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2) 제 1 부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들을 교제했는지 이야기해 보아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두 가지 측면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서로 다른 시기, 또는 서로 다른 단계에 교회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었고, 어떤 리더 일꾼은 교체되었으며, 어떤 이는 병에 걸렸고, 어떤 이는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고 할 때, 이런 일들이 발생한 것은 전부 우연이 아니며, 저희는 이에 대해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실행의 길에 관해 교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마주했을 때는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지요. 첫 번째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심판이나 형벌, 시련, 연단이든 아니면 은혜나 축복이든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전통문화 중 덕행의 논조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해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중점적으로 교제한 화제 역시 덕행의 논조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 화제에 대해서는 꽤 오래 교제했는데,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조와 요구, 정의에 대한 것을 폭로했다. 너희는 이 화제에 대한 교제를 통해 덕행의 논조를 새롭게 인식하고 정의했느냐? 이 논조들의 본질을 분별하고 밝히 알게 되었느냐? 마음속 깊이 이것들을 내려놓고 버리며, 진리와 혼동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로 여겨 추구하거나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 임하는 일들이 덕행에 관한 말과 관련될 때, 자신이 이 덕행에 관한 말들에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속박되고 결박되고 통제되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속으로 아직도 덕행에 관한 말로 자신을 속박하는지, 언행에 영향을 받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는지 의식하고 성찰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예전에 하나님께서 전통문화에 관해 교제하고 해부해 주시기 전까지는 이 덕행 측면의 사상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저에게 어떤 위해를 끼치는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이 덕행 측면에 관한 논조의 오류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그것을 저버려 더는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일상생활 속에서 자세히 체험하고 파헤치고 분별해야 덕행 측면의 논조를 철저히 간파하고 저버릴 수 있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인식이 생겼다고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이 전통문화의 그릇된 사상 관점들을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임했을 때 불현듯 그 논조들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체험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전통문화의 이 그릇된 관점을 자세히 해부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문화의 논조를 대할 때 그 본질이 진리에 어긋나며 실제적이지 않고 사람을 미혹하고 해하는 것임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마음에서 철저히 이 터무니없는 관점의 해악을 제거할 수 있다. 너희는 지금 전통문화의 각종 논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이치상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좋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전통문화의 해악과 영향을 근원적으로 철저히 해결할 수 있을지 여부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덕행의 논조는 그게 어떤 것이든 전부 인류가 제창하는 덕행 측면에 관한 사상 관점이다.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가 지닌 본질에 대해서는 이미 적잖게 폭로한 바 있지만, 전에 교제한 그 몇 가지 측면 외에 반드시 폭로해야 할 덕행의 논조들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인류가 제창한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지난번에는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덕행의 논조에 대해 교제했다. 의미를 보면, 이 말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그것은 남성에 대한 하나의 요구이자, 사람들이 말하는 ‘사내대장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다. 우리는 남성에 대한 이 기준을 폭로하고 해부하였다. 남성에 대한 이 요구 외에 예전에 교제한,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라는 여성에 대한 논조를 통해서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전통문화는 여성에게만 현실성 없고 인성에 맞지 않는 비인도적 요구를 한 게 아니라 남성에게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인성에 어긋나는 논조와 요구를 제시했는데, 이는 여성의 인권은 물론 남성의 인권까지 박탈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언뜻 공평한 것 같다. 여성을 풀어 주지 않고 남성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으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을 보면, 여기에 심각한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논조가 한 측면으로는 여성에게 덕행의 기준을 제시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마찬가지로 남성이 사내대장부가 되는 행위 준칙을 규범화했다고는 하나, 이 요구 기준을 보면 공평함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성의 덕행에 대해 제시된 요구 기준은 여성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여성의 사상을 옭아맬 뿐만 아니라 여성의 두 발 또한 옭아매며, 여성에게 규방 깊이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라고,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고 여성을 훈계하는 것 외에도 여성의 행동 범위나 생활 범위를 엄격하게 규정하면서 여성에게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멀리 외출을 하지도 말라고, 사업도 하지 말고, 큰 야심이나 욕망, 꿈은 더더욱 갖지 말라고 요구한다. 심지어는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더더욱 비인도적인 논조까지 나왔다. 