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집 (a)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에 대한 설교 교통

【129-A-1】

말씀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

인류 중의 한 사람으로서, 경건한 크리스천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바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인(全人)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모두 하나님의 주재로 인하여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부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류의 정의로운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부탁을 위해 순교한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고, 더욱이 우리에게 전부를 공급하는 하나님을 대할 면목도 없다.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이 인류를 창조하였고 더욱이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인류의 문명도 만들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인류를 어루만져 위로하고 있고 이 인류를 밤낮으로 보살펴 주고 있다. 인류의 발전과 진보는 하나님의 주재를 떠날 수 없고, 인류의 역사(歷史)와 미래도 하나님 손의 안배(安排)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만일 명실상부한 크리스천이라면 너는 반드시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도 다 하나님의 안배 아래에 있음을 믿을 것이다. 어떤 국가나 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떠할지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이 인류가 어디로 갈지도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장악하고 있다. 인류가 좋은 운명이 있기를 바라고 한 국가가 좋은 운명이 있기를 바란다면 인류는 모두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과 귀숙(역주: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은 피할 수 없는 큰 재난이 될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짓던 시대를 돌아보자. 인류는 깊이 패괴(역주: 부패, 타락)되어 하나님의 축복에서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빛이 없는 흑암 속에서 살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인류는 음란이 본성으로 되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타락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류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는 받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자격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렸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버렸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짐에 따라 그들은 타락하여 이지(理智)를 잃고 인성을 잃었다. 그들은 갈수록 악해졌고 더 나아가 죽음을 향해 갔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속에 떨어졌다.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악에서 떠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분부한 것을 듣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방주를 짓고 각종 살아 있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예비된 후 하나님은 곧 세상을 멸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때 세상을 멸할 때 오직 노아의 일가 여덟 식구만 다행히 그 재난을 피하여 생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노아가 여호와를 경배하며 악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또 오늘의 이 시대를 보자. 노아와 같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그런 의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인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고 여전히 이 마지막 시대의 인류를 너그럽게 용서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을 찾고 있고, 그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그의 부탁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그의 앞에서 영아처럼 그에게 순복(역주: 순종)하고 그를 대적하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다. 네가 만일 어떠한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는 대상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복을 베풀어 줄 대상이 될 것이다. 만일 너에게 아주 높은 지위와 명망이 있고 많은 지식과 많은 자산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너를 옹호하지만 네가 여전히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부탁을 받고 하나님이 너에게 하라고 하는 일을 한다면 네가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의의 있고 또한 인류의 가장 정의로운 사업이 될 것이다. 네가 만일 지위를 위하거나 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네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저주하는 것이고 더욱이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다. 네가 대통령이나 과학자 혹은 목사나 장로일지라도, 너의 관직이 얼마나 크든지 네가 너의 능력과 지식으로 너의 사업을 한다면 너는 영원히 실패자이고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네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네가 정의로운 사업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네가 인류를 위해 복리를 도모하고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인류의 지식과 힘으로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애써 밀어내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네가 인류를 인도하여 흑암과 사망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도 잃어버린 끝없는 발단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인류에게 사회과학이 있게 되면서부터 과학과 지식이 인류의 심령을 차지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과학과 지식이 인류를 통치하는 도구가 되어 인류에게 하나님을 경배할 충분한 공간이 없게 하였고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유리한 더 많은 조건이 없게 하였으므로 인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지위는 갈수록 낮아졌다. 인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는 그런 세상은 어둡고 소망이 없으며 공허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사회 과학자, 역사학자, 정치가들이 일어나 그들의 사회과학론, 인류 진화론 등등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진리에 어긋나는 그런 논조들을 발표하여 인류의 머리와 심령을 채웠다. 이로 인해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점점 더 적어졌고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한 말씀을 신화로 대하여 하나님의 존엄과 위대함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졌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신조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졌으며, 인류의 존망(存亡)과 국가나 민족의 운명이 사람에게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인류는 모두 먹고 마시며 놀고 즐기는 공허한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오늘 어디에서 역사하고 인류의 귀숙을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하는지를 주동적으로 찾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리하여, 부지중에 인류의 문명은 갈수록 사람의 원대로 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오히려 죽은 사람들보다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이전에 아주 문명했던 나라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원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설사 통치자나 사회학자가 모두 온갖 머리를 짜서 인류의 문명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도 인류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 그것은 아무도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없고, 그 어떤 사회 논조도 사람으로 하여금 공허함으로 인한 시달림을 떨쳐 버리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지식, 자유, 민주, 누림, 안일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위안이다. 인류는 이런 것들이 있어도 여전히 불가피하게 죄를 짓고 있고 사회의 불공평을 원망하고 있다. 또 이런 것들이 있어도 인류가 탐색하고자 하는 갈망과 욕망은 저지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인류의 무의미한 희생과 탐색은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번뇌만 가져다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게 하고, 이후의 길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게 하며 심지어 과학과 지식을 두려워하게 하고 공허한 느낌은 더욱 두려워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 네가 자유국가에 있든 아니면 인권이 없는 국가에 있든 너는 인류의 운명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으며, 네가 통치자든 아니면 통치를 받는 자든 너는 인류의 운명과 심오한 비밀 그리고 귀숙을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고 알 수 없는 공허한 느낌에서는 더욱 벗어날 수 없다. 인류에게 있는 공통된 현상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사회현상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이런 문제를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위인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위와 하나님의 생명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넉넉한 생활과 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그런 공평한 사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명 공급이다. 인류는 오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명 공급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만 인류의 필요와 인류가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과 심령의 공허함이 해결될 수 있다. 만약 어떤 국가나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면 그 국가와 민족은 몰락으로 나아가고 흑암으로 나아갈 것이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훼멸될 것이다.

혹시 너의 나라가 지금은 흥왕할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너의 국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게 한다면 그 나라는 갈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고, 국가의 문명이 갈수록 더 많이 사람에게 짓밟히게 될 것이며, 머지않아 그 나라의 국민이 일어나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늘을 저주하고 욕할 것이다. 부지중에 한 나라의 운명은 이렇게 끝난다. 하나님은 강대한 나라를 일으켜 하나님께 저주받는 그런 국가들을 처리할 것인데 심지어 지구상에서 그런 나라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한 국가나 민족의 흥왕과 존망의 관건은 그 국가의 통치자가 하나님을 경배하는지, 그 나라의 국민을 이끌어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하는지,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시대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그런 국가들을 특별히 후대하고 그런 국가들을 한데 모아 세계에서 비교적 정의가 있는 진영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무신론 국가들과 참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국가들은 정의적인 진영의 대립파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곳이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권세를 행사하는 국가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국가로 하여금 제재와 제한을 받게 하였다. 비록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의 경배는 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류가 하나님을 너무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잊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며, 지구상에는 비정의를 저지하는 국가와 정의를 행사할 수 있는 정도의 국가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바람에 전혀 이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국가의 통치자도 하나님에게 그 나라의 국민을 통치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국가의 정당도 그 나라의 백성을 조직하여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각 나라, 각 민족, 각 집권당의 마음속에서, 심지어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에게 있어야 할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에 일부 정의로운 세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는 통치는 매우 약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정치 무대는 혼란하고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없게 되면 그것은 인류에게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 통치자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그 나라의 국민을 위해 무엇을 공헌하든, 인류가 함께 정의로운 대회를 얼마나 많이 소집하든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고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모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고 인류가 다 같이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국가가 좋은 국가이고 좋은 지도자가 있는 국가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없는 국가라면 그가 멸하고자 하는 국가로 여긴다. 사람의 생각은 늘 하나님의 생각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정상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매우 비참할 것이고, 또한 그 국가는 귀숙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장악하고 있고 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며 전 우주를 장악하고 있다.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나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다. 인류의 운명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와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고 경배하는 인류를 번창하게 할 것이며, 그를 대적하고 저버리는 인류를 쇠퇴되고 멸망되게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소돔을 멸할 때의 그 모습을 생각해 보고 또 롯의 아내가 어떻게 소금 기둥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니느웨 성의 백성이 어떻게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고 죄를 자백했는지를 보아라. 2천년 전의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결말, 즉 유대인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나 세계 각국으로 도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온 민족이 전례 없는 망국의 고통을 겪은 그 일을 생각해 보아라. 그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촉노(觸怒)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저지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들 자신이 저지른 것에 대한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정죄하고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통치자가 국가와 민족에게 가져다준 쓴 열매와 재난인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다시 인간 세상에 와서 그의 사역을 하고 있다. 그가 사역을 하는 첫 지점은 독재 통치자들이 집대성(역주: 여러 가지를 모아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완성함)된 중국, 즉 무신론의 견고한 요새이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능력으로 한 무리 사람들을 얻었는데, 그 기간에 중국 집권당의 온갖 추적을 당하였고 온갖 고난을 다 받았으며 머리 둘 곳도 없었고 거할 곳도 없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하고 있다. 즉, 말씀하고 음성을 발하며 복음을 확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을 원수처럼 보는 중국, 이런 국가에서 하나님은 여태껏 그의 사역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역사와 말씀을 받아들이는 더 많은 사람들을 얻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 중의 각 사람을 최대한 구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이루려는 일은 그 어떤 국가나 세력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저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지옥에 던질 것이고, 한 국가가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면 하나님은 그 국가를 멸할 것이며, 한 민족이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를 반대하면 하나님은 그 민족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여 더는 존재하지 않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지극히 거룩하고 존귀하며 지극히 높은 유일한 경배 대상이 되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여호와의 약속 가운데서 산 것처럼, 하나님이 태초에 만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산 것처럼 전 인류가 모두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나는 각 민족과 각 국가 심지어 각 분야의 사람들까지 모두 다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인류의 운명에 관심을 돌리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센 파도와 같이 호호탕탕하여 아무도 그를 만류하여 멈추게 할 수 없고 아무도 그의 발걸음을 제지할 수 없다.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과 그를 찾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만이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고 그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그 밖의 사람은 모두 치명적인 재앙과 마땅한 징벌을 받을 것이다.

