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집 (a) 하나님 말씀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에 관한 설교 교통

【134-A-1】

하나님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여 하나님의 만족을 얻어야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하여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있고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야 한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인 후에야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기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부담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고 종교 인사의 소행이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역사의 *안받침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 마치 하나님 집의 장식품과 같다. 이들은 숫자를 채우는 사람이고 폐물에 속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할 가치도 없다. 이런 사람은 표준이 되는 산송장이어서 성령께 쓰임받을 성분이 조금도 없다. 모두가 사탄에게 점령당한 사람이고 사탄에게 극도로 *패괴된 사람이며 하나님이 도태시킬 대상이다. 오늘 사람을 쓰는 것은 사람의 취할 만한 부분을 이용하여 합당한 부분을 발휘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취할 수 없는 부분을 온전케 하고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만일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여 하나님 앞에 안정시킬 수 있다면, 너는 성령께 쓰임받을 기회와 자격이 있게 되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게 되며, 더욱이 성령이 너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기회도 얻게 된다. 너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때,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네가 더 깊이 진입하여 더 높은 깨달음이 있게 되고, 소극적인 방면에서는 네게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자신의 결함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게 되며, 또한 소극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것은 네가 옳은 사람임을 설명한다.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된 전제에서 네가 성령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네가 적극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성령이 사람을 깨우치고 사람을 쓰는 데는 사람을 소극적이게 하는 것이 조금도 없고,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진취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연약이 있을지라도 이것에 의해 살지 않을 수 있고 생명이 자라남에 지체되지 않을 수 있으며 계속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를 구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표준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네가 이미 성령의 함께함을 얻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사람이 늘 소극적이면 설사 빛 비춤을 받고 자기를 알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어서 일어나 하나님과 협력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만 입은 것이지 성령의 함께함을 얻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소극적인 면을 놓고 말하면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고 영이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지 못하였음을 설명한다. 이 점을 모두 어느 정도 인식해야 한다.

경력(역주: 체험) 중에서 보다시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사람의 영적 생활과 사람의 생명이 자라나는 문제에 관련된다. 만일 너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킨다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비로소 효과에 도달할 것이다. 네가 부담을 갖고 하나님 앞에 왔기에 늘 자신에게 부족함이 너무 많고 진리를 많이 알아야 하며 실제를 많이 경력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느낀다. 이런 일을 늘 마음에 두고 있어 마치 너를 숨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내리누르는 듯한데, 너는 이로 인해 마음이 무겁다(그러나 소극적인 *정형은 아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의 부담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무거움으로 인해,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치른 대가와 받은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바꿔 온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차별 대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지만 마음대로 사람에게 베풀어 주지는 않으며, 무조건적으로 사람에게 더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면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최소한 마음조차도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사람의 생명 성정이 아직도 별로 변화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살면서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는 표준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부담이 있으며,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진리를 찾고 구하려는 심지(心志)가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고 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겉으로는 마치 이지(理智)가 없는 것 같고 사람과 정상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말을 분수 있게 하고 함부로 하지 않으며 마음을 언제나 하나님 앞에 안정시킬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성령께 충분히 쓰임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언급한 이지가 없는 것 같다는 그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마치 사람과 정상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또 겉면의 사랑과 겉면의 행실을 논하지 않지만, 영 안의 일을 교통할 때는 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경력(역주: 체험)하여 얻은 빛 비춤과 깨우침을 사심 없이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 준다.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훼방하고 비웃을 때도 그 사람은 바깥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통제를 받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안정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가 있는 듯하다.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그는 마음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웃고 떠들어도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거나 마음속의 하나님께 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다. 그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정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전혀 중요시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마치 처세 철학이 없는 듯하다. 겉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활발하고 사랑스러우며 애티가 나고 침착함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 어떤 처세 철학, ‘정상적인 이지’는 그런 사람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을 전부 하나님 말씀에 기울이는데, 마치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님만 있는 듯하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말하는 ‘이지가 없다’는 사람이고, 바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늘 하나님 앞에 있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방탕하고 정욕을 방종하고 육체를 방종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이런 특징이 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하며, 바로 성령께 온전케 되는 사람이다. 만일 네가 이 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께 얻어질 자격이 없고 성령께 온전케 될 자격이 없다.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으려면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이 기초에서 네가 다른 사람과도 정상적인 관계가 있게 된다. 만일 네가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다면 네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수호하든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사람의 처세 철학에 속한다. 너는 사람의 관점과 철학으로 사람들 가운데서의 너의 지위를 수호하여 사람들이 모두 너를 칭찬하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다른 사람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만일 네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수호하며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줄 알면 자연히 너와 모든 사람의 관계도 정상이 될 것이다. 이렇다면 너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육체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기초에서 맺어진 것이다. 육체적인 왕래는 거의 없지만 영적으로는 교통이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서로 공급한다. 행하는 그 모든 것은 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기초에서 하는 것이며, 사람의 처세 철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부담으로 자연히 형성되는 것이며, 너의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고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기를 원하는가? 너는 하나님 앞에서 ‘이지가 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너는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들 가운데서의 너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기를 원하는가? 네가 접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너와 관계가 가장 좋은가? 어떤 사람들이 너와 관계가 가장 나쁜가? 너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정상적인가? 너는 모든 사람을 다 일률적으로 대하는가? 너와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너의 처세 철학으로 수호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사랑의 기초에서 맺어진 것인가?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영이 무디고 마비되어 지각이 없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사람의 성정에도 영원히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성정이 변화되는 과정은 사람이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한 방면은 사람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고 또한 소극적인 방면에서 인식하게 한 후 따라서 벗어 버릴 수 있게 한다. 네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면, 영 안의 세밀한 감동까지 하나하나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이 주는 약간의 깨우침과 빛 비춤까지도 알 수 있으며, 계속 유지한다면 이것으로써 성령께 온전케 되는 경로에 차츰차츰 진입하게 된다.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안정할수록, 너의 영이 더욱 예민해지고 섬세해지며, 더욱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갈수록 정상적이 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정상 관계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한 기초에서 맺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은 육체적 관계만 있고 다 비정상이며, 모두 정욕을 방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너의 영 안에 감동이 있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네 마음에 맞는 사람과 교통하기를 원하고 언제나 네가 중요시하는 사람과 교통하기를 원하면서 만일 다른 사람이 구하는데도 너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여 네가 오히려 편견을 가지고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네가 사적인 감정에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과 아예 정상 관계가 없음을 더욱 증명한다. 너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덮어 감추는 것이다. 설사 네가 인식을 좀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너의 속마음이 옳지 않다면 네가 하는 것은 모두 인위적으로 좋아하는 것이어서 하나님도 너를 칭찬하지 않는다. 너는 육체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부담으로 인해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할 수 있고 또한 무릇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모두 정상적으로 왕래할 수 있다면 너는 비로소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러면 네가 사람과 어떻게 접하든지 처세 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너희 중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너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도대체 정상인가? 어떤 기초에서 맺어진 것인가? 너에게 처세 철학이 얼마나 있는가? 벗어 버렸는가? 만일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향할 수 없다면 너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최종에 가서도 너는 여전히 사탄에게로 돌아가며, 너는 하나님의 자민(子民)이 될 자격이 없다. 이런 것은 모두 네가 자세히 고찰해야 한다.

