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9)

우리는 제3편 말씀에서 욥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화복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이고 화복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이런 관점이 어떻습니까?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만약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데에 이를 수 없다면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쉽게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다년간 믿었다고 해서 반드시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아들이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인(全人)을 얻게 하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장기적인 공급과 부축의 사역 기간에 하나님은 그의 뜻과 그의 요구를 일일이 사람에게 알려 주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도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데, 목적은 사람에게 분량을 갖추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에게서 각 방면의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인데, 사람에게 이런 장비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매 하나의 경로와 방식은 다 하나님의 원수 즉 사탄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후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사탄이 배치한 진영에서 빠져나오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서 빠져나온다면 이번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사람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방면을 검증하든지 검증하는 표준은 바로 사람이 사탄의 공격 하에 간증을 굳게 섰는지의 여부와 사탄의 올무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기를 던지고 투항하여 사탄에게 귀순했는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렸고,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하나님이 준 무기를 갖고 독립적으로 사탄의 결박을 이겨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고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렸다. 한 사람에 대한 사탄의 단념과 포기는 사탄이 더는 하나님과 이 사람을 쟁탈하지 않고 더는 이 사람을 참소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더는 이 사람을 제멋대로 학대하거나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 하나님께 얻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이다.

욥의 간증이 후세 사람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깨달은 동시에 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목적과 의의도 알게 되었다. 욥이 받은 고난에 대해 사람은 더는 연연하지 않고 욥이 고통받은 의의에 대해서도 아주 새로운 터득이 있게 되었다. 사람은 더는 자신에게 욥과 같은 시험이 닥칠까봐 걱정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의 시련이 와도 저촉하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욥의 믿음과 순복, 사탄을 이긴 욥의 간증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큰 도움과 격려를 주었다. 욥의 몸에서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을 보았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에 의하면 완전히 사탄을 물리치고 사탄을 이길 수 있음을 보았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할 수만 있으면,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결심과 믿음만 있으면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실패하게 할 수 있음을 보았고, 사람에게 목숨을 버릴지언정 간증을 굳게 설 결심과 의지력만 있으면 사탄이 말만 들어도 겁을 내고 황급히 물러선다는 것을 보았다. 욥의 간증은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고를 주었는데, 이 경고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만약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잔혹한 해침에서도 벗어날 수 없음을 훈계하고 있다. 욥의 간증은 또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계시를 주었는데, 이 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역주: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음을 깨닫게 했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구원받은 것임을 깨닫게 했다.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인생의 추구는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각 사람마다 본받아야 할 것이며, 그의 평생의 살아냄과 시련 속에서의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의 귀중한 재산이다.

욥의 간증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위로를 얻게 하였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 이 사람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 그중의 함의를 깨닫지 못할 것이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말하려 하는지의 심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에 가서 너희가 욥과 같거나 비슷한 시련을 겪을 때, 너희가 환난을 겪고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배치한 시련을 겪을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치욕과 고통을 참을 때면 내가 한 이런 말의 의의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너는 욥에 비해 아직도 훨씬 멀었다고 느낄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를 느낄 것이고 네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느낄 것이다. 그때에 가서 너는 욥이 한 그 몇 마디 대표적인 말이 패괴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욥이 해낸 것이 지금의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해내기 어려운 것인지를 느낄 것이다. 네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이런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치른 대가가 얼마나 값진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하나님이 지불한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교통하니 너희는 욥, 이 사람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있고 정확한 평가도 있지 않는가? 너희의 마음속에서 욥, 이 사람은 도대체 참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인가, 아닌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확실하게 “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욥이 행하고 표현해 낸 이런 사실은 사탄을 포함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들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증거는 욥의 몸에서 생긴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얻은 첫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의 몸에서 희망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욥의 몸에서 위로를 얻었다. 창세부터 욥의 그때에 이르러 하나님이 처음으로 무엇을 위로라 하는지, 무엇을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은 것이라 하는지를 진정 체득하였으며 무엇을 진정 그를 위해 한 증거라고 하는지를 보기도 하였고 얻기도 하였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간증과 욥, 본인에 대한 각 방면의 서술을 들은 후 자신의 앞길에 대해 계획이 있으리라 믿으며, 또한 우려와 공포로 가득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천천히 풀기 시작하고 조금씩 마음에서 해방받기 시작했으리라 믿는다……』

이번에 하나님이 욥에 관한 말씀에서 제일 주요하게 어떤 진리를 천명하셨는지, 이것은 사람이 깨달아야 할 바입니다. 우리가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욥과 베드로의 간증을 내놓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왜 말세 역사에서 먼저 욥의 간증, 베드로의 간증을 내놓아 하나님 선민에게 보여 주셨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만드신 사람이고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은혜시대에 만드신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세 역사에서 왜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 만드신 사람을 내놓아 말세의 하나님 선민에게 보여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말세에 하나님이 하나님과 합심하는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심하는 이 한 무리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얻으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드시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전케 하시는지, 어떤 효과를 이루려 하시는지, 오직 욥의 간증과 베드로의 간증에서만 체현됩니다. 오늘, 욥의 간증 아울러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은 것인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한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간증에서 이른 효과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두 밝히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욥 본인과 욥의 간증에 포함된 하나님 역사가 도달한 모든 효과를 다 말세의 사람에게 뚜렷이 보여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욥을 어느 정도로 만드셨는지, 나중에 그가 어떻게 사탄의 시험을 겪으면서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했는지, 이 일을 보아야 하고 이 일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몇몇 방면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몇몇 방면의 진리는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믿고서 구원에 이르는 데에 대해 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욥의 간증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당신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무엇을 온전케 하려 하시는지를 모르며, 당신은 더욱더 하나님께서 말세에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시는지, 사람이 어떻게 경력(역주: 체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마지막에 또 사탄의 시험을 겪는 것으로 사탄을 이기는 데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도 모릅니다. 이런 일을 사람이 만약 알아볼 수 없다면 진리를 잘 추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잘 경력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서 구원에 이르는 길은 욥의 간증에서 완전히 체현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서 하나님의 어떤 뜻을 나타내려 하셨는지 교통해 봅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장기적인 공급과 부축의 사역 기간에 하나님은 그의 뜻과 그의 요구를 일일이 사람에게 알려 주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도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데, 목적은 사람에게 분량을 갖추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에게서 각 방면의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인데, 사람에게 이런 장비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매 하나의 경로와 방식은 다 하나님의 원수 즉 사탄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후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사탄이 배치한 진영에서 빠져나오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서 빠져나온다면 이번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사람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이 단락 말씀은 아주 관건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 그다지 분명하지 못해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읽고 교회 생활을 떠나지 않고 본분을 할 수만 있다면 최종에 살아남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보면 이런 관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단지 사람이 집회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과 본분을 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니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제일 주요한 방식은 사람을 사탄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즉 반드시 사탄의 포위공격, 사탄의 박해, 사탄의 시험을 겪은 후 사탄의 포위공격, 박해, 시험에서 걸어나와야 합니다. 