【129-A-2】

방금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많은 진리를 발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인 우리가 다 알아야 할 진리이고, 갖춰야 할 진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죠.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 이 말씀 제목 자체가 바로 진리이고 사실입니다. 아무도 외면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 구절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사실이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진리라는 걸 믿습니다.”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그것은 다 사실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있고, 진리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진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상고해야 할까요? 만약 누군가 “전 이 말이 진리라고 인정합니다. 전 하나님의 이 말씀이 진리이고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왜 아니죠? 이건 깊이 생각해 볼 일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면 진리를 갖춘 걸까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다고 진리를 얻은 걸까요? 얻지 못했습니다. 얻지 못했다는 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에 진리가 없고,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본분을 하면서 원칙이 없고, 원칙을 운용할 줄 모릅니다. 셋째, 살면서 진리대로 살지 못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의 삶에 진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상 몇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은 했으나, 진리를 이해했고, 인식했고, 얻었다는 걸 대표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정했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정한 건 깨달은 게 아닙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얻은 건 아닙니다. 이런 걸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얘기할 수도 있고요!” 그러나 온통 글귀 도리 뿐이고, 그저 얕은 사유와 관념 뿐입니다. 그걸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물의 실질을 인식하는 수준에 도달한 걸까요? 잠재의식에 있는 걸 알고 있고, 장악하고 있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사람의 사유와 인식이 모두 잠재의식 속에 있다면 진정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 다 찾고 구해야 합니다. 찾고 구하면서 하나, 둘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경력하는 가운데서 진실로 깨우치고 더 많은 경력, 더 긴 세월의 경력, 오랜 시간의 경력을 통해 진리의 실질을 진정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돼야 진정으로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수년의 경력을 거치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잠재의식 속에 있는 그것이 아니라, 진리의 실제와 실질에 대해 알게 된 겁니다. 그때면 진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의 생명이 되고 사람도 자연스럽게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일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선택하고, 가는 길까지 다 진리로 결정할 것이고, 진리의 영향을 받아 효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뒤에 “저는 이 말씀이 진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묵상해 볼 것도 없이 벌써부터 알고 있었어요.”라고 합니다. 그건 또 어떤 사람일까요?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기고, 글자 표면의 도리와 뜻을 말할 수 있으니,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글자 표면으로 알게 된 것이 진실한 경력과 인식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경력 가운데서 인식하고 알아야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표면의 뜻으로 아는 건 그저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알려면, 반드시 경력하고, 교통을 하고, 늘 묵상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성령의 빛 비춤을 얻게 됩니다. 성령의 빛 비춤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빛 비춤을 얻게 되면, 진리의 실제를 깨닫기 시작하게 되고, 진리의 핵심과 실질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빛 비춤이 없으면, 그저 글귀 도리에 지나지 않는 얕은 것들만 알게 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리의 실제에 대해 교제를 하면 느낌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교통해 주시니까 실제적이라서 마음에 쏙쏙 들어오네요.” 그리고 누가 글귀 도리를 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틀렸어요. 당신이 말하는 건 글귀 도리뿐이라서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전 안 들을래요. 당신이 말한 것들은 저도 알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누가 진리를 정말 알고 있는지, 사실 서로 거울처럼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한다면 먼저 뭐부터 묵상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 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보세요. 이 말씀들은 전부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매 단락의 뜻은 전부 이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전부 한 효과에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효과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겁니다. 그럼, 인류가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경우, 어떤 효과가 나타나게 될까요? 전 인류가 참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하게 인정할 것이고, 동시에 참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아무도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나 국가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다 멸하십니다. 이건 사실이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셨고, 율법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대통령, 황제,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멸하셨습니다. 그 사실들은 역사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역사들이 전부 사실이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록된 사실들을 쓰셨는데, 어떤 효과에 도달하고자 하시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확실히 주재하고 계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런 걸 알지 못하고 “우린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잘 몰라요. 하나님이 대체 존재하시긴 한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그럼 인류의 역사를 찾아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대적했던 자들이 왜 전부 훼멸됐을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실들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요? 하나님께 대적했던 자들이 훼멸되었는데, 그럼 그건 누가 멸했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께서 멸하신 겁니다. 사람이 멸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오직 조물주만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분별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주재의 진실성을 증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성육신하셔서 구속 사역을 하실 때, 로마 정부와 유대교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께서 멸하셨는데,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됐죠.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끝이 오면 이스라엘은 다시 재건될 거라고 이스라엘에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적한 죄를 가만두지 않으셨고, 국가를 멸하는 벌을 주셨는데, 그것도 장장 2천년 동안 망국의 아픔을 맛보게 됐습니다. 여기에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적한 다른 나라의 결말을 볼까요? 고대 로마 정권은 하나님께 맞서면서 기독교인들을 약 300여년 가까이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결국엔 그 나라도 하나님께서 멸하셨습니다. 온 나라에 온역이 돌아 로마 제국의 사람들 열에 여덟아홉은 다 온역으로 죽어 나갔고, 거리마다 전염병으로 죽은 자들이 여기저기 널리게 됐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도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대적한다면 스스로 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께 대적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멸하십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시고 계신다는 걸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항상 사람은 대자연으로부터 왔고, 만물 역시 대자연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합니다. 대자연에는 주재자가 없고 전부 자연히 생겼다고 합니다. 그 말이 성립되나요? 자연히 생겨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그 어떤 것도 자연적으로 생기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진흙탕에서 모기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럼 진흙탕은 어디에서 생긴 걸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진흙탕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사람은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과학자들은 복제 양과 복제 소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득의양양해서는 “복제 양과 복제 소의 꿈을 실현한 다음, 우리는 사람을 복제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양과 소를 복제했나요? 실패했죠. 천지만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천지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 제목,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서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고 할까요?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수없이 몸부림 쳐보고, 시도를 해보고 나서 마지막에는 사람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 싶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각 사람의 운명은 전부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전부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업종에 종사하라고 정하셨으면 아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가면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의학, 괜찮죠, 밥 벌어 먹기 좋고, 병도 치료하고, 사람도 구할 수 있죠.” 근데 의대를 졸업한 다음 생각이 바뀝니다. ‘의학은 사람의 몸을 구할지 몰라도 생명과 영혼은 구하지 못해. 정치를 해야겠어.’ 보세요! 또 변합니다. ‘그럼 문학적인 일을 해야지. 글을 써야겠어!’ 그리곤 글을 쓰게 됩니다. 그 운명은 스스로 결정한 걸까요?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죠? 그러나 졸업을 한 뒤에는 생각이 바뀝니다. 계획은 늘 변화보다 빠르지 못하죠. 그건 뭘 말할까요?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운명을 주신다면 그게 사명인 겁니다. 사람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음악을 합니다. 실패해도 계속 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오랫동안 노래에만 매진하고, 또 수년간 실패의 쓴 잔을 마시고, 수년 동안 좌절을 겪으면서도 노래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운명이야. 어쩔 수 없어!” 마지막엔 끝내 노래로 성공합니다. 그게 바로 운명이 아닙니까? 어떤 이는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쓰다가 힘들어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안 돼, 안 쓸 수가 없어, 내 마음속에 담아둔 그 많은 말들, 반드시 써야 해!” 그리고 또 쓰기 시작합니다. 보세요! 어떤 이는 교사가 되어 수년을 강단에 섭니다. 싫어도 계속 가르칩니다. 누가 반대해도 또 가르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정해 주신 그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오게 되면 다 부탁을 하나씩 받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온 것은 바로 어떤 일에 종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습니다. 큰일을 하도록 정해진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황제가 되고, 어떤 이는 총리가 되고, 또 대통령이 되려고 이 세상에 옵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을 보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날 즈음, 주변 사람들은 죽기 시작합니다. 몇 년 뒤에 한 명이 죽고, 또 몇 년 뒤에 한 명이 죽고, 다 죽고 나면 그 사람도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됩니다. 그 주변 사람들이 사명을 다 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온 겁니다. 속담에 “윗사람이 바뀌면 아랫사람도 바뀐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겁니다.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이 그렇게 싸우면서도 이혼하려고 해도 이혼할 수가 없으니, 마지막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게 다 팔자야!” 그게 바로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부터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고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좌절을 만나고 환난과 핍박이 임하면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대체 세상이 왜 이래! 나라가 왜 이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박해할 수가 있지? 하나님을 믿는 게 얼마나 좋은데.” 몇 번이나 연약해지고 낙심도 하지만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마음이 괴롭기 그지없고 피를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믿겠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믿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알게 되죠. 이건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정하시고 택하신 거구나! 아무도 벗어날 수 없구나! 도망가도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돌아갑니다. ‘장사할 거야! 안 믿겠단 말은 안 해!’ 그런데 어딜 가나 밑지고, 어딜 가나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시기에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바보 같지?” 이게 바보 같은 일인가요? 이건 총명한 것도, 바보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겁니다. 바보 같다는게 뭔 말입니까? 지금 그렇게 핍박받고 있는데도 그 사람들은 계속 따르면서 믿고 있습니다. 그걸 바보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갖은 핍박을 다 받고, 온갖 고난을 다 감내한 뒤에,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게 바보스러운 걸까요? 그건 대단히 총명한 겁니다. 보세요, 어떤 게 바보 같은 것이고, 어떤 게 총명한 것인지는 결과와 결말을 근거로 정해지는 겁니다! 일시적인 육체적 고통과 수모를 얼마나 받았느냐로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과와 무관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129-A-3】

