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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10)

『4. 욥은 하나님이 계심을 귀로 듣기만 하였다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42:2-6)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이 비록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이런 말에서 너희는 여기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는가? 여기에 하나의 사실이 있음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우선,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는지,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보자. 여기에 이상의 2가지 문제를 설명할 만한 말이 한 마디 있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구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계심을 전설 속에서 알게 된 것이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그런 후 생활 속에서,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어떤 사실인가? 욥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은 지금의 사람들과 같은 것이 아닌가? 욥이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그 뜻은 비록 그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 요소이다. 객관적으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을 따랐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고 그에게 말씀한 적도 없었다.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비록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한 적도 없고 그에게 어떤 분부도 하지 않았지만 욥은 만물 중에서,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던” 전설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 그런 후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욥, 이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유래와 과정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든지, 그가 어떻게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 장절을 보자.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그가 하나님이 그의 앞으로 지나가거나 일을 하거나 사람을 인도하는 때를 상상하면서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하지 않을 때 사람에게 임하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하는지, 어떤 곳에 임하는지를 모른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숨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의 숨김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다음 단락에서 욥이 또 말했다.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이 단락의 기술에서 우리는 욥의 경력(역주: 체험)에서 하나님이 시종 욥을 향해 숨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이 그의 앞으로 지나가거나 그의 오른쪽에서 일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고 줄곧 여겨왔다. 욥이 여태껏 하나님을 보지 못한 정황에서도 그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해낼 수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만약 진실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계속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닌가? 너는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 있는가? 욥, 이 사람의 순전함과 정직(역주: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진실한 것이지 하나님이 과장해 말씀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설령 하나님이 그를 대한 것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말씀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봐 항상 번제를 드렸고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했다.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이 일에서 욥, 이 사람이 얼마나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했는지, 욥의 믿음이 얼마나 굳세었는지, 그의 믿음이 또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숨었다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 하여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숨었다 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향해 공개적으로 나타나라고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가 만물 중에서 이미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고 그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축복과 은총을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여일하게 그를 향해 숨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도 얻지 못한 성과 즉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다.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화복을 따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오늘 언급할 중점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듣지도 못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있었다.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엇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것이다. 이 “찬송”은 조건이 없고 배경이 없고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음을 보게 된다. 그의 마음에서 생각한 것과 작정한 것과 계획한 것은 다 하나님께 털어놓은 것이지 봉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그를 위해 무엇을 해달라고, 무엇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이렇게 하나님께 경배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지나친 욕망도 가지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토색도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이 복을 받거나 화를 받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든지 재앙을 받든지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은 변할 수 없기에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재앙을 받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은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으며,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과 권병의 창현(彰顯)이며, 어느 각도에서 보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을 것인데, 이것은 욥이 한평생 경력하고 인식한 것이다. 욥의 이 모든 마음과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하나님의 앞에 와서 하나님께 중히 여김을 받았다. 하나님은 욥의 이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욥에게 이런 마음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소중히 여겼다. 이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게 될 모든 것을 맞이했다. 욥 자신은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요구하여 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순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욥이 여겼던 자신의 직책이자 역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다. 욥은 전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전혀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분부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타이르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지금의 말로 말하면 바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그 어떤 진리 방면의 깨우침과 인도와 공급도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대견스러운 일이다. 그의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 있어서 족한 것이며, 그의 간증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마음과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도리만 말하고 큰소리만 치고 제물을 바치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진실한 인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경외가 없는 그 사람들과 비하면 훨씬 소중하다. 그것은 욥의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에 대해 숨김이 없고 그의 인성이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하고 선하며 그가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인성을 구비하고 이런 마음을 구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해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병과 권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는 데에 이를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화복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에 사람의 걱정은 무지몽매한 이지 없는 표현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이 사실에 대해 의심의 태도를 갖고 있는 표현이자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표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이런 인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은 너희만큼 많은가? 하나님이 그때 한 사역과 한 말씀은 아주 적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욥에게 이런 성과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실로 쉽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런 태도가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성과 그 자신의 추구로 말미암아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시대에 하나님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이미 그에 대해 이런 평가가 있었고 이런 정론(定論)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하나님은 사람에게 숨겼지만 만물 중에서의 하나님의 행사는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

욥이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력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시련 속에서의 그의 간증은 오히려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애(寶愛)와 기쁨과 칭찬을 받았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탄복도 받았으며 더욱이 사람들의 자자한 칭찬도 받았다. 그의 일생은 평범하고 위대하지 않았으며 여느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이 평범한 몇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가 일반인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인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주재도 체험하고 감지한 것이다. 그는 그 어떤 일반인보다 총명하지 않았고 초강력 생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이 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다수의 일반인들이 구비하지 못한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구비했으며,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굳세고 의연하고 생각이 세밀했다. 그러므로 그는 평범한 나날에서 하나님이 한 모든 비범한 일을 보았고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보았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과 보호를 보았고 지고지상한 하나님의 존귀와 권병을 보았다. 욥이 일반인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게 된 첫 번째 원인은 그에게 순결한 마음이 있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고 그의 마음이 조물주께 끌린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욥의 추구인데, 그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순전한 사람이 되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 것이다. 욥이 구비한 것과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배경 하에서였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지혜도 감지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사람에게 주고 사람에게서 거두는 행사는 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보낸 세월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없지만 그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 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그의 인식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행사가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고 하나님의 주재도 사람의 생활 속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다 있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의 평범한 나날에 그의 생활의 구석구석마다 그는 하나님의 비범하고 기묘한 행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안배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숨김”과 하나님의 “침묵”은 결코 하나님 행사에 대한 욥의 체험을 가로막지 못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욥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일생은 바로 평범한 생활 속에서 만물 중에 숨겨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한 것이다. 그는 또 평범한 나날 속에서 만물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지만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하면서 발표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언어를 귀여겨듣고 터득했다. 보다시피, 사람이 만약 욥과 같은 인성과 욥과 같은 추구를 구비한다면 욥과 같은 체험과 인식을 얻을 수 있고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에 대한 터득과 인식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지 않고 욥에게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고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은 전제 하에서 만물 중에서의 하나님의 행사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는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권병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권병도 충분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욥, 이런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인 이상, 하나님을 따르는 일반적인 각 사람도 다 마땅히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은 논리적 추리 혐의가 있을지라도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뜻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욥, 한 사람만의 특허인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사람은 욥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란 딱지가 붙여져 있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아주 명확하다. 