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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편의 <사역과 진입>에서 발췌한 말씀

1. 사람이 생명의 정상 궤도에 들어선 후 지금까지도 많은 일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이 해야 하는 많은 사역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원인은 사람의 경험이 편향되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고, 또 하나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사람을 그 정도까지 인도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영적인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애매모호하기만 하다. 너희는 자신이 진입해야 하는 것에 대해 모호하고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것은 너희의 부족한 점이며 더욱이 모든 종교계 인사들의 커다란 허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허점’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병’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산을 밀어내고 바다를 뒤집는 것처럼 어려워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버림받았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다 죽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하게 죽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잔인무도하게 박해당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비극이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탓에 일어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느냐? 이것들은 종교계만의 부족한 점이 아니라 너희와 그들의 공통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흐름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상상하는 사역을 거창하게 행하고, 개인적인 바람과 사치스러운 욕망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 많은 이들이 제멋대로 허튼짓을 하고 하나님의 지위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런 것이 모두 사람의 ‘사심’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지 않느냐? 사람에게 기만 요소가 너무나 많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 중에서

2. 물론 사람이 매우 똑똑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행위가 그렇게 ‘대단하냐’? 누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파격적으로 높여 준 것일 뿐이다. 사람 그 자신에게 어떻게 그런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이 이제 시작되고, 그의 말씀이 이제 시작되었는데 사람이 스스로 괜찮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망신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깨달은 것이 너무 적다. 최고의 이론가나 언변이 뛰어난 연설가도 하나님의 풍부함을 모두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너희들은 어떻겠느냐? 너희는 자신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그 어떤 이성적인 사람보다도 낮게 생각해야지 하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너희가 진입해야 할 길이다. 자신을 누구보다 낮게 보아야 한다. 그렇게 대단하게 높일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너희는 긴 생명의 여정에서 이제 막 출발했다. 너희가 본 것은 하나님의 팔뿐이지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많이 보아야 하고 너희가 진입해야 할 것을 더 많이 발견해야 한다. 이는 너희의 변화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 중에서

3. 사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미천하다. 비록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만물 가운데 사람만이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사람만이 사탄의 온갖 수단에 의해 타락하여 자주권이 전혀 없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더러운 땅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탄에게 조롱당하고 사탄에게 죽을 만큼 농락당하고, 인간 세상의 풍파와 고난을 숱하게 겪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을 실컷 우롱한 후에 사람의 운명을 끝낸다. 이처럼 사람의 일생은 복잡하게 얽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탓에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을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채 사탄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유린당했다. 오늘날 사람은 더욱 지치고 활기가 없어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면 사람의 체험은 영원히 불완전할 것이고, 사람의 진입은 영원히 공백일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 중에서

4.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한 이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인의(仁義)와 지조 있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을 위해 한동안 사역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지위에 서서 사람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느냐? 무엇으로 진입을 논하겠느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매몰시켰다. 역대로 사역한 사람들 중에 진입한 사람이 아주 적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이 깨달은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의 위대함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다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경배하게 했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 중에서

5.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얼마나 오랫동안 은밀하게 있었는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안개 속에서 살펴보았는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에 셋째 하늘에서 살펴보았는지,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겨울 동안 만인 위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는지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고 침묵했으며 조용히 떠났다가 소리 없이 돌아왔다. 누가 그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느냐? 그가 사람에게 말씀한 적도 없고 사람에게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겠느냐?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왜 모르느냐? 오늘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했지만 사람은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한다. 사람의 생명 진입이 너무나 얕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자격이 전혀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 소원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의 심혈과 하나님의 사역이 모래 속에 파묻힌 금처럼 한 가닥의 빛도 낼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소양과 마음가짐, 관점에 매우 염증을 느낀다. 이해력이 부족하고 극도로 둔감하며 부패하고 속되고 노예근성이 너무 강한 데다가 나약하고 의지력도 없는 그들을 소나 말처럼 끌고 가야 한다. 영적인 진입과 하나님의 사역으로의 진입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고, 진리를 위해 고난받으려는 의지도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것이 말처럼 쉽겠느냐?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이 점에서부터 진입하고, 너희의 사역과 진입에서부터 하나님의 사역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 중에서

6. 사역이라 하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곳곳에서 전도를 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옳긴 하지만 아주 단편적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더 많이 돌봐 주고 공급하는 것이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체험했음에도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역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도 일치하는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사역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사람의 진입도 단편적이 되었다. 너희는 모든 측면에서 더 잘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에서부터 진입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진입해야 할 것이다. 사역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생명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사람을 영적으로 돌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람의 책임이자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다. 너희의 진입이 곧 너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과정에서 진입하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줄 아는 것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증거할 줄 알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사람을 영적으로 돌보고 공급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역이자 너희가 진입해야 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2> 중에서

7.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곳곳에서 설교하는 것만을 중시한 나머지 개인의 체험을 망각하고, 영적 생활에 진입하는 것을 간과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영적으로 돌본 이가 사역과 설교를 진입할 것으로 여기고, 개인의 영적 체험을 중요하게 진입할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령 역사로 인한 깨달음을 밑천 삼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든다. 또 설교할 때 큰 사명감을 느끼고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령의 메시지를 쏟아 낸다. 사역하는 사람은 이때 성령의 역사가 개인의 영적 체험인 양 득의양양해하며 자신이 한 말이 개인의 속성(원문: 所是)이라고 생각한다. … 이렇게 설교를 한 번 하면 자신의 실제 분량이 생각했던 것만큼 작지 않다고 느낀다. 성령이 이와 비슷하게 몇 차례 역사하면 사람은 자신에게 분량이 있다고 확신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곧 자신의 진입이고, 자신의 속성이라고 착각한다. 늘 이런 체험을 하다 보면 개인의 진입에 대해 해이해지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나태해져 개인의 진입을 전혀 중시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타인을 돌볼 때 네 분량과 성령의 역사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더 잘 진입할 수 있고, 너의 체험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성령의 역사를 개인의 체험으로 동일시하는 것에서 사람의 상태가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너희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너희의 진입을 핵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2> 중에서

8. 사역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을 다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며,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인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하나님 사역의 효과가 완벽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너희는 반드시 사역의 본질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할 자격이 있다. 즉, 모두가 성령께 쓰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기회를 가진 것이지만 사람이 말한 것과 깨달은 것이 사람의 분량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너희는 사역을 해야만 너희의 부족함을 더 잘 알게 되고, 더 많은 성령의 깨우침을 얻게 되며, 사역하면서 더 잘 진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인도를 자신의 진입이나 자신에게 원래 있었던 것으로 간주한다면 사람의 분량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성령은 사람의 상태가 정상적일 때 깨우쳐 준다. 이때 사람은 흔히 자신이 얻은 깨우침을 자신의 실제 분량으로 착각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깨우침이 너무나 정상적이고,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깨우침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역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영적 생활을 하거나, 기도를 할 때 불현듯 어떤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사실 사람이 깨달은 것은 성령의 깨우침(물론, 이 깨우침 역시 사람의 협력과 관계있음)일 뿐 자신의 실제 분량은 아니다. 사람이 또다시 한동안 체험하면서 실질적인 어려움에 많이 봉착하면 사람의 진실한 분량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그때야 사람은 자신의 분량이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사람의 사심, 잡념, 탐욕 등이 모두 쏟아져 나오게 된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많은 이들이 이런 체험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예전의 깨우침이 자신의 실제가 아닌 성령의 일시적인 빛 비춤이었고, 사람은 빛 비춤을 받은 것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쳐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은 배경에 관계없이 분명하고 명확한 경우가 많다. 즉, 사람의 어려움을 계시에 연관시키지 않고, 직접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입하는 가운데 어려움에 봉착할 때 이를 다시 성령의 깨우침에 연관시키면 사람의 실제 체험이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너희의 진입은 더욱 중시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 무엇이 너희의 진입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너희의 진입 속으로 끌어들여 성령의 온전케 함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너희에게서 성령 역사의 본질이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을 알고 자신도 알게 된다. 또한, 여러 차례의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일 조금씩 더 가까워지며, 수많은 책망과 연단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싹 틔우게 된다. 따라서 너희는 고통, 채찍질, 환난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성령의 역사만 있고 진입이 없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날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도 성령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진입이 없는 것도 무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치는 것은 사람의 열의를 유지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진입을 위해 활로를 열기 위함이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을 알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하기 위함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2> 중에서

9.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일을 맡겼으며, 사람의 진입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사람의 자질이 너무나 부족해 하나님의 많은 말씀은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람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이유는 다양하다. 사상과 도덕성이 부패하고 교양이 없으며, 봉건적 미신에 마음을 점령당했고, 타락하고 문란한 생활 방식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각종 폐단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98%의 사람들이 문화와 지식 교육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문화와 지식이 일천하고, 고등 지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더더욱 극소수이다. 이로 인해 사람은 영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봉건적인 미신으로부터 얻어진 신에 대한 막연하고 불명확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민족 기상’이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악영향과 봉건사상을 남겨 조금의 자유도 느낄 수 없게 옭아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패기도, 의지력도, 진취 정신도 없이 소극적이고 뒷걸음질 치며, 노예근성에 젖게 되었다. 이러한 객관적 요소들은 사람의 사상적인 풍격, 개인의 이상, 도덕, 성품을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추한 몰골로 만들었다. 이에 사람들은 공포의 암흑세계에 갇힌 양 벗어날 생각도, 이상적인 세상도 꿈꾸지 못한 채, 그저 현실에 안분지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노력하고 땀 흘려 일하며, 안락하고 원만한 가정을 꿈꾸고, 부부간에 사랑하며, 자녀는 효도하고, 즐거운 노년을 보내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낸다. 지난 수십 년,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아니 심지어 지금도 사람은 이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그 누구도 최고의 인생을 만들지 못했다. 그저 어두운 세상에서 서로 죽고 죽이고, 이익을 두고 다투며, 아귀다툼을 했을 뿐이다. 그들 중 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더냐? 누가 하나님의 사역에 신경을 썼더냐? 흑암 권세에 점령당한 사람의 이 모든 것들은 이미 고질화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전개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사람은 하나님이 맡긴 일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어찌 됐든, 나는 사람이 내가 말하는 것들을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수천 년의 역사(歷史)이다. ‘역사’란 사실을 말한다. 게다가 이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추태’인데, 굳이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3> 중에서