사람이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효과에 도달하게 될까요? 첫 번째 효과는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께 부복하여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과는 더 이상 자신의 명리를 위해 분투하지 않고, 육체의 향락을 탐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효과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서 자신이 서야 할 위치를 찾고,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하면서 인생의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효과가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진정으로 알게 된 후에 도달하게 되는 효과가 맞나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나서 “알아요! 다 알겠어요! 어렵지 않고 이해하기 쉬워서 금방 알 수 있네요.”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왜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까요? 사람이 인식한 것에 이 세 가지 효과가 없다면, 정말 깨달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진리는 사람을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사람에게 진리로 인해 도달해야 할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죠. 진리의 글자 표면의 뜻을 아는 것으로는 정말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글귀 도리에 불과하고, 진리의 겉면만 아는 것으로 진실된 경험과 인식이 있다는 걸 대표하지 않습니다. 교계의 많은 목사들이 성경을 강해하는 걸 보면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사람에게서는 아무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 성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악을 멀리하는 최소한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 걸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진리를 폄하하는 것이며, 진리에 대한 모독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효과가 따라오게 됩니다.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여전히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옛 사람입니다. 일을 대하는 낡은 관점과 사탄의 낡은 논리만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는 조금도 순복하지 않고, 진실되게 경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만 인정하는 정도에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그것은 기만이고 외식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글귀 도리를 조금 알아가지고는 여기저기서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다가 마지막에는 정죄받고, 성령의 역사를 잃게 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짓 인솔자, 거짓 목자가 돼 도태됐죠. 왜 도태됐을까요? 진리를 멸시하고 경시하고 모독하고 우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겁니다. 진리를 눈으로 대충 한번 훑어 본다고 다 알게 되는 걸까요? 그게 진리일까요? 인간 세상의 지식처럼, 책 두 권만 읽으면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모두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깨닫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려야 할까요? 네, 그 누구도 단정하지 못합니다. 그럼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 경력을 해야 할까요? 본인 스스로 운명은 자기 손에 있는 게 아니라 확실히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걸 느끼고, 경력을 통해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확실히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이 사실을 보게 되면 바로 정복된 것입니다. ‘그래, 완전히 인정하는 거야! 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 앞에 순복할 거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거야! 내 자신의 명리, 지위, 앞날을 위해서는 어느 것도 계획하지 않을 거야! 오직 하나님만 따르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갈 거야! 내가 해야 할 본분을 잘 하면 마음이 편안한 거야! 이게 사람의 본분이니까! 이제 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 수 있게 됐고, 드디어 하나님 앞에 순복하게 됐구나!’ 그때가 되면 정말 진리를 깨달았고, 정말 변화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까지 경력을 해야만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귀 도리를 이해한 걸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착각하는데, 그건 너무 얕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우리가 몇 년 정도 경력할 수 있을까요? 몇 년을 경력해야 제가 좀전에 말씀드린 그 몇 가지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야심과 욕망과 포부를 다 내려놓은 겁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달아 얻은 효과이고, 진리를 깨달아 생긴 변화입니다. 아직도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어서 “그건 모를 일이야. 한 번만 더 해보고, 또 실패하면 그때 인정할 거야! 그때는 인류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걸 인정할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걸까요? 한 번 더 뭘 해보겠다는 건,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게 진리를 아는 걸까요? 그런 교만한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고, 특히 어려움이 임했을 때는 더욱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고 이전부터 말해 왔습니다. 이 말이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어려움에 부딪쳐도 진리를 찾고 구한다는 거예요? 그럼 기근이 임하게 된다면 어떤 진리를 구해야 합니까? 딱 한 가지 진리일 뿐인데요, 밥을 못 먹으면 배가 고프고, 밥을 못 먹으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며칠 굶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이 진리만 알 수 있지, 다른 진리는 알 수 있나요? 또 무슨 진리를 찾고 구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구한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구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일이 임하면 진리를 찾고 구한다고요? 전 그 말이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무슨 진리를 구한다는 거죠? 누군가 대학입시에 떨어졌다면, 그건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거잖아요! 다른 게 뭐가 더 있어요? 노력했는데 합격 못할 리가 있겠어요? 노력을 안 했으니까 떨어진 거죠. 그게 사실이고 그게 진리인 거죠.” 이런 말이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이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배부르게 먹을 줄밖에 모릅니다. 짐승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셨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패역한 말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교통하겠습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찾고 구할 진리가 도대체 있는지 없는지, 진리가 도대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해서 교통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일에 관해서 봅시다. 다들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경력하고 있는데, 어떤 일이 닥치게 되어 거짓말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후 반성하면서 “이건 아니야! 내가 거짓말을 했어!” 얼른 찾아가 사과합니다. “제가 좀 전에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제 맘은 사실 이런 거였어요. 정정할게요.” 그럼 상대방은 “성실한 사람이 되면 뭐가 좋은데요? 성실한 사람이 되면 안 죽는대요? 성실한 사람이 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답니까? 못 믿겠네요.”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멍청한 사람들은 ‘어? 이방인들의 말도 실제적이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게 진리일까? 정말 진리가 맞나? 진리가 존재하긴 하나?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면 좋은 결말이 있나? 대체 상이 있나? 정말 잘 모르겠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계속 성실한 사람이 돼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힘이 풀립니다. 김이 샙니다. 그건 무슨 문제일까요? ‘진리라는 게 대체 존재하나?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걸까? 대체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시는 것이 맞긴 할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에 따라 실행하면 도대체 어떤 결말이 있게 되지? 하나님은 어떻게 대해 주실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긴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시험에 들게 되고, 이렇게 곤혹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실패하고, 실행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서 정말 이런 시험이 들고 곤혹스럽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어떤 원인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지, 그 문제를 가지고 교통해 봅시다. 문제의 근원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누가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이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말씀 한 마디에 있습니다. 이 진리를,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실행할 자신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진리를 실행해도 힘이 나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고, 어려움도 너무 클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해도 마음속에서 벌써 그 결과부터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 이 문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사람에게 있는 사탄 논리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 집에서는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통하고 진리를 교통한 후에는 진리를 실행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럼 “제가 진리를 실행하면 어떤 이득이 있죠? 실행하고 나면 뭘 얻을 수 있어요? 뭘 보장할 수 있어요? 서명이라도 해 주시는 건가요? 서명이라도 해 주신다면 제가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을 때, 배상해 주시고 보상해 주셔야죠. 저는 지금 이득이 보이지 않습니다. 실행한 후에 불이익을 보게 될까 두려워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에게 붙잡혀 취조를 당하면 처음에는 굽히지 않습니다. “난 당신들 말 안 들어!” “안 들어? 고문해!” 고문을 한바탕 들이대면 아파서 소리지릅니다. “항복! 항복! 다 말할게요!” 그리고 낱낱이 다 털어놓습니다. 왜 다 말한 겁니까?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자백할 수밖에…… 견뎌낼 수가 없었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지켜 주십시오. 저의 육체가 더 이상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전 유다가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절 구해 주세요! 유다가 되지 않게 지켜 주세요.” 2, 3일을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역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합니다. “됐어요! 전 기도했어요. 당신께서 역사하지 않으셨고 초자연적인 일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이 저를 고문하는 것도 막아 주시지 않았고요. 그럼 전 유다가 될 거예요.” 이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 진리를 실행하는 데 이렇게 큰 대가를 치러야 돼요? 전 그런 대가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그렇게 큰 대가를 치러야 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면 누가 뭐래도 전 안 할 거예요! 전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래요.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실행하는 대가가 너무 큽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가잖아요. 누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지한 자의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그럽니다. “아니에요! 성실한 사람이 되는 데는 그런 대가가 필요 없어요. 기껏해야 한 번 모욕을 당하고 바보란 소리 듣겠죠.” 하지만 진리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그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하라고 요구하신 건 많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해야 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간증을 굳게 서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런 것도 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으로서 최소한 갖추어야 할 진리죠. 그런 진리들을 정말 다 실행하자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되는지 모릅니다! 이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중국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는 대가도 치러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는다 해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는 것조차도 안 됩니다. 참 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만 하면 다 정죄되고 다 사교로 단정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하나님을 믿으면 바로 반혁명으로 몰렸습니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습니다. 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이 되면서 정치적인 비판은 하지 않았으나, 어떤 죄명을 덮어씌웠죠? “사교 신도”, “사회 치안 교란”, “국가 정권 전복 도모” 등등 몇 가지 죄목을 씌웠습니다. 죄목 하나만으로도 몇 년을 감옥에 보낼 수 있고, 또 죄목 몇 개를 합치면 평생을 옥살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면서 진리를 실행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정말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 그런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럴 만한 배포가 있으신가요? 그만한 믿음과 배포도 없다면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지 아십니까? 민주주의 국가의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을 것 같습니까? 정말로 진지하게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똑같이 관여하고 따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해 발표하신 말씀 뿐이죠. 성육신을 통해 발표하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성품인데, 곧 진리입니다. 사람이 접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 본 적 있어요?” “없어요.” “그럼 뭘 봤는데요?” “전 하나님이 발표하신 말씀이 모두 진리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그걸 실행할 수 있나요?” “글쎄요, 몇 년을 경력해 보니까, 저는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걸 체험했어요! 왜냐면 정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실행하려면 고난도 받고, 박해도 받아야 하고, 인류에게 버림도 받아야 하고, 비웃음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죠!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리를 접하게 되면 사람은 어렵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는 봤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말씀만 먹고 마시고 또한 이런 말씀만 인식하게 하는데, 이런 말씀들을 잘 먹고 마시고, 잘 깨닫게 된 다음 계속 경력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또한 우리가 직접 보고 경력해 온 것입니다.

