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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 수훈 예수의 비유 계명

1.산상 수훈

 1) 복을 말하다 (마 5:3~12)

 2) 빛과 소금 (마 5:13~16)

 3) 율법을 말하다 (마 5:17~20)

 4) 노하는 것을 말하다 (마 5:21~26)

 5) 간음을 말하다 (마 5:27~30)

 6) 이혼을 말하다 (마 5:31~32)

 7) 맹세를 말하다 (마 5:33~37)

 8) 보복을 말하다 (마 5:38~42)

 9)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다 (마 5:43~48)

 10) 구제를 말하다 (마 6:1~4)

 11) 기도를 말하다 (마 6:5~8)

2.예수의 비유

 1) 씨 뿌리는 비유 (마 13:1~9)

 2) 가라지 비유 (마 13:24~30)

 3) 겨자씨 비유 (마 13:31~32)

 4) 누룩 비유 (마 13:33)

 5) 가라지 비유를 설명 (마 13:36~43)

 6) 보화를 감추는 비유 (마 13:44)

 7) 진주를 발견하는 비유 (마 13:45~46)

 8) 그물을 치는 비유 (마 13:47~50)

3.계명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선 ‘산상 수훈’에 포함된 조목부터 보자. 이런 내용은 다 어떤 것에 관련되느냐? 확실히 말해서, 이런 내용은 율법시대의 규례 속에 있는 그런 내용들보다 더욱 높고 더욱 구체적이며, 사람의 생활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사람의 실제적인 실행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다음의 구체적 내용을 읽어 보자. ‘복을 말하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율법을 말하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노하는 것을 말하다’에 대해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 간음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혼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말들과 규정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이혼할 수 없는지, 맹세를 말하고, 보복을 말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구제하는 것 등등 이런 내용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여러 방면의 실행에 관련된다. 이런 실행들을 지금에 가져와도 어떤 것은 계속 적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람을 향한 지금의 요구보다는 좀 얕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접촉하게 되는 기초적인 것에 가까운 진리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의 생명 성정 방면에 관련된 사역에 착수했지만, 그런 사역은 율법의 기초상에서 하게 된 일부분 사역이다. 그런 방면의 규정과 논법은 진리와 관련이 있을까? 당연히 관련이 있다! 이전의 규례든 원칙이든 아니면 은혜시대의 그런 수훈이든, 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관련이 있는데, 다 진리와 관련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발표하든, 어떤 방식으로 발표하든, 어떤 언어를 통해 발표하든, 그 기초, 근원, 출발점은 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원칙으로 하여 발표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런 말씀들이 지금에 와 보면 좀 얕기는 하지만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은혜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생명 성정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없어서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훈 중에서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없다! 어느 한 가지든 다 진리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가지든 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고,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람 됨의 원칙과 범위이며, 다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때 사람의 생명 정도(程度)는 겨우 그런 것만 받아들이고, 겨우 그런 것만 깨달을 수 있었을 뿐이다. 사람의 죄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말씀들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범위에서 그렇게 얕은 교훈으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원칙과 범위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은 모두 그때 사람들의 분량에 근거해 결정한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쳐 준 범위도 그런 범위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예수의 비유’ 중에 있는 조목들의 내용을 보자.

"첫 번째,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매우 뜻깊다. 씨 뿌리는 것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일이다. 두 번째, 가라지의 비유이다. 무엇이 가라지인지는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나 어른이라면 다 알 것이다. 세 번째, 겨자씨의 비유이다. 너희는 겨자가 뭔지 다 알겠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찾아보면 된다. 네 번째,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들은 누룩이 발효 식품에 쓰이고, 사람의 일상생활에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음의 여섯 번째, 보화를 감추는 비유, 일곱 번째,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 그물을 치는 비유, 그 모든 비유의 소재들은 다 사람의 생활에서 찾은 것이고, 다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 비유들은 사람에게 어떤 그림을 떠올리게 하느냐? 그 그림은 하나님이 정상 사람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활상의 용어, 인성의 용어로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사람의 각종 생활 방식을 체험하고 목격한 후, 그런 생활 체험은 다 신성의 언어를 인성의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敎材)가 되었다. 또한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예수가 사람에게 진리를 좀 깨닫게 해 주려고 할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좀 깨닫게 해 주려고 할 때, 위의 여러 가지 비유와 같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런 비유는 모두 사람의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사람의 생활과 어긋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할 때, 농부들이 씨 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무엇이 가라지인지도 알고 무엇이 누룩인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예수는 인류가 보화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보화를 감추는 비유도 하고, 보화를 찾는 비유도 해 주었다. 예수는 생활 속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어부들이 그물을 치는 등등 인류의 생활과 관련되는 그런 행위들을 친히 보았고, 동시에 그런 생활을 체험하기도 했었다. 예수는 모든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하루 세 끼와 일상에서 일하고 쉬는 것을 체험하고 평범한 사람의 생활을 친히 겪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활도 목격하였다.

