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의 교통 설교

목차

111집(b)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해야 하는 10가지 방면의 효과

【111-B-1】

지금은 모두가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 얻는 것을 중요시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행할 줄 모르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일을 처리하든지 길이 있어야 합니다! 길을 알지 못하면 성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실행하는지, 마지막에 어떤 방면의 효과에 도달하고 어느 방면에서 변화가 있고 성과가 있는지를 뚜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선 하나님께 순복(역주: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하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충심으로 본분을 해야 하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늘 말했습니다. 이런 도리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추구했는데 이런 방면에서 효과를 보았습니까? 만약 몇 년 동안 추구하면서 시종일관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무슨 문제입니까? 진리를 얻지 못한 게 아닙니까? 만약 정말 진리를 얻었다면 어찌 효과가 없고, 변화를 볼 수 없을까요? 이런 건 다 실제 문제입니다.

오늘은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해야 하는 10가지 방면의 효과를 교통하겠습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효과는 첫째는 욥과 같은 믿음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알아 가는 것이고, 넷째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여섯째는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진리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 합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고, 열째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진리 실제는 무엇을 통해 도달합니까?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효과는 바로 이 10가지 방면의 실제를 갖추는 것입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실제를 만약 사람이 어느 정도 갖추고 진실한 진입이 있다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천국의 자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10가지 방면에서 진입한 것이 비교적 뛰어나 간증을 할 수 있고 진리를 교통할 수 있으며 비교적 깊은 인식을 말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온전케 된 사람이며, 하나님께 쓰임받고 중용될 것입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면서 성과가 있다면 이 10가지 방면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고, 이 10가지 방면에서 모두 서로 다른 정도의 진입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몇 년 동안 진리를 추구했지만 이 10가지 방면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고 아무런 진입도 없고 어느 방면에서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얻었을까요? 틀림없이 진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의 성과는 주로 성품 변화를 보고 행위 표현을 보고 선행을 얼마 예비했는지를 보는 게 아닌가요?”라고 말합니다. 그건 작은 방면입니다. 최종의 진실된 성과는 이 10가지 방면인데 이건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첫 번째가 무엇이죠? 국도의 자민은 반드시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춰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반드시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춰야 할까요? 그건 욥의 믿음이 진실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믿음은 무엇을 가리켜 말합니까? 사람의 모든 것, 사람의 근원, 사람이 피조된 것과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안배해 놓으셨으며, 다 하나님께서 한 단계씩 인도해 주셔서 오늘까지 오게 된 것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것에 대해 진실되게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진실된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욥과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욥의 믿음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요? 바로 욥이 시련을 받고 나서 간증을 굳게 선 것에 근거해 보게 된 것입니다. 욥은 시련이 임한 뒤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칭송했는데 그건 진실된 믿음입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도리를 말할 때는 “아,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뭐든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다가도 시련이 닥치면 또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하는 말이 다 도리이고 거짓말임을 증명합니다. 시련이 닥칠 때에야 진담을 하고 마음속 말을 하게 되는데, 말하지 않으려 해도 자제할 수 없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 특히 시련 후에 나오는 말이야말로 진실된 말이고, 그 사람의 실질과 성품 그리고 그 사람의 관점을 대표하고 그 사람의 진정한 *분량도 대표합니다. 그럼 오늘날 하나님을 따르면서 심지어 모든 것을 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 실행하는 것입니까? 진실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까 아니면 복만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른 속셈이나 목적이 있어서입니까? 이런 일들은 다 드러날 것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만약 사람에게 진실된 믿음이 있다면 행하는 것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본다면 누가 어떤 도리나 그릇된 논리를 말하든지 미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사실의 진상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시련 가운데서 표현하는 것과 유로(流露)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진실된 믿음이 있는지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잡히면 왜 유다가 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원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정할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해 진실된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걸 알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사탄에게 넘기신 건 나를 시련하시고 나를 드러내시고 내 믿음을 검증하시기 위해서라면 죽을지언정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어!”라고 이런 말을 한다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왜 나를 사탄에게 넘기셨을까? 사탄에게 넘기시면 난 하나님을 안 믿을 거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데 왜 나를 안 구하시지? 왜 나를 보호해 주시지 않지?”라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의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해 자백서를 쓰고 큰 붉은 용에게 투항합니다. 이건 사람에게 진실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의 시련으로 그 사람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가 있다고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확실히 성육신하셔서 오셨다는 것도 시인합니다. 하지만 큰 붉은 용의 잔혹한 핍박 앞에서는 무서워 “지금은 본분을 할 수 없고 집에서 몰래 믿을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 큰 붉은 용이 무너지면 다시 정식으로 본분을 할게요.”라고 말합니다. 이건 뭘 말합니까? 그 사람이 욥과 같은 믿음을 갖췄습니까? 욥과 같은 믿음이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수록 도달하는 효과는 더욱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을수록 나타나는 효과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지고 더 진실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첫 번째의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춘다면 이건 생명이 자라나는 토대이고 생명이 자라나는 전제인 것입니다! 진실된 믿음이 없으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힘이 없고 본분을 해도 진심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순복도 단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생명 진입도 다 사람에게 진실된 믿음이 있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사람의 믿음이 큰지 작은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분량의 크기를 보려면 먼저 그 사람의 믿음을 봐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믿음이 작은 사람이면 분량이 없고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작은 사람이 기꺼이 진리를 실행할까요? 믿음이 작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쉬울까요? 믿음이 작은 사람이 육체를 배반하기 원할까요? 믿음이 작은 사람이 시련이 오면 굳게 설 수 있을까요? 이런 것에 다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갖춰야 할 이런 진리의 실제에 진실된 믿음이 없다면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추는 것은 첫째로 진입해야 할 진리 실제이고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첫 효과입니다.

*분량: 생명의 크기

【111-B-2】

두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을수록 더욱 진리를 사랑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으며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면 한 가지 효과에 도달하게 되는데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보세요, 무릇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일에서 신중하게 되고 진리를 구하게 되며 떨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 득죄하면 안 되고 악을 행하면 안 돼!” 이것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두 번째 효과입니다.