10. 하나님은 사람의 미신 활동을 가장 증오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놓지 못한 채 그러한 미신 활동을 하나님이 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날까지 말끔히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치르는 결혼 피로연이나 혼수, 그리고 축의금, 축하 파티 등 결혼과 관련된 허례허식과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말, 죽은 이를 위한 장례식에서 이뤄지는 모든 무의미한 미신 활동들을 하나님은 더욱 혐오한다. 그건 예배일(종교계에서 지키는 안식일 포함)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인정이나 세속적인 교류는 더욱 혐오한다. 모두가 아는 ‘설날’이나 ‘크리스마스’ 역시 하나님이 정한 것이 아닐진대, 명절 기간 동안 하게 되는 여러 가지 것들(대련(對聯), 떡, 폭죽, 크리스마스 선물, 등불, 크리스마스 파티, 성찬)은 더욱 사람들의 우상이 아니겠느냐? 안식일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고, 세마포를 입는 것은 한층 더 우상 같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용대두(2월 2일)’, ‘단오절’, ‘중추절’, ‘납팔’, ‘양력설’, 종교계의 ‘부활절’, ‘세례일’, ‘예수 탄생일’ 등 근본을 알 수 없는 명절들은 전부 예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전통이 된 것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와는 통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들은 사람의 풍부한 상상력과 ‘교묘한 구상’으로 인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어떤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전부 사람을 희롱하는 사탄의 장난 도구이다. 사탄이 떼를 지어 거하는 곳일수록 진부적이고 낙후하며, 봉건적이고 고루한 풍속이 심하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더욱 꽁꽁 얽어매고 있어 옴짝달싹할 여지조차 없다. 언뜻 독창적으로 보이는 종교계의 수많은 기념일이 하나님의 사역에 다리를 놓아 줄 것 같지만, 이는 전부 사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속박하는 무형의 밧줄이자 사탄의 간계라는 걸 어찌 모른단 말이냐? 사실, 하나님의 한 단계의 사역이 끝나면, 당시 사용한 도구나 ‘특색’은 모두 없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경건한 신도’들은 여전히 유형의 물질에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은 뇌리 한쪽으로 치워 살펴보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을 문밖으로 내쫓고 ‘사탄’을 집 안에 모신 것임은 알지 못한다. ‘예수의 초상화’, ‘십자가’, ‘마리아’에서부터 ‘예수의 세례’, ‘예수의 만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천주’로 여기며 경배하고 말끝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현재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전부 혐오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앞길을 단단히 가로막고 있으며, 사람의 진입에 있어서는 더욱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사탄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타락시켰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위트니스 리의 이론’, ‘로렌스의 체험’, ‘워치만 니의 개론’, ‘바울의 사역’ 등이 이미 사람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디서부터 손을 대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사람 내면에 ‘개인주의’, ‘이론’, ‘법도’, ‘규칙’, ‘제도’ 따위가 너무 많은 데다가, 봉건 미신적인 색채까지 더해져 사람을 약탈하고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감동적인 신화 스토리 같고, 구름 속을 떠도는 듯하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심금을 울리는 것이어서 눈이 휘둥그레지게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3> 중에서

11.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일 먼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뼛속까지 중독된 것들을 바로잡음으로써 사상과 도덕관을 바꿔 놓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이 종교 의식, 종교 활동, 연월, 절기 등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며, 이러한 봉건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농후한 미신 색채를 깨끗이 씻어 내야 한다. 이러한 것도 다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것에 포함된다. 너희는 하나님이 어째서 사람을 세속적인 것에서 나오게 하고, 또 어째서 사람을 규례 속에서 나오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가 진입하는 데 있어 관문과도 같다. 너희의 영적인 체험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이것들이 너희의 진입과 하나님에 대한 앎을 가장 크게 가로막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일종의 ‘그물’처럼 사람을 그 속에 가두어 마음대로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수없이 읽어 수많은 구절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진입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성경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가늠하며, 하나님이 행하는 이 단계 사역의 근거와 발원지가 성경인 양 군다. 하나님의 사역이 성경의 내용에 부합하면 사람은 그 사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하나님을 새로운 시선으로 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이 성경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은 초조함에 식은땀을 흘리며 하나님이 사역하는 근거를 찾으려 든다. 하나님의 사역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면, 사람은 하나님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이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을 몹시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고 깐깐하게 따져 순종하고, 건성으로 알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늘 과거의 것들을 반만 버리고 반은 남겨 놓는다. 이것을 진입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들은 다른 이의 서적을 끌어안고 보물처럼 여기며,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대문을 여는 ‘황금 열쇠’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현재 하나님의 요구는 들은 체 만 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똑똑한 전문가들’이 왼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오른손에 다른 이의 ‘명저’를 들고 있다. 그들은 그 ‘명저’ 안에서 오늘날 하나님이 하는 말씀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명저’와 결합하여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면서 ‘사역’을 하는 양 군다. 사실, 사람들 중 많은 ‘연구원’들은 오늘날의 최신 연구 성과, 게다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었던 연구 성과(하나님의 사역, 말씀, 생명 진입의 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자력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세 치 혀에 의지해 곳곳에서 ‘전도’하고, ‘하나님의 명예로운 이름’을 자랑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진입은 누란지세이며, 하나님의 요구와는 창세 때부터 현재까지의 거리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의 사역이 말처럼 그리 쉽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3> 중에서

12. 사람은 자신의 반은 과거에 남겨 놓은 채 반만 현재로 가져오고, 반은 사탄에게 건넨 채 나머지 반만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듯하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좀 위로를 받는 것 같다. 사람의 내면세계는 너무나 음험하다. 사람은 미래를 잃는 것도, 과거를 버리는 것도 두려워하며, 사탄에게 밉보일까 봐 겁내면서 하나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오늘날의 하나님을 거스를까 봐 겁내기도 한다. 사람은 사상과 도덕적 수양이 너무도 부족하기에 분별력은 더더욱 형편없다. 그래서 오늘날, 사역을 행하는 이가 정말 하나님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사람의 봉건 미신적 사상이 너무 뿌리 깊어 이미 오래전에 미신과 진리, 하나님과 우상을 같은 부류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분별할 마음이 없다. 마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확실하게 알 수 없기에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걸어가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전부 올바른 사상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생긴 결과이며, 사람의 진입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참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늘 관심이 없고, 사람(사람이 보기에 위인 같은 자들)이 하는 일에는 낙인이라도 새겨진 듯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전부 사람이 진입해야 할 최신 과제가 아니더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3> 중에서

13. 만약 사람이 정말로 성령의 역사에 따라 진입할 수 있다면 사람의 생명은 우후죽순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날 것이다. 현재 많은 이들의 분량에 비추어 보면 사람은 모두 생명을 전혀 중시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표면적인 일들을 중시하거나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니기만 한다. 목표도 없이 막막하게 사역하며, 나아갈 방향도 모르고, 누구를 위해 사역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낮추어 숨기며’ 일만 할 뿐이다. 사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말세의 뜻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의지력에 의존해 타인의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다. 마치 단단히 벼르며 어깨를 펼 날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이런 ‘기이한 광경’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 모두가 깨달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지금 많은 이들이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진입의 발걸음이 절망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것이 바로 사람이 동경하는 ‘무릉도원’이고, ‘자유의 경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곁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4> 중에서

14. 하나님은 중화 대륙, 즉 홍콩이나 대만 동포가 말하는 내륙에 성육신하였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에 왔을 때,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이 은밀히 재림한 참뜻이기 때문이다. 그가 육신을 입고 사역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아는 이가 없다. 어쩌면 이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도 있겠다.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이 얼마나 대단한 기세로 역사하든 하나님은 시종일관 내색하지 않으며,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이 단계의 사역은 천계(天界)에서의 사역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모두 보기는 했지만 알지는 못한다. 하나님이 이 단계의 사역을 끝내면 사람은 평소와 달리 긴 꿈에서 깨어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번에 육신으로 온 것이 호랑이 굴에 떨어진 것과 같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즉, 하나님은 이번에 육신으로 와서 사역하고 게다가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강생했기 때문에 더욱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땅에 온 것이다. 총칼, 몽둥이, 시험, 살기등등한 사람들에 직면하여 언제든 죽임당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진노를 지니고 왔다. 그러나 그는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즉, 구속 사역에 이어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 단계의 사역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천방백계로 시험의 공격을 피해 가며,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한 적이 없다. 예수가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원한 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일 뿐, 온전케 하는 사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이 반만 완성된 것이다. 구속 사역을 끝낸 것은 전체 계획의 반만 완성한 것이다. 새 시대가 곧 시작되고 옛 시대가 지나가기 직전에 아버지 하나님은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깊이 생각하고, 두 번째 부분의 사역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과거에는 말세에 성육신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 더 은밀하게 육신으로 오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만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동틀 무렵에 땅에 와 육신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이 순간이 도래하였음을 모른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을 수도 있고, 많은 이들이 깨어 기다릴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드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사역을 더 순조롭게 펼치고, 보다 나은 사역의 효과를 거두며, 더 이상의 시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봄잠에서 깨는 동틀 녘에 하나님의 사역은 이미 끝나 버렸고, 그때는 하나님이 땅을 떠남으로써 땅에서 떠돌며 기거했던 생애를 마쳤을 때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고 친히 말해야 하며, 사람이 손을 쓸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극심한 고통을 감수하고 땅에 와 친히 사역을 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시대의 수천 배에 달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내려와 자신의 일을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빈궁한 백성, 거름 더미 속의 사람을 속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고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크나큰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극악무도한데 어찌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이 때문에 하나님이 땅에 와서 늘 묵묵히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잔혹하게 굴어도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하늘의 아버지가 맡긴 더 중대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사역만 하고 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눈뜬 자가 있더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부담을 아들보다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영은 항상 걱정하고, 땅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간구하며 애태우는데, 어느 누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느냐? 하늘과 땅으로 헤어져 있기 아쉬워 항상 멀리서 마주하며, 영 안에서 함께한다. 인류야! 언제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것이냐? 언제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것이냐? 아버지와 아들은 본래 서로를 의지하거늘 이들을 하늘의 위아래로 갈라놓아야만 하겠느냐?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듯 아버지도 아들을 사모하거늘, 왜 하염없이 기다리고 고대해야만 한단 말이냐? 떨어져 있은 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날 속에 사랑하는 아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알겠느냐? 그는 지켜보고,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사랑하는 아들의 빠른 귀환을 위한 것이거늘, 세상 바다 끝까지 떠돌고 있으니 언제면 재회할 수 있을까? 상봉하는 날에 영원히 함께할지라도 어떻게 수천의 나날을 천상천하로 떨어져 지내겠느냐? 땅에서의 수십 년이 하늘에서의 수천 년 같거늘 어찌 아버지 하나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땅에 온 하나님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파에 시달린다. 하나님은 본래 죄가 없거늘 어찌 사람과 같은 고난을 겪게 하는 것이냐?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거늘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넘치게 주었는데, 사람이 무엇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다 보답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적어도 너무 적으니 어찌 하나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4> 중에서

