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집 (a) 하나님 말씀 ≪너의 귀숙을 위하여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에 관한 설교 교통
【115-A-1】
너희들 가운데서 나는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물론 말도 조금 하였다. 하지만 나는 늘 나의 말과 역사가 아직 내가 말세에 역사하는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말세에 내가 역사하는 의의는 일부 사람들이나 어떤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원인, 시간이 촉박하거나 혹은 사역이 아주 바쁜 것으로 인해 사람은 나의 성품에서 나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무릇 나를 본 사람들이 모두 나의 생존으로 인해 가슴 치며 끝없이 통곡하도록, 나는 발을 내디뎌 나의 새로운 계획에 진입하고 나의 마지막 역사에 진입하여 나의 역사 가운데의 더욱 새로운 한 페이지를 펼친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의 말일을 인간 세상에 가져다주어 이로부터 나의 모든 성품을 인류에게 다 공포하여 나를 알거나 나를 모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한껏 눈요기’를 하게 할 것이고 내가 확실히 인간 세상에 왔고 만물이 번식하는 땅에 왔음을 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계획이고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오직 한 번밖에 없는 나의 ‘고백’이다. 오로지 너희가 모두 나의 일거일동에 마음을 다하고 유의하기만을 바란다. 왜냐하면 나의 형벌의 채찍이 또 한 번 인류에게 다가왔고 나를 적대하는 모든 인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과 동시에 내가 하려는 사역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파 속을 헤치며 나아가고 천지 사이에서도 운행하고 있다. 사람은 모두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적이 없고 나의 말에 유의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계획은 여전히 순조롭게 진전되고 있는데, 다만 너희의 모든 기관이 너무 마비되어 나의 사역 절차를 조금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너희가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너희와 함께 생활하고 함께 고난을 받는다. 나는 진작부터 나에 대한 인류의 태도가 도대체 어떠한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더 많이 천명하고 싶지 않으며, 더욱이 사람을 아주 가슴 아프게 하는 이런 일들에서 더 많은 실례를 들어 너희에게 치욕을 주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너희가 자신이 행한 일을 모두 마음속에 기억하였다가 우리가 다시 만날 때 대조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들 중 어느 누구도 모함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일하는 것은 언제나 공평하고 합리하며 광명정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또 너희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하늘과 땅 그리고 양심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너희에 대한 나의 유일한 요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하늘에 사무친 죄로 인해 불안해하며, 많은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좋은 일을 한 가지도 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본래보다 더 심해져 아직 완전하게 드러난 적이 없는 추악한 몰골을 아주 철저히 드러내어 나의 성품을 시험한다. 나는 그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별로 개의치 않고 유심히 살피지도 않으며,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어떤 소식을 좀 파악하거나 한가히 거닐면서 구경하거나 내가 흥미를 갖는 범위 내의 일을 조금 한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는 원래 계획대로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사역을 하는데, 일분일초도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수월하고 매우 간결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는 매 단계 사역을 할 때마다 사람들을 얼마 떼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람들이 아첨하는 몰골을 매우 싫어하고 허세 부리는 노예 꼬락서니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의적이든 아니든 내가 역겨워하는 사람은 당연히 나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미워하는 모든 사람을 다 내게서 좀 멀어지게 한다. 물론 나는 마찬가지로, 나의 집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악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을 징벌하는 날이 곧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꼴 보기 싫은 모든 놈들을 나의 집에서 급히 몰아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 자신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내가 각 사람의 결말을 확정할 때이지 사람을 만드는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는 아니다. 나는 각 사람의 말과 행위 그리고 각 사람의 따라온 역정(歷程)과 원래의 속성 또는 그 최종의 표현을 하나하나 나의 기록책에 적어 놓는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든지 모두 나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모두 나의 배정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될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역주: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사람의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준행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모두 징벌받게 된다는 것을 너희는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징벌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징벌받고 그들 스스로 갖은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인해 보응을 받는다. 나의 계획은 시종일관 조금도 변동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말하는 대상이 점점 적어지고 또한 진정 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갈수록 적어질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말한다, 나의 계획은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지만 사람의 믿음과 사랑은 줄곧 변하고 있고 적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각 사람은 나에게 아부하던 데에서 냉담하게 대하는 데까지, 더 나아가 나를 문밖으로 쫓아내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나는 너희의 태도에 대해 미지근할 뿐이며 내가 반감을 가지고 혐오할 정도에까지 이르면 마지막에는 징벌한다. 하지만 너희를 징벌하는 날에 가서 나는 여전히 너희를 볼 수 있어도 너희는 더는 나를 볼 수 없다. 나는 이미 너희들 가운데의 생활에 대해 너무 무미건조하고 답답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너희의 악한 말에 상처받는 것을 피하고 또한 더러워서 차마 보기 어려운 너희의 행위를 멀리하기 위해, 너희가 계속 나를 속이고 형식적으로 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당연히 다른 생활 환경을 선택한다. 내가 아직 너희를 떠나기 전에 여전히 너희에게 권한다,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말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과 자신의 귀숙에 대해 유익한 일을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다.
