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1≫에 관한 설교 교통 (3)
『하나님나라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이 또 한 번 말씀이 육신 되었는데 이 방식은 첫 번째 성육신과 똑같다. 이 역사 기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조금도 남김없이 그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고 그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발표하고 있는 동시에 또 부단히 사람의 패역함과 무지함을 인내하고 관용하고 있다. 이번 역사 기간에도 하나님이 부단히 그의 성품을 유로(流露)하고 있고 그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인류가 있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하나님의 뜻은 누구에게나 다 공개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일부러 그의 실질, 그의 성품, 그의 뜻을 숨긴 적이 없는데, 단지 사람이 모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보잘것없이 적은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의 본체를 숨기는 동시에 매 시각마다 사람과 함께하고 매 시각마다 사람에게 그의 뜻, 그의 성품과 실질을 공개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본체도 역시 사람에게 공개된 것이지만 사람이 눈멀고 거역함으로 전혀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현재 이런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대로라면 각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가, 아닌가? 이 문제는 대답하기 아주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쉽다고 말하자니, 일부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있지만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고 아무리 해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즉 어렴풋하고 모호하다. 어렵다고 말하자니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경력하면서 각 사람마다 경력하는 중에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었고 어쨌든 마음속에 하나님과 어느 정도 감응(感應)도 있고 하나님과 심령의 부딪침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마땅히 얼마간의 감성적인 인식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도 얼마간의 수확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서부터 지금까지 얻은 것이 너무나 많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즉 사람의 낮은 소질, 사람의 우매, 사람의 패역, 사람의 여러 가지 속셈으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을 뿐이다. 사실상,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이 적은가? 하나님이 비록 그의 본체를 숨겼지만 그의 소유소시와 생명을 모두 사람에게 공급해 주었으니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정말 지금 이런 정형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와 더 진일보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 관한 이 화제를 교통할 것이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목적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 몇천 년 동안의 고심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사람에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알고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영역에서 새로운 단계로 매진하게 할 수도 있고 사람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진실한 지위를 회복시킬 수도 있다. 즉 하나님께 “공평”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에서 몇 가지 일을 언급했습니다.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시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발표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역사하시는 기간에 “여전히 조금도 남김없이 그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고 그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발표하고 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 가지 일을 말하는데, 즉 말씀이 육신 되어 어느 연대에서든지, 어떤 성별이든지 그분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은혜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한 방면은 말씀을 발표하신 것인데 어떤 일이 임하든지, 어떤 배경 하에서든지 그분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면 그것을 말씀하셨고 조금도 남김없이 그분의 관점과 그분의 성품을 당시 그때 배경 하에서 발표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도달한 효과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에 관련됩니다. 어떤 문제에 관련됩니까? 성육신 하나님은 임하는 한 가지 일에서, 하나의 배경 하에서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발표하고 계시고 그분의 소유소시를 발표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바로 그분의 발표를 보는 것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성육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계시면서 이렇게 그분의 사역을 하고 계시고 그분의 말씀을 발표하시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이 혼자서 말씀하시고 나서 떠나시면 그만이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을 보게 하시고 그분과 접촉하게 하시고 그분을 알게 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을 얻게 하시고 그분을 따르게 하시고 그분께 순복(역주: 순종)하게 하시고 그분께 경배하게 하시는 것인데, 이 목적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심에 있어서 어떤 일이 임하든지 어떤 배경 하에서든지 그분은 조금도 남김없이 그분의 말씀을 발표하시고 그분의 진리를 발표하시는데 인류가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얻어야 할 진리를 발표하십니다. 그럼 이 방식이 사람이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유익한 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좋은 길이니 사람이 보지 않으면 안 되고 접촉하지 않아도 안 됩니다. 보세요, 전체 패괴된 인류가 몇 천 년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계심을 본 사람은 아주 적고 모두 그 마왕들, 각 부류의 패괴된 인류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런저런 일을 저지르고 연설을 발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마지막에는 무장 투쟁을 일으켜 혁명을 하고 하나의 정권을 뒤집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종 영들이 하는 일은 다 같지 않습니다! 혁명가가 오면 연설을 발표하고 문학가가 오면 책을 써서 학설을 세우고 또 신선이 된다는 도를 닦는 자들이 오면 일련의 불경, 도경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열독하게 하고 공법(功法)을 배우게 하고 수련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는 말씀을 하시고 그분의 소유소시를 발표하시고 그분의 소유소시를 유로(流露)하셔서 사람들에게 보게 하시고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세상의 그 마왕들과 다른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품 방면에서 다른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을 하는 방식과 원칙상에서 다른 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에 분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품 방면에서 하나님은 낮추시고 숨기시지만 그 더러운 귀신 악령들이 오면 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증거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가장 뚜렷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사탄 악마의 성품과 같지 않습니다. 사탄 악마의 성품은 극도로 거만하고 극도로 독선적이며 하는 짓이 무법천지여서 어떤 사람도 안중에 두지 않고 강제로 사람에게 따를 것을 강요하고 순복(역주: 순종)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는 낮추시고 드러내지 않으시며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십니다.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곁에 사람이 얼마 안 되지만 마왕이 말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회를 열어서 연설하고 거리를 다니면서 연설하며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유세합니다. 공자가 왔을 때에는 열국에 유세하면서 열국의 국왕들을 정복하여 다 그의 권력 아래에 복종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다 그를 숭배하게 하여 자기가 천하의 주인이 되려고 했는데, 이것이 극도로 거만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람에게 호소하여 다 그분을 따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많은 곳에 가셔서 강연하셨습니까?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 그분의 말씀, 그분의 성품, 그분의 인격, 그분의 인성, 양심, 이지 각 방면은 나무랄 데가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데, 참으로 정상적 인성입니다! 