세 번째 방면의 효과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면서 정말로 진리를 깨달았다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자연히 인식이 있게 됩니다. 그럼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가 대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즉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로되는 *소유소시(所有所是)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발표하신 진리는 다 하나님 성품의 유로이고 다 하나님 생명 실질의 유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수록, 진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됩니다. 만약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3~5년을 추구했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에 대해 얼마의 인식이 있겠지요!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8~10년 믿었어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조금도 모른다면 이건 뭘 말합니까? 그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네 번째 방면의 효과는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더욱 진리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표현이 아닌가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표현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무릇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고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다섯 번째 방면의 효과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또 다른 방면의 효과는 자신을 알고 자신의 패괴(역주: 타락, 부패)를 알며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자신의 추하기 그지없는 몰골을 알며 자신의 간사함과 사악함을 알게 됩니다. 도달하게 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점점 성실해지면서 정상 인성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정의감이 있게 되고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정상적이 되며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자신의 패괴 실질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수록 육체를 배반하고 진리를 실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를 많이 깨닫게 되면서 자연히 좋아지고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정의감이 있는 사람으로 됩니다. 이건 다 진리를 깨달아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어도 여전히 간사하고 교활하며 여전히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여전히 사악하고 여전히 번드레하게 말하며 무슨 일을 해도 여전히 대충대충 해서 속이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생명 성품의 변화가 조금도 없으면 그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 만약 누군가 “그 누구 누구 있잖아요, 그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물을 때 생각해 보다가 “그 사람 크게 나쁜 일도 한 게 없고 큰 악행도 없고 진리를 추구하는 부분은 일반적인 거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말이 어떻습니까? 틀렸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큰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데 여전히 간사함과 교활함이 있고 성실한 사람도 아니라면 생명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 일꾼을 몇 년 했음에도 말할 때 매우 간사하고 교활하며, 일을 만나면 과감히 책임을 맡지 못하고, 책임을 지지 못하며 언제나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살까 두려워하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인솔자 일꾼을 몇 년 했음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도태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 집에서는 양성하지 않고 쓰지도 않습니다. 아시겠죠?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여섯 번째 방면의 효과는 바로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본분을 하면서 더욱 책임을 지고 더욱 충성심이 있으며 갈수록 효과를 보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보고 “정말 충성심이 있고 정말로 책임감 있는 사람이네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한 가지 본분을 하거나 혹은 이런 사람에게 한 가지 사역을 맡기면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고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고 신뢰성이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틀림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본분을 하면서 늘 책임감이 별로 없고 늘 대충대충 해서 속이면서 사람들에게 믿음성을 주지 못하고 효과도 너무 떨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받으면 며칠 좋아지다가도 얼마 못 가 또 대충대충 해서 속이고 늘 이랬다저랬다 하고 차가웠다 뜨거웠다 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하는 것이 합격되겠습니까? (불합격입니다.) 사람들도 믿어주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음을 놓으실 수 없습니다. 본분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 놓으실 수 없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없으면 본분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 진실된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느낌과 양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본분을 충심으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일할 수 없으면 당신에게 욥과 같은 믿음이 없고 당신이 믿음이 작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좋은 일을 좀 하고, 뒤에서는 마음대로 망령되이 행하면 불신파가 아닙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걸 모르고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영도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모르는데 이 한 가지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보니까 그리스도의 인성은 정상이던데요. 그분의 눈에 안 보이시면 그분도 모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제 곁에 안 계시니 본분을 하면서 대충대충 해서 둘러대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건 어떤 문제입니까? 무릇 본분을 하면서 대충대충 해서 둘러대는 것은 주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작습니다. 둘째,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지 못합니다. 넷째, 본분을 해도 충심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이 몇 가지를 종합하면 바로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분을 함에 있어서 시종일관 대충대충 해서 둘러대는 사람은 다 성실한 사람이 아니므로 믿음성이 없고 신뢰할 만하지 못하며 인품이 불합격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를 가리켜 말함

