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3) 제 2 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겉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가 가는 길, 자기가 치른 대가를 마음 깊이 반성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이 부탁한 본분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성찰하거나 구한 적이 있느냐? 사람은 대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냐? 사람의 여러 모습과 표출, 나아가 사람 내면 깊은 곳의 속셈, 그리고 하나님이 행한 일을 대하면서 표출하는 여러 성품을 통해 보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했느냐? 자기에게 유익한 일에 대가를 치르고 마음을 쓰는 것 외에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쳤느냐? 전부 계산적이고 타산적이며, 방어적인 데다가 불손한 태도이다. 불손은 태도의 일종인데 이 태도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동사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농락이다.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들어 보았습니다.) 농락은 점잖은 단어인데 속된 말로는 뭐라고 하느냐? 조롱, 희롱이다. 너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네가 우습게 보이고 얌전해 보이니 그는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농락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이런 성품을 가진 그의 마음속에 천사가 살고 있겠느냐, 마귀가 살고 있겠느냐? (마귀입니다.) 마귀가 살고 있다. 감히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니 그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선물을 준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요구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는지,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직속 상사를 대하는 것처럼 환심을 사고, 기만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느냐? 아첨과 아부에 기대어 살아간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면서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왜 내게 이런 ‘배려심’과 ‘호의’를 보이겠느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가 예측이나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는 알지 못한다. 정상인의 사고가 전혀 안 되는 것이다. 그의 행동, 그의 성품을 내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정의하며 평가하는지 그는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이냐? 어떻게 비위를 맞추면 목적을 달성해서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런 속셈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것이 어떤 인성이냐? 정말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겠느냐? 네가 그 정도 살았으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첫째, 내게 잘 보일 필요 없다. 둘째, 내게 아무것도 바칠 필요 없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네가 무엇을 하든, 네게 어떤 속셈이나 목적이 있든 네가 하는 일의 성질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게서 정의되고 규정된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끝마쳤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네가 어떤 속셈이었는지, 어떤 동기였는지 확실히 살펴볼 것이다. 나는 오직 네 성품만 본다. “사람에게 너무 가혹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가혹하냐? 내가 보기엔 전혀 가혹하지 않다. 조금도 가혹하지 않기에 빈틈을 타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나를 접해 보고는 바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 나랑 별반 차이 없잖아. 똑같이 삼시 세끼 드시고 권병이나 능력은 보이지도 않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대하든 아무 말씀도 없으시잖아. 날 어쩌시겠어?’ 이것은 어떤 생각이냐? 이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째서 사람에게 이런 성품이 생기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면, 아무리 하나님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지위가 존귀하며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해도, 또 그가 아무리 입으로는 감격했다면서 기꺼이 수고하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해도, 막상 본분을 이행할 때는 그의 마음속에 마귀가 주인 노릇하며 일하기 시작한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까지 속이고 농락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마귀입니다.) 마귀이다.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예전에 우리는 사탄과 하나님의 어떤 대화에서 사탄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지 교제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사탄아,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었을 때 사탄이 뭐라고 대답했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마귀적인 말입니다.) 이것이 마귀적인 말이다! 그것이 만약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이것이 말 같은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고 완전한 말로서 문법에도 맞아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 사탄이 이렇게 대답했느냐?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대답하더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너희는 이 말을 알아들었느냐? (못 알아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탄은 대체 어디서 왔느냐? 그것이 어디를 두루 돌아다녔느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여기에 정론이 있느냐?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사탄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나님에게 와서 하나님에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지금까지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이런 것들을 모르는 것이다. 사탄은 왜 이런 말투와 방식으로 하나님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것은 진지하게 대답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물음에 대답했느냐? 농락했다. 마치 네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어디서 왔나요?”라고 물었는데 “맞춰 보시죠.”라고 답하니 “모르겠네요.”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맞추지 못할 걸 알면서 너더러 맞춰 보라고 하니 이는 너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를 우롱이라고 하고, 농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의가 없고 알려 주고 싶지 않으면서도 너를 희롱하며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데, 사탄의 성품이 바로 이렇다.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이들이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느냐? 