욥만이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구비했기 때문에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말뜻은 너희도 틀림없이 깨달았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성실하고 선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인성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악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없고 시련 속에서 굳게 설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사탄의 얽매임과 올무 속에 처해 있는데, 모두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잔혹하게 해하고 삼킬 대상들이고 모두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며 모두 사탄에게 감금된 죄수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사람들이 모두 욥과 같은 인성을 구비하지 못한 이상, 사람의 본성 실질과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어떻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이 말로 개괄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이 말을 자주 말하지만 이 말의 실제 함의를 전혀 모른다. “하나님의 원수”, 이 말에는 그 실질적인 면이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 것이다. 우선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의 최초의 소망을 놓고 본다면 어느 누가 목적과 속셈과 야심을 갖고 있지 않았는가? 설사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보았을지라도 여전히 이런 속셈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믿는 최종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생명 경력 중에서 사람은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렸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뭘 주셨는가? 내가 이 기간에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세어 보고 점검해 봐야지. 내가 이 한동안 화비(역주: 들이다, 바치다, 쓰다, 지불하다의 뜻)한 것이 적지 않고 많은 길을 뛰어다니고 많은 고통도 받았는데, 나의 이 동안의 표현에 대해 하나님께 무슨 약속이 없을까? 하나님이 나의 선행을 기념하실까? 나의 결말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복을 받을 수 있을까? ……’ 각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수시로 항상 이렇게 따져 보고 속셈과 야심을 품고 거래도 품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즉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따지고 또한 끊임없이 자기의 결말을 위해 하나님과 “이치에 근거하여 강력히 논쟁”하면서 하나님께 구두 자백을 얻어내려 하고 하나님이 도대체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지를 본다. 사람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시종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요구하고 심지어 점점 압박하면서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하나님과 논쟁한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시련이 오거나 환경이 임하면 늘 연약하고 소극적이고 나태해지며 하나님에 대해 원망이 가득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서부터 하나님을 보물단지, 만능상자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최대 채권자로 여기며, 하나님 손에서 축복과 약속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권리와 직책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고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터득이자 역시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이다. 사람의 본성 실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 추구에까지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아예 관련시킬 수가 없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경배하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 사람의 이런 정형을 놓고 말하면 사람의 실질이 분명히 보이는데, 이 실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이 악랄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아주 봉해져 있고 전혀 하나님께 맡겨지지 않아 하나님은 여태껏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고 사람의 경배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든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공급하든지 사람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전혀 무관심하며, 마음을 시종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장악하려 하고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그 뜻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사람들의 상황이다. 계속해서 욥, 이 사람을 보자. 우선 그에게 하나님과의 거래가 있었는지 보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데에 다른 의도가 있었는가? 그때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 이후의 결말에 관한 일을 말씀한 적이 있는가? 그때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도 결말에 관한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욥은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사람은 그와 비교성(比較性)이 있는가? 양자는 차이가 매우 크고,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많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전혀 거래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사치한 욕망과 요구도 없었으며,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여겼다. 이것은 그가 다년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켜오면서 보고 얻은 성과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이런 성과도 얻었다. 이 두 마디 말은 그가 생활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가 있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이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두 마디 말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그의 가장 유력한 무기이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선 초석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말하면 욥, 이 사람은 너희의 마음속에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너희는 사탄에게서 오는 시험을 겪는 것이 두려운가, 두렵지 않은가? 너희는 하나님께 욥을 시련한 것 같이 너희를 시련해 달라고 기도할 심지가 있는가? 믿건대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감히 이렇게 기도하지 못할 것이다. 보다시피, 너희의 믿음이 보잘것없이 작아 욥에 비하면 너희의 믿음은 그야말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너희가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설 수 없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길 수 없는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겠는가? 욥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의를 깨닫고 알게 된 후 현재 너희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신심이 있는가?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할 심지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통 시작하겠습니다. 첫 단락 하나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이 비록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인데 이 말씀은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이 말씀은 바로 진리이고 곧 사람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수 있음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바로 믿음이 도달한 효과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으며 진실한 순복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지 못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다년간 믿었어도 하나님에 대해 시종 진실한 인식이 없고 시종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치 않지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는지의 여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도대체 얼마나 전능하시고 얼마나 지혜가 높으신지 측량할 수 없으며 그는 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전능하시다는 것도 그다지 믿지 않습니다. 이 외에 하나님께서 도대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지 없는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실 수 있는지 없는지, 시대를 끝마치실 수 있는지 없는지, 그는 완전히 믿지 않고 심지어 조금 의심하기까지 하는데, 특히 사탄의 사악한 세력 즉 큰 붉은 용이 하나님 선민을 잔혹하게 박해할 때, 그는 더욱 하나님의 권능을 의심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큰 붉은 용을 멸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정말 큰 붉은 용을 완전히 제거하실 수 있을까?’ 그는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성경에서 예수님이 일부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모함을 당하고 추적을 당하셨을 때 역시 이 성에서 저 성까지 도망가시는 것을 보더니 그는 “예수님이 대체 하나님이 맞아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왜 도망가고 피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의심이 생겼고 나중에 어느 날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고 나서는 마음속으로 더욱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야. 하나님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있겠어?”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겠습니까? 특히 중국에서 그리스도께서도 사탄, 큰 붉은 용에게 추적당해 여기저기 숨어다니시는 것을 보고 그는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라면 숨겠어? 하나님이라면 사탄의 사악한 세력이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가까이 가기만 하면 무조건 징벌받고 재난당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무조건 천둥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격살하실 거야. 그래야 하나님이지! 특히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하나님의 선민을 박해하고 추적할 때 만약 참 하나님이라면 큰 붉은 용이 그 자리에서 보응받고 화를 입어 죽어야 돼. 그래야 참 하나님이지!”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정말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왜 또 믿겠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데,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일까? 모르겠어, 따르자. 우선 따르고 다시 보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새신자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무슨 사역을 하러 오셨는지, 그분이 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으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전능이 어떤 부분에서 나타나는지 모르고 알지도 못합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을 의심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구약 율법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방인들과 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이 도대체 참 하나님인지 아닌지, 도대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주님인지 아닌지 의심한 사람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틀림없이 의심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승리하도록 보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구체적으로 일이 닥치면 사람 안의 그 불신하는 악한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럼 그런 악한 마음이 무엇 때문에 나오겠습니까?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고 진리가 없어서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전능하다’는 건데, 정말 전능하다면 큰 붉은 용의 경찰차가 추적하고 있을 때, 왜 뒤집혀 도랑에 빠지게 하지 않았어? 만약 큰 붉은 용이 하나님 선민을 체포하고 박해한다면 즉시 벼락 맞아 격살돼야 하고 경찰차가 전부 뒤집혀서 불이 붙어 폭발해야 돼. 그리고 큰 붉은 용이 잡으려고 날뛸 때 천안문 광장에 큰 폭발이 일어나게 하고 경찰이 하나님 선민을 체포하려고 할 때 즉시 하나하나 급성 전염병으로 죽어야 돼. 그래야 전능하다고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식이 없습니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초자연한 사역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도 초자연한 사역을 아주 적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관념대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으십니다. 사람이 상상하는 그런 외적인 일을 하나님은 조금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들을 숨기시기에 당신은 조금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많은 일에서 나타나셔서 표적과 기사를 좀 나타내 하나님 선민에게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면 얼마나 좋아요!” 사람은 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많이 할 필요 없어요. 우리에게 한 가지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한 가지도 안 하셔도 나중에 당신에게 하나님의 전능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전능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려면 어떻게 경력해야 하겠습니까? 겉으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고 초자연한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정상임을 나타내 당신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경력하여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이르게 하고 또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보게 하며 큰 붉은 용, 사탄이 다 하나님의 받침물임을 보게 하는데 여기에 진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찾아볼 진리가 있고 찾아야 할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욥에게 역사하셔서 도달한 효과를 더 봅시다. 욥은 이런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는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시는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욥은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표적과 기사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능을 보여 주지 않아도 그는 마지막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전능이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나타나는지, 사람이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비밀입니다.