【111-B-3】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일곱 번째 방면의 효과는 바로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의 여부는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의 여부를 직접 증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10여 년 믿었지만 어떤 일을 처리하든 원칙이 없습니다. 이건 무슨 원인입니까?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를 해도 인솔자로서 어떤 사역들을 해야 하는지 원칙이 없고, 인솔자로서 어떤 사람들을 양육해야 하는지 원칙이 없으며, 인솔자로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원칙이 없고, 인솔자로서 하나님의 선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원칙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떤 일을 처리하든 다 원칙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그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설교할 때 말을 잘하던데, 왜 진리가 없다고 하죠?”라고 말하는데 그건 틀림없이 다 글귀 도리이고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원칙이 있습니다! 농민이 농사를 짓는 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해에 가뭄이 있는지, 어떤 농작물이 침수에 견디지 못하고 어떤 농작물이 가뭄에 견디지 못하는지, 어느 땅이 어떤 토질이고 뭘 심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방인들은 장사하면서 손님을 대하는 데에도 원칙이 있는데 진리를 몰라도 좋은 소질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깨달을수록 더욱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분별하면 맞습니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형제(자매)는 작심삼일인데요, 예배도 자주 안 하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대하면 좋죠?”라고 말합니다. 원칙이 없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늘 그릇된 논리를 퍼뜨립니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적그리스도 맞는지 모르겠고 악령이 맞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분별할 줄 모릅니다. 그럼 이런 사람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역시 원칙이 없네요. 원칙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악령이면 출교시키고, 악인이면 출교시키고, 어리석은 사람이면 남겨 관찰합니다.” 그러면서 규례에 맞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함에 있어서 한 가지 규정을 제정해 주어 규례를 지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좋은 소질을 갖고 있고 터득 능력이 좋은 사람에게 진리를 분명하게 교통해 주면 그 사람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런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하나님 뜻에 맞고 절대로 잘못이 없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해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깨달은 진리에 근거해 실행의 원칙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생명 진보가 빠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흔히 십분의 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질이 있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열정이 있고 좋은 소질을 갖고 있지만 진리를 순수하게 터득하고 빠르게 터득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지금 천리마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관건은 천리마를 발견할 수 있는 백낙 같은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겁니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까? 누가 사람을 볼 줄 아는지, 누가 양성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는지, 바로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샅샅이 알아보면서 몇 명을 알아봐도 어떤지 몰라 관찰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 도달한 사람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왜 많지 않을까요?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너무 부족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걸 좋아합니까?” “네, 좋아해요.” “진리를 듣고 나면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주 좋아요.” 아주 좋다면서 1~2년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까요? 왜 별 효과가 보이지 않을까요?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진실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진리를 듣고 내일이면 바로 효과를 보려고 한다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걸려야 볼 수 있습니까? 만약 제가 이렇게 교통하면서 1~2년을 교통했으면 효과가 보일 때가 아니겠습니까? 효과가 보일 때가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뚜렷한 진보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대다수의 인솔자 일꾼들은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규례만 좀 지키고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맞춰 보고 맞춰지면 처리를 좀 하고 안 맞춰지면 그냥 내버려 두고 진리를 교통할 줄 도 모르고 더욱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릅니다. 그럼 이 사람들에게 제가 이렇게 3~5년, 7~8년을 목양해도 별다른 효과가 안 보이는 건 뭘 말합니까?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면서 “저는 진리를 사랑하는데 왜 저를 못 보시는 거죠? 제가 얼마나 열정이 넘치고 얼마나 많은 걸 버렸는데요.”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다 버렸는데 가정도 직업도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 한두 살, 서너 살짜리 애가 있음에도 애와 부모를 다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열의와 열정이 있다는 것은 봤지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효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제가 1년 동안 교통하고 효과를 보려 한다면 조금 이르지만 2~3년, 3~5년이라 해도 이릅니까? 농사꾼은 씨를 뿌릴 때도 있고 추수할 때도 있는데 다 계절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나서 한두 달 지나서도 싹이 안 보이면 문제입니다. 그건 좋은 종자가 아닙니다. 만약 5~6년, 7~8년을 목양해도 아직 진실한 진입이 보이지 않고, 본분을 하면서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마저도 보이지 않고, 어떤 사람은 성실한 사람의 모습마저도 전혀 없고 여전히 간사한 사람이고 거짓말만 하고 허풍만 떨고 귀신 말만 하면서 남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워하고 책임지지 않는다면 이건 어떤 문제입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5~6년을 교통할 때 듣기는 잘 듣고 그 당시엔 잘 깨달았다고 하지만 5~6년 들어도 변화가 조금도 없으면 첫째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고, 둘째는 본분을 함에 있어서 대충대충 해서 속이며, 셋째는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하고, 넷째는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들은 게 성과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과가 없는 건 어떤 문제입니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뭔가요? 생명이 없으면 다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면 정말 문제가 아닙니까? 만약 3~5년 더 지나도 진입이 없다면 죽어야 할 놈입니다. 끝난 거죠.

지금 재난이 갈수록 커집니다. 만약 사람에게 진리가 조금도 없다면 재난이 닥칠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만 발표하시지 진리를 추구하라고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권면의 말씀, 의미심장한 말씀, 당부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착실한 사람이 되고, 정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라”, “진리를 추구하여라”, “성실한 사람이 되어라”, “충심으로 본분을 하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은 지금까지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는데 어떻게 생명이 있겠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재난으로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이후에 재난이 올 때 일부 이방인들은 반드시 죽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은 사람도 반드시 죽습니다. 생명이 없으니까요! 명의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이방인과 같다면 여전히 죽습니다. 그때 가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몇 년 믿고 나서 “아~ 이번에는 정말 하나님 앞으로 들림받고 참 도를 찾았으니 이방인들이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게 맞습니까? (틀립니다.) 왜 틀립니까? 하나님 말씀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여전히 죽는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바라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건 사람이 이지가 없고 낯짝이 두껍다는 걸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제가 주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저의 죄를 사해 주시므로 그 은혜를 힘입어 구원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를 부려도 안 됩니다. 지옥에 내려간 자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이치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유황불 못에서 타고 있는데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 불 못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그때 가서 계속 주님을 향해 죄를 자백하면서 “주여, 저를 구해 주소서, 저는 어떤 어떤 죄를 지었습니다. 사해 주소서!”라고 해도 주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정죄받았기 때문입니다.

