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집(c)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깨달았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에 관한 설교 교통
【111-C-1】
『하나님이 역사하고 말씀하는 것은 다 너희의 성품에 변화가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목적은 너희로 하여금 깨닫게 하거나 인식하게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터득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상에 무슨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부분이 모두 인성 언어로 되어 있고 또 너무나 명확히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실행하라고 하는지를 다 알 수 있다. 이것은 터득 능력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구비해야 할 바이다. 특히 하나님의 현재의 말씀은 더욱더 분명하고 명확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려하지 못한 많은 일, 또는 사람의 각종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을 다 지적해 내었다. 하나님은 말씀을 빈틈없이 하였고 그 말씀은 마치 명월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니, 지금 이때에 이르러 많은 문제는 사람이 다 알고 깨달았으며 이제 실행하는 것만 남았다. 각 방면의 진리는 모두 사람이 세부적으로 경력(역주: 체험)해야 하고 더 세밀하게 탐색하고 구해야지 더는 가만히 앉아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만일 이렇게 나아간다면 공밥만 얻어먹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이러한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최종에는 모두 도태될 것이다. 너희에게 90년대의 베드로 풍격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바로 너희 각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여 경력하는 가운데서 진실로 진입하라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깨우침을 더 많이 더 크게 받아 자신의 생명에 더욱더 도움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글귀로만 깨달을 뿐 실제로 경력하는 가운데서 체험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아니라 죽은 글귀이다. 만일 네가 죽은 글귀만 지킨다면 너는 하나님 말씀의 실질을 찾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일 네가 실제 경력 중에서 경력한다면 그때에야 하나님은 말씀 중의 영적인 뜻을 너에게 풀어 준다. 오직 경력 중에서만이 많은 진리의 영적 뜻을 찾을 수 있고, 오직 경력 중에서만이 하나님 말씀의 심오한 비밀을 열 수 있다. 만일 네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명확하다 해도 너의 손에 가서는 텅 빈 글귀 도리가 되고 너의 종교 규례가 된다.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이 행하던 것이 아닌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기를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 대해서는 실제적인 것이다. 만일 실행하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는 마치 셋째 하늘의 전설과 같다. 실제적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과정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이고 또한 하나님께 얻어지는 과정이다. 분명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고 깨달으며 체험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실제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영생만 얻으려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고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두 미련한 사람이다. 마치 사람이 잔치에 참석하여 어떤 맛있는 것들이 있는지를 보고는 마음속에 담아 두기만 할 뿐 직접 맛보지 못한 것과 같다. 이는 미련한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람이 구비해야 할 진리이고, 모두 사람에게 가장 유익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것으로, 너희들 몸에 필요한 자양제와 영양제이며, 사람이 정상 인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사람이 장비(裝備)해야 할 진리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수록 너희의 생명 진보가 더 빠르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수록 진리를 더 잘 투득하게 된다. 너희의 분량이 자라나게 되면 영계의 일을 더욱 꿰뚫어 보게 되고 사탄을 이기는 데에 더욱 유력하다. 너희가 몰랐던 많은 진리는 모두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투득하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표면적인 뜻을 아는 데에 만족하고 도리적으로 장비하는 것은 중요시하지만 실행 방면에서 깊이 경력하는 것은 오히려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행실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는다’는 이 말의 실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 후에야 자라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본 후에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만 하면 생명이 있고 분량이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너의 인식은 치우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참으로 깨닫는 것은 진리를 실행할 때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다’라는 이 말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네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본 것은 기껏해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할 수 있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반만 맞을 뿐 결코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네가 진리를 하나 알기 전에는 아직 이 진리를 경력하지 못한 때인데, 도를 들을 때에는 깨달았다고 느껴져도 참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며, 진리의 글귀를 구비한 것이지 진리의 참뜻을 구비한 것은 아니다. 네가 진리의 겉면을 알고 있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과는 같지 않고, 진리를 인식한 것과도 같지 않다. 진리의 참뜻은 모두 경력하는 가운데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니, 진리를 경력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경력하는 가운데서만 진리의 은밀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으며, 깊이 경력해야만 진리에 내포된 뜻을 잡을 수 있고 진리의 실질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가 있어야 천하를 두루 다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너에게 진리가 없다면 많은 종교 인사들이 너에게 탄복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너의 집안 사람이라도 너에게 탄복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진리가 없으면 곧 눈송이가 흩날리는 격이고, 진리가 있으면 즐겁고 여유로울 수 있고 아무도 너를 공격하지 못하며, 이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진리를 공격하여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진리가 있으면 천지를 뒤집고 산을 밀어 버리고 바다를 뒤집어엎을 수 있으며, 진리가 없으면 구더기도 성읍을 공격하여 무너뜨릴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현재 관건은 진리를 안 후에 진리를 실행하여 더 많은 진리의 참뜻을 장비하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바이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 너의 글귀에만 순복(역주: 순종)하게 할 것이 아니라 너의 실행에 순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의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닥치든, 어떤 사람이 임하든, 너는 진리가 있어야 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이지 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보고 나서도 살아나지 못하고 여전히 죽은 사람이라면 너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한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보고 실제가 있는 설교를 많이 들었어도 너의 침울한 상황이 그래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만일 너희에게 참으로 하나님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너희는 도리를 장비하여 높은 도리로 사람을 교훈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경력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중요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현재 진입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일과 시간은 모두 유한한 것이다. 네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어떤 효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왜 하나님은 늘 너희에게 하나님 말씀을 깨달은 후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라고 하는가?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을 나타내면 그 다음 단계는 너희가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실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또 깨우쳐 주고 이끄는 한 단계 사역을 하는데, 일은 곧 이렇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자라나게 하는 말씀이므로 사람을 치우치게 하는 성분이 없고 소극적이게 하는 부분도 없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실행도 하였으나 여전히 성령 역사가 없다고 한다면 이 말은 어린아이나 속일 수 있을 뿐이다. 너의 마음이 옳은지 그른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모를 수 있겠는가? 왜 다른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면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가? 왜 네가 실행하면 성령의 깨우침이 없는가? 하나님에게 감정이 있을 리가 있는가? 너의 속마음이 참으로 옳고 또한 네가 협력도 하였다면 하나님의 영은 너를 따를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늘 일어나 따로 깃발을 세우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교회를 이끌지 못하게 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능만 하였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 검증받았는가?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속마음도 옳아야 한다. 속마음이 옳지 않다면 절대 서지 못한다. 너희가 가장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효과에 도달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실행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혹시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터득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은 터득 능력이 부족한 너희의 이 결함을 보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많은 진리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은 관건의 관건이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33년 반의 일생 동안 진리를 실행함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고난을 받기도 하였다. 무엇 때문에 늘 그가 핍박받은 일을 기록하였는가? 이것은 그도 적지 않은 고난을 받았음을 설명한다. 바로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였기에 많은 고난을 받게 된 것이다. 만일 진리를 알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면 고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유대인의 교훈을 따르고 바리새인을 따랐다면 그는 고난받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실행에서 네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도달하는 효과는 사람의 협력으로 되는 것이다. 너희는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가 만약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고통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만약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지 않았다면 고민하며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고난은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111-C-2】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본분이 바쁘고 고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육체적 고생을 좀 했지만 영적으로 수확이 있고 생명에도 경력이 있고 진입이 있으며 마음 깊은 곳은 충실하고 즐겁고 평안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함에 있어서 고생은 하였지만 생명에는 오히려 진보가 없습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줄 몰라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분 하면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우리에게 생명 진입을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진리도 교통해 주지 않고 우리를 수리, 대처하는 사람도 없으니, 우리 생명이 계속 자라나지 않는 거야!’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진리를 발표하셨는데 사람이 경력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근거해 우리가 <진리를 깨달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이 한 편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나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흐리멍덩하게 경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깨달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 이 한 마디 말씀 자체가 곧 진리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경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의 심판, 형벌을 어떻게 경력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많은데 어느 구절을 경력해야 합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경력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바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하고 날마다 진리를 교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교통하고 어떤 진리를 교통하든 한 가지 원칙을 장악해야 합니다. 