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집 (b) 하나님 말씀 <‘믿음’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설교 교통
【129-B-1】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 말씀 “‘믿음’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읽겠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사람에게는 단지 있는 듯 없는 듯한 ‘믿음’이란 글자가 존재할 뿐 사람은 오히려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지 모르고 더욱이 왜 믿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너무 부족하고 깨달은 것이 너무 적어 다만 무지하고 어리석게 나를 믿고 있을 뿐이다. 비록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사람은 여전히 ‘멍하게’ 나를 믿고 있다. 내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결코 그렇게 어리석게 내게 부르짖거나 혹은 아무렇게나 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사역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보게 하고 나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지 나의 역사로 인해 나를 새로운 눈으로 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낸 적이 있었고 또한 많은 이적도 행했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은 나를 몹시 ‘우러러 보며 탄복하였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나의 출중한 능력을 몹시 숭배하였다. 당시의 유대 백성은 내가 의술이 뛰어나고 평범치 않다고 여겼다. 게다가 나의 그와 같은 많은 역사로 인해 사람은 모두 나를 앙모하였으며, 나의 그 모든 능력을 더없이 흠모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내가 행한 이적을 본 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짝 따랐으며,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가 ‘병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을 보기까지 했다. 내가 그와 같이 표적과 기사를 많이 나타냈어도 사람은 단지 나를 뛰어난 의원으로만 보았고, 내가 또 많은 말로 당시의 사람을 교훈하였어도 그들은 단지 나를 제자보다 높은 선생으로만 간주하였다! 오늘날, 사람은 내가 사역했던 역사(歷史) 기록을 본 후 그 성경 내용을 해석하여 여전히 나를 사람의 병을 고쳐 주는 ‘대단한 의원’이라고, 무지한 사람들의 ‘선생’이라고 하였고 또한 나를 ‘인자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규정하였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비록 나의 ‘의술’보다 높은, 심지어 이미 선생을 넘어선 제자일지라도 그렇게 명망이 높고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린 그 사람들이 결국 나를 작디작은 의원으로 하찮게 보았다! 나의 행사가 얼마나 많은지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고, 나의 지혜는 얼마나 높은지 모든 ‘솔로몬의 자손’보다 뛰어나지만 사람은 단지 나를 작디작은 의원으로 믿고 나를 사람을 가르치는 무명 선생으로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자신의 병을 고침받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다만 나의 능력으로 자신의 몸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나의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내게서 더 많은 물질적인 부(富)를 얻어 내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금생에서 무사히 지내고 내세에서도 별고 없기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지옥의 고통을 피하고 천당의 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잠시적으로 안일하기 위한 것이지 내세에 무엇을 얻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를 쏟았을 때,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기쁨과 평안을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모두 의심하였다. 내가 사람에게 지옥의 고통을 주고 천당의 복을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분한 나머지 화를 내었다. 사람이 나에게 병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 내가 오히려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으므로 사람은 나를 멀리 떠나 더러운 의술을 행하는 술객의 도를 찾았다. 사람이 내게서 얻어 낸 것을 내가 다시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모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나를 믿는 까닭은 나의 은혜가 너무 많기 때문이고 나를 믿어서 얻는 좋은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대 족속의 사람들은 나의 은혜로 인해 나를 믿었고 곳곳에서 나를 따랐는데, 그 무지하고 식견이 좁은 사람들은 단지 내가 나타내는 표적과 기사를 보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나를 유대 족속 중에서 가장 큰 이적을 나타낼 수 있는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내어 줄 때 그들은 왈가왈부하면서 나를 엘리야라고도 하였고 모세라고도 하였으며 나를 옛 선지자라고도 하였고 가장 큰 의원이라고도 하였다. 내가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아무도 나의 소시와 나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스스로 하늘은 본래 내 아버지가 거하는 곳이라고 말한 것 외에는 아무도 내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몰랐다. 내 스스로 내가 전 인류를 구속하고 인류를 속량하리라고 말한 것 외에는 아무도 내가 인류의 구속주임을 몰랐고 사람은 단지 나를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인자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분명하게 말한 것 외에 사람은 모두 나를 알지 못하였고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였다. 사람은 단지 이렇게 나를 믿고 또 이렇게 나를 속일 뿐인데 나에 대한 사람의 그런 견해로 어떻게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나를 믿지만 결코 나를 위해 증거하지는 못하고, 또한 내가 나타나기 전에는 나를 증거해 낼 수도 없다. 사람은 단지 내가 피조물을 능가하고 또 모든 성결한 사람을 뛰어넘는다는 것만 보았고, 또한 내가 하는 사역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의 사람들 중에 무릇 나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본 사람은 나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했을 뿐 입으로 나를 증거할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내 아버지만이 나를 위해 증거하였고, 나를 위해 피조물 가운데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은 내가 조물주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내게서 받아 낼 줄만 알고 내가 행한 것으로 인해 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를 아는 것은 단지 내가 본래 무고하고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내가 많은 심오한 비밀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내가 뛰어나 뭇사람 위에 있기 때문이고, 혹은 내게서 유익한 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조물주임을 믿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고 나를 믿는 목적과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며, 사람의 실제가 너무 적어 나를 위해 증거할 조건이 거의 구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너희의 진실한 믿음이 너무 적기에 너희가 얻은 것도 아주 적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증거’가 너무 적고, 또한 너희는 깨달은 것이 너무 적고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나의 행사를 증거하라’는 요구에 거의 미치지 못한다. 너희의 심지(心志)는 작지 않지만 너희는 정말 ‘하나님의 실질’을 증거할 자신이 있는가? 너희가 경력(역주: 체험)한 것과 본 것은 역대의 성도와 선지자보다 더 높지만 너희는 역대의 성도와 선지자보다 더 높은 말로 나를 증거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은 모세와 다윗에게 준 것을 초월하였으므로 나는 너희의 증거가 모세의 것보다 높고 너희의 말이 다윗의 말보다 높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내가 너희에게 백배로 베풀어 주었으므로 나는 또 너희가 나에게 백배로 갚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나는 인류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는 자이고, 너희는 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나를 위해 증거하는 자임을 너희들이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너희의 본분이고, 내가 너희에게 임하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를 위해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다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고, 이스라엘 선민이 얻은 적이 없는 생명을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으므로 너희는 마땅히 나를 위해 증거해야 하고 나를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쳐야 한다. 내가 나의 영광을 누구에게 베풀어 주면 그는 나를 위해 증거해야 하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내가 일찍이 정해 놓은 것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는데 그것은 너희의 복이고, 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은 너희의 본분이다. 만일 너희가 복을 위해서만 나를 믿는다면 나의 역사는 그다지 의의가 없게 되고 또한 너희도 결코 너희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본 것은 나의 긍휼과 자비, 위대함뿐이었고 유대인이 본 것은 나의 인내와 구속뿐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나의 아주 적고 적은 영의 역사뿐이고 심지어 그들이 깨달은 것은 너희가 듣고 본 것의 만분의 일에 불과하다. 너희가 본 것은 그들 가운데의 대제사장이 본 것을 초월했다. 너희가 오늘 깨달은 진리는 그들이 깨달은 것보다 높고 너희가 오늘 본 것은 율법시대의 것보다 많고 또한 은혜시대의 것을 초월했으며, 너희가 경력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의 것을 더욱 뛰어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이 깨달은 것은 여호와의 율법뿐이고 본 것은 여호와의 뒷모습뿐이며, 유대 사람이 깨달은 것은 예수의 구속뿐이고 얻은 것은 예수가 베풀어 준 은혜뿐이며 본 것은 단지 유대 족속 중의 예수의 형상뿐이기 때문이다. 오늘 너희가 본 것에는 ‘여호와의 영광’과 ‘예수의 구속’ 그리고 나의 오늘의 모든 행사가 있으며, 또한 너희는 내 영의 말을 직접 듣고 나의 지혜를 깨닫게 되었고 나의 기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나의 성품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경영 계획의 전부도 너희에게 알려 주었다. 너희는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하나님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공의가 가득한 하나님도 보았고 내 역사의 기묘함도 보았다. 너희는 또한 내가 진노와 위엄을 만재(滿載)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더욱이 내가 이전에는 진노를 이스라엘 집에 쏟았다가 오늘은 다시 너희에게 내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희가 하늘에 있는 나의 심오한 비밀을 깨달은 것은 이사야와 요한의 것을 초월하였다. 너희는 역대의 성도들보다 더욱 나의 사랑스러움과 존경스러움을 알고 있다. 너희가 터득한 것은 나의 진리, 길, 생명만이 아니라 요한의 것보다 높은 더 큰 이상(異象)과 계시이다. 너희는 더 많은 심오한 비밀을 깨닫게 되었고 나의 본래 모습도 보게 되었다. 너희는 나의 더 많은 심판을 받아들여 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말세에 태어났으나 이전의 것과 과거의 것을 깨달았고 또한 오늘의 것, 곧 내가 친히 한 것도 경력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는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이 너무나 많고 너희가 내게서 본 것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성도들처럼 나를 위해 증거하라고 너희에게 요구하는데 그것은 나의 유일한 바람이다.