이야말로 구원에 이른 사람이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른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후에 각 사람마다 사탄의 시험이 임하게 되고 사탄의 박해와 사탄의 포위공격이 임하게 되는데,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식에 의해 인류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 역사의 이상 방면의 진리입니다. 현재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반드시 이 이상 방면의 진리에 대해 명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면의 이상에 대해 명확하지 못하고 무작정 도피하고 늘 사탄의 포위공격과 시험을 회피하려 하고 늘 평안한 환경을 찾아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지금 보면 이 길은 통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제가 만약 하나님 말씀만 먹고 마시면서 많은 진리를 깨달으면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까? 왜 꼭 사탄의 시험과 포위공격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탄의 시험을 겪고 도달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탄 앞에서 한 간증을 얻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어야 열외로 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약 이 간증을 얻지 못하고 제 딴엔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열외로 치시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정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어떤 효과에 도달하게 됩니까? 바로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의 간증 앞에서 철저히 창피를 당하고 실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이 해낸 간증에서 창피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간증이라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은 마지막에 이 간증으로 실증합니다. 이 간증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기신 간증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이 간증이 없다면, 즉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사탄이 한 사람을 계속 고소하고 계속 불복한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이 철저히 탄복하고 철저히 창피당하고 황급히 도망치기까지 즉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고소가 없어야 이 사람이 철저히 구원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이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장비해야 하는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가 없으면 사탄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럼 왜 진리가 없으면 사탄을 패배시킬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는 단호히 믿을 겁니다. 사탄이 어떻게 괴롭히든 저는 꼭 믿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믿음만 있으면 사탄을 패배시킨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 인정할 수 없습니까? 누가 이 일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일은 아주 관건입니다! 이 일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왜 사람이 반드시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만 사탄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따르면서 경력한 일을 돌아보면 우리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늘 사탄의 시험과 올무에 빠져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고 늘 죄 속에 빠져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심지어 늘 사탄에게 미혹되고 사탄에게 이용되고 사탄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었고 더욱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에게 도대체 진리 실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은 진리가 없으면 늘 사탄에게 미혹되고 늘 사탄에게 이용되고 늘 사탄의 통제를 받으며 하나님께 충성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없습니다. 이는 바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에 근거해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실제 행동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의 여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근거해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가 없는가에 근거해 결정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가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지만 늘 사탄에게 미혹되고 늘 거짓 인솔자에게 미혹되고 늘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늘 악령 역사에 미혹되며 또 각종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속박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 순복이 없으며 하나님과 합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시종 사탄의 권세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설사 붙잡혀 혹형을 당하는 것을 겪었다 해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인정할 수 없습니까? 간증이 없습니다. 무슨 간증이 없습니까? 사탄 권세에서 벗어난 간증이 없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한 간증이 없으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 간증이 없습니다. 이런 영문이 아닙니까?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아주 단호히 믿고 또한 “누가 물러가도 난 안 물러가.”라고 말하지만 그가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고 그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고 적그리스도를 따르거나 어느 인솔자의 미혹을 받고 그 인솔자를 숭배하고 심지어 그 인솔자의 말을 듣고 그 인솔자에게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넘어서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넘어선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너무나 사람이 깊이 반성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을 말해 봅시다. 한 교회에 예를 들어 50명이 있다면 진리를 추구하여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어떤 인ㆍ사ㆍ물의 속박도 받지 않는 데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정말로 많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인ㆍ사ㆍ물의 속박도 받지 않는 데에 이른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조금도 사람을 숭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 사탄의 그 어떤 포위공격이든, 그 어떤 시험이든, 그 어떤 대적이든 이겨 내어 사탄을 철저히 창피당하고 실패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에서 얼마만한 비율을 차지합니까? 이런 분량에 이른 사람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원칙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늘 말하던 욥의 간증은 구원에 이르는 간증에 속하고 구원받는 표준에 속하며, 베드로의 간증은 온전케 되는 표준에 속합니다. 그럼 베드로의 간증과 욥의 간증은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간증은 한층 더 높습니다. 욥의 간증은 구원받는 표준입니다. 구원받는 표준은 한 마디 간단한 말로 개괄하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악에서 떠날 수 있으면 이것은 구원받는 표준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분량과 표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구원받는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계속 얘기해 봅시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다년간 믿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몇 방면의 표현이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가 매사에 하나님의 감찰을 받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매사에 진리를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사탄의 시험, 사탄의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가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와 악인의 모든 미혹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가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를 수호하고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런 것에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는 왜 도달하지 못합니까?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매사에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리 없고 그는 매사에서 분별이 없고 진리가 없으며 그는 무엇을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라 하는지를 모르고 그는 무엇을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하는지를 모르며 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것인지를 모르고 그는 무엇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의 마음에 애증이 분명한 느낌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시비를 가릴 능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려는 소원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요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런 것이 결코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고 그가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만약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면 그의 마음은 틀림없이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고 틀림없이 매사에 사람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며 혹은 오만 자대하고 독선적이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면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간사가 가득하고 오만이 가득하고 악행이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면 그의 마음속에 틀림없이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악한 것들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이 진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다년간 믿으면서 만약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대상입니까, 아닙니까? 그럼 또 한 마디 하겠습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다년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사람은 도대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 마음속에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100%입니다. 우리 다수 사람 중 무릇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10%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20%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50%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다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가늠합니까? 바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악에서 떠나는 정도에 이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악행을 멀리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표준입니다. 이제 알겠습니까?