즉, 깨달은 진리가 있고 또 자신이 ‘어떤 진리는 좀 깨달았어.’라고 생각한다면 빨리 실행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든 무릇 자신이 깨달은 진리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다 실행해 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에 적용해야 하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됨의 원칙이고 살아가는 원칙이며, 바로 자신의 생명이 되고 자신이 살아가는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효과에 도달한다면 진리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진리를 얻은 효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여 실행해 낼 수 있고 자신이 인식하고 진리를 깨달아 마지막에 이 진리가 자신의 생명이 되고, 일을 판단하는 것도 진리에 근거하고 일을 하는 것도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근거한다면 마지막에 이 진리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기초가 되는 것이고,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 안에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생명이 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생명 성품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 인생관,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하여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변화와 효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는 효과이고,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어 도달하는 변화입니다. 이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진리를 얻어서 도달하는 변화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 글자의 뜻만 알고 도리를 알면서 얻었다고 생각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경력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은지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보았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5~6년, 7~8년 믿은 후에 인솔자 일꾼이 되었는데, 다 글귀 도리를 말할 줄 알고 어떤 하나님 선민은 또 탄복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말을 정말 잘하네. 진리를 아는 게 많아.” 하지만 인솔자를 몇 년 했어도 이런 사람에게서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것은 전혀 보지 못했고 진리 실제를 살아내는 것도 전혀 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경력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그가 사역을 하면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글귀 도리도 잘 말하는데 왜 생명 성품에 변화가 없습니까? 왜 진리 실제를 살아내지 못합니까? 왜 진실한 간증이 없습니까? 글귀 도리만 알고 진리 실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고 무엇이 실제인지 모르며 글귀 도리만 말할 줄 아는데, 결국 그 어떤 진실한 간증도 살아내지 못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것도 볼 수 없으며 심지어 일을 판단하는 관점도 이방인과 같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리새인이 걸은 길입니다! 하나님 집에 글귀 도리는 많이 아는데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솔자 일꾼이 되면 하나님 선민은 수긍하지 않고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반대하고 거절하면 그들은 도태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솔자 일꾼이 아니어도 시간이 길어지면 역시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납니까? 다른 사람이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순전히 이름만 걸어 놓은 불신파입니다. 입만 열면 다 이방인들이 하는 그런 말을 하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나 말하는 방식 그리고 성품이 이방인과 똑같아서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짜 신자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서 실패했습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 글귀 표면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을 진리를 안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며, 글귀 도리를 말할 줄 알고 글귀 도리를 깨달은 것이 많으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글귀 도리를 말해 줄 줄 알고 텅빈 이론이라도 말해 줄 수 있으면 돼. 이러면 하나님을 믿어 성공한 사람이야”라는 데에 만족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길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집에서 글귀 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버림받고 도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선민 대부분은 다 분별할 줄 알아 그들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글귀 도리를 말하면서도 득의양양해 하지만 하나님 선민은 듣고 나서 수긍하지 않고 속으로 ‘이것은 다 글귀 도리야. 이것은 바리새인이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깨달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는 진리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원칙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면 어느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 다 수확이 좀 있고 마음에 자양분을 얻을 수 있으며 진리를 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설교 교통을 들어도 진리를 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좀 깨닫고 나서 본분을 하고 실행하면 길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사람이 살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짐승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면 불신파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진리를 얼마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 깨달았으면 즉시 실행해야 합니다. 이래야 진실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이든,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이든 아니면 사람을 폭로하는 말씀이든, 위로하는 말씀이든 아니면 이상 방면의 말씀이든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목적은 바로 사람이 진리를 얻고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는 데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역사의 이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하나님의 역사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발표하시는 목적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하는지 이런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취미를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 때문이고, 복을 얻기 위해서 좀 포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본분도 하면서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본분을 하면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복을 얻을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이 맞습니까? 이러면 틀립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걷는 길이 틀렸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해야 합니까? 본분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 합니까? 이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본분을 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라면 반드시 본분을 해야 하고 책임을 다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맞기 때문입니다. 본분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은 반드시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알고 나면 그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그럼 본분을 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바로 반드시 충심을 다해야 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우리의 본분을 다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행이고 우리가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진실한 간증입니다. 만약 우리가 본분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고 원칙도 없이 대충대충 한다면, 이렇게 본분을 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만약 본분의 목적이 명확하여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고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기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111-C-3】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은 주요하게 세 마디 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매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마지막에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게 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 세 마디를 해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역시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고 마지막에 진리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모두 진리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알아들었겠죠!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왜 이 세 마디를 실행해야 합니까?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마지막에 진리를 얻기 위함이고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진리를 구함에 있어서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치면 어떻게 실행할지 모르고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까닭으로 본분을 해도 늘 잘하지 못해 소극적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생스럽다고 하면서 고생하려 하지 않고 믿음도 없어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본분을 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정말 계속 본분을 해야 하는가요?”라고 묻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 존재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결혼 상대를 찾지 않았어요. 만약 10년, 20년 더 경력하다가 늙고 건강도 안 좋아지면 누가 저를 돌봐 주죠?” 또 어떤 사람은 “제가 본분을 하면 언제 큰 붉은 용한테 잡혀갈지 모르는데, 그럼 감옥에서 죽어야 하잖아요? 그럼 한평생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이건 문제가 아닙니까? 다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를 구할 때가 온 겁니다. 만약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쉽게 소극적이 되며 마음은 고통스럽습니다. 만약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길이 없고 거기에 묶여서 흑암에 떨어지게 되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모르고 흑암을 벗어나지 못하며 광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의 본분을 잘하지 못하는데 효력자만 되어도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효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에 속하지 않고 또 당신의 마음에 위로도 없고 공허하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과정은 바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치면 부단히 진리를 구함으로써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고, 해결하고 나서 또 새로운 문제가 임하게 되면 또 진리를 구하고, 진리로 해결하다 보면 마지막에 하나님 말씀 속의 진리를 우리가 다 찾고 깨닫게 되고, 우리가 모두 경력하고 실행하여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한다면 우리는 곧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과정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얻었을 때는 더 이상 어려움이 없고 더 이상 비애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자유 경지에 들어가게 되고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진리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임하면 모두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곤경에서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설교 교통을 듣고 나서 진리를 깨닫고 육체의 묶임과 결박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구해 도달한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단 진리를 깨닫게 되면 커다란 믿음과 힘이 생기게 되고 무엇이든 버릴 수 있고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붉은 용의 감옥이 인간 지옥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곳에 있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을 지경이고 살아 나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형제자매들은 감옥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가 사람에게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 부딪쳐도 진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원칙입니다.
