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4)
『욥이 하나님의 도를 보애한 것은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술되었다.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 단락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여 물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욥이 첫 번째 시련에서 나타낸 것과 살아낸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음을 보게 한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겪기 전의 욥에 대한 평가와 똑같은 것이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집을 지켜 주고 그에게 복도 베풀어 주었다. 그는 하나님 안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험 후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는데, 그의 실제 표현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갈채를 보내며 만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욥의 눈에는 모든 가산과 자녀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로 하여금 이로 인해 하나님을 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처음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의 보애(寶愛)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에 대한 보애가 모든 것을 뛰어넘었음을 보게 했다. 단지 이번의 시련이 욥에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상을 얻고 또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가산과 자녀를 빼앗기게 된 경력이 있게 하였을 뿐이다.
욥에 대해 말하면 이것은 그의 심령을 씻는 한차례 진실한 체험이자 역시 그의 인생을 충실케 하는 한차례 생명의 세례이고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 자신의 순복과 경외를 검증하는 한차례 풍성한 잔치이다. 이번의 시험은 욥의 신분을 부자에서 단 한 푼도 없는 사람으로 되게 하였고 동시에 또 그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사탄의 참해를 겪게 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단 한 푼도 없음으로 인해 사탄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사탄의 이토록 악랄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고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적대시함과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배반도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영원히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더욱더 불러일으켰다. 그가 “절대로 그 어떤 외부의 요소, 예컨대 가산이나 자녀와 친족으로 인해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등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절대로 사탄의 노예, 가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라고 맹세했는데, 이것은 욥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험의 다른 한 방면에서도 욥은 마찬가지로 수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 속에서 욥이 얻은 것도 상당히 풍부하다는 것이다.
지나간 몇십 년이란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도 얻었는데, 이런 축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게 했고 더욱더 빚짐을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결코 무엇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이토록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이토록 많은 은혜를 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하면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 동시에 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도 있을 수 있기를 바랐고 하나님이 그의 순복과 믿음을 인정할 때까지 그의 순복을 검증할 수 있고 더욱이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이 한차례의 시련이 오니 욥은 스스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여기고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한평생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의 도래는 그의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검증을 받을 수 있는 동시에 정결함도 얻을 수 있음을 뜻하고, 더욱이 그에게 하나님의 칭찬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깝게 올 수 있게 한다는 것도 뜻한다. 욥에게 이런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이번의 시련 속에서 더욱 순전할 수 있게 했고 또한 이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했다. 동시에 그는 더욱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했고 더욱더 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찬송했으며 또한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앙망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간절히 사모했다. 그때의 욥은 비록 여전히 하나님 안중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욥의 경력과 체험을 놓고 말하면 욥, 이 사람의 믿음과 인식은 이미 아주 큰 진보와 초월이 있었다. 즉 그의 믿음이 증가되었고 그의 순복에 목표가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에 더 깊은 진보가 있게 되었다. 비록 이번의 시련이 욥의 심령과 생명을 일신되게 했지만 그는 결코 이로 인해 만족해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그는 이번의 시련 속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을 헤아려 보았고 자신의 부족함과 결점도 성찰해 보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또 묵묵히 기도하면서 다음번의 시련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외가 하나님의 다음번의 시련 속에서 승화(昇華)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간증에 관해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말씀은 성경의 ≪욥기≫와 도대체 구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말씀은 ≪욥기≫와 어떤 관계입니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이것이 ≪욥기≫의 내막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저는 성경 말씀의 “책을 펼치시는 그분”을 연상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욥기≫의 내막 실정을 전부 밝히셨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오늘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특히 성경 속의 모든 비밀과 실정을 완전히 밝히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세 역사가 책을 완전히 펼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이렇게 ≪욥기≫의 내막과 실정을 밝히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욥기≫를 아무리 읽어도 이런 말씀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깊이 읽을 수 있고 이런 내막을 다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에서 보면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 말씀을 터득하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기관이 없는데, 이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알려 주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이 간증을 밝히 드러내신 것은 우리의 두뇌 사유로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밝히 드러내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바로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려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만드신 본보기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욥의 간증의 내막과 실정에 대해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가 오늘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구약 율법시대에서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십니까?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욥의 간증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세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 이 일을 완전히 밝혀 하나님 선민으로 하여금 한껏 눈요기를 하고 생명 진입의 도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자 역시 하나님께서 욥의 간증을 통해 말세에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하나님 자민을 인도하고 공급하고 도와주고 온전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첫 단락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술되었다.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 단락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여 물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욥이 첫 번째 시련에서 나타낸 것과 살아낸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음을 보게 한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겪기 전의 욥에 대한 평가와 똑같은 것이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를 완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잘 장악하시는 분입니다. 사탄은 그럴 수 없고 영원히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탄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욥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는데 사탄은 불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의 관점은 하나님께 저촉되고 하나님과 어긋났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부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완전히 사실에 부합됩니다. 아울러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은 후 간증을 굳게 선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완전히 진실한 것이고 진리이고 실제이며 그 누구도 번복할 수 없음을 충분히 실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며 하나님 안중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다 환히 감찰하신다고 말합니다. 오직 조물주 즉 하나님만이 인류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이 어떤 실질인지를 일찍이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사탄 즉 하나님의 원수는 사람에 대해 진실한 이해가 없고 사람의 실질에 대해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겉면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만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것처럼 감찰하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실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사탄에게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사탄은 조물주가 아니고 인류는 그것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탄에 대해 더 완전한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이 사탄에 대해, 악령의 역사에 대해 아직도 완전히 분별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사탄도 사람의 부족함을 알고 있던데요! 각종 악령들을 보세요, 지금 당신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 당신의 선조가 뭐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다 알고, 당신이 이 한평생 자식 몇을 낳을 수 있는지, 시집을 몇 번 가는지, 가난한지 부유한지도 다 알고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실질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죠? 그럼 이 2가지 일이 모순될까요? 모순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일을 통해 우리는 사탄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생겼습니까? 이방인들은 각종 악령과 거짓 신을 섬기면서 사탄이 정말 능하고 사탄이 만능이라고 여기는데, 그것이 정말 만능입니까? 사실 만능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이젠 이 일에 대해 확신하겠죠? 이것은 욥의 시련과 간증에서 우리가 얻은, 하나님에 대한 얼마간의 인식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탄과 각종 악령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진실한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비록 사람을 통제할 수 있고 사람을 패괴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이 조물주가 아니고 그것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히 사람을 장악하시며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한 가지는 아주 확실합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럼 제가 오늘 교통한 이 몇 마디는 우리가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에서 인식해야 할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기억하세요,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을 읽을 때마다 그 속에서 얼마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은 욥에 대해 투철한 인식이 없습니다. 그것이 욥의 일에서 하나님과 내기를 걸었다가 수치를 당했고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손에 패한 놈입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두 차례 시련으로 인해 우리는 사탄의 실질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것이 단지 사악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도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부 겉면의 일과 육체적 일만 꿰뚫어 볼 수 있을 뿐 사람의 실질은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이외에 또 하나의 가장 진실한 사실은 바로 사탄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고 단지 하나님 수중의 바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하나의 명령을 내리시니 그것이 감히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사실도 보았습니까? 이 사실을 본 다음 우리가 다시 이 관점과 이 진리에 근거하면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시험이나 시련이 다 하나님의 허락 범위 안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큰 붉은 용이 이렇게 발광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선민을 박해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까? 이것도 역시 큰 붉은 용이 하나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효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선민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이자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마주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을 판단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다.
