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집 (a) 진리와 무관한 일을 중요시하면 절대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125-A-1】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 이 책의 하나님 말씀 몇 단락을 읽으세요.
『635 사람이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는 근거는 나의 말이다. 만일 나의 말대로 실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모두 흑암 권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른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 속에서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인솔 가운데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충성하는 정형 속에서 사는 것이며, 진리를 구하는 정형 속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화비(역주: 헌신, 소비)하는 실제 가운데서 사는 것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형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런 정형과 실제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점차 진리가 깊어짐에 따라 변화될 것이고 사역이 깊어짐에 따라 변화될 것이며, 최종에는 꼭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이 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흑암 권세에서 벗어나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다≫에서 발췌)
『636 내가 원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사람이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진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이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며, 너희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너희가 하나님께 얻어지도록 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너희가 다 들었으므로 너희는 이 말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최종에 너희가 이 말을 실행해 내면, 즉 내가 이 말로 너희를 얻고 동시에 너희도 이 말을 얻게 되면 바로 이 크나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너희가 정결함을 받게 되면 진정한 사람에 속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경력―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629 사람의 육체는 사탄에게 속하여 패역 성정으로 가득 찼고 더럽기 그지없는데, 정결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너무 많고 육체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에 대해 극히 증오한다. 사람은 사탄의 더러움과 패괴된 것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더러움과 패괴를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 속한다. 사람의 아귀다툼, 간사, 교활 이런 것은 모두 사탄의 것에 속한다. 너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틀릴 리가 없는데, 다 사람을 구원하여 흑암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어느 정도까지 믿게 되면 육체의 이런 패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육체 패괴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 너는 하나님을 창현(彰顯)할 수 없고, 더러운 것에 속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없다. 네가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고 나면 거룩한 사람이고 정상적인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실행 2≫에서 발췌)
『630 사람이 육체에서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심판이 없고 형벌이 없으면 사람이 다 사탄과 마찬가지로 더러운데, 어찌 성결해질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이렇게 여겼다.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은 사람에게 제일 좋은 보호이고 제일 큰 은혜이다. 오직 하나님이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해야만 사람이 각성할 수 있고 육체를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엄한 징계는 사람이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서 살 수 있게 하였다. 심판 형벌은 참으로 제일 좋은 구원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경력―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631 사람이 일생 동안 정결케 되고 성품이 변화되는 데에 도달하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며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징계와 격타가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탄의 지배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도록 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바로 빛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빛이며, 사람에게 가장 좋은 축복과 가장 큰 은혜이고 가장 좋은 보호임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베드로의 경력―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이전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교통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명 진입 방면의 진리에 대해 아직도 그리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기 원하는데, 왜 생명 진입이 그렇게 느리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느립니까? 이것은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오늘 이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좀 교통해야겠습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이 몇 단락의 하나님 말씀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듣고 나서 인식이 좀 생겼을 텐데, 이는 좋은 일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이런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낸 사람의 실제 정형,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에게 가리켜 준 생명 진입의 길과 진리를 추구하는 길, 이런 말씀을 읽고 깨달아 마음이 환해지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려면 한 걸음 한 걸음씩 먼저 일부 실제적인 문제부터 착수해야 합니다. 어떤 실제적인 문제일까요? 그럼 하나님 선민들이 현재 직면한 일부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교통해 봅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의 육체는 사탄에게 속하여 패역 성정으로 가득 찼고 더럽기 그지없는데, 정결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너무 많고 육체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에 대해 극히 증오한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패괴된 인류를 증오하신다는 것은 주로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바로 사람이 육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체 속에서 살고 있는 표현은 무엇입니까?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너무 많고 육체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 많다.”라는 것입니다. 육체적 누림을 탐낸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언제나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만 중요시하고, 지위의 복만 중요시하며, 언제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만, 육체를 드러내는 것만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또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바로 사람들이 육체의 취향, 육체가 누리기 원하는 것, 육체적 관념과 상상을 전혀 증오하지 않고, 전혀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며, 시종일관 벗어버리지 못하고 빠져나오지 못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완전히 육체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육체에 속한 사람은 사탄에게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완전히 육체에 속한 사람은 도대체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혐오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에 속하는 사람이 만약 변화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가 그 사람과 인연이 없고 상관이 없어 그 사람이 조금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육체를 배반하지 않고 육체를 혐오하지 않으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발표하신,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이 모든 진리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모든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국도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속하는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변화되지 못한다면 최종의 결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상세하게 말할 필요 없이 틀림없이 도태될 것입니다. 도태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대재난 가운데서 훼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재난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이고, 재난 가운데서 쓰러져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재난이 곧 닥칠 텐데, 만약 조금밖에 남지 않은 기회에 잘 추구하여 육체적 누림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틀림없이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절마다 응하고 구절마다 이루어질 것인데, 이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사람의 육체를 정죄하셨고 인류를 증오하는 근본 원인을 말씀하셨는데, 인류를 증오하는 표현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말세의 심판 사역 중에서 발표한 진리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노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엄격하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합니다.
【125-A-2】
지금 많은 사람들이 왜 육체적 누림에 대한 것과 육체가 좋아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할까요? 왜 포기하지 못할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방인들이 잘 입고 잘 누리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한시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이방인 스타들을 보세요, 이방인들이 입고, 치장하고, 누리고, 먹고 마시는 것들을 보세요,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언제 저런 것들을 누릴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형제자매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으로 몸에 치장한 것을 보기만 하면 궁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데, 다른 사람들은 왜 잘 입고 몸에 좋은 것을 치장할 수 있지? 나는 왜 안 돼?’ 이것은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심지어 ‘다른 사람은 어떻게 그런 가정이 있을까? 다른 사람의 집은 왜 그렇게 돈이 많을까?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왜 아무 좋은 것도 누리지 못할까? 이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심한 정도에 이르러 좋은 옷 한 벌 입어 보지 못하고 좋은 물건 하나 몸에 치장해 보지 못하면 입맛도 잃고 잠도 자지 못하는데 마음이 아주 괴로워 본분을 하는 것마저 영향을 받다 보니 여기에서 걸렸습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입니다.) 육체적 누림에 대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것, 누리는 것이 도대체 긍정적인 것인지, 진리인지,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하지 않습니까? (인식해야 합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몰고, 좋은 시계를 차는 것은 긍정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입니까? (아닙니다.) 왜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차를 몰아야 하나님께 축복받은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것을 누리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탐내고 누리는 이런 것들, 육체가 좋아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며, 게다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은 사람의 육체적 누림이 얼마나 좋은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육체가 무엇을 누려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근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에 근거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진리의 실제가 있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인지,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했는지,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지에 근거합니다. 