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제 3 부
자식 세대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한 가지는 미성년 자녀에 대한 기대이고 또 한 가지는 성인 자녀에 대한 기대이다. 성인 자녀에 대한 기대에 관해서는 지난 시간에 간단히 교제한 바 있다.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하나님, 지난번에는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에게 순조로운 직장 생활을 하고, 행복하고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며, 사업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는 내용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간략하게 교제하였다. 부모가 자녀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면, 성인이 된 자녀는 일이나 사업, 결혼, 가정, 그리고 자신의 독립적인 삶, 나아가 다음 세대에 대한 양육 등을 직면하게 된다. 또 그들은 부모를 떠나 독립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기에 부모도 그들의 신체 건강을 돌봐 주거나 그들의 삶, 일, 결혼, 가정 등에 개입할 책임이 없다. 물론, 정과 가족애에서 출발하여 형식적으로 돌봐 주거나 조언을 해 주거나 인생 선배로서 의견과 도움을 주거나 잠시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요컨대, 자녀가 성인이 되면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내 눈에는 성인 자녀에게 거는 부모의 기대가 쓸데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쓸데없는 것이겠느냐?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든, 어떤 결혼을 하고 어떤 가정을 꾸리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업을 하기를 바라든, 자식의 삶이 풍족하든 궁핍하든, 부모의 기대가 과연 무엇이든 그것은 그저 일종의 기대일 뿐, 자녀는 성인으로서 자기 삶은 스스로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근원적으로 볼 때, 자녀가 어떤 운명을 지닐지, 궁핍할지 부유할지 등은 전부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부모는 그런 일을 돌볼 책임도, 의무도 없으며, 개입할 권리도 없다. 그러므로 부모의 기대 또한 가족으로서 갖는 좋은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 좋은 바람은 부모의 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식이 가난하고 평생 혼자 살거나 이혼하거나 가정이 파탄 나거나 직업적으로 안 풀리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아무도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으며, 기대를 하려면 반드시 좋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 부모의 기대가 자녀의 현재 삶과 충돌한다면, 또는 자녀의 현재 삶이 부모의 기대에 어긋난다면 부모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제할 문제이다. 부모로서 성인 자녀에게 지녀야 할 태도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축복하고,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밖에 자녀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떤 인생과 운명을 맞이할지 등은 그저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어떤 부모도 이 모든 것을 바꿔 놓거나 주관할 수 없다. 비록 네가 낳고 키운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예전에 말했듯이 부모는 자녀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의 육을 낳아 주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 주었지만, 자녀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는 부모가 선사해 주거나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부모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식이 잘되게 해 주고 싶다고 해서 반드시 잘되겠느냐? 자식이 역경이나 불운을 맞이하거나 갖가지 나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서 그런 나쁜 일을 겪지 않겠느냐? 자식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그것은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필요와 기대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무엇을 알려 주느냐? 자녀가 장성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독립적인 사상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 독립적인 처신의 원칙과 인생관을 지녀 부모에게 영향받거나 좌우되지 않고, 속박받거나 통제받지 않게 된 이상, 그는 정말 성인이 된 것이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부모가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을 놓는다’는 말은 자식이 독립적으로 나가서 경험을 쌓게 하고 자신의 인생길을 걷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느냐?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이다. 즉, 자녀에게 더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찾아야지. 이런 직업에 종사해야 해.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건 리스크가 너무 커!”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늘 자녀의 삶이나 일, 결혼, 가정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시야 안에 두려 하며, 모르는 일이나 통제 불가능한 일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하고 걱정한다. ‘우리 아들이 그 일을 꼼꼼히 처리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소송에 휘말리는 것 아닐까? 소송을 하게 된다면 나한테 돈도 없는데! 돈도 없이 송사를 치렀다가 아들이 감옥에 가지는 않을까? 나쁜 사람에게 모함을 당해서 8~10년간 수감되는 건 아닐까?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며느리가 도망가지는 않을까? 손주는 누가 키우지?’라며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우리 딸은 직장 생활이 순조롭지 못해. 항상 괴롭힘을 당하지. 만약 상사가 못되게 굴면 어떡하지? 다른 일자리를 찾아 줘야 하는 것 아닐까? 뒤로 손을 좀 쓰고 인맥을 이용하고 돈이라도 좀 써서 정부 부처의 일자리를 찾아 주어 공무원이 되면 날마다 업무도 수월할 거야. 월급은 많지 않아도 최소한 서러울 일은 없겠지. 어릴 때부터 회초리도 한 번 안 들고 항상 공주처럼 키운 아이가 지금 남한테 괴롭힘을 당하다니, 이를 어째?’ 걱정스러운 마음에 밥도 못 넘기고 잠도 못 자서 입술에는 물집이 생기기까지 한다.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걱정하고 마음을 쓰며, 어떤 일이든 개입하고 대신하려 든다. 자녀가 병에 걸리거나 어려움에 부딪히면 부모는 가슴을 졸이며 괴로워한다. “난 네가 잘되길 바랄 뿐인데 어째서 그 모양이니? 나는 네가 잘 풀렸으면 한단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잘 풀려서 출세하길 바라지 재수 없이 사기당하거나 모함당해서 송사에 휘말리는 건 바라지 않아!” 