【129-A-4】

하나님을 그 정도까지 믿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가족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세요. 제가 하나님을 몇 년 믿고 보니까,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세요!”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해 자신이 행하셨던 일들, 전 인류가 알지 못한 일들을 전부 밝혀 주셨어요. 그건 전부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네요” “더 있어요! 이건 하나님이 음성을 발해 하신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면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건 사람이 한 말이잖아요.” “사람의 말? 그럼 당신이 말해 보세요. 한 글자라도 말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보고 말해 보라고 하세요. 전 인류를 다 모아 놔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지 아닌지 아실 거예요!” “당신이 지금 하나님이 발한 음성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실을 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니까 믿기네요. 신빙성이 높아요, 간증도 있고요! 근데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얻은 성과가 이것밖에 없어요? 정말 이것밖에 없다면 곤란한데요.” “더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긍휼과 자비 뿐만이 아니라 확실히 공의와 위엄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거스르면 정말 죽게 돼요. 반드시 죽죠!” “아, 당신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인식이 있는 걸 보니, 믿음이 큰가 보네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경력해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됐어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지도 정확하게 알게 됐고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는지, 어떤 사람을 훼멸하시는지도 똑똑히 봤어요.” “그럼 하나님의 얼굴을 봤어요?” “아니요, 이런 걸 아는 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당신이 이런 걸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모습을 봐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당신이 얻는 건 저보다도 적을 거예요.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끌려 하늘나라로 가서 천당도 보고 지옥도 두루 돌아보고 주님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눴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나요? 알지 못합니다.” “주님을 만났는데, 왜 모를까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주님을 봤을 뿐, 주님이 진실하다는 것만 시인하고 주님과 그저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주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고 수많은 시련과 연단 속에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겪어야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만 온전케 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에게 이런 인식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있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인식이 있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대체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죠?” “그건 쉬워요.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무소부재하시고, 우주 공간에 충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사람들 가운데서 거닐고, 실제적으로 말씀하시고, 실제적으로 역사하세요. 이게 다 하나님 영의 직접적인 발표예요.” “그럼 당신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진 거네요. 하나님과 좀 마주한 것 같아요.” “그럼요! 이런 게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경력하면서 도달한 효과예요. 저는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면서 저에게 있던 패괴 성정과 사탄의 철학, 사탄의 논리, 사탄의 인생 법칙 같은 걸 이미 많이 벗어버리게 됐어요. 진리가 맘속에 굳건하게 자리잡고 튼튼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요. 어떤 진리는 이미 제 생명이 됐어요. 아무도 빼앗지 못해요.” 이런 말들은 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경력하면서 도달하게 된 효과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이 정도까지 경력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까요?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고, 간증도 많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적이 된다면 반드시 훼멸된다는 것도 보게 됐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현재 큰 붉은 용이 천지를 뒤엎을 기세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선민을 잔인하게 해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 말씀과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큰 붉은 용을 어떻게 대하실지,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해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한번 볼까요?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정말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일을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지금 큰 붉은 용이 그렇게 잔혹하게 탄압하고 광적으로 박해한다고 해서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있다면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박해할 때, 천지를 뒤엎을 기세가 보이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해를 가리며 암담하다 해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큰 붉은 용아, 네 놈은 이젠 곧 끝장이야. 네 놈의 결말은 하나님께 훼멸되는 거야!” 그래서 전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서 주재하실까? 정말 주재하신다면 큰 붉은 용이 그토록 미친 듯이 날뛰는데, 왜 벌하지 않으시지? 하나님께서 친히 저 녀석들의 이를 다 뽑아버리고, 손에 든 무기를 해제시키고, 친히 그 머리를 박살내야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신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어떤가요? 그런 것은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실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지혜는 사탄의 궤계 위에 있노라” 큰 붉은 용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만세 전에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예언을 하셨고, 그 이후의 일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2천 여년 전에 요한이 밧모섬에서 이 기이한 현상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 사실들을 말씀하셔서 먼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실대로 이루어졌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부 이루어졌다는 걸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정한 첫 번째 진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입니다. 전 인류의 운명은 전부 하나님께서 안배하고 주재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증명되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군가 하나님의 많은 예언이 적중한 것을 보고도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그대로 적중했는데, 하나님을 칭송하지도 않고 찬양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면, 어리석은 자나 불효자가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인정합니다. 그런데 큰 붉은 용이 와서 하나님의 선민들을 잔혹하게 박해하면 또 오리무중에 빠지고 맙니다. 성경에 기록된 일들은 인정하면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사람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까요? 성경의 글귀 도리만 알고 현실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고 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글귀만 알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돔성이 훼멸당한 사실을 보고 말합니다. “큰 붉은 용의 국가, 중국도 반드시 저렇게 훼멸당해야 돼요.” 이 말은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을까요? 조금 있습니다. 종교 바리새인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 세상은 지금 어느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말세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대 재난이 곧 임박했습니다. 아닙니까? 대 재난까지 몇 년이 걸릴까요? 이 인류가 철저히 끝나고, 천년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까지 몇 년이 있어야 할까요? 그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대단한 겁니다. 여러분은 꿰뚫어 볼 수 있으세요? 우리는 비록 그 일을 꿰뚫어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이 있고 인식이 있습니다. 이건 그것과 다른 것이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 재난이 시작되어서부터 인류가 하나님께 철저히 멸망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지 우리는 간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져야 하고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이죠. 정말로 추구한다면 사람은 더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고, 얻게 되는 것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바로 이런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말세의 마지막 단계에 7년 대 재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전의 작은 재난은 몇 년이 될까요? 모릅니다. 대 재난이 임박했다는데, 몇 년 있어야 그 재난이 올까요? 그것 역시 모릅니다. 한마디로 재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시작되어서 총 몇 년이 걸릴 지는 모릅니다. 최소 몇 년일까요? 적어도 10 여년입니다. 마지막에 7년의 대 재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7년 이전에는요? 그때도 재난이 아닌가요? 맞나요? 그것은 바로 7년 대 재난이라 하면, 그 시일이 7년이 아니란 걸 증명합니다. 몇 년을 지속하게 될 지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10 여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재난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하고, 앞으로 10 여년은 좋은 날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예 7년의 대 재난이 와서 패괴된 세상을 철저히 훼멸하시면 될 거 아니에요!” 이 말이 맞나요? 하나님은 원칙 있게 역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기에, 각종 재난을 내리셔서 일부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연단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온전케 하십니다. 따라서 살아남게 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진실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재난을 내리셔서 이방인들과 악인을 바로 멸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재난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재난은 이중의 사명을 가지고 있고 여러 방면의 효과에 도달하려고 하기에, 재난이 지속되는 시간이 더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민들을 어떤 환경에서 온전케 하신다고 하셨죠? 바로 재난 전에 한 무리의 이긴 자들을 만들고, 재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민들을 온전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수년의 재난을 겪어야 하고 구사일생의 경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사일생입니다! 구사일생이란 무슨 뜻일까요? ‘구사’, 숫자만으로 보면 아홉 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홉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명이 참 깁니다! 구사일생으로 마지막에는 살아납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게 될까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게 됩니다. 육체의 패괴는 모두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게 바로 구사일생을 경력하여 도달한 효과입니다. 재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재난 속에서 교계의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의 자민들은 재난 속에서 온전케 되는 겁니다. 또한 재난 전에는 한 무리 이긴 자들을 만드시는 겁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다 기록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이 진리 속에는 앞으로 닥칠 재난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연단하시고, 온전케 하시는지에 대한 일들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난을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멸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시는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셨죠!