제가 전에 ≪하나님의 비미은장(역주: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의 뜻)은 너무나 사랑스럽다≫란 가사를 썼는데 그때 희미한 가운데서 고만한 인식이 있어 “너무 사랑스럽다”라고 쓴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너무 사랑스럽다고 했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이 거만하고 독선적이고 자고자대(自高自大)하지만 그리스도는 진리이면서도 오히려 낮추시고 드러내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인식은 그리 깊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제가 이 말을 생각해 보면 또 새 빛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기만 하면 저는 자신이 곧 마귀 사탄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패괴된 인류는 이렇게 큰 구별이 있는데 천양지차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성품 변화를 요구하실까요? 당신은 패괴된 인류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거만하고 독선적입니까! 보세요,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이시면서도 낮추시고 드러내지 않으시며 조금도 거만하거나 독선적인 것이 없고 자신을 추호도 과시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랑스러운 점은 전 세계에 인류가 있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비하셨고 인류 중에 구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해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 진실합니까, 진실하지 않습니까? (진실합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적지 않은 문제와 일들을 물었습니다.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물었습니다. “율법시대의 사역은 모세가 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호와께서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분명히 그분이 모세를 깨우쳐 주시고 빛비춰 주시고 지배하셔서 하게 하신 것이었는데 그분은 그래도 “모세가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낮추고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과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 지위에 있었다면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한 거야. 단지 내가 모세를 감동시켜서 하게 한 것뿐이지. 그를 지배해서 일을 하게 했으니까 근원은 그래도 내가 한 거야.”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겠죠? 이렇게 말하면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까? (틀리지 않습니다.) 틀리지도 않고 사실에도 부합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 일이 곧 사람을 탄복하게 합니다! 여기에 찾아볼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식할 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지,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 하는지 이제는 길이 좀 생기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무지몽매입니다. 사람이 너무 무지몽매하면 하나님이 당신 곁에서 유로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아무리 많고 발표하신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당신은 얻지 못합니다. 당신이 무지몽매하고 소질이 낮으면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이 일도 아주 뜻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느니라”) 우리 사람의 사유대로라면 틀림없이 “아버지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아버지이니라 너희가 아직도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느냐”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대답하시면 틀리다고 할 수 있습니까? (틀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시면 훨씬 간결한데 그분은 왜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지위로 행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시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단지 그렇게 완곡하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라면 틀림없이 분명하고 가장 투철하고 가장 간결한 한 마디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는 성품이 같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보았습니까?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셔도 완전히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전혀 오만함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우리라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우리 사람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가 엄중한데 결과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 성품이 변화되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어서 아직 이릅니다! 저의 이 분량으로 제가 100년을 더 경력한다면 어떤 모습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비하면 여전히 천양지차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우리가 한평생, 두 평생을 경력해도 다 경력하지 못합니다. 아마 영원토록 경력해도 다 경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소시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생명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다고 하겠습니까?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한 마디 말로만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만함이 조금도 없고 독선적인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간단한 말로 형용하면 되겠습니까? 이보다 훨씬 더 좋은데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소시를 추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의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고 진리를 교통할수록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해 더 진실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면 대단히 감복할 것이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를 것이며 자신의 성품이 너무나 패괴되고 정말로 사탄이고 사람 모양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생명을 추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 천연적인 패괴 즉 거만함, 독선, 자고(自高)함을 살아낼 때 당신은 매우 메스껍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느껴질 때면 정말로 자신을 증오하고 자신을 경멸하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자신을 부인하고 쉽게 자신을 배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경력해서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하나님의 아픔에 대해 이제 조금 알고 조금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느린 것이 아닙니까? 몇 년을 믿었는데 이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했습니까? 너무 느립니다! 하나님 역사는 바로 이렇게 한 단계씩 하면서 당신으로 하여금 한 걸음 한 걸음씩 경력하게 하고 이렇게 조금씩 각성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한 마디 한 마디씩 알게 하고 경력하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이렇게 깨닫다가 어느 날 당신이 하나님의 고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이 피를 흘리고 계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는 것을 참으로 깨닫게 될 때 당신이 다시 하나님이 어떤 단어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본다면 이때 당신은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나 위대하고 사람이 사랑하기에 너무나 합당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 글 속에 하나님의 고심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글귀만 봐서는 누구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경력해 낸 것입니다. 경력하지 않으면 당신이 아무리 문학을 정통하고 아무리 글자의 뜻을 안다 해도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금방 읽은 “동시에 또 부단히 사람의 패역함과 무지함을 인내하고 관용하고 있다.” 이것을 어느 방면에서 볼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꼭 인내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럼 당신은 발견했습니까? 당신은 체험했습니까? 당신이 이 한 마디 말씀을 인정만 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은 마땅히 체험해야 하고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부모가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합니까?”라고 물어보면 “이해합니다. 어떤 때는 부모님들이 저에 대해 인내하시고 관용해 주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일 일반인이라면 화를 내고 노할 것이지만 그는 억지로 참으면서 화내지 않고 억지로 참으면서 부드럽게 대하고 또 억지로 참으면서 웃는 낯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 웃음마저도 이미 부자연스럽고 여전히 억지로 참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눈물 흘리면서 조금 웃음을 띠고 당신에게 연약하지 말고 화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마음을 당신은 느꼈습니까? 이 한 마디 말씀을 보고서 당신이 이해하고 그런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지만 당신은 느꼈습니까? 사람이 느끼지 못한 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중요시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그분을 알아가기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설명합니다.
