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집 (a) 하나님 말씀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에 관한 설교 교통 (1)

【113-A-1】

몇천 년의 패괴(역주: 부패, 타락)를 겪고서 사람은 모두 마비되어 둔해졌고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歷史)는 모두 ‘사기(史記)’ 중에 기록되기까지 하였고, 심지어 사람의 패역한 행위는 사람 자신마저도 다 진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고 사탄에게 유혹되어 이미 갈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보고도 배반하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배반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이지(理智)가 이미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사람의 양심도 이미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한다. 나의 눈에는 사람이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고 모두 독사이다. 사람이 내 앞에서 어떻게 가련한 척하든지 나는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흑과 백의 차이를 아예 모르고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지가 이렇게 마비되고도 여전히 복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람의 인성이 이렇게 비열하면서도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이지로 누구에게 왕노릇 하겠는가? 이러한 인성으로 어찌 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 정말로 부끄러운 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소인배이다! 나는 복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거울을 찾아 자신의 추한 몰골을 좀 비춰보기를 권한다. 너는 왕이 될 그릇이 되는가? 너는 복받을 오관을 갖추었는가?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진리도 조금도 실행하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내일을 생각하는데 참으로 망상이다! 이같이 더러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심각하게 사회의 전염과 봉건 예절의 영향을 받았고 ‘고등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 낙후한 사상, 부패한 도덕, 저열한 인생관, 비열한 처세 철학, 추호의 가치도 없는 생존, 미천한 풍속과 생활,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사람의 마음을 침해하고 사람의 양심을 파괴하며 사람의 양심을 공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한다.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악랄해져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버릴 수 있거나 하나님께 순복(역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예 하나도 없고 기꺼이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더욱이 하나도 없으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마음껏 향락을 즐기고 흙탕물에서 자신의 육체를 마음껏 패괴시키고 있다. 흑암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설령 진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실행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이미 나타났음을 보았다 하더라도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패괴된 인류를 조금이라도 구원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부패한 인류가 어떻게 빛 가운데서 살 수 있겠는가?

【113-A-2】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일부 사람들은 수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적지 않은 도리도 알고 큰 악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몇 년 믿었든지 만약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 사람들은 “저는 변화되고 싶고 지금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때는 하나님과 적이 됩니까?”라도 말합니다. 변화를 추구하고 싶어 하거나 혹은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성품 변화를 추구하거나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품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아주 명확합니다.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악을 행하여 사람들이 “당신은 인식했습니까?”라고 물으니 “저는 인정하지 않아요. 악을 행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 아닙니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통하는 것을 듣고는 바로 순복하고 “그 사람이 교통하는 게 맞고 진리에 부합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입니까? 진리에 순복할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에 이것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본성이 있는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순복하지 않으면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고, 사탄의 성품이 있는데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거만하고 자대(自大)하여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길지 않고 진리를 몰라서 사람 생각에 따라 가로막는 일도 하지만 수리 대처가 임하면 순복하고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진리에 순복할 수 있고 수리 대처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진리를 교통해 내고 말한 것이 진리에 부합되기만 하면 순복할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설령 패괴 유로가 있고 과오가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측은지심으로 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성품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인지 각 사람마다 자신이 어느 부류의 사람인지를 가늠해 보세요. 수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품 변화를 중요시하지 않고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원래 이래. 나는 이런 믿음법이야.”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주 골칫거리이고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입니다!

몇천 년의 패괴(역주: 부패, 타락)를 겪고서 사람은 모두 마비되어 둔해졌고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었다.” 몇천 년 동안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 패괴되었습니까? 우선 마비되어 둔해졌습니다. “마비되어 둔해졌다”는 건 어떻게 해석합니까? 영 안이 마비되어 분별력이 조금도 없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며 선악을 분별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비되어 둔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마비되어 둔해진 것이 심각한 데다가 사악을 숭상하고 마귀 사탄을 숭배하며 또한 사탄을 따라 흑백을 전도하고 사실을 왜곡하는데 이것은 극도로 마비되어 둔해진 것 아닙니까? 마지막 결과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는데 이렇게 마비되어 둔해지면 구제불능인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조건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진리를 교통하면 그 사람이 듣고는 “이건 바른길이고 하나님의 음성이야. 여기에 진리가 있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극도로 마비되어 둔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교통해 주면 깨달을 수 있고 각성할 수 있어 구해 낼 만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선악을 모르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별할 줄 모를 정도까지 마비되어 둔해지면 끝장이고 구제불능입니다. 하나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에 속하는데 구제불능이고 모두가 짐승들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 집으로 잠입해 들어와 완고하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데 무엇에 속합니까? 사탄의 심부름꾼입니다. 사탄의 심부름꾼도 영리한 구석이 있어 듣고는 “이건 참 도야. 이 도를 믿으면 복받을 수 있겠네. 그럼 믿어보자!”라고 합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러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러 온 것도 아니라 복받으려는 속셈을 품고 하나님 집에 잠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악마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도 성품이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과 적이 되는데 결과는 갖은 악을 행하여 드러나 도태되고 교회에서 출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하나님 집에 아직도 적그리스도 악마들이 있습니까? 여전히 있는데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무릇 적그리스도 악마로 드러나면 반드시 출교시키고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를 하지 않아 드러나지 않고 인솔자를 하면 적그리스도가 되는데 이것은 드러난 것 아닙니까? 인솔자 일꾼을 하지 않을 때는 겉으로 아주 온순하지만 인솔자 일꾼을 하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데 이것은 본성의 문제가 아닙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歷史)는 모두 ‘사기(史記)’ 중에 기록되기까지 하였고, 심지어 사람의 패역한 행위는 사람 자신마저도 다 진술할 수 없었다.” 온 인류가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를 다 잘 아시지요? 이방인의 사회 발전사를 보세요. 그건 인류가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가 아닙니까? 교계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는 하나님을 거역한 역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모두 ‘사기(史記)’ 중에 기록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서 ‘사기’는 모든 역사 기록을 포함하고 성경도 포함합니다. 유대교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것은 ‘사기’ 중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교계가 하나님을 대적한 역사는 말세에서도 뚜렷이 나타났고 또한 ‘사기’ 중에 기록되었습니다. 무릇 하나님 말씀으로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들춰 내고 해부한 이런 사실은 다 역사 기록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고 사탄에게 유혹되어 이미 갈 방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갈 방향을 모르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사람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것을 모르며 마땅히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믿죠? 하나님을 믿으면 무슨 소용 있어요? 어떤 유익이 있나요?”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것과 같은데, 이것이 갈 방향을 모르는 것에 속합니다. “사람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 오늘날도 온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인데 믿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계가 바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셔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밖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성경을 미신하 숭배하며 사람을 바라보고 따른 것 역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눈에는 “사람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고 다 사실입니다.

