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에 관한 설교 교통 (3)

『3)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주동적으로 돌려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한 후 사탄은 물러갔다. 뒤이어 욥에게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이 들이닥쳤다. 먼저 소와 나귀가 빼앗기고 종이 살해되었으며, 이어 양떼와 종들이 불에 타죽었고, 그다음 낙타가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되었으며, 나중에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빼앗겼다. 이 일련의 공격은 욥이 처음으로 시험을 겪으면서 받은 고통이다. 이번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단지 욥의 가산과 자녀만 겨냥하고 욥 본인은 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욥은 거액의 가산을 소유한 부자에서 순식간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이 타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정확히 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욥은 오히려 그의 비범한 면을 나타냈다.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묘사되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것은 욥이 여러 가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을 들은 후의 첫 반응이다. 우선 그는 결코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고 당황스러움도 표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분노나 증오도 표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이 모든 재앙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더욱이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의 시련이 그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의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어 가려 한 것임을 확신했다. 그때의 욥은 마음이 아주 평온했고 또한 아주 맑았다. 그의 순전하고 정직(역주: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한 인성은 그로 하여금 이성적으로, 자연적으로 그에게 임한 재앙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때와 달리 냉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겉옷을 찢고”는 그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고, “머리털을 밀고”는 그가 신생아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왔음을 뜻하며,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는 그가 알몸으로 세상에 왔다가 지금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신생아처럼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 임한 이 모든 일을 대하는 욥의 이와 같은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은 신뢰의 범위를 벗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그의 순복이다.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베풂에 감사를 드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거둠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었고 더욱이 그의 목숨을 포함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주동적으로 돌려드릴 수도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복은 인류 중에서의 본보기이고,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이 구비해야 할 인성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는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체험했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했고 또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임의로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도 어떤 원망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설령 그 시각 그의 육체를 거두어 가도 기꺼이 원하고 아무런 원망도 없다고 고할 수 있었다. 그의 이 모든 표현은 다 그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욥, 이 사람이 단순하고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하고 착하기 때문에 그가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고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초상에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인도한 것이나 그가 만물 중에서 본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마음과 행위, 표현과 일 처리하는 원칙을 규범화했다. 오랜 시일이 지나 그는 그의 경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가 생긴 동시에 악에서 떠나는 데에도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욥이 지킨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성실하고 단순하고 착한 인성을 구비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 경력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는 인식도 구비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탄의 이처럼 악랄한 공격에서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시련이 올 때에 하나님을 실망케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 있었다. 비록 첫 번째 시험에서 욥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후세 사람들이 일생 동안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의 “간단”함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욥의 이상의 표현을 구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 욥의 이 “간단”한 표현을 마주하고 또 오늘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칭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표명한 “절대적으로 순복하고 죽기까지 충성하자”라는 구호와 결심을 대조하면 너희는 온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부끄럽지 않은가?

네가 성경 본문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이 모든 것을 볼 때 어떤 반응이 있겠는가? 많은 생각들이 연이어 떠오르지 않는가? 아주 놀랍지 않은가? 욥에게 닥친 시련을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라는 이 단어로 묘사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욥에게 시련이 왔을 때 그 정경이 문자적 묘사를 통해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게 했는데, 하물며 진실한 장면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보다시피, 욥에게 임한 것은 한차례 “연습(演習)”이 아니라 “실탄 무기를 소지한 정규적인 싸움”이었다. 그에게 임한 이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조작한 것인가? 당연히 사탄이 한 것이고 사탄이 직접 손을 써서 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말씀했는가?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그것에게 하나의 조건을 주었는데, 이 시험이 곧 욥에게 임한 것이다. 이 시험이 욥에게 임했을 때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 사탄의 악랄함과 사람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함을 느끼게 했다. 이로부터 보다시피, 그때 시험의 잔인한 정도는 글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 사람을 해하는 악랄한 본성과 사탄의 추한 몰골은 그때 여지없이 폭로된 것이다! 그것이 이런 기회를 빌어, 하나님이 그것에게 허락한 기회를 빌어 욥에 대해 조금도 사정 두지 않고 미친 듯이 해쳤는데, 해친 수단과 잔인한 정도는 현재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자 현재의 사람들이 전혀 견뎌 낼 수 없는 것이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고 시험 속에서 간증을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욥이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사탄과 한차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대결을 펼쳤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이번의 대결에서 욥은 온 산의 우양과 모든 가산을 잃었고 그의 자녀들도 잃었지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를 포기하지 않았다. 즉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그의 가산과 그의 자녀들을 잃을지언정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를 지키고 그의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성경 본문에 욥이 가산을 잃은 전 과정이 간결하게 기술(記述)되었고 또한 욥의 표현과 태도도 기술되었다. 간명하게 핵심을 찌른 문자 기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욥이 마치 아주 “가볍게” 이 시험을 대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정말 사실의 진실한 장면을 원상복귀하고 또 사탄의 악랄한 본성에 결부시키면 이 몇 마디 말로 묘사한 것처럼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며, 진실한 장면은 이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대하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대하는 사탄의 참해와 증오 정도이다. 만약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해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틀림없이 조금도 사정 두지 않고 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바라지 않고 또한 하나님 안중의 의인,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사탄을 배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그것에게 허락한 이 기회를 빌어 조금도 사정 두지 않고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다 욥에게 가한 것이다. 보다시피, 욥이 몸과 마음에서 육체까지, 외부에서 마음속에까지 받은 고통은 그토록 그토록 심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기에 성경의 기록에서 당시 욥이 고통받을 때의 심정을 약간이나마 체험할 수밖에 없다.