또 아래로 봅시다. “이번 역사 기간에도 하나님이 부단히 그의 성품을 유로(流露)하고 있고 그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볼 수 있습니까?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거일동과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장 좋기는 다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야 당신이 빨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당신이 언제나 이 일에 관심이 없다면 어디 가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발표와 하나님의 유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관심이 없다면 그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알 수 없으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알아가는 것은 구원받는 것과 관계있고 진리를 얻는 것과 관계있고 최종에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사실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가장 의의 있는 일입니다. 이 의의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바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보통 일로 대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전혀 모르고 진리가 보배인 줄을 모르며 생명을 얻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이런 말씀을 발표하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은 가장 간단한 말로 하면 바로 사람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한 무리 사람들 안에 만들어 생명이 되게 하려 하시는데 이 한 무리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온전케 하시려는 사람들입니다. 즉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 주려 하시는데 이 새로운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데 당신이 만약 얻었다면 바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한차례 역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인류가 유사 이래로 가장 복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을 발표하셔서 사람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데 이런 말씀은 성육신 하나님에 의해 발표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접촉하게 하고 보게 하여 그분을 알고 따르게 하며 최후에는 그분께 얻어지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게 합니다. 이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신 후 하나님께서 이 세계 인류를 훼멸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셔서 시대를 개척하시고 또한 시대를 끝마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시대를 개척하는 것은 바로 국도에서 한 무리 사람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후 시대를 끝마치는데 즉 이 인류를 훼멸하는 것입니다. 한 무리 사람들을 다 만든 후에 하나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역사를 대적한 자들을 전부 재난으로 훼멸합니다.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사람이 아직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 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가장 미련한 사람이고 가장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고 연애하고 싶어 합니다! 바보입니다! 바보 같이 굽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당신은 연애를 해도 구원받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정력이 너무 넘쳐서 다 쓰지 못하니 그래도 이성 친구를 사귈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연애를 하고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이 가장 정력이 소모되고 가장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데 하나님을 모독할 작정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욕되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혐오를 느끼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이성 친구를 사귀려면 믿지 말고 세상에 돌아가서 할 것이지 하나님을 역겨워하시게 하려는 겁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요!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마침 식사할 때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오면 이 파리가 뭐하러 왔겠습니까? 식사 중에 다 기분이 좋아서 입맛이 도는데 그놈이 날아오면 계속 입맛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을 메스껍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이 파리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미워합니다.) 미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식사하기 전에 먼저 서둘러 그놈을 없애버려야 하는데 그놈을 없애버리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역사를 경력하는 결정적인 순간, 생명 진입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 친구를 사귀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요! 이방인들에게 “장수 노인이 목매는 건 사는 게 지겨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때가 이성 친구를 사귈 때입니까? 대재난이 곧 떨어지고 칼이 목에 닿아있어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또 무슨 이성 친구를 사귑니까? 하나님이 오지 않으셨을 때는 당신이 어떻게 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오셨는데도 당신은 이성 친구를 사귀겠습니까?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까? 눈이 멀었습니까? 당신이 찾는 것이 때가 아닙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 가지 말며”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홍수가 났는데 당신이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죽지 않겠습니까?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는 무슨 뜻입니까? 똑같이 거기서 가을걷이를 하고 노동을 하고 일을 처리하고 본분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다가 어떤 사람은 도태되었습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도태되고 당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아 도태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둘 중에서 하나를 데려간다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이를 배는 것과 젖을 먹이는 자체가 죄 있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때가 안 맞는 것입니다. 뜻밖에 전쟁을 만나 사람들은 다 도망하고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는데 당신이 아이를 낳으려 한다면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때가 안 맞는 것입니다. 지금 연애하는 것을 하나님 집에서 제한했습니까?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 진리를 교통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만약 정말 이성 친구를 사귀려고 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찾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사람을 속박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성 친구를 사귀겠다면 본분을 하지 말고 가서 살림살이나 잘하세요! 당신을 제명하지도 않고 제거하지도 않지만 이 본분은 당신이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한창 연애하느라 본분을 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인솔자라면 당신은 지금 인솔자 본분을 할 수 없기에 그만두고 반성해야 합니다. 당신이 문서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면 문서 사역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형제자매들을 접대하는 것은 그런대로 할 만합니다. 접대하는 것은 밥만 하면 되니까요. 문서 사역은 진리와 관련되는 일이고 간증과 관련되는 일이기에 당신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성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일부 중요한 본분을 할 수 없으니 빨리 그만둬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케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박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허용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본분은 당신이 잘 할 수 없기에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현재는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결정적인 시각이어서 진리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있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하나님의 뜻은 누구에게나 다 공개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일부러 그의 실질, 그의 성품, 그의 뜻을 숨긴 적이 없는데, 단지 사람이 모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보잘것없이 적은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발표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유로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공개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발표 즉 하나님의 말씀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분을 믿는 각 사람의 손에 나누어 주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교회 생활을 하고 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공개된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데에 이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 성과입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발표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는데 무엇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시종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시종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할 수 없고 시종 진실한 간증이 없습니까?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최후에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을 보고도 하나님 말씀에 대해 조금도 인식이 없고 진리에 대해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실제에 조금도 진입하지 못하고 조금의 간증도 없는 이런 사람을 도태시키고 버립니다. 어떻게 버립니까? 성령이 떠나시고 하나님이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 교회는 사람이 50명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는 몇 사람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당신께서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태껏 나를 안 적이 없고 나도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이 일부분 사람들은 드러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해는 보잘것없이 적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가련할 정도로 적겠습니까?