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9) 제 1 부

최근 우리는 계속 덕행 측면의 주제에 관해 교제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논조에 관해 교제하였다. 오늘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에 관해 교제할 것이다. 이 또한 사람의 덕행에 대해 제기한 전통문화의 요구이다. 이 논조는 어떤 측면의 덕행과 관련이 있겠느냐? 이 논조는 사람에게 도량과 관용을 요구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의 도량에 관한 요구이다. 이 요구의 기준은 무엇이냐? 그 핵심은 어디에 있겠느냐?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해야지 너무 몰아세워 활로를 없애 버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 덕행의 논조는 사람에게 쪼잔하게 굴지 말고 도량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남과 사귈 때나 일을 처리할 때 분쟁이나 갈등, 불화가 발생하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너무 높고 과하며 가혹한 요구를 하지 말라고,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하고 도량을 보여야 할 때는 도량을 보이라고, 마음속에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렇게 큰 도량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도량이 없다. 이런 일에 대한 본능의 수용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난날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적대시한 사람, 혹은 자신의 이익을 빼앗아 간 사람을 대할 때, 정상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증오를 보인다. 사람의 마음속에 증오가 생겨났을 때,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가 쉽지 않으며, 대부분이 해내지 못한다. 인성에 갖춰진 양심과 이성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는 게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어떤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사소한 일인지를 봐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 또한 다르므로 그 수준도 봐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끔 말로 네게 상처를 주는 데 그쳤다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보통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도 악의는 없었을 거야. 말은 거칠어도 진심은 아니었을 테지. 오랜 세월 함께한 정을 봐서, 또 누구누구를 봐서, 어떤 일을 봐서 따지지 말고 넘어가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도 있잖아. 그냥 한마디 한 것뿐이야. 내 체면에 먹칠을 한 것도 아니고, 뭔가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야. 내 지위나 앞날에 영향을 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넘어가자고.’ 이렇게 사소한 일이 임했을 때, 사람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네 직접적인 이익에 해를 끼치거나 네 가족에게 해를 끼쳤다면, 심지어 네 인생에 영향을 줄 만큼 큰 해를 끼쳤다면, 그때도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누가 네 부모를 죽이고 구족을 멸했다면, 너는 그 사람에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혈기를 지닌 정상인이라면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논조는 사람의 깊은 원한을 제약하지 못한다. 물론, 그 일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견해에는 더더욱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상대가 일부러든 무의식적으로든 네 이익을 침해하고 네 앞날에 지장을 주었다면, 혹은 네 몸에 상처를 입혀 장애가 생기게 하거나 어떤 흉터를 남겼다면, 혹은 네 정신세계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늘을 드리웠다면, 너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이 덕행 측면에서 관용과 도량을 보이라는 전통문화의 요구대로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일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과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지에 달려 있다. 만약 피해가 크지 않아서 감당 가능한 수준이고 인성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정상적인 성인으로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원한과 증오를 풀며 상대적으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람은 상대에게 관용을 보이고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에 속하는 덕행 측면의 어떤 말이 너를 제약하고 지도하지 않아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너는 해낼 수 있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고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일이 네게 준 상처가 그리 깊지 않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네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아주 쉽게 그 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일이 육적, 심적, 영적으로 네게 아주 큰 영향을 주고 네 인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면, 언제나 그 일로 우울함과 분노를 느끼며 마음이 어두워지고 상실감이 들게 됐다면, 적대적인 시선으로 이 인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사라졌다면, 평생 원한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면, 다시 말해 그 일이 정상 인성의 수용 범위를 넘어섰다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해낸다면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 속한다. 그런 상황은 무엇을 기초로 성립하겠느냐? 어떤 기준이 갖춰져야겠느냐? “그럼 불교에 입문하여 원한을 내려놓고 부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이는 세상에서 해탈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해탈에 불과하다. 소위 ‘해탈’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세상의 분쟁과 원한, 살육을 멀리하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심란할 일도 없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것을 멀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일이 네 마음 깊은 곳에 주는 영향도 줄어들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기억이 흐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용서에 이르지 못하고, 그 일에 있어 관용과 포용을 베풀며 철저히 내려놓지도 못한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려져 그 일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혹은 불교의 가르침으로 인해 억지로 원한 속에서 살지 않고, 더는 세상의 그 애증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애증으로 점철된 분쟁이 있는 그곳에서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멀리한 것일 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정상 인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이 육체나 정신, 몸에 심각한 상처를 줄 경우, 그러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이나 상처를 줄 경우, 자신이 무엇을 갖추고 있든 견디지 못한다.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정상 인성과 사상 관점이 그것들을 견뎌 내거나 풀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그 일을 이해하고 간파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한을 견뎌 내지도, 풀어 버리지도 못하는데,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실행할 수 없다는 말의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에 그런 도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가 네 부모를 죽이고, 네 구족을 멸했다면, 너는 그 일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 원한을 풀어 버릴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원수를 보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처럼 원수를 떠올려 심신과 영혼에 아무 느낌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불교를 믿고 직접 자기 눈으로 인과응보를 확인해야만 원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어떤 이는 “저는 선량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제 부모님을 살해한다고 해도 저는 그를 용서하여 복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과응보를 누구보다 더 믿으니까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아닙니까? 