나의 긍휼은 나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사람에게 나타낸다. 그러나 그 악인들이 받는 징벌은 바로 나의 공의로운 성품의 증거이고 더욱이 나의 진노의 증거이다. 재난이 닥칠 때, 나를 대적한 모든 사람은 기근과 온역 가운데 떨어져 애곡할 것이며, 온갖 악을 행하면서 오랫동안 나를 따른 그 사람들도 죄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천만년 이래 보기 드문 재난 가운데 떨어져 흉흉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르면서 나에게 일편단심 충성한 그 사람들은 오히려 손뼉을 치며 기뻐할 것이고, 나의 큰 능력을 찬송할 것이며, 상쾌한 심정을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 여태껏 인간 세상에 베풀어 준 적이 없는 즐거움 속에서 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의 선행을 귀히 여기고 사람의 악행을 몹시 증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류를 오늘까지 인솔하면서 나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나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하지 않는 그 사람들을 나는 지금까지 잊은 적이 없고 항상 마음으로 미워하였는데, 다만 기회를 기다려 그 악행에 보응할 것이고 이로 인해 즐거워할 것이다. 오늘 나의 날이 마침내 왔으니 나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마지막 사역은 내가 사람을 징벌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귀숙을 안배하기 위한 것이고, 더욱이 나의 모든 행사가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나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한 모든 것이 다 옳고 다 나의 성품의 나타냄이지 결코 사람의 행사가 아님을 보게 하며, 더욱이 대자연이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물 가운데의 각 생령(生靈)을 자양(滋養)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한다. 나의 존재를 잃어버리면 인류는 멸망하거나 재해의 침범을 받을 수밖에 없고, 누구도 더는 아름다운 나날과 녹색의 세계를 볼 수 없으며, 인류가 직면하는 것은 다만 어둡고 차디찬 흑야(黑夜)와 항거할 수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다. 나는 인류의 유일한 구속이고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며 더욱이 전 인류가 생존하는 데의 의탁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라도 나를 잃으면 인류는 즉시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인류는 오직 치명적인 재난과 각종 유령의 짓밟힘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사역을 하였는데, 사람이 얼마의 선행으로써 나에게 보답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비록 나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인간 세상에서의 여정을 끝마치고 곧 전개할 다음 단계 사역을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바쁘게 보낸 것이 이미 결과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아주 만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에 두는 것은 인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람의 선행이다. 어쨌든, 나는 너희가 자신의 귀숙을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기 바란다. 이래야 내가 비로소 만족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재난의 엄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재난은 나로 인해 일어나는데, 물론 역시 내가 지배한다. 너희가 만일 내 앞에서 선하게 보일 수 없다면 모두 재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환난 가운데서 너희의 모든 행위는 완전히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의 믿음과 사랑은 다 텅 비었고 단지 비겁함이나 강인함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단지 아주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만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여전히 너희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다. 이것으로써 너희의 결말을 정한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분명히 알려 주려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 나에게 조금도 충심이 없는 그 사람들에게 나는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긍휼은 다만 여기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이전에 나를 배반했던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더욱이 친구의 이익을 팔아먹은 사람과 왕래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성품이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누구든지 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의 관용을 얻을 수 없으며, 누구든지 나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115-A-2】
이 편의 하나님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 중요할까요? 하나의 매우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귀숙을 위하여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 이 한 마디 말씀은 각 사람에게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이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의 좋은 귀숙이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신의 귀숙에 대해 아주 관심을 갖고 아주 중히 여깁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귀숙을 마음에 두지 않을까요? 바로 짐승 즉 이지가 없는 짐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귀숙이 무엇인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무릇 정상 인성이 있고 이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귀숙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귀숙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전에 사람들은 다 잘 몰랐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을 갖고 있는데, 오직 주님을 위해 뛰어다니며 고생하기만 하면 좋은 귀숙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인 사람은 오직 생명을 얻어 하나님께 구원받는 데에 도달해야만 좋은 귀숙이 있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한 말이 맞습니까? 맞기는 하지만 그다지 구체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구원받는 것일까요? 당신이 진리만 조금 알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하나의 심오한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바로 “너희의 귀숙을 위하여 충분한 선행을 예비해야 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좋은 귀숙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충분한 선행이 있으면 좋은 귀숙이 있고, 충분한 선행이 없으면 좋은 귀숙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주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여기지만 선행이 조금도 없다면 이 사람이 좋은 귀숙을 얻을 수 있다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거짓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로 진리를 얻었다면 마땅히 충분한 선행을 갖췄을 겁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저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솔자가 되어도 쓰임에 합당치 않아 교체됐다가 나중에 또 인솔자로 선거되어 1~2년 사역해도 여전히 진리가 없고 다 자기의 뜻대로 겉면의 일만 좀 하고 진리 원칙이 조금도 없으며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원칙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조금도 없어 또 도태된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실패와 좌절을 겪어도 그 사람은 진실한 회개가 없었는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족히 증명합니다. 그럼 그 사람의 인성에 문제가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의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할까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 인성이 좋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인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정말로 인성이 있다면 그 사람은 충분한 선행을 예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니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고 하나의 열심만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믿고 많은 선행을 예비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형제자매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고 하나님 집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 집을 위해 일처리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줄곧 베푸는데 자신이 번 돈을 대부분 다 하나님 집에 헌금하고 형제자매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일을 처리합니다. 이런 사람이 이런 선행을 갖춘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런 사람은 인성이 있고 마음씨가 착합니다! 깊이 패괴된 사람은 대부분 다 돈을 탐하지만 이런 사람은 돈을 탐내지 않고 게다가 자신이 얻은 돈과 자신이 번 돈을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신 거야, 나는 하나님께 더 많이 바쳐야 해!’ 이런 것을 마음씨가 착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나 되고 인솔자 일꾼이 되어도 쓰임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형제자매들에게 베푼 것이 얼마입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이 얼마입니까? 만약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주 적다면 그 사람의 인성은 문제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까요? 정말로 인성이 있는 사람은 선행도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겉으로 무슨 악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선행이 너무 적다면 이런 사람에게 인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악을 저질렀는지의 여부만 보면 되겠습니까? 이 한 방면만 보면 안 됩니다. 만약 정말로 악을 많이 저질렀으면 틀림없이 악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악을 많이 저지르지 않았지만 선행이 조금도 없다면 이런 사람도 악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도대체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도대체 얼마만한 선행을 갖추었는지를 보면 됩니다. 이것으로 가늠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한 방면으로는 그 사람이 악을 얼마나 저질렀는지에 근거하고 한 방면으로는 그 사람이 선행을 얼마 예비했는지에 근거하는데, 이 두 방면에 근거하면 그 사람이 도대체 악인인지 아니면 좋은 사람인지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늠하면 완전히 정확합니다. 진정으로 좋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며,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라야 선행을 예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나쁜 일도 하지 않지만 좋은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쁜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악을 많이 저지르고 선행도 없으면 악인으로 정해도 됩니다. 만약 선행이 없는 데다가 제물까지 훔쳐먹는다면 어떤 사람입니까? 이것을 악인이라고 합니다. 만약 악을 저지른 증거가 있으면 반드시 출교시켜야 합니다!