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시하지 않고 더욱이 매사에 진리를 구하거나 사람 모양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이 방면의 성과에 대해 질문하실 때면 사람은 맞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어제 제가 몇몇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집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보세요.”라고 물으니 얼버무리며 말을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기서 기어이 이렇게 캐묻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캐묻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 한 마디를 물어보신다면 그 의의는 또 다릅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이 물어보는 것은 어떤 작용을 일으키겠습니까? 당신은 마땅히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한 마디 말씀에 대해 쉽게 물어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물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이렇게 물어보신 것은 베드로에 대해 요구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물어볼 가치도 없고 요구도 없기에 하나님은 묻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만일 자신이 도대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른다면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제일 관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어떤 소유소시가 있는지를 보고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발표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반성하게 하고 진리를 얻게 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한 방면은 진리를 얻고 자기를 반성하고 사탄의 패괴를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며, 한 방면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원칙에 따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최종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조금이라도 살아낼 수 있다면, 설령 하나님의 소유소시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살아낼 수 있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이러한 심지가 있어야 당신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본분을 하면서 늘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늘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고 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 자기를 따르게 하며 그런 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것은 여전히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말을 듣게 하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진리 실제가 좀 있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된다 해서 사람을 강요해 당신의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이지가 없습니다. 다만 진리를 교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할 뿐이지 받아들이는지의 여부는 그 사람의 일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강요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방금 그리스도의 소유소시를 교통하였죠? 그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화신이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나이까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묻자 그분은 “내가 바로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바로 나이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세요, 이 말씀을 아주 기교적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낮추고 드러내지 않으시며 거만과 독선이 조금도 없으시며 너무나 사랑스러우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자신을 뉘우치게 되고 또 너무나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그런 이치를 따지고 그런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된다 해도 그렇게 오만한 것은 역시 사탄 성품이고 칭찬할 만한 가치가 없으며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진리, 길, 생명이시니 발표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유소시입니다. 그분은 왜 조금도 독선적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진리, 길, 생명이 아니고 진리 실제도 얼마 없으면서 여전히 그렇게 오만하고 독선적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비기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비긴다면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고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천양지차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좋습니까? 자기의 뜻이 일리가 있고 맞다고 오만해도 되겠습니까? 맞다고 해도 좋지 않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이 성품은 수치스럽고 가증스러우며 사람을 혐오케 하고 너무 메스껍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정말 자기의 거만하고 독선적인 이 사탄 성품을 인식했다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고 하나님 앞에 살 자격이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어느 때면 하나님의 성품을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비미은장이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것은 진리이고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으며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지도 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순복할 수도 있는데 이런 생명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런 비미은장의 생명을 흠모합니까? (흠모합니다.) 이 생명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이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합니까? 아름다운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스러운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거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사랑스럽지 않고 가증스럽고 증오스럽고 메스껍습니까? 이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찾아볼 만한 진리가 있지 않습니까? 비밀이 있지 않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여기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서 늘 자기 뜻을 고집하고 늘 상대방에게 자기 말을 듣도록 강조하는데 이 성품이 좋습니까? 만약 당신이 한 말이 아주 정확하고 매우 진리에 부합된다면 마땅히 어느 각도에 서서 이 말을 해야 합니까? 어떤 어조로 이 말을 하면 사람이 듣기에 알맞고 이지 있고 사람이 듣고서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여기에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당신의 관점이 아주 정확하다고 여기는 정황 하에서 당신은 어떤 심리상태로 이 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한 가지 일을 아주 투철히 꿰뚫어 보았어요. 제가 한 말이 틀림없이 진리에 부합되기에 저는 지금 아주 정중하게 여러분께 말씀드리는데 여러분들이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좋습니까? 혹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일을 놓고 오랫동안 고려해 보고 또 여러 번 기도한 후 최종에 제 뜻이 완전히 진리에 부합된다고 검증했는데 지금 여러분께 정식으로 교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 번 기도해서 검증했고 그다음 정식으로 교통했는데 뭐가 합당하지 않단 말입니까? 이것이 진리에 부합되고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일이라고 증명하지 않습니까? 왜 합당하지 않습니까?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꿰뚫어 볼 수 없습니까? 이런 태도와 이런 관점 자체가 바로 한 가지 그릇된 성품 즉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을 대표합니다! 먼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혼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궁리한 것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성령의 검증을 거쳤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검증해 주신 것입니까? 당신은 감히 맞다고 확신합니까? 이것도 역시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아닙니까? 착오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하면 적합하겠습니까? 어떻게 말하면 사람들이 듣기에 이지가 있겠습니까? “제가 여러 번 기도하고 이 일을 놓고 많이 생각해 봤는데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함부로 장담하지 못하겠으니 여러분이 다시 좀 교통하는 것이 가장 좋겠네요. 한 사람의 견해는 정확하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정확하다고 인증할 수도 없기에 저는 여러분의 것을 믿고 제 개인의 생각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이지가 있고 이렇게 실행하면 좋습니다. 당신 생각이 아주 맞고 정확하고 확실히 착오가 없다는 것을 믿을 만합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아무리 맞다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증명을 거쳐야만 믿을 만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여러 차례의 인증이 있고 명확하게 성령의 인증을 받고 여러 차례의 경력을 거쳐 실증하고 그런 후 가장 좋기는 진리를 깨달은 몇 사람이 다시 인증해야 정확한 것이라고 실증할 수 있습니다. 설령 정확하다고 실증되었을지라도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겠습니까?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자기 생각이 정확할지라도 그런 성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방금 우리가 성육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지만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성품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맞다고 여겨질 때에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고 사탄의 독선적인 성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차츰 경력하다 보면 기초를 터득하게 되고 길이 있게 되며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천천히 해결됩니다. 사람의 패괴에서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 제일 증오스럽고 제일 가증스럽고 제일 비열한 것입니다. 사람을 제일 메스껍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첫 번째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사악한 정욕이며 세 번째는 감정에 치우쳐 말하고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 사람이 보기에 참을 수 없고 메스꺼운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기만 해도 메스껍고 진리가 없고 감정에 치우쳐 말하고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사악한 정욕은 사람에게 인격이 없음을 뜻합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사악한 정욕이 늘 범람하면 이 사람은 인격이 없고 존엄이 없는 천한 놈인데, 천한 놈이면 가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세요.
