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8)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것과 하나님의 역사 취지와의 관계

비록 지금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역주: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함을 인정하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사람이 결코 욥에 대한 인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더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욥, 본인의 인성과 추구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욥이 이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좋아하고 사모하게 하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존재하리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이 의문은 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다수의 사람들을 모두 곤혹스럽게 하는 이상, 우리는 이 문제를 내놓고 명확히 해석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하나님이 하는 매사는 다 매우 필요하고 또한 다 비범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 몸에 하는 것은 다 그의 경영에 관련되고 인류가 구원받는 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욥이 하나님 안중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욥의 몸에 한 사역도 예외가 아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어떤 것을 대가로 하든지, 어떤 것을 목표로 하든지 그가 하는 일의 취지는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 안에 만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안에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실질을 깨닫고 알게 하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일의 한 방면의 취지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탄이 하나님 역사 중의 받침물이고 효력품이기 때문에 사람은 늘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과 공격에서 사탄의 사악함, 추함, 비열함을 보게 하고, 이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 사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고 어느 정도 분별이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와 방해와 공격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복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에 의해 완전히 사탄의 공격을 이겨 내고 사탄의 참소를 이겨 내는 데에 도달하면 사람은 철저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람이 구출될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실패를 선고함을 뜻하고 그 사람이 더는 사탄의 먹잇감이 아니고 더는 사탄이 삼키려는 대상이 아니라 사탄이 포기한 대상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고 순복이 있고 경외가 있으며 사탄과 철저히 결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사탄을 간담이 서늘케 하고 또한 사탄을 철저히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가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철저히 손을 떼게 하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 얻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마다 만약 구원을 받으려면, 만약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지려면 반드시 사탄에게서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여기에서 걸어나와 완전히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여러 번 하나님의 시련을 겪고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이성이 있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의 매임과 엿봄, 참소, 참해가 없으며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이고 완전히 해방되고 해탈된 사람이다. 욥이 바로 이런 자유인이었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려 하였는가 하는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욥이 비록 직접 사탄의 참해를 겪었지만 그는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얻었고, 영원히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사탄의 참해와 참소를 받지 않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우려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살 수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누구도 박탈할 수 없고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누구도 차지할 수 없다. 이 권리는 욥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의지력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에 의해 바꿔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하나의 진정한 피조물로서 땅에서 당연하게 조물주를 경배하는 아무런 방해도 없는 자격과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도 욥이 시험을 겪은 후의 최대의 성과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사람의 생활은 늘 사탄에게 방해받고 심지어 사탄에게 통제받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사탄에게 구금된 사람이고 자유가 없는 사람이며 사탄의 손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사람이며 사탄에게 끊임없이 뒤쫓기고 가차없이 맹타당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행복이라고는 말할 여지가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이라고는 말할 여지가 없으며 존엄이라고는 더욱 말할 여지도 없다. 사람이 혼자 나서서 사탄과 싸우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무기로 하여 사탄과 결사전을 벌이고 철저히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너를 보기만 하면 피하게 하고 너를 보기만 하면 간담이 서늘케 해야만 사탄이 철저히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포기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구출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만일 너에게 사탄과 철저히 결렬할 결심만 있고 사탄을 물리칠 유리한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면 너의 처지는 여전히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오래 나가다가 네가 사탄에게 시달려 기진맥진해도 여전히 간증을 해낼 수 없고 여전히 너에 대한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아주 막연하다. 최종에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음을 선포할 때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단단히 붙잡혀 벗어날 수 없다면 너는 영원히 기회와 희망이 없다. 그 뜻은 바로 이런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노략당했다는 것이다.』

이 한 단락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 이상 방면의 진리 즉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시는가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관련되는데, 욥의 간증에서 하나님은 이 방면의 진리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것과 하나님의 역사 취지와의 관계”, 이것은 이상 방면의 진리입니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깨닫지 못해 “사람은 바로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께서 또 사람을 사탄에게 다시 넘기려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시 사탄에게 넘기시는 것과 구원받는 것이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명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이 바로 이 문제를 해석했습니다. 지금 누군가 또 말합니다. “욥이 이처럼 순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좋아하고 사모하게 하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까?” 우리 이 문제를 교통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매사는 다 매우 필요하고 또한 다 비범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 몸에 하는 것은 다 그의 경영에 관련되고 인류가 구원받는 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욥이 하나님 안중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욥의 몸에 한 사역도 예외가 아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어떤 것을 대가로 하든지, 어떤 것을 목표로 하든지 그가 하는 일의 취지는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 안에 만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안에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실질을 깨닫고 알게 하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일의 한 방면의 취지이다.』 이 단락의 말씀을 읽은 다음 사람은 모두 마땅히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또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려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어떤 효과를 이루려 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이 일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아는 것은 도리로 아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사람을 사탄에게 넘기신 후 사람이 어떻게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는 것과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의 관계는 어떠한지, 이런 세부적인 일을 경력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부 경력(역주: 체험) 간증 동영상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잡혀 혹형까지 받았는데, 혹형을 받은 후 어떤 효과에 도달했습니까? 