【129-A-5】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전 인류를 주재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더 많아지고, 믿음이 작아지고, 시험이 많아지고, 심지어 그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교통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을 갖춰야 될까요? 바로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런 실제를 갖추고, 그런 실행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찾는 사람입니다.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전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할 줄 몰라요! 본분이 임하기만 하면 어려워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갈피를 못 잡겠어요. 찬양을 부르는 것도 원칙이 있어야 하고, 춤을 추는 것도 원칙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건 더 원칙이 있어야 하니……, 복음 전하는 거야 전하면 되지, 무슨 원칙이 그렇게 많대요? 그것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전해야 되고, 인성이 좋은 사람에게 전해야 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뭐, 이마에 써놓지 않은 이상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제가 봤을 때, 사람이면 그냥 전하면 돼요! 그럼 얼마나 간단해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찾고 구할 줄 아는 걸까요? 소질이 너무 부족한 겁니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건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지는 거죠? 반드시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존재하는 문제점, 애로사항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다음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되는 겁니다. 만약 실제적인 어려움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는 글자 그대로의 뜻만 묵상한다면 진리를 알 수 있을까요? 그런 걸 탁상공론이라고 합니다. 실제와 결부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죠? 왜 인성이 좋은 사람에게만 전해야 되죠?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도 있으시고 전능하시잖아요!”라고 합니다. 맞는 말일까요? 진리는 어떻게 찾고 구해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다. 평판이 좋고,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는 사람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쉽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교적 순종을 잘하고 정직한 편이어서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계속 방해하거나 부질없는 일을 만들거나 소란을 피우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 원칙에 따라 전도를 한다면, 전도된 대다수는 하나님께 구원될 사람들이지, 들어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훼방만 놓다가 나중에 도태되는 사탄 마귀들은 아닙니다. 보시면, 어떤 사람은 듣자마자 “그러네, 하나님 집의 이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딱 맞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에게 전도하는 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되는 거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만 구원하신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너무 깊이 패괴된 거고, 믿어야 좋게 변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그릇되고 전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어떤 일이든 다 상대적으로 봐야 합니다. 패괴된 인류에게 패괴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차이는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시인하는 자와 부인하는 자의 차이도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차이도 있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진리를 거절하는 차이도 있지 않은가요? 그런 차이가 있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하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겁니다. 여러분이 행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원칙에 따라 일을 한 겁니다. 일을 원칙에 따라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 하나님께서 딱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다 하나님 앞으로 데려온다면, 그것이 바로 본분을 합격되게 하는 겁니다. 합격된 본분을 했다면, 그것은 또 선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억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시인하는 사람들을 많이 전도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중에 열에서 여덟 명은 다 구원받을 수 있고, 2~3년 교회 생활을 한 뒤에,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거듭난다면, 나중에 그 사람들은 감지덕지할 겁니다. “다 당신이 저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덕분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들어올 수 있었겠어요? 제가 어떻게 이렇게 큰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어요?”라고 할 겁니다. 그럼 여러분도 마음이 아주 흡족하고 기쁘겠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알아볼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좋은 물고기, 좋은 양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건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게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전하는가 하면, 악마를 데려오고, 악령을 데려와 교회 사역을 방해만 시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민들이 수많은 해를 당하게 되고, 다들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바로 저 사람이 그 화근을 전도했대요. 저 사람이 우리를 해친 거예요!” 사역을 하면서 복음 전하느라 그렇게 열심히 힘을 썼는데, 좋은 결과를 얻게 됐나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원칙을 어기고, 성령의 인도에 순복하지 않고, 함부로 전했기 때문에 죄업을 쌓은 겁니다. 악을 행하게 된 거죠.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찾고 구함에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의 뜻에 더 맞을까요? 그런 일에서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를 보고, 그런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아, 그렇게 말하니까 알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요?” 그건 그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그런 일을 담아두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늘 그런 일들을 염두에 두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그런 일들을 찾고 구한다면,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서 더 빨리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진실하지 않습니까? 진리는 모든 일에 다 존재합니다. 많이 찾고 구하면 많이 얻게 되고, 적게 찾고 구하면 적게 얻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에, 모든 일에 다 찾고 구할 진리가 존재합니다. 진리는 모두 진실로 존재하는 거지, 찾지 않으면 진리 역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면 진리가 나타납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전혀 찾고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진리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에도 진리가 존재해요? 그런 일은 제가 보기엔 이렇게 된 거 같아요.” 하면서 진리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찾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전 찾고 구해 봤어요. 책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서민들도 그렇게 말하고, 지식인들도 그렇게 말했고, 명언에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건 다 진리이고, 다 사실입니다.” 이러는데, 그 말이 맞나요? 어떤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꿰뚫어 볼 수 있나요? 불신파만이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에서는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이 화를 당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세상의 조류를 따르는 것에 관해 진리를 말해 보세요.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조류가 틀린 거라면, 어떻게 조류가 될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걸 따를 수 있죠? 그건 어떻게 된 일이죠? 설명 좀 해보세요!”라고 합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찾을 줄 아십니까? 또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은 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거죠? 왜 그토록 세력이 큰 거죠? 진리가 어디 있어요? 교통해 보세요!”라고 합니다. 그런 일을 교통하기 쉬울까요?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런 일에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든 다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다는 겁니다. 진리의 존재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느냐 찾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찾고 구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면, 진리가 우리를 향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를 보게 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도 불공평한 대우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큰 붉은 용이 집권하는 게 도대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이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안배에서 비롯된 거죠.” “그럼 우리는 큰 붉은 용에게 순복해야 하나요, 순복하지 말아야 하나요?” 이 일을 가지고 오랫동안 찾고 구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순복하지 않으려니 그들이 정말 가만두지 않지, 순복하려니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마음은 더 흑암에 빠집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이 있습니까? 지금 진리를 찾고 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부모님은 아주 보수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분들이세요. 똑똑하고 지식도 갖추셨어요. 그분들이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면 전 어떻게 해야죠? 하나님을 믿어도 부모님께 효도는 해야 되잖아요.” 이 일에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찾고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모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건 진리가 아닌가요? 그럼 부모에게는 어떻게 하는 게 합당할까요? 효도하는 책임을 지면 되는 겁니다. 왜냐면 부모는 진리가 아니고,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탄에 속한 사람인 겁니다. 사탄에 속한 사람이라면, 사탄이든 부모든, 아니면 부모의 조상이든 다 순복해서는 안 됩니다. 경배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게 진리 아닙니까? 왜냐면 하나님은 “전 우주 아래의 사람들 중 무릇 마귀에 속한 사람은 다 멸절된다. 무릇 사탄을 경배하는 사람은 다 나의 불사름 속에서 넘어지게 되는데, 지금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 타서 잿더미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됐습니다. 이렇게 교통하면 그 사람은 “아, 그러고 보니 그 일에도 정말 찾고 구할 진리가 있었네요. 그 말대로라면 범사에 찾고 구할 진리가 있는 거네요.”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범사에 찾고 구할 진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거리에서 책 파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손님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 믿으세요? 저한테 전능하신 하나님의 책이 있어요.’라고 얘기하던데요.” 이 일에는 찾고 구할 진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역시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이 온 겁니다. 낚으러 온 겁니다. 누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찾고 있는 거죠. 이렇게 범사에 찾고 구할 진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한다면, 자연히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존재를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 정확한 선택을 하게 되고, 바른길로 나아가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구하는 일에는 찾고 구할 진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자녀를 교육하는 건요? 대체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는지, 진리와 미신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런 일들에는 다 찾고 구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일에 대해 우리가 너무 많이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실들을 시인했으니까요.