15. 사람 중에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거의 하나도 없다. 사람은 자질이 형편없기 짝이 없고, 영감이 상당히 둔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야만성이 언제 되살아날지 몰라 늘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크나큰 시험을 무릅쓰고 땅에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영광을 가득 안고 그의 뜻을 숨김없이 다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이들을 온전케 하기로 결정했기에 고난이나 시험에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해 나가고 있다. 하나님이 영광받는 날이면 사람도 하나님을 알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때면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임할 때,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한 모든 일이 인류의 행복과 더 나은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무릅쓰고 왔을 뿐만 아니라 진노와 위엄도 지니고 왔다. 하나님이 사람을 떠날 때는 일찌감치 영광을 얻었으므로 영광과 귀환의 기쁨이 가득한 채로 떠난다. 땅에서 사역하는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어떻게 저버리든 상관하지 않고 그의 사역만 행할 따름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4> 중에서

16. 세상을 창조하고 수천 년의 역사(歷史)가 흐르는 동안 하나님은 땅에 와서 수많은 사역을 했지만 세상에서 수없이 버림받고 비방을 당했다. 또한 하나님을 반겨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수천 년의 고초를 겪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마음에 모진 상처를 입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람의 패역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계획을 세워 사람을 변화시키고 정결케 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와서 조롱, 비방, 핍박, 환난, 십자가의 고통, 사람의 배척 등을 더 겪을 수 없을 정도로 겪었다. 육신으로 온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갖은 고난을 겪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눈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그의 육신 앞에서 죽도록 참회하며, 그에게 거역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않은 지 오래다. 하나님은 너무도 큰 대가를 지불했지만 사람은 무사태평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신경조차 쓰지 않기 때문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4> 중에서

17. 지금 너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이 인생의 정상 궤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있고, 또 다른 시대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또, 하나님은 사람이 이 흑암의 옛 시대를 벗어나도록 인도하고, 사람이 육적인 것에서 빠져나와 흑암 세력과 사탄 권세의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게 한다.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사람의 내일을 향한 더 힘찬 발걸음을 위해,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더 잘 누리게 하기 위해, 육신을 입은 하나님도 사람이 고대하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도록 온 심혈을 기울여 사람의 앞길을 예비하고 있다. 너희가 이 아름다운 순간을 소중히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과 함께한 날이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사람이 이 아름답고도 짧은 세월을 영원한 기념으로, 땅에서의 보물로 삼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5> 중에서

18. 수천 년간 계속된 중국인의 노예 생활은 사람의 사상, 생각, 생활, 언행을 일말의 자유 없이 속박해 버렸다. 영을 가진 살아 있는 사람은 수천 년의 역사(歷史)에 시달려 영이 없는 죽은 사람처럼 변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칼 아래에서 살고, 많은 사람이 동물의 굴 같은 곳에서 살며, 많은 사람이 소나 말이 먹을 법한 음식을 먹는다. 많은 사람이 ‘저승’에서 나뒹굴고 있으면서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외모는 원시 인류 같고, 사람이 쉬는 곳은 지옥과 같다. 게다가 곁에는 온갖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따라다닌다. 겉보기에 사람이 고등‘동물’인 것 같지만, 사실 사람은 더러운 귀신과 함께 기거하고, 함께 생활한다. 다스리는 자가 없기에 사람은 사탄의 매복권 내에서 살고, 그 속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은 따뜻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기보다 ‘저승’에서 살면서 귀신, 마귀와 교제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사실, 사람은 사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더러운 귀신이 떼 지어 있는 곳에서 살면서 더러운 귀신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의 침대는 사람의 시체가 편히 잠든 곳이자 사람의 ‘안식처’인 것 같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5> 중에서

19. 사람과 동물은 함께 무리 지어 살면서 화목하게 지낸다. 한 번도 다툼이 벌어지지 않았고, 설전을 벌인 적도 없다. 사람은 동물을 살뜰하게 보살피고 배려하며, 동물도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을 위하고, 고분고분 순종하며 사람을 위해 산다. 겉보기에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상당히 융화적이고 조화롭다. 더러운 귀신이 바로 사람과 동물의 완벽한 결합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람과 땅의 더러운 귀신은 훨씬 더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고, 서로 헤어지기 싫어한다.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대해 우단사련*하고, 더러운 귀신도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한다. 사람은 매일 ‘염왕궁’에서 향락을 찾고, ‘염라대왕’(사람의 조상)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 지금 사람의 온몸은 이미 더러워졌고, 저승에 오래 머물다 보니 오래전부터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일단 빛을 보고,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초조와 불안을 느끼고 여전히 저승으로 돌아가 유령과 함께 살길 원한다. 사람은 진작 하나님을 잊어버렸기에 계속 묘지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5> 중에서

20. 사역과 진입은 본래 실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진입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본모습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에 진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말세에 이루는 사역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왜 큰 수모를 감내하면서까지 육신으로 임하여 사람과 영욕을 함께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 사역의 목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세 계획의 근본 취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이처럼 다양한 원인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입에 늘 미온적이고, 얼버무리기 일쑤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으로 하는 사역에 크나큰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마치 사람은 장애물이 되기라도 한 듯,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를 모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사역과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이야기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욥처럼 죽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온갖 치욕을 감내하며,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이 말세에 얻을 지기(知己)가 되도록 말이다. 나는 형제자매 모두가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하늘의 뜻을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바치고, 하나님 집의 거룩한 종이 되어 하나님의 무한한 약속을 누리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하루빨리 편히 쉴 수 있게 하기만을 바란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좌우명으로, 이 말을 사람의 진입을 위한 등대, 그리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지이다.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완전히 마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육신의 사역에 협력하는 것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 그가 하루빨리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도록 환송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아니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6> 중에서

21.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하나님의 성육신 사역을 끝낸 것이고, 온 인류를 속량한 것이며, 음부의 열쇠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은 부족함 없이 완성되었다고 여겼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가 작은 부분의 사역만 완성했을 뿐이다. 그는 인류를 속량하였을 뿐 정복하지는 않았고, 사람의 사탄과 같은 추한 몰골을 바꾼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성육신한 몸은 죽음의 고통을 겪었으나 이는 내가 성육신한 목적이 아니다. 예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나의 사역 중 일부만 완성하였을 뿐 모든 사역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성육신의 사역을 잇는 두 번째 계획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궁극적 뜻은 사탄의 손에서 구원한 사람을 온전케 하고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육신으로 온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6> 중에서

22. 하나님은 이미 많은 곳에서 시님(원문: 秦國) 땅에서, 즉 세계의 동방에서 이긴 자들을 얻으리라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하는 곳은 틀림없이 시님 땅인 것이다. 바로 큰 붉은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에서 큰 붉은 용의 자손들을 얻음으로, 그것에게 완전한 실패와 수치를 안겨 줄 것이다. 하나님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들을 완전히 깨워서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고 큰 붉은 용을 버리게 할 것이다. 또한 꿈에서 깨어나고 큰 붉은 용의 본질을 알아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어둠 세력의 억압 속에서 힘차게 일어나 세상의 동방에 굳게 서는 하나님의 승리한 증거가 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마친 사역을 다시 큰 붉은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가 떠난 2천 년 후 또다시 육신으로 와서 은혜시대의 사역을 이어 나간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다시 육신으로 새 사역을 펼친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단지 몇천 년이 흘렀고, 사역의 장소와 내용이 달라졌을 뿐, 계속 은혜시대의 사역을 이어 가는 것으로 본다. 오늘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육신이 입은 형상은 예수와 확연히 다르나 그 본질과 근원은 결국 하나이고, 하나의 근원인 것이다. 또한, 겉보기에는 비슷하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일 수 있으나 사역의 실상은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완전히 다른 시대인 만큼 하나님의 사역도 천편일률적이거나 서로 방해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6> 중에서

23. 예수는 유대인의 모습을 취하고, 유대인의 옷차림을 하며, 유대인의 음식을 먹고 자랐다. 이는 정상인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아시아 백성의 모습을 취하고, 큰 붉은 용 나라의 음식을 먹으며 자랐다. 이는 하나님이 성육신한 목적에 모순되지 않으며, 상득익창*으로 하나님 성육신의 참된 의미를 더욱 온전하게 한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인자’ 또는 ‘그리스도’라고 불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겉모습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육신은 결국 ‘인자’로 불리고, 육신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단계의 사역은 상당히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이유는 그가 본래 죄인을 속량해야 하므로 반드시 죄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죄인의 형상으로 죄인의 죄를 담당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저주받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십자가(십자가는 본래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고 형벌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저주와 형벌은 죄인을 대상으로 함)에서 사람을 구원했다. 죄인들이 다 회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죄를 자복하게 하였다. 즉, 하나님은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된 육신으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거룩한 육신으로 모든 죄인을 바꿔 온 것이다. 이는 예수가 사탄 앞에서 ‘속죄제’로 내어져 사탄에게 짓밟힌 무고한 인류를 하나님께 돌려 달라고 ‘간청’한 것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했다. 이는 필요조건이자 아버지 하나님과 사탄이 싸울 때 맺은 ‘조약’이다. 그래서 예수가 사탄에게 넘겨진 후에야 그 사역을 끝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사탄 역시 무엇을 요구할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성령으로 잉태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본래 거룩하며 무고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성육신한 하나님은 더 이상 은혜시대의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란 말이냐? 하나님이 성육신하는 것에도 규례가 있어야 한단 말이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6> 중에서