너희는 이 말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이 정말 성립하느냐? 여자가 재주가 없는 것이 어떻게 덕이 될 수 있겠느냐? 이 ‘덕’은 도대체 무슨 덕이겠느냐? 박덕(薄德)하다는 것이냐, 아니면 유덕하다는 것이냐? 만약 재주가 없는 여자를 덕행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재주가 있는 여자는 전부 박덕하고 무덕(無德)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재주 있는 여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겠느냐? 여성의 인권을 심각하게 박탈하는 것 아니겠느냐? 여성의 존엄에 대한 일종의 모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여성의 존재를 경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며, 여성에게 불공평하고 부도덕한 처사이다. 그러니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이 어떻겠느냐? 인도적이겠느냐? (비인도적입니다.) ‘비인도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박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심각하게 박덕한 것으로, 중국 속담으로 비유하자면 ‘조상 몇 대가 박덕한 것’이다. 이 논조는 너무도 비인도적이다!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라는 말을 선동하는 사람에게는 속셈과 목적이 있다. 그는 여자가 재주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 즉, 여자가 사회사업에 참여해 남성과 평등한 지위에 서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남성을 받들어 모시는 도구가 되어 착실하게 남성의 시중만 들면서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기를 바라며, 이것이 바로 유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성을 옳은 부분이 하나도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부정하며, 여성이 남성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남성의 시중만 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지위에 서서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관점이 사람의 정상적인 사유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아니면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겠느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 이는 분명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에게 본능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어떤 약점이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남성이 여성을 멸시하고 여성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여성의 자유와 인권을 박탈할 핑계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생각하는 여성의 이 약점과 타고난 취약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여성은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 약점과 문제들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이며,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점도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탄의 눈에 약점과 결점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 천연적인 것, 긍정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만든 자연법칙에 부합한다. 오직 사탄만이 이렇게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을 깎아내릴 수 있고,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것을 결점이나 약점, 또는 본능 면에서 부족한 문제로 보면서 확대하여 멸시하고 비웃고 비하하고 배척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여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권리와 여성의 재능과 특기를 발휘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는 종종 ‘속 좁은 여자’나 ‘계집’이라는 말이 도는데, 이는 이런 단어로 여성을 형용하여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존재로 비하하는 처사이다. 비슷한 단어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계집애 같은 남자’,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 “여자는 가슴만 크지 머리는 비었다.” 등은 전부 여성을 모욕하는 말이다. 보아라. 이 말들은 다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나 여성을 일컫는 호칭을 이용해 여성을 모욕하고 있다. 이 사회와 인류가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시선은 완전히 다르며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불공평한 것 아니겠느냐? 이는 남녀평등에 입각하여 말하고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완전히 불평등한, 남존여비의 시선으로 여성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에서,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많은 말이 생겨났는데, 여성의 특징과 여성을 일컫는 호칭으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문제를 형용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언급한 ‘속 좁은 여자’, ‘계집’, ‘계집애 같은 남자’라든가 “머리만 길지 식견은 짧다.”, “여자는 가슴만 크지 머리는 비었다.” 등의 말은 여성을 형용하고 여성을 겨냥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특징이나 성별과 관련된 단어로 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비웃고 헐뜯고 폭로한다. 인성이 없는 사람을 형용할 때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짐승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그 단어로 심각하게 인성을 상실한 정도를 형용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여성을 경멸하고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에 여성과 관련된 단어로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과 일, 사물을 형용한다. 이는 분명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한 비하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이 인류와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여성에 대해 내린 정의는 불공평하며 사실에 어긋난다. 요컨대, 여성에 대한 인류의 태도는 ‘비하’와 ‘억압’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형용할 수 있다. 