【129-A-6】

진리를 찾고 구하면 도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효과와 유익을 가져다줄까요?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 중요하죠!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건 쉬워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진심으로 찾고 구한다면 정말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근데, 진리를 알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힘들어요. 찾고 구한 후에 실행하지 못하는데, 그럴 거면 진리를 찾고 구해서 뭘 할까요? 찾고 구할 필요가 있나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 원인이 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찾고 구한 뒤에도 저는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겠어요. 진리를 실행하기가 무서워요. 하나님을 믿는 건 괜찮아요.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도, 힘을 내는 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저에게 진리를 실행하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진리를 실행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진리를 실행하라는 말만 들으면 막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그저 일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만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동원하여 효력하게 한다고 하신다 했더니, 별별 효력자가 다 왔습니다.

우리, 이 일을 가지고 말해 봅시다. 여러분은 예전에 열성적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화비하고 효력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조금이라도 진리에 흥미가 생겼나요? 그 방면에서 진보가 조금 있으신가요? 처음 믿었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죠? 그게 바로 진보입니다. 처음 믿었을 때는 일하기만 좋아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열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정말 진리도 알아야겠더라고요. 안 그러면 그릇된 길로 나아가 쉽게 악을 행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도 진리를 아는 게 좋아요. 하나님 집에서 교통하는 게 맞아요.” 이제 인식이 좀 생긴 거죠. 이건 뭘 설명할까요? 어린아이가 컸습니다. 철이 좀 든 겁니다. 그렇죠? 여러분의 실제 분량은 인생으로 따지면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15~16살 정도? 아니면 17~18살? 아니면 20대인가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마 네다섯살 정도일 거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뇨, 전 15살 정도일 거에요. 웬만한 일들은 다 알아요. 어쨌든 진리와 진리의 실행,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에 흥미가 좀 있긴 한데, 그렇게 크지는 않아요. 뭘 좀 하라고 하면 육체적으로 고난받는 건 괜찮아요. 할 수 있고 물러서지도 않죠.”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몇 살 정도 될 것 같습니까? 17~18살 아니면 20대일까요? 어느 연령대인 것 같습니까? (15~16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발전했죠? 고난을 받겠다는 심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진리를 추구하면서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까지 한다면 정말 커서 어른이 된 겁니다. 분량이 자라지 않을까 봐 걱정할 건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향상하다 보면 성장도 빠를 것입니다.

지금 보시면 하나님 집의 설교 교통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진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합니다. 흥미가 없다면 듣기 싫어할 겁니다. 듣다가, 졸다가, 자다가, 또 듣다가 잡담이나 하게 됩니다. 몇 번 듣고 나선 안 듣겠다고 합니다. 누군가 다시 설교 교통을 듣자고 부르면 “아, 일이 있어요. 당신들끼리 가세요.” 합니다.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 저건 실제적이야, 저건 나도 좀 경력해 봤어, 저건 나도 좀 체험해 봤어.” 그런 사람은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는 말도 실제적이 되었고, 들으려고 합니다. 이건 뭐라고 할까요? 그런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몇 년 정도 믿어야 설교 교통을 듣기 좋아하게 될까요? 제가 하는 설교 교통은 유머스럽지도 않고 문학적인 색깔도 없습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근데 왜 다들 듣기 좋아하는 걸까요? 바로 진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실제적이고 진실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교통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 교통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또한 완전히 깨달을 수 있고, 알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어려움이 많을까요? 그렇게 많진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의 말씀에 대해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알겠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라고 말한다면 알게 됐다는 겁니다. 그런 게 진보한 게 아닙니까? 설교 교통을 듣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까지, 그 과정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경로가 아닌가요? 언젠가 교회 생활이 없을 때에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생명 경력에서 어느 단계에 속하는 걸까요? 바로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더 이상 젖먹이 아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성장한 것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까? 상면의 설교 교통 듣는 걸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그냥 귀담아 듣고, 예배를 즐기고, 듣기 원하는 거잖아요? 그걸로 뭘 설명할 수 있겠어요?”라고 하겠지만 틀렸습니다. 그것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 상면의 설교 교통을 듣지 않아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어요.” 합니다. 적그리스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정말 깨달았을까요? 정말 도달했을까요?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의 실제가 전혀 없습니다. 정말 진리의 실제가 있었다면 하나님 집에서 그 사람을 출교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상면에서 출교시키기로 결정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민들이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은 “그 사람에게는 정말 진리의 실제가 있어요. 진심으로 회개했어요. 우린 출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손들지 않겠습니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진리가 주권을 잡고, 하나님 말씀이 주권을 잡고, 그리스도가 주권을 잡습니다. 더욱이 성령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실천 경력 속에서 어떤 공과를 배우셨나요?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첫 걸음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확실히 많은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했습니다. 또한 진리는 모든 일에서 정말 찾게 되고 구하게 됩니다. 매번 선택과 관련된 순간에 진리를 찾을 수 있고 구할 수 있습니다. 매번 곤혹스럽거나 어둠 속에 살고 있을 때,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무소부재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는 것이고,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진리가 확실히 존재하는 만큼, 우리는 진리를 찾은 다음, 또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리를 실행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의 이론과 진리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않고 실행의 길을 찾지 않는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까요?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진리가 있다는 것만 인정하고 “우린 진리에 어긋나서는 절대 안 돼요.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그럴까요? 정말 그렇게 간단할까요? 어떤 일은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일은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붉은 용의 권세하에서 그들에게 붙잡혔다고 합시다. 거기서 ‘내가 배반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돼.’라고 한다면 성립될까요? 큰 붉은 용이 이가 부러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때린다면,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진리를 실행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대가를 치르는 원인도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리와 돈을 위해, 어떤 사람은 허영심과 체면을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자녀를 위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위해, 어떤 사람은 우상이나 보배를 위해 대가를 치릅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단지 진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이나 어떤 상을 받기 위한 게 아니라,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적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일을 하나 돌이켜 봅시다. 율법시대에 아브라함은 그러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항상 남에게서 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다른 사람들도 와서 자리를 잡고 그곳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고 “여기를 빼았겠다? 좋습니다! 양보할게요! 우리가 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과 똑같이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우리 주인님은 정말 나약해서 맨날 당하기만 하시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많은 재산을 강도에게 약탈당해 아브라함을 찾아 갔습니다. “되찾을 수 있도록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네, 제가 돕겠습니다.” 가서 되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찾을 수 있게 도와주셨으니, 당신에게 보상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싫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풍족하게 해줬어’라고 말할까 봐, 당신의 물건은 신발 끈 하나, 땡전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두 가지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아들이고, 제가 평생을 살면서 이제 겨우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시면 바쳐야지. 아들을 안 바치면 어떻게 되고, 바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이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어. 아무튼 하나님께서 내게 바치라고 하셨으니 그럼 바쳐야지! 이득을 바라지 말자!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다시 달라고 하시는 것도 당연한 거야! 바쳐야지!” 하나님은 그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쳤습니다. 결국, 바쳤지만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나이다. 그걸 바라고 바친 것도 아니나이다. 근데 하나님께서 절 축복해 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을 바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그런 일들을 했을까요? 뭘 위해서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인성과 양심, 그리고 이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저 기준이자 원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브라함의 기반을 빼앗으려고 할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것이라고 말하는데, 너무 억지스럽지만 난 당신과 싸우지 않겠네! 양보할게. 내가 다른 곳으로 갈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내가 돕겠소. 하지만 상은 주지 마시오. ‘아브라함을 풍족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소. 나도 기개가 있소. 내가 먹고 쓸 것은 내 손으로 벌 거니까! 당신의 베풂 같은 건 필요 없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상은 바라지 않소.”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까닭은 뭘까요? 속셈이나 뒤섞임이 있었나요? 그건 아브라함이 일을 행하는 데의 최저 기준이었고, 사람으로서의 원칙이었습니다. 일을 행하는 데에 최저 기준이 있었다는 건 아브라함에게는 원칙이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원칙을 뭐라고 여겼을까요? 바로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그렇게 처신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 겁니다. 그렇게 처신하는 게 참된 길이고,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29-A-7】