계속 아래로 읽겠습니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집을 지켜 주고 그에게 복도 베풀어 주었다. 그는 하나님 안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방면의 진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욥을 축복하셨는지? 왜 이렇게 욥을 지켜 주셨는지? 많은 사람들이 전에 이렇게 생각해 봤지만 답이 없었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집을 지켜 주고 그에게 복도 베풀어 주었다. 그는 하나님 안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어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아마 예전에 어떤 사람은 ‘난 왜 하나님 축복을 받지 못했을까? 난 왜 그렇게 많은 재산을 얻지 못했을까? 난 왜 그렇게 훌륭한 자식을 많이 얻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얻지 못했는지 이제는 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더욱이 의인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도 않고 패괴된 인류이기 때문에 지금은 아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많은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특별히 저에게서 역사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설교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저에게 그리 많이 깨우쳐 주시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왜 저를 지켜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저를 중용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직접 저를 온전케 하시지 않습니까?” 이런 욕망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일을 대해야 하는지 이제는 답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 그렇게 쓰임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이 주신 위치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드려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그런 축복과 그런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깊이 패괴된 사람이고 욥과 같은 인품이 없고 욥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하나님의 높여주심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높여주심에 대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에서 우리가 마땅히 깨달아야 하고 해내야 할 바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읽고 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 하나님의 높여주심과 특별한 보살핌에 대해 아직도 보지 못하고 아직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없고 아직도 늘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이지가 없고 양심이 없고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래 말씀을 또 봅시다. “시험 후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는데, 그의 실제 표현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갈채를 보내며 만점을 주었다.” 이 말씀 속에는 찾아볼 진리가 있습니다. 매사에 진리를 구하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 말을 다 인정하시죠? (네.) 그렇다면 이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매 마디 말씀마다 진리가 있기에 매번 시련이 임할 때마다 진리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실행할 줄 모른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줄 모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시험 후”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은 시험이 임한 후의 그 결과이고 역시 하나님께서 최종에 얻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얻으려고 하셨던 것, 얻기를 바라셨던 것이 바로 시험 후의 그 결과입니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로 하나님의 마음이 만족을 얻었는가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외에 그 결과에 근거해 사람의 결말도 생기는 것입니다. 시험 후는 다시 말해서 흔히 하나님과 사탄이 싸워서 최후에 도대체 누가 이기느냐 이 사실이 드러날 때입니다. “시험 후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다.” 이 하나의 결과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시험 후 이 결과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사람의 표현에 근거하는데, 사람의 표현은 주로 말입니다. 시험이 끝난 후 사람은 모두 욥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사탄도 하나님도 천사도 거기서 듣고 있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도 듣고 있었고 온 영계와 물질 세계가 다 보고 있고 듣고 있으면서 욥이 어떤 말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욥의 그 한 마디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의 관심을 끄는 초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다……”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대단합니다! 욥이 입으로 범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다.” 그때에도 입으로 범죄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이 한 가지 일이 바로 시험을 겪은 결과입니다. 시험을 겪은 후의 욥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태도로 최후에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실제 표현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갈채를 보내며 만점을 주었다.” 이 “만점”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보통 만족이 아니라 완전히 만족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참 잘했다. 내 요구에 완전히 도달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더 높은 요구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가 조금도 차이없이 완전히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만점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의 눈에는 모든 가산과 자녀 중 어느 한 가지도 그로 하여금 이로 인해 하나님을 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잘 교통해야 합니다. 그 만점은 어떻게 도달한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욥은 이러한 일을 잘 생각해 봤어요. 앞으로 어떤 시험이 임하든지 이 규례대로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맞추면 그때 가서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케 할 거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복하며 “구원에 이르려면 우린 묘한 방법이 있어요! 첫째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때려죽인다 해도 배반하지 않는 겁니다. 이러면 굳게 선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방법이 어떻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앞으로 아버지, 어머니, 자식, 남편(아내)이 죽는다 해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저도 욥처럼 만점을 맞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논법이 어떻습니까?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립되지 않습니까? 욥의 그 간증에서 욥은 무슨 까닭으로 만점을 맞았습니까? 그는 실제 분량을 구비한 것이지 규례를 지켜 운에 부딪친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볼 때는 가끔 운에 부딪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부딪칠까요? 복습한 그 몇 개 문제가 마침 시험문제여서 시험을 잘 치른 결과 합격된 것입니다. 시험은 운에 부딪칠 수 있고 겉면의 일은 우연한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임하여 사람의 분량을 드러내는 것은 운에 부딪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분량이 있어야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도 예전에 심지를 세웠었습니다. “큰 붉은 용에게 붙잡힌다면 나를 때려죽여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거야!” 이런 심지를 세운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결국 감옥에서 고문을 받자 이틀도 안 지나 자백하고 쓰러지고 유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실제 분량이 없으면 그런 드높은 간증을 해내지 못하는데 이것이 한 가지입니다. 이외에 당신은 하나님께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패가 되시고 힘을 더해 주시면 당신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모르고 자기 의지에만 의거하다가 의지에 의거하는 것을 견지하지 못하면 패하여 결국 실패하게 되는데 아주 처참하게 패합니다. 보세요, 욥이 그 시련 속에서 무엇 때문에 만점에 도달했는지? 그에게 이런 실제 분량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런 실제 분량이 있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실증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증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보다시피, 그때 그 시대에는 욥보다 더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욥이 첫손에 꼽혔고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특별히 축복해 주셨고 특별히 보호하고 지켜 주셨습니다. 