【115-A-3】
“현재는 내가 각 사람의 결말을 확정할 때이지 사람을 만드는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는 아니다. 나는 각 사람의 말과 행위 그리고 각 사람의 따라온 역정(歷程)과 원래의 속성 또는 그 최종의 표현을 하나하나 나의 기록책에 적어 놓는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든지 모두 나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모두 나의 배정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될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역주: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사람의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이 단락의 말씀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결국을 확정하실 때입니다. 이것은 어떤 때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거의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의 처음의 표현과 나중의 표현 그리고 원래의 속성과 따른 과정을 다 하나님의 기록책에 적어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기록책’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록책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을 하고 무슨 나쁜 일을 했는지 하나님께서 다 적으십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이 기록책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일까요? 영계에서 적는 것입니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현재는 내가 각 사람의 결말을 확정할 때이지 사람을 만드는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는 아니다.” 사람이 믿기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결국을 정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거의 끝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길 끝까지 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결국을 확정하십니다. 마치 한 사람이 학교에서 한 학기가 거의 끝날 때는 그 기말고사가 바로 다음 학기에 진급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20여 년이면 그 사람의 결국은 정해집니다. 마지막 그 몇 년 동안 그 사람에게 도대체 회개가 있고 변화가 있는지, 도대체 수확이 있는지, 선행을 얼마 예비했는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결국을 정하시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나님을 20여 년간 믿으면서 아주 많은 과오와 패괴 유로가 있어 수리 대처와 시련 연단을 거쳐도 회개가 없고 뉘우침이 없고 변화가 없고 선행이 없으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면 이런 사람은 철저히 도태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러 차례의 수리 대처를 겪고 여러 차례의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매번 진실한 회개와 진실한 뉘우침이 있고 이전의 실패한 교훈을 받아들여 나중에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또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따라 본분을 하고 선행도 예비했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대상이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결국을 정하시는 것은 이런 것에 근거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대적한 어떤 일을 한 적이 있는지, 하나님을 배반한 일을 한 적이 있는지입니다. 둘째, 어떤 악을 저질렀는지,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입니다. 셋째, 만약 정말로 인성이 있다면 양심적으로 어떤 좋은 일을 했는지, 진리를 깨달은 후 얼마의 진리를 실행했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따라 또 어떤 일을 했는지, 특히 치우친 길을 걸을 때,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징계와 채찍질을 받은 후 진실한 회개가 있었는지, 나중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합격되게 본분하는 데에 도달했는지입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결국을 정하시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증거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여러 번 인솔자가 되어도 다 도태됐지만 맨 나중 한 번 인솔자가 되어 진보가 있고 변화가 있고 진리 실제가 있어 굳게 섰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사람의 결국을 정하실까요? 바로 그 사람의 최종의 표현에 근거합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선행이 있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것은 최종의 표현입니다. 최종의 표현은 한 사람에게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를 증명하고, 최종의 표현은 한 사람이 도대체 하나님께 순복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최종의 표현은 한 사람이 도대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도 실증할 수 있고, 최종의 표현은 한 사람에게 도대체 진리 실제가 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최종의 표현은 도대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증명합니다. 만약 이 몇 가지 방면에서 다 진심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살아남을 수 있고 좋은 귀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배반한 적이 있습니다. 본분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돈 벌러 갔었습니다. 몇 년 동안 돈을 번 후 보니 세상이 너무 사악하여 또 하나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에게 이런 과거사가 있는데 저의 귀숙에 영향 받을까요?” 제가 솔직히 알려 줄게요. 당신에게 한동안 이런 과오가 있었지만 당신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관건은 당신이 돌아온 후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입니다. 만약 진실한 회개가 있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순복이 있으며 또 선행을 예비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도 했다면 당신의 이전의 과오는 단번에 말소됩니다. 그렇지만 돌아온 후에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하는 것이 또 대충대충 하며 전혀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복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고 별로 뚜렷한 선행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좋은 귀숙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요? (진실한 회개가 없고 충분한 선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끝난 겁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이전에 붙잡혀 유다가 되고 배신했었습니다. 그럼 이후에 다시 진리를 잘 추구하고 선행을 많이 예비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실제 문제입니다. 이전에 한 번 유다가 된 적이 있어 특별히 뉘우치고 지금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에게 좋은 결국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최종의 표현을 봐야 합니다.) 이 말은 비슷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이 유다로 된 것이 어느 정도인지 보아야 합니다. 만약 연약하여 중요하지 않은 것을 좀 말해 대응하고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고 후에도 그들에게 무슨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람에게 진실한 회개가 있고 또 충분한 선행을 예비했다면 혹시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해 주실지도 모릅니다. 만약 배신한 것이 너무 심각하고 철저히 큰 붉은 용에게 빌붙고 게다가 큰 붉은 용을 위해 일했다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도태되고 정죄받습니다. 이런 일을 잘 들으세요. 잘 듣지 않다가 그때 가서 함부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그럼 제물을 훔쳐먹은 사람은요? 너무 많이 훔쳐먹고 배상하지 않으면 꼭 징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유황불 못에 떨어져 주야로 끊임없이 탈 것입니다. 그 불은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습니다. 불에 타고 벌레에 물리면서 영원히 고통받고 영원히 중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훔치는 것은 큰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일부러 훔쳐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탐내서 조금 점하고 조금 누린 거지 돈을 주머니에 넣은 것도 아니고 훔쳐서 집에 가져간 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의 제물을 훔쳐서 누리고 몰래 누린 것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도 진실한 회개가 있는지,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여 그 손실을 돌이킬 수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만약 진실한 회개가 있고 충분한 선행이 있어 이런 손해를 돌이킬 수 있다면 그 과오를 하나님도 마음에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깨달음입니다. 당신이 들은 후에 합당하다고 느껴지면 잘 회개하고 선행을 많이 예비하세요. 이것은 제일 관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제가 회개하고 후회하면 되잖습니까? 다시는 이런 일을 안 하면 되잖습니까?” 입으로만 말해서는 쓸데없고 충분한 선행이 있어야지 충분한 선행이 없으면 안 됩니다!