일반적으로 진리가 없는 사람이 표적과 기사가 대단하다고 하고 표적과 기사가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가장 위력이 있고 가장 전능하다고 보는데 여기에 찾아볼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말해 보세요,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 뛰어납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큽니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큽니다.) 여기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일은 전부 꿰뚫어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사탄의 권세와 큰 붉은 용의 세력이 아주 크고 대단해서 하나님 선민을 몸 둘 곳이 없게 추적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습니까? 여기에 찾아볼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사실 겉으로 보면 표적과 기사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 말씀이 전능을 나타냈고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을 성취했는데 그 자체가 바로 표적과 기사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병은 모든 것보다 높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말씀의 권병을 압도할 수 없습니다. 두고 보세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발표됐고 발표된 후, 전 우주 세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 우주 세계는 하나님 말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몇십 년 더 지나서 다시 세계를 보면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성품만 변화시키고 사람의 형상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하게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세의 흐름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이 한 무리 사람들 몸에서 그분의 위력을 나타냈습니다. 몇 년 더 지나면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여 하나님 말씀에 의해 변화될 것입니다. 몇십 년 더 지나면 당신은 전 세계가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기고, 전 인류가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길지 모를 것입니다. 이는 다 하나님 말씀이 모든 사실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말씀이 만물의 발전을 주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을 볼 수 있고 더욱이 하나님 말씀의 권병이 모든 것보다 높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주재를 알아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도달하는 것입니까?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의해 도달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말씀을 그리 많이 듣지 못했고 오늘과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려면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까? 어느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인식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는데 여기에 비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 말해 보세요, 그가 만약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전 우주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시고, 각 사람의 화복이 다 하나님 수중에 있다는 이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없습니다. 그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된 후에 도달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 된 후에야 도달한 것입니까? 이런 일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심을 귀로만 들었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계심을 귀로만 들었다고 합니까? 바로 사람의 전설 속에서, 간증 속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시인한 것입니다. 마치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그는 도를 듣고 나서 마음속으로 이것은 진짜일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귀로만 들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초자연한 사역을 하시는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더 진실하게 느껴졌고 더 실제적으로 느껴졌으며 사람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보호하고 보살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이 인류를 축복하고 계심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기 때문에 사람이 그분께 순복하면 복을 받고 사람이 만약 그분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면 화를 받게 된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욥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마음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점점 더 완전해져 최후에는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정상적인 경력 과정이 있었지 믿자마자 무엇이든 다 깨닫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조금씩 경력하고 조금씩 보면서 관찰할 줄 알게 되었고 영으로 느낄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인식을 느낄 수 있었고, 최후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런 성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욥의 추구는 확실히 대단하고 아주 실제적인데, 틀림없이 많은 대가를 지불했을 것입니다! 욥은 그때 어떻게 진리를 추구했겠습니까? 이것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때는 하나님께서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럼 욥은 무엇을 읽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는 구약 성경이 있었고 역대 성도들이 전한 그런 이야기 서적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구약 한 권이지만 사실 율법시대에는 그 외에도 많이 있었고 신약시대의 사람보다 더 많이 읽었기 때문에 절대로 한 권의 구약성경뿐만이 아니라 이것보다 몇 배나 더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 자체는 진리를 많이 깨닫는 것을 기초로 해야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데 그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오늘날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이 욥이 읽은 것보다 많지 않습니까? (많습니다.) 그럼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왜 사람에게 큰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까? 욥은 읽은 것이 적었어도 오히려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여기에 사람이 반성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도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고 또는 무엇을 선행이라고 하는지 몰라도 선행을 좀 행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들은 무슨 근거로 행한 것입니까? 천성적으로 인성이 좋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하에 긍정적인 일을 좀 할 수 있고 선행을 좀 행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천성적으로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누가 착한 사람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는 그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도와주는데, 이런 것은 진리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천성적으로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향상하기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며 착한 사람이 되고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며 사악을 싫어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믿은 후에 진리를 조금만 깨닫는다면 금방 올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향상하는 것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한동안 지나면 진보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은혜시대 때 제가 각처에 있는 교회를 돌아보고 있을 때 어떤 곳의 형제자매들은 좀 총명하고 소질이 좀 있어 저에게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부터 진리를 구했어요!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정한 인생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하지만 길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인생인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저는 추구하면 할수록 더 힘이 생겼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참 도를 찾았어요.” 이는 무엇을 설명합니까? 진리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천성임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진리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이 계심을 시인합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시인하는 사람은 과학 무신론이 아무리 그를 미혹해도 믿지 않고 그는 하나님이 계심을 시인합니다. 그런 그릇된 논리를 그에게 만 번, 십만 번, 백만 번 말해도 그는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천성적인 것이 아닙니까? 천성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면 바로 그것인데 아무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욥은 진리를 많이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었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천성적으로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서도 이런 효과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욥이 만약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일부 형제자매들이 진리를 추구하기를 좋아하고 불의한 일을 싫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악을 행하고 누가 교회에서 방해하고 계속 속이고 거짓말만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증오하고 혐오하며 이런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멀리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인성이 있고 인성이 좋고 정의감이 있고 애증이 분명합니다.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인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인성이 좋은 표준은 바로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것입니다. 