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1) 제 1 부

지난번 예배 때는 어디까지 교제했느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에서 ‘내려놓기’ 부분에 관한 내용, 그중에서도 결혼에 관계된 주제를 교제했다. 결혼이라는 분야의 주제는 이미 몇 번 교제한 적이 있는데, 지난번에 주로 교제한 내용은 무엇이냐?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고, 기혼자들이 결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치우친 견해와 이해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바르게 대하라는 내용도 있었고, 마지막에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저희 사명이 아니라고 교제하셨습니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제에 관한 교제를 너희는 얼마나 받아들였고, 얼마나 기억했느냐? 주로 결혼에 대해 사람이 가진 비현실적이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유치하고 비이성적인 생각과 바람에 대해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이를 올바르게 대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결혼을 오락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온갖 환상이나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추구를 충족시키는 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느냐? 이런 환상은 사람이 생활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주로는 사람이 세상과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여러 가지 결혼과 관련한 주장과 해석, 태도와 관계가 있다. 그런 주장과 해석, 태도는 사회와 인류의 여러 종족에서 비롯된, 실제에 맞지 않고 사실과 어긋나는 갖가지 주장이자 관점이다. 왜 이런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느냐? 왜냐하면 결혼에 대한 이런 갖가지 관점과 태도는 패괴된 인류에게서 온 것이고, 사악한 세상에서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태도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결혼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결혼의 개념과 정의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에 더욱 치중되어 있고, 또한 사람이 생활에서 마땅히 구현해야 하는 인성과 양심, 이성에도 치중되어 있다.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는 주로 사람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올바르게 짊어져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만약 네가 미혼이어서 결혼 생활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면, 너는 하나님이 내린 결혼의 정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 가지다. 또 하나는 사람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짊어질 준비를 하라고 일깨우는 것이다. 결혼은 오락이 아니고, 어린아이들 소꿉장난과 같은 놀이가 아니다. 우선 결혼은 책임의 상징이라는 사상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정상 인성 안에서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을 준비하거나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사악한 세상에서 나온 결혼의 개념과 이해, 결혼에 대한 주장은 무엇에 더 중점을 두느냐? 감정과 정욕을 가지고 놀면서 육체의 욕망,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중시하고, 당연히 사람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도 중시한다. 그 안에는 책임도 인성도 없고, 하나님이 정해 준 결혼의 양 당사자인 남녀가 결혼의 틀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남녀 각자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다루지 않는다. 세상이 사람에게 주입한 결혼에 대한 각종 해석과 주장, 태도는 사람의 정과 욕망을 충족시키고, 탐색하고, 따르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네가 사회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그런 각종 주장과 이해, 또는 태도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악한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온 그런 결혼관에 의해 패괴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상 관점에 의해 패괴되고 영향을 받게 되면 거기에 좌우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동시에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그런 관점에 우롱당하고 지배당할 것이다. 결혼에 대한 이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후로 이방인들은 애정, 그리고 정욕의 충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상 관점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인다면, 너 역시 애정과 정욕의 충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는 피할 수도 없고, 비켜 갈 수도 없는 일이다. 결혼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이해, 태도가 없을 경우, 너는 자연스레 세상과 사회, 인류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각종 관점과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알기만 해도, 그런 사상을 방어할 면역력이 없다면, 너는 무의식중에 그런 사회 풍조에 영향을 받고, 결혼에 대한 그런 관점과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네가 받아들일 경우, 그런 사상 관점은 결혼에 대한 네 태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네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상과 사회, 인류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갖가지 주장에 영향을 받고 심지어 통제되기 십상이다. 그런 말이 너를 통제하게 되면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결혼은 당연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을 품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교제하면서 그런 환상은 사악한 인류가 결혼에 대해 가지는 여러 가지 그릇된 이해와 관점에서 비롯되며, 그 이해와 관점은, 그것이 구체적이든 포괄적이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했다. 한편으로는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그릇된 정의와 이해를 내려놓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배우자감을 올바르게 선택해야 한다. 