만약 열심히 뛰어다니고 일하며 가끔씩 수고하고 대가를 조금 치르는 그들의 겉모습만 보면 그런 사람 같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물음에도 바로 답하지 않고 뱀처럼 빙빙 돌려 답을 찾지 못하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불손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왜 못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런 부류 사람의 사악한 점이다. 그들의 사악한 점은 그들이 보는 하나님의 신실함, 낮춤 그리고 정상 실제 등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족한 점이고 사람에게 쉽게 관념을 일으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가장 큰 옥의 티이자 결점, 허물, 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겠느냐? 그들이 이런 방식과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인데, 그들 자신에게는 어떠냐? 그들에게 득이 되었느냐?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모욕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성의 없이 먹을 것을 하나 선물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도 묻지 않고 바보처럼 그냥 집어 먹는다면 보통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인성에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지 않겠느냐? 인성에 모자란 구석이 있는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성육신한 그리스도가 만약 이런 정상 인성도 갖추지 못했다면 사람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믿을 만하지 못하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인성의 특징이 무엇이냐? 이성과 사고, 양심이 무엇보다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판단력은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 내가 판단력이 없고 부주의하며 상식이나 식견도 없어서 일이 닥쳤을 때 숙고할 줄 모른다면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는 결함이 있는 인성이지 정상 인성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라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성육신할 때 이런 육신을 택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너희가 이런 하나님, 소위 성육신을 따를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너희는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이것은 내 관점에서 본 하나의 측면이다. 다시 너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고 따라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를 이렇게 대한다면 너는 너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둔 것이냐? 이는 너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을 존중할 만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도 그를 믿는다면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멍청이가 아니냐? 너는 아무 생각도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냐? 이는 스스로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네가 그를 정상 인성의 몇 가지 측면을 두루 갖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행동한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냐?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맞는 말이지 않으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든 사람의 관점에서 보든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면서 그렇게 대한다면 이는 대놓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반면 네가 그를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는데도 그를 따른다면 이는 모순이 아니냐? 이는 너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두 가지 경우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라. 내 말이 맞지 않으냐?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어째서 이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느냐?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냐? 설마 단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겠느냐? 깊게 따져 볼 것도 없이 이런 사람은 자질 면에서 지능이 떨어지는 자이다. 여기서 지능이란 무엇을 뜻하겠느냐? 생각이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고 이해득실을 따질 줄 모르며, 이런 일은 어떤 성질인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지 고민할 줄 모르니 이를 두고 지능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에는 무엇이 있느냐? 동물, 짐승이 그렇다.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을 생각할 줄 안다. 사람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어리석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면 지능이 떨어지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이성이 건전하지 못한 자로, 속된 말로 ‘팔푼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사심이 너무 크고 그의 음흉한 속내가 결코 작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산다고 하는 까닭이다.
‘선물’ 사건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침소봉대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만약 이렇게 교제하지 않고 이 일을 대충 얘기한다면 너희가 그 말을 듣고 나서 이런 성과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면 너희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정말 별 사람이 다 있네!’ 너희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하고 얘기하면 끝이다. 하지만 이렇게 깊이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게 깊이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들이 너희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 너희가 어떤 진리를 얻었느냐? 먼저 너희에게 한 가지 알려 주어야 할 것은, 사람과 하나님이 과연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가장 좋으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거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낼 때 어떻게 지내야겠느냐? 원칙을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어떤 일이 이야기 속 그자가 한 일과 성질이 같으냐?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런 교훈을 얻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 눈을 속이려 했다간 큰일 나. 그분과 가깝게 지내지 말고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어. 만만한 분이 아니니 왕래하지도 말아야지! 잘못했다가는 괜히 크게 비난받고 뼈도 못 추릴 수도 있어. 그분께는 선물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해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사실 너희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까이 지낼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왕래하는 경우는 더더욱 많지 않기 때문에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너희와 접하는 날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비결을 하나 알려 주겠다. 