무골호인을 인성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골호인은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를 모르고, 뚜렷한 애증이 없기 때문에 무골호인을 진정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 인성이 있다는 것은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정의감이 있으면 불의를 미워하고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만약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정도에 이른다면 바로 순전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어 왔지만 무엇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까요?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악인처럼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거나 함부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훔치고 약탈하는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성품이 나쁘고 교활하고 간사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사람과 암투를 벌이기 좋아하고 패거리를 짓기 좋아하며 사람을 타격하기 좋아하며 누가 자기보다 훌륭하다고 생각되면 시기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깔보고 억누르고 비웃고 훼방하며 배척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품이 나쁩니다. 성품이 나쁜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하기 쉽겠습니까? 자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을 보면 깔봅니다. “그를 얕잡아보고 배척하고 논단하고 비웃을 거야.” 사람이 상대하기 어려워보이면 “강자!”라고 하면서 비굴하게 복종하고 아첨하며 비위를 맞춥니다. 이것은 천성적인 악인의 본성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자제하지 못하고 변할 수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착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을 보면 좋아합니다. “음, 이런 사람 찾기 힘들어요! 저는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고 이런 사람과 친구로 친하게 잘 지내야겠어요. 이 사람이 곧 저의 친구이고 저의 형제, 자매이며 정직한 사람이에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면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찾고 새우가 새우를 찾고 악인이 악인을 찾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것을 마음이 맞고 공통 언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람을 잘못 찾아서 자신과 한 부류가 아니라면 공통 언어가 있겠습니까? 공통 언어가 없으면 말이 안 통해서 접촉하기만 하면 두 사람은 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할 말이 없고 어색하기 때문에 가장 좋기는 접촉하지 말고 멀리 피해야 합니다. 보세요, 성실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비교적 단순한 사람, 이런 사람은 한데 어울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찾고 함께 진리를 교통하면 공통 언어가 있고 두 사람은 힘이 생기고 한데 어울릴 수 있으며 서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유익한 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면 서로 의견이 잘 맞지 않아 반마디도 하기 힘듭니다! 당신이 말하면 그가 반응이 없고 그가 당신에게 얘기를 하면 당신이 듣고 반감을 가지게 되면서 결국 할 말이 없어 기분 나쁘게 헤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씨가 착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쉽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기 쉽겠습니까? 진리는 긍정적인 사물이고 그 사람 자체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쉽고 아주 홀가분하고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예컨대 어떤 성실한 사람이 있는데 당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하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거짓말을 하라고 하면 난감해 할 것입니다. “저보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면 저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거짓말만 하면 금방 들통 나고 다른 사람들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만약 어떤 성실한 사람과 착한 사람에게 다른 한 성실한 사람과 착한 사람을 공격하라고 하면 그 사람이 하겠습니까? 그는 안 합니다. “왜 저보고 그를 공격하라고 하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안 할 거예요.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성실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입니다. 보세요, 그 성실한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무슨 말을 합니까? 다 성실한 말을 하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것인지,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논합니다.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말하고 진리를 교통하면 그는 할 말이 있고 말하기 좋아하고 듣고 보기만 해도 기뻐하고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이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에 부합되는 일을 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그런 일을 하며 그런 악을 행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에 달린 일이 아닙니까? 역시 사람에게 어떤 본성이 있으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본성의 자연적 유로(流露)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늘 교회에서 시비를 일으키고 있고 아귀다툼하며 패거리를 짓고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이런 본성이 있으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한 사람이 시비를 걸기 좋아하고 사람을 논단하기 좋아한다면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모두 시비를 걸고 사람을 논단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에게 진리를 교통하는 말을 좀 하게 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말을 하라고 하면 그는 말하지 못하는데, 그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할 때 늘 하나님 집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며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누가 어떤 좋은 일을 좀 하면 그는 찬물을 끼얹고 누가 선행을 좀 예비하면 그는 빈정댑니다. 교회에서 무슨 사역을 좀 하면 그는 논단하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며 방해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늘 파괴하는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질투해서입니다! 그가 긍정적인 사물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사물이 임하면 그는 파괴하지 않고 방해하지도 않으며 엇나가지도 않고 마구 퍼지게 합니다. 긍정적인 사물이 나타나면 그는 혈안이 되고 속이 근질근질거려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는 방해하지 못해 안달인데,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본성이 나쁘고 마귀 사탄에게 속한 자는 이렇습니다.

그럼 우리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어떤 사람이라야 쉽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인성이 좋고 애증이 분명하며 정의감이 있는 사람은 홀가분하고 유쾌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떻게 도달합니까? 악에서 떠나는 것은 어떻게 도달합니까? 사람은 다 모릅니다. 그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모든 것보다 높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심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심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전 우주 만물을 주재하심을 인식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국가의 운명, 한 민족의 운명, 한 사람의 운명, 좋은 사람의 운명, 나쁜 사람의 결말이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고 다 하나님께서 안배하시고 명정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모두 자기의 결말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한 교회에서 교회 인솔자가 그 교회의 사역을 책임진다면 이것을 보고 착한 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난 교회 인솔자 말을 들어야겠어. 교회 인솔자가 안배해 준 대로 해야지.” 이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악인은 어떻습니까? “뭐? 당신이 교회 인솔자라고? 난 인정 못해. 왜 내가 아니야? 그래 좋아! 먼저 기회를 찾아 약점을 잡고 약점이 많아지면 덜미를 눌러놓았다가 언젠가 당신을 쓸어버리고 내가 대신할 거야.” 이것이 악인이 아닙니까? 이것은 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휴,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하나님 집의 모든 사무를 책임지고 있기에 저는 그의 안배에 따르기를 중요시하고 그의 설교를 많이 듣고 진리를 좀 많이 깨달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연히 이런 생각이 있고 향상하기를 추구합니다. “누구에게 진리가 있으면 저는 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누굴 쓰시면 그의 말을 들을 거예요.” 악인은 어떻습니까? 본성이 발작하여 누구에게든 불복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일 수 있어요? 저는 왜 아니에요?” 이것이 악인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이 똑같이 한 사물을 대하는데 왜 서로 다른 관점이 있고 서로 다른 표현과 행실이 있을까요? 이것이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 그가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며 진리를 좋아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쉽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훨씬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실행해 내지 못하는데 무슨 문제를 설명합니까? 그에게는 정의감이 없고 애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악한 사물을 좋아하고 시비를 거는 그런 일을 좋아하고 잡담하기 좋아하고 사람을 논단하기 좋아하고 관념을 퍼뜨리기를 좋아하고 관계를 이간시키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결국 입만 열면 이런 것들이고 입만 열면 이런 것과 아주 가깝고 입만 열면 이런 효과를 가져오고 입만 열면 이런 느낌이 들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은 올바르지 못하네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라고 여기게 합니다. 무슨 말이든 그의 입에서 나오면 느낌이 다릅니다. 이것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보세요, 착한 사람이 좋은 말을 하면 듣기 좋고, 나쁜 사람이 좋은 말을 하면 거슬리고 맛이 변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본성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가 좋은 말을 해도 거슬리고 좀 부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인성 문제입니다. 간사한 사람이 말하는 방식과 정직한 사람이 말하는 방식이 같습니까? 간사한 사람이 말하는 방식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빙빙 돌려서 말합니다. 이런 말은 왜 하게 된 것인지, 무슨 의도인지, 사람으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게 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은 간사하고 언변이 좋아 그의 속내를 모르게 하고 대책이 없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대답해도 그에게 꼬투리 잡히기 쉽고 틈을 노리게 합니다. 