【111-B-4】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변화가 조금도 없으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도태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어느 정도 변화는 있지만 그리 썩 좋게는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일들에선 원칙이 있고 어떤 일들에선 원칙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정도 진입이 있고 수확도 있습니다. 이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이방인과 같다면 끝입니다. 지금도 사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통하는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이후에 땅에서 오랫동안 살림살이하기 위해서 입니까? 이후에 땅에 그럴 날이 있을까요? 네 번째 핏빛 달이 지난 후의 날은 차츰차츰 대 재난으로 들어갑니다. 즉시 큰 재난이 다 쏟아지는 게 아니라 재난이 내리기 시작해서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평안한 날이 없고 다 재난 가운데의 날입니다. 그럼 이 재난은 도대체 얼마나 지속될까요? 아마 7~8년, 10여 년일 수도 있습니다. 재난이 언제 끝날까요? 이 인류가 대부분 거의 멸망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남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만 남았을 때면 재난이 멈춥니다. 세상의 끝날이 곧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끝날이면 바로 이 사악한 인류가 반드시 훼멸될 것입니다. 물질세계가 훼멸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시겠죠? 노아가 방주를 짓고 큰 홍수가 하늘에서 내렸을 때 세상이 훼멸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날은 결코 이후에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사악한 인류가 훼멸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인류는 바로 천국의 자민입니다. 이후에는 바로 재난의 날이므로 온 천하의 사람들이 시련을 받는 날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연애하겠습니까? 연애하면 행복합니까? 이런 사람은 다 눈먼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몰래 연애하려고 합니다. 연애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의의가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처리하든지 원칙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진리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똑똑히 보았겠죠?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여덟 번째 방면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되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건 무엇을 통해 도달합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많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통해 도달합니다.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진리를 실행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인해 갈수록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게 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어떻게 실행하면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길이 생깁니다. 이것이 광명 가운데서 살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줄 아는 사람 안에 또 어둠이 있을까요? 어둠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사악하고 어둡든지 이런 사람은 어떻게 광명 가운데 살아가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인생의 이상(異象)이 있고 인생의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의의 있는 인생이라는 걸 알고 마지막엔 하나님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데에 도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줄 아는 사람은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춘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여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에 도달하면 온전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생명 진입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나요?”라고 물어보면 이제는 분명히 아시겠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자신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부탁이 무엇인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만약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입니까? 틀림없이 아닙니다. 일반 새신자에게 “무엇을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몰라요.”라고 말합니다. 8~10년 믿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몰라요,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만 알아요.”라고 말하는데 보세요, 진리를 얻지 못하고 이런 일에 대해 모르며 분량이 너무 작은 것입니다. 스무 살쯤 결혼 상대를 찾으려고 할 때 “왜 결혼 상대를 찾아요?”라고 물어보면 “고독하고 외로워서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 진정한 인생인지 알아요?” “몰라요.”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지 알아요?” “연애하면 의미 있죠.” 스물 살쯤 결혼 상대를 찾는 사람이 인생을 알까요? (모릅니다.) 그냥 철부지입니다. 단지 결혼 상대를 찾아서 즐길 줄밖에 모르고 정욕을 방종할 줄밖에 모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순전히 일시적으로 좋아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뭐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트렌드에 따르는 유행어를 몇 마디 배워서는 키스나 날리면서 “죽을 만큼 사랑해!” 하면서 함부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뭐가 사랑인지 알기나 합니까? 그 사랑은 전부 다 정욕이지 진정한 인성 안의 사랑이 아닙니다. 20대 사람에게 분량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철부지입니다. 할 일은 하지 않고 결혼 상대나 제멋대로 찾으면서 할 일이 없으면 찐득거릴 줄밖에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별나게 뭐만 생각합니까? 이성과 같이 있기 좋아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찾고 여자는 남자를 찾으면서 같이 있으면 기쁘고 본분을 해도 힘이 날 것 같지만 다 동성이면 재미도 없고 힘도 없어서 이성과 같이 협력하고 접촉하면서 생활이 충족하기를 선택합니다. 이러면 진리 실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면요? ‘동성이든 이성이든 누가 나한테 도움이 되고 유익한 점이 있으면 그 사람을 선택할 거야.’ 이러면 원칙이 있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매라고 합시다. 어떤 자매님이 매사에 진리를 찾고, 어떤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중요시하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찾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에서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길을 찾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람과 같이 있고 그 자매님이 당신과 얘기하고 교통하면 유익한 점을 많이 얻게 되고 생명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택하여 곁에 두면 어떻습니까? 이성을 택하여 사귀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만약 늘 이성을 택하여 협력하고 접촉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정욕에서 살기 쉽지 않겠습니까? (쉽습니다.) 사람이 정욕에서 살 때 진리를 교통할 수 있습니까? 바른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접촉하면 얻는 게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갈수록 방탕해집니다. 마지막엔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이성과 떨어지면 살지 못하고, 이성과 떨어지면 살아도 재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하고 문제가 됩니다. 이러면 정상 인성이 없습니다. 지금 이런 일들을 제가 밝히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왜 그렇게 직설적으로 하시죠?”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직설적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빨리 진리를 잘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10~20년을 더 믿어도 소용없고 아무런 효과도 없고 조금의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전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은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으면 바로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천년국도 시대가 오면 이런 사람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원합니다.) 그러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진리에서 오랜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이런 효과에 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111-B-5】