욥이 지킨 순전함은 사탄을 수치당하게 하고 허둥대며 도망하게 했다

욥이 이런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보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또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느낌은 어떠했겠는가? 당연히 마음이 몹시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픔으로 인해 자신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할 리 있겠는가? 답은 그가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사탄에게 기회를 주어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의 욥의 의를 실증하게 하였고 또한 사탄에게 기회를 주어 그것의 사악함을 드러내고 그것의 비열함을 드러내게 하였으며 더욱이 욥에게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탄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향해 그의 의를 간증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을 간증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정확하여 틀림없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사실상, 욥은 이미 사탄을 이기지 않았는가? 여기에 욥이 말한 가장 대표적인 말이 있는데, 즉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이다. 그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그는 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는데, 욥이 한 이런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음을 실증했으며, 하나님의 칭찬이 그른 데 없고 하나님이 칭찬한 이 사람이 의인임을 실증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바로 욥이 하나님을 위해 한 증거이다. 바로 이런 한 마디 일반적인 말이 사탄으로 하여금 듣고 두려워하게 했고 수치당하고 허둥대며 도망하게 했으며 더욱 사탄으로 하여금 속수무책이 되게 했다. 또한 바로 욥의 이 한 마디 말이 사탄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의 기묘와 위력을 느끼게 했고,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가 마음속에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을 보게 했으며, 더욱이 사탄으로 하여금 작디작은 한 사람의 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나타낸 강대한 생명력도 보게 했다. 첫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하고 말았다. 비록 그것이 “견식은 늘었지만” 욥에 대해 그만두려 하지 않았고 그것의 악랄한 본성도 결코 이로 인해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계속 욥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그것이 또 하나님 앞에 왔다……』

욥의 간증을 읽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할 몇 방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반드시 영계 싸움의 진실한 내막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인간 세상의 모든 시련, 재난, 환난의 근원을 해결합니다. 즉 사람에게 임한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인지, 이 근원적인 문제를 꿰뚫어 보면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합당한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제일 관건입니다. 영계 싸움의 진실한 내막은 인간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전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영계의 싸움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를 몰랐고 사탄이 사람 몸에 무엇을 하는지, 하나님께서 사탄을 이용해 효력하게 하면서 사탄에게 무엇을 하도록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최종에 이르시려는 효과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하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럼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투득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함에 있어서 가장 관건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첫 방면의 진리입니다. 두 번째, 사탄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면이 있습니까? 사탄이 사람에게 하는 것에서 패괴시키는 것 외에 그것이 무엇 때문에 또 하나님 선민에게 화를 입히고 하나님 선민을 박해하여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할까요?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간계와 속셈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방면의 진리입니다. 세 번째 방면, 욥은 무엇 때문에 아름답고 드높은 그런 간증을 해낼 수 있었습니까? 욥의 간증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복에서 온 것입니다. 그럼 그의 경외와 순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이 진리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렇게 오래 역사하여 최종에 온전케 하신 것은 바로 욥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입니다. 욥이 시련을 받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됐을까요? 70세였습니다. 사람의 일생을 놓고 말할 때 70세는 어떤 개념입니까? 바로 노년에 이른 때이고 사람의 일생이 끝날 때입니다. 욥의 생명은 그가 70세일 때 제일 풍성하고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성 방면에서든 아니면 진리 방면에서든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 믿음, 경외는 모두 완벽함과 최고봉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공정을 시험하려 하셨기 때문에 욥에게 그런 시련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검증하려 하셨을 때 하늘 위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하나님과 그분의 뭇아들이 그곳에 모였고 사탄도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가 왔음을 보시고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보기에 욥에게 임한 것은 제일 큰 시련, 전례없는 시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늘 위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한 토막 대화로 말미암아 온 것이었습니다. 욥이 그 당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시련이 임한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의 배후의 진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 제일 귀중한 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복을 완전히 갖추었고 성숙되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에서 그 시련이 임한 후의 욥의 모든 표현을 보았습니다.

이 일이 얼마전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욥의 표현이 어떠한지는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이것은 욥이 여러 가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을 들은 후의 첫 반응이다. 우선 그는 결코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고 당황스러움도 표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분노나 증오도 표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이 모든 재앙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더욱이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의 시련이 그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의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어 가려 한 것임을 확신했다. 그때의 욥은 마음이 아주 평온했고 또한 아주 맑았다. 그의 순전하고 정직(역주: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한 인성은 그로 하여금 이성적으로, 자연적으로 그에게 임한 재앙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다시피 욥은 이렇게 큰 시련이 임한 후 매우 침착하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더욱이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여기에 생각해 볼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욥은 이렇게 큰 일이 닥쳐도 화를 내지 않고 더욱이 원망하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는데 이는 일반인이 보기에 기인(奇人)입니다! 매우 괴이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마 좀 이상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욥이 멍청해졌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가 멍청해졌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성품의 표현에서 보면 그 사람은 너무나도 성숙되었습니다! 그럼 그의 성숙은 이방인의 침착함과 차분함입니까? 만약 이방인의 침착함과 차분함이라면 이 정도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의 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욥의 표현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에 대해 확실한 인식이 없고 이 문제의 실질을 마음속으로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이런 차분함과 침착함은 누구도 표현해 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욥, 이 사람에게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진리를 구비해야만, 즉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과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경외를 갖춰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만약 큰 붉은 용, 마귀가 이런 일이 닥치면 첫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즉시 부대에 연락하고 경찰에 연락해 뒤쫓고, 때리고, 빼앗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일이 임하면 이방인과 다릅니다. 그 시련은 몇 번에 나뉘어 온 것입니까? 며칠 나뉘어 한 일입니까? 사탄이 몇 무리로 나눠서 온 것입니까? 이 일은 하루의 일이 아닙니다. 하인이 몇 번 나눠 소식을 알렸습니다. 몇 번 소식을 알렸는데 욥은 그때 아무런 표현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소식을 다 알리고 전체 사건의 과정이 다 끝나고 나서야 그는 반응을 보였는데, 즉 하나님 앞에 온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왔습니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이것저것 말하지 않고 그의 친구를 찾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이 일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욥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여기에서 욥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일 처음 소식을 알렸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임하도록 허락하셨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임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정확한 결론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이 끝날 때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의 행동에서 우리는 또 욥이 그 사건에 대해 도대체 어떤 태도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한 마디 말이 바로 그 시련에 대한 그의 반응이고 태도였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소질이 어떠했을까요? 욥이 흐리멍덩했을까요? 그의 생각은 아주 또렷했고 조금도 흐리멍덩하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 그는 아주 성숙되고 노련했습니다. 욥은 그렇게 큰 시련을 겪으면서 이런 하나의 반응이었습니다. 시련이 임했을 때 그의 태도에 사람의 방법이 조금이라도 있었습니까? 사람의 우매함과 황당함과 무지함이 드러났습니까?