이런 언어는 너무 교활하고 마귀의 외교적 언어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직설적이고 뜻이 뚜렷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욥의 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순전한 사람이 되도록 온전케 했습니다. 그럼 욥,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를 수 있었습니까? 첫째, 마음씨가 착하고 둘째, 애증이 분명하고 셋째, 정의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정상적 인성에는 주로 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이 세 가지는 그가 진리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음을 결정하였습니다. 사람이 만약 이 세 가지를 구비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될 수 없습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성경에 이런 한 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본 적 있지만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이 말씀이 곧 진리이고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틀림없이 소수는 믿고 다수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믿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믿고,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믿지 않을까요? 이것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여기에 찾아볼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믿는 사람은 곧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다 믿고 그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불성실한 사람, 간사한 그런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간사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지 않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진리를 깨달아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그 사람들은 간사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럼 다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태껏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그 사람들은 성실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간사한 사람입니까? (간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간사해서 진리를 믿지 않고 진리를 의심하고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100% 확정할 수 있습니까? (네.) 그러므로 당신이 교회에서 본 큰 방면의 진리이든지 아니면 작은 방면의 진리이든지 여태껏 실행하지 않은 그 사람들은 가장 간사하고 가장 교활한 사람입니다. 한가하면 당신에게 도리나 말해 주고 그런 다음에는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은 바로 가장 간사한 사람입니다. 간사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간사한 사람 그 자체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집니까?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시고 사람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심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외에 진리를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고 애증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다 구비했다면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둘째는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구비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은 이론상에서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심이 절대로 틀림없다고 인정하고 큰 붉은 용이 무너질 날이 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세상을 훼멸해야 될 때면 무조건 훼멸하는 것은 절대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응할 것임을 100% 믿는데 왜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까? 인성이 나쁘고 진리의 실제를 싫어하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컨대, 사람을 논단하기 좋아하는 것이 악이고 본분을 함에 있어서 대충대충 하고 속이는 것이 악입니다. 그는 진리를 싫어하고 사람을 논단하기 좋아하며 대충대충 하고 속이기를 좋아하며, 시비를 걸기 좋아하며 패거리를 짓기 좋아하며 이것저것 평론하기 좋아하며 암투를 벌이기 좋아하는데 그 결과 어떻습니까? 그는 이런 악에서 한 가지도 떠날 수 없고 날마다 밥 먹듯이 하고 있는데 그럼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본성의 문제입니다. 그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악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 아주 쉽습니다. 예컨대 한 가지 일이 닥쳤을 때 “거짓말해선 안 돼. 사람을 속일 순 없어. 거짓을 꾸밀 순 없어.” 이렇게 그의 정직한 성품은 자연히 나오게 되는데 사람을 속이지도 않고 거짓을 꾸미지도 않으며 거짓말은 더욱 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일부 형제자매들이 자기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아 그가 깔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악에서 떠나야 돼. 형제자매니까 정확하게 대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돼. 친 형제자매처럼.” 업신여기지도 않고 논단하지도 않고 얕잡아 보지도 않으며 더욱이 배척하지도 않으면 악에서 떠난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논단하고 얕잡아 보는 것을 보면 “아, 이 사람 인성이 별로네. 하지만 하나님 집의 사람이니까 됐어. 만약 도울 수 있으면 돕고 도울 수 없으면 포용하고 인내하자. 사람을 대함에 원칙이 있어야 되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면 이것이 악에서 떠난 것 아닙니까? 이러면 악에서 떠나기 아주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약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 깊든 얕든 다 실행해 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진리를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데에는 모두 어떤 악을 포함합니까?” 인류가 깊이 패괴되어 악한 짓을 많이 할 수 있기에 총결해 내면 적어도 30~50가지는 될 것입니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글귀 도리만 많이 깨닫는다면 30~50가지를 총결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10~20가지는 총결해 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당신이 아무 진리도 모르는 새신자에게 패괴된 인류가 어떤 악을 행할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떤 악들이 있는지를 물어본다면 그가 양심에 따라 총결해도 10~20가지는 총결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면의 악은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논단하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간증하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본분을 함에 있어서 대충대충 하며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이 외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 악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면의 악만 해도 10~20가지가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대하면서 행한 악은 더 많은데 적어도 10~20가지는 됩니다. 본분을 대하면서 행한 악도 적어도 8~10가지는 됩니다. 사탄의 정권을 대하는 이 방면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악도 몇 가지는 됩니다. 어쨌든 진리를 많이 깨달을수록 발견하는 악이 더 많아지고 진리를 적게 깨달을수록 발견하는 악행이 더 적어지며 당신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효과도 좋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30가지 악에서 떠날 수 있을 때, 당신은 3~5가지 악에서 떠나는 효과를 가져와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무슨 악에서 떠났습니까? 사람을 죽이지 않고 불을 지르지 않고 훔치지 않고 빼앗지 않으며 게다가 하나님의 제물을 훔쳐먹지도 않는데 이러면 악에서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만약 당신이 진리를 좀 깨달았다면 악에서 또 얼마 더 떠날 수 있습니까? 정직한 사람을 억누르지 않고 탄압하지 않고 논단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는다면 이 방면의 악을 멀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있어서 어떤 악에서 떠나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데, 우리 간단하게 얘기해 봅시다. 본분을 함에 있어서 대충대충 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악이고, 사람을 억압하고 속박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악이고 패거리를 지어 작은 집단을 만드는 것이 악이고 사람과 시기 분쟁하고 암투를 벌이는 것이 악이며 사람을 함부로 논단하고 공격하고 훼방하며 정죄하는 것이 악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또는 진리에 부합되는 것에 순복할 수 없거나 대항하는 것이 악이며, 악인을 따르고 착한 사람을 억압하고 성실한 사람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악이며, 분명 진리임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만 수호하는 것이 악이며, 사람의 미움을 살까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악이며, 세상 사람을 속이고 수단을 부리며 기만하는 것이 악이며, 악인(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을 폭로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저버리지 않는 것이 악이며, 하나님 선민에게 어려운 점이 있고 환난에 부딪친 것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보호해 주지 않는 것이 악이며, 소극적이고 연약한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부축해 주지 않고 공급해 주지 않고 오히려 비웃고 훼방하고 수수방관하는 것이 악이며, 형제자매의 책망과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움을 거절하고 마음으로 대항하며 거부하고 순복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교회의 재물을 횡령하고 함부로 쓰고 낭비하는 것이 악이며, 인솔자 일꾼으로서 책임지지 않고 실제 사역을 하지 않고 지위의 복을 누리며 교회에 의지해 먹고 사는 것이 악입니다. 이 외에 하나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의심하며 늘 관념이 생기고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 악이며, 하나님 집의 사역을 대함에 있어서 이러쿵저러쿵 마구 논하고 지나치게 트집잡고 순복이 없는 것이 악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면서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논단하는 것이 악이며 늘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얼마만큼 고생했고 얼마만큼 대가를 치렀고 얼마만큼 공헌했다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같다고 하는 것도 악이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늘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고 사람으로 하여금 숭배하게 하여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게 하는 것이 악이며, 늘 지식과 철학에 의해 살고 지식을 자본으로 하여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높이 보게 하고 숭배하게 하는 것이 악이며, 늘 개인이 총결한 경험 교훈과 규례를 진리로 삼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더욱 악이며, 말할 때 늘 간계를 띠고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게 하는 데에 이르며 사람을 미혹하는 것에 속하는 것은 더욱 악입니다. 