이런 것은 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이 몇 가지 방면의 조건에 도달했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으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 몇 가지 방면의 조건에 도달했다면, 설사 그 사람이 누리는 육체의 것들이 너무 적고, 별로 좋은 옷도 입어 보지 못했고, 좋은 시계도 차 보지 못했고, 좋은 차도 몰아 보지 못했고, 그 무슨 별장이나 호화로운 주택에서 살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주로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조건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한 요구와 그런 조건에 도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았겠지요? 그럼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차를 몰고, 호화로운 주택에서 사는 것을 부러워한다면 이것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런 것 누리기를 마음속으로 몹시 부러워하고 몹시 사모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사람이고, 육체 가운데서 사는 사람이며, 육체로 사는 사람으로, 완전히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육체에 속한 사람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틀림없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는 사람도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럼 육체에 속한 사람이 진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아무 의의도 없는 것같이 여기고, 육체가 누리는 그런 것보다 가치가 없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어, 좋은 시계 하나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이 두 가지를 당신 앞에 놓는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당신은 그 좋은 시계를 버리고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좋은 시계를 택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걸 말할 필요 있나요? 저는 진리를 택하겠어요.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예요. 저는 가난에 시달리며 시계를 차지 않더라도 성실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시험이 없을 때는 “저는 진리를 택하겠어요.”, “저는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잘 하는 걸 택하겠어요.”, “저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걸 택하겠어요”, “저는 진리를 추구하는 걸 택하겠어요.”라고 말하지만, 좋은 시계, 좋은 집, 좋은 차가 앞에 놓이고 시험이 거기에 놓였을 때는 변하여 다른 선택을 할 것입니다. 시험이 임하기만 하면, 진리를 추구하려는 심지가 사라지고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데, 좋은 시계, 좋은 옷, 좋은 차를 보기만 하면 눈에서 빛이 돕니다. 이는 무슨 문제입니까? 그런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고, 사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보세요, 일부 사람들은 시험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아주 듣기 좋게 말해 겉보기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라고 할 정도이지만, 교회 인솔자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니 힐끗 훔쳐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겠습니까? 속이 안정되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똑같이 다 하나님을 믿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좋은 시계를 찼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좋은 옷을 입었을까? 나는 왜 입지 못할까? 나는 왜 갖지 못할까? 이건 불공평해. 입으면 다같이 좋은 것을 입고 차면 모두가 차야지, 왜 저 사람만 차?’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균형을 잃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그 사람의 속셈,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다들 빈궁하게 살아갈 때는 그 사람이 누구를 봐도 관념이 없었고 “다 고생하잖아!”라며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어떤 사람이 닭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속이 끓기 시작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은 일이 임하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인솔자가 좋은 스위스제 시계를 차고 오니 그 사람이 보자마자 “이건 무슨 시계예요? 되게 좋아 보이네요, 좀 봅시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으세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하나님 말씀 책을 앞에 놓고 머리는 책을 향하였으나 눈은 그 시계 쪽으로 쏠렸습니다. 말해 보세요. 눈이 왜 시계 쪽으로 쏠릴까요? 눈에서 늘 빛이 도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요? 무엇을 뜻합니까? 그 사람은 육체적 누림에 대해 너무나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이 어쩌면 그렇게 민감합니까! 다른 사람은 누가 손목에 무엇을 찼는지 별로 주의하지 않는데, 그 사람은 오로지 그런 것만 관찰합니다. 여자를 볼 때는 목에 목걸이를 했는지, 귀에 귀고리를 했는지, 손에 액세서리를 했는지 봅니다. 남자를 볼 때는 손목에 어떤 시계를 찼는지 봅니다. 이런 사람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는 모두 육체를 탐하는 사람에 속합니다. 육체를 탐하는 사람이 마음을 진리에 기울일 수 있을까요? 당신이 그 사람의 마음을 진리 쪽으로 향하게 바로잡으면, 그 사람은 쌀쌀하게 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육체적 누림 쪽으로 향하게 하면 즉시 야단법석을 떨며 정신을 집중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람이 너무 육체적 누림을 탐하면 마음이 딴 곳에 있기에 진리를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가 바로 이러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실행하면 나도 실행하고, 여러 사람 중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도 실행하지 않겠어. 인솔자 일꾼이 다 앞장서서 진리를 실행하면 나도 좀 실행할 수 있고, 인솔자 일꾼 중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도 실행하지 않겠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에 언제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언제나 추세를 봅니다. 그러나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입니다. ‘엄마 아빠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나는 그들을 저버리고 그들의 구속을 받지 않을 거야. 엄마 아빠가 진리를 증오하면 내 부모가 아니야. 기껏해야 부모에게 육체적인 의무를 좀 하고, 돈이나 좀 드리면 돼. 그러나 절대로 부모에게 구속받지 않을 거야. 부모가 진리를 증오하니까 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부모를 배반할 거야.’ 부모가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역시 마귀 사탄입니다! 만약 진리를 어느 정도 사랑하게 되고 원칙이 있게 되어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에 대해 용서하지 않고 그 사람과 등지며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면 교회에 아무리 많은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가 있을지라도 통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인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사탄을 이긴 사람이고 진정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이며, 육체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았겠지요? 그럼 만약 교회에서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뒤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시비를 조장하고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지껄이며 당신에게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저 사람이 당신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또 통제를 받겠습니까? (받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싫어하고 회피하고 그런 것들을 혐오해야 합니다. 무료한 그 사람들을 반드시 멀리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과 사귀어서 좋은 일이 있을 리 없고, 의의가 없습니다.
육체가 어떤 맛있는 것, 예를 들어, 닭 다리를 먹는 것은 진리입니까? 긍정적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먹어야 할까요? 영에 속하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닭 다리를 가져다가 개에게 주세요. 그것을 칼로 쳐서 땅에 묻어 버리세요. 이것을 영에 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맞긴 뭐가 맞습니까? 분별이 없네요. 그것은 영에 속하는 척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이 어떻게 대하는지 보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일부 사람들은 분별이 없습니다. 닭 다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여건이 되면 간혹 한 끼씩 먹는 것도 괜찮습니다. 맛도 괜찮구요. 그러나 편식하면 안 됩니다. 여건이 안 되는데도 기어코 닭 다리를 먹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먹지 못하면 못 살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각종 식품을 정확하게 대해야 합니다. 특별히 한 가지를 좋아하면서 ‘저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맛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기름에 튀긴 음식을 좋아합니다, 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여건이 주어지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니 있으면 먹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시지 않아 여건이 안 되면 우리도 그것에 구속받지 말고, 못 먹는다고 소극적이 되거나 연약해지거나 살아갈 생각조차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채를 예비해 주시면 야채를 먹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겨와 나물을 예비해 주시고 좋은 먹거리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겨와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또 닭 다리가 생기면 그것을 버리겠습니까? (버리지 않겠습니다.)
【125-A-3】
음식을 대함에 있어서 무릇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이면 어떤 음식이든 정상적으로 먹어야 하고 정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맛있는 것만 먹으면서 맛으로 택하면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것은 입맛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음식을 대하는 원칙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어떤 음식이든 다 먹습니다. 고기도 좀 먹지만 많이는 안 먹고 야채를 많이 먹고 잡곡을 많이 먹는 편인데 이것은 저의 식사 원칙입니다. 육류는 붉은 빛을 띤 고기(역주: 쇠고기, 양고기 등)는 조금 먹는데, 많이 먹으면 쉽게 고지혈증에 걸리고, 혈청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각종 동물의 내장과 머리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먹으면 쉽게 종양이 생깁니다. 무릇 하나님께서 만드신 깨끗한 음식은 다 먹어야 하고, 사람 몸에 좋은 것은 다 먹어야 합니다. 편식하면 안 좋습니다. 야채는 제일 좋은 것입니다. 절대 적게 먹거나 안 먹어서는 안 되고, 잡곡과 야채를 균형 있게 먹고, 고기도 조금은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각종 먹거리를 보면, 어떤 야채든 맛이 다 향긋하고 좋습니다. 셀러리를 먹으면 그 맛이 참 좋고, 기타 각종 야채, 무, 당근, 배추 어느 종류나 다 맛이 향긋하고 좋습니다. 반대로, 고기 냄새는 별로 안 좋은데, 자주 먹으면 먹을수록 냄새가 안 좋습니다. 고기 맛이 향기로울수록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각종 야채의 향이 제일 좋은 향입니다. 음식을 대함에 있어서 마땅히 이런 태도여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람의 몸은 어느 한 가지 음식이 모자라서도 안 되고, 편식하게 되면 쉽게 병에 걸립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마땅히 몸에 좋은 것과 건강에 유익한 것을 택해야 합니다. 이 원칙에 따라 먹는 것이 제일 정확한 식사법입니다. 이런 정확한 식사법이야말로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입니다. 절대 편식하거나 골라 먹지 마세요. 기름진 것, 육류, 기름은 좋은 것이 아니니 이런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그 밖에, 어떤 음식을 먹든지 과다 섭취하면 안 됩니다. 과다 섭취하면 안 좋으니 골고루 섞어 먹어야 합니다. 땅콩을 많이 먹으면 소화가 안 되고, 달걀은 하루에 2개 이상 섭취하지 못하니 많이 먹지 마세요.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영양적으로 균형 있게 섭취하면 건강에 유리합니다. 이것이 식사의 원칙입니다.