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탄복할 만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이 그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고 율법시대에서 한평생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 고려한 것이 많겠습니까, 적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고려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 하나님 말씀에서 욥의 표현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한 방면입니다. 이외에, 사물의 정상 법칙의 발전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 어떤 사상들이 있었는지, 이것도 역시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 누구나 하나님을 5년, 10년 혹은 20년 믿어오면서 많은 일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일과, 하나님과 한데 연관되게 할 수 있고, 많은 일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연상하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 아닌지,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어떤 일은 아주 분명하게 느낍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야.’ 당신은 이런 경력(역주: 체험)이 있었습니까? 다 이런 경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의 집이 그렇게 부유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많이 축복해 주셨는데 그에게 이같은 경력이 많겠습니까, 적겠습니까? 틀림없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말했습니다. “내가 소유한 이 모든 재산은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라” 이 말이 실제적이죠?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것들을 축복해 주셨는지, 얼마만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당신의 경력에 근거해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고 만약 말할 수 없다면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없습니다. 만약 어느 날까지 경력한 후, 당신이 ‘나는 하나님을 믿은 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를 보고 내가 많은 일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았어. 나는 하나님이 진실하신 분임을 보았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진실하시구나!’라고 느껴진다면 이것은 제일 처음의 경력입니다. 만약 당신이 한걸음 더 깊이 경력한다면 말이 더 보태집니다. “저는 지금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만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 제가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줄곧 저를 인도하셨고 하나님을 믿도록 저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의 모든 것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서 온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볼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만약 이 방면을 인식할 수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몇 년을 더 경력한다면 이런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또 ‘이후에 걸을 길과 아직 임하지 않은 일도 사실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 놓으셨고 다 안배해 놓으셨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만약 이런 것을 더 볼 수 있다면 당신의 믿음이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의 믿음은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욥의 믿음에 도달했습니까? 욥의 믿음은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그의 믿음은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니라. 내가 올 때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갈 때에도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박탈당해 역시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러므로 내 일생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내게 모든 것을 주셨느니라. 내가 누리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니 떠날 때에도 원래대로 돌려드려야 하리라. 하나님께서 내 일생을 축복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욥의 믿음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사탄은 단지 하나님의 효력품과 받침물에 불과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탄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고 사탄을 증오하거나 사탄과 따지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께 보고드리고 하나님께 태도를 표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또 무엇을 보았습니까? 욥은 진실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의 인성은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너무나도 정상적이며 생각이 매우 또렷하고 조금의 우매함과 오만함과 패역함도 없었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늘 정상적 인성에 대해 말했는데 무엇이 정상적 인성이고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고 세부적인 인식이 얼마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의 욥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밝히심에서 우리는 정상적 인성에 대해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욥의 인성을 보세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람의 모양이고 본보기, 표본입니다! 욥의 태도에서 우리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정상적 인성의 표현과 정상적 인성의 내용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욥은 율법시대에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신 표본이고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시련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 배워야 할 것, 장비해야 할 진리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마땅히 구비해야 할 인성과 인성의 실질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 과제는 우리가 한평생 배워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3편 말씀, 즉 욥에 관한 이 말씀이 20여 페이지인데 거의 3만 자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진리를 잘 장비하고 진입하면 되고 그러면 틀림없이 구원받는 사람이다. 이번에 분명히 말했으니 앞으로 욥의 간증에 관한 이런 말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말씀을 쓰실 때 하나님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고 몸도 불편하셨지만 매일매일 견지하시면서 쓰셨습니다. 날마다 견지해 조금씩 쓰셨는데 많이 쓰시면 힘들어 잠을 이루지 못하시면서도 나중에는 그 한 편의 하나님 말씀을 다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조금 더 있는데 더 쓰고 싶다.” 제가 “필요하시면 다 쓰시고 정말 너무 힘드시면 천천히 쓰십시오.”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회가 지나면 다시 써도 필요 없다. 이 한 편이 매우 중요하니 이번에 다 쓰도록 노력해야지.” 지금 우리는 제3편, 욥에 관한 이 말씀이 우리의 생명 진입에 있어서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평생 당신이 만약 제3편 말씀 속의 진리, 이 말씀의 실제를 모두 얻는다면 틀림없이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온전케 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읽은 말씀을 들은 후 어떻습니까? 지금 전체 패괴된 인류는 모두 찾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그분이 도대체 누구신지? 누가 이 우주 세계를 주재하고 계시는지? 그 밖에 인생에 임하는 이 모든 환난과 고통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인류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패악한지? 세상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흑암한지? 도대체 누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지?’ 이것은 전 인류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온 얼마간의 문제들이 아닙니까? 욥에 관한 이 한 편의 말씀이 마침 이런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 즉 3천년 전에 욥 시기의 인류는 늘 이런 문제를 연구 토론해도 답이 없었습니다. 비록 답이 없었지만 욥의 간증이 이 문제를 간접적으로 일부분 해결했습니다.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속의 일을 전부 확실하게 말씀하셨고 욥이 깨닫지 못했던 것도 모두 확실하게 말씀하셨으며 인류가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도 더욱더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 선민이 마주한 제일 큰 환난은 무엇입니까? 큰 붉은 용의 잔혹한 박해가 말세의 하나님 선민에게 임했습니다. 율법시대에 사탄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만드신 사람, 욥을 직접 박해했습니다. 욥이 시련 속에서 받은 고통은 무엇일까요?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 목숨만 남았습니다. 그때 욥의 시련은 사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하나님 선민에 대해 얼마간의 박해, 공격, 훼방, 논단을 한 것이었습니다. 말세에는 큰 붉은 용이 또 하나님 역사의 받침물, 효력품으로 되었습니다. 큰 붉은 용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하나님 선민에 대해 또 무엇을 했습니까? 미친 듯이 추적하고 잔혹하게 탄압하고 악독하게 훼방하고 논단하고 먹칠했습니다. 또한 소수의 하나님 선민을 체포하고 고문으로 괴롭혔습니다. 말세에 하나님 선민에 대한 사탄의 박해는 율법시대에 하나님 선민에 대한 박해보다 약해졌습니까, 심해졌습니까? (심해졌습니다.) 확실히 심해졌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심해졌습니까? (목숨까지 해쳤습니다.) 지금 큰 붉은 용은 당신의 재산과 모든 것을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당신을 감옥에 넣고 목숨까지 빼앗아가려 합니다. 그럼 큰 붉은 용은 무엇 때문에 말세에 이렇게 흉악할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율법시대에는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감히 벗어나지 못했으나 지금 말세에 이르러서는 원래보다 더 심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선민의 목숨을 기어코 빼앗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말세의 사탄이 율법시대의 사탄보다 더 잔인해지지 않았습니까? 더 잔인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하나님 선민이 받는 고통은 아마도 율법시대에 욥이 받은 고통보다 더 클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더 큽니까? 율법시대에 그 강도들은 욥의 소, 양, 낙타, 나귀를 다 빼앗아갔고 또한 그의 종과 자식까지 다 죽인 다음 욥을 거기에 버려두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것을 다 뺏어가면 화가 나서라도 죽을 거야! 영감탱이니까 죽이지 않아도 살지 못할 거야.” 이 뜻이 아닙니까? 중국에 이런 옛말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 자식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중년은 아내(남편)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소년은 부모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욥이 70세가 되었을 때 자식들을 한 번에 다 빼앗겼는데 이것을 누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부양해 줄 딸이나 아들 하나만 남겨도 좋은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이 사탄이 아주 악랄합니다! 지금 사탄은 욥을 남겨둔 것을 보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도 죽여버렸더라면 하나님한테 간증이 없을 텐데!” 그래서 말세에 큰 붉은 용은 아주 뿌리째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매우 악독합니다!