주로 2가지 방면의 효과가 있습니다. 한 방면으로는 큰 붉은 용의 사악한 실질에 대해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큰 붉은 용이 하나님 선민을 박해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가서 “큰 붉은 용이 왜 하나님 선민을 박해합니까? 큰 붉은 용 중에도 아마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나쁜 사람은 누구나 다 박해하고 누구나 다 업신여기죠!”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직접 큰 붉은 용의 박해를 겪은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큰 붉은 용, 이놈은 확실히 매우 사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선민을 박해하고 좋은 사람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가장 주요한 것은 특히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나중에는 큰 붉은 용이 그 무슨 권력의 통제를 받아 마지못해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성이 사악하고 그것의 실질이 사악하고 그것의 실질이 악마이고 사탄이기 때문에 사람을 잔혹하게 해하려 하고 사람을 삼키려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큰 붉은 용의 실질에 대해 이 정도까지 인식했습니다. 사람이 만약 직접 큰 붉은 용의 박해를 받지 않고 큰 붉은 용의 혹형을 받지 않는다면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직접 경력해 낸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의 박해를 겪고 그것의 혹형을 받아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의 박해를 겪게 하시는 것은 사탄의 사악한 실질을 인식하는 데에 효과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효과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이 효과는 대체할 만한 다른 방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직접 경력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악함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시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고 사탄을 알 수 있잖아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당신에게 드러내 주셔도 당신이 경력하지 않으면 완전히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경력이 없으면 완전히 믿을 수는 없고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 선민들이 혹형과 박해를 겪은 후 뭐라고 말합니까? “이전에는 제가 가장 숭배한 것이 바로 고위급 인사와 경찰들이었는데 그들을 정의의 상징이라고 여겼었습니다. 지금 박해를 겪은 후 저는 공산당의 관료와 경찰들의 실질을 간파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이 사악의 실질이고 사탄 악마인데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효과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생명 진입에서 기꺼운 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두 번째 방면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사탄의 박해를 겪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실질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인식이 생겼고 또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증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나온 후 감개무량해합니다! 나중에 뭐라고 말합니까? “저는 하나님을 헛믿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때의 감방 생활이 그로 하여금 이런 것을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사탄은 사악한 놈이고 정말로 사람을 삼키는 놈이다. 그것은 지독하고 잔인하다! 이번에 받은 고통은 너무나 가치 있다! 하나님을 헛믿지 않았다. 이번에 나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확실히 진실한 분이시고 그분이 확실히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보았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진리, 길, 생명이시다. 지금 나는 사탄의 사악한 실질을 더욱 분명히 보았다. 나는 큰 붉은 용, 이 옛 악마를 철저히 배반하여 단호히 하나님을 따라 끝까지 가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를 원한다.” 사람에게 이 심지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세지고 더욱 진실해지며 믿음도 크게 증가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것이 큰 붉은 용의 박해를 겪은 후 또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이른 효과입니까,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얼마간의 환난을 겪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 자라나고 사람이 사탄의 사악한 실질을 간파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진리를 깨닫고 사탄을 이기고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 너무나 유익한 점이 있고 너무나 필요합니다. 우리는 욥의 간증에서도 이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비록 믿음이 아주 컸지만 그는 “이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라고 말했고 나중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본 후에는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본 후 후회되고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대번에 그로 하여금 크게 변하게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 하나님 역사가 사람으로 하여금 시련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즉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었다가 다시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이른 효과입니다. 지금 아마 많은 하나님 선민들은 욥의 간증을 밝힌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읽고 나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었다가 다시 사탄의 시험, 공격, 박해를 얼마간 받게 하여 나중에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을 철저히 배반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데에 대해 너무나 유익한 점이 있다는 이런 일들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세 역사의 내막과 실질 그리고 최종에 도달할 효과임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 말세 역사를 경력하면서 하나님이 하신 것, 즉 우리에게 임한 매사에서 우리가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우리의 생명 진보에 대해 다 유익한 점이 있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모두 “나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매사마다 사람의 생명 자라남에 다 의의 있다.”라는 하나님 말씀이 진실한 것이고 너무나 진실하다고 시인합니다! 지금 무릇 하나님 역사를 몇 년간 경력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반드시 본분을 해야 하고 이렇게 해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즉 생명 진입의 길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본분을 하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고 시련을 좀 받지 않고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좀 받지 않고 형벌 심판을 좀 받지 않으면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고난, 연단, 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며 생명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구원받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이제 잘 알겠습니까? 지금 욥의 이 간증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만약 사탄의 시험, 미혹, 공격, 박해를 겪지 않는다면 사탄의 실질을 간파할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간파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사탄의 실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사탄을 증오하고 배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이 만약 진실로 사탄을 증오하고 배반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께 순복하는 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역시 이를 수 없습니다. 그 뜻인즉, 사람이 만약 사탄에 대해 간파할 수 없고 분별할 줄 모른다면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저는 사탄을 증오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따를 것이며, 하나님께 순복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립되지 않습니까? 애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도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 증오도 진실한 증오가 아닙니다. 그럼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요? 하나님과 사탄이 싸울 때 그가 도대체 진실로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까 아니면 진실로 사탄 편에 서겠습니까? 