24. 많은 이들이 성경에서 관련 근거와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예언을 찾으려고 한다. 사고의 회로가 끊긴 사람의 머리로 하나님이 더 이상 성경 안에서 ‘사역’하지 않고 성경 밖으로 ‘뛰쳐나가’ 오래전에 계획했으나 사람에게 알린 적이 없는 사역을 즐거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은 너무도 비이성적이어서 수박 겉 핥기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높은 곳에 서서, 고급스러운 ‘휠체어’에 앉아 하나님의 사역을 상고한다. 심지어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을 가르치려 든다. 많은 ‘어르신’들이 돋보기를 쓰고 수염을 쓸어내리며 평생 동안 보아서 누렇게 변한 ‘오래된 누런 달력’(성경)을 펼친다. 두 눈을 반짝이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계시록을 펼쳤다, 다니엘서를 펼쳤다, 널리 알려진 이사야서를 펼쳐 보기도 한다. 검은 글자가 빼곡히 적힌 책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묵독하고,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갑자기 수염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멈추고, 수염을 잡아당긴다. 이따금 수염이 뜯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한 행동은 ‘왜 저렇게 세게 잡아당기지? 왜 화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웠다. 다시 ‘어르신’을 보니 그의 양미간이 떨려 오고, 하얗게 센 눈썹이 깃털처럼 눈꺼풀에서 2cm 떨어진 곳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다. 우연인 듯하지만 제법 어울린다. ‘어르신’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곰팡이가 핀 듯한 책장을 응시한다. 몇 번 반복해서 읽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누군가와 인사말을 주고받는 듯하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여전히 ‘누렇게 변한 달력’에서 맴돈다. 그가 갑자기 보고 있던 페이지를 덮고, 바로 ‘다른 세상’을 펼친다. 조급한 행동이 다시 두려움을 자아내고 당황스러운 느낌을 주는 듯하다. 구멍에서 나온 쥐는 그가 침묵할 때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혼비백산하여 쏜살같이 구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멈추었던 ‘어르신’의 손이 다시 위아래로 움직이며 ‘수염을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책상 위에 놓는다. 문틈과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무정하게 책을 덮었다 펼치며 형용할 수 없는 처연함을 자아낸다. 이때에는 책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만 들릴 뿐 만물이 침묵을 지키는 듯하다. 그는 방에서 뒷짐을 진 채로 서성인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움직인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정말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까?”라고 중얼거리다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님이시여! 누가 당신의 사역을 측량할 수 있겠나이까? 당신의 발걸음은 어찌 이리 찾기가 힘든 것입니까?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때 ‘어르신’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두 눈을 감은 채 난감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신중하게 의논을 해 보려는 듯 극도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정말 ‘어르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한평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불행히도’ 이런 일을 당하였으니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누가 그의 ‘오래된 누런 달력’이 ‘누렇게’ 변하라 했더냐? 누가 그의 수염, 눈썹이 흰 눈처럼 무정하게 얼굴의 각 부위에 자라나라 했더냐? 마치 그의 수염이 그의 경력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런데 사람이 ‘오래된 누런 달력’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을 정도로 어리석을지 누가 알았겠느냐? ‘오래된 누런 달력’이 몇 장이나 된다고 하나님의 행사를 있는 만큼 다 기록할 수 있겠느냐?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은 글귀에 천착하여 하나님의 현현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 하며, 이로써 생명에 진입하려고 한다. 이것이 어찌 말처럼 쉽겠느냐? 이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그릇된 논리가 아니냐? 우스꽝스럽지 않으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6> 중에서