욥은 그때 어떤 분량에 도달했습니까?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대체할 수 없다.” 이 한 마디 말씀은 욥에게 이런 실제가 있었음을 실증합니다.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고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가산과 자녀를 다 앗아가셨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사람의 마음속에 도대체 하나님의 지위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분량은 욥에 비해 별로 차이 나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정말 이렇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와 가산을 앗아가실 때 당신이 설 수 있는지 없는지 보십시오. 당신은 감히 하나님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도 제일 높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당신 마음속에서의 당신 아버지의 지위는 하나님보다 어떻습니까? 당신 마음속에서의 당신 어머니의 지위는 하나님보다 어떻습니까? 당신 마음속에서의 당신 자녀의 지위는 하나님보다 어떻습니까? 하나하나 가늠해 보세요, 만약 당신이 “저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유일하심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이렇게 간증한다면 분량이 있고 욥의 분량에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욥의 분량에 이르렀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시험이 임하도록 허락하셔서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할 때 사탄이 탄복할까요, 불복할까요? 사탄이 당신의 이 말에 찬성할까요, 반대할까요? 이것은 모릅니다. 그렇죠? 만약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지금 하나님은 저의 유일하심이니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어요. 저는 지금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련이 닥쳐도 굳게 설 수 있고 또 욥처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요.”라고 큰소리친다면, 당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다면 사탄이 옆에서 불복하면서 “큰소리치고 있네! 좋아, 내가 하나님한테 가서 너에게 시험이 좀 임하게 해달라고 말할 거야. 니가 설 수 있는지 어디 보자.”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그때면 훌쩍거릴까봐 걱정됩니다. 이 일에서 큰소리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당신이 한 말은 몇 사람 앞에서 한 것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체 영계에 관계되기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보세요, 큰 붉은 용이 허튼소리만 하고 있는데 전 우주가 다 알고 천사도 알고 하나님은 더욱 알고 계시며 사람도 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큰 붉은 용은 곧 보응을 받게 됩니다. 큰 붉은 용은 어떤 끝장입니까? 이후에 무저갱에서 영원히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끝장이고 악마의 끝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입으로 한 말은 결말과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 말은 정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잡담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정말로 하나님과 관련되고 결말과 관련되는 말을 한 마디 한다면 이 말은 작용을 일으키고 어느 정도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 말에 대해 책임져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컨대, 당신이 다른 사람과 잡담하면서 그 사람이 당신에게 “왜 하나님을 믿어요?”라고 물을 때 “하나님을 믿으면 복받을 수 있으니까 믿고 있죠. 복받을 수 없으면 안 믿어요.”라고 말한다면 이 말로 완전히 끝이 난 것입니다. 사탄이 기억하고 있고 하나님께 있어서도 당신이 복받기 위해 믿는 것이라고 등록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 한 마디 말이 그 사람의 결말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함부로 입으로 범죄하면 그가 한 말이 그의 결말을 정하게 됩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큰소리칩니다. “어떤 사람이 물러가든 난 물러갈 수 없어요!” 큰소리치자 시험이 임하니 넘어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인데 그가 먼저 넘어진 것입니다. 이 말을 함부로 해도 됩니까? (안 됩니다.) 입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주요한 표현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입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에 있는 일부 불결한 것과 비열한 것을 말해서는 안 되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하나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일부 말을 해서는 안 되며, 마음속에서 진리로 가늠해야 합니다. 가늠해 보고 틀리면 그것을 저버려야 합니다. 입으로 범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입니다!
현재 우리가 보다시피, 욥의 이 분량이 어떻습니까? 진리 실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그 어떤 가산과 자녀도 하나님의 지위를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님을 사랑했고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님을 믿었고 모든 것을 초월해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그가 이런 분량에 이르고 이런 실제를 갖췄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박탈하시든지 사탄이 어떻게 그를 공격하고 시험하든지 그는 넘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욥, 이 사람은 그의 자녀와 재산을 다 빼앗아가도 굳게 설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목숨을 앗아간다 해도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그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사실상 정말 그의 생명을 빼앗아갔을지라도 그는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분량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실제입니다. 욥이 이런 진리 실제가 있고 이런 실제적 분량을 갖췄기 때문에 간증을 굳게 섰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이 간증을 만약 규례를 지키는 방식으로 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규례를 지키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합니다. “저는 욥의 간증에서 사탄이 하나님 자민을 시험할 때 먼저 그의 모든 재산을 옮겨가고 또 자녀를 옮겨가고 그다음 사람의 육체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하나의 규례를 총괄해 냅니다. ‘어떤 재산을 옮겨가든지, 어떤 친족을 옮겨가든지, 몸에 어떤 병이 나든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규례를 지키면 그때 가서 틀림없이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습니다.” 현재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실행하려고 합니다. 이 말이 성립되겠습니까?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성립되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도 위험한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육체의 의지와 신념에 의해서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실제 분량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험이 임하면 그 고통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서 당신의 의지 방어선은 지키지 못하고 다 타파될 것입니다. 당신이 세운 심지에만 의거해 규례를 지키면 100% 지킬 수 없습니다. 당신은 큰 붉은 용의 그 경찰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나의 이 몇 가지 수법을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어. 99%의 사람들이 다 감당하지 못해. 보통 사람은 3가지 수법이면 자백하는데, 몽땅 다 말한다고! 그런데 전능신 믿는 사람만 금강석으로 만들어졌어.” 그들의 그렇게 많은 수법도 안 되고 다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이 매우 능해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으로 되고 사람의 능력으로 되었기 때문에 사탄을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다 넘어지고 일찍이 넘어지게 됩니다. 사람은 아무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사람이 그 시각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하고 아주 진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서 사람의 능력으로 되면 최후에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때 만약 하나님에 대해 그런 믿음이 없고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굳게 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잔인함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내려면 사람이 세운 심지에만 의지하고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데에만 의지해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려면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면 그때 가서 하나님께 의지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정상이고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모른다면 어떤 시험이 임해도 다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사람이 어디에 가든 승리함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사람은 시험이 임하지 않아도 무너질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있고 그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수시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받고 수시로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결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시고 그의 힘이 되시고 그의 생명이 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가까워져 수시로 기도하면 힘이 생기고 어떤 일이 닥쳐도 마음속에 믿음이 있게 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힘이 생기고 진리가 있으면 능력이 생깁니다. 