『2. 하나님이 하와를 만듦
(창 2:18-20)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2-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하와를 만듦”, 이 성경 본문에는 몇 마디 가장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밑줄을 그어라.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이 각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아담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에게 하나의 사실을 알려 주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든 후 아담이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가? 글을 아는가? 하나님이 각종 생물을 창조한 후 그가 이 각종 생물들을 보고서 알았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라고 알려 주었는가? 물론 하나님이 그에게 각종 생물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지어 줘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럼 그가 이런 생물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지, 어떤 이름으로 지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았는가? 이것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더해 주었는지, 이런 문제에 관련된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 주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너희는 다 알아들어야 한다!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너희가 알아야 할 바이다. 즉 아담이 그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 후 그 생물들의 이름은 하나님 편에서 확정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여기에 또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반드시 설명해야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사람에게 그의 얼마간의 지혜와 능력과 소유소시(所有所是)도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것을 준 후 사람은 독립적으로 얼마간의 일을 할 수 있었고 독립적으로 얼마간의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사람이 생각해 낸 것과 사람이 해낸 것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열납하고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이 한 것이 옳은 일이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고 한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하나님은 그 어떤 정정도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담이 뭐라고 부르면 하나님이 “그래”라고 말씀하면서 그것을 뭐라고 부를지를 확정하였다. 하나님께 의견이 있었는가? 없었다. 이것은 틀림없다! 너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고, 사람은 하나님이 준 지혜로 일을 했다. 만약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한 것이 긍정적인 일이라면 이 일은 하나님 편에서는 확정된 것이고 인정된 것이고 열납된 것이니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평가나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 어떤 인류나 그 어떤 사탄 악령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 성품의 유로를 보았는가? 만약 사람이라면,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이라면 다른 사람이 자기의 눈앞에서 자신을 대신해 일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 혹은 그와 다른 세력에게서 이 지위를 쟁탈하지 않겠는가? 꼭 쟁탈할 것이다! 그때 만약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이 아담과 함께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담이 한 것을 부인했을 것이다. 그에게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있고 독특한 견해가 있음을 실증하기 위해 그는 아담이 한 모든 것을 부정했을 것이다. “네가 이것이라고 부르면 나는 기어코 그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네가 장삼(張三)이라고 하면 나는 기어코 이사(李四)라고 불러 나의 뛰어남을 보일 것이다.” 이것은 무슨 본성인가? 오만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성품이 있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한 그 일에 대해 그 어떤 비정상적이고 반대적인 행동이 있었는가? 확실히 말해서 없었다! 하나님 성품의 유로에는 분쟁이나 오만과 독선적인 것이 조금도 없는데, 이 점은 여기서 아주 분명히 나타났다. 비록 아주 작은 일이지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네가 마음속으로 만약 하나님이 어떻게 하였는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없고 하나님 성품의 발표와 유로를 볼 수 없다. 그렇지? 그럼 내가 방금 해석한 이런 것을 너희는 인정하는가? 하나님이 비록 아담이 한 이런 일에 대해 “네가 잘했구나, 제대로 했다, 내가 찬성한다!”라고 기세당당하게 말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인정한 것이다. 그는 아담이 한 일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였다. 이것은 창세 이래 인류가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나님을 위해 한 첫 번째 일인데, 이 일은 하나님을 대신해 한 것이자 하나님을 대표해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중에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지혜에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보기에 그것은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때 아담이 한 것은 인류 몸에서의 하나님 지혜의 첫 번째 창현(彰顯)인데, 그때 창현은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부분 소유소시와 지혜를 사람에게 더해 준 까닭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창현하는 생물이 될 수 있게 하고 이런 생물로 하여금 그를 대표해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바란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지혜를 인류에게 부어 주셨고 지금 또 모든 진리를 발표해 인류에게 베풀어 주어 생명이 되게 하시는데 그분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겠지요? 바로 아담처럼 하나님을 대신해 얼마간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얼마간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를 제일 기뻐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말씀과 이렇게 많은 진리를 발표하셔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데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발표하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런 말씀에 의해 살면서 하나님을 창현하고 이런 진리에 의해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역시 하나님이 보기를 간절히 바라신 바입니다. 이런 사역을 다 하신 후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누림을 얻으려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창현 즉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의 간증을 누리려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닙니까? 이것은 더욱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이 이 한 무리 사람들을 만드시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에 의해 살게 하고 그분이 베풀어 주신 진리에 의해 생명이 되게 하고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 살게 하려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칭찬이 있으시고 기쁨이 있으시고 누림도 있으신데 하나님은 곧 사람이 그분을 위해 한 간증 즉 사람의 이런 살아냄을 누리려고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케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왜 진리를 추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목표는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인생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사람의 모양입니까? 이제는 분명히 알았겠죠? 바로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이런 진리에 의해 하나의 형상을 살아내는 것인데 이 형상이 바로 사람의 진정한 모양이고 바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온전케 하는 이런 인류의 진실한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인류가 살아내는 이런 모양과 간증 그리고 이런 형상을 누리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 한 가지씩 만드시고 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으면 그분은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그분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한 번 말씀하시자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누리려 하신 것이고 그분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기쁨 속에도 일부분의 누림이 있음을 뜻하는데 제일 주요한 것은 누림입니다. 이 누림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이 몇 글자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간단하게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 주위에 여러 가지 꽃을 심었다고 합시다. 심은 후에 당신이 심은 이런 식물이 자라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볼 때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이런 심정을 단 한 마디로 “보기에 좋았더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일을 다 하고 나서 할 일이 없으면 가서 좀 보고 할 일이 없으면 속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누리고 좋아하며 마음이 유달리 유쾌하고 즐거우며 어떤 때는 감동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누리는 과정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예컨대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무엇을 배우게 하고 싶었는데 나중에 자식들이 그렇게 할 줄 알고 실행하고 있을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하나의 누림이고 유달리 기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어리고 자식이 없지만 자식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의 차림새와 생활 그리고 자식의 표정과 말과 일거일동이 매우 예의 바르고 매우 대범한 것을 볼 때 매우 누림이 있습니다. 부모가 “우리 자식이 드디어 어른이 되었네. 참 훌륭해!”라고 말할 것인데, 그 누림이 크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 대해 이런 마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만드신 인류에 대해서는 더욱 이런 마음입니다. 지금 하나님 역사를 경력한 지 여러 해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일 오래 믿은 사람은 10년, 20년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누리려 하시겠습니까? 바로 당신이 진리를 얼마 깨달았는지, 당신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원칙을 얼마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오래 먹고 마셨으면 어떤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큰 붉은 용의 간계를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큰 붉은 용이 하나님 선민을 미친 듯이 박해할 때 당신은 일어나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쓴 글이나 만든 동영상 그리고 당신이 한 간증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은 이로 인하여 마음이 기쁘고 누림을 얻으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곧 이것을 누리려 하시고 이것을 보시면 위로를 얻으십니다! 세상, 큰 붉은 용, 사탄, 마귀가 하나님을 공격하고 대적할 때에 오로지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 하나님 선민들입니다. 이 땅 위에 우리 하나님 선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누림을 얻으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하나님 선민만을 사랑하시는데 오직 우리 하나님 선민들뿐이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생명이 자라나고 일어나 증거할 수 있기만을 바라십니다. 