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6) 제 3 부
(3)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엿본다
지금까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지 엿본다는 내용 중 두 가지를 교제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에 관한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저주와 징벌의 말씀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앞의 두 가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말씀을 대할 때 적그리스도는 같은 태도를 취한다. 즉,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알아내려고 하는 한편, 이런 말씀이 이루어지는 날을 보고 싶어 하고, 이 말씀이 이루어진 사실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말씀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속으로 저울질하고, 대책을 고민하고, 온갖 의문을 품으며,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관찰하고 검증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대책을 마련한다. 적그리스도가 재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마음은 재난이 이루어지는 날에 대한 기대와 온갖 상상으로 충만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동시에 재난이 내려서 자신이 크게 눈 뜰 수 있기를, 자신의 바람과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예언한 재난은 모두 하나님 대업의 성공,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 날, 성도들의 들림 받음, 사람이 아름다운 종착지로 들어가는 것 등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재난을 예언하는 이 부분의 말씀에 더욱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하다. 앞서 두 가지 방면과 비교할 때 적그리스도는 이 방면의 말씀에 더욱 관심이 많다. 적그리스도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면, 예컨대 지진, 전염병, 충해, 홍수,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커다란 능력자이고 재능이 뛰어난 자이며, 그런 존재는 자신이 따르고 숭배할 만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는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하나님이 하나님인지 재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는 속으로 이런 식의 사고 논리와 사상 관점을 철석같이 고집한다. 그의 생각에는 이런 관점이 옳은 관점, 성립될 수 있는 관점이고, 똑똑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하나님을 따르는 그날부터,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 예언의 말씀을 본 그 순간부터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그 일을 계속 생각한다. 종말의 날이 오고 하나님 사역이 대성공을 거둘 때, 하나님이 인류를 어떻게 형벌할지, 하나님이 어떤 재난을 내려 인류를 징벌하고 멸할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재난에 빠뜨릴지,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만이 이런 재난을 피하고 벗어날 수 있고 이런 재난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을지 하는 말씀을 계속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 예언의 말씀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서 속으로 분석하고 머리로 기억하고 암기하며, 재난에 관련된 말씀은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긴다. 아울러 이런 재난이 언제 이루어지고 어떻게 이루어질지, 만약 이루어진다면 그는 어떻게 될지, 이런 말씀은 어떤 재난에 대한 예언인지, 만약 이루어진다면 그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상상한다. 이런 예언을 보고 나면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 희망이 생기고 방향과 목표가 생긴 것처럼 느낀다. 적그리스도는 재난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예비한다. 그는 대재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직장과 가정도 버린다. 동시에 재난이 닥쳤을 때 살아남기 위해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빨리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성취하려는 모든 일이 빨리 성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이 하루빨리 영광을 얻고 안식을 누리고, 자신이 하루빨리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적그리스도의 이 모든 관점을 볼 때, 그가 늘 하는 이런 말과 기도로 볼 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대업을 이루고 하루빨리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이런 바람의 이면에 적그리스도의 나쁜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기도, 이런 거짓 이미지로 재난을 피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예비하는 동시에 재난이 빨리 오기를,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 얼른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의 범위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전과 다름없이 대가를 치르며 헌신하거나 고생하고 인내하는 등 남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 머리를 쥐어짠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전하느라 얼마나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무시와 박해를 받았는지, 이날을 기다리느라 얼마나 커다란 대가를 치렀는지 모두에게서 인정받고자 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가 이런 고생을 하고 이런 대가를 치른 것을 봐서 재난이 내릴 때 자기한테는 그 어떤 재난도 닥치지 않게 해 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자신이 치른 대가 덕분에 재난이 내린 후 본인은 다행히 좋은 종착지를 얻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적그리스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아무도 몰래 이 모든 것을 저울질한다. 결국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좌절을 겪는다. 그의 행위와 행동이 정죄된 듯한데, 이것은 그의 희망과 환상이 파괴되고 그의 바람이 실현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을 품겠느냐? ‘그 많은 대가를 치르고 그 많은 고생을 하고, 그렇게 많은 나날들을 견뎌 왔고, 그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재난을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걸 하나도 못 봤어. 하나님은 과연 재난을 내리시는 건가? 우리가 간구하고 기다리는 일을 하나님은 과연 이루시는 걸까? 하나님은 대체 어디 계시는 걸까?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구원해 주실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재난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들 어서 떠나야지! 이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은 없다고!’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한계이다. 조그마한 좌절, 남들이 무심코 던졌을지도 모르는 정죄의 말, 폭로의 말이 자신의 약점을 건드리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감추지도 못한 나머지 발끈한다. 그래서 맨 먼저 하는 일이 노발대발하며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며 이런 말을 쏟아 내는 것이다.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신이 말씀하신 재난이 쏟아지지 않는다면 당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원래 저는 재난을 예언하는 이런 말씀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대가를 치르고 본분을 이행한 겁니다. 그 말씀이 없었으면 당신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말씀 때문에, 곧 들이닥칠 재난 때문에 당신을 하나님으로 믿은 겁니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당신이 말씀하신 재난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도 많은데 징벌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고, 재난 속에 떨어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 속에서 살면서 유유자적 즐겁게 지내고 있지만 저는 당신이 말씀하신 재난에 관련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기다리고자 이렇게 오랫동안 타협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은 뭘 하셨습니까? 