원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이지만 나는 더욱 큰 영광을 얻으려 하고 또한 피조물의 입으로 나를 위해 증거하게 하려 한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다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는데, 그 목적은 바로 너희로 하여금 너희의 본분을 다하게 하여 사람들 가운데서의 나의 사역을 끝마치기 위한 것이다. 너희는 왜 나를 믿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너희가 단지 나의 ‘제자’나 나의 ‘환자’가 되기 위한 것이고 또는 나의 천당의 성도가 되기 위한 것뿐이라면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한 너희가 그렇게 나를 따르는 것은 헛되이 정력만 소모할 뿐이고, 그렇게 나를 믿는 것은 허송세월만 하고 청춘만 낭비할 뿐이며, 최종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헛되이 애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미 유대인들 가운데서 떠났기에 더는 사람에게 의원이 되지 않고 양약(良藥)이 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람이 마음대로 끌고 다니고 마음대로 죽이는 우마가 되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여 모두 나를 알게 한다. 너는 마땅히 내가 전에 구속 사역을 한 적이 있고, 내가 전에는 예수였지만 영원토록 예수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내가 전에는 여호와였으나 후에는 또 예수가 된 것과 같다. 나는 인류의 하나님이고 조물주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토록 예수일 수는 없고 영원토록 여호와일 수도 없다. 내가 전에는 사람이 여기는 의원이 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을 단지 인류의 의원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이전의 관점으로 나를 믿는다면 어떤 일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오늘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저에게 병을 고쳐 주시고 또 사람에게 축복과 평안, 기쁨을 베풀어 주시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잘 대해 주시는지 그분을 믿기만 하면 돈과 재물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아무리 나를 자랑해도 나는 여전히 나의 고유한 사역에 엇나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오늘 나를 믿으면 나의 영광을 얻을 것이고 또한 나를 증거할 자격이 있게 된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부차적이다. 너는 이런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너는 왜 나를 믿어야 하는지 정말로 아는가? 너는 내가 역사하는 목적과 의의가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가? 너는 너의 본분이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가? 너는 나의 증거가 무엇인지 정말로 아는가? 네가 나를 믿기만 하고 오히려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보이지 않고 나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내가 이미 도태시킨 대상이다. 뭐든 다 안다고 하는 그 사람들은 더욱 내 눈의 가시이고, 내 집에서는 내게 걸림돌이 될 뿐이며, 나의 역사에서 내가 머지않아 깨끗이 키질해 버릴 가라지여서 아무런 쓸모가 없고 가치가 조금도 없는데 그들은 일찍이 나에게 혐오받았다. 무릇 아무런 간증도 없는 그 사람들에게는 항상 나의 분노가 있을 것이고 나의 형벌의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그들을 악한 자의 손아귀에 넘겨주어 나의 축복이 전혀 없게 하였다. 그날이 되면 그들이 받는 형벌은 그 어리석은 여자보다 더 중할 것이다. 현재 나는 다만 나의 직분 내의 사역을 할 뿐인데, 모든 밀단을 다 묶어 두고 그 가라지도 그 중에 함께 묶어 둔다. 이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이다. 내가 타작할 때 그 가라지들을 깨끗이 키질해 낸 후 알곡은 곳간에 넣고 그 가라지는 불에 태워 재가 되게 한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은 단지 모든 사람을 단으로 묶는 것일 뿐이다. 즉, 철저히 정복하는 것이다. 그다음 타작하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의 결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어떻게 나를 만족케 해야 하고 나를 믿는 정상 궤도에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너의 지금의 충성과 순복(역주: 순종)이고 지금의 사랑과 간증이다. 설령 네가 지금 무엇을 간증이라 하고 무엇을 사랑이라 하는지 모를지라도, 너는 마땅히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데 너의 유일한 보배로운 충성과 순복을 나의 손에 바쳐야 한다. 내가 사탄을 패배시키는 증거는 사람의 충성과 순복에 있고 내가 사람을 철저히 정복하는 증거도 사람의 충성과 순복에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나를 믿음에 있어서의 본직 사역은 바로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이고 나에게 충심무이(忠心無二)하고 끝까지 순복하는 것이다. 내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전개하기 전에 너는 어떻게 나를 위해 증거해야 하겠는가? 너는 또 어떻게 나에게 충성하고 순복하겠는가? 너는 네가 하는 기능에서 충성을 다하겠는가 아니면 내팽개치고 그만두겠는가? 너는 기꺼이 나의 모든 안배에 순복하겠는가 (설령 죽을지라도, 멸망할지라도) 아니면 중도에서 도망쳐 나의 형벌을 피하겠는가? 내가 너를 형벌하는 것도 나를 위해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나에게 충성하고 순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지금의 형벌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고 이후의 사역을 막힘없이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그래도 좀 총명해져 네 개인의 목숨과 네 생존의 의의를 무가치한 한 줌의 모래나 흙으로 여기지 말 것을 권한다. 너는 나의 이후의 사역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너는 내가 이후에 어떻게 역사하고 사역을 어떻게 전개하는지 아는가? 너는 마땅히 나의 역사를 경력하는 의의를 알아야 하고 더욱이 나를 믿는 의의도 알아야 한다. 내가 이처럼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어찌 네가 상상한 것처럼 중도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큰 공정을 시작하였는데 어찌 헐어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시대를 끝마치러 온 이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너는 내가 시대를 시작하고 또한 사역을 전개하며 더욱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확장한다는 것에 대해 더욱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의 사역은 단지 시대를 시작하는 것이고 이후에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이며 또한 다가올 날에 시대를 끝마치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사역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전혀 아니고, 또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런 가치도 의의도 없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너에게 알리겠다. 너는 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더욱이 나의 영광을 위해 네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은 더욱이 내가 일찍부터 바라던 것이고, 나의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더구나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129-B-2】
“‘믿음’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인식하는가?”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의 제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마 각 사람마다 자신의 관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 관점이 무엇이고, 그 생각이 어떻든지를 떠나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믿음’에 대하여 너는 어떻게 인식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진리가 아닙니까? 그 믿음은 무엇으로 생긴 건지, 믿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고 하는지,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말세 역사에서 해결하시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말씀을 발표하신 것은 너무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매 단계 역사에서 역대의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었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감명을 받게 되었고, 또한 교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정말 너무나 가련하다는 것도 보게 됐습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은 도대체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추구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진리를 다 발표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다들 인식을 어느 정도 가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들을 갖춘 믿음인지, 하나님을 위해 간증할 수 있는 믿음인지, 이것은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세에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다 보고 나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것 같고, 또 말로도 “저는 정말 많은 걸 얻었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문제를 놓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게 뭔데요? 우린 이렇게 많은 걸 알고 있고, 이렇게 많은 걸 얻었는데, 왜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겠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우리 교통을 좀 해봅시다. 본인은 많이 알고 있고, 많은 걸 얻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위해 어떤 걸 증거했습니까? 어떤 증거를 한 겁니까? 이 문제에 대답하기 쉽습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들으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거요? 하나님을 위해 증거한다는 거야 사람이 봤을 때, 진리를 교통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인식을 나눌 수 있고,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닌가요?” 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런 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가요? 