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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진입의 교통 설교

목차

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와 하나님 역사가 도달할 효과≫에 관한 설교 교통 (3)

『하나님의 도를 준행 :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

한 마디 말을 너희는 마땅히 기록해야 한다. 나는 이 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날마다 내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되새겨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매번 한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매번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매번 한 사람의 하나님을 믿어온 경력(역주: 체험)이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이 말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그 사람인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그 사람인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너희는 모두 큰 기대를 걸고 기다리겠지만 이 말을 할 때면 너희는 아마 매우 실망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이미 여러 해 동안 입에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태껏 입에 달고 있지 않았고 이 말을 마음속에 두었다. 이 말은 무엇인가?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 :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 이 말은 비록 간단하지만 이 말에 대해 참으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 말이 아주 무게가 있고 실행할 가치가 크고 진리 실제가 있는 한 마디 생명의 언어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의 일생의 추구 목표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일생 동안 따라야 할 도라고 여긴다. 그러면 이 말이 너희에게 있어서 진리인가, 아닌가? 이런 의의가 있는가, 없는가? 아마 일부 사람들은 생각하고 상고하고 있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을 의심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할까? 매우 중요할까? 이 말을 이렇게 강조할 필요가 클까?’ 또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도를 이 한 마디 말로 말하면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한 마디 말로 귀결시키면 하나님을 너무 미소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수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이 말의 깊은 뜻을 그다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너희가 적기는 했지만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둘 뜻이 없다. 그저 수첩에 적어놓고 한가할 때 펼쳐 보고 상고해 볼 뿐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전혀 이 말을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더욱이 그것을 사용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겠는가? 너희가 어떤 관점이든지 또 어떻게 생각하든지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커다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 한 마디 말을 해야겠다. 너희가 지금 이 말을 어떻게 터득하고 어떻게 대하든지 나는 그래도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만약 사람이 이 말을 잘 실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사람이고 틀림없이 좋은 결말이 있는 사람이며, 만약 이 말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너의 결말은 바로 미지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말을 먼저 너희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너희 마음속에 먼저 실정과 내막이 있게 하고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너희를 가늠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방금 이 말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커다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 관련이 어디에 있는가? 너희도 아주 알고 싶어 하니 오늘 우리 얘기해 보자.』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압니까? 주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사람이 진실로 구원받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시고 그렇게 많은 일을 하셨는데, 하나님 선민의 몸에서 최종에 도대체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지, 하나님 선민이 구원을 받는 데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에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이 기준에 사람이 정말 도달했습니까? 왜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해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역사하신 효과가 완전히 도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이 효과를 이루시려는 의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 오늘 우리가 교통하려는 내용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역사가 이미 거의 끝이 났고 남은 것은 끊임없이 사람을 시련하고 드러내어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련하시고 드러내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드러내시겠습니까? 당신이 유다인지 아닌지, 간증을 설 수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만 드러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도태시키는 부분입니다. 사람을 드러냄에 있어서 가장 주요하게는 모든 하나님 선민으로 하여금 많은 시련을 경력하게 하는 것인데, 각 사람마다 이 많은 시련을 경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많은 시련이 도달하려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즉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 사람이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 효과에 도달한다면 하나님 선민은 진실로 하나님께 만들어진 사람이고, 만약 하나님 선민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전혀 볼 수 없다면 이 사람은 바로 생명이 없는 사람이고 도태되는 사람입니다. 진실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구원받는 기준은 도대체 뭐지? 지금 알아봐야겠어.” 바로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이 문제의 답이 나온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로 당신이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민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사람이며,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드러나 도태될 것입니다. “이 한 단계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를 사람의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사랑으로 되게 한다.”라고 하나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모든 말씀이 사람의 생명 실제가 되면 이런 사람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 시대에 시대를 끝마치실 때, 왜 하나님 선민에 대해 이렇게 요구가 높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 훼멸되고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만약 하나님의 이 요구대로라면 인류 중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높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이런 요구가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마땅히 어떻게 인식해야 합니까? 만약 이 점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을 것이고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오해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강요하신다고 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이 정말 사람에게 강요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모두 의의 있는 일이고 의의 없는 일을 그분은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3단계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이 3단계 역사가 끝날 때 하나님과 합심하는 한 무리 사람을 얻으려 하시고 한 무리 이긴 자를 온전케 하려고 하십니다. 이런 이긴 자는 하나님나라시대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등급의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은 바로 하나님나라시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할 사람입니다. 다음 한 시대에서 제사장이 되고 인솔자가 될 사람인데 진리 실제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그들은 일반 자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실 한 무리 사람들이고 모두 소질이 있고 인성이 있고 진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다음 시대에서 하나님을 섬길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하나님 선민 중에서 최종에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습니다. 비록 많지 않지만 하나님은 몇 사람이라도 온전케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인원수에 연연치 않으시고 최종에 하나님과 합심하는 이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요구하고 이렇게 교통하고 또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 말씀을 교통하는 의의입니다. 오늘 하나님 선민이 설교를 듣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하나님 집의 선민 중 다수는 모두 진리를 깨닫는 소질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 멍청이, 덜렁꾼, 지력 장애자에게 전하지 않는다는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전하지 않습니까? 구원받을 수 없기에 전해 들어와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선민은 기본적으로 모두 진리를 깨닫는 소질이 있기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역사를 교통하고 어떻게 진리를 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지를 교통하는 것은 너무나 합당하고 완전히 필요한 것이지, 지나친 것이 아니고 더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주 정당한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소질이 있는 데다가 이 소망도 있고 동시에 또 하나님의 요구이기에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사역하고 이렇게 교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요구하시면 우리 하나님 선민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추구하고 진입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편차가 전혀 아니며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이 도를 들은 지 몇 년 되지만 지금까지 조금도 진입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길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정말 길을 찾고 경력해 나가면서 또 일부 시련과 연단을 경력하게 되면 점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급해 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었지만 간증을 굳게 섰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원래부터 분량이 있었습니까? 완전히 진리 실제에 진입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시련이 왔을 때 특히 혹형이 닥쳤을 때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들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첫 반응은 “난 절대 유다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 힘을 더해 주시고 보호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럼 이 기도와 이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 있지 않습니까? 좀 있습니다. 그가 완벽한지의 여부와 분량이 얼마나 큰지의 여부를 떠나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좀 있기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고 성령이 역사하여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에게 힘을 주셨으며 그 결과 그가 간증을 서게 된 것입니다. 이 간증을 선 후 그의 분량이 자라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경력이 있게 됐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생기게 됐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환난과 시련을 경력하고 또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성령 역사의 온전케 함을 얻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변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야, 정말 놀랍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이런 경력을 하게 되고 이런 환난까지 겪다니, 비록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얻은 것이 너무나 많아 정말 만족스럽다, 후회도 없고 유감도 없어. 이 정도 고생쯤은 해도 너무나 값지지! 성령의 일깨움을 얻었고 하나님 말씀이 더해 준 힘도 얻었고 진실한 믿음도 생겼고 더욱이 진리를 추구하는 심지도 생겼어.” 이런 사람이 잡혀 들어가 옥살이한 경력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큰 붉은 용을 움직이고 효력시켜 도달하려는 효과입니다. 큰 붉은 용이 이 효력을 하는 것은 지금 효과에 도달했고 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온전케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최후에 하나님께 의지하여 사탄을 이기고 간증을 섰고 큰 붉은 용을 철저히 수치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케 하십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교통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우리 안에 장비하여 마음속에 우선 이런 인식이 있게 된 후 또 심지가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환경을 예비해 주시기에 우리는 실제적으로 경력하면서 배울 과제를 배워야 합니다. 실제 경력 중에서 우리가 각종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과 시련이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하나님과 교통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깨우쳐 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면 또 다시 협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지내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심령의 교제를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가 도리만 안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 도달하는 것입니까? 첫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진리를 교통하여 진실한 인식이 생겨야 하고 그 다음 시련 연단을 경력하여 마지막에 실제에 진입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과정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감옥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나올 때는 달라져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고 진실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그래요. 저희에게 만약 귀신 굴과 같은 감옥에 가라고 한다면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곳에서 나오고 나니 생각지 못한 수확을 얻게 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생각지 못한 수확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 행사의 기묘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됩니까? 어떤 때는 감옥을 이용하고 큰 붉은 용을 이용하여 효력하게 하고 어떤 때는 악령, 적그리스도를 이용해 효력하게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기묘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환경은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쓰다고 느끼든지 달다고 느끼든지 나중에 얻는 것은 생명의 성과이고 진실한 간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설교를 듣고 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언제 생기게 될까’라는 문제에 대해 이젠 자신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언제 생깁니까? 우리가 지금 교통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마음속으로 더 향상하도록 노력하고 더 협력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환경을 배치하여 우리가 시련 연단을 다 경력하고 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악을 많이 행하지 않게 되고 패괴 유로도 자연히 적어집니다.