【134-A-2】

지난 몇 차례의 집회에서 이상(異象) 방면에 관련된 진리에 대해 간단하게 좀 교통했습니다. 사실 그런 진리는 하나님이 더 확실하고,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저는 그저 간단하게 좀 교통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이제는 이상 방면의 진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잘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바로 생명 진입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고 싶은데, 지금 길이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생명 진입 방면의 진리에 대해 교통하도록 하겠습니다.

생명 진입의 진리는 어디서부터 들어가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참되고, 얼마나 실제적이든 여전히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겉면의 사역을 중요시하고, 성경의 지식과 이론을 아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진정으로 하나님 알기를 추구한 사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은 왜 열심으로 주님을 위해 사역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 일부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느 정도 깨달아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고,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 허공을 향해 말하는 것이고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 결코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일까요?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없고,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믿고, 그저 겉으로만 하나님을 위해 힘써 사역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겠습니까? 맞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만 하는데, 일방적인 소망인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의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면서 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냐고 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비록 주님의 이름을 믿고, 주님께 기도하지만, 영 안에서는 시종일관 주님과 참된 교제가 없었고, 마음을 주님께 맡기지 않았고, 주님께 진리를 구하지 않았고, 주님의 뜻을 더듬지 않았고, 주께서 분부하신 것에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말씀을 교통함으로써 주님이 은혜시대에 하신 말씀에 대해 참으로 깨닫게 되지 않았나요? 이젠 정말로 깨달았겠죠?

여러분이 얘기해 보세요.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다들 자신을 한번 반성해 보세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어 왔는데,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반성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께 기도하긴 하는데 …… 제 기도가 …… 종교적인 기도인가요? 저는 막연하게 하나님께 말하고, 글귀 도리와 성경 글귀를 말합니다. 이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진리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는 건 더욱더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진실한 기도라고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으실까요?”라고 말할 겁니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사람에게 종교적인 기도만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의 기도에 실제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진리를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더듬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생명의 경로를 얻기를 찾고 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몇 가지가 다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지 허공을 향해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막연하게 자신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말만 하면서 하나님이 들으셨는지도 모르고, 또한 하나님이 좋아하시든, 하나님의 기분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글귀 도리만 실컷 쏟아 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한두 시간 합니다. 그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오늘 하나님과 어떤 일에 대해 교통했고, 어떤 진리를 찾고 구했는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알게 된 모든 말을 전부 한번 중얼거리기만 하는데, 이것이 진실한 기도입니까? 진실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데도 기도가 아니라구요? 그러면 어떤 말을 해야 기도가 되는 건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데, 그 사람은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런 종교적인 기도는 아주 전형적인 것인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주재자이시며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구속주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우리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으시고 의인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해도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패괴되었든, 어떻게 죄를 범하든 다 우리를 사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의 빛이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전부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당신의 양입니다. 당신은 날마다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부모, 자녀를 축복하시고, 우리 온 가족을 축복하십니다. 날마다, 해마다 돈을 잘 벌도록 축복해 주시고, 100살까지 장수하도록 축복해 주시고, 우리가 평안하도록 매일 보살펴 주시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시는데, 대재난이 임해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닥치지 않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과 만나게 하실 때까지 우리가 재난을 극복하도록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것이 기도입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주님과 교통하는 겁니까? 이것이 주님께 진리를 구하는 겁니까?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겁니까? 이런 기도는 어떤 성질의 기도입니까? 종교적인 기도이고,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이런 기도를 싫어하시고 증오하십니다. 교계 사람들은 이런 말들로 기도합니다. 저는 방금 대략적으로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 두세 시간씩 하는데, 어디 이런 말들뿐이겠습니까? 제가 말한 것보다 10배, 20배는 많습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 이런 말들만 하는데,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생명 성정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고, 성령 역사를 볼 수 없고, 또한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겠습니까? 정상이 아닙니다. 아시겠죠?

하나님은 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실까요? 바리새인이란 어떤 뜻일까요? 바리새인들의 실질은 무엇일까요? 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 외식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외식하는 사람이고, 그것을 외식하는 기도라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분명히 보았겠죠?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에 아직 그런 기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그것은 무슨 문제일까요? 그것은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매일 외식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우리가 여전히 바리새인의 길을 간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정죄하신 대로 그렇게 우리를 정죄하고 도태시키실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계의 목사나 전도사들만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우리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의 길로 간다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외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무나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다 진리를 추구하려고 하고, 생명 진입도 있길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생명 진입에 대해 교통하겠습니다.

【134-A-3】

생명 진입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생명 진입을 하는 길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우리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지, 어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얻을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온전케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의 관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달했다면, 우리의 생명 진입에는 뿌리가 있게 되고, 토대가 있게 되고, 보장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직접 미치게 되는 결과는 성령의 역사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역사가 없이 단지 주의 이름을 위해 이것저것을 하면서 수고하고 분투하는 것뿐이라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공로는 없다 쳐도 수고는 했잖아요! 뭐, 그것도 없다면 몸이 피곤하기라도 했잖아요.”라고 말합니다. ‘피곤’은 어떤 것인가요? 생명인가요? 진리인가요? 피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곤은 뭔가요? 헛된 것이고 헛수고한 것입니다. 아시겠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면,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면, 그건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고, 구원받아 온전케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정상 관계부터 맺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정상 관계는 피조물과 조물주의 관계를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해 순복하고, 하나님으로 대해 믿으면서 하나님께 참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계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참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하나님이 되고,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정상 관계가 아닙니까? 만약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면, 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부정적인 관계, 잘못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꿰뚫어 볼 수 있으십니까?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복을 받고 목적을 달성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평안을 얻고 재난에서 벗어나 죽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정상 관계일까요? 그리고 또 하나 거래 관계도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구원하셔서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죽지 않게 해 주시고,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면, 전 당신을 위해 무엇 무엇을 할 거고, 무엇 무엇을 바칠 거고, 당신을 위해 고난도 얼마 얼마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건 거래 관계가 아닌가요? 하나는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건데, 그건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겁니다. 자신의 수고로 하나님의 축복을 맞바꾸려는 것입니다. 이건 거래에 속하기 때문에 역시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다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가 아닙니다. 아셨나요?