또 하나, 기혼자들이 자신의 결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이 ‘올바름’이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깨우고 부탁한, 결혼에 대한 태도와 책임을 말한다. 너희는 잘 알아야 한다. 결혼은 애정의 상징이 아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결혼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웨딩드레스, 다이아 반지, 교회, 굳은 언약, 촛불 저녁 식사, 낭만, 둘만의 세상 등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것들이 결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결혼을 얘기할 때는 우선 마음속에 심어진 결혼에 대한 환상 및 그 환상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것들을 없애야 한다. 결혼에 관한 올바른 해석에 대한 교제와 사탄과 사악한 세상에서 비롯된 결혼에 관한 온갖 치우친 사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너희는 결혼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좀 안정적인 태도로 결혼을 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 또 식견도 좀 넓어진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식견이 넓어지느냐? (전에는 결혼을 생각하면 생화, 다이아 반지, 웨딩드레스, 굳은 언약과 같이 허무맹랑한 것들을 상상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알았습니다. 결혼은 사실 하나님이 정하신 일로,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서로 보살피고, 서로 챙겨 주고,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일종의 책임감이죠. 결혼에 대해서는 이런 관점이 허황되지 않고 보다 실제적입니다.) 식견이 어느 정도 넓어지지 않았느냐? 넓은 면에서는 식견이 어느 정도 높아졌고, 세부적인 면에서는 사모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과거 자신의 기준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전에는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긴 남자나, 돈 많은 미녀만 만나려 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가장 기본적으로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이 착실하고 책임감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그런 방향과 목표, 방식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결혼이 행복할 확률이 크겠느냐, 아니면 불행해서 이혼할 확률이 크겠느냐? (행복할 확률이 큽니다.) 행복할 확률이 좀 더 크다. 우리가 이런 결혼이 백 퍼센트 행복할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느냐?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는 바로 사람이 가끔 눈에 뭐가 씌어서 상대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와 결혼해 버리는 경우다. 또 한 가지는 결혼하기 전에는 다 좋아 보이는 경우다. ‘우리는 성격도 잘 맞고, 마음도 잘 맞아. 그이도 그랬지. 결혼하면 나한테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절대 내게 미안할 짓은 안 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다 보면 모든 게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잘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비록 겉보기에는 딱히 인성이 나쁘거나 악하지 않지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얼마 안 되는 인성이 지닌 책임감과 의무감도 점점 사라지고 변해서 본모습이 드러난다. 네가 볼 때 부부가 한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경우, 즉 너만 일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상대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아 낼 수 있겠느냐? (오래 참지 못합니다.) 생활 습관이나 인성이 안고 있는 작은 문제나 결함은 그래도 억지로 포용하고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얘깃거리도 없고,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도 없어질 것이다. 상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언제나 세상의 사악한 시류만 좇는 자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줄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책임감도 곧 사라지고 만다. 이런 결혼이 행복하겠느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두 사람이 같이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헤어집니다.) 그렇다. 이별을 생각하고 실제로 헤어지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처음에는 둘이 서로 적응하고, 적응한 다음 또 싸우고, 싸우고 나서는 다시 화해하고, 화해하고 나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상대를 보며 또 참고, 한동안 참았다가 또 싸우기를 반복한다. 결국에는 갈등이 극에 달했다가 다시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안 맞아. 처음 생각한 거랑은 다르고 말이야. 같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니 이혼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또 이혼하자니,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잖아.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하면서 왔는데, 이렇게 가볍게 이혼하면 안 되지. 참고 살아 보자. 아무렴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1, 2년을 참으며 사는데, 상대는 볼수록 맘에 들지 않고, 거슬리기만 해서 같이 사는 게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서로 간 대화도 갈수록 사라지고, 상대의 문제만 더 눈에 들어오고, 포용하고 참으려는 생각도 갈수록 사라진다. 5, 6년 뒤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완전히 갈라서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완전히 갈라서려고 할 때는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혼한 다음 어떻게 살지도 철저하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한 번으로는 결심이 서지 않아서 여러 번 생각 끝에 아쉬워도 두 눈 질끈 감고 포기한다. ‘헤어지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혼자 조용히 살자.’ 허구한 날 싸우고, 사이 좋을 때가 없었다. 전에는 참았는데 이제 더는 참지 못한다. 상대만 보고 있으면 짜증이 밀려오고, 그가 말하기만 하면 부아가 치민다. 심지어 목소리만 들어도, 생긴 것만 봐도, 상대가 입던 옷, 상대가 썼던 물건만 봐도 속이 뒤틀리고 역겹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이제 서로를 낯선 사람 취급하고 있는 이상, 이혼밖에는 답이 없다. 