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제 2 부

방금 우리는 가정이 늘 사람에게 아주 모순되고 난감하게 하는 것에 대해 교제했다. 완전히 내려놓자니 양심에 참소를 받아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고, 내려놓지 않고 몸과 마음 전부를 가정에 바쳐 가정과 하나가 되자니 종종 가족과의 관점 차이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사람은 가정을 대할 때 무척 어렵다고 느낀다. 가족들과 완벽하게 맞을 수도 없고, 가족들을 완벽하게 끊어 낼 수도 없다. 오늘 우리는 사람이 가정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교제해 보도록 하겠다. 이 주제는 가정에서 기인한 짐과 연결된다. 바로 가정을 내려놓으라는 내용에 포함된 주제 중 세 번째인 가정이 지운 짐을 내려놓기로, 이는 중요한 주제이다. 가정이 지운 짐과 관련된 내용 중에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이는 사람의 책임, 의무 그리고 효도 등등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정이 지운 짐은 사람이 가정을 위해 다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효도와 관련이 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있어 한편으로는 마땅히 다해야 하는 책임이자 의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환경하에서 일부 특수한 케이스의 사람에게는 그것이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그 방해 요소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짐이다. 가정이 지운 짐을 두 측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겠다. 한 측면은 부모의 기대이다. 부모 혹은 집안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저마다 조금씩 다른, 크고 작은 기대를 품고 있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처신하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열등생이 아닌 우등생, 수재가 되어 선생님과 동급생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시험 성적은 늘 80점 이상이기를 바라는데 만약 60점을 받으면 때리고, 60점도 못 받으면 벽을 보고 반성하게 하거나 벌로 오래 세워 두거나 밥을 안 주거나 잠을 안 재우거나 TV를 못 보게 하거나 컴퓨터를 못 쓰게 하거나 사 주기로 했던 좋은 옷과 장난감을 안 사 준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갖가지 기대를 품고, 자녀에게 커다란 희망을 건다. 다들 자녀가 굵직한 인물이 되고 출세 가도를 달려 조상과 가문을 빛내기를 바란다. 자기 자녀가 나중에 거지, 농사꾼이 되거나 심하게는 강도, 도적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자기 자녀가 사회에 나가 남의 아랫사람 노릇을 하거나 고물을 줍거나 노점상을 하거나 영세 상인이 되거나, 혹은 남에게 무시당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부모의 이러한 기대가 실현될 수 있든 없든 아무튼 부모는 자녀에게 갖가지 기대를 품는다. 그들의 기대는 자기가 좋다고 여기거나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그러한 추구를 자녀에게 의탁하고, 자녀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이 부모의 바람을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이러한 바람은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무엇으로 작용하겠느냐? (압박감입니다.) 압박감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느냐? (짐이 됩니다.) 압박감이 되고 일종의 족쇄가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므로 자신들의 기대에 맞추어서 자녀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교육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을 위해 자녀에게 투자를 하거나 그 어떤 대가든 치른다. 자녀가 학교에서 수재이자 뛰어난 학생으로서 시험을 볼 때마다 90점 이상을 받아 1등을 하고, 아무리 못해도 5등 안에는 들기를 바라는 부모를 예로 들겠다. 부모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아이가 그 목표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도 어느 정도 희생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목표를 실현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복습하고 교과서를 외우면 자기들도 일찍 일어나 함께하고, 더운 날에는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 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인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에게 콩국, 꽈배기 튀김, 달걀을 준비해 준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아이에게 긴 꽈배기 하나와 달걀 두 개를 주면서 먹고 100점 받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못 먹겠어요. 달걀은 하나만 먹을래요.”라고 하면 “뭘 모르는구나. 달걀을 하나만 먹으면 10점밖에 못 받으니까 하나 더 먹어. 힘내서 이 달걀까지 먹으면 100점 받을 거야.”라고 한다. 아이가 “방금 일어나서 안 들어간단 말이에요.”라고 하면 “안 돼. 꼭 먹어야 해! 착하지, 엄마 말 들어.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먹으렴.”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고민하다가 이런다.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다 나를 위해서 저러시는 거니까 먹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달걀이지만 사실상 삼키는 것은 무엇이냐? 압박감, 달갑지 않은 마음이다. 음식이 좋고 어머니의 기대가 아주 크니 인성과 양심상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에 반항해야 하고 그러한 방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화를 낼 것이고, 너를 때리고 야단치거나 심지어 몹쓸 말을 퍼부을 수도 있다.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다. “못나게 구는 것 좀 봐. 고작 달걀 하나 먹기가 그렇게 힘들어서야. 꽈배기 하나랑 달걀 두 개를 먹으면 100점 아니겠니?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도 못 먹겠다니. 못 먹겠으면 앞으로는 나가서 빌어먹을 거야. 마음대로 해라!” 정말로 들어가지 않는데 부모가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먹고 나서 토하는 아이도 있다. 그렇게 토하면 부모는 더 화를 낸다. 아이는 동정과 이해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꾸짖음까지 당해야 한다. 