어떤 자녀는 집을 사면서 30년, 50년짜리 대출을 받는데, 부모는 그것을 보며 걱정한다. ‘그 대출은 언제 다 갚지? 그게 바로 하우스푸어 아냐? 우리 세대는 집을 살 때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공공주택에 살면서 매달 월세나 좀 내면 됐으니까. 정말 편했지. 요즘 젊은 세대는 너무 힘들겠어. 사는 게 쉽지가 않다니까. 집 살 때도 대출을 받아야 하고 말이야. 좋은 집에 살아도 매일 너무 바쁘게 일해야 해서 힘들잖아. 늘 밤새워 가며 야근하고, 제때 먹고 자지도 못하고. 항상 파는 음식만 먹으니 위가 망가지고 몸도 엉망이 되지. 내가 가서 밥이라도 해 주고 청소나 설거지라도 좀 해 줘야겠어. 청소할 시간도 없어서 애들 생활이 엉망이 되잖아. 이 어미는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가정부 역할이라도 해 줘야지. 가정부를 들이려면 돈을 써야 하고, 또 믿을 만한 사람 찾기도 힘들잖아. 내가 무보수로 가정부가 되어 줘야겠어.’ 그렇게 식모가 되어 매일 자식을 위해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때맞춰 밥을 해 놓으며, 각종 식자재를 사 놓는 등 책임을 계속 이어간다. 식모나 하인이 된 부모는 집에 돌아온 자식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눈치 보며 말을 해야 하고 자식이 기분이 좋으면 덩달아 자기도 좋아한다. 자녀가 좋아하면 자기도 좋아하고 자녀가 걱정하면 자기도 걱정하는 이런 삶이 가치가 있겠느냐? 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운명을 책임져 주고 싶다고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자녀가 명리와 세상의 향락을 추구하면서 어떤 고생을 하든 그것은 다 그들 스스로가 원한 것이다. 게다가 다 큰 성인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떤 고생을 한들 뭐가 문제겠느냐? 누리는 만큼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면, 자녀가 무엇을 누리고 싶어 하든 부모가 대신 지불해 주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고 해도 자식이 좋은 것을 누리고 싶다면 그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은 자식 스스로 견뎌야지 부모가 그것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부모가 늘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어 하고, 자녀가 받는 고통을 대신해 주려고 하며, 기꺼이 그들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면 이는 불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그럴 필요는 없다. 이는 이미 부모의 의무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요 원인은, 네가 자녀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하든 그들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도 없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생존하면서 명리를 추구하든, 인생의 바른길을 걷든 누구나 성인으로서 자신의 바람과 이상을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해야지 다른 누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설령 부모라고 할지라도,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너를 위해 감당해 줄 의무가 없고, 어떤 고통도 분담해 줄 의무가 없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기에 자녀를 위해 아무리 많은 일을 할지라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헛일이니 그런 행동 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비록 부모가 늙고, 이미 자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고 해도, 부모가 행한 모든 일이 자녀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부모로서의 존엄성이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추구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여생의 에너지와 세월을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에 쏟아부어야지 자녀를 위해 시간과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네 생명은 자녀에게 속하지 않으며, 자녀의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모해서도 안 된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맡긴 본분과 부탁, 그리고 너라는 피조물이 완수해야 할 사명에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 생명이 지닌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존엄을 내팽개치고 자녀의 노예가 되어 자녀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든 해 준다면 이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며, 하나님께 기억될 수도 없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서 이런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너라는 사람은 더없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준 생명과 세월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네 생명과 세월을 하나님이 준 본분에 쏟지 않고 오직 네 육과 감정을 위해 쏟는다면 너라는 사람은 살아갈 필요가 없으며, 그 삶은 가치가 없으니 너는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이 준 생명을 누릴 자격도,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자격도 없다. 하나님이 네게 자녀를 준 것은 자녀를 키우는 과정을 즐기며, 그 가운데서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는 인생 경험과 체험을 얻으라는 것이고, 인생에서 특수하고 평범치 않은 경험을 느끼는 한편 대를 이어 나가라는 것이다. 물론, 부모의 신분으로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네게 정해 놓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이자 부모로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는 자녀를 키우는 특별한 과정을 체험하는 한편,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의무를 다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었다면 그들이 출세하든, 평범하고 단순한 일반인이 되든 너와는 무관하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 네가 결정하는 것도, 네가 선택하는 것도, 나아가 네가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라면 너는 자녀의 삶과 생존에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자녀가 어떤 생활 습관과 생활 규칙, 생활 태도를 갖고 있든, 어떤 생존 방식과 인생관, 세상에 대한 태도를 지니고 있든 그것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지 너와는 무관하다. 네게는 그것을 바로잡거나 자녀 대신 고통을 받거나 자녀가 매일 행복하게 살도록 지켜 줄 의무가 없다. 