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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6)

『욥 본인에 관하여

욥이 시련을 겪은 전 과정을 알게 된 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 본인과 관련된 메시지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이고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는가의 “비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 여기에서 욥, 이 사람에 관해 얘기해 보자!

욥의 일상생활 속에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보다

욥 본인을 얘기하려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는 것에서부터 말해야 한다.

우리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순전함과 정직함”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욥이 아주 완벽하고 아주 강직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글자 표면상의 해석과 이해이다. 진정 욥, 본인을 알아보려면 현실 생활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단지 글자 표면에서, 책에서, 도리상에서는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 먼저 욥, 이 사람의 일상생활이 어떠한지, 즉 그의 생활 속의 정상적인 표현이 어떠한지를 보고 이런 것을 통해 욥의 생존 원칙과 그의 인생 목표를 알아보고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그의 추구도 알아보도록 하자. 지금 성경 중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말은 욥의 지위와 신분이 그 당시에 아주 높았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그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그의 가산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 때문인지를 알려 주지 않았다. 어쨌든 욥의 지위, 신분은 사람들의 총애를 받은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한 욥에 대한 사람들의 첫 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며, 그는 거대한 가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존귀한 지위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일상 음식, 생활의 질과 그의 각 방면의 사적인 생활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다음의 성경 본문을 읽어봐야 한다. (욥 1:4-5)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 성경 본문에는 2가지 일이 기술되었다. 첫 번째 일은 욥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고,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그의 자녀들을 염려하고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기 때문에 항상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 2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생활 내용의 기술(記述)이다. 한 가지는 욥의 자녀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생활이 부유해 늘 잔치를 즐기고 생활이 사치스러운 것인데, 그들은 배불리 먹고 마시는 생활에 빠져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준 우월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나날을 보냈으므로 늘 죄를 범하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지 않고 이를 위해서 번제도 드리지 않았다. 보다시피, 이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상세한 상황은 결코 우리가 관심을 가질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중점 부분은 욥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본문에 기술된 다른 한 가지 일인데, 이 일은 욥 본인의 인성 실질과 그의 일상생활에 관련된다. 성경 본문에는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이 거기에 있지 않았고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술되었다. 다시 말하면, 욥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진탕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비록 부유하여 갖가지 가산을 소유하고 또 많은 노비도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결코 사치스럽지 않았다. 그는 부유함으로 인해 우월한 생활 환경 속에 빠져 있지 않았고 부유함으로 인해 육체의 누림을 탐하지 않았으며 부유함으로 인해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부유함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도 않았다. 보다시피 욥, 이 사람의 생활은 바르고, 그는 결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누림을 좋아하거나 생활의 질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함에 겸손하고 처세함에 떠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했고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의 일상생활에서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그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란 것이다. 즉 욥의 마음속에서 풍부한 물자(物資)는 결코 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도 대체하지 못했다. 그가 평소에 행하는 것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 자신을 위해서든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는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긴 것인데 일상생활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타났다. 욥의 이런 실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욥, 이 사람의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함을 보게 하고 정의를 좋아하고 긍정적 사물을 좋아하는 욥의 실질을 보게 한다. 그가 늘 “그의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뜻은 그가 그의 자녀들의 행위를 동의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싫어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죄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늘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자백하라고 했던 것이다. 욥의 이 행위는 또 우리로 하여금 욥의 인성의 다른 한 면을 보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여태껏 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그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한 것이다. 설령 이들이 욥의 자녀일지라도 그는 결코 그들과의 혈연관계로 인해 그의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감정으로 인해 그들의 죄행을 놔두지 않았고 그들에게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관용을 얻으라고 권유했으며 또한 그들에게 누림을 탐냄으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증오하였으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행하는 사람을 증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중에 보여진 욥의 정직함이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알아보려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욥의 진실한 인성의 유로와 살아냄에 관한 것이다.』

방금 이 말씀은 주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욥의 가정 생활에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욥 본인을 알아가는 제일 좋은 증거입니다. 욥의 가정 생활에 한 가지 가장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즉 가정 생활이 부유하다 보니 그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일은 우리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이 진실한가의 여부를 알아가는 데 제일 관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표현에 대해 분별할 줄 모르고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표현은 주로 큰일이나 시련이 닥칠 때에야 드러날 수 있고 엔간한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말대로라면 큰일이 닥쳐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 생기게 되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는 가정 생활의 사소한 일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가정의 육체 가족을 대하는 방면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육체적인 정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닥치든 정을 중히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욥의 가정을 봅시다. 그의 자녀들은 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돈 많은 집은 모두 잔치를 떠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잔치라고 합니까? 손님을 초대하고, 선물을 주고, 실컷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즉 휴일만 되면 가족이 단란히 모여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고 또 친척, 친구들을 청하는 것인데, 이것을 잔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기에 욥은 이런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욥의 자녀들이 한데 모여 먹고 마실 때 욥이 참석했습니까?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까? 그 가정이 아주 화목합니까?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가정의 잔치는 다 함께 모이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기에 욥의 집에서는 다 모입니까? 욥과 그의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욥은 그의 자녀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데에 어떤 행동이 있습니까? 바로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늘 먹고 마시면서 잔치만 즐긴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늘 당부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함께 진리를 많이 교통하고 잔치를 좀 적게 베풀고 바른 일이나 하거라.” 이것은 욥이 늘 자녀들에게 한 말이죠? (네.) 분명히 적지 않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용을 일으켰습니까?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권고합니다. 권고해도 안 되면 한 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을 했습니까? 욥은 늘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번제를 드렸습니까? 그의 자녀들을 걱정하고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에서 볼 때 욥은 마음속으로 자녀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책임을 다했지요? (다했습니다.) 욥은 자녀들에 대해 원칙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 원칙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그의 자녀들의 이런 행위에 대해 좋아하지 않고 늘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는다 해서 욥은 그들에게 뭘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그들이 잔치를 베풀 때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고 잔칫상을 뒤집어놓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일이 지난 후에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을 뿐입니다. 이 일에서 볼 때 욥은 자녀들에 대해 감정에 따라 처신했습니까? 욥이 자녀들에게 한 일은 정말로 원칙이 있습니다. 한 방면으로는 타일렀는데 타일러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중에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 일에서 또 어떤 문제를 보게 됩니까? 욥의 인생, 그가 걸은 길은 그의 자녀들과 같은 것입니까? 욥 본인은 생활이 부유해도 잔치를 자주 베풀지 않았지만 그의 자녀들은 생활이 부유함으로 인해 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두 부류의 사람이지요? 이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욥의 가정으로부터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이 가는 길도 서로 다른 길임을 보았습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한 부류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욥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 욥이 걷는 길과 같은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욥은 그래도 부친의 책임을 다하면서 늘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릴 수 있었는데, 자녀들에게 모든 성의를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육체적 가족을 대함에 있어서 감정에 따라 처신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을 탐하는 그 불신자들의 일거일동을 따랐습니까? (아닙니다.) 그와 달리 그들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아울러 모든 성의를 다했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늘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의 방식으로 하면 늘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그 뜻입니다. 욥은 어떻게 육체적 가족을 대했을까요? 여기에서 몇 가지 원칙을 총결해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 우리는 어떻게 육체적 가족을 대하는 것인지를 보세요. 욥의 이 일에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완전히 알 수 있겠죠? 이 한 가지 일만 해도 매우 관건입니다!