떡으로 배만 불리고 하나님을 믿어 복 받기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일까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합니다. 바울이 갔던 길, 바울의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은 주로,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서 저에게 빛을 비춰 당신이 바로 주님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걸 보여 주셨습니다. 그건 당신을 위해 헌신하라는 게 아닙니까? 전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게요. 저는 모든 고난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고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건 주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과 주님의 관계는 사실,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자 주님과 거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목적, 바울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건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알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또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거나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좀 받고 대가도 좀 치른 뒤에는 득의양양해져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4장 7절, 8절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것이..........” 보세요, 바울은 주님께 면류관을 요구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공의로우시다면 반드시 당신의 공의에 따라 제게 면류관을 주셔야 합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면류관을 주세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바울이 그동안 고생하면서 사역했던 목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저는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주님께서 높여 주신 거고, 주님의 은총이십니다! 주께서 제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주셨는데, 이건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겁니다. 아니면 제가 주님을 대적했던 그 죄대로라면 저는 훼멸돼야 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성령의 인도와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제게서도 효과를 보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주님에 대해 알게 됐고 하나님의 전능을 보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전도하지 못합니다. 설사 복음을 전한다 해도 아무런 성과도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입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에 대해 좀 알게 됐고, 드디어 인간다운 모습을 좀 살아내게 됐으며, 양심과 이지가 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시 무엇을 맡기시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신다면, 저는 계속 전력을 다해 헌신할 겁니다. 저는 의의 있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이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했었다면, 하나님을 믿는 목적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비교적 정상인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도대체 정상인지 아닌지 꿰뚫어 보지 못하고, 도대체 어떤 관계가 정상적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진리들을 다 발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 이렇게 곱씹어 보기만 하면 ‘이 말씀들은 모두 진리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서, 또 어떤 것이 사람과 하나님의 정상 관계인지, 어떤 것이 사람과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지를 모두 밝혀 주셨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는 은혜시대의 모든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할 겁니다. 그것을 보면 우린 정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게 됐고,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일도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 읽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여 하나님의 만족을 얻어야 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촉하여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이 한 구절의 말씀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절마다 진리입니다. 마침표가 있는 데까지 한 구절인데, 그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 구절 말씀의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거나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반드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으며, 영원히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흡족케 하는 비밀을 밝혀 주셨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도 좋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고 추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해야 합니다. 바로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여 하나님의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이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약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만족을 얻는 것과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경로를 단번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역대로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 실패했을까요? 사람들의 종교식 기도에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복을 누리려고 하던 그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한 것입니까? 그들이 하지 못한 건 뭐고, 잃은 건 뭡니까? 하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의 실패를 하나로 종합한다면, 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걸 현실적으로 하면 어떻게 말할까요? 그들의 기도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족을 얻지 못했고, 성령의 역사를 얻지 못한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예를 들어 봅시다. 예를 들려면 일단 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예로 들어야 됩니다. 자, 말씀해 보시죠! 바울은 하나님의 영과 마음으로 접촉한 건가요? 어떤 분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증거라도 있나요? 실례를 들어 보세요. 이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말만 하면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틀렸어요. 내가 봤을 땐 그렇지 않아요. 그건 당신들의 견해일 뿐이에요.”라고 할 겁니다. 보세요! 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한다”는 것과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반드시 한 구절씩 세세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묵상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곱씹어 보지 않고 그저 “전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해요.”라고 말하면서 지나가 버리면 사람들은 “당신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과 접촉한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어떤 실제적인 표현들이 있죠? 제게는 실행의 길이 없어요. 제가 보기에 그건 빈말 같네요. 입으로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같네요, 별반 차이가 없네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말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깨닫기 쉬울까요? 그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하는 것과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나요, 없나요? 차이가 있겠죠? 어떤 땐, 입으로 하는 말이 꼭 마음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뭘 대표할까요? 어떤 때, 입으로 하는 기도는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대뇌를 통해 사고하고, 대뇌에서 일단 생각이 만들어지면 그런 말이 몇 마디 튀어 나옵니다. 그건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머리에서 나온 말과 마음에서 나온 말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분들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다음에 생기는 유형의 말이라면 어떤 성질일까요? 그런 유형의 말들을 분별할 줄 아십니까? 그럼 지금 하나님께 마음에 있는 말을 한 마디 하고, 그다음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해서 한번 대조해 보세요.

자, 마음속 말을 해 봅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얻었습니까? 마음속 말을 하면서 기도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말씀을 보고, 묵상한 다음 기도합니다. 일정기간 기도를 통해 자신의 패괴된 진상을 알게 되고,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신 건 조금도 틀린 게 없습니다! 처음에는 관념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말씀은 폭로하시는 게 좀 지나친 것 같았고, 좀 정죄하는 것 같았고, 좀 과장된 것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경력을 하고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적절하시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앞에서 제 진상을 똑똑히 보게 됐습니다. 저는 정말 개같은 놈입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은 어떻습니까? 진실하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의 말씀을 먹고 마시기 시작해서부터 인류의 패괴된 진상에 대해 날마다 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의 말씀에 대해, 당신께서 폭로하시고 심판하시고 정죄하신 말씀에 대해 관념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다 진리이고, 다 사실입니다!” 이런 말은 실제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머리에서 나온 말, 텅 빈 도리적인 말을 좀 해 보세요. 그런 말을 해 보세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절 사랑하고 높여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본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대로 말했습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도리적인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입으로만 한 겁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해 낸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고,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고, 당신은 천지 만물의 주재자이십니다. 저희는 영원히 당신을 믿을 것이고,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희는 당신께 순복하기 원하고,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 원합니다.” 이건 빈말이 아닌가요?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인가요? 전부 빈말입니다.