많은 사람들이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간증을 교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인식도 나누면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건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사람을 정결케 하시고 온전케 하셔서 마지막에는 어떤 효과에 도달하시려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우리 안에서 이뤄지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셔서 마지막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으면 그걸로 끝일까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할까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의 사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역사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게 됐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간증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이 너무나 많고, 너희가 내게서 본 것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의 성도들처럼 나를 위해 증거하라고 너희에게 요구하는데, 그것은 나의 유일한 바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자신의 뜻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명확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건 거의 다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에 대해 “주님은 인자하신 구세주시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고, 우리를 사탄의 죄악에서 구원하셨다”, 이렇게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구세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은 했지만, 그렇게 믿는 게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믿는다면 아직 거리가 너무 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높이 요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막 속량되어 죄악을 다 벗어버리지 못했고, 날마다 죄 가운데 살면서 기도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그저 뭘 간구하는 것 밖에 몰랐습니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높이 요구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말세에 전능하신 하나님은 심판 사역을 하시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모든 비밀을 다 발표하셨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지, 사람들에 대한 요구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모두 낱낱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슨 문제겠습니까?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게 아닐까요? 대역무도한 게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은 “우린 정말 많은 것을 얻었어요. 정말 많은 진리를 알게 됐고요.”라고 합니다. 근데 왜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요?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간증이 있을까요? 본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간증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런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알게 되었다고 여기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얻은 게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본분을 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걸까요? 왜 본분을 하면서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지 않는 걸까요? 왜 본분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해 드리는 마음이 없는 겁니까? 그건 무슨 문제입니까? 지금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씩 됐지만 본분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그건 무슨 문제입니까? 본분마저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에게 간증이 조금이라도 있을까요? 조금도 없습니다! 충성된 효력자라고 해도 간증이 좀 있습니다. ‘내가 왜 충성으로 효력해야 되지? 그건 하나님이 날 너무 사랑하시고, 너무나 많은 걸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지. 내가 효력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없는 거야. 내가 효력마저도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지!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충성으로 효력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거야.’라고 합니다. 이게 간증이 아닙니까? 간증입니다. 정말 본분을 하지 못한다면 간증이 있을까요? 정말 간증이 없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게 대체 어떤 거예요? 설마 본분을 하는 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가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인지 교통을 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력 속에서 깨닫게 된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증거하는 한 방면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것 자체에 또 한 방면의 의의가 있는데, 바로 우리 자신이 진리의 실제를 갖추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굳센 간증을 하는 거죠. 우리가 자신이 깨달은 진리대로 살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증거한다’는 건 정확하게 말하면 주로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입으로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교통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피조물의 본분을 잘하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실제가 되도록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만족케 해 사탄을 철저히 수치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로는 이 2가지입니다. 이 2가지 부분의 간증을 다 갖췄다면, 그 사람의 믿음에는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2가지에서 조금만 갖추었거나 한 가지만 갖추었다고 합시다.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을 증거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간증을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해 진실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를 살아내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을 흡족케 해 드리는 것만이 가장 굳센 간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깨달을 수 있나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걸까요? 이제 분명히 아셨나요? 어떤 사람은 “그 말대로라면 이 간증을 하는 건 간단하네요. 최선을 다해 본분을 잘한다면 그게 바로 간증 아닌가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말이 맞나요? 겉으로는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하지만 본분을 합격되게 하려면, 사람이 노력만 하고 본분을 하는 것만 중요시한다면 합격되게 할 수 있을까요? 힘만 들인다고 해서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진실한 순복이 없이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헤아리는 마음이 없이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본분을 잘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렇긴 한데, 저는 소질이 낮아서 진리를 깊이 깨닫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는 있어요. 하나님 집에서 뭘 하라면 하고, 어떤 본분을 하라고 하면 그 본분을 할 수 있어요. 전 원망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분을 제대로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은 그렇게 합니다. 근데,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 분별할 줄도 모르고 적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대로 듣고, 그대로 한다면, 그런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잘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들을 퍼뜨리면, 그걸 듣고 소극적이 되고, 본분을 제멋대로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고, 심지어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까지 한다면, 그것이 합격된 본분을 하는 걸까요? 그렇게 본분을 하면서 충성심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순복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는 본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본분을 하면서 일을 원칙 있게 처리하고, 진리를 살아내어 실제가 있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격되게 본분을 했다고 할 수 있고, 가치 있고 진정한 효과가 있어 진정한 간증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가요? 본분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참 좋은 질문을 했습니다. 본분은 하지 않았지만 시련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시련을 이겨내고 떠나가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나의 간증입니다. 시련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서게 됐다는 건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계신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본분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있는 걸까요? 하나님에 대해 순복이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걸까요? 시련이 임해 어떻게 됐든 본분을 하지 않았다는 자체는 바로 가장 큰 빚을 진 것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자녀가, 자기는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업으로 인해 바빠서 부모님에게 일이 발생해도 곁에서 지켜 드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마지막에 돈이나 좀 보내드립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효도에 속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근본적인 일도 하지 못하고 최저 요구인 피조물의 본분마저도 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면에서 간증이 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조그마한 간증으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일들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129-B-3】
저는 어떤 사람들이 지금 본분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가 본분을 잘하는 게 가장 좋은 간증이라고 말하면 관념을 가지면서 완전하게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깨닫든 저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교통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터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복인 거고, 그만큼 총명한 겁니다. 터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 교통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이렇게 교통하는 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본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성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연약할 때가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연약해질 수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환경을 두려워하고 용기가 없고, 믿음이 너무 작아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에 따라 요구하시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분량이 작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높이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는 진리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몇 년 믿었는데도 여전히 작은 분량을 갖고 있으면 안 되겠죠. 몇 십년을 믿고도 자신의 분량이 작다고 하면서 그걸 핑계로 본분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 될까요?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이런 것을 평가하지 맙시다.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더듬으면서 진리를 찾고 구하면 되는 겁니다.
