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2) 제 2 부

캐나다 교회의 적그리스도 사건을 처리하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들은 몇 년간 본분을 이행했는데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교란한 일 때문에 격리당했어.’ 그에게 위기감이 엄습한다. ‘아, 하나님께서 노하시면서 사람을 저주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 적그리스도의 일당, 공범자, 추종자까지 봐주지 않으시니 정말 매정하시네! 평소엔 항상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긴다고 하시면서 이번에 정말 사람이 견디기 버거울 정도로 화를 내시네!’ 그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너희는 이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다고 하느냐?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설교를 들은 게 몇 년째냐? 최소 5년 이상은 되지 않았느냐? 그럼 우리가 많은 일에서, 특히 원칙성이 비교적 명확한 일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공감대가 무엇이냐? 일종의 이심전심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너희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너희가 왜 그런 건지 마음속으로 이미 다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또 긍정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를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느냐?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듣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내가 많은 일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나의 관점과 생각, 일하는 원칙, 그리고 너희가 깨달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 등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내 관점이 이런 것이라고 알려 준 다음 너희가 내 관점을 받아들이고 내 관점에 따라 사물, 본분, 신앙, 삶, 사람을 대한다면 우리 사이의 이심전심이 갈수록 많아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이런 이심전심의 수준에 이르렀느냐? 오늘 내가 이렇게 해석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로 이심전심이 되겠느냐? ‘일벌백계’,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이런 게 이심전심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들은 꽤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는데 내가 한 이 일이 이들 사이에 왜 이런 반응을 일으켰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들의 이런 관점을 내가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겠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겠느냐? (그러셨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런 말, 이런 관점, 이런 인식과 이해의 방식은 존재해서도 안 되고 나타나서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뜻밖의 일이고 나의 예측과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니 내가 이 일로 수치를 느낀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심각한가요? 이는 침소봉대가 아닌가요?” 너희에게 이렇게 답해 주겠다. 이 일은 큰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이라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부터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며 네 주라 인정하고, 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며 너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순종한다면 그날부터 너는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 어떤 문제겠느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하며 나아가 자발적으로 구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면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시각각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먹고 마시든, 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할 생각이든 이 위기가 하루라도 존재하는 한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바람은 성립되지 않고 산산조각 나서 환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고, 이 위기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떤 관계이겠느냐? 서로 합하는 관계이겠느냐? 가족의 관계이겠느냐, 아니면 동료의 관계이겠느냐? 과연 어떤 관계이겠느냐?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위기가 존재하는 한 너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고 오해하여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항하고 그 일을 거부할 것이다. 이것이 위험이 아니겠느냐? 이 위험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긍정적인 면은 제쳐 두고 부정적인 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예를 들어, 네가 영원히 하나의 시선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군주요, 최고의 관료요, 이 땅 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라고 생각한다면, 언제까지나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이를 바탕으로 너는 하나님의 행사와 말씀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겠느냐? 몇 가지 예를 들어 주면 아마도 내가 말한 이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임금을 모심이 마치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럼 이 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은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또 방금 말한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 역시 하나님을 세상의 군주나 권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있는 것이고,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이렇기 때문에 또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가 세상에서 지위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 “자기 침상 곁에 어찌 남이 코를 골게 내버려두랴.”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군주나 지위와 권세를 가진 자들의 행동 방식을 묘사하는 말이다. 너희 중에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알거나 접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 역시 이런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일이나 말씀을 할 때 너는 그 말들을 결합하여 그런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네가 그런 시선과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되겠느냐? 대립할 것이다. 네가 자기 마음속 하나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앙모하고 두려워하든, 얼마나 순종하고 머리 숙여 복종하든, 또 네 태도가 어떻든 사실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여전히 대립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상황이 이러하지 않으냐? 캐나다 교회의 적그리스도 사건을 내가 이렇게 처리한 후에 너희에게 상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사정 그리고 그들을 처리한 이유를 얘기하지 않아서 자기 앞날과 운명을 걱정한 사람이 많았다. 이 걱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인식이 하나님의 본질에 부합한다면, 가령 하나님의 공의와 권병, 지혜에 대한 네 인식이 진리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든 네가 그 안에 담긴 이유를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한들 하나님을 오해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다. 내가 캐나다 교회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우리를 겁주려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뭐가 문제겠느냐? 이 말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이것이 올바른 인식이냐? (아닙니다.) 왜 아니라고 하느냐? 내가 간단히 한마디만 하겠다. 그의 이런 인식 방식은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해한 것이다. 이 말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 그리 어렵게 해석하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누굴 겁주려는 것이 아니다. 최근 본분 이행의 성과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다면 그들은 본분 이행에 합격했겠느냐? 아직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는 과정에 있기에 사소한 문제들이 있어도 추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교란하는 사람들이 있고 꾸물대는 사람들이 있으며, 혹은 도중에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썩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본분을 이행하러 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없이 바쁘고 고생해도,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여러 환경을 체험할 기회를 주어서 여러 체험과 경험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니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너희는 무엇을 걱정하느냐? 또 누구를 경계하느냐? 그럴 필요 없다. 너희는 정상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자기 위치를 올바로 찾아서 자기 본분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면 된다. 너희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다.