【134-A-4】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알아들으셨겠죠? 예를 들면, 누가 “하나님, 저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당신을 위해 화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분량은 너무나 작습니다. 저는 살아가는 것도 걱정되고, 앞날과 운명도 걱정되고 나중에 육체가 고통받을까 이것저것 생각하며 내려놓지 못하겠어요. 저는 참으로 당신께 빚졌어요. 저를 구원하시고 일깨워 주시길 원하고, 제가 하루속히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완전히 화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렇게 했다고 합시다.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주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또 기도하며 말합니다. “다른 사람도 가정 상황이 저와 같은데, 어떻게 그런 분량이 있나요?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시간을 다 화비할 수 있는데, 저는 왜 할 수 없는 거죠? 저는 진리가 너무 부족하고 늘 육체를 생각해요. 저의 믿음은 너무나 작아요. 하나님, 당신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겨 하루속히 당신을 위해 화비할 수 있도록 저에게 깨달음과 빛 비춤을 주세요. 당신의 가장 큰 바람은 바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마지막에는 다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증거할 수 있고,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당신이 영광을 얻으시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이끌어 주세요. 당신은 제가 무지몽매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제 분량이 작다는 것도, 제 믿음이 너무나 작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속 말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과 마음을 털어놓고 교제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을 기만하거나 입술로 하나님을 대충 속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게 되어 성령이 바로 역사하시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 피조물은 조물주 앞에서 마땅히 무엇을 갖춰야 합니까? 참된 순복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참된 신뢰와 진실한 경배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이 이끄시고, 주재하시고, 안배하시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찾고 구하면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인 겁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이면 사람의 기도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서로 교제하는 것이 갈수록 참되고 성실하며, 말은 갈수록 진실하고 간절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아, 이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구나, 말하는 것이 다 마음속 말이니 내가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없구나. 이 사람을 이끌고 일깨워 줘야겠다. 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진리를 깨닫도록 해야겠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기 때문에, 곧 당신에게 역사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이끄실 겁니다. 맞지 않습니까? 사람이 아직도 하나님을 이용해 복받거나 하나님과 거래하고 싶어한다면,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복받는 것이 아니라면 제가 하나님을 믿어 뭐하겠습니까?’라는 이런 신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관점입니까? 이런 사람은 왜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 수 없겠습니까? 그가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할까요? ‘하나님, 당신은 전에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복을 베풀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왜 저에게는 큰 복을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어떻게 좋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을 본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의 본심이 옳지 않은 겁니다. 그렇죠? 마음이 옳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을 해도 안 되는 겁니다. 사람도 눈치채거나 알아들을 수 있는데,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더 잘 아시죠.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시고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너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느냐? 그와 같은 인성이 있느냐? 네가 그와 비교할 자격이 있느냐? 너는 자신이 어떤 꼬락서니인지 거울을 좀 비춰보거라. 너는 아브라함의 털끝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실 텐데, 하나님은 아마 이런 뜻일 겁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했기 때문에 비록 꼭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우리가 한 말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뜻은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묘사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마 그런 마음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그런 기도를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예를 들어,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이끌어 천국에 들어가게 하고, 또한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공중으로 끌어올려 당신과 만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말씀이 오래도록 실현되지 못하는 겁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어떤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합니다. 어디가 비정상입니까? 그저 느낌만 있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면, 이건 무슨 문제일까요? 이 문제의 실질을 간파하지 못한 겁니다.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는 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건 하나님을 사람과 동등한 인류로 본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자신과 같은 부류로 여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과 그렇게 말하는 건 괜찮습니다. “당신이 지난번에 저에게 어떻게 말했죠? 당신은 왜 실천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말에 왜 책임지지 않습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뭐, 괜찮습니다, 태도가 좋든 나쁘든 사람은 평등하니까요. 그러나 사람이 조물주께 이런 말투로 말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인 겁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해지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사탄이 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가 말한 것이 사탄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과 동등해지고 싶어 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입니다.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여러분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닌 각종 행위들을 더 예로 들 수 있습니까? 어떤 기도, 어떤 몇 가지 유형의 기도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주님 앞으로 들림받아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고, 또한 주님이 그들 가운데서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을 온전케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저는 한평생 주님을 믿었고 또한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주님은 왜 제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그들에게는 나타나십니까?’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그와 주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어떤 교계 인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왜 그들에게 나타나시고 우리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우린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을 따르면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곳곳에서 당신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고, 우리 기도도 들어주지 않으셨으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이제야 보고 깨달았습니다. 저를 들어 올려 천국에 들어가게 하지 않으신다면, 누가 주님이 오셨다고 증거해도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데, 그와 주님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역시 비정상입니다. 또 한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2~30년 믿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화비도 많이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좋은 직장도 포기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20여 년을 돈도 벌지 않았습니다. 음식도 변변찮게 먹었고, 옷도 평범하게 입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모진 핍박과 환난 그리고 비방과 훼방도 다 당했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다시 오셔서 저를 끌어올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고 조그마한 느낌도 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정말로 저를 버리셨다면, 당신에게 신용이 없는 것이니 저는 더 이상 당신을 믿을 수 없고,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이런 기도는 이지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래의 하나님 말씀을 봅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모두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통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인 것입니다. 마치 두 사람이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을 나누는 것과 같은데, 다 마음속 말만 합니다. 사람이 마음속 말을 하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요? 사람은 심적으로 해방감을 느끼고, 시원하다고 느끼고, 또한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느낌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일이 임하면 오랜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 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입을 열기도 멋쩍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서 혼자서 끙끙 앓는데, 자신이 모든 고통을 떠맡습니다. 결국 스트레스가 쌓여 정신적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참되게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그렇게 큰 어려움이 있는데, 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몇 가지 경우가 있을까요? 첫째, 사람이 그 일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지 못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남몰래 저지른 일이고, 비열한 수작이고, 또한 광명정대하지 못하고 사악한 일이기에 죄악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또한 사람에게 말할 용기도 없어 입을 열기가 어려운 겁니다. 이런 사람은 가장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많이 억눌리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이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여기고, 그것은 사람의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도 한 가지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경우 외에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까? 또 하나의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 진리를 찾고 구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인데,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보게 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상황은 다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고,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많은 일에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겠습니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고, 많은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 첫째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죄 속에서 살면서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고, 또 죄의 낙을 누리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이지,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이런 문제에 부딪혔다면,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진리를 찾고 구하고 싶습니까? 진리를 찾고 구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내려놓을 용기가 있게 되고 또한 그것을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찾고 구하고 싶지 않다면, 내려놓는 것이 손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그것을 꼭 끌어안고 움켜쥐고 있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보세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혼 상대를 만나니 꼭 껴안고 놓지 않습니다. 3년을 끌어안고 보니,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손해가 아닙니까? 그는 용기 있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양심과 얼굴을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건 내려놓고 얼른 육체를 배반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더 껴안고 한동안 더 누리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다가 시험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방인이 그에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어 돈 벌 기회가 생긴 겁니다. ‘아, 돈 벌 기회는 드문 거야,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잖아, 얼른 한몫 벌어야겠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가 그 일에서 하나님께 반복적으로 기도하고, 진리를 거듭 찾고 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그는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남겨 두게 하시겠어요? 하나님은 당연히 ‘얼른 버리거라!’고 하실 텐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어요. 기도하면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어요. 제가 버리고 싶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 가져가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이 일은 제 자신의 일이고 사적인 일이니 하나님께 맡길 수 없어요.”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까요?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늘 자신의 사적인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런 일들이 당신의 생명 진입에 어떤 해를 끼치게 될까요? 도중에 결혼 상대를 만났는데, 한번 빠지니 3년입니다. 그 3년 동안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게 될까요?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도중에 돈 벌 기회가 생겨 거기에 빠지니 또 3년입니다. 그 결과, 돈은 벌었지만 또 없어지니 후회막급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쉽습니다. 오직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간혹 사탄의 시험이 임하게 되면 사람은 벗어나지 못하여 단번에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시험에 들게 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비정상이 되어 사람은 피하고 숨을 겁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피하고 숨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한 번 피하고 숨게 되면, 때로는 한 달이 되고, 6개월이 되고, 때로는 1년이 됩니다.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하나님을 피하기 시작하고, 또한 감히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기도해도 할 말이 없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이 자라는 것을 지체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런 것을 경력해 봤습니까? 다 경력해 보셨죠? 여러분은 다 도중에 무엇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까? 결혼 상대를 만난 사람이 많습니까? 돈 벌 기회는요? 승진의 시험은요? 이런 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인데, 벗어나지 못한다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또한 빠지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 되는 겁니다.