본분을 하는 것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꼭 외국에 나가서 본분을 해야만 본분하는 거야. 외국에 가서 하는 게 아니면 본분을 한다고 할 수 없지.’ 이런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그럼 예를 들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심지어 하나님 말씀 책을 숨겨 두고 읽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어떤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기도나 좀 하면 끝나는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의 믿음은 너무 가엽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저는 큰 붉은 용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핍박과 환난이 없어지면 그때 잘 믿을게요. 제가 열정이 많으니까 아무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소용 있을까요?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때, 마침 대재난이 닥치고 하나님이 이미 땅을 떠나셨다면 아무리 열정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소용 없습니다. 증거할 기회는 다 지나갔습니다. 다른 사람은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때, 만인 가운데서 하나님이 승리하신 간증을 하는데,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큰 붉은 용이 날뛰면서 통치할 때는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겁쟁이인데 무슨 간증이 있을까요?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때 나설 면목이 있을까요? 수치를 당하게 되고 면목이 없어 나서지도 못하고 간증도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증거하는 데에도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 속담에 “순금은 불을 겁내지 않는다”, “환난 속에서 진심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건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접촉하면서 또 명언을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말은 타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참된 믿음은 어떤 배경에서 드러나게 될까요? 바로 열악한 환경에서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의 선민을 광적으로 박해하고 탄압할 때, 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보세요, 지금 온 교계에 큰 붉은 용이 가정교회를 핍박하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상황이 임했습니다. 근데, 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숨어버렸습니다. 큰 붉은 용이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핍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잔혹하게 탄압할 때, 그 사람들은 수수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집권당에게 순복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주님께 순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집권당의 박해를 받는다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권을 장악한 집권당에 대항하는 것은 형벌을 자초하는 거라고 여깁니다. 주님을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신도들은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광적으로 대적하고 정죄하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과감하게 일어섰습니다. 가정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본분을 하면서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겪었지만 다 하나님께 보호받아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견지한다면, 대재난이 쏟아질 때, 진정으로 굳센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큰 붉은 용이 무너진 후에 증거하고 본분을 하려고 합니다. 그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신파와 비슷하고 교계의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좀 전에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은혜시대에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는지, 그런 예와 실정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율법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고 또 고만한 정도의 인식뿐이었고, 은혜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그 정도 밖에 알지 못했고, 예수님을 그렇게 대했다는 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자하신 예수님이라고 불렀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스승님,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이는 예수님을 최고의 선지자, 최고의 의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혜시대에 예수님을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지만 주님에 대해 그 정도 밖에 알지 못했고 그렇게 부를 줄밖에 몰랐습니다. 주님이 매우 실망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는데,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데다 무지한 말까지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참된 간증이 있을까요? 없죠. 그뿐만 아니라 그 바보 같은 소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본분을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간증이 없을 뿐더러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때문에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축복하실까요?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대 이래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믿어도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하고, 그저 구세주, 최고의 의사, 랍비, 긍휼과 자비로우신 주 예수님이라고만 부른다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참된 간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주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주님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태된 사람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태된 거네요. 그럼 마찬가지로 주님을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바친 사람이라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행한 것은 주님을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거죠. 바울과 같습니다. 공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고난받으면서 사역한 거지,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통행하기 위해 한 건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떤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건 다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증거한 것이고, 자기의 복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것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렇게 말했을 때, 증거하는 것이란 도대체 뭘까요? “증거하는 것이란, 고난받고 사역하며, 좋은 대가와 진실된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피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성립되나요? 왜 성립되지 않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으신가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왜냐고 묻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두려워할수록 전 왜냐고 물어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여러분에게 진리를 찾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안 물어 봐도 여러분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묻지 않아도 되나요? 묻는다는 건 참답게 대하는 것이고, 근원을 캔다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찾고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래 맞아, 왜 그럴까? 잘 생각해 봐야겠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읽고 노력을 들이고, 잘 생각해 보면서 반드시 이 일, 이 근원, “왜 그럴까”에 대해 분명한 답을 찾아야겠어.’ 그렇게 노력하고 공을 들이면 성과가 있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제가 물어 본 것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생각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을까요? 별로 큰 가치가 없고, 참된 간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힘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구원을 조금씩 알게 되면,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본분을 하는 마음 자세가 점점 순결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됩니다. 본분을 하기 위해 고난 받고 대가를 치를 수 있고 충성을 다할 수 있다면, 그 본분은 아름다운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본분을 시작할 때는 열성으로 내려놓고 버리고 본분에 힘을 쓰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합니다. 예전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하루 8시간을 일했다면, 지금은 피조물의 본분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8시간 또는 10시간을 씁니다. 그렇게 본분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시험이 임하게 될 때, 처음에는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고 좌절을 당해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공급을 받아 일어서게 됩니다. 소극적이었던 것이 굳세어지고, 대충했던 것이 충성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때면 본분을 하는 그 경지와 품질, 실질은 다 향상된 게 아닙니까? “본분을 하면서 첫해는 열심만 가지고 했었죠! 그다음 해는 책망과 질책을 좀 경력하면서 진리를 좀 깨닫게 됐어요! 그러고 나서야 예전에 하나님께 너무 많이 빚졌다는 걸 깨달았고, 너무 양심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때서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됐습니다! 앞으로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위해, 저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본분을 잘하겠습니다.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살 자격도 없고, 사람도 아니죠.” 이렇게 이듬해는 다른 사람으로 확 바뀌었습니다. 첫해와 왜 달라진 걸까요? 어떻게 된 걸까요? 그렇게 본분을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사람에게 책망, 질책, 시련과 연단이 임하게 한 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도 하루하루 변하게 되는데, 변할수록 하나님을 점점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점점 더 헤아리게 되고,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게 됩니다. 생명 성정은 그렇게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에 따라 본분을 함에 있어서 충성심이 있고 순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도 헤아리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임하든 진리를 찾고 구하고,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는 실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분하는 효과도 점점 좋아지고 본분을 함에 있어서 점점 원칙이 있게 됩니다. 사람이 본분을 함에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있는지, 하나님께 순복하는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본분하는 가운데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헤아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입으로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해야 됩니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이 그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걸 본분에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만 말하지 않았지만 볼 수 있지 않나요?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 무엇을 두고 있으면 실제적인 대가와 행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입니다. “그 사람이 본분을 하는 건 우리랑 달라요. 우린 이 일을 대충했는데, 저 사람은 그러지 않았어요.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구속을 받지 않더라구요.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아, 지켜 보니까 알겠어요. 그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께 충성하고, 본분을 함에 있어서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하네요.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편에 서네요.” 그 사람이 본분을 하는 데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케 하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보였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간증입니다.
【129-B-4】
