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집 (b) 하나님 말씀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에 관한 설교 교통 (2)
【113-B-1】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실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하고 사람의 의식, 사람의 본성, 사람의 정신면모가 변화되어야 하며 근본상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이래야 사람의 성품이 비로소 진정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의 패괴(역주: 타락, 부패) 성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이 이미 사탄의 독해(毒害)를 받고 사탄에게 짓밟혀 사람의 사상, 도덕, 견식, 이지가 사탄에게 심각하게 파괴된 데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사람의 근본적인 것들이 이미 사탄에게 패괴되어 하나님이 만든 본래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우선 사람의 사상, 견식, 이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고 또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야 한다. 가장 깊이 패괴된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더구나 무엇이 하나님인지 모르고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모르며, 깊이 패괴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인식하지 못하고 깊이 패괴된 사람일수록 그의 이지와 견식은 더욱 부족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 원인은 모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의 패괴로 인해 사람은 양심이 마비되었고 도덕이 타락되었으며 사상이 부패해졌고 정신 면모가 낙후해졌다. 사탄의 패괴를 겪지 않은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순복하는 사람이었으며, 본래 이지와 양심이 건전하고 인성이 정상인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탄의 패괴를 겪은 후에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이지와 양심 그리고 인성은 마비되었고 모두 사탄에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사랑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람의 이지가 정상적이 아니고 사람의 성품도 짐승의 성질처럼 변하여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심해지지만 사람은 여전히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한사코 대적하고 거역하기만 한다. 사람의 성품의 유로(流露)는 바로 사람의 이지, 견식, 양심의 발표이다. 사람의 이지와 견식이 모두 불건전하고 양심이 이미 극도로 마비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성품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품이 되었다. 사람의 이지와 견식이 변화되지 못한다면 성품 변화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의 뜻과 합한다는 것도 말할 나위 없다. 사람은 이지가 건전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받지도 못한다. 정상 이지란 하나님에 대해 순복과 충심이 있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이고 양심이 있음을 가리키며, 하나님에 대해 일편단심이고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대적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비정상적인 이지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사탄에게 패괴된 후,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겼고 충심이 없으며 사모하지도 않고 양심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논단할 뿐만 아니라 뒤에서 하나님을 욕하며, 하나님인 줄 뻔히 알면서도 뒤에서 논단하며, 순복하려는 뜻은 아예 없고 줄곧 하나님께 토색하고 요구할 뿐이다. 이지가 건전하지 못한 이런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패역한 행위를 뉘우치지도 못한다. 만일 자신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이지가 약간 회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이지가 건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이 말씀을 읽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를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은 소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얻는 것이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에 어떤 뜻이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긍휼이 여기시는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지, 어떤 사람을 인성 있는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을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 하는지 이런 일들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다면 이건 어떤 문제일까요? 소질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통을 들어도 그 어떤 명확한 효과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소질이 있는 것과 소질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교통을 듣고 나서 순수한 터득이 있는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만약 이 몇 가지 방면에 효과가 있으면 그 사람은 소질이 있는 사람이고, 만약 이 몇 가지 방면에 효과가 없다면 그 사람은 소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정말 오래 믿었다 해서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단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소질이 뛰어나고, 인성 있는 사람만 전해야 한다고 할까요? 그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성이 안 좋거나 소질이 낮은 사람을 전한다면 그런 사람은 믿어도 헛믿으므로 구원을 못 받습니다. 이 일을 아시겠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변화가 조금도 없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런 본분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폐물이고 쓰레기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늘 악을 행하고 교회에서 방해하고 가로막는 사람은 인성이 없는 짐승이고 야수로,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실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하고 사람의 의식, 사람의 본성, 사람의 정신면모가 변화되어야 하며 근본상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이래야 사람의 성품이 비로소 진정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사람의 성품이 변화됨에 있어서 먼저 자신의 본성 실질과 패괴 진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합니다. “사람의 실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그럼 인류의 실질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는데 정상 인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상 인성이 없는 건 어떤 표현들이 있습니까? 본성 실질이 사탄의 실질이고 사탄의 본성이며 정상 인성의 실질이 아닙니다. 사탄의 본성이 있는 사람에게 있어 그 사람이 유로(流露)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부 사탄의 성품입니다. 사람이 좋게 보는 그 부분마저도 다 사탄의 성품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랑이 좀 있고 어떤 때는 좀 봉헌하며 어떤 때는 고통을 좀 받고 어떤 때는 대가를 좀 치르며 어떤 때는 버릴 수 있는데, 여기에 뒤섞임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뒤섞임이 있을까요? 그건 사람의 실질은 이미 사탄 본성의 실질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내는 것과 유로하는 것은 다 사탄의 성품이고, 사람의 실질은 정상 인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는 좋은 일이나 좋은 표현에도 틀림없이 사탄의 성품이 뒤섞여 있습니다. 사람의 속마음, 사람이 받는 고통, 사람이 지불하는 대가, 사람의 사랑에는 다 사람의 뒤섞임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복을 받으려는 속셈의 뒤섞임이고, 어떤 것은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며, 어떤 것은 허영심과 체면을 위해서이고, 어떤 것은 상을 받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이며,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 동정을 얻기 위해서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의 뒤섞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제가 하나님을 위해 버리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로, 뒤섞임이 조금도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은 진심이고, 하나님께 순복함에 있어서는 거래하거나 토색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겉보기엔 아주 좋고 뒤섞임이 조금도 없어 보이고 사탄에게 패괴된 것 같지 않고 혹은 참으로 온전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온전케 됐다 해도 뒤섞임이 조금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이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다 긍정적이지만 그 긍정적인 가운데도 사람의 편차적인 터득이나 얕은 터득 혹은 좋은 마음이나 선의 등등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생명 성품의 변화에 도달함에 있어서 만약 이런 사실의 진상을 모른다면 변화되는 길이 있을까요? 변화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시종일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변화가 있을까요?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사역하면 어떤 성품들을 유로하고 어떤 표현들이 있을까요? 첫째,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자신은 뭐든 다 좋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은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며 자신을 나태내기 좋아하고, 자신을 증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과대 평가를 받기 좋아하며, 심지어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여 사람들에게 숭배와 순복을 원합니다. 셋째,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혹 마음으로 자신에게 패괴가 있다고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허영심과 체면이 너무 강해 자존심이 상할까 봐 변명하고 위장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가상을 보여 주고 진상을 감추기 좋아합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 세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여 성품 변화에 도달하려면 왜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만약 자신을 알게 된다면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고,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또 한 방면의 실제입니다. 정말 자신을 확실하게 알고, 자신의 본성 실질과 진상을 보고, 자신의 유로와 말과 행위가 다 사탄의 성품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요? 그렇게 교만하지 않고 그렇게 독선적이지 않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고 단지 은사와 지식이 좀 있고 언변이 좋을 뿐 본성은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도 없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마귀 사탄에게 속하는 사람이고 짐승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겸손하게 낮아지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것을 봤다 해도 자신보다 별반 차이 없다고 여기며, 본성은 다 비슷하고 단지 겉면의 지식의 차이와 생김새의 차이, 각종 서로 다른 은사의 차이만 있을 뿐 본성 실질은 다 똑같은 꼬락서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여전히 교만할까요? 여전히 자신을 내세우려고 할까요? 