예수가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친히 겪을 때, 어떻게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인지, 어떻게 자신이 더 자유롭고 더 편하게 살 것인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그런 진실한 생활을 체험하는 동시에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쓰라림을 보았고, 사탄의 패괴 아래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쓰라림과 가련함과 비참함도 보았다. 예수는 인류의 생활을 체험하는 동시에, 패괴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너무나도 의지할 데 없다는 것도 몸소 느끼게 되었고 또한 죄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사탄에게 시달리고 죄악에 시달려 목표와 방향이 없는 참상도 느끼게 되었다. 예수가 그런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신성에서 본 것일까 아니면 인성에서 본 것일까? 예수의 인성은 존재하고 살아 있는 것이어서 그 모든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실질, 곧 예수의 신성도 그것을 당연히 보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 자체―예수, 그 사람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가 본 그 모든 것은 자신에게 그 당시에 도성육신이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예수는 그때에 도성육신이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임하는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고 있었지만,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무기력함을 보게 되었을 때, 인류가 율법 아래에서 가련하게 살면서 힘없이 몸부림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예수의 마음은 더욱더 아팠다. 그리하여 예수는 더욱더 절박하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하였다. 예수는 마음속으로 어떤 곤경에 직면하게 되든, 앞으로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든, 죄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을 구속해야겠다고 더욱 굳게 생각하였다. 그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이 어떤 것인지, 담당해야 할 부탁이 어떤 것인지 더욱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는 자신이 담당할 사역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완성하려고 했다. 곧,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도록, 그와 동시에 하나님도 속죄제로 말미암아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그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진일보의 사역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사람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제가 되는 일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마음속으로 기꺼이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고, 속죄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뿐만 아니라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그 사역을 완성하려고 했었다. 심지어 예수는 인류 생활의 참상을 보았을 때, 되도록 빨리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려고 했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그런 절박한 마음이 있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을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이 얼마나 큰 굴욕을 참아야 하는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예수의 마음속 신념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즉, 자신을 바치기만 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제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고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전개할 수 있으며,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생활과 생존 상태가 이제 곧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념과 예수가 하고자 마음을 굳힌 일은 모두 인류를 구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여 다음 단계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