【134-A-5】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는 것은 도리적으로 매우 간단하고, 실행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다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 어려울까요? 사람은 분량이 너무 작기 때문에 늘 사탄의 교란과 사탄의 궤계 그리고 사탄의 시험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사탄의 교란과 사탄의 시험에 속하는 이런 겉면의 것 외에, 우리 자신의 애로 사항에서 어떤 것들이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에 방해가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애로 사항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고 허영심과 체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 가지 방면입니다. 가장 주요하게는 우리가 어떤 때는 지위를 좋아하고,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이런 것들에 묶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과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는 것에 영향을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어떤 때는 우리가 자신의 교만한 본성의 지배로 아주 교만하고 독선적이어서 늘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고, 늘 혼자 결정하려고 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관리하려고 하고, 또한 하나님이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하나님께 찾고 구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이런 성정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의 걸림돌이고 장애물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사람이 교만하고 독선적이면 궁리해 보다가 “됐어, 이렇게 하자!”라고 하는데, 누가 “하나님께 기도했나요?”라고 물으니, “하나님께 기도하든 안 하든, 뭐 이렇게 해야 되니 기도할 필요 없어요.”라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하니, 성령 역사가 없어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교만하고 독선적이어서 자신은 무엇이든 다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효과가 있는지 보세요. 어떤 사람은 설교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설교할 수 있어요. 머리 속에 든 것도 많고, 성경 지식도 아는 게 많아요. 성경의 대표적인 하나님 말씀을 거꾸로도 줄줄 외울 수 있어요. 입만 벌리면 설교하게 돼요.” 결국 설교를 하게 되니 실제가 전혀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별로 진실한 도움을 주지도 못했으며, 텅 빈 이론만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나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말한 것이 다 맞고, 다 성경에 부합되지만 사람의 생명 진입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음에 있어 어떠한 빛 비춤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역이 가치가 있을까요? 추호의 가치도 없습니다. 사람은 왜 하나님과 진실한 기도로 교통하지 않을까요? 왜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을까요? 진리를 찾고 구하는 발걸음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교만 자대(自大)한 사탄의 본성입니다. 자신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러면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형식적으로 할까요? “하나님, 저는 피조물이니 당신을 위해 화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저는 당신을 위해 사역하고, 설교하러 나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셔서 저의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고, 또한 저의 말재주와 은사를 다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시길 원하며, 당신을 만족케 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면 좋습니까?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어떻게 좋지 않은가요? 여기에는 찾고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는 성령 역사가 없어도 설교를 잘할 수 있고 사역을 잘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매우 높게 봅니다. 이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정을 지닌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것은 어떤 성질의 기도일까요? 어떤 것을 유로했을까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았고, 사람의 재능과 은사를 꿰뚫어 보지 못했는데,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이런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 역사가 그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높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탄의 성정을 유로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까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는 것은 더더욱 없으며, 교만하고 독선적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고, 기도를 해도 마음에 없는 말로 몇 마디 할 뿐입니다.

그런 기도가 어떤 성질을 띠고 있는지, 그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적인지, 이제는 기본적으로 분별할 수 있겠죠? 여러분이 매일 하는 기도에는 어떤 것이 부족한지, 어떤 성정이 유로되는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는지, 이런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하루의 생활을 인도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저에게 악한 일이 닥치지 않고, 제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만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길 원합니다. 아멘!” 기도는 마쳤지만 마음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고, 입은 많이 움직였지만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다 좋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도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는 어떤 성질을 띠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 것일까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공기로 대하고,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정확할까요? 이 사람의 기도를 들어보면 아직도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공기로 삼았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대충대충 하여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런 사람이 경건할까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경건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은 저의 설교 교통을 듣고 나서 제가 사람을 논단하고, 교계의 목사와 전도사만 논단하고 또 사람을 정죄한다고 함부로 판단합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일까요? 이것은 어떤 성질일까요? 해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저주하신 것에 대해 불만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교계의 목사와 전도사, 적그리스도를 폭로하신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불복합니다. 또한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하나님이 바리새인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을 보면 반대하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일까요, 사탄 편에 선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은 교계의 목사와 전도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정죄하는 것을 보면 기뻐합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고 바리새인을 저주하니 불만스러워하고 가로막고 정죄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적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교계 적그리스도 단체의 집 지키는 개가 아닙니까? 그 성질은 엄중합니다. 당신같은 종교인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진리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면서 논단합니까? 제가 한 그 말이 함부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드러내심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지,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제가 한 그 말이 근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서 말한 것인데, 누가 정죄하고 대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진리를 증오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질은 이 성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이 성질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아시겠죠? 그런 사람이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최종에 알게 될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끊임없이 대적하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발표하고, 얼마나 많은 비밀을 밝히셨든지 그런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계속 사탄의 편에 서고, 교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연구하고 글귀를 따지면서 하나님께 캐묻습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왜요? 왜요? 왜요?”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또한 이런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2천년 전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저주하실 때, 당신도 예수님께 항의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반대하고 정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보지 못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지, 정말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바리새인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정죄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지, 맹목적으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한 말이 진리에 부합되는지 의심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논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입니다! 만약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찾고 구해야 지혜가 있습니다. 늘 자신이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는 게 뭡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진리마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사람의 설교 교통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지도 모르는데, 뭘 안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134-A-6】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있고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야 한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인 후에야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기게 된다.” 또 말씀 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어떤 진리를 발표하셨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한 구절의 말씀마다 다 진리이기에 여러분은 한 구절을 읽고 나면 묵상해야 합니다. “이 구절 말씀의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 구절에서 어떤 진리를 발표하셨을까? 꼭 깨달아야 돼!” 여러분은 헛 읽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눈으로 훑어보고 그냥 지나가면 안 됩니다. 대충 훑어보고 나서 “됐어. 진리는 내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나타날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에게 그런 기능이 있습니까? 사람이 깊이 묵상하지 않고 찾고 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이 구절에서 어떤 진리를 발표하셨겠습니까?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있으려면”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의 ‘정상적인 영적 생활’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바로 정상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정상적으로 진리를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정상적인 영적 생활에 속합니다. 