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집 (b)하나님 말씀 에 관한 설교 교통

오늘의 예배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심판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를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부한 은혜를 누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섬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연약해지기도 하고 또 자주 강건해지기도 하면서 모든 행위는 다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또 천부의 뜻대로 행하는 길을 이미 걷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 주 예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며, 주 예수의 영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땅에서의 생활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것이 ≪계시록≫에 예언한 것처럼 ‘주님이 오실 때 재난을 가져오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며, 그를 따르는, 그의 돌아옴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중에 끌어올려 주님과 만나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은 감개무량하였고, 자신이 말세에 태어나 운 좋게 주의 강림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다행스러워하였다. 비록 박해는 당하지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꿔 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이 모든 간절한 바람과 주님이 베풀어 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다그쳐 예배하게 하였다. 혹시 내년에, 혹시 내일에, 또 혹시 더욱 빠른, 사람이 예상치도 못한 때에 주님이 홀연히 강림하여 그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한 무리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다투며 누구도 뒤떨어지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님의 나타남을 제일 먼저 보는 자가 되기 위해서였고, 주님께 들림받는 자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도래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화비해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어떤 이는 가정을 버렸으며, 어떤 이는 혼인을 포기하였고, 심지어 어떤 이는 모아 둔 돈을 다 바쳤다. 얼마나 사심 없는 봉헌인가! 이러한 진지함과 성실함, 이러한 충심은 틀림없이 역대 성도들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은총을 베풀고 싶은 자에게 은총을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자를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봉헌과 화비는 주님이 이미 눈에 담아 두었으리라 믿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도 이미 주님의 귀에 상달되었으니 주님이 우리의 봉헌에 보답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복과 약속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장래를 계획하면서 당연하게 자신의 봉헌과 화비를 공중에 들림받아 주님과 만나는 조건과 자본으로 삼고 더욱이 서슴없이 자신을 장래의 보좌에 올려놓았는데, 만국만민을 다스리든, 왕이 되어 권력을 잡든 모두 당연한 일이고 역시 예상하던 일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와 적대되는 모든 사람을 멸시한다. 그들의 결말은 장차 다 훼멸되는 것이다. 누가 그들더러 주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지 말라 하였는가? 물론 때로는 주 예수를 본받아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면서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하였다. 우리는 모두 성경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였는데, 무릇 성경과 어긋나는 것이면 이단이고 사교라는 이런 신념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님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구원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 부축하였고, 예배 때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에 맞고 주님께 열납(悅納)되기를 바랐다. 비록 상황은 아주 열악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복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인들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다 말이 필요 없었고 모든 것은 또 다 하나님의 눈이 감찰하고 있었다. 거름 더미에서 들림받은 우리 이 극소수의 궁핍한 사람들은 주 예수를 따르는 모든 보통 사람들처럼, 들림받는 꿈을 꾸고 복받는 꿈을 꾸며 만국을 다스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의 패괴는 하나님의 눈에 여지없이 드러났고, 우리의 욕망과 탐욕은 하나님의 눈에 정죄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토록 정상적이고도 그토록 이치에 맞게 자연스레 발생하여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맞는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모든 것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 누가 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도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우리는 구할 줄 몰랐고 탐구할 줄도 몰랐으며 더욱이 물어보고자 하는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우리가 들림받을 수 있는지, 축복받을 수 있는지, 천국에 우리의 자리가 있는지, 생명수와 생명나무의 열매에 우리의 몫이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되기 때문이었다. 주를 믿는 것과 주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의 죄는 이미 사함받았고, 우리는 이미 회개도 하였으며, 쓴잔을 마셨고 십자가도 졌다. 어느 누가 우리의 대가가 주님께 열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우리가 충분한 기름을 예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련한 처녀가 되기를 원치 않았고, 버림받는 자 중의 하나가 되기도 원치 않았기에 항상 주님께 기도하여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구하였다. 이는 성경에서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태복음 24:23~24)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구절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거꾸로도 줄줄 외우면서 그것을 더없이 귀한 보배로 여기고 생명으로 여겼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들림받을 수 있는지의 근거로도 삼았다……

수천 년 이래, 살아 있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소망을 가져갔고 꿈도 가져갔는데 천국으로 갔는지는 아무도 분명히 모른다.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와서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고 여전히 앞사람의 가르침과 앞사람의 길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우리의 주 예수, 우리의 하나님이 과연 우리가 행한 이 모든 것을 정말 열납할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장차 벌어질 모든 것을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줄곧 침묵하며, 여태껏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에게 말씀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제멋대로 성경에 따라, 표적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성품을 판단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지식과 관념, 도덕 윤리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대체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데에 익숙해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시로의 도움이 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손 내밀어 요구하고 하나님을 오라 가라 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또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개의치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규례를 지키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더욱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날들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서로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의 소유소시(所有所是)가 무엇인지, 그의 형상이 어떠한지, 그가 오면 우리가 그를 알아볼 수 있는지 등등 이러한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가 계시고, 우리가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어떠어떠하다고 상상하기만 하면 충분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감상하고, 우리의 영적인 것들을 귀하게 여기며 만사를 분토로 여기고 만유를 발 아래에 밟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도들이기에 설령 천산만수(千山萬水)와 온갖 위험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시록 22:1~5)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한없는 기쁨과 만족으로 넘쳐났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님의 택하심에 감사드리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금생에 백배를 얻게 하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해 주셨으니 만약 지금 우리에게 죽으라 해도 절대로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주여! 빨리 오소서! 우리가 당신을 간절히 바라는 걸 봐서라도,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걸 봐서라도 더 이상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우리에게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사역은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온 땅을 감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사람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을 친히 보고 있다. 그는 계획 있게, 절차 있게 그의 경영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걸음씩 인류에게 다가와 번개처럼 신속히 우주 가운데 그의 심판대를 펼쳤고 그의 보좌도 곧이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것은 얼마나 위엄 있는 장면인가! 그것은 얼마나 장엄하고 엄숙한 광경인가! 그 영은 마치 비둘기처럼 또 포효하는 사자처럼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는 지혜이고 그는 공의이고 위엄이며, 권병(역주: 권세)을 지니고 자비와 긍휼을 만재(滿載)하고 조용히 우리 가운데 강림하였다. 그가 오신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오신 것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그가 하려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의 생활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소의 마음, 평소의 세월이다. 하나님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작은 따르는 자로서, 평범한 신자로서 우리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추구와 목표가 있고 더욱이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성도 있다. 아무도 그의 신성의 존재를 주의하지 못하였고, 또 아무도 그의 실질이 사람과 구별이 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눈에는 다만 작디작은 신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의 눈앞에 있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모두 그의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아무도 그의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하는 기능에 대해 그 어떤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아무도 그의 신분에 대해 그 어떤 추측과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추구를 계속할 뿐이었다. 마치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성령은 그를 ‘통해’ 한 편의 말씀을 발표하였다. 아주 뜻밖이라고 느꼈지만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온 음성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흔쾌히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말씀을 발표한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우리는 다 받아들여야 하고 거절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다음번의 음성은 혹시 나를 통해, 혹시 너를 통해, 또 혹시 그를 통해 발할 수도 있는데, 누구이든 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이든 우리는 숭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일 수가 없고, 우리는 또한 절대로 이렇게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높고 크고 얼마나 존귀한데, 어찌 작디작은 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더군다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와서 우리를 끌어올려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바라는데, 이렇게 작디작은 사람이 어찌 이처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임무를 감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님이 재림한다면 반드시 흰 구름을 타고서 만인으로 하여금 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어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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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132-B-2】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서 은밀히 거하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바로 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하는 새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거나 온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지도 않고 다만 그의 계획과 절차에 따라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발하는 음성과 말씀은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위로ㆍ권면ㆍ일깨움ㆍ경고에서 책망ㆍ징계에 이르기까지, 어조가 부드럽고 자상하던 데에서 언사가 격렬하고 위엄 있는 데까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한껏 긍휼을 받게 하고 또 매우 두려워하게 하였다. 그의 말씀은 모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비밀을 적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찔러 아프게 하였고 우리를 몸 둘 바 모르게 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우리는 그 사람 마음속의 그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혹시 이런 고생을 겪어야만 우리가 들림받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마음속으로 따져 보고 있었다…… 이후의 귀숙을 위하여 또한 장래의 운명을 위하여. 우리는 여전히 아무도 하나님이 이미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비록 그가 이미 우리와 오랫동안 함께 하였지만, 비록 그가 이미 우리와 대면하여 많은 말씀을 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우리의 미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전망과 운명을 다 이 작디작은 사람에게 맡겨 주관하게 하는 것은 더욱 달가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끊임없는 생수의 공급을 누리고 있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오직 하늘에 있는 주 예수의 은총에 감사할 뿐 신성을 지닌 그 보통 사람의 느낌은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비미은장하여 육신 가운데서 사역을 하고 있고 마음의 소리를 발표하고 있었다. 마치 그에 대한 인류의 저버림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고, 마치 그가 영원히 사람의 유약함과 무지함을 용서해 주고 영원히 그에 대한 사람의 무례한 태도를 관용해 주는 듯했다.