【113-A-3】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에는 몇 가지 정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도 배반한다”라고 하셨는데, 인류가 하나님을 보고도 배반하는 정도까지 사탄에게 패괴되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배반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있어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인류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정형은 보거나 보이지 않고를 떠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본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사탄의 본성이 너무 심각한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보고는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으며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저주하시는지 알고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들이 이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적그리스도와 악인은 다 이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10~20년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이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칩니까?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역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러면 더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충심으로 본분을 하지 않으며 건성으로 하고 속이는데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본분을 좀 하라고 하면 “네, 저는 본분 하길 원해요.”라고 말하지만 여러 날 본분을 해도 완성품을 한 가지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본분한 것을 보면 다 건성으로 하고 속인 것이어서 분통이 터집니다. 거기서 눈만 빤히 뜨고 하나님을 건성으로 대하고 속이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며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인데 끌어 당겨도 가지 않고 때리면 뒤로 물러섭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 충심으로 자신의 본분을 하지 못하면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의 이지(理智)가 이미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원래의 기능’은 무엇을 가리켜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게 되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지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인데 사람의 원래의 이지는 이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설교 교통도 듣고 무엇이든 다 알지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데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지(理智)가 이미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에게 양심과 이지가 없고 인성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도 이미 원래의 기능을 잃었다”, 이 ‘원래의 기능’은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리키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이지를 구비해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만약 사람의 양심과 이지로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효과가 없다면 이것은 바로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사람은 사탄에게 일정한 정도에까지 패괴되고 마비되어 멍청해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었는데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 비교적 합당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이지가 없는 사람은 짐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눈에는 사람이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고 모두 독사이다.” 보세요, 우리는 그 부류의 사람들을 짐승이라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눈에는 모두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고 독사입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짐승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같습니다. 어느 단어가 조금 품위 있습니까?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란 이 단어가 품위 있는데 이것이 좋네요. 지혜롭게 이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좋습니다. “나의 눈에는 사람이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고 모두 독사이다. 사람이 내 앞에서 어떻게 가련한 척하든지 나는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말씀에서 또 하나의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됩니까? 바로 인성이 없는 사람들과 짐승에 속하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속한 사람들과 독사에 속하는 부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더는 측은지심을 발하시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가련한 꼴을 하고 피가 날 정도로 이마를 땅에 조아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며칠을 금식하면서 어느 정도까지 울든지 하나님은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분명하게 아시겠죠! 분명하게 알고 나서 이런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단단히 기억하세요. 어느 날 짐승 하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피가 날 정도로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보면 또 “어, 진심이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또 기회를 주실지도 몰라. 이렇게 하나님께 회개하는데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수 있겠어? 하나님은 틀림없이 긍휼히 여기실 거야.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까!”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또 거기서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논리를 퍼뜨리게 되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내 앞에서 어떻게 가련한 척하든지 나는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이 증명하는데 당신은 아직도 거기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허튼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측은지심을 발하시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과오가 있어 회개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 여전히 측은지심을 갖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만약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아 1~2년이나 3~5년 혹은 7~8년이면 그런대로 괜찮고 혹시 또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을 10~20년 믿어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끝장인 것입니다. 특히 인성이 나쁜 사람이면 틀림없이 끝장입니다. 인성이 약간 좋은 사람은 통제받고 얽매임으로 인해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면 이런 사람은 아마 또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 악인과 독사의 부류는 너무나 교활하여 여태껏 마음을 터놓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태껏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없고 진리를 실행한 적이 없는데 이런 사람은 인성이 나쁩니다. 이건 공인된 것입니다. 각지 교회에 무릇 공인된 나쁜 사람과 못된 부류와 여태껏 진리를 실행하거나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없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절대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기억하셨죠! 그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는 사람을 교회에 두면 어떤 유용한 점이 있습니까? (하나님 선민으로 하여금 분별하게 합니다.) 다 분별할 줄 알면 직접 그를 출교시키고 제명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쁘다고 말하자니 그리 나쁘지도 않고 나쁘지 않다고 말하자니 어떤 때는 또 아주 나쁜데, 간파하지 못하면 며칠 더 머물게 하고 일단 간파하면 얼른 출교시키고 제명하세요. 이건 옳은 것입니다. 그럼 일부 나쁜 사람들도 복을 받으려고 기꺼이 효력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조금 세력이 있어 접대 본분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을 출교시켜야 합니까? 그가 효력하기 원하고 효력을 조금 할 수 있으면 쓰세요. 만약 큰 재난이 내려 효력하는 것이 필요 없다면 얼른 출교시키면 됩니다. 이 원칙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113-A-4】

왜냐하면 사람은 흑과 백의 차이를 아예 모르고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지가 이렇게 마비되고도 여전히 복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람의 인성이 이렇게 비열하면서도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이지로 누구에게 왕노릇 하겠는가? 이러한 인성으로 어찌 보좌에 오를 수 있겠는가? 정말로 부끄러운 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소인배이다!” “흑과 백의 차이”는 바로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의 차이입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모른다.” 여기에서 ‘진리’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비진리’는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탄 철학과 사탄 법칙입니다.) 한 가지를 빠뜨렸습니다. 진리에 부합되는 말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비진리입니다. 도리상에서 사람은 진리와 비진리의 차이를 알지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이 사람의 말인지를 구분하라고 한다면 구분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제가 하나님께서 교통하신 말씀을 한 단락 찾고 또 사람이 교통한 말을 한 단락 찾아 당신에게 보여 주면 어느 단락이 비진리이고 어느 단락이 진리인지, 당신이 분별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론상에서 보면 무릇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진리이고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비진리입니다. 비진리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한 가지는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속하는데 사이비한 그릇된 논리를 포함하고, 다른 한 가지는 진리에 부합되는 것에 속하는데 단지 진리에 대한 약간의 견해와 인식 그리고 약간의 실행의 길인데 이 부류도 진리가 아니고 비진리에 속합니다.