고기만 먹고,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육체적 누림을 탐내고 입맛을 만족시키는 이런 사람은 벌받을 것입니다. 어떤 벌을 받습니까? 병이 나서 징벌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병이 날 때까지 먹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어느 날 병이 나서야 얌전해지는데, 그것은 업보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대할 때, 정상 인성의 관점을 가져야 하고, 건강 원칙에 따라 택해야 합니다. 각종 야채의 영양은 다 좋습니다. 그것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고기보다 영양가가 좋고, 비타민과 미량의 원소가 골고루 들어 있어 좋은 것입니다! 다시는 음식을 먹을 때 고기를 탐하지 마세요. 고기를 탐하는 사람은 좋지 않고, 언젠가는 병이 나서 벌받을 것입니다. 술을 탐해서도 안 됩니다. 특히 알코올이 든 술은 절대로 마시지 말고, 안되면 적게 마시든지 하세요. 술은 간에 제일 크게 손상을 입히는데, 고량주를 마시는 사람은 다 쉽게 간염, 간경화에 걸립니다. 술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와인을 마셔도 알코올 농도가 제일 낮은 것을 골라야 합니다. 아무튼, 술을 적게 마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고기는 적게 먹어야 좋으니, 야채와 잡곡을 많이 드세요. 각종 야채는 특별히 맛있고 다 맛있는 음식들입니다! 이것은 음식을 대하는 방면으로, 영양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먹으면 됩니다. 알아들었겠지요?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식탐이 많습니다! 육체적 누림이 가장 심각한 사람은 고기를 좋아합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장래성이 없고, 절대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식탐이 강한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고, 제일 게으른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며, 놀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고, 고생하기 제일 힘들어하는 사람도 이 몇 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무릇 육체적으로 많이 고생하는 사람은 보배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다 성공할 수 있고, 육체의 갖가지 고통을 다 받을 수 있으며 어떤 방면의 고생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인류 가운데 제일 좋은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육체적 누림을 제일 탐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식탐이 많은 사람, 가장 게으른 사람, 놀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놀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게임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포함해 이런 사람들은 장래성이 없고 다 도태될 것입니다. 제가 제일 혐오하고 미워하고, 하나님도 제일 혐오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은 30대, 20대들이 한가하면 게임하는 것입니다. 게임기는 다 마귀에 속하는데, 그런 사람은 그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 하찮은 것이 진리입니까? 긍정적인 사물입니까? 어떤 사람은 게임하면 몇 시간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데, 그런 사람은 완전히 다 마귀인데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도태될 사람들이고, 인류 중의 인간쓰레기, 찌꺼기, 폐인이고,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짓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하나님 집에서 여러 가지 본분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가하면 슬그머니 게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격리시키고, 회개하지 않으면 본분을 시키지 마세요. 각급 인솔자 일꾼들은 얼른 이 일을 시행하여 여러 가지 본분을 하는 사람 중 한가하게 자주 게임하는 사람은 빨리 격리시키세요. 본분할 때 이런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사람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들은 향상하려는 마음이 없고, 고생하려는 심지가 없으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과 사악한 것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 가지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주요 원인인데, 이 일을 반드시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들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육체적 누림을 탐내는 것이 너무 많고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쓸모없습니다. 조금도 고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폐인이 아닙니까?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쓰레기가 아닙니까? 다 인간쓰레기입니다! 무엇이 인간쓰레기입니까?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구제불능인 자는 다 인간쓰레기에 속하고 구할 수 없는 사람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진리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누가 잘못하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으면 알아차리고 말도 명확히 잘하며, 분별도 잘하고, 어느 정도 견해도 있는 것 같고, 확실한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에 대해 분별할 줄 아는 것 같지만, 자신이 대처 수리를 받으면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내고 원망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한사코 궤변을 늘어놓고 변명하는데,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옛것을 지키고,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싶어 하며,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하고, 마음속으로 여전히 유아독존하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순복하길 바라는데, 이런 사람은 가장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아닙니까? 사탄의 성정이 너무 심각합니다! 사탄의 성정, 사탄 본성의 핵심 실질이 어디에 있습니까? 교만하고 자대하며, 자고하고 독선적이며, 유아독존하는 것입니다. 무릇 이 방면의 성정이 매우 뚜렷하고 심각한 사람이 인솔자를 하지 않을 때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인솔자를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일단 인솔자가 되면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할 줄 몰라 “그 사람이 인솔자가 되기 전에는 설교도 잘하고, 말하는 것도 진리가 있고 분별력이 있고 견해가 있어 일반인보다 견해가 높은 것 같던데요.”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과 겉면의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별력과 견해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분별할 때 아주 정확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도 아주 정확하게 보고 진리에 부합되지만 인솔자가 되고 나서 왜 적그리스도가 되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누가 말해 보세요,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사탄 성정이 심각하고, 특별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자대하고 자고하며 유아독존하면서 사람들이 다 자신에게 순복하고 다 자신을 우러러보고 따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정을 가진 사람이 일단 인솔자로 선출되면 100% 다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주요한 표현은 성정 방면이 특히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유아독존하는 것 외에 또 어떤 표현이 있습니까?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고 자신을 전혀 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인솔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에게 진입이 없었고, 자신은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으며, 전혀 자신을 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솔자나 일꾼을 하면 설마 하나님 집을 위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데, 하나님 집을 위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까? 적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분별할 때는 아주 정확하게 보지만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면 안 됩니다. 첫째, 자신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둘째,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가 설교하거나 말하는 것은 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다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지 그 자신에게는 진입이 없고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인솔자가 되고 나서도 자신의 진입은 여전히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성질이 같습니다. 그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인솔자가 되기 전에도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인솔자가 되고 나서도 필연적으로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125-A-4】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자 할 때, 무엇이 제 역할을 해야 실행할 수 있을까요? 가장 주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 정상인의 양심과 이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상인의 양심과 이지는 바로 정상 인성에 갖춰진 그 양심과 이지입니다. 그 양심과 이지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의식이 있게 되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양심이 평안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느낄 수 있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을 어긴다면 양심이 평안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은 일이 닥치면 그 일을 아주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요? (양심입니다.) 양심이 지배하는 여기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올바른 마음입니다. 양심은 정확하게 무엇을 대표합니까? 양심은 사람의 영을 대표하고, 사람의 올바른 마음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그 사람을 지배하여 진리를 실행하게 하고, 긍정적인 일을 하게 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게 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게 합니다. 이 책임과 본분을 이방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의무라고 합니다. 사실, 의무라고 말하면 적합하지 않고, 책임이나 본분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무릇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면 양심과 이지가 있는 사람이고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정확합니다. 진리를 깨달았어도 지금껏 진리에 따라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 양심과 이지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지금껏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어도 조그마한 책망도 없고 마음속으로 조그마한 고통도 없으며 예전과 같이 평온하고 편안하고 태연하다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영적 용어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사람의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의 영이 없습니다! 보통말로는 양심이 없다고 하는데, 영적 용어로는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짐승’, ‘이방인’, ‘사람 탈을 쓴 짐승’, 이 몇 개 용어는 다 적합합니다. 이방인들은 다 영이 없기에 사람 탈을 쓴 짐승입니다. 가장 듣기 거북한 이 말도 실은 사실에 제일 부합되는 말인데,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럼 영이 없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를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남을 욕하는 말일까요? 이것은 남을 욕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에 맞는 말입니다. 마치 당신이 돼지에게 “돼지, 이 짐승아!”라고 말하고, 개에게 “개, 이 짐승아, 너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개, 돼지, 소에게 짐승이라고 말하면 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욕이 아닐까요? 그것은 그 자체가 바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짐승이라고 하지 않으면 사실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말에게 “어, 노형, 왜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해요?”라고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당신이 암퇘지에게 “노모님, 왜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면 됩니까? (안 됩니다.) 이것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겁니까? 짐승을 사람으로 대한 것인데, 이것은 짐승을 높여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말씀, 사람을 심판하시는 말씀을 보고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왜 관념이 있었겠습니까? 그 일의 사실 진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몇 년 경력하고 나서야 “사람은 패괴되어 정말로 짐승과 같습니다. 인성이 없고 사람의 양심과 이지도 없어 하는 말, 하는 일, 살아내는 모습이 짐승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짐승’, ‘마귀’, ‘사탄’, ‘사탄의 후손’이라는 표현을 봐도 관념이 없고, 말씀하신 것이 매우 적절하고 천만 번 지당하며 조금도 틀림없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에 대해 진심으로 탄복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도달한 효과가 아닙니까? 보세요, 교계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가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하기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몇 년 경력하고 나면 또 달라지고 바뀌어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고 사실이며, 천만 번 지당하여 사람이 진심으로 탄복하게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관념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탄복하기까지 합니다. 이 정도까지 경력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사실이고 다 실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든지, 사람이 이해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모두 진리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합니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정말 진심으로 탄복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된 사람이 아닙니까? 