그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악에서 떠난 것은 무엇으로 실증합니까? 욥의 간증에서 어떤 일이 그가 악에서 떠났음을 실증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욥에게 시련이 임한 후 그의 재산과 자녀가 박탈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악에서 떠나는 표준입니까, 아닙니까? 그렇게 큰 시련이 임해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이것은 제일 좋은 증거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욥의 재산과 자녀가 박탈당한 후 그는 사람을 찾아가 결판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악에서 떠난 사람임을 실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욥은 그렇게 큰 시험이 임했어도 조금의 악도 행하지 않았고 조금의 혈기도 없었습니다. 일반인은 이렇게 큰 시험이 임하면 아마 다 혈기를 낼 것이고 다 사람의 방법으로 가서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가장 좋은 간증이 아닙니까? 그리고 욥은 다른 사람이 그를 미혹하고 끌어들이고 유혹하는 것을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밖에 우리는 욥이 어떤 악을 행했는지를 보았습니까? 욥은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욥은 순전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실증을 얻었겠죠? 완전히 실증을 얻었습니다.

그럼 지금 여러분이 더 얘기해 보세요. 어떤 배경 하에서든지, 어떤 환경 속에서든지 그가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무엇을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까? 어떤 사람이 “그 악은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강도질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이런 악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어떤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까? 사람은 어떤 악을 저지르기 가장 쉽습니까? 갖가지 시험과 시련이 임할 때 사람은 어떤 악을 저지르기 쉽습니까? 불평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것은 큰 악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성 표현과 겉면에서는 악이 없지만 시험이 임한 후에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고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고 하나님을 논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큰 악이 아닙니까?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본분을 함에 있어서 고생하기 싫어하고 대가를 치르기 싫어하며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없는데,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악에서 떠난 것입니까? 그럼 이런 사람이 만약 시험이 임한 후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조금만 고생해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조금만 고생하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위해 고생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보수를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저는 왜 보지 못했습니까?”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이것은 악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만약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하면서 충심이 조금 있는데 어느 날 그의 집에 재앙이 닥치고 사람이 죽는다면, 그가 만약 “제가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많은 본분을 하는데도 왜 저의 집에 재앙이 임합니까? 제 남편(아내), 제 자식이 병까지 났으니 하나님도 불공평하네요!”라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가 이런 말을 한다면 이것은 악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을 불신자의 악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하면서 충심이 있고 많은 고생을 하고 많은 대가를 치르고 집에 또 많은 재난이 닥쳐도 그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으실 만하다고 말한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믿음을 시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친족을 다 박탈하시고 저의 재산을 박탈하실지라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런 간증을 해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간증은 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런 간증을 하는 데에 어떤 분량이 필요합니까? 얼마만한 진리를 장비해야 합니까? 이것은 다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우리가 다시 욥과 대조해 보면 우리는 욥보다 어떻습니까? 욥은 하나님을 한평생 믿고서 70세가 됐을 때 시련이 임하여 이런 분량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말세에 이렇게 많은 도를 듣고 하나님 입으로 발표하신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으니 마땅히 욥보다 깨달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욥보다 깨달은 것이 많은데 무엇 때문에 욥의 간증을 해낼 수 없습니까?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전에 모두 자신이 인품이 아주 좋고 마음이 착하고 정의감이 있고 애증이 분명하다고 여겼지만 무엇 때문에 간증을 해내지 못한 것입니까? 이건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만약 정말로 마음이 착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또 정의감이 있다면 왜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 편에 설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없습니까?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욥은 그렇게 많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어도 시련이 임했을 때, 재산과 자녀가 박탈당하고 몸도 격타를 당했을 때 여전히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었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의 인품, 인성은 너무나 좋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마음이 착한 것이고 애증이 분명한 것이고 정의감이 있는 것입니다! 명실상부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그렇게 많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어도 이런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인품, 인성이 좋은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럼 욥의 간증은 어떻게 해낸 것인지, 우리가 이렇게 총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요한 것은 욥이 인성이 좋고 마음이 착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는 데다가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총결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럼 우리는 이렇게 많은 진리를 알고도 왜 욥의 이런 간증을 해낼 수 없습니까?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애증이 분명하지 않고 마음이 착하지 않고 정의감이 없습니다. 그렇죠? 그럼 이 3가지를 합치면 인성이 안 좋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인성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 3가지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 3가지를 진실로 갖추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성이 안 좋은 것입니다. 인성이 안 좋으면 설사 많은 진리를 깨달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주로 인성이 좋은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성이 좋은 데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 우리의 차이점은 뭡니까? 인성이 낮은 것입니다. 욥보다 깨달은 진리는 많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럼 악에서 떠나는 것은 어떻게 이르는 것입니까? 한 방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게다가 진리를 깨달으면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 있으면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양심에만 의지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안 되고 사람에게 분별이 없어도 안 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모르고 늘 사람을 숭배하고 사람에게 순복하고 하나님께는 순복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무슨 원인입니까? 두 방면의 원인입니다. 첫째는 인성이 안 좋고 둘째는 진리가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성이 안 좋고 그의 본성에 늘 사람의 사탄 철학이 있고 늘 육체적 애호가 있기에 그는 사람을 숭배하고 사람에게 순복하고 다른 사람과 패거리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조금도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행하는 악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우리가 인성이 안 좋은 일부 사람들을 보면 그는 이런 일을 하기 좋아합니다. 즉 패거리를 짓기 좋아하고 시비를 부추기기 좋아하며 남을 논단하고 남을 얕잡아보고 남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을 숭배하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인성이 안 좋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왜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실질도 진리이고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이것도 다 진리인데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 지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왜 악에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면 사악을 싫어하게 됩니다. 