우선 영적 생활이 정상이 되어야 하고, 그다음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이 정상적이 되면 사람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야 한다.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인 후에야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기게 된다.”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는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 제 마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한 절차로 다 맡기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 맡기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기 자신에게 맡긴 것입니다. 이 한 마디로 하나님께 맡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는 받지 않았다. 나는 쓸데없는 말과 빈말 그리고 나를 기만하는 말을 한 마디 받았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기만하면 안 됩니다! 입으로 하나님께 대응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 마음을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면 일이 곧 이루어집니다.”라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한 마디 하시면 일이 곧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사람이 한 마디 말하면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어떤 일이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고, 죄를 범하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고, 거짓말하는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정상적인 절차가 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야 한다.”, 이것은 첫 번째 절차입니다. 어떻게 안정합니까?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당신 앞에 왔습니다. 지금 당신과 중요한 일을 하나 교통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떤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나님과 한 가지 일을 교통하는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혹은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읽고 묵상하고는 “아, 진리가 있어. 새로운 빛이 있어. 계속 묵상해야지. 하나님, 저를 깨우쳐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 몰입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말씀에 몰입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킨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려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 안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안정한 후에는 어떻습니까? 다른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 가정의 일, 육체적인 일은 마음에서 전부 사라지고, 그 시각 자신과 하나님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안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절차입니다. 두 번째 절차는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인 후”인데, 완전히 몰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마음’은 완전히 하나님께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에 몰입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로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때면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의 온 마음이 하나님께 쏠리는 것은 이방인의 말로 하면, 곧 ‘두 사람의 세계’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고 “나와 하나님, 하나님과 나뿐인데, 내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차츰차츰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생긴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기도로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는 것이며, 진리를 찾고 구하여 효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무릇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은 다 정상적인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정상적인 영적 생활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영적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 일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당신께 아이도, 부모님도 맡기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다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축복해 주시고 보호해 주세요, 아멘!” 이렇게 두어 마디 기도하고 가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안정하는 것입니까? 온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이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은 기도할 때 누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듯 하나님께 대충 두어 마디 하고는 얼른 달아납니다. 완전히 형식적인데, 마치 교계 인사들의 기도와 같습니다. 밥 먹을 때 얼른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또 시간을 보니 서둘러 출근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한 끼 식사를 축복해 주세요. 하나님, 이 한 끼 식사는 당신이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고,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갚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사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금 나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일하러 갑니다. 이런 기도가 소용 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마음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형식적이고 대충 건성으로 해서 기만하는 것이며 순전히 종교 의식입니다. 늘 이런 기도를 하면 종교 의식이 되는데, 의의가 없고 하나님이 혐오하십니다. 만약 시간이 없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고 마음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 더러운 말들로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상투적인 말이고 공허한 도리이므로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를 중시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면 어떻게 기도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또 자신의 그런 수작을 억지로 하나님께 더하는데, 그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부담을 자신의 부담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고 종교 인사의 소행이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역사의 안받침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 마치 하나님 집의 장식품과 같다. 이들은 숫자를 채우는 사람이고 폐물에 속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비유하고 묘사하셨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 역사의 안받침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 마치 하나님 집의 장식품과 같다. 이들은 숫자를 채우는 사람이고 폐물에 속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구절에서 어떤 일을 말씀하셨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도대체 어떤 것에 속합니까? 그 밖에 또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의 실질은 숫자만 채우는 것이고 폐물에 속하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폐물이 아닙니까? 그 사람은 쓰레기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쓰레기가 되기를 원합니까? 모두가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도태되고 쓰레기가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없고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으며, 늘 종교 의식을 따르고 바리새인을 본받으며, 마지막에 하나님에 의해 폐품, 쓰레기로 처리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역사의 안받침물이 될 수밖에 없는데’라고 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마치 하나님 집의 장식품과 같다’라고 하는데, ‘장식품’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합니다. 안받침물은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효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효력을 합니까? 예를 들면, 하나님 선민들이 아마도 무엇을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놓고 해부해 보면 무엇을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선민들이 무엇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는지 모르는데, 이럴 때 안받침물은 또 쓸모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의 실질을 해부하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안받침물의 역할을 합니다. 만일 그들이 없으면 사람들이 깨닫기 쉽지 않은데, 이것을 안받침물의 역할이라고 합니다. 알겠죠? 그러면 무엇을 안받침물이라고 합니까? 사역을 할 때 그저 부정적인 것만 말해서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나중에 이런 안받침물을 놓고 해부하면 효과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교회 안에 악인이 존재하고 악령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적그리스도의 존재를 허락하시고, 떡으로 배불리려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시는데,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시는 것은 어떤 목적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역사에서 어떤 사람을 도태시킵니까?”라고 합니다. “악인, 악령, 적그리스도, 불신파입니다.” “그럼 무엇이 적그리스도입니까? 무엇이 불신파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럼 출교당한 적그리스도 중에 대표적인 인물 하나를 놓고, 떡으로 배불리려는 불신파 하나를 놓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 인물은 다 존재했었고 다 교회에서 출교당한 것입니다. 그런 인물들의 예를 내놓으면 모두가 무엇을 적그리스도라고 하는지, 무엇을 거짓 인솔자라고 하는지, 무엇을 악인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악령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불신파라고 하는지를 바로 철저히 알게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철저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인해 도달하게 된 효과입니까? 바로 그런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안받침물, 생생한 부정적인 인물들을 내놓고 해부함으로써 모두가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안받침물은 이런 효력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이런 효력을 하는 자들인데, 이런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알겠죠? 그럼 어떤 사람이 “저는 모르겠어요.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계시는데, 왜 악령, 적그리스도, 악인, 불신파들이 하나님 집에 잠입하는 것을 허락하시나요?”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큰 붉은 용이 이렇게 미친 듯이 하나님 선민을 박해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것을 훼멸하지 않나요? 마지막 사역을 다 끝마친 후에 다시 그것을 훼멸하려고 하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 이 문제를 설명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것들을 안받침물로 삼아 움직여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안받침물은 하나님 역사 가운데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 그런 안받침물은 먼저 훼멸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훼멸하실 때는 한 국가 한 국가 훼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훼멸되는 것은 큰 붉은 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받침물의 말로입니다. 알겠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데도 안받침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134-A-7】