정복된 후에는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 진리이고 다 사실임을 인정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더 이상 관념이 없고, 관념이 없으니 패역도 적어지게 됩니다. 설사 순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패괴되어 패역하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된 후,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며, 정식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것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진리를 추구하여 참으로 진리를 얼마 깨닫게 될 때는 어떻게 말할까요? “지금 저는 긍정적인 사물이 무엇이고 부정적인 사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분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정상 인성에 어떤 긍정적인 것들과 어떤 진리 실제를 갖춰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아주 많은 것들이 모두 진리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의 절반 이상은 부정적인 것이며, 또 일부분은 진리와 무관한 것이고 긍정적인 것은 아주 적습니다. 그럼 지금 진리를 추구하는 원칙에 근거해 볼 때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이 다 진리와 무관한 일이라면 그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저는 부정적인 것도 추구하지 않았고,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 악인들이 저지르는 짓도 하지 않았고 중요시하지도 않았으며 끼어들지도 않았고 그 사람들과 섞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제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가요?”라고 말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봅니까? 그 사람들도 겉보기엔 괜찮습니다. “저는 또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압니다. 저는 본분을 할 때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릇되게 말하고 그들이 인솔하는 길이 틀리면 저는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분별이 있어 그들과 단절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악을 행한 것이 많으면 저는 또 그들을 드러내기까지 하는데요!” 이런 사람은 도대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볼 줄 압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지요? 사실, 당신이 중요시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진리와 무관한 일들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들에서 어떤 일들은 별로 악한 일이 아니지만 긍정적인 것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중요시하는 일, 진리와 무관한 일은 모두 어떤 일들입니까? 어떤 일들이 진리와 무관한 일들에 속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사 당신이 한평생 중요시해도 진리를 얻을 수 없는 일, 비록 당신이 악을 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리를 얻을 수도 없는 일, 그런 일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까? 그런 일들을 해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일을 붙들고 경력하면서 그런 일을 중요시하는데, 그 결과 여러 해 동안 그런 일 가운데서 살았어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생명은 조금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진리와 무관한 일에서 가장 뚜렷하고 분명한 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규례는 백년을 지켜도 거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규례만 잡고 지키면 백년을 지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무관한 첫 번째 부류의 일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두 번째 부류의 일은 바로 사람이 관념, 잘잘못, 시비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떤 일에서 잘잘못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면 옳고 저렇게 하면 틀리다, 이렇게 하면 적합하지 않고 저렇게 하면 적합하다고 하며 늘 이렇게 잡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진리의 원칙을 장악하지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맞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릇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행실에 따라 맞게 했을지라도 그것은 당신이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당신이 잘못했을지라도 범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오늘 네가 물건을 살 때 0.5위안을 더 써도 책망을 받지 않고, 0.5위안을 적게 써도 상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일이니 성령이 하는 사역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내가 사역하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에서 잡고 늘어져도 쓸모없고 진리와 무관하여 백년을 잡고 늘어져도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리와 무관한 두 번째 부류의 일입니다. 참으로 원칙에 어긋난 일들에 대해 모든 사람이 해부하고 분석하고 분별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진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개별적인 일의 방식이라면 잘잘못을 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잡고 늘어지기 좋아합니까? 대부분 소질이 비교적 낮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순수하지 못하고 심지어 터득이 좀 치우치고 그릇된 사람들이 이런 일을 잡고 늘어지기 좋아합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은 지 1~2년 되는 새 신자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진리를 참답게 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치우치고 그릇된 것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만약 믿은 지가 이미 7~8년이나 10여 년이 되고 오래 믿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일을 잡고 늘어진다면, 영이 별로 통하지 않고 좀 치우치고 그릇됩니다. 사람이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들을 계속 잡고 늘어지며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여전히 그것을 진리를 추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있습니까? 원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경력상에서의 편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을 잡고 늘어지는 그 사람들 중 악인은 한 명도 없다고 확실히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악인이 아닙니다. 그들 대다수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터득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새 신자여서 진리를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진리를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힘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힘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에 속하지 않고 경력상의 편차와 실행상의 편차에 속합니다. 잘 알았겠지요?
진리와 무관한 일의 세 번째 방면은 바로 아주 하찮은 그런 겉면의 일들이고 진리 원칙의 문제에 관련되지 않는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한 끼 먹었고, 어떤 사람은 좋은 옷을 입었고, 어떤 사람은 금은 장신구를 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고는 “이건 문제입니다. 육체를 탐하는 것이니 사탄에게 속합니다!”라고 남에게 함부로 죄를 덮어 씌워 사소한 일을 요란스레 처리합니다! 이것은 진리와 무관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일은 추궁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 누가 물만두를 한 끼 먹은 뒤 찬물을 마셔서 설사를 했는데, 당신이 “하나님의 징벌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한다면, 맞습니까? (틀립니다.)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전염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저주가 임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일은 추측할 수 없으니 규례에 씌워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은 꿰뚫어 볼 수 있어 정말 그렇게 된 일이고 다방면으로 검증하여 확실히 그런 일이라고 확정되면 그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방면으로만 검증했다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은 너무 서둘러 말하면 안 됩니다.
【125-A-5】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어 갑자기 감기에 걸렸는데, 이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네요!”라고 뒤집어씌웁니다. “왜 하나님의 징계인가요? 무엇에 근거해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옷을 똑같이 입었어도 다른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데, 왜 유독 당신만 감기에 걸렸겠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징계인 겁니다!” 이런 논법이 성립됩니까? 이건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 아닙니까? 이건 논단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논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면역력의 높낮이가 다르고 사람의 연령도 다르며 신체 상태도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렸는데, “하나님의 징벌이야!”라고 오명을 덮어씌운다면 적합합니까? 규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겉면의 일에서 “마치……같네요.”라고 말하는데, 같다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기에 절대로 규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진리와 무관한 이런 일에서 논쟁해서는 안 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런 일에 봉착한 사람도 맹목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스스로 기도하고 찾고 구해 보세요. 아마 한동안 지나면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일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사가 어떤 사람의 병을 진단하는 것도 한 방면의 증상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실증에 근거해야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에서 세 번째 방면은 어떤 일들입니까? (사소한 일들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은 주로 이 몇 가지 방면입니다. 그리고 또 의식주에 관한 그런 자질구레한 일도 있습니다. 잘 누리는 사람도 있고 못 누리는 사람도 있는데, 누가 잘 누리면 “아유, 하나님 축복이야!” 누가 가난해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야!” 이렇게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고 하나님의 안배가 있는데,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경력하여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면 많은 일들에 대해 참으로 알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심지어 사람이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어떤 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히 알았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바로 그렇다고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저는 조금 꿰뚫어 본 것 같아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어찌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후회하지 않도록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러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무관한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들이 주로 세 가지 부류, 세 가지 방면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 세 가지 방면의 일들을 모두 귀납해 보세요. 모두 몇 가지 조목이 있는지, 여러분이 본 것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몇 가지 조목이 있는지, 분명하게 귀납한 후 이런 일들에 대해 마땅히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대해야 하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는 그 가운데 찾고 구할 진리가 있지만 어떤 일은 중요시하지 말고 아랑곳하지 마세요. 아무 의의도 없습니다. 심지어 찾고 구할 진리가 없고 아무 심오한 비밀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포기하세요. 백년을 중시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진리와 무관한 이런 부류의 일들은 우리가 원칙을 장악하고 정확히 대해야 합니다. 의식주행은 진리와 무관합니다. 왜 진리와 무관할까요? 당신이 잘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없고, 더욱이 진리를 실행한다고도 할 수 없으며, 당신이 잘 먹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당신을 증오한다고 할 수 없고, 더욱이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생활이 좋든 나쁘든, 무엇을 입든, 몸에 무엇을 치장하든 이것은 당신이 진리를 얻을 수 있을지, 이후에 어떤 귀숙이 있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런 일에서 구속을 받아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좋은 옷을 입지 못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도 흥미 없고 본분을 하는 데도 흥미가 없어요. 언제 좋은 옷을 입고 누리게 된다면 저는 본분을 할 때 틀림없이 신바람이 날 것이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육체를 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말로 좋은 옷을 입히고 누리게 한다면 그 사람이 정말 본분을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말하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허풍을 떠는 것이고 사람을 속이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탄의 간계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저에게 지위를 하나 주어 인솔자 일꾼을 하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사역을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성립되지 않습니까? 