이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욥에게 이런 실제 분량이 있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임을 설명합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소에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즉 매사에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매사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이 그의 왼편에도 계시고 그의 앞에도 계시고 그의 오른편에도 계시며 그의 곁에서 그를 감찰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늘 그의 곁에 계심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만약 사람이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시고 하나님은 내 마음에 계시고 하나님은 나를 은밀히 지켜 주시고 하나님은 나를 은밀히 인도하신다’는 것을 여태껏 느끼지 못했다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느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여태껏 이런 느낌이 없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은 틀림없이 아주 작고 작은 것입니다. 작아서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믿음이 제일 작으면 어느 만큼 작습니까? 단지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고 하늘 위에 틀림없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만 인정할 뿐입니다. 믿음이 만약 조금 더 커지면 지상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시인하고 조금 더 커지면 20% 믿음이 생깁니다. 또 조금 더 커지면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에도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30% 믿음입니다. 좀 더 커지면 하나님이 확실히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40% 믿음입니다. 좀 더 커지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또 커진 것입니다. 좀 더 커지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시고 오늘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세요.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우리 스스로 피땀으로 고생해서 벌어온 것이 아니에요. 만약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죽도록 일해도 벌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어요. 단지 고생한 것으로 받았을 뿐이에요.”라고 하는데, 이런 믿음은 욥의 믿음에 가깝습니다. 좀 더 커지면 하나님의 말세 역사는 확실히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더 커지면 “전체 영계, 사탄, 악령, 더러운 귀신마저도 다 하나님의 주재 안에 있고 그것들은 함부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요!”라고 합니다. 당신의 믿음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이런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하늘 위에 계신다는 것만 인정한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방인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할 때 이런 느낌이 들어서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저의 곁에서 저를 보고 계시는 것을 느꼈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느낌입니까, 아닙니까? “특별한 시련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이런 느낌이 없었어요. 그 고문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곁에서 저를 보고 계심을 느꼈어요. 하나님은 정말 진실하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감찰하시면서 저에게 힘을 더해 주셨어요! 그때 사탄이 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곁에서 다 보고 계셨어요! 하나님께서 시종 저를 지켜 주고 계셨어요! 그 시련에서 저는 하나님을 보았어요. 비록 하나님의 본체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았어요! 하나님께서 저의 곁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모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저는 다 알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까, 아닙니까? 이때는 정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시련은 저에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했어요. 예전에 저의 믿음은 아주 작고 작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믿음이 생겼어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것과 비슷해요.” 시련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본체를 보았습니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욥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직접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지 않습니까? 이런 느낌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일부 하나님 선민들은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곁에서 그를 보고 계시고 그의 곁에서 그에게 힘을 더해 주시고 그와 함께하심을 느끼는데 이것이 직접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는 기도할 때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전에 믿음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저 당신의 존재만 인정했을 뿐입니다. 오늘 저는 비록 당신의 본체를 보지 못했지만 직접 눈으로 당신의 존재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바로 저의 곁에 계십니다. 저의 느낌은 아주 분명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인 눈으로 느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에게 이런 경력이 있는 것이 귀중하지 않습니까? 이런 경력은 어떤 것으로 바꿔 온 것입니까? 평소에 느끼고 싶으면 느낄 수 있습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평소에 실컷 먹고 마시며 할 일이 없을 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 당신이 저의 곁에 있음을 느끼도록 저에게 느낌을 주세요.” 당신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죠? 이밖에 당신은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며 나에게 힘을 더해 주신다’라고 느낄 수 있게 하실까요? 시련이 임할 때 사탄이 직접 하나님 선민을 해치지 않도록 그분은 친히 하나님 선민을 지켜 주십니다. 친히 하나님 선민을 지켜 주신다는 것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단지 사탄이 사람을 때려죽일까봐 두려워서입니까? 만약 이 일 때문이라면 매우 간단합니다. 여기서 제일 주요한 의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 선민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하여 이로부터 당신의 믿음을 증가시키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알게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시련을 받을 때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에게 나타내어 당신으로 하여금 영 안에서 그분을 보게 하고 그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고 더욱더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사모하고 추구하게 하며 더욱더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련 속에서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세의 말씀 중 어느 말씀이 응한 것입니까? “불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은 불의 연단 속에 있는 인자를 보았다.”라는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제를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시는 진실한 증거입니다. 무릇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신 말씀은 다 하나님 선민으로 하여금 경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력하게 되면 당신은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이 실제적이고 진실하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력이 있었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성령의 역사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고 깨우쳐 주시면서 당신에게 힘을 더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진리 방면에서 어떤 때는 문득 성령의 깨우침이 와서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이것으로써 당신을 인도합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무릇 영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셔. 