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7)

『욥의 근본 :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다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의 몸에 악창이 난 다음 어떻게 표현했는지의 한 단락 묘사이다. 그 시각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아픔을 참고 있었는데, 누구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도와 몸의 아픔을 경감시켜 주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의 상처 표면을 긁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욥이 고통받는 기간의 한 장면에 불과하여 욥, 본인의 인성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욥이 이 기간에 결코 그 어떤 말로도 그때의 심정과 그의 관점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의 거동과 표현은 여전히 그의 인성의 진실한 유로이다. 앞의 1장의 기술에서 우리는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2장의 이 장면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이 사람이 뜻밖에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게 했다. 이 앞뒤의 두 묘사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이 대비는 우리로 하여금 욥의 근본적인 모습을 보게 한다. “욥은 비록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여태껏 그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 그의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인가의 여부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내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가져다준 후광을 누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여호와 하나님 안중에서 그의 가치와 삶의 의의가 무엇인가만 마음에 두었다.” 욥의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욥, 이 사람의 실질이다. 즉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으며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았다.』

먼저 “욥의 근본 :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 않음”을 교통하겠습니다. 이 “근본”이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일까요? “본래의 진면목”이라고 이렇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적합합니까? 글자 표면에서는 바로 이 뜻입니다. 하지만 “욥의 근본”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본래의 진면목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음”을 말씀했는데 세 마디가 바로 세 가지 뜻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진실함, 순박함, 솔직함이겠습니까? 우리가 다음 사실을 봅시다. (욥 2:7-8)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는데 어떻게 난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사탄이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한 마디 말만 할 줄 알면 끝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이 말은 어디에 이어집니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명령하신 후 사탄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의 허가증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물러갔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고 나서 한 첫 번째 일이 무엇입니까? “욥을 쳐서”라는 것입니다. 이 네 글자에서 보면 쳤다는 것은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고 즉 욥의 몸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친 것입니까? 여기에서 말하지 않았지만 친 결과는 여기에서 말했습니다.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여러분은 무엇을 악창이라 하는지 아십니까? 이 악창은 바로 살가죽이 썩어 늘 일종 고름이 나오는 것인데, 매우 가렵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픕니다. 욥의 그 악창은 아주 이상하게 온몸에 다 나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났는데 전부 악창이고 어디나 다 노란 고름이 나고 어디나 다 가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악창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이것이 관건입니다. 이 악창은 사탄에게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탄이 이렇게 치니 욥은 온몸에 악창이 났을 뿐만 아니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노란 고름이 나오고 몹시 가렵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그에게 난 그 악창은 인류 가운데서 흔히 보게 되는 피부병인데, 어떻게 사탄에게서 온 것일 수 있습니까?” 이 의문점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꼭 있습니다. 불신파는 바로 이것이 자연현상이지 사탄과 관계없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탄과 관계있다고 했습니다. 왜 사탄과 관계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일을 본 후 “그럼 전체 패괴된 인류에게 나는 악창은 다 사탄이 쳐서 생긴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당신과 이런 일을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일부 아주 이상한 병은 사탄의 시험, 사탄의 공격에서 생겨난 것이고 일부 이상한 병은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징벌에서 생겨난 것이며 일부 이상한 병은 또한 본인이 음식 위생에 주의하지 않아 초래된 것입니다. 그 밖에, 일부 이상한 병은 사람의 몸에서 전염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몇 가지 상황은 다 있으니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질병에 대해 또 한 가지 새롭고 순수한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일부 질병은 하나님의 징벌, 징계와 관계되고 일부 질병은 사탄의 시험, 공격과 관계됩니다. 그럼 모든 질병이 다 사탄의 탓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질병을 다 자연적인 객관적 요소의 탓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또 일부 이상한 병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인식해야 하겠습니까? 