지금 말한 것은 거의 30가지나 됩니다. 만약 더 총결해 본다면 50가지는 될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함에 있어서 주요하게 적어도 이 30가지의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당신이 해낸다면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30가지의 악에서 떠날 수 없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악은 당신이 한두 가지 악에서 떠나기만 하면 다른 것은 다 해내기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터득할 수 있겠죠? 예컨대, 당신이 사람을 논단하지 않을 수 있다면 누가 연약하고 과오와 패괴 유로가 있음을 발견했을 때 논단하지 않고 사랑으로 도와줄 것입니다. 그럼 논단한다면 무엇입니까? 적으로 보고 경시하고 얕보는 것입니다. 논단하지 않고 사람을 다 똑같이 이해하며 사랑으로 도와준다면 당신은 사람을 괴롭히는 다른 악에서도 떠날 수 있습니다. 어떤 악은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구비하고 원칙을 구비하기만 하면 한 가지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아울러 다른 몇 가지 악에서도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 그리 많지 않고 진리에 투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쉽습니까? 사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선행을 예비하는 것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어렵습니까? (선행을 예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쉽고 가장 간단한 일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선행을 예비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좀 어려울 것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좀 어려울 것입니다. 당신이 악을 행하지 않아야 선행을 예비할 수 있고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최저 기준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진정한 기준은 바로 생명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주요하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당신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저 지키기만 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면 되고 만약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를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악을 행하지 않는다 해서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음을 뜻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외에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아니면 선행을 예비하는 것이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선행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예비하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선행을 예비하려면 어떤 때는 시간이 필요하고 베풀어야 하며 고생해야 합니다. 예컨대 일부 형제자매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은 말만 해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도움은 물질적 도움이 필요하고 어떤 도움은 일손을 도와야 할 것이 필요하고 직접 그를 도와 문제를 해결할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면 대가를 좀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는 데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을 논단하지 않는 데는 돈 쓸 필요가 있습니까? 이간질하지 않는 데는 돈 쓸 필요가 있습니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악을 행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는 데는 그 어떤 대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예컨대 어떤 때 악을 행하는 것은 입으로 마음으로 하게 되는데 당신이 지금 입을 다물고 속으로 기도하면 이 악을 행하지 않겠죠? 이러면 돈 쓸 필요가 있습니까? 고생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것은 간단한 일이고 조금도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하면 그 자체가 바로 누림이고 전혀 고생할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선행을 예비함에 있어서는 어떤 때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에게 어려운 점이 있어서 도움이 필요해 교통해 준다면 여기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시간을 조금 들여야 하고 신경을 좀 써야 하며 어느 정도 대가를 좀 치러야 합니다. 선행을 예비하고 본분을 잘하는 것은 대가를 좀 치러야 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고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복하고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 도달하려면 어떻습니까? 이 대가는 정말 큽니다. 예를 들어 시련이 임했다면 고통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가도 치러야 합니다! 큰 붉은 용에 체포된다면 그것은 심혈을 좀 기울이면 되는 게 아니라 육체가 고문당해야 합니다! 육체가 고문당한 다음 큰 붉은 용이 또 당신의 집을 발칵 뒤집어놓을 것이고 벌금을 부과할 것이고 당신의 집을 몰수할 것이고 당신의 생활비를 가져갈 것이고 당신을 직장에서 해고시킬 것이며 당신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갈 기회를 없앨 것입니다. 이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련에 부딪쳤을 때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 이르고 하나님께 순복하려면 그 대가는 어떤 때 아주 큽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현재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는 그다지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고 악에서 떠나는 것은 바로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을 만나면 제가 그를 멀리하고, 적그리스도를 만나면 멀리하고 저버리고 폭로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가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시련에 부딪치면 간증을 굳게 서야 하고 하나님의 안배에 절대적으로 순복해야 하는데, 이때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어떤 때 대가를 좀 치러야 합니다. 어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서 허풍만 쳐서는 안 되고 직접 해야 하고 정력을 들여야 하며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대가를 좀 치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인솔자 일꾼이어서 어느 교회에 문제가 발생해 그 교회에 해결하러 갔다고 했을 때 10분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한 번 집회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때 가면 며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당신이 돌아간 후에도 문제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2~3일 집회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언급하면 본분을 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는 데에 이르는 것에 연관되고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 연관되는데 이것은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고 고생을 해야 합니다. 심지가 없으면 해내지도 못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바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지금 악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몇 가지나 실행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어떤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어떤 악을 지금 행하지 않고 멀리할 수 있는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한 가지 본분을 하면서 대충대충 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려면 몇 년을 경력해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본분을 함에 있어서 계속 대충대충 하며 속인다면 한 가지는 게으르고 심지가 없고 또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에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다수입니까, 소수입니까? 틀림없이 소수일 것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로 적습니까? 3분의 1에서 5분의 1입니다. 그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악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악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가 여전히 악을 행할 수 있고 악행이 아직도 적지 않으며 그의 입에서는 늘 일부 악언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악설과 악언을 할 뿐만 아니라 또 불신까지 해 메스꺼운데, 이것은 더 심한 악입니다! 툭하면 “저는 믿지 않을래요.”라고 말하고 교회에서 그를 제명하려고 하면 “당신을 참소할 거예요.”라고 합니다. 이런 악인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무릇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참소하려고 하고 인솔자와 교회를 참소하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100% 악인입니다! 하나 발견하면 하나 제명하고 남겨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을 때는 힘이 좀 있다가도 어려운 점에 좀 부딪치고 환난에 좀 부딪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이 없고 물러서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방면에서 부족합니까? 진실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심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탄의 모든 사악한 세력을 패배시킬 수 있음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최종에 이 사악한 시대를 끝마치실 수 있음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에게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능을 믿지 않는데 그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경외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전능을 믿어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둘째, 추호의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심은 절대적으로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사악한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질 것인데 마치 그때 노아가 “이 방주를 다 지으면 이 세상이 없어질 것이고 전부 물에 잠길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노아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 방주를 지었던 것입니다. 