만약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떤 일을 잘못하면 터놓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본성을 뭐 감싸고 숨길 게 있어요? 누가 모르겠어요? 누가 간파하지 못하겠어요? 감싸고 있으면 답답하고 숨기고 있으면 역겨워! 다른 사람들은 다 털어놓는데 내가 그러지 않는다고 더 좋은 것도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고 ‘난 정말 깊게 패괴되었구나, 이런 일들을 하면 뒤섞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이기적이며 비열해! 이런 꼬락서니인데 빛을 못 볼게 뭐가 더 있을까? 드러내면 마음도 시원하고, 얘기하며 마음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개운하고 속도 편해! 감싸고 숨기고 감출수록 마음이 더욱 편치 못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워 해방받지 못해. 결국 감쌀수록 더 흘러나오는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털어놓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아, 저 사람도 저렇게 경력했구나! 나도 저렇게 경력했는데’라고 느끼면서 마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 영 안이 곧 자유롭고 해방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실한 말을 하면 마음에는 어떤 느낌이 들죠? 외식하는 말을 하면 어떤 느낌이 들죠? 같은가요? 진실한 말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환하며 자유롭고 해방받으며 부담이나 염려가 조금도 없고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만약 가식적인 말을 하면서 감싸고 숨기면 마음이 답답하고 찝찝하며 수치스럽게 느껴지는데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들키거나 남의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이건 어떤 느낌이죠? 누림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대부분 다 마음을 털어놓기 원하고 사람들과 마음속의 말을 하기 원하며 자신을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일에서 어떻게 유로했는지를 말합니다. 처음에 그렇게 하면 분별이 없고 느낌도 없지만 몇 년을 믿고 나서 그렇게 하면 분별이 생기고 느낌이 있게 되면서 그것이 패괴 성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느끼고 인식하고 나서 형제자매들과 말하고 나면 마치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하고 큰 병이 나은 듯하여 마음이 환해지고 편해지며 안심되고 평안해집니다. 만약 더 많은 일들이 닥쳐도 이렇게 교통한다면 이걸 뭐라고 하죠? 자유롭고 해방되어 더 이상 당신을 속박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113-B-2】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해 알게 된 후에 형제자매들과 교통을 하면 어떤 방면의 효과를 가져올까요? 이후에 임하는 일에서 자신을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방면에서 유로한 패괴 실질이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임을 인식했고, 다음에는 저 방면에서 말하며 유로한 성품이 교만하고 자대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또 한 가지 방면을 인식할 거야. 마음의 것을 털어놓지 않고 간사함을 띠고 기만하고 위장하면 왜 외식하는 느낌이 들지?’ 보세요,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점점 예리해져 뭔가 유로하면 영 안에서 바로 의식하게 됩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바로 교만하고 자대하는 성품이 나오고, 한 가지 표정이 나오면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이면서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고, 한 가지 속셈이 나오면 바로 이기적이고 비열하다는 걸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이 정도로 예민하다면 이건 어떤 표현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늘 빛 비춤이 있고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의 일언일행을 비춰 보면서 심령의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단 자신의 패괴 유로를 발견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의 원칙을 구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시작이 아닙니까? 이것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걸 발견합니다. ‘저 사람은 자신을 알아감에 저렇게 예민한데 난 왜 안 될까? 난 패괴가 유로되는 일을 하루에 한두 가지도 발견하지 못하는데 저 사람은 하루에 10~20가지나 발견하니 말이야. 에휴, 저 사람은 왜 저렇게도 인식을 잘 할까?’ 이건 어떤 문제일까요? 일반인은 하루 동안 기껏해야 ‘저는 그 일에서 패괴를 유로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그럼 다른 일에서는 유로한 게 없어요?”라고 물으면 “네,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자신에 대한 인식이 너무 얕고 진리가 없네요! 그렇게 뚜렷한 일에서만 겨우 보고 마음과 생각에서 흘러나오는 건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냥 조금만 유로했다고 하는데, 정말 일을 너무 쉽게 보는군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까지 되셨나요? 만약 정말 자신에게 하루에도 많은 패괴 성품이 유로하는 것을 알고 겉으로는 어떤 나쁜 일을 한 것도 없지만 속셈과 목적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본성 실질을 알고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에서도 이런 문제의 실질을 안다면 그 사람의 생명 경력은 이미 실제에 진입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 이렇게 예리하면 이 사람의 생명 성품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깊게 경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알아가는 일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방면에서 이렇게 세세하게 진입할 수 없습니다. 무릇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 예민하지 못하고 단지 나쁜 일을 저질러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야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할 뿐이라면 이것은 어떤 정형입니까?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깊을까요 아니면 얕을까요? (얕습니다.) 행위를 발견해서야 알게 되고 마음과 생각 그리고 말할 때 유로하는 표정에서 알 수 없고 해부할 줄 모른다면 자신을 아는 것이 좀 얕고 금방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 성품이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생명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할까요? 예를 들어 사람이 교만하고 독선적이면 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그렇게 교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을까요? 이런 일들은 확실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자신이 경력했으면 말해 낼 수 있지만 경력하지 못한 건 말해 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걸 물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건 어떻게 대답하지?’라고 생각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건 어떤 문제일까요? 경력한 것이 아직도 얕다는 것입니다. 깊게 경력했으면 어떻게 대답할지를 압니다. 사람의 경력이 깊고 얕음은 어떤 그래프에 근거해 측정할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정도에 근거해 결정합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함의 깊고 얕음은 무엇에 근거해 측정할까요?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함의 파악 정도에 근거합니다. 어떤 일들에서 이미 정확하게 원칙을 파악하여 확고부동하게 되었는지, 어떤 일들에서 아직 원칙 있게 하지 못하고 아직 규례만 지키고 있는지, 이런 정도에 근거해 사람의 생명 진입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에 근거해 결정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순복과 경외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뻐하시고 베드로를 기뻐하시고 욥을 기뻐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죠? 일반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들인가요? 그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그 사람들은 다 가장 좋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품행을 보면 우리는 부끄러워집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기뻐하십니까? 아브라함과 욥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서 보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고 마지막에 간증을 굳게 서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천국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 천국으로 들림받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최종에 생명 성품의 변화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고 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는 이런 효과에 도달한다면 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품을 논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인정하고 진심으로 탄복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역사를 오랫동안 경력하여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고 각종 시련과 연단을 받은 후에 도달한 변화를 보고 그 방면의 효과를 본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우세한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사람들의 우세한 점은 선천적인 인성입니다. 그 사람들은 얕게 패괴되었고 인성이 너무 좋으며 우리보다 훨씬 좋습니다. 우리는 뭐 자랑할 만한 게 없고 단지 좋은 때를 만나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파격적으로 끌어올려 주셔서 그냥 덕을 보게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과 시련 연단을 경력하여 우리는 운 좋게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었고 조금의 변화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또 어느 정도 간증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세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품이나 인성을 말하면 그들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고, 먼저의 성도들과 비하면 너무도 차이 납니다. 그럼 바리새인과 비교한다면요? (부족합니다.) 어디가 부족하죠? 바리새인들은 나쁘기 그지없는데 우리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쁘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럼 이 일은 간파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충성심을 우리가 비길 만할까요? 바리새인들은 규례를 아주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고 언제든지 굳건하게 지키면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장점에도 우리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단점보다도 별로 더 나은 점이 있기나 할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그런 배경이라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가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신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고 저주를 받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요? 그들보다 어디가 더 나은가요? 별로 낫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였으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만약 종교에 남아 있다면 그들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들보다도 못합니다! 그럼 우리가 바울보다는 어떨까요? 바울이 생명 성품이 변화가 됐는지 안 됐는지를 떠나서 바울은 마지막에 주님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그냥 여기서만 봐도 우리는 바울보다 별로 나은 점이 없습니다. 바울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자신을 분명하게 알면 이런 일들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여전히 교만하고 자대하며 여전히 독선적이고 자신이 역대 성도들보다는 못하지만 바리새인이나 바울보다는 좀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진리를 깨달은 깊이가 기준에 도달했을까요? 자신을 아는 깊이가 기준에 도달했을까요? 자신의 실질을 꿰뚫어 보았을까요? 자신이 대체 어디가 부족한지, 어떤 진입이 있는지, 어떤 실제가 있는지, 이런 일들을 다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생명 성품의 변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 성품의 변화는 어떤 기초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하죠? 전적으로 자신을 아는 정도에 따라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깊게 알면 변화가 크고, 얕게 알면 변화가 작습니다. 만약 정말로 인식이 조금도 없다면 변화도 전혀 없습니다. 만약 아주 깊게 알고 아주 실제적이면 진실된 변화가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변화되는 건 아닙니다. 오늘 알았다고 해서 지금 바로 변화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80% 알고 20% 변화되어도 괜찮습니다. 그건 경력하는 과정이 있고 변화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식하고 나면 의식과 관점, 긍정적인 사물과 일처리 원칙들이 점차 형성되는 것입니다. 형성된 후 효과에 도달하면 그게 바로 변화의 진실된 효과입니다.