어떤 어려움은 사람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진리의 교통을 듣고 빛 비춤이 좀 있으면 믿음이 조금 자라게 되는데 그러면 그 어려움이 너무 크다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며칠 지나 말씀 한 편을 읽고 또 한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 문제는 또 좀 길이 생기게 되고, 며칠이 더 지나 또 설교 교통을 듣고 진리를 좀 알게 되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보세요, 얼마만한 시간을 들여 진리를 구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문제는 2개월이나 3개월이 걸려야 해결되고 어떤 문제는 3~5년이 걸려야 마지막에 해결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의 사탄 성품, 즉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을 해결하려면 몇 년이 걸립니까? 7~8년 없이 됩니까? (안 됩니다.) 오늘 진리를 좀 깨달아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을 단번에 잘라내고 내일 또 진리를 조금 깨달아 호되게 타격하고 또 몇 달이 지나 진리를 더 깊게 알고 난 후 또 한 번 때리면 마지막에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육체의 정 하나를 해결하려면 몇 년이 걸립니까? 사람 안의 사탄 패괴 성품은 우리에게 임하는 어려움보다 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은 늘 남녀 문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이건 더 큰 어려움이죠? (예.) 이 문제는 몇 년 걸려야 해결될 수 있습니까? (이건 쉽지 않습니다.) 또 소질이 비교적 좋은 사람은 인솔자 일꾼이 되고 싶어 하는데 이 명예, 지위심 하나도 해결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는 늘 명예, 지위를 위해 사역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누리기 위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몇 년의 시간으로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것은 고질병의 근원에 속하고 사탄 성품이 마음속에 뿌리박혔기 때문에 이 사탄 성품을 뿌리째 뽑으려면 몇 년의 문제가 아닙니다. 철저히 뽑으려면 정말 8년, 10년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많은 형제자매들이 다 가족을 멀리 떠나 스스로 고독에 빠집니다. 자식을 생각하고 부모를 생각하면 안쓰러운 눈물을 흘리죠. “집이 생각나요, 부모가 그립고 자식이 그리워요.” 그때 어떻게 합니까? 좀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노래 한 곡을 불러봅니다. 마지막에 해결됩니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육체의 정도 사탄 성품에 속합니다. 사람마다 정은 다 있습니다. 가족이 그리운 것은 정상 인성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맞다 틀리다 논할 수 없습니다.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은 다 생각납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통제를 받아 너무 고통스럽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고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건 좋지만 생각해도 거기서 나올 줄 알고 사리도 알아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육체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정상 인성이고 이지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거기에 빠져 한사코 집에 가서 가족과 만나겠다고 하면서 본분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것이 진리에 부합됩니까? 만약 당신이 생각한 것이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상 인성에 속하지 않고 패괘 성품에 속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조물주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에게서 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부모가 사람에게 진리를 줄 수 있습니까? 참된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부모는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진리를 얻어야 진실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진리를 생명으로 만들어야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공급하시고 사람을 오늘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아름다운 귀숙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정을 내려놓을 수 있고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아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좋은 약이고 사람의 여러 가지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는 좋은 약입니다. 사람은 오직 진리 안에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고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하나님과 더 친근하게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진리는 너무나 귀합니다. 확실히 진리만이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의 진실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선민은 다 느꼈겠죠? 오직 진리만이 사람의 진정한 생명이고 오직 진리만이 사람의 영원한 생명이며 오직 진리만이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고 오직 진리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와 하나님을 긴밀히 한데 연결해 놓았고 영원히 갈라지지 않게 한 것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영생으로 이끕니다. 이 말은 지금에 와서 다 실제적이고 다 진실한 것입니다. 그럼 이 효과는 어떻게 도달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 체험하여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면서 늘 대충대충 하는데, 진리가 있습니까? 진리가 없습니다. 마치 어린애처럼 먹을 줄밖에 모르고 놀기만 하고 자기만 합니다. 너무나 어리죠.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며 사람이 되는 원칙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여러 해 믿은 사람이 만약 본분을 함에 있어서 아직도 대충대충 하여 하나님을 기만한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수리 대처를 여러 번 받아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데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대처만 해서는 소용없습니다. 그에게 참된 회개가 없다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도 난 진리를 구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진리를 아무리 분명히 교통해도 안 받아들일 거야.” 이런 사람은 불신파입니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다 보니 당신이 교통한 진리를 그가 알아들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실행하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의 사탄 철학대로, 사탄 논리대로, 사탄 법칙대로, 사탄 궤계대로 행동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에 속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 드러난 사람들, 진리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은 출교시키고 도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신자가 아니라 무엇이나 다 알면서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남아 있다 해도 골칫거리이고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적그리스도, 악인을 출교시키면 관념이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교회에 남겨두면 하나님 선민에게 번거로움과 위해, 고통만 가져오기에 반드시 제명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끊어야 할 때 끊어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우환이 됩니다!
【111-C-4】
그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육체의 이런 누림을 추구하는 것이 좋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점점 더 밝아지고 하나님과도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가장 자유, 해방되고 누림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일 큰 복입니다! 육체에서 살면 사탄과 점점 가까워지고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고 나중에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면 영원한 고통이고 영원한 유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세에 태어난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실제의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실제의 하나님 앞에 들림받아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공급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큰 복입니다. 이 복은 묘사할 방법이 없습니다! 창세 이래 얻지 못했던 복을 우리가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이렇게 큰 복을 얻었는데, 결정적인 시각에 육체 사랑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추구하면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까?