나는 하나님을 느꼈어. 하나님은 바로 나의 곁에 계시면서 은밀한 중에 나와 말씀하시고 나에게 계시와 빛을 주시고 나를 인도하고 계셔. 난 하나님은 안 보여도 하나님의 역사는 느꼈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거야. 하나님은 나에게 힘을 더해 주고 계셔.’라고 진실로 느끼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민입니다! 무릇 여러 해 동안 경력하면서 하나님의 이런 역사를 한 번도 경력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곁에 계시고 그와 함께하심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사람은 틀림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이런 특별한 생명 경력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욥은 이런 실제 분량에 도달했기에 비로소 간증을 굳게 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평소의 경력도 아주 풍부했을 것인데 이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욥기≫에는 그의 평소의 경력이 그렇게 많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욥기≫에 욥이 평소에 어떻게 경력했는지를 더 써낸다면 ≪욥기≫ 이 편의 말씀이 매우 많지 않겠습니까? 지금 ≪욥기≫가 모두 몇 자나 됩니까? 적어도 2만 5천여 자는 됩니다. 만약 욥의 평생의 주요 경력을 더 써내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걸은 길을 더 써낸다면 2배로 해야 하기 때문에 ≪욥기≫에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습니다. ≪욥기≫에 생명 진입의 많은 세부 내용, 그리고 욥이 시련을 겪은 세부 내용과 진상을 다 쓰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결과만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다음 몇몇 친구들과의 대화, 사탄이 수치를 당한 것, 표면적인 윤곽은 다 썼지만 실상 내막은 쓰지 않았습니다. 왜 쓰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세에 오셔서 드러내시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하실 때 다시 이 사실과 진상을 드러내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선민에게 사용하도록 주시는 것이고 온전케 되는 사람에게 사용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이 책은 말세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풀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그리스도께서 욥의 간증 경력에 관해 몇 페이지 쓰셨을까요? 이번에 ≪욥기≫에 대한 게시는 29페이지인데 ≪욥기≫ 20페이지를 더하면 거의 50페이지 됩니다. 이 50페이지에서 ≪욥기≫의 내막을 드러내고 풀어 주셨습니다. 전체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한번 다 밝혀 주시려고 하셨는데 대부분 다 주요하지 않고 의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 생명 진입에 관련되는 것, 사람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방면의 말씀을 다 밝혀 주셔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고 진입하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밝혀 주시려고 하셨지만 하나님의 기력이 유한하고 하나님 선민의 소질이 유한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기준에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은 쓰시지 않고 이런 말씀만 쓰셨습니다. 구약 성경의 주요한 것과 가장 중요한 비밀은 기본상 다 열어 주셨는데,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는 ≪욥기≫에 대해 밝혀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느낌이 어떠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만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밝혀 주신 이 한 편만으로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크십니다. 여기에서 많은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 진입의 길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데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 한 편의 게시(揭示)에서 전부 다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밝혀 주신 욥의 이 한 편의 말씀을 읽고서 이해하고 깨닫고 완전히 진입하기만 하면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터득할 수 있습니까? (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께서 ≪욥기≫를 밝히신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매 마디마다 진리가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 한 편의 말씀을 읽고 깨달으면 당신의 생명 진입에 길이 생기는데,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는가에 길이 생기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간증하는가에 길이 생기며 영계의 진실한 동태를 어떻게 보는가에 길이 생깁니다. 이외에 어떻게 온전케 될 수 있고 어떻게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가에도 길이 생기고 투득하게 됩니다.
“욥은 처음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의 보애(寶愛)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에 대한 보애가 모든 것을 뛰어넘었음을 보게 했다.” 사람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가 만약 가장 높다면 그의 재산, 그의 자녀,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초월하지 않게 됩니다.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가 가장 높다는 것은 어떤 방면에서 나타납니까? 2가지 방면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보애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도에 대한 보애입니다. 하나님의 도에 대한 보애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이 분량은 바로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분량입니다. 이런 분량이 있으면 시험을 겪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를 내놓고 사탄과 내기하실 수 있으며 그의 몸에서 그를 칭찬하실 수 있고 사탄에게 도전하십니다. 그럼 이 일에서 또 무엇을 보게 됩니까? 일부 시험은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표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있는 일부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그 무슨 결과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내주어 사탄과 내기하시고 사탄에게 증거하여 사탄으로 하여금 태도를 표시하게 하시는데, 이 사람의 분량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이런 하나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이 분량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이런 시험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왜 그렇게 큰 시험이 임하지 않을까요?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분량이 부족한 데다가 이런 시험을 이겨 낼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또 “일부 사람은 분량이 없어 시련이 임하니 유다가 되었는데, 그건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누가 얘기해 보겠습니까? 이 일을 해석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이 아니니 드러난 겁니다.)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도 아니니 하나님께서 일부 시험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요구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민도 아니고 남의 꽁무니를 따르며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니 하나님은 거들떠보시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 몸에서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를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냥 드러나고 도태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에휴, 그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유다가 됐네.’라고 여기고 사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그를 내놓고 나와 내기하지도 않았어! 그가 한 것을 하나님도 상관하지 않고 그가 유다인지 아닌지도 상관하지 않는데 하나님과 무관해.”라고 말합니다. 단지 우매한 사람이 거기서 함부로 평론하고 함부로 말할 뿐 하나님께 있어서는 열외로 치십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 자민들입니다. 진정한 하나님 자민들에게는 매사마다 하나님의 안배가 있는데, 그것은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일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옥살이하도록 안배해 감옥에서 연단받고 간증을 하며, 일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타지에서 본분을 하도록 안배하십니다. 일부 사람들이 어떤 간증을 해야 하는지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이외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자, 남의 꽁무니를 따르며 맞장구를 치는 자, 마구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아주 많은데, 그들의 성공 실패는 인정되지 않고 버텨냈을지라도 구원받지 못하며 실패해도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꿰뚫어 봐야지 함부로 규례에 맞춰서는 안 됩니다.