그런 것은 다 불필요한 행동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므로 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릴지, 어떤 가정과 결혼, 자녀를 갖게 될지, 이 사회와 인생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자녀 스스로도 예측하거나 바꿀 수 없으며, 부모는 더더욱 바꿀 능력이 없다. 그러니 자녀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부모가 도와줄 능력이 있다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에서 도와주되, 그럴 능력이 없다면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피조물의 입장에서 그 일을 대하고, 자녀를 자신과 같은 선상에 있는 피조물로 대하는 것이 좋다. 네가 겪은 고난과 인생을 그들도 겪어야 하고, 네가 미성년 자녀를 양육한 과정을 그들도 겪어야 한다. 또 네가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겪은 갖가지 우여곡절, 사기와 기만, 감정적 갈등, 인간사의 갈등 등을 그들도 겪어야 한다. 자녀 또한 너처럼 패괴된 인간이며, 이 사악한 흐름에 휩쓸리고, 사탄에게 패괴되었다. 네가 그러하듯 자녀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 그러므로 자녀가 어떤 고난도 겪지 않고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것은 허황된 망상이자 어리석은 생각이다. 매의 날개가 아무리 커도 새끼 매를 평생 지켜 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새끼 매가 홀로 날아가야 할 때가 온다. 새끼 매가 홀로 날아갈 때, 그것이 날아올라 향하려는 하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자녀가 성인이 된 다음, 부모의 가장 이성적인 태도는 손을 놓아 자녀가 스스로 인생을 체험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인생의 각종 문제를 혼자 직면하고 처리하고 해결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자녀가 도움을 청할 때 네가 능력과 조건이 된다면 당연히 손을 뻗어 필요한 도움을 주어도 된다. 하지만 그 전제는, 네가 자녀에게 어떤 도움을 주든, 금전적인 도움이든 정신적인 도움이든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어떤 실질적인 문제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녀의 인생길은 그들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 너는 자녀 대신 어떤 일도, 어떤 결과도 책임질 의무가 없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다.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 알았다면, 성인 자녀에게 거는 기대 또한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일부 어리석은 부모들은 인생과 운명을 밝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해 자녀를 대하는 일에서 쉽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예를 들어, 자녀가 독립한 후 특수한 일을 만나거나 고난과 큰 사고가 닥친 경우가 그렇다. 어떤 이는 병으로 고통받고, 어떤 이는 소송에 휘말리며, 어떤 이는 이혼하고, 어떤 이는 사기당한다. 또 어떤 이는 납치당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거나 구타당해 죽음에 직면하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자녀는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한다. 이렇게 특수하고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대다수의 부모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부모의 신분을 지닌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하겠느냐? 이런 일을 전해 듣고 남의 일처럼 행동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하룻밤 새에 머리칼이 하얗게 세고,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낮에는 밥을 넘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 싸맬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하염없이 울어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눈물마저 말라 버린 채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봐서 자기 자식을 지켜 달라고, 아이에게 은총과 축복을 내려 달라고,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어 아이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부모로서 인성적인 연약함과 유약함, 그리고 자녀에 대한 정이 전부 드러난다. 또 무엇이 드러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패역이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자식에게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게 해 달라고, 설령 재앙이 닥치더라도 그 아이가 죽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악인에게 해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병세가 심해지지 않고 호전되게 해 달라고 구하고 기도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냐? (하나님, 그의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며, 또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친 것에 몹시 불만을 품고, 제 자식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게 해야 했다며 하나님을 원망한다. 불만 속에 원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에게 생각을 바꾸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자기 자식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평안해지게 해 달라고 구한다. 병에 걸렸다면 낫고, 소송에 휘말렸다면 그 상황이 마무리되고, 화를 당했다면 화근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즉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롭게 해 달라고 말이다. 이런 기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패역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도 좋지도 않으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네 자식이고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이 닥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다른 사람의 자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너를 봐서라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해 줘야 한다고 말이다. 또 만약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지 않는다면 너는 괴로워하고 울고 소란을 피우며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거라고, 그가 죽는다면 너도 못 산다고 말이다. 이런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다. 