지금 우리는 왜 아직도 패괴가 좀 흘러나오고 관념, 상상, 논단의 말을 좀 하고 또 패역이 좀 있고 엇나가고 방해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 적어서 어떤 때에 사람이 여기는 것과 상상 그리고 사람이 얻은 경험을 진리로 삼아 잘못을 범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서 자신을 단속하지 않아 패괴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의 입에서 오만한 말이 나올 때 그것은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안에서 지키고 있지 않아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속시원할 대로 말하고 본분을 할 때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좋다고 생각되는 대로 하기에 결국에는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많은 패괴를 유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서 단속하지 못한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됐죠?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잘못한 일도 없고 말을 잘못한 것도 없는 것은 성격의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일을 함에 신중하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탄 철학이 마음속에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람 안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지배하지 않고 균형을 잡지 못하기에 사람의 살아냄은 볼품이 없고 문제가 아주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너무나 관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사람이 일생 동안 걸을 길을 결정하고 사람 일생의 모든 행위를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진실한 생명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을 곧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 효과에 도달했다면 진리가 당신의 생명으로 된 것입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효과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고 더 높아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좀 더 높아지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죽기까지 순복(역주: 순종)하는 데에 도달하여 베드로와 같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사람 생명이 된 이후에 도달하게 되는 효과이고 사람이 살아내는 실제입니다. 제일 최저 기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살인 방화와 같은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악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부분 사람들이 행하는 악들은 다 어떤 악입니까? 바로 오만자대하고 제멋대로 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며 관념, 상상, 논단의 말을 하고 진리에 순복할 수 없고 상면의 사역 안배에 순복할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없는 것인데, 이방인이 말하는 악과 별개의 일입니다. 이방인이 말하는 악은 어떤 것입니까? 살인하고 방화하고 강도질하고 음란하고 절도하는 이런 악들입니다. 교회 안의 이런 악을 세상에 가져다가 이방인에게 보이면 “이건 악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괜찮은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들의 관념으로 가늠한다면 이것은 괜찮은 것이고 악도 아니지만 진리로 가늠한다면 바로 악입니다. 보다시피, 하나님 집의 국도 자민의 기준은 높습니다! 왜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 집에서 바로 이 기준으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요구하면서 이렇게 추구하게 하기에 10년, 20년 추구하다 보면 달라지게 되고 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경력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확실히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고 확실히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이며 참으로 실제적이고 조금도 거짓이 없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겠지요? 너무나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닙니까? 사람이 이것을 볼 수 있고 이 이상이 있게 되면 진리를 추구함에 힘이 있게 되는데, 진리를 얻기 위해 그 어떤 시련 연단을 경력하든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 원망이 없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경력하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지, 얼마나 큰 굴욕을 당하든지 원망이 없고 기꺼이 고통받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어떻게 도달하는 것인지 아셨겠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언제 생길까? 난 내가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달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왜 내 마음속에 조금도 없고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왜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지?’라고 늘 걱정하는 사람이 아직 있습니까? 어떤 원인인지 이제 분명히 아셨습니까?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경로가 잘못되었고 성령 역사에 협력하는 실행이 잘못되어 일부 시련 연단을 참답게 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으며 진리에 순복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당신은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이고 배워야 할 많은 과제를 배우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까지도 빈털터리이고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기회를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할 때 당신이 이유를 대며 한사코 변명하면 나중에 그가 당신을 어떻게 수리 대처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더는 수리 대처하지 않고 그만두면서 ‘당신 혼자 믿고 싶은 대로 잘 믿어 보세요.’라고 한다면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잡혀갔다가 갖은 방법으로 돈을 써서 풀려났지만 성령 역사를 경력하지 못했고 성령이 그에게 더해 주는 믿음을 경력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을 얻지 못해 또 한 번의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육체가 고통받을까봐 늘 환경을 피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너무 열악해지자 겁이 나서 ‘위험한 일은 하지 말자,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지 말고 인솔자는 집을 버려야 하니 하지 말자, 그건 너무 위험해. 일단 잡혀 들어가면 한평생 옥살이하거나 얻어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기회를 또 놓친 것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그런 사람은 온전케 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육체가 한 번 고통을 받음으로 나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라났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성령 역사를 얻었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누릴 수 있었으며 한 번 고통받음으로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큰 재난에 죽지 않으면 필히 복이 따른다”는 이방인의 말이 응한 것입니다. 잡혀가서 유다가 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온전케 되는 기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주요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기에 도태 될 위험에 직면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상처가 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상처를 드리는 일이고 당신이 이런 일을 한 번 하면 그것은 영원한 유감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남편(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린다면 그것은 큰일이고 만회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1편 최신 말씀에서 어떤 문제를 언급하셨습니까? 참 도를 배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몇 년 믿고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위험한 데다가 가정 환경도 여의치 않음을 보고는 ‘아예 집에 돌아가자, 세상으로 가자.’라고 하면서 세상에 몇 년 빠져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다는 것을 듣고 나서 다시 돌아왔는데 이것은 투기자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돌아오자 하나님께서 “너는 참 도를 배반했다. 참 도인지 뻔히 알고 고의로 죄를 지었으니 속죄제는 없다.”라고 태도를 표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갔어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참 도에 대해 확신도 못한 상황에서 흐리멍덩하고 무지몽매하게 6개월 또는 1년 믿고 세상으로 되돌아갔다가 세상이 좋지 않고 재난이 너무 많아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면, 당신이 무지몽매할 때 떠났기에 이런 상황은 아직 한 가닥 희망이나마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교회 생활을 몇 년 하고 교회의 양육을 받아 참 도를 깨닫고 참 도라고 확신한 후 떠났다면 이것은 달리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일은 심각한 문제이고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를 때는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잘 알 수 있도록 양육해 주지 않았고 그때 저도 무지몽매하여 진리에 대해 흥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고 들어보니 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구나, 맞는 것이네.’라는 도리적인 생각이었기에 깨닫지 못하고 떠났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분이 다시 저에게 알려 줘서 그때서야 정말 조금 깨닫게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아직 한 가닥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말을 함에 있어서 100% 장담할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정확한 답을 얻고 싶어 하지만 가능성이 적습니다. 저도 100% 장담한다고 말할 수 없기에 여러분에게 95%만 말해 줄 수 있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사람이다 보니 제 인식과 터득에 근거해 각종 정형(역주: 상태 혹은 상황)에 대해 이렇게 대략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말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시든 그래도 진리를 추구해 나중에 참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고 싶어요. 만약 제가 나중에 정말로 진리를 조금 얻고 사람 모습을 살아낸다면 죽어도 가치가 있고 헛되이 살지 않은 거잖아요.”라고 말한다면 이 관점은 옳은 것이고 이 태도도 아주 좋기에 저는 찬성합니다. 제가 만약 당신과 같은 처지라면 저도 그렇게 선택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여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하는지 지금 다 알겠죠? 하나님께서는 결실을 보려고 하십니다. 어떤 결실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 결실이 당신의 몸에서 나타나고 효과에 도달했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이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당신이 지금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말하기 어렵다”라고 합니까? 장담하지 못하고 미지수라는 뜻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구원받는 일이 미지수이고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빨리 추구해야지 머뭇거려선 안 됩니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추구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의의가 있습니까? 높게 말하면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고 낮게 말하면 자신을 살린다고 하는 것이 진실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더 실제적입니다. 자신을 살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것입니다. 