그가 사탄을 증오하지 않는데 진실로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진실로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저는 제삼자의 입장에 서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약 사탄의 실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사탄을 증오하거나 배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진실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없는데, 이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단순한 2가지 세력의 싸움이 아니라 그것은 2가지 실질의 대립이고 더욱이 2가지 생명 실질의 대립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긍정적인 사물의 대표이시며 사탄은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의 발표자이고 모든 사악한 사물의 대표입니다. 당신이 만약 양쪽에 다 속하지 않고 중간에 있다면 이 논법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시려면 하나의 경로밖에 없습니다. 즉 반드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또 말합니다. “우리 패괴된 인류는 원래부터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것은 우리를 또 사탄에게 넘겨준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진리를 얻어 구원에 이르기 전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것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의 시험, 박해, 괴롭힘, 공격을 겪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럼 현재 사탄이 당신을 시험했습니까? 당신을 공격했습니까? 당신을 박해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원래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그것은 본성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직 당신을 정식으로 사탄에게 넘겨주지 않았고 즉 당신이 그것의 큰 박해와 큰 시련과 공격을 겪지 않았으니 당신은 사탄의 본성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예컨대, 당신이 지금 붙잡히지도 않고 옥살이도 하지 않고 그것의 혹형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 말해 보세요, 사탄이 어떤 가장 사악하고 비열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로 사악한지, 사탄이 어느 정도로 비열한지, 어느 정도로 악독한지, 어느 정도로 잔혹하고 탐욕스러운지, 만약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사탄의 사악함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등의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다 분명히 볼 수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것을 진실로 증오할 수 없고 그것을 진실로 배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으로 하여금 당신을 박해하고 당신에게 혹형을 가하고 당신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당신이 감옥에서 받은 사탄의 괴롭힘과 박해는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받은 패괴와 확연히 다르고 별개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큰 붉은 용의 권세 아래에서 수십 년간 살아왔어도 큰 붉은 용이 어떻게 사악한지에 대해 간파하지 못했는데 큰 붉은 용의 체포, 혹형, 박해를 몇 개월, 1년, 2년을 겪고 나니 큰 붉은 용의 실질을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이런 고통을 좀 받으니 큰 붉은 용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큰 붉은 용이 하나님 믿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개별적인 사람들이 한 일이지 모든 큰 붉은 용이 다 이 일을 한다는 것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가 잡혀 들어가 며칠 동안 혹형을 받은 다음 풀려나와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큰 붉은 용은 다 너무나 사악합니다! 그들이 겉보기엔 사람이지만 본질은 악마의 환생입니다! 너무 악독해 아무 짓이나 다 합니다. 참으로 잔혹하고 탐욕스럽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며칠 옥살이하고 나와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데, 이 효과는 어떻게 도달한 것입니까? 바로 당신을 다시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의 혹형의 시달림을 겪고 사탄의 공격, 박해를 겪게 하여 사탄의 본질과 진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당신이 살던 곳에 돌아가 농사짓고 당신이 살던 곳에 돌아가 일하면서 식구를 벌어먹이면 당신은 사탄이 어떻게 사악한지를 볼 수 없지만 당신을 사탄의 감옥에 두면 당신은 무엇이든 다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또 말합니다. “한번 붙잡히니 효과가 괜찮네요. 대번에 사탄에 대해 분명히 알았어요. 여러 해 동안이나 이해하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했던 일을 이 며칠 동안 전부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나온 이긴 자는 마음 상태가 다르고 경지도 다르며 눈이 밝아져 사탄에 대해 간파하고 그런 후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에 대해서도 하나의 새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 몇 개월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하고 형제자매들과도 만나지 못해 손해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하나님 말씀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본분을 잘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나의 경력을 많이 간증해야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보세요, 이렇게 사탄의 괴롭힘과 시달림을 겪고 나니 사람의 심령에 이른 경지가 다릅니다. 그럼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여 도달하게 된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준 다음 사탄의 세력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이루게 해 주고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이루게 해 주고 사람이 애증이 분명해지는 것을 이루게 해 주고 사람이 큰 붉은 용을 증오하고 사탄을 증오하고 사탄을 배반해 진실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이루게 해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역사 방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을 쾌속으로 이루게 해 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을 믿어도 큰 붉은 용의 사탄 본성 실질에 대해 간파하지 못하다가 1년 옥살이를 하고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10년 믿어도 1년을 옥살이하면서 자라난 것보다 빠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쾌속으로 이루게 해 주는 방법이지요? (네.) 여러분은 이런 방법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까? (원합니다.) 좋습니다, 이번에 환경이 임했으니 한번 잘 경력해 보세요. 여러분은 과감하게 경력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만약 정말 이 일이 닥쳐서 그때 당신이 일어서지 못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한바탕 때리니 견뎌 내지 못해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다 털어놓고 다 자백하고 두 손 들어 투항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큰 붉은 용에게 붙잡힌 후 한바탕 혹형의 시달림을 받자 철저히 두 손 들어 투항하고 다 털어놓고 큰 붉은 용이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가 일부러 한 것입니까? 그가 큰 붉은 용 그곳에 가서 유다가 되려고 작정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천성적으로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진리를 위해 고생하려는 심지가 없고 목숨을 내놓을 수 없기에 시험이 임했을 때 넘어진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의 감옥에 들어가면 첫 번째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죽음입니다.) 네, 여러분은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목숨으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붉은 용에게 넘기시면 우리는 목숨으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숨으로 진리를 바꾸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이 희생 정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기에 이 길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 모레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길은 누구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순탄치 않고 온갖 위험과 어려움이 가득합니다. 진리를 얻으려면 목숨으로 바꿔야 하고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대가가 없으면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진리를 얻기 위해, 구원에 이르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려 합니까?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합니까? 어떤 때는 남편(아내)을 버려야 하고 부모, 자식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어떻게 버립니까? 제가 그를 집에 내버려 두고 문을 잠그고 가면 버린 것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큰 붉은 용이 당신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면 당신은 그래도 남편(아내), 자식이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붉은 용이 당신을 지명수배하면 당신이 집을 떠나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당신이 집을 떠나 나오면 가정을 버리게 된 것이 아닙니까? 