개처럼 밥때가 되면 밥을 줘야 하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소란을 피우며 밥그릇을 물고 땅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내니 말이 안 통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개는 가끔 야성이 튀어나온다. 며칠 동안 고기를 먹이다가 하루 고기를 주지 않으면, 먹이를 바닥에 엎거나 밥그릇을 문 채 땅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그 뜻은 고기를 먹고 싶으며, 고기를 먹는 건 당연한 일이고, 고기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도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자녀에게 일이 좀 생겼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요구하며 항의하니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짐승은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이 말하는 소위 이치나 인정 같은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짐승이 억지를 부리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항의한다면 이성이 있겠느냐? 이런 자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만약 짐승이 그런다면 사람은 “이 녀석, 성깔 좀 있네. 항의할 줄도 알고 꽤 똑똑하단 말이야. 아무래도 이 녀석을 얕보면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하며 재미있다고, 단순하지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물이 성깔을 부리면 사람은 그 동물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항의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게 평가하겠느냐? “이 녀석, 이런 요구도 할 줄 알고, 대단하네!”라고 하면서 높이 평가하겠느냐?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이는 패역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사람이 모르겠느냐?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럼 왜 아직도 그렇게 금식 기도를 하고, 뻔뻔스럽게도 네 자식을 지키고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냐? 또 감히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겨루며,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계속 금식하고 기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금식의 의미는 무엇이냐? 단식이다. 단식의 또 다른 뜻은 생떼를 쓰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생떼를 쓸 때는 발을 구르면서 “아이고, 내 자식이 죽으면 나도 안 살 거야. 살아갈 수가 없다고!”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고 더없이 우아하게 “하나님, 제 아이를 지켜 주시고 그 아이의 병이 낫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당신은 사람을 구하는 최고의 의사이시며, 당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를 돌보고 지켜 주십시오. 당신의 영은 어디에나 존재하지요. 당신은 공의로운 분,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당신은 사람을 걱정하고 아끼십니다.”라고 말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겠느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럴 때 해야 할 말도 아니다. 네 뜻은, 만약 하나님이 네 자식을 구하거나 지켜 주지 않고 네 소원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이 아니며, 사랑이 없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는 생떼를 쓰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이 하나님을 크게 높이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생떼를 쓰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며,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하나님에게 감히 이렇게 따지고 항의하며 횡포를 부리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아이가 뭐가 그리 특별하냐? 하나님이 누구의 운명을 지배하고 주재하든 너와 관계가 없으면 괜찮고, 네 아이의 운명을 주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으며, 누구도 하나님 손의 주재와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왜 네 아이만 예외란 말이냐? 하나님의 주재에는 그의 정함과 계획이 있다. 네가 바꾸고 싶다고 그게 되겠느냐? (안 됩니다.) 네가 바꾸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어리석은 일이나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르지 마라. 하나님의 행사에는 다 전생의 인과가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항한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네 자녀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감정일 뿐 정의도, 긍휼도, 선량함도 아니다. 그저 감정의 작용에 불과하다. 감정은 이기적인 마음을 대변한다. 너의 그 알량한 감정은 공개 석상에 내놓을 수 없고, 너 자신도 그것이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일로 하나님을 협박하려고 한다. 혹자는 “제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 아이가 죽으면 저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네게 정말 죽을 용기가 있느냐? 그럼 어디 한번 죽어 보아라! 이런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겠느냐? 설마 자식이 죽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냐?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분이나 지위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다. 네가 믿어서 하나님인 것도, 네가 믿지 않아서 하나님이 아닌 것도 아니다. 설령 전 인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은 바뀌지 않으며, 하나님의 지위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전 인류의 운명과 우주 세계를 주재하는 그분이다. 그러니 네가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네가 믿는다면 특별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네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에 대한 정이 있어 내려놓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에게 어떤 일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아니면 도덕과 인성에 부합하겠느냐? 