여러분이 말씀해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순복과 충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건 진실한 것이지 텅빈 도리가 아닙니다. 일부분 사람들은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합니까? 그 사람들은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 이런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고 중요한 일만 합니다. 부모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걸 원하시는지,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잘 알고 있으며, 부모님이 필요할 때면 틀림없이 만족케 해드립니다. 그럼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걸 하나님께도 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제가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복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알게 돼 놀리고 모욕하고 괴롭히고 비웃을까 봐 좀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무슨 문제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고 굳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되다면 그런 구속을 받을까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데, 누가 비웃고 조롱하고 배척하고 찬물을 끼얹는다면 그건 뭘까요? 전형적인 마귀 사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흡족케 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 사탄이 조롱하고 비웃는다면, 난 사탄을 더욱 수치당하게 할 거야!’ 이런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탄 마귀의 통제를 받는다면 될까요? 진정한 형제자매들, 하나님의 선민들은 딱 보고 “야, 저분은 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네요! 저보다 하나님께 더 순복하고 하나님께 더 충성하네요! 저보다 훨씬 나아요. 전 그저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비교해 보니까 정말 부끄럽네요! 우리도 뒤처지지 말고 어서 추구합시다! 저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저도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저분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충성심이 있다면, 저도 하나님께 순복하고 충성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형제자매입니다. 이런 말 또한 양심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본분을 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착실하게 하는 걸 보고 누군가 비웃고 찬물을 끼얹는다면 여러분이 똑똑히 보세요. 그런 자는 전형적인 마귀 사탄입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내버려야 합니다. 또한 “사탄 마귀가 나왔어요! 원형이 드러났어요.”라고 지적해 주세요. 사탄 마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실행할 때면, 질투하고, 비웃고, 타격하고, 배척하고, 적대시합니다. 그런 사탄 마귀들은 하루빨리 정리해 세상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세상은 그런 자가 사는 곳이고, 마귀의 소굴이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집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인데, 사탄 마귀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통제하고 방해한다면 그건 큰일입니다. 이런 일을 간파하셨습니까? 간파하셨다면 진리만 추구하세요. 원수나 마귀의 조롱, 비웃음, 타격 같은 것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구든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타격한다면 교회 인솔자 일꾼들은 반드시 나서서 사탄 마귀의 궤계를 폭로하고, 사탄 마귀를 발로 짓밟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되죠? 사탄 마귀가 세상에서는 미쳐 날뛰겠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꿈도 꾸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나오는 족족 훼멸시키고, 나오는 족족 처리해야 합니다. 교회의 인솔자 일꾼들은 반드시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 기죽지 않게 해줘야 합니다. 반드시 좋은 사람들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악인이 일어나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을 논단하고 정죄하는 걸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악인을 폭로하고, 그 다음 머리를 못 들게 만들어 모두가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의 지탄을 받게 한 뒤 출교시키면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합당합니다. 아셨나요?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예전에 다들 ‘난 실제 하나님을 믿게 돼서 너무 영광스럽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말은 어떻습니까? 완벽하다고 할 수 있나요? 분량이 너무 작은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말하죠? “실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 말은 어떤가요? 어떤 사람은 “저는 오래 믿었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해요! 정말 아쉽고, 헛살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한탄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 2, 30년을 믿었지만,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게 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건 복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건 줄만 알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어떻습니까? 그런 믿음을 보면 역겹다는 느낌이 없나요? 그런 믿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말하면 그야말로 듣기조차 민망하다”. “듣기조차 민망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없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듣기조차 민망하기에,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셔도 마음이 편치 않고 무거우실 겁니다. 그건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요구는 듣기조차 민망한 것이고, 하나님도 역겨워하실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비열한 생각을 갖고 있고 그런 비열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믿음이 가련할 정도로 작고 하나님의 요구에 어긋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꽤 많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정말 듣기 좋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 참 좋구나. 사람다운 말을 했구나.’ 하실 그런 효과에 달하면 됩니다. 말해 보세요, 있나요?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경력과 인식 가운데서 생기는 겁니다. 경력이 없으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하려면 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여 많은 걸 얻었다는 건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얻었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얻었다고 기뻐 뜁니다. 꿈에서도 기뻐서 일어납니다. “너무 좋아! 참 하나님을 찾았어! 우리 작은 이모랑 고모 봐봐! 아직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니, 얼마나 어리석어! 내가 훨씬 더 똑똑하네!” 이 말은 어떤가요? 이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쁜 만큼 하나님의 뜻을 좀 헤아릴 수는 없을까요? ‘아직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지 못했어! 하나님께 죄송하구나.’ 자신만을 위해 기뻐하고 축하하는 건 좀 이기적이고 비열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교계에서 예수님을 믿는 가여운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날 너무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날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난 하나님을 위해 뭘 했지? 본분을 잘했던가? 본분도 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렇게 큰 구원을 누릴 자격이 없지! 하나님께 정말 송구스럽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께 빚졌다는 걸 느끼게 되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본분을 좀 해야겠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본분을 다 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어!’ 사람에게 이런 심지가 있다면 그 믿음은 합격입니다. 본분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 본분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까요? 본분을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보고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다른 사람들과 다르네. 주님을 믿는 사람들과 다르구나. 저 사람은 맨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면서 일을 하고, 거기에 보수도 따지지 않는데도 저렇게 큰 힘이 있는 건 어떻게 된 걸까? 저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 왜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을까? 이건 정말 심오해. 창세 이래 저런 인류를 본 적이 없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딱 알아보고 나서 “아, 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어 피조물의 본분을 무엇보다 높게 보는 거였구나! 저 사람들은 저렇게 본분을 하는 걸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저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서 반드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으로 불릴 자격도 없다고 여기는구나. 이게 저 사람들의 인생관이고 가치관이구나.”라고 합니다. 그렇게 본분하는 게 간증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면 간증이 됩니다. 나중에 더 관찰해 보고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핍박하고 탄압하고 박해하는데도 저들에겐 저런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 변함없이 충성하면서 본분을 해요. 저 사람들, 정말 대단하네요. 중국 공산당이 저렇게 광적으로 잔혹하게 탄압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굳게 서서 견지하고 있네요. 저 사람들이 본분하는 것은 정말 간증이 맞아요. 정말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어요!”라고 합니다.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은 본분하는 가운데서 엄한 책망과 질책을 많이 겪었고, 또 어떤 사람은 심지어 형제자매들에게 미움받고, 버림받았지만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인식합니다. 그다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진실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소극적이 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자포자기하지도 않고, 오히려 굳건하게 서서 자신의 본분에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 성정의 변화가 있을까요? 정말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분을 하는 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고, 본분을 하는 건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을 누리는 겁니다! 심판과 형벌, 책망과 질책, 또는 시련과 연단을 겪으면서 어느 누가 소극적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연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불평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밀히 부축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한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말 설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양심과 이지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려할 줄도 몰라요. 오늘까지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건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죠.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 경력에서 무엇을 보게 됐습니까?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는 동안 어떤 걸 보게 됐는지 누가 중점적인 부분을 얘기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어떤 진실한 인식과 실제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지 말할 수 있으십니까? 예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진심으로 화비하는 자를 내가 꼭 크게 축복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을 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큰 복을 내리시는 걸 보지 못하셨나요?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크게 축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시겠죠? 보세요, 지금 본분을 하는 사람들은 다 많은 고생을 하지만 얼굴만은 다들 환하게 피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 아닙니까? 다들 얼굴에는 하루가 다르게 웃음꽃이 피고, 그 웃음은 갈수록 커져갑니다. 근심도, 걱정도 없고, 눈물은 더더욱 없죠.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러한 사람들 마음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점점 더 정상적이 되고,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진 듯하고, 또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 듯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호하고, 그렇게 모든 일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모든 일에서 우리를 축복하시며,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또한 각종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민을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팔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영이 직접 역사하신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129-B-5】
교계의 사람들이 “당신들은 정말 하나님을 봤나요? 당신들이 믿는 분이 정말 하나님이세요?”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또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조물주이십니다. 틀림없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를 흔들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참된 믿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본분도 합격되게 할 수 있고, 또한 간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분을 하는 것과 진실한 믿음이 서로 관련이 있을까요? 아주 많습니다. 그럼 본분을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의 믿음의 크기와도 관련이 있을까요? 본분을 하는 것이 어떤 수준에 도달했는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는 그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을까요? 본분을 하는 것은 믿음이 향상되고 자라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면, 본분하는 것도 따라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게 됩니다. 믿음이 불합격이면 본분도 틀림없이 불합격일 것입니다. 믿음이 어느 수준에 있으면 우리가 하는 본분의 실질도 그 수준에 있게 됩니다.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본을 하는 질과 효과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정도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우리의 믿음도 그만큼됩니다. 욥의 믿음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습니까? 욥의 믿음이 도달한 정도와 욥의 간증이 일치하지 않았나요? 욥의 간증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정말 대단합니다. 일반인들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욥의 믿음이 이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욥의 간증도 그 정도까지 있게 된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무슨 뜻일까요?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믿음은 무엇을 말할까요? 진실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믿음이 늘 그저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걸 인정하는 정도, 그 정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런 믿음은 불합격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불합격이라면 하는 일도 간증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믿음이 합격되면 그 사람이 하는 간증도 반드시 합격인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큼 크면 간증도 그만큼 크고, 믿음이 얼마큼 좋으면 간증도 그만큼 좋은 것입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은혜시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깨달음을 나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그런 논법과 평가를 들으면서 하나님은 실망하시고 크게 낙심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시고, 역사를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도 마지막에 그 정도의 간증밖에 안 됩니다. 사람이 행한 모든 것은 정말 내놓을 만한 게 없습니다. 은혜시대에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를 대하고도 논단하는 말들을 수없이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건 악행을 저지르는 겁니다! 