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욥의 간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위로를 얻게 하였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 이 사람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 그중의 함의를 깨닫지 못할 것이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말하려 하는지의 심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에 가서 너희가 욥과 같거나 비슷한 시련을 겪을 때, 너희가 환난을 겪고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배치한 시련을 겪을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위하여 간증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치욕과 고통을 참을 때면 내가 한 이런 말의 의의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너는 욥에 비해 아직도 훨씬 멀었다고 느낄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를 느낄 것이고 네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느낄 것이다. 그때에 가서 너는 욥이 한 그 몇 마디 대표적인 말이 패괴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욥이 해낸 것이 지금의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해내기 어려운 것인지를 느낄 것이다. 네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이런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치른 대가가 얼마나 값진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하나님이 지불한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교통하니 너희는 욥, 이 사람에 대해 정확한 요해가 있고 정확한 평가도 있지 않는가? 너희의 마음속에서 욥, 이 사람은 도대체 참으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인가, 아닌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확실하게 “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욥이 행하고 표현해낸 이런 사실은 사탄을 포함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들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증거는 욥의 몸에서 생긴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얻은 첫 간증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했을 때 하나님은 욥의 몸에서 희망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욥의 몸에서 위로를 얻었다. 창세부터 욥의 그때에 이르러 하나님이 처음으로 무엇을 위로라 하는지, 무엇을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은 것이라 하는지를 진정 체득하였으며 무엇을 진정 그를 위해 한 간증이라고 하는지를 보기도 하였고 얻기도 하였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간증과 욥, 본인에 대한 각 방면의 서술을 들은 후 자신의 앞길에 대해 계획이 있으리라 믿으며, 또한 우려와 공포로 가득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천천히 풀기 시작하고 조금씩 마음에서 해방받기 시작했으리라 믿는다……

다음의 몇 단락 경문도 욥과 관련된 기록이다. 계속 보자.

4. 욥은 하나님이 계심을 귀로 듣기만 하였다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42:2~6)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이 비록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이런 말에서 너희는 여기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는가? 여기에 하나의 사실이 있음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우선,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는지,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보자. 여기에 이상의 2가지 문제를 설명할 만한 말이 한마디 있다. (욥 42: 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구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계심을 전설 속에서 알게 된 것이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그런 후 생활 속에서,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어떤 사실인가? 욥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은 지금의 사람들과 같은 것이 아닌가? 욥이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그 뜻은 비록 그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 요소이다. 객관적으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을 따랐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고 그에게 말씀한 적도 없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비록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한 적도 없고 그에게 어떤 분부도 하지 않았지만 욥은 만물 중에서,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던” 전설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 그런 후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욥, 이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유래와 과정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든지, 그가 어떻게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 장절을 보자. “(욥 9:11)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그가 하나님이 그의 앞으로 지나가거나 일을 하거나 사람을 인도하는 때를 상상하면서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하지 않을 때 사람에게 임하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하는지, 어떤 곳에 임하는지를 모른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숨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의 숨김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다음 단락에서 욥이 또 말했다.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이 단락의 기술에서 우리는 욥의 경력에서 하나님이 시종 욥을 향해 숨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이 그의 앞으로 지나가거나 그의 오른쪽에서 일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고 줄곧 여겨왔다. 욥이 여태껏 하나님을 보지 못한 정황에서도 그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해낼 수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만약 진실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계속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닌가? 너는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 있는가? 욥, 이 사람의 온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진실한 것이지 하나님이 과장해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설령 하나님이 그를 대한 것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말씀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의 온전함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봐 항상 번제를 드렸고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했다.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이 일에서 욥, 이 사람이 얼마나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했는지, 욥의 믿음이 얼마나 굳세었는지, 그의 믿음이 또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숨었다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 하여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숨었다 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향해 공개적으로 나타나라고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가 만물 중에서 이미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고 그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축복과 은총을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여일하게 그를 향해 숨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도 얻지 못한 성과 즉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다.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화복을 따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오늘 언급할 중점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듣지도 못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있었다.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엇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것이다. 