사람의 이지가 이렇게 마비되고도 복받고 싶어 하고” “이렇게 마비되었다”는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까? 분별력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무엇이 진리이고 비진리인지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마비되고도 복받고 싶어 하고 또한 왕노릇 하고 보좌에 오르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수치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적습니까? (많습니다.) 인솔자 일꾼을 하라고 하면 갖은 방법을 다해 몰두하는데 이것은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인솔자 일꾼으로 선거되지 못하면 소극적이 되는데 이것은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인솔자 일꾼을 하다가 도태되면 자포자기하는데 이것은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째서 왕노릇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까? 어떤 부분이 부족합니까? 바로 진리를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구비하지 않아 조금도 분별하지 못하면서도 왕노릇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지와 양심이 없다는 것을 들춰 내시고 해부하심과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의 심오한 비밀을 암시하십니다. 바로 이후에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이기는 자가 되는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다섯 고을을 차지하고 어떤 사람은 열 고을을 차지하며 어떤 사람은 제사장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지가 정상이고 흑백을 구분할 수 있으며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할 줄 알고 진리 실제를 구비했는데, 이 사람들은 최후에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한 무리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사람들은 이지가 건전한데 “이지가 건전하다”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통하고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든 이런 사람은 도달하고 따를 수 있는데 이것을 이지가 건전하다고 합니다. 이지가 건전한 사람은 또한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소질이 좋은 사람입니다. 소질이 안 좋은 사람은 이지가 건전하지 못해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진리를 교통해도 깨닫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며, 단지 글귀만 아는데 실제적인 일이 임하면 또 어리둥절하여 적용할 줄 모르고 시종일관 원칙을 장악하지 못하며 규례를 지킬 줄밖에 모릅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원칙을 교통해도 방도를 생각해 원칙을 규례로 바꾸고 나중에 규례에 맞추는데, 규례에 맞추고는 ‘내 소질은 좋아. 나는 진리를 깨달았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규례에 맞추다 보니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러 사람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지가 불건전하고 소질도 부족하며 불합격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있습니까? 왕노릇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의 그 패괴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소질이 불합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집에서 각 방면의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교통하지만 얼마의 사람들이 실행해 낼 수 있습니까? 얼마의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고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할 줄 알고 분분을 하는 가운데서 적용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많습니까? 많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데 왜 이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중의 주요 원인은 바로 사람의 소질이 불합격이기 때문입니다. 소질이 불합격이고 정상인의 이지와 양심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에게 또 야심이 있어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하고 보좌에 오르고 싶어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눈에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수치를 모르고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소인배입니다! 소인배라고 하면 골칫거리이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데 이런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고 하나님께서 증오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하나님께서 가장 증오하시는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이지가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지낼 때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어느 부류의 사람입니까? 이지도 없고 양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없으면 함께 지낼 수 없기에 사람은 최소한 양심이 있어야 하고 배은망덕해서는 안 됩니다. 인성의 주요 두 가지 측면은 하나는 양심이고 하나는 이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구비하면 인성이 있고 이 두 가지를 구비하지 않으면 인성이 없습니다. 만약 조금 더 높은 요구를 하면 인격과 존엄에 관련되는데 어떤 사람은 인격이 조금 있고 또한 존엄도 있습니다. 만약 인격이 없는 사람이 또 존엄을 논하면 이것을 “목매달아 죽은 귀신이 연지와 분을 바른다. 즉 뻔뻔하기 그지없다.”라는 것입니다. 아무 인격도 없으면서 뭘 존엄을 논합니까? 동물이 존엄을 논합니까? 그것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존엄을 논하지 않습니다. 사람됨에 있어 만약 이지가 아주 좋고 건전하며 소질도 좋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격이 있고 존엄을 논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지 방면에서 부족하다면 인격과 존엄을 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인격과 존엄을 논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소질이 낮고 이지 방면도 그리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격과 존엄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까? 이지가 아주 정상이고 건전한 것입니다. 사람의 이지 방면이 건전하면 그 사람은 소질도 높고 마음도 맑고 깨끗하며 틀림없이 인격과 존엄이 있습니다. 만약 이지가 보통이면 그 사람의 존엄과 인격은 없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지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따라 생겨나는데 이지 방면이 비교적 높고 비교적 건전하면 양심과 인격 그리고 존엄의 경지 역시 높은 것입니다. 이지 방면이 그리 건전하지 못하고 비교적 낮으면 그 사람에게 조금의 양심만 있어도 이미 괜찮은 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과 존엄에 이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성이 좋고 나쁨은 주로 무엇을 근거로 생겨나는 것입니까? 주로 이지 방면이 건전한지의 여부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요?

나는 복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거울을 찾아 자신의 추한 몰골을 좀 비춰보기를 권한다. 너는 왕이 될 그릇이 되는가? 너는 복받을 오관을 갖추었는가?” “왕이 될 그릇”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왕이 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무릇 왕이 됨에 있어서 반드시 구비해야 할 조건을 당신이 다 구비했으면 남들이 당신을 왕이 될 그릇이라고 말하고, 만약 이런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으면 왕이 될 그릇이 아닙니다. 만약 왕이 될 그릇이 아닌데도 왕이 되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마치 어떤 남자들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나는 백마 탄 왕자야(흑마 탄 왕자야)”라고 자신을 왕자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은가요? 그런 재목감이 아닌데 그것이라고 억지로 말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게 아닙니까? 이것은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소인배가 아닙니까? 이방인들은 본래 이지가 없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어서 어떻게 말해도 비웃는 사람이 없지만 당신이 하나님 집에서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당신을 판단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왕이 될 그릇일까? 저 사람에게 왕이 될 인품이 있는가? 왕이 될 이지가 있는가? 왕이 될 인격이 있는가? 왕이 될 능력이 있는가? 왕이 될 진리 실제가 있는가?’ 이런 것이 다 없으면서도 왕이 될 그릇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왕이 되는 것에 ‘그릇’이라는 논법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 일꾼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좀 교통하라고 해도 교통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을 궁리하고 있는데 이지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진리를 교통도 해내지 못하면서 늘 인솔자가 되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조금도 없으면서 인솔자를 하고 싶어 하며, 어떤 사람은 밖의 일조차도 잘 처리하지 못하면서 인솔자를 하고 싶어 하는데 이지가 있습니까? 