게다가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면, 그 원한은 풀린 것과 마찬가지이니 저는 그를 용서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그런 도량을 보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네가 그 원수를 잡은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매일 마음속으로 한순간도 복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은 너무 큰 상처와 영향을 주었기에 정상인이라면 틀림없이 평생 그 원한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꿈에서까지 가족들이 살해당하던 그 장면과 네가 복수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 일은 평생, 네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네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큰 원한을 사람은 결코 내려놓지 못한다. 물론, 이것보다 좀 가벼운 상황은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사람들 앞에서 네 뺨을 때려 망신과 모욕을 주었다고 해 보자. 너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모욕을 당했고, 그 후로 많은 사람이 너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롱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네 부모나 가족을 죽인 것보다 훨씬 가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하기가 몹시 힘들다. 네게 일어난 그 일은 이미 정상 인성의 수용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심신과 존엄, 인격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너는 그것을 잊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하기가 몹시 힘든 것이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방금 교제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전통문화에 나오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는 사람을 제약하고 일깨우는 도리로서 사소한 일, 별 볼 일 없는 갈등에만 완화 역할을 할 뿐,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과연 인성을 이해했겠느냐? 이 요구를 제기한 자는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수용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저 이 이론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뽐내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고 칭찬을 받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사람이 존엄과 인격, 이익에 해를 입고 나아가 앞날과 인생에 영향을 받는다면, 인성의 각도에서 볼 때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아무리 양심과 이성이 있어도 그대로 끝내려 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복수의 정도와 방식이 달라지는 데 그칠 뿐이다. 이 현실 사회에서, 인권이 없고 극도로 어두우며 사악한 이 사회 환경과 사회 배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살육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을 때 다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심할수록 복수하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복수의 수법도 잔인해진다. 그럼 이 사회의 기풍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회는 살육과 복수로 점철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완곡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지 말라고 알려 준 것인데,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려는 것이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인격과 존엄이 모욕당하고 상처 입었을 때, 사람들이 이 덕행의 논조에 영향을 받아 충동적으로 굴거나 과격한 행위를 하지 않고 재차 생각하게 한 것이다. 만약 이 사회의 사람들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을 때, 그 대우가 국가에서 온 것이든 사회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복수를 한다면, 이 인류, 이 사회를 관리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지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 수시로 벌어질 것이다. 그럼 이 인류, 이 사회는 무척 혼란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회가 혼란해지면 통치자가 관리하기가 쉽겠느냐, 어렵겠느냐? (관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소위 사회의 교육가, 사상가들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일깨운 것이다. 사람이 어떤 불공평한 대우나 차별, 모욕, 심지어 짓밟힘과 유린을 당해도, 마음과 육체가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일단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말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도덕 경전을 떠올리도록 말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부지중에 전통문화에 속하는 이 덕행의 논조에 제약을 받게 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제약하며, 다른 사람이나 국가, 사회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를 해소하게 한 것이다.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 있어야 할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생각이 완화되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원한으로 인한 살인을 대폭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관둘 거예요.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고 하잖아요. 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도 있고요. 그가 제 가족을 죽인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잖아요. 양측이 모두 자기주장을 내세웠을 겁니다. 게다가 제 가족이 죽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 일을 언급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해야지요. 도량을 갖춰야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고, 원한을 내려놓아야 즐겁게 살 수 있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일은 꺼내지 않겠습니다. 그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렇게 저한테 따져 들고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저도 그와 싸우지 않겠어요. 그건 없던 일로 하겠어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누구든 복수할 때가 되면 갑자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언행, 그리고 이론은 기본적으로 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싸우긴 뭘 싸워요! 사내대장부가 돼서 그 정도 일도 내려놓지 못하다니요! 훌륭한 사람은 마음속에 천하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아량이 크다고 하잖아요. 천하를 담을 아량은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도량은 갖춰야지요! 사람이 살면서 어느 정도는 도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이는 법이잖아요. 그렇게 하찮은 일로 따지고 싸워 봤자 웃음거리가 될 뿐이죠.”라고 말한다. 이런 말과 사상 관점은 세상사에 대한 사람의 한 가지 태도를 집중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태도는 분명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도덕 경전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말에 물들고 영향받아, 이 말들이 사람을 권면하고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며, 이 말들을 맞는 것, 옳은 것으로 여긴다.