캐나다 교회에 일어난 적그리스도 교란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오늘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했느냐? 내가 그들 사정을 전혀 몰랐던 게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참아 왔다. 어느 정도로 참았겠느냐? 오랜 시간 그들은 완성된 작품을 만들지 못했고 사역에도 진전이 없었는데 다들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려 제멋대로 굴고 단속 없이 방탕하게 지냈으니 진작에 처리되었어야 했다. 너희도 만약 제멋대로 굴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린다면 내가 너희를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거라. 이 얼마나 체면이 서느냐?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이것도 옳지 않다. 너희는 자꾸 떠날 생각만 하지 말고 마음 편히 이곳에 발을 붙여 자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제대로 이행할 수 있든 없든 도망치지 말고 최소한 마음을 다해 마지막에 온전한 답안지를 제출하여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자질이 떨어지고 가방끈도 짧아서 별 재능이 없어요. 성격에도 결함이 있고 본분 이행에도 늘 어려움이 있습니다. 만약 제대로 못 해서 교체되면 어떡해요?” 뭐가 걱정이냐? 그 사역이 너 혼자 완수할 수 있는 일이냐? 너는 그중 한 역할을 맡았을 뿐이지 너더러 전부 도맡으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네 몫만 맡으면 된다. 이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간단한 일이냐? 왜 의심하기만 하느냐? 떨어지는 낙엽에 맞을까 걱정하며 발 뺄 궁리부터 하니 못나지 않았느냐? 무엇을 못나다고 하느냐? 현실에 안주하며 전력을 다하려 하지 않고 늘 대충 먹고 살 궁리만 하며 좋은 것을 누리려 하니 이런 사람이 바로 쓸모없는 자이다. 속이 너무 좁은 사람을 뭐라 부르느냐? (좀생이라고 합니다.) 좀생이인 사람은 모두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려서 다른 사람을 모두 그와 같이 이기적이고 비열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은 못난 사람이다. 설사 하나님을 믿더라도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의 믿음이 너무 작은 것은 무엇에서 기인하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과 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이해하기에는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도 미미하여 이것을 이해하는 데 미치지 못하니 네게 하나님에 대한 여러 의심과 상상, 오해,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곤 죄다 이런 것들이라면 네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너희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언제 교체될지 몰라 늘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한테 오셔서 시찰하실지 몰라.’라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안심해라. 너희가 하나님 집으로부터 받은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설사 너희가 진리 추구나 생명 진입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내가 추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너희가 예배 때 설교를 어떻게 듣는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 등 일은 내가 감시하지 않고, 너희의 사역을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 너희를 간섭하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각 방면의 업무에 관해 너희가 나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의 사역 과정에서 너희의 경험이나 업무 측면에서 발전이 있었을 것이고, 일련의 방안을 도출해 냈을 것이다. 그것이 글이든 말이든 하나의 틀은 도출해 냈을 터이다. 너희의 사역 패턴이 어떤지 나는 모르니 너희의 사역 계획이나 사역 방식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너희 나름의 스타일이나 규칙, 틀에 따라 손에 익은 방식, 쉬운 방식, 모두가 자유롭고 사역 효율이 높은 방식대로 하여라. 너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둘러볼 때도 있겠지만 너희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가면서 최대한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 왜 이렇게 하겠느냐? 모두가 업무가 익숙지 않아 배우면서 조금씩 익혀 가는 게 필요하다. 업무를 배우는 것이든 아니면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든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진도와 효율이 있기 마련이다. 무리하게 강요해선 안 된다. 사람은 반드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실패와 좌절을 겪거나 약간의 교훈을 얻은 다음 차츰 다방면으로 어느 정도 길을 도출해 내고 원칙을 파악하면 발전이 있게 된다. 너희에겐 너희 나름의 업무 스타일이 있고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니 내가 간섭해선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너희 사역에 관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입장을 고려한 이유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내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너희에게 숨김없이 말하자면, 업무 측면이든 아니면 예술과 관련된 측면이든, 더 나아가 진리와 관련된 측면이든 너희가 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무척 낮은 것 같다. 내가 만약 알묘조장 식으로 너희를 대한다면 너희가 견딜 수 있겠느냐? 견뎌 내지 못한다. 내 뜻대로 너희 가운데에서 일을 한다면 내 요구치가 지금 너희의 실제 업무 수준과 실제 생명 진입의 분량을 넘어설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힘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가 고생스럽기도 하다. 우리 모두에게 난감한 장면이 연출될 것이니 이는 좋지 않다. 그것은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실제 상황이 바로 이렇다. 이 두 가지 원인, 즉 하나는 너희 자신의 원인,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내가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너희의 점진적 성장에 적합하다. 생명 진입 측면으로는 하나님 말씀 책이 있고, 여러 예배와 설교가 있으며, 양육하고 붙들어 주는 리더 일꾼이 있으니 너희가 먹고 마시며 공급받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의 생명 성장 과정은 마치 파종하고 물을 대고 비료를 주면 점점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은 매우 더딘 과정이다. 물론 이 더딘 정도는 낱알의 씨가 싹을 틔워서 열매를 맺는 과정보다 훨씬 느리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의 내면에 많은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타성을 가지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변하기 쉽고 게을러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것이 무감각하고 둔하다. 