여성이 떨치고 일어나 일하는 것, 어떤 사회적 의무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더욱이 여성이 사회에서 뭔가 역할을 발휘하는 것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 어떤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처사이다. 여성이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말하는 것도, 심지어는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니 이는 여성에 대한 박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박해는 덕행의 요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정이나 사회, 사람들이 여성에게 제시하는 갖가지 요구를 보면, 인류가 무리 지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게 되었을 때부터 여성에 대한 박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그 박해가 언제 최고조에 이르렀겠느냐? 전통문화 중 각종 덕행 측면의 논조와 요구들이 점차 생겨나면서 여성에 대한 박해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명문화된 규정과 명확한 논조가 있기에 이것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여론과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여론과 세력은 여성에게 피할 수 없는 올무나 멍에가 되어 여성으로 사는 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인류 가운데서 살면서, 서로 다른 시기의 사회에서 살면서 굴욕을 참고 모욕을 당하며 사회의 노예, 심지어는 남성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덕행 측면의 이 오래된 사상과 논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현대 사회의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에는 남성도 포함되고, 당연히 여성도 포함된다. 여성은 어느샌가 부지중에 이 덕행 측면의 논조와 사회 여론으로 스스로를 제약하게 되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당연히 이 올무와 멍에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의 이 강력한 여론 세력에 저항할 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통문화 중 각종 논조의 본질을 간파할 수도, 간파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벗어나고 싶고 그 올무와 멍에에서 탈출하고 싶어도 그럴 힘이 없다. 주관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다가 창조주가 사람을 지은 의미가 무엇인지, 남성과 여성의 본능을 만들어 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큰 사회도덕의 틀 속에서 살아가고 생존하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회라는 큰 환경 아래에서 전통문화 중 덕행에 속하는 논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논조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종의 보이지 않는 멍에가 되었다.

여성을 박해하는 전통문화의 논조들은 여성에게만 무형의 멍에인 게 아니라 당연히 남성에게도 보이지 않는 멍에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남성 역시 이 인류 가운데 태어나 사회의 또 다른 주요 구성원으로서 이 전통 도덕 문화에 물들고 영향받기 때문이다. 이 전통 도덕 문화는 모든 남성의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내려져 남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에 영향받고 속박받는다. 예를 들어, ‘속 좁은 여자’,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 “여자는 반드시 현숙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 “여자는 반드시 순결해야 한다.” 등의 주장은 남성들이 마음속으로 철석같이 믿는 것으로, 그들 역시 이 전통문화에 단단히 얽매여 있다. 한 측면으로는, 여성을 박해하는 이 주장들은 남성의 지위를 높이는 데 매우 큰 도움과 유익이 된다. 이 큰 도움과 유익 면에서 보면, 남성은 사회에서 이 여론에 무척 큰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을 박해하는 이 여론과 주장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남성들 역시 이 전통 도덕 문화에 미혹되고 영향받기 때문에 남성은 전통문화의 큰 흐름 속 또 다른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온 사회가 남권 지상주의를 외치는데 어째서 남성도 피해자라고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류를 유혹하고 오도하고 미혹하고 마비시키고 얽매는 전통 도덕 문화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여성은 전통문화의 도덕 사상에 심하게 해를 입었고, 남성 또한 깊이 미혹되어 적잖은 해를 입었다. ‘미혹되었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남성을 평가하고 여성을 정의할 올바른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떤 각도에서 보든, 그는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정해 준 각종 규칙, 법칙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드러내 준 긍정적인 사물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그가 근거하는 것은 전통문화이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남성 또한 전통문화에 유인되고 오도되고 미혹되고 마비되고 얽매인 피해자이다. 그러므로 남성은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없다는 이유로 가엾게 생각할 것이 없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보다 높다는 이유로 흡족해할 것도 없다.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라. 사실 남성 또한 무척 불쌍한 존재로, 비교하자면 똑같이 가엾다. 어째서 똑같이 가엾다고 하겠느냐? 남성에 대한 이 사회와 인류의 정의나 평가, 혹은 남성에게 부여한 책임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자. 지난번에 교제한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남성에 대한 요구를 보면, 이 요구의 최종 목표는 바로 남성을 ‘사내대장부’로 정의하는 데 있다. 이는 모범적인 남성에 대한 호칭이다. 이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이 남성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순간, 그 남성은 반드시 그 호칭을 짊어지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호칭을 짊어지려 하면 의미 없는 희생과 정상 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수도 없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남성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내대장부가 되려면 어떤 연약함도, 두려움도 보여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강인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 피곤하다고 호소해도, 울어도 안 되고, 인성의 연약함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걱정하고 슬퍼하거나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네 두 눈은 언제나 생기 넘쳐야 하며, 네 얼굴은 반드시 의연하고 두려움 없는 빛을 띠어야 하고, 적을 대할 때는 머리끝까지 분노해야 한다. 