【115-A-4】
무엇을 충분한 선행이라고 합니까? 사람이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것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 했다면 이것을 충분한 선행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기 좋게 말하지만 선행이 너무 적습니다. 다른 사람이 80%나 90% 하는데 그 사람은 고작 10%나 20%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한 과부는 두 렙돈이 있었는데 다 바쳤고, 한 부자는 백만원이 있는데 고작 10원, 20원을 바쳤습니다. 이 부자가 한 것을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이 사람이 헌금한 10원, 20원이 과부의 그 두 렙돈보다 훨씬 많다고 보지 마세요. 그렇지만 과부가 헌금한 것은 하나님께 기념되고 하나님께 열납되고 그 부자가 헌금한 것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게 너무 많은데 선행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명수배령이 내리고 추적당하는 인솔자 일꾼을 접대합니다. 그 본인도 좀 이름이 나고 다른 사람들이 알까 봐 두려워하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 접대하고 보호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름이 나지 않고 위험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조건이 있고 그런 환경이 있어 지명수배령이 내리고 추적당하는 인솔자 일꾼을 엄호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번거러움을 가져올까 봐 접대하기를 꺼려 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조금의 위험도 짊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선행이 없고 마음이 악독하며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헛믿는 것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얻지 못합니다.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때를 기다려 접대하려 한다면 쓸데없습니다. 비가 그친 뒤 우산을 보내 주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요만한 효력도 하지 못하면서도 복을 얻으려고 하는데 망상하지 마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지금 제가 제일 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슨 선행일까요? 어떤 인솔자 일꾼들은 추적당하고 지명수배령이 내려 몸을 숨길 데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도 났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당하며 접대하고 엄호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충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합니다.) 그래서 선행을 예비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얼마 깨달았는지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씨가 착한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지에 있는데, 이것이 제일 관건입니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역주: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은 20대여도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복하고 충분한 선행이 있어 여전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70~80세여도 순복이 없고 언제나 마음에 관념이 있고 언제나 자기 뜻을 따르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이방 세계는 관록을 논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관록을 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귀숙을 정하시는 것은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많고 인솔자를 한 시간도 길지만 진리 실제가 없으면 여전히 도태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고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도 알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고 선행이 아주 적으면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어디에서 표현되었습니까? 첫째로는 “그 사람의 나이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둘째로는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셋째로는 “고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넷째로는 “ 더욱이 그 사람의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 못했고 어떻게 인식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공평을 알게 됩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는 데에 길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것이 너무나 원칙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상관치 않으시고 관록의 많고 적음도 상관치 않으시고 더욱이 고생한 것의 많고 적음도 상관치 않으시며 가련한 정도도 보지 않으시고 진리가 있는지의 여부에만 근거하십니다. 나이가 어려도 진리가 있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고 고생을 아무리 많이 하고 관록이 아무리 많아도 진리가 없으면 여전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결국을 확정하시는 원칙에서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대하시든 다 공평하십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바로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에 근거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이 없다”는 무슨 뜻입니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든, 주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다 쓸데없습니다. 진리가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인데 즉 진리가 있는 사람은 몇 년을 믿어도 진리가 있고, 진리가 없는 사람은 평생을 믿어도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집에서 관록을 논해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이 고생을 얼마 했는지를 간증해서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과오가 좀 있어 수리 대처를 좀 받아 울기도 많이 했지만 회개는 도리어 아주 적고 선행을 예비한 것도 아주 적으면 그 울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눈물로 사람을 미혹하는 겁니까? 눈물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겁니까? 어림도 없는데 망상하지 마세요! 관건은 회개가 있는지, 회개한 후에 진리를 얻었는지인데, 이것은 근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조금 인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인식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진리를 많이 추구하고 선행을 많이 예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일 요긴한 것이고 다른 것은 다 쓸데없습니다. 바른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해도 쓸데없습니다! 당신의 실제 표현만 봅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가지 소극적인 정서를 유로(流露)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전에 엄중한 과오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나는 어떻게 믿어도 소용없어. 내가 끝까지 믿어도 도태될 거야. 안 믿자니 징계받을까 두렵고 도대체 어떻게 할까? 그냥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따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가 맞습니까? (틀립니다.) 어디가 틀렸습니까? 뭐가 뭔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과오가 있는 것을 알면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왜 다시 새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왜 선행을 많이 예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만약 노력하고 정말로 대가를 치르고 선행을 예비하고 회개했다면 최소한 자신에게도 위안이 될 것입니다. ‘나는 노력했어. 나는 변했어. 죽는다 해도 눈을 감을 수 있어.’ 하나님은 조물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 하나님의 배설과 안배에 순복해야 하고 죽기까지 순복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누가 순복하지 않아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해야 할 노력을 했습니까? 치러야 할 것을 치렀습니까?