진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죽지 않을 것이고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진리를 발표하신 것은 사람에게 보여 주기만 하고 들려주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에게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에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마지막에는 어떤 효과도 없다면 자신을 살리지 못합니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할 뿐이지 듣고 보고 나면 그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까? 즉 하나님 말씀의 글자 표면의 뜻은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사람의 생명으로 되는 의의와 사람이 진리를 얻는 가치를 깨닫지 못하며 이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임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는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지만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비밀이어서 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걸 거야. 난 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지, 느낌이 어떤지 테스트해 봐야겠어. 만약 들어봐서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고 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이고 다 일반적인 말이면 마음에 두지 않을 거야,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일반인이 한 말이구나.’라고 여기기에 그는 흥미를 가지지 않고 비밀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까? 갈급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비밀을 알려고 온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목성에서 화성까지의 거리가 얼마 멀고 태양의 비밀이 무엇인지, 왜 태양이 그렇게 돌고 있는지를 말씀하신다면 그는 이런 것을 듣고 “이건 하나님 말씀이야.”라고 말하면서 눈에 빛이 날 것이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감동을 받지만 생명 진리 실제의 말씀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기에 귓등으로 흘려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너무나 오만합니다. 너무 오만한 사람은 모두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늘 비밀만 들으려 한다면 분명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패괴된 인류를 놓고 말하면 가장 큰 비밀이 무엇입니까? 즉 어떻게 구원받는 데에 도달할 수 있는지,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살릴 수 있는지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쓸모있는 비밀이고 가장 큰 비밀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 다른 비밀이 쓸모있습니까? 우리와 상관이 있습니까? 이후에 인류가 어떻게 훼멸되는지 등등의 비밀이 우리와 상관있습니까? 그런 비밀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모두 쓸모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함에 실제를 말씀하시고, 사람에게 가장 쓸모있는 것이 무엇이면 곧 그것을 말씀하시고, 구원과 무관한 것은 아무리 큰 비밀이라고 해도 한 마디도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비밀을 듣기 좋아하는 것과 표적과 기사를 보기 좋아하는 것은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모두 허황된 것을 추구하고 실제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곧 죽을 사람이 제일 관심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 죽을 수 없을까? 이 병을 치료할 수 없을까? 1~2년이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는 이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패괴된 인류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지금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알게 되었죠. 그러면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역사하러 오셔서 “내가 너희 패괴된 인류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 주겠다. 오늘 내가 온 것은 바로 한 무리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이고 그리고 나서 이 세계를 훼멸할 것이다. 만약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훼멸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노골적인데 이방인과 마귀 사탄이 다 들으면 좋습니까? 이러면 너무나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여 만자로 한 권이나 되는 말씀을 하셨지만 어떤 사람은 그래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이런 뜻이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는 의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는 이렇게 중요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늘 하나님의 입에서 비밀을 듣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좀 무지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목숨이 곧 없어지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당신은 칼이 당신의 목에 들어왔음을 모릅니까? 아직도 생명과 무관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의의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이 몇 년 더 살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느 날 지진 하나면 모든 게 끝나는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솔직하게 말한다면 무엇입니까? 즉 생명의 길을 얻는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하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이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생명을 얻어서 나의 실제가 되고 나의 지금의 생명이 된다면 난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의의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글귀 도리만 아는 것이라고 여깁니까? 그것은 생명의 것이고 효과가 있으며 간증이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도달하는 긍정적 효과, 다시 말해 진실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인데, 이래야 당신의 생명 성품이 변화되었음을 설명합니다. 당신이 이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지금 당신의 생명에 진실로 변화가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됐다면 이는 딴 사람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말로 전혀 딴 사람같다고 하는 것인데, 완전히 변했고 환골탈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일이 닥치면 어떤 태도입니까? 무엇을 선택합니까? 그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최저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그가 처신함에 있어서의 최저선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부자를 만났는데, 이 사람이 돈이 엄청 많아서 당신에게 좀 준다면 당신은 즉시 무엇이든 다 있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상황을 알아볼 것입니다. “당신이 부자지만 하나님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안 믿어요.” “당신은 마귀입니다! 저는 당신과 사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죄지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일이 닥치면 바로 이런 태도이고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리를 구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과의 현저한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분을 함에 있어서 우선 고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을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떤 의의가 있을까?” 그는 우선 진리를 구한 뒤 다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일이 닥치면 그의 원칙의 최저선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든 밑지지 않으면 되고 이익이 있어야 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연히 악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악에서 떠나는 데에 어떻게 도달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됩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악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대적하는 종류이고 사탄에 속하는 종류이고 분명히 구원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두 부류의 사람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곧 사탄에게 속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좋은 결말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에 훼멸되고 다 지옥에 떨어지고 무저갱에 떨어집니다. 무엇을 무저갱이라고 합니까? 귀신이 떨어져도 기어나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지옥에 있는 귀신들은 어떤 놈도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이 나올 수 있으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얻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살아남는 사람의 표본 모형입니다. 표본 모형을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는 기준인데, 바로 이 기준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면 바로 분명해지고 일목요연해집니다. 평소에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려면 당신이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알아보고, 어떻게 결정하고,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가늠해 보면 바로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옥살이하는 사람이 큰 붉은 용의 고문이 닥쳐 “빨리 말해! 불으란 말이야!”라고 자백을 강요당할 때,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말하면 악을 행해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잖아? 그러면 안 돼, 말해선 안 돼, 모른다고 해야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풀려났습니다. 어떻게 풀려난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지배가 있었기에 간증을 서서 풀려난 것입니다. 이 사람이 큰 붉은 용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문제를 보여 주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에 이 간증을 해낸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이 사람의 이런 태도를 보고 나서 “이 사람은 신화분자네. 약이 없어, 너무 깊게 빠졌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신화(神化)되었다고 하는 그들의 귀신 말인데, 즉 하나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한다면 진리를 얻었고 생명이 있게 된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의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에게 도대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사탄도 굴복합니다. 사탄은 “이 사람은 간단하지 않구나. 혹형 앞에서도 겁내지 않다니, 이렇게 심문했는데도 모른다고만 하네, 정말 류후란 강설금보다 더 굳세구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탄을 수치당하게 한 것이 아닙니까?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각종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 앞에서 특히 사탄의 시험 앞에서 사탄이 각종 편익을 줘도 그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너의 편익을 받으면 이건 사탄과 야합하는 거잖아? 내가 너의 “선물”을 받으면 너의 구속을 받아야 하고 너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럼 내가 사탄 편에 서는 게 되잖아? 안 돼,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니들이 주는 편익을 받을 순 없어. 뇌물받지 않을 거야.’ 이방인이 이것을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서 멍청해졌나봐, 이렇게 큰 이익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다니.’