그래야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에 걸맞다. 다시 말해, 너는 평생 허리를 꼿꼿이 펴고 용기를 내야지 평범하고 세속적이고 일반적인 범인(凡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범인을 뛰어넘어 초인이 되어야 하며, 초월적인 의지와 끈기, 인내, 강인함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사내대장부’라는 호칭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즉, 남성은 먹고 마시고 문란하게 굴고 도박을 해도 되지만, 반드시 여자보다 강인해야 하고, 초월적인 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임하든 굴복하거나 위축되거나 ‘No’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겁내거나 두려워하거나 나약해진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이런 모습들을 전부 숨기고 포장하여 조금도 드러내지 말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나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너는 사내대장부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 사내대장부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바로 어떤 사람과 일, 사물도 그의 뜻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남성이 어떤 일을 하려고 뜻이나 이상, 소망을 품었을 때, 예를 들어 나라에 몸 바치겠다거나 친구에게 의협심을 보이겠다거나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마음을 먹었다거나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한다거나 야심을 가졌다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누구도 그를 간섭할 수 없다. 애틋한 사랑도, 가족 간의 정도, 가정도, 사회적 책임도 그의 뜻을 바꿔 놓을 수 없고, 그가 포부와 이상, 바람을 포기하게 하지 못한다. 그의 뜻이나 그가 이루려고 다짐한 목표, 걸어가려는 길은 누구도 바꿔 놓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역시 스스로에게 언제 어느 때라도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일단 긴장을 늦추고 해이해지는 순간, 가정으로 돌아가 책임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돌보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이상과 뜻을 포기하고 걸어가려는 길과 이루려는 목표를 버리려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사내대장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못난 인간, 머저리가 된다. 이는 온 사회가 멸시하는 것으로, 당연히 남성도 그런 자신을 멸시한다. 자신의 행동에 사내대장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문제나 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멸시하며, 이 사회에서 설 곳도 능력을 발휘할 곳도 없다고, 사내대장부나 남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내대장부의 또 다른 특징은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이나 폭력, 위협 등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정신이다. 즉, 어떤 권력이나 폭력, 위협을 마주해도, 심지어는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남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백절불굴의 마음으로 포로나 겁쟁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떤 세력에도 굴복해서는 안 되며, 몸을 굽혀 보전을 꾀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임이나 의무를 위해, 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권력이나 어떤 세력에 굴복한다면, 설령 살아남아 목숨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숭상하는 전통 도덕 문화로 인해 그 행위에 모멸감을 느낀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패배해서 수모를 당하면 할복자살을 하려고 든다. 생명이 그리 가벼운 것이더냐?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뿐이다. 작은 패배나 좌절 때문에 죽겠다는 마음까지 품는다면, 이는 전통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일이 임했을 때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전통문화의 요구에 부합하는 선택을 내리지 못하며,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증명해 보이지 못하고, 스스로가 사내대장부임을 보여 주지 못하면,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자살을 선택한다. 이 사상 관점을 지니게 된 원인을 파고들어 보면, 전통문화가 남성의 사상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남성의 사상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문화의 이런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남성이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할복자살을 선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내대장부’라는 정의에 대해 남성들은 무척 분명하고 확고하게 그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남성들까지 판단하고 제약한다. 남성의 사상 관점, 그리고 이상이나 목표, 선택하는 길을 보면, 모든 남성이 전통문화에 깊이 영향받고 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영웅의 행적이나 아름다운 전설은 전통문화가 사람의 마음 깊이 파고들었음을 보여 주는 사실적인 묘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전통문화에 큰 해를 입은 것 아니겠느냐? 단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이 다를 뿐이다. 여성에게는 끝도 없이 모욕하고 비하하고 제약하고 통제하지만, 남성에게는 가능한 한 부추기고 미혹하고 선동하고 교사(敎唆)하여 겁쟁이나 범인, 평범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남성에 대한 요구는 무슨 일을 하든 여성과 달라야 하고, 여성을 뛰어넘어야 하며, 여성보다 대단해야 하고, 여성을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 사회와 인류, 사회의 흐름과 방향, 사회의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며, 심지어 이 사회에서 대권을 손에 넣고 사회와 인류를 통제하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권력에는 여성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것이야말로 남성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고, 사내대장부의 영웅적 기개라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국가가 민주 사회에 진입하고 여자와 어린이의 권익 역시 보장받게 되면서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으로 인한 영향과 속박은 어느 정도 희미해졌다. 