【115-A-5】
하나님 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는지, 우리는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첫째, 장기간 악령 역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공인된 악인인데 무슨 나쁜 일이든 다 해냅니다. 셋째, 공인된 적그리스도, 악을 많이 저지른 적그리스도인데 하나님의 선민을 심하게 해쳤습니다. 거짓 인솔자는 아닙니다. 거짓 인솔자는 혹시 아직 희망이 있고 혹시 효력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넷째,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음행하는 자, 하나님을 믿은 후 여러 차례 간음을 행한 자입니다. 다섯째, 장기간 동성연애를 하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다섯 부류의 사람 외에 또 두 부류의 사람도 위험이 있습니다. 특별히 비겁해 집에서 몰래 믿는데 최종까지도 비겁해 본분을 조금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외에 심각하게 그릇된 자로, 비교적 엄중하게 그릇된 자에 속하고 진리를 왜곡하고 진리를 그릇되게 해석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사람인데,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릇된 것은 몇 가지 정형으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은 개별적인 일에서만 좀 그릇되고 일부 진리와 일부 일에서는 순수하게 터득합니다. 이것을 일반적인 그릇된 것이라 하고 조금 그릇된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 그릇된 사람이 만일 마음씨가 착하고 선행을 예비했다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릇되면 구원받지 못할까요? 그릇된 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늘 진리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또한 사람을 미혹하며 교회 생활을 방해하여 교회 생활에 번거로움을 가져오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령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릇된 영이고 악령 역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몇 부류 사람 외에 또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첫 부류는 선행이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릇된 자가 아니고 비겁한 것도 아니며 늘 교회 생활을 하고 본분도 하지만 선행이 조금도 없고 좋은 일을 조금도 하지 않으며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시종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궤사한 사람인데,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인솔자 일꾼이 시종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지위와 명예를 위해 사역하며 악인을 출교시키지 않고 적그리스도를 출교시키지 않으며 게다가 악인을 발탁하고 나쁜 사람을 발탁하며 좋은 사람을 배척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솔자 일꾼은 좋은 일을 하지 않고 악을 저지르는 인솔자 일꾼에 속합니다. 악을 저지르는 인솔자 일꾼이 만약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자니 아직은 아니고, 그 사람을 거짓 인솔자라고 말하자니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사역도 좀 하지만 시종 바른길을 걷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나타내고 언제나 지위와 명예를 위해 사역하며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생명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늘 그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발탁하고 정의감이 있고 진리를 사랑하는 좋은 사람은 발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솔자 일꾼은 사실 적그리스도와 비슷합니다. 외식하는 인솔자 일꾼에 속하는데 절대 구원받지 못합니다. 네 번째 부류는 엄중한 과오가 있어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인데 구원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한 적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악을 저질러 하나님 집의 사역에 엄중한 손실을 초래했으며,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엄중한 과오가 있은 후에도 시종 회개하지 않고 큰 악은 저지르지 않지만 작은 악은 끊임없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으면 선행이 조금도 없고, 선행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부류는 이전에 과오가 있는 것으로 인해 소극적이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인데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포자기하면 바보가 아닙니까? 한 숨만 붙어 있어도 노력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선행을 예비해야 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이면 자살과 같습니다! 과오가 있어 늘 소극적이고 자신이 아무리 믿어도 쓸데없고 하나님도 원하시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당신은 결국만을 위해 살고 복 받기만을 위해 삽니까? 이런 사람은 속마음이 바르지 못합니다. 언제나 복을 받는 것만 위하는데, 사람이 복을 받으려는 속마음이 너무 심하면 쉽게 소극적이 됩니다. 복 받는 것을 위하지 않고 사람됨만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합니다! 개인의 속셈과 목적이 없고 광명정대하고 마음이 떳떳하면 소극적이 되지 않습니다. 알아들었겠죠?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여전히 너희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다. 이것으로써 너희의 결말을 정한다.” ‘각 사람’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겁니까? 인솔자 일꾼 중의 각 사람입니까 아니면 집을 떠나 본분을 하는 각 사람입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는 모든 각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각 사람에게 다 관심을 기울이시지 일부분 좋은 사람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결국을 정하실 때 모두 아주 진지하시고 아주 책임지십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고 좋아하시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한 분의 하나님이신데 일하시는 것이 너무 실제적이고 너무 진지합니다. 우리 사람이 일하는 것은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지만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고 죽든 살든 상관치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와 거리가 너무 멉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하나님은 너무 사랑스러우시고 너무 공의로우셔서 각 사람의 결국을 모두 진지하게 대하시고 모두 정확하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시는데 사람을 심복구복하게 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각 사람을 대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성품에서는 하나님에게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시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그분이 마음에 들어하시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표현에 대해서는 아주 진지하시고 모두 책임지시며 모두 공평하게 하나의 결론을 내려 심복구복하게 하시고 할 말이 없게 하시며 하나님이 너무 좋고 사람에 대해 너무 공평하다고 느끼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입니다. 사람이 이 점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너무 좋으시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너무도 합당하시며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러우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인식이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과오를 좀 범한 후에 “끝났어! 난 과오가 있어 아무리 믿어도 좋을 리 없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믿어도 좋을 리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큰 정죄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당신이 상상한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만약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된다면 한평생 통회할 것입니다. 지금도 “나는 과오가 있어 아무리 믿어도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말을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회개할 줄 모릅니까? 왜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미봉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제일 선하시고 제일 공의로우시다는 것을 모르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신 점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어느 한 사람에 대해 탄복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품이 너무 좋고 너무 정직해.” 그럼 이 사람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에 비하면 천양지차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느 사람을 제일 탄복해도 그 사람의 모든 행위와 성품은 하나님과 비하면 천양지차여서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도 ─사람들이 제일 좋다고 여기는 사람도─ 하나님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숭배하지 마세요. 제가 사실대로 알려 드리죠. 하나님만이 제일 좋으시고 하나님만이 제일 사랑스러우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경력해 보세요. 그럼 어느 날엔가 당신은 하나님이 제일 좋으시고 하나님이 제일 사랑스러우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 해답
【115-A-6】
문제 (1) 좋은 귀숙을 추구하는 것과 복 받기를 추구하는 것에는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복 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상관치 않고 복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자신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돼야 할지, 어떻게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야 할지, 어떤 인생 가치를 살아내야 할지도 관심이 없고 복 받기만을 위하는데, 이 속마음은 틀렸습니다. 사람의 정확한 추구는 마땅히 첫째는 진리와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둘째는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고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셋째가 비로소 자신의 귀숙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면 맞습니다. 만약 첫째, 둘째, 셋째가 전부 복 받기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끝난 것이고 버려진 것이며, 너무 이지가 없고 인성이 없습니다. 복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데 이것은 정신병이 있는 게 아닙니까?
문제 (2)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의 관용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씀셨는데 “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는 사람”, 이런 정형에 대해 분명하지 못한데, 교통해 주십시요.