사악은 진리와 대립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류, 세상의 악인,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는 다 진리와 대립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진리를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성품도 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롭고 하나님이 공평하고 특히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다 의의 있고 다 진리 실제이니 그는 다 사랑합니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 모든 것에 대해 그는 마음속으로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들떠보지 않고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 지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지위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점점 높아지고 점점 커지는 것은 무엇에 의해 이르는 것입니까?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의해 이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위도 사람이 점점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집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이 발표하신 진리에 대해 많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더욱 커지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사람이 보다시피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다 진리이고 하나님의 성품은 다 진리이고 공의이고 사람에 대해 아주 공평한데 이는 다 진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욱더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유로(流露),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가 다 진리임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더욱더 좋아하게 됩니다. 더욱더 좋아하면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난 하나님의 말씀을 얻을 거야. 난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할 거야. 난 진리의 형상을 살아내기를 사모하고 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사모하고 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사모하고 난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사모하고 난 하나님을 얻기를 사모해야지!’ 이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의해 점차적으로 이르는 효과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진리에 대해 인식이 조금 있으면 진리에 대해 조금 호감이 생기며 진리에 대해 깨달음과 인식이 많아질수록 진리에 대한 그의 흥미가 점점 커지고 진리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진리가 만약 사람의 생명이 된다면 사람이 진리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은 바로 진정 빛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최고의 영광에 진입하는 것이고 광명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참된 인생입니다! 이것은 다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의해 이르는 효과입니다. 그럼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많아짐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 흑암이 있겠습니까? 사악을 증오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씩 악에서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럼 악에서 떠나는 것은 어떻게 이르는 것입니까?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의해 분별이 생겨 조금씩 광명 속에서 살면 흑암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면 몇 방면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첫째, 더욱더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이 효과는 뚜렷합니다. 둘째,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셋째, 더욱더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넷째, 더욱더 광명으로 나아가고 나중에 빛 속에서 사는 데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여 이르는 네 방면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는 경로이죠? (네.) 욥은 진리를 추구한 사람입니까? (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럼 우리도 지금 만약 진리를 추구한다면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최고의 경지이겠습니까? 생명을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빛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데에 이를 때면 이미 사탄을 벗어나 악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와 진리를 추구하는 의의에 대해 분명해 지지 않았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의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서 인솔자, 일꾼을 선거할 때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선거하기를 원합니다. 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선거합니까? 왜냐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 진입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며 우리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우리를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서 구원받고 온전케 되면 이 한평생 살아감에 있어서 정말 의의 있습니다. 특히 지금 교회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은 설교원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인솔자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 선민에 대한 이런 사람의 생명 공급과 하나님 선민에 대한 사랑의 부축은 하나님 선민으로 하여금 ‘야! 이 사람들이 너무나 좋고 너무나 소중해. 우리는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고 교회는 이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 돼. 우리 생명이 자라남은 이 사람들이 없어선 안 돼. 하나님 집에는 이 사람들이 필요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고 이후에 차츰차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점점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 사람들의 생존이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 무리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선민들이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고 교회 사역도 이 사람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교회의 기둥이고 하나님 선민의 지심인(知心人)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은 생존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교회에서 진리를 깨닫고 실제가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모두 하나님께 구원받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이 되며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은 더욱더 가치 있습니다.

우리 또 한 가지 간단한 문제를 말합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 사람들은 왜 세상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세상의 실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다 공허합니다! 순식간에 공허해지고 당신이 얼마를 얻든 다 공허하고 무의미합니다. 세상은 사악한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추구할수록 더 깊이 패괴되고 깊이 패괴될수록 구원받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일을 꿰뚫어 보았기에 이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고 전력으로 진리를 추구하면서 가장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냅니다. 이 사람들은 인생관, 가치관이 바뀌어 세상 사람의 관점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 사람과 걷는 길이 다르고 선택한 길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온 인류 가운데서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 즉, 우리 이 한 무리 사람에게 희망을 두십니다! 전체 패괴된 인류를 말하자면 이 사람들만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패괴된 인류에 대해서는 희망을 버리고 이 사람들에게 즉 말세에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한 무리 사람들을 만들고 온전케 하여 아름다운 거처로 이끌어 들어가신 다음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한 자들을 모두 훼멸시키려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시대를 끝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오셔서 어떤 사역을 하십니까? 한 방면은 한 무리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은 우리 이 무리 사람을 만드신 후 이 시대를 훼멸하고 이 세상을 훼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욥의 간증에서 이 길을 보았습니까? (보았습니다.) 욥이 걸은 길은 우리와 같은 것입니까? (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으면서 이르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욥이 했었던 간증입니다. 즉 우리가 앞으로 반드시 경력해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효과이며 반드시 해내야 하는 간증입니다. 만약 욥의 이 간증을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 욥의 간증을 해낼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과 실패는 여기에 달렸습니다. 그럼 욥의 간증을 다 읽고 난 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위로를 얻으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잘 알았습니까? (잘 알았습니다.)