객관적 요소에서만 찾아보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이 비위생적이어서 그런지, 건강에 나쁜 음식을 먹어서인지, 자연적 법칙에서 찾아보면 되겠습니까? 일부 이상한 병에 걸리면 영계로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신 걸까? 사탄이 나를 치고 나를 공격한 것일까?’ 그래도 이 방면으로부터 봐야 하고 질병에 대해 순수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욥의 몸에서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진실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질병은 영계와 관계된 것이지 인위적이나 자연적 요소로 초래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질병은 인위적인 자연적 요소이고 일부 질병은 하나님의 징계로부터 온 것이고 영계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아래 더 봅시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 일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만약 온몸에 악창이 난다면 사람에게 여러 가지 방법과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텐데, 아십니까? 첫 번째 표현, 어떤 사람은 악창이 나면 즉시 서둘러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가는데, 이런 행동이 가장 많죠? 또 한 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만약 아주 보기 좋은 사람, 사람들 가운데서 명망이 있는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린다면 그는 집에 숨어서 다른 사람을 시켜 명의를 집으로 모셔오게 하여 치료를 받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악창이 난 것을 남들이 보면 명예를 잃고 체면을 잃을까봐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나 저라면 아마 이런 표현일 것이고 절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창피를 당할까봐서입니다. 이것은 허영 체면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얼굴에 악창이 나고 반점이 생기고 여드름이 나면 남들이 얼굴에 뭐가 난 것을 보고 싫어할까봐 며칠간 밖에 나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려 얼굴이 초췌해지니 친구가 보러 오면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나 지금 병이 나서 아파, 화장도 못해 얼굴이 보기 싫으니까 만나지 말자.” 이런 사람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욥은 명망이 아주 높았고 동방에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대인물, 대부호이면서도 그는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것을 보면 “이 사람, 거지네요, 자녀도 없고 돌보는 사람도 없네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거지라야 이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거지가 아니라 동방에서 가장 명망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할까요? 그는 자기의 명성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는데, 재가 옷에 묻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떨어뜨릴 수도 없어 매우 더럽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옷에 재가 가득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어떻게 조소할 것인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악창이 난 몸의 고름은 긁어내지 않으면 자꾸 가렵습니다. 기와 조각으로 고름을 다 긁어낸 다음 재가루를 악창 위에 바르면 말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긁고 말리고 하면 잠시 가렵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를 보든지 그때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보다시피 욥의 본성에 허영에 찬 그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그는 이런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나는 아랑곳하지 않아. 내 마음엔 그런 것이 없어.’ 이것은 무엇을 충분히 설명할까요? 욥에게는 허영심이 없습니다. 그는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이 없음을 어떤 단어로 묘사하면 좋습니까? 바로 진실함, 순박함, 솔직함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아래에 더 봅시다. “그 시각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아픔을 참고 있었는데, 누구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도와 몸의 아픔을 경감시켜 주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의 상처 표면을 긁었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욥이 고통받는 기간의 한 장면에 불과하여 욥, 본인의 인성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욥이 이 기간에 결코 그 어떤 말로도 그때의 심정과 그의 관점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의 거동과 표현은 여전히 그의 인성의 진실한 유로이다.” 이 단락의 말씀은 그의 인성 품격을 드러냈습니다. 그렇죠? “앞의 1장의 기술에서 우리는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2장의 이 장면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이 사람이 뜻밖에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게 했다. 이 앞뒤의 두 묘사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이 대비는 우리로 하여금 욥의 근본적인 모습을 보게 한다. ‘욥은 비록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여태껏 그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 그의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인가의 여부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내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가져다준 후광을 누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여호와 하나님 안중에서 그의 가치와 삶의 의의가 무엇인가만 마음에 두었다.’” 이것이 매우 대단합니다. 이것은 그의 간단한 인성 품격의 나타냄이 아니라 그의 인생 가치관, 그의 인생 목표, 그의 생존 원칙에 관련되는데, 이것이 바로 욥의 가치입니다. 욥의 근본 모습이 바로 욥, 이 사람의 실질입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고, 솔직했습니다.