꾸짖음을 당하면서 더욱더 부모님에게 미안해지고 더욱더 자책하게 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아이가 사는 것이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다 토한 다음에도 계속 토하는 척하면서 화장실에서 혼자 몰래 운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얼른 눈물을 닦는다. 엄마에게 눈물을 들켜서는 안 된다. 어째서냐? 엄마가 봤다가는 야단맞을 테고, 더 나아가 몹쓸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이런 한심한 녀석을 봤나, 울기는 왜 울어! 머저리 같은 놈아, 이렇게 잘 차려 줘도 못 먹겠다니 그럼 뭐가 먹고 싶은 건데? 네가 굶어 봐야 먹겠다고 하지. 너는 고생할 팔자야!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시험도 열심히 안 볼 거면 앞으로는 빌어먹을 거야!” 어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교육 같기도 하고 꾸짖음 같기도 하지만 네가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부모의 기대와 부모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하더라도 너는 눈물을 머금은 채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 삼켜야 한다.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도 참고 먹어야 하고, 구역질이 나더라도 먹어야 한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기가 좋으냐, 좋지 않으냐? (좋지 않습니다.) 어째서 좋지 않으냐? 너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느냐? (시험을 반드시 잘 봐야 하고 나중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 하고, 꼭 어머니의 사랑과 고생스레 치른 대가를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하고, 꼭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고, 너를 위해 전부를 바쳤으며, 생명으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치른 그런 대가와 그들의 교육, 그들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전부 무엇이 되느냐? 네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 되는 동시에 네 짐이 된다. 그 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부모가 그러는 것이 본능 때문이든, 사랑 때문이든, 아니면 이 사회에서 필연적인 것이든 아무튼 부모는 그러한 방식으로 너를 교육하고, 대하고, 심지어는 네게 갖가지 생각을 주입한다. 결국 네 마음이 얻는 것은 자유, 해방, 위로, 기쁨이 아니다. 그들은 너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압박감, 공포, 양심의 가책, 불안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멍에와 결박이 있습니다.) 멍에와 결박이다. 그리고 바로 부모의 이러한 기대 속에서 너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기대를 위해 살아간다.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실망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매일 열심히, 꾸준하게 모든 과목을 공부하고 그들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한다. TV를 보지 말라고 하면 너는 시키는 대로 TV를 보지 않는다. 사실 너무 보고 싶으면서도 어째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냐? (부모가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들었다가 정말로 성적이 떨어져서 좋은 대학에 못 갈까 봐 두려운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부모의 단속, 꾸짖음, 압제가 없으면 앞길이 도대체 어떨지 모를 것 같다. 너는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엄두도, 그들이 채운 족쇄에서 벗어날 엄두도 못 낸다. 그저 그들이 네게 각종 규칙을 정해 주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뿐,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심과 인성상 그들을 거역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너는 자식으로서 응당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네가 잘되기를 바라서 하는 것이고 너의 장래와 너의 앞길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게 각종 규칙을 정해 주면 너는 그저 묵묵히 따른다. 속으로는 너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복종한다. 그들이 TV를 못 보게 하면, 학교 공부와 관계없는 책을 못 보게 하면 너는 보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급우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면 너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그들이 몇 시에 일어나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에 일어난다. 그들이 몇 시에 쉬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에 쉰다. 그들이 네게 얼마만큼 공부하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만큼 공부한다. 그들이 네게 책을 얼마만큼 읽으라고 하고 교과 외 기능을 얼마만큼 배우라고 할 때 그들이 돈을 들여서 너를 배우게 하는 한, 너는 그들이 마음대로 지배하고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둔다. 특히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특별한 기대를 건다. 자녀가 그들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그들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더더욱 바란다. 무용가가 되고 싶었던 부모를 예로 들겠다. 본인 성장기의 시대적 배경 또는 당시의 집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는 결국 무용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는 그 꿈을 네게 투영한다. 기본적으로 네게 학교에서 반드시 상위권을 차지해야 하고 명문대에 붙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거기에 더하여 너를 무용 학원에 등록시켜 학과목 외에 여러 가지 무용을 배우게 한다.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해 무용 학원 내의 에이스가 되라고 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명문대에도 붙고 무용가도 되라고 한다.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용가가 되거나 명문대에 들어가 석사,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길뿐이다. 