다음과 같이 답변함: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으면 얼마나 큰 나쁜 일을 저지르고 얼마나 큰 악을 행했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진리가 없어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아들딸로서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면 또 모친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얻을 수 없습니까? 사람과 사람 간에는 정이 있습니다. 부자간, 모녀간 또는 자매간이든, 그 관계는 모두 선이 있습니다. 만약 그 선을 넘으면 부자간, 모자간의 관계가 제일 정이 깊다 해도 파열됩니다. 아들딸로서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으면 선을 넘은 것이 아닙니까? 선을 넘었으면 끝난 거지요. 모친도 그 자식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일을 하면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고 그 선을 넘게 될까요? 예컨대, 모친이 병이 났는데 아들이 작은 돈을 들여 간단하게 치료해서 병을 잘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아들이 이유를 댑니다. “나 돈이 없습니다. 우리 집도 생활해야지요!” 이 일은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아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아주 부유하고 돈이 아주 많은데 모친이 병이 난 것을 보고도 상관치 않으며 돈 한 푼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건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그 아들은 일부분의 돈을 내고 나니 돈이 얼마 없고 남은 돈도 자신의 생활비나 되니 모친의 병을 치료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래도 괜찮은데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후의 그 아들은 한 푼의 돈도 내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모친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 그 모친이 아들을 찾아가 “아들아, 문 열어라!”라고 하면서 문을 두드리니 아들이 나와서 “난 당신을 몰라요, 어디서 온 거지야? 빨리 여기를 떠나요!”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네.) 그리고 또 한 아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 모친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개까지 풀어 물게 한다면 이것은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네.) 그럼 이런 아들이 만약 어느 날엔가 모친 앞에 와서 무릎 꿇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이전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돈 많았는데 병을 치료해 드렸어야 했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문 두드릴 때 쫒아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또 “개를 풀어 물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것이 쓸데있습니까? (쓸데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던 연고입니다. 모친의 마음은 이미 몹시 싸늘해졌습니다. ‘이놈은 늑대이고 짐승이야! 인간이 아니야! 난 이런 놈을 인정하지 않아. 내가 인정하면 쪽팔릴까 봐 싫어!’ 사람 간의 거래는 선이 있고 사람의 용서와 인내도 선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긍휼은 선이 없겠습니까? 당신이 어떤 일을 하면 이 선을 넘어 하나님께서 다시는 당신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까요? 바로 그 일을 한 것이 너무 인성이 없고 정말로 이치에 어긋나 사람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것에 속합니다. 마치 아들딸이 부모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여 무엇을 해도 부모가 다 용서해 주지 않는 것과 같지요. 그럼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일을 저지르면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인지, 예를 들어봅시다! 바리새인들이 메시아가 임하시기를 기다리면서 도리어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제물을 몇 십만 위안이나 훔쳐간 건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큰 붉은 용에게 가서 하나님을 팔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라 말하고 자신은 속임수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가 악을 많이 저지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선행은 조금도 예비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부당한 이득만 챙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과 먹고 입는 걸 비기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너무나 이지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작은 일을 하고 무슨 공헌이 있다 해서 하나님과 비길 자격이 있습니까? 사람은 이 자격이 없습니다.
【115-A-7】
문제 (3) 매번 시련과 연단 혹은 심판과 형벌, 수리와 대처가 임할 때, 언제나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방비와 의심을 유로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도태시키려 하신다고 느껴져 연후에 아주 소극적이 됩니다. 며칠 소극적이 되다가 그 후에야 천천히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환경에서 먼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정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언제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방비하는 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은 사악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언제나 하나님과 싸우고 언제나 하나님과 엇서고 언제나 하나님과 겨룹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서로 지낼 때도 언제나 사람을 방비하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당신, 무슨 뜻입니까?”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언제나 싸웁니다. 이것은 정상 인성입니까? 이는 인성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좀 사악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 안에 있는 패괴 인성을 들춰내고 집어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의 그 귀신 본성과 사악한 성품을 해부해야지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고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며 마땅히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말하지 마세요. 그것은 도리이고 쓸모없습니다. “당신은 정상 인성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다 이렇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왜 틀립니까? 베드로는 이렇지 않았고 욥도 이렇지 않았으며 아브라함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시련이 임하면 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싶어 하지 하나님을 방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릇 시련이 임하면 늘 하나님을 방비하는 사람은 모두 궤사한 사람인데 모두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마음속에 자기 자신만 있고 하나님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과 겨룹니다. 무슨 일이 임하기만 하면 먼저 하나님을 방비하고 하나님을 연구하며 ‘하나님께선 무슨 뜻일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임하게 하실까?’라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집니다. 이것은 바르지 않아도 너무 바르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상인이 아니고 귀신 본성입인데, 그 어떤 사람과도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늘 다른 사람을 방비하는데, 마음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더욱이 마음이 떳떳하고 단순하게 마음을 여는 사람도 아닙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낼 때 어떤 말을 하기 좋아합니까? “이 사람은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 약아 빠져 제가 이기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이런 말을 하는데, 무엇을 대표합니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이렇습니다. 서로 겨루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궤사한 사람으로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개 중에서 싸우기 좋아하는 개를 뭐라 합니까? (싸움개입니다.) 싸우기 좋아하는 닭은 뭐라 합니까? (싸움닭입니다.) 그럼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을 뭐라 합니까? (싸움꾼입니다.) 이것은 모두 ‘싸움’표가 붙은 것입니다. 공산당은 싸움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공산당은 “하늘과 싸우는 그 재미 끝없고 땅과 싸우는 그 재미 끝없고 사람과 싸우는 그 재미 끝없다.”라고 말하면서 날마다 사람과 싸우고 사람이 많을수록 더 싸우게 됩니다. 큰 붉은 용은 전문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싸우는데, “하늘과 싸우는 그 재미 끝없다”라는 큰 붉은 용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늘 하나님과 싸우고 늘 하나님을 방비하고 늘 하나님을 의심하는데, 어떻게 해결할까요? 하나님과 싸우지 마세요. 하나님과 싸워 좋을 것 없고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당신은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많이 저질러 하나님이 보응하시면 끝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이 싸우기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싸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당신은 늘 싸우려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연구하지 마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 자주 접촉하다 보면 사람이 안 좋고 사람에게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사랑이 있는데도 당신이 알지 못하면 안 되지요. 당신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고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어. 그래서 나는 진심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해야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다 사람을 정결케 하시기 위한 것이고, 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며, 다 사람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이고, 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간증을 굳게 서서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을 받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지 하나님과 싸우지 마세요. 하나님과 싸우는 것은 정상 인성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싸울 생각을 합니까? (안 합니다.)