아홉 번째 방면의 효과는 진리를 추구하여 반드시 진리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 합하는 데에 도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매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복한다면 바로 진리의 종입니다. 진리의 종이 되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 무엇으로 가늠합니까? 우선 먼저 진리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진리의 화신이시고, 그리스도는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만약 진리의 종이라면 틀림없이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만약 진리의 종이 아니고 진리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와 합하는 데에 도달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아시겠죠? 많은 사람들이 진리 실행을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실행합니까? 어떤 일들은 진리를 더듬을 수 있고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 알지만 어떤 일들은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 모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데의 가장 관건은 우선 우리가 모든 일에서 진리에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진리에 순복한다는 이 말을 경력하고 실행한다면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진리를 구체적으로 실행한다고 하면 어떤 일들을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모르고 단시간에 더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진리를 교통할 때 당신이 교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교통해서 빛비춤이 있으면 어떡하겠습니까? 진리에 순복해야 합니다. 진리에 순복하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순복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순복하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진리에 순복했으면 마음에서 진리를 잘 알고 깨달았다는 걸 증명합니다. 진리임을 먼저 확정하고 시인한 다음 순복하면 이것을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는 경건은 주요 표현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순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리에 순복하는 그 마음 상태가 표현되면 사람들이 볼 때 바로 경건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순복하는 데의 진실된 마음 상태와 진실된 표현입니다. 사람이 진리 앞에서 순복하면 또 오만한 성품이 있을까요? 여전히 잘난 체하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그럼 독선적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의 인성도 정상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할 때, 진리에 순복할 때 왜 사람의 패괴 성품이 사라질까요? 왜 보이지 않을까요? 인성의 가장 정상적인 표현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에 순복하는 표현과 하나님께 순복하는 표현입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누가 진리를 교통하면 즉시 듣고, 듣고 나서는 받아들이고 순복하고 실행합니다. 이때 이런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건 무엇입니까?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순복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교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니 모두가 “아멘!”으로 화답했지만 결국 진입을 언급하면 길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마치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면 순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 앞에 계시지도 않고 당신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무엇을 순복이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이런 표현을 해석하여 아주 진실되고 아주 객관적이고 아주 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고 보여 주면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어떤 표현입니까? 진리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순복하는 것을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 때 무엇을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라 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진리에 순복하는 것을 말하자면 어떤 장소에서든 다 통해야 하고 다 길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생활이나 본분을 하는 면에서든 아니면 이방인들 가운데서든 아니면 가정생활에서든 실행해야 할 화제가 많고 경력해야 할 공과가 많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할 때 진리에 순복하는 걸 실행하기 쉽습니까? 길이 있습니까? 부부가 같이 말할 때, 같이 지낼 때 진리에 순복하는 걸 실행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과 지내든지, 어떤 사람들 가운데 있든지 아니면 혼자 단독으로 있을 때든지 진리에 순복하는 걸 다 실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진리에 순복하는 건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실제로 같은 일입니다. 또한 한가지 실제와 한가지 상황을 두 가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과 진리의 종이 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에 순복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은 다 같은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정확하게 실행하고 더욱 길이 있을까요? 바로 진리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왜 진리에 순복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을 대체할까요?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리스도께 순복한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곁에 계시지 않으니 어떻게 순복할지 모릅니다. 진리에 순복한다고 하면 그건 길이 있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말로 하나님의 선민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게 하면 틀림없이 가장 좋은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실행하는 데에도 길이 있게 되고, 들어도 깨닫게 되며, 척 들으면 알게 됩니다. 진리를 교통할 때 이렇게 교통하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이렇게 교통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어떻게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지에 대해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그럼 제가 또 물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도대체 합했습니까, 합하지 못했습니까?” 이 문제 대답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관건은 제가 그리스도와 같이 지내본 적도 없는데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그럼 도대체 합한 걸까요, 아닐까요? 저는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진심으로 믿으면 합한 게 아닙니까?” “당신이 진심으로 믿으면 정말 그리스도와 합한 것인가요? 확실히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렇게 물어보면 확실히 그렇다고 장담 못하겠네요.” “정말 당신이 도대체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면 이것만 물어볼게요. 당신은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맞나요? 이건 아마도 잘 알겠죠?” “아, 그건 알죠, 저는 대부분 경우에 늘 육체를 따르고 늘 육체의 취향에 따라서 육체에 유리한 대로 행합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저한테 이익이 없고 부끄러운 일이 되고 손해 보게 되고 문제가 되면 절대 그대로 실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느낌이라면 당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맞나요?” “그렇게 말하면 저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네요.” “그러면 당신이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맞나요?” “이렇게 가늠하면 더욱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와 합한 사람이 맞나요?” “아, 진실로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틀림없이 그리스도와 합하는 사람도 아니네요.” 보세요, 이렇게 진리를 교통하면 사람이 자신의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을 쉽게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 문제는 알게 됩니다. 진리 실제와 관련되는 일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묵상하고 생각하면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진리를 어느 정도 추구하면서 일정한 효과에 도달하여 매사에 진리를 높이고 매사에 진리를 존중하며 마지막엔 매사에서 진리에 순복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진리의 종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좋아했습니다. 특히 교만하고 자대하는 사람들은 “난 누구한테도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복종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이것은 교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말인즉 진리라 해도 복종하지 않고 누군가 진리에 부합되는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순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도 도대체 복종할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만약 정말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본다면 복종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저는 진리에만 복종하고 하나님께만 복종합니다. 누가 진리에 부합되는 말을 한다면 절대적으로 복종할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지가 좀 있고 진리에 복종하고 하나님께 복종할 줄 압니다. 만약 말로만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면 입으로만 하고 가장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복종한다고 하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장 순복하기 어려운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네, 하나님께서 직접 저에게 말씀하시면 틀림없이 복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죽으라고 하셔도 죽을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할 자신이 있고, 그럴 심지가 있어요. 그럼 얘기해 보세요, 제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맞지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어떻습니까? 사실에 부합됩니까? 사실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111-B-6】