환경이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버리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어떤 때는 당신이 본분의 필요로 반드시 가정을 떠나야 하는데 버리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이런 것은 바로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이니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지금 당신은 무엇을 버렸습니까? 어떤 사람은 혼인을 버리고 배우자를 찾지 않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고 그 좋은 직업도 거절하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을 버리고 집을 떠나 집을 포기하고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정, 친척, 친구에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집에 발 들여놓지 마, 반겨줄 사람 없어!” 이것이 바로 대가이고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입니다. 환경이 임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필요할 때, 붙잡혔을 때는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합니다! 목숨을 내놓기만 하면 이 목숨을 찾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사탄에게 넘겨져 반드시 받아야 할 고통이고 사람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배울 과제를 당신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시험이 임했을 때 “안 돼! 난 이 배울 과제를 안 배울 거야, 난 진리가 필요 없고 내 집이 필요하고 내 아내(남편), 자식, 부모가 필요해.”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도태된 것이 아닙니까? 이러면 도태된 것입니다. 당신은 이 길을 걸을 수 없고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고통받을 심지가 없고 당신이 이 대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준 후 사람의 생명이 자라나는 것이 왜 그렇게 빠를까요? 사탄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자라나는 것이 왜 그렇게 더딜까요?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고통받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받을 때는 사탄이 대면하여 당신을 박해하는데, 그리고 나면 당신은 사탄을 꿰뚫어 보게 되고 분명히 파악하게 됩니다. 그 외에 고통받을 때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당신을 구원하시며 직접적으로 당신을 향해 나타나시고 당신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시고 당신을 일깨워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대면”이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것은 너무나 의의 있고 고통받는 것은 너무나 좋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환경에서는 왜 이런 효과가 없고 이 두 “대면”이 없습니까? 첫째, 사탄의 직접적인 박해, 공격, 시험이 임하지 않으면 사탄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둘째, 사람이 시험을 받지 않을 때, 사탄의 괴롭힘을 겪지 않을 때 즉 큰 고통을 받지 않을 때는 성령 역사를 보기가 쉽지 않고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은밀한 가운데 계셔서 사람이 볼 수 없고 그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으로 지나가셔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왼편에 계셔도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우편에 계셔도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날에는 마치 흑암한 날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빛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은 더디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편안한 환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좋겠습니까? 고통스러운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누릴 수 있으며 성령의 특별한 깨우침과 빛비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빨리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가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 빨리 자라나겠습니까 아니면 가정의 편안한 생활에서 여유 시간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빨리 자라나겠습니까? 여가 시간에 하나님을 취미생활 정도로 믿는다면 자라나는 것이 너무 늦습니다. 그것은 그가 본분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분을 할 수 없으면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것이 아주 느린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하면서 만약 시험이 임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임하지 않고 더욱이 수리 대처도 임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생명의 자라남이 빠르겠습니까 아니면 늦겠습니까? 늦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리 대처가 임하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도태된 듯한 느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느낌은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립니다.) 어디가 틀립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늠하면 이런 사람은 쉽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떤 수리 대처가 임해도 쉽게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사람들이 여러 번 수리 대처가 임한 후에 조금의 진보도 없고 여전히 더 심하게 방해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도태시키고 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진보가 있고 계속해서 본분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본분만 어느 정도 잘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없다면 최종에는 그래도 위험합니다. 사람은 진리가 없으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본분을 1~2년 하게 되면 형제자매들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이 사람은 진리를 사랑해요!” 이 사람에게 매번 수리 대처가 임할 때마다 진보가 보이고 그의 생명이 진보할수록 그의 인성이 더욱 좋아집니다. 인성이 더욱 좋아지는 것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정상이고 정상적인 대인 관계가 있으며 다른 사람과 정상적으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양이 조금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생명이 자라났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본분을 하면 누구와도 마음이 맞지 않습니다. 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비정상이고 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는 사랑이 없고 미움뿐입니다. 늘 이 사람과 친해지고 저 사람과 멀어지고 늘 이 사람을 배척하고 저 사람을 끌어들이는데 그는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상적 인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상적 인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 인성이 없고, 정상적 인성이 없으면 그는 진리 실제가 없으며, 오랫동안 진리 실제가 없으면 뭇사람에게 혐오받고 사람에게 저버림받고 도태됩니다! 나중에 어느 날엔가 많은 사람들이 다 당신을 거들떠보지 않고 다 당신을 악하고 간사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당신을 인성이 없다고 말하면서 문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때면 당신은 철저히 도태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집에서 모두 다 패괴 유로(流露)가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역사를 경력할수록 더욱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을수록 더욱 정상적 인성이 있으며, 정상적 인성이 있을수록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고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최종에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냅니다.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는 사람은 생명 성품 변화가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겼는데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적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상일 수 있습니다.) 그 정상적은 어떻게 온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리에 순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진리에 순복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이 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볼 때 어떻게 가늠합니까? 단 한 가지 즉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형제자매가 한 말이 진리에 부합되면 받아들이고 누가 한 말이든 진리에 부합되면 다 받아들이고 순복한다면 이 사람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이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무릇 본분을 하는 중에 진리에 순복할 수 없는 자는 모두 오만 자대한 사람이고 모두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고 모두 순복이 없는 사람이며 조금도 진리 실제가 없습니다. 무릇 진리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형제자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누가 한 말이든 옳으면 순복합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도 어려움이 없고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진리에 순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곧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실질이 곧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진리에 순복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에 순복할 수 없으면 당신이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역시 거짓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 즉 그의 재산과 자식이 박탈되었을 때 하나님께 순복하는 그의 표현은 무엇으로 실증된 것입니까? 