어떤 측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도덕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너는 자녀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비호하는 것이며, 감정에 얽매인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자식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한다. 네가 네 생명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하고 하나님이 네게 준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자식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니 그럼 자식과 함께 죽거라. 그가 병에 걸리면 너도 얼른 그 병에 옮아서 함께 죽거나 밧줄로 목을 매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쉽지 않겠느냐? 네가 죽은 후에도 너와 네 자식이 한 부류겠느냐? 여전히 혈연관계가 있겠느냐? 여전히 정이 있겠느냐?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면 달라진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일을 바라본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어떤 성질인지를 무엇에 근거해 판단하느냐? 사람의 사상에 근거해 판단한다. 오직 눈으로만 일을 바라보면, 이 물질세계를 꿰뚫어 볼 수 없고 영계를 볼 수도 없다. 사람이 머리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에서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사람은 나와 가장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사람이지. 언제라도 내 아이는 나와 가장 가까운 거야. 나도 내 아이를 가장 아낄 거고.’ 이 정도의 경지와 구조에 머물러 있으며, 사상적 경지가 이렇게 ‘광활’하다. 그 말이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합니다.) 너무도 유치하다! 네 자식이 이번 생은 너와 혈연관계가 있다. 그럼 지난 생은 어땠겠느냐? 그때는 너와 어떤 관계였겠느냐? 그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가겠느냐? 그가 죽고 육의 목숨이 끊어져 영혼이 떠나면 너와는 완전히 안녕을 고할 것이고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다른 세계로 돌아갈 때, 너 혼자 울고 그리워하며 심적으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이고, 우리 아이가 떠났구나.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의식하겠느냐? 그는 너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며, 티끌만큼도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육을 떠난 그는 그 즉시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제삼자가 된다. 그는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저 노인네들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우는 걸까? 아, 저 육 때문에 우나 보네. 내가 방금 저 육에서 빠져나왔지. 난 이제 그렇게 무겁지 않고, 병으로 고통스럽지도 않아. 해방된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죽은 후 육에서 나와 다른 세계에 가서 계속 생존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니 너와는 관계가 없어진다. 너는 이곳에서 크게 울고 그리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인연이 닿으면 그는 너의 직장 동료나 동향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네게서 아주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 같은 세상에 있을지라도 서로 상관이 없는 둘이 될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특수한 상황에서, 혹은 특수한 방법으로 그의 전생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를 바라보는 너와 너를 바라보는 그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지난 생에 네 자식이었을지라도 너는 그에게 아무 감정이 없으며,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죽은 그 아이일 뿐이다. 그 역시 너에게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다른 부모와 가정, 성씨가 있고, 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리워한다.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이냐? 한때 너와 혈연관계가 있던 그 육, 그 이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네 머릿속에, 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하나의 장면이나 형체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는 없다. 그는 다시 태어나 사람이 되든, 아니면 다른 생명체가 되든 너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부모들이 “아이가 죽으면 저도 못 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다! 그의 수명이 끝났는데, 네가 무엇 때문에 못 산다는 것이냐? 어찌 그리 무책임한 말을 한단 말이냐? 그의 수명이 다 됐기에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둔 것이다. 그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만약 네게 또 다른 임무가 있다면 하나님이 네 목숨을 거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너는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가게 한 이상 너는 죽을 수 없다.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혹은 주변의 어떤 가족이나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든 사람은 감정을 이렇게 생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혈연으로 얽혀 있다고 한다면,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책임을 다하는 것 외에 어떤 의무도 없고, 무언가 변화시킬 능력도 없다. 그러니 ‘자식이 죽어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낸다면 그 부모도 못 산다’는 부모의 말은 무책임하다. 만약 정말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간다면, 그것은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날이 그만큼이어서 가야 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모는 죽지 않았으니 잘 살아가야 한다. 물론, 인성 측면에서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남은 세월을 전부 가 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데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일을 대할 때,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혈연관계에 대해 밝히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 사이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육적으로도 혈연으로도 얽혀 있지 않다. 