부지중에 우리는 그 작디작은 사람에게 이끌려 하나님의 하나 또 하나의 역사 절차에 들어가 수많은 시련과 수많은 채찍질을 겪었으며 죽음의 시험도 겪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롭고 위엄 있는 성품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누리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큰 능력과 지혜를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실한 마음도 보게 되었다. 그 평범한 사람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으며, 사람의 본성 실질도 인식하게 되었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도 보게 되었다. 그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하였고 또 부활하게 하였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받게 하였고 또 갑절로 가책받고 갑절로 빚졌다고 느끼게 하였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었고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도 하였다. 때로 우리는 그의 손의 어린 양과 같아서 그에게 목숨을 맡겼으며, 때로 우리는 그의 눈동자와 같아서 그의 사랑을 누렸으며, 때로 우리는 그의 원수와 같아서 그의 눈에서 그의 노기에 의해 재가 되었다. 우리는 그가 구원하는 인류이고, 우리는 그의 눈에 구더기이며, 우리는 또 그가 밤낮 생각하며 되찾으려는 잃어버린 양이다. 그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우리를 혐오하며, 우리를 끌어올리며, 우리를 위로하고 권면하며,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에게 깨우쳐 주며, 그는 또 우리를 책벌하고 징계하며, 심지어 우리를 저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를 밤낮으로 걱정하고 밤낮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심혈과 대가를 기울였다. 우리는 그 작고 평범한 육신이 하신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귀숙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허영심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서 훼방을 놓아 그런 사람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기꺼이 주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비록 그가 우리에게 많은 만나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져다주었지만 우리 마음속의 ‘주님의 지위’는 그런 것들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마지못해 그 사람의 특수한 신분과 특수한 지위를 존중하였다. 그가 입을 열어 우리에게 그를 하나님이라고 시인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가 바로 곧 오게 될, 하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서 오랫동안 역사한 그 하나님임을 주동적으로 시인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 그의 음성을 발하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각도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훈계해 주는 동시에 그의 마음의 소리도 표현하고 있었다. 그의 말씀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행할 길을 보여 주었으며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진리인지도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끌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에 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눈에 띄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고, 우리를 위하여 침식도 편하게 하지 못했으며, 그는 우리 때문에 울고, 우리 때문에 탄식하며, 우리 때문에 병 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의 귀숙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굴욕을 참고 있었지만 우리의 무감각, 우리의 패역은 그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이러한 소시소유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또한 패괴된 어떠한 사람도 구비하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일반인에게 없는 관용과 인내가 있으며, 그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분 외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우리의 본성과 실질에 대해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인류의 패역과 인류의 패괴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이렇게 역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존엄을 갖춘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그에게서 남김없이 발표되었다. 그분 외에는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광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비밀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사탄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부탁을 발표하고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와 새 기원을 개척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역사를 가져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막연함 중에서 지내던 우리의 삶을 끝냈고, 우리 전인(全人)으로 하여금 구원받는 길을 철저히 보게 하였다. 그는 우리 전인을 정복하고 우리의 마음을 얻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마음은 지각이 있게 되었고, 우리의 영도 소생한 듯하였다. ‘이 평범한 사람, 이 작디작은 사람, 우리 가운데 생활하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저버림 받았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늘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바라던 주 예수가 아닌가? 그분이다!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분이 바로 진리ㆍ길ㆍ생명이다!’ 그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광명을 보게 하였으며, 우리의 마음이 더는 떠돌아다니지 않게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앞길을 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완전히 그에게 정복되어 더 이상 그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고, 더 이상 그의 역사와 말씀을 저촉하지 않았고, 전인이 그의 앞에 엎드러졌으며 오로지 이 한평생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만을 원하였고 그에 의해 온전케 되어 그의 은총에 보답하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에 보답하며 그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역주: 순종)하고 그의 역사에 협력하며 최선을 다해 그의 부탁을 완성하기만을 원하였다.

하나님께 정복되는 과정은 마치 한차례의 승자전과 같다.

하나님 말씀은 마디마디마다 우리의 급소를 찔러 우리를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관념과 상상을 드러냈고 우리의 패괴 성품을 드러냈다. 일언일행, 일거일동에서 마음과 생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본성 실질을 그의 말씀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여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하였고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였다.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속셈과 목적,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패괴 성품까지도 그는 일일이 우리에게 알려 주어 우리를 만신창이가 되게 하였고 게다가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하게 하였다. 그는 그에 대한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모독과 정죄를 형벌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눈에서는 우리가 옳은 게 하나도 없고 우리가 바로 살아 있는 사탄임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의 희망은 깨지고 말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감히 그 어떤 무리한 요구나 의도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우리의 꿈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일순간 우리의 마음은 평형점을 잃어 앞길을 어떻게 걸어 나가야 할지 몰랐고,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몰랐다. 마치 우리의 신앙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하였고, 또 마치 우리는 주 예수와 ‘만난 적도, 알고 지낸 적도’ 없는 듯하였다. 눈앞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하였고 우리를 방황하게 하였다. 우리는 낙심하였고 실망하였으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굴욕이 생겼다. 우리는 토해 내려고 시도했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시도했으며, 더욱이 우리의 구주 예수를 계속 기다렸다가 그에게 속사정을 하소연하려고도 시도했다. 때로는 우리의 겉모습은 대범하였지만 마음은 전례 없이 낙담되었고, 때로는 우리의 겉모습은 아주 침착해 보였지만 마음은 바다가 뒤집어지듯이 갑절로 괴로움을 받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꿈과 희망이 빼앗겨 더는 지나친 욕망을 갖지 못하였고, 그가 바로 우리의 구주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말미암아 그와 우리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는데 심지어 아무도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말미암아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큰 좌절을 겪고 이렇게 큰 굴욕을 받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거스를 수 없고 존귀한데,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비천하고 얼마나 더러운지를 느끼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우리의 오만과 자대(自大)를 알게 하였고, 또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고 같이 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더는 이러한 패괴 성품 가운데서 살지 않고 하루속히 이러한 본성 실질에서 벗어나 더는 그에게 미움받지 않고 혐오받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구하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그의 말씀에 순복하고 그의 말씀을 듣게 하였으며, 더는 그의 지배와 안배를 거역하지 않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달갑게 그를 받아들여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정복 사역에서 걸어 나왔고 지옥에서 걸어 나왔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걸어 나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이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셨다! 그는 사탄을 이기셨고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켰다!

우리는 사탄의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이런 한 무리 평범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만세전에 예정해 놓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거름 더미에서 끌어올린 궁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정죄하였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정복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도를 얻었다. 하늘 끝이든 바다 끝이든, 핍박이든 환난이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떠날 수 없다. 이는 그가 우리의 조물주이고 우리의 유일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흘러 너에게도 베풀어 주고 나에게도 베풀어 주고 그에게도 베풀어 주며,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준다.