25. 오늘날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온 목적은 천만년 동안 이어져 온 사람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하나님의 형상을 바꾸기 위함이다. 또한, 이 기회에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즉, 사람의 ‘인식’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법,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을 되돌리고, 사람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고 바꾸고자 함이다. 책망과 징계는 방식이고, 정복과 갱신은 목적이다. 사람이 막연한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미신적인 사상을 타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며, 하나님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절박한 마음이다. 모두가 이를 신중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모든 사람이 체험의 방식을 바꾸어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이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하여라. 하나님이 땅에서 행하는 마지막 단계의 사역이 완벽한 성공에 이를 수 있도록 하여라.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한 번 위로하여라. 형제자매 중 그 누구도 이를 행함에 있어 책임을 회피하거나 건성으로 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26.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온 것은 초청에 응하여 온 것이고,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온 것이다. 즉,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자 온 것이다. 요컨대 사람의 자질과 교양이 어떠하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현현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온전케 되고 사상과 관념을 바꾸어 하나님의 본래 모습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땅에서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다. 천성적인 것이 얼마나 많든, 사람의 본질이 얼마나 나쁘든, 과거에 사람이 도대체 어떤 행위를 했든, 하나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이 마음속에 자리하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바꾸고, 인류의 본질을 인식하여 사상적 면모를 바꾸길 바랄 뿐이다. 또한, 하나님을 마음속 깊이 그리워하고, 하나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유일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27. 수천 년의 고대 문화와 역사적 지식으로 사람의 의식과 생각, 정신 면모는 물샐틈없이 밀봉되었는데, 호추부두(戶樞不蠹)와 같다. 사람은 십팔 층 지옥에서 살며, 하나님에 의해 지하 감옥에 던져진 것처럼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봉건사상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억눌려 질식당하고, 반항할 여력이 없어 묵묵히 참고 또 참는다. 지금까지 정의와 공평을 위해 싸우거나 일어선 자가 아무도 없다. 그저 봉건사상의 가혹한 학대와 속박에 시달리며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가격을 당하여 늦가을의 낙엽처럼 시들었을 뿐만 아니라 누렇게 뜨고 바싹 야위었다. 사람은 오래전에 기억을 잃고, 인간 세상이라 불리는 지옥에서 속절없이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 고대하는 종말의 날이 ‘편히 누리는’ 날인 것처럼 종말의 날을 기다리고, 지옥과 함께 파멸을 맞고자 한다. 봉건적 예교가 사람의 삶을 ‘저승’으로 이끌어 사람은 반항할 힘을 더 잃게 되었고, 온갖 압박 속에서 한 걸음씩 저승으로 추락하여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에 사람은 하나님과 생면부지의 사이가 되어 얼굴을 마주하면 계속 피하기에 급급하다. 모두가 하나님을 안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고립시켰다. … 고대 문화의 지식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몰래 훔쳐 마왕과 그 자손에게 넘겼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사람의 사상적 관념을 또 다른 패역의 시대로 끌어갔으며, ‘서경(書經)’의 편자를 더욱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갈수록 쌓여만 갔다. 어느덧, 마왕은 사람 마음속의 하나님을 무정하게 내쫓고, 득의양양해하며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였다. 그때부터 사람은 추악한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마왕의 몰골을 하게 되었으며, 사람의 가슴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마왕의 사악한 독은 매일 사람 안에서 퍼져 나갔고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고, 마왕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대로 마왕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어린 마음에 ‘무신론’이란 암세포를 심어 버렸다. ‘과학과 기술을 배워 4대 현대화를 실현하자.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이론을 교육시키고, 말끝마다 “우리의 근면한 노동으로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꾸려 가자”라고 외쳐 대며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이에 동참하여 조국에 보답해야 한다고 교육한다. 이렇게 마왕은 사람들을 무의식 속에서 자기 앞으로 오게 만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공(하나님의 손길이 온 인류를 잡아 주고 있는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으며,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뻔뻔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자신은 쥐처럼 책상 위로 ‘뛰어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경배하게 한다. 이 악당들아! 입으로 ‘세상에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한 변화이고, 비는 안개가 찬 공기를 만나 응결되어 작은 물방울로 맺힌 후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진은 지형의 변형이 초래한 지각의 흔들림이고, 가뭄은 태양 표면의 핵자가 깨지고 갈라지면서 초래된 건조한 공기이다. 이것이 자연 현상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행사일 수 있겠는가?’와 같은 끔찍한 소문을 퍼뜨리는구나.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고대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이고, 지금의 세계는 약 억만년 전의 원시 사회가 교체되며 형성된 것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두 손에 달려 있다.’는 등등의 입에 담기도 민망한 논리를 외치는 자도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화상을 벽에 거꾸로 걸거나 책상 위에 봉안하고 경배하게 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외치며 스스로를 신으로 간주하고, ‘사정없이’ 하나님을 지계(地界) 밖으로 밀어내며,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마왕 노릇을 하려 든다.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하나님이 마왕의 원수이고,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내쫓고 자신은 법망 밖에서 활보하려고 한다. 이런 마왕들! 어찌 그것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여 볼품없이 만들고,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들쑤시고 나서야 손을 놓는다. 하나님께 끝까지 맞서려는 듯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든다. 고의로 하나님과 대립하고 점점 강한 압박을 가한다. 추악한 몰골은 이미 오래전에 낱낱이 드러났고, 곤경에 처하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내려놓지 않는다. 하나님을 통째로 집어삼켜야 마음속의 원한이 풀릴 것처럼 군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인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그것을 말살시키고 근절해야 금생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어찌 그것이 계속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을 타락시켜 하늘해(원문: 天日)를 모르게 만들었고, 아둔하고 무감각하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의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 우리의 온몸을 바쳐 그것을 쳐부수고 불태워 후환을 없앰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하루빨리 공전의 성황을 이루도록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 악한 무리들이 인간 세상에 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불안을 조성하였고,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사람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게 한 다음 사람의 시체를 집어삼키려는 속셈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하나님과 겨루어 보겠다는 헛된 생각을 하며, 모든 것에 올인했지만 그것이 어디 말처럼 쉽겠느냐!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마왕을 위해 준비한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마귀에게 던졌고, 일찌감치 승리하였으며, 인류의 죄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28.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과 맞선다. ‘오랜 문화 유산’, 소중한 ‘고대 문화의 지식’, ‘도교의 학설, 유교의 학설’, ‘공자의 경전, 봉건적 예교(禮敎)’와 같은 것들이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현대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발달한 공업, 농업, 상업은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고대 ‘유인원’이 가져다준 봉건적 예교만을 강조하며 고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대적하고, 무너뜨리고 사람을 오늘날까지 해쳐 왔다. 게다가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한다. 사람은 봉건적 예교의 가르침을 받고 고대 문화의 지식을 물려받아 크고 작은 마귀로 물들어 버린 지 오래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오심을 즐겁게 맞이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다. 사람은 모두 얼굴에 살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에 독살스러운 기운이 잔뜩 올라와 있으며, 하나님을 육지에서 몰아내려 한다. 손에 칼을 쥔 채 진을 치고 하나님을 ‘말살’하려 한다. 항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마귀의 땅에는 우상이 널려 있다. 온 땅의 상공에는 종이를 태우고 향을 피우는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하여 숨 쉬기가 힘들 정도이다. 마치 독사가 뒹굴며 일으키는 썩은 흙냄새와 같아서 구토를 유발한다. 또한, 머나먼 지옥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한 악귀의 ‘독경’ 소리는 몸서리치게 한다. 알록달록한 우상이 빼곡히 진열된 땅은 주지육림의 세계로 전락했다. 마왕은 음모를 실현한 듯 섬뜩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데,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또한 마귀에 의해 타락하여 정신이 혼미하고 실의에 빠져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리고, 하나님을 다시 욕되게 하고 암살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고 방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땅에서 인간 세상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폭로하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망치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악에 받쳐 있는 마귀가 하나님이 땅에서 그것의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어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겠느냐? 추악한 몰골이 남김없이 드러나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고, 언급할 수조차 없다. 이것이 마귀의 본질이 아니겠느냐? 그런데도 추악한 영혼은 이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악의 앞잡이들! 속세에 내려와 쾌락을 추구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염량세태를 초래하고, 사람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사람을 농락하여 성결했던 본래의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하고 사악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 군림하고 세상을 호령하려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방해하고, 사람을 철옹성처럼 둘러싸 가둔다. 이렇게 많은 죄업을 쌓고, 화를 불러오고도 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잡귀와 요괴가 세상에서 잠시 횡행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심혈을 물샐틈없이 차단시켰다. 이토록 말할 수 없이 극악무도하거늘 어찌 하나님이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찌 하나님이 크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심히 가로막고 대적하니 이보다 더한 패역이 어디 있겠느냐! 크고 작은 잡귀조차 호가호위하며, 덩달아 풍파를 일으키며, 진리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대적한다. 패역한 자식들! 그것의 염라대왕이 ‘왕’이라고 새겨진 보좌에 오르기라도 한 듯 유유자적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구나. 진리를 찾고 정의를 따르는 자가 몇이나 되느냐? 개돼지,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 역겨운 파리 떼를 이끌고 거름 더미 속에서 의기양양해하며 못된 수작을 부린다. 자신의 ‘염라대왕’이 가장 대단한 ‘왕’이라고 생각하며 우쭐한다. 자신이 역겨운 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는 것이냐? 개돼지만도 못한 부모의 힘에 기대어 하나님의 존재를 모독한다. 보잘것없는 파리가 자신의 부모는 이빨고래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보잘것없이 작고, 제 부모는 자신보다 수억 배나 큰, 더러운 개돼지임을 어찌 알지 못하느냐? 자신의 비천함을 모른 채 개돼지의 ‘썩은 냄새’를 믿고 곳곳에서 횡포를 일삼고, 후대를 번성하겠다는 헛된 생각에 빠져 부끄러움도 모른다. 초록색 날개를 달고(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을 내세움) 잘난 체하며, 여기저기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뽐낸다. 자신의 더러움을 슬그머니 사람에게 내던지고, 오색찬란한 날개로 자신의 더러운 것들을 감추었다는 듯 득의양양해하며 참 하나님의 존재를 핍박한다(종교계의 실상을 가리킴). 파리가 날개는 아름답고 매혹적일 수 있어도 배 속은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은 독을 가진 균으로 들끓는, 작디작은 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이 어찌 알겠느냐? 파리는 개돼지 부모에 기대어 횡포를 부리고(하나님을 핍박하는 종교계의 관계자들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참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배반하는 것을 일컬음), 미쳐 날뛴다. 마치 떠돌던 유대 바리새인의 영혼이 하나님을 따라 큰 붉은 용의 나라, 자신의 소굴로 되돌아와 또다시 핍박을 시작하고, 수천 년 동안 해 온 일을 이어 나가는 듯하다. 이 인간쓰레기들은 결국에는 땅에서 멸망할 것이다! 수천 년 후 더러운 귀신은 더욱더 ‘교활하고 간사해진’ 듯하다. 속으로 늘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겠다는 생각을 품고, 온갖 술수를 쓰며, 수천 년 전의 비극을 자신의 고국에서 ‘재연’하려 한다. 하나님은 핍박을 받다 못해 큰 소리로 부르짖을 뻔했고, 당장이라도 셋째 하늘로 되돌아가 당장 그것을 멸해 버리고 싶게 만든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알며, 그가 혐오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사람의 진입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진입이 빠를수록 하나님의 마음은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마왕을 꿰뚫어 볼수록 하나님과의 거리가 좁혀져 하나님의 바람을 이룰 수 있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29. 하나님이 말세에 하는 사역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누차 말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은 크나큰 상처를 받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죄악에 깊게 물들어 해를 입은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즉, 사람의 영을 일깨움으로써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소생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다. 사람의 생명과 체험이 얼마나 높고 깊은지는 차치하자. 사람의 마음이 일깨워질 때,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 큰 붉은 용의 해악을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의 본직 사역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날, 즉 사람이 본격적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기 시작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직분도 끝을 고하게 된다.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사역은 전부 끝나고, 사람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 그러니까 사람의 ‘직무’를 이행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역의 절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러한 것을 인식한 기초 위에서 진입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전부 너희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30. 사람의 마음이 변화해야 더 잘 진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은 속량해 온 사람들, 여전히 흑암 세력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마귀가 군집하는 땅에서 철저히 구원하여 천고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큰 붉은 용을 완전히 뭉개 버려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 하나님의 마음이 한시바삐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너희 마음 가득한 원한을 ‘남김없이’ 발산하게 하고, 곰팡이가 슬어 버린 독균(毒菌)을 깨끗이 없애며, 소나 말 같은 삶에서 벗어나 더는 노예 생활을 하지 않게 하고, 더는 큰 붉은 용에게 마구 유린당하거나 함부로 부림 받지 않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더 이상 이 패망의 민족에도, 죄악이 만연한 큰 붉은 용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더는 그것의 부림을 받지 않게 된다. 마귀의 ‘소굴’은 반드시 하나님 손에 부서져 멸망될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선 너희는 이 노예 왕국이 아닌,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 어둠의 사회를 뼈에 사무치도록, 이가 갈리도록 증오했다. 당장이라도 이 극악무도한 옛 뱀을 짓밟아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님은 그것의 과거도, 더 이상 사람을 속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역대로 쌓인 죄업을 하나하나 전부 청산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 괴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며, 철저히 없애 버릴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31.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결의 땅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더럽고 도처에 참상이 난무해 있다. 곳곳에서 유령이 횡포와 협잡을 일삼으며 사시이비한 언행과 악랄한 수법이 가득하다. 이렇게 무참히 짓밟힌 귀신의 성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썩은 내가 온 땅의 상공을 뒤덮고 있다. 게다가 삼엄한 경계를 펼치니 누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겠느냐? 마귀는 사람의 온몸을 꽁꽁 묶고 두 눈을 가렸으며, 입을 단단히 막아 버렸다. 수천 년 동안 횡행한 이 마왕이 오늘날에도 마귀의 성을 이토록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으니, 마치 난공불락의 ‘마귀 궁전’ 같다. 그리고 이 집 지키는 개들은 하나님이 빈틈을 노려 그들을 일망타진하면 ‘안락’의 땅을 잃을까 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런 마귀의 성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어디에서 누려 봤겠느냐? 인간 세상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이 지극히 은밀하게 성육신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어두운 사회의 마귀는 잔인무도하다. 사람을 죽여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마왕이 어찌 사랑스럽고 선량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겠느냐? 어찌 하나님의 강림을 반기겠느냐? 그 개만도 못한 노예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하나님을 괄시하고 극히 잔인하게 굴며 하나님을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흉포하게 약탈을 일삼고, 악랄한 수작을 부렸으며, 양심을 내다 버리고, 무고한 인류를 유혹해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고대의 것들을 계승하는 후계자니, 경애하는 지도자니 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다! 다 세상을 농락해 어둠으로 밀어 넣는 것들이다! 종교와 신앙의 자유요,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요 하는 것은 전부 죄악을 가리려는 수법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누가 지지하더냐?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목을 내놓고, 피를 흘리는 자 그 누구더냐? 조상 대대로 노예로 부림 받던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노예로 부리려 한다. 그러니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천고의 원한이 마음에 맺히고, 만고의 죄악이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 그러니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원한을 갚고, 하나님의 원수를 철저히 없애 버릴 것이다. 이렇게 계속 미쳐 날뛰고 제멋대로 발광하라고 해라! 이제 때가 왔다. 사람은 그 마귀의 추악한 몰골을 벗겨 버리기 위해 일찍이 온몸의 힘을 모아 잘 준비하고 모든 심혈과 대가를 바쳤다. 그리하여 속임을 당하고 고통과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그 아픔 속에서 떨쳐 일어나 이 악마를 저버리게 해야 한다. 어찌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물샐틈없이 가로막는 것이냐? 어찌하여 갖가지 수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이냐? 진정한 자유와 합법적인 권익이 어디에 있느냐? 공평이 어디에 있느냐? 위로가 어디에 있느냐? 따스함이 어디에 있느냐? 어찌하여 간계로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의 강림을 강제로 막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으로 자신이 창조한 땅에서 마음대로 노닐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머리 둘 곳도 없게 쫓아가 죽이려는 것이냐? 인간 세상의 따스함은 어디에 있느냐? 인간 세상의 환영은 또 어디에 있느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짖도록 만드는 것이냐?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하게 몰아붙이는 것이냐? 어두운 사회와 궁지에 빠진 집 지키는 개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으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고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크나큰 고통을 감내하고, 가슴 아프지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골육을 너희에게 주었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본 체도 하지 않는 것이냐? 너희는 모든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강림을 저버렸고, 하나님의 우정을 거절했다. 어찌하여 그리도 양심이 없는 것이냐? 이런 어두운 사회에서 억울함을 참고 살겠단 말이냐? 어찌하여 가슴에 천고의 원한을 품지 않고 마왕의 ‘배설물’을 채우는 것이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32.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걸음걸음 방해물이 산적해 있다.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 미숙함, 무지함, 사람의 모든 것을 위해 다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을 수 없고,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마치 ‘종이호랑이’ 같아서 감히 건드릴 수도, 화를 돋울 수도 없다. 조심스럽게 살짝 건드려도 도리어 물거나 또는 쓰러지거나 길을 잃기 때문이다. 사람은 조금만 눈을 떼도 제 버릇 못 고치고 예전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을 본체만체하거나 ‘개돼지’ 부모의 품으로 달려가 그것들의 몸에 있는 오물을 즐길 것만 같다. 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냐! 하나님의 사역은 매 단계가 시험이며, 한 번 한 번 다 크나큰 위험을 감수하며 사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간곡하고 의미심장하며 악의가 없지만, 그것을 누가 받아들이기를 원하더냐? 누가 완전히 복종하기를 원하더냐?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만 할 뿐이다. 사람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사람의 생명을 위해 초조해하며, 사람의 연약함을 헤아리고 있다. 그런데도 모든 사역과 모든 말씀이 다 많고 적은 우여곡절을 겪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밤낮으로 사람의 연약함과 패역, 미숙함, 유약함 등을 생각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데 이것을 누가 알아주더냐? 이것을 누구에게 털어놓겠느냐? 누가 이해하겠느냐? 늘 사람의 죄를 증오하고, 줏대 없고 유약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또 늘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사람이 직면한 길을 생각한다. 또한, 사람의 언행을 보며 긍휼을 가득 베풀지만 또 분노로 가득 차기도 하고, 늘 사람을 눈에 담으며 안쓰러워한다. 무고한 사람들은 분명 무감각해졌는데 굳이 그들을 힘들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유약한 사람들에게 이미 의지력이라곤 없는데 굳이 그들에게 분노를 쏟을 이유가 있겠느냐?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굳이 그들의 패역을 훈계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위협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 사람은 결국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가슴 깊은 곳에 묻고 사람이 천천히 반성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는 극도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깨닫지 못한다. ‘늙은 마왕’에게 짓밟혀 지각이라곤 남아 있지도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미지근한 태도로 대한다. 많은 말씀을 했는데 진지하게 대한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초조해하거나 갈급해하지 않으며, ‘마귀’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저승과 지옥에서 살면서도 ‘바닷속 궁전’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고, ‘큰 붉은 용’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국가의 ‘은총’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귀’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고도로 육적인 것의 ‘기예’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불결하고 천박한 머저리들! 비참한 불행을 맞닥뜨리고도 알지 못하는구나. 이런 어두운 사회에서는 화가 홀로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니, 자기 위안과 노예의 성품을 언제쯤 벗어 던지려느냐? 어째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냐? 이러한 압박과 고난을 모두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냐? 언젠가 흑암을 광명으로 바꾸고 싶지 않단 말이냐? 꺾여 버린 정의와 진리를 되찾아 오고 싶지 않단 말이냐? 진리를 저버리고, 사실을 왜곡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겠느냐? 기꺼이 참아 넘기겠느냐? 기꺼이 노예가 되겠느냐? 기꺼이 망국노들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멸망을 당하겠느냐? 너의 의지는 어디에 있느냐? 너의 포부는 어디에 있느냐? 너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인격은 어디에 있느냐? 또 너의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진정 ‘큰 붉은 용’이라는 마왕을 위해 네 일생을 바치겠느냐? 진정 평생 그것에게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하겠느냐?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은 하늘과 땅을 원망하고 있다. 어찌 사람이 태양을 볼 날이 있겠느냐? 미약하기만 한 사람이 어찌 이 잔인한 폭군 마귀와 겨룰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하루빨리 자신의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느냐? 아직도 망설이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역이 언제쯤 완성되겠느냐? 이렇게 아무 목표도 없이 압제를 당하면 결국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될 텐데 굳이 총총히 왔다가 총총히 갈 필요가 있겠느냐? 어찌하여 귀한 것을 조금이라도 남겨 하나님께 바치지 않느냐? 천고의 원한을 모두 잊은 것이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33.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한 이유는 이 사역을 하기 위함이다. 즉, 그가 아직 완성하지 않은 사역을 끝내고, 이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 시대를 심판하며, 죄악으로 물든 사람들을 고해에서 구해 내어 철저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유대 여정’을 끝냈다. 그리고 머지않은 어느 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친히 인간 세상에 강림했다. 큰 붉은 용의 나라에 조용히 임한 것이다. 사실, 유대 국가의 종교계는 오래전부터 예수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 놓았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아버지의 두 번째 명을 받고 못다 한 제2단계의 사역을 하기 위해 벌써 인간 세상에 돌아왔음을 그들이 어찌 알겠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목할 때, 그는 오히려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완전히 시대가 바뀌어 버린 다른 세상에 강생했는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의 차림새와 전체적인 면모 또한 환골탈태라 할 수 있을 만큼 변했다. 그러니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부활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느냐! 그의 몸에는 어떤 흉터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예수에게 여호와의 형상이 조금도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때의 예수는 그전의 ‘풍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알아볼 수 있었겠느냐? 의심 많은 ‘도마’는 그가 부활한 예수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며 늘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봐야만 마음이 놓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의혹’에 휩싸여 ‘속 편하게’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가 맡긴 사역을 하러 왔다는 것을 불쌍한 ‘도마’가 어찌 알았겠느냐? 어째서 반드시 ‘못 자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냐? ‘못 자국’이 예수의 표식이기라도 하단 말이냐? 그가 사역을 하러 온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째서 수천 년 전 유대인의 꾸밈새와 차림새를 하고 와야 한단 말이냐? 육신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것은 누가 ‘정해 놓은 논리’냐? 하나님의 사역이 어째서 반드시 사람의 상상에 부합해야 한단 말이냐? 하나님의 사역은 성과만을 추구하며, 율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떤 규칙도 없다.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겠느냐? 사람의 관념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히 알 수 있겠느냐? 그러니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오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마지막에 형벌 속에 떨어져 ‘앞자리’에 있던 네가 형벌받는 자들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도, 비웃음을 당하고 싶지도 않다면, 사소한 일을 크게 떠벌리지도, 호들갑을 떨지도 말고 조용히 있어라. 잔꾀를 부리다가 일을 망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생쥐처럼 좁은 너의 식견으로 정말 영원에서 영원까지 바라보는 하나님을 밝히 볼 수 있겠느냐? 너의 얄팍한 체험으로 어찌 하나님의 뜻을 전부 꿰뚫을 수 있겠느냐?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쨌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러니 그가 하는 사역이 어찌 네 예상 범주 안에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8> 중에서