이혼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전제는 무엇이냐?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혼자 사는 것만 못한 경우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들다. 더 이상 정도 없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혼자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낫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러면 속으로 늘 상대를 염려해야 한다. ‘밥은 먹었나? 옷은 잘 입고 다니나? 잠은 잘 잤을까? 밖에서 일하는 건 피곤하지 않을까? 누가 못살게 굴지는 않았나? 기분은 어떨까?’ 이렇게 늘 걱정해야 한다. 지금 보니까 역시 혼자 조용히 사는 게 낫다. 누구를 생각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 때문에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 그는 네가 염려하고 아껴 줄 가치가 없고, 책임을 다할 가치가 없다. 사랑스러운 구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중에 이혼 수속을 밟고 두 사람의 결혼이 끝이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혼도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결혼은 전생의 은혜와 원한 등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빚을 갚기 위한 것 말이다. 부부 양쪽이 서로 빚을 진 경우도 있고, 여자 쪽이 남자 쪽에 빚을 지거나, 남자 쪽이 여자 쪽에 빚을 진 경우도 있다. 전생에 어느 한 쪽이 너무 덕을 보고 신세를 많이 져서 이번 생에 함께 살면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결혼은 대개 행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못한다. 가정 때문이든, 자녀 때문이든, 아니면 모종의 관계 때문이든, 어쨌든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아서 늘 싸우고 다투기만 하고, 성격, 취향, 추구, 취미 할 것 없이 전혀 맞지 않는 데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게 전혀 행복하지 않지만, 여전히 헤어지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죽을 때도 기어이 상대의 속을 긁어 놓는다. “다음 생에는 당신이랑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요!”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면서도 이번 생에서 헤어지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이다. 이 각양각색의 결혼은, 그 구성과 내력이 어떻든 관계없고, 사람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관계없다. 어쨌든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결혼에 대한 각종 유치한 환상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결혼을 대해야 한다. 정욕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되고, 더욱이 사회가 주입한 그릇된 결혼관의 함정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네가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지, 네가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는지, 상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 상대는 네게 아직 느낌이 있는지, 너는 상대에게 아직 느낌이 있는지 등 결혼에 대한 느낌에만 탐닉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느낄 필요도 없고, 음미할 필요도 없다. 하나같이 모두 터무니없고 시시한 생각들이다. 네가 그런 것을 음미할수록 더욱 결혼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네가 그런 생각에 빠져들수록 결혼의 함정에 빠졌음을 증명하게 된다. 그러면 너는 행복도, 안정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상 관점과 생각에 빠져들면서 네 결혼이 기형적으로 변하고 네 인성도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너 역시 사회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각종 사상 관점에 꼼짝없이 통제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각종 관점과 주장은 한편으로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 그런 관점과 주장을 거절해야 한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결혼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달라지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를 내려놓아서는 안 되고, 사악한 세상의 각종 결혼관에 영향을 받아 시선이 교란되어서도 안 된다. 쉽게 말해, 결혼은 한 사람이 청소년에서 성인이 된 후, 인생의 다른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 있어 시작점이다. 즉, 네가 성인이 된 다음,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 단계는 바로 결혼해서 너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와 생활하는 첫날부터 너는 아내, 혹은 남편으로서 결혼 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더 많은 경우 두 사람이 결혼 생활 전반에 걸친 일들을 함께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결혼은 한 사람이 부모를 떠나고 독신 생활과 결별한 뒤, 다른 사람과 둘만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으로, 두 사람이 함께 생활을 마주하는 단계다. 이 단계는 네가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는 의미이며, 당연히 생활하면서 다양한 검증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다. 네가 결혼의 틀 안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혼의 틀 안에서 부딪히는 전반적인 일을 어떻게 둘이서 공동으로 마주할 것인지 등은 네게 있어 검증이 될 수도 있고, 온전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재난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인생에서 더 많은 경험을 얻는 원천이 될 수도 있고,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과 이해를 얻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이라는 이 주제는 여기까지 돌아보기로 하자.