【113-B-3】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실질을 아는 것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아주 실제적이고, 사람에게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길을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교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통하면 두드러지는 부분이 몇 가지 있나요? 첫째, 자신을 아는 데 두드러져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데 두드러져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는 데 두드러져야 합니다. 넷째,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 두드러져야 하고 바른 생각과 관점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몇 가지가 두드러지면 사람의 생명 진입은 실제에 들어갔고 효과가 있습니다. 이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파악해야 할 원칙 즉 하나님의 말씀을 교통하는 네 가지 원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도 자신을 알아가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보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이후에 어떤 원칙에 진입하기를 실행해야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이 몇 가지 방면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건 바로 이 네 가지 방면의 효과가 아닌가요? 이 네 가지 방면에서 하나도 두드러지지 못한다면 다 빈말이고 의의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고 우리는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길은 자신을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확히 보셨겠지요? “사람의 의식, 사람의 본성, 사람의 정신면모가 변화되어야 한다”, 사람의 의식에서 먼저 자신을 알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뀌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면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정신면모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만약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사탄의 성품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은 바뀔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될 리가 없습니다. “근본상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이래야 사람의 성품이 비로소 진정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변화’는 주로 어떤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까? 사람 안에 있는 실질, 가장 중요한 것,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들이 해결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강산은 바뀌기 쉬워도 사람의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본성은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건 본성이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 절대 변화되지 못하는 부분은 본성이 아니라 사람의 성격입니다. 천성적으로 활달한 사람은 영원히 활달하고, 천성으로 내성적인 사람은 영원히 내성적이며, 천성적으로 시원시원한 사람은 영원히 시원시원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젊어서부터 노년까지 아무런 변화도 없나요?”라고 물어봅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게 아닙니다. 질은 변하지 않지만 양만 변한 것입니다. 즉 젊었을 때 유치하던 데서 노년이 되어 성숙해지지만 성격의 실질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활달하고 유치하지만 나이가 들면 활달하고 성숙되는데, 그냥 이 정도의 변화입니다. 젊었을 때 어떻게 생겼으면 나이가 들어도 그대로입니다. 변하나요?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는 잘 생겼는데 노년에 가서는 못생겨졌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검버섯이 생기는데 이것은 피부가 노화된 것이지 못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골격이나 주요한 오관은 원래 그대로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 성품의 변화는 본성 실질의 변화를 대표할까요? 본성 실질의 변화에는 성격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원래는 사탄에게 속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속하고, 원래는 사탄 본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리가 있으며, 원래는 사탄을 따르고 사탄에게 순복하고 경배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따르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며, 원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생명 성품의 변화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생명 성품의 변화는 사람의 본성 실질의 변화를 대표하지 않습니까? 조금도 차이 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원래는 사탄을 숭배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며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며 처세철학을 보면 “사람은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 “마음을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고 새는 먹이를 위해 죽는다” 다 사탄의 논리와 사탄의 법칙입니다. 근데 지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건 마귀야,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건 *천경지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이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전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 성품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까? 원래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해 분투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수고하며 생명이 멈추지 않는 한 그 분투도 멈추지 않고 숨이 있는 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위해 의의 있는 일을 합니다. 이런 것이 생명 성품의 변화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생명 성품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요? 숨이 하나라도 붙어 있으면 자신을 위해 살고 숨이 하나라도 붙어 있으면 자녀를 위해 살며, 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녀를 위해 남기고, 한 걸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자신의 명리를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사탄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삶의 법칙은 누구를 위해 사는 것입니까? 자신을 위해 살고 사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요?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살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기 위해 살며, 간증을 굳게 서기 위해 살며,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삽니다. 이는 생명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까? 자신을 위하지 않고 진리를 얻기 위해 살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살면 이런 사람은 이기적에서 고상함으로, 평범함에서 위대함으로, 치욕에서 영예로움으로, 불행에서 행운으로 변한 것입니다. 원래는 사탄에게 말세에 이르기까지 패괴되어 다 불행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운이 좋게 하나님을 위해 화비(역주: 헌신, 소비)하는데, 하나님께서 파격적으로 높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숨이 하나라도 붙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야 하고, 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 복음 확장을 위해 써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제 무엇을 생명 성품의 변화라 하는지 아셨습니까? 여전히 그 사람이고, 말하는 목소리도 예전과 같고, 성격도 별다른 변화가 없고, 상대적으로 조금 성숙했을 뿐이지만 생명 성품은 정말로 변화가 생겼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아름다운 증거를 하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수고하고 사역하고 화비하고 대가를 지불하며, 인생의 목표가 생기고, 돈과 지위를 위해 살지 않고, 육체의 누림을 위해 살지 않으며, 더욱이 자녀를 위해 살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존엄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사는 걸 원하십니까? (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 할까요? 자신을 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을 더 깊고 더 확실하게 알수록 생명 성품의 변화가 더 빠르고 더 크고 효과가 더 좋습니다. 자신의 본성 실질에 대해 더 깊고 더 확실하게 알수록 자신의 부족한 점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더 갈망하고 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향상하려는 심지가 더 커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며 속박받지도 않게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진리를 추구할수록 효과가 더 좋아지고 더 크게 변화됩니다. 보세요, 지금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추구하면 힘들지 않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어떤 충격을 받고 좌절을 당해도 넘어지지 않고 반드시 일어설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일이 닥치고 어떤 속박을 받든 하루이틀 소극적이 되다가도 3~5일 정도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또한 어느 인솔자 일꾼이 그 사람을 억눌러도 속박받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솔자 일꾼과 이런 일이 임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먼저 자신을 알고 보자.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진리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다른 문제니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이고 배워야 할 공과나 배우자. 늘 다른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를 연구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실용적인 걸 얻어야지. 다른 사람이 잘못된 걸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그러지 못하면 자신의 공과나 잘 배우지 뭐! 그러면 이 방면에서 먼저 생명의 진리를 얻을 수 있어.’ 이렇게 실행하면 어떤가요? (좋습니다.)