크리스천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습니까? 한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같은 행렬에 선 것 같아 모욕감이 좀 드는구나. 저들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 듣기만 해도 역겹고 보기조차 싫구나. 저들은 크리스천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이런 뜻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 ‘그럼 우리가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실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태도가 아니실까요?’라고 의식하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볼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본분부터 잘 하세요. 본분이 합격되면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보시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진리가 전혀 없이 그렇게 본분을 하면 불합격입니다. 본분이 불합격인데, 인품은 합격될까요? 사람이 본분하는 면에서 취할 만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인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소용없고 무지몽매한 것입니다. 제 말이 맞나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공통 언어가 있어야 하고 진리에 부합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참된 인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어 보시고 좀 교통하시면 사람의 표정이나 어투가 다 옳고 경건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정상적인 인성의 이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흡족해 하시고, ‘그 사람과는 접촉해 대화하면서 나눌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표정이나 어투가 올바르지 못하면 “이 사람은 틀렸구나. 이 사람은 마귀고 불신파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하시면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믿음이 합격되는지 못 되는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합격되는지는 본분이 합격되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믿음이 합격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최고의 의사로만 알고 있다면 그건 합격될까요? 형편 없는 불합격이죠. 예수님을 인자하신 구세주라고만 한다면 합격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칭한다면 합격될까요? 예수님을 최고의 선지자라고만 칭한다면 합격될까요? 그건 더더욱 불합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첫째, 예수님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이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시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 2가지에 도달해야 사람의 믿음이 합격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진리, 길, 생명이자 구세주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실한 순복이 있고, 경외심이 있고, 또한 자신의 본분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람의 믿음과 사람의 행위는 관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사람의 믿음과 본분을 하는 것은 관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사람의 믿음과 사람에게 참된 간증이 있는 것은 관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할 수 있으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합격된 믿음이 있을까요?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본분도 잘할 수가 없거니와 아무리 한다 해도 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면 진리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진리 실제란 무엇인지, 진리 실제와 본분과의 관련성에 대해 꿰뚫어 보셨습니까? 사람의 진리 실제는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기본적으로 본분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있는지는 본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는 더더욱 본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지도 역시 본분을 통해서 볼 수 있죠. 마지막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전부 본분을 통해 규정하고 가늠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 본분을 하지 않았지만, 저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에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성립될까요? 또 어떤 사람은 “저는 본분은 하지 않았지만, 참 도를 지켰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어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성립될까요? 또 “저는 본분은 안 했지만, 저도 하나님께 충성했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어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성립될까요? 어쨌든 이런 사람들이 정말 존재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죠. 사람의 믿음이 이러한 관점 위에 세워졌다면, 마지막에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물음표가 아닐까요? 알 수 없는 관념과 상상 위에 세워진 것으로, 마지막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도박을 건다면 그건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진실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지 마세요. 자신의 관념과 상상은 결국 마지막에 지옥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예수님을 대적해 결국엔 지옥의 문을 열고 말았습니다. 말세의 많은 교계 지도자들도 바로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해 하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국, 지옥의 문을 열게 되었고 지옥에 떨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일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면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확신이 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발표하신 모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음성이고 진리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장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만 지키고, 그 어떤 죄도 짓지 않고, 음란의 죄도 짓지 않을 것이며, 제물을 훔쳐 먹지도 않고, 권력 다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지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성립될까요? 그 사람이 정말 이 3가지 죄를 범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도 떠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하는 그런 말들이 바로 그들의 믿음을 대표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그들의 믿음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믿고 있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절대 불합격입니다.
【129-B-6】
진실한 믿음은 무엇으로 증거해야 할까요? 어떤 말로 표현해야 가장 적절할까요! 방금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주님에 대한 인식과 예수님에 대한 논법, 그리고 깨달음들을 전부 예로 들어 꺼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들을 들으시고 정말 실망하고 낙심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불합격이라는 걸 충분히 증명하죠. 그럼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합격된 것일까요?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곧 말세의 그리스도이시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합니다. 이 두 마디만 가지고 될까요?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당신들이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겁니까? 얘기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간증과 관련이 됩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걸 간증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간증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인식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것 자체가 간증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말도 간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간증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는 본분이 간증일까요? 역시 간증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저희는 하나님을 따르면서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수년간 본분을 했습니다. 이게 간증이 아니라면 뭐가 간증입니까?”라고 합니다. 그건 수년간 힘을 쓰고, 수년간 효력만 한 거죠. 왜 이렇게 말할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마디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본분하는 마음 자세가 틀린 것입니다. 복을 받고,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 본분은 불합격이고 또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속셈과 목적이 있는 거래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본분도 하고 힘도 많이 썼고, 다른 사람이 땀 흘린 만큼 흘렸고, 다른 사람이 대가를 치른 것만큼 치렀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은 합격되게 본분을 했다고 하고, 제가 한 본분은 효력이라고 합니까? 이건 불공평하지 않나요?”라고 합니다. 때가 되면 이렇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지금 여러분 스스로 얘기해 보세요. ‘난 합격되게 본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분은 손을 들어 보세요. 드실 수 있습니까? 그럼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정말 효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손들어 보세요. 여러분은 왜 자신이 본분하고 있는 걸 효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저는 대부분의 경우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따라 본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력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합니다. 진리의 원칙을 알지 못하고 본분을 했다는 것만으로 효력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자신이 심복구복해야 성립됩니다. 스스로 머리 숙이게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나요? “난 확실히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한 게 아니야. 복을 받기 위해 한 거였어. 사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했지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참되게 아는 게 없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없어. 그래서 내가 화비하고 바치는 건 순전히 복 받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지! 이런 사실에 따라 내가 하는 본분은 효력이라고 단정할 수 있어.” 혹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는 본분의 실질이 효력이라는 걸 아주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저는 효력자가 되는 게 싫어요. 저는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잘할 수 있는 합격된 피조물이 되고 싶고,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럼 자신이 효력하는 것을 진실된 본분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그 길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면 되죠! 그렇게 천천히 하나님을 알게 되면 제가 하는 본분도 자연히 합격되지 않을까요?”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많은 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늘 복을 받으려는 마음 자세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은 곧 효력에 속하고, 충성되게 본분을 하는 것은 기꺼이 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 기꺼이 자신의 본분을 다해 조물주를 흡족케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그런 인식이 있다면 사람이 하는 본분에는 거래가 없게 됩니다.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 본분을 하는 것이고 조물주를 흡족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분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편치가 않아! 이렇게 본분하지 않으면 난 사람도 아니고 살 자격도 없지! 그래서 이렇게 본분을 하는 거야. 정말 기쁘고 즐겁구나!”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고 진정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은 관련이 있을까요?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은 양심과 이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연히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본분을 합격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보시면 지금 다들 충성되게 본분을 하고 있고 또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련이 닥치고 죽음이 닥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될 때,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때도 후회하지 않고 “저는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래도 피조물의 본분을 좀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한번은 사람답게 살 수 있었고, 진정한 사람이 됐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다 공의로우신 겁니다! 지금 이건 예전에 제가 하나님을 많이 거역하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것은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되는 걸까요? 입으로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행해야 합니다. 충성되게 본분하는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마지막에 검증을 거쳐 증명이 돼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검증을 거쳤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높이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독자를 주었으니, 너는 아들을 제물로 내게 바치라. 그럼 내가 너를 인정하리라’ 아브라함은 정말 바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던 겁니다. 욥은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지만, 그것으로 인해 욥은 간증을 굳게 서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에게는 체포되는 시련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간증을 하게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검증을 거쳐 실증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아무렇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여러분의 간증과 여러분이 하는 본분은 검증을 거쳐 실증됐습니까? 검증을 거쳐 실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일이 임할 때면 곤란해질 것입니다.