아래 더 읽겠습니다. 『욥에 대해 말하면 이것은 그의 심령을 씻는 한차례 진실한 체험이자 역시 그의 인생을 충실케 하는 한차례 생명의 세례이고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 자신의 순복과 경외를 검증하는 한차례 풍성한 잔치이다. 이번의 시험은 욥의 신분을 부자에서 단 한 푼도 없는 사람으로 되게 하였고 동시에 또 그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사탄의 참해를 겪게 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단 한 푼도 없음으로 인해 사탄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사탄의 이토록 악랄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고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적대시함과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배반도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영원히 지키려는 그의 마음을 더욱더 불러일으켰다. 그가 “절대로 그 어떤 외부의 요소, 예컨대 가산이나 자녀와 친족으로 인해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등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절대로 사탄의 노예, 가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라고 맹세했는데, 이것은 욥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험의 다른 한 방면에서도 욥은 마찬가지로 수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 속에서 욥이 얻은 것도 상당히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 단락 말씀에 시련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유익한 점과 수확과 온전케 함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 선민이 시련을 겪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간증하는 것만이 아니고 가장 주요한 것은 하나님의 온전케 하심을 얻는 것인데,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하나님을 위해 간증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부분에서 틀리는지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간증을 누리시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을 시험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러면 하나님 뜻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요하게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다음 비로소 사탄을 욕되게 하고 사탄을 패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려면 사람을 택하셔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온전케 될 만한지, 누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보십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분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온전케 하심을 얻지 못하고 이런 가치 있는 시련을 얻지 못합니다. 욥이 그 당시 그의 그런 분량대로라면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순전한 사람”, 이 경지에 이르러 아주 훌륭한데, 그럼 하나님께서 왜 또 그를 시련하셨을까요? 그를 더 훌륭해지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그 시련에서 또 무엇을 얻었을까요?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욥은 시련이 임하기 전에 사탄에 대해 인식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진실한 인식이 없었으며 영계의 진실한 동태에 대해서도 얼마 깨닫지 못했고 거의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어떤 관계인지, 사탄이 하는 짓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 모든 것에 대해 욥은 조금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시련을 겪고 욥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시련하려 하시는지, 사탄이 왜 사람을 공격하고 시험하는지, 사탄이 어떤 실질이고 어떤 놈인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련하시고 사람에게 상을 주신 후 또 거두어 가시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런 일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욥은 현재 마음눈이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과 비하면 경지가 더 높아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 시련이 욥에 대해서 온전케 함일까요? (네.) “욥이 얻은 것도 상당히 풍부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실제적입니다. 시련 이후 사람은 생명 경력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사탄에 대한 인식에서, 영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에서 모두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는 것, 즉 시련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효과는 사람이 평소에 추구하여 얻는 효과보다 클까요, 작을까요? (큽니다.) 많이 큽니까? (네.) 뚜렷하게 많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차례 큰 시련에서 사람이 얻게 되는 것과 인식하게 되는 것은 평소의 경력으로는 영원히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과 같습니다. 만약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그가 70년을 더 산다 해도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드시 시련 속에서라야 볼 수 있고 시련이 없으면 얻을 수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이렇게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경력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잔치”입니다. 이 말이 적절하지 않습니까? 이 잔치에는 누가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사탄이 있고 사람도 있고 천사도 있는데 모두 곁에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이 잔치는 풍성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잔치에 참석하기만 하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되고 영계의 진실한 동태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되며 하나님의 원수, 인류를 패괴시킨 괴수 즉 사탄에 대해서도 인식이 있게 됩니다. 이외에 사람이 땅에서 도대체 어떤 역을 맡았는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이 진정한 인생인지, 인생의 모든 비밀을 이렇게 큰 시험을 통해 전부 드러내고 전부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보게 합니다. 이 한차례는 시야를 넓히고 한껏 눈요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럼 천지간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계의 이 모든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비밀이 아닙니까? 고대에 그렇게 많은 현인(賢人)과 성인(聖人)들은 이렇게 풍성한 잔치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여전히 일무소득인 것입니다.
그 아래 단락을 더 읽겠습니다. 『지나간 몇십 년이란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도 얻었는데, 이런 축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게 했고 더욱더 빚짐을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결코 무엇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이토록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이토록 많은 은혜를 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하면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 동시에 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도 있을 수 있기를 바랐고 하나님이 그의 순복과 믿음을 인정할 때까지 그의 순복을 검증할 수 있고 더욱이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이 한차례의 시련이 오니 욥은 스스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여기고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한평생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의 도래는 그의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검증을 받을 수 있는 동시에 정결함도 얻을 수 있음을 뜻하고, 더욱이 그에게 하나님의 칭찬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깝게 올 수 있게 한다는 것도 뜻한다. 욥에게 이런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이번의 시련 속에서 더욱 순전할 수 있게 했고 또한 이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했다. 동시에 그는 더욱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했고 더욱더 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찬송했으며 또한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앙망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간절히 사모했다. 그때의 욥은 비록 여전히 하나님 안중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욥의 경력과 체험을 놓고 말하면 욥, 이 사람의 믿음과 인식은 이미 아주 큰 진보와 초월이 있었다. 즉 그의 믿음이 증가되었고 그의 순복에 목표가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에 더 깊은 진보가 있게 되었다. 비록 이번의 시련이 욥의 심령과 생명을 일신되게 했지만 그는 결코 이로 인해 만족해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그는 이번의 시련 속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을 헤아려 보았고 자신의 부족함과 결점도 성찰해 보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또 묵묵히 기도하면서 다음번의 시련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외가 하나님의 다음번의 시련 속에서 승화(昇華)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언일행(一言一行)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고 있다. 욥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또 한차례의 시련이 예정대로 임한 것이다.』
매 단락 하나님 말씀마다 많은 진리가 있는데, 다 사람이 실제 경력에서 얻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욥의 영적 경력은 차츰차츰 높아졌는데 아주 실제적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밝혀 주지 않으셨더라면 ≪욥기≫만 읽어보고 욥에 대해 진실로 이해하고 알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욥기≫를 몇 십년 읽고도 나중에 욥에 대해 알기는커녕 오히려 로봇같은 욥을 읽어내고는 욥이 그 몇 마디 말뿐이고 그만한 일뿐이고 생각이 없었다고 여기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것만 아는 것 같다고 여깁니다. 다른 것은? 욥이 어떻게 경력했는지,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했는지, 어떤 기대가 있었는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었는지, 이런 것은 다 모릅니다. 이번에 하나님께서 말세에 역사하여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실 때 욥의 사적을 전부 드러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시야를 넓히게 하셨고 한껏 눈요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욥은 명실상부한 성인이고 진정한 성인입니다! 이 말은 실제적 면이 있습니다. 이 실제적 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 시대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 실제 효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이 이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가 순전한 사람이고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야 순전한 사람으로 될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러야만 순전한 사람으로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순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에게 과오가 있겠습니까? 큰 과오는 없습니다. 왜 큰 과오는 없다고 할까요? 이렇게 큰 시험이 임해도 간증을 굳게 섰는데 또 무슨 과오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큰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데 일부 작은 일에서는 더 훌륭하고 더 완벽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입니다. 욥은 실제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그를 성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명실상부한 성인인데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련은 사람을 드러냅니다! 욥은 그렇게 큰 시련이 임해도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재산을 약탈한 그 악인들을 저주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도를 지켰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고 훼방하는 상황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아내마저 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권했을 때에도 그는 간증을 굳게 섰고 가장 무게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이 도는 대단합니다! 왜 악에서 떠나야 할까요? 