지금 우리 말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실행하기 전에 우선 거래부터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슨 득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이익에 눈먼 사람이 아닙니까? 늘 무슨 이득이 있는지, 어떤 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따집니다. “아무런 이득도, 복도 없다면 안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건 고생스럽고 힘들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지금 어떤 사람은 일하러 가면서 ‘내가 본분을 할 수 없게 되니, 일을 하라고 하네. 또 시간 남으면 복음 대상 찾는 본분을 하라고 하는데, 난 안 해! 나 보고 일하라고 했으니까 끝까지 갈 거야. 상관 안 하고, 본분도 안 하고, 돈 벌어서 결혼할 거야! 혹시 여기 외국에서 현지인 만나서 애라도 낳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 이런 생각이 어떻습니까? 사람됨의 최저 기준이 있습니까? 사람됨의 원칙이 있나요?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하라고 할 수 있고, 내일은 본분하라고 할 수 있고, 모레는 또 위험한 일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본분이 그 사람이 하기에 적합하면 교회에서 형제자매를 보내 묻습니다. “자매님, 본분에 협력하실 수 있나요?” “아, 안 할래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좋습니다, 그럼 하지 마세요,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상 어떤 일이 일어난 거죠? 그 사람은 순복하지 않았고, 반항하는 뜻이 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효자이고 대역무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포기하고 도태시키십니다. 외국에 나오긴 했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본분을 할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라고 하고, 여가 시간에 복음 대상을 찾는 본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근데 순복하지 않는 순간, 그 사람의 인품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 일은 사람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배반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어! 이렇게 하는 게 진리에 맞다면, 좋아! 이번엔 진리를 실행하겠어! 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일입니다. 그 일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일하라고 하고, 내일은 본분을 하라고 하고, 모레는 다시 일을 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반응을 보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고,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 안배되고 어떻게 바뀌어도 불평 없습니다. 순복하겠습니다.” 보세요, 바로 이렇게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역사와 안배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바로 이렇습니다.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일로 사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지금 우리 말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실행하기 전에 우선 거래부터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슨 득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이익에 눈먼 사람이 아닙니까? 늘 무슨 이득이 있는지, 어떤 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따집니다. “아무런 이득도, 복도 없다면 안 할 겁니다. 그렇게 하는 건 고생스럽고 힘들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지금 어떤 사람은 일하러 가면서 ‘내가 본분을 할 수 없게 되니, 일을 하라고 하네. 또 시간 남으면 복음 대상 찾는 본분을 하라고 하는데, 난 안 해! 나 보고 일하라고 했으니까 끝까지 갈 거야. 상관 안 하고, 본분도 안 하고, 돈 벌어서 결혼할 거야! 혹시 여기 외국에서 현지인 만나서 애라도 낳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어!’ 이런 생각이 어떻습니까? 사람됨의 최저 기준이 있습니까? 사람됨의 원칙이 있나요?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해야 합니다. 오늘은 일하라고 할 수 있고, 내일은 본분하라고 할 수 있고, 모레는 또 위험한 일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본분이 그 사람이 하기에 적합하면 교회에서 형제자매를 보내 묻습니다. “자매님, 본분에 협력하실 수 있나요?” “아, 안 할래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좋습니다, 그럼 하지 마세요,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상 어떤 일이 일어난 거죠? 그 사람은 순복하지 않았고, 반항하는 뜻이 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효자이고 대역무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포기하고 도태시키십니다. 외국에 나오긴 했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본분을 할 사람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라고 하고, 여가 시간에 복음 대상을 찾는 본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근데 순복하지 않는 순간, 그 사람의 인품이 드러나게 된 겁니다. 그 일은 사람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배반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어! 이렇게 하는 게 진리에 맞다면, 좋아! 이번엔 진리를 실행하겠어! 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일입니다. 그 일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일하라고 하고, 내일은 본분을 하라고 하고, 모레는 다시 일을 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반응을 보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고,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 안배되고 어떻게 바뀌어도 불평 없습니다. 순복하겠습니다.” 보세요, 바로 이렇게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역사와 안배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복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바로 이렇습니다. 아주 간단한 한 가지 일로 사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가끔 어떤 사람들을 아주 엄하게 대처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악마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 괴로워합니다. 저녁이 되면 계속 생각합니다. ‘그건 형제님이 말한 거 맞지? 그래 맞아. 하나님이 하신 걸 대표할까?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다면 큰일 났네. 날 마귀라고 했는데,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 말은 형제님의 개인 생각이었으면 좋겠어. 형제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을 대표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그럼 희망이 있어.’ 이건 진리를 찾고 있는 걸까요? 그 사람은 자꾸 내막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거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악마라면 난 끝장이야. 내 운명과 결말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네.’ 이 사람은 생각하는 근원 자체가 틀렸습니다. 그저 자신의 결말을 알아보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진리를 찾고 구한다면 어떨까요? “상면의 형제님이 말한 게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든,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하지 않아. 어떤 배경에서 나를 악마라고 했을까? 내가 뭘 했길래, 뭘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그 일부터 살펴봐야겠어! 내가 한 일이 악마의 소행이 맞는지부터 말이야. 내가 한 그 일이 겉면으로는 일반적인 일이지만 실제로 엄중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면 형제님이 그렇게 말하는 게 맞아! 사실에도 부합되는 거야. 그렇다면 순복부터 해야겠어! 내 자신을 저주하고, 육체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순복해야겠어!’ 이렇게 한다면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 게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분별할 수 있으시죠? 그럼,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는 말은 실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는 일도 잘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 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고 출교시키네. 그 사람이 살인이나 방화같이, 뭐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런 일에 진리가 있는 건가? 진리에 부합되는 걸까?”라고 합니다. 그런 일에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생각없이 멍한 상태에서 황당한 논리를 말했는데, 악령으로 단정되어 제명당했어요.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사람이 술 마시고 취해도 허튼 소리를 할 수 있고, 가끔 금방 자다 깨면, 뭐 잠꼬대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멍한 상태에서 황당한 논리를 말했다고 악령으로 단정하다니요? 출교되다니요? 출교를 잘못 시킨 거면 어떡해요?” 그런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일에서 다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저, 제가 배우자를 구해도 될까요?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아도 될까요?” 합니다.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어떤 이는 “남자라면 장가 가고, 여자라면 시집 가야지! 다 컸으면 당연히 가정을 꾸려야겠죠. 그건 당연한 도리죠!”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평생 결혼을 안 하고, 진리만 추구하고 하나님만 섬기는데, 그건 진리에 부합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요구를 하신 적이 있나? 난 진리를 찾고 구해 봐야겠어.” 그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결혼하면 안 됩니다. 육체가 너무 커서 결혼을 하고 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배우자가 없을 땐, 마냥 즐겁게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 배우자가 생긴 뒤에는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지 않을 수도 있고, 살림에 빠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울수록 더 잘 믿습니다. 오히려 생활이 편하고 안락해지면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확실히 다릅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각기 다른 사람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없을 땐, 어려움이 참 많습니다. 집에서도 핍박하고 남들도 비웃습니다. 하지만 배우자를 찾자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함께 본본을 합니다. 보세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찾는 게 하나님을 믿는 데에 불리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배우자를 찾지 않아야 생명이 자라고 온전케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가 감히 규정할 수 있습니까?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대해야 합니다. 각 사람의 상황과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모르면서 함부로 틀에 맞추면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틀에 맞추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을 했지만 결혼 상대를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인품도 좋고,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하면 형제자매들이 논단할까 봐 결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몰래 사귑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가 그런 사람을 억압하고 제한하면 될까요?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대해야 합니다. 늘 규례로 사람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비밀리에 연애하면 어떻습니까? 함부로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양다리나 세 다리 걸친 것도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가 될까요?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합당하면 제한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범사에 찾고 구할 진리가 있습니다.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함부로 논단하거나 규례에 맞춰선 안 됩니다. 규례에 맞추기를 좋아하고 관념과 상상에 근거해 논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럼,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찾고 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관념과 규례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지막에는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사람이 진리 안에서 해방받고 자유로워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진리 실행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영원히 막연하게 삽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는 건 인정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없고, 여전히 막연한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글귀 도리를 이해하는 걸 가지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전부 진리에 부합되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기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는 건 전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실까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위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건 다 글귀 도리뿐이고, 규례뿐입니다. 진리의 실제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 진리가 있는 사람은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을 속박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늘 다른 사람을 속박하고, 늘 이렇게 저렇게 실행하라고 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다 바리새인입니다. 정말 진리가 있다면 왜 진리를 교통할 줄 모를까요? 왜 사람을 규례와 관념과 상상에서 나오도록 이끌지 못할까요? 본분을 하면서 그런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역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진리가 없다는 것을 더더욱 증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정했습니다. 그럼 진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히 존재하고, 전부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걸 뜻하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보여주는 것은 다 진리의 존재입니다. 또한 진리의 존재와 진리의 실제를 증명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진리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자 하나님 자신의 소유소시라는 걸 보여줍니다. 진리가 바로 하나님 성품의 유로이고, 하나님 역사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발표를 통해 땅에서 하나님의 선민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모든 진리는 진정 이 땅에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경력하고 인식하고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도달한 효과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에 온전하게 진입했을 때는 곧 하나님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경력이 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왜 하나님과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걸까요? 믿을수록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더 많이 느껴요! 예전에는 왜 이런 느낌이 없었을까요? 아무리 믿어도 그저 막연했었어요. 믿을수록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듬을 수 있어요! 진리를 더듬을 수 있고, 실제도 더듬을 수 있어요. 진리 속에서 또 사실을 하나 보았어요. 진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생명 실제였어요! 모든 진리는 전부 하나님의 소유소시이고,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 성품의 유로이고, 하나님 생명의 유로였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실제와 진리의 존재를 느낀다는 건 하나님을 본 것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마주한 것과 같지 않을까요? 그런 효과에 도달한 게 아닙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129-A-8】