인솔자 일꾼이 되면 즉시 본분을 잘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테스트할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이 사역을 잘할 수 있는지, 본분을 잘할 수 있는지는 사람의 인품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사람의 분량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인품이 있지만 진리가 없고 그런 분량이 없기에 해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본분을 잘한다면 힘도 썼고 인품도 구비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도 인품이 없다면 역시 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방면은 좋은 인성이 있어야 하고 또 한 방면은 진리를 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본분을 잘하고 실제적인 사역을 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분을 잘하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고 지위가 있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인솔자 일꾼들이 처음에는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만약 인솔자 일꾼이 된다면 틀림없이 그 누구누구보다도 나을 거야!” 나중에 인솔자가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도 낫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어디가 나은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겉면의 말에 속으면 되겠습니까? 속임수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큰소리치는 것은 사탄 본성의 특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와 무관한 이 몇 가지 일에 대해, 어떤 일은 포기해야 합니다. 상관하지 말고 따지고 들지 마세요.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그 외에 어떤 일은 진리를 찾고 구해 해결해야 하며,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정확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썽을 부리며 시비를 따진다면 그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대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나 그런 일에 대해 우리는 추궁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사람의 분량이 어떤 상태인지, 그 사람이 왜 그런 시비 가운데 살고 있는지,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떠한지, 그 사람이 시비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지, 그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본성 실질은 무엇인지,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런 것에 대해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일을 꿰뚫어 보았다면, 그 사람을 꿰뚫어 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다음 다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좀 더 쉬운데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럼 우리 자신이 아직도 늘 진리와 무관한 일부 일들을 중시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역시 진리의 원칙에 근거해 대해야 합니다.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하고 진리를 찾고 구해 해결해야 할 것은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실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많은 문젯거리와 많은 방해물을 없애 버리게 됨으로 진리를 추구하여 정확한 궤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에 대해 우리는 지금 거의 분별하였고 기본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당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던데요.”라고 말하면 이것은 쓸모가 있습니까?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면 됩니까? 들어야 할 것은 들어야 합니다. 다 들어야 분별하게 되고 정확하게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좀 오해하고 있네요. 그 사람이 겉면의 일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정상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편면적으로 봤고 규례에 맞췄네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사람을 미워하면 됩니까? 미워하지 말고 정확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은 진리와 무관한 일이지만 당신은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진리로 문제 해결하기를 찾고 구해 그 일에 대해 정확한 태도와 입장이 있다면 틀림없이 간증을 설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진리와 상관 없는 일에 대해 따지고 마구 시비를 가리고 사단을 일으킨다고 해서 당신도 따라서 시비를 조장하고 사단을 일으키면 그것은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육체적 애호와 논쟁 가운데서 살게 되는데 당신도 진리가 없고 그 사람처럼 진리와 무관한 일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일은 어린 아이가 싸움을 하고 소꿉장난하며 다투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형제자매와 낯을 붉히며 논쟁하고 서로 버티면서 물러서지 않고 시간이 오래 지나도 해결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당신은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됐어요?”라고 물을 것이고 당신은 “10년 믿었습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자라지 않은 10살짜리 아이지요! 10년을 믿었는데도 그런 의의 없는 일을 얘기하고 있고 가정주부처럼 식견이 없는데 진리의 실제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장래성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뺨을 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분량이 너무 작아서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에서 옥신각신하며 필사적으로 다투어 꼭 잘잘못과 시비를 가리고 이치를 따지며 이기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긍정적인 사람입니까?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을 이방인의 속어로 어떻게 말합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길에서 욕지거리를 퍼붓는 몰상식한 여자가 아닙니까? 제멋대로인 망나니가 아닙니까? 시비나 논쟁을 좋아하는 소인배가 아닙니까? 염치없는 자가 아닙니까? 이렇게 분별하면 완전히 적합합니다. 어떤 사람은 온종일 이런 일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인솔자를 만나면 잘됐다면서 “당신은 청렴한 분이니 제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해 주고 판단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에게 무슨 판단을 내려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은 모두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데 교회에서 누가 당신에게 그런 일에 판단을 내려 주겠습니까?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당신에게 아무리 이치가 있어도 쓸모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양심과 이지가 있다면 왜 진리 추구를 중시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 사람들과 이런 일을 잡고 늘어집니까? 왜 육체를 배반하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빛 가운데 살지 못합니까? 왜 광명정대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까? 당신도 좋은 놈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맞습니까? 저에게 판단을 내려 달라고 하면 저는 이렇게 판단을 내려 줄 것입니다. “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잡고 늘어지지 마세요. 의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이 말한 것은 틀렸다고 할 때, 당신이 정말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사실이 왜곡되었다고 해도 좀 인내하세요. 인내하면 아량이 넓어집니다! 인내해야 할 일이라든가 사람에게 오해받을 일에 부딪쳤을 때, 참고 또 참으면 아량이 넓어지고 분량도 자라나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당신은 온전케 될 수 없고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말한 것이 맞고 진리에 부합된다면 당신은 진리를 찾고 구하여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의 문제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다음 진리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안배하고 배치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 일에 부딪치면 당신은 충분한 공과를 배우게 되고 분량이 자라나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구태여 잡고 늘어질 필요가 있습니까? 잡고 늘어지는 것은 당신에게 분량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당신이 진리에 순복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잡고 늘어진다면 당신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당신도 옳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 사람도 틀렸고 당신도 틀렸는데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맞다면 그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겠습니까? 당신은 벌써 진리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125-A-6】
도대체 어떻게 긍정적인 것을 추구해야 합니까? 진리 진입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진리 진입과 무관한 일은 상대하지 말고 거들떠보지도 말며 절대 그것에 묶여서는 안 됩니다. 옳고 그른, 얽히고 설킨 그런 일에 묶이지 말고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오늘 임한 일에서 나는 진리를 구했는가? 진리로 문제를 해결했는가? 원칙 있게 일을 처리했는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분별하고 일을 판단했는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가?”와 같은 이런 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반성해 봐야 합니다. 여러 번 반성하고 나면, 이런 일이 다시 임할 때는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할지 알게 되고, 어떻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알게 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문제를 대하고 해결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이 몇 가지 방면에 효과가 있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맞고 진리 실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또한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 도달하여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약 범사에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기를 중요시하고, 범사에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범사에 분별 있고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진리로 문제 해결하기를 중요시한다면 이것은 다 긍정적인 것에 속합니다. 이것은 다 당신이 매일 진정으로 진리 실행에 진입이 있고, 참으로 진리 추구를 중요시하며, 참으로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기를 중요시하고, 참으로 진리를 실행하여 원칙 있게 일처리하기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늘 이렇게 중요시하면 자신도 모르게 진리 실제를 살아내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고 빛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럼 도대체 긍정적인 것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진리와 유관한 일이겠습니까? 진리와 유관한 일은 주로 어떤 방면일까요? 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관련된 일이고, 다 본분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며, 다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고, 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진리와 관련된 일이고 하나님 선민이 반드시 중요시해야 할 일입니다. 진리와 관련된 일을 이제 분명하게 알았겠죠? 한 방면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와 관련되고, 한 방면은 본분과 관련되며, 한 방면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관련되고, 한 방면은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되며, 한 방면은 사탄과의 싸움과 관련되는데, 이런 일은 다 진리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원칙에 따라 대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데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진리와 관련된 이런 일들을 중요시하지 않고 반대로 진리와 무관한 일을 중요시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솔자 일꾼이 좋은 시계를 찬 것을 보게 된다면 영향을 받겠습니까? 그런 일에서 영향을 받는다면 이것은 어떤 문제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바깥 사물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럼 당신 마음속에 진리가 있겠습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늘 육체적 누림만 중요시하는데 누가 육체를 잘 누리고 있으면 견딜 수가 없어 자기도 좀 누리려고 하고, 이익을 함께 나누어 가지려고 하며, 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누리면 나도 그것을 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을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늘 사람을 따르는데,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면 자신도 그것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 있으면 자신도 그것을 가지려 하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중요시하면 자신도 그것을 중요시합니다. 이는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어떤 인솔자 일꾼이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닌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런 여건이 되고, 그 집이 워낙 넉넉하여 좋은 것을 입고 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선민들 중 어떤 사람은 부유한 환경에서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환경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배로 사람에게 다 유익합니다. 바로 이런 일로 서로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이 공과를 배우게 하고 포기할 줄 알게 하며 육체를 배반하게 하는 이런 효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에게 몸치장할 줄 알게 하고, 세련되고 잘 생기게 하셔서 못 생기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나서 영향을 받고 소극적이 되어 고생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고생하고 많이 부딪치면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알게 되므로 마지막에는 육체의 그런 일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육체를 이겨 내는 데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 선민이 배워야 할 공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안배하시고 허락하신 것은 다 하나님 선민에게 유익하고 다 사람들에게 공과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을 보고 나서도 공과를 배우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따라만 한다면 그런 사람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떤 형제자매가 부유한 가정의 형제자매와 같이 협력하며 본분을 하게 된다면, 처음에는 그 부유한 형제자매가 먹는 것, 입는 것, 차는 것에 다 영향을 받습니다. 