이 단락의 말씀을 우리가 다 보았고 다 교통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배울 과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자신의 안이 어떤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인지를 보고, 욥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인성에 무엇이 부족한지, 우리의 패괴가 주로 어디에 있는지, 만약 우리에게 정말 패괴가 있다면 이 패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우리를 어떤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을지, 이런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욥을 아는 것이 한 가지 일이고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또 한 가지 일입니다. 이 2가지 일은 다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욥의 표현을 통해, 우리가 욥의 몸에서 보게 된 그가 구비한 인성의 진실한 품격, 진실한 모습을 통해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이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어 어떤 사탄 독소가 있는지를 봅시다. 배워야 할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사람 안의 모든 패괴를 여기에서 더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요? 드러내지 않아도 알겠죠. 예컨대, 오만 자대를 볼 때,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데도 우쭐거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면서도 우쭐거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동방 사람 중에서 어떤 신분이겠습니까? 동아병부(東亞病夫)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도 오만 자대한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단지 이지가 없는 문제입니까? 자신이 분명히 매우 보잘것없고 또 패괴되고 불결하여 언급할 가치도 없는 놈이면서도 여전히 아주 오만 자대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 병이 악창보다 치료하기 쉽습니까? 악창보다 무섭지 않습니까? 욥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난 것은 사탄이 친 것 때문이고 우리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오만 자대로 가득찬 것은 사탄의 패괴 때문입니다. 사탄이 심히 패괴시켰는데, 이 “심히”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일까요? 바로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다 패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동아병부(東亞病夫)인데도 오만 자대하고 누구에게도 불복합니다. 이것은 욥이 온몸에 악창이 난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욥은 사탄이 쳐서 온몸에 악창이 났습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심히 패괴되어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다 지긋지긋하게 더러워도 창피당하고 체면이 깎일까봐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약 욥과 비한다면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겠습니까? 욥은 진정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릴 수 없으니 아예 산 귀신이고 인성도 없습니다. 욥과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하늘과 땅사이의 간격과 같거나 하늘 땅 차이라고 말하면 좀 지나친 것 같고 알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욥은 진정한 사람이지만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고 산 귀신이라고 부르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정말로 심히 패괴된 마귀”인데 이렇게 인식하면 비슷하고 거의 적절합니다. 다음 단락을 더 봅시다.

『욥은 애증이 분명했다

욥과 아내의 대화에서 욥의 다른 한 방면의 인성을 또 모두에게 보여 준다. (욥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아내는 욥이 그토록 고통받는 것을 보고 욥에게 권고하여 욥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호의”는 결코 욥의 찬사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복(역주: 순종)을 부인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욥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그가 어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에 대해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전혀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했다. 욥이 아내를 대한 태도에는 노기와 증오를 띠고 있었고 질책과 훈계도 띠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애증이 분명한 그의 인성의 자연적 유로이자 역시 그의 정직한 인성의 진실한 표현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정의감은 그로 하여금 사악한 기풍과 조류를 증오하게 했고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 괴상한 논조나 터무니없는 이론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버리게 했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뭇사람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꿋꿋이 지키게 했다.』

이 단락의 말씀의 제목은 “욥의 분명한 애증”입니다.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있으면 애증이 반드시 분명해야 합니다. 패괴된 인류는 애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욥의 애증은 아주 분명했는데, 이 “분명”이 무엇을 대표할까요? 무엇을 설명할까요? 이 일은 찾아볼 가치가 있고 알아볼 가치가 있습니다. “욥과 아내의 대화에서 욥의 다른 한 방면의 인성을 또 모두에게 보여 준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한 마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오고 누가 이 말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욥에게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한 후 욥의 아내가 태도를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의 아내가 태도를 표명하는 이런 말을 했는데, 이것은 섭섭한 일, 뜻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이 그의 아내 입에서 나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아내가 욥과 적어도 50년쯤은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랜 부부여서 환난을 같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과정이든, 행복의 누림이든 다 겪어오고 이 50여 년간 고난을 함께 하고 함께 걸어왔기에 욥의 지심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욥의 일생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생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생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설마 그의 아내에 대해 영향이 조금도 없었겠습니까? 그의 아내가 욥의 분량만큼 안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절반만큼은 돼야 하고 또한 진실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욥의 아내가 이런 말을 했으니 욥의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욥은 환난이 닥친 후에 가산이 없어지고 자녀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 온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필요한 것은 이해와 위로이고, 한 지심인이 두어 마디 해 주는 것이고, 한 사람이 그와 함께 설 수 있고 그와 같은 심지가 있어 그를 도와 일어설 수 있게 하고 그로 하여금 간증을 잘하여 사탄을 욕되게 하고 누군가 그에게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욥, 자네가 한 게 맞아! 우린 아무것도 필요 없고 하나님만 있으면 충분해.” 그러나 그 중대한 고비에 그의 아내가 그런 말을 했으니 욥의 상처에 또 소금을 한 줌 뿌린 것이 아닙니까? 부부란 바로 인생의 동반자가 아닙니까! 늙어서는 동반자가 되고 공통의 언어가 있고 한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인생에 다 우여곡절이 있고 다 여의찮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부부 간의 도움과 부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때 욥의 아내가 이런 말을 했으니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녀가 울어도 좋고 또는 연약해져도 정상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고 또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느뇨”라고 물었는데, 이것이 사탄의 심부름꾼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기반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게 어디 부부입니까? 