그들의 기대는 한편으로는 네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들어간 다음 두각을 나타내어 앞길이 유망하고 찬란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부 혹은 미래의 직업 측면에서 너는 동시에 두 개의 짐을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들이 너를 위해서 치른 모든 대가에 보답하며, 훗날에 두각을 나타내어 그들을 호강시켜 줘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그들의 꿈을 대신 이루어 줘야 한다. 힘들지 않겠느냐? (힘듭니다.) 어느 쪽 짐이든 네게는 벅차다. 어느 쪽 짐이든 모두 너를 숨 막히게 짓누른다. 특히 지금처럼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시대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갖가지 요구는 말 그대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고 잔인무도하다. 그야말로 생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뭐라고 하느냐?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이방인들이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똑똑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스라이팅이라 하고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멍에, 짐이라고 합니다.) 짐이라고 한다. 짐이라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별도의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따로 하나를 더 짊어진 것이다. 너라는 사람과 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너의 몸, 마음, 영이 갖추고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지 너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부모는 네 학업과 네가 종사할 직업 측면에서 네게 여러 기대를 품는 동시에 네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대가를 치르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한편으로는 네가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너를 향한 부모의 기대가 정당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부모의 그러한 행동과 관점, 태도, 방식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보이지 않는 멍에가 된다. 그들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든, 네 앞길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든, 아니면 너를 잘살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든, 그들이 어떤 구실을 대든 간에 그러한 요구의 목표와 요구의 방식, 그리고 그들 생각의 출발점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짐이 된다. 그것은 인성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성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 짐은 사람의 인성을 왜곡시키고, 비정상적으로 만들고,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인성에 대한 일종의 박해이자 상해이고 압제이다. 그 결과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며, 심지어는 사람에게 평생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부모의 신분으로 너에게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온갖 일들, 혹은 인성 본능에 맞지 않고 인성 본능을 초월한 일들을 시킨다. 예를 들면, 성장기에 아이를 매일 5~6시간만 재운다. 밤 11시가 되기 전에는 못 자게 하고, 아침 5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놀이 활동은 하나도 없고 일요일에도 못 쉬게 한다. 반드시 숙제를 얼마만큼 해야 하고 교과 외 도서를 얼마만큼 읽어야 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외국어 한 가지를 배우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과정 외에 꼭 추가로 다른 기능과 지식을 어느 정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익히지 않는다면 너는 좋은 아이, 착한 아이가 아니고 열심히 하는 아이, 철든 아이가 아니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며, 머저리이고, 바보이다. 부모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전제하에 네게서 잠잘 자유를 빼앗고, 네 어린 시절의 자유를 빼앗고, 네 어린 시절의 즐거운 시간을 빼앗는 동시에 네가 한 명의 미성년자로서 누려야 할 갖가지 권리도 빼앗았다. 네 몸에 휴식이 필요할 때마저도, 예를 들어 7~8시간은 쉬어야 몸이 겨우 회복될 상황에서도 그들은 너를 고작 5~6시간만 쉬게 했다. 혹은 어쩌다가 7~8시간을 잤더라도 너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부모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거나 아니면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학교 갈 필요 없으니까 집에서 잠이나 자! 자는 게 그렇게 좋으면 평생 집에서 자라. 학교 다니기 싫어하니 나중에 거지 돼서 구걸이나 하게 될 거다!” 너는 딱 한 번 늦게 일어났다고 이런 취급을 받는다. 이는 비인도적인 취급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거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너는 참고 양보하면서 자신을 단속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만 하고 밤에는 11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일이냐? 달가우냐? 둘 다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네가 부모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인상을 쓰거나 너를 야단친다. 때리지는 않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책가방 쓰레기통에 버렸다. 학교 다닐 필요 없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도 좋지. 성년이 되면 나가서 고물이나 주우면 되니까!” 그들의 이런 나무람은 폭력도 욕설도 아니지만 이렇게 너를 자극하면 너는 견디지 못한다. 무엇을 견디지 못하느냐? ‘한두 시간 더 자면 나중에 빌어먹는 거지가 될 거다.’라는 부모의 말이다. 너는 속으로 자기가 두 시간 더 잔 것에 심한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두 시간 더 잔 것 때문에 부모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며, 오랜 세월 자기를 위해 부모가 고생스럽게 치른 대가와 자기에게 들인 정성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자기가 미워진다. ‘왜 이렇게 한심한 거야! 두 시간 더 잔다고 뭐가 더 나아지나? 점수를 더 받을 수 있기를 해, 아니면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기를 해? 왜 그렇게 자각성이 없어?