만약 욥이 자녀들의 잔치에 참석하고 나중에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다면 합당하겠습니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욥은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런 생활 방식을 반대했습니다. 그럼 욥이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푸는 이런 생활 방식을 반대한 것으로부터 또 욥의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욥 본인의 인성 품격에 관련됩니다. 그의 인성 품격은 무엇을 포함하는지? 총결해 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본문에 기술된 다른 한 가지 일인데, 이 일은 욥 본인의 인성 실질과 그의 일상생활에 관련된다. 성경 본문에는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이 거기에 있지 않았고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술되었다.”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은 이런 사치한 생활을 혐오했습니다.) 일반인의 마음속에는 자녀에 대한 정이 깊습니다. 자녀들이 먹고 마시면 그도 참석해 가족끼리 단란하게 모여 축하하며 누리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죠? 여기에서 욥의 자녀들이 욥에게 조금도 효도하지 않았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욥의 자녀들이 만약 욥에게 아주 효도한다면 욥도 마음이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부친으로서 자녀들이 다 아주 효도하면 잔치를 베풀 때 참석해도 마음은 아주 기쁜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가장 가까운 가족―자녀들의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으면서 자녀에 대해서는 아주 사랑하고 아주 긍휼히 여겼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또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욥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품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설사 육체적으로 제일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정이 없었고 육체적 어려움을 만족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런 잔치에 참석하는 것도 아주 누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다 자녀들이 함께 모여서 기쁘게 먹고 마신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일을 증오했는데 어느 정도로 증오했을까요?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안 돼! 내가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면 이건 바로 악행이야! 하나님께 죄짓는 거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니 참석 안 해.” 그때에 그는 부자 간의 정도 다 배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뚜렷합니다! 그래서 욥이 기도할 때,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릴 때의 그 마음은 깨끗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이런 잔치에 참석하고 나서 또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다면 합당하겠습니까?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행하고 잔치에 참석해 잔치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번제를 드릴 때 자신을 위해서도 한몫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고 자녀를 위해 번제를 드리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무엇을 보여 줍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의 잔치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을 거절하고 나서 “너희를 위해 번제를 드리노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이 여기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일반인은 이것을 해낼 수 있습니까? 정말 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예를 들어 집에 횡령꾼이나 장사꾼이 있어 돈을 사기친 다음 그 부당한 돈으로 맛있는 음식, 쓰기 좋은 물건을 사온다면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거절하면서 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런 좋은 것을 누릴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이구, 이 돈은 정당하게 번 게 아니고 더러운 돈이야, 더러운 돈으로 바꿔 온 건 좋은 거라 해도 난 누릴 수 없어, 이건 악에 물드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서 원칙이 없습니다. ‘어떻게 벌든 따져서 뭐해! 맛있는 걸 사왔으면 먹어 주고, 먹고 나서 다시 보자. 좋은 옷을 사왔으면 입어 주고, 입고 나서 다시 보자. 어쨌든 내가 죄짓지 않으면 그만이지.’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욥은 하나님의 축복에 자신의 노동을 더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얻게 되었는데 그가 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누리고 그 자신은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서도 누릴 만큼 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다음으로 말씀을 한 단락 더 봅시다. “성경 본문에는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이 거기에 있지 않았고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술되었다. 다시 말하면, 욥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진탕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비록 부유하여 갖가지 가산을 소유하고 또 많은 노비도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결코 사치스럽지 않았다. 그는 부유함으로 인해 우월한 생활 환경 속에 빠져 있지 않았고 부유함으로 인해 육체의 누림을 탐하지 않았으며 부유함으로 인해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부유함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욥의 인성 품격입니다. 그러면 이 인성 품격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어떤 관계입니까? 여기에는 찾아볼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악에서 떠나는 이런 실행과 사람의 인품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인품이라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찾아볼 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관건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생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일반적 인성이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음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상고하지 않고 그저 읽고 나서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는 데에만 만족하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 속에는 어느 정도 연대 관계가 있습니다. 일부 말씀의 뜻 속에는 다른 한 가지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당신이 생각해 내지 못하면 안 됩니다. 말해 보세요, 여기에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어떤 행동에서 알 수 있는지? 그 밖에 이것은 그의 어떤 방면의 인성 품격과 관계있는지?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상고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아래에 더 봅시다. “보다시피 욥, 이 사람의 생활은 바르고, 그는 결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누림을 좋아하거나 생활의 질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함에 겸손하고 처세함에 떠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했고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인성 품격을 말하는 몇 가지 방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성 품격을 개괄하면 무엇입니까? 겉면의 이런 표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에게 개괄해 주셨습니까? 순전하고 정직함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의 인성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그가 정직한 사람임을 뜻합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정직한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고 탐욕을 싫어하고 누림을 싫어하는데 그 “싫어함”은 단속해서 생긴 것입니까 아니면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선천적인 것입니까? 그의 본성, 천성은 타고난 것인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운 것이 아니고 단속해서 생기거나 훈련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만약 훈련해서 생긴 것이고 배운 것이라면 그도 이전에는 이런 잘못을 범하고 나중에 시정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럼 여기에서 욥이 이전에 이런 일을 범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천성적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천성적으로 이런 인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이러한 사람은 후천적으로 얼마나 좋은 생활 환경, 얼마나 부유한 가정 환경이 주어져도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만약 천성적으로 이런 인품이 없다면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는 누리려 할 것이고 갖은 방법을 다해 토색할 것이고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입니다. 욥은 천성적으로 육체 누림에 연연해 하는 사람이 아니고 천성적으로 탐욕을 싫어하고 불의의 재물을 싫어하고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그 인품은 타고난 것이지 후천적으로 난관에 부딪치고 다른 사람의 수리(역주: 교훈)나 하나님의 징계를 거쳐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타고난 것입니다. 그가 천성적으로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결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누림을 좋아하거나 생활의 질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함에 겸손하고 처세함에 떠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했고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욥이 천성적으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든지, 가정 생활이 얼마나 부유하게 되었든지 그는 이런 것에 대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식이 많아질 때 모두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생활이 좀 넉넉했으면 좋겠다.’ 이런 요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욥에게 자녀 10명이 있었는데 이런 요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물질 조건이 너무 나빠 한 끼를 먹고 나면 다음 끼가 없어 날마다 걱정하고 어느 날 먹을 밥도 없게 된다면 그런 날은 지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욥도 그런 날을 지내기를 원하지 않았고 게다가 아주 부지런히 일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 그가 지불한 대가를 통해 생활이 부유해졌습니다. 부유해진 후 욥은 천성적으로 누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에 대해 조금도 탐욕스러운 생각이 없었고 또 부유하다 해서 특별히 생활의 질을 따지지 않았으며 더욱이 부유하고 가산이 가득하다 해서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도 않고 오히려 매우 조용하고 조금도 떠벌리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매우 신중하고 또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하면서 하나님께 보답하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죄짓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욥의 이 인품을 개괄하면 무엇입니까? 순전하고 정직함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까? 이 사람은 아주 정직하고 바른길을 걷고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후에 욥은 늘그막에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그가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가정 생활이 부유하니 늘 모여 잔치를 베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이 일은 욥의 나이가 얼마쯤 된 후에 발생한 것입니까? 50세 후일 것입니다. 50세 후 철없던 애들도 벌써 스무살이 넘어 사치한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믿는 길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50세 후에 이 문제를 발견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일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했습니다. ‘자식들이 다 커서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방인처럼 되지 않을까?’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때문에 자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늘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보통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식이 자라날 때에 이 일로 걱정합니까? (네.) 당신이 한 40~50세 되는 사람에게 “당신네 집에 또 누가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물으면 “에휴, 저희 두 내외만 믿어요.” “자식은요?” “자식은 안 믿고 세상만 좇아요.” 그는 이것이 체면을 잃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말을 꺼내기 싫어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근심되어 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사람은 욥과 비슷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뜻이 조금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습니다! 그가 보고는 “이 자식이 가정을 일구고 재산을 모으더니 하나님도 믿지 않고 이방인과 똑같네. 