나중에 늘 진리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알게 되고 공과를 배우게 되면, 부유한 가정의 형제자매가 무슨 옷을 입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치장하든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이 잘 입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고, 좋은 것을 차지 못해도 여전히 협력하면서 본분을 하고, 여전히 본분에 충성하며, 여전히 진리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인정해 주실까요?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방면에서 온전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형제자매 옆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안배해 놓으신 것은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려고 하신 것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럼 우리같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운이 안 좋은 거네요. 온전케 될 수 없으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왜 틀리다고 합니까? 진리는 사람을 차별 대우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가정의 자식도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온전케 하십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형제자매와 같이 있게 된다면 어떤 공과를 배워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처음에 ‘봐봐, 내가 얼마나 행복해!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어. 그러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돈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보다 더 잘 입고 더 좋은 것을 차고 생김새도 더 잘 생겼어. 당신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못생겼으니 깔보고 업신여겨도 돼!’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다른 사람의 장점을 봐야 합니다. 어떤 장점을 봐야 합니까? ‘그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식주 조건이 다 안 좋지만 하나님께 진짜 충성하고 진리를 잘 추구해. 내가 이렇게 잘 입고 좋은 것으로 몸치장 해도 그 사람은 영향을 받지 않고 마치 이런 것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아. 이것은 그 사람의 장점이고 또한 나의 부족한 점이야!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할 이지인데, 나는 왜 없을까?’ 그런 사람은 이런 공과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 그런 사람은 또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경우를 바꾸어 내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 사람이 먹는 그런 음식을 먹고 그 사람이 입는 그런 옷을 입는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또 하나님을 위해 충성되게 본분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어려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낫고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나보다 훨씬 강하고 나는 그보다 못해! 내가 이렇게 잘 누리고 잘 입고 좋은 것으로 치장해도 그 사람만큼 충성되게 본분하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그 사람보다 못한데 만약 내가 그 사람의 그런 고생을 한다면 아마 벌써 소극적이 되어 물러났을 거야. 나는 그 사람의 그런 분량이 없고 그 사람의 그런 인품도 없어!’ 그가 이런 것을 인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 형제자매에 대해 탄복할 것입니다. ‘저 사람의 인품은 나보다 훨씬 낫고 좋구나. 저 사람에게 갖춰져 있는 정상 인성의 본능이 우리한테는 없어!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은혜로 나를 보호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내가 오늘까지 하나님을 따라올 수 있었을까? 또 이렇게 본분을 할 수 있었을까? 어려워!’ 이것은 반성해 봐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럼 도대체 어떤 사람이 더 귀할까요? 어떤 사람에게 장점이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일까요? 부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일까요? 하나님은 겉으로 잘 입었든 못 입었든, 생김새가 좋든 나쁘든 얼마를 누렸든 그런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고생할 심지가 얼마 있는지, 하나님께 순복하려는 심지가 얼마 있는지,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보시며,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를 보십니다. 잘 생긴 사람에게 날마다 성령 역사가 있고 못생긴 사람에게 성령의 깨우침이 전혀 없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저를 보세요, 저는 키도 크지 않고 생김새도 보통이지만 성령께서 저에게 역사하십니다. 저를 홀대하셨습니까? 조금도 홀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보다 키가 훨씬 크고 잘 생긴 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에게 성령의 이런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는지는 무엇에 근거할까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는 무엇에 근거할까요? 사람의 외적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실행하는지에 근거해 성령이 역사하실지,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하나님이 축복하실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데, 하나님 선민이 정말로 깨달았다면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을 중요시하면 될까요? 당신에게 인솔자 일꾼을 투표로 선거하라고 하면 무엇에 근거하겠습니까? 차림새에 근거하겠습니까 아니면 생김새에 근거하겠습니까 아니면 키나 나이에 근거하겠습니까? 무엇에 근거하겠습니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다. 늘 겉모습만 보고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을 중요시하면 하나님께서 증오하시고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늘 먹고 입고 누리는 것만 중요시하는 그런 일은 진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한번 따라해 보세요. 늘 먹고 입고 누리는 것만 중요시하는 것은 다 진리와 무관한 일입니다. (늘 먹고 입고 누리는 것만 중요시하는 것은 다 진리와 무관한 일입니다.) 다 알아들었겠죠? 왜 여러분들에게 한번 따라 해보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런 일을 참으로 꿰뚫어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에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본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즉, 20~30대 사람이 절반 이상이고, 40~50대 사람은 절반이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먹고 입고 누리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패괴된 인류에게 다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교통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매우 실제적입니다. 전에 우리는 정감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통했습니다. 정감에 치우쳐 살면 사람의 생명에 해가 된다는 이런 말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그럼 육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정감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육체에 속하는 사람이 정감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런 일은 다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다 같은 성질이고 다 같은 본성 안의 것이며, 사탄의 본성 중 두 가지 중요한 방면입니다. 정감에 치우쳐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육체에 치우쳐 살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에 치우쳐 사는 것은 주로 정감에 치우쳐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완전히 성립됩니다. 또한 한가지 일이어서 매우 비슷하고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5-A-7】
여러분은 세부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까? 진리 실행에 관련되고 우리가 오늘 교통한 화제에 관련된 일도 다 되고 혹은 실행길을 찾는 문제나 실행 원칙의 문제를 제기해도 됩니다!
문제 (1) 늘 체면, 명예, 지위의 속박을 받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심판 형벌을 거쳐도 여전히 본성의 통제를 받고 얼마 진입하지 못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답: 늘 체면, 허영심, 지위의 속박을 받고 어떻게 벗어날지 모르고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는데, 이와 같은 문제는 본성 안의 것입니다. 바로 사람 육체의 정욕과 같습니다. 그것을 단번에 파내려 하고 내보내려 하면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해낼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근원으로부터 내보내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실행의 원칙을 어느 정도 잡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것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고 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세하게 교통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제가 말하는 이런 길만 듣고서는 소용없는데, 그러면 실행할 줄 모릅니다. 구체적인 실행은 바로 ‘내가 왜 허영심, 지위, 체면의 속박을 받을까’라고 찾고 구하는 것을 중요시하면서 이 일부터 먼저 꿰뚫어 봐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지금 이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하나님 말씀 앞에 내놓고 우리가 이 일을 판단하고 해부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자신의 ‘병’이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왜 허영심, 지위, 체면의 속박을 받습니까? 사람이 사탄 독소의 독해를 받으면서 살고 있기에 이런 것들의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 철학에 어떤 말이 있습니까? “사람은 체면을 지키고 나무는 껍질을 지킨다.” 사람은 얼굴도 있고 살가죽도 있기에 체면이 수모를 당하면 그것은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고 남을 볼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람이 살아갈 면목이 없게 하여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어떤 일입니까?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가장 비열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를 들어, 누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한바탕 때렸다면 이것을 수치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바보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추한 짓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남의 돈을 적지 않게 훔쳐 붙잡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살 면목이 없는 일이고, 커다란 치욕을 당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낯을 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얼굴에 빛이 없고 수치를 당합니까? 그러니 우리가 긍정적인 일을 하였다면, 설령 악인의 훼방과 논단 혹은 박해를 당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참으로 낯을 들 수 없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떳떳하고 마음속으로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붙잡히고, 본분을 한다는 이유로 붙잡혔을 때, 그들이 피켓에 하나님을 믿으며 어떻게 어떻게 했다는 글을 써 우리에게 죄명을 씌우고 조리돌리지만 우리 마음은 평안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므로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왜 붙잡혔어요?”라고 물으면 당신은 머리를 번쩍 들고 “하나님을 믿어서요!”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당신이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조금도 수치심이 없는 것을 보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어, 하나님 믿는 건 나쁜 일이라 할 수 없어. 이 정부가 정말 가증스럽네. 하나님을 믿는 사람까지 붙잡다니.’ 그러면서 당신을 범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일을 하면 정말로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습니까? 나쁜 짓을 하여 다른 사람이 “왜 잡혀 왔어?”라고 물어볼 때 “남의 돈을 훔치다가 잡혔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여럿이 “남의 돈을 훔치다니, 이 나쁜 놈아!”라고 비난합니다. 도둑은 모든 사람이 다 미워하고, 어디에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나쁜 놈이기에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짓을 저질러 10명, 20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면 그건 머리를 들 수가 없겠지요, 그것은 짐승이니까요! 도박 때문이라면 좀 나을 것입니다. 도박은 단지 술을 마시는 것처럼 일종의 취미이므로 붙잡힌다 해도 그다지 치욕적인 일은 아닙니다. 맞습니까? 이런 것은 양심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을 보세요, 큰 붉은 용이 갖은 방법으로 추적하고 지명 수배하고 붙잡는다 해도 우리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까? (평안합니다.) 이 일에서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속에는 책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바르면 마음이 편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이 방면의 일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고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이 명예와 지위의 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이 어떤 일인지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심판 형벌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패괴된 실질과 본성을 드러내시니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고 ‘내가 왜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왜 이렇게 깊이 패괴되었는가? 이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지만 사람 앞에서는 또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람의 패괴는 다 같고 온 인류는 다 이래.’ 