말씀 한 단락을 보시겠습니다. “현재 나는 다만 나의 직분 내의 사역을 할 뿐인데, 모든 밀단을 다 묶어 두고 그 가라지도 그 중에 함께 묶어 둔다. 이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이다. 내가 타작할 때 그 가라지들을 깨끗이 키질해 낸 후 알곡은 곳간에 넣고 그 가라지는 불에 태워 재가 되게 한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역은 단지 모든 사람을 단으로 묶는 것일 뿐이다. 즉, 철저히 정복하는 것이다. 그다음 타작하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의 결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어떻게 나를 만족케 해야 하고, 나를 믿는 정상 궤도에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너의 지금의 충성과 순복이고, 지금의 사랑과 간증이다. 설령 네가 지금 무엇을 간증이라고 하고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는지 모를지라도, 너는 마땅히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데, 너의 유일한 보배로운 충성과 순복을 나의 손에 바쳐야 한다. 내가 사탄을 패배시키는 증거는 사람의 충성과 순복에 있고 내가 사람을 철저히 정복하는 증거도 사람의 충성과 순복에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나를 믿음에 있어서의 본직 사역은 바로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이고, 나에게 충심무이(忠心無二)하고 끝까지 순복하는 것이다. 내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전개하기 전에 너는 어떻게 나를 위해 증거해야 하겠는가? 너는 또 어떻게 나에게 충성하고 순복하겠는가? 너는 네가 하는 기능에서 충성을 다하겠는가 아니면 내팽개치고 그만두겠는가? 너는 설령 죽을지라도, 멸망할지라도 기꺼이 나의 모든 안배(安排)에 순복하겠는가 아니면 중도에서 도망쳐 나의 형벌을 피하겠는가? 내가 너를 형벌하는 것도 나를 위해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나에게 충성하고 순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지금의 형벌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고, 이후의 사역을 막힘없이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그래도 좀 총명해져 네 개인의 목숨과 네 생존의 의의를 무가치한 한 줌의 모래나 흙으로 여기지 말기를 권한다. 너는 나의 이후의 사역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너는 내가 이후에 어떻게 역사하고 사역을 어떻게 전개하는지 아는가? 너는 마땅히 나의 역사를 경력하는 의의를 알아야 하고 더욱이 나를 믿는 의의도 알아야 한다. 내가 이처럼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어찌 네가 상상한 것처럼 중도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큰 공정을 시작하였는데, 어찌 헐어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시대를 끝마치러 온 이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너는 내가 시대를 시작하고 또한 사역을 전개하며 더욱이 국도의 복음을 확장한다는 것에 대해 더욱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의 사역은 단지 시대를 시작하는 것이고, 이후에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이며, 또한 다가올 날에 시대를 끝마치기 위해 기초를 닦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의 사역은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전혀 아니고, 또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런 가치도 의의도 없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너에게 알리겠다. 너는 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더욱이 나의 영광을 위해 네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를 위해 증거하는 것은 더욱이 내가 일찍부터 바라던 것이고, 나의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더구나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129-B-7】
방금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요구와 하나님의 마음을 간절하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요? 이것이 바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에 어떻게 하실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서는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절차가 하나 하나 연이어 있는데, 너무도 많아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꿰뚫어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분고분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인솔하시는지, 어떻게 정결케 하시는지, 마지막에 어떻게 온전케 하시는지를 보면서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잘하면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것은, 다음 단계의 사역을 위해 기초를 닦으시는 겁니다. 예전에 많은 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부탁을 알게 됐습니다. 그다음 어떻게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명을 완성해야 하는지 알게 됐죠. 그럼 다음 단계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예전에 우리는 대재난이 오면 낡은 시대를 멸하실 거라고, 꼭 이 일을 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이것뿐일까요? 어떤 사람은 “저는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서 큰 붉은 용을 멸하셔서 속 좀 시원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의미가 있나요? 어린아이가 이 말을 한다면 모를까, 어른이라면 하지 마십시요. 어떤 사람은 “전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으면 좋겠어요. 근데 큰 붉은 용이 멸망되지 않으면 어떻게 부모님과 상봉할 수 있겠어요?”라고 합니다.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할 수는 없습니까? 지금 우리는 본분을 함에 있어서 진리가 없으면 효과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본분을 해도 합격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합격되게 본분을 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아셨나요?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난 왜 뭘 해도 제대로 못할까요? 정말 못났네요. 예전에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요? 왜 이제야 느끼게 됐을까요? 진리를 추구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진리가 없으면 소질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소용없어요. 빈껍데기나 다름없어요.”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걸 잘 아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급선무는 바로 진리를 잘 추구해 본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고 진리를 얻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중요한 거죠.
지금은 국도 복음을 확장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 계속 진리를 잘 갖추지 않는다면 본분을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됩니다.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때, 사람에게는 진실된 간증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단지 힘만 쓰고, 효력만 했을 뿐이죠. 이때에 진리를 잘 추구해 복음 확장 사역에 갈수록 효과가 좋고, 사람을 더 많이 얻게 되고, 본분도 갈수록 더 잘하고, 효과도 더 있게 된다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제가 제작한 동영상의 클릭수가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어요. 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동영상을 보고 참 도를 알아보러 온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찬양을 하는데, 찬양을 할수록 더 잘 부르고 부를수록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고, 감동돼 눈물을 흘립니다. 노래를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말씀 찬양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과 마주한 것처럼 느끼게 되죠. 그렇게 된다면 이것이 간증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춤을 추는 본분도 합격되게 하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대본은 구절마다 시청자의 마음을 울립니다. 시청자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정말 참 도구나. 진실된 간증이야!”라고 하게 됩니다. 보세요, 본분을 잘하니 이렇게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데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본분을 합격되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본분을 합격되게 하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각종 동영상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참 도를 알아보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본분들이 진실로 그런 효과에 도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본분은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본분으로 아름답고 굳센 간증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온전하고 합격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하면서 어려움에 부딪치면 “본분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높아서 전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잘할 수 있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전 그걸 배운 적도 없는데, 잘하라고 하면 강요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어떤 일이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스승을 둔 적이 있었습니까? 노아는 건축학원에서 배운 적도 없었고, 그런 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방주는 이렇게 만들어야겠구나. 각 부분의 규빗은 얼마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아.’ 그때 노아는 그런 말씀들을 마음에 새겼고, 기억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할수록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속으로 방주의 윤곽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윤곽이 잡히자 노아는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 마음속에 방주가 그려졌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좋아, 시작해 봐야지.’ 그리고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이 막 노아에게 “너는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 네가 방주를 다 만들면 내가 홍수를 내려 이 세상을 멸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자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고? 그런 건 배운 적도 없고 만들 줄도 모르고, 방주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노아는 이런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노아는 하나님을 원망했나요? ‘절 난처하게 하시네요! 이건 강요하는 게 아닌가요? 저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하시면 몰라도 방주라니요. 전 그런 것에 관련된 책을 본 적도 없는데요!’ 노아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론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건 하나님의 계시야! 하나님께서 내게 방주를 만들라고 계시하셨으니, 틀림없이 인도해 주시고 빛 비춤과 깨달음을 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방주의 윤곽과 만드는 방법을 생각나게 해 주실 거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자. 맞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야.’ 노아는 틀림없이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하나님, 저는 방주를 만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야의 지식도 없고요. 저는 무능하지만 당신은 전능하십니다. 저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신 만큼, 저를 이끌어 주시고 지시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곧이어 마음에 느낌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해 주실 거야. 더 말할 것도 없어. 내가 왜 계속 이렇게 구했을까? 그건 쓸데없는 말이 아닌가?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작을까?’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나서 말합니다. ‘괜찮아, 됐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으니 틀림없이 이끌어 주실 거야. 난 협력만 하면 돼.’ 그리고 방주의 크기에 대해, 만드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한동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길이 생기고 점점 밝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다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두 눈으로 보셨죠? 세상에서 지식들을 다 배우고 와서 하나님 집에 와서 이런 것 저런 것 완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께 기도해 성령께서 깨달음과 빛 비춤을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부족한 면이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바로잡고 끊임없이 교정하면서 점점 더 좋아집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모색하면서 경험이 생기고 갈수록 더 완벽해지고, 마지막에는 정상 궤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경력하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고 너무나 진실하십니다. 이런 성과가 나오게 되자 이방인들은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그렇게 경력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다 어느 정도의 인식이 있게 된 것이 아닙니까? 아무도 “우린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요. 우린 이 일을 못하겠습니다. 집으로 갑시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거야.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셔. 하나님을 의지하면 절대 틀릴 리가 없어.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거야!’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이 생깁니다. 이 믿음은 경력을 통해 얻은 게 아닙니까? 우리의 경력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모든 일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끊임없이 자라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게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하는 본분은 아름답고 굳센 간증이 될 것입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본분을 처음 할 때는 거역하고 대충대충, 얼렁뚱땅 해서 속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점차 순복하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이런 과정이 아닌가요?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다가 집 생각이 납니다. ‘집에 가고 싶어.’ 그러나 몇 번 기도하고 나서는 생각이 바뀝니다. ‘집에 돌아가면 안 돼. 내가 집에 간 사이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고, 나를 빼놓으시면 손해가 너무 크지.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는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그러고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면 본분하는 가운데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버린 그런 것들보다 백배, 천배 더 높은 가치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알게 된 후에 ‘몇 년간 본분을 하면서 나에게 많은 발전이 있게 됐구나. 정말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됐어. 집에 있을 때보다 분량도 훨씬 많이 자라났어! 집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그땐 아는 것도 별로 없었지! 지금은 많은 걸 깨닫게 됐고, 또 견식도 넓어지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것과 진리 원칙도 알게 된 거야! 내가 얻은 이런 진리 생명들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건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야!’라고 합니다.