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지 왜 조금 더 눈을 붙인 거야?’ 이러다가 곰곰이 생각한다. ‘너무 졸렸는걸. 난 정말로 휴식이 필요했다고!’ 이러다가 또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이러면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생각하다가는 나중에 정말로 거지가 되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제멋대로 굴지 말고.’ 부모의 갖가지 책벌 속에서, 부모가 네게 정해 준 갖가지 규칙 속에서, 너를 향한 부모의 갖가지 정도를 넘어서거나 넘어서지 않은 요구 속에서 너는 점점 고분고분해진다. 하지만 고분고분해지는 동시에 부모가 네게 하는 모든 일이 부지불식간에 멍에가 되고 너의 짐이 되어 네가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고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게 된다.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그 짐을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짐이 무슨 짐이냐? ‘부모님이 하는 일은 전부 내 장래를 위한 거야. 나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으니까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해. 부모님이 하는 일은 뭐든 옳고 좋아. 나 때문에 너무 많이 고생하고 너무 많은 대가도 치르셨으니까 부모님을 위해 분발해야 해.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좋은 직업을 얻어 돈을 번 다음 부모님을 부양하고 호강시켜 드려서 보답해야지. 그거야말로 내가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가 너를 대하던 방식과 네가 보낸 힘겨운 세월,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더 나아가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떠올리면 내심 부모가 한 모든 일이 네 인성과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감히 미워하지 못하고, 그것을 감히 올바르게 대면하거나 직시하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이 알려 준 방식을 써서 이성적으로 부모가 한 모든 일과 너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대하지 못하며, 감히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부모를 대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 너희는 학업과 직업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부모가 너희에게 들인 정성, 너희를 위해 치른 대가, 그리고 그들이 네게 하라고, 응당 추구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에 대해 분별이 있었느냐?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분별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러는 것이 다 저에 대한 사랑이고 제가 나중에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약간의 분별이 생겨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느냐? (멍에와 결박, 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인성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고, 어린 시절의 행복을 박탈하는 것이며, 잔인무도한 압제이다. 만약 상해라고 말한다면 너희가 양심상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인성의 자유와 어린 시절의 행복을 박탈하는 것이요, 미성년자에 대한 일종의 압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만약 괴롭힘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 네가 어리고 철이 없으니 무엇이든 그들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그들은 네 곁에서 너를 쥐락펴락했고,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들이 네게 무언가를 시키면 너는 그대로 따랐다. 네게 무용을 배우라고 하면 너는 반드시 배워야만 했다. 네가 “배우고 싶지 않아요. 저는 싫어요. 박자도 못 따라가겠고 저는 균형 감각도 없어요.”라고 하면 “안 돼. 너는 꼭 배워야 해. 내가 좋아하니까 나를 위해서 배워야 한다고!”라고 했다. 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네게 이런 말도 했다. “엄마를 위해 배워야 해. 엄마 말 들어. 너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나중에 크면 다 너를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보렴, 엄마는 어렸을 때 조건이 안 받쳐 줬어. 돈을 털어서 무용을 배우게 해 줄 사람이 없었거든. 엄마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단다. 너는 지금 얼마나 좋으니. 엄마 아빠가 너를 위해 돈을 벌고 저축해서 무용을 배우게 해 주잖니. 너는 공주, 왕자나 다름없어. 얼마나 행복하니!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배우라는 거야.” 너는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보통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니 어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시비를 가릴 줄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살필 줄도 모른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자기들도 속으로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말로 종종 아이를 현혹하고, 아이의 어린 마음을 마비시키며, 아이가 기꺼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배에 따르도록 만든다. 또한, 그보다 더 많은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고, 생각을 주입하고, 아이에게 어떠한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부분에 있어서 흔히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고, 말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말한다. 게다가 거의 99.9%의 부모가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아이가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일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지 않고, 자기들만 선호하고 자기들만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강압적으로 주입하여 아이에게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당연하게도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의 99.9%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이 가져야 할 사상 관점이 아니며, 동시에 아이 연령대의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한 예로 틈만 나면 인형 놀이를 하거나 줄넘기를 하고 만화 영화를 보는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부모가 옆에서 다해야 할 책임은 오직 무엇이냐? 