“그때에 너는 욥에 비해 아직도 훨씬 멀었다고 느낄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를 느낄 것이고 네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느낄 것이다.” 욥은 사랑스러운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당신이 욥을 만난다면 어떻게 그를 대하겠습니까? 당신은 그의 재산과 자녀가 다 하나님께 박탈당하고 후에 또 온몸에 악창이 나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것으로 인해 그가 가소롭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욥의 그런 가련한 모습을 보고 “난 당신을 멀리할 거야. 난 당신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남들이 자녀가 많고 재산이 풍부하고 영예를 얻은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부러워하며 환심을 사다가 나중에 어느 날 그 사람에게 시련이 임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얕잡아보고 비웃고 멀리하는데, 이런 사람은 인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당신이 어떤 형제자매가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악마에게 얻어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숨이 간당간당하는 것을 볼 때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돌보겠습니까 아니면 그를 꺼리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을 드러낼 때입니다. 진정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지경에 처하든, 얼마나 큰 고생을 하든, 모습이 얼마나 가련하든 그의 심리상태, 그의 생각,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 그가 구비한 진리 실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보세요, 교회에 진리를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이 가정 형편이 아주 변변치 않아 입고 쓰는 것이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이고 겉으로는 남들에게 얕보이지만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보겠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생김새가 예쁘고 단장할 줄 알고 약삭빠르고 은사가 있어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고 옹호하지만 진정 진리를 추구하는 그 사람들, 생김새가 보통인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제일 사랑스럽습니까? 은사가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까 아니면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까?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도리는 다 알지만 해낼 수 있습니까? 만약 한 국가의 고관이 하나님을 믿으러 왔는데 진리의 말씀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만약 한 일반 농민이 하나님을 믿으러 왔는데 생김새가 아주 보통이고 가정 형편도 정말 넉넉치 않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또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우리가 숭배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합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해야지 자신의 애호를 만족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야말로 진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바뀌면 하는 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만약 바뀌지 않고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애호대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일을 많이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입니까?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하나님은 욥과 같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마땅히 욥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을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삼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됩니다.) 해낼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참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몇이 됩니까?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진정한 형제자매로 대하고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며 이런 사람들과 잘 협력하고 본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봉사해야만 생명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알아들었겠죠? (알겠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잘 알았겠죠? 욥과 같은 사람, 욥을 본받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형제자매입니다. 은혜시대에 예수님이 하신 어느 구절 말씀이 제가 오늘 한 말을 실증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께 감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분은 그분의 양부와 생모에 대해 감정이 어떻습니까? 특별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죠?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마 그분의 모친과 그분의 양부에 대해서는 일반적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도를 대하는 것보다 잘 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가족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형제, 자매를 어떻게 대해야만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서 마땅히 진리를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아직도 그들의 속박을 받습니까, 받지 않습니까? 이 일은 아주 관건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진입에 관련됩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 의해 도달해야 합니다. 진리를 실행해야 실제가 있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실제가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육체의 가족을 대하는 방면에서 만약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만약 원칙이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얻으면 심령에 어떤 느낌이 있게 되는지 압니까? 마음속에 진실한 평안과 기쁨이 있고 심령에 위로가 되며 심령에 뿌듯함과 행복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끝내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마음속 말입니까, 아닙니까? “저는 끝내 육체적 감정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쁩니다. 진리를 실행하니 참 좋네요. 심령이 정말 행복하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습니다!” 이런 느낌이 맞습니까? (네.) 그럼 당신이 감정 안에서 살면서 늘 육체의 가족과 한데 뒤엉키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흑암한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외에 공허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합니까? 당신이 육체 속에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심령의 느낌을 찾는 것은 생명 진입의 관건입니다! 당신이 진리를 실행할 때 왜 심령에서 누림과 기쁨을 느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과 가까이하시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시고 당신이 빛과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왜 육체 패괴 안에서 살면 사람이 공허함을 느끼고 사는 것이 무미건조하다고 느끼고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느낍니까? 이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멀리 떠나셔서 당신이 흑암 속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흑암 속에 떨어지면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벌 속에서 살게 되는데,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역주: 들이다, 바치다, 쓰다, 지불하다의 뜻)하고 고생하면서 대가를 치르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성령이 날마다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이 한걸음씩 인도하시며 매사마다 버리지 않아서 그들은 사는 것이 아주 뿌듯하고 심령이 아주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어떤 환난이 닥치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곁에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옆 사람에게 어떤 재난이 닥치든 그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그가 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그를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재난과 시련 속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런 보호와 축복이 있다면 이것이 제일 큰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생의 전정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 행복을 무엇으로 바꿔 올 수 있습니까? 얼마만한 돈으로 사올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부자, 갑부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랴?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것이 모든 것보다 낫지! 누가 나를 재난에서 벗어나 오래 살게끔 구원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바칠 거야!” 무릇 부자들은 생명도 잠깐이라고 여기고 생명을 얻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만사는 다 헛되다고 여깁니다! 대통령이 된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대통령이 돼도 헛되다, 이렇게 사는 건 너무 힘들어! 별로 행복하지도 않네!’ 또 그가 “도대체 뭐가 행복입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는 모르지만 우리는 알았습니다.