특히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반격할 때 하나님 선민이 어떻게 하나님 말씀과 진리의 무기로 큰 붉은 용의 각종 그릇된 논리를 반박하고 최후에 큰 붉은 용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반박하여 그것을 철저히 패배시키는지를 보려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자민이 성장하였으니 땅에서의 나의 사역이 완성되었고 이 무리 사람들에게 치른 나의 심혈 대가가 드디어 헛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열매를 보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반격할 때 하나님은 우리 이 사람들의 태도를 보려 하시고 누가 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최고로 위로해 드릴 수 있는지를 보려 하십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분량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을 아프시게 할 때가 많았고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할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우리의 분량이 자라났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위로를 얻으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큰 붉은 용을 반격하여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보고 싶어 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큰 붉은 용에 대해 전혀 증오하지 않고 마치 이 일이 그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보시고 누림이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아이가 철모르고 생명이 없고 진리도 얻지 못했구나. 이 아이가 너무 어린데 언제면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림이 없으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보기 싫어하시고 알아주시지 않으며 보신다 해도 기뻐하시지 않고 위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는 죽은 사람이 아닌가? 죽은 사람을 나는 원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사람은 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이 그들 때문에 상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몹시 상심케 했었는데 하나님이 조금도 알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맨 마지막 때에, 하나님 역사가 곧 끝나게 될 때에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일,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일을 얼마간 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메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이 매우 관건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당신 때문에 몹시 상심하셨으나 오늘 당신이 한 일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이것을 공로로 과오를 씻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드디어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드디어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의 변화와 표현을 보시면 마음속으로 흐뭇해 하시고 기뻐하십니다!
『3. (창 3:20-21)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세 번째 단락을 보자. 여기서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준 이름은 의의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이는 아담이 피조된 후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가 무엇을 알고 얼마를 아는지에 관해 지금 연구하지 않고 토론하지도 않겠다. 이런 것은 내가 말하려는 세 번째 단락 성경 본문의 중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락 성경 본문의 중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이 성경 본문을 보자. 만약 오늘 내놓고 교통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마 평생 이 말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너희에게 힌트를 좀 줄 테니, 너희의 상상을 펼쳐도 좋다. 에덴 동산을 상상해 보라. 아담, 하와가 그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니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숨어버렸다. 하나님이 그들이 보이지 않아 부르니 그들은 “우리가 벌거벗었으므로 당신을 만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감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원문은 이러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으로 옷을 지어 주었는지 알겠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어 준 이 옷은 가죽옷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지은 첫 번째 옷이다. 가죽옷은 지금 놓고 말하면 고급 옷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 너에게 “인류의 선조가 입은 최초의 옷이 무슨 옷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너는 “가죽옷입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이 가죽옷은 누가 만들어줬습니까?” 너는 다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중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옷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내가 방금 이렇게 묘사하니 너희의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가? 하나의 대략적인 윤곽은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에게 인류가 입은 최초의 옷이 어떤 옷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 말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 중점은 가죽옷에 있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중점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할 때 유로한 성품과 소유소시(所有所是)를 사람이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본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아담, 하와와 함께 있었는가? 오직 둘만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는가? 하나님의 신분으로 나타났는가?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대답해 봐라.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가?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타이완의 형제자매들이 말해 봐라. (아담, 하와의 일가족의 신분, 친족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담, 하와의 친족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이런 것은 다 아주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만든 후 그들을 동반자로 삼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고 그들의 의식주행도 보살펴 주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 하와의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일에서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높고 큼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신비함도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도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낮춤, 자비만 보였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 책임과 보호만 보였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한 태도와 방식은 마치 사람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또 인류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처럼 실제적이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높은 지위로 행세한 것이 아니라 친히 가죽으로 인류에게 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 이 가죽옷이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든, 추위를 막는 것이든, 어쨌든 하나님이 친히 만들고 손수 이 일을 한 것이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하나님이 생각으로 또는 표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옷을 지어 사람의 몸을 가려준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으로 인류가 하나님이 할 리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여기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은 비록 간단하고 심지어 사람이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을 따르고 전에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상상으로 가득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였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낮춤도 보게 하였다. 스스로 높다고 여기며 거만을 부리는 그 오만한 따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의 높이 쳐든 머리를 숙이게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낮춤은 더욱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했다. 그것과 비해 사람 마음속의 “높고 큰” 하나님, “사랑스러운” 하나님, “무소불능한” 하나님은 오히려 그토록 미소하고 추하고 취약하게 되었다. 네가 이 말을 보았을 때, 이 일을 들었을 때 너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했다 하여 하나님을 경시할 수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전혀 반대이다. 그는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고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여기는데, 바로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볼수록 하나님 사랑의 진실된 존재를 느끼고 사람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가치를 느끼고 하나님이 시시각각 사람의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우리는 마땅히 현재와 연결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시초에 그가 만든 사람을 위해 이렇게 아주 작은 일, 심지어 일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나 예상치 못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럼 하나님은 이런 일을 지금의 사람 몸에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질은 꾸며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도 꾸며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실질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지 외인(外人)이 더해 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시간, 지점,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는 사람이 보기에 하잘것없는 일에서, 미소하다고 여기는 일에서,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이 전혀 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한 가지 아주 작은 일에서라야 진정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을 체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위선적이 아니다. 그의 성품과 실질에는 과장이 없고 가식이 없고 교만이 없고 오만이 없다. 그는 전혀 큰소리치지 않고 신실하고 진실한 태도로써 그가 창조한 사람을 아끼고 걱정하고 보살피고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체험할 수 있든지, 사람이 얼마나 느낄 수 있든지, 사람이 얼마나 볼 수 있든지, 하나님은 확실히 이런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런 실질을 알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나는 네가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알게 될 때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고 더욱 진실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질투와 의심도 가지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묵묵히 매 한 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진실함과 신실함, 그의 사랑으로써 묵묵히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여태껏 어떠한 고려나 후회도 없었고 여태껏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보답하는 것도 필요치 않았으며 사람 몸에서 무엇을 받아내려고 바란 적도 없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그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얻으려는 것이다. 첫 번째 화제는 여기까지 얘기하자!