이게 어디 동반자입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아내가 이런 말을 한 후 욥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누가 그때의 욥의 심정과 마음속에서 하려는 말과 그의 고통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런 배우자를 만나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혼하자니 한평생을 지내왔고 그 외 많은 자식을 낳았으니 만약 이혼하면 남에게 해를 끼칠까 양심적으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혼하지 않자니 결정적인 시각에 그 여자가 당신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상처에 소금을 뿌려 당신을 속상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말해 보세요, 이런 아내를 만나면 고통입니까, 아닙니까? 하지만 그때 욥의 아내가 이 말을 한 속마음과 목적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래에 말씀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그토록 고통받는 것을 보고 욥에게 권고하여 욥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 욥의 그 고통이 줄어들고 정말 벗어날 길을 찾았으니 고통에서 벗어나 이후에 다시 이런 일의 속박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욥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욥에게 고통을 더해 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아내가 한 이 말에 근거하면 그녀가 욥에 대해 도대체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요? 그녀가 욥의 지심인일까요? 그녀는 자기 남편에 대해 정말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한평생 살고도 욥의 심지와 욥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를 몰랐고 욥을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한 마디 말이 나쁘게 되고 문제로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욥으로 하여금 ‘당신은 됨됨이가 안 좋아. 당신이 나보고 하나님을 욕하라 하고 나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데, 당신은 인품이 매우 나빠. 당신이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어? 당신이 나랑 한평생 살고도 아직 나를 모르고 내 뒷다리를 잡아당겨 나보고 하나님을 욕하라고 하니 너무나 어리석어.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고 현모양처도 아니야.’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욥의 아내의 말은 그녀의 불신파의 실질을 드러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전혀 하나님의 지위가 없었고 그녀는 절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시련이 임하여 욥을 온전케 하고 그의 아내를 드러냈습니다. 그 시련을 보세요, 환난을 같이 겪으면서 50여 년간 함께 살아온 백발이 성성한 부부를 드러냈습니다. 드러난 후 욥이 그녀를 반박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그리고 또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한 마디 말입니다. 사실상 아마 일부 말을 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뜻을 가장 간략한 말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결정적인 시각에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의 여부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욥이 이 말을 한 것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이제 보니 욥은 이 시련이 임하기 전에 이 일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꼭 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일부 사람은 화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밖에 각 사람이 도대체 복을 받는지 아니면 화를 받는지는 말하기 어렵고 아마 복을 받을 수도 있고 화를 받을 수도 있는데, 이 일은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보세요, 욥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50년간 경력(역주: 체험)한 것도 비교적 깊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사람이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어떤 인품인지를 전부 드러냈는데, 이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욥이 이 시련에서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순복은 확고하여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도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복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 재산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욥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복은 절대적이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의 구속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에 좌우지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간증이 아주 뚜렷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뚜렷합니다. 또 우리의 간증과 우리가 하는 본분을 보세요, 어떤 인ㆍ사ㆍ물의 구속과 좌지우지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많은 사람들이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마저 분별할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본분을 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복이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의 좌지우지와 미혹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너무 가능합니다. 무릇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나 어떤 인ㆍ사ㆍ물의 구속과 좌지우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입니까? 틀림없이 아닙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역시 틀림없이 아닙니다. 즉 사람이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의 미혹, 좌지우지, 속박을 받거나 어떤 인ㆍ사ㆍ물의 속박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지 않았고 틀림없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욥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데, 이것은 결정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세 친구가 그와 변론해도 그는 구속을 받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으며 절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욥의 믿음과 순복은 나중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가장 곤란할 때, 가장 고통스러울 때 누구의 속박을 가장 잘 받습니까? 아내(남편)의 속박이나 자녀의 속박이 아닙니까? 특히 노부부의 그 한 마디 말은 마음속에서 천근 무게입니다! 하지만 욥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아내의 한 마디 말이 어떤 역할을 조금이라도 했습니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 욥에게 날카롭고 엄숙하게 거절당하고 부인되었습니다. 욥의 아내는 마치 사탄의 심부름꾼이 와서 욥을 시험하듯이 욥에게 바로 반격을 당하고 격퇴되어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욥의 아내가 욥의 이 말을 들은 후 어떤 표현이 있었을지 알고 있습니까? 몸을 돌리자마자 자기 뺨을 두 대 때렸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어리석고 정말 무지해. 이렇게 오래 살아왔어도 저 사람을 잘 알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러면서 또 뺨을 두 대 때렸을 것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쓰여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제가 말한 것이 사실입니까? (네.) 이것은 진실한 정형입니다. 단지 여기에서 말할 필요가 없었을 따름입니다. 