사람이 증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작은 일을 따지고 들면서 늘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관용을 보이지 않다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사회 여론에 질책을 받으며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분을 삼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한 측면으로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압박과 비합리적인 상처, 그리고 불공평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다. 즉, 사람은 인성에 그러한 것들을 견디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요구는 누구에게든 불공평하고 비인도적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런 사상 관점은 당연히 이런 일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견해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 일들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논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사물로 보게 한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 사람은 여론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받은 모욕과 불공평한 대우를 마음속으로 참고 억누르며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입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잖아요. 관두죠. 복수할 필요 없어요. 다 지난 일이에요.”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인성의 본능 면에서 보면, 그는 영원히 그 일로 인한 상처를 잊지 못한다. 즉, 그 일이 그의 육체와 마음에 준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소위 ‘원한을 잊자. 그 일은 지나간 거야. 이미 다 지나갔다.’라는 태도는 외적인 형식에 불과한데, 그것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속박되고 영향받아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람은 이런 사상 관점에 얽매여 있기에, 이 말대로 행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마음과 도량을 갖지 않는다면,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책망 들으며 나아가 이 사회나 사람들 사이에서 멸시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멸시받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들과 접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 사람은 쪼잔해서 원한이 있으면 꼭 갚으려고 듭니다. 이 사람하고 사귈 때는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생기게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온 사회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런 사상을 떠받드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온 사회가 이런 사상에 얽매이고 영향받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그 말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도 무척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 분위기에 굴복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논조, 관점을 따르면서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소위 철학가라는 자들이 제기한 도덕적 사상 관점에 대한 이런 말에는 특정한 속셈과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그들이 원한 것이 인류가 더 자유로워지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더 해방되는 것이겠느냐?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덕행의 말들은 결코 정상 인성의 필요에 도움이 되고,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하기 위해 제기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통치 계급이 국민들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통치 계급을 위해 힘을 쓰고, 통치 계급이 사회 질서와 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로 모든 사람, 모든 가정을 제약하고, 모든 개체와 군체, 단체를 제약하며, 각 단체로 이뤄진 사회를 제약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도덕적 사상 관점이 주입되고 또 거기에 영향받고 물들어 사회 주류의 도덕적 사상 관점이 생겨나고 형성되었다. 이 사회도덕, 사회 분위기의 형성은 인류의 생존이나 사상의 진보, 정화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며, 인성의 개선에 더욱 유리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 도덕적 사상 관점의 형성으로 인해 인류의 사상은 통제 가능한 범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럼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겠느냐? 사람들이겠느냐, 아니면 통치 계층이겠느냐? (통치 계층입니다.) 그렇다.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통치 계층이다. 도덕 경전을 사상과 덕행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은 통치하기도, 양민으로 만들거나 지배하기도 더 쉽다. 또 모든 일에서 도덕 경전의 여러 논조나 사회의 제도, 도덕, 분위기, 여론으로 제약하기가 더 쉽다. 이렇게 하면 같은 사회 제도, 도덕 환경,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 관점, 처신의 마지노선이 기본적으로 통일된다. 그들의 사상 관점은 소위 철학가, 사상가, 교육가들이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통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의 사상과 정상 인성을 비롯해 모든 피지배자가 도덕 경전의 이런 말에 동화되고 얽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요, 사람의 입과 뇌까지 제약을 받으며,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전통문화의 도덕적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사상 관점들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거나 제약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과 이 사회를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동시에 이 도덕 경전의 말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여론에 통제된다. 