라고 느낄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생존 법칙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큰 이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 가지 일에서의 그의 태도를 보고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아주 원칙이 있고 정말 진리를 견지하고 아주 정의롭구나!”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도달한 효과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자연히 악에서 떠나게 되고,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은 모두 진리 실제가 있고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탄이 봐도 굴복합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가 보여 준 이 모든 것은 곧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고, 그 사람은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순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인성이 자연히 좋아지고 자연히 간증을 서게 되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인성이 있는 거야, 내가 여태껏 살면서 무엇이 정인 군자인지, 무엇이 진정한 사람인지 몰랐었는데, 이제야 보게 됐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몸에서 나타나는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진리가 있고 실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찬성할 뿐만 아니라 사탄도 굴복하기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욥, 그 사람에 대해 그때 그 백성들이 분명히 다 그를 칭찬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칭찬했겠습니까? 그를 평가하기만 하면 먼저 “욥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결함을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욥이 일을 함에 있어서 아주 원칙이 있어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말하게 되는데, 간증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이 큰일이 닥치면 분명히 압니까 아니면 흐리멍덩합니까? 분명히 압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죄짓지 않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압니다. 그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방인은 이 일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이방인은 불가사의하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지? 그의 하나님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그는 어떤 일이 닥치든지 늘 하나님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려고 하니 말이야. 그의 마음속의 하나님은 지고지상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너무나 높아.”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방면의 간증이 너무나 많았기에 마지막에 가장 심한 시련, 가장 큰 시련이 닥쳤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실제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과정에 마찬가지로 많은 시련이 오는데, 원칙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구합니까? 간증이 있습니까? 굳게 섰습니까? 만약 욥과 같이 일어설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것은 실증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 아닙니까? 사람됨을 추구함에 있어서 이렇게 추구하면 됩니다. 길은 지금 나와 있습니다. 욥은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이고, 베드로는 우리가 추구하여 최종에 살아내야 할 목표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기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된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여 이 2가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마음속에 얻는 누림과 위로는 도대체 얼마나 클까요? 아주 큽니다. 너무나 큰 누림이고 너무나 큰 위로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물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큰 누림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령 역사의 쾌감을 느껴 본 적 있죠? 어떤 때에는 성령이 축복하는 쾌감을 느끼고 하나님 말씀으로 축복하는 쾌감을 느끼면서 하나님 말씀의 축복을 얻고 자민이 되어 하나님께서 “너희는 다 구원받을 수 있고 너희를 꼭 온전케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 마음속의 그 쾌락과 그 누림은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시각 당신은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행운스럽고 참으로 복이 많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두터운 사랑을 주신 것이기에 저는 위로받고 매우 만족스럽습니다.’라고 느끼면서 마음속에 특별히 누림이 있는데 그것은 복이 아닙니까?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럼 “행(幸)”자는 무슨 의미인지 압니까? 행운을 가리킵니다. 이 복을 얻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입니다. 사람이 이 말세에 재난의 세월 속에 살면서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의 위로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입니다. 이런 복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흑암이라는 느낌 뒤에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불안하고 초조하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이 죽은 후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결말을 보게 되는데, 그런 심정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마음속에 진리 실제가 없는데다가 또 많은 악을 행했다면 마음속은 흑암하고 불안하고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며 또 하나는 애곡하며 이를 갈게 될 것인데, 그것은 아주 비참합니다. 행복의 반대는 바로 비참함입니다. 타이완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방인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인터넷에 올리려 했는데 그들이 “이방인이 말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서 다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나서 “이 말씀은 고쳐야 합니다. 고치지 않으면 올려 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함부로 쉽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자 그가 “저희들은 이 말씀을 보기 싫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괴로워요.”라고 했는데, 웃기지 않습니까? 괴로워하면서 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받아들이기도 싫고 죽기도 싫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싫어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심하고 이런 이방인들을 보면 너무나 가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두터운 사랑을 누리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이것이 행복이 아닙니까? 당신이 행복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아직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지금 어떤 사람은 생각해 봅니다. ‘내 맘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나? 정말 시련이 오면 간증을 설 수 있을까? 지금은 잡히지 않았지만 이후에 재난이 닥치고 홍수가 오고 지진이 오고 온역이 와 재산이 다 없어지고 자녀도 죽고 남편 아내도 다 죽으면 그때 욥처럼 간증을 설 수 있을까?’ 마지막에 자신이 없어서 딱히 말하지 못하겠다는 답을 하나 얻긴 했습니다. 마음속에 자신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 다시 시련이 오면 성령은 또 시련을 통해 우리를 드러내고 우리를 연단하고 우리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압력 앞에서 사람의 육체가 받는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하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면 이 생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신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때 육체에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람 안에 장비하면 사람의 육체가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부 고통입니다. 육체가 고통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육체가 극한에 달할 때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생명이 될 수 있고 당신의 공급이 될 수 있으며 당신의 능력이 될 수 있고 당신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육체가 이런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더 주시지 않고 성령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외에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함에 이르렀는지 다시 봅시다. 수백 차례의 시련을 거쳐 달한 것인데, 그 수백 차례의 시련에서 그의 육체와 마음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고통을 얼마큼 감당해야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을 살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 일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경로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경로를 잘 상고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난 후에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그에게 외워보라고 하면 외울 수도 있고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심은 어떤 배경에서 하십니까? 이 과정은 어떤 과정입니까? 사람의 육체가 아주 편안할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육체의 고통이 조금도 없는 상황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안일을 탐하는 사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해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이런 길을 선택합니다. 첫째, 가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둘째 세상을 버리지 않습니다. 셋째,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으려고 합니다. 넷째, 자신도 손해를 보면 안 됩니다. 그는 이런 몇 가지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계속 진리를 얻으려 하고 나중에 하나님과 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하고 가족과 이방인도 그를 좋아하게 해서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부 은혜만 받아 하는 일마다 잘 풀리네.”라고 찬성하게 하려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죠? 이 생각이 성립됩니까?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지 소용없습니다. 제가 예수를 막 믿었을 때 걸은 길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직장을 버리고 가정을 버렸더니 가족, 친척, 친구, 아는 사람,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어서 미치고 멍청해졌다고 했고 나중에 그들은 저를 소고집도 유별난 소고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산당이 잡는 줄 뻔히 알면서 이렇게 믿어 왔고 공산당이 어떻게 저에게 사상 교육을 해도 듣지 않았고 어떤 편익을 줘도 받지 않았고 이 길만 끝까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정말 소 열 마리도 저를 끌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길은 바로 이렇게 가야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이 길을 가야만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실증됐습니다. 이런 게 맞죠? 어떤 사람은 제가 믿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완벽한 방법으로 믿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통하지 않는 길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진리를 추구하는 이 길이 맞구나, 나도 추구해야지. 그런데 남편이 아직 안 믿고 있어서 내가 추구하려면 그를 버려야 하고 그러면 가정이 깨지는데 이걸 어떡해야지?’ 이러면서 그저 머리만 긁적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남편을 버리기 쉽습니까? 쉽지 않죠. 