방주를 지을 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니 성령께서 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나중에 방주를 다 지었을 때 하늘에서 폭우가 내렸고 밤낮으로 내려 온 땅을 다 침몰시켰는데, 그 시대는 그렇게 훼멸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신 것처럼 불로 멸하십니다. 각 대도시는 다 소돔 성이어서 모두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각종 재난이 다 내려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십니다. 하나님, 저를 구해 주세요!”라고 계속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난을 봤을 때에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이러면 늦은 것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지 않으셨을 때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까? 이것이 쉽습니까? 사실 이것도 쉽습니다. 그럼 당신은 노아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멸하셨는지 믿습니까? 율법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를 훼멸하셨는지 믿습니까? 이런 것은 다 사실입니다! 지금 그 곳을 알아보면 정말 유황불로 태운 소돔 성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외에 4800년 전에 확실히 홍수로 세상을 멸한 이 일이 있었음을 과학이 다 실증했고 노아 방주도 발굴되었습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난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큰 재난이 좀 임하면 사람은 다 놀라서 벌벌 떱니다! 당시에는 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젠 끝장이구나. 죽게 생겼어. 재난이 내리니까 너무 무서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데에 어떻게 도달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전능을 믿으려면 성실한 마음 즉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저는 믿습니다. 100% 믿습니다. 사실을 보지 못해도 믿습니다.” 이것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늘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인데 그는 사실을 보고서도 나중에 생각해 보고는 또 의심하고 사실을 보고서도 시간이 길면 또 의심합니다. 그가 자꾸 의심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진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아주 쉽게 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간혹 과오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상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점점 더 투철해지고 시련을 더 많이 겪음에 따라서 사람이 악에서 떠나는 효과도 더 좋아지게 되고 최종에 완전히 거룩해지는 데에 도달하여 순전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다년간 믿으며 악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생명에 늘 진보가 있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생명에 진보가 없습니다. 그럼 생명의 진보를 무엇으로 나타내고 증명합니까? 첫째는 악에서 떠나는 것이고 둘째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악을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진리를 싫어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다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많이 실행할 수 있다면 즉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한 사람이 되는 진리, 본분을 함에 있어서의 각 방면의 진리, 정상적인 대인 관계 방면의 진리, 하나님께 순복하는 방면의 진리, 간증을 하는 방면의 진리를 다 적지 않게 실행해 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생명의 진보가 빠릅니다! 이 사람은 분량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다년간 믿으면서 영적 도리를 많이 깨닫고 또 많은 도를 말할 수 있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이 실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 도리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에 그는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없고 성령께서도 그에게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진실한 진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년간, 7~8년, 10년을 믿었음에도 많은 악을 행할 수 있고 많은 악행을 시종 벗어버리지 못하고 지위의 복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제물을 훔쳐 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이를 희망이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미 끝장났고 폐물이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역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찍이 그를 포기하셨는데, 그가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그의 과오와 악행을 간단히 말하기만 해도 먼저 그 자리에 엎드려 이것이 악행임을 알고 하나님께 빚졌다고 느끼면서 두려워합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한 사람의 악행에 대해 몇 가지 폭로했을 때 그가 아무런 반응도 없고 심지어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다면 이 사람의 문제는 엄중합니다.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위험합니다! 폭로해도 모릅니다. 다들 말하고 대면하여 지적해 주는데도 인식하지 못하면 끝장난 것이고 폐물이 된 것입니다! 진정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악을 조금 행하고 패괴가 조금 유로되면 당시에 압니까, 모릅니까?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해 봅니다. ‘이건 악이고 패괴야! 하나님께 빚졌어!’ 얼른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며 후회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얼른 하나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털어놓고 인정하는데,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몇 가지 악을 다 저지르고 사람들에게 버림당할 때까지도 뉘우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었습니다. 이는 영 안이 이미 마비되어 느낌이 없고 성령 역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중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비했다면 이 모든 악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저지르지 못합니다. 그는 이런 것을 증오합니다. 예컨대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사람을 함부로 논단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하겠습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하겠습니까? “저보고 좋은 일을 좀 하고 본분을 좀 하고 책임을 좀 맡으라고 하면 괜찮지만 저보고 악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을 논단하고 공격하고 혼내주라고 하는 것은 악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지를 수 없습니다!” 각종 악행을 사람이 보기만 하면 계속 메스꺼워하는데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도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그에게 악에서 떠나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그가 하는 것은 절대로 악이 아니기에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가 하는 일은 다 선행이고 다 사람에게 유익한 점이 있는 일이고 다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공급해 주고 사람을 부축해 주며 사람을 위해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는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의 사역을 수호하고 하나님 선민을 이끌고 진리를 추구하여 사탄을 이기고 간증을 굳게 서는 것은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선행도 다 예비하지 못했는데 악을 저지르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악을 저지르라고 시키지 마세요. 그는 저지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악인은 다릅니다. 당신이 그에게 악을 저지르지 말라고 해도 그는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악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밥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거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악인은 천성적으로 악한 짓을 하는 물건짝이니 변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입으로 다른 사람을 논단하기 좋아하는 사람, 사람을 비웃고 훼방하기 좋아하는 사람, 사람이 입으로 범하는 죄, 저지르는 악이 여러 가지 방면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이 그에게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의 입을 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이 악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입은 무엇의 지배를 받습니까? 입은 도구이고 마음이 근원입니다. 당신이 입을 봉한들 마음을 억제할 수 있습니까? 그가 마음속으로 사람을 욕하고 있는데 누가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속으로 사람을 욕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듣지 못합니다. 당신이 듣지 못해도 그에게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는 좀 있다가 다가와서 당신을 “뻥” 걷어찰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사람을 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그는 누가 눈에 거슬리면 달려와 귀뺨을 올려붙이는데 이것이 사람을 욕하는 것보다 더 흉악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음이 악하면 사람은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일부 악인을 보세요, 당신이 그를 악에서 떠나게 하려고 해도 어림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이 너무 악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 즉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아주 쉽고 홀가분하며 유쾌할 것입니다. 그가 설령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해도 많은 악을 저지르지 못하고 설령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을지라도 확연히 드러나는 일부 악에서 이미 떠나는 데에 도달했습니다. 만약 일단 진리를 깨달았다면 마음과 생각에 있는 많은 악과 아직 행하지 않은 악이 마음속에서 없어지는데 이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악이 없어집니다. 일부 특별한 배경,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를 업신여겨 그가 화나서 이 사람을 욕하고 싶고 반박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지만 양심이 “저주하지 말고 욕하지 말라.”고 절제하고 있어 기껏해야 변론해 보다가 끝냅니다. 만약 그가 진리를 더 깨닫게 된다면 변론한 후에도 그와 싸우는 것 같아 마음에 구속도 좀 받고 아주 증오스러워하기도 하고 메스꺼움이 나오기도 하여 얼른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게 됩니다. 구하니 “마음속의 이 악도 있어선 안 돼. 차라리 인내하자. 정당한 방법으로 대하자.”