일단 네 행동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는 마음이 씁쓸하고 거북해질 것이다. 이어서 ‘만약 내가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속 좁은 사람처럼 따지고 들고 옹졸하게 굴면서 증오를 전혀 내려놓지 못한 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동료나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를 도량이 큰 사람으로 위장한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회 여론에 통제되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네 마음 깊은 곳에는 무형의 족쇄가 있다. 즉, 사회 전체의 여론과 질책이 네게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른길을 걷고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 사실을 밝히거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복음을 전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째서 모두에게 밝힐 용기를 내지 못하겠느냐? 이는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 사회 환경이 너에게 어떤 영향과 제약을 가져다주었겠느냐? 너는 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겠느냐? 왜 복음조차 전하지 못하겠느냐? 전제 독재 국가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박해를 받는다는 특수한 상황 외에도 너는 사회 여론에서 비롯된 갖가지 말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혹자는 네가 종교를 믿고 나서 집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고, 혹자는 너를 요괴처럼 생각하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은 다 신선이 되려고 하며 세상과 등지고 산다고 한다. 또 혹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밥을 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일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더더욱 듣기 거북하다. 네가 처음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하지 못한 것은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 아니겠느냐? 이런 것들이 사회 환경 속에서 네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는 네 마음에 영향을 주고 네 체면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회는 신앙이 있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적대적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차마 들어 주기 힘든 모욕과 비방의 말을 하기에 너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할 때도 도둑처럼 슬그머니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 비난을 들을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다. 너는 울분을 참으면서 그렇게 조용히 숱한 고통을 참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뎠기에 큰 도움을 얻고 많은 일을 밝히 알게 되며,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된 것이다.

방금 우리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관해 무척 많이 교제하였다. 인성의 각도에서 보면, 이 논조는 사람에게 도량과 아량 면에서 최소한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사실, 사람의 인권, 존엄, 인격, 그리고 인성이 받는 상처와 영향을 볼 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강도나 산적들의 말 같은 것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제약하는 것은 양심과 이성을 지닌 이에게 크나큰 모욕이며, 비인도적이고 부도덕한 일이다. 정상 인성에는 희로애락이 갖추어져 있다. ‘희’, ‘애’, ‘락’은 차치하고, ‘로’는 정상 인성에 지니고 있는 정서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에서 생기고, 어떤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드러나느냐? 정상 인성의 분노가 표출될 때, 그러니까 사람의 인격과 존엄, 이익, 그리고 정신, 마음이 상처 입고 유린당하고 모욕당할 때,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화를 내며, 분노하고, 나아가 증오한다. 이것이 바로 분노가 생기는 원인이자 그 구체적인 표출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며, 사소한 일에도 분노한다. 상대가 말을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면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화를 낸다. 이는 화가 너무 많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 존엄, 인권, 정신세계와는 관련이 없다. 그가 너무 쉽게 성질을 내는 것은 화가 너무 커서 그럴 수 있다. 그리하여 무슨 일에서든 분노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정상 인성으로 드러내는 분노와 화, 신경질, 증오로, 이는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즉, 인격, 존엄, 인권, 그리고 마음이 유린당하고 모욕받고 상처 입을 때, 사람은 분노한다. 이 분노는 한때의 화도, 한때의 정서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과 존엄, 마음이 상처를 입었을 때 정상적인 인성이 보이는 반응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인 만큼 그 반응은 정당하고 이성에 부합한다고, 죄를 짓는 것에 속하지 않으니 제약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을 그 정도로 상처 입히는 문제는 마땅히 공정하게 해결하고 처리해야 한다. 만약 상황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공평하게 처리하지도 못하는데, 무리하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피해자에게 부도덕하고 비인도적인 처사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인식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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