이러면 글렀어, 바른길도 걷지 않고 말이야!”라고 하면서 늘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늘 자녀를 타이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해! 하나님을 믿는 게 바른길이야! 세상을 좇아 니가 아무리 부유해도 쓸모없어. 그건 진정한 인생길이 아니니 나중에는 결국 멸망될 거야!”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만 자녀가 세상을 좇는 것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어떤 자녀는 출세하여 비록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아주 효도하니 그는 대단히 만족해 하며 말합니다. “이렇게 효도하는 자식이 있으니 됐어. 하나님을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나한테 효도만 잘하면 그만이야.” 그래서 자식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여태껏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로 가라고 타이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모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는 자녀의 효도, 그에게 주는 혜택만 연연해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욥과 비하면 얼마나 멉니까? 이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하나님을 믿는 데 대해 그는 요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형식적으로만 합니다. “너도 믿거라!” 자녀가 “안 믿어요, 엄마(아빠)나 잘 믿고 저를 상관 말아요!”라고 말하면 “그래 알았어, 상관 안 할게.”라고 말하고는 끝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전혀 기도하지 않고 마음속에 이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이 일로 고민하지도 않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욥과 대조해 보면 이것은 사람의 패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일부 부모들은 자녀의 효도에만 연연해 하고 자녀가 가져다주는 혜택만 탐하고 가난에 찌들까봐 걱정하면서 누릴수록 더 좋아합니다. 효도를 많이 하고 누릴 물질을 많이 주는 자식을 좋아하고 적게 효도하는 자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인품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나쁩니다.) 그러면 진정한 인품은 무엇입니까? 육체적 누림에 연연치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할 때는 누림에 연연치 않다가 부유해지기만 하면 누림에 신경 쓰고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을 나타냅니다. 나들이할 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착용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줍니다. “저를 보세요, 생활이 부유하고 자녀들이 효도합니다. 제가 입은 걸 보세요, 제가 한 걸 보세요.”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은 욥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너무 나지요? 사람이 가난할 때 누림에 연연치 않는 것은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오직 부유할 때라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죠? 부유한 사람이 여분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많이 구제해 주는 것은 무슨 문제를 설명합니까? 이 사람이 정말로 육체적 누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한 남을 구제하고 도와줄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마음씨가 착하지 않습니까? 정말 착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탐욕을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분을 늘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구제해 줄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마음이 착합니다. 이런 사람은 욥과 비슷합니다.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품성을 타고난 데다가 후천적으로 참 도를 추구하고 진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물질 방면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고 육체 누림에 연연치 않고 육체적 생활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일반인은 해낼 수 없습니다! 일반인은 자신이 연연치 않아도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자녀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기 위해 몇 번 참석하는데, 이것은 아주 정상입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견스러운 일인데 일반인은 해내지 못합니다. 왜 성경에서 이 일을 꺼내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논증할까요? 바로 이 일에서 일반인은 해내지 못하고 욥만 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그런 표현은 명실상부하고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늘그막에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풀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을 보고 이 일로 곤혹스러워하였고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집 생활이 너무 부유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 커서 자식들이 이런 습관을 기른 게 아닐까? 만약 생활 형편이 궁했다면 얘들이 무엇으로 잔치를 베풀겠어? 아무것도 없으면 잔치를 안 베풀었을 거야.’ 그래서 그때 욥은 ‘사람이 너무 부유해도 좋을 게 없고 좋은 일이 아니야, 먹고 입을 것만 있으면 만족해야 돼.’라고 느껴졌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분명히 있었습니다. 욥의 생각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이런 생각이 있을 때 그는 물질이 너무 풍부하고 너무 충족한 것에 결코 흥미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즉 그의 모든 물질 재산에 대해 별로 사랑하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쓸모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50~60세가 되면 물질적 요구에 대해 그리 큰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때 욕망이 제일 큽니까? 가정을 이루기 직전에 욕망이 제일 큽니다. 어른이 되면 가정을 이루려는 꿈이 생기는데, 가정을 이루는 꿈은 바로 어떠한 가정, 어떠한 가정의 생활 조건, 어떠한 생활 환경이 있어야 더욱 즐겁고 더욱 행복하게 보내겠는가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사람은 욕망과 재산에 대한 요구가 제일 강렬합니다. 그럼 왜 50~60세가 되면 담담해질까요? 이 한평생을 거의 다 겪고, 사람이 도대체 얼마 요구하는지, 얼마 누리는지,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는 이런 일을 다 겪고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담담해지는 것입니다. “별로 재미없어! 공허해!” 집이 아무리 커도 당신의 잠자리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1m×2m 크기입니다. 당신의 몸매가 아무리 좋고 생김새가 아무리 예뻐도 입는 옷은 고작 그 몇 벌뿐입니다. 이 외에 당신에게 어떤 요구가 있든 당신이 먹는 것은 집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보통 식사인데 누구도 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잘 먹는다 해도 몇 사람 분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1인분입니다. 한 사람이 한평생 먹는 것, 입는 것, 거주하는 것, 쓰는 것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므로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의의가 없고 짐이고 장식품입니다. 나중에는 또 속을 썩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50~60세가 될 때 육체에 필요한 것, 먹는 것, 쓰는 것 이런 일을 다 겪고 꿰뚫어 보고 투철하게 체험하고 나면 무미건조하고 너무 많아도 쓸모없다고 여깁니다. 대부분의 사람, 정상 사람은 모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50~60세가 되면 이런 요구에 대해 모두 담담해지고 인생에 대해 기초적인 느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 이외의 것 즉 자녀, 부모, 가족, 재산을 포함해 조금도 중요하지 않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래도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서서 진리를 얻는 것이다. 진리를 얻으면 새로운 생명이 있게 되고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누리는” 이 복을 조금 누리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지금 우리는 진리를 얻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고 진리를 얻으면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경외와 순복(역주: 순종)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 이 위로는 너무나 큽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복은 너무나 크고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누림은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복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이 복을 누릴 때 몸 이외의 그런 것에 대해 여전히 흥미를 느끼겠습니까? 많이 담담해진 것이 아닙니까? 어떤 연로하신 분은 말씀합니다. “자식의 효도를 누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고 물질의 풍요함을 누려도 하나님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고 좋은 편안한 환경을 누려도 하나님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하지 않아. 하나님을 누리는 것만이 제일 행복한 일이야.” 우리가 여기까지 경력(역주: 체험)했을 때 돈에 대해 여전히 미련을 갖겠습니까? 자녀에 대해 여전히 지나친 요구를 하겠습니까? 여전히 남편(아내)에 대한 감정의 구속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 다 담담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이런 경력이 있습니다. 우리 다시 욥을 봅시다. 그가 50~60세 되었을 때 이런 경력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욥의 경력은 어떠했습니까? 우리 경력보다 깊으면 깊었지 못하지 않고 우리보다 더 낫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절정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느낌이 있고 이런 인식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절정에 이르지 못했고 너무나 유한합니다. 욥은 50~60세가 되었을 때 자녀들이 이 풍성한 물질 환경으로 인해 잔치에 빠져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물질적인 것이 아무 의의도 없고 단지 사람을 유인하여 범죄하게 할 뿐이라고 여기고 이런 것에 대해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렇게 부유하고 우월한 가정 환경에서도 생활을 단속하며 간단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으며 누림을 탐하지 않고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했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것을 다짐하고 조금도 하나님께 죄짓지 않았습니다. 욥이 이 정도에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은 인생의 공허함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제일 좋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지 다른 것은 다 아무 의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런 의의가 없고, 자녀가 효도하는 것도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풍성한 물질 재산도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만사는 다 공허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만이 최대의 누림입니다. 그러니 욥의 생명은 50세 후부터 점차적으로 풍성해져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욥이 50세 된 후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욥의 자녀들이 자주 잔치를 베풀 때 욥이 그들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이 사실을 보신 후에 욥에 대해 이런 평가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다른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 일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제일 잘 설명합니다. 이것이 제일 좋은 간증입니다. 그럼 이 일에서 욥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실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실증을 얻었습니다. 그럼 지금 각 사람마다 자신을 반성해 보세요, 욥의 이 길을 걸을 수 있는지? 만약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여 만사를 공허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이를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곧 이루어집니다. 만약 당신이 많은 일을 아주 중요하게 본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욥은 아들 일곱, 딸 셋이지만 아무 의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방인들은 어떠할까요? “자식이 많은 만큼 행복도 많죠! 만약 장가가거나 시집가서 한평생 자녀 몇 명도 없다면 사는 맛이 없어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죠.”라고 합니다. 욥은 자녀도 많은 데다가 또 특히 부유했습니다. 그럼 보통 사람의 관점으로 놓고 말하면 이는 제일 부유한 사람이고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욥은 행복을 느꼈습니까?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다 공허하고 아무 의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다른 것에서 진정한 행복의 길과 참으로 의의 있는 인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길일까요?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데에 이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인생이 아닙니까? 욥이 율법시대에 이 경지에까지 추구할 수 있었는데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것이 간단한 일입니까?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효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 계속 읽읍시다.