34. 유구한 ‘민족 전통’과 ‘정신적 풍모’는 너무 일찍 사람의 순결하고 어린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조금의 ‘인성’도 없이 무자비하게 사람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다. 이 마귀들의 수법은 극도로 잔인하여 마치 ‘교육’이나 ‘육성’이 사람을 죽이는 마왕의 ‘전통적인’ 수법이 된 듯하다. 마귀는 ‘심도 있는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추악한 영혼을 숨기고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사람을 속여 신임을 얻어 낸 후,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사람들을 전부 삼키려고 한다. 불쌍한 인류가 어찌 자신이 나고 나란 곳이 마귀의 땅이며 자신을 키워 준 자가 자신을 해친 원수인 줄 알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사람은 각성하지 못했음은 물론,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시자 ‘키워 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사람은 아직도 자신을 키워 준 ‘국왕’이 실은 자신의 원수임을 모르고 있다. 땅에는 죽은 자의 유골이 도처에 흩어져 있고, 마귀는 기뻐 날뛰며 ‘저승’에서 계속 사람의 육체를 삼키고 있다. 사람의 시체를 자신과 함께 순장시키려고 마지막에 살아남은 만신창이가 된 사람까지 다 삼키려고 든다. 그런데도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고 마귀를 원수로 대하기는커녕 도리어 성심성의로 섬기고 있다. 이렇게 타락한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성육신하여 모든 구원 사역을 하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겠느냐? 이미 저승에 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9> 중에서