바로 그가 한 한 마디 말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욥이 깨달은 진리이고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얻은 진리입니다. 즉 욥이 하나님을 50년쯤 믿고 이 진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도 있고 취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할 가치가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는 이 진리를 얻었습니다. 그가 이 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런 시험이 임했을 때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그가 만약 이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그 시련이 임했을 때 그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간증을 굳게 선 것은 그때 우연히 한 마디 생각나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 그가 이미 이 진리를 얻은 것입니다. 즉 그는 이미 시험을 이길 이 분량을 갖추었고 그에게 이 진리 실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시련이 임했을 때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내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 선민에게 또 큰 시련이 임했습니다. 큰 붉은 용, 이 “짐승”이 전면적으로 출동하여 하나님 선민을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일부 조치를 취해 하나님 선민을 보호하고 일부 사람들에게 빨리 피하고 빨리 숨으라고 했습니다. 이외에 새신자는 그의 분량에 따라 환경에 대응하고 진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혜로 말하고 지혜로 일을 처리해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왜 이 일을 하겠습니까? 바로 사람의 분량이 다 같지 않고 분량이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도 새신자이고 믿은 지 1년밖에 안 되지만 저는 간증을 굳게 설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분량과 개인의 믿음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지금 보다시피 하나님이 역사하여 사람에게 시련이 임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까? 지금 바로 정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을 시작했지만 소수의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시련이 커지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모두 시련이 임할 때는 바로 정식으로 모든 하나님 자민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가서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이 전면적으로 시작되고, 다 하면 하나님의 사역도 끝나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신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 모두 알았겠지요? 하나님의 역사가 최종에 도달할 효과를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세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분명히 압니까? 제가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양육하고 공급하는 사역을 다 했고 생명 진입의 설교도 여기까지 하면 거의 됐고 해야 할 말도 거의 다 했습니다. 사람은 더는 해나갈 수 없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손이 사람에게 시련이 임하게 하여 시련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나 성령만 역사하여 사람을 시련 속에 이끌어 들어가 친히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얼마 안 되고 아주 유한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 몸에서 어떻게 인도하고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 역사의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취지”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즉 사람 몸에서 최종에 도달할 효과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최종에는 다 그 효과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은 겪은 시련이 좀 크고 어떤 사람은 겪은 시련이 좀 작으며 어떤 사람은 고통받은 것이 좀 크고 어떤 사람은 고통받은 것이 좀 작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취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에게 역사하여 이르는 최종의 효과는 변하지 않고 모두 같은 것입니다. 단지 어떤 구별만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의 소질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소질이 좋은 사람, 고통을 크게 받은 사람은 얻은 진리와 생명이 좀 많고 분량도 좀 큽니다. 분량이 작은 사람, 즉 고통을 적게 받은 사람, 소질이 더 낮은 사람은 얻은 것이 좀 적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은혜시대에 하신 그 비유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얻은 것은 다섯 달란트이고 어떤 사람이 얻은 것은 두 달란트이며 어떤 사람이 얻은 것은 한 달란트인데, 이런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면 고통받아야 하고 본분을 하면 붙잡히고 옥살이하고 혹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본분도 하지 않고 숨어있는데, 이런 사람은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기 쉽지 않고 버림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이 붙잡기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안 믿을래요. 큰 붉은 용이 다 붙잡고 나면 다시 믿을 게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러면 위험하고 기회를 놓치기 쉽습니다! 어떤 일은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일인 것 같아 “안 붙잡히고 고통도 안 받으면 이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라고 말하지만 생명을 얻는 것에 있어서 그것은 아마 나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은 사람이 보기에 나쁜 일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집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니 친구, 친척, 사회가 그를 미치광이, 바보라고 하면서 한바탕 훼방했어요!” 사람이 보기에 나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사람은 온전케 되었고 생명을 얻었고 진리를 얻은 가장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됩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 부분은 사람의 관념에 정말 부합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사람이 보기에 나쁜 일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물을 보는 관점도 마땅히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하나님 편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면 우리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의 견해와 사탄의 견해는 진리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 않고 진리를 위해 고통받으려는 힘이 작고 세상의 훼방, 세상 사람의 논단을 들으면 소극적이 되고 힘이 없어집니다. 그는 ‘그래!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게 아닐까? 온 세상, 집권당 큰 붉은 용까지 다 우리를 훼방하고 논단하는데 이 길을 이렇게 가는 게 맞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이런 사람은 결정적인 시각에, 가장 중요한 일에서 세상 사람의 편에 서고 세상의 관점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진리를 어기면서 세상의 길로 가면 이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어리석고 바보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여기에 있지 세상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따르면 육체는 편안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을 배반해 곤란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이 세상을 따르면서 넓은 길로 가면 육체는 편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은 화가 있다. 참 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으니 너는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충심이 없으니 너는 도태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런 일에서 사람이 만약 진리가 없으면 쉽게 사탄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간증을 굳게 설 수 없고 분별할 줄 모릅니다. 세상의 그 여론, 큰 붉은 용의 그 여론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마땅히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 선민을 다 사탄에게 넘겨주고 즉 다 시련 속에 두고 연단하여 누가 일어설 수 있는지를 보려 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사람을 드러내는 때입니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당신이 만약 세상을 따르고 세상 사람을 따르고 사탄을 따른다면 드러나 도태된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확고하게 하나님을 따르고 죽기까지 충성하며 하나님을 따른다면 진리를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때에 진리를 위해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런 심지가 없으면 마지막에 모두 일어서지 못하고 모두 도태될 것입니다.