생명을 얻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복은 며칠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력에 의해야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 의해야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의해야 합니다. 이외에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또한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얻는 데에 왜 고생을 해야 하고 대가도 치러야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럼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신의 어려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패괴 성품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명예 지위를 중요시하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비웃음을 받고 비방당하고 논단받고 정죄받는데, 사람은 이 고생을 하지 못하므로 이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이 고생은 무엇으로 인해 초래된 것입니까? 바로 자신의 패괴 성품 때문에 어려움이 너무나 많이 생긴 것입니다. 결코 진리 자체가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서려 하는데 마침 큰 붉은 용이 당신을 잡아갔다면 그것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그런 것입니까?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다시 그것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그러지 않으려고 “저는 하나님을 믿을 겁니다. 하나님을 단호히 따를 것입니다. 당신들 같은 악마를 배반할 겁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당신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에게 고문을 가하여 고통을 받게 하고 당신을 괴롭힙니다. 보세요,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서고 하나님 믿는 것을 견지하면 사탄은 당신을 괴롭힙니다. 이렇게 괴롭히면 당신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이 이 고통을 받지 못하면 이 간증을 서지 못하고 이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면 선택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당신이 이 고통을 받지 못하면, 비겁하게 유다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치르게 되는 대가는 더욱 큽니다. 육체가 죽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 고통은 더 큽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얻기 위해 고생을 하지 못하고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육체의 누림을 사랑하고 육체에 연연하고 명예와 지위에 연연하기 때문에 진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고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인데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진리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잘못된 길을 걸어 하나님께 도태되었는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이 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힘들어요? 어쩌면 이렇게 고통스러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 자체는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어 행복을 얻게 하고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기만 하면 먼저 도달하는 효과는 바로 심령이 충실해지고 위로를 얻으며 그런 다음 영 안이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칭찬도 얻게 됩니다. 보세요,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긍정적인 것, 누림, 평안, 즐거움, 축복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 육체의 사탄 성품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고 사탄의 성품이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실행하면 고통을 좀 받는데, 당신은 마땅히 사탄을 배반해야 하고 사탄을 증오해야지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진리를 원망해서는 안 되며 진리가 불공평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서 간증을 섰고 진리를 지켰습니다. 진리를 지킨 후에는 육체가 그렇게 많은 고문을 받고 그토록 고통스러웠어도 마음은 평안과 즐거움을 얻었으며 마음은 위로를 얻어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리가 사람의 마음에서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지켰다면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위로, 즐거움, 해방, 자유,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면 큰 붉은 용에게 시달림을 받아 죽을까 봐 겁을 내는 사람은 큰 붉은 용에게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며 회개서를 씁니다. 육체가 고통받지 않았고 심문도 받지 않고 석방되었으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왜 기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울까요?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을 대적하였기에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비록 육체가 고생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심판받고 형벌받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더 큽니다!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악을 행하고 나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누구에게 죄를 지었으면 그 사람에게 “저를 한바탕 때려 주세요. 화가 풀릴 때까지 때려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음이 평안하기 위해 때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렇게 맞고 나면 마음에 위로를 얻고 마음에 가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입니다. 육체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지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한지, 평안과 즐거움이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무엇에 근거해야 합니까? 육체가 고생하는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처를 받는지의 여부에 근거합니다. 만약 사람이 죄지어 마음속에 상처를 받게 되면 그 고통은 너무나 커서 만회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으며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는 무엇에 관계됩니까? 도대체 무엇이 진실한 행복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생명입니까? 지금 분명히 알았겠죠?
사실, 하나님을 몇 년 믿고 나면 어느 방면의 진리에 대해서든 조금씩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생명 진입에 있어 자라는 것이 아주 느립니까?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진리를 조금 깨닫기는 했으나 실행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너무나 적습니다! 많은 진리에 대해 껍데기만 아는 데에 만족하면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오히려 실행은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 노력한 것마저도 다 포기하게 되고 실제는 조금도 없습니다. 진리는 얼마를 깨달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실행을 얼마나 했는가에 달렸습니다. 얼마를 깨달았든 실행하지 않으면 다 헛된 것이고 소용없으며 깨닫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깨달은 것이 조금 있고 빛 비춤이 조금이나마 있기만 하면 실행하기를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분명히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빛 비춤이 조금 있고 길도 조금 보이는데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 빛 비춤도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조금 있었던 그 길도 없어지고 나중에는 여전히 진리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를 얻는 것은 진리를 실행함으로 도달하는 것이지 결코 한 번 실행하여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장기적으로 실행하고 끊임없이 실행해야 마지막에 경력을 통해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고 분명히 깨닫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야 사람은 완전히 진리에 근거해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진리에 대해 경력이 아주 얕을 때는 깨닫는 것도 아주 얕은데, 한 가지 진리를 완전히 실행할 수 있습니까? 그는 실행할 방법이 없고 분명히 보지도 못합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당신과 같이 지내는데, 당신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이름, 그 사람의 가정, 겉으로 볼 수 있는 그의 생활 조건 등은 알지만 그 사람의 실질을 모르고, 그 사람과 손은 잡아봤지만 그의 마음은 읽지 못하며, 그 사람을 만나봤을 뿐이지 그 사람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것은 술친구이고 그저 만나는 친구이지 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아닙니다. 진리를 얻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진리의 겉면만 알고 진리를 문자로만 알고 진리의 실질을 모른다면 이것을 진리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진리의 실질과 진리의 실제에 대해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진리에 근거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으려면 반드시 무엇에 근거해야 합니까? 부단히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해야 합니다. 많이 실행하고 많이 경력하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해 봅시다. 당신이 막 성실한 사람이 되는 실행을 시작했을 때에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이 진리에 대해 인식이 있습니까? 당신은 분명히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거짓말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것인데, 당신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여기에 관한 얕은 도리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도리를 좀 아는 것을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실질과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저는 규례를 지킬지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지만 한동안 지키고 난 후에 보면 어떤 일에서는 지켜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일에서는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지키지 못해서 나중에는 끝내 또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나서 무너집니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구나, 성실한 사람이 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정말 어려워.’ 진리에 대해 관념이 생겼죠? 진리를 실행한 줄 알았는데 결국 실패한 때가 너무 많아서 마지막에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그것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손해나 좀 보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손해를 봐도 크게 봐야 돼. 밑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못하지. 난 진리를 실행할 순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뒤로 물러섰죠? 사탄에게 투항해 진리 실행하기를 꺼리게 된 것입니다.