≪창세기≫에 인류를 패괴시킨 것은 옛 뱀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 사람을 잔혹하게 해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큰 붉은 용입니다. 그럼 용과 옛 뱀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세력이 커졌고 사람을 해하는 능력이 커졌고 사람을 미혹하는 능력도 커졌습니다. 그래서 이 옛 뱀이 큰 용으로 되었는데 바로 말세의 큰 붉은 용 즉 중국 공산당 정권입니다. 이 큰 용은 말세에 하나님 역사의 받침물로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것이 맡은 역할이 적합하지 않습니까? (적합합니다.) 그것이 아주 바쁩니다!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확장하기 시작해서부터 줄곧 지금까지 그것이 이 업무를 제일 중요한 일로 삼고 전력투구하여 하나님 선민을 체포해 왔는데 아주 바쁩니다! 큰 붉은 용도 하나님에 의해 들볶여 갈팡질팡하고 곤경에 빠졌습니다! 지금 중국 공산당 정권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타격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고 체포하는데,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 받침물이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세 역사의 받침물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럼 그것이 어떤 받침물 역할을 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이 받침물은 하나님 선민에게 고통만 가져다줄 뿐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선민에게 전에 좋은 집이 있었지만 큰 붉은 용에 의해 없어졌습니다. 조금 번 돈도 큰 붉은 용에게 몰수당했습니다. 집회하려고 하면 큰 붉은 용이 해산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어 자식이 수능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직장을 구해도 핍박에 못 이겨 사직했습니다. 하나님 선민이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긴 고통은 다 큰 붉은 용이 조성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큰 붉은 용이 받침물로 되어 효력하는 것이 이것뿐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럼 그것이 어떤 효력을 했습니까? 이 받침물이 주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주로 어떤 효과에 도달했습니까? 당신에게 고통만 받게 하면 의의 있습니까? 받침물이 달하는 효과는 긍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긍정적인 효과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없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욥은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 일을 당신은 어떻게 인식합니까? 당신이 만약 이 일을 꿰뚫어 본다면 당신의 믿음은 욥과 같을 수 있습니다. 말해 보세요, 큰 붉은 용이 당신 집을 철거했는데 이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하지 못합니다. 큰 붉은 용이 당신을 쫓아내 집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까? (좋은 일입니다.) 그럼 당신은 왜 여전히 큰 붉은 용을 증오합니까? 당신은 큰 붉은 용의 어떤 부분을 증오합니까? 잘 모르겠죠? 이런 일을 다 해결해야 하고 다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꿰뚫어 보지 못하면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보세요, 욥이 그렇게 큰 시련이 임했는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다 좋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데에 이르려면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합니까?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까?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지금 우리는 욥보다 임한 시련이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그럼 당신은 욥의 간증이 있습니까? 욥은 무엇 때문에 그런 간증을 해낼 수 있었고 지금 당신은 무엇 때문에 하지 못합니까? 이 문제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보세요, 욥의 그렇게 많은 재산, 일생 동안 애써 얻은 재산이 다 사라졌는데 그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그러니 손해 본 것도 없느니라” 이것이 욥의 뜻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당신은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말하지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푸대접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잘 공급해 주셔서 저는 부자로서 없는 것이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저에게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도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늘그막에 이젠 갈 때가 되니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데 제가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공평하고 합리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약 이렇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은 욥만큼 분별이 없습니다. 욥은 분별있게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욥과 비교해서 드러난 부족함이 아닙니까? 우리는 욥보다 한층 낮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져가신다면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이런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간증을 할 수가 없고 시련이 임하면 쓰러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이 일들을 일찍 분명하게 생각한 것이지 시련이 임한 후 3일 만에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련이 임하기 전에 이런 문제를 분명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예전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을 만약 어느 날 가져가신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욥이 50~60세 때에 이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는 틀림없이 생각해 봤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해 주시고 베풀어 주시다가 만약 어느 날에 가져가시면 내가 어떻게 할까? 여전히 감사드릴 수 있을까? 여전히 찬미의 소리를 발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을 겁니다. 욥은 일찍이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하게 될 이 모든 일에 대해 욥은 예감이 없을 때부터 이미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욥의 생각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런 생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좋은 남편(좋은 아내)을 만나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하나님께 감사하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좋은 내 남편(좋은 아내)을 데려가신다면, 그가 병으로 죽는다면 어떻게 할까?’ 이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부부는 자기 자식이 그렇게 귀여우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여운 아이를 주셨어. 이 귀여운 아이가 없으면 우리 둘의 감정도 그다지 썩 좋진 않을 거야. 그러니 아이가 바로 우리의 보배이고 귀동자이고 생명줄이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의식합니다. ‘만약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큰일인데,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이 세상을 버릴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의 믿음이 욥과 비하면 어떻습니까? 부족하고 불합격입니다. 불합격일 때 일단 시련이 임하면 어떠하겠습니까? 꼭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화를 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해 단번에 폐기되고 그 생명이 없어집니다.