이런 화제는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은 이해와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통하여 사람에게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체득할 수 있게 하고 당시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느낌과 의의를 느낄 수 있게 하며 당시의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본 후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더욱 느낀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의 존재가 공허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음을 느꼈는가? 이런 느낌이 있은 후 사람은 하나님이 곧 사람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혹시 너희는 지금 느낌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을 것이고 아마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너희의 마음속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을 때, 진실한 인식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곧 너의 곁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단지 너의 마음이 여태껏 진실로 하나님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은 진실한 것이다!
이런 교통 방식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라올 수 있는가? 너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면 마음이 아주 무겁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너희의 느낌은 어떤가? (좋습니다, 흥분됩니다.) 어디가 좋은가? 왜 흥분되는가? (에덴 동산으로 돌아오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이 화제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사실상 아주 생소한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평소에 상상한 것, 책에서 본 것, 또는 교통에서 들은 것을 너는 늘 소경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그저 손으로 더듬기만 했을 뿐 사실상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손으로 더듬는” 것은 너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본 윤곽을 전혀 줄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분명한 개념도 줄 수 없으며 오히려 너에게 더 많은 상상을 가져다주어 하나님의 성품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실질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상해 낸 불확실한 이런 요소들이 너의 마음속에 늘 많은 의심이 생기게 한다. 네가 확정할 수 없지만 또 알고 싶어 하는 일에서, 너의 마음속에 늘 모순이 생기고 늘 충돌이 생기며 심지어 어떤 때는 방해가 되어 너로 하여금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네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그를 분명히 보고 싶어 할 때에도 오히려 도무지 답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가? 물론,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추구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이런 일에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좋기는 하나의 전설이나 몽상이기를 바라는데 이러면 그들이 제멋대로 할 수 있고 세상에 자기보다 큰 자가 없다고 뽐내고 유아독존할 수 있으며 악을 행해도 그 어떤 결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고 징벌받을 필요가 없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고 심지어 하나님이 말씀한 악인에 대한 그런 논법이 그들의 몸에서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귀찮아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알아보기를 귀찮아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적대되는 자들이고 도태될 일부분 사람들이다.』
이 단락의 말씀을 읽고 나니 모두 소감이 있겠지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전에 우리는 모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단락의 말씀을 읽고 난 후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모르고 전혀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이 공감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단락의 말씀은 저를 부끄럽게 하였고 또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제일 큰 감명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렇게 실제적이고 비미은장하시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인식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인식했습니까? 이전에는 그래도 자신이 조금 인식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하나님을 진실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랑스러움, 하나님의 비미은장함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당연하게 매우 오만하고 매우 독선적이고 매우 잘난 체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이 그토록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잘난 체하고 거만한 것은 무엇으로 인해 초래된 것입니까? 무엇으로 인해 조금의 변화도 얻지 못했습니까? 이제는 분명히 보았겠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었기에 사람의 성품 변화에 성과가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조금 변화되었다고 여기고 하나님께 어느 정도 순복할 수 있고 진리를 조금 실행할 수 있고 일을 처리함에도 어느 정도 원칙이 있다고 여기지만 성품 변화의 실질(거만, 뽐냄, 독선)에 관련되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해결했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적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게 할 만한 진실한 낮춤이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이제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알지 못하고 특히 하나님의 낮춤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인식이 너무 적기 때문에 우리의 거만하고 자대(自大)하고 자고(自高)하고 독선적인 성품에 그리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원인인데 이제는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단락의 말씀을 다 보고 나니 부끄러웠습니다! 오만한 머리가 곧바로 숙여졌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이 별로 큰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모르고 이전의 인식이 너무나 얕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실질, 하나님 성품의 실질,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하나님의 낮추심,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이 매우 실제적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앞에서도 지위에 서시지 않고 사람의 가족 신분으로 나타나 사람을 걱정하시고 도와주시고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실제적이십니다. 하나님이 생각으로,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이루실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능력이 있어도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분이 만드신 인류를 위해 손수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손수 일을 하실 때 어떤 심리상태였을까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상고해 봐야 합니다. 이 단락의 말씀을 우리가 다 읽었으니 이 안의 실정을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심리상태로 일을 하셨을까요? 우리 사람은 이런 일이 닥치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입만 놀리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분부하면서 자기는 몸을 사리고 간사한 짓을 하려고 할까요?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위해 일을 할 때 무엇 때문에 그리 큰 애심이 없고 그저 대강 마무리짓고 겉치레만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과 모든 안배에 대해 무엇 때문에 마음을 다할 수 없고 언제나 소홀히 대하고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을까요? 이것은 다 어떤 성품입니까? 사람 모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진지하게,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분은 사람을 위해 손수 일을 하시고 정중하게 사역을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일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심리상태입니까? 진실한 사랑입니까? 진지합니까? 공손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순복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 몇 가지의 긍정적인 것과 정상적 인성에 구비되어야 할 것이 우리에게는 다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본분을 할 때에 모두 어떠한 패괴 성품들이 있습니까? 거만, 자대, 자고, 독선, 소홀히 대하는 것,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 것,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패괴 성품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우리가 살아내는 것이 사람 모양입니까?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양심 이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와 같이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대하시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보니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이런 말씀을 교통하시지 않고 성경의 말 즉 이전에 하나님이 아담, 하와에게 하셨던 일을 우리에게 친히 밝혀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기관이 없다”라는 이 말씀에 대해 이제는 깨달았겠죠?