지난번에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너의 사명이 아니다’는 주제도 교제했다. 이 주제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일생의 행복을 자신의 배우자에게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되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위 애정을 지키려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피조물임을 잊지 말고, 결혼 생활에서 본인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피조물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생의 행복을 본인의 결혼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결혼의 행복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결혼이 행복하면 자신의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결혼의 행복을 일생에서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결혼하면 신선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많은 일을 하느라 머리를 쥐어짠다.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바로 그들이 얘기하듯,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가 되었든, 언제나 찰싹 붙어 다니는 갓 만난 연인들처럼 둘이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 언제 어느 때나 속으로 늘 상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마음은 상대의 웃는 모습,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으로 가득한 것이다. 하루라도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하루라도 상대의 모습을 안 보면 넋이 나간 듯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행복한 결혼의 상징이자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집에만 있는 소위 전업주부들 중에는 집에 들어올 남편을 기다리는 게 가장 큰 행복인 사람들도 있다. 남편이 제때 들어오지 않을 때 이들이 전화해서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이 무엇이냐? (“당신 언제 들어와요?”입니다.) 너희도 자주 듣는 말인가 보구나. 이 한마디가 벌써 많은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첫 마디는 당신 언제 돌아오느냐는 말인데, 이 말을 하고 난 뒤 정확한 대답을 듣고 못 듣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의 그리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활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집에서 조용히 배우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외출을 해도 멀리 못 나가고 집을 오래 비우지도 못한다.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상심하고 실망하고 슬플까 하는 마음에서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희망과 자신감이 가득하다. 또한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예전처럼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고 속으로 상대를 사랑하려고 한다. 그리고 틈만 나면 상대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묻곤 한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이가 들어왔나 모르겠네. 들어와서 밥은 먹었을까? 피곤하진 않을까? 계속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자니 맘이 편치 않네. 좀 미안하기도 하고.’ 다음번 예배 때는 상대에게 물어본다. “당신 보통 몇 시에 들어와요? 내가 예배드리느라 집에 없으면 혼자 쓸쓸해요?” 남편이 대답했다. “안 그럴 리가 있나? 텅 빈 집에 나 혼자 있는데. 평소에 늘 둘이 같이 있다가 졸지에 혼자 있게 됐잖아. 맨날 무슨 예배야? 예배 나가는 건 괜찮은데, 내가 집에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들어오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알아차렸다. ‘아, 남편이 바라는 게 많지 않구나.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내가 집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리고 다음 예배 때는 시계만 계속 들여다본다. 곧 남편 퇴근 시간이면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말한다. “마저 예배드리세요.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 얼른 가 봐야 해서요.” 그러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이가 아직 안 들어왔네. 잘 됐다! 얼른 밥하고 청소해야겠다. 그이가 들어왔을 때 집안이 깔끔해야지. 맛있는 냄새에 인기척도 있고 말이야. 식사 시간에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겠어! 예배 시간을 다 못 채워서 많이 못 듣고 덜 얻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집에 와서 그이한테 따뜻한 밥을 해 먹이는 것도 좋잖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 후로 예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어쩌다 한 번 예배가 늦게 끝나서 부랴부랴 집에 가 보니 남편이 이미 집에 와 있었다. 아내에게 불만스럽고 심기가 불편한 남편이 볼멘소리를 한다. “예배 좀 덜 나가면 안 되나? 집에 들어왔는데 당신이 없으면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견디기 힘들다고!” 그 말에 아내는 너무 감동했다. ‘그 말은 날 너무 사랑해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 내가 안 보이면 견디기 힘들다니, 너무 행복해! 말에 가시가 좀 돋긴 해도 날 사랑하는 게 느껴져. 다음엔 조심해야지. 예배가 몇 시간 진행되든 꼭 미리 집에 들어와야겠어. 그이의 사랑을 저버릴 수야 없지. 예배에서 좀 덜 얻는 게 별건가. 하나님 말씀 좀 덜 듣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예배 때는 예배 시간 내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남편 사랑 앞에 떳떳하고, 또 본인이 결혼 생활에서 추구하는 행복을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녀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먼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남편의 사랑을 저버리는 거야. 계속 그렇게 그이를 실망시키면 남편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까? 전처럼 날 사랑해 주지 않는 건 아닐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기에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 관계를 일생동안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꿋꿋하게 그렇게 행동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 리더에게 자꾸 요구한다. “저는 저녁에 외박은 안 돼요. 결혼했잖아요. 제가 집에 안 들어가면 그 사람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밤에 자다 깼는데 제가 없는 것도 견디기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가 안 보여도 힘들 거예요. 자주 집을 비우면 그이가 내 충절과 결백을 의심하지 않겠어요? 