사람이 도대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이 일을 알아보기 쉽습니까? 믿어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내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맞을까?’라고 물어보세요. 생각해 보니 어떤 일에서는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지만 또 생각해 보니 어떤 패괴와 육체에 관련되는 일에서는 하나님께 순복하지도 못합니다. ‘나는 도대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맞을까? 내버리는 일에서는 순복할 수 있고 혼인에서도 순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진리를 교통해 주셔도 순복하고 상면의 형제님이 진리를 교통해 주셔도 순복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인솔자가 되면 복종하지 않고, 나에게 선입견이 있거나 내가 얕보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맞고 아무리 진리에 부합돼도 복종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이 사람은 진리에 순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지의 여부는 어떻게 가늠하면 가장 정확합니까? (그 사람이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인지 보면 됩니다.) 이 한 가지 원칙이 아주 대단합니다. 만약 이 한 가지 원칙으로 가늠하면서 각 사람마다 자신이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인지를 반성해 본다면 제가 보기에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면 이것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도달하는 한 가지 길이야. 이 길대로 실행하고 추구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쉽겠어! 오늘부터 훈련하면서 누가 하는 말이든 진리에 부합되면 다 순복할 거야. 그러면 차차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잖아?’ 이런 생각이 성립됩니까? (성립됩니다.) 이렇게 실행하면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실행하고 나면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솔자 일꾼이 교통한 것이 진리에 부합되면 나는 순복할 수 있지만 어떤 형제자매들은 언변도 그리 좋지 않고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나보다 짧아도 가끔은 빛비춤이 있고 교통한 것이 진리에 부합되는데 나는 순복하지 못하는구나! 나의 이 순복은 사람을 가리는 거야. 나보다 높은 사람이 교통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되면 복종하고, 나보다 못하면 교통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돼도 순복하지 못하는구나!’ 이건 어떤 정형입니까?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이건 선택이 있는 순복입니다. 이렇게 선택이 있으면 많은 진리에서 실행하지 못하고 순복하지 못합니다. 어떤 진리는 당신이 얕보는 사람이 당신에게 교통해 주는 것이 있고, 진리에 부합되는 어떤 빛비춤은 당신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있으며, 어떤 진리의 빛비춤은 새신자나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교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진리에 당신이 다 순복하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부족함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많은 진리에서 다 실행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절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누가 진리를 교통하든 무릇 진리에 부합되면 다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새신자가 진리를 교통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다 읽고 나서 그 일에서 길이 생기면 나는 받아들이고 순복하고 그 말씀을 실행할 거야! 그 사람에게 내가 선입견을 갖고 있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만약 교통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되면 그 당시에는 순복하기 싫어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순복하고, 이 진리를 실행할 거야! 나는 이 진리의 빛비춤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오든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할 거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 그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속박도 받지 않을 거야!’ 이 정도로 진리에 순복한다면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만약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조금도 의심할 바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데에 길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실행하기 쉽습니까? 이것은 실행하기 가장 쉽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다 교회 생활을 하고 있고, 형제자매들의 분량이 어떻든지 새신자든 오랜 신자든 모두가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고 서로 협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진리를 교통하면 당신이 듣고서 영 안에서 인증이 되면 받아들일 수 있고 순복할 수 있다면 정말 변화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생명 성품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 어떤 환경이나 인ㆍ사ㆍ물의 속박도 받지 않고 누가 진리를 교통하든 다 받아들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까?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다 해내고 다 갖췄습니다. 그래서 만약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진리 실제가 있고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으며 진리도 있고 인성도 있고 무엇이든 다 갖췄으며, 틀림없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틀림없이 구원받은 사람이고, 온전케 되는 것에도 제가 보기에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교통하는 것이 맞으면 다 순복할 수 있고, 자신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교통해도 진리에 부합되면 “우리 둘이 맞지 않지만 당신이 교통한 것에 진리가 있으니 순복하고 들을게요.”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모두가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 사람은 누가 교통하든 진리에 부합되면 다 듣고 다 받아들이고 다 순복합니다. 그 사람은 진리에 순복함에 있어서 선택이 없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의 속박도 받지 않습니다. 그동안 생명이 빨리 자랐네요. 패괴 성품이 벗겨지고, 교만하고 자대하며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도 볼 수 없고 누구와도 잘 지내고 누구와도 교통할 수 있고요. 예전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대했든지, 오랜 신자든 새신자든, 진리 실제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네요. 누구의 교통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아도 짓누르거나 배척하지도 않고 얕보지도 않으며 정확하게 대해 주고 포용해 주며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함부로 정죄하지 않네요. 아~ 그 사람은 누구와도 정상적인 대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분량이 있어요.” 보세요, 매사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은 분량이 자라난 것이 아닙니까?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추구하기 원합니까? (원합니다.) 이 길은 아주 분명하고도 간결하여 쉽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아홉 번째 방면의 효과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마지막 한 방면의 효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실제는 대단합니다! 이 두 가지 효과에 도달한다면 온전케 된 사람이 아닙니까? 조금도 의심할 바 없이 100%입니다. 이 두 가지에 도달하면 바로 완전한 사람이고 성결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 설교자가 “다들 하나님을 사랑하길 추구하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면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몇 년을 추구하고 나서는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해지지 않네요. 어떻게 된 일이죠?”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면 별일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이익을 좀 가져다주거나 자그마한 선심을 베풀어 주고 마음속 말을 좀 해 주면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압니다. 근데 하나님은 사랑해지지 않습니다. 이건 어떤 문제입니까? 진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리가 없으면 이런 사람이 마음속으로 믿는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있어 실제의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조금도 인식이 없으면 이런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바로 막연한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믿는 분은 실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바로 실제이고, 하나님을 모른다면 실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시련이 임해도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으로 간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서 부끄러워하면서 “좀 전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아, 아무 진리 실제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고 욥은 보지 못했지만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욥은 정말 진지하게 듣고 마음속에 새겼고 분명하게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 풍부해서 측량할 수 없고 너무 높도다! 우리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 눈멀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갓난아기와 같으니라”고 뉘우치기 시작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말을 해도 다 웃음거리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번 말씀하신 것이 욥에게서 그런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욥이 믿은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막연한 하나님일까요? (실제 하나님이십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보기에 막연한 하나님이고 하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욥이여 만나 봤느냐? 하나님은 아예 너에게 나타나신 적 없어. 마지막 한 번은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영체도 보지 못했잖아.”라고 말할 때 욥은 “나는 보았노라 얼굴을 맞대고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오늘의 실제 하나님을 믿는 우리보다 더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111-B-7】