그저 독립된 두 생명체일 뿐이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불행히 병고가 임해도, 혹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그런 일을 올바로 마주해야지 자식의 불행이나 죽음 때문에 자신에게 남은 생존의 시간을 버려서는 안 되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나 완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버려서도 안 된다. 이 일은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네게 올바른 사상 관점이 있고, 이 일을 밝히 알 수 있다면 절망과 비통, 그리움 속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그 일은 죽을 때까지 네 남은 생을 옭아맬 것이다. 하지만 네가 밝히 안다면, 그 시간은 무한한 게 아니라 끝이 있을 것이며, 네 남은 생과 내내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밝히 알 수 있다면 일부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너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네가 자식과의 혈연관계를 밝히 알지 못한다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는 너에게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부모는 없다. 어떤 부모든 자식을 먼저 보낼 때, 혹은 자식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남은 인생의 에너지를 쏟아 그리워하고 걱정하고 고통에 빠질 것이다. 아무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마음에 새겨지는 상처이자 낙인이다. 육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감정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기에 그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네가 자녀와의 감정을 밝히 알 수 있다면, 그것은 한결 옅어질 것이며, 자연히 네 고통도 한결 줄어들 것이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많이 줄어들 것이다. 밝히 알지 못한다면 그 일은 네게 잔인한 것이 되겠지만, 밝히 알게 된다면 그 일은 네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 특수한 체험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인생과 혈육의 정, 인성을 더 깊이 체험하고 이해하게 할 것이며, 또 네 인생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물론, 누구도 이 풍부한 경험을 바라거나 마주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잔인하게 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네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그 전통적이고 진부하고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감정과 혈연관계를 올바로 직면하며, 자녀의 죽음을 똑바로 대해야 한다. 이 일을 밝히 알게 된다면 완전히 내려놓게 될 것이고, 그 일로 손상을 입지 않게 될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베풀어 주신 자산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사유 재산인 거죠.”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떤 부모는 이 말을 듣고 “그건 맞는 말입니다. 다른 재산은 전부 자기 것이 아니어도 자식만은 자기 피붙이이니 가장 가까운 존재죠.”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틀립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너희의 이치를 말해 보아라. 사람이 자식을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 적절하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적절하지 않으냐? (사유 재산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하는 물건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육적인 관계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결을 주신 거죠. 만약 자식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부모인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서 있는 위치와 입장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조금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육적인 관계를 제외하면 자식과 부모의 생명은 독립되어 있다. 그들 간에는 종속 관계도, 상하 관계도 없으며, 당연히 소유와 피소유의 관계는 더더욱 없다. 그들 각자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들 각자의 운명 역시 하나님이 주재한다. 그저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며 자식보다 나이가 많고, 자식은 부모보다 나이가 어린 것뿐이다. 사람은 이런 관계, 이 표면적인 현상에 근거하여 자녀를 부모의 부속품이나 사유 재산으로 여긴다. 이는 근원적으로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육적으로, 감정적으로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 논법과 입장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부속품도, 사유 재산도 아닌 독립된 개체인 이상,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어떤 기대를 걸든 그것은 생각에만 머무를 뿐 현실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현실화하거나 약속을 지키거나 대가를 치르거나 희생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성인 자녀가 독립적인 삶과 생활 능력을 갖게 되면, 내려놓기를 택해야 한다.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식을 존중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자식에게 책임감을 보이는 것이다. 늘 자녀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통제하거나 자녀의 삶과 생존에 간섭하고 관여하려고 한다면, 이는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유치한 행동 방식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든 그것은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고, 현실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부모라면 그 모든 현실적, 비현실적 기대를 내려놓고 올바른 시선과 입장으로 자녀와의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올바른 시선과 입장으로 성인 자녀가 행하는 모든 일, 또는 그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원칙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반면, 이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서 혈육 간의 정이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그 정은 하늘보다 크다고 여긴다면, 마치 네가 자녀의 운명을 주관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두고 보아라. 분명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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