당신은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걸 봐서라도 이적과 기사를 좀 나타내고 재난을 내리셔서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보게 하심으로써 저희 믿음이 확고해지고 충성심이 견고해지도록 해 주셔야 하는데,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어쩜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재난을 내려서 이 사악한 세상과 인류를 징벌하는 일이 그리 어렵습니까? 저희는 단지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뿐인데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하지 않으시면 저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어 봐야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믿을 필요가 없고, 본분도 이행할 필요가 없고, 복음도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소한 좌절을 만나면, 살면서 순조롭지 못한 일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적그리스도의 본모습과 내면의 진짜 생각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러나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재난이 언제 내릴지,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지 말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두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은 사람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아서 그런 것이지, 너희에게 이런 말씀으로 하나님을 트집 잡고 하나님을 판단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했으면 마땅히 사람이 살아생전에 그런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해 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은 무산되는 줄 안다. 말씀이 무산되는 하나님은 당연히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이 될 자격도 없고 자신의 하나님이 될 자격도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논리이다.
적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용하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 말씀에서 일깨움을 얻은 그는 사람의 좋은 행위, 사람이 치르는 모든 대가와 육적인 고통을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복과 맞바꾸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재난을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생각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말씀을 선포한 대상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시시각각 하나님을 검증하고 재단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엿보았다.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져서 자신의 눈이 크게 뜨이고, 그런 말씀이 자신의 입맛과 관점, 필요에 맞게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만약 자신의 바람에 어긋나고,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어긋나면 말씀을 한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그가 속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 적이 없고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라는 이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한동안 고민하고, 견뎌 내고, 또 내면의 갈등을 겪은 뒤, 적그리스도는 교훈을 얻었다. “쉽게 하나님 말씀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아무렇게나 가볍게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재단해서는 안 돼. 사람은 아직도 충분히 단련되지 않았고, 여전히 계속 참고 견디며 마음을 넓혀야 해. ‘재상의 뱃속에서 배도 저을 수 있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는 말도 있잖아. 이만한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대수야? 아무것도 아니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버텼는데, 그만큼 더 버티면 아마도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질 거고, 그러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좀 더 견디고 한 번 더 걸어 보자. 욱하면 안 돼.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고생한 게 다 도로 아미타불이 될 거야. 그러면 얼마나 손해야! 지금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일어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비난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야. 여전히 계속 대가를 치르고 고생하면서 견뎌야지.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말을 잊으면 안 돼. 이 말은 언제든 성립되고, 언제든 최고의 진리야. 잘 지키고 시시각각 가슴에 새기자.” 한동안 소극적이고 잠잠하게 지낸 적그리스도는 마침내 다시 ‘일어섰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적그리스도는 각종 역할을 맡으며 여러 사역을 담당했고, 겉으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나님을 따르는 날이 늘어날수록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더 세세하게 따진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그만큼 그가 대가를 많이 치르고, 또 많이 버렸다는 뜻이고, 그만큼 세상으로 돌아갈 길도 줄어든다는 뜻이다. 따라서 재난을 예언하는 이런 말씀에 대해 적그리스도는 점점 더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게 다 진짜였으면 좋겠어. 모든 게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그는 이 ‘반드시’라는 굳은 신념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 여겼다. 이른바 참된 믿음은, 이방인들이 말하는 ‘끝까지 노력해야 이긴다’는 말처럼,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견디고 또 견디도록 그를 다그쳤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신념을 고수하는 동시에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계속 엿본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이 세상에는 재난과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국가, 다양한 집단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재난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생존 환경과 생태 환경을 바꾸고 사회의 많은 서로 다른 구조와 생활 방식을 바꾸는 등,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적그리스도의 눈에 하나님 말씀이 여전히 약간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내면에서 가장 성취감을 느끼는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그날, 그 단계가 왔으니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견디고 기다린 일이 결국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기죽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참고 견디며 기다린다 해도 적그리스도가 속으로 가장 괴로워하는 일은 무엇이냐? ‘작은 재난은 이루어졌구나. 기근, 전염병이 발생하고, 일부 정부가 해체되기도 했어. 소소하게는 모두 이루어지고 있어. 그런데 대재난은 언제 이루어질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의 일부가 천천히,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의심을 한다. ‘그런 재난은 그냥 자연재해잖아? 유사 이래로 재난은 늘 끊이지 않았어. 그런 재난이 닥친 게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일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또 뭐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말씀을 믿어야 해. 하지만 하나님 말씀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다고?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 거지? 왜 나는 보이지 않는 거지? 난 왜 모르는 거지? 