하나님의 역사는 해와 달이 바뀌는 것처럼 여태껏 멈춘 적이 없다. 너에게도 역사하고 나에게도 역사하고 그에게도 역사하며,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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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

②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132-B-3】

지금 보면 많은 새 신자 형제자매님들은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셔서 역사하셨는지’, ‘왜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하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음성을 발하고 말씀을 발표하셨는지’, ‘누가 기록을 한 건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역사하시는 걸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데, 왜 당신들은 갑자기 나와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증거를 하는 건지’ 등등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예배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택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그 문제들을 중심으로 교통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형제자매들의 많은 어려움과 의문들을 해결해 드릴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은밀히 강림하시는 것과 공개적으로 강림하시는 것, 이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은밀하게 강림하신다는 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인자의 모습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음성을 발하고 말씀하시는 걸 말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강림하신다는 건 주께서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천만의 거룩한 자들과 함께 강림하시는 걸 만국만민이 다 보게 된다는 거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증거하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역사하신다고 말하는데, 왜 우린 보지 못했나요? 하나님께서 언제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을 하셨어요? 하나님은 어떻게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하셨는데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 누가 기록을 했나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갖고 오신 건가요? 하나님은 왜 당신들 가운데서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하시죠? 우린 왜 듣지 못했죠? 우린 왜 보지 못했죠?”라고 하면서 의심을 합니다. 이런 질문이 어떤가요? 네, 아주 좋은 질문들을 하신 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셨는데, 이런 문제들을 꿰뚫어 보실 수 있나요? 다 간파하실 수 있나요? 언제 확실히 알게 되셨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나서 알게 되신 건가요? 아니면 예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확실하게 알게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맞습니다. 하나님은 동방에 있는 중국에 나타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인자의 모습으로 음성을 발하고 말씀하시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죠. 하나님은 평범한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겉모습은 일반인과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들 가운데서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하시고 사역을 하십니다. 거기에 초자연적인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맞긴 한가요?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역을 하신다면 초자연적이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교계에서 믿고 있는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초자연적이셨나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말씀하실 때,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었나요?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한 곳에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실 때, 다른 곳의 사람들이 볼 수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왜 볼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고 사역하시는 것도 초자연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 빼고는, 초자연적인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역하실 때,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만 보고 듣고 또 체험할 수 있었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면입니다. 아셨습니까? 그래서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에서는 하나님이 중국의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에서 하신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왜 모를까요?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그 사람들만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같은 중국인들이 보거나 들을 수 있었나요? 서방의 영국인들, 미국인들이 보고 들을 수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그럼 서양 사람들과 동방의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역사를 다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가 증거를 했거나 누군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역사가 기록된 성경을 우리에게 나눠 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면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구주시라는 걸 믿게 됐습니다. 그렇게 믿게 된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렇게 믿게 된 겁니다. 이제 서방 사람들이 “하나님이 중국에 나타나 역사하시는데, 우린 왜 몰라요? 우린 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어요?”라고 하는 그런 문제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명하기 쉽습니다. 좀 전에 제가 설명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역사에 대해 성경에 예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뭘까요? 하나님의 말세 역사가 번개처럼 동방에서 나타나고, 동방에서 시작된 그 번개가 잇따라 서방을 비출 것이고, 인자도 그렇게 강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인자의 강림도 그러하리란 뭘 가리킬까요? 번개처럼 동방에서 역사하셔서 먼저 동방 사람들에게 큰 빛이 나타나고, 참 빛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걸 보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큰 빛은 번개처럼 곧바로 서방까지 비추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동방에서 발한 뒤에, 그 말씀을 다시 인터넷에 올리면, 서방까지 전해지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쯤 인터넷에 올렸는지 아시나요? 적어도 2007년 쯤에 올렸습니다. 좀 더 일찍한 건 2005년 쯤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게 아마 2010년 쯤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터넷에 올려진 지 그렇게 오래 됐는데, 기독교인들 중에 온라인으로 알아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지 않습니다. 온라인으로 알아본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말씀은 인터넷에 일찍이 올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터넷에 있다는 걸 다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왜 알아보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그게 무슨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곳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됐습니다. 하지만 시종일관 알아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결국 침륜되고 멸망될 겁니다. 그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잘못이 누구에게 있나요? 하나님께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는 겁니다. 왜 사람에게 있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찍이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42),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마태복음 25:6), “내 양은 내 음성을 알리라”(요한복음 10:27)라고 하셨습니다. 또 “구하라 그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태복음 7:7)라고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봅시다. 사람이 시종일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이 오셨다고 증거하는 걸 듣고도 알아보지 않고, 오히려 맹목적으로 정죄하고, “하나님이 오셨다고 증거하는 건 다 이단이고 사이비다.”라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아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 받아 죽게 된다면, 그건 누구 탓일까요? 교계의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의심합니다. 뭘 의심할까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겠어? 왜 우리에게는 감추시겠어? 왜 우리는 알지 못하게 하시는 거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내가 은밀히 강림하여 역사할 때,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깨우쳐 주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죠? 계시록 3장 3절입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누군가 하나님의 말세의 사역에 대해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면서 증거하는 걸 듣고도 자발적으로 찾고 구하지 않고, 알아보지 않아 재앙에 떨어지고, 징벌받아 죽게 된다면, 하나님을 원망해선 안 됩니다.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고, 어떤 면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옳은 것입니다. 처음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셨나요? 주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셨나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지금 누군가 이 복음을,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보살핌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건한 사람은 그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자대하지 말고 자신을 높게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먼저 나한테 계시해 주실 거야! 하나님이 오셔서 나한테 계시해 주지 않는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난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잘못을 한 거죠?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여러 번 봤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오시면 당연히 저한테 계시해 주셔야죠. 먼저 저부터 계시하셔야죠. 안 그럼, 전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오시면 꼭 당신에게 먼저 계시해 주신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근거가 있나요? 주님이 ‘내가 와서 너에게 먼저 계시해 주겠노라.’라고 알려 주셨나요?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온 천하에 당신이 가장 높고, 가장 대단하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남들보다 대단합니까? 당신은 특별한 피조물입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기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왜 심판 사역을 하십니까? 바로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을 뵐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패괴된 인류에게는 다 사탄 성정이 있어서 다 아주 교만자대하고 잘난 척하고 독선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너무 지나치게 사치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다들 자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죠. 하늘 아래에서 만인 위에 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패괴 성정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뵐 자격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하나님은 왜 당신들에게 나타나셨어요? 왜 우리한테는 나타나지 않으신 거죠? 하나님은 왜 중국에서 나타나셨어요? 왜 서양 어느 나라에 나타나지 않으신 거예요?”라고 할 겁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셔서 역사하시든 사람의 의견을 구해야 합니까? 각국각방의 하나님 선민들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여러분, 와서 투표하세요. 득표수가 가장 많은 곳이 나오면 제가 그리로 가서 나타나 역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을까요? 물어봐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도 대중의 소리를 좀 들으시고 민주 선거를 하시게 말입니다. 이게 합당합니까? 왜 합당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기어이 이런 요구를 제출한다면,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될까요? 사람이 너무 이지가 없는 것이고, 너무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사라도 되려는 겁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어디에서 나타나시는 것까지 사람의 의견을 물어 봐야 한다는 뜻이겠죠. 이런 피조물이, 이런 인류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성정이겠습니까? 교만자대가 아니겠습니까? 이건 제가 그런 사람을 정죄하는 겁니까? 사람은 너무 교만자대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지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132-B-4】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저는 티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긴 건 사람 같지만, 하나님의 앞에서는 티끌에 불과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낮췄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걸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지고지상하시고 존귀하신 분이지만, 사람은 티끌에 불과하고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조건이나 지나친 요구를 할 자격이 없고, 감히 하나님을 향해 사치스런 욕망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게 있었고, 그에게 역사하신 겁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다 순복하여 결국엔 조물주의 축복을 받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아브라함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왜 감히 아브라함과 비교하지 못할까요? 전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됐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그 가운데의 일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기도와 일처리 하는 것을 보면 패괴된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말들, 행했던 일들을 보면 아주 이성적입니다. 그리고 인성도 아주 좋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비교할 존재가 못됩니다!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우리는 너무 부족합니다. 아브라함의 손톱 만큼도 상대가 안 됩니다. 욥과 비교해도 우린 따라가지 못하죠. 우리는 말세에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사람에게 있어야 할 이지를 갖춰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오직 순복하고 찾고 구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그 어떤 사치스런 욕망이나 지나친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봅시다. 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역사하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땅에서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구세주가 나타나 인류의 속죄제가 될 거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렸죠. 메시아가 하루빨리 강림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였죠. 메시아의 뜻이 뭐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근데, 구세주가 오셔서 이름을 ‘구세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오셨는데, ‘신(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이라고 부르면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신’이라고 불리는 자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보세요, 어떤 여자들을 ‘여신’이라고 합니다. 누구 누구는 자기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역겹습니까!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다 신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맹신하는 영웅들이나 역사적인 인물들을 다 신이라고 합니다.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 마음에 신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시면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했습니다. 율법시대에는 여호와라고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그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스스로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은혜시대에 메시아가 오셨는데, “예수”라고 불리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라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우린 당신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당신이 하나님의 신분으로 말을 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린 당신을 정죄할 거야! 당신은 참람한 말을 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구세주가 되려고 하기에 우린 받아들일 수 없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거야.”라고 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나중에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건 무슨 문제일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예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고 징벌하시는 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2천년 동안 좋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망국의 아픔을 겪게 됐고, 세상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노예가 됐습니다. 중국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고, 서양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각국에 다 있죠. 그들은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많은 무슬림 국가들은 그들과 딱 적이 되어 대대로 끝이 없이 싸웁니다. 지금도 계속 싸우려고 하죠! 그런 일들은 다 어떤 문제를 말합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훼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데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과 경건한 마음을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까요?”라고 합니다. 맞는 말인가요? 많은 분들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 유대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정죄했던 모든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유대교를 저주하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걸 대표하지 않나요?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한다면, 아까 말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외심과 경건함, 그리고 그들의 ‘선행’을 하나님이 기억하실까요? 그럼 끝난 겁니다. 없던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실 당시에 유다는 사도로 임명받았지만, 계속 주님의 돈 주머니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유다를 사탄에게 넘겼습니다. 사탄에게 넘겨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셨죠?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다음,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됐습니다. 유다는 저주를 받아야 할까요, 받지 말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또 “예수님을 팔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돈 때문에 그랬잖아요. 그래도 예전에 예수님을 위해 선행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했을지 모르잖아요. 그럼 주님께서 그 착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실까요?”라고 합니다. 주님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없던 일이 된 겁니다. 그 한 번의 배신과 배반으로 본성 실질이 철저히 드러난 겁니다. 지난날 했었던 일들은 다 외식한 것이고, 다 불순물을 갖고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믿기 시작한 분들은 이런 일들을 시종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마음이 대체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 주로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요? 이런 일들을 알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한 말은 누구의 말에 근거해서 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왜 유대교를 저주하고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실까요? 그들을 증오하실까요? 유대교인들이 먼저 예수님과 적이 되고, 예수님을 정죄하고 대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신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실 때를 다시 봅시다. 왜 유대교 성전에 가시지 않았을까요?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의 회당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 예수님과 적이 됐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거기에 가셨더라면, 3년 동안 복음 전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게 아니라, 아마 더 일찍 잡히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번 잡힐 뻔하다가 도망하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예수님을 가장 미워하고 예수님을 붙잡지 못해 안달이 났던 자들은 로마 정권이었습니까 아니면 유대교였습니까?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붙잡아 로마 정권에 넘겼지만 로마 정권이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유대교는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오.”라고 강력하게 밀어 붙였습니다. 유대교는 빌라도를 고소하려고 했습니다. 그 뜻은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면, 우리는 로마 황제에게 당신을 고발하여 당신을 파면시킬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유대교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명령을 내리라고 핍박했던 겁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교계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적하는지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교계를 위해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당신들은 왜 교계를 정죄합니까?” 저희가 교계를 정죄하는 걸까요? 아니면 교계가 하나님의 역사를 정죄하는 걸까요? 대체 누가 누구를 정죄하는 걸까요? 은혜시대에 예수님께서 먼저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이 먼저 예수님과 적이 됐습니까? 이 일은 분명히 하고 가야 합니다. 이걸 분명하게 파악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조금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결국 제멋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논단하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정죄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겁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죄하신다 해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죄하신 게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사람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교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왜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까요? 인터넷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회 홈페이지가 생긴 지 10년 정도 됩니다. 그렇게 오래 됐는데도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알아보는 사람은 왜 그렇게 적을까요? 문제의 근원이 어디 있을까요? 알고 계십니까? 바로 중국 공산당과 교계의 적그리스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극력 정죄하고 모독하면서 각종 부정적인 영상이나 비방 선전물을 제작해 인터넷에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끊임없이 먹칠하고 공격하고 모독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보이는 게 다 부정적인 선전과 자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교계는 어떤 것입니까? 대체 누가 교계를 정죄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정죄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정죄하십니까? 왜 그런 걸 꿰뚫어 보지 못할까요! 왜 교계 적그리스도 무리들을 두둔하고 나서는 걸까요! 왜 그 일이 인류에 대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고, 또한 교계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까요! 이건 깊이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정말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성육신하셔서 하시는 역사는 다 하나님과 사탄의 가장 치열한 전쟁입니다! 이 인류, 이 인류의 집권당, 그리고 이 인류의 종교를 포함해 먼저 다 화살을 그리스도께 겨누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역사를 철저히 없애고, 이 땅에 영원한 무신론 구역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게 사탄의 궤계가 아닙니까? 그들은 왜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광적으로 대적하고 정죄할까요? 중국에서부터 시작해 전 세계에 무신론 구역을 세우려는 비열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의 종교 신앙은 다 사라지게 될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권당 내에 기독교인들은 몇이 안 됩니다. 정권을 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많지 않습니다. 만약 한 국가에서 완전히 무신론 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기독교인들은 박해받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고 하늘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보고 “아, 종교신앙이네.”라고 하면서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참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들은 우리를 정죄할 것이고, 교계는 우리를 이단이나 사교로 정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육신 실제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그 목적은 바로 패괴 성정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 천국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으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순탄할까요? 그 길은 왜 험난하고 순탄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 세상이 사악하기 때문이고, 집권당이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계가 사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더 많은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132-B-5】