어느 날 시련이 닥치면 저는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니면 사탄을 경외하는지 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그게 뭐 어려운 겁니까,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되는 일입니다. 이방인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 말하든 개의치 마세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버리기 쉽고 고통도 그다지 크게 받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버리지 못해 집에서 나온 지 며칠 지나고 보름이 되자 걱정합니다. ‘내 아이는 어쩌고 있을까? 누가 밥을 챙겨주지? 누가 옷을 갈아입혀 주지? 누가 학교가는 걸 보살펴 주지? 학교를 안 다니면 앞으로 전망은 어떡하지?’ 당신이 말해 보세요, 고려하는 게 어떻습니까? 고려 안 하는 게 없죠? 그렇게 빈틈없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목숨 목숨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자신이 국도에 들어가면 남편과 자식도 모두 국도로 데려가려고 하는데 정말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 좋은 마음이 무슨 쓸모있습니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정을 끊어야 할 때면 끊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려면 어떤 때는 정을 끊어야 합니다. 욥을 보세요, 시련이 닥친 후 아내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 때, 욥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정이 있습니까? 아무런 정도 없습니다. 마귀에게 무슨 정을 논하겠습니까? 마귀에게 정을 주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것을 증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은 바로 이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늘 정 속에서 살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려면 모든 것을 타파해야 하고 정이 없어야 하고 진리를 실행해야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기에 진리를 얻기 위해, 본분을 하여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지금 가정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버려야 합니다. 어떤 때 당신이 본분을 하다 보니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집에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로 본분을 버리고, 있는 본분을 하지 않고 집을 돌본다면, 돌볼수록 병이 더 생기고 돌볼수록 시끄러운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 일은 다 적지않게 경력해 봤습니다. 당신이 본분을 잘한다면 모든 것이 다 원만하고 본분을 잘하지 못하면 흐리멍덩하고 엉망이고 아무 곳에도 쓸모없습니다. 본분을 잘하는 것은 간증인데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어디에 간증이 있습니까! 욥의 그 시련이 없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음을 나타낼 수 없고 사탄을 수치당하게 할 수 없고 또 사탄이 시인하지 않기에 시련을 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련은 사탄을 수치당하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욥 본인에 대해 또 어떤 역할을 일으켰습니까?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했습니다. 욥이 만약 이 시련을 겪지 않았다면 시련이 닥칠 때 간증을 설 수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욥 자신도 모르겠지만 경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욥이 이 시련을 경력한 후 “이 시련이 왔을 때 난 이렇게 행동했구나, 사람들은 이렇게 봤고 나는 저렇게 여겼고, 아내는 이렇게 말했고 나는 그렇게 그를 대했어. 또 세 친구의 말에 대해 내가 이런 관점을 보였구나.”라고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진실한 분량과 진실한 정형에 대해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련은 누구에게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사탄에 대해서든 자신에 대해서든 각 방면의 효과에 모두 도달했고 자신도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시련을 경력하는 자체가 생명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이 이 시련을 경력할 때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없어졌고 전 재산과 수년간의 적금도 다 사라져 어떤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고 훼방받고 경시당하고 온몸에 악창이 생겨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더 바싹 다가갔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 외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이 모든 일을 처리했고 이 모든 일에 대답했는데 이 자체가 바로 생명 진입의 가장 실제적인 훈련인 것입니다. 이 간증을 다 하고 이런 말을 다 했을 때 그의 마음속은 어떤 느낌이었겠습니까? 그는 분명히 “내 나이 70에 이런 시련이 와서 내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 내 가족과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어. 아내의 원모습이 이미 드러나 비록 그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꿰뚫어 보게 됐고 부부 간에 정이 있는지 없는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알게 됐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의 친구가 이 일에 대해 어떤 견해가 있는지 친구의 관점도 단번에 알게 되어 모든 진상이 다 밝혀진 것입니다. 더욱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고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에게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신 후 그는 자신이 간증을 굳게 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귀로 듣기만 하며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는데 오늘에야 대면해 하나님을 보게 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됐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이 이번 시련을 겪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느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한평생을 헛살지 않았구나, 칠십이 다 되어 죽어가는 몸인데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니, 정말 얻은 게 너무나 많아.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셨지만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시고 인식하게 해 주셨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갈 때에도 역시 빈 몸으로 돌아갈 텐데, 난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에게 하신 말씀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깨달음과 인식이 있게 됐으니 이것은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가치없는 모든 것을 버려고 가장 귀중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귀중한 것을 얻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버린 것이 너무나 가치 있고 너무나 의의 있구나! 무엇이든 다 버려도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만이 가장 귀중하고 진리만이 가장 귀중하구나,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버려도 가치가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내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을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와 재산을 다 버려서라도 하나님을 얻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해하지 못하니 우리가 개의치 않으면 되고 그들이 눈이 멀어서 어떻게 논단하든지 그들과 맞서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얻기 위해 무엇을 버려도 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제가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단 말입니까?” 당신이 이렇게 다년간 경력하면서 버리지 않은 사람이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못봤습니까? 버리지 않고 얻는 사람을 봤습니까? 만약 그 길이 통한다면 우리도 버리지 않습니다. 은혜시대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자격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격이 없고 불합격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시지 않고 당신이 믿는다고 해도 헛믿는 것입니다. 그럼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잘 알았겠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당신의 뜻은 제가 이혼하고 자녀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입니까? 진리를 추구하여 영적으로 속박을 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장 좋은 실행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욥이 이 간증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니 아내가 그에게 말 한 마디를 했는데 그가 속박을 받았습니까? 속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아내, 남편, 자식, 부모 사이에 존경할 것은 존경하고 효도할 것은 효도하고 보살필 것은 보살피고 사람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본분을 할 때에는 그들의 속박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정확한 실행입니다. 알겠죠? 만약 아내가 방해하면서 “뭔 진리를 추구한다고 그러세요. 쓸 돈도 모자라는데 돈이나 벌어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진리로 대신해 쓸 수 있어요? 자신을 살릴 수 있어요? 그럼, 당신이나 벌어요. 난 목숨 살리는 게 급해서 안 벌 거예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어떤 아내는 본분을 함에 있어서 남편의 속박을 받습니다. “남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생활만 잘하던데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아? 당신은 왜 날마다 밖으로 나도는 거야? 계속 밖으로 나돌면 전족해서 못 다니게 만들 거야.”라고 말하면 당신은 어쩌겠습니까? “당신이 전족해도 저는 나갈 거예요, 제 마음만은 묶어놓지 못해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따르려면 굳센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분을 하는 과정에, 교회 생활을 하는 과정에 진리를 추구하고 수리 대처를 받아들이고 상면의 안배대로 자신의 본분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경력하면 성령 역사가 있고 늘 성령의 깨우침이 있고 날마다 진리를 깨닫는 데에 진보가 있으며 실행할수록 정확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에 시련이 임할 때 간증을 서게 됩니다. 교회 생활은 국도 훈련에 속합니다. 훈련을 어느 정도 하고 나면 시련이 오고 훈련을 어느 정도 더 하고 나면 또 시련이 오게 되는데, 시련이 오는 것은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설교를 듣고 나서 느낌이 아주 좋아 죽을지언정 유다가 되지 않겠다는 심지가 생겼는데, 어느 날 시련이 와서 정말 아름답고 드높은 간증을 했습니다. 보세요, 교회 생활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교회 생활은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보고 이렇게 교통하고 이렇게 설교를 듣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일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길이 생기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를 알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가를 알게 되며 무엇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모든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할 때면 각종 시련이 끊임없이 오게 되면서 부단히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매번의 시련은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진리 생명을 조금씩 얻게 하고 자신을 알게 하고 다 진실하게 드러내어 마지막에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하여 더욱 갈급하게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련이 많아지고 당신은 온전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평온하고 편안하게 지내는데, 왜 시련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늘 이 재난이 닥치지 않으면 저 일이 꼬이고 이런 저런 굴곡과 풍파가 많은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것은 곧 사람의 심지에 달렸고 사람의 추구에 달렸습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시련이 적습니다. 