『시련 속에서의 욥의 인성 표현 (시련 속에서의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알아본다)

이상 우리가 말한 것은 모두 욥이 시험을 겪기 전에 일상생활에서 나타낸 인성의 각 방면인데, 욥의 이 각 방면의 표현이 사람에게 욥의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과 이해가 있게 하고 물론 기초적인 확신도 있게 하리라 믿는다. 내가 “기초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에 대한 그의 추구 정도에 대해 아직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알게 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욥이 한 이 두 마디의 말에서 욥에 대해 좋은 인상이 조금 있는 것 외에는 결코 더 깊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의 시련을 받을 때 그의 인성의 살아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이래야 욥, 이 사람의 진정한 인성을 각 사람에게 완전하게 보여 줄 수 있다.

욥이 가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살해당한 이런 소식을 들은 후 욥의 반응은 이러했다.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 말에는 이런 한 가지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욥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당황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린 종을 질책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일이 일어난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가서 현장을 검사하거나 사실의 경과를 조사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산을 잃음으로 인해 그 어떤 아쉬움이나 몹시 상심한 표현이 없었고 또한 자녀와 친족들을 잃음으로 인해 눈물을 줄줄 흘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 거동은 보통 사람의 거동과 달랐고 그의 이 거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게 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욥을 “몰인정”하다고 질책하게 했다. 한 사람의 가산이 순식간에 없어졌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몹시 상심하거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산은 사람의 일생 동안의 심혈을 뜻하고 사람 생존의 의탁이고 사람이 살아나갈 희망이며 사람에게 가산이 없어지면 사람의 심혈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뜻하고 사람이 희망도 없어지고 심지어 미래까지 잃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산을 대하는 정상적인 사람의 태도이고 가산과 한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자 역시 사람 안중의 가산의 중요성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가산을 대하는 이처럼 냉담한 처리 태도에 대해 모두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오늘 욥의 속마음을 읽음을 통해 절대다수 사람들의 현혹을 풀어 보자!

상식적인 이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가산을 베풀어 주었으니 욥은 당연히 가산을 잃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그가 하나님이 준 가산을 잘 보호하지도 보살피지도 못했고 지켜내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산을 빼앗겼다는 것을 들은 후 욥의 첫 반응은 마땅히 현장에 가서 갖가지 물건을 철저히 점검한 다음 하나님의 상을 다시 얻도록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택한 것은 당연히 그의 생각이 있는 것이다. 욥은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온 것이지 그가 고생해서 얻은 것이 아님을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얻은 축복을 자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지켜야 할 도를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을 생존의 원칙으로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겼지 결코 더 많은 축복을 탐내거나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산을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고 축복이 없거나 축복을 잃음으로 인해 번뇌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기뻐서 날뛰거나 너무 흥분하여 모든 것을 잊은 것도 아니고 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도 않았다. 욥이 가산을 대한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욥, 이 사람의 진실한 인성의 유로를 보게 한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며 물질 생활에 대한 그의 요구 표준은 매우 낮은 것이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까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속에서의 순복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거두어 가지 않든 그는 요구가 없었고 원망도 없었으며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여태껏 그의 가산이 자신이 고생해서 얻어온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즉 욥의 신심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 3가지 개술을 통해 욥, 이 사람의 인성과 평소의 진실한 추구가 아주 분명하지 않은가? 욥이 가산을 잃었을 때 이처럼 냉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욥에게 이런 인성이 있고 이런 추구가 있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의 평소의 추구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시련 속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분량과 믿음이 있게 한 것이다. 그의 이 한 마디 말은 일조일석에 얻어온 것이 아니고 그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나서 꾸며낸 것도 아니라 그의 다년간의 인생 경력에서 본 것이고 얻어온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만 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의 순복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존재만 믿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은가?

욥의 이성(理性)

욥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은 욥으로 하여금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 그의 이런 이성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고,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으며, 그의 인식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게 했고 순복할 수 있게 했으며, 그의 순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고, 그의 경외는 그로 하여금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했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순전하게 되었으며, 그의 순전함은 그에게 지혜가 있게 했고 또한 그를 가장 이성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글자 표면으로 해석하면 바로 이지가 있고 사상이 논리에 부합되고 황당무계하지 않으며 적절한 언행과 판단이 있고 적절하고 규범화된 도덕 표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이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간단한 해석이 아니다. 여기에서 욥을 가장 이성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인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표현과 관계된다. 욥은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순복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남이 얻지 못한 인식을 얻게 했다. 이런 인식은 그로 하여금 닥친 일을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게 했으며 따라서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더 정확하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즉 그의 언어, 행위, 일처리 원칙, 일처리 방침은 매우 규범적이고 매우 명확하고 아주 구체적이지 맹목적이 아니고 충동적이 아니고 감정적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되게 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으며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의 베풂과 거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이다. 바로 욥이 이런 이성을 구비했기 때문에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욥에게 몸의 극통이 오고 친구들의 만류가 오고 죽음이 닥쳤을 때 욥의 실제 표현은 또 욥, 이 사람의 진실한 면을 각 사람에게 나타냈다.』

먼저 첫 단락을 봅시다. 시련이 임한 후 욥의 표현은 사람들이 보기에 남다른 행동이었습니다. “남다르다”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일까요? 바로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한 것입니다. 이 몇 마디 말은 어떤 문제를 설명합니까? 욥이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한 후 그의 일련의 표현은 다 하나님 앞에서의 표현입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 온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즉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하니 그가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반성하고 뉘우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도리를 따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설명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 어떤 일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것은 더욱더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를 실증할 수 있고 더욱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임을 실증할 수 있고 더욱더 임한 이런 일이 다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발생한 것이고 다 하나님의 허락에서 나왔음을 욥이 이미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욥의 믿음이 아닙니까? 그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지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에게 가서 이유를 따지거나 일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간증은 아주 대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가장 진실한 간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진실한 믿음의 가장 큰 나타남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허락에서 나온 것이고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사람의 행위가 아니고 설사 사탄이 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일을 아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련이 임한 후 그의 첫 번째 표현은 하나님 앞에 온 것이지 사람을 찾아가 이치를 따지거나 사람을 찾아 일을 처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은 거의 소송을 걸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학대와 박해를 받아도 소송을 걸지 않는다는 이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련입니다. 그의 재산과 자녀들이 빼앗기고 살해되어 이렇게 큰일이 닥치니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사람에 대해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욥의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믿음의 크고 작음을 가늠하지 않고 사람의 믿음이 작아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틀리다고 말하지 않고 욥의 이 믿음이 일반인의 믿음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만 말합니다. 이것은 명실상부합니다.