【111-C-5】
진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첫 번째 원칙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바로 진리를 깨달았으면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깨달았으면 그만큼 실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하잖아요. 지금 조금도 깨달은 게 없는데 어떻게 실행해요?”라고 말하는데, 조금도 모르면 먼저 규례라도 지키세요. 진리의 뜻을 규례로 한동안 지켰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때 다시 기도하고 또 구하게 되면 진리에 대해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다만 빛 비춤이 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좀 깨닫고 빛 비춤이 좀 있으면 그만큼 실행하고, 깊게 깨달으면 실행도 깊어져야 합니다. 완전히 깨달으면 완전히 실행해야겠죠. 얼마를 깨달았으면 그만큼 실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았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진리를 깨닫는 데에 도달하였고 일을 판단하는 관점도 바뀌었고 생명 성품도 변화되었다면 진리가 곧 사람의 생명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었을 때 다시 진리를 실행하게 되면 어려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이 방금 진리를 좀 깨달았을 때 진리를 실행하면 어려움이 있겠죠? (그렇습니다.) 진리를 실행할 때 눈물도 흘려야 하고 마음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고 기도를 통해, 사람의 인솔을 통해 진리를 조금 실행해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진리를 실행하면 정에 금이 가는 것 같고 체면이 구겨지는 것 같고 사람에게 미움을 사는 것 같고 또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납니다. 이렇게 많은 우려와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실행하면 마치 십자가를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런 실행은 왜 고통스럽습니까? 분량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므로 진리를 실행할 때 어려움이 큰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의의를 알고 나서 진리를 실행하면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조금도 없는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진리에 대해 분명히 알고 진리를 실행하는 의의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분명히 알았을 때는 설령 그에게 십자가를 지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해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이때는 진리가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고, 마음으로 이미 진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진리와 완전히 합하며 저촉이 조금도 없고 관념도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다시 진리를 실행하면 조금도 어려움이 없고 마음에는 오직 즐거움과 평안만 있게 됩니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어느 정도 경력하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야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느끼고 진리를 어기면 고통스럽다고 느끼겠습니까? 바로 사람이 특히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완전히 인식했을 때, 다시 진리를 어긴다면 고통스럽고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조금도 없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그 정도입니다. 만약 이 정도가 되면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의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변화가 있습니다.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는 사람은 진리를 어기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합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과 합하는 사람은 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면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고통스럽고 후회막심하며 자신이 증오스럽고 저주스럽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했을 때 진리를 실행하면 어려움이 특히 큽니다. 그러나 일단 진리를 얻게 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어기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고통이 생깁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단 일을 잘못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마음이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화되어 처음 상태를 회복할 때에야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마치 부부간이 양심과 이지가 있고 서로 사랑하는데, 한 사람이 일을 잘못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워합니까? 두 사람이 오해를 풀어서 상대방을 용서해 줘야 마음이 평안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진리를 얻어서 생명이 되게 하고 성품이 변화될 때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고 차라리 죽으라는 것이 낫지 진리를 실행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더 어렵습니다.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고 가책을 받으며 평안하지 않고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도리어 평안하고 위로를 느끼고 즐겁고 흥분됩니다. 이것은 생명의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도리대로 말하자면 육체 관계가 있어 마땅히 친근해야 하는데 왜 그들과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미워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논단하면 그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대적해도 그는 부모를 버리고 미워합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인해 생기는 느낌입니까? 이것은 바로 진리를 깨달아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사람이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적이 됩니다. 이것은 다 진리를 깨달아 생기는 변화이고 역시 생명 안의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부모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교회 생활을 방해하면 수리, 대처를 하고 엄중하면 교회에서 제명합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면 “너와 선을 그을 거야. 다신 친구 아니야. 발걸음 하지 말자.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너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 보세요,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모두 진리를 깨닫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어서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으면 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진리에 근거합니다. 정말 진리를 얻었다면 육체 가족이 고통스러워하거나 죽는 것을 보았다 해도 마음이 비록 괴롭긴 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다소 정이 있긴 하지만 다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사람 간의 관계를 맺는데, 누구를 대해도 다 진리 원칙이 있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대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의 생명 성품은 다 변화가 조금 있습니다. 이런 효과는 어떻게 도달한 것입니까? 개괄해 말한다면 한 마디입니다. 즉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중에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부단히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여 마지막에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는 데에 도달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쳤는데 전혀 진리를 구하지 않고 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를 어떻게 분명히 교통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귓전으로 흘려버린다면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은 다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늘 소극적이고 연약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1년 동안 좋은 날이 며칠 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보기에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진리에서 좋은 점이나 유익한 점이나 도움을 조금도 얻지 못했고 진리에서 조금도 덕을 보지 못했고 사탄의 패괴 성품만 묻혀 와 늘 사탄의 패괴 성품 안에서 살기 때문에 결국 본분을 하면 늘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까닭으로 늘 연약해지고 소극적이고 정지하여 앞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심각해지면 자포자기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이런 규칙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빛이 늘 어둡고 빛난 적이 없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고 진리가 그의 속에서 지위가 없고 위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안은 흑암이 가득하고 사탄의 철학, 사탄의 논리, 사탄의 법칙이 가득하여 흑암 속에서 살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대집회에서 진리를 교통할 때 분위기가 열렬하고 성령이 크게 역사하면 그때 얼굴은 어떻습니까? 윤기가 돕니다! 그럼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 맛은 달지 않습니까? (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그런 자유를 얻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말 왜 그렇게 좋죠?” 이것이 바로 심령에 어느 지경까지 누린 것입니다. 자유, 해방되어 생기는 누림인데, 이 누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예.) 진리를 얻으면 좋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진리를 얻으면 어떻게 좋습니까? 진리를 얻은 진실한 표현과 특징은 바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배우자를 찾아 “기쁜 일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말하는데 이건 진정한 행복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그것은 육체의 욕망이 만족을 얻은 것이지 진정으로 자유, 해방되었다는 그런 행복한 느낌은 아닙니다. 육체의 욕망이 만족을 얻을 때 한 가지 쓴 열매가 속에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까? 예상되는 앞날은 별로야, 암담해! 길이 어디에 있지? 나중에 어떤 결과일까? 어떤 쓴 맛을 보게 될까? 어떤 죄업이 생길까? 이건 다 미지수야.’ 이런 느낌이 있지 않겠습니까?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 다 체험이 얼마 있습니다. 설령 직접 체험한 것이 없다고 해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111-C-6】
진리를 실행하기가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은 어떤 까닭으로 생긴 것입니까?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이 진리를 실행하면 유로하게 되는 사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익만 챙기려 하고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방어선으로 인해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그것에서 늘 벗어나지 못하며 소극적이고 연약해져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사탄에게 투항합니다. 그렇죠? 만약 당신이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큰 손해를 볼지언정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밑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성실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려움이 없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광명정대한 것이고 광명 속에서 사는 것이며, 하늘의 뜻에 맞고 땅도 받드는 이치이며, 또한 밀어낼 수 없는 의무입니다.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대수로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원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아니라 광명 속에서 사는 것이고 떳떳한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늘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탄 철학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분명히 보아야지 분명히 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럼 사람이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일단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진리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빨리 진리를 구해 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합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걸림돌과 장애물이 되는 것은 모두 발로 차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진리를 실행함에 성공한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성공하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게 됩니다. 