문제 (4)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서 너희의 모든 행위는 완전히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의 믿음과 사랑은 다 텅 비었고 단지 비겁함이나 강인함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단지 아주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단지 비겁함이나 강인함을 드러낼 뿐이다”라는 이 말씀에 대해 모르겠습니다. 교통해 주십시요.
다음과 같이 답변함: “환난 가운데서 너희의 모든 행위는 완전히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 대해 하신 걸까요? 바로 환난 가운데서 굳게 선 사람들인데, 이 하나님 선민들의 표현을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표현한 것은 괜찮지만 완전히 적합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바람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괜찮다고도 하고 완전히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리고 말합니다. 이 환난은 어느 때를 가리킬까요?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언제일까요? 1996년, 중공 정부가 무릇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한 차례의 대환난이었습니다. 1996년에 하나님 선민들이 대환난을 겪고 1997 년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발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92 년입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고작 4년인데 표현한 것이 어떠했습니까? 다만 비겁함이나 강인함, 이런 단순한 표현이었을 뿐 진실한 믿음과 사랑은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4년 된 분량은 바로 그렇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로 욥의 그 진실한 신심을 구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구비한 믿음은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고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말씀을 발표하신 것을 시인할 뿐이지 진실한 믿음은 아직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진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사랑은 사람에게 없고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표현한 것에서 뚜렷한 것은 비겁함과 강인함이었습니다. 여기의 “비겁함이거나 강인함”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바로 사람이 굳게 섰고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인함과 비겁함의 2가지 표현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에 대해 단지 아주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만 한다.” 이 아주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는 당연히 너무 높은 것입니다. 사람이 표현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구비하지 못했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아주 좋다거나 나쁘다는 평가를 하셨을까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 분량에 도달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강인함을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좋다고 말씀하셨고, 연약함과 비겁함을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나쁘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너희의 강인함에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으며 다 나쁘고 불합격이며 다 뒤섞임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공의롭고 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의 결함을 말씀하시고 나중에 또 아주 좋다고 평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모두 공평하고 합리적인데,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어 어느 정도에 도달하는지에 근거하고 그 정도에 따라 사람에게 요구하십니다. 알았겠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에 대해 한 방면으로는 공의롭고 한 방면으로는 또 긍휼이 있으며 너무 높게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은 곧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십니다. 당신이 이 일에서 이해할 수 있으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됩니다.
【115-A-8】
문제 (5) 하나님께서 “내가 아직 너희를 떠나기 전에 여전히 너희에게 권한다,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말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과 자신의 귀숙에 대해 유익한 일을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과 자신의 귀숙에 대해 유익한 일을 하여라.”는말씀은 어느 방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내가 아직 너희를 떠나기 전에 여전히 너희에게 권한다,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아주 분명하죠?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시기 전에, 우리를 떠나시기 전에 여전히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부류의 말씀일까요? 이것은 맨 나중의 부탁입니다.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무릇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마세요. 당신이 깨달은 것이 깊든 얕든 당신이 깨달은 데에 따라, 당신이 인정하는 데에 따라, 무릇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마세요. 만약 당신이 꿰뚫어 보지 못하여 구하고 교통하면 도달하는 효과는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어떻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고 어떻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지를 깨닫고 꿰뚫어 보았다면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의 분량이 크든 작든 어쨌든 당신에게 알려 주는데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은 하지 마세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이 ‘모든 사람’은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신 걸까요? 하나님의 선민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모든 사람’은 바로 하나님 선민입니다. 하나님 선민의 정의는무엇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입니다. 적그리스도, 악인, 악령, 그릇된 자는 하나님 선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선민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선민에는 그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교회 중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다수의 사람이 바로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의인데, 알곡을 가리켜 말씀하시고 밀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령, 그릇된 자, 적그리스도, 악인은 모든 사람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가라지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 부정적인 사물일 수 있을까요?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은 틀림없이 진리에 부합되고 틀림없이 긍정적인 사물이며 절대로 하나님께 정죄받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적그리스도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했다고 말하면 이것이 맞습니까? 이는 그릇된 자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선민이 아니고, 하나님 선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인솔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인솔자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하는 일을 당신이 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습니까? (대표하지 못합니다.) 그럼 당신은 누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어느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고, 이것은 일하는 원칙입니다. 하나님 선민이 공인하는 일, 사람의 양심이 공인하는 일은 선행이고 맞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 자신의 귀숙에 대해 유익한 일을 했다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너무 높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이런 터득이 있어야 하고 마땅히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마땅히 이 원칙을 알 것입니다! 당신이 이 제일 낮은 원칙 표준에 따라 하면 틀림없이 좋은 귀숙과 좋은 결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닿을 수 있는 표준으로 요구하시는 것이지 너무 깊은 진리를 실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며, 당신이 꿰뚫어 볼 수 없는 일을 시켜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당신이 했다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한 일을 모든 사람이 좋아할 거라고 당신은 여기지만 모든 사람은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이 사람이 한 일은 원칙을 어겨 우리는 찬성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끝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을 정죄하고 모든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말하며 모든 사람이 당신을 버리는데, 당신이 아무리 당신이 한 일이 진리에 부합된다고 말해도 쓸데없습니다. 하나님 선민의 눈은 밝습니다. 