지금 보면 갓 믿기 시작한 형제자매들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교계 예배당에 갔다가 문제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적이 시작되고 포위 공격이 시작된 겁니다. 형제자매들은 어리둥절해집니다. ‘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왔는데, 왜 이렇게 적대시하지? 왜 이렇게 원수처럼 여기지? 아, 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구나. 에휴, 교계에 복음을 전하려면 아주 큰 인내심이 있어야 하네! 정말 인내가 없으면 안 되겠어!’ ‘이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해 주려고 하면 핍박받고, 우릴 원수처럼 대하네! 복음을 전하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혹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가 아닌가?’라고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의 실질을 꿰뚫어 보지 못해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합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은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건 왜 그렇게 힘들까요? 그건 예수님께서 속죄의 사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죄하는 사역은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하고 심판과 형벌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은혜만 베풀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평안과 즐거움을 주고, 축복을 주어 모든 일을 순조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병이 들거나 재앙이나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해 줄 수 있고 평안과 축복을 주신다고 하면 “좋아요, 믿을게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는 쉽습니다. 사람마다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사람의 관념에 너무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은혜도 베풀어 주고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니 참 믿기 좋고 받아들이기도 너무 쉽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왜 믿어야 해요?”라고 물어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분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해야 합니다.” “예? 심판과 형벌이요? 우릴 정죄하신다구요? 전 죄가 없어요!”라고 합니다. 정말 곤란합니다. 심판과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안 좋은 감정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루만 증거해도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는 최소한 열흘 정도 걸려야 겨우 받아들입니다. 10: 1의 비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7일이나 8일씩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7, 8일씩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려면 성경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증거해서는 안 됩니다. 반 년씩, 일 년씩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못합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말과 지식으로는 교계의 사람들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1년 정도는 갖추고 또 설교 교통도 자주 들어야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말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공의를 위주로 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인류를 정결케 하시는 모든 진리를 가져오셨고 다 발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딱 봤을 때, 하나님은 전부 공의와 위엄과 진노시고 전부 심판과 형벌이시고, 또 시대를 끝마치고 이 사악한 세상을 훼멸하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어려운 문제가 사람들 앞에 놓여져 있는데 알 수 있겠습니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3단계 역사를 거의 다 교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만 말해서는 안 되죠.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에게 하셔야 할 말씀, 인류에게 하셔야 할 사역, 인류에 대한 모든 안배 그리고 인류의 귀숙이 어떤지에 대해 다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죠. 그래서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많은 진리를 알아야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고, 잘 알 수 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세요? 무슨 근거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예요?”라고 합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쉬울까요? 그럼 그 사람에게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십니까? 이제 얼마나 믿었다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적도 전혀 없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였나요? 예수님을 본 적이 있나요? 그분이 당신 앞에 나타나셨나요?”라고 묻는다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세요. “무슨 근거로 여호와를 믿습니까? 여호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여호와가 당신에게 나타나셨나요? 무슨 근거로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하십니까?” 대답하기 쉬울까요? 확실히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의 발표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믿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는 권병과 능력이 있고,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들을 행하셨기 때문에, 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합니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은 “우린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적 있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릴 인도하십니다. 우린 죄를 지으면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분에게 제물을 바쳐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우린 그분의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라고 확신합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람은 각기 부류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다 마귀나 사탄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믿고, 어떤 사람은 석가모니를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을 믿습니다. 그리고 악비, 관우를 믿는 사람도 있고, 마조신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이 믿는 것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것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할 수도 없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다 거짓 신들입니다. 거짓 신은 악령입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악령은 사람을 해칠 수도 있고, 사람을 죽게도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짓 신도 조금은 용해야 사람들이 믿습니다. 이방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용하지 않다면 믿지 않겠죠. 그래서 거짓 신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각종 악령들입니다. 그것들도 좀 영험한데, 자잘한 표적과 기사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악령이죠. 악령은 인류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인도하지도 못하며 세상을 바꾸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은 창조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짓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인류는 다 각기 부류대로 나뉘어졌고, 다 자신만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 자신만의 근거와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은 자유이기 때문에 아무도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려면 어떤 원칙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발표이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회에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증하고 교통해도 계속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아무런 방법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강요하여 억지로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말해서 뭘 하겠습니까?