욥의 믿음을 말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들은 차이가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차이가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욥의 믿음이 없으니 욥의 시련이 임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사역이 끝났는데 욥의 믿음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고 국도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그러면 욥의 시련이 임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제가 힘껏 간증을 굳게 서면 안 됩니까?” 진리가 없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간증을 굳게 서겠습니까? 방금 우리가 말했다시피 욥은 이런 시련이 임했을 때 왜 그토록 차분하고 침착하고 이성적이었을까요? 일찍이 준비가 돼있었고 이런 분량이 있었으며 일찍이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고 일찍이 그날이 꼭 임할 것을 알고 생명 진리를 예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 말이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실제적입니다.) 그럼 지금 당신은 이 방면의 진리 생명을 예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야 합니다.) 예비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 남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가져가시고 옮겨가시든지 저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제 아이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제가 아이를 보배처럼 여겨 사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언제 옮겨가시든지 저는 불평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미할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 용기 있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정말 일부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해도 당신의 분량이 꼭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저는 지금 이런 심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진리 장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비됐습니까? 진리를 정말로 잘 장비하고 이 일을 꿰뚫어 보면 시련이 임할 때 분명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잘 준비하지 못하고 이 일을 아직 꿰뚫어 보지 못하면 시련이 임할 때 고통이 큽니다. 그것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고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잘 장비하고 진리로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꿰뚫어 보고 나면 하나의 정확한 관점이 잘 예비될 것입니다. 어느 날 일이 임할 때면 당신은 욥과 같은 침착, 욥과 같은 이성, 욥과 같은 평온함을 표현해 낼 것이고 조금의 불평도 없고 조금의 분노도 없을 것이며 우매하고 황당한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욥의 생명이라야 욥의 간증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생명이 없으면 그런 간증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 간증은 오리가 홰에 오르는 것처럼 한꺼번에 쓰는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 먼저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잘 그리고 예술적 경지가 있게 그리면 사람이 척 보고 즐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속에 먼저 이 그림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뭔가 있어야 손으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 안에 뭔가 있어야 그것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과 같은 간증을 하려면 욥이 구비한 모든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진리로써 이 일을 모두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꿰뚫어 본 다음 이런 부류의 시련이 임하면 당신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필사적으로 빼앗고 싸웁니다. “너, 어디서 온 강도야? 내 지역에 와서 내 재산을 빼앗다니, 내 성이 뭔지 알기나 해? 니가 내 걸 빼앗으면 나도 니 걸 빼앗을 수 있어. 니가 오늘 내 걸 빼앗으면 나는 내일 니 걸 빼앗을 거야. 못 믿겠어?”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 사람이 이렇게 한다면 곤란하겠죠? 이러면 아주 곤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사람은 우매하고 오만 방자합니다! 그것은 그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에서 온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간증을 할 것을 당신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만약 요만한 재산을 위해 쟁탈한다면 동물이 먹이를 빼앗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동물세계는 적자생존 법칙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든 관계없이 세력으로 다투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기에 이 세상이 이렇지 않습니까?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와 세력 범위를 다투고 영토를 다투는 것은 무엇에 의합니까? 이치에 의합니까? 이치에 의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력에 의합니다. 각자 이치를 따지고 이 사람은 이 사람의 근거가 있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의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근거도 다 성립된다고 하는데 세력을 겨루는 것입니다! “내 세력이 크니 내가 먼저 그것을 빼앗을 거야. 어쩔래?” 하지만 하나님과 사탄과의 영계 싸움에서 쟁탈하는 목표물은 하나님 선민인데 이 사람들이 진정한 인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 선민은 닥친 일에서 비인류와는 같은 관점이 아니고 같은 행실이 아니며 같은 표현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만약 동물세계처럼 그렇게 재산을 다투고 이익을 다툰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엇이겠습니까? 비인류입니다. 하나님께 기념되지 않는데 모두 훼멸되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이 싸움의 대결에서 진리에 근거하고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인식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싸움에서 도달해야 할 효과입니다. 당신이 만약 진리가 있어 간증을 굳게 섰다면 이 의의는 이방인들이 무력을 이용하고 세력을 이용하여 빼앗은 이익과 재부와는 같지 않고 같은 등급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계 싸움과 관련되며, 당신의 간증은 하나님의 경영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간증을 잘하면 당신은 구원받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며,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의의는 너무나도 깊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욥이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한 다음 누리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재산을 갑절로 얻고 또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이외에 또 어떤 것이 있습니까? 더 좋고 더 가치 있는 것은 그가 또 140세를 더 살고 수명이 210세가 되어 나이가 차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축복을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힘이든 다 모아도 이 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 간증을 잘 하고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 하나님을 만족케 하니 최종에 그가 누리게 된 것은 그가 구하고 바라던 바를 넘어섰고 세상의 어떠한 세력, 어떠한 인물도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장수하여 140년을 더 살면서 재산을 원래보다 갑절로 얻고 자식을 원래만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경영 계획 중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대표로 되었습니다. 그를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축복은 너무나도 큽니다. 그러므로 말하니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러 이어받는 축복은 땅 위의 어떤 피조물, 어떤 세력도 줄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욥의 간증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욥의 간증이라면 당신은 지금 준비되었습니까? 만약 지금 시련이 당신에게 임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을 드러내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큰 붉은 용의 모든 공세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모든 매스컴을 움직여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전면적으로 훼방하고 논단하고 먹칠하면서 하나님과 결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럼 이 사탄의 공세가 오면 당신은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습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까? 이는 진정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진정한 능력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제일 간단한 공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의 정치적 선전 공세와 훼방하고 논단하고 먹칠하는 말이 당신을 압박해 극도로 숨이 막히게 하고,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까? 며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당신의 순수함을 지키겠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도를 지키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 세력의 이런 포위 공격 속에서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없어지고 어떤 사람은 사탄에게 빌붙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 도태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임하든 진리가 없으면 굳게 서지 못합니다! 욥이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믿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진리입니다. 각 방면의 진리가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했습니다. 