무엇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까? 말해 보세요, 욥의 간증이 이 문제에 해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욥의 간증으로 무엇이 진정한 인생의 행복인지에 정확히 해답한다면 여러분은 길이 있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의의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욥은 시련을 받기 전에 부자였고 갑부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임을 잊지 마세요. 그의 육체가 공격을 받기 전에 그는 별로 큰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임한 후 그의 몸 이외의 것(역주: 주로 명예, 지위, 재산 등을 말함)이 다 박탈당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할 가치가 있도다”라고 말할 수 있었고 별로 큰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일에서 무엇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인지를 해석한다면 아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는 모든 재산을 얻은 후 행복하다고 여겼습니까? 그는 헛되다고 여겼습니다. 그의 집이 그렇게 부유해도 그 자신은 누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이런 재산이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늘 잔치를 베풀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였기에 그는 마음속으로 재산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치 이 재산이 그에게 고통을 얼마간 가져다준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풀어 그의 친척 친구를 다 불러와서 집에서 먹고 마시고 놀며 즐겼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것에 대해 매우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자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습니다. 무슨 까닭에 감정이 없겠습니까? 그의 자녀들은 모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걸고 말로만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늘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기만 했습니다. 그럼 욥이 이런 일을 경력한 후 그의 인생관에 어떤 변화가 있기 시작했습니까? 그는 몸 이외의 것은 다 헛되고 자녀를 포함해 아무런 의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럼 그때 그는 무엇을 행복이라 하는지 느꼈습니까? 자녀가 많은 것이 행복입니까? (아닙니다.) 재산이 많은 것이 행복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그가 느낀 진실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행복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인생관, 가치관이 바뀌었겠죠? (네.) 그래서 시련에 임한 후 그는 간증을 굳게 섰던 것입니다. 그럼 시련이 임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를 살아냈습니까? 이미 이런 진리 실제를 구비했습니다. 그에게 시련이 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가 있었고 그의 인생관, 가치관은 이미 변화가 생겼고 그가 일을 판단하는 관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 이미 하찮게 여기고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에 임했을 때 그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의 인생 행복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에게는 이미 이런 진리 실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공격, 시험이 임한 후 그는 아주 가볍고 쉽게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간증은 어쩌다가 우연히 좋은 운수를 만나 해낸 간증입니까? 요행스럽게 이긴 것입니까? 악담을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은 것입니까? 그는 이미 이런 진리 실제를 구비하고 있었고 이미 이 분량이 있었습니다. 그럼 보세요, 시련 속에서 욥이 그의 자녀 때문에 울었습니까? 그의 재산 때문에 울었습니까? 그가 재산이 박탈당한 것 때문에 무슨 일을 했었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은 그 당시에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 강도를 쫓아가 그 재물을 되찾아올 만한 세력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욥은 많은 사람과 친교를 맺었기에 그에게 이 세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 일의 실질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재물은 중요하지 않아. 그건 하나님의 축복이야.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려 하시면 거두어 가시는 거야.’ 관건은 그때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뭘까?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뭘까?’ 이것이 관건입니다! 재산을 거두어 가는 것도 괜찮고 자식이 죽어도 괜찮았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는데, 무엇 때문에 거두어 가셨을까요? 욥은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자식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날마다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였어! 그러니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 거야.’ 그러므로 욥은 이때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뭘까? 하나님께서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임하게 하실까?’ 그는 “아마 하나님께서 나를 테스트하시려나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중요시하였고 그 무슨 지나친 일이나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에게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한 후 이런 간증이 있을 수 있고 이런 표현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닙니까? 그럼 그의 이런 표현과 이런 말은 욥의 어떤 방면을 대표합니까? 그의 인생관, 가치관을 대표합니까, 대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대표합니까, 대표하지 않습니까?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임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너무나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평가의 말씀은 그가 시련을 겪은 후의 표현에서 완전히 실증을 얻었는데,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철저히 수치당하고 황급히 달아나 물러갔으며 더 이상 욥을 시험하지 않았고 더 이상 욥을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참으로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욥의 이 길을 걸었는지 봅시다. 욥의 이 경지에까지 걸었습니까? 욥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이 경지에까지 걸어왔는데, 그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다 걸은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길은 죽을 때에야 다 걸은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의 성공은 실증을 얻게 되었고 끝내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길을 다 걸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도 어디가 부족합니까? 아직 진짜로 사탄의 시험을 겪지 못했습니다! 이 간증을 아직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생애에 마침표를 찍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생애는 지금도 여전히 쉼표입니다. 다음 단계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합니까? 시험을 겪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죠? 지금 진리를 거의 장비했고 모두 알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지금 이긴 간증을 하는 길에서 아직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아직도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어떤 사람들은 재산에 대해 아직 꿰뚫어 보지 못하고 아직도 돈을 추구하려 하고 아직도 세상에 돌아가 돈을 많이 벌고 몇 년이라도 더 누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에휴! 난 아직 장가도 안 가고 자식도 없어! 나도 욥처럼 자식 열 명 낳고 가장 훌륭한 아들딸을 낳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욥은 인생의 공허함을 다 체험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까? 그에게 자식이 열 명 있어도 그는 “쓸데없어, 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돈만 좀 있으면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기만 하니, 좋은 놈들이 아니야, 너무나 사랑할 가치가 없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자기의 아내를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 여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집안일만 하면서 어머니의 책임을 다할 줄밖에 모릅니다. 그럼 그녀가 욥과 공통언어가 있겠습니까? 공통언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 그녀가 욥을 도와 고통을 덜어주려 하다가 결국 사탄 편에 서서 욥을 한바탕 구역질이 나게 했던 것입니다! 욥이 마지막에 그녀에게 한 마디 평가를 했는데, 어떤 평가입니까?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그럼 그녀가 욥의 아내로 되는 것도 끝장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에 “어리석은 여자”라는 이 호칭을 얻었는데, 진리가 없으면 이렇게 수치당하고 실패합니다. 그럼 당신의 아내(남편)는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남편(어리석은 부인)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아직도 마음속으로 그들을 사랑합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그와 이미 이혼했습니다. 저는 그와 갈라졌습니다.” 당신이 갈라졌다고 해서 당신이 마음속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떠나고는 계속 그리워하면서 오늘이라도 당장 돌아가서 그를 보지 못해 안달합니다. ‘아유! 내가 밥 해 주지 않으면 누가 해 주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육체를 돌보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육체를 돌보는 것인지 아니면 사탄을 돌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에 근거해 보면 당신은 욥에 비해 어떻습니까? 인품 격차가 큽니다! 욥이 가족을 대하는 데에 원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원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감정의 속박을 받으면 안 됩니다. 욥처럼 가족에 대해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돈에 대해 꿰뚫어 봐야 합니다. 헛된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내가 고생할지언정 그것에게 구하지 않고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을 거야!” 이것이 대단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돈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가 “보세요, 다른 사람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몰고 다니는데 우린 없잖아요.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우린 돈 벌어야 해요, 좋은 차를 몰고 좋은 집에서 살며 누려야 해요! 그래야 헛되이 안 살죠!” 이 인생관이 맞습니까? 이 인생관을 만약 바꾸지 않는다면 사람을 망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느낍니다. 당신이 누려 보지 못했으니 그것의 헛됨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죠? 저는 먹고 입는 것이 아주 단순합니다. 절약한 시간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본분을 하면서 진리를 추구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물질 생활 방면의 조건에 대해 별로 요구가 없습니다.