그럼 대체 무엇을 실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까요? 하나님께서 사람 눈앞에서 성육신 하셔서 몇백 만 자의 말씀을 하셨어도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믿는 것이 실제적이지 못하고 여전히 막연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립됩니까? (성립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비록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진실되게 믿었고 참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한 마디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체를 보지 못했어도 자신의 아들을 바쳤습니다. 외아들을 바치는 게 쉽습니까? 믿음이 없이 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아브라함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참된 믿음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 그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실제의 하나님일까요? (실제의 하나님이십니다.) 대체 무엇이 막연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무엇이 실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를 어떻게 판단하고 확정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가 조금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설령 믿는 하나님이 실제 하나님일지라도 사실 이런 사람이 믿는 건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대처하고 나면 하나님에게서 온 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나를 대처하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온 거야!’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야. 나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사람에게 순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터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대처하신다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말할까요? “내가 믿는 건 하나님의 영이지 하나님의 육신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이런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막연한 하나님일까요 아니면 실제의 하나님일까요? 이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진리가 없는 사람은 분명하게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마음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아주 막연하다고 느껴지고 하나님의 실질에 대한 인식도 아주 막연하며 하나님이 발표하신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발표하신 이 진리들이 하나님의 어떤 방면을 대표하는지 모르며 이런 진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생길까요? 하나님이 발표하신 많은 진리를 깨닫고, 그런 진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을 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많은 사랑스러움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보아야만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 말할까요? 진리를 사랑하고, 공의를 사랑하며, 거룩함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다 사랑하고 특별히 흠모해야 하며 얻기를 갈망하고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며 살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는 “아, 우린 우매하고 무지하네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갖추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는 “아, 나는 왜 이렇게 더럽고 이렇게 패괴됐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조금이나마 갖추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보고는 “너무 귀하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런 생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보배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서도 특별히 보배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시는 걸 보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데에 지혜가 있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에 너무도 원칙이 있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무도 실제를 중요시하심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패괴에 대해 크나큰 인내와 포용이 있으심을 보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고 대가를 지불하시며 자신의 생명을 인류에게 부어 주신다는 것을 보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자신의 골육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고는 “아,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귀하고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 진실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너무나 진실하구나!”라고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소유소시의 만분의 일이라도 살아 낼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비로소 참으로 인성이 있게 되고 그 사람의 생명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뭘 말할까요? 하나님의 세부적인 것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지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너무나 전능하고 너무나 지혜롭다고 느끼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먼지이고 정말 분토라고 느끼면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흠모하고 진리를 얻기를 갈망하며 하나님 형상의 만분의 일이라도 살아 내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그래야 바로 진정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얼마나 큽니까? 강렬합니까? (강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작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 강렬해져 마치 당신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실되면 됩니다. 아시겠죠!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무엇을 통해 도달할까요?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많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실질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며 모든 진리가 다 하나님에게서 오고 다 하나님의 소유소시이고 다 하나님 성품의 유로라는 것을 보게 되는 그때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고 직접 도달하는 효과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다 매우 사랑스럽고 다 사람이 사랑할 만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다 사람이 가장 흠모하고 가장 갈망하며 얻으려는 생명이 되는 그때면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렬해지면서 “만약 사람이 이런 진리를 얻어 자신의 생명으로 되게 한다면 어떤 인생일까요? 그럼 살아 내는 진정한 사람의 형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성결할까! 그럼 얼마나 고상한 사람일까! 사람이 이런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해야 진정한 사람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 굳게 버티어 서는 사람인데 너무나 의의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진리를 추구하세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 생기는 효과입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많은 말씀을 보고 “아, 이건 정말 하나님 성품의 발표이고 하나님 성품의 유로구나! 하나님께서 유로하신 이 성품과 이 소유소시가 바로 진리이고 실제구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생명을 유로하신 건 어떤 뜻이 있을까요?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누리게 하며 사람에게 받아들이게 하여 마지막에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예를 들어봅시다. 엄마가 자신의 몸에서 생산되는 젖을 아이에게 먹이면 아이의 몸이 자라나는데, 이것을 모성애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 소시를 유로하셔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누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소시를 유로하셔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누리게 하시고 마음속에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데 어떤 피조물에게 이런 사랑으로 대해 주셨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인류에게만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이 인류는 매우 우매하고 무지합니다. 게다가 또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다 발표하셔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게 하시고 인식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평범한 사랑입니까? 이 사랑은 너무나 큽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보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렇게 큰 사랑은 단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를 위해 속죄하신 것만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 그리고 소유소시를 다 쏟아 내셔서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누리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임을 보고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진리를 추구하기 원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최종 효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한 최종 효과이고 또한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난 하나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것이 막연합니까?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현실적이어서 사람이 완전히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심지를 세우고 계속 이렇게 추구하면서 매일 이렇게 교통하고 매일 이렇게 실행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을 통해 항상 넘쳐 흐르는 힘이 있다면 1~6개월이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1년을 진입하면 아주 뚜렷하게 보이고, 3년이면 자그마한 변화가 보이며, 5년이면 큰 변화가 보입니다! 3년이면 틀림없이 진실한 믿음이 있게 되고, 5년이면 생명 성품의 변화가 보이며, 교만하고 자대하는 것과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많이 적어집니다. 진리에 순복하는 일에서 실행하는 것이 갈수록 절대적이 되고 갈수록 굳건해집니다. 육체를 배반하고 정을 버리는 것은 3~5년이면 효과를 보게 됩니다. 거짓말과 기만을 해결하는 것은 8~10년이면 근절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3~5년이면 도달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10~20년을 추구하면 이 몇 가지 방면에서 다 조금씩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어느 방면에서든 다 절정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면에서든 다 10~20%, 30~50% 진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기준으로 판단할 때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정식으로 추구한다면 1~2년 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지 않을까요? 모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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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추구하면 주로 이 10가지 방면의 성과에 도달합니다. 