*천경지의: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나 법칙을 뜻함. 천경지위라고도 함.
【113-B-4】
어떤 사람은 일이 닥치면 자신이 먼저 진리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옳은지 그른지를 연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는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남의 일에만 참견하고 다른 사람이 생명 진입이 있는지, 진리를 실행하는지에만 신경 쓰는데, 이것은 ‘희생’ 정신일까요? 이런 정신을 권장해야 할까요? (권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다 보면 갈등이 생기는 일들이 많은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처리해야 갈등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형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원칙은 ‘일단 이 일을 균형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해결한 다음에 다시 나의 생명 진입을 요구해야지! 내 양심이 평형되고 위로가 된 다음 진리를 추구할 거야.’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든지 일단 이유부터 따집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지 이유도 없이 나보고 순종하라고? 생각도 하지마! 어림없어! 난 이유에만 순종하지 누구한테도 순복 안 해.’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문제입니다.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한 자신을 모릅니다. 그럼 생명 진입이 전혀 없습니다!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성품입니까?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탄 성품입니다. 예전에 저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실패와 하나님의 채찍을 통해서야 나중에 어느 정도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 어떤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까요? 이유를 따지는 것이 맞는지,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성품인지,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지,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인지, 이유를 따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인지,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생명 성품이 변화된 사람인지 이런 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깊이 잘 생각해 보면 이유를 따지는 그 힘이 좀 가라앉고 조용해질 수 있습니다.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의 목은 어떻습니까? 목이 곧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따지고 있을 때면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하여 누구에게도 순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그럼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의 목은 부드럽지 않을까요?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의 목은 부드러워 고개가 숙여지고 거기에 둬 마디 더 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거기에 더 심각하게 말하면 벽에 머리를 박습니다. 정말 자신을 알고 도달하는 효과는 바로 이유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이 맞든 틀리든 먼저 내 자신을 검토하고 먼저 내 자신을 알고 내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른 사람 문제는 나중에 다시 봐야지.’ 이것은 이지(理智)가 있는 것입니다. 이지가 불건전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고 이유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고 이유를 근거로 삼고 이유를 진리로 여겨 순복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에 눈을 떼지 않을 때면 이지가 정상일까요? (비정상입니다.) 무릇 이유를 따지는 사람은 모두 이지가 불건전하고 모두 비정상이어서 마치 술에 취한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사람은 어느 때에 이지가 불건전하고 비정상일까요? 바로 눈을 다른 사람에게 두고 자신의 이유를 따질 때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지 못한 것이며 이지가 불건전한 것입니다. 무릇 이유를 따질 때면 이지가 불건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유로하는 성품은 무엇일까요?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불복하는 것으로, 사탄의 성품을 유로합니다. 사탄의 성품을 유로하면 그 사람이 살아내는 것은 사탄의 추태가 아닐까요? 어떤 성품을 유로하면 바로 그런 형상을 살아내는데,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생명 성품에서 어디가 변화되기 가장 어렵습니까? (패역 성품입니다.) 사람의 성품이 패역한데 그 패역의 초점이 바로 이유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유가 안 되면서도 자신을 위해 억지로 이유를 따지고 이유를 대는데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은 이유가 있으면 따지고 이유가 안 돼야 부끄러움을 당하고 복종하게 되는데, 이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런 이유가 안 될 때면 조용합니다. “이거 당신이 한 게 맞나요?” “네.”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잘못됐네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다 인정합니다. 일단 이유가 있기만 하면 이렇게 순복하지 않습니다. ‘이 이유를 말하지 않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면 값어치가 없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이유를 반박해서 없애고 그 사람의 요해처를 적중하여 날선 검과 같이 그의 아픈 곳을 찌르면 그 때에야 ‘이유가 안 돼! 잘못됐고 패역하구나!’라고 부끄러워하면서 눈물 콧물을 흘립니다. 이런 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거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유를 따지는 그 사람의 고집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솔자 일꾼들은 제가 대처ㆍ수리(역주: 교훈ㆍ질책)를 하면 잘 순복하면서 맞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개서를 썼는데 제가 보니 정말 자신의 요해처를 제대로 인식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겉으로는 순복하지만 회개서를 쓴 것을 보면 아무 인식도 없습니다. 아무 인식이 없으면 겉으로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맞서지 않았다 해도 속으로는 적게 따지겠습니까? 뒤에서는 적게 따지겠습니까? 틀림없이 적지 않게 따졌을 것입니다. 그건 회개서를 보면 전혀 인식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로봇도 아니고 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속에서는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생각도 끊임없이 움직일 것입니다. 근데 어떻게 따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럼 이런 패괴 성품과 사탄의 본성은 어떻게 하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변화해야 할까요? 도리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본성 실질을 알아가는 것에서 중요시하고 착수해야 합니다. 중점적으로 어떤 것을 해결해야 할까요? 이유를 따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해결해야 할까요? 이유가 있어도 따지지 않고 자신을 알아간다면 변화된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진리 실제 그러니까 이 정도로 순복하기까지는 8~10년의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저도 이렇게 경력해 왔습니다. 변화되어 일정한 효과에 도달하면 이유가 있어도 입으로 말하지 않고 다음에 자신을 알아갈 때도 그렇게 알아가고 순복해야 할 때면 순복할 수 있고 소극적이지 않지만 속으로는 이유를 조금 따지긴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속으로도 따지지 않으면 정말 성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쉬울까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8~10년의 노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저는 마귀 사탄입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한바탕 울고 나면 끝납니다. 소극적이지도 않고 연약해지지도 않습니다. 이러면 자신을 진실되게 알았다고 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문제의 실질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이유를 따지고 있나요?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네, 아직도 따지고 있어요.” “그럼 이 문제 해결된 거 맞나요? 왜 아직도 이유를 따지시죠?” “그 일은 정말 아직 확실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고려해 보지 않았네요.” “그럼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데요? 왜 확실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시는 거에요? 속으로는 이유를 따지고 있는데 이것은 문제가 아닌가요? 이러면 절대적인 순복이 있나요? 정말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 없나요?” 그럼 자신을 어느 정도로 알아야 정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일까요? 패역 성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다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깊이를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경력한 것이 얕습니다. 만약 진리를 아는 사람이 조금 귀띔해 주면 “아, 맞는 말이에요. 저는 경력이 너무 얕아서 아직 그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는데 그건 규례적인 인식이지 실질적인 것은 아직 알고 있는 것이 얕습니다. 실질적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면 겉으로 순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고난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인내할 수 있는지 없는지, 충성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만족해 하지 않고 성품상에 아직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근원을 파악할 수 있고 근원과 핵심을 파헤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헤치고 나면 자신이 겉으로 유로하는 성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안에 아직 어느 정도 이유가 있고 꼬리만큼 남아 있다면 그다지 깨끗하지 않습니다. 패괴 성품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끝난 것이 아니고 아직도 더러움이 있고 아직도 패역이 있습니다. 겉으로 유로되는 일에서 원망이 전혀 없고 절대적으로 순복하며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고 불평이 없을 때가 되면 자신을 아는 것이 비로소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생명 성품의 변화가 비로소 철저하게 효과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3-B-5】