그래서 머리 들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가 되어 온갖 못된 짓만 일삼다가 드러나면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받는 느낌과 같습니까?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 집에서 드러내고 수리 대처하고 해부한다면, 어떤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반항하고 원망하며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데, 이것은 어떤 문제입니까? 이것은 교만하고 자대하는 것이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선적이며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고 잘못하고도 맞다고 말하며 제멋대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늘 체면, 허영심, 지위만 중시하는 것과 여기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중시하는 것이 다르기에 체면, 허영심과 지위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설사 마음속으로는 기분 나쁘고 아무리 고통받을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순복할 수 있으며 반항하지 않고 대적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면과 허영심이 매우 심하여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진리에 부합되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순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사탄 본성이 너무나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위와 체면, 허영심을 너무나 탐내고 너무나 중요시하는데 심지어 진리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지위, 체면, 허영심이 진리보다 높고 지고지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수리, 대처를 받고, 체면, 허영심에 영향을 받는 일이 임하면 고통이 매우 크고 매우 참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말했으면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할 수 있다면 허영심, 체면, 지위를 쉽게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원칙이 있다면 이런 일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진리와 원칙이 없다면 지위, 허영심, 명예를 무엇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깁니다. 지위, 명예, 허영심을 잃으면 ‘나는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 살지 말고 죽는 게 낫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려놓기 쉽겠습니까?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오래 인솔자 일꾼을 하면서 이런 문제를 아주 긴 시간 동안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솔자 일꾼을 하지 말라고 하시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변함없이 본분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만약 나에게 다른 본분을 하라고 하시면 내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인솔자 일꾼도 하지 않고 어떤 본분도 하지 않는다면, 계속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선민과 같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정상적으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까?’ 저는 생각하고 나서 ‘할 수 있을 거야, 큰 문제 아니야, 며칠 안에 적응될 거야.’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당신 생각인데 당신 생각이 현실과 같을까요?”라고 하는데, 이 문제, 참 잘 제기했습니다! 저의 생각은 아마 별 문제 없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 자신의 경력에 근거해 확정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경력에 근거해 말합니까?”라고 묻는데, 저는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가장 심하게 받았을 때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그렇게 지내 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견뎌 왔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바로 그렇게 견뎌 왔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저에게 등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저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는데 저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으로는 다른 말 하지 않고 “마땅합니다. 저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등을 돌리고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계속 사역하라고 하시면서 “계속 교회를 인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본분을 해야 합니까? 어느 지역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전에 하던 것을 계속 하고 했던 대로 계속 해라.” “정말입니까?” “그래! 아직도 모르느냐? 뭘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냐?”, “네,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하겠습니다.” 그때 하던 일이 익숙해서 하기 쉬웠습니다. 제가 하니 어떤 형제자매들은 “당신이 또 인솔자입니까! 이전에 당신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고 또 논단도 했었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런 일은 따지지 않으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공격하여 보복하지 않았고, 제가 발탁한 사람은 다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저의 친구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도태되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저를 괜찮게 대해 주었지만 발탁되지 못해도 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감에 치우쳐 사람을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렇게 지내 왔습니다. 따라서 제가 방금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한 말이 상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기한 이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진리 구하기를 중시하고 진리에 순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영심, 체면은 긍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 실제가 아니므로 그것을 중시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어떻단 말입니까? 아무리 수치당해도 괜찮습니다. 진리를 중요시하기만 하면 얼마나 큰 치욕을 받든 다 지나가게 되고, 다 일시적인 일이고 다 일시적인 고통이지 영원한 고통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대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리에 순복할 줄 알게 되면 어떤 허영심, 명예, 지위든 다 포기할 수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당신이 저에게 보통 형제가 되어 따르라고 해도 저는 그렇게 따를 것이고, 지금 제가 설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저는 설교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들을 것입니다. 누가 말한 것이 맞고 성령의 깨우침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누가 말하는 것이 도리이고 빈말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귓등으로 흘려 버리면 끝입니다. 누가 “당신은 말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저는 말하지 않고 맹세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일을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진리와 원칙에 부합될 것인데, 이 일을 하기 쉽지 않습니까? 매우 수월한 일입니다! 고통받은 사람과 고통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같을까요? 지위와 명예를 항상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은 근원적으로 볼 때, 고통을 많이 받으면 해결할 수 있고, 고통을 너무 적게 받으면 내려놓지 못합니다! 저도 그 당시에는 내려놓지 못해 꽤나 견디기 힘들었는데 고통을 많이 받고 나서 나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진리를 추구하면 당연히 더 빨리 내려놓게 되지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설령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고생을 겪으면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며느리도 20년을 참고 견디면 시어머니가 된다”는 도리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시어머니가 되면 된 것이고 실력이 수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습니까? 진리 원칙을 중시하고 진리에 순복할 줄 알아야 하며 또 지위, 명예, 허영심, 체면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옥수수떡이나 비지떡처럼 값진 것이 아닌데 왜 내려놓지 못합니까? 그런 것을 마음에 두어 뭐 합니까? 그런 것은 값없습니다. 당신이 수치를 좀 당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좀 받는다면 스스로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당신이 참된 사역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실제적인 본분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때는 지위, 명예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본분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인생,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값지고 무엇보다도 진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위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본분이 중요합니까? 본분을 잘하면 당신은 인성이 있는 사람이고, 지위가 있어도 사역을 잘 하지 못하면 당신은 마귀입니다. 무릇 지위를 보물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놈이 아니고, 땅에 떨어져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싸구려 비지떡과 같은 놈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듣기 좋습니까? 이건 다 무슨 말입니까? 생활 언어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생활 언어가 얼마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왜 생활 언어가 없습니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삶에 대해 모르고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모두 흐리멍덩한 것입니다. 흐리멍덩하게 지내 온 사람은 삶에 대해 모르지만 참으로 삶에 대해 알고 생활상의 일을 다 간파하면 생활 언어도 자연히 생기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모두 흐리멍덩한데 생활 언어가 생길 수 있습니까? 생활 언어는 어디서 옵니까? 삶에서 옵니다. 깊은 삶을 체험하여 한 가지 언어가 생기면 실제적인 생활과 실제적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런 언어는 아무렇게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들었겠지요? 생활 언어는 어떻게 생깁니까? (삶에서 옵니다.) 당신이 삶을 참답게 대하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으며, 고통을 받은 것이 너무 적고 체험한 것이 너무 얕으면 생활 언어가 없습니다. 구두(口頭)로 늘 표현하는 속담, 겉면의 말, 빈말, 글귀 도리의 말, 책 속의 말, 가치 없는 언어는 생활 언어에 속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농부들이 한평생 살다 보면 언어가 풍부해지고, 근로자들도 한평생 생활하다 보면 언어가 실제적이 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한평생 살면 생활 언어가 더욱 풍부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25-A-8】
소질이 좋은 사람은 한 가지 일이 임하면 정확하게 보고 꿰뚫어 봅니다. 인식한 정도는 하나님 말씀에 근접하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되어 사람들이 들으면 진심으로 탄복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식견이 있고 생각이 있다고 합니다. 좋은 작가는 다 생각이 있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고 또 생활 언어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 작가가 쓴 글을 보기 좋아합니다. 이해 정도가 깊을수록 말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빈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작가의 언어는 매우 세련되고 다 생활 언어입니다. 특히 좋은 감독의 언어는 매우 세련되고 필력이 강하고 특히 식견이 있으며 일을 판단하는 것이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여 관료들의 말보다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삶을 잘 체험했다고 합니다. 소질이 좋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면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쉽고 진리를 얻기 쉽습니다. 소질이 좋은 사람이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늘 설교를 들으면 외적인 일에 대해, 진리와 무관한 일에 대해 점점 더 싫어지고 그런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그건 중시하지 말자. 쓸모없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중요하게 여기는 것, 추구하는 것은 다 진리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의미 없는 일과 무료한 사람은 상대하지 않고 눈에 거슬려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은 생각할 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통말로 하면 그런 사람은 바른 일을 하기에 앞길이 창창합니다! 바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 진리와 무관한 그런 소소한 일을 하며 살면서 말할 때는 늘 그런 쓸모없는 작은 일과 하찮은 일에 대해 담론하고 논쟁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 식견이 없는 사람, 무료한 사람에 속합니다. 그 사람들은 한가하면 잡담하는데, 자신들의 생활에 대해 잡담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과 사귀면 장래성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과 섞여 있으면 바로 돼지와 같이 살고 개와 같이 사는 것인데, 아무런 의의도 없습니다. 한평생을 살아도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사람이 늘 남녀간의 일을 중시하면 좋습니까? 누가 누구와 붙어 있다든가, 누가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다든가,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든가,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다든가, 누가 누구와 눈을 맞추고 추파를 보냈다든가 하는 늘 이런 지저분한 일들을 담론하면 쓸모없고 무의미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애정 영화를 보기 좋아하는데 의의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다 진리와 무관한 일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할일 없는 사람들로 장래성이 없습니다. 