우리, 계속해서 다음 구절 말씀을 교통합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종교 의식을 행하고 늘 외식하는 사람을 싫어하시고 축복하지 않으시며 더욱이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은 폐인이 되어 쓸모가 없고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는 본분이 다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면의 본분을 잘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이고, 모두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과 인도 가운데서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다면 본분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잘할 수 없죠. 왜 효력자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까? 왜 바울처럼 사역하면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아도 온전케 될 수 없습니까? 여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교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실까요? 사람이 자기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하거나 또는 고난도 많이 받고 대가도 많이 치렀는데, 나중에 하나님은 왜 칭찬하지 않으시고 도태시키십니까? 왜일까요? (그런 사람이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것은 한 방면입니다. 또 어떤 원인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없는데, 이것이 가장 주된 원인입니다.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지 못하면 그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얼마큼 체험하고 경력하고 인식했으면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늘 성령의 역사를 접촉하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 자라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여태껏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은 적이 없고, 하나님을 느껴 본 적도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저는 하나님을 느꼈어요, 하나님은 정말 계세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봤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만져 봤습니까?” “만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저는 마음속으로 성령의 역사를 느꼈고, 하나님 영의 행사를 느꼈어요. 하나님 영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느꼈고, 하나님 영이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도 느꼈고, 이끄신다는 것도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랐고 진실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셔요. 하나님은 사람을 이끄시기도 하고 또 사람을 깨우쳐 진리를 깨닫게도 하십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역사하셔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그리고 정결케 하심을 느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경력하면서 성령의 행사를 느끼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느끼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주된 방면입니다. 다른 한 방면은 사람이 이런 경력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효과에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커지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해 드리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럼 이런 효과는 어떻게 도달하게 된 것입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말하고, 기도하고, 교제하며 성령의 역사를 얻어 도달하게 되는 효과입니다.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많이 체험할수록 하나님을 점점 더 알게 되고, 성령 역사를 체험하고 경력한 것이 적을수록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적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작은데, 이것은 다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의 역사가 있고, 많은 일에서 하나님과 진실한 기도가 있으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체험하게 되며, 많은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깨닫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접촉한다는 것은 뭘 말한 것입니까?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속 말로 하나님과 교통하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 역사를 얻으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본 것처럼 하나님이 너무나 진실하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진실하세요. 하나님은 절대 막연하지 않아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진실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거든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실하고 살아 계신 분이세요!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의 행사와 깨우침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는 다 느꼈어요. 경력한 것이 많아요! 느낀 것도 많구요! 다 이 마음속에 있어요. 자기 눈을 믿으면 안 돼요.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도 마음으로 다 봤어요. 마음으로 느낀 것이 눈으로 본 것보다 백배, 천배 더 진실해요.” 그렇다면 이와 같이 성령 역사를 많이 느낄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 알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죠? 사람이 늘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면 늘 성령의 역사와 인도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수록 정상적이 되며 갈수록 진실하게 됩니다. 교계 사람들처럼 공기에 대고 기도하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안 맞아요, 그건 중언부언하라는 거잖아요? 마음속에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싫어하실 거예요.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느끼지 못할 때가 있어도 이렇게 하나님께 말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성령 역사를 느낄 때면 경건함을 좀 보이고, 느끼지 못하면 허튼소리를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너무 어리석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은밀한 중에 너의 기도를 듣고 있고, 은밀한 중에 너를 감찰하고 있다. 나는 네가 나를 대하는 마음이 진실한지, 나를 경외하는지, 나에 대해 경건한지를 볼 것이다.” 그래야 사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늘 그렇게 역사하셔서 여러분에게 성령이 이렇게도 역사하시고 저렇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고, 뒤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당신에게 느끼게 하실 때도 있고 느끼지 못하게 하실 때도 있는데, 사람에게 숨기고 얼굴을 가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는지, 참된 순복이 있는지, 참된 경외심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십니다. 제가 말한 것을 다 알아들으셨겠죠? 이런 경력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이런 경력이 있는 사람은 바로 이렇습니다. “때로는 성령의 역사를 경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성령이 저에게 숨기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감찰하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숨기셔도 저는 하나님과 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속 말을 합니다.” 이런 경력이 있는 사람은 생명과 믿음이 절대로 멈추지 않고 계속 자랍니다.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기도할 때는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때는 기도가 정말 영적이었고 말도 아주 잘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계속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난 후 이런 느낌은 사라졌습니다. 이런 느낌이 사라진 후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숨기셨을까?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거지? 내가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을 노엽게 했지? 그렇다면 빨리 죄를 고백해서 다시 그 느낌을 되찾고 싶어. 그런 느낌이 없으면 나는 못 살아! 어떻게 해서든 회복해야겠어, 성령이 나를 뚜렷하게 감동시키고 인솔하시면 내가 느낄 수 있어. 이런 영 생활을 회복해야 돼.” 이런 생각은 맞습니까?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어떤 사람은 정말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늘 초자연적인 느낌을 구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늘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하나님이 늘 나타나시고 영이 감동을 주시고 인솔하셔서 점점 더 뚜렷하게 느끼게 한다면, 분량이 작고 아직 ‘어린애’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부모가 늘 갓난 아기 곁에서 보고만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기는 ‘으앙’하고 울며 찾습니다. 왜냐하면 아기의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말하면서 아기를 다독이면 아기는 잠들고 조용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포대기 속에 있는 아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보살피십니다. 만약 철이 든 대여섯 살 아이한테 부모들이 밖에 일하러 나가면서 “아가야, 집에 있어.” 하면 아이는 “응.” 하고 대답합니다. 부모들이 밖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이는 좀 있다가 “왜 아직도 안 오지?” “엄마, 왜 아직도 안 와, 어디 갔어?”라며 ‘으앙’ 하고 울음보를 터뜨립니다. 한참 울고 나니 엄마가 돌아왔습니다. “울긴 왜 울어?” “반나절이나 안 보이니까 무서웠어.” “엄마가 밖에서 일한다고 했잖아.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들어와서 너랑 놀겠니? 말 잘 들어, 엄마 밖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알았어.” 그제야 아이는 두세 시간 정도 울지 않고 버팁니다. 만약 한 살 더 먹으면 부모가 5시간을 비워도 괜찮고, 두 살 더 먹으면 부모가 밖에 나가 반나절 일을 하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아이는 갈수록 철이 듭니다. 사람의 생명도 이렇게 자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 저를 깨우쳐 주셔서 제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늘 이렇게 구한다면 맞습니까? 틀렸습니다. 그럼 뭘 구해야 합니까? 효과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 역사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 효과에 도달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기도를 다 하고 나서도 하나님을 만지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저는 진리를 깨달았고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이러면 족합니다. 저의 기도가 효과에 도달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꼭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 밖에서 일해도 돼요, 근데 내가 배고플 때, 나한테 밥하고 김치만 주면 돼요. 엄마 아빠가 밖에서 일하고 있는 거 알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구하고 이렇게 하나님과 지내면 좋습니까?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게 하시고, 어떻게 해야 당신을 만족케 해 드릴 수 있는지만 알게 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명확한 느낌을 달라고 구하지 않고 효과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만을 구하겠습니다.”라고 이렇게 그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사람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구한 후에 3, 5일 혹은 7, 8일 동안 그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깨닫게 되고 길이 생기고 빛 비춤이 있게 되면, 그 일에 대해 점점 더 환해집니다. 오늘은 조금 빛 비춤이 있게 되고, 다음날에는 더욱 환해지며, 이틀 뒤에는 꿰뚫어 보게 되며, 3일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깨우쳐 주시니 알겠습니다. 요즘 저는 이 일에 대해 꿰뚫어 보게 됐습니다. 이게 다 당신께서 깨우쳐 주시고 빛 비춰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당신을 만족케 해 드려야 할지 알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보시고 “네가 깨달았구나, 성과를 얻었구나, 답을 얻었구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어떻습니까?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정상 관계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정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 마음속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면서 이루어질 때까지 이렇게 한 가지씩 처리하고 한 가지씩 간구하는 것입니다. 간구할 때는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하고, 이루어질 때는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 그대로 합니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으로 깨닫게 되고,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인도로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믿는 길을 가면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도 갈수록 실제적이 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실제적이 되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갈수록 참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도 갈수록 실제적이 되며, 자신도 모르게 일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생명 성정이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과 진실로 교제하는 가운데 구원을 받고 온전케 되며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길을 이렇게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길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진리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듬고, 마지막에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아 진리를 깨닫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알게 되면 그렇게 하게 됩니다. 경력하면서 이런 부류의 일은 이렇게 처리하고 이렇게 경력하는 것입니다. 패괴를 유로하고 과오가 있어도 역시 이렇게 처리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찾고 구하며, 마지막에 자신을 인식한 후에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이 생기고 진실한 회개가 생기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이 일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을 했는지, 이제는 당신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당신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꼭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이며, 다시는 하나님 집의 사역에 손해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드립니다.” 이러면 됩니다. 과오가 있어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복잡한 일이 닥쳐도 어떻게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각종 어려움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역자 간의 협력하는 관계에서 꿰뚫어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해 어떤 원칙에 따라 처리하고 대해야 하는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또 어떤 애로 사항이 있는지, 모든 문제를 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야 하며 진리를 찾고 구해서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1년 동안 이렇게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는 과정이 많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1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얻는 것이 많지 않겠습니까? (많습니다.) 1년에 10여 가지 일을 참으로 경력할 수 있으면 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의지해서 해결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진실로 회개했습니다. 저는 이런 어려움을 가지고 한두 달 기도하면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에 자신이 어떻게 포기했다고 말하면 그것이 바로 진실한 경력입니다. 1년에 10여 가지 일에서 기도를 통해 진리를 찾고 구하여 철저히 해결하면 그 경력은 아주 풍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기도하고, 날마다 쓸데없는 말을 하며, 마지막에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든 자기 뜻대로 하고, 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교계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백배 낫지 않습니까? 교계 사람들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어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교계 사람들은 가는 길이 두 갈래 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면 자신의 패괴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달렸습니다.