시련이 너무 적은 사람은 어찌 된 일입니까? 시련을 받을 자격이 안 되고 분량이 너무 작아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많이 경력한 사람은 경력할수록 시련이 더 커지면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온전케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시련을 달라고 구하라고 시켜도 시련이 오면 넘어질까봐 두려워 기도할 때 이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시련이 오면 어떤 때는 가정이 한 번에 파산되고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감히 시련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됩니까?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진리만 추구하면 됩니다.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온전케 하시려면 그렇게 하시고 저를 어떻게 인도하시려면 그렇게 인도하십시요.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 더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다른 것은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어느 날, 당신의 남편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남편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남편이 없으면 저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까? 이러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의 남편이 너를 살릴 수 있는가? 남편이 너의 구세주인가? 그를 떠나면 안 된다고 하다니, 너의 마음속에는 나의 지위가 없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정말로 병에 걸려 죽게 됐다면 당신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순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남편도 역시 피조물이고 그 또한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살든 죽든 하나님께서 안배하시기를 바라고 제 자신은 선택이 없습니다. 그가 죽는다고 해도 저는 하나님을 따르고 믿을 것이며 진리를 추구할 것입니다. 될 수만 있다면 그래도 죽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죽으면 제가 고통스러우니까요.”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까?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앞의 말은 그나마 잘했는데 뒤에 “될 수만 있다면”으로 말을 바꾼 게 문제입니다. 당신은 순복만 배우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간구하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다년간 믿었지만 지금에 와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임한 모든 일에서 저는 악을 많이 선택하고 잘못을 선택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많았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사람 모습을 살아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라고 칭함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어떤 시련으로 저를 온전케 하시든 저는 모두 순복하고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기도한다면 아주 좋습니다. 당신이 갈급히 진리를 추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분량에 따라 당신을 이끌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의 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인ㆍ사ㆍ물에 손을 대어 우리를 시련하고 드러내십니다. 이런 일에서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제 마음이 무엇에 묶여 있고 무엇에 점유되어 있는지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저는 지금 그것이 저의 마음속에 지위가 있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만 경외하고 싶지만 저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안배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나 의의 있고 바로 제가 추구해야 할 인생입니다. 제가 추구하려는 인생과 삶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방면의 진리를 중심으로 상고하고 마음으로 경력하고 실행한다면 한두 해 지나 진리도 깨닫게 되고 실제에도 진입할 것이며 효과에도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매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데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함은 무엇을 통해 도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통해 도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여 성공하고 실제에 진입한다면 당신은 자연히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도는 어떤 것을 포함합니까? 주로 하나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고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런 효과에 도달하려면 어떤 생명을 구비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명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명이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게 되고 자연히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제가 주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일까? 난 언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때 저는 어쨌든 십자가를 져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만 알았었지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잘 경력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데에 도달한 후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성품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의 부탁도 완성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부탁을 당신에게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탁을 주신다면 성령은 당신을 인도하기 시작하고 당신에게 부담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탁이 당신의 몸에 있게 된 후 당신의 일생은 하나님의 부탁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게 되며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분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면 되겠습니까? 적그리스도라면 되겠습니까?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적그리스도의 버림과 그의 모든 행위는 다 명리와 지위를 위한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이고 그의 면류관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더욱이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간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가 있어서 말합니다. “저도 하나님을 섬기고 싶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를 추구하여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람마다 다 본분을 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제가 하는 본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사역에 근거하여 본분을 안배하는데, 당신이 중요한 본분을 하려면 진리 실제를 구비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구비해야 합니다. 첫째는 당신이 진리 실제를 구비해야 하고 둘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구역 인솔자 본분을 할 수 있는데 소구역 인솔자 본분을 시키겠습니까? 큰 인재를 작은 곳에 쓸 수는 없죠. 당신이 목회 구역 사역자 본분을 할 수 있는데 소구역 인솔자 본분을 시키겠습니까? 더욱이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진리를 터득하는 정도에 근거하고 당신이 진리를 교통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통하는 정도에 근거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투철하고 깊게 교통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탄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상층 인솔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분량에 근거하여 당신의 사역을 안배하고 본분을 안배합니다. 당신의 분량이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그 본분을 시켜도 하지 못합니다. 소질이 평범한 사람이 너무나 많기에 지금 당신이 어떤 본분을 하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이 과제를 잘 배워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진정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본분하는 것과 진리를 깨닫고 나서 본분하는 것은 다르기에 그때가 되면 다시 안배를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인솔자와 일꾼을 안배함에 있어서 무엇에 근거합니까? 진리 실제가 있는가 없는가에 근거하고 생명 경력이 깊은가 얕은가에 근거합니다. 이방인이 늘 “능력이 있다,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데 “야, 이 사람은 능력이 있네.”라는 말에서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재주가 있고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고 “능력”이 없으면 큰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도 이것에 근거하는데 즉 진리를 얻었는가의 여부에 근거해 진리를 얻은 사람은 바로 “능력이 있고”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은 한평생 설교했어도 진리가 없고 많은 사람은 몇 년 경력했어도 설교할 때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탁을 받을 수 있고 진리가 없는 사람은 부탁을 줘도 쓸모가 없기에 하나님도 그에게 부탁을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 하나님을 믿은 지 5~6년 되는 사람이 진리를 투철하게 교통하지 못하는데 빈자리가 있다고 해서 그에게 구역 인솔자 본분을 하라고 한다면 그가 사역을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하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 선민에게 글 쓰는 것을 훈련하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인데, 한 방면은 드러내고 다른 한 방면은 당신을 경력하게 하고 진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리 실제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빨리 추구하고 오만한 자세를 낮춰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몇 달 동안 머리를 짜도 좋은 간증문 한 편을 써내지 못해 마지막에 고개를 숙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정말 진리 실제가 없어요. 스스로 실제가 좀 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에 와보니 아무것도 없고 간증문을 쓴 것도 가치가 없고 너무나 얕아 다른 사람이 다 깨달은 것이어서 쓸 필요가 없네요. 하지만 훈련 삼아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가 쓴 것을 보고 “사람에 대해 유익하고 도움이 됩니다. 정말로 좋습니다!”라고 다들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진리가 있고 진리를 조금 깨달았음을 설명합니다. 진리를 조금 깨달은 사람은 쓸 수 있고, 여러 사람이 보면 인정하고 그러게 되면 당신을 추천하여 인솔자로 선거할 것입니다. 보세요, 당신이 쓰지 않으면 누가 압니까? 쓰지 못하면 교통해도 됩니다. 교통한 것이 아주 좋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서 다른 사람이 듣고 나서 교통을 잘하고 분량이 있다고 하면 인솔자를 선거할 때 자연히 당신을 뽑게 됩니다. 이것은 겉면의 문화 지식이 높고 낮은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겉모습의 생김새와 기질에 관계가 있습니까? 여전히 별 관계가 없습니다. 참된 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함에 있어서 정부 수뇌보다 훨씬 낫고 지혜도 있고 원칙도 있고 전면적입니다. 진리가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뛰어넘고 진리가 있으면 능력이 있고, 패기가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있어야 참된 능력이 있는 것이지 지식이 있는 것은 참된 능력이 아닙니다. 지식은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시는 사람은 분명히 뛰어납니다. 