“사람의 의식, 사람의 본성, 사람의 정신면모가 변화되어야 하며 근본상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이래야 사람의 성품이 비로소 진정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변화에 도달하는 것은 몇 가지 방면일까요? 사람의 의식, 사람의 본성, 사람의 정신면모입니다. 사람의 의식 방면의 변화는 어떤 변화입니까?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뀌고, 정확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세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으면 의식 방면에서 뚜렷한 변화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고 본분을 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영적 도리만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상의 진실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가장 좋은 효과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뀐 건 대단한 것입니다. 그건 의식상의 변화입니다. 원래는 입만 열었다 하면 사탄의 논리를 꺼냅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 “사람의 혼인, 사람의 사생활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사랑은 죄가 아니다”라고 아주 조리 있고 부러지게 말하는데 마치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이치인 것 같습니다. 함부로 음란을 하고도 사랑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사악을 숭상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사람은 무엇이 사랑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면 왜 서로 칼부림합니까? 바로 전에 음란을 하고 나서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면 범죄가 아닌가요? 내연녀가 되는 건 범죄가 아닌가요? 음란으로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사랑인가요? 이방인들은 사랑을 알고 있나요? 그들은 성행위를 사랑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가장 큰 잘못이고 가장 크게 그릇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을 말할까요? 의식과 인성의 각 방면에서 사람에게 더 큰 유익을 얻게 하고 진정한 도움을 얻게 하며,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진정한 인생길에 들어서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만약 사람을 정욕으로 이끌고 세상으로 이끌며 죄악으로 이끌고 지옥으로 이끈다면 그것이 사랑일까요? 그건 사람을 해치는 것이고 사람을 망치는 것이며 사람을 잘못되게 인도하는 것이고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식의 앞날을 위해 자녀를 세상으로 이끌어 가면서 ‘난 우리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뼈가 부서져도 돈을 벌어서 뒷바라지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엔 지옥까지 뒷바라지해 줍니다. 그리고는 자식에게 “엄마 아빠가 하나님을 믿는 건 어쩔 수 없어서야! 이번 생에는 출세하지 못했고 앞날도 창창하지 못해 하나님을 믿는 거야! 너는 출세도 할 수 있고 앞날도 창창하니 하나님을 믿으면 안 돼! 먼저 공부부터 하고 출세부터 해야 돼!”라고 말하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그건 가짜 사랑으로, 정말 해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속마음과 목적이 다 잘못됐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셔! 정말로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단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얘, 이젠 다 컸고 철도 들었으니 빨리 하나님 믿고 본분 하거라! 세상에서 되는대로 살지 말고, 대학을 나와도 쓸모없어, 대학 졸업하기 전에 재난이 내릴 거다.”라고 말하면서 본분을 하라고 내보냅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 해외로 나가서 본분 하거라! 여긴 지금 환경이 열악하니 자칫해서 잡혀가면 큰일이야! 집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진보도 느리고 해외로 나가 본분 하면 장래성이 있어!” 이것은 자식에 대한 참된 사랑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무엇을 통해 도달할까요?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깊이 깨달을수록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얕으면 자신을 아는 것도 얕으며,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으면 자신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진리를 깊이 깨달을수록 사람은 분별이 더 있게 되며, 분별이 있을수록 자신을 더 쉽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분별이 없는 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얼마만큼 깨달으면 분별도 그만큼 있게 되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 얕으면 아무 일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기초에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진리를 깨달은 게 없는데 어떻게 죄를 자백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양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법과 도덕 그리고 사람의 관념에 근거해 가늠해 낸 것입니다. 살인 방화는 범죄이고, 길을 막고 강탈하는 것도 범죄이고, 강간하고 희롱하는 것도 범죄인데 이런 것은 도덕상의 규정이 아닌가요? 그것은 가장 얕은 것이므로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믿은 후에 아무런 악도 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성결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에 진리가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모르는 것이고, 무엇을 패괴 성품이라고 하는지도 모르며, 무엇이 범죄행위인지만 알고, 범죄행위 속에 감춰진 패괴 성품을 보지 못하는데 그건 반소경이 아닙니까? 범죄는 어떻게 초래되는 것입니까? 먼저 패괴 성품이 있고 그다음 행위가 있습니다. 보세요, 사람이 간음할 때 그 눈부터 이상해지면서 사람을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간악한 모습이 흘러나오는데, 흘러나오고 나면 행위가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범죄하기 전에 먼저 그런 패괴 성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촬영할 때 표정이 이상합니다. 그 웃는 것을 딱 보면 경건하게 웃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웃고 속으로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속으로 간사하게 웃고 속으로 키득키득 하는 이런 웃음이 정상입니까? 진리를 교통해서 영 안이 해방받는 표현입니까? 이런 사람은 이렇게도 많은 패괴 성품이 있는데 정상 인성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범죄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이건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진실로 자신의 패괴 유로를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10여 년, 20여 년을 믿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까? 여기에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영이 통하지 않고 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던해서 늘 향상하려고 하지만 노력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소질이 너무 낮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데에 도달하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럼 자신을 아는 것은 어떤 기초에서 세워지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 외에 반드시 진리를 아는 기초에서라야 자신을 진정으로 아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13-B-6】