밖의 일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이지가 조금도 구비되지 않았는데 왕이 될 그릇입니까? 왕이 될 그릇이 아니면 왕이 될 일을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최종에 하나님 나라의 자민으로 될까요 아니면 효력자로 될까요? 제가 보기에 당신이 효력자로 되면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충심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싫어하고 “당신이야말로 효력자에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효력자를 원치 않으면 자민이 되는 것이 당신 뜻입니까?” “자민도 좀 지위가 낮아 저는 제사장이 될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어떻습니까? 그 사람에게 이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심지가 있는 것과 이지가 있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둘은 모순됩니까? (모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추구합니까? 왕이 되는 것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진리를 추구합니까? 자민이 되는 것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효력자가 되는 것을 추구합니까?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합니까 아니면 도태되는 것을 추구합니까?” 만약 당신이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단지 그런 심지만 있고 만약 참된 실행의 길이 없다면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 합니다. 허풍을 떠는 것은 이지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합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저는 자민이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나요?” “하고 싶지만 추구하지 못할까 봐 염려돼요.” “어째서 추구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지와 소질도 안 돼요.” “이지도 소질도 안 되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면 되는 겁니까?” “기껏해야 효력자가 되는 것이 그런대로 할 만해요.” “그럼 당신은 효력자 되는 것을 추구하세요. 어째서 효력자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아직도 자민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 하죠?”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저는 이지도 소질고 안 되고 기껏해야 효력자가 될 수 있으면 괜찮은 편이죠. 그래도 저는 머리를 땅에 박을 정도로 해야만 효력자가 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제 생각에 자민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괜찮은 것 같으나 보장할 수 없어요. 소질도 그리 이상적이지 못한 것 같고 몇 년간 설교 교통을 들었지만 지금까지 본분을 함에 원칙이 없어 아마도 기껏해야 효력자일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비교적 실제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사실에 근거해 정확하게 말해야지 비현실적인 이상만 추구하거나 자신을 너무 높게 봐서는 안 됩니다. 높은 것은 바라볼 수 없고 낮은 것은 눈에 차지 않아 하다가 결국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지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너는 복받을 오관을 갖추었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의 오관과 용모를 만드신 것에 심오한 비밀이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일생과 소질 그리고 사람의 본성 실질, 어떤 길을 걸을지, 복받을지 아니면 화 입을지를 명시해 줍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눈이 삐뚤어졌는데 무슨 문제입니까? “마음이 삐뚤면 눈도 비뚤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의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험에서 나온 말도 사실에 어긋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좀 관찰해 보세요, 무릇 눈이 삐뚤어진 사람은 대다수가 마음이 정말 그리 바르지 못한데 이 말은 그야말로 약간 부합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코가 삐뚤어졌고, 어떤 사람은 눈에 생기가 없어 마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아주 살벌하고, 어떤 사람은 눈빛이 아주 나쁘고 눈이 곪아서 사람들이 보면 아주 역겹습니다. 어떤 사람은 광대뼈가 튀어나와 마치 투견처럼 흉악한 인상의 용모입니다. 이런 오관으로 왕노릇 할 수 있습니까? 생김새만 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고 마치 이방의 흉악한 놈이나 악인 같은데 이런 사람이 국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국도에도 들어갈 수 없는데 누구에게 왕노릇 하러 간다는 것입니까? 사탄의 세계에 가서 왕노릇 하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보세요, 사탄의 세계에서 관리들은 하나 하나 모두가 흉악하고 악한 얼굴상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인성의 유무는 오관과 용모와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알려 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만들어 주신 오관을 보면 명시되어 있는데 그 사람의 오관을 보기만 하면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맞습니까? 틀릴 리가 없습니다. “너는 복받을 오관을 갖추었는가?” 복받을 오관은 논법이 있는 것입니다. 척 보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척 보면 정인군자이며, 척 보면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이고, 척 보면 절대로 좋은 사람인데, 이것이 바로 복받을 오관입니다. 화를 입을 오관은 척 보면 너무나 흉악하고, 척 보면 대표적인 악인이며, 척 보면 이것은 마귀이고, 척 보면 못된 놈이며, 척 보면 너무나 역겨워 눈뜨고 볼 수 없고 다시 더 보면 두렵고 더 보면 토하게 됩입니다. 복받을 오관을 볼 줄 압니까? 진리 방면에서 중요시하면 서서히 볼 줄 알게 됩니다. 진리를 다 깨달으면 이 방면도 십중팔구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척 보고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별할 줄 알면 자신이 보호받게 됩니다. 이러면 충분합니다. 너무 자세히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113-A-5】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진리도 조금도 실행하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내일을 생각하는데 참으로 망상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하면서도 내일에 복받고 재난이 임해도 죽지 않기를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념하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후안무치합니다! 이 구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보게 됩니다. 무릇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하는 자는 내일이 없고 틀림없이 쓸모없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내일 복받는 일은 그런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데 절대로 몫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어떤 표현이 있는지 당신이 척 보고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어. 이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해.’라고 분별할 줄 압니까? ‘나는 성품이 조금 변화됐는가? 나는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는가?’라고 자신을 가늠할 줄 압니까? 만약 자신이 볼 줄 알고 가늠할 줄 안다면 자신이 이후에 복받는 데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조금도 가늠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문제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성품이 조금이라도 변화되었는지, 진리를 조금이라도 실행해 낼 수 있는지를 간파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고 진리를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 역시 끝장입니다. 분간할 수 없으면 자신에게 변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정말로 구비되어 있고 정말로 변화가 조금 있으며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다면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언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지 몰라도 자신의 모든 행위는 당연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형에 대해 조금도 간파하지 못하고 분별할 수 없는 사람은 이지가 없는 사람에 속하는데 더욱 끝장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가련합니다.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진리도 조금도 실행하지 못하면서 아름다운 내일을 생각하는데 참으로 망상이다!” 이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아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기노트 첫 페이지를 펼쳐 위에다 써서 좌우명이나 경계의 말로 삼고 이 말씀을 보면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어느 날 선행을 조금 하여 기쁘고 멋지다가도 저녁이 되어 노트를 펼치면 이 말씀을 보고 또 자신을 경계하게 됩니다. 늘 자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경계하는 것이 많아지고 늘 상고하면 서서히 조금 분별이 생겨 어떤 것을 분간해 낼 수 있는데 효과에 도달한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 말씀들은 바로 이렇게 조금씩 늘 상고하고 자주 보면 서서히 깨우침이 있고 빛비춤을 얻게 되어 마지막에 참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지경에까지 마비되어 멍청하기에 단지 한두 번 보고는 정말로 소용없습니다!