제가 어떻게 말하든 모두 여러분의 필요에 부합되고 여러분에게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고 성령께 쓰임받는 이 실제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사람은 설교를 함에 있어서 자연적인 유로이고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머리를 많이 써서 설교문을 쓴 다음 당신에게 읽어 줄 필요가 없이 그의 자연적인 유로만으로도 당신을 공급하고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은혜시대에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나님께 있어서 이 한 무리 사람들을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홀가분하고 유쾌한 일이어서 몇 마디 말씀만 하시면 일을 이루십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런 생명과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제일 간단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셔서 지금 발표한 말씀 외에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그런 비밀은 왜 말씀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의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의가 없음”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의의가 없으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의의가 없음은 생명과 무관하다는 것이고 또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일부 비밀을 말씀하신다면 이 일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하나님의 사역에 어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외에 하나님께서 일부 비밀을 더 드러내신다면 하나님 선민이 외적인 일에만 중요시하고 생명 영 안의 일을 중요시하지 않아 사람의 마음을 쉽게 외적으로 끌어가는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기에 사람을 온전케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의 그런 비밀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번에 하나님께서 파격적으로 영계의 일에 대해 조금 말씀하신 것은 결말에 관련되는 일이기에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행성들의 비밀을 다시 밝히신다면 과학자들도 다 와서 믿을 텐데,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실제적인 하나님이심을 시인하게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이 가장 관심을 갖는 오묘한 비밀을 말씀하신다면 이방인들도 다 참 하나님이 오셨다고 할 텐데, 이 사역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선민을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 선민을 구원하시는 사역은 어긋나게 되고 파괴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에 성육신 하셔서 일부분 말씀만 하셨고 어떤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며 진리 생명만 교통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은밀히 하기 위한 것인데, 이 사람들만 알게 하여 온전케 하고 구원하면 되기에 이방인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중시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 하나님을 증거하면 이방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맞아요? 제가 보기엔 왜 하나님 같지 않죠?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이런 말씀만 하셨네요. 다 진리이고 다 맞는 것이고 모두 긍정적 사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와 긍정적 사물만 교통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인가요? 그럼 안 되죠. 하나님이라면 표적과 기사가 있어야 되잖아요.” 보세요, 사람은 표적과 기사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비밀을 밝혀 주시기를 원하고 영계와 천문 그리고 우주의 오묘한 비밀을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을 말씀하신다면 그들이 다 와서 믿을 텐데 이러면 시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 그 외에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시지 않고 사람의 생명에 무관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비밀을 밝히시지 않고 표적과 기사만 보기를 추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들을 드러내시고 마지막에 다 도태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무나 의의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지혜로우며 너무나 적당합니다.

제가 요 며칠 여러분에게 이렇게 진리를 교통해 주니 어떻습니까? 얻은 것이 좀 있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수리 대처가 좋죠? 수리 대처가 없으면 바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불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이 일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비교적 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이 2천년 동안 그렇게 많은 명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마지막까지 믿어서 어떻게 됐습니까? 다 실패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실제 사역을 좀 했고 공헌도 좀 했지만 왜 “결국에는” 다 실패했겠습니까? 이 문제는 아주 관건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왜 역세 역대에 그렇게 소질이 좋고 비교적 우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다가 최종에는 다 실패했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람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이 속에 비밀이 조금 숨어있지만 사실 하나님 말씀에서 이미 답을 주었기에 비밀도 아닙니다. 문제의 관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어느 시대에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했든, 왜 최종에 다 실패를 초래했겠습니까? 관건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에 하신 사역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이 아니었기에, 즉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이 아니었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아무리 성령 역사가 있었고 당시의 그 시대에서 성령이 사람을 깨우쳐 주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지 사람의 생명 성품은 절대로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역을 끝까지 하고 나서 스스로 많은 사역을 했기에 공을 세웠고 명성도 떨쳤다고 여기는데 결국 사람의 패괴와 오만, 사람의 야심과 사치한 욕망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드러난 후에는 실패한 것이지 않습니까? 성령이 버리고 떠나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마지막까지 추구하여 길 끝까지 갔을 때 20~30년을 믿었든지 아니면 40~50년을 믿었든지 그의 생명 성품이 만약 변화되었다면 실패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추구하여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들에게 얼마나 깨우쳐 주셨든지 그들의 생명 성품이 왜 변화되지 못했겠습니까? 지금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까? 바로 성령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성령이 당시에 사람 몸에 역사하실 때 동시에 하시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었잖아요?” 이 말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다. 왜 성립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6천년 동안 역사하시는 데에는 자신의 경영 계획이 있고 매 단계에 어떤 사역을 할 것인지 모두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방면입니다. 다른 한 방면은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이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간단해서 성령의 깨우침만 있으면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필요하고 많은 명확한 말씀으로 파헤치고 심판하고 사람의 생명을 공급해야 하고 또 명확한 말씀의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단계 사역을 하지 않으셨고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며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기에 성령이 깨우쳐 주고 빛비춤을 주셔도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성령은 무엇에 근거해 역사하십니까?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 자민을 온전케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원칙이 있고 범위가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인도에 근거하여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이루려 하면 성령은 곧 그것을 하시고 하나님이 어디까지 말씀하셨으면 성령도 거기까지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 역사의 원칙입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성육신 하셔서 심판 형벌의 사역과 발표해야 할 말씀을 다 발표하셨기에 성령은 이런 말씀에 따라 사람을 깨우쳐 주시고 빛비춰 주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셔서 이 모든 진리에 진입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성령 역사의 원칙입니다. 그럼 은혜시대에 성령은 왜 사람을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사역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은혜시대에 베드로가 온전케 됐잖아요?” 베드로가 온전케 된 것과 오늘 하나님 선민이 온전케 되는 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때 성령은 베드로의 몸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소유소시, 사랑스러운 점을 인식하도록 깨우쳐 주셨기에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이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는 들은 적이 없기에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늘 이 단계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역대에 소질이 비교적 좋고 하나님에 대해 비교적 충심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지막까지 믿었어도 왜 실패했습니까? 특히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왜 실패했습니까? 그들이 소질이 그렇게 좋고 그렇게 많은 성령의 이끄심을 경력하였고 성령의 역사와 인도를 경력하였으며 당시에 성령이 사람에게 깨우쳐 주신 많은 진리도 깨달았는데 마지막에 왜 실패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없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이런 진리가 없다면 소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도록 온전케 하시고 사람의 믿음과 성품 변화를 온전케 하여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 하십니까? 마지막에 사람의 모든 야심과 사치한 욕망을 없애 사람에게 그 어떤 야심과 사치한 욕망 그리고 복을 얻으려는 속셈까지 없어지게 합니다. 마지막에 사람의 추구 목표는 무엇 뿐이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진정 사람의 형상을 살아내기만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것만 추구하라고 합니다.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이런 진리와 이런 실제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진정한 인생을 얻는다면 이것이 사람됨에 성공한 표징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신 표징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 놓고 말해도 끝이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함에는 끝이 없습니다. 진실한 인생을 살아냄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사람 모양을 조금 살아내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성공하는 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 모양을 조금 살아낸다고 만족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역대의 성도가 참으로 사람 모습이 조금도 없었겠습니까? 다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 실패했습니까? 진정한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상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상을 진실로 살아낸다면 사람 안에 뒤섞임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만약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뒤섞임이 너무 많다면 이 뒤섞임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실패를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역을 좀 하고 고생을 좀 하고 심지어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는 공의로운 면류관을 얻으려 하고 상을 얻으려 하고 들림받으려 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사람의 뒤섞임이 아닙니까? 