하나님께 화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에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욥의 이 한 마디 말은 지금까지 6천년 내내, 패괴된 인류,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 중에 아무도 깨달을 수 없고 아무도 이 말에 닿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욥처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욥밖에 없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어떻게 해낸 것입니까? 어떤 인식이 있어야 합니까? 어떤 진리를 깨닫고 어떤 일을 꿰뚫어 보아야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을 알려 주실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에게 이런 계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그는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복을 받기 위해서이고 복을 받지 못하면 믿지 않고 만약 화를 받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말세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 이런 속셈입니다. 욥은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 말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고수 중의 고수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욥이 이런 말을 한 근거는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말을 했는지? 누가 이 일을 투철히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 꿰뚫어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이 일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그는 고수 중의 고수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마디 진실한 말을 알리겠습니다. 이 말은 모든 영웅호걸을 곤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어집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모든 신학 박사를 곤란하게 하고 모든 종교 목사를 곤란하게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개별적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체 인류의 6천년 역사에서 이 말을 깨닫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 대다수 사람들이 몽롱 속에, 꿈속에 있고 깨어난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누가 이 말을 분명하게 풀이한다면 그는 정말 깨어난 사람입니다. 욥, 이 사람의 경력은 정말 대단하고 비교적 깊습니다! 그의 생각과 깨달음이 제일 높은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있었습니까? 그는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멸망하고 화를 받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위험한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도태되는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화를 받는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는지를 꿰뚫어 보았습니까? 그는 패괴된 인류가 어떻게 사악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이 사실을 꿰뚫어 보았습니까? 그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도 반드시 화를 받을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까?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이것을 꿰뚫어 보았을 때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다 화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추구하면서 화를 받지 않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이 일의 심각성을 본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럼 말세의 사람 중에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이시니 하나님을 믿으면 복만 받고 절대로 화를 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런 오해와 관념이 있어 결국 징벌을 받고 화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말세의 사람은 욥처럼 명석하지 못합니다. 말세의 사람은 다 “취해” 있는 것이고, 욥은 “홀로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옛 사람의 말을 터득하면 적합할까요?
“지나간 몇십 년이란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도 얻었는데, 이런 축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게 했고 더욱더 빚짐을 느끼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결코 무엇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이토록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이토록 많은 은혜를 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욥이 어떤 인품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중국에는 또 “공로가 없으면 봉록을 받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욥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그렇게 큰 복을 받고 더욱더 불안함을 느끼고 더욱더 빚짐을 느꼈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토록 큰 축복을 누린다’고 느껴져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여기에서 욥, 이 사람의 인품을 말했는데,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까?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물 한 방울의 은혜라 해도 용솟음치는 샘물로 갚아야 한다”라는 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욥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보기에 욥, 이 사람이 좋습니까? 하나님의 그토록 큰 축복을 누리면서 그는 더욱더 불안함을 느꼈고 더욱더 빚짐을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토록 큰 축복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빚져서 마땅히 하나님께 보답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을 좀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에게 이런 심리상태가 있고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고 이런 불안감이 있었다면 그 당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늘 어떤 말을 했을까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이것은 상상할 수 있겠죠?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저를 너무나 축복해 주셨음을 저는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고 둘째, “하지만 저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해 당신께 빚짐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저는 마음이 불안해 당신을 위하여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며 그리고 또 “하나님,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당신을 만족케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무엇을 추구해야 당신의 소원을 만족케 해드릴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욥의 이런 기도에서 우리는 또 욥의 어떤 방면을 볼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영 안의 진실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한 것과, 하나님과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진실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입니다. 욥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남의 이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까?’ 이 일은 틀림없이 욥의 마음속의 제일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계속 이 일을 생각하고 이 일을 그의 마음속에서 없애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보답하지?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잘 대해 주셨는데 하나님은 아주 진실하셔. 만약 하나님께 보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살 자격이 없고 사람으로 불릴 자격도 없어!’ 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이런 인성이라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까? 마음씨가 제일 착한 사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지금의 부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욥과 같은 이런 심리상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성은 별로입니다. 욥, 이 사람은 가장 착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는 욥보다 더 착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세에 욥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은데, 저는 확실하게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욥, 이 사람의 인품은 아주 뛰어나고 아주 훌륭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은 아주 진실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이런 사모함이 있었고 이런 심리상태가 있었으며 하나님께 빚짐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가장 좋은 심리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심리상태는 아주 좋은 것이고 최고로 하나님께 축복받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에게 이런 심리상태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당신의 심리상태는 무엇입니까? 몇 마디 말로 개괄해 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보세요.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온전케 될 수 있습니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저는 조급합니다. 답을 알고 싶습니다!” 모두 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제가 도대체 하나님 자민인지 아니면 효력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신 마음속에서는 어떤 무게입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어떤 결말입니까?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집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지위도 없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당신만 믿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축복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당신의 지켜 주심을 보았습니다. 제가 살아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이 몇 마디밖에 할 수 없는데 이런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별로이고 정상적 인성이 아닙니다. 정상적 인성의 실제가 너무나 적고 계속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는데, 사람이 깊이 패괴되어 심리상태가 좋지 않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또한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치명적인 부분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는 당신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족한 것이 바로 진리이니 진리를 추구하기를 사모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건 다름이 아니라 진리만 얻는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제가 당신을 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낼 수만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저에게 이런 사모하는 마음만 있어 의에 주리고 목마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이렇게 기도한다면 이런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런 심리상태입니까? 이런 심리상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없고 성령 역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심리상태가 아주 중요합니다! 또 일부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있을까, 없을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이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면 또 없는 것 같아.’ 온종일 궁리하면서 있다 없다 하는데, 이런 사람의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시련이 좀 임하고 여의찮은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며 계속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기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이런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성령 역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각종 사람의 심리상태를 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욥의 심리상태를 보고 다시 우리 자신의 심리상태와 대조해 보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지,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지, 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지, 왜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없는지, 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게 됩니다.