욥의 아내는 당시에 틀림없이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고 너무나 욥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와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어떻게 공연히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그녀는 후회되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욥의 아내라면 욥이 시련받을 때 이런 말을 했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을 당신은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모두 했었고 후회도 했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한 것은 말하지 않겠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생각은 다 있겠죠? 그럼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까, 뜻하지 않습니까? 얼마쯤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낙담하게 하는 말이나 믿음을 잃게 하는 말을 좀 하고 나면 당시에 마음속으로 후회되고 괴로워 자기 뺨을 때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시련이 임할 때에 자기의 아내(남편)를 끌어들여 뒷걸음질하려 하고 소극적이 되어 물러나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남편이 옥살이하니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뭐라고 말할까요? “우리, 믿지 말고 살림이나 잘 해요.” 이런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아내가 옥살이하니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가거나 편지를 써서 “우리 가족이 함께 살면서 살림이나 잘 합시다.”라고 말하고 아이는 “저는 엄마의 사랑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데, 아내는 아이가 한 말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욥의 아내가 한 말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가장 뚜렷한 것입니다. 그 외에 또 어떤 말이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이 본분을 할 때 조금 고생하거나 조금 피곤해 하면 가족이 “온종일 집에 있지 않고 아내(남편), 아이까지 버리고 본분을 하면서 그렇게 힘들게 고생만 하는데, 도대체 뭘 바라고 그러는 거야? 뭘 위해서야?”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것을 생각만 하면 저절로 후회합니다. ‘정말 그래, 내가 온종일 이렇게 바쁘게 보내고 이렇게 많은 고생을 하는데, 도대체 뭘 위해서인가?’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력이 있었습니까? 욥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당신 스스로도 어떤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이 생각이 무섭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사상이 있을 때, 이런 생각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자신을 “어리석은 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만약 남성이라면 “어리석은 남자, 우매한 바보” 또는 “너, 이 마귀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런 시험이 늘 임하는 것입니다! 꼭 당신의 재산, 자녀를 거두어 갈 때라야 욥의 아내의 이런 시험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평소에 본분하면서 고생할 때, 좌절을 당했을 때,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받을 때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럼 이 생각이 욥의 아내가 욥을 시험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같습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이 어떤 때에는 욥의 아내처럼 어리석은 여자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까? 늘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이렇게 거역하며 늘 믿음을 잃고 소극적이고 후퇴합니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하다가 붙잡히든지, 옥살이하든지 아니면 과로해 병이 나든지 모두 불평이 없고 아주 행복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본분하면서 또 많은 은혜와 큰 구원을 받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아 정말로 하나님의 높여주심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느낀다면 이런 사람은 인성 품격이 그래도 좋고 양심과 이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이 전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육체가 심히 패괴되었기에 이런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만약 이런 인식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고생할 때 간증을 굳게 설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것은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에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아내가 이 말을 한 다음 무엇을 드러냈습니까? 그녀에게 불신의 악한 마음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럼 불신의 악한 마음이 좋은 환경에서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배경에서라야 드러날 수 있습니까? 환난을 당했을 때, 궁지에 이르렀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에게 만약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하지 않으면 그의 아내가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보세요, 사람들은 모두 ‘욥 내외가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이야!’라고 여깁니다. 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욥을 말하기만 하면 그의 아내도 언급할 것인데,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의 아이들 중 아마 적어도 절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결국 이 한 번의 시련에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아이들이 죽고 도태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사탄이 빼앗아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아이들은 틀렸습니다. 한가하면 진탕 먹고 마시기에 욥이 그렇게 많은 번제를 드려도 소용없었습니다. 욥의 아내도 욥과 달라 불신의 악한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니었고 욥만이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육체가 죽은 후 욥의 영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었고 욥의 아내는 드러나고 도태된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지금 본분을 하는 진실한 정형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욥입니까 아니면 욥의 아내입니까? 당신에게 욥의 시련이 임할 때 당신은 욥의 아내가 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신은 욥의 아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도 사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어떤 곳에는 악인, 적그리스도가 나왔는데, 허튼소리만 해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할 줄 몰라 ‘이 사람, 괜찮구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배우자도 안 구하네! 집과 부모마저 버리고 나와서 본분을 하더니 어떻게 또 도태됐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것도 헛수고가 아닌가?’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본분을 하면서 힘도 썼는데 왜 도태되었어요? 살인, 방화한 것도 아닌데요!”라고 말합니다. 힘을 좀 썼다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을 어느 정도 해야 합니다. 당신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고 당신이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을 증거하는 다른 사람의 사역에 엇나가고 방해하는 것이면 이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엇나가고 방해하며 하나님 뜻의 통행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도태된 것입니다. 이 문제의 실질을 당신은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분별이 없고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당신은 욥의 아내보다 더 어리석습니다! 