육신에서 살고 있는 도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그에게는 정상 인성이 있었다. 또한 그는 정상인이 구비한 감성과 이성(理性)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고통인지를 알고 있었다. 예수는 인류의 그런 생활을 보았을 때, 단지 사람에게 어느 정도 교훈만 해 주고, 어느 정도 공급이나 가르침만 해 주면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계명만 지키게 하면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사해 줄 수 있다고 깊이 느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고 목격한 후, 마음속에 인류를 죄 속에서 헤매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강렬한 소망이 생겼다. 예수는 그 소망에, 더더욱 자신이 되도록 일찍, 되도록 빨리 십자가에 올라 인류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때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죄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낀 후에 갖게 된 마음과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인류를 향해 이런 뜻을 가지고 이런 성품을 발표하고 유로하였는데,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구비한 것이냐? 보통 사람이 그런 환경 속에서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만일 보통 사람이 그 모든 것에 직면한다면, 높은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볼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그럴 수 없다! 비록 하나님 도성육신의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고 또한 사람의 지식도 배우고, 사람의 언어로 말하며, 심지어 어떤 때는 사람의 방식을 쓰거나 사람의 논법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지만, 인류를 대하고 일을 대하는 그의 실질은 패괴된 인류와 절대로 같지 않고, 또한 그가 서는 각도와 높이는 그 어떤 패괴된 인류도 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입은 육신도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구비하고 있고, 그의 마음과 인성에서 발표해 낸 것도 다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로 놓고 말하면, 육신이 발표한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다. 그런 공급은 단지 어느 한 사람만 상대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상대한 것이다. 패괴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속에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그 몇 명뿐이고, 자신이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사람도 단지 그 몇 명뿐이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기 집의 아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신의 부모이다. 상대적으로 ‘널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기껏해야 어떤 친척이나 괜찮은 친구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을까? 영원히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단지 사람의 각도와 사람의 높이에 서서 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성육신 하나님은 패괴된 인류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그 도성육신이 얼마나 평범하든, 얼마나 정상적이든, 얼마나 낮든, 심지어 사람들이 얼마나 업신여기든 그의 생각과 인류를 향한 태도는 아무도 구비할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신성의 각도에 서서, 조물주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질로, 하나님의 마음 상태로 인류를 대하고 있다. 그는 절대로 보통 사람의 높이에서, 패괴된 사람의 각도에서 인류를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은 인간의 안목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규례, 사람의 학설 등등을 가늠 기준으로 삼아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이고, 패괴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범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가늠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육신과 패괴된 인류가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다. 그 다른 점은 각자의 실질로 인해 결정된 것인데, 바로 그 다른 실질로 각자의 신분과 지위가 결정된 것이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각도와 높이도 결정된 것이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발표와 유로를 보았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가 행한 것과 말한 것은 모두 자신의 직분과 관계되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계되며, 모두 하나님 실질의 발표와 유로이다. 설령 예수에게 인성의 표현이 어느 정도 있을지라도 예수의 신성 실질과 유로를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런 인성의 표현들은 정말 인성의 표현일까? 예수와 패괴된 인류의 인성 표현은 실질상에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의 도성육신이다. 예수가 정말 패괴된 인류 중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그가 신성의 각도에서 인류의 죄악된 생활을 대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육신이 받는 고통은 무엇이냐?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너무나 큽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지만, 사람은 다 그분의 실질을 모르고 늘 그분을 사람으로 대하여 섭섭하게 하고 억울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정말 너무나 큽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무고하신 분이고 죄가 없으신 분인데 오히려 사람과 똑같은 고통을 받으시고 사람과 함께 박해, 훼방, 모욕을 당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오해를 참아 주시고 거역하는 것도 참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정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보아하니,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실, 너희가 말한 그런 고통은 하나님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원인은, 그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고통일까? 말씀으로 된 육신에게 있어서 진정한 고통은 또 무엇일까?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있어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 오해가 있어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늘 하나님이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 같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도성육신 된 기간에 인류에게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높고 큼을 보게 할 수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늘 그렇게 낮추면서 작디작은 육신에 자신을 감추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틀림없이 매우 고통을 받는다고 여긴다. 사람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에게 온갖 동정을 주며, 심지어 늘 이런 것에 대해 자그마한 찬미까지 드린다. 사실, 사람이 터득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차이가 있고 거리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도성육신이든 그런 고통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도성육신 하나님의 각도에서만 하나님이 받은 고통에 대해 교통해 보자.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존 방식, 생존의 법칙이 하나님에게 주는 느낌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마음에 혐오감을 느끼게 하지 않겠느냐? 왜 혐오할까? 인류의 생존 방식과 법칙은 무엇이냐? 어떤 원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냐?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등 그 모든 것은 다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을 토대로 하여 생긴 것이다. 그런 생존 법칙 아래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인성이 없고 진리가 없으며, 전부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만 가지고 있다. 우리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질을 보자. 하나님의 실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전혀 반대된다. 하나님의 실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 등등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제가 가득하다. 그런 실질을 구비한 하나님이 이런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데, 하나님 마음속의 느낌은 어떠할까?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자 아무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면한 것, 접촉한 것, 들은 것, 본 것, 체험한 것은 전부 다 인류의 패괴와 사악이고,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패괴된 인류는 실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패괴는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을 때, 자신과 공통 언어가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인류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느냐? 사람이 논의하는 것, 사람이 좋아하는 것, 사람이 추구하고 동경하는 것은 모두 죄와 관련되고, 모두 사악한 조류와 관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하지 않겠느냐? 그런 일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기쁠 수 있겠느냐? 위안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그런 고통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이라도 가진 적이 있느냐? 누가 거들떠본 적이라도 있느냐? 누가 또 몸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더 느끼지 못한다. 사람의 냉담과 사람의 마비는 하나님이 받는 고통에 설상가상이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는 가장 큰 고통일 것이라고 여긴다. 지금, 사실에서 보면 그러하냐?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태껏 육신이 받는 그런 고통으로 인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적이 없고, 지금까지 사람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거나 무엇으로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사람의 패괴된 생활과 패괴된 인류의 사악함을 목격하고, 사람이 사탄에게 통제되고 사탄에게 농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 사람의 그 모든 죄악에 하나님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인류에 대한 혐오는 날로 늘어나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는 크나큰 고통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마음의 소리, 자신의 희로애락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 완전하게 발표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진정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노력해 보는 사람도 없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한번 또 한번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대가에 대해 그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실질로 인해 하나님은 인류의 사악, 패괴와 죄악을 조금도 용인할 수 없고,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극도로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육신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너희는 이런 것을 보았느냐? 너희 중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천천히 체득해 보아라!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속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