당신이 본분을 하면서 경력한 일이 많아지고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찾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줄 알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고 누구와도 정상적인 대인 관계가 있다면 이 심령 속의 위로는 아주 큽니다. 보세요, 사람과의 정상 관계를 세우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고 다른 사람에 대해 원칙이 있으면 이 마음이 매우 즐겁고 큰 해방을 받고 속박을 받지 않게 됩니다. 감정 속에서 살면 번거로움이 많습니다! 이것은 생명 진입의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 방면입니다.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대인 관계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형제자매인지, 어떤 사람들이 멀리해야 할 자들인지, 어떤 사람들을 지혜로 대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 몸에 우리의 본분이 있고 책임이 있는지, 이것을 잘 장악하면 사는 것이 홀가분하고 즐겁습니다. 그 밖에 본분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효과에 이르고 능히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이르면 나중에 마음속에 한 가지 위로가 있게 됩니다! ‘나는 진리를 실행할 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할 줄 알며, 나는 무엇을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라 하는지를 알고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지를 안다.’ 이 비결을 찾기만 하면 사람은 안에 누림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진리를 더 추구하여 하나님의 심판 형벌에 순복할 수 있고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받아들일 수 있고 남을 미워하지 않고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돌파이고 또 하나의 경지입니다. 이것을 생명 경력이 더한층 높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수리 대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생명 진입이 하나의 절정에 이른 것인데, 사람에게 정말로 순복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그가 우리를 질책하고 결점을 제기하고 수리 대처를 해도 순복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하는 실제 분량에 이른 것이고 이 표준에 이른 것입니다. 일반인은 다 여기에서 걸리는데, 다른 사람의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서 나타날까요? 그는 남을 증오합니다. “누가 나를 대처하고 누가 나를 질책하면 나는 그를 미워하고 그를 원수로 여긴다.” 이러면 번거롭게 되고 실패하게 되는데, 그의 인품은 불합격입니다. 다음은 당신이 남을 증오할 수 있다면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당신의 마음 자세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은 절대로 마음이 선한 사람이 아니고 절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리 대처 앞에서 만약 정확하게 대하지 않고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순복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진리 실제가 없음을 설명합니다. 이 일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이 일은 아주 관건입니다! 그가 어느 급의 인솔자가 되든지,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본분을 하든지 만약 다른 사람의 수리 대처를 정확하게 대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진실한 분량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절대적으로 진리에 순복하고 자신을 배반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의 분량은 자라난 것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고 구원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다른 사람의 수리 대처가 임한 후 순복할 수 있다면 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 2가지 일은 관련이 있습니다. 비록 그 표준에 완전히 이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절반 이상은 도달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순복하기 가장 어렵습니까? 한 가지 일을 놓고 이 문제를 설명하겠습니다. 몇 가지 정형(역주:상태 혹은 상황)은 모두 순복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는 수리 대처가 올 때 순복하기 가장 어렵습니다. 체면에 관련되고 사람의 존엄에 관련될 때 순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절실한 이익에 관련될 때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시련이 임할 때 재산이 박탈당하고 가족이 죽으면 순복하기 가장 어려운데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시련이 임하기 전에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는 이 분량을 마땅히 구비해야 합니다. 수리 대처에 순복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이 일반적 상황에서는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악에서 떠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수리 대처가 와도 증오가 조금도 없고 혈기가 조금도 없고 사람의 방법이 조금도 없다면 그가 악에서 떠났고 분량이 이미 절반 이상에 도달했음을 설명합니다. 한 인솔자 일꾼이 한 것이 합격인가의 여부는 무엇으로 가늠하면 가장 정확하겠습니까? 바로 그가 하나님 선민의 수리 대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인데, 이 일이 사람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 선민의 수리 대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고 그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가 만약 수리 대처를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다면 이 인솔자 일꾼은 거의 합격입니다. 그럼 지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수리 대처든지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것을 해낼 수 있습니까? 아마 꼭 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면의 형제님이 저를 대처하면 받아들이고 순복할 수 있지만 만약 일반 형제자매가 저를 수리 대처하면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정형이 아닙니까? 이런 정형은 무슨 문제를 설명합니까? 해부해 보세요, 수리 대처가 임하면 악한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욥의 분량과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는 것과 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욥은 몸 이외의 것을 이미 하찮게 여겼고 이미 헛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재산이 헛되고 자식이 헛되고 부부 간의 사랑이 헛되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고 순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인생의 의의이다.” 이것은 욥의 인생관, 가치관입니다. 욥,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의인입니까, 아닙니까? 율법시대에 누가 첫 번째 의인입니까? (욥입니다.) 욥뿐이고 두 번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지 일을 해낸 것은 이삭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면서 원망이 없었지만 그가 사탄의 시험과 공격을 겪었습니까? 그는 이 간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욥에 비해 차이가 납니다. 그럼 롯은 사탄의 시험과 공격을 겪고서 굳게 선 간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롯의 의는 어디에서 나타났겠습니까? 그의 두 딸로 두 천사를 바꾸어 그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의로운 행위이지만 욥의 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가 사탄의 공격과 시험을 겪은 간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시대에 욥, 한 사람만이 사탄의 시험을 겪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에 의해 사탄을 이기고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역사하시면서 진실로 얻으신 유일한 사람입니다. 오직 욥의 간증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사람에게서 온 위로를 얻으시게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위로를 얻으시게 하는 간증을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의의 있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마땅히 어떤 경지에 도달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겠습니까? 반드시 욥의 이 경지에 도달해야 하고 욥의 간증, 이 표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 표준은 첫째로 최소한 재산과 자녀를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몸 이외의 것은 헛되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고 세상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조류, 세상의 정치, 세상 사람의 관점, 세상 사람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지 말고,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고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하며 진정한 사람의 형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 목표입니다. 