이같이 더러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심각하게 사회의 전염과 봉건 예절의 영향을 받았고 ‘고등 학부’의 교육을 받았다. 낙후한 사상, 부패한 도덕, 저열한 인생관, 비열한 처세 철학, 추호의 가치도 없는 생존, 미천한 풍속과 생활,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사람의 마음을 침해하고 사람의 양심을 파괴하며 사람의 양심을 공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한다.”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어떤 이유로 초래된 것입니까? 이런 사회 환경이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쳐 초래된 것입니다. 사람의 사탄 본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입니까? 사탄은 어떻게 인류를 패괴시켰습니까? 바로 이런 사회 환경을 통해 인류를 패괴시킨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이런 국가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것에 물들고, 어떤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어두운 사회의 환경에서 자란 후에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되어 사람은 갈수록 인성과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아주 귀엽고 한 살에 말을 배우고 대여섯 살이면 일을 배웁니다. 왜 열 살 넘으면 거짓말하기 시작하고, 20대가 되면 사람이 아니고, 30대가 되면 못된 놈이 되고, 40대가 되면 마귀가 되고, 50대가 되면 악마가 되는 것입니까? 어째서 점점 더 깊이 타락하는 것입니까? 이런 사회가 초래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보면 다 괜찮은데 처음에 조금 거짓말하면 어른이 “거짓말하면 못써.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을 배웠잖냐?”라고 교육합니다. 그 후에는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과목도 없어졌습니다. 사탄은 배우지 못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게 하는데 이렇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20대가 되면 부모가 “애가 왜 갈수록 예전 같지 않아? 어릴 때는 말을 잘 듣더니 왜 클수록 철없는 거지?”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는 아이는 누구든지 다 패괴되어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자라나 마귀로 변하는 과정에서 사탄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키는지를 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회의 전염” “봉건 예절의 영향” “‘고등 학부’의 교육” “낙후한 사상, 부패한 도덕, 저열한 인생관, 비열한 처세 철학, 추호의 가치도 없는 생존, 미천한 풍속과 생활”. 이런 사회 환경이 막 태어나 원래 양심과 이지가 있던 사람을 패괴시켜 이성을 잃고 발광하는 마귀 사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해 보세요, 이런 사회 환경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소용있겠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왜 아이를 낳는 것이 소용없습니까? 당신이 아이를 낳아도 이 세상에서 아이가 서서히 마귀로 변해 가기에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고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게 할 거야.”라고 말해도 간섭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온종일 품에 안고 있어도 안 됩니다. 당신 본인에게서도 유전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누가 유일하게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았습니까? 바로 성육신 하나님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으셨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으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신성의 실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의 실질은 그분의 생명이시고 그분에게는 또 인성의 생명도 있습니다. 사탄의 그릇된 논리는 그분의 안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분의 생명이 될 수 없는데, 그분 안에 마치 저항력이 있는 것처럼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배출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밖이 아무리 춥고 아무리 습하고 아무리 더워도 건강한 사람은 안에 저항력이 있어 병균이 침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밖의 사탄의 이러한 방법을 신성 실질이 없는 사람은 쉽게 따르고 쉽게 받아들이는데,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고 눈이 밝아지면 좋은 거야.’라고 생각하고 한 입 먹고 속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의 이런 궤계를 꿰뚫어 보실 수 있고 이런 사설과 그릇된 논리를 간파하실 수 있어 사탄이 외부 환경으로 아무리 영향을 끼치고 아무리 방해해도 그리스도의 마음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런 엉망진창인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고 배척하고 반감을 가지며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것들은 그분의 안에서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고 어떤 관점이나 사상 그리고 어떤 철학도 형성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12살 때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율법사들에게 약간의 질문을 하셨는데 그들은 놀라고 기이하다고 느꼈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바로 예수께는 신성의 실질이 있고 그분의 생각은 일반인과 다르고 그분이 생각하신 문제도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그런 것들은 그분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고 그분을 패괴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역사를 경력하고 많은 진리를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이런 저항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천성으로 신성의 실질이 있어 그분이 철이 들지 않았을 때에도 외부의 것들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외부의 이런 난잡한 일을 보자마자 간파하실 수 있고 관심이 없는 그런 것들을 보고 나서 거들떠보시지도 않기에 어떤 작용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국 타향에 갔을 때 거기의 풍토와 인심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또한 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은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들어올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일인데 한 이치입니다. 그럼 지금 여러분은 패괴된 인류는 왜 사탄에게 패괴될 수 있고 성육신의 하나님은 왜 사탄에게 패괴될 수 없는지에 대해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아셨겠지요? 그러면 사람은 어떤 것을 통해 패괴된 것입니까?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에서 받아들이고 환영하면 문제가 되는데 패괴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당신을 초대하여 음식으로 대접할 때 만약 음식에 독을 타면 당신이 먹고 독살됩니다. 만약 당신이 초대되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 독살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것들을 당신 입에 강제적으로 넣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마르크스ㆍ레닌 철학, 무신론, 진화론의 그 책들을 당신에게 다시 읽어준다고 해서 당신을 독해(毒害)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독해할 수 없는데 그 책을 보면 구역질이 나고 그릇된 논리를 봐도 역겨워 백 마디의 말로 그것을 반박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보자마자 “이 말도 맞아. 이 말도 조금 일리는 있어.”라고 말하고 반복적으로 많이 읽고 나서 받아들이고 패괴되었는데 바로 이런 일입니다.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의 선민을 붙잡아 세뇌시키고는 “한참 동안 읽었는데 어떤 느낌이 있어?”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구역질 나고 갈수록 역겨워 자꾸 토하고 싶은데!”라고 말하면 큰 붉은 용이 이 말을 듣고는 “끝났어. 신격화 분자야. 세뇌시킬 방법이 없어. 세뇌할수록 더 역겨워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역겨워하지 않는데 들어보고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세뇌된 것인데 그 결과는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인류는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합니까? 사탄이 패괴시킨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켰습니까? 이 단락의 말씀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사람의 마음을 침해하고 사람의 양심을 파괴하며 사람의 양심을 공격하고 있다.” 사람의 양심은 갈수록 지각이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세상의 조류를 따르고 사탄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동양인은 이전에 전통 관념이 약간 있었는데 남녀가 접촉해선 안 되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옷소매도 꽉 매야 했습니다. 나중에 서방에서 성(性)개방 문화가 전해져 학교에서 남녀가 정상적으로 접촉해도 되었고 심지어 관계를 발생해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죄짓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데 고발하거나 신고하는 사람이 없으며 사회에서도 제한하지 않는데 패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 일을 알아보려 하면 자녀들은 “이건 사적인 일로 프라이버시는 보호를 받아야 해요. 당신은 저의 프라이버시를 알아볼 권리가 없는데 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거에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언급하면 “사랑은 무죄”, “사랑은 불변의 법칙”이라 하면서 개의치 않습니다. 남녀간의 경계가 전부 무너진 것입니다. 남녀가 큰 길에서 함께 붙어있거나 껴안고 키스해도 문제 되지 않는데 그것을 낭만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동성애도 문제 되지 않고 법도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인류가 사악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인류 사회가 사악을 숭상하는 것이 어느 지경까지 이르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뭐라고 말합니까? “이 말은 다 맞아요. 그러나 이것을 권장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것을 말하면 낙후된 거에요. 남녀가 서로 즐기고 사랑하는 것은 정당한데 뭘 정죄해요? 안 돼요.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지를 말할수록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사악한 시대에서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낙후되었다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성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사회에 전염되고 물들어 사악한 풍조를 따르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저항력이 있습니까? 