예전에 제가 주님을 믿을 때, 전도하다가 만난 어떤 사람들이 “제가 직장도 안 다니고 일도 안 하면 당신이 믿는 그 주님이 돈을 주나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돈을 갖고 싶다면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사람을 구원해서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건 돈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거죠. 사람이 병에 걸려 죽게 됐는데, 돈이 구할 수 있겠습니까? 구하지 못하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바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다음엔 지옥에 가고 아무도 당신을 구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 어느 날 가서 죽는다고 해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걸 돈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들은 “난 당신 말 안 믿습니다. 누가 봤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안 믿네요. 영계를 인정하지 않고, 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끝이에요. 그러면 당신은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방법도 없어요. 아무리 말해봤자 소용없어요. 당신은 코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고, 돈과 물질세계만 확실하다고 생각하네요. 돈만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보면 뭐라고 하죠?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이 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기록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실 때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오실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어떤가요? 쉽게 대답해 줄 수 있나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사람의 말이라고 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참람한 말을 하네! 우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시는 걸 보지 못했지?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면 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한다면 그들은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거나 잡아 가두려고 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가 마음으로 어떻게 터득하는지 봐야 할 일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오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저들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중국에서 사역하시고 말씀을 발표하십니다.” “증거 있어요?” “말씀이 증거입니다.” “그럼 그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건 어떻게 인정합니까?” “읽어보시고, 눈으로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한번 보세요. 이런 말씀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들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들과 근원이 같은지, 한 영이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신 것이 맞는지 보세요. 그 문제를 알게 된다면 문제는 해결된 겁니다. 답은 이 안에 다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영 한 분이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고 역사하신 것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영이 통해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믿는 유대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됐습니까? 아주 적었습니다. 아주 적은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사람들은 영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거구나.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오신 거야.”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들어보니 예수는 참람한 말만 하더라,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야, 받아들이지 않겠어!”라고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시니 교계 내에 참으로 믿는 자와 거짓으로 믿는 자,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영이 통하는 자와 통하지 않는 자가 한순간에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다 드러났습니다. 은혜시대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유대교의 참으로 믿는 자와 거짓으로 믿는 자들을 드러내셨습니다. 말세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전체 기독교와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안에서 참으로 믿는 자와 거짓으로 믿는 자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영이 통하고 누가 안 통하는지, 누가 진리를 좋아하고 누가 싫어하는지, 선한 종과 악한 종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는 것도 드러난 것에 속하는 건가요?”라고 물어봅니다. 알아보지 않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교계에 가서 “‘동방번개’는 어떻게 생긴 건지 아세요?”라고 물어보세요! 그러면 “알고 있어요. 중국 공산당 정부와 교계가 다 ‘동방번개’를 정죄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보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알아보지 않습니다. 무슨 문제일까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맞습니까?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맞습니까? 슬기로운 처녀입니까? 이 몇 가지에 다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아보지 않는 것이고, 또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도 않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전도하면 되지 않나요? 저희가 가서 전도부터 해본 다음 아무리 전도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때 다시 정죄해도 늦지 않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럼 가서 해 보세요. 지금도 계속 전하고 있지 않나요?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는 계속 전하고 있습니다. 모두 말세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역사하고 있다는 걸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전하지도 않아서 그들이 모른다거나 그들이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정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에게 다 충분한 시간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은 2천년 동안 역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하신 지 지금까지 2천년입니다.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짧습니다. 짧지만 지금까지 20년이 넘어 30년이 다 돼 갑니다. 20년이 넘는 동안 국도 복음도 전 세계에 거의 다 전파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도 다 전파되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각국에 다 있습니다. 물론 은혜의 문이 닫히려면 아직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은혜의 문은 언제 닫힐까요? 대재난이 끝나면 은혜의 문도 철저히 닫히게 되는 겁니다.