【129-B-8】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할까요? 진리를 추구하면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범사에 진리를 구해야 하고, 어려움에 부딪치면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어려움에 부딪치면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 원칙을 교통해야 합니다. 다 같이 교통하면 길이 생기고 일도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처리하고 나면 마음이 정말 편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편안하고 든든한 느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돈으로 그 느낌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면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면 마음은 더없이 평온하고 더없이 든든합니다. “예전에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행복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봐요.”라고 합니다.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평안하고 든든하고 홀가분한 느낌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누리도록 주신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면 나는 너에게 평안함과 든든함을 줄 것이고, 네가 누릴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실된 간증을 하게 되면, 네 마음을 더 즐겁게 해 주고, 누림이 있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충성을 다해 본분할수록 마음에는 더 누림이 있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함을 느낍니다. 제가 어떤 형제자매를 크게 책망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속으로 ‘세상에, 저렇게 심하게 책망하시는데도 순복할 수 있다니? 난 왜 순복할 수 없을까? 저 형제님은 정말 분량이 크네. 정말 순복을 잘하네’라고 생각합니다. 책망받은 사람은 마음이 고통스러워 끊임없이 생각해 보고 반성해 봅니다. ‘내가 왜 잘못을 했을까? 왜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을까? 정말 어리석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도 합니다. 계속 기도하면서 나중에는 깨닫게 됩니다. ‘진리는 약간 알게 됐지만 생명 성정은 별로 변화되지 않았구나.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를 어기고 제멋대로 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래, 알았어! 내겐 생명 성정이 변화된 간증이 없어. 예전에 좀 변한 줄 알았는데. 내가 일을 보는 관점에 변화가 좀 생겼으니, 생명 성정도 변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이 일을 통해 따귀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구나. 이제야 나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걸 알게 됐어. 앞으로 계속 고분고분, 성실하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하고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면서 본분이 합격될 때까지 잘 해야겠어!’ 이렇게 노력하고 또 한동안 지나게 되면 성과가 보이게 됩니다. ‘이제는 본분을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게 어렵지 않아. 이제는 본분을 하면서 어려움에 부딪쳐도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어. 이제는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육체를 배반할 수 있고, 내 관념과 생각에 의지하지 않게 됐어. 이젠 내 자신을 믿지 않을 거야. 진리에 순복해야지! 누가 정확하게 말하면 그대로 행할 거야.’ 이렇게 실행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과 기쁨, 누림을 맛보게 됩니다. ‘아, 내 생명이 자라났나 봐! 이번에 육체를 배반하고 진리를 실행했더니, 내게 더 큰 평온과 기쁨을 주셨어. 이게 생명이 자라나는 경험이구나. 이번에 고난받은 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어! 이번의 책망과 질책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었고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이었고, 더 진실된 사랑이었어. 하나님께서 날 너무나 사랑하시는구나!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한쪽에 두고 내버리신 게 아니셨구나!’ 이렇게 경력하면서 몇 년이 지나면, 하나님께 순복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고통스럽고, 순복하면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게 정말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할 때가 훨씬 많아졌고 하나님을 거역할 때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생명이 자라난 게 맞나요? 그 정도까지 경력하고 나면 그 사람의 생명 성정에 변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번에는 정말 변했습니다. 진리를 행할 때가 더 많아졌고 육체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하던 일이 아주 적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성정이 변화된 간증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본분을 하는 것에 자신을 위한 의도라든가 불순물이 들어 있을까요? 거래가 있을까요? 혹은 축복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과 본분은 진실된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저쪽에서 또 참소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참소하려는 거냐? 저 사람이 본분을 어떻게 하더냐? 저 사람이 나를 위해 충성되게 본분을 했고, 사람이 되고자 본분을 한 것이다. 그래도 부인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 마귀는 생각해 보고 “그러네요!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제가 보기에도 하나님만을 위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사탄은 “저 사람은 더 이상 참소하지 말아야겠구나! 참소해 봤자 실패할 거고, 나도 수치를 당하게 될 테니까! 참소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시련은 그렇게 면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배후에서 그 사람이 한 말들 속에 여전히 개인의 속셈이 있고, 개인의 축복을 받기 위한 것들이 있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마귀는 또 참소할 것입니다. 마귀가 참소한다면 또 시련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하는 것인지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십니까?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것도 간증입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도 역시 간증입니다. 본인이 행하는 것과 본분 자체 또한 간증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의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이 이루어졌나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위한 간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제 확실해지셨나요? 적절한 말로 표현하실 수 있으십니까? 어떤 분들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입으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릅니다. 말하고 보면 도리이고 빈말이고 거짓말이어서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실까 봐 두려워합니다. ‘난 그냥 실제 행동으로 보여 드려야지! 충성을 다해 본분할 거야. 본분으로 보여 드려야겠어.’ 그러면 더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본분하고 간증을 하는데, 왜 가끔은 재난과 환난에 부딪치게 될까요? 그건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그 재난이나 환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게 맞나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가끔은 사탄의 참소도 있습니다. 그런 시련에 부딪치고 그런 시련을 통해 그 일을 밝히고자 하신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우리의 언행,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보시고 사탄도 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지, 하나님께 속하는지, 그런 일을 가지고 영계에서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의 일도 영계에서 논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온전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이런이런 일이었습니다.”라고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를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권세 아래에 욥을 시험하는 걸 허락하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영계에서는 그런 일이지만, 물질세계, 인간 세계에서는 욥에게 시련이 닥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가운데 임한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재하시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욥이 살던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말세의 사역을 하지 않으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진리를 발표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의 그 시대는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시련이 닥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도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그 시대에 욥의 간증은 최고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욥의 그 시대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발표하신 이렇게 많은 진리를 갖고 있고, 하나님도 이렇게 많은 실상과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 세상이나 영계를 막론하고 영계의 전쟁에 속한 배후 실정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간증이 욥의 간증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불합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임하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때가 바로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날 때인 것입니다. 평소에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따지지 않으십니다.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도 하나님은 옆에서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각종 카메라며 녹음기며 쭉 꺼내 놓고 욥이 말하기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욥이 어떻게 간증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셨습니다. 사탄도 그곳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보려고 했습니다. 사람은 시련이 임하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영계에서도 보고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일상적인 일은 보지 않으시고 관여하지도 않으실 거야. 혹시 보시더라도 간혹 보고 계실 거야. 괜찮아. 우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까요? 정말 없습니다. 영계의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이 뒤에서 저지른 떳떳치 못한 일들은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으실까요?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사람이 뒤에서 행하는 것과 마음에 생각한 것과 뒤에서 다른 사람과 한 말들 전부 다 그 사람의 간증과 관련됩니다.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