그는 사회에서 특히 선진국에서 실행하는 것이면 정확하고 유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행을 따르면 전위적이라고 하고,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낙후되고 보수적이고 부패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관점인 것입니다. 결과는 서양 사회에 어떤 것이 유행하면 그는 그것을 따르면서 죄짓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음란 가운데 살면서 또 하나의 이론이 있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마다 자유롭게 사랑을 즐겨야 하고 사람에게 사랑할 권리가 있으며 사랑은 죄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건달에게도 일련의 건달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포로가 된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또 저에게 “음란도 무슨 죄짓는 거라고 할 수 없어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까?”라고 하니 저는 “당신은 음란이 범죄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무엇에 근거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걸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음란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음란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당신은 왜 음란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까? 이것은 사탄의 논리가 아닙니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서양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패괴된 인류의 길로 가면서 하나님 집의 행정을 범하면 마찬가지로 당신을 출교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진리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고 사회의 유행을 따르면 반드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위험한데 당신이 감히 음란이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공연히 진리와 상반된 논조를 펴는데 사는 게 싫었나봐요!” 진리가 없는 사람은 눈을 뻔히 뜨고 귀신의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유행 앞에서 패전한 것입니다. 그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 모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는데 이것은 멍청이가 아닙니까? 이것은 마비되어 멍청한 것 아닙니까?

【113-A-6】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악랄해져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버릴 수 있거나 하나님께 순복(역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예 하나도 없고 기꺼이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더욱이 하나도 없으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마음껏 향락을 즐기고 흙탕물에서 자신의 육체를 마음껏 패괴시키고 있다. 흑암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설령 진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실행할 마음이 없고 하나님이 이미 나타났음을 보았다 하더라도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 이렇게 패괴된 인류를 조금이라도 구원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부패한 인류가 어떻게 빛 가운데서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의의 없고 거짓으로 믿는 것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까? (됩니다.)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악랄해져” 여기의 ‘악랄’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악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깊이 패괴된 것이 어디에서 표현됩니까? 바로 “사람의 성품은 나날이 악랄해져” 어느 정도까지 악랄해졌습니까?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순복할 수 없고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예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기꺼이를 언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버리는 것은 그리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별로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까? 포기할 때는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하는 성질을 띠고 복받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보답해 달라고 바라는 것인데 이것이 기꺼이 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셔도 나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 바칠 거야. 나는 기꺼이 원하고 거래하지 않고 보답도 바라지 않으며 복 받기 위한 것도 아니라 이것은 나의 조그마한 양심이야. 내가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나는 하나님께 조금 돌려 드리는 것 뿐이야.” 이것을 “기꺼이 원하다”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는 선행을 좀 예비해야 해요. 선행을 조금도 예비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죠! 선행을 예비하면 십중팔구 복을 받을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므로 가치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마음 상태에서 비롯되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기꺼이 원하는 것입니까? 기꺼이 원하는 것이라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조금도 틀리지 않아. 하나님께 너무나 빚져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지 안 그럼 양심이 없고 사람이 아니야.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복받기 위한 게 아니고 더군다나 무슨 상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라 내 자신의 양심이 안위받기 위한 거야. 나는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면 이런 본심에서 비롯되어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은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기꺼이 원하는 것과 기꺼이 원치 않는 것의 차이를 분간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처음에 기꺼이 원하지 않지만 약간의 진심은 있는데, 만약 많은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진심이 기꺼이 원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진리를 깨달으면 뒤섞임이 갈수록 적어지고 이후에 바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 그리고 선행을 예비하는 것은 기꺼이 원하는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 인성이 있는 사람은 믿을수록 더욱 좋은 쪽으로 변하고 믿을수록 더욱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믿을수록 더욱 분량이 자라납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해 행한 모든 것이 뒤섞임이나 속셈이 있는 것에서 기꺼이 원하고 진심으로 원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이것도 하나의 자연법칙입니다. 바치는 것에 있어서 처음부터 뒤섞임이 조금도 없고 처음부터 기꺼이 원하는 사람이 없는데, 조금씩 진리를 깨닫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김에 따라 효과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바치는 것도 진심이지만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분량이 느리게 자라는데 소질 방면의 원인일 수도 있고 혹은 양육하는 사람이 없고 수리 대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느리게 자라는데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뜻과 뒤섞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뜻과 뒤섞임은 무엇을 통해 정결케 될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 정결케 됩니다. 진리를 깨달은 후 생명 성품이 변화되어야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봉헌하며 하나님에 대한 순복이 비로소 점점 더 순결해지고 점점 더 기꺼이 원하게 되며 점점 더 철저해지는데 어느 한 사람의 생명 진보의 과정도 다 이렇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화비할 때 처음에는 열심으로 하지만 그 후에 한동안 진리를 깨달으면 진심으로 바뀌고 또 나중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되면 기꺼이 원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기꺼이 원하는 것으로 바뀌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는데 그 사람은 진리를 얻은 사람에 속하고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처음에는 열심에서 비롯되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평생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지만 나중에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 사람이 처음에 바칠 때는 진심이 아니고 단지 열심으로 한 것이어서 결국 기꺼이 원하는 것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거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너무나 의의 있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고통받기 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생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결혼하지 않는다면 이때 그 사람이 바치는 것은 열심에서 기꺼이 원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아무리 훌륭한 이성을 만나도 동요하지 않고 남들이 구애를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꺼이 바치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이 기꺼이 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아셨겠지요? 기꺼이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에는 어떻게 도달합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도달합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당신이 행한 모든 것은 다 뒤섞임이 있고 다 기꺼이 원하는 것이 아니며 다 거래하는 것이고 다 목적이 있으며 영원히 기꺼이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원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시험이 임하면 틀림없이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진리를 얻기 위해 어떤 고통도 받을 수 있으므로 기꺼이 원하는 것도 동요될 리가 없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버릴 수 있거나 하나님께 순복(역주: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예 하나도 없고 기꺼이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으려 하는 사람은 더욱이 하나도 없다”, 여기 몇 개의 ‘기꺼이’를 해내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마음껏 향락을 즐기고 흙탕물에서 자신의 육체를 마음껏 패괴시키고 있다.” 