욥의 인생은 가장 의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확정하였고 정확히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욥의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며 욥의 목표가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이런 심지가 있는데 또 어떤 방면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렇게 한동안 실행한 후 어려움에 부딪치고 훼방, 논단, 비웃음에 부딪치면 당신의 심령은 아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 견지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연약하고 실패하고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길은 보았지만 걸어갈 수 있는지, 욥의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이것이 아주 관건입니다!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심지가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부딪친 어려움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큽니다.) 어느 정도 큽니까? 어느 정도로 컸는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어떤 일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오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는데 우리의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계속 걸어간다면 또 어떤 과중한 부담과 어려움이 임할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일어나 여러분을 반대하고 논단하고 여러분을 제지하고 구속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것도 역시 자연법칙입니다. 지금 대륙의 하나님 선민 중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고 가정이 파탄된 것은 무엇이 초래한 것입니까? 큰 붉은 용이 초래한 것입니다. 당신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그것이 당신을 붙잡고 당신이 본분을 해도 그것이 당신을 붙잡습니다. 이렇게 붙잡고 이방인들이 또 논단하고 훼방하고 먹칠하면 가정의 불신자들이 가만있지 않고 반항할 것이고 당신과 시비를 따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굳게 설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만약 간증을 굳게 설 수 있고 끝까지 견지할 수 있다면 이 아름다운 간증을 해낸 것입니다. 그럼 간증을 하는 과정은 어떤 과정입니까? 고통을 겪고 나중에 간증을 굳게 서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어떻게 간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간증을 하는 과정은 시종 고통을 겪는 과정인데, 고통 속에서 사탄을 이기는 간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간증한다는 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욥이 간증할 때를 얘기해 봅시다. 안에 시종 어떤 고통이 따랐습니까? 첫째, 재산이 박탈당하고 한평생 모아둔 돈, 한평생의 심혈이 한 번에 없어졌는데, 이 고통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큽니다.) 둘째, 평생 키운 자식 열 명이 비록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다 키워 20~30세가 되었는데 하루 사이에 없어졌습니다. 집이 무너져 깔려 죽었습니다. 고통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셋째, 이런 시험을 받은 후 또 사탄이 몸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고, 악창이 난 후 또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는데, 이 고통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이전에는 동방에서 명성이 자자한 욥 나리였습니다! 지금은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으니 사람들이 비웃고 얕잡아보았습니다. 나중에 또 한 가지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의 친구들이 와서 또 그를 논단했습니다. “너 무슨 큰 죄를 지었어? 빨리 하나님께 시인해!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시련이나 징벌이 임할 리 없어. 여기서 바른 척하지 마!” 친구들도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고통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이것이 몇 가지 고통입니까? (4가지입니다.) 하지만 욥을 넘어뜨렸습니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증을 굳게 섰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욥의 분량은 어떻습니까?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도 인정했습니다! 사탄도 수치당하고 도망쳤습니다. 말해 보세요, 사람이 누가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시대부터 말세에 이르기까지 몇 천년 동안 오직 욥뿐이고 두 번째 예는 베드로입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세에 만들어질 우리 이 무리 사람들은 다 욥처럼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습니다. 바로 이런 일입니다. 이 길을 분명히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서 사람이 매번 진리를 조금 얻고 매번 생명 진입이 조금 있고 매번의 생명 진입과 진리를 깨달아 이른 효과는 다시 말해서 모두 시련과 고생을 겪는 것으로 바꿔 온 효과입니다. 그럼 고생하지 않고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고생을 견디지 못해 마지막에는 진리를 얻을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다 사실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나와서 본분을 좀 하려고 해도 가정 환경이 안 됩니다. 남편이 가로막고 아내가 가로막고 자녀가 가로막습니다. 그는 고생을 견디지 못해 마지막에 본분을 포기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참 도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데 사회가 핍박하고 정부가 핍박하고 종교계가 논단하고 제지하고 모함하는 것을 보고 ‘고통이 이렇게 많구나! 온 천지에 깔렸어! 안 되겠어, 내가 물러나야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커질 거야!’라고 여기고 결국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국이나 타이완 같은 이런 곳은 민주 자유국가여서 큰 붉은 용의 통치가 없지만 한 가지는 같습니다. 즉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 살면서 사람에게 주는 사탄의 흑암 권세의 박해와 압력은 같고 사람에 대한 종교계의 압력과 박해는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진리를 추구하는 누림과 즐거움을 맛보았습니까? 당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복할 때 당신의 심령은 어떤 느낌입니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지 않습니까? 즐겁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육체의 자녀의 정을 누릴 때 심령은 공허하지 않습니까?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의의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여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의지할수록 당신 심령의 위로, 누림, 즐거움이 더욱 커지고 더욱 진실해집니다. 당신이 돈에 의지하고 세력에 의지하고 자녀에게 의지할수록 심령이 더욱 공허하고 더욱 흑암하고 더욱 속박받고 더욱 누림이 없고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날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하나님이 없는 심령은 고통스럽고 흑암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육체의 모든 것을 떠나도 살 수 있지만 오직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자식의 봉양에만 의지하면 되겠습니까? 자식이 당신을 천당에 보낼 수 있습니까? 자식이 당신을 구원받게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당신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당신을 공허함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이 당신을 죄악에서 벗어나고 사탄 통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자식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마음속에 하나님만 있고 하나님이 당신의 유일하심이라면 족합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존재, 영원한 생존, 영원한 가치,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행복입니다! 어떤 것도 없어도 되지만 오직 하나님만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진실한 인생의 가치관입니다. 꿰뚫어 보았습니까? 당신이 어느 정도에까지 경력하고 나면 이런 진정한 인생 가치관, 이런 최고의 생명 격언은 당신 안에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생명 실제가 됩니다.

오늘 제가 한 이런 말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고 확실히 그런 일이고 여기에 진정한 인생길이 있고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마지막 거처이고 이것이 제일 행복한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람은 아마 아직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리 알아듣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방 믿어서 도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소질이 안 좋고 터득 능력이 안 좋아서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방 믿었어도 소질이 좋고 이해력이 있고 터득 능력이 있어 제가 한 이런 말을 듣고 ‘맞아! 여기에 인생길이 있어, 이것이 진정한 인생의 길이야!’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적겠죠? 한 국가에 지식인은 아주 많지만 진리 방면에서 이해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세요, 지식인 가운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일부 사람들은 바로 평민이지만 이 사람들은 진리 방면에서 이해력이 아주 풍부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는 하나님의 선민입니까, 아닙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하나님 선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방면에서 이해력이 있는 사람, 진리의 터득 방면에서 매우 총명한 사람, 이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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