결혼할 때 우리 둘은 서로 충성심과 지조를 지키기로 합의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은 지켜야 하고, 그이한테 떳떳해야 해요. 왜냐하면 세상에 이렇게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또 없으니까요. 내 결백을 증명하고 내 충성심과 지조를 증명하려면 절대 외박은 안 돼요. 아무리 교회 사역이 바쁘고 본분이 급해도 저녁 늦게라도 꼭 들어가야 한다고요.” 자신의 결백과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데, 사실은 결혼이 불행해지면 끝이 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차라리 본분을 잃고, 또 본인이 다해야 할 본분을 포기해서라도 결혼의 행복을 지키려고 한다. 마치 결혼의 행복이 본인이 하는 모든 일의 동력이자 원천이어서, 결혼의 행복이 없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피조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는 상대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것, 계속해서 사랑받는 것을 행복한 결혼의 지표로 삼고, 또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았다. 어느 날 자신이 전처럼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혹은 상대의 사랑을 저버리는 어떤 잘못을 저질러 상대가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생긴다면 그녀는 넋이 나갈 것이다. 예배도 안 드리고 하나님 말씀도 안 읽고, 심지어 교회에서 본분을 맡겨도 몸이 안 좋다거나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심하면 앞뒤가 안 맞는 엉뚱하거나 황당한 말로 둘러대는 등 온갖 이유를 찾아 이를 거절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인생에서 큰일로 생각한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상대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 하거나 사로잡으려고 한다. 상대가 계속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신혼 초의 달콤함과 처음 결혼했을 때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그 때문에 더 큰 희생을 치르기도 한다. 코를 높이고, 턱을 깎고, 가슴 성형술, 지방 흡입술을 받는 등 어떤 고통도 기꺼이 감수한다. 두꺼운 종아리 때문에 고민 끝에 축소술을 받았는데 신경이 손상되어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이 이를 보고 말했다. “종아리가 굵긴 해도 정상이었는데, 지금은 서지도 못하고 폐인이 됐군. 헤어져!” 보아라.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맞이한 결과가 결국 이런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매일 예쁘장하게 단장하고 향수도 뿌리고 분칠도 한다. 립스틱이니, 볼 터치니, 아이섀도니 하는 온갖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는데, 그 목적은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해서 상대 마음을 사로잡고, 처음처럼 사랑받기 위해서다. 남자는 남자대로 결혼의 행복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형제님은 하나님 믿는 것으로 잘 알려졌어요. 주위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신고를 당해 잡혀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본분을 이행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근심에 휩싸인다. ‘만약 떠나게 되면 내 결혼은 파탄 난다는 말이 아닐까? 이것으로 끝나는 거 아닐까? 내가 집을 떠나면 아내가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지나 않을까? 우리 관계는 여기서 단절되는 건가? 다시는 함께하지 못하는 건가?’ 괴로운 나머지 흥정을 시도한다. “안 가면 안 됩니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집에 가면요? 가정을 건사해야 한다고요!” 사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정을 건사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다른 사람하고 달아날까 걱정되고, 결혼의 행복이 여기서 끝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결혼의 행복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정말 원치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결혼의 행복이 어떤 일보다도 커서 그게 없으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랑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해. 내가 상대를 사랑하니까, 또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까 결혼이 행복하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여기서 접는다면 결혼의 행복은 이제 끝나서 없어지는 거고, 다시는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닌가? 결혼의 행복이 없으면 삶이 어떻게 되겠어? 내 사랑이 없으면 아내는 어떻게 살지? 아내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서 창조주 앞에서 사람의 사명을 완성한다고 이 결핍을 채울 수 있을까?’ 이들은 모른다. 답이 없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의 행복을 최고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 사역의 필요로 인해 집을 떠나 외지에서 복음을 전도하며 본분을 이행해야만 하는 경우, 결혼의 행복을 곧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낙담하고, 안타까워하고, 심지어 불안해한다. 어떤 이들은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본분 이행을 포기하거나 거절하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 집의 중요한 안배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늘 상대의 감정을 살핀다. 상대가 자신의 신앙과 자신이 하나님 믿는 길을 가는 것, 자신이 본분 이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거나 조금이라도 불쾌하거나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 얼른 방향을 바꿔 타협하곤 한다.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늘 상대와 타협한다. 설령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포기하고 예배드리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영 생활 하는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상대가 쓸쓸하고 적막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상대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신앙, 혹은 하나님 믿는 길을 걷기 위해 상대의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혼의 행복을 포기한다는 뜻이고, 그의 생각에 결혼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은 외로운 사람,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아무도 사랑하고 아껴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록 도리를 어느 정도 알고,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의미를 알고, 또 당연히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해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또 자신의 행복을 당연히 결혼의 행복에서 찾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해하고 알더라도, 결혼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지 못한다. 