다음 한 단락 말씀을 더 읽읍시다. 이 단락은 가장 관건입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탄이 하나님 역사 중의 받침물이고 효력품이기 때문에 사람은 늘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과 공격에서 사탄의 사악함, 추함, 비열함을 보게 하고, 이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 사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고 어느 정도 분별이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와 방해와 공격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복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에 의해 완전히 사탄의 공격을 이겨 내고 사탄의 참소를 이겨 내는 데에 도달하면 사람은 철저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람이 구출될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실패를 선고함을 뜻하고 그 사람이 더는 사탄의 먹잇감이 아니고 더는 사탄이 삼키려는 대상이 아니라 사탄이 포기한 대상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고 순복이 있고 경외가 있으며 사탄과 철저히 결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사탄을 간담이 서늘케 하고 또한 사탄을 철저히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가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철저히 손을 떼게 하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 얻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마다 만약 구원을 받으려면, 만약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지려면 반드시 사탄에게서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여기에서 걸어나와 완전히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의 시험, 공격, 박해를 겪게 하셔서 이른 효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복,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사탄을 능가하고 사탄을 이길 수 있게 하며 사탄으로 하여금 당신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당신을 박해할 수 없게 하고 더는 당신을 통제할 수 없게 하여 마지막에 철저히 수치당하고 실패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탄을 이긴 사람이고 최후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하여 사탄을 떠나게 하시는 것이 의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역은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도리상에서만 사람에게 말하여 깨닫게 하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탄과 싸우고 사탄과 대결하는 것이며 사탄과 마주해 총칼을 겨누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사탄을 이기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역은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당연히 이 싸움의 무기는 혈기에 속한 방식이 아니라 사탄이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지 우리가 진리에 의지해 살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면서 간증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러면 사탄을 수치당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의지해 산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고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순복에 의지하고 셋째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의지해 간증을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러면 사탄이 철저히 수치당합니다. 사람이 사탄과 싸우는 이런 과정을 경력하면서 만약 이기고 간증을 굳게 선다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경력하면서 실패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힌다면 바로 하나님께 드러나 도태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에서 하나님 선민이 분명히 알아야 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싸움에서 사람이 이길 수 있는가의 관건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자신의 무엇에 달렸을까요? 당신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진리에 순복할 수 있는지,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많은 간증은 다 하나님이 역사하여 도달한 효과이지 결코 사람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의지해 이겼다면 그는 진리에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만약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에 순복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혹형이 임하니 아예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넘어지고 투항했는데 이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은 똑같이 다 혹형을 두려워하고 사탄 앞에서 똑같이 다 분량이 너무 작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진리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서 성령께 순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서도 성령께 순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이런 차이가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간증을 굳게 서고 어떤 사람들은 시련 속에서 실패하고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당신이 그분께 순복하지 않고 그분에 대해 믿음이 없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면 간증을 굳게 설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일어서고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일어서며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일어섭니다. 그럼 당신이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진실한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께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넘어지는데 바로 이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이 단계 사역에서 사람은 욥의 믿음이 없으면 일어서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의 믿음은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 있어서 관건입니다!

보세요, 욥은 그렇게 큰 시련이 임하여 재산을 박탈당하고 자녀를 박탈당하고 육체가 사탄의 공격을 받아 온몸에 악창이 나도 나중에 여전히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고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굳게 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서 각 사람마다 욥의 그런 시련에 임하고 욥의 그런 상황에 직면할 것인데 그저 선후가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그 외에 크기가 좀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련이 임할 때 당신은 욥의 그런 믿음이 있으면 굳게 설 수 있고 욥의 그런 믿음이 없으면 굳게 서지 못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집이 허물어지고 땅이 몰수되고 자녀가 직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소송을 걸고 이치를 따집니다. 소송을 걸어 몇 년 되어도 찾아오지 못하고 나중에 생명을 망치고 지체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탄과 이치를 따져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그것과 따져서 찾아온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럴 경황이 있으면 진리를 얻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것과 따져서 통할까?” 세상을 보세요, 큰 붉은 용에게 집을 빼앗긴 자, 땅을 빼앗긴 자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고소하고 상소하면서 몇 년을 그렇게 해도 나중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산과 있던 돈마저 다 써버렸는데 결국 어떤 사람은 또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이치가 먹히겠습니까? 만약 재산이 몰수되어도 당신이 “우리 집을 몰수하고 토지를 몰수했으니 마침 잘 됐어! 난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추구하러 갈 거야.”라고 말하고 나서 나중에 진리를 얻게 된다면 진리가 집보다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땅보다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으면 살아갈 수 있고 바로 다음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게 되면 당신은 얼마나 많은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는지 압니까? 도시 전체를 다 당신에게 주어 마음대로 살게 하면 집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도시의 땅 전체를 다 당신이 관리하면 땅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사탄이 당신 집을 한 채, 땅을 한 뙈기 빼앗아가도 이후에 당신이 진리를 얻고 살아남으면 집 100채를 다 당신에게 주고 땅 100뙈기도 다 당신에게 주는데 금세에 백배를 얻고 내세에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계되는 일입니까, 아닙니까?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은 큰 붉은 용이 집을 몰수하고 땅을 몰수하고 일자리를 박탈하려 하자 “몰수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두고, 몰수하지 않더라도 난 갖지 않을거야! 하나님을 따르러 갈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일자리를 직접 버리고 사직하고 그 무슨 철밥통이라든가, 그 무슨 대학이라든가 거저 줘도 가지지 않고 관직을 줘도 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따르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습니까? 얻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대통령도 거지가 되고 백만장자도 병들어 죽을 것이며 당신이 부자라 해도 전염병에 걸리고 재난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당신이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있어도 쓸모없고 다 헛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어딜 가든지 먹을 것이 있고 잘 자리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안배해 주십니다. “진리가 있으면 천하를 두루 다니고 진리가 없으면 한 치 앞도 나아갈 수 없다”! 