나와 함께 지내든 남몰래 기도하며 구하든 최고의 비결이 무엇이겠느냐? 절대 내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런 부류라면 내게 얼씬도 하지 말거라. 어떤 사람은 말할 때 자꾸만 잔머리를 굴린다. 눈 깜짝할 사이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하는 말마다 과장과 허풍이 섞여서 그런 사람이 몇 마디 더 하게 되면 어떤 말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내게 얼씬도 하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과 접촉하고 왕래할 때 네가 지키고 준수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존중은 체면을 차리는 것도 아니고, 환심을 사거나 아첨하는 것도, 아부하며 비위를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행해야 할 한 측면이다. 나와 접촉할 때 내 말을 끊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말한다. 그러면 내가 말하는 동안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눈을 감고 듣는다. 그게 무슨 뜻이겠느냐? ‘당신은 쓸데없는 말을 하고 계세요. 당신이 뭘 아세요?’ 이런 태도인 것이다. 내가 모르긴 하지만 원칙이 있다. 내가 배운 것, 내가 본 것, 내가 이해한 것, 내가 아는 원칙을 알려 주면 네가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항상 흘끗거리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면 너는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알아서 찾아보아라. 그렇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들을 때 내가 너희 관점을 밝히지 못하게 가로막더냐? 내가 막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나면 나는 너희에게 질문이 있는지 묻는다. 누군가 질문하면 내가 바로 설명해 주고 그 문제가 어떤 원칙에 해당하는지 알려 준다. 어떨 때는 너희에게 원칙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접 하나하나 알려 준다. 비록 내가 모르는 업무도 있지만 나만의 원칙이 있고 이런 일에 대한 나만의 관점과 처리 방식이 있다. 나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원칙으로 너희를 가르친다. 어째서 너희를 가르치겠느냐? 너희가 그런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끝나면 다른 질문은 없는지 물어보고 질문이 더 나오면 바로 설명해 준다. 나는 내 말을 들으라고만 하지 않고 너에게도 발언권을 준다. 단, 너는 쓸데없는 말을 하며 시간을 뺏지 말고 합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내가 다급한 마음에 일부 사람들의 말을 끊을 때가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그러겠느냐? 그가 중언부언하고 다섯 마디면 끝날 말을 열 마디나 할 때이다. 사실 나는 한 마디만 해도 알아듣고 뒤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으니 길게 말할 필요 없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지 말아라. 말하고 나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지 답을 알려 주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어쭙잖게 이렇게 말한다. “안 됩니다. 당신도 저를 존중해 주십시오. 저희 사이에서 존중은 상호적인 겁니다. 당신은 하실 말씀 다 하셨지만 제 관점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잖아요. 제 관점은 이렇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릴게요.” 그는 늘 자기 관점을 밝히려 하는데, 내가 그의 관점을 모르는 줄 안다. 사실 나는 그가 운만 떼어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데 그가 말할 필요가 있느냐? 필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지능이 너무 떨어져서 두 마디로 끝날 일을 열 마디를 하고, 말을 끊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다. 다들 알아듣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런데도 말을 계속하려 하니 이는 지능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이토록 이성과 지능이 떨어지는데 자기가 똑똑한 줄 아니 역겹지 않으냐? 소름 끼치도록 역겹다. 사람이 하나님과 접촉할 때 첫 번째 원칙은 정직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원칙은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진리를 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을 믿는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아마도 이 원칙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일 텐데 어째서 이것을 언급하겠느냐?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실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니 지금 미리 준비하라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많은 사람을 접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몇 가지 일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후 내가 부탁한 일을 일일이 적어 놓은 메모를 보여 주면서 지금도 하나하나 실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만나면 실행 상황이 어떤지 보고하고, 구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이며,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문제는 무엇인지 모두 설명했다. 중간의 세부 사항들도 자세히 얘기해 주는데, 때로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시시콜콜 얘기할 때도 있지만 그의 이런 태도를 통해 진정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책임과 본분, 의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와 달리 두 가지 일을 부탁했더니 당시에는 메모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행하지 않고 있다가 내가 물어보니까 그제서야 생각나서 또 한 번 메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 어째서 아직도 일을 처리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더니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또다시 노트에 적었다. 그가 어디에 적었느냐? (노트에 적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지 않느냐? 인간도 아니다.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 흘려듣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내가 부탁하는 여러 가지 업무나 사무 쪽 일, 일부 교회 사역은 모두 사람의 역량 안에 있는 일이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리더 일꾼에게 일을 맡기면 다수가 모두 알겠다고만 하고 피드백도 없고, 어떤 상황인지 파악도 안 된다. 그야말로 감감무소식이다. 과연 이 사역을 안배했는지, 잘하고 있는지, 어떤 착오가 있는지, 결과는 어떤지 전혀 보고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은 채 그냥 한쪽에 미뤄 둔다. 그래서 결과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 내가 부탁한 일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첨하고 기만하기까지 한다. “저희는 어제 어디를 가서 어떤 일을 했고 그저께는 어떤 일들을 했으며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식과 둘러대기에 얼마나 능한지 잘 들어 보아라. 내가 특별히 부탁한 일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일이나 실컷 하면서 중요한 사역을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게 어떤 모습이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입만 열면 거짓말과 기만뿐이다!