감독하고, 규범에 맞게 하고,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아이가 이 시기에 부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도와주고, 자기 연령대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긍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연령대에서는 친구와 잘 지내는 법, 집과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를 더 잘 교육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 걱정거리가 있거나 말을 듣기 싫을 때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 등등을 배우게 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의 유아적 취향을 충족시켜 주는 일이다. 예컨대 아이가 만화 영화를 보고 싶어 하고 인형 놀이를 하고 싶어 할 때 꾸짖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부모는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만화 영화를 보거나 인형 놀이를 하고 있으면 야단친다. “못났구나! 넌 몇 살인데 공부도 할 줄 모르고 네 할 일을 할 줄 모르니! 만화 영화 보는 게 무슨 쓸모가 있어? 쥐 아니면 고양이나 나오겠지. 좋은 것 좀 배울 수 없니? 그 만화에는 온통 동물만 나오잖아. 사람 나오는 것 좀 볼 수 없어? 너는 언제 클 거니? 인형 버려! 그 나이에 인형 놀이나 하고 있다니 못난 것 같으니!” 말해 보아라. 어린아이가 이 말을 듣고 어른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 나이의 아이가 인형 놀이나 흙장난을 안 하면 무엇을 하고 논다는 말이냐? 원자 폭탄을 가지고 놀겠느냐?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 그 아이의 나이에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 나무 블록, 기차,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정상이다. 놀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며, 몸이 건강하고 기분이 즐거워야 한다. 무언가를 할 때 제멋대로 굴거나 억지를 부리고 소란을 피우면 어른이 이렇게 교육해야 한다. “너 이러면 철없이 구는 거야. 이러면 착한 아이가 아니야.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엄마 아빠도 싫어해.” 아이를 잘 타일러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성인의 방식과 시선으로, 그리고 성인의 욕망과 야심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주입하고,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 아니다. 연령과 관계없이 부모가 자녀를 위해 다해야 할 책임은 그저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교육하고, 지도하고 감독하고, 타이르는 것뿐이다. 자녀의 일부 생각, 행동 방식, 행위에서 극단적인 점을 발견하면 긍정적으로 코치하고, 인도하고, 교정하여 자녀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긍정적이고 무엇이 부정적인지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이러면 부모가 올바른 방식으로 교육하고 인도하는 가운데 아이는 예전에 몰랐던 많은 것들을 부지불식간에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물을 많이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사람의 마음과 인성이 정상적이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그 어떤 학대와 압제도 받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마음만은 비틀리지 않고 건강하게 된다. 사람은 좋은 교육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지 나쁜 교육 환경의 압제 아래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장 과정에서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자녀에게 압박감을 주고 자녀를 결박하거나 자녀의 선택을 방해하여 자녀에게 짐을 하나 또 하나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성격과 자질이 어떻든지 간에,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자녀를 인도하는 것인데, 자녀에게서 일반적이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말과 행위 혹은 생각이 발견됐을 때 즉시 심리적으로 코치해 주고, 행위를 지도하고 교정해 주는 것이다. 자녀가 배우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공부를 잘하는지 아닌지,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데에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커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자녀가 천성적으로 무엇을 갖추었고, 무엇을 선호하며, 어디에 관심을 갖는지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녀가 부모 손에서 건강하고, 자유롭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자 부모가 자녀의 성장, 학습, 직업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다. 자기 바람과 뜻,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더 나아가 자기 욕망을 억지로 자녀에게 강요하여 자녀가 실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한 측면으로는 부모도 지나치게 희생할 필요가 없고, 다른 측면으로는 자녀 역시 부모의 올바르고 정당한 교육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며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의 특기, 관심사, 그리고 자녀의 인성에 따라서 올바르게 자녀를 대할 수 있게 되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자녀를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최종 결과는 분명 좋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자녀를 대하라는 것은 자녀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가르쳐야 할 때는 가르치고 엄격해야 할 때는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엄격하든 느슨하든 간에, 자녀를 대할 때의 원칙은 좀 전에 말한 대로 순리에 맡긴 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인도와 도움을 제공하고, 그런 다음 자녀의 실제 상황에 근거해 기능과 지식 혹은 물질 측면에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다.