욥은 이런 진리를 구비하고 즉 그 믿음에 포함된 모든 진리를 구비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섰으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럼 지금 이런 진리를 깨달았는데, 당신이 굳게 설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진리를 조금 깨닫고는 자신이 괜찮다고 여깁니다. ‘내가 언제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으니 누구도 나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뺏어갈 수 없어.’ 며칠이 안 지나 큰 붉은 용이 그를 잡아가서 세뇌시켰는데, 1개월 동안 세뇌시키니 어떻게 됐습니까? 그 세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지고 거기서 자백서를 쓰고 또 “삼서(三書)”에 서명한 다음 큰 붉은 용이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풀어 준 다음 어떻습니까?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가족들이 그에게 “어땠어요? 굳게 섰어요?”라고 물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유다가 됐어요?” 잠시 후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세뇌에 믿음이 없어져 이겨 내지 못하고 “삼서”에 서명했는데, 이것은 투항한 것이 아닙니까? 큰 붉은 용의 세뇌, 그 고비도 넘기지 못했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습니까? 드러나고 도태되었습니다! 20세쯤 되는 적지 않은 연약한 여자들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다가 붙잡혔는데, 붙잡힌 후 어떻게 됐습니까? 따귀 몇 대 맞고 발길질 몇 번 당해 땅바닥에 넘어져 엉엉 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릅니다. 울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왜 울겠습니까? 우는 건 틀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니 힘을 얻고 눈물을 닦습니다. ‘일어나 앉아야지. 울긴 왜 울어? 때려죽여도 안 울 거야!’ 나중에는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겉보기에 매우 연약해 한 대도 견디지 못할 것 같지만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어떤 사람은 굳게 서고 어떤 사람은 강해 보여도 굳게 서지 못했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여기에서 관건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습니다! 몸이 잘 버틴다 해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의 태도는 다릅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셔서 그의 고통을 덜어주셨고 그에게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니 사탄도 방법이 없어 용서를 빌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이 그를 보호해 주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를 인도하여 난관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드리게 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계속 하나님께 부르짖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것이 그에게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것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감동케 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 고통을 없애주려 하셨고 그를 위해 고통을 감당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 일을 하기 시작하셨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주셨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져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이 아무리 완강해도 소용없습니다. 완강한 것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반성하고 이 일을 판단하여 유난히 침착하고 이성적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유난히 마주할 힘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이 그를 보호하여 우매하고 오만하고 황당한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몸에서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많은 도리를 깨닫는 데에만 의지한다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공허한 이론과 상상에만 의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련이 가장 심할 때, 사탄이 사람을 박해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제일 주요하게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신의 마음이 만약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가져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당신의 마음이 텅 빈 것이어서 쓸모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일으키는 역할은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매번 일이 닥칠 때마다 첫 반응이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지, 하나님께서 어떤 감동을 주실지, 하나님께 기도한 후 심령에서 어떤 생각이 나오고 어떤 견해가 생기고 어떤 길이 생기는지를 살펴보고 나면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알게 될 거야.’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방법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것이 어리둥절해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당신이 만약 기도하지 않고 사람에 의지해 이렇게 하고 저렇게 말하고 이렇게 대응하면서 항상 당신에게 지혜가 있고 수단이 있고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곳곳에서 창피를 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시련이 임할 때 첫 반응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감동시키고 인도하시고 깨우쳐 주시는지를 살펴본 다음 어떻게 마주하고 행할지를 확정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확정해야지. 만약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어.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보자.’라고 합니다. 욥의 침착은 여기에서 표현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첫 반응입니다. 보통 사람, 혈기에 속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먼저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도 무리들이 우리 소를 약탈해갔어요.”라고 보고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빨리 사람들 모아서 가 다시 뺏어와!” 욥은 그때 이렇게 했습니까? 욥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걸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갑자기 임할 수 있겠어? 좀 더 기다리면서 생각해 보자.’ 그는 여전히 기도해야 했는데, 기도해도 분명하지 않으면 함부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그때 그의 그 침착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으면 난 안 움직일 거야. 모든 재산이 다 빼앗긴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해.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면 일단 움직이지 말아야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재산을 잃어도 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거야.’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시련이 임했을 때 욥이 이런 간증을 해낼 수 있고 이런 표현이 있게 된 것은 확실히 좀 특별하고 온 인류에게 없었던 일입니다. 욥이 보여 준 것은 너무나 비범합니다. 욥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해낼 수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아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럼 욥이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동시에 종을 보내 사람을 모아서 일부분을 다시 빼앗아오게 하면 손실이 좀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사람들이 10명밖에 오지 않았네. 여기에 20여 명의 종이 있으니 가서 그들을 내쫓을 수 있어. 우리가 사람 많으니까 그래도 적게 손해 볼 거야.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지 않으시니 조금이라도 뺏어올 수 있으면 뺏어오자. 반만 뺏어와도 좋아. 하나님의 축복에도 영향을 주지 않고 간증을 굳게 서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아!”라고 말하면 이런 말이 의의 있습니까? 당신이 뺏어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런 인식과 이런 터득과 이런 믿음이 매우 소중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고 이런 간증이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 소중한 부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이 재산을 일부분 뺏어올 수 있든 없든 그것은 큰 의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에 갈등이 생겨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때 경찰들이 저를 붙잡아간 것은 사람들이 많이 왔기 때문입니다. 4~5명이나 와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1~2명만 오면 제가 먼저 손봐줘서 붙잡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그들이 몇이 오고,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당한지를 떠나서 우선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말해 봅시다.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이것이 관건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공안국에 찾아가도 아무 의의가 없습니다. 당신이 비록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관건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당신이 기도했는지, 우매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를 보시는데, 이것이 관건입니다. 어떤 일의 세부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신이 조금 피동적이든, 이리저리 치우치든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관건은 당신이 이 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나중에 간증을 굳게 서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합니다! 