또한, 사람 자체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여 생명 진입에 이르는 것은 순전히 오르막길을 가고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대세를 따르고 그럭저럭 살며 세상을 추구하고 사회 흐름을 따르게 하는 것은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는 건 쉬울 뿐 아니라 주관적으로 사람도 이렇게 하는 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일을 하며 정의감을 가지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가 자기의 주관적 바람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기분과 관념은 물론 게으름 등 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들을 버려야 한다. 자기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역 파트너, 환경을 마주하고 나아가 정곡을 찌르거나 듣기 거북한 말을 들으면 기도로 이겨 내야 하니 그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는 데에 장애물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의 심지가 깊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한두 해를 체험한 후 어느 정도 성장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성미대로 하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이라면 그의 성장은 더디기만 할 것이다. 어쩌면 얼마 동안 특수하고 뜻깊은 일이 일어나 그가 교훈을 받아들이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 마음 깊은 곳에 엄청난 상처와 자극을 받아야만 그의 생명 진입에 자그마한 전환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 전환점으로 인해 그가 성장할 수 있겠느냐? 아직 그럴 수 없다. 그동안 그가 어떻게 진리를 향해 구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가 만약 이치만 떠들고 육적인 편안함만 탐하며 그다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일은 그에게 있어 수박 겉핥기 식의 교훈이 될 수밖에 없기에 진리를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의 생명 성장이 더딘 정도에 따라 내가 너희와 이런 식으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더없이 유익하다. 최소한 너희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온종일 살피고 지켜보면서 24시간 숨돌릴 틈 없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하면서 별도로 너희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너희가 순리에 따르게 할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것이 너희가 방종해도 된다는 뜻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안심하고 너희를 지켜보지 않겠느냐? 성령이 감찰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그런 필요가 있고 그가 마음속 깊이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기에 네가 지켜보지 않아도 그는 진리를 추구할 것이다. 그가 바로 정직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지켜보고 있어 봤자 소용없다. 지켜보더라도 그는 겉으로만 반응할 뿐이고, 네가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그는 구색만 맞추다 돌아서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감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너희와 지내고 접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캐나다 교회의 일이 모두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이 일에서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도 계속 이것이 일벌백계이고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이런 일이 없을 땐 네가 하나님의 마음과 이미 합해져서 너와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자 네 보잘것없는 분량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슨 분량이겠느냐? 너는 네가 중임을 맡을 수 있다고, 고생할 수 있다고, 네 의지가 예전보다 강하고 믿음도 커져서 곧 온전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이런 착각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어떠냐? 아직 멀었다! 나란 사람을 보면 외모는 이렇게 생겨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내 성격은 시원시원하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성격으로만 보면, 나는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너희에게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다가 몰래 그 일을 하고는 너희에게 내가 무슨 생각인지 맞춰 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든 나는 너희에게 똑똑히 말해 준다. 결국, 너희는 일련의 이론을 도출해 낸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 최고의 인식입니다.”라고 말이다. 이 인식이 어떠냐? 이제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가장 실패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하는 말을 너희가 들을 수 있고, 내 외모를 너희가 볼 수 있으니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있는, 뼈와 살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겨우 이 정도의 일만 해도 너희는 짐작하지 못하니 우리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고, 고작 이 정도의 이심전심도 안 되는 것이다.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머냐! 너는 하나님을 인식하기에 아직 멀었다! 이것이 진실한 말이고, 실제 상황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오래 믿어서 도리를 말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잘 들어라. 너는 아직 멀었다! 네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사실 너는 하나님을 인식하기에 아직 멀었고 근처도 가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다 사람을 드러낼 수 있다. 캐나다 교회를 처리한 일의 경우에도 일부 사람들이 드러났다. 사람은 이런 다양한 환경과 사건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행사와 성품을 이해하고 사람의 패역,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이 과연 어떤 관계인지 인식해야 한다. 아울러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을 통해 네 진실한 분량과 내적 상태를 가늠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번에 교훈을 좀 얻었느냐? 다음부터는 이런 인식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이 이렇게나 오래 이야기할 일이었느냐?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왜 그래선 안 될 일이라고 하겠느냐? 너희가 알고 있는 글귀와 도리에 따라 이 정도의 일은 너희가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생각해 본 다음 다 같이 교제해서 이렇게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상대적으로 순수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결국 지금은 극단으로 치우쳤으니 내가 일부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교제로 모두의 마음이 환해지지 않았느냐? 이 일과 관련하여 다른 생각이 들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그들을 이렇게 처리한 것이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일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교제하도록 하겠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