이방인들이 말합니다. “신은 정말 존재해요! 전 신을 인정해요.” “신을 본 적 있어요?”, “보지는 못했지만 그분이 내리시는 비를 봤어요! 비가 필요하면 비를 내려 주시고, 바람이 필요하면 바람을 주셨고, 햇빛이 필요하면 햇빛을 주셨어요. 흐린 날씨가 필요하면 그것도 주셨고, 더운 날씨가 필요해도요, 추운 날씨가 필요해도 다 주셨어요. 너무나 진실하고 실제적이에요! 신은 그렇게 실제적이고 진실합니다. 뭐, 비록 그분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는 못하지만, 사람에게 주는 느낌은 여러 가지로 다 있었고, 다 실제적이고, 조금도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이방인은 마지막에 이런 결론을 내릴 겁니다.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리라”, “일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는 실제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달한 효과는 이방인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실제적입니다. 이방인은 신이 주신 바람, 비, 우뢰, 번개, 햇빛, 이슬을 누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건 뭘까요? 모든 진리의 공급과 양육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입니다. 그래서 더 실제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역사를 경력하는 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가장 큰 축복이고, 창세 이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됐고 얻게 됐습니다. 진리를 찾고 구하여 진리를 얻으면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 이제 분명하게 보셨나요?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하는 건 계속 실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하면 잘못을 적게 저지르게 되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한다면 진리를 더 많이 얻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되고, 진리에 더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면,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질문(1):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게 맞는 말인지 형제님이 교통해 주세요.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 말은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진리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꽤 실제적이고 간단하지 않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인류는 진리를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논점과 논조, 수많은 이론에 대해 관념과 상상으로 분명하게 측량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일들을 관념과 상상으로 확정하고 “이게 진리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몇년 지나지 않아 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은 과학으로 “이게 진리야.”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역시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지 않아 또 과학으로 부정해 버립니다. 그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인슈타인, 뉴턴, 그런 과학자들의 이론은 원래 전부 진리라고 불렸습니다. 근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부정됐습니다. 그 사실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라고 하는데, 진리를 점검하는 게 실천만으로 충분할까요? 사람의 실천이 그렇게 완전할까요? 그렇게 완벽할까요? 사람의 실천에 원칙이 있습니까? 사람의 실천 범위는 얼마나 클까요? 그런 것들은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십 년 실천하고 ‘진리’라고 확정한 후, 후세들이 이어서 실천하다가 100년 정도 지나니 그것이 또 부정됐습니다. 어느 실천이 정확할까요? 어느 실천이 진리를 정확하게 인증했을까요?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이 충분할까요? 그건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 말이 곧 진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맞는 말이긴 하나, 진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기준이다”란 이 말이 성립은 되지만, 많은 진리, 그리고 너무 깊은 진리는 평생 실천해도 다 경력하지 못하기에 확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설명할까요?

지금 온 인류는 6천년 동안 사탄에게 패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사탄을 알고 있나요? 사탄이 말한 그런 말들은 그릇된 논리일까요, 진리일까요? 인류에게 결론이 있나요?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라고 하는데, 그럼 자신이 행한 것이 맞는지를 점검해 봐야겠죠! 그래서 그 말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만으로 볼 때는 맞는 말입니다. 그 공식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을 거쳐야 합니다. 그 실천의 범위는 얼마나 클까요? 얼마나 걸려야 할까요? 어떤 진리를 경력하여 인증할 수 있을까요? 사탄의 패괴에 대해, 그 그릇된 것들에 대해 경력하고 검증해 냈나요? 공자 노자가 꺼낸 것들을 가지고 그렇게 오랜 세월 실천했는데, 인증이 됐나요? 도대체 맞는 건가요, 틀린 건가요? 결론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어떤 사람은 “그럼 하나님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우리가 경력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잖아요.” 합니다. 그럼 그 점을 놓고 봤을 때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는 말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진리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옛날 중국의 여성은 천년 가까이 전족을 했습니다. 천년 가까이 실천한 것으로 전족이 맞는 일인지 틀린 일인지를 증명했나요? 결론이 있나요? 인류는 이런 황당한 많은 일들을 오랜 세월 경력했지만, 누구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가 실천이라는 방법만 갖고 진리를 증거할 수 있을까요? “실천은 진리를 점검하는 유일한 기준이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아주 정확한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경력하고 아무리 믿어도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은혜시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에 대해 어느 정도 경력과 인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리를 얻었나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리 경력해도 소용 없습니다. 사람의 경력과 실천으로 달할 수 있는 효과는 너무나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 몇 세대, 천년, 2천년을 실천한다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못하고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통하면 어떻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어쨌든 저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실천해도 결과가 없고, 아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려면 성령의 역사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입니다. 사람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실천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2): 지금 저희가 예배드릴 때 대부분의 경우에 각자 자신의 것을 얘기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결부해서 개인의 경력을 말하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또 어떤 말씀으로 어떤 일을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교통할 줄 모릅니다. 주제를 중심으로 어떻게 교통해야 서로 보완할 수 있고, 한 방면의 진리에 대해 순수한 터득을 가질 수 있고, 길이 있게 될까요? 예배가 끝나고 나면 얻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실행해야 예배가 더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경력해서 진리를 경력할 수 있을까요? 맹목적으로 경력해도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 잘 인솔해야만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제가 이렇게 교통하고 나면 스스로 실행할 수 있지 않나요? 제가 현장에 직접 가서 여러분에게 닥치는 일들을 한 가지 한 가지씩 세세하게 말하고 알려 줘야 할까요?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만한 분량도 없다면 될까요? 예전의 실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진리를 찾고 구한다는 건 예배에서 교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개인의 교통을 듣고 나서 돌아가 어떻게 묵상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공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 진리를 확실하게 교통할 수 있으면 얻을 수 있고, 예배에서 확실하게 교통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는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분량이 아주 작습니다. 예배에서 교통하는 것으로 도달하는 것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래서 공을 들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개인적으로 경력하는 것에만 공을 들이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될까요? 왜 안 될까요? 예배에서 다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교통하고 서로 글귀 도리가 아닌 실제로 교통한다면 그래도 효과가 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교통을 했는데 빛 비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실제적으로 교통을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빛 비춤과 실제를 결부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인식을 더하면 적지 않은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저 사람이 교통하는 빛 비춤은 나도 있고 너무 얕아. 저 사람 교통이 실제적이긴 한데, 나도 있어! 모든 면에서 다 확실하고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안 들을 거야!” 이런 태도를 가지고 예배를 하면 성과가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높은 수준의 설교만 듣기 좋아합니다. 높은 자의 설교, 높은 자가 교통해 주는 것만 즐겨합니다. 일반 형제자매가 사투리에 생활 용어까지 쓰고 말이 많으면 ‘난 조만한 깨달음과 실제는 묵상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만약 좀 높은 사람이 말하면 ‘귀에 쏙쏙 들어오게 잘 말씀하시네. 찬성하고 받아들이겠어’ 합니다. 그런 마음 자세로 예배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건 교만방자하고 독선적인 것입니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겉보기에 학력이 낮고 표현 능력도 별로인 것 같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느 정도의 실제와 빛 비춤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할 줄 모르고, 말을 이렇게 들을 줄 모르고, 사람을 이렇게 대할 수 없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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