당신이 진리를 잘 추구하면 어디에 가든 당신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세요, 지금 어떤 형제자매들은 어디에 가서 진리를 교통하든 형제자매들이 아주 도움을 받습니다. “야! 교통을 잘하시네요. 당신이 교통하시고 나니 환해졌고 길이 생겼어요. 어떻게 경력해야 되는지도 알았어요. 다음에도 저희 집에 오세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저희 집에서 같이 생활해요.” 당신은 “그러면 안 돼요. 저를 필요로 하는 데가 많아요, 제가 가서 교회를 돌보기를 기다리고 제가 가서 양육하고 봉사하기를 기다리는 곳이 적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진리가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어디에 가든지 모두 먼저 데려가려 합니다. 이후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진리가 있는 사람의 교통과 공급이 필요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든지 다 진리가 있는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진리가 있으면 천하를 두루 다닐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가 있으면 무엇보다 귀중하고 기술이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당신에게 기술이 있어도 사람들은 “저는 지금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니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진리가 있으면 다수 사람들이 모두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 적지 않은 교회에서 진리가 있는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해도 없습니다. 교회에 몇십 명 사람들이 의에 주리고 매우 목말라 양육이 필요합니다! “누가 진리가 있으면 저희 교회에 와서 돌봐주세요, 저희 교회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교회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다수의 인솔자 일꾼들은 모두 글귀 도리만 말할 줄 알고 진리 실제가 별로 없습니다. 형제자매들에게 구체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그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보세요, 만약 정말로 진리 실제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다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몇 마디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문제는 창호지와 같아 뚫기만 하면 됩니다. 진리가 없으면 그는 분명히 지적하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그 진리가 투철하면 한마디로 사람을 지적하여 깨닫게 합니다. 진리가 없고 글귀 도리밖에 말할 줄 모르면 그 한 마디를 죽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귀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진리를 교통할 줄 알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진리를 소유하기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습니까? 제가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뒤에서 교통 제법 잘하고 있던데 말하기 시작하면 앞뒤로 딱딱 맞게 잘하더군요. 그럼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실제가 없습니다.) 실제가 없다구요? 실제가 없는 것은 어떤 표현이 있습니까?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마치 많은 한의사들이 한의학 이론을 말할라치면 큰소리치지만 실제로 진단하기 어려운 질병에 부닥치면 속수무책인 것과 같습니다. “어디 졸업했어요?” “한의대입니다.” “어느 명의한테서 배웠어요?” “누구누구입니다.” “치료할 줄 압니까? 몇 년을 했습니까?” “20~30년, 40~50년 됐습니다.” 물어보면 이론은 잘 말하는데 실제 병에 부닥치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텅 빈 이론만 있으면 무슨 소용있습니까? 소용없습니다. 실제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것은 이론을 얼마 아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척 보기만 하면 알고 사람의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남에 있어서 일부 구체적 문제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예컨대 거짓 인솔자를 만나도 그가 분별할 수 없으면 이것은 사탄을 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진정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습니다”라는 답은 맞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관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그의 미혹을 받을 수 있고 여전히 그의 통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거짓 인솔자의 통제와 미혹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순복에 어떤 영향을 초래할까요? 당신이 거짓 인솔자의 미혹과 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또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복합니다”라는 당신의 말은 빈말이 아닙니까? 당신이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계속 따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 (사람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위협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데의 장애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 당신이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진실로 하나님께로 향한 사람이 아니고 더욱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사탄에게 한동안 유괴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유괴되어 풀려나지 못한다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도태됩니다. 즉 당신이 사탄의 유괴로 인해 망쳐진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에게 먹힌 것에 속합니다. 이 문제의 결과에 근거해 한 마디 더 합시다. 무릇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통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 그를 미혹할 수 있고 그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바로 도태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지금도 거짓 인솔자, 거짓 일꾼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르고 적그리스도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르고 악령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르고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위험합니다! 분명히 도태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이 사탄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가 세뇌당했는데, 이렇게 세뇌되자 물러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큰 붉은 용을 따라갔습니다. 이런 사람은 굳게 서지 못했고 진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혹형을 가하자 실족했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세상의 사악한 세력과 큰 붉은 용의 여론에 억눌려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는데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큰 시련의 드러냄에서 굳게 선 사람은 소수 혹은 극소수이지만 온전케 된 이 사람들은 이후에 모두 왕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보통 자민이 아닙니다. 간증을 굳게 선 사람은 모두 “시님 사람”입니다. “시님 사람”은 모두 왕이 될 사람이고 하나님과 합심하는, 하나님을 아는,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실족한 사람은 도태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지금 만약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인성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일을 꿰뚫어 볼 수 없다면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탄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너무 쉽게 사람의 미혹을 받고 사람의 속박을 받습니다. 지금 교회에 사람을 미혹하고 겉으로 기만하고 인성이 아주 간사하고 여태껏 진리를 교통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르며 곳곳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흔히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인기가 있고 잘나가는 것 같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또 숭배하며 특별히 탄복하고 찬성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만약 한 사람이 말을 함에 있어서 아주 교활하고 아주 간사하고 누구와 함께 지내도 마음을 나누지 않고 주위 사람들도 그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잘나간다면 무엇을 증명합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사역하라고 보냈는데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면 다수 사람들이 분별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버림받고 여러 사람에게 간파되고 여러 사람에게 폭로된다면 다수의 사람들이 진리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정도에 도달했습니까? 사람들 속에서 인기가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수 사람들이 꿰뚫어 볼 수 없겠죠?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진리가 없습니다. 진리가 없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받는 표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구원받는 표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할까요? 왜냐하면 그가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직도 사탄 권세에 통제받기 쉽고 그가 아직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한 사람이 아니며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한 사람, 즉 한 악인,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탄에게 속하는 한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권세를 잡고 사람의 숭배와 옹호를 받을 수 있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진리가 없는 사람에 속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만이 사탄에게 속하는 사람을 옹호합니다. 