여기에서 언급했습니다. “욥의 이 거동은 보통 사람의 거동과 달랐고 그의 이 거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게 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욥을 ‘몰인정’하다고 질책하게 했다. 한 사람의 가산이 순식간에 없어졌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몹시 상심하거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산은 사람의 일생 동안의 심혈을 뜻하고 사람 생존의 의탁이고 사람이 살아나갈 희망이며 사람에게 가산이 없어지면 사람의 심혈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뜻하고 사람이 희망도 없어지고 심지어 미래까지 잃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가산을 대하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 즉 욥이 가산을 대하는 견해는 일반인과 달랐습니다. 그는 ‘이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거니 하나님께서 수시로 거두어 가시는 건 다 가능한 일이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때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거두어 가실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해.’라고 여겼는데, 이것은 욥의 이성(理性)입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이런 비범한 사람의 이성이 있었을까요? 그의 이성과 일반 정상인의 이지는 어떤 구별이 있을까요? 여기에는 찾아볼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묘한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욥의 이성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요? 그 이성은 정상 사람에게 구비된 것입니까? 천성적으로 구비된 것입니까? 타락된 인류가 천성적으로 구비한 이지는 아주 유한합니다. 어떤 충격도 받지 않은 정황에서, 매우 정상적인 정황에서라야 이지가 조금 있습니다. 충격만 받으면 특히 시련이 임하고 큰 타격을 받을 때 사람은 모두 격앙됩니다! 그럼 욥이 이렇게 큰 시련 즉 이렇게 큰 충격과 이렇게 큰 타격이 임해도 여전히 비범한 이성을 나타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은 욥이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한 효과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이 진리가 없으면 진정한 이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이 구비한 이지는 너무나 유한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지식인, 학자, 고관들이 큰일이 닥쳤을 때 흥분되고 격앙되어 사람을 실망케 하는 일부 말을 하거나 비정상적인 일부 행동을 하고 심지어 정신병에 걸리고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별별 일이 다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지식과 이성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식은 사람에게 정상적인 상황 하에 있어야 할 이지를 조금 가져다줄 뿐입니다. 큰 시련이 임할 때, 큰 손해를 입을 때 지식은 사람에게 진정한 이성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사람에게 진정한 이성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즉 진리가 사람의 진정한 생명이 되면 진정한 이성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이성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지금 답이 생겼습니까? (“그의 이런 이성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잘 찾았습니다. 답이 생겼네요. 진정한 이성에 대해 우리가 또 더 깊은 해석을 좀 한다면, 지금의 말로 말하면 오직 환난이 닥칠 때 진정한 이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라야 진리를 추구해 도달한 효과입니다. 진리를 얻은 사람만이 환난이 닥칠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즉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큰 시련이 임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게 되면 우리는 욥의 이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욥은 이렇게 큰 시련이 임했을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반성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일이 닥쳤을까?’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해 보고 다른 사람과 이치를 따지지 않았는데, 이것이 욥의 믿음입니다. 만약 큰 시련이 임할 때 다른 사람과 이치를 따지고 다른 사람과 논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없고 그는 이 일이 하나님과 관계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전혀 반대입니다. 그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임한 일이니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사람과는 관계가 없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올 수 있었는데, 이것이 욥의 믿음이죠?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일반인이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사람은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 이유를 따지고 논쟁하고 소송을 걸고 앙심을 품고 그 강도 무리를 찾아가 결판을 낼 것입니다. 욥은 그 당시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욥은 분명히 친구가 많았을 것입니다. 욥이 만약 사람들을 모아서 토적을 찾아가 결판을 낸다면 이 일은 쉽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매우 쉽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빨리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욥의 믿음이 아닙니까? 이 믿음은 너무나 큽니다. 일반인이 해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이러한 한 가지 행동을 했을 때 즉 하나님 앞에 왔을 때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욥은 왜 그렇게 했을까? 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왜 사람들을 모아서 그 토적들을 쫓아가 재산을 되찾아오지 않았을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 일부 사람들은 각각 다른 해법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욥은 그때 돌았어! 그 사람들 찾아가 보복할 줄도 모르고 말이야. 욥은 그때 미쳤어, 정말 멍청해,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하다니!”라고 말하는데, 이런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견해는 아주 황당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욥이 정말 미쳤습니까? 이것을 비범한 이성이라고 합니다! 이 이성은 모든 사람이 다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 이성적입니다! 욥의 이 이성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가 어떤 행동들을 했기에 연결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에 연관되겠습니까? 모두 이 2가지 일과 연관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구비한 것은 진리 실제입니까, 아닙니까? 그가 살아낸 인성은 너무나 두드러지고 너무나 뚜렷합니다. 정말로 순전하고 정직합니다! 욥의 믿음은 일반인의 믿음을 크게 뛰어넘었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감탄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평상시에 만약 소 2마리가 죽거나 전염병으로 양이 몇 마리 죽었을 때 욥이 이런 행동을 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한 후 이런 일을 해냈는데, 이것은 제일 뛰어난 표현입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만은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욥의 이 간증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세요, 누가 욥보다 뛰어납니까? 누가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할 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반성하고 뉘우치고 자신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큰 시련이 임하면 사람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전형적인 규범입니다! 이 간증은 매우 진실합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 아래로 봅시다. “욥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은 욥으로 하여금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 여기에서 무엇을 언급했습니까? 그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 이 두 방면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효과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실제 경력은 무엇을 포함합니까? 그의 실제 경력은 바로 그가 경력한 것이 비교적 깊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의 실제 경력이 그로 하여금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였고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게 하였으며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런 실제 분량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죠? 어떤 사람은 진리만 깨달았다고 말하는데, 진리만 깨달았으면 큰 시련이 닥칠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만 깨달으면 꼭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또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서 한 가지 방면만 언급하지 않고 2가지 방면을 언급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경력 중에서 보다시피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별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인성입니까? 바로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이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지 않는 그 인성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이 아니라 패괴된 인성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욥이 큰 시련이 임한 후 이렇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으로 도달한 효과임을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또 한 방면의 진리와 관련됩니다. 일부 사람들의 인성은 불합격일지라도 그의 소질이 아주 좋고 그도 진리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시련이 임할 때 어떤 때는 제대로 서있지 못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이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도를 들어 어떤 진리든 다 알지만 실행해 내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진리든 다 안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의 소질이 아주 좋고 터득 능력도 아주 좋고 이해력도 풍부한데, 이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진리도 실행해 내지 못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인성이 안 좋습니다. 인성이 안 좋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무엇입니까? 인성이 없습니다. 인성이 없는 사람은 소질이 아무리 좋고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 소용없고 실행해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큰 시련이 임할 때 간증을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인성이 있는 사람이고 둘째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2가지는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이 2가지 조건을 구비해야만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럼 욥은 이 2가지 조건을 구비한 것이 아닙니까? 첫째는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이고 둘째는 하나님에 대해 또 진실한 믿음이 있어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련이 임했을 때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증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모두 인성이 제일 좋고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진리든지 다 조금씩 알고 깨달은 것이 꽤 많지만 어떤 진리도 실행해 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악을 저지르고 어떤 잘못을 범하면 다 지적해 낼 수 있지만 자신은 조금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어떤 악행이든 다 저지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증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할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그의 인성이 너무 나빠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조금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을 때에 그가 해내는 것은 전부 다 악이고 한 가지 선행도 없습니다. 만약 시련이 임한다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련이 없을 때에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데 시련이 있을 때에는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일부 사람들에 대해 매우 반감을 가집니다. 여러 번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해도 그는 전혀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늘 악을 행하고 있고 몰래 나쁜 짓을 하며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아낼 때는 제일 정확하고 제일 분명하게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것이 전부 다 악인 줄 알면서도 계속 하고 있고 추호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완전히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증오하시기에 그에게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더 이상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말한 것은 어떤 사실입니까? 즉 인성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지 악을 행하는 그의 본성 실질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이런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원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인 데다가 진리를 추구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이미 그의 실제로 되고 그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얼마나 큰 시련이 닥치든 그가 살아내는 것은 다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든 아니면 잿더미에 앉아 몸에 난 악창을 긁은 행동이든 아니면 친구와의 대화에서든 다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고 순전한 사람임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탄복하게 하는데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 몇 가지 일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가 큰 시련이 임한 후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었고 성실하고 정직하며 순전함을 추구하고 완벽함을 추구해 나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만약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하여 나중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데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욥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받아야 합니다.) 그럼 당신은 일부 시련이 닥쳤을 때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했습니까? 당신은 어떤 일에서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까? 당신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간증을 잃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반성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악인인지 분별할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이 무슨 일에서 어떤 말을 한 것이 도대체 기반을 무너뜨리고 방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분을 하여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인지에 대해 분별이 없으며, 사람이 한 말과 한 일이 하나님 집의 사역에 유익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집에 그렇게 많은 좋은 일, 하나님 선민이 본분을 함에 있어서 마땅히 효과에 도달해야 할 일도 그는 다 무너뜨리고 다 방해하고 다 그르쳤습니다. 일부 하나님 선민들은 지금까지도 분간할 수 없는데, 이런 사람은 눈먼 것이 아닙니까? 누가 본분을 하는 중에 악인, 적그리스도 역을 맡았는지, 누가 좋은 사람의 역을 맡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적은 힘이나마 바치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역을 맡았는지에 대해 분명히 분별하지 못합니다. 한 교회에 30~50명, 70~80명이 모두 눈먼 사람이고 눈을 뜬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가련합니까, 가련하지 않습니까? 한 교회에 몇십 명이 다 눈을 감고 생활하고 눈을 감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눈먼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할 수 없습니까? 눈먼 사람은 우선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기 쉽습니까? 악인의 편에 서서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자신이 한 일도 잘잘못을 모르는데 바로 눈을 감고 되는대로 한 것입니다. 언제 악인이 와서 방해하는지도 모르고 또한 악인을 좋은 사람으로, 형제자매로 대합니다. 이외에 눈먼 사람은 쉽게 한 가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아무렇게나 이끌어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인도하면 당신은 좋은 사람의 길을 걷게 되고 악인이 인도하면 악인의 길을 걷게 되며 눈먼 사람이 인도하면 눈먼 사람의 길을 걷게 됩니다. 눈먼 사람에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는데, 바로 “젖을 주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굶어죽을 리 없습니다. 돼지 젖도 먹고 개 젖도 먹고 이리 젖도 맛있다고 합니다. 그렇죠? 이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기 쉽습니까? 마지막에 남에게 팔려도 모르고 그를 도와서 돈을 세어 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망쳐져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도 그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감지덕지할 것입니다. 눈먼 사람이 가련합니까, 가련하지 않습니까? 눈먼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눈먼 사람은 교회에서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불신파입니다. 즉 좋은 사람이 인도하면 좋은 사람을 따르고 나쁜 사람이 인도하면 나쁜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남을 따라 맞장구치며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은 도태될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구원받지 못합니다! 지금 해외의 일부 교회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까요? 즉 눈을 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눈먼 사람이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는 이 뜻입니다. 교회에 만약 모두 눈먼 사람만 있다면 이것은 어떤 교회에 속합니까? 이 교회에 이름을 붙이면 “소경 교회”라고 부릅니다. 우아한 이름을 붙이면 “소경무리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정말 골칫거리입니다! 분별있는 사람이 없고 눈을 뜬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교회에 만약 욥이 한 명 나타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길을 밝히는 등잔불이 생긴 것입니다! 길을 인도하는 좋은 인도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죠? (네.) 그럼 여러분이 “소경 무리” 교회에 있다면 욥과 같이 길을 인도하는 이런 등잔불이 있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바랍니다.) 바란다면 욥을 잘 본받으세요! 모두 욥을 본받으면 차츰 하나의 욥 즉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나와서 교회를 이끌 것입니다. 그때면 이 “소경 무리 교회”의 실질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성이 있는 것은 진리 실제가 있어 도달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정상 사람이 구비해야 할 이지를 구비했다면 당신은 시련이 닥칠 때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정상 인성의 그런 이지만 있다면 시련이 임한 후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좀 있고 학식이 좀 있고 책을 좀 읽으면 ‘나야 뭐 가장 이지적이고 생각이 가장 또렷하고 판단이 가장 정확하니까 어떤 일이 닥치든 실수가 생길 수 없지.’라고 여깁니다. 지금 당신은 이렇게 함부로 큰소리칠 수 있습니까? 평상시에, 일이 없을 때에는 당신이 이지 있다고 여기지만 정말 시련이 임하면 당신이 맨 먼저 갈팡질팡하고 맨 먼저 흥분하고 맨 먼저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임한 후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하려면 반드시 진리를 구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주재가 모든 것을 초월함을 확실히 알고 게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맹목적으로 충동적으로 일을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마땅히 구비해야 할 이성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구비한 이성과 정상 사람이 구비한 이지는 구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식이 있는 사람이 구비한 이지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구비한 이성은 구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구별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에게 아무리 이지가 있어도 진리가 없다면 그의 선택과 판단이 정확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틀림없이 여전히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면 그가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아주 유식한 사람이 영적 도리를 얼마간 깨달았다고 여긴다면 그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겠습니까? 그럼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기초가 없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을 인식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기초 위에서 한 선택이 아니라면 모두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가장 이성적인 선택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질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는 기초 위에서 한 선택과 판단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식만 알면 여기에서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제는 분별이 좀 생겼겠지요?