이 ‘찬송’은 조건이 없고 배경이 없고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음을 보게 된다. 그의 마음에서 생각한 것과 작정한 것과 계획한 것은 다 하나님께 털어놓은 것이지 봉해져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위해 무엇을 해달라고, 무엇을 베풀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이렇게 하나님께 경배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지나친 욕망도 가지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토색도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이 복을 받거나 화를 받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든지 화를 받든지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은 변할 수 없기에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화를 받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은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으며,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의 창현(彰顯)이며, 어느 각도에서 보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을 것인데, 이것은 욥이 한평생 경력하고 인식한 것이다. 욥의 이 모든 마음과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하나님의 앞에 와서 하나님께 중히 여김을 받았다. 하나님은 욥의 이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욥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소중히 여겼다. 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게 될 모든 것을 맞이했다. 욥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요구하여 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순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욥이 여겼던 자신의 직책이자 역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다. 욥은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전혀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분부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타이르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지금의 말로 말하면 바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그 어떤 진리 방면의 깨우침과 인도와 공급도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대견스러운 일이다. 그의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 있어서 족한 것이며, 그의 간증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마음과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도리만 말하고 큰소리만 치고 제물을 바치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경외가 없는 그 사람들과 비하면 훨씬 소중하다. 그것은 욥의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에 대해 숨김이 없고 그의 인성이 성실하고 선하며 그가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인성을 구비하고 이런 마음을 구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해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병과 권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는 데에 달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화복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에 사람의 걱정은 무지몽매한 이지없는 표현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이 사실에 대해 의심의 태도를 갖고 있는 표현이자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표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이런 인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은 너희만큼 많은가? 하나님이 그때 한 사역과 한 말씀은 아주 적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데에 달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욥에게 이런 성과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실로 쉽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성과 그 자신의 추구로 말미암아 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시대에 하나님이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이미 그에 대해 이런 평가가 있었고 이런 정론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하나님은 사람에게 숨겼지만 만물 중에서의 하나님의 행사는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

욥이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력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시련 속에서의 그의 간증은 오히려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애와 기쁨과 칭찬을 받았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탄복도 받았으며 더욱이 사람들의 자자한 칭찬도 받았다. 그의 일생은 평범하고 위대하지 않았으며 여느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이 평범한 몇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가 일반인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에 대한 보임을 얻었고 일반인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주재도 체험하고 감지한 것이다. 그는 그 어떤 일반인보다 총명하지 않았고 초강력 생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이 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다수의 일반인들이 구비하지 못한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구비했으며,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굳세고 의연하고 생각이 세밀했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나날에서 하나님이 한 모든 비범한 일을 보았고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보았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과 보호를 보았고 지고지상한 하나님의 존귀와 권병을 보았다. 욥이 일반인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게 된 첫 번째 원인은 그에게 순결한 마음이 있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고 그의 마음이 조물주께 끌린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욥의 추구인데, 그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 것이다. 욥이 구비한 것과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배경 하에서였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지혜도 감지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사람에게 주고 사람에게서 거두는 행사는 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보낸 세월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없지만 그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 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그의 인식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행사가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고 하나님의 주재도 사람의 생활 속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다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의 평범한 나날에 그의 생활의 구석구석마다 그는 하나님의 비범하고 기묘한 행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안배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숨김’과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하나님 행사에 대한 욥의 체험을 가로막지 못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욥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일생은 바로 평범한 생활 속에서 만물 중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한 것이다. 그는 또 평범한 나날 속에서 만물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지만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하면서 발표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언어를 귀여겨듣고 터득했다. 