【132-B-6】

그럼, 어떤 사람은 지금 교계의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 멸망되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그렇다고 했나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어떻게 봐야 될까요? 대재난이 끝나면 은혜의 문은 철저히 닫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종교계는 내가 만민을 형벌할 때, 서로 다른 정도로 내 나라에 돌아온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정도”라고 하신 것은 바로 대재난 때, 각 교단에서 일부 사람들이, 그러니까 소수가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계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는지,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이 하는 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말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그건 정확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함부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건 아니겠죠?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믿지 않는 악한 마음입니다. 명색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조차 믿지 않는다면 뭐가 될까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은” 뭘 말할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반신반의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뒤섞임이 있을까요? 바로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그런 악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촉하고 거역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적대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 그런 일에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적대시할 수 있게 만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말은 누가 했습니까? 사람이 했다면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나요?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봐야겠네요.”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찾아 본 다음엔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네요. 그럼, 그 사람은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이 한 말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아무리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순복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경외하는 것이고 경건한 것입니다. 사람이 한 말이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정죄하고 대적한다면, 그건 하나님에 대한 경외일까요 아니면 경건일까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외도 아니고 경건도 아닙니다. 그건 교만하고 독선적인 패괴 성정의 유로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저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계를 정죄하신다는 것은 계시록에 나온 예언입니다. 큰 바벨론이 바로 교계입니다. 큰 바벨론은 마지막에 멸망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큰 음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계를 정죄하시는 건 사실이 아닙니까? 주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계시록의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교계가 큰 바벨론이라는 것도 모른다면 참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교를 정죄하셨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오셔서 온 교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는 교계를 큰 바벨론, 큰 음녀라고 정죄했습니다. 큰 바벨론과 큰 음녀의 아래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도대체 어떤 길을 가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는 길일까요?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길일까요? 지금은 여러분이 아무리 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에 몇 년 순복하고 나면 이런 일들을 밝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타남을 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강림하실 때면 우리가 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어떤 분들은 틀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걸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결과가 뭐였죠? 계시록 1장 7절에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볼찌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강림하시는 걸 볼 때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하나님께서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강림하시는 것을 보고 왜 애곡합니까?”라고 할까 봐 아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하리라”, 계시록의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도 요한에게 묵시하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선지서와 같은 겁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있고, 또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있고, 또 계시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람의 뜻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보면 성경에 사람이 쓴 말들에서 어떤 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사람의 이해일 수 있는데, 그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접하긴 했지만 그다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건 사람의 치우친, 그릇된 터득에서 비롯된 겁니다. 우린 성경의 말씀을 그렇게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계시록의 말씀을 말하게 됐는데, 그 말씀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서와 같은 겁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직접 요한에게 보게 하신 것이고, 요한이 본 대로 적은 것이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여기에 또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찌른 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요? 바로 말세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정죄하는 교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찌른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때까지 살게 되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해야 합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라는 부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사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 걸 보고 애곡할까요? 그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거치지 않아 정결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모든 족속이 애곡”한다는 결과를 얻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고 대재난 속에서 온전케 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 걸 보면 ‘우리의 하나님께서 드디어 우리에게 또 나타나셨구나!’라고 하면서 모두 즐거워하고 기뻐 뛰게 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우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떠나시고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수 있나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육신에서 하시는 사역을 다 마치시면 다시 시온으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신 것과 같습니다. 완성하신 다음 죽음에서 부활하셨죠. 부활하신 다음엔 여전히 육신에 계셨던 그 몸일까요? 영체이십니다. 육신에 계시던 모습과 비슷하긴 합니다. 사람들도 보고 “어? 예수님이시잖아?”라고 하게 되지만 영체이십니다. 그 영체는 제자들에게 얼마 동안 보이셨습니까? 40일 동안 보이셨습니다. 40일 동안 보이신 다음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세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서 하시는 사역을 다 마치시면 시온으로 돌아가십니다. 시온에 돌아가시면 뭘 하실까요?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시온으로 돌아가신 다음 한동안 지나고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십니다. 바로 나타나시는 게 아닙니다. 시온으로 돌아가시면 재난을 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번에 오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하셨죠? “모든 재난을 가져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도 다 하시고 사역도 다 하신 다음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돌아온 사람들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으로 정결케 하여 이긴 자로 만드십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시온으로 돌아가신다는 겁니다. 그 이긴 자들이 바로 재난 전에 온전케 된 사람들이고, 재난 전에 들림받아 만들어진 이긴 자들입니다. 그리고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람들은 대재난 속에서 연단 받으면서 정결케 됩니다. 그 속에서 반성하게 하고 공과를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재난이 임할 때, 하나님은 충분한 공과를 배우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난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는 거죠. 하나님의 자민은 그렇게 재난 속에서 온전케 됩니다. 대재난이 쏟아지면 세상 사람들은 한 무더기씩 훼멸될 겁니다. 이런 재난이 닥치면 한 무리가 한순간에 훼멸되고, 저런 재난이 닥치면 또 한 무리가 한순간에 훼멸됩니다. 이쪽 사람들은 이쪽 재난에서 죽게 되고, 저쪽 사람들은 저쪽 재난에서 죽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재난에서 죽게 됩니다. 각 재난이 올 때면 다 자신의 사명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을 일부 데려갑니다.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액운은 피하기 어렵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아직도 교계의 박해를 받게 되고, 심지어 정부의 탄압과 박해까지 받게 됩니까? 우리가 받는 고통은 너무 많아요, 이방인들을 보세요, 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더 잘 되고, 더 편안합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서 자유롭습니다. 우린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요?”라고 합니다. 이걸 어떻게 보십니까? 이건 어떤 말입니까? 이 말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누가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이건 불신파의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정말 행복할까요? 이방인들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더 많습니다. 겉보기엔 아주 즐거운 것 같지만 심적인 고통은 더 큽니다. 질병이 수시로 임하고, 거기에 시달리고, 사회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 사회환경의 방해 요인, 그리고 재난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두려움에 온종일 불안해하고 안절부절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다 죽기 살기로 먹고 마시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걸 예비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예비하신 것은 바로 재난입니다. 그들은 죽어서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럼 하나님의 선민들에게는 어떤 걸 예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심판과 형벌의 고난을 받아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고,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민들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패괴 성정이 정결케 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이고 또한 진리를 얻기 위해 받는 고통입니다. 마치 병원에 가서 치료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의사가 치료를 해 주는데,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고통받지 않고는 치료될 수 없고,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난 심판과 형벌의 고통을 받기 싫어요, 그냥 이방인들처럼 며칠 더 실컷 누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다가 재앙이 와서 덜컥 죽어서 지옥으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이건 어떤 사람일까요? 그건 바보같은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만이 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의 고통은 뒤에 있습니다. 대재난이 임하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느 날 죽으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지옥에 떨어지면 영혼은 고통받지 않을까요? 영혼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 고통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지금 그들의 육체도 고통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받는 고통이 더 큰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받는 고통은 작은 겁니다. 이방인들이 지옥에 떨어져 받게 되는 고통과 너무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는 고통은 큰 고통이죠. 작은 고통을 마다하고 큰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건 바보 아닙니까? 성경에 뭐라고 했죠?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린도후서 4:17)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겁내는 게 뭘까요? “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 뒤에는 핍박이 따르고, 더 크고 더 잔혹한 영계 전쟁이 있구나. 사탄에게 잡혀 가면 사탄의 표를 받게 되고, 사탄의 표가 찍히면 영원히 멸망하는 거잖아. 아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이 길을 지키기는 참 힘들구나. 고통을 받아야 하는구나.”라고 합니다. 두려워할 거 없습니다.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재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면 됩니다. 아직 임하지 않은 일은 함부로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대재난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각 나라가 다 내부에서부터 혼란해질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중하신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국제 정세는 더욱 긴박해질 것이고, 각국은 내부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한다……” “현재는 시작 단계이지만 어느 날이 되면 전 우주 아래는 전란으로 어수선하게 되며, 지상의 사람에게 더는 지도자가 없으며, 온 땅은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지고 다스리는 사람이 없다……” 대재난이 임하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다 혼란해지는데, 그건 나중에 있게 될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이면 몇 년 정도냐고 묻는데, 그건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나중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고 계세요? 당신이 하는 말이 다 정확합니까?”라고 합니다. 제 말을 듣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면 알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더 보시면 저와 같은 관점이 생기게 되고, 저처럼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고 제 말만 듣는다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제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으세요. 여러 번 보다 보면 다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또 “무슨 근거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십니까? 뭘 근거로 그러시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저는 제 심령의 느낌에 따른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발표가 하나님의 발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 마세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여겨진다면 제가 받아들이지 말라고 해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리 받아들이라고 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개인의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음성을 발해 말씀을 하신 건가요? 누가 하나님을 위해 기록을 한 건가요? 이런 말씀들은 사람이 기록한 건가요?”라고 물어봅니다. 그 일에 대해 제가 보고 경력한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132-B-7】