사람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이 너무 늦어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면 주로 어디에서 걸린 것입니까? 사람이 생명 진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과감하게 실행하지 못하고 단호하게 실행하지 못하며 떳떳하게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람의 사탄 패괴 성품이 너무 엄중하고 사탄의 본성이 너무나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늘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철학으로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때 방해받고 가로막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도 진리를 얻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무엇인지 좀 알았으니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교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는 구체적인 한 가지 일에서 어떤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내면서 별로 죄지은 것도 없다면 이미 진리를 실행한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죄짓지 않았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결하고 직면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데에 가장 관건이 되는 3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매사에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 진리를 깨달으면 마땅히 실행해야 합니다. 셋째, 마지막에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진리를 얻은 것입니다. 진리를 얻어서 생명이 되게 하면 바로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진리에 순복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복한다고 느낀다면, 진리를 얻어서 생명이 된 것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당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하라고 했는데 당신이 모르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결혼 상대를 찾는 일이 임하여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배우자 감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거나,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거나, 어떤 사람이 결혼해 달라고 프로포즈를 한다면 당신은 이 일에서 어떻게 대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상대를 찾지 않고 거절하겠으며 소개하는 그 사람을 쫓아버릴 것이고 프로포즈하는 그 사람도 한 발에 차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은 한 가지 규례 즉 ‘난 찾지 않겠다’는 규례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실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리를 실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의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고 진정한 태도가 있어야 하며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볼 수 있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진리에 부합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원칙으로 처리하면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당신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다면 그 사람이 당신이 보기에 ‘나보다 괜찮네. 이상형이야. 여러모로 봐도 나보다 나아서 마음이 가지만 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하나님께 기도해야 돼.’라고 합니다. 기도해서 뭘 말합니까? “하나님, 어떤 사람이 저에게 프로포즈를 하였는데, 저는 이전에 맹세를 하였으니 결혼 상대를 찾아선 안 됩니다. 하지만 프로포즈한 이 사람이 어느 면에서나 다 저보다 나아서 제 마음이 흔들립니다. 제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기도입니까? 이건 타협하려는 것이고 하나님께 사정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전에 당신께 저를 다 바치겠다고 했지만 오늘은 제가 연약해졌으니 이 면을 살펴주셔서 저를 용서하시고 제가 결혼하도록 해주세요!” 이 기도는 거지가 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럼, 진리를 구하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아 이 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야, 내가 정말 그와 연애하고 또 임신하고 애를 키우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수년 내에 끝나게 될 텐데 그 역사를 경력하지 못하게 되잖아. 이건 하나님을 배반하는 표현이구나, 이 일은 심각해. 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주님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어. 롯의 아내가 돼서는 안 돼. 재난이 내릴 때 가족을 생각하다 보면 소금기둥이 되는 결과를 맞게 될 거야. 난 육체를 돌보아서는 안 되고 그것을 만족시켜서도 안 돼. 난 진리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살며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살아야 돼.’ 여기까지 생각하고 ‘하나님, 저는 이 혼인을 거절하겠습니다. 결혼 상대를 절대 찾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정했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감찰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진리를 깨닫고 나서 프로포즈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결혼하자고 사정했는데, 저도 당신의 마음이 진심인 줄 알아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따라야 돼요. 지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시기인데 저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요. 오늘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 태도를 알려 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저는 혼인을 포기하고 결혼 상대를 찾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일을 마침내 분명히 볼 줄 알게 되었고 알고 난 후 육체의 연약함은 돌보지 않고 단호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그 혼인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구하는 간증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건 규례를 지키는 것과 어떤 다른 점이 있습니까? 규례를 지키는 사람은 이 일을 분명히 볼 줄 모릅니다. 간단한 도리만 알고 규례만 지켜 그와 만나지 않지만 그가 매력이 있어서 마음은 늘 그에게로 끌립니다. 정말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는 연약하지 않고 상대방이 아무리 좋아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한 가지 일에서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까?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인솔자가 되었는데, 그에게는 실제가 별로 없어서 형제자매들 늘 연약하고 소극적이며 혹은 어떤 사람이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으면 그는 그 사람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도와줘도 말하는 것은 다 글귀 도리이고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여 그는 마음이 괴롭고 소극적이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우선 문제의 근원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인솔자가 된 이상,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싶고 사역을 잘하고 본분도 잘하고 싶으며 형제자매들의 어려움도 다 해결하고 싶지만 나는 진리가 부족하고 생명도 너무 얕아서 실제 사역을 하지 못해.’ 진리를 구함으로써 우선 이 문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난 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빨리 경력해야겠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실행하고 어떤 방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그 방면의 진리를 실행해 진리 실행하기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은 점차적으로 해결됩니다. 당신이 진실한 경력이 있고 난 후 다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쉽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진리를 구하고 실행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다른 사람도 진리를 실행하여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혼인 문제에서 소극적이고 연약한데, 당신이 마침 혼인 문제에서 한동안 좌절을 겪다가 나중에 진리를 깨닫고 육체를 배반하여 혼인을 포기한 이런 경력이 있다면 그에게 부족한 이 부분의 경력과 진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야, 다행히 내게 이 경력이 있었구나. 만약 이 경력이 없었더라면 그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거야.’라고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어떤 방면의 진리이든 모두 자신이 경력해야 교통할 수 있겠네요!”라고 말하는데,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 문제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깨달은 진리가 깊다면 그가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혼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을 때, 당신이 이 일을 경력하지 못했어도 다른 형제자매의 실제 경력 간증으로 그의 문제를 해결하여 마침 효과에 도달하였다면 이것도 실제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력에다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근거하여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보고 인식한 것을 교통하여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11-C-7】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한 방면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방면에서 모두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완전하게 경력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은 무엇일까요? 바로 “한 가지가 통하면 100가지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접촉하게 되면 그 옆에 있는 것까지 통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를 알면 3가지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서 당신이 경력이 있으면 이와 유사한 일에서 경력하지 않아도 깨닫게 되고 분명히 알게 되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형제(자매)가 당신에게 선입견이 있어서 어떤 때에 사실을 왜곡하여 당신을 논단하고 공격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우선 당신은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그 형제(자매)가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며, 지위 명예만 추구하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나면 그 사람을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로 인해 화가 생기고 다른 사람을 논단하고 공격하고 비하합니다. 당신이 이 일의 실질을 분명히 보게 되면 이 일에서 마땅히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나를 공격하고 논단하는구나! 좋아, 그럼 나도 공격할 거야. 나를 살갑게 대하지 않으면 나도 예의를 지킬 이유는 없지!’라고 한다면 이게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실행하는 것입니까? 사탄 철학입니다. 사탄 철학을 실행하면 그건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까? 사탄 철학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하려면 마땅히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이 사람은 악인이 아니야. 그저 속이 좀 좁을 뿐이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질투하면 그 사람에게 계속 그렇게 해. 분량이 작아서 그러니 내가 포용하고 인내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야.’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떤 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참지 못해 화가 치밀어 마음속으로 늘 미워합니다! 그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생기게 되며, 믿음이 생기면 마음속으로 개의치 않게 되고 포용하고 인내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 그가 또 논단하면 당신은 또 화가 나게 되는데, 그때는 정말 반격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전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속의 가시가 그리 아프지 않고 한동안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지나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 가시가 또 마음을 찔러 아프고 또 반격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분량이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규례로라도 포용하고 인내할 수 있습니까? (해내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할 수는 있어도 한평생 하지는 못하고 언젠가는 다시 범할 것이고 다시 폭발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리가 있는 사람은 정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실질을 해부해 보면 그가 분량이 작고 질투심이 조금 있을 뿐이야.’ 그 다음 다시 자신이 이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분량이 작으면 다 이렇구나.