어쨌든 수많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했으며, 많은 분야와 업종에서 여성의 참여가 날로 늘고 있다. 하지만 전통문화의 사상은 이미 오래전에 인류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여성의 마음뿐만 아니라 남성의 마음에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도 모르게 전통문화의 관점이나 입장으로 각종 문제를 생각하고 바라본다. 물론,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으로 각 분야의 사업과 직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남녀의 불평등 문제는 어느 정도 개선되었지만, 전통문화 속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나라의 교육이 기본적으로 전통문화의 이 핵심 사상들을 위주로 이뤄진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회와 인류가 전통문화의 논조로 갖가지 문제를 서술하는 일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전통문화 사상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을 칭찬할 때 어떤 단어를 쓰더냐? ‘여장부’, ‘여걸’이라는 말을 쓴다. 이는 존칭이겠느냐, 아니면 폄칭이겠느냐? 어떤 여성은 “여장부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어떤가요? 저는 남성 사회에 진출해서 지위 상승을 이뤘어요. 여자지만 뒤에 ‘장부’가 붙어서 ‘여장부’가 됐잖아요.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니까 일종의 영광이죠!”라고 말한다. 이는 인류 사회의 어떤 민족, 혹은 단체가 그 여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여성이 ‘여장부’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고, 사내대장부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동등하다는 뜻이다. 또한, 그녀의 사업이나 재능, 심지어 사회에서의 지위, 사회에 발붙일 만한 지능이나 수단 등은 남성들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 ‘여장부’라는 호칭은 많은 여성에게 있어 사회적 포상이자,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사회적 지위의 인정이다. 여장부가 되고 싶어 하는 여성이 있지 않겠느냐? 이 호칭이 듣기에는 좀 별로지만, 어쨌든 누군가 ‘여장부’라고 불린다면 이는 그 여성이 무척 능력 있고 재능이 뛰어나며, 남성이 보기에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릴 정도라는 의미이다. 그럼 남성에 대한 호칭은 어떠하냐?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 관념의 논조를 지키며, 이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성취욕이 전혀 없고, 권세나 지위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현실에 안주하고, 평범한 일이나 삶에 만족하면서 가정을 보살피는 데만 신경 쓰는 남성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사회는 그런 남성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남성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단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매우 신중하게 임한다. 그런데 이런 남성은 어떤 말을 듣겠느냐? ‘여성스럽다’, ‘속 좁은 여자’라는 말을 듣는다. 보아라. 남성을 모욕하는 말에는 저속한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여자’와 관련된 말로 남성을 모욕할 뿐이다. 여성을 추켜세울 때는 ‘여장부’, ‘여걸’ 등의 말로 그 지위를 높이고 재능을 인정한다. 반면, ‘속 좁은 여자’와 같은 말은 남성을 폄하하고 대장부 같지 않다고 질책할 때 쓰인다. 이는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현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생겨난 이 말들은 한 가지 문제를 보여 준다. 전통문화는 현대 생활과 멀어진 것 같고, 사람들 마음속에서 오래전 일 같으며, 현대인들은 인터넷이나 각종 전자용품, 또는 각종 현대적인 생활 방식에 빠져 있다. 설사 사람이 현대적인 생활 환경 속에서 더없이 안일하게 산다고 해도, 혹은 인권과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표상에 불과하다. 사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전통문화의 독소가 수도 없이 남아 있다. 비록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 같고, 사상 또한 어느 정도 해방된 것 같아도,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고 발달하는 현대 사회에서 견문을 늘려 외부의 많은 일에 지식과 식견이 생긴 것 같아도, 인류는 여전히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갖가지 덕행에 관한 논조의 그늘 속에서 살아간다. “저는 전통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무척 현대적이죠. 저는 현대파라고요.”라고 말하면서 코에 피어싱을 하고 귀에 주렁주렁 귀고리를 달며, 전위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옷을 입는다고 해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은 여전히 전통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그렇겠느냐? 그의 마음과 사상은 이미 전통문화에 물들고 얽매여 있으며, 그의 뼛속에서 생겨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설령 머릿속에 스쳐 간 생각일지라도 전부 전통문화에 주입되고 물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전통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전부 전통문화라는 큰 틀 아래에서 생겨났다. 이런 사실은 인류가 전통문화에 얽매여 있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인류는 전통문화에 얽매여 있다. 가방끈이 긴 사람이든 짧은 사람이든, 학력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이 인류 가운데서 살아가는 한 반드시 인류의 전통 도덕 문화에 물들고 영향받게 되어 있다. 그 전통문화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학교나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가정에도 존재하며, 당연히 사회의 곳곳에 존재한다. 이렇게 사람은 부지중에 이런 것들이 주입되고 거기에 영향받으며 미혹되고 오도된다. 그래서 인류 모두가 전통문화의 결박과 속박, 통제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숨고 싶어도 숨지 못하고,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사회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는 현재 상황이자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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