계속 읽겠습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글자 표면으로 해석하면 바로 이지가 있고 사상이 논리에 부합되고 황당무계하지 않으며 적절한 언행과 판단이 있고 적절하고 규범화된 도덕 표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이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간단한 해석이 아니다. 여기에서 욥을 가장 이성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인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표현과 관계된다. 욥은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순복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남이 얻지 못한 인식을 얻게 했다. 이런 인식은 그로 하여금 닥친 일을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게 했으며 따라서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더 정확하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즉 그의 언어, 행위, 일처리 원칙, 일처리 방침은 매우 규범적이고 매우 명확하고 아주 구체적이지 맹목적이 아니고 충동적이 아니고 감정적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되게 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으며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의 베풂과 거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이다. 바로 욥이 이런 이성을 구비했기 때문에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욥의 이성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시 해석했는데, 바로 그가 구비한 진리와 실행 원칙입니다. 이 실제에 근거해 다시 욥의 이성을 해석하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느 때든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도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한 것이 잘못된 도라면 가장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시련이 임할 때에 그의 선택이 완전히 진리에 부합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바로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입니다. 만약 그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진리에 어긋난다면 바로 가장 이지적이지 못한 선택과 판단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맞습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교통하면 확실히 알겠죠. 지금 우리는 “가장 이성적”인 것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무엇을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이라고 하는지를 완전히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럼 지금 “욥의 이성” 윗 단락을 한 번 더 읽어봅시다.