35. 하나님은 인류의 사역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지옥에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인간 세상의 쓸쓸함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사람의 패역을 질타한 적도 없다. 도리어 크나큰 치욕을 참으며 친히 사역을 할 뿐이었다. 하나님이 어찌 지옥에 속할 수 있겠느냐? 어찌 지옥의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인류가 하루빨리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치욕을 참고 땅에 내려와 친히 ‘지옥’과 ‘저승’에 들어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 사람을 구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단 말이냐? 또 무슨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겠느냐? 무슨 낯짝으로 다시 하나님을 마주한단 말이냐? 하늘의 하나님은 가장 더럽고 음란한 땅에 왔으면서도 단 한 번도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사람들의 박해와 억압을 감내할 뿐이다. 그는 한 번도 사람의 과한 요구에 반항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 적도, 무리한 요구를 한 적도 없다. 그저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침, 깨우침, 책망, 말씀의 연단, 일깨움, 권면, 위로, 심판, 폭로 등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사역을 할 뿐이다. 이런 것 중 사람의 생명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비록 사람의 앞날과 운명을 거두어 갔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하는 일 중 사람의 운명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의 생존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고난과 칠흑처럼 어두운 흑암 세력의 압제에서 구해 내려고 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사람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인자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의 그 절박한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느냐? 불처럼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기대의 대가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과 무정하고 냉혹한 눈동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훈계와 욕설, 냉소와 조롱, 비방과 무시였다. 또한, 비웃음과 유린, 저버림, 오해와 원망, 거부와 회피였다.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전부 기만이었고, 공격이었으며, 쓰디쓴 결과뿐이었다. 따뜻한 말씀은 ‘차디찬 시선과 손가락질’로 돌아왔으니, 하나님은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수많은 세월, 하늘의 별과 마주하며 지새운 밤이 얼마였고, 전전반측하며 하늘의 달과 함께 철야한 적 얼마였던가! 아버지와 이별하는 것보다 천배나 더한 고통을 참아 내고, 사람의 공격과 ‘깨뜨림’을 견디고, 사람의 ‘훈계’와 ‘책망’을 감당했다. 하나님이 ‘지극히 낮춘’ 대가로 얻은 것은 사람의 차별, 그리고 불공평한 시선과 대우였다.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인내와 포용은 사람의 탐욕 섞인 시선으로 돌아왔다.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하나님을 밟아 죽이려 했고, 하나님을 갈라진 땅 틈 사이에 밀어 넣으려 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보기 드물게 똑똑했다’. 사람은 자신이 업신여기고 별 볼 일 없다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인의 발아래 깔아뭉개고는 스스로를 추켜올려 ‘산(山)을 차지하여 왕’이 되고, ‘권력을 독점하고’, ‘수렴청정’을 하려는 듯 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고분고분 순순히 ‘무대 뒤의 감독’ 역할이나 하게 하며, 반항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였다. 즉, 하나님께 ‘마지막 황제’처럼 조금의 자유도 없는 ‘꼭두각시’ 역할을 시킨 것이다. 사람의 작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이런저런 요구를 한단 말이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건의’를 한단 말이냐? 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헤아려 달라고 요구한단 말이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누릴 자격이 있더냐? 계속되는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을 자격이 있더냐? 사람의 양심은 어디에 있느냐? 일찍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하였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하나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가슴 가득 기쁨을 안고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아주 작은 온정이라도 베풀기를 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늘 사람들의 위로를 얻지 못했으며, 돌아온 것이라고는 설상가상 식의 공격과 괴롭힘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 탐욕스럽고, 사람의 욕망은 너무 커서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어 했으며, 무리한 트집을 잡으면서 하나님께 조금의 자유도, 발언권도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묵묵히 울분을 참으며 사람의 조종을 받아야만 했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9> 중에서

36.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얼마나 많은 이의 공격을 받았더냐!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으며, 조금의 관용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를 ‘가르치고’, ‘질책하고’, ‘혼낼’ 뿐이다. 마치 하나님이 길을 잘못 들까 걱정하는 것 같고, 하나님이 땅에서 함부로 행동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막무가내로 굴어 일을 그르칠까 겁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항상 이런 식일진대, 하나님이 상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성육신’한 것만으로도 이미 크나큰 고통과 치욕을 감내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가르침까지 받으라고 하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세상에 왔는데도 조금의 자유조차 없어 마치 저승에 갇힌 것 같고, 반항도 못 한 채 사람들의 ‘해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전부 치욕이 아니더냐? ‘예수’가 정상인의 가정에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크나큰 굴욕이다. 자신을 지극히 낮추사 이 풍진세상에 임할 때 지극히 평범한 육신을 취한 것은 더더욱 큰 치욕이다. 지고지상한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것이 고통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더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이 한 번이라도 되더냐? 유대 족속에게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하늘을 원망하지도 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수천 년 전의 비극이 다시 한 번 유대 족속과 비슷한 이방의 족속 가운데서 재연되고 있으니, 모두가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단 말이냐? 하나님을 대적한 후에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사람은 항상 정의를 향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사람은 늘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냐? 사람의 의로움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의 공평함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하나님을 대표한단 말이냐? 사람의 ‘정의감’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있느냐? 사람은 모두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흑백을 가리지 못하며, 정의와 진리를 깔아뭉개고, 불공평과 불의를 높이 들어 올린다. 또한, 사람은 밝은 빛을 몰아내고 어둠 속에서 환락을 좇는다. 진리와 정의를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빛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발로 짓밟으며, 자기 자신을 높이 추켜올린다. 사람은 모두 비적 같다. 그런데 무슨 이성이 있단 말이냐? 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누가 정의를 지키겠느냐? 누가 진리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겠느냐? 전부 흉악무도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고, 또 광란의 환호성을 멈추지 않았으니, 닭이나 개 같은 부류다. 당을 지어 독립 왕국을 세우고, 곳곳에서 바람 잘 날 없이 일을 만들고 있다. 무턱대고 미친 듯이 짖어 대는데, 닭도 울고 개도 짖으니, 온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와서는 자기 조상들의 ‘위대한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있다. 그 짐승 같은 것들은 오래전에 하나님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은 모두 개와 닭 같아 한 마리가 짖으면 백 마리가 따라 짖는다”라고 말씀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처럼 ‘요란’하게 오늘날까지 끌어왔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정의가 있는지, 하나님께 발붙일 곳이 있는지, 내일이 어떻게 될지, 자신의 비루함과 더러움은 어떻게 될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한 번도 미래를 걱정한 적이 없다. 모든 이익과 보물은 전부 품에 끌어안고 하나님에게 던져 주는 것은 그저 잔배냉적(殘杯冷炙)뿐이니, 이 얼마나 잔인한 인류냐! 사람은 하나님께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몰래 훔쳐 먹고는 하나님을 멀리 차 버리고 그의 존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짓밟으면서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기만한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떠받들고’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보면서도 으스대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서는 하나님의 ‘불의’를 ‘심판’한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말하고 눈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욕한다. 하나님께 ‘관용’을 보이면서도 하나님을 억압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또, 손에는 하나님의 물품을 들고 있고 입으로는 하나님이 준 음식을 씹으면서 눈으로는 냉혹하고 무정하게 하나님을 주시하는데, 마치 하나님을 통째로 삼켜 버리려는 것 같다. 진리를 보고도 ‘사탄의 간계’라고 우기고, ‘정의’를 보고는 그것을 ‘자기희생’으로 둔갑시킨다. ‘사람의 행위’를 보고는 ‘하나님의 속성(원문: 所是)’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사람의 재능’을 보고는 ‘진리’라고 우긴다.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는 “오만방자하다”, “거만을 떨며 잘난 척한다”라고 억지를 부리고, ‘하나님’에게 기어이 ‘사람’이라는 표식을 붙이고는 강제로 그를 끌어다가 사탄의 더러움에 물들어 버린 ‘피조물의 자리’에 앉히려 든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알면서 기어이 ‘사람의 글’이라고 말한다. ‘영이 육신 되었고’, ‘성육신 하나님’임을 확실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탄의 후예’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사탄이 치욕을 당하고 하나님은 이미 승리했다”라고 말한다. 이 폐물들아! ‘집 지키는 개’보다도 못하구나! 흑백을 분변치 못하는 것도 모자라 짐짓 흑백을 전도하고 있다. 사람의 세력과 포위 공격 속에서 어찌 하나님이 빛을 볼 날이 허용되겠느냐?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죽음으로 밀어 넣으며 얼굴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의로움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랑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곁에 앉아 하나님을 자신의 발아래에 짓누르고는 자신에게 용서를 빌게 하고, 자신의 모든 배치에 순종하게 하며, 자신의 모든 배치를 따르게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발대발하며 고함을 친다. 이렇듯 흑백이 뒤집어진 흑암 권세하에서 하나님이 비통해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근심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왜 하나님의 이번 사역을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의 행위는 어찌나 ‘풍부’한지, ‘끊임없이 흐르는’ ‘생수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것 같다. 그 ‘생수의 근원’은 또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어 ‘힘겨루기’를 마다하지 않게 한다. 게다가 거리낌 없이 하나님 대신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 또한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그에 협력하고 있다. 그러니 무슨 성과가 있겠느냐? 냉정하게도 하나님을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난 외진 곳에 치워 놓고는, 누군가 주목할까 봐 심히 걱정하고,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이 사람을 황홀한 경지로 이끌고 사람을 얻을까 봐 겁낸다. 그래서 사람은 오랜 세월, 세상사들을 겪은 후 하나님과 아귀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비판 투쟁’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눈 속에 있는 들보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잡아서 불 속에 넣어 몽땅 단련시키려고 안달이며, 하나님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포복절도하며 기뻐 날뛴다. 그러면서 하나님도 연단에 들어갔다고 하며, 하나님의 불결한 불순물들을 몽땅 태워 버리겠다고 말한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이치에 들어맞고 ‘하늘’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의 이런 폭력적이고 비열한 행위는 고의 같기도 하고 무의식적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고 또 그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을 내보이며, 불쌍한 거지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또한, 곳곳에서 횡포를 부린 뒤에는 가련한 모습을 하고 하늘의 용서를 구하며, 극도로 불쌍한 아첨꾼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은 언제나 방심한 틈을 타서 허를 찌르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임기응변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과 비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하나님께 맞설 뿐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억울하게 한 양, 처음부터 이렇게 대하면 안 됐다는 양, 하늘이 보는 눈이 없어 자신을 괴롭혔다는 양 군다. 그래서 사람은 늘 몰래 악랄한 수단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매우 엄격히 하며, 눈을 부릅뜬 채 호시탐탐 하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자 적수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며, 언젠가 하나님이 뿌연 안개를 걷어 내고 사실을 밝혀 자신을 ‘호랑이 아가리’에서 구하고 원통함을 풀어 주기를 소망한다. 오늘날까지도 사람은 자신이 역대에 수많은 사람이 맡았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자신의 행함이 이미 오래전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고, 자신의 깨달음이 진작에 깊은 물 속에 잠겨 버렸다는 것을 알겠느냐?