그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이번 생에 추구해야 할 사명, 피조물이 추구하고 완성해야 할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 결혼의 양 당사자에게 한 부탁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그를 위하여 배필을 지으셨고 그 배필이 그와 짝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는 이 정의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서로 곁에 있어 주고, 서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결혼의 틀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과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온전히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둘은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느냐? (그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자신의 최대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이 살면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최대의 책임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추구 목표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말해 보아라. (사람이 결혼 생활에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대하지 못할 경우,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지키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책임을 바르게 대한다면, 먼저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과 사명을 완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결혼의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하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이냐? 그것과 하나님이 정한 결혼이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너에게 결혼의 틀 안에서 남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상황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너를 동반할 반려자를 준 것이다. 이 반려자는 네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또 네가 인생의 각 단계를 지나는 동안 너를 동반할 것이다. 동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를 도와주고, 돌봐 주고, 또 네가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일을 분담한다는 뜻이다. 즉, 얼마나 많은 일에 부딪히든 네가 더 이상 그것들을 혼자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는 것이 보다 홀가분하고 쉬워질 것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각자의 장점과 강점을 발휘하며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나 간단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허락했으니, 너는 결혼하면 상대를 언제나 끝까지 사랑하고 기분을 맞춰 주어야 한다. 이것이 네 사명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결혼을 허락하고, 반려자를 주고, 다른 생활 환경을 주고, 이런 생활 환경과 배경 안에서 배우자와 네가 모든 일을 함께 분담하고 대면하게 해서 네가 더욱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게 한다. 동시에 네가 인생의 다른 단편을 체험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결혼에 팔지 않았다. 결혼에 팔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바로 네 일생과 운명, 네 사명, 또 네가 인생에서 어떤 길을 걷고,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어떤 신앙을 가지는가 하는 이런 것들은 네 배우자가 결정하도록 맡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여자는 운명과 추구가 어때야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고, 어떤 인생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반드시 남편이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고, 한 남자는 운명과 추구, 인생관이 어때야 하고,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반드시 아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도, 그렇게 정한 적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이 최초의 인류에게 결혼을 정하면서 그런 말씀을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남녀의 일생의 사명이니, 네가 반드시 결혼의 행복을 지켜야 일생의 사명이 완성되고, 피조물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또한 “너는 반드시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네 인생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네 결혼에 달려 있고, 네 배우자에게 달려 있다. 네 인생관과 운명은 반드시 네 배우자가 결정해야 한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운명적으로 정해 주고, 배우자를 주어서 네가 결혼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네 신분과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너이다. 네가 여자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여자이고, 네가 남자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남자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가 남자든 여자든 창조주 앞에서는 모두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너희는 서로 포용하고 아껴 줘야 하고, 서로 돕고 붙잡아 줘야 한다. 