일부 교회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눈먼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 욥의 아내와 같아서 불평합니다. 무엇 때문에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 악인을 하나 분별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까요? 누구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너무 심하게 눈멀고 너무 심하게 멍청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분명한 애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애증이 분명하지 않으면 어떤 놈입니까? 멍청이입니다. 이치대로라면 욥은 아내를 사랑했어야 합니다. 노부부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보세요, 노부부가 함께 있으면 끌어안는 일이 있을까요? 키스하며 문안하는 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진실로 서로 사랑하고 누구도 누굴 떠나지 못합니다! 그럼 욥이 노년에 즉 시련이 임했을 때 아내가 이런 말을 한바탕 했는데, 욥의 마음에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겠습니까? 조금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공통언어가 있겠습니까? 공통언어가 없는데,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할 말이 별로 없고 간단한 몇 마디 뿐입니다. “식사하세요.” “주무세요.” 이러면 끝입니다.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음속 얘기를 좀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본분을 하면서 고생을 좀 하고 대가를 좀 치르면 첫째로 우리의 인성을 단련하고 우리의 소질을 높이게 됩니다. 그 밖에,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인성 품격도 변화가 생깁니다. 예컨대, 정직한 사람,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한 사람이 되기를 배우는 것이 매우 관건입니다! 소박함을 배우고 거만하지 말고 말을 하고 일을 함에 착실해야 하는데, 이것이 인품입니다! 고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이 비교적 듬직하고 비교적 성숙되었음을 설명합니다. 무릇 본분을 함에 있어서 고생할 수 없고 대가를 치를 수 없다면 인성 품격이 불합격이고 듬직하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하고 정상적 인성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정확합니다. 보세요, 욥은 고생을 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큰 고생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그렇게 우월한 물질적 조건이 있어도 누림에 중시하지 않고 고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욥이 매우 소박하고 매우 정상임을 설명합니다. 그런 조건이 없으면서도 누리려 한다면 비정상인데, 이것을 사치한 욕망이라고 합니다. 당신에게 그런 것이 없는데, 당신은 당신에게 있으면 내려놓을 수 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없기 때문에 당신이 그 말을 하면 비현실적입니다. 그것을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욥은 있어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것을 누리지 않았고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빼앗길 때 별로 고통스러운 느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욥에게 탐욕이 없었음을 설명합니다. 정말로 탐욕스러운 사람은 빼앗길 때 표현이 다릅니다! 그것은 가슴을 찢는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늘그막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재산을 잃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녀를 잃는 것일까요? (자녀를 잃는 것입니다.) 만약 자식 열에서 하나를 잃으면 고통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요? 둘을 잃으면? 하나를 잃으면 하나 잃은 고통이고 둘을 잃으면 두 배의 고통이며 자식 열을 다 잃으면 열 배의 고통입니다. 그럼 욥은 열 배의 고통이 있었습니까? 열 배의 고통은 볼 수 없었고, 아마 대 여섯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 욥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자식을 잃고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까닭인지 알고 있습니까? 욥이 보니 그의 자식들이 저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고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자식들이 좋은 자식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좋아하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으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안중에서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마음속에는 일찍 이 열 명의 자식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욥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일을 판단하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가의 여부에 근거해 일을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면 그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면 그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열 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욥의 마음속에서의 지위는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그는 사탄이 쳐서 악창이 났을 때에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의 악창을 긁으면서도 크게 소리내어 울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악창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럼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을 때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에 대한 아내의 시험과 아내에게 대답한 말을 통해 우리는 그의 마음이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무엇으로 실증합니까? 아내에게 대답하는 그의 말로 실증하는데,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아내에게 대답한 말에서 우리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을 때 그의 마음속의 진실한 정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아래에 또 한 단락 말씀이 있는데 매우 관건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호의’는 결코 욥의 찬사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복(역주: 순종)을 부인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욥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욥의 실질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욥의 그때 마음은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고부동하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시험하는 말을 한 후 욥을 화나게 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에 대한 요구가 엄했습니까, 엄하지 않았습니까? 욥의 요구가 엄한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순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보세요, 그의 인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아낸 것인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이렇게 좋은 인품을 살아낸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인품은 하늘 아래에 찾을 곳이 없습니다! 가장 좋은 인품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여기에서 드러났습니다. 지식이 사람의 인품을 좋아지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직 진리,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인식,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경외만이 사람의 인품을 좋아지게 할 수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좋은 인성 품격을 살아내게 할 수 있습니다. 욥의 간증에서 우리는 실증을 얻었는바, 진실로 좋은 인품과 진정 의의 있는 인생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인식, 하나님에 대한 경외, 하나님에 대한 순복으로 말미암아 살아낸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확실한 것입니다.