욥의 간증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사탄의 탄복과 사탄의 수치스러움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욥에게 또 다른 행동이 있었다면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계속해서 욥을 참소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욥을 참소한다면 욥이 그 일을 한 것이 어떻습니까? 아마도 합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고 수치당하고 도망갔다면 이 효과는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효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선민들이 큰 붉은 용의 고문 속에서 여러 가지 간증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할 때 성령 역사가 있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있어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버텨냈지만 고문이 지나간 후에 자백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간증을 선 것입니까? 이것은 포탄 앞에서는 쓰러지지 않다가 마지막에 종이 한장 앞에서 쓰러진 것과 같습니다. 그럼 그는 무엇 때문에 이 자백서에 서명했을까요? 고문 고비도 다 넘겼으면서 자백서 고비는 넘지 못했습니다. 이는 석방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여기 있기 싫어, 나를 옥살이하게 하지 않고 석방만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좋아.’ 바로 이런 사상의 지배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에 거래가 있는 사상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에 조건이 있는 사상이 아닙니까?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조건이 있는데,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지만 나를 감옥에만 보내지 않으면 됩니다. 만약 나를 감옥으로 보낸다면 당신을 부인하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백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거래가 있고 조건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사탄이 나중에 보고는 ‘어, 고문으로 한나절이나 괴롭힐 때는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종잇장에 부인하네. 일찍 알았더라면 힘을 들여 때릴 필요도 없이 직접 종잇장에 서명하게 해서 끝냈을 텐데.’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는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를 감옥으로 보내지만 않으면 그가 당신을 믿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부인합니다. 보세요, 자백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서명한 자백서를 하나님께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그럼 이 사람은 내게 필요치 않다. 그는 내게 속한 사람이 아니니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가 자백서에 서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의 속셈, 하나님을 믿는 데에 뒤섞인 것들을 모두 그 자백서로 대체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백서는 서명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고 당신을 철저히 사탄에게 팔아넘기는 것입니다. 이건 큰일입니다! 그럼 어떤 배경에서 서명한 자백서가 무효입니까? 당신이 정신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의 손을 잡고 강제로 찍게 한 이런 상황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다 분명하고 의식이 있는 상황에서 자기 손으로 이름을 쓴다면 당신이 뭐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앗아가는 자백서이고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자백서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고 사탄으로 하여금 꼬투리를 잡고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참소하게 하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존엄을 갖고 계시는 분이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사람이 사탄 앞에서 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보셨으니 그때 가서도 인정하십니다! 사탄이 어떻게 말하든지 하나님께서 척 보시면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서 당신에게 임한 여러 가지 시련에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면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영계의 싸움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는데 왜 보지 못하죠? 영계의 싸움이 정말로 있는 일입니까?”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도대체 영계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탄과 내기하신 겁니까? 만약 정말로 있다면 제가 보게 되면 잘할 겁니다. 지금은 보지 못해서 도대체 이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셔도 저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 정말로 영계 싸움의 사실을 보지 못한다면 간증을 서기 쉽겠습니까? 영계 싸움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합니까?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식이 없음을 설명합니다. 그럼 그가 하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이 진짜임을 인정하겠습니까? 그가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영계 싸움의 사실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이런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간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지 않고 또 하나님과 사탄과의 싸움이 진실한 것임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간증을 하든 말든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 본인이 이 믿음을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련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게 뭡니까? 저는 왜 알아듣지 못합니까? 어디 이런 일이 있습니까? 당신들, 대낮에 잠꼬대하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어떻게 봅니까? (영이 통하지 않고 불신파입니다.) 이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고 불신파입니다. 불신파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시련이 임할 필요도 없이 드러납니다. 이 한 권의 하나님 말씀도 믿지 않는데 당신에게 또 뭘 말하겠습니까? 당신에게 진리를 교통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믿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늘날 진실한 믿음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집니까? 바로 이 한 권의 하나님 말씀은 진실하고 하나님의 영이 발하신 음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다 진리이고 다 실제이며 다 사람의 생명으로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마다 응할 것입니다!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 응할 때에 도태됩니다. 당신이 믿는다면 다 응할 때에 간증을 하여 구원받고 국도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믿지 않으면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교통하면 여러분은 믿습니다. 제가 왜 이방인들에게는 말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들에게 뭘 말하겠습니까? “좋은 말은 지인에게 주고 밥은 굶주린 사람에게 줍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너무 작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까지 한다면 또 무슨 간증을 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에게 욥의 그 시련이 임하여 강도 몇몇이 온다면 그들과 싸우고 인력과 물력을 조직해 싸우면 그만이지 또 무슨 간증을 하겠습니까? 적자생존하고 뺏어올 수 있으면 먹고 뺏어오지 못하면 굶어죽는 동물과 같다면 당신의 생존 방식, 당신의 인성은 이방인들과 같은데, 비인류입니다! 교회에 불신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기억하세요, 불신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당시 성령 역사가 있을 때는 듣고 ‘어, 진짜네! 예전에는 별로 믿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80% 믿어지고 90% 믿어지네.’라고 느껴질지라도 집으로 돌아가서 두 끼 배불리 먹고 나면 10%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3~5일 집회하지 않으면 50%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신파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안중에서 인정하실까요? 이는 하나님 안중의 이방인입니다. 알겠죠? 예를 들어 말해서, 하나님 집에 100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기껏해야 30명이 하나님 선민이고 시련을 겪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30명 중에 누가 간증을 굳게 서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나머지 70명은 어떻게 믿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상관하시지 않고 보시지 않고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가 잘해도 상이 없고 못해도 징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상대하시지 않고 거들떠보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불신파이고 열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 집에서 불신파는 도대체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진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믿는다”는 무엇을 가리켜 한 말입니까? 참 하나님을 시인하면 진실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제일 주요하게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 진리이며 이런 말씀이 다 응할 것이고 다 사실임을 믿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다 사람의 생명으로 되는 것이고 제일 귀중하고 제일 높은 생명 격언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후의 인류는 모두 이런 말씀에 근거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21세기에 전 인류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점차적으로 응하는데,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먹고 마실 것입니다.