만약 사람이 시종일관 진리에서 향상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너무 얕고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진실로 자신을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알지 못하면 생명 성품 변화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정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행위에서는 별 문제가 없고 버리기도 하고 화비도 하지만 늘 본분을 하면서 원칙 있게 하지 못하고 사람을 질투하며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 진입이 없고 생명 성품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부가 협력이 잘 됩니까? 어떤 부부는 주방에서도 싸웁니다. 한 사람은 이거 먹겠다 하고 한 사람은 저거 먹겠다면서 싸웁니다. 마트에 가서 물건 사면서도 하나는 사겠다고 하나는 안 사겠다고 싸웁니다. 또 자녀를 교육하면서도 하나는 공부시키려 하고 하나는 안 시켜도 된다고 싸웁니다. 어떤 부부는 밤에 자기 전에도 싸웁니다. 어떻게 싸우게 됩니까? 어떤 일을 의논하다가 결국엔 통합이 안 돼서 한밤중에 갈라섭니다. 어떤 사람은 파뿌리가 된 노부부를 보면서 “야~ 저 부부는 정말 사랑이 깊을 거야!”라고 합니다. 사실은 그 나이까지 그냥 싸우고 다투면서 살아 온 겁니다. 이건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패괴된 인류는 부부 사이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없는데 누구와 잘 협력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바꿔 준다면 잘 협력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10명을 바꿔도 협력할 수 없습니다. 근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패괴 성품이 너무 심하고, 정상 인성을 살아내는 것이 적어서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도 사람이 만족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낸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제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하나님께서 꼭 저를 좋아하실 것입니다.”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사람과 함께 지내도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실까요? 하나님도 칭찬하시지 않고 인정하시지 않기에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와도 협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서입니다. 그 외에 부족한 부분도 너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빨리 진리를 갖추세요! 만약 정말 정상 인성을 갖춘다면 문제는 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관련 본분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증문 쓰는 게 어때요?”라고 물으면 “힘듭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글을 쓰는 건 괜찮은데, 시나리오 쓰는 건 어떻습니까? 진리를 교통하는 부분이 너무 얕고 확실하지 못하고 핵심적으로 정통을 찌르는 말이 몇 마디 없고, 어떤 건 정곡을 찌르지도 못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못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합격되게 본분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가 아닌가요? 그럼 이 두 가지 방면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려면 사람은 정상 인성이 있어야 되고, 누구와도 잘 협력해야 하며, 그 누구에 대해서도 포용하고 양해해 주며 정확하게 대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속박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 외에 본분을 함에 원칙이 있어야 하고 합격된 본분을 해야 하며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러면 사람은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표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을 때에야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시고 접촉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있으면서 섬기는 일을 나누고 사역에 대해 나누면 하나님의 마음은 위로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이런 사람은 미칠 수 있습니다. 이쪽에서 종을 치면 저쪽에서 메아리가 들려오듯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만족해 하시고 하나님 마음은 아주 즐거워하시며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이십니다.
만약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다면 무엇을 말합니까? 인성이 부족하고 사람을 대함에 원칙이 없습니다. 보세요, 지금 비록 사람이 겉으로는 악을 행하지 않고 뚜렷한 죄를 짓지 않지만 생명 성품에는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조그마한 변화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 실제가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이 관문을 넘지 못하고 본분을 해도 뚜렷한 효과를 볼 수 없으며 사역을 해도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지 못합니다. 이러면 불합격입니다. 계속 훈련해야 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진리 추구를 중요시하고 자신을 더 깊이 알아야 생명 성품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생명 성품이 변화하면 뚜렷하게 보이는 세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상 인성 방면에서 다른 사람과 잘 맞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면은 본분을 함에 원칙이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맞으며 합격된 본분을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방면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합니다. 그러면 온전케 된 사람에 속하며 다음 세대에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피조된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광입니다! 지금 인솔자 일꾼은 적지 않습니다. 근데 하나님을 섬기고 실제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얼마 안 됩니다. 대다수는 다 한계가 있는 사역을 좀 하고 수호하는 사역을 좀 할 뿐입니다. 만약 정말 한몫을 하고, 적그리스도 거짓 인솔자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을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양성하고, 각 방면 사역을 잘 안배하고, 정말 명실상부한 하나님 선민들의 인솔자가 되고 하나님 선민들의 마음에 맞는 지심인(知心人)이 되어 하나님 집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의 선민들을 보호하며 어디에 거짓 인솔자나 악인이나 적그리스도가 있으면 분별하고 제거하고 고립시켜 형제자매들이 버릴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일정 기간에 다 생명 진입의 효과가 있어 모두가 “이 사람은 정말 실제 사역을 할 수 있어요. 이 몇 년간 우리를 이끌어 주어 우리는 어떤 진리들을 알고 어떤 실제에 집입하고 어떤 변화가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하고 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된 것입니다.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고 진리 실제가 있으며 실제 사역을 할 수 있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니다. 이런 인솔자 일꾼이 많습니까?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을 정말 괜찮습니다. 사람은 아주 바르지만 생명 진입이 좀 얕고 자신을 아는 것이 아직 깊지 못합니다. 실제 사역을 하면서 효과에 한계가 있으면 안 됩니다. 사역에서 존재하는 문제는 여전히 많습니다. 계속 훈련해야 하고 계속 깊이 들어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의 패괴 성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이 이미 사탄의 독해(毒害)를 받고 사탄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바로 사람의 패괴 성품의 근본 원인은 사탄의 독해와 짓밟힘을 어느 지경까지 받았기 때문에 사람 안에 사탄의 본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탄 본성이 형성되면 사람이 유로하는 것은 가지각색의 사탄 성품입니다. 즉 교만하고 자대하며 무법천지이고 유아독존하며 늘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 하고 사람들 위에 서기 좋아하며 늘 사람을 다스리려 하고 늘 남의 머리 위에 올라 타려 하며 늘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경배하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사탄의 성품입니다! 사람의 사탄 성품이 형성되면 사람 안에 이미 사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바로 사탄의 각종 독소가 사람 안에서 사람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의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 아니라 사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본성과 사람이 유로하는 가지각색의 사탄 성품을 인식하기가 쉽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경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어느 정도까지 경력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과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거치지 않는다면 사람은 사람의 패괴 본성과 사탄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는 제가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탄의 본성이 있고 정상 인성이 얼마 없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좀 더 깊게 말하라고 하면 “저의 패괴 유로를 근거해 보니까 제 자신이 딱 사탄의 후예이고 인성이 조금도 없는 산 마귀입니다!”라고 입으로는 산 마귀라고 시인하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그래도 좋은 사람인 편인데’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건 틀에 박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형제자매들이 다 그렇게 인식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지 않으면 뒤떨어지고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이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외식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이 마음속 말입니까? 정말 인식해서 나오는 말입니까 아니면 흐름을 따라가기 위한 말입니까? 무엇이 깊이 패괴된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로 패괴되어야 사탄의 본성이 형성됩니까? 어느 정도로 패괴되어야 말하는 것과 웃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자연적인 유로도 다 사탄의 성품으로 된 것입니까? 쉬운 말로 뭐라 하죠? 귀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별로 뚜렷하지 못하고 깊지 못하면 변화가 생길 수 없습니다!