1991년에 하나님이 정식으로 음성을 발해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나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의 첫 페이지에 가서 목차 아래를 보시면 내용 소개가 있습니다. 그다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이 한 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하신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 속에 연월일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시간 순서에 따라 정확하게 나열한 겁니다.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해 말씀하신 것은 대부분 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쓰신 것입니다. 다 쓰신 다음 교회에 전달되었고, 형제자매들이 먹고 마시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소부분은 하나님께서 여러 교회를 다니실 때 하신 설교 교통을 정리한 겁니다. 그 역시 설교하신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교통 중에서 담소를 나누신 부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분들은 삭제하시고,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관건적인 말씀들만 남기셨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많지 않은데, 약 5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에 있을까요? 제3부분에 있는데, 성육신하신 인자가 뭇 교회를 다니시면서 하신 교통입니다. 기타 제1부분, 제2부분 그리고 제4부분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하나님께서 친필로 쓰신 겁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음성을 발해 말씀하신 것과 좀 다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당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냥 하신 말씀이었고, 또한 녹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기록된 걸까요? 바로 제자들이나 사도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어 몇이서 대조하면서 쓴 것입니다. 그런 사도들이 기록한 말씀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기록한 말씀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대부분일까요, 아니면 일부분일까요? 절대로 대부분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일부분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가끔은 차이가 있고, 어떤 것은 몇 글자씩 차이가 날까요? 그건 정상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녹음해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로 기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뜻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지만, 단어는 간결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쓰신 것인데, 말씀 중 80%는 다 하나님 자신이 한 글자 한 구절씩 쓰신 겁니다. 하나님이 쓰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수정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설교 교통을 녹음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분 담소를 나누시는 내용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말씀은 일부 삭제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하실 때 누구에게 질문을 하셨거나 누구와 몇 마디 한담하셨던 말씀들은 삭제해야 했습니다. 전부 남기면 너무 많아서 책의 두께가 한 뼘 이상이 될 겁니다. 그래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분은 빼야 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겁니다. 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속편)≫이라는 책도 있는데, 거기 말씀도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설교 교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통이 끝난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들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씀하신 것이라 구체적이지 못하니, 자신이 다시 정리하고, 다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쓰시다 보니 말씀이 몇 배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 말씀으로 편성된 책이 바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속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설교 교통도 일부분은 ≪교회 인솔자 일꾼에 대한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에 수록되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도 하나님의 설교 교통입니다. 하지만 거기 말씀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한 내용이고, 하나님께 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사역하여 발표하신 말씀 가운데서 가장 표준이 되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고 친히 정리하신 내용은 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 (속편)≫에 수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정리한 내용은 ≪교회 인솔자 일꾼에 대한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에 넣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습니다. 이 두 부분의 말씀이 총 몇 자 정도 되는지 아십니까? (한자로) 약 2백 만자 정도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설교 교통 중의 일부분은 정리하지 못했는데, 그 부분은 주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하나님의 심판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 <라는 말씀이 당시 교회들에 보내진 뒤에, 뭇 교회의 하나님 선민들 사이에서 그 말씀을 보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말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 토론해 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지,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지, 때가 되면 결과가 다 드러나게 되니까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한두 달 정도 지난 다음, 저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필로 쓰신 말씀이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한 사람은 다 영이 통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고 한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전해지자 어떤 사람들은 부끄럼을 당해 울음이 터지면서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어떻게 영이 안 통하지?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헛 믿은 거잖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지 않습니까? 믿어지지 않으면 이 말씀들을 들고 교계에 가서 주님을 수년간 믿은 사람들에게 보여 줘 보세요. 그리고 이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 물어보세요. 그들은 보고 나서 사람의 말이라고 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이라구요? 자세히 더 보세요, 며칠 더 보세요.” 하면, 보고 나서 또 말합니다. “아, 아니에요. 어떤 건 하나님의 말씀 같기도 하고, 어떤 건 사람의 말 같기도 해요.”라고 할 겁니다. 그래서 또 “더 자세히 보세요, 더 읽어 보시고 다 읽으신 다음 다시 말해 보세요.”라고 하면, 그렇게 어떤 사람은 다 본 다음 “하나님의 말씀 같아요, 사람은 쓸 수 없어요, 절대 써내지 못합니다. 아무도 쓸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제가 목사, 신학 박사, 영적 인물들의 저서를 그렇게 많이 읽어 보았지만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이런 말씀을 쓸 수 없어요. 이 말씀들은 아무도 쓸 수 없는 거예요. 이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권병을 지니고 있고,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런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게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음성을 발하여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라고 쓰지도 않았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는 것도 없어요. 여기에는 예수님이 원래 하셨던 말씀들이 조금도 없잖아요. 이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음성을 내어 말씀하신 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어요. 이건 사람이 쓴 거예요.”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까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이런 말씀들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아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인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받아들이라고 권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주견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자기 주견이 있고, 자기만의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각기 부류대로 나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신 주님이시고,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100% 맞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들림받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음성을 발하여 하신 말씀이고, 또한 여호와께서 나타나 음성을 발하여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신파가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알지 못해 도태된 겁니다. 그렇게 도태되는 건 누가 결정한 건가요? 제가 정죄한 건가요? 그 사람이 믿지 않는 게 제 탓인가요? 누굴 원망해야 합니까? 신앙은 자유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 사람은 믿지 않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날 주님을 믿으면서 받은 고난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은 제가 한 건가요? 하나님 말씀에 이런 뜻이 있지 않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말씀을 찾아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말을 찾아내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지는 않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맹목적으로 제가 하는 말을 정죄한다면 현명하지 못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쓰여 있는 겁니다. 제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유형의 말씀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제가 다른 사람의 결말에 정의를 내리면서 그 사람은 반드시 멸망되고 침륜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결정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건 하나님 말씀에서 그렇게 정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저주하신 것과 같습니다. 바리새인을 저주하신 말씀은 주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주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들을 교통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바리새인을 정죄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원래 말씀이 바리새인들을 정죄한 겁니다. 아시겠죠? 이런 일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겁니다. 혹시 “우리는 왜 그런 일들을 계속 꿰뚫어 보지 못하죠? 교계 사람들 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게 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은혜의 문이 아직까지는 닫히지 않았고, 대재난이 쏟아질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재난 속에서 받아들일 사람들이 또 있을 겁니다. 교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재난 때에 각기 다른 정도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교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 멸망된다고 단정짓지는 못합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 기간에 누가 받아들일지,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지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걸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지만 우린 교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그들이 다 대립하고 정죄하고 대적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실은 다 보셨겠죠? 그래서 교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무 심하게 대적하기 때문에 그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이 극소수라고 정해진 겁니다. 그들은 비방 선전과 부정적인 자료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는 쉬워도 교계인들에게 증거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닌가요? 교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부닥치게 되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거절당합니다. 두 번째, 수모를 당합니다. 세 번째, 공격이나 비방 그리고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진까지 찍어서 교인들에게 보이면서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있으니, 절대 집에 들여선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대우를 받게 됩니다. 온 교계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하러 간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건 뭘 설명합니까? 교계는 벌써 적그리스도의 견고한 요새가 되었고, 사악한 사탄 세력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교계에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구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습니다. 너무 적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어머니는 교계에서 믿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아무리 전해도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고 목사와 장로만 믿습니다. 한 가족이지만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고, 자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서로 맞지 않아 아무리 교통해도 안 됩니다. 그런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일은 강요하지 못합니다. 각기 자신만의 터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계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꼭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인가요?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만 대적하고 정죄하고, ‘주 예수’라는 이름 석자에는 대적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한 걸까요, 아닐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호와’라는 이름 석자에는 대적하지 않고, 성육신하신 예수님만 정죄했습니다. 그럼 그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건 여호와를 정죄한 게 아닙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하고 정죄한 게 아니라, 예수님만 대적하고 정죄한 거라고 할 수 있나요? 그 말이 사실과 맞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유대인의 모습으로 오신다면, 우린 열렬히 환영하고 레드 카펫까지 펴 놓을 겁니다. 그럼 우린 예수님께 칭찬받을 사람이 아닌가요?”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인의 모습을 한 예수님은 열렬히 환영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대적하고 정죄합니다. 그럼 주님께서 정말 오셔서 그들을 칭찬하실까요? 그렇지 않다는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여호와도 하나이십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의 영이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실 때, 어떤 때는 성육신으로 역사하시는데, 직접 육신을 입고 정상 인성을 지니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직접 사람을 들어 역사하시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이 직접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성령의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면 또 성육신의 사역을 하십니다. 이건 다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 영의 행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는 하나님의 영이 직접 역사하셨습니다. 은혜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서 영계로 돌아가시면,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하늘에는 하나님이 몇 분 계실까요? 하늘에는 하나님 한 분만 계십니다.