아래에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욥의 선함과 진실함

욥의 여러 가지 표현에서 모두 욥, 이 사람의 인성 유로를 볼 수 있다면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교통하려는 다음 화제이다.

앞에서 내가 욥이 무엇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는가의 근원을 말했는데,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이 없고 냉혹하고 무정하고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기의 생일을 증오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인성이 없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슬퍼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아파하는 것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겠는가? 답은 당연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낌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다. 외인이 보기에는 시련 속에서의 욥의 모든 표현이 다 사람이 따라배울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일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물음표를 찍거나 서로 다른 평가를 하게 하였다. 사실상, 욥의 이 거동이야말로 욥, 이 사람의 인성 실질의 가장 근본적인 유로인 것이다. 그의 인성 실질에는 숨김이 없고 꾸밈이 없고 사람의 가공도 거치지 않았다. 그의 이 거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 깊은 곳의 선함과 진실함을 보게 했는데, 그는 맑은 샘물처럼 바닥까지 보이고 순수하고 투명하다.

욥, 본인의 여러 방면을 알게 된 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 이 사람의 인성 실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한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서도 더한층 깊고 실제적인 이해와 터득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이해와 터득이 사람을 도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단락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진리가 있고 더욱 깊은 비밀이 있기에 짧은 시간에 다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한 가지 일만 언급하겠습니다. 이 일을 사람이 어떻게 봐야 정확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지, 여기에는 찾아볼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일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사람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이 일이 합당할까요? 정상적인 규율대로 말하면 사람은 다 살고 싶어 하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더 좋게 살고 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다 향상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다 좋은 방면으로 요구하고 나쁜 방면으로 요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의 소망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럼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일은 어떤 배경에서 생긴 것일까요? 문제의 관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배경이 없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특수한 배경이 없다면 누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확실하게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졌을 때 나이도 안 많고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채 죽을 고비에 이르면 ‘사는 게 너무나 불행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을 때, 자기의 일생의 소망과 포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곧 죽게 되면 이때 그는 귀찮아하면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데, 이것은 정상이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틀리다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욥의 이런 상황과 금방 말한 이런 상황이 같은 것입니까?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바로 욥이 한평생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말할 필요 없이 너무나 커서 일반인보다 큽니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고 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인생의 모든 일, 사람이 어떻게 살면 의의가 있는지, 어떻게 살면 의의가 없는지,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이 사람인지, 무엇이 사람이 아닌지를 다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일을 꿰뚫어 보았고 다 겪었습니다. 욥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어떤 인생관일까요? 바로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약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고 살아갈 자격이 없으며 죽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이 방면으로 교통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근원이 무엇인지 봅시다.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이 없고 냉혹하고 무정하고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기의 생일을 증오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인성이 없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슬퍼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아파하는 것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겠는가? 답은 당연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낌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다.』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근원이 필요합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한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이 상처를 받을까봐 자신이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이 상처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는데, 이것은 어떤 인성입니까? 너무나 선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에까지 선하면 조물주 즉 하나님의 마음이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어떤 원인으로 고통받고 또 하나님의 마음까지 고통받게 할 수 있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욱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 일에서 보면 욥의 마음이 선한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상처를 받으실까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럼 이 선함은 진실하지 않습니까? 이 선함이 실증을 얻었습니까? 한 사람의 마음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선함은 어떤 곳에서 나타날까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순수한 선함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이 상처를 받을까봐, 하나님의 마음이 이때문에 고통을 받을까봐 하나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으시지 않게 하기 위해 차라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지언정, 자신이 땅에서 생존하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이 단락 말씀에서 우리는 마음이 악랄한 사람이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자가 없고 마음이 악랄한 사람은 다 남을 저주하지 전혀 자기를 저주하지 않고 더욱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분별할 줄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진리를 교통할 때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증오하는 것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큰 악을 저질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다음 자기를 저주하는 말을 좀 하면서 자신이 진실로 자신을 증오함을 증명했습니다. 