향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향략을 추구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흙탕물에서 마음껏 자신의 육체를 패괴시키는데 이것을 어느 지경까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기생이나 음녀처럼 존엄이나 인격이 조금도 없고 짐승이 되면 끝장이고 두말할 것 없이 반드시 죽습니다! “흑암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설령 진리를 들었다 하더라도 실행할 마음이 없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사람은 진리를 들어도 사실상 실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실행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까?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흥미를 느끼고 늘 향락만을 추구하려 하는데 진리를 실행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타락의 시작이 아닙니까? 사람이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까지 타락하면 이것은 위험한 신호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도 구원받을 희망이 크지 않습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몰래 연애하고, 어떤 사람은 몰래 자리다툼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적극적으로 진보하는 것을 공격하고 이간질하며,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 집의 제물을 횡령하려 하며, 어떤 사람은 늘 음모와 궤계만 꾸미는데 마지막에 누군가 경고해도 듣지 않고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끝장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나쁜 짓을 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내리막길을 걸으면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열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드러내실 때 사람들이 보고 검거 적발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은 마땅히 자신을 반성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반성해야 합니까?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만약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위험한 사람이고, 만약 이미 내리막길로 갔다면 돌아서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수리 대처를 해도 소용없고 다른 사람의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않고 속으로 욕하고 심지어 감히 반박한다면 끝장이고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패괴된 인류를 조금이라도 구원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부패한 인류가 어떻게 빛 가운데서 살 수 있겠는가?” 이러면 도태되는데 어두움이 이제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도 찾을 마음이 없는데 이는 교계 사람들이고 이방인들입니다. 이러면 끝장인 것입니다. 교회를 양육하면서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무리 진리를 교통해도 그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우선 한쪽으로 제쳐놓아 거듭 관찰하고 한동한 지나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으면 B조에 보내어 반성하게 하세요! 그래도 고분고분하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하면 출교시키세요! 반드시 이렇게 처리해야 합니다.

【113-A-7】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절대 성품 변화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이래. 나는 변화하지 않을래.”라고 말하면 이는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입니다. 왜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까? 사람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이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과 처세 철학 그리고 사람의 생존관과 가치관이 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패괴된 인류는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만약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여전히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품이 변화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원래부터 하나님과 적이 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고 도태될 운명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정형을 자주 교통해 왔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몇 년 믿어도 모두가 보기에 그 사람이 이방인처럼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으며 이방인들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과 같고 이방인들의 처세 철학과 같으며 이방인들의 말과 구두어 그리고 유행어와 완전히 같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적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척 보면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바로 하나님과 적이 되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이 거짓말을 한 마디 하는 것은 별거 아닌데 입만 열면 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식사했어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무슨 뜻이지?’라고 생각하는데 척 보니 바로 마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사실대로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하지만 이방인은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마음을 떠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습니까? 진보가 조금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뭐요? 왜 이걸 물어봐요? 무슨 자격으로 묻는 겁니까? 내 일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이방인이 아닙니까? 바로 이방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악의도 없고 가족과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몇 년 믿은 후에 다시 이방인들과 대화하고 일 처리를 하려면 쉽지 않고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만약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어느 정도 거치고 진리를 교통하는 것을 통해 사람의 패괴를 들춰 내면 모두가 갈수록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통하니 패괴된 인류가 정말 가련하고 정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네요. 패괴된 인류의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과 처세 철학은 어떻게 돼서 다 사탄의 독소인가요? 사람의 모양이 조금도 없네요!”라고 말하는데 점점 더 뚜렷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니 하나님을 안 믿으면 정말로 안 되겠어요. 하나님을 믿는 건 너무 좋네요! 이렇게 많은 진리를 깨닫고 인류가 패괴된 실상을 이렇게 뚜렷하게 보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은 곧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네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정복되어 순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든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정죄하시고 저주하시고 심판하시고 증오하시든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하면서 인정합니다. 마지막에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은 다 진리입니다. 패괴된 인류의 추악상을 너무나 철저히 진실하게 들춰 내셨는데 저는 전부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합니다. 저는 당신을 저의 구주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곧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에 정복된 사람이 아닙니까? 그 후에 또 일부 패괴들이 유로되고 형제자매들과 약간의 마찰이 생겨 다시 어느 정도의 수리 대처를 거치고 다시 반성하여 자신을 알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보게 됩니다. 이때면 ‘이 인류가 왜 이렇게 깊이 패괴되었어? 이런 패괴 성품과 패괴 본성은 알고 분명하게 보았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주 완고해! 때로는 속으로 그렇다고 인정하지만 일이 닥치면 순복할 수 없고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으며 여전히 자신의 사탄 본성에 따라 하고 대하는 거야. 아, 자신을 아는 것과 성품 변화는 진짜 거리가 있구나. 만일 이렇다면 나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지?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고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수리와 대처를 받아들여야 하고 고통을 좀 받아야 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아마도 쉽게 변화되지 못하는데 변화되고 싶다고 해서 변화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인식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의 패괴된 성품은 변화되기 쉽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당신의 역사를 경력함에 수리와 대처가 없으면 안 되고 시련과 연단이 없으면 안 되고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제 자신을 당신께 맡깁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성품 변화이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어 당신을 만족케 해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하십시요. 저는 어떤 고통을 받든 다 되며 떠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동안 수리 대처와 시련 연단을 조금 겪으면 약간의 변화가 있고 조금 순복할 수 있으며 담대하게 대중 앞에서 자신이 너무 깊이 패괴된 것과 인성이 없는 것을 인정하고 어떤 잘못이 있으면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말하게 됩니다. 이 정도까지 경력하면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된 변화입니다. 대중 앞에서 담대하게 자신의 패괴를 인정하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며, 누구에게 가장 빚지고 누구에게 미움을 샀으면 그 사람에게 용기 있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는데 이건 쉽습니까? 일반인이 해낼 수 있습니까? 성품 변화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남의 발을 밟았으면 “미안합니다”라고 말해도 되지만 정말로 꿍꿍이 짓을 했다면 입을 열지 못하고 담대히 인정하지 못합니다. 겉으로 인사치레하는 말은 쉽게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짓을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시인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드러내는 것은 해내지 못합니다! 이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성품 변화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성품 변화라고 하는지 분명히 아시겠지요!