욥은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아내, 자녀, 재산을 다 빼앗겨도 나는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 이런 실제, 이런 심리상태, 이런 믿음을 구비한 사람이 있다면 복을 받습니다. 당신은 지금 구비했습니까? 아직도 얼마나 차이 납니까? 만약 당신에게 욥과 같은 그런 시험이 임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재산과 자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한 가지만 빼앗아가도 당신은 버티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집을 빼앗기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넘어지며 입으로 죄를 범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을 거두어 가도 안 됩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좀 받고 고문을 좀 받으면 곧바로 유다가 되는데, 목숨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을 욥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욥의 분량, 욥의 실제, 욥의 인품, 욥의 믿음, 욥의 경외, 욥의 순복을 구비해야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욥과 비교해 보고 나서도 감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겠습니까?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다면 이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의 믿음도 욥을 따라잡았습니다. 저를 축복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합당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의 믿음은 욥보다 큽니다. 욥이 깨닫지 못한 진리도 제가 다 깨달았는데 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까요?” 이런 말을 하면 더욱더 이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들은 도는 많지만 당신의 분량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까? 이런 효과에 도달했습니까? 당신이 들은 도가 아무리 많아도 이런 분량과 이런 실제는 없습니다. 욥의 믿음, 욥의 사랑, 욥의 순복, 욥의 경외를 당신은 한 가지도 구비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들은 도가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실제로 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욥보다 설교를 잘한다 해도 쓸모없고 실제 분량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조건에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욥에 대해 교통할수록 더 탄복하게 되는데, 욥에 대해 알 수 있겠죠? (있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 주셔야 합니다.
계속해서 아래를 봅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하면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란 동시에 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도 있을 수 있기를 바랐고 하나님이 그의 순복과 믿음을 인정할 때까지 그의 순복을 검증할 수 있고 더욱이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욥을 보세요, 그는 자기의 분량에 대해, 자기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어느 정도 실제가 있다고 느껴졌지만 결점도 있고 아주 완벽하지 못해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순복할 수 있고 당신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뜻에 부합되었는지, 당신의 요구에 이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경력 중에서 제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가도록 기회가 되시면 당신께서 저를 검증해 주시길 바랍니다.’ 욥에게 이런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욥이 만약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무엇을 설명합니까?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계속 진리에 더 깊고 더 실제적으로 진입하기를 요구하고 자기의 분량이 자라나 시련 속에서 승화되기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더 많이 고통받고 더 많이 시련을 겪고 분량이 더 크게 자라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에 이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것이 욥의 추구이고 욥의 심지입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 분량이 자라나는 것을 중요시하고 늘 자기의 기존의 분량과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에 대해 만족해 하지 않고 자신에게 아직도 부족함이 있고 아직도 분량이 부족하고 아직도 분량이 너무 작다고 늘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입니다!
현재 일부 사람들은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무엇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한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분량이 자랐다고 여기고, 한동안 다들 자기를 부러워하면 자기 분량이 자랐다고 여기며 만족해 하고, 한동안 새 빛을 조금 말할 수 있으면 만족해 하며 “극에 달하고”. 한동안 다들 그에게 탄복의 눈길을 던지면 유아독존하고 누구에게도 불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메스껍게 하고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기 주제를 모릅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실제 분량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말한 것은 어떤 때는 사람이 한창 경력하고 있는 것이고 어떤 때는 사람이 금방 본 것이지 사람이 완전히 살아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무한하며 끝이 없는 일입니다! 생명 진입은 끝이 없는 일입니다. 이방인들이 기술을 배울 때 어떤 말을 합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합니다. 진리에 진입하는 일도 역시 평생 경력하고 배워야 하는데 끝이 없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당신에게 양심적 사랑만 조금 있어 “저는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가장 얕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뒤섞임이 너무 많고 시험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이런 사랑이 만약 시련을 겪은 후 이것저것 빼앗긴다면 그래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만약 시련을 겪고 굳게 서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얕은 것은 바로 양심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 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지켜 주심을 보았으니 저는 하나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얕은 것인데 사랑한다는 뜻이 조금 있습니다. 가장 얕은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실한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기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초월해 자기의 부모, 자녀, 아내(남편), 모든 재산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시련을 겪고 굳게 설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랑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랑이 시련을 이겨 낼 수 없다면 그 사랑은 부족하고 불합격이며 분량이 너무 작습니다. 욥은 생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늘 자기 분량이 너무 작다고 여기고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기도가 진실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하나님, 당신에 대한 저의 경외는 도대체 어떤 분량인지, 만약 시련이 닥치고 당신께서 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신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믿음이 도대체 당신의 요구 표준에 이를 수 있을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부로 큰소리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분량이 작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저에게 역사해 주시고 저에게 더 큰 믿음을 더해 주시고 저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당신의 표준에 부합되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이것은 욥이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한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늘 이렇게 교제했습니다. 그러므로 적합한 때가 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련이 임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한차례 시련이 하나님에 대한 욥의 다년간의 기도, 간구, 소망을 다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욥의 순복을 온전케 하시고 욥의 그 간증을 온전케 하시고 욥이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는 것을 온전케 하셔서 욥으로 하여금 하늘을 떠받치고 우뚝 서게 함으로써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이루려고 하신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도대체 무엇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축복입니까? 물질적 축복입니까? 바로 생명의 온전케 함과 생명의 진보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간증을 굳게 서는 것이고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욥이 얻은 것이 이런 것이 아닙니까? 욥이 하나님의 이런 축복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재산과 모든 물질적 축복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그런 것들의 지위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러 차례의 시련이 임했을 때 욥은 입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고 그 원수들을 저주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욥의 마음속에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이 가장 보애(寶愛)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믿음, 그의 순복, 그의 경외가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것을 논했습니까? 율법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것을 가장 많이 논했습니다. 다니엘의 그 간증, 선지자와 성도들의 간증이 하나님 선민 중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는 것을 논했습니다! 그럼 욥이 시련 속에서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었는데, 이 사실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이 100%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마지막에 이렇게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내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음을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