이만하면 괜찮지만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저주했습니까? “제가 만약 또 악을 저지른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저주해 제거하시고 비명에 죽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껏해야 이 정도까지 말하고 다른 말은 없습니다. 지금 보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자신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자신을 저주하는데, 이것이 진실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흔히 보는 일이고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자신을 증오하고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인물일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인물일까요? (긍정적인 인물입니다.) 그럼 자신을 저주하는 일은 긍정적인 사물일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일까요?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이 사람에게 양심의 발견이 있고 회개의 표현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럼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일은 긍정적인 사물일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일까요?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이 있고 성령 역사가 있을 때를 연상해 보면 어떤 때는 자신을 증오하기도 하고 자신을 저주하기도 하며 심지어 맹세까지 하면서 자신을 저주합니다. 이것은 욥의 저주와 비록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정형도 있고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세상의 그 악마들, 그 악인들, 그 집권자들에게 자신이 악을 행한 것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일이 있습니까? 자신을 저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고도 다른 사람이 폭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폭로하면 또 보복하려 하고 살인하려 하고 본래보다 더 심하게 하려 하는데,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 아닙니까? 보세요, 하나님 집에서 이긴 자의 간증, 하나님 선민이 박해받은 경력을 신문에 게재하고 인터넷에 올리니 큰 붉은 용이 가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것이 그런 악을 행한 것으로 인해, 하늘에 사무치는 그것의 죄행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반대로 더 악질적으로 구실을 만들어 거짓말을 조작하고 거짓 안건을 조작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사람들을 더욱 잔혹하게 추적하고 박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문제일까요? 이것이 악마의 본성 실질이 아닙니까? 그것이 스스로는 항상 비평을 받아들이고 자기 비평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왜 이 일에서는 자기를 반성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것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악을 저지르고도 회개의 표현이 조금도 없고 반성하는 인식이 조금도 없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문제일까요?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성이고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악을 저지르든지 회개의 표현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양심이 없고 조금의 이지도 없고 조금의 인성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의 표현에 근거하고 또 사탄 악마의 표현에 대조해 보면 우리는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을 증오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은 시련을 받아 가장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찾을 수 없을 때 자신이 한 일이 아마 하나님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으시게 했을지도 모르고 정말 하나님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으시게 했다면 죽기보다 못하고 그래도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 적합하고 이러면 혹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때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는데, 이 일에서 보면 욥은 의인입니까, 아닙니까? 욥은 의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계 싸움의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기에 욥은 그런 배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일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으시게 하면 그 죄악이 커서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연약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연약한 것 같지만 이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그에게 너무 높이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영계 싸움의 배경을 꿰뚫어 보지 못한 배경에서 이런 일을 한 것은 그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충분히 간증할 수 있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고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임을 충분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나 선하고 그의 심령이 아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비로소 진정한 의인임을 충분히 실증할 수 있습니다! 의인만이 그런 배경에서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됩니다.) 그럼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또 오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서 모두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때 가서 마땅히 자신을 반성해야 하고 마땅히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그러면 족하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해선 안 된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은 연약한 표현이다.” 지금 보면 그런 배경에서 누가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정상이며 또 연약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순복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원래 명정에 순복할 것을 지키려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잘 모르겠나이다 이 시각 하나님의 뜻이 나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시련하려는 것인지?” 예수님은 당시에 아마 90%는 아시고 조금은 완전히 확정하지 못하셨으므로 이런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의 연약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말이 적합합니까? 그 말은 누가 한 것입니까?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바울의 터득은 틀립니다. 성령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하나님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니 후에 사람들이 그때 예수님께 연약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연약이겠습니까? 그것은 연약이 아닙니다. 육체가 극도로 고통스러울 때 그것은 정상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은 연약이고 그때에 절대적으로 순복하고 고통이 없이 굳세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말한 그 굳셈은 존재하지 않고 없는 일입니다. 그런 굳셈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가장 좋은 나타냄이고 최고로 순복하는 나타냄이며 이미 하나님의 칭찬을 얻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정상과 굳셈은 없습니다! 그것은 상상이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그때의 표현을 연약이라고 말할 수 없고 역시 정상인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런 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연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해석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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