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네. 질투심이 너무 강해. 이건 한 사람의 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야. 그 사람은 나하고 원수진 일도 없어. 그냥 분량이 작을 뿐이고 질투할 뿐이지 사실 나쁜 사람은 아니고 악인도 아니야.’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면 포용과 인내가 비교적 크고 비교적 진실한 것입니다. 그때 다시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이 아주 좋고 그는 역시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며 거기에다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을 보면 “야, 역시 좋은 형제자매야, 단지 분량이 작을 뿐이지.”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 포용과 이전의 그 포용은 다릅니다. 형제자매들을 가족으로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고 일의 실질을 분명히 보게 되어 도달한 효과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 포용과 인내를 당신이 실행해 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실하게 진리를 실행한 것입니다! 알아들었겠죠? 그럼 형제자매들에게 진리를 실행하여 포용하고 인내하게 된 것은 규례입니까? 이 속에는 사랑이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생기고 진실한 아량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긴 포용과 인내의 힘은 큰데 그것이야말로 참된 포용이고 정말로 상대방을 살펴 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그에게 자신의 간증을 말하고 자신이 실패한 경력을 말할 때 그도 감동을 받는다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선으로 악을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실하게 서로 사랑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받고 회개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이것은 분량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입니다. 만약 규례만 지킨다면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규례만 지키면 도달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면 안에 믿음이 있고 힘이 있으므로 실패하여 수치를 당할 지경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면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가게 되고 사람을 대함에 원칙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이러면 도달하는 효과는 아주 뚜렷하고 해낸 간증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사람을 정복할 수 있으며 사람을 탄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규례를 지킨다면 그의 안에 진실한 믿음과 힘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그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규례를 지키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젠 깨달았습니다. 만약 매사에서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구하며 이렇게 진리를 실행한다면 진리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다시 진리를 실행하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완전히 원칙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진리를 실행하여 도달하는 표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다 실행의 원칙이 있습니다. 규례를 지키는 것을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규례를 지키는 것을 원칙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소극적으로 지키기만 할 뿐 결코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규례를 하나 지킨다고 해도 그 속에 진실한 믿음이 없고 힘이 없으면 지키지 못합니다. 설령 오늘은 지킬 수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규례를 지키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 분량이 작은 사람들이 처음에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규례를 지키는 것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규례를 지키기 위해 아주 큰 노력과 대가를 들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오늘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규례를 지키지만 한동안 경력하여 성령이 일깨워 주어 그가 무엇이 진리를 구하는 것인지, 무엇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무엇이 원칙 있게 일을 처리는 것인지를 알게 되면 조만간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2015년, 이 한 해 동안 수확이 큽니까? (큽니다.) 수확이 다 아주 큽니다. 수확이 큰 사람은 분명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깨달아야 얻는 수확도 큰데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 적으면 수확도 분명히 작을 것입니다. 수확이 큰 관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왜 수확이 클 수 있습니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수확이 자연적으로 큰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흐리멍덩하고 허송세월만 한다면 수확이 적습니다. 관건은 바로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밖에 사람이 가정과 정에서 나와 밖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의 포기죠! 사람에게 이러한 포기가 있고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요소가 있다면 수확은 크게 되어 있습니다. 이 포기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 한 해 동안 본분을 하며 정말 아주 바쁘게 돌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힘들었지만 영 안은 즐겁습니다. 이 한 해 진리를 적지 않게 깨달았고 도움도 적지 않게 얻었으며 생명도 좀 자라났고 생명 성품에도 다소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수확이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만약 2~3년 계속 이러한 수확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고 수확이 더 크게 됩니다. 수확을 듬뿍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 관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진리를 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 2가지를 견지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에 임하는 것은 겁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정상입니다. 문제에 부딪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관건은 어떻게 진리를 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가입니다. 매번 문제에 임하는 것은 모두 온전케 되는 한 번의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서 진리를 구해 그것을 해결한다면 진리에서 한 걸음 진보한 것이고 진리에서 한 걸음 실제적인 깨달음과 진입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번 진리를 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관건입니다. 당신이 어려움이 없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과정은 바로 부단히 문제를 발견하고 부단히 진리를 구하고 부단히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과정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많아지고 진리도 분명히 깨닫게 되면 진리를 얻은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할 줄도 모른다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매사에서 진리를 구할 줄 안다면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를 얻게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을 믿은 지 8년~10년이 되어 진리를 많이 깨달았습니다. 어떤 일에 임해도 다 문제가 없고 어떤 어려움에 부딪쳐도 그가 보기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고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마치 별로 큰 고통을 받지 않는 것 같고 진리로 해결할 수 있어 너무나 쉽습니다. 큰 붉은 용에게 잡히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목숨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께서 임의로 지배하시게 하여 자신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일이라고 해도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다 작은 일이 됩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 어떤 작은 일 하나도 다 하늘같이 큰 어려움이 되고 다 걸림돌이고 장애물이며 그것은 마치 큰 산이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진리가 있으면 어떤 문제도 다 작은 일이고 괜찮으며 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진리는 정말 대단합니다! 정말 너무나 귀합니다! 사람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터득할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사탄 성품이 있으면 어떤 일이 임하든 다 어려움이 됩니다. 당신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다 해결하고 난 후 다시 자신의 몸에 사탄의 패괴 성품이 아직도 얼마나 존재하는지 보게 되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바로 사탄 독소의 뿌리를 뽑는 과정이고 바로 사탄의 둥지를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사탄의 성품을 정결케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문제를 다 해결하고 나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림, 즐거움, 평안, 자유, 해방입니다.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유익한 점은 아주 많죠? (예.) 진리는 아주 귀합니다! 지금은 진리에 대해 생소하지 않겠죠? (생소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 취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지식을 가장 귀하다고 보는데 그 결과 어떻습니까? 지식은 사람을 교만, 자대하게 하고 사람을 더 깊이 패괴시키며 마지막에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며 지옥에 떨어지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박사 학위를 땄는데, 그 박사 학위가 좋은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옥의 문을 여는 키입니다! 당신에게 지옥의 문을 여는 키가 있다면 단번에 지옥의 대문을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진리를 얻으면 다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천국의 키죠. 천국의 대문은 진리로 열 수 있습니다. 영생의 대문은 진리로 엽니다. 진리가 있으면 천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진리야말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고 영생의 도입니다.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111-C-8】
문제 해답
문제 (1) 왜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실행 방면의 진리를 늘 견지하지 못합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쉽게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는 ‘내가 이렇게 해도 하나님은 못 보셨을 거야! 난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감찰하시지 않으면 난 괜히 한 거잖아!’ 그러면 하나님의 감찰을 끝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가지 좋은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은 날 축복해 주시지 않았어. 하나님께서 정말 보신 걸까? 하나님은 보시지 않아. 그렇다면 앞으로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 않을 거야. 그래도 자신을 만족시키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행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는 더욱 믿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다는 것은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상대해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라고 믿는 사람만이 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다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일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을 수 있고 어떤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어떤 일을 하나님이 칭찬하시며 어떤 일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어떤 일이 하나님의 노를 거스를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을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가 한 모든 일은 점점 더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고 그는 점점 더 진리의 실질을 더듬게 되며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더 확고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정확해집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섬기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하는 본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됩니다. 이러면 온전케 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케 되는 과정이죠?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알았겠죠?