『욥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은 욥으로 하여금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 그의 이런 이성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고,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으며, 그의 인식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게 했고 순복할 수 있게 했으며, 그의 순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고, 그의 경외는 그로 하여금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했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순전하게 되었으며, 그의 순전함은 그에게 지혜가 있게 했고 또한 그를 가장 이성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 단락의 말씀은 욥이 그렇게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한 근원에 대해 가장 좋은 해석을 했습니다. “그의 이런 이성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 이성적인 선택은 일시적 충동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갑자기 떠오르는 기이한 생각이나 성령 감동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즉 그가 평소에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한 효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 추구만 한다면 가장 이성적인 선택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추구는 하지만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과가 없으면 이 추구가 하나의 미지수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추구는 반드시 하나의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 효과는 무엇일까요? 즉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으로 생긴 참된 믿음의 정도입니다. 이 성과가 있어야만 그로 하여금 시련이 임한 후 가장 이성적인 선택과 판단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평소에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한 효과와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가장 간단합니다. 그럼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국을 정하실 때 하나의 큰 시련이 닥쳐 사람이 일어서지 못한다면 이것이 그가 평소에 추구해 도달한 효과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진학을 위한 결정적인 시기에 시험을 잘 치지 못해 진학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공부를 참답게 했는가의 여부, 도달한 효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마지막에 큰 시련이 임했을 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에 진리를 추구해 도달한 효과와 갈라놓을 수 없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일어설 수 있고 나중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데에 이르려면 반드시 무엇을 중요시해야 합니까? 평소에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당신이 소홀히 하면서 시련이 임할 때 갑자기 이겨 내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환상을 해도 소용없고 꿈을 꿔도 소용없습니다! 이방인은 꿈을 좇지만 우리는 꿈을 좇지 않고 현실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평소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만약 아무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실제가 없으니 역시 안 됩니다. 평소에 반드시 추구해야 하고 추구해도 일정한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래야 시련이 임할 때 틀림없이 일어설 수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간증은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가 평소에 진리를 추구해 도달한 효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구체적인 설명을 봅시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심을 믿는 것은 무엇을 통해 달할 수 있습니까? 머리로 되겠습니까? 사람이 지식을 아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과학을 아는 것으로 되겠습니까? 네, 이 한 마디를 사람이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에까지 경력해야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에까지 경력해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경력하세요! 아마 당신의 나이와 관계되고 시간과도 관계될 겁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경력할 때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자연히 믿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특별한 말씀이 한 마디 있습니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다.” 이 “성실”이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의 “성실함” “진실함”은 아주 귀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늘 관념이 생기고 늘 의심하고 늘 하나님 말씀 옆에 물음표를 찍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늘 의심이 생기고 관념이 생기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는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세요, 특별히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보자마자 “이건 진리야! 이건 실제야! 이건 하나님 말씀이야!”라고 믿는 사람이 바로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자마자 믿습니다. 성실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이렇게 분별하면 정확합니까, 정확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가장 정확하고 100% 정확합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사람의 규칙으로 분별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함에 있어서 반드시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는 기초에서라야 진실한 경력이 있게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 경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경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면 바로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관념이 있고 하나님 말씀을 싫어하고 하나님 말씀에 반감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성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씀하시면 “네, 저는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성실한 사람은 다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유가 다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고 말씀하시면 “네! 저는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성실한 사람은 “우린 다 믿습니다! 우린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린 이렇게 하나님께 순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한 말이 사실이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런 단순한 믿음이 있습니까?

지금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자꾸 고칩니까? 이 고친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 맞습니까? 무릇 하나님 말씀이 고쳐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고친 겁니다. 의도적으로 고친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맞고 아무리 좋아도 우린 안 볼 거예요!”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논조가 아닙니까? 이것은 사탄의 음성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진리를 의도적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두어 표현이 완벽하지 못하기에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시 좀 고치시고 풍부하게 하셔서 더욱더 서면어에 맞게 하시고 더 구체적이고 더 전면적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고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완벽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고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하나님 말씀의 실질을 바꾸고 고치고 왜곡하는 것이라야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성실한 사람이 돼야 해!” 이것은 구두어입니다. 그것을 서면어로 “우리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고치는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지 고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쳤다고 말하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질을 바꾸고 하나님 말씀에 포함된 진리의 뜻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야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설교를 더 완벽하고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사람들이 보고 나서 “야! 너무 좋습니다! 이전 설교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깊고 더 완벽해 더 알아보기 쉽고 효과가 더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건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조를 듣고 나서 저는 마음속으로 이들을 증오하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행위이고 적그리스도의 황당무계한 논리이고 사탄의 음성입니다. 반드시 이런 적그리스도를 전부 제명해야 합니다!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 역사를 방해하는 인간쓰레기이고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런 허튼소리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약 그리스도께서 고치셨다면 그런대로 괜찮기에 우리가 보겠지만 만약 사람이 고쳤다면 안 볼 겁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진리에 부합됩니까?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각종 곡식이 자라서 성숙되었을 때 당신이 직접 먹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밀 한 줌을 입에 넣는다면 잘 먹을 수 있겠습니까? 벼 한 줌을 입에 넣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가공해서 당신에게 주어야 합니다. 벼를 식량으로 가공하고 밥을 지어서 당신에게 먹으라고 할 때 당신이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조, 밀, 벼는 이런 것이 아니에요. 껍질 있고 생것인데 당신이 바꿔 익은 것으로 만들었네요. 당신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고쳐서 우리에게 누리라고 하면 우린 안 받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황당한 것이 아닙니까? 어떤 때 그리스도께서 교통하신 후 저에게 한 번 검사하면서 매끄럽지 못한 구두어 부분을 고치라고 하시면 저는 “예!”라고 말씀드리고 좀 고칩니다. 그러면 다들 읽으면서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고치신 겁니까 아니면 사람이 고친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사람이 고친 겁니다.”라고 말하니 “사람이 고친 거면 우린 먹고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건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면 마치 아주 영적인 것 아서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걸 보세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걸 보세요! 하나님 말씀만 먹고 마시고 사람이 조금만 고쳐도 그는 건드리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이 사람이 고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는다면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의 설교 교통은 듣습니까? 형제자매들의 교통은 듣습니까? 형제자매들이 한 그런 아름다운 간증을 봅니까? 이런 것을 당신은 봅니까, 안 봅니까?” 이런 것은 다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능력이 있으면 이런 것도 보지 마세요, 당신이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지 없는지 봅시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황당합니까, 황당하지 않습니까? 황당합니다! 교회에 별별 나쁜 놈이 다 있습니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일부 설교 교통은 제가 정리한 것인데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안에 있습니다. 못 봤습니까? 당신이 그런 단락을 골라내지도 않았잖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딘가 좀 흐리멍덩하고 영적인 것을 구실로 삼으나 사실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수정 또는 사람의 수정을 거치니 원래보다 더 깊어지고 진리 교통이 더 투철해지고 더 구체적이어서 사람이 보고 나면 더욱 깨닫기 쉽고 효과가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나쁠 게 뭐가 있습니까? 사람의 그릇된 논리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왜 그렇게 까다롭습니까? 왜 그렇게 좋고 나쁨을 모릅니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기 혼자 고결하다고 여기며 스스로 잘난 체합니다! 오만하여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치 그가 아주 영적인 것 같지만 사실 조금도 영적이 아닙니다. 그는 제일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지금 무릇 “하나님 말씀을 고쳤다면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한 이런 적그리스도를 전부 제명해야 합니다!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이것은 상면의 명령입니다. 발견하는 족족 제명하세요! 누구도 통사정해선 안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는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이렇게 하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100% 정확하니 이대로 하세요. 이런 어리석은 자는 남겨도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는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가장 큰 소경입니다. 그는 무엇을 진리라고 하는지를 조금도 모르고, 무엇을 옳고 그름이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말씀을 먹고 마셔야 효과가 있는지, 효과가 뚜렷한지 뚜렷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 어리석은 자의 논리입니다. 이런 사람을 모두 제명하면 잘한 것입니다. 필요치 않습니다. 도태됐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다니요! 상면에서 어떻게 먹으라고 하면 그대로 먹으면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효과라고 하는지 모릅니까? 당신은 고친 후의 말씀이 더 좋고 더 구체적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사람이 누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극치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발표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고친다 해도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도 일부분을 고쳤지만 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매끄럽게 했을 뿐입니다. 한 마디가 적은 부분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을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진리를 발표하실 수 있는데 이 일에 대해서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것은 눈먼 것이 아닙니까? 말해 보세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풍부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에 한 획이라도 추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에 금상첨화를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뿐이고 그리스도뿐이며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눈멀었습니까? 당신은 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까? 당신이 그래 하나님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더 완벽하게 고칠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습니까? 사람이 누가 그런 능력이 있습니까? 눈먼 사람이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적그리스도, 이런 나쁜 놈은 전부 제명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저는 이런 사탄의 음성, 적그리스도의 그릇된 논리를 들으면 화가 나고 분개하고 증오합니다. 저는 하나님께도 이 일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치 않으니 마땅히 제명해야 한다! 이 사람들을 제명하는 건 당연하다. 그들을 온전케 할 수가 없다. 하나님 말씀까지 의심하다니, 절대로 그 무슨 좋은 놈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처 교회의 하나님 선민들이 모두 똑똑히 들었지요. 무릇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는 자가 “고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고친 것이면 우린 읽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시면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면 이런 사람도 제명하세요! 하나도 남기지 마세요! 그를 하나님 집에서 물러가게 하세요! 그가 안 가면 하나님 선민이 그를 버리세요! 잘 알아들었지요? 일부 금방 믿어 모르는 사람들, 남에게 미혹된 사람들은 구별해서 대해야 합니다! 만약 3~5년 이상 믿어서 알 만큼 다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바로 적그리스도, 그릇된 자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니 반드시 제명해야 합니다!