보다시피, 사람이 만약 욥과 같은 인성과 욥과 같은 추구를 구비한다면 욥과 같은 체험과 인식을 얻을 수 있고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터득과 인식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지 않고 욥에게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온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고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은 전제 하에서 만물 중에서의 하나님의 행사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는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권병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권병도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욥, 이런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인 이상, 하나님을 따르는 일반적인 각 사람도 다 마땅히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은 논리적 추리 혐의가 있을지라도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뜻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욥, 한 사람만의 특허인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사람은 욥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란 딱지가 붙여져있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아주 명확하다. 욥만이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구비했기 때문에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뜻은 너희도 틀림없이 깨달았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악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없고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사탄의 얽매임과 올무 속에 처해있는데, 모두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참해하고 삼킬 대상들이고 모두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며 모두 사탄에게 감금된 죄수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사람들이 모두 욥과 같은 인성을 구비하지 못한 이상, 사람의 본성 실질과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어떻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이 말로 개괄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이 말을 자주 말하지만 이 말의 실제 함의를 전혀 모른다. ‘하나님의 원수’, 이 말에는 그 실질적인 면이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 것이다. 우선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의 최초의 소망을 놓고 본다면 어느 누가 목적과 존심과 야심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설사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보았을지라도 여전히 이런 존심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믿는 최종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생명 경력 중에서 사람은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렸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뭘 주셨는가? 내가 이 기간에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세어보고 점검해봐야지. 내가 이 한동안 *화비한 것이 적지 않고 많은 길을 뛰어다니고 많은 고통도 받았는데, 나의 이 동안의 표현에 대해 하나님께 무슨 약속이 없을까? 하나님이 나의 선행을 기념하실까? 나의 결국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복을 받을 수 있을까? ……’ 각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수시로 항상 이렇게 따져보고 존심과 야심을 품고 거래도 품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즉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따지고 또한 끊임없이 자기의 결국을 위해 하나님과 ‘이치에 근거하여 강력히 논쟁’하면서 하나님께 구두 자백을 얻어내려 하고 하나님이 도대체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지를 본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시종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 점점 압박하면서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시련이 임하거나 환경이 임하면 늘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나태해지며 하나님에 대해 원망이 가득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서부터 하나님을 보물단지, 만능상자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최대 채권자로 여기며, 하나님 손에서 축복과 약속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권리와 직책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고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터득이자 역시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이다. 사람의 본성 실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 추구에까지 어느 한가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아예 관련시킬 수가 없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경배하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 사람의 이런 정형을 놓고 말하면 사람의 실질이 분명히 보이는데, 이 실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악랄하고 음험하고 궤사하며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아주 봉해져있고 전혀 하나님께 맡겨지지 않아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고 사람의 경배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든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공급하든지 사람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전혀 무관심하며, 마음을 시종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장악하려 하고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그 뜻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사람들의 상황이다. 계속해서 욥, 이 사람을 보자. 우선 그에게 하나님과의 거래가 있었는지 보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데에 다른 의도가 있었는가? 그때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 이후의 결국에 관한 일을 말씀한 적이 있는가? 그때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도 결국에 관한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욥은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사람은 그와 비교성(比較性)이 있는가? 양자는 차이가 매우 크고,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많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전혀 거래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사치한 욕망과 요구도 없었으며, 도리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여겼다. 이것은 그가 다년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켜오면서 보고 얻은 성과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라는 이런 성과도 얻었다. 이 두 마디 말은 그가 생활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가 있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이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두 마디 말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그의 가장 유력한 무기이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선 초석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말하면 욥, 이 사람은 너희의 마음속에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너희는 사탄에게서 오는 시험을 겪는 것이 두려운가, 두렵지 않은가? 너희는 하나님께 욥을 시련한 것 같이 너희를 시련해달라고 기도할 심지(心志)가 있는가? 믿건대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감히 이렇게 기도하지 못할 것이다. 보다시피, 너희의 믿음이 가련하게 작아 욥에 비하면 너희의 믿음은 그야말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너희가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설 수 없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길 수 없는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겠는가? 욥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의를 깨닫고 요해한 후 현재 너희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신심이 있는가?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할 심지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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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