어떤 사람이 본분을 하다가 사역을 망쳤다면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깊이 반성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것입니까? 이것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누가 해낸다면 이 사람의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는데 이런 실제 예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조금 교통하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을 조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아, 그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뀌었네요. 그럼 생명 성품도 틀림없이 변화됐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리에 순복하는 면에서 뚜렷한 간증을 볼 수 없는데 당신은 그 사람이 정말로 생명 성품이 변화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증거가 그리 충분치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단지 일을 판단하는 관점에만 따르면 변화가 조금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반드시 실제 표현을 봐야 합니다! 실제 표현은 정말로 진리를 어느 정도 실행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진실한 것이고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도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성품 변화는 정말로 일을 잘못했을 때 담대하게 진실하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도 남겨 놓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실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합니다. 이것은 100% 성품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렇게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간증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신할 때 사실에 근거해 처리하는데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가식이 없고 거짓이 없으며 거만함도 없습니다.

【113-A-8】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이제는 쉽게 깨닫겠지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았으면 무엇을 추구해야 합니까? 무엇을 중요시해야 합니까? 당신은 성품이 변화됐다고 말하는데 무엇으로 성품 변화를 실증하겠습니까?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며 잘못을 저지르면 인정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설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성품이 변화된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바로 성품이 변화된 증거입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성품이 변화됐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고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적이 된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고 나서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매사에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얼른 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제멋대로 하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아 지금부터 시작해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진리를 구할 거야. 내가 진리를 구하면서 터득 능력이 부족하면 깨달은 것에 따라 실행하고 깨달은 만큼 실행할 거야.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 규례라도 지킬 거야. 그러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실행하면 해낼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글귀 도리를 말하지 말고 확실하게 가야 하고 실제적인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매사에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실제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추구하면 생명 성품이 변화되지 못할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리를 실행한 것이 너무 적으면 생명 성품의 변화도 너무 적고, 진리를 실행한 것이 많을수록 생명 성품의 변화도 더 많아집니다. 마지막에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리에 순복할 수 있으면 바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고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며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의 표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무엇을 성품 변화라고 합니까? 원래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사탄의 본성이 곳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곳곳에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람의 관념에 따라, 사람의 철학에 따라, 사람의 논리에 따라 행했습니다. 지금은 변화되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인데, 곳곳에서 진리를 원칙으로 삼고 곳곳에서 진리에 근거해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안의 사탄 본성이 해결되었습니까? 해결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성이 정결케 되었고 제거된 것입니다. 지금 그 대신 하나님 말씀 중의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었고 깨달은 모든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었는데 이런 사람은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따라 살고 매사마다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얻은 사람이며 진리를 생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품이 변화된 사람에 속합니다. 이전에 사탄의 본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리가 생명이 되었는데 전혀 딴사람 같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고 새사람이며 진리 있고 인성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이 최종에 도달하는 효과는 바로 사람을 진리와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에서 최종에 얻는 결정체입니다. 이 한 무리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국도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다음 시대, 즉 천년 하나님 나라가 땅에 실현될 때 이 사람들은 살아남아 천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무리 사람들이 어떻게 천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천년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나요?”라고 묻는데 이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탄에게 속하는 자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 하나님과 적이 되는 자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 소멸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교회, 즉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국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교회에서 교회 인솔자를 했던 사람이 백 명을 관리했으면 국도에서는 천년 하나님 나라의 백부장이 되고, 소구역 인솔자가 천 명을 인솔했으면 천년 하나님 나라에서 천부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뜻은 거의 같습니다.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에 아직 헌법이 없지요? 천년 하나님 나라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발표하시고 천년 하나님 나라의 헌법도 생기는데, 그때는 땅의 각 나라들과 각지의 성(城)들은 다 그리스도의 국도에 귀속되어 다스림을 받습니다. 국도에는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행정 기구도 새로이 안배하고 설립하는 것입니다. 천년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때는 성대하고 성령께서도 크게 역사하시며 하나님께서도 인류를 향해 나타나십니다. 날씨도 새로워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이 변화되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기를 추구하면서 마지막에 천년 하나님 나라가 될 때 살아남으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복을 누릴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그때는 완전히 실현됩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 날을 향해 발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 날을 향해 전진합시다! 우리가 정말로 진리를 얻고 큰 재난이 따라서 내려오면 재난 가운데서 시련과 연단을 더 받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게 되는데 일부 사람들은 도태되고 일부 사람들은 드러나고 일부 사람들은 온전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갖추는 것은 재난을 겪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어 재난 가운데서 쓰러지면 큰일입니다. 하나님 자민은 바로 재난 가운데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후에 충분한 공과가 있어 너로 하여금 배우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두가 충분한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최후의 날입니다. 재난이 갈수록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시면 지진, 기근, 온역, 전쟁 모든 재난이 다 내려오는데 마지막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됩니다. 지금 성경의 예언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보았습니까? 달이 핏빛 같이 되는 것이 4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달이 핏빛 같이 되는 것이 4번 이루어진 후가 곧 재난의 날인 것입니다. 그 밖에, 지금 중동 지역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성경의 예언은 다 이루어질 것이고 한 마디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이렇게 전능하고 이렇게 지혜롭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은 하나님께 이런 예언이 있음을 아는데 왜 하나님을 위해 이런 효력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사탄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갈고리로 걸어 그것에게 이 일을 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것을 갈고리로 거셨을까요? 우리가 지금은 분명하게 볼 수 없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갈고리로 걸어 이렇게 효력하도록 강요하시므로 그것이 효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교계가 기근이 든 후 참 도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구하지 않으면 죽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물주이시고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시고 온 우주를 주재하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주재하십니까?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재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은 왜 그렇게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예언에 따라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는 능력은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시면 있고 명정하시면 명정되는데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땅의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국도가 나타난다고 명정하셨으므로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시는 권병과 능력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세요. 경력이 많아지면 알게 됩니다. 경력이 많을수록 인식이 더 분명해지고, 인식이 더 분명할수록 사람의 믿음이 더 커지며, 인식이 분명할수록 더욱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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