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참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 간단한 말씀을 읽기도 하고 줄줄 외우기도 하지만 그 속에 내포된 뜻과 그 속의 실정을 우리는 알 수 없고 종이 한 장을 두고도 뚫을 수 없을 정도이며 있는 힘껏 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그런 일, 인류에게 하셨던 일과 말씀을 이렇게 밝혀 주시니 우리는 문득 크게 깨닫게 되고 즉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을 보게 되고 인류를 위해 정중하게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가 본분을 함에 좀 고생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조금 하고 간증을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도록 좀 고생할 수 있습니까? 좀 공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진지하고 정중하게 일을 하시고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보살펴 주시며 조금도 지위를 나타내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뭐라도 좀 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습니까? 심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 간증을 하고 좀 실행해 보세요. 이 일을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서 느낌이 있습니까? (저도 형제님이 얘기하신 것 같이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묵묵히 이런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분이 매우 외롭다고 말씀하실 때 저의 마음은 매우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본분을 해도 대충대충 해서 속이고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 아직도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함에 있어서 전력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공감이네요! 우리의 느낌은 같습니다. 이런 느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뜻밖에 정말 많네요. 이런 느낌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우침이 있고 인식이 있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생각하던 마음속의 하나님은 어떠한 한 분의 하나님이셨는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실제적이고 비미은장하고 사랑스러운 이 한 분의 하나님과 얼마나 큰 거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막연한 요소가 많지 않습니까?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너무 적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얼마큼 있으면 하나님의 실제와 하나님의 진실이 우리 마음속에 그만큼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단지 도리의 인식, 관념적인 인식과 글귀의 인식만 있다면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은 틀림없이 높고 크신 분이고 완전히 사람의 상상에 부합되는 그런 한 분의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사실, 참 하나님, 실제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상상한 그 하나님이 실제의 하나님과 오차가 생길 때는 우리가 하나님과 거리가 있음을 증명합니다. 어느 때에 우리가 마음속으로 믿는 하나님이 매우 실제적이고 조금도 초자연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으며 조금의 상상도 없고 완전히 다 실제적이고 사실에 부합되면 우리가 비로소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맞지 않습니까?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을 아주 높고 크다고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사람의 관념에 맞고 사람의 상상 즉 하나님이 어떻게 어떻게 전능하고 지혜롭다는 것에 부합되지만 그 결과는 우리의 성품이 부지중에 높고 커지며 거만해지고 독선적이고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보다 낫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 성품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른 방면 즉 가장 실제적인 면, 가장 진실한 면, 그리고 그분의 비미은장한 면, 가장 사랑스러운 그런 방면은 우리가 오히려 보지 못했고 인식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향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는데 만약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다 경력하고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실제와 사랑스러운 점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정말로 실패하고 철저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인식이 조금도 없고 역시 종교인처럼 그렇게 믿고 마음속으로 믿는 분이 높고 큰 하나님이고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이며 전부 자기의 상상과 이론에 의해 장비한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과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좋은지 여기에 대해 시종 실제가 얼마 없고 직접 마주한 진실한 인식이 얼마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성과가 없고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의 마지막 이 열두 편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 열두 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하였고,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과 대면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제를 우리에게 진실로 나타냈습니다. 열두 편 말씀에서 우리는 실제의 하나님이 참으로 말씀이 육신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이 열두 편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장막이 인류 가운데 있음을 보았고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시는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이 열두 편 말씀이 도달한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두 편 말씀은 최후에 하나님의 선민을 온전케 하는 말씀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매우 귀중하고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날마다 읽어야 하고 매일 적어도 한두 단락씩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마지막에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를 수 있는가의 관건은 열두 편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는지, 진실로 생명 진입이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일부 멍청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수정하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터무니없는지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신 후에 “당시에 여러 방면을 다 교통할 수 없었고, 상세하게 말하다 보면 중심 화제로 돌아오기 쉽지 않았다. 원고가 없는 교통 방식은 그 정도로 할 수밖에 할 수 없으니 어떤 말은 나중에 꼭 보충해야 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도 역시 이렇게 실제적이고 이렇게 진실한 것이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초자연하지 않습니다. 보다시피 지금 일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이 수정되면 저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의심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그릇됩니다.) 지금 하나님 말씀이 수정됐다 해서 일부 말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보충하고 추가하여 더 완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실질이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았으며 더 완벽하게 보충했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이 계속 자기의 그릇된 관점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수정되었으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읽지 마세요. 그때 가서 뼈저리게 뉘우칠 것입니다. 마치 어떤 요리를 당시에는 간단하게 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앉아 먹다가 “에이! 뭐가 모자라네.”라고 말하면서 또 두 가지 양념을 더 넣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집에 멍청한 아이가 있다면 “두 가지 더 넣으면 저는 안 먹을래요. 저는 원래 거 먹을래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고 먹지 않으면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합니다. 그럼 바보가 아닙니까? 어떤 적그리스도가 틈을 타서 “어떤 사람이 또 하나님 말씀을 왜곡했는데 아마 또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한 일일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추가된 이런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이 스스로 수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패괴된 인류는 구원받는 사람이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못합니다! 제가 쓴 “사람의 교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하면 바로 천양지차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충하고 완벽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가 추가하고 고친 것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이 근거 없이 날조한 것이 아닙니까? 저에게 어디 그런 솜씨가 있겠습니까? 상상에 의해서만 말하는데 당신이 저를 너무 높여줬네요.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적그리스도가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는 매우 그릇되고 매우 황당합니다! 당신의 눈이 너무 나쁘네요. 이 말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좀 보세요, 누가 써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도 써내지 못합니다. 요만한 일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는데 너무나도 무지합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열두 편 말씀을 다 하셔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하고 변경하였으니 우리는 안 읽겠습니다……”라고 여전히 정죄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철저히 드러날 때에 다시 그들을 처리하는데, 적그리스도, 바보, 그릇된 자들은 다 도태될 것입니다. 매번 하나님의 말씀이 완벽해질 때마다 여러 가지의 적그리스도 음성이 들리는데 지금은 우리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다가 마지막에 함께 응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