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이런 것이지 자녀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거나 인성에 위배되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녀에 대한 기대는 현재 사회의 경쟁,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사회적 풍조, 사회적 주장, 혹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녀를 대하는 갖가지 생각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다. 자녀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 훗날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훗날 물질생활이 어떠할지, 이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지 부모의 손이나 다른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운명도 주관하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자기 운명도 주관하지 못하는데 부모라고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부모로서 자녀의 학업과 직업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미련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현명한 방법으로 자녀를 대해야 한다. 자기 기대를 자녀의 짐으로 만들지 마라. 자기가 한 희생, 자기가 치른 대가, 자기가 한 고생을 자녀의 짐으로 만들지 마라. 가정을 자녀의 연옥(煉獄)으로 만들지 마라. 이것이 부모가 알아야 할 사실이다. “그러면 아이가 부모와 어떤 관계로 지내게 해야 하나요? 친구인가요, 동료인가요, 아니면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인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네가 알아서 해라. 자녀가 좋아하는 대로,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면 된다. 이는 사소한 문제이다.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만약 자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부모를 만났다면, 이렇게 말이 안 통하고 악마와 같은 부모를 만났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부모의 교육을 계속 듣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원칙적인 면에서 그들의 교육 방식이 틀렸고 그들이 너를 대하는 방식은 네 인성에 상해를 가하는 것이자 네 인권을 박탈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 스스로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네가 무엇을 배우기를 좋아하는지, 네가 무엇을 잘하는지, 혹은 네 인성의 자질로 무엇에 이를 수 있는지, 이는 모두 하나님이 정해 두었으며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부모가 너를 낳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은 그들 역시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이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일을 부모가 억지로 네게 시키더라도 너는 모두 거절해도 되며 그들을 상대로 이치를 따져도 된다. 그런 다음 다른 면에서 보충하여 그들을 안심시키면 된다. 네가 “마음 놓으세요.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요. 저는 절대로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 거고 반드시 바른길을 걸을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에 꼭 진정한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도, 키워 주신 은혜를 잊지도 않을게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부모는 어떻게 반응하겠느냐? 만약 부모가 이방인이고 마귀에 속한 자라면 미친 듯이 화를 낼 것이다. ‘키워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부모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네 말이 빈말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렇게 했느냐? 부모의 요구대로 했느냐?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고위 관료가 되거나 큰돈을 벌어 부모를 호강시켜 줄 수 있겠느냐? 그들에게 실익을 안겨 줄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알 수 없다. 이는 미지수이다. 그들이 화를 내든, 기뻐하든, 아니면 묵묵히 인내하든, 네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사람이 세상에 한 번 오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빛내기 위해서,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그들이 너를 키우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그것은 전부 그들이 기꺼이 원한 일이다. 너를 키우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고 의무였다. 그들이 네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든, 네게 건 그 기대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고 냉대받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전부 다 그들이 자청한 것이다. 네가 요구한 것이 아니고, 네가 그들에게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들의 각도에서 보면 그저 자기들을 위해서였다. 표면적으로는 네가 잘살고 장래가 유망하기를 바라서였지만 사실은 네가 자기들을 망신시키지 않고 체면을 세워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갚아야 할 의무도 없고 그들의 바람과 너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줄 의무도 없다. 어째서 그럴 의무가 없느냐? 하나님이 네게 시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의무가 아닌 까닭이다.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들에게 네가 필요할 때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힘닿는 데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들이 너를 낳고 기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저 그들이 네 시중을 필요로 할 때 옷을 빨아 주고, 밥을 해 주고, 청소를 해 주고, 그들이 아플 때 병상 곁을 지켜 주는 것뿐이다. 네게는 그들의 말을 무조건 따를 의무가 없고, 그들의 노예가 될 의무도 없으며, 그들이 아직 실현하지 못한 바람을 유업으로 받을 의무는 더더욱 없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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