문제 (2) 자신이 바리새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마땅히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 합니까?
다음과 같이 답변함: 드러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단번에 자신을 알고 자신을 꿰뚫어 보게 되니까요. 이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음에는 육체를 배반하고 진리를 실행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드러나는 것을 도태되는 것이라 여기지 마세요. 만약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미워할 수 있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분명히 보고 난 후 하나님이 드러내 주신 것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큰 구원이야. 이런 드러냄이 없었다면 난 아직도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고 답보 상태에 머물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면서 진보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드러나게 돼서 내 자신의 본 모습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기에 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내겐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 그리고 난 마귀 사탄의 원석과 같은 사람이야! 이젠 정말 진리를 추구하고 다시 시작해서 사람이 돼야지.’ 이렇게 진실한 심지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조금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정말 도태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몇 년이나 봐 왔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드러나고 나니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새롭게 사람이 되기 시작했으며 자신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에 대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의 결국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도 섣불리 규정하지 못합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볼 줄 알겠지만 개별적인 사람에 대해 우리가 다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소극적이 되지 마세요. 하나님이 아직 도태되었다고 하시지 않은 이상 우리는 향상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태되었다고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향상해야 하고 닿을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닿을 수 있는 데까지 노력했는데도 마지막에 닿지 못해 지옥에 간다 해도 마음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향상하지 않은 사람에 비하면 마음이 평온할 것입니다. 노력할 만큼 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향상하세요.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누가 당신을 마귀가 꼬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하고 마귀 사탄이라고 정한다 해도 “저는 마귀지만 그래도 진리를 추구하겠습니다. 저는 마귀로 정해져 지옥에 내려갈지라도 지금부터 추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 볼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쉽게 꺾이지 마세요. 그래도 향상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지라고 합니다. 바른 길로 가면 그것을 심지라고 하고 곁길로 빠진다면 야심이라고 합니다!
문제 (3) 어떤 때 본분을 하다가 큰 어려움에 부딪쳤는데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뒤로 물러서고 싶은데 또 섣불리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본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소극적이 됩니다. 이런 정형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정형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답변함: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면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이 일을 난 왜 못하지?’ 실행했습니까? 노력했습니까? 대가를 치렀습니까? 그 외에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고 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50Kg 짊어지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50Kg 짊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15Kg 겨우 질 수 있다면 조금 노력해서 최대한도로 15.5Kg 질 수 있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목표를 주셔서 그 방향대로 노력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알겠죠? 예를 들면, 배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저 표준에 도달하면 다 괜찮습니다. 진실하고 자연스럽고 일부러 꾸며낸 것이 아니어서 사람이 보기에 봐줄 만한 정도면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도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만약 자신에게 요구가 너무 높다면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때 자포자기하게 되고 소극적이 됩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람 자신이 우매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람이 모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직 최대한 노력하고 향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되고 하나님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분을 함에 있어서 설령 잘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을 규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섣불리 규정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영원히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규정은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정말 계속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면 ‘난 계속 진리를 구하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지할 거야. 그러면 마지막에 꼭 성공할 수 있어.’라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좋지 않습니까? 당신이 계속 노력하고, 닿지 못해도 노력하면서 ‘힘이 얼마 있으면 그만큼 노력하고 능력껏 하다 보면 차츰차츰 어느 날엔가는 꼭 성공할 거야.’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 무엇을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에 따라 사람에게 요구하십니다. 0.5Kg 들 수 있는 것이 당신의 능력인데 당신이 0.5Kg 들었다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은 5Kg 들었으니 자신은 실패했다고 본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맞습니까? 공평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분량은 그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 누가 진리가 더 있는지 겨루고 누가 진리를 더 깨달았는지 겨룹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되었습니까? 당신이 믿은 것은 고작 몇 년입니까? 그렇게 비교하면 잘못됐습니다. 당신은 노력하면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계속 노력하면 됩니다. 본분을 할 때마다 비록 잘하지는 못했어도 조금 진보가 있어 ‘다음은 이전보다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비록 내 바람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진보가 있어.’라고 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늘 진보가 있으면 성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죠? 어떤 사람은 대본을 쓰는데 계속 잘 쓰지 못하니 소극적입니다. 제가 “10년 더 써 보세요. 분명히 진보가 있고 분명히 좋은 대본을 써낼 수 있을 것입니다. 3년만 써도 달라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본을 씀에 있어 쓴 말들이 다 실제적이면 됩니다. 자신에게 진리를 얼마나 높이, 얼마나 깊이 있게 써야 한다고 요구하지 마세요. 쓴 것이 얕아도 실제가 있어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도움이 되고 다 좋다고 한다면 그 대본은 가장 좋은 대본입니다. 이 원칙으로 쓰면 됩니다. 지금 몇 번 실패했다고 자신을 규정하지 마세요.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규정은 원칙이 없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사실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본분을 함에 있어서 요구가 너무 높으면 안 되고 계속 진보가 있으면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높게 요구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높게 요구하십니까?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을 잘 아십니다. 계속 다른 사람과 겨뤄 높이 오르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겨루다가 닿지 못하면 소극적이 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것은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며 자신과 장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어리석지 않습니까? 이러면 어리석고 우매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