이것은 모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네가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 마땅히 완성해야 할 사명은 네가 배우자에게 다해야 할 책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배우자에 대한 네 책임과 하나의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다해야 할 본분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네가 선택해야 할 것은 상대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선택해야 할 방향이자 목표이고, 물론 네가 당연히 완성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혹은 배우자를 보살피고, 돌봐 주고, 사랑하는 등 배우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배우자를 본인의 하늘, 본인의 운명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네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이지 네 배우자가 주재하는 것이 아니며, 결혼은 네 운명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이 네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도 바꾸지 못한다. 네가 어떤 인생관을 지니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는 너 스스로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하지, 네 배우자에게 의지하거나 그가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너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이외에, 그는 네 운명을 좌우해서도 안 되고, 너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네가 어떤 길을 갈지 결정해서는 안 되고, 네가 어떤 인생관을 수립할지 결정해서도 안 된다. 너를 옭아매거나 구원받기를 추구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결혼에 관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결혼의 정의에 따라 부부 양쪽이 서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전생과 현생, 내세를 결정할 수도 없으며, 영원은 더더욱 결정할 수 없다. 네 종착지와 운명, 네가 가는 길은 오직 창조주만이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네 역할이 아내든 남편이든, 네가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행복은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결혼 자체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결혼의 틀 안에서 아내나 남편의 책임을 다하는 데서 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네 길을 선택하고 인생관을 수립하는 일은 결혼의 행복이 바탕이 되어서도 안 되고, 결혼한 어느 한 당사자가 이를 결정해서도 안 된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람들 중에서, 결혼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자신의 실행 방법과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대로 배우자와 결혼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일 뿐이다. 함께 생활하는 동시에 아내나 남편의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인생관을 지니는지, 상대방에게는 이를 결정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 비록 네가 이미 결혼해서 반려자가 있지만, 소위 반려자는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반려자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반려자가 다해야 할 책임만 지면 되고, 나머지 그와 무관한 것들은 너 스스로 선택하고 너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네 선택과 결정이 네 기호나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이 사실에 대한 교제가 이해되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틀 안에 있는 어떤 한 쪽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거나 어떤 희생도 기꺼이 치르는 것은 모두 기념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배우자에게 다하는 의무와 책임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해도, 또 아무리 배우자 앞에서 떳떳하다 해도, 바꿔 말하면 네 결혼의 행복을 아무리 완벽하고 훌륭하게 지키더라도, 아무리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그것은 네가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했다는 뜻도 아니고, 네가 이미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었음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너는 완벽한 아내, 혹은 완벽한 남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이라는 틀에 한정된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는 네가 그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네가 어떤 길을 가는지, 네 인생관이 무엇인지, 네 인생의 추구는 무엇인지, 네 피조물의 사명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너라는 피조물이 가는 길과 미래의 종착지를 판단하지, 네가 아내나 남편으로서 다한 책임과 의무가 어떤지, 배우자에 대한 네 사랑이 상대를 만족시켰는지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네 사명이 아니라는 이 주제에 관해, 우리는 오늘 이 부분을 보충해 보았다. 이 문제들을 교제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아마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실제로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여전히 그럴듯한 여러 가지 문제에 가로막히고 걸릴 것이다. 아내 혹은 남편의 의무도 다하고 싶고, 한 사람, 하나의 피조물이 해야 할 일도 잘하고 싶은데 이 두 가지가 상충되거나 모순되고 혹은 서로 방해가 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까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과 진리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사물, 옳고 좋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을 잘 알면 명확해진다. 사람이 생각하는 긍정적 사물, 좋은 것들은 많은 경우 사람의 관념 상상이 가득하고 사람의 감정이 가득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것, 진리가 아닌 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고 진리로 여기면서 이를 지키고, 고수하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믿는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들어설 수 없고, 결국 진리에서 너무 멀어지고 말 것이다. 그건 누구의 책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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