【113-B-7】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식은 벌써 기준에 도달했어! 이미 내 자신을 사탄 마귀라고 시인했는데 그러면 인식이 얕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무엇을 기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합니까? 무엇에 근거해 기준에 도달했다고 말합니까? 정말 변화가 있습니까? 자신을 아는 것이 기준에 도달했다면 왜 변화가 없습니까? 말로 도달했다고 하면 기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배워 온 말인지 아니면 심령과 폐부에서 나온 말인지 아니면 거짓으로 꾸며 낸 말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바로 사탄 마귀라고 시인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인성이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아, 저는 마귀 사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인성이 있어요?” “저는 마귀 사탄이고 사탄의 후예입니다.” 제가 “도대체 인성이 있어요? 이걸 말하세요!”라고 말하니 그제야 “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일찍이 말 안 해요? 인성이 어떻게 없어요? 말해 보세요.”라고 물으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문제를 바로 짚고 가면 한 마디도 안 하고 늘 겉면의 말만 하려고 하는데 누굴 속이려는 겁니까? “왜 자신에게 인성이 없다는 말은 안 합니까? 이 일은 무엇에 근거해 그렇게 했어요?”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진실을 말하지 않나요? 마음속 말을 하세요!” 이렇게 묻고 따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재미있나요? 누가 그렇게 묻고 따지기 싶어 하는 줄 압니까? 제가 인솔자 일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하는 건 그런대로 할 수 있다고 해도 형제자매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형제자매들을 대처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 아래에 있는 인솔자 일꾼들은 감히 이렇게 대처합니까? 인솔자가 대처하면 어떤 사람들은 즉시 들고 일어나면서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 사람을 괴롭히고 억누르고 사랑이 없어!’라고 감투를 씌웁니다. 그래서 자신을 아는 건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 거 같아요? 하나님은 말씀만 하십니다. 사실이 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렇게 물어보실까요? 이런 건 자신이 진리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지에 달렸습니다. 그럼 저는 왜 인솔자 일꾼만 수리 대처를 할까요? 그건 그 사람이 인솔자이기 때문입니다. 인솔자 일꾼들을 제가 그렇게 수리 대처를 하지 않으면 사역을 제대로 하기 어렵고 하나님 선민들을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이끌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그 사람 본인을 생각해서 그런 거고 또한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을 생각해서이며 더욱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솔자 일꾼들에게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진보가 너무 느립니다. 사실 저는 어느 사람에 대해서도 원한이 없습니다. 제가 인솔자 일꾼들에게 상대적으로 좀 엄하지만 그 엄한 것도 그 사람이 하루빨리 변화되고 빨리 실제 사역을 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제가 그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고 일하는 효과도 안 좋은 걸 보고서 안타까워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도를 좀 올려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뜨거운 피가 끓지 않아 힘도 없을 때 몇 마디 대처 수리하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과 대처 수리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진실하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요?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수리 대처를 좀 더한다면 인식함에 있어 실제에 결부시킬 수 있고 자신의 패괴 유로에 결부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조금 터득하는 것은 완전히 자신의 관념과 이지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지만 수리 대처를 거치면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자신의 관념과 상상 이외에서 실제 공과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련이 임하면 어떤 분량인지 다 드러납니다. 특히 실패하고 배반한 사람들은 자신의 진상을 철저히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수리 대처를 떠날 수 없으며, 수리 대처가 많을수록 효과는 더 좋아지며, 시련이 많이 임할수록 효과도 더 좋아집니다. 수리 대처는 씁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대 맞으면 어떤 사람은 그 당시에 멍해집니다. 일이 지난 뒤에 반성해 보면 어떤 사람은 깨닫고 유익을 얻으며 다음부터는 교훈이 되어 그 일이 임할 때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떻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 무엇이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어떻게 행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 알게 됩니다. 만약 그런 따끔한 경고가 없다면 그다음 같은 일이 닥쳐도 똑같이 하게 됩니다. 하나의 수리 대처가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전환점을 가져다줍니다. 돌파하는 효과에 도달하여 자신의 참된 분량과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외에 생명 진입에 어떤 효과를 가져옵니까? 갑자기 한순간 전환 기회가 오면서 곧바로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까? 이 일은 어떻게 하면 원칙에 부합될까?’라고 생각하게 되고, 곧바로 눈을 뜨고 길을 보게 됩니다. 이런 효과는 매우 뚜렷합니다. 여러분은 수리 대처가 임하기를 원합니까? (원합니다.) 이건 좋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 나를 수리 대처하면 내가 인정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인정하는 사람이면 아무리 수리 대처해도 순복하겠지만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면 나를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고 반항하고 이치를 따질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이 말이 잘못된 건 알고 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은 바로 이 원칙입니다. 이런 말이 잘 나오지 않겠지만 일이 닥칠 때는 다 이렇습니다.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면 사람이 큰 유익을 얻게 되는데, 이건 정해진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수리 대처가 임하고 나서 그 뒤에 얻어지는 것은 대부분 유익한 점입니다. 이건 사실이므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해도 수리 대처 뒤에 얻게 되는 유익은 작지 않고 또한 ‘내가 한 것이 정말 틀렸어! 일방적인 책임이 있지, 다음엔 이 방면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되겠어’라고 느껴지는데 요만한 인식이 있게 되고 이런 효과에 도달할 뿐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 큰 유익을 얻게 되고 가져오는 변화도 더 큽니다.