농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올해 어떤 채소가 괜찮던데 종자를 남겨 두었느냐?”라고 묻자 “남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저번에 채소를 모두 수확해서 남은 게 없다고 들었다.”라고 하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다 거두지는 않아서 조금 남았습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조금 남았다는 채소가 어디 있는지 한번 보자.” 그가 말했다. “어? 잠시만요. 제가 우선 가서 보겠습니다.” 과연 종자를 남겼겠느냐? 남기지 않았다. 그의 말 중 처음에 “남겼습니다.”라고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 거두지는 않아서 조금 남았습니다!”라고 한 두 번째 말은 거짓말이 아니냐? 남겼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도 모르면서 “제가 우선 가서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으니 세 번째 말도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의 거짓말에는 모두 단계가 있어서 점점 심해지니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너희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과 왕래하고 싶으냐?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인 사람과 함께 대화하거나 일할 때 기분이 어떠냐? 화나지 않느냐? 그 누구라도 감히 다 속이다니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이 속일 일이냐? 이렇게 속여서 네가 얻는 유익이 무엇이냐? 이런 태도로 일을 하고, 이런 태도로 너를 대하는 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한 사람이 한담이든, 사역이나 올바른 일에 대한 이야기든, 진리에 대한 교제든 하는 말의 99%가 전부 거짓말이면 이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누구라도 속일 수 있다면 너는 어떤 인간이냐?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어떤 이방인은 말만 하면 “제가 알기론”, “양심적으로 말하면”이라는 이 전제와 함께 그래도 사실을 좀 말한다. 너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고 이렇게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도 사실은 한 마디도 없고 전부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마귀이냐? 남들이 역겨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런 자가 많지 않으냐? 너희가 이런 자들이냐? 너희는 나와 접촉할 때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느냐? 사고를 쳐서 출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결과가 심각하리라는 것을 알면 남들이 말만 꺼내도 거짓말로 무마한다. 이런 일에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일에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느냐? 바로 자기 체면을 세우고 남들에게 추앙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말했다가 교체당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상부에 사역을 보고할 때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구하는 척하면서 남들에게 거짓 이미지를 심어 준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이다. 그는 사역을 전혀 하지 못하지만 아무 문제도 거론하지 않으면 상부에서 자신의 허점을 눈치채고 자기를 교체할까 봐 재빨리 뭔가 하는 체한다.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의 마음가짐이 모두 이렇다.
방금 교제한, 사람과 하나님이 접촉할 때 지켜야 할 원칙 세 가지 중 어떤 원칙이 지키기 힘들고, 어떤 원칙이 지키기 쉬운지 생각해 보아라. 사실 진정으로 지킨다면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마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마귀를 쫓아내야 지킬 수 있다. 너는 마음속에서 마귀와 전쟁을 치러야 하며 그때마다 그것을 물리친다면 너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매번 패배하여 그것에 사로잡힌다면 너는 지킬 수 없다. 그 어떤 원칙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지킬 수 있다면, 나와 함께 지내고 왕래할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 형제자매와 접촉할 때도 이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모두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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