욥은 시련 속에서 무엇 때문에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었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 진실한 믿음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그의 믿음은 절정에 이르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했다면 당신의 믿음이 성립되겠습니까? 당신의 믿음은 부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늘 일부 사람들을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의 수리 대처가 임하면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뉘우치고 자신을 미워하고 맹세 기도를 하면서 자신을 저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의 수리 대처가 임하면 속으로 저촉하고 욕하고 불복하며 심지어 형제자매들을 공격하겠다고 떠벌립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드러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경외하지 않고 진리에 조금도 순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신파이고 하나님 말씀 이외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나 되어도 진리에 순복하지 못하고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은 시련이 임하면 틀림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수리 대처가 임할 때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무릇 과오가 있을 때 형제자매들의 질책을 거쳐도 전혀 회개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이런 사람은 모두 도태될 대상입니다. 보세요, 지금 각지에서 누가 본분을 하는 중에 하나님 집의 사역을 방해하는지, 누가 교회에서 횡포를 부리는지, 누가 자꾸 자기의 도리만 따지고 자꾸 제멋대로 하는지, 그럼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데는 개인의 속셈과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속셈과 목적대로 하지 못하면 그는 그 누구에게도 불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100% 도태되고 생존하지 못합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무릇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한 말이든 맞으면 듣고 곳곳에서 하나님 집의 사역을 수호합니다. 어느 형제자매가 장점이 있고 본분을 잘하면 그는 따라 배울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으며 찬성하고 누가 사역을 잘할 수 있고 인솔자가 되기에 적합하면 그를 수호하고 그의 말을 듣고 그와 협력합니다. 이것은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것마저 해낼 수 없으면 인성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누가 자기보다 능력이 강하고 자기보다 재능이 있으면 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하고 질투가 생기며 또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성품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으니 다 질투가 있겠죠?” 질투가 있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질투에는 범위가 있고 한도가 있습니다. 그에게 만약 인성이 있고 마음씨가 착하다면 그의 질투는 기껏해야 어떤 것이겠습니까? 속으로 불만을 느낍니다. ‘봐봐, 그가 있으니까 나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어.’ 그는 그 사람에 대해 그다지 기뻐하지 않고 별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모함하고 공격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데, 이것은 최저선입니다! 만약 질투로 인해 공격하고 적대시하고 증오하며 팽팽히 맞서 싸운다면 이런 사람은 성품이 악독한 사람이 아닙니까? 성품이 악독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대상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도태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믿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요. 당신은 믿어도 소용없어요.” 패괴된 인류는 누가 질투가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든 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질투는 사람을 해하지 않고 그저 속으로 좀 증오하고 당신을 좀 탓할 뿐입니다. “당신은 왜 나보다 우월합니까? 당신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유없이 공격하고 모함하고 해치는 일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더욱이 결사적으로 팽팽히 맞서 싸우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며칠 질투하다가 기도하고 나면 지나가는데 어떻게 증오로 되겠습니까? 만약 질투가 증오로 되어 팽팽히 맞서 싸우고 남을 모해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너무나도 악독합니다. 그럼 이 사람이 마귀 사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큰 붉은 용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가 질투로 인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것은 큰 붉은 용이 아니겠습니까! 마귀 사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는 교회에 질투로 인해 남을 공격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팽팽히 맞서 싸울 수 있고 사람들과 패거리를 지어서 대립할 수 있는 일부 사람들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도태시켜 여기서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되고 빨리 쫓아내야 합니다. 남을 너무 심하게 질투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귀신의 본성이 가득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질투로 인해 증오가 생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해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까? 그것은 다 어릴 때 하던 짓, 10~20대가 하는 짓입니다. 40~50대가 되면 이런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40~50대가 되면 견식이 생기고 사람의 운명도 다 정해지는데 누가 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보다 훌륭하고 우리보다 우월하면 우리는 찬성하고 배워야 합니다. 저는 저보다 훌륭한 사람, 여러 가지 재간을 가진 사람, 각 방면의 재능을 가진 사람과 왕래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와 함께 지내면 배울 수 있고 그가 저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보세요, 제가 오늘 비록 하나님 집에서 이 본분을 하고 여러분에게 진리를 교통해 주고 있지만 저는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문예, 인터넷, 동영상, 영화에 관해 저는 비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재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 기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점이 저보다 더 많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장점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 저는 누림이 있습니다. 제가 배울 수 있으니까요! 만약 무능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느 방면이든 다 자기보다 못한데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누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느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장점이 있는 사람,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마음속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질투하는 사람은 속이 좁지 않습니까? 중국 고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주유를 나게 했거든 어찌 또 제갈량을 나게 했단 말인가!” 남을 질투한 그 주유는 어떻게 됐습니까? 자신을 괴롭히다 죽었는데, 36세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남을 질투하면 뼈가 문드러지고 남을 질투하면 빨리 죽고 남을 질투하면 수명이 짧아집니다! 속이 좁고 남을 질투하면 좋은 점이 있습니까? 좋은 점이 조금도 없습니다. 옹졸하고 속이 좁고 악독하면 남의 웃음거리로 됩니다. 그는 살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속이 좁으면 좋지 않은데 이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때 우리는 이겨 내지 못합니다.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이 오기만 하면 질투하고 화내고 심지어 그를 보기만 해도 못 살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임하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자신을 저주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기도합니까? “저는 남이 잘되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이게 무슨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정말 살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사람을 보면 질투하는데 이게 어떤 마음입니까! 이것은 정상적 인성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징계해 주시고 수리(역주: 교훈)해 주시길 원합니다.”라고 말한 다음 또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여 옹색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도록 마음이 넓어지고 아량이 넓어져 사람 모양을 살아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동안 기도하면 혹시 당신의 마음이 부지중에 조금 넓어져 당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다시 만나도 질투심이 그렇게 크지 않고 용납할 수 있고 정상적으로 함께 지낼 수 있으며 천천히 정상이 됩니다. 인성이 정상적이 되면 삶이 행복하고 시원하고 대범합니다. 속이 너무 좁으면 삶이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우리의 인성에 어떤 패괴 성품이 있든지, 어떤 문제와 결점이 있든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의해 모든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사람의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 바뀌고 사람의 이지가 어느 정도 정상적이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패괴된 인류는 다 속이 아주 좁습니다. 이익만 꾀할 정도로 속이 좁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니고 사람 모양이 없습니다!

방금 우리는 욥의 간증을 교통했는데 욥의 인품은 너무나도 좋습니다. 율법시대에 인류는 그리 깊이 패괴되지 않았고 우리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세에서도 한 무리 사람들을 만들어 욥과 같은 믿음을 구비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게 하려 하십니다. 우리의 인성 토대에 따르면 욥만큼 좋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진리를 발표하시고 이렇게 많은 말씀으로 우리를 심판 형벌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시초의 정상적 인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욥의 인성 기준에 이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의 그 믿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여 이르시려는 효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협력하고 진리를 많이 추구하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욥의 간증을 살아낼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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