만약 이 10가지 방면의 성과에 다 도달한다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만약 이 10가지 방면의 성과 중에 매 한 가지에서 다 10~20%, 30~50% 진입이 있다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사람입니다. 이건 절대적입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기 원한다고 하면서 몇 년을 추구했음에도 이 10가지 방면의 성과가 조금도 없고 10%도 진입하지 못했다면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그건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생명이 없으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생명이 없다면 도태되는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주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도태될 수도 있습니다. 도태된 사람은 재난이 닥치면 문제입니다. 아마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재난에 안 죽으면 다음 재난이 닥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멸망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무턱대고 애인이나 찾으면 위험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따릅니다.) 지금 진리에 전혀 순복하지 못하고, 누가 아무리 분명하고 환하게 진리를 교통하든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위험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문제가 됩니다. 누가 진리를 교통하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어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가 믿으면 그만이니까 설교도 듣지 마세요! 설교를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들어서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말해 보세요, 무엇을 위해 설교를 듣죠? 진리를 깨닫기 위해, 실행할 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본분 가운데서,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여 진리를 더 잘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죠? 많은 진리를 환히 깨닫지 못하고 반만 깨닫고 있을 때 설교를 한 번 듣고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해 환해지면 ‘이 방면에서 행할 길이 생겼어! 어떻게 경력할지 알았어!’라는 느낌이 있고, 그런 후 또 한 번 예배를 드리고 또 설교를 들으면 ‘아,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해 또 좀 더 환히 깨닫게 됐어! 또 길이 생겼어!’라는 느낌이 있으며, 한동안 지나 또 예배를 드리고 또 설교를 들으면 기타 방면의 진리도 조금씩 환해집니다……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쌓이면서 1~2년, 3~5년이 지나면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해 저도 모르게 많이 환해집니다. 그 후에 ‘이젠 정말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경력할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실지, 진리를 어떻게 추구할지, 무엇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 하는지, 진리 실제에 어떻게 진입할지 알겠어!’라는 느낌이 들고 안에서 이런 일들에 대해 모두 환하게 느껴집니다. 이러면 행할 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알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길을 열고 또 그런 길과 원칙에 따라 실행하면 진리를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얻으면 바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 나면 ‘하나님을 헛되이 믿지 않았구나! 하나님을 믿는 이 길을 내가 제대로 걸었구나!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으면서 가정과 가족을 버린 게 가치 있어! 후회하지 않아. 얻은 것이 너무 많아 뭘 버려도 가치 있어! 진리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생겼고 보배를 얻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보다 더 귀한 거야!’라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저도 해외로 나가서 본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서 제가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해외로 나오지 마세요. 온다면 후회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해외에서 본분을 하면 정말 고생이며 매우 힘듭니다! 어느 날 고통스러워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정도 세상도 버렸는데 뭘 얻었지?”라는 말을 하면 문제가 아닙니까? 지금 본분을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자신이 왜 그 본분을 하려 하는지 왜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와서 피조물의 본분을 하려 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까? 만약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그 버린 것들이 좀 맹목적이지 않습니까? 버리고 나서 후회할까 두렵지 않습니까? 열정만 가지고는 믿음성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다수의 하나님 선민들은 하나님 집에서 매일 교통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 확실히 진리이고 다 진리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마지막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헛되이 믿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풍성한 잔치에 참석하고도 기근에 허덕이네요!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어떤 말들을 했습니까? 분별할 줄 압니까? 어떤 사람은 “제가 듣는 건 확실히 다 진리인데 왜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까요? 왜 아무것도 없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이는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이 아닙니까? “저는 뭐든 다 아는데 진리만은 실행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기근에 허덕이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본인이 얻지 못한 걸 누굴 탓하겠습니까? 본인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탓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이렇게 많이 교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진입하고 실행하기 시작하는데 당신은 왜 실행하지 않습니까? 실행할 줄 몰라서입니까? 이건 무슨 문제입니까? 기근에 허덕이는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다 기근에 허덕이기 시작합니다. 잔칫상에 앉아 있어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 마치 소경이 잔치에 참석해 아무거나 막 먹어대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를 먹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먹지 않으며 알맹이를 먹지 않고 도리만 먹고 겉겨만 먹으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공연히 헛수고한 것이 됩니다. 이제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길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를 실행하는 길을 모두 비교적 환하게 교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으면 다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음에도 여전히 아무런 진리 실제가 없습니까? 하나님을 3~5년 믿고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고 하면 조금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3~5년이면 금방 길을 찾고 무엇이 진리인지 금방 깨닫고 진리 추구를 이제 금방 중요시하면서 그 열정 단계가 이제 금방 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그럼 8~10년 믿은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진리를 교통했는데 왜 이제야 깨어나는 겁니까? 왜 이렇게 늦게 깨어나는 걸까요? 이건 어떻게 설명할까요?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교통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의 예배에서는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10가지 방면의 효과에 대해 교통했는데 거의 다 분명하게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는 개개인에게 달렸습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순복하는 일에서 어떻게 공을 들이느냐에 달렸습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효과는 바로 사람이 갖춰야 할 10가지 방면의 진리 실제입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진리 실제가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10가지 방면의 실제에 모두 일부분씩 진입한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느 방면에서든 다 절정에 이르고 완전하게 할 거야!’라는 생각을 갖지 마세요. 그건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건 평생 동안의 일인데 저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면의 진리 실제든지 다 30~50% 정도 진입하여 어느 정도 경력이 있고 어느 정도 실제적인 인식과 간증을 말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나중에 어떤 큰 재난이 닥쳐도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는 예언처럼 되고 병에 걸려 마지막 숨이 붙어 있어도 죽지 않으며 나중에 치료하지 않아도 나아집니다. 하지만 반드시 병이 날 때는 있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시련이 갈수록 커질지라도 죽을 사람이 아니면 죽지 않고 죽고 싶어 해도 안 됩니다. 이 10가지 방면에서 어느 방면이든 다 조금씩 진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늘 자신을 반성해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합니다.) 이 10가지 방면에서 깊이 생각해 보면서 한 가지씩 대조해 보세요. ‘욥과 같은 믿음이 나한테도 갖춰져 있는지? 내 믿음은 어느 정도인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신다는 것만 시인하는지?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재하시고 어떻게 이끄시고 어떻게 사람의 모든 것을 안배하시는지?’ 만약 이런 것들을 다 보고, 사람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고 사람의 지혜와 머리로 벌어 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 사람이 왜 얻지 못하는지에 대한 그런 일들을 꿰뚫어 보았다면 그런 믿음은 참되고 살아 있는 것이지 규례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추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이 경외는 어떻게 생기는 겁니까? 진실한 믿음의 기초에서 세워진 것이고,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기초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만약 욥과 같은 믿음이 있다면 자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으면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는 것은 진실되고 실제적입니다. 만약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는 사람이라면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람 즉 아브라함이나 욥을 보면 다 가장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부당한 이익을 챙기지도 않으며 사람과의 관계도 정상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는 건 되지만 네가 나한테 편익을 주는 건 안 돼! 난 바라지 않아! 나중에 가서 너의 나눔으로 인해 내가 부유해졌다고 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야. 나는 하나님을 의지해 살 거야!’ 성실한 사람은 합격되게 본분을 할 수 있습니다.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하면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면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면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고 그리스도와 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진리들은 다 연관성이 있지 않습니까? 다 점차 나아가고 점차 깊어지면서 나중에 완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