어제 저는 또 그릇된 자가 말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인터넷에 업로드할 때 만약 하나님 집의 동영상 옆에 세상적인 것, 저질적인 동영상이 나온다면 이런 채널에는 업로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은 성물이고 세상의 그런 것은 저질적이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물, 하나님 집의 동영상을 더러운 것과 함께 있게 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했는데, 여러분이 이런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그가 이 황당무계한 논리를 말해 달성하려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즉 복음이 밖으로 확장되는 것을 가로막아 하나님 집의 동영상과 하나닙 집의 이런 “이긴 자의 간증”을 세계 각 채널에 업로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비열한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음 확장을 가로막는 마귀 사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이런 사람을 하나님 집에 남겨둬야겠습니까?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땅합니다.) 그는 인터넷 팀에 이렇게 방해하고 파괴하러 왔습니다. 인터넷 팀에 큰 파괴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탄의 야심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맞습니다. 반드시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 확장을 가로막는 마귀 사탄이고 적그리스도이고 악령입니다. 이것은 제일 큰 그릇된 자입니다! 그릇된 자가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릇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 계속해서 더 읽겠습니다.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다.” 사람의 이런 믿음에 의하면 첫째, 사람의 마음 상태가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이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 그의 믿음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시는 사실에 순복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이 먼저 믿으므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빛비춰 주신 후 사람에게 경력 인식이 있으면 나중에 인식하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역사가 생기고 인식이 생깁니다. 믿지 않으면 성령 역사가 없습니다. 성령 역사가 없으면 그는 더욱이 영원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무엇입니까? 성령 역사를 얻는 기초이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시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이르는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믿습니다! 이 말씀에서 말한 것이 바로 진리이니까요. 진리라면 곧 하나님의 말씀이죠. 사람이 고쳤든 고치지 않았든 진리의 실질은 전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이 자체가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믿음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성실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만약 말씀을 몇 글자 고쳤지만 진리의 사실이 더 뚜렷해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효과가 커졌다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고친 것입니까? 이것을 완벽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분명하게 하고 뜻을 더 뚜렷하게 했습니다. 그렇죠?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선민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고 기껏해야 삼분의 일밖에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무슨 까닭에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 않겠습니까? 지금 분명히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질이 낮고 너무 간사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으며 너무 그릇되고 망령돼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별별 어리석은 놈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단락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그의 인식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게 하고 순복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이 있어 도달한 효과입니다. 이 인식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고 순복할 수 있는 표현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련이 임한 후 진실한 순복이 있고 불평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탈하시든 아니면 격타하시든 아니면 징벌하시든 그는 불평이 없었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순복입니다. 하나님의 주재 안배에 대해 이런 인식이 없다면 이런 순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그의 순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다.” 이 순복은 무엇 때문에 더욱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이를 수 있었습니까? 순복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순복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이르는 효과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법칙입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을 알았겠죠.

아래로 더 봅시다. “그의 경외는 그로 하여금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했다.” 이 경외의 제일 뚜렷한 효과는 바로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른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경외야말로 진실한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경외라면 그것은 허위이고 비실제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 봅시다. 무릇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많든 적든 간에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뜻이 조금은 있지 않습니까?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10%이고 어떤 사람은 20%이며 어떤 사람은 30%이고 어떤 사람은 50%이고 어떤 사람은 70%이고 어떤 사람은 90%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몇 %에 도달할 때 그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정확히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경외는 당신을 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가 단지 10%, 20%뿐이면 악에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은 “저는 지금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았으니 끝까지 믿겠습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저는 물러가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그에게 10%, 20% 경외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분명히 경외가 있겠죠. 하지만 시련이 닥칠 때 일어서지 못하고 고문을 받을 때 일어서지 못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의 경외가 아직 악에서 떠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악에서 떠나는 표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너무 클 때, 육체가 고통받아 견디지 못할 때 그가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그의 악행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디까지 도달해야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악에서 떠나 어떤 악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 죄짓는 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그 어떤 일도 저지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표준에 이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 정도에 도달했습니까, 도달하지 못했습니까? (도달했습니다.) 그러면 각 사람마다 자신을 반성해 보세요,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몇 % 되는지?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악에서 떠나는 정도에 도달했는지? 이것은 마땅히 잘 반성해야 합니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순전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면 순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순전한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순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매우 크기에 모든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로 순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럼 또 표현 방식을 바꾸어 말하면 무엇이 순전한 사람입니까? 바로 어느 한 지경 즉 악에서 떠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가 곧 순전한 사람이 되는데, 이 말은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순전하게 되었으며, 그의 순전함은 그에게 지혜가 있게 했고 또한 그를 가장 이성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 말씀은 매우 의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순전한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다음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진정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야말로 순전한 사람이고, 순전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순전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이 결론은 이치에 맞게 잘 풀리는 일입니다. ≪잠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른 사람이라면 바로 가장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럼 왜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어야 가장 지혜있는 사람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그분을 경외하지 않으면 악을 행할 수 있고 그분께 훼멸되고 저주를 받고 멸망되기 때문입니다. 멸망될 사람이 지식이 얼마나 있든지 그것이 지혜있는 사람입니까? 멸망될 사람은 바보이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을 자초하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도 관련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말씀에서 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까? 영혼을 죽이는 이것은 한 사람의 존재와 멸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없어지면 이 사람은 철저히 멸망된 것입니다. 몸이 죽은 것은 철저히 멸망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는 분이야말로 제일 두려운 분입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죽는 것이 두려워 사탄에게 투항하고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이것이 지혜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사탄에게 죽임당할지언정 하나님께 순복하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혜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까? 유다가 된 그 사람들보다 너무나 지혜있습니다! “저는 순교할지언정, 죽을지언정 다시 한 번 태어나도 좋으니 하나님께 죄짓지 않겠습니다!” 사탄 권세를 두려워하고 몸을 죽여 생존하지 못하게 할까봐 두려워하는 그 사람들은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탄에게 무릎 꿇어 투항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리석은 것입니까 아니면 지혜있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는 제 딴에 아주 지혜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가 제일 어리석은 자입니다. 무엇 때문에 어리석습니까? 그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그 한 분의 참 하나님께 죄지었기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진정으로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신은 자녀와 재산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택하겠습니까? 이 양자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욥은 어떻게 택한 것입니까? 욥은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자식과 재산이 다 박탈당했지만 저는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의 선택은 지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은 지혜도 그 속에 들어 있는데 바로 가장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런 순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선택은 가장 지혜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이성적입니다! 하지만 제일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가장 지혜있는 사람이 흔히 그들에게 미치광이,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그럼 오늘 이방인이 어떻게 보든 우리는 진리를 견지하고 무릇 긍정적 사물,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순전한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본받아야 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긍정적 사물은 필연적으로 패괴된 인류의 공격, 훼방, 논단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자연적 법칙입니다. 깊이 패괴된 인류는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긍정적인 사물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순전한 사람이 되는 것,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데에 이르기를 추구함에 있어서 사악한 이방 세계의 비웃음, 훼방, 논단의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되고 마땅히 사실의 진상을 꿰뚫어 보아야 하고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욥처럼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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