보세요,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교통하라고 하면 잘 교통하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고 마음속으로는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한 것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찬성한다면 당신은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일 낮은 표준입니다. 사람이 제일 알기 쉽고 제일 도달하기 쉬운 말씀으로 해석하시고 부탁하시는데, 당신에게 마땅히 길이 생길 것입니다. 이 말씀도 당신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당신의 터득 능력은 너무 낮고 당신에게 정상 사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여라”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대해 유익하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보에 대해 유익하며 그 외에 하나님 선민의 생활에 대해 유익한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 선민의 집을 헐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도와서 지어 준다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선민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면 “내가 엄호하고 방법을 대서 그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도록 하고 합리적으로 안배해 적어 한 사람이라도 같이 예배드리게 해야지”라고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하나님 선민이 집에서 혼자 답답해 하고 함께 예배 드리며 교통할 사람도 없는데 당신이 “안 돼요, 안전 때문에 혼자 있어야겠어요. 큰 붉은 용이 무너진 다음 모든 사람과 함께 예배 드리세요.”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람에게 유익하겠습니까? 사람의 생명 진보에 대해 유익이 없고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일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 선민이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되어 당신에게 하나님 집에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면 당신은 “몰라요, 제가 소식을 전하다가 일이 나면 어떡해요? 못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일을 하면 맞습니까? (틀립니다.) 이것은 하나님 선민에 대해 유익이 없고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병이 나서 죽게 되었는데도 당신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양심이 없는데,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남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약을 사다 주라고 시키면 당신이 “저는 돈이 없는데요.”라고 하면 선행을 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을 해치는 일은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면 당연히 전해 주어야 하고 당신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도와줘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여라”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라면 어떤 일은 당신이 하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 중의 일부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좀 치우치고 그릇된 것이 아닙니까? 이 ‘모든 사람’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당신은 마땅히 방법을 대서 무슨 일을 하든 다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적그리스도로 정해져 출교당했습니다. 그 사람이 만일 진실한 회개가 있어 당신에게 책 한 권을 달라고 하는데 당신은 “적그리스도는 안 줘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람에게 유익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보지 않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사람에게 한 권 줘서 혹시 그 사람이 그 책을 가져다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증거해 두 사람을 전도했다면 이것도 두 영혼을 구해 죽지 않게 한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왜 사람다운 일을 하지 않습니까? 무슨 규례에 맞춥니까? 바보 아줌마가 영적인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세요. 알겠죠?
“자신의 귀숙에 대해 유익한 일을 하여라.”는 무슨 일입니까? 본분을 하고, 선행을 예비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시련이 임하면 간증을 하며, 수리 대처가 임하면 소극적이거나 연약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여 교훈을 받아들여 진실한 회개가 있는 것은 다 자신의 귀숙에 유익합니다. 이외에 어느 사람이 당신을 수리하고 대처하면 보복하지 말고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하면 틀리고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죄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면 당신은 악인입니다. 당신의 심리상태가 틀리고 마음이 선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귀숙에 불리한 일을 하지 말고 자신의 귀숙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귀숙에 유익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일이고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일이며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저질렀는데 그 사람이 당신과 정이 있고 관계도 좋고 이전에 당신을 도와준 적도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이전에 적지 않은 악을 저질렀는데 어떤 악행은 당신만 압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적발하지도 검거하지도 않으면 이것은 악인을 싸고도는 게 아닙니까? 악인을 싸고돌면 당신의 귀숙에 유익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귀숙에 대해 유익이 없는 일을 당신이 했다면 당신의 결국은 좋다고 할 수 없으며 많이 쌓이면 당신의 결국은 없어집니다. 즉 당신을 지옥에 보낼 것입니다. 당신은 바보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귀숙을 위해서라도 악인과 계선을 나누고 악인과 결별하며 진리 원칙을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귀숙에 유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다.” 무엇을 재난이라고 합니까? 갑자기 온역이 닥쳐 다른 사람은 안 걸렸는데 당신이 걸렸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걸린 겁니까? 재난은 눈이 있습니다. 당신이 “재난은 눈이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재난이 왜 눈이 없겠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은 병에 걸리고 한 사람은 병에 안 걸립니다. 총에 눈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총에 눈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허튼소리입니다. 총이야말로 눈이 있지요. 총은 쏴야 할 사람을 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차가 번저져 차 밑에 들어가게 됐어도 공간이 생겨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느 한 번, 한 사람이 길을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와 마주쳤는데 “쾅” 하고 달구지가 그 사람 옆에 번저졌습니다. 마침 달구지에 철사들을 실었는데 한 가가닥이 대번에 그 사람의 종아리를 꿰뚫고 나갔습니다. 그 철사도 눈이 있어 오로지 그 사람의 종아리를 꿰뚤렀습니다. 이것을 뭐라 합니까? 누구도 하나님 징벌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사람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징벌하려 하시면 당신이 평길을 걸어도 곤두박질을 하고 맹물을 마셔도 이에 끼이고 자다가도 바닥에 굴러 떨어져 쥐에게 귀가 물려 뜯깁니다. 그게 좋습니까? 저주받으면 좋을 리 없습니다!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다.” 당신이 이 몇 가지 하나님의 마지막 부탁을 어기면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 일이 임합니다. “재난 속에서 고통받는다”는 무슨 뜻입니까? 징벌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징벌이 무엇인지 모르면 재난이 내릴 때는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아주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아직 정하지 않으시고 말씀뿐이지만 땅을 떠나시기만 하면 재난 속에서 상선벌악하는 사실이 다 임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하나님을 논단한 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저를 징계하시지 않았어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즉시 징계가 임해서 입이 헐기 시작하면서 혀가 썩고 이가 빠지고 말을 못합니다. 무슨 사실이나 다 임하는 것입니다.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다 이런 일이 임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이 도대체 진짜인지 까짜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악을 저질러도 아무렇지도 않고 아주 좋았어요.”라고 말합니다. 아직 시간이 안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시면 선악을 다 보응하십니다! 중국인의 속담에 “선은 선의 보응이 있고 악은 악의 보응이 있다. 보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안 됐고 시간이 되면 무엇이든 다 보응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땅을 안 떠나시면 해는 여전히 아침에 동쪽에서 떠올라 저녁에 서쪽에서 집니다. 이 법칙이 조금도 변함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땅에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세계에 지금 대재난이 임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즉시 형상을 바꾸어 떠나시는데 그때면 무슨 재난이나 다 내리고 무슨 보응이나 다 옵니다. 알아들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