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보세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이 닥치면 이렇게 실행하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일부 악도 피하고 행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악은 행하고 싶어도 생각해 보면 양심에 찔려 안 하게 됩니다. 그가 진리를 더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 생기면 꿰뚫어 보지 못한 일부 일을 기도를 통해서 깨닫기도 하고 또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을수록 사람이 떠나고 버리는 악이 점점 더 많아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 커지며 떠나는 악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진리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만약 어떤 사람이 “에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게 쉽지 않네요! 한평생 해도 도달하기 어려워요.”라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문제에 속합니까? 그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 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휴, 악에서 떠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악에서 떠나라는 것은 나보고 밥 먹지 말고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아. 나는 그런 악을 행하기 좋아해. 예를 들면 매일 할 일이 없어 남의 흉을 보고 사람을 논단한다든가 혹은 사람을 혼내주고 패거리를 짓는다든가 이래야 재미나고 살맛이 나고 사람을 속이고 이익을 챙기는 게 제일 좋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천성적으로 악한 사람이고 본성이 바로 악인이기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는 사람은 분명히 옳은 사람이고 긍정적인 인물입니다. 즉 마음씨가 착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제 알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부분 사람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소부분 사람은 어떤 인성입니까? 인성이 좋습니다. 인성이 좋으면 어떤 표현이 있습니까? 첫째, 마음씨가 착하고 둘째, 애증이 분명하며 셋째, 정의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동안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고 강해지며 부지중에 모든 악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마음씨가 착하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으로 되기 쉽습니까 아니면 간사한 사람이 성실한 사람으로 되기 쉽습니까? (착한 사람입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 성실한 사람으로 되기 쉽습니까? 마음씨가 착한 사람은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며 착한 사람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의 마음 상태는 적극적으로 향상하는 심리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 악에서 떠나기 쉽습니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은 일단 자신이 패괴를 유로하고 악행을 유로한 것을 발견하면 자신을 뉘우치고 증오합니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는 자신을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씨가 착한 사람은 패괴를 증오하고 사악을 증오하고 불의를 증오한다고 합니다. 그는 패괴에서 벗어나기 쉽고 불의에서 벗어나기 쉽고 사악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악인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영원히 악행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인은 바로 악을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누림으로 여기는데 그런 사람은 영원히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사람을 혼내주는 것을 누림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착실한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두 마디 비웃고 몇 마디 논단하고는 방법을 생각해서 다시 당신을 풍자하고 필요할 때가 되면 악한 말로 직접 상처를 줍니다! 그가 만약 착실한 사람이 본분을 아주 적극적이고 아주 열정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눈에 거슬려합니다! “저 사람, 왜 아직도 저기서 추구하고 있어? 정말 기운도 넘치네. 아직도 넘어지지 않았어? 얼른 손 좀 봐줘야겠어. 저 사람 무너뜨리고 쓰러뜨리면 마음이 뻥 뚫릴 거야.” 이것이 악인이 아닙니까? 악인은 어떤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어떤 거짓말을 하고 기만함에 있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의 목적과 간계가 일단 달성되면 그는 속으로 기뻐하고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악인입니다.

기억하세요! 악인이 교회에 있으면 영원히 재난입니다! 악인을 하루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루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교회에 있으면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악인을 해결하지 않는 교회는 희망이 없고 전망이 없습니다. 만약 교회 인솔자가 악인을 제거하지 않고 악인을 비호한다면 그 교회 인솔자도 틀림없이 악인이고 또한 사탄의 앞잡이이고 한패입니다. 그는 정의감이 없습니다! 만약 교회에 악인이 여러 명 있는데 교회 인솔자가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없애지 못하고 제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이 교회의 인솔자로 될 자격이 있습니까?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마치 양을 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양떼 속에 양 가죽을 쓴 이리 몇 마리를 보고도 감히 때려잡지 못한다면 이런 양치기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거짓 목자, 거짓 인솔자, 거짓 일꾼입니다! 그는 하나님 선민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그가 혼자서 처리할 수 없으면 마땅히 정의감이 있는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연합해서 함께 악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좋은 인솔자이고 좋은 일꾼입니다. 무릇 인솔자 일꾼인데 악인을 제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 정의감이 없고 애증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이고 다 인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씨가 착하지 않고 인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을 제거하지 않는 인솔자 일꾼을 발견하기만 하면 저는 이런 인솔자 일꾼에 대해 가장 반감을 갖게 되고 기회를 찾아 그를 교체할 것입니다. 악인을 제거하지 않는 인솔자 일꾼은 절대로 좋은 인솔자가 아니고 좋은 일꾼이 아닙니다. 악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까? 그는 악에서 떠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악인을 교회에 두고 일부러 악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선민을 억압하고 하나님 선민에게 화를 입히도록 허락합니다. 악인이 교회에서 하는 “본분”은 무엇입니까? 첫째, 악한 일을 하여 하나님 역사에 엇나가고 방해하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 선민에게 화를 입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실질은 바로 해치는 것인데 곳곳에서 하나님 선민에게 화를 입히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입니다. 보세요, 어떤 악인은 B조로 갔거나 제명되었습니다. 이러면 교회가 평안한 것 아닙니까? 각처에 분쟁이 사라졌습니다. 악인이 어디로 가면 거기에 먼저 분쟁, 변론, 싸움이 있고 그곳의 사역이 중지되며 하나님 선민은 본분을 할 수가 없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것이 악인이 방해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첫 번째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악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합심하여 악인을 제거해야 교회 생활이 있고 하나님 선민들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 선민들에게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 있게 됩니다. 이래야만 하나님 선민의 생명이 부단히 자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악인을 제거하지 않는 교회는 바로 악인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날뛰는 교회이기에 성령 역사를 쉽게 잃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잃게 됩니다! 악인이 교회에 있는데 제거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방해하여 엉망으로 만들고 뒤죽박죽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간증을 즉시 잃게 되고 교회 생활도 없어지게 됩니다. 한 교회에 악인이 한 명만 있어도 그것은 바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리는 격입니다! 만약 어떤 곳의 하나님 선민이 본분을 잘 하려고 하고 교회 사역을 잘 하려고 한다면 첫 번째 임무는 악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악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역을 전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교회의 사역을 함에 있어서 첫 번째 사역은 하나님 선민을 양육하고 하나님 선민에게 공급하며 설교 교통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역 안배를 내려보내서 교회의 모든 사역을 안배하는 것이며 셋째는 악인을 제거하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를 제거하고 모든 악령을 제명하는 것입니다. 이 몇 가지 사역을 저는 동시에 진행합니다. 저는 어느 목회 구역에서 사역을 잘 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 목회 구역의 상층 인솔자 중에 틀림없이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가 있음을 알고 관찰하는데 한동안 관찰해서 문제를 발견하면 손을 씁니다. 우선 제일 높은 상층의 그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를 처리한 다음 다시 중층의 사람을 해결하고 마지막에 하층의 사람을 해결합니다. 한 무리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를 제거하고 나면 그곳의 교회 생활도 따라서 좋아지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도 다시 정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만약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면 최소한 적그리스도와 악인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적그리스도, 거짓 인솔자, 악인, 악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것을 분별한 다음 원칙에 따라 제거하고 처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처리한 다음 다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본분을 하면 틀림없이 효과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규율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악인을 제거하지 않고 악인이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한 목회 구역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몇 명 된다면 그 목회 구역의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우선 반드시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의 문제를 해결해야 교회의 사역이 순조롭게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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