만약 하나님 손으로 직접 하신 일이라면 신자들 눈에 당연히 보여야 하고, 하나님이 마땅히 이상(異象)을 주셔야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손도 보지 못했고, 하나님 음성도 듣지 못했어. 그렇다면 그런 일들은 모두 우연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면 연약해져. 그래도 모든 게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야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재하신 거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그래야 마음이 좀 편하지.’ 그는 자기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똑똑하고, 또 멋진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굳건해지게 하고, 자기 마음속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과 욕망도 잠재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잠시 양보하고 타협하는 동시에 큰 재난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대재난은 언제 내려오지? 대재난이 내리면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림 받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들림 받지? 날아오르게 될까, 아니면 하나님이 손으로 사람을 들어 올리실까? 대재난이 내릴 때 사람은 여전히 육체가 있을까? 여전히 지금의 옷을 입을까? 이방인들은 모두 죽게 될까? 그때는 상황이나 상태가 어떨까? 이 일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만 믿자. 그런데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언제 이루어질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계속해서 거듭 스스로에게 묻고 거듭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재난이 그의 앞날과 운명에 밀접하게 관련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순간도 재난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추구하고 지켜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돼. 포기하지 말자.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널리 복음을 전하고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는 거야. 방해하거나 교란해서도 안 되고 잘못을 저질러서도 안 돼. 조용히 처신하고 날뛰지 말자.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교회에서 출교당하지만 않으면 돼. 피난처에 들어가는 데는 반드시 내 몫이 있을 거야. 이건 하나님이 약속하신 건데 누가 앗아 가겠어?’ 작은 재난이 점차 내려올 때, 모든 인류가 재난 속에 떨어질 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평정을 찾고 약간의 안정도 얻는다. 동시에 그는 또 대재난이 내리기를 기대하고 성도들이 들림 받는 그날을 기대한다. 어쨌든 적그리스도가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엿보는 건 여전하다. 이런 엿보는 행위가 하나님에게는 사탄이 엿보는 것과 똑같다. 하나님이 볼 때 그것은 의심하고 부정하고 비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의 권병과 전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이런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본인이 몰래 궁리하고 속으로 저울질하며 만들어 내는 이 모든 대책이 적그리스도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똑똑하고 가장 은밀한 대책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눈여겨보고 동시에 정죄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한 것과 같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하나님은 속으로 조용히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나의 행사, 나의 말씀을 엿보는 자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적그리스도가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느냐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로 삼고,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자 악행이다.
하나님이 어떤 방면의 말씀을 하든 그것이 이루어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언제, 어디서 이루어지는지는 모두 하나님 자신의 방식이 있다. 인간이 다행히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총을 베푼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이용해 하나님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검증하고 하나님의 신분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단지 인간에게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어떻게 하겠다고, 이 일을 누구에게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하겠다고 알려 준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뭔가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 신호는 분명하다. 그건 바로 인간은 알 필요도 없고 알 자격도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늘 이런 일들에 관여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려 한다면, 늘 이런 일로 하나님을 트집 잡으려 하고 이런 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한다면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너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냐? 하나님 눈에 너는 바로 사탄이자 원수, 마귀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사람이 만약 이런 걸 알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문제 삼고 하나님에게 트집을 잡는다면, 너에게 알려 주겠다.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또 어떤 방식, 어떤 이성으로, 어떤 입장에 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걸 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이 피조물의 신분과 본래 자리를 잃어버리면 그 본질이 달라질 것이다. 만약 동물로 변하면 하나님도 너를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너는 하찮은 존재가 된다. 만약 마귀 사탄으로 변한다면 너는 위험해진다. 마귀 사탄으로 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고, 그러면 너는 영원히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 너희 모두에게 알려 주겠다. 하나님의 행위를 엿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엿보지 말고, 하나님의 사역을 엿보지 마라. 하나님과 관련된 건 그 어떤 것도 엿보지 마라. 너는 사람이고 피조물이니,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네 분석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네가 엿보는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네가 피조물이자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너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말씀이 곧 네가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이 하는 말씀을 너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 비밀과 예언에 관련된 일, 하나님의 신분에 관련된 일이라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바로 이런 것은 네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은 네 생명 진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아는 만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네가 성품 변화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일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옳은 일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엿본다면, 게다가 몇 번씩 얘기해도 고치지 않고 완고하게 고수한다면, 이런 방식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은 요원하다. 적그리스도가 재난에 관련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엿본다는 이번 조항은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자. 이어서 다음 내용을 교제하겠다.
성경은 ‘개역한글’을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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