이런 하나의 사람으로, 이런 한 가지 사례로 뭇사람의 분량을 다 드러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고는 ‘어!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쓸 수 있지? 이 사람은 인성이 별로이고 아주 간사해!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리하여 소극적이고 연약하고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또 힘이 없어집니다.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이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성이 없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한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여전히 잘나가고 하나님 집에서 쓰임받는 것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잃고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며 진리를 추구하기 싫어하며 심지어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이런 사람은 너무나 유치하고 너무나도 진리가 없습니다. 이 한 사람으로 그를 드러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을 쓴다 해서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 집에서 어떤 방식으로 안배하는지 압니까? 당신이 알기나 합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까? 당신이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뭘 함부로 추측합니까? 당신은 꿰뚫어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알고 있고 상면에서는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 상면에서 해석을 해 줘야 알 수 있는 겁니까? 상면에서 해석해 줄 필요가 있습니까? 이런 일은 다 안배가 있습니다. 당신이 뭘 압니까! 악인은 최종에 다 도태될 것이고 진리가 없으면 다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고 이것은 필연적인 추세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데 이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최종에 반드시 무너지고 반드시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당신이 이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믿음이 있습니까? 무릇 조그마한 일, 얼마간의 개별적인 현상의 속박을 받을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소극적이고 연약한 사람이라면 시야가 좁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에 속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마저도 없으며 하나님의 전능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이 왜 이렇게 창궐합니까? 왜 이렇게 흉악합니까? 야! 하나님이 큰 붉은 용을 멸하실 수 있을까요? 큰 붉은 용을 물리치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더 시야가 좁은 것입니다. 왜 그를 시야가 좁다고 할까요? 그는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이 일찍 그에게 안배해 놓으셨고 몇 천 년, 몇 만 년의 일도 안배해 놓으시고 다 안배하셨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왕조마다 몇 년이 되고 어느 왕조가 몇 세대이고 몇 대 황제가 있는지 다 응하였고 일찍 예정해 놓은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이 어느 날에 무너지고 천년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계시록≫에 모두 예언해 놓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있어서는 이미 이루신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영화를 방영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또 10년이 지나면 세상이 크게 변하고 달라지고 다 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시면 있고 세워지라 명하시면 세워지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면 그 사실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때가 되면 다 하나님 말씀대로 응하게 되는데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의 믿음이 너무 작을 뿐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보지 못하면 당신은 믿음이 없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누가 이 빛을 차단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차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한 마디 말씀을 사탄이 파괴하여 응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붉은 용은 하나님께 있어서 멸해 버릴 것으로 이미 정해졌습니다. “큰 붉은 용은 첫 번째로 훼멸된다”, 이 말씀도 다 성취되었고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당신은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한 마디 빈말이 아니고 이론적인 일만이 아닙니다. 이러면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의 전능을 보고 만유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만 믿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모두 다 응한 일이고 성취된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말한 이상 일은 이미 이렇게 이루어졌고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따름에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다 훼멸되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이 일도 역시 하나님께서 일찍이 하신 말씀이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시대에 온전케 된 자는 다 거룩한 자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이 일도 다 성취되었고 모든 더러운 귀신이 다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불신파, 두려워하는 자는 다 도태되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이고 하나님 말씀이 이미 성취한 일입니다.”라고 말할 이런 믿음이 있으면 되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속박도 받지 않게 됩니다. 지금 어떤 비정상적인 일이 임하거나 어떤 일시적인 일이 임하든 당신은 이와 같은 일은 분명히 옳지 못하고 이런 사람은 분명히 굳게 서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이 권세를 잡으시고 하나님 말씀이 권세를 잡으며 성령이 모든 것을 주재하십니다. 당신은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보세요, 지금 하나님 집의 사역이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하루하루 심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효과가 점점 뚜렷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 선민들이 진리에 대해 점점 투철해지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 거짓 인솔자가 하루하루 도태되고 있지 않습니까? 큰 붉은 용이 하루하루 내리막길을 걷고 하루하루 붕괴를 향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대세의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집에서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한 이 사람들은 점점 뚜렷해지고 충성된 효력자는 살아남게 됩니다. 무릇 충성된 효력자가 아니라면 그들은 효력을 다 하고 나면 각종 방식으로 무너지고 넘어집니다. 어떤 자는 효력을 하다가 악을 저질러 도태되었습니다. 어떤 자는 효력할수록 더 갈팡질팡하고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효력할수록 더 방해하고 엇나가 마지막에 도태되었는데, 효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태된 후에도 효력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명되고도 효력하는 것을 부러워합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위해 효력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기회가 없습니다. “효력할 수 있는 것도 복입니다!” 이 말씀은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언젠가는 하나님 선민이 모두 ‘하나님을 위해 효력하는 것은 다 복이고 다 하나님의 파격적인 높여주심이야!’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볼 때면 하나님의 큰일이 철저히 이루어집니다! 지금이 이 추세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효력을 하지 않는 자는 아마 모두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 당신을 도태시킬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이렇게 효력하면 안 돼요. 당신을 안 쓰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저를 며칠만 더 남겨두면 안 될까요? 앞으로 꼭 잘 효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당신이 그를 제명해도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제명된 자는 여전히 거기서 본분할 것을 생각합니다! “저를 효력하게 하면 안 될까요? 지금 본분을 못하니 제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저를 효력하게만 해도 저는 만족입니다!” 어떤 사람은 효력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에게 효력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제 무엇이 구원받는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알았겠죠? 즉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 앞에서 간증을 하게 하여 간증을 잘한 사람은 살아남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증이 없는 사람은 바로 실패한 것입니다. 간증이 있는 사람은 사탄을 이기고 간증이 없는 자는 사탄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 사실로 한 방면은 사람을 온전케 하고 한 방면은 사람을 드러내는데, 이 사역은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또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십니까? 어떻게 인류를 온전케 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진실하고 너무나 현실적이고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사탄과의 싸움을 겪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진리를 얻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고 죽음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간증을 굳게 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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