“사람의 사상, 도덕, 견식, 이지가 사탄에게 심각하게 파괴된 데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사람의 근본적인 것들이 이미 사탄에게 패괴되어 하나님이 만든 본래의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을 어떻게 패괴시켰습니까? 바로 사탄의 것이 오기만 하면 세계 조류로 형성되어 온 세상이 사탄의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사탄의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배우고 숙달하여 적용합니다. 사람이 세계 조류를 따라가고 사탄의 그 사악한 풍기를 따라가면 사람의 의식, 사람의 도덕, 사람의 견식, 사람의 이지는 자연적으로 충격을 입게 되고 파괴됩니다. 예를 들면 온 세상이 거짓말하는 것이 유행합니다. 그럼 “거짓말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라는 관점이 형성됩니다. 큰일을 이루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럼 작은 일에서도 거짓말을 해야 하기에 그런 관점이 한순간 인간세상의 명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과 이런 관점 그리고 이런 그릇된 논리가 나타나자 사람의 의식, 사람의 도덕, 사람의 견식, 사람의 이지가 충격을 입은 것이 아닙니까? 사탄의 각종 독소와 그릇된 논리가 나오면 유행으로 형성되는데 그 뒤에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람 안의 선천적인 그런 순수, 성실, 의식, 도덕, 견식, 이지가 심한 충격을 입고 파괴되면서 마지막엔 깡그리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니 양심에 따라야 되잖아요?”라고 물으면 그냥 ‘허허’ 웃으면서 “흥, 양심이 몇 푼이나 하는데?”라고 말합니다. “이지가 있기나 해요?” “이지가 있어서 뭐해요? 돈으로 쓸 수 있어요?” 이런 사실에서도 보다시피 사람의 도덕적 최저표준이 다 없어졌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이렇게 패괴시킨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렇게 패괴시킨 것입니다. 사람의 정상 인성이 조금도 없으면 여전히 사람입니까? 짐승으로 된 것이 아닙니까?
【113-B-8】
말세의 사람들은 진리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사악을 숭상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적어도 100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서 이 사악한 세상을 멸하시려 하니 빨리 방주를 지어야 하느니라”고 증거했지만 그 100년 동안 누구도 짓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노아 일가 여덟 식구만 큰 방주를 지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누구도 손을 내밀어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늙다리 같은 노아 정말 미쳤네, 맨날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도 모르냐? 어디에 뭔 변화가 있다고? 홍수가 어디에 있냐? 하나님이 어디 있냐?”라고 비웃으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인류는 어느 정도로 패괴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100년 동안 전했지만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사실이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방주에 오른 사람을 세어보면 가슴이 시립니다! 노아 일가 여덟 식구뿐이고 그 외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들이 도리어 방주에 들어갔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노아를 비웃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가 사악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사악한 시대였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지금 이 시대가 노아의 그때 시대와 때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말씀을 발표하셨고, 하나님 집에서 그렇게 많은 영화와 동영상을 만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하지만 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 안 될까요? 제가 보니까 “노아의 때와 된 것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이 사실이고 그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이 응한 것입니다! 이 사악한 시대는 노아의 때와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우리가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게 힘을 들이면서 그 사람들에게 뭐 증거할 거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게 맞습니까?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 사람을 얼마나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건 하나님의 부탁이고 사람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본분을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온전케 하여 진리를 얻고 생명 실제에 진입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고 얻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일입니다. 가장 주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켜 이 증거를 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이런 증거로 이 시대를 정죄하시고 모든 이방인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들도 좋은 사람 많은데요! 저를 만나면 말도 건네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기도 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압니까? 무엇을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그 사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해 보세요! 즉시 눈을 부릅뜨고 반감을 가질 것이며 도와줬던 것도 다시 찾아갈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로 그 사람을 드러내지 않아서지 진리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기만 하면 곧바로 그 사람이 마귀 사탄이라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어떤 나라 사람들은 좋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나쁠 거에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 맞습니까? 온 인류의 패괴는 다 똑같습니다. 본성 실질은 다 정상 인성이 없고 사탄의 본성이며, 유로하는 것은 다 사탄의 성품인데,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았을 때 이방 세상의 말을 하면 왕래하면서 웃는 얼굴로 맞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진리를 교통하기만 하면 즉시 마귀 사탄이 되어 버립니다. 뭘 보고 “사람이 좋다”라고 말합니까? 아직도 허튼소리를 하고 아직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말하는데, 진리 실제가 전혀 없습니다! 누가 좋습니까? 어디가 좋습니까? 온 세상의 패괴된 인류는 다 똑같습니다! 서양에 가서 영어판 하나님 말씀을 보여 주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다 똑같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다시 나타났는데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뭘 실증하려는 것일까요?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다 사악을 숭상하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패괴 실질과 패괴된 진상을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뚜렷하게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인식이 있는데 이방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세상의 인류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여기의 사람이 좋고, 저기의 사람이 좋다”라고 바보 같은 소리만 합니다. 좋긴 뭐가 좋습니까! 다 마귀 사탄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 해답
문제 (1)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이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면에서 향상해야 합니다.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인식이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정식으로 진리를 사모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효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도달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진리 면에서 향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이런 긍정적인 진리 실제와 정상 인성이 구비해야 할 것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소시는 사랑스럽고 거룩하며, 하나님은 너무나 공의로우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찬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나서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흠모가 생기고 찬미가 생기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도 진실해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어떤 오해도 다 없어집니다. 어떤 때 하나님 집에서 하는 일이 관념에 맞지 않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난 소극적이 되지 않아!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 그러니 누구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인솔자 일꾼이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믿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이건 대단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면 하나님 집의 인솔자 일꾼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아무 영향도 받지 못하지만 일단 관념이 생기면 문제가 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늘 소극적이고 연약해집니까? 바로 진리가 없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고 분량이 너무 작아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력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걸 보고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우시니 나는 하나님을 따라야 하고 정말 하나님을 잘 믿어야지! 예전에 그렇게 오랫동안 믿으면서 왜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까?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많은 거역하는 짓을 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간파하고 단번에 깨닫고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럼 그런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온 것입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도리를 조금 안다고 해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도달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전에 진리 추구를 언급할 때는 ‘내 머릿속에 개념이 없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건 도리이고 틀에 박힌 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진리 추구를 말하면 ‘아, 진리는 정말 보배롭고 귀한 거야!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이고, 진리를 얻는 것은 값으로 칠 수 없는 귀중한 보배를 얻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지금 진리를 추구하면서 어떤 효과를 보셨나요?”라고 물어보면 “진리를 추구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 인식이 생기고, 진리를 추구할수록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지며, 진리를 추구하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명 진입이 있으면 사람은 정말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며,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히 생깁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진리는 정말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가치 있고,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가 있습니다. 정말 진리를 얻었다면 죽어도 천국으로 갑니다. 베드로나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지금 그 사람들은 천국에 있으므로 환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진리는 값으로 칠 수 없는 귀중한 보배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를 가리켜 말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