반드시 도태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 걸 보고 그런 걸 마음에 담아 뭐 합니까? 그런 일들을 많이 담고 있으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주고, 바른 일을 생각하는 데 영향을 주며, 본분하는 데 영향을 줍니다! 제일 할일 없는 사람은 게임을 하는 사람입니다.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각급 인솔자 일꾼은 이런 사람을 얼른 조사해서 그 사람들의 본분을 정지시키세요. 들었지요? 그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진리와 무관한 일만이 아니라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방종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본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 인간쓰레기이고 다 폐물이며 다 진흙을 담벼락에 바르지 못하는 것처럼 무능하고 쓸모없기에 얼른 도태시키고 철저히 도태시키세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게임을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하찮은 휴대폰을 가지고 매일 게임하고 한가하면 게임하면서 본분을 하지 않습니다. 얼른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세요. 그런 사람들은 한평생이라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겁니다. 장래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게임하지 않는 사람들도 진리를 추구하여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 말하기 어려운데, 늘 게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진리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일찍 추구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얼른 도태시키고 깨끗이 제거하세요! 알아들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아무 진리도 없고 아무 원칙도 없으며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외적인 일에 대해 여러 번 말해도 그런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고 또 뒤에서 함부로 합니다. 이것은 마귀의 방해가 아닙니까? 외적인 일은 한 번 말해 주면 기억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이 말해 주어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방해합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 사람은 마땅히 도태시키고 폐기시켜야지 본분을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교통하는 걸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인식이 깊지 못하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진리에 관련되는 일은 말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또 경력해야 하고 일부분 받아들인 다음 다시 한동안 경력하고 또 깊이 진입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상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일은 한 번 말하면 분명히 알고 조금만 지적해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모르고 아무리 많이 말해 줘도 잘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마음이 있습니까? 생각이 없지 않습니까? 짐승이 아닙니까?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별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런 사람에 대해 제일 화가 납니다. 보통의 일은 대체적인 원칙을 장악하고 하는 것이 좀 차이가 난다고 해도 누가 추궁합니까? 추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원칙을 장악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아직도 늘 분명하게 모르면 폐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봅시다.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 이 책의 630번째 단락입니다. “사람이 육체 속에서 사는 것은 곧 인간 지옥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육체 속에서 산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육체의 정욕 속에서 살고 애호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 누림만 중시하는 사람들, 육체의 관념과 상상만으로 일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바로 육체 속에서 사는 사람, 즉 육체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체에 속하는 사람은 바로 인간 지옥에서 삽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지옥에서 살지 않는데요?”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인간 지옥에서 산다는 건 뭘 가리키는 것입니까? 패괴 성품에서 살고 패괴된 육체에서 사는 것인데, 이것이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지옥에서 사는 가장 주요한 실질은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며 어둠 속에서 사는 겁니다. 무릇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은 다 인간 지옥에서 사는 겁니다. 설사 지금 죽지 않았다고 해도 죽으면 바로 지옥에 내려갑니다. 여기에서 “바로 인간 지옥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인간 지옥에서 사는 사람은 죽은 다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분이 참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살았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천국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완전히 육체에 속하는 사람이고 완전히 육체 속에서 살고 육체의 정욕과 애호에 따라 일을 하고 일을 판단한다면 그건 끝장난 겁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 이런 사람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이 말을 하고 일을 하고 평소에 중요시하는 것이 다 진리와 무관한 일이고 다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면 그 사람은 육체에 속하는 사람인데, 완전히 지옥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은 제로입니다. 특히 늘 게임을 하는 그런 사람들, 휴대폰을 가지고 게임만 하면서 밥 먹는 것도 다 까먹고 잠 자는 것도 미루는 그런 사람은 다 지옥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다 멸망될 것입니다. 제가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사실대로 알려 드리죠.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심판이 없고 형벌이 없으면 사람은 다 사탄과 같이 더러워지는데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 이것은 틀림없고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깊이 패괴된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심판과 형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심판과 형벌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심판과 형벌 외에는 다른 방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계에서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생명책에 분깃이 있고 천국에 분깃이 있습니다.”라고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걸 듣지 마세요. 그건 허튼소리입니다. 그것은 허튼소리이고 사람을 속이는 말입니다. 없는 일입니다. 알아들었지요? 미혹되지 않겠지요?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 형벌은 사람의 가장 좋은 보호이고 가장 큰 은혜라고 여겼다.” 베드로의 이 관점이 지금 우리의 관점과 같지 않습니까? 이 일을 우리도 분명히 봤습니다. 그럼 우리의 경력을 베드로의 경력과 등호를 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베드로의 관점과 같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갓 믿었을 땐 이런 관점이 없었고 도달할 수 없었으며 이런 인식이 없었지만, 지금 몇 년을 경력한 후 이런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인식이 있으면 어떤 땐 수리 대처가 임하고, 어떤 땐 좌절을 당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어떤 땐 어둠 속에 떨어져 징벌을 받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가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까? 정말로 이 일을 꿰뚫어 본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인식과 같고 정말로 베드로의 인식과 베드로의 분량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베드로의 분량이 없고 더욱이 베드로의 인식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 형벌은 사람의 가장 좋은 보호이고 가장 큰 은혜라고 여겼다.” 그것은 베드로가 경력해 낸 것이지 아무렇게나 한 마디를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정말로 이런 인식이 있으면 심판 형벌이 임할 때 순복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만약 “저는 찬미가 안 나옵니다. 저는 아직도 원망이 있고 아직도 대립되는 것이 있는데요!”라고 말한다면 아직 베드로의 분량과 인식이 없고 베드로의 그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해야만 사람은 깨달을 수 있고 육체를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할 수 있다.” 사람이 육체를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하는 것은 심판과 형벌로 도달한 효과에서 생긴 것입니다. 심판과 형벌을 경력하지 않는다면 육체를 증오하려 해도 그것은 상상이고 성립되지 않기에 증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징계는 사람에게 사탄의 권세를 벗어나게 하고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엄한 징계가 임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엄한 수리와 대처, 심판과 형벌은 어떤 때는 징벌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했더니 나중에 거기에서 ‘덜컥’ 가로막혀 일이 안 풀리고 손해를 봤습니다. 그것은 꼭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한 징계입니다. 사람은 징벌이 임했고 하나님께서 노하셨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럼 사람에게 이런 느낌이 있게 하여 도달한 효과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징계가 임하면 벗어버리기 쉽고 내려놓기 쉽고 순복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육체를 포기하기 쉽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엄한 징계로 도달한 것입니다. 엄한 징계가 없다면 죽어도 벗어나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엄한 징계는 우리에게 도대체 은혜와 축복일까요 아니면 증오와 저주일까요? (은혜와 축복입니다.) 이번엔 정말로 잘 알겠지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겠지요? 원망하지 않겠지요? (네.) 그럼 어떤 때 제가 여러분에게 엄하게 말하는 건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맞을까요? 성령에게서 나온 거 맞을까요? (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순복해야 합니다.) 순복할 줄 알아야 하고 원망 없이 절대적으로 순복해야 합니다. 이런 순복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에 순복하는 것이지 저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지요? 여러분이 순복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저는 사람한테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에 순복하는 겁니다.” 이렇게 밝혀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 없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모릅니다. 여러분이 일단 밝히면 순복이 없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전에 제가 한 사람을 대처하니 그 사람이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사람에게 순복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원망을 품고 그 말을 한 것이지 그건 진실한 순복이 아닙니다. 진짜 순복은 마음에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건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니까 순복해야지. 절대적으로 순복해야지. 다른 말 할 것 없어.’라고 하면서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임하면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축복입니다.) 왜 축복이라고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징계하셔야만 사람이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육체를 배반하고 포기하며, 육체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육체의 통제에서 벗어나야만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육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육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살면 사람이 무엇을 중시합니까? 육체적 누림과 먹고 입는 것, 경제와 이익, 그리고 정감 등이 있는데, 친척, 친구, 지인, 가족 구성원을 포함한 그 좁은 세계입니다. 그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 진리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은 심판과 형벌, 수리와 대처를 경력하여 자기의 남편(아내)을 대하든 아니면 형제자매를 대하든 차별 없이 다 똑같이 대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듣기 좋게 말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부부간에 또 다른 말을 하는데 교회에서 하는 말과 다릅니다. 이건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육체와 정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와 정감 속에서 한 가지 말을 하고 교회에 가서 또 다른 공식적인 말을 하는데, 그것은 외식하는 것이 아닙니까? 광명 속에서 사는 사람은 사람 뒤에서 하는 말과 교회 생활 가운데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 같고 하나입니다. 이야말로 진정 광명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광명 속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정형입니까? 여기에서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살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산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인데 이것을 광명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났습니까? 자기 육체의 범위에서 벗어났습니까? 이것은 사람이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을 늘 중시하면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육체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인간 지옥에서 살고 어둠 속에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형벌, 심판은 정말 가장 좋은 구원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진리와 무관한 그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진리를 깨닫고 육체를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하며, 나중에 자기 육체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자기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