【134-A-8】

이 말씀은 여기까지 교통하겠습니다. 이어서 새 신자 형제자매들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겠습니다.

문제(1) 어떤 새 신자는 예수님을 믿을 때 바울이 겉으로 보면 아주 많은 것을 버리고 화비했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각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 교회들을 돌보면서 온 유럽에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매우 숭배했습니다. 이 새 신자는 바울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한 모든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답변: 이 문제는 답하기 쉽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울이 한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까?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바울이 갔던 길을 해부해 보았을 뿐입니다. 은혜시대에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화비했던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화비하면서 확실히 아주 많은 사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한 사역은 어떤 효과에 도달했습니까? 하나님을 만족케 했습니까? 성정이 변화된 간증이 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간증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수고를 아주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고생해서 사역한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았습니까? 다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비록 고생스럽게 많은 사역을 했지만, 행한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에 닿지 못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생명 성정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사역을 했어도 다시 옛 병이 도져 교만 자대(自大)하면서 자신을 아주 높이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 상을 요구하였고, 하나님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서 은혜시대의 모든 사도와 제자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갔던 길은 다 옳지 않았고, 그 사람들은 진리와 생명을 추구하지 않았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사역을 아주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실질을 간파했죠? 지금 우리는 바울이 갔던 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통하는 건 바울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께 징벌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징벌받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바울이 처음에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했을 때부터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제사장을 추종하기 위해, 교계에서의 직위를 얻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미친 듯이 예수님을 정죄했는데,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는 데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어느 정도까지 대적하고 정죄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그렇게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음에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바울이 우매 무지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까? 만약 정말로 우매 무지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해 사람에게 속은 것이라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해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았을 때 “아, 우리가 대적했던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셨구나, 내가 잘못 대적했어, 너무 후회돼. 난 속았어, 사람들에게 미혹된 거야. 진짜 우매 무지해!”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마땅히 회개해야 하고, 자발적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회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잃고 미친 것처럼 계속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았습니다. ‘예수, 당신이 부활했으니 아마 하늘로 올라갔을 테지. 그래서 이제 당신을 잡지 못하니 난 당신의 제자들을 잡고, 사도들을 잡을 거야.’ 바울이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우매 무지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고의적으로 예수님과 적이 된 것입니까? 그 성질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바울은 왜 또 예수님을 위해 화비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큰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하늘로부터 바울에게 큰 빛을 비추어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주여, 뉘시니이까?”라고 하자, 주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바울은 무너졌습니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었구나! 큰일 났다. 한 마디 말이면 나를 멸할 것인데, 내가 얼른 대답해야지. 예수를 위해 화비하면 그래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거야!’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은 본인이 원해서 돌아선 건가요? 기꺼이 원한 건가요?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원했습니까? 바울은 억지로, 어쩔 도리가 없어서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나타나셔야만 믿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믿음은 보아야만 믿는 믿음이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신에서 사역하시는 것처럼 겉모습은 인자이십니다. 인자는 하나님 영체의 형상을 조금도 지니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보고는 그분을 보통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으나, 우리는 그분이 음성을 발하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그분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이분이 바로 성육신이세요.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에게 훼방을 받고, 교계의 정죄를 받으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그분은 바로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누굴 믿나요?”라고 물으면 “성육신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네? 당신 참 무지하네요.” “무지하다고 말한다 해도, 저는 이것을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은 어떠합니까? 바울은 하늘 위의 하나님을 믿었지, 성육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권병과 능력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께 향할까 봐 있는 힘을 다해 잡고, 정죄하고, 깎아내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야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 위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바울은 영원히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면 바울의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바울은 하늘 위의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보이시면서 바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말씀이 육신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많은 진리를 발표하신 데 대해 매우 증오하면서 미친 듯이 붙잡고 박해하며 예수님을 대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바울의 실질이 아닙니까? 바울은 그런 인간이 아닙니까? 바울은 어떤 배경에서 효력했습니까? 자신이 훼멸당하게 될 때 효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영체로, 큰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에야 받아들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큰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바울은 여전히 주님을 위해 화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여전히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 그리고 큰 이적에 항복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성육신이었고, 나사렛 사람의 아들이고 목수였다면, 바울은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완고함은 무슨 본성입니까? 적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순전히 효력에 속합니다. 아시겠죠? 바울은 효력하는 기간에 자신의 본성 실질을 인식했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 때문에 얼마나 뉘우쳤나요? 눈물을 얼마나 흘렸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바울이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게다가 또 면류관까지 요구했으니, 정말 이지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자신의 죄명을 씻어 없애기만 해 줘도 다행인데, 거기다 또 공의로운 면류관까지 달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이 문제에 이렇게 답하면 어떻습니까?

문제 (2) “말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너희의 사랑을 나의 앞에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진노가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상면에서 교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은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하시는데, 사람이 만약 잘 경력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죠. 말세의 이 단계 사역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이렇게 많이 하시고, 사람에게 이렇게 큰 구원을 가져다주시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많이 나타내 주시는데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또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없다면, 이런 사람은 저주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고 살아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으면 나의 진노가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은혜시대에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말세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품을 전부 사람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무엇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은 다 인류에 대한 가장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나타내시든, 어떤 효과에 도달하시든 모두 진실한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품을 다 경력하고 분명하게 체험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형벌을 경력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최종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효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면서 제 자신이 바로 마귀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는 제가 완전히 망할 놈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어떻게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떻게 참된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볼 때면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데, 여기서는 왜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도달하라고 하는 거죠? 말이 좀 모순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할수록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바로 완전히 마귀 사탄이라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해서 도둑질하거나 훔치거나 빼앗지 않고, 무슨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제 자신을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고 나니까 자신의 성정이 천사장과 똑같이 교만 자대하고, 거만하고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이고, 심지어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물건짝입니까!” 여기까지 경력하고 나니 제 자신이 바로 지옥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옥에 떨어져 마땅하고, 지옥에 가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 과오에 따라, 패괴된 진실한 정형에 따라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인식하고 난 후에는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바뀌고, 이지와 양심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참되게 화비하고, 또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고통받아도, 대가를 아무리 많이 지불해도, 본분을 아무리 많이 해도 달가워하게 되고, 면류관이나 축복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힘을 다하고 효력을 다한 다음 하나님이 지옥으로 멸해 버리셔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바울과 다릅니다. “바울은 면류관을 따졌지만 난 그런 것을 따지거나 바라지 않아, 지옥에 떨어져도 괜찮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길 거야. 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봤어!” 이 정도까지 경력하면 상이나 면류관을 바라지 않고, 축복을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게 됩니다. 자신은 복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달갑게 효력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본분을 다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인식하면, 하나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 최고봉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이 정도까지 인식했을 때, 하나님은 “너희 같은 사람들, 무릇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이 곧 내가 구원하려는 인류이고, 내 역사가 도달하려는 효과이다. 너희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자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또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공의로운 하나님은 우리가 과오가 너무 많고, 완전히 마귀 사탄인 것을 보시고도 우리를 징벌하거나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또 우리를 국도로 이끌어 들어가 국도의 자민이 되게 하시는데,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기까지 경력하고도 여전히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고, 요만한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면 나의 진노가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이해가 됩니까? 만약 아직도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칭할 자격이 너무 없고 양심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뭐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은 벌받아도 쌉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개돼지만도 못하고 양심과 이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짜이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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