【132-B-8】

예수님은 말세가 되면 다시 오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약속하셨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이 다시 오신다는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영만 다시 오신다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럼 예수님께서 재림을 약속하신 건 무슨 뜻일까요? 다시 성육신으로 인자가 되어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겁니다. 성령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라면, 재림하신 분은 여전히 영체일 것이고, 성령의 역사일 뿐일 겁니다. 그리고 사람은 보지 못할 겁니다. 또 ‘주가 다시 오시리라’는 말씀도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면 반드시 다시 성육신하실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유대 땅에 나타나 역사하신 것과 같이 인자의 모습으로 말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실 겁니다.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두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태복음 24:27), 그리고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누가복음 17:25)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보시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정권을 장악한 자들로부터,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온 교계로부터 정죄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대에 버림받은 게 아닙니까? 세대에 버림받으신 겁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이미 응하여 이루어졌죠. 지금 교계에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면 “틀렸어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정죄하는 거면 절대 참 진리가 아니고, 교계가 정죄한 거라면 절대 참 진리가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그들은 왜 그토록 공산당 정부를 믿는 걸까요? 왜 교계를 그렇게도 믿는 걸까요? ‘교계는 큰 바벨론’이고, ‘교계는 큰 음녀’라는 사실을 왜 믿지 않는 걸까요? 왜 그들은 계시록의 예언을 믿지 않을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까요? 그들은 왜 중국 공산당 정부와 교계가 하는 정죄를 사실이라고 믿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그릇되고 황당하지 않습니까? 너무 그릇됩니다. 그렇게 그릇되고 황당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쉬울까요?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제 갓 믿기 시작한 형제자매님들은 교계 예배당에 가서 복음을 전할 용기가 있으신가요? 예배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위험이 따릅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공격하고 훼방하고 정죄하고 사진까지 찍어 쫓아낼 겁니다. 그런 일들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교계의 많은 사람들은 다 사리도 밝고 인성도 좋고 그리고 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정죄하거나 반대하지 않을 거고,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믿어요.”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분은 예배당에 가서 한번 체험해 보시면 됩니다. 교계인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체험해 보시면, 교계의 다수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게 될 겁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교계를 정죄하셨는데, 주로는 교계의 지도자, 즉 교계를 장악한 적그리스도들의 사악한 세력을 정죄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교계에서 역사하시지 않고, 교계에서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이 끝까지 교계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교계와 같이 죽게 되고, 같이 멸망하게 될 겁니다. 교계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교계를 벗어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건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제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지 묻습니다. 이 말은 제가 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으면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교계에서 나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100%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말은 제가 한 겁니다.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아보세요.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교계에서 나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건 절대적인 겁니다. 아시겠죠? 예수님의 이름만 지킨다면 절대 구원받지 못할 거고,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또 예전에 주님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고 묻습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세 사역을 하시기 전에 주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나요?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잖아요.”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시대에는 은혜시대의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십니다. 은혜시대는 은혜시대의 기준이 있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시대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믿으세요. 은혜시대에 교회당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죽은 다음 천국에 간 사람이 대부분일까요, 아니면 소부분일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죽어서 다 천국에 간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결정하고 규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 은혜시대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사람은 죽은 뒤에 영혼이 지옥에 있지 않고 영계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배만 불리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혀 준행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사람들은 죽어서 이방인들처럼 지옥에 떨어집니다! 아시겠죠? 그리고 앞의 영혼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말세에 다시 돌아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말세에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환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말세에 다시 환생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검증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단계 역사야말로 진정으로 전 인류의 최종의 결말과 귀숙을 결정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오늘 읽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훑어보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만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걸 인정해도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지 못합니다. 일이 닥치면 또 의심하게 되고, 특별한 일이 임하면 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을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맞을까? 정확할까? 정말 맞을까?’ 또 의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몇 년 경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 진노가 어떻게 발표되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찌르는지를 체험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에 대해 참으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지 않는다면 설령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보았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참으로 알았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기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는 것과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다수의 선민들이 모두 얻어 낸 결론입니다. 제 개인의 경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형제님이 하나님께 온전케 됐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몇 년 정도 경력하고 난 뒤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알게 되면, 그때 성령이 쓰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알게 됩니다. 직접 경력하기 전에는 누가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믿으십니까? 다들 이 말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한 마디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저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참으로 순복하고,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에서 충성을 다해 본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정도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가장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온전케 되는 최저 기준입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된다”는 이 말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셨나요? 누군가 제게 “당신은 자신이 온전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해 드립니다. “저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전 부족하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전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이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저는 반드시 정확하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온전케 된 사람이다 하시면 그것은 단지 온전케 되는 최저 기준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최저 기준은 뭘 말합니까? 우린 다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사람입니다. 설령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고 정결함을 받았다 해도 그걸 참으로 거룩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참으로 거룩해진 게 아니라, 단지 정결함을 받아 더 이상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조금 있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좀 있어 악을 행하지 않게 됐을 뿐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정결케 되었다고 해도 ‘거룩’이란 두 글자는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정말로 거룩해졌냐고 물어보면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거룩에는 절대 이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또 “그럼 당신에게는 아직도 더러움과 패괴가 있다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있습니다. 그러나 큰 악행을 할 수 없고, 명확한 악도 행할 수 없습니다. 강도짓을 하거나 겁탈을 하거나 살인 방화를 하거나 법에 정죄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건 예수님을 믿을 때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과 생각이 다 거룩해졌을까요? 아닙니다, 멀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에는 아직도 더러운 것이 있고, 패괴된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진리로 그것들을 제압하고 반박해서 서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단지 그 정도의 경력이 있고, 그 정도의 효과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만약 저 같은 정도가 온전케 된 거라면, 그것은 말세에 온전케 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높지 않다는 겁니다. 오르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10년, 20년 경력한다면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저를 아주 좋게 상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을 아주 높게 상상한 겁니다. 누가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몇 명이나 도달하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높게 상상했기 때문에 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제가 여기에서 본분하는 것을 보신 분들은 저와 오래 지내보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본분하는 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통하는 면에서, 또 제가 일을 처리하는 관점과 저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인성 면에서 아직 어떤 패괴 유로가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 여러분이 한번 보세요. 보고 가늠해 보세요. 이 정도가 하나님이 온전케 하시는 최저 기준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패괴된 인류에게는 현실적인 기준이 아닐까요? 이 기준은 현실적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높지 않습니다. 사람의 상상대로 요구하면 아무도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생각은 비현실적인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정말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뵐 자격이 있나요? 어떻게 당신을 온전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라고 합니다. 제가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정결케 된 것도 사실이고, 구원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거룩 앞에서 우리 패괴된 인류는 자격이 없습니다. 거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패괴된 인류가 아무리 정결케 되고, 아무리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거룩하게 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거룩’이란 이 두 글자는 패괴된 인류가 지금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방금 한 말을 들어보면 전 당신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요.”라고 합니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관점이기 때문에 전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소용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진리를 잘 추구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몇 년간 경력한다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악을 멀리하고 충심으로 본분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무엇이 구원받는 것인지, 자신이 온전케 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금방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갖게 됩니다. 몇 년 정도 경력하고 나면 제 말이 비교적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나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설령 정결케 되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거룩이라는 면류관을 사람에게 씌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긴 하지만 그 거룩이란 뭘 말할까요? 일정한 기준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최저 기준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사람에 대한 나의 요구는 높지 않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다시 이 말씀에 근거해 생각해 보세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위기 11:45)이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 ‘거룩’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거룩과 같은 걸까요? 만약 하나님의 거룩과 같은 거라면 사람은 하나님이 되지 않겠습니까? 영원히 불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릴 수 없습니다. 그건 사람의 언어가 온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말은 영적인 일을 번역하다 보면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워 당장은 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언어에 대해 가장 많이 체득해 보셨을 겁니다. 인류의 어휘는 너무 부족하고 완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상상에 맞고 아주 적절한 용어를 찾으려고 해도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게 사실 아닙니까? 특히 번역을 하는 사람은 다 각국의 어휘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영적 생명에 관한 용어가 너무 부족해 적절한 용어를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쓰실 때, 가끔 중국의 어휘는 풍부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어떤 용어들은 한참씩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은 글자에만 매달리지 말고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에 영이 있어서 그 의미를 이해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깨닫는다면 순수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온전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온전케 됐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여 하나님께 정복되었고, 또한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데에서 어느 정도 효과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고, 인성이 좀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터득하시면 됩니다.

오늘의 교통은 여기까지 하고 묵도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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