누가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있더냐? 누가 하나님의 강림을 기쁘게 맞이하였더냐? 누가 하나님의 현현을 즐겁게 바랐더냐? 사람의 작태는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殿)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이 더럽혀 놓고도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고칠 수도 없게 된 듯하다. 그래서 사람은 차라리 저주를 받을지언정, 자신의 ‘언행이 또다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겠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겠느냐?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9> 중에서

37. 나는 사람과 함께 수없이 많은 날을 보냈고, 사람과 함께 이 세상에 살았지만, 사람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한 적은 없다. 늘 사람을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을 인도하며, 항상 인류의 운명을 위해 일을 마련할 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누가 깨달았더냐? 누가 천지 사이를 오갔더냐? 나는 더 이상 사람과 함께 사람의 ‘말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사람은 너무도 ‘구식적’이며,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차려 놓은 잔칫상에서 허겁지겁 먹을 줄만 알 뿐, 그 외의 일들은 전부 ‘나 몰라라 하며’,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류는 너무 인색하며, 인간 세상은 너무 소란스럽고 처량 맞으며 너무도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날에 승리로 거둔 아름다운 열매를 사람과 함께 누리고 싶지 않다.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낸 복이나 누리라고 해라. 인류는 나를 환영하지 않는데, 내가 왜 인류에게 억지 미소를 강요하겠느냐? 세상 구석구석을 봐도 온기가 있는 땅은 단 한 곳도 없고, 산천 여기저기를 봐도 봄기운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다. 사람은 전부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조금의 따스함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 같다. 심지어 몸에 흐르는 피까지도 얼어 버린 얼음처럼 ‘가슴 시리게’ 할 뿐이다. 그런데 온기가 어디에 있겠느냐?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도 무사태평이었으며,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다. 잔인한 폭군이 또 한 번 인자를 ‘생포’하여 형장에서 총살함으로써 마음의 원한을 풀려고 하는데, 이렇듯 위험한 땅에 내가 남아 있어 본들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냐? 내가 남아 있어 봤자 사람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전쟁과 총검, 끝없는 후환뿐이다. 내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싸움일 뿐 화평을 준 적이 없기 떄문이다. 인류의 마지막 날은 분명 전쟁으로 점철될 것이고, 인류의 종착지는 반드시 총검이 난무한 전쟁 속에서 무너질 것이다. 나는 이 전쟁의 ‘환락’을 사람과 ‘함께 즐길’ 마음이 없다. 또한, 나는 사람의 옆에서 피 흘리는 희생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미 사람에게 버림받아 ‘풀이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인류의 전쟁을 지켜볼 마음이 없으니, 사람끼리 마음껏 싸우게 내버려 두고 편히 쉬면서 편히 자겠노라. 마귀더러 인류의 마지막 날을 함께하라고 해라! 누가 내 마음을 알겠느냐? 사람은 모두 나를 환영하지 않았고 한 번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니, 나 또한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인류에게 종착지를 주었고, 내 모든 풍부함을 인간 세상에 남겼으며, 내 생명을 인간 세상에 쏟아부었고, 내 생명의 씨앗을 사람의 마음에 심었다. 또한, 사람에게 영원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내 모든 사랑을 인류에게 건넸으며,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내 모든 것을 전부 사람에게 베풀어 우리가 그리워하는 사랑의 선물로 삼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영원히 서로 사랑하며, 우리의 과거를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소중한 선물로 삼았으면 했다. 나는 이미 내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무슨 원망을 한단 말이냐? 나는 이미 생명의 전부를 사람에게 남겨 줬으며, 인류를 위해 묵묵히 ‘사랑의 땅’을 갈고 경작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사람에게 어떤 합리적인 요구를 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인류의 배치에 순종했고, 늘 인류에게 더 아름다운 내일을 만들어 줬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0> 중에서

38. 하나님이 성육신한 일은 각 교파와 교단을 뒤흔들었고, 종교계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니 누구인들 앙모하지 않겠느냐? 누구인들 하나님 뵙기를 고대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 자신이 현현하고, 모두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 지난날, 하나님은 사람과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슬픔을 나눴고, 이제 또다시 인류와 만나 옛정을 나누고 있다. 유대에서 떠나간 후, 하나님은 줄곧 함흥차사였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회할 날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오늘날 이렇게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지난날 추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2천 년 전의 오늘, 유대인의 자손인 바요나 시몬은 구주 예수를 만나 음식을 나누고 오랜 세월 그를 따르며 깊은 우정을 나눈 바 있다. 그는 예수를 마음으로 사랑했고 가슴 깊이 사랑했다. 초라한 말구유에 강생한 노란 머리의 갓난아이가 뜻밖에 성육신 하나님의 첫 번째 형상이었음을 유대 백성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자신과 같은 부류로 생각했지, 특별하게 여긴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예수’를 사람이 어찌 알아볼 수 있었겠느냐? 유대인들은 모두 그를 당시 유대인의 아들로 여겼지, 사랑스러운 하나님으로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그를 향해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와 평안과 기쁨을 내려 달라고 요구할 뿐이었고, 오로지 그가 백만장자처럼 모든 걸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도 그를 사랑해야 하는 분으로 대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반항하고 터무니없는 요구만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고, 일관되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는 묵묵히 사람에게 따스함과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으며, 나아가 새로운 실행을 알려 줌으로써 사람을 율법의 속박에서 풀어 주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부러워하고, 그의 ‘출중한 재능’을 높이 살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구주 예수가 얼마나 큰 굴욕을 참음으로 이 세상에 왔는지, 눈먼 인류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고충을 헤아려 주는 사람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리아가 그의 ‘생모’였다고는 하나, 인자한 주 예수의 마음의 소리를 그녀가 어찌 이해했겠느냐? 형언할 수 없는 ‘인자’의 괴로운 고통을 누가 알아주었더냐?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서 얻어 낸 뒤에는 냉정하게 그를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또한 문전박대했다. 그는 그렇게 길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 수많은 세월을 떠돌면서 길고도 짧은 고난의 33년 인생을 보낸 것이다. 사람은 그가 필요할 때는 집으로 초대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 내고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의 ‘공헌’을 받은 후에는 즉각 그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사람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공급받고,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그를 대적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누가 베풀어 주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살을 먹고, 그가 해 주는 밥으로 배를 채우며, 그가 개척한 길을 걷고, 그의 피를 마시면서도 그를 저버리려 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노예를 ‘하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고의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느냐? 그를 먹고 마시고 누리며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유다가 그를 팔아넘겼기 때문이 아니더냐? 팔아넘긴 이유는 예수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선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더냐? 사람들이 정말로 예수가 하늘에 속한 비범한 분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를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숨이 끊길 때까지 24시간 동안이나 매달아 놓았겠느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 사람은 끝을 모르고 탐욕스럽게 하나님을 누릴 줄이나 알지, 한 번도 그를 안 적이 없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원하면서 ‘예수’가 자신의 지시와 부름에 완전히 복종하기만을 원했다. 이 머리 둘 곳도 없는 ‘인자’에게 일말의 온정을 베푼 이가 있었더냐? 그와 한마음으로 협력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맡긴 사명을 완수하려고 했던 자가 있더냐? 그를 생각해 준 자가 있더냐? 그의 고충을 헤아려 준 자가 있더냐?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를 이리 끌어당기고 저리 밀치고 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광명과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인간 세상의 고난을 체험한 2천 년 전의 ‘예수’를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을 꿍꿍이만 가지고 있다. 설마 ‘예수’가 그렇게 증오스러운 존재란 말이냐? 그가 해 준 모든 것을 사람은 다 잊었단 말이냐? 수천 년 전부터 쌓인 원한을 끝내 쏟아 내려고 하는구나. 유대인 같은 자들아! ‘예수’가 언제 너희에게 적의가 있었느냐? 어찌하여 그리도 그를 증오한단 말이냐? 그는 수많은 일을 하고, 또 수많은 말씀을 했다. 설마 다 너희에게 무익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는 너희에게 자신의 생명을 값없이 베풀어 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산 채로 그를 삼키려 드느냐? 그는 너희에게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바쳤고, 세상의 영화와 따스함, 사랑 등 인간 세상의 모든 복과 즐거움은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그에게 얼마나 야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땅에 있는 모든 풍성함을 누려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진실하고 뜨거운 마음을 전부 너희에게 바쳤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바쳤다. 그런 그에게 누가 온정을 베풀었더냐? 누가 위안을 주었더냐? 사람은 자신의 모든 스트레스를 그에게 쏟아 냈고, 자신의 불행도 모두 그에게 돌렸으며, 인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체험을 그에게 강제로 떠넘기고, 모든 불의를 그에게 덮어씌웠다. 그런데도 그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누군가에게 불만을 말한 적이 있더냐? 보답을 바란 적이 있더냐? 그러나 누가 그를 체휼했었느냐? 정상적인 사람 치고 낭만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자가 있느냐? 오색찬란한 청춘을 가져 보지 못하고 가족의 온정을 느껴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친구와 친척들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다른 이의 존중을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따뜻한 가정이 없는 자가 있느냐? 절친한 벗의 위로를 받아 보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가 어찌 누려 봤겠느냐? 누가 그에게 한 번이라도 온정을 주었더냐? 누가 그에게 일말의 위안을 주었더냐? 누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인성의 도덕을 베풀었더냐? 누가 그에게 관용을 보였더냐? 누가 그와 고난의 날들을 함께했더냐? 누가 그와 인생의 힘든 삶을 함께했더냐? 사람은 한 번도 그에 대한 요구를 느슨하게 한 적이 없으며 그저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 내려 요구했을 뿐이다. 마치 그가 인간 세상에 온 이상, 반드시 사람의 마소 역할을 해야 하고, 단상 아래 선 죄인이 되어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는 절대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이대로 포기하지도,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높이 평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너무나 엄격해서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죽게 만들어야 요구를 느슨하게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요구치를 낮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의 증오를 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날의 비극이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의 양심은 어디로 갔느냐? 입에 침이 마르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하나님을 산 채로 해부하고 괴롭혀 죽음으로 몰아가니, 이는 전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 아니더냐? 이런 ‘유대인’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 그러니까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육안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이냐? 육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영에서 비롯되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겠느냐? 누가 알아볼 수 있겠느냐? 인간 세상에 진리가 어디에 있더냐? 진정한 공의는 또 어디에 있더냐? 하나님의 성품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 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겨룰 수 있겠느냐? 그러기에 사람은 인간 세상에 온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저버렸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겠느냐? 어찌 빛이 인간 세상에서 어둠을 쫓아내는 것을 용인하겠느냐? 이것들은 전부 사람의 광명정대한 봉헌 정신이 아니더냐? 정정당당한 진입이 아니더냐? 하나님의 사역은 전부 사람의 진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더냐? 너희가 사역과 진입을 결합시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잘 맺고,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며, 성의를 다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역도 그에 따라 끝날 것이며, 영광받음으로 끝이 올 것이다!

—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사역과 진입 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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