이 뒤섞임에 거래의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 거래는 무엇을 뜻합니까? 배반의 요소가 그 속에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당신을 위해 고생했으니 꼭 면류관을 얻어야 합니다.”라는 이 배반의 요소 즉 거래라는 하나의 속셈이 있다면 문제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이 거스름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공의롭고 거룩합니다. 거룩함이 그의 실질이기에 당신이 하나님과 거래가 있으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이며 그 결과는 성령이 당신을 버리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로 하나님의 성품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하고 공의로운데 당신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거래를 해왔고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결국 끝장나고 위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의 관점과 목적이 최종에 모두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성품 변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심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실질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는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드러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그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합니까? 당신이 지금껏 하나님을 믿은 것이 뒤섞임이 있어서였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은 너무나 작습니다. 이 뒤섞임이 바로 악이고 거래이고 배반이며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고 ‘만약 내가 이 편익을 얻지 못하고 이 복을 얻지 못하고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할 거야.’라고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거래는 배반의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함에 있어서 마땅히 어떤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합니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많은 고생을 했다면 면류관을 받아야 한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들림을 받고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을 영접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 상태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 일은 생각해 봐도 모르겠죠? 이것이 바로 구해야 할 진리인데 일반인에게는 없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저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기에 저는 한평생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기를 원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어떤 복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만 있다면 만족합니다.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이 든든하고 평안합니다. 만약 제가 이렇게 본분하지 않는다면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사람의 이지로서 마땅히 해야 하고 구비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기에 자랑할 게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사람의 본분이고 사람의 의무이고 사람의 책임일 뿐입니다. 절대로 이런 것을 보수를 요구하고 면류관을 요구하는 자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 상태가 있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뒤섞임이 있습니까? 거래와 속셈이 조금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사람의 본분과 사람의 책임을 할 뿐이고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 않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고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살 면목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많이 주시고 많이 요구하시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더 많이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고 또한 하나님께 많이 보답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인생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까지 인식한다면 또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여기까지 인식하여 이대로 행한다면 당신은 오만이 없고 요구가 없고 사치가 없고 더욱이 욕망이 없게 됩니다. 그때가 돼야 사람은 가장 양심 이지가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만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주셨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십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본분이고 책임이고 의무이고 당연한 것이고 불변의 이치이지 절대로 이것을 면류관을 얻고 상을 얻으려는 자본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이지가 없고 양심이 없으며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분을 잘하는 원칙이고 합격되게 본분을 하는 데에 도달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생명 성품 변화는 바로 이런 효과가 있어야 하고 이런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마땅히 이런 마음 상태와 이런 심지가 있어야 하고 이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고생을 좀 하고 일을 좀 했다고 해서 자본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사람은 좀 비열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심판 형벌 하시는 것은 바로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것인데, 이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없다면 패괴된 인류는 사람 모습을 살아낼 수 없고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려면 심판 형벌을 경력해야 하고 수리 대처를 경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항상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 형벌을 한동안 떠나면 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패괴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데, 사람이 오만해지고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며 이지가 없고 제멋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너무나 믿을 바가 못 됩니다. 천성적으로 인성이 좀 있긴 하지만 많지 않고 귀신 본성만 가득합니다. 언제 어느 때 귀신 본성이 나오면 인성은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이 본분을 하다 보면 또 잔꾀를 부리기 시작하고 열흘도 조용히 있지 못하고 보름이 되면 태도가 변하고 발광하며 이상한 짓을 하고 신경질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없다면 사람은 너무 쉽게 고질병이 도지게 됩니다. 생명 진입은 끝이 없고 진리를 추구함에도 끝이 없습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비밀 맞죠? 이 비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온전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이 말을 쓰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면 온전한 사람이다”라는 이 말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추구하고 성품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을 경외하여 완벽한 데에 이르고 악에서 떠나는 효과에 도달했다면 이 사람은 바로 온전한 사람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는데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이건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이 만약 정말로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당신이 만약 정말로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면 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겠습니까?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큰지 아니면 작은지, 이것으로만 사람이 진실로 진리를 깨달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사람입니다.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만약 너무 작아서 아직도 많은 악에서 떠날 수 없다면 이것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끝이 없습니까? 진리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은 자신이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매 한 가지 진리의 깊이는 모두 끝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투철히 깨닫지 못한 진리가 많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만약 일부 일에 부딪쳐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쉽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까? 이때 무엇으로 그것을 제재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설사 어떤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악에서 떠날 수 있고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으며 진리를 구할 수 있고 제멋대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나 유한한 상황에서 무엇으로 사람의 행위를 제재하여 악을 행하는 것을 방지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방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주 위험하고 악을 행하기가 너무 쉽고 하나님을 대적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이 일을 분명히 알았겠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반드시 도달해야 할 효과입니다. 이 효과에 도달하기만 하면 당신은 곧 온전한 사람이 될 희망이 있고, 이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면 당신은 영원히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고 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겉으로 보기에 많은 진리를 깨달은 것 같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실패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다 실패하게 되는 것이 바로 역대 이래 성도가 실패하게 된 교훈이고 근원입니다. 욥은 왜 70세가 됐을 때 그렇게 큰 시련이 임했어도 간증을 서고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기 때문이고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간증을 굳게 섰지만 욥보다 더 많이 깨달았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그런 사람은 마지막에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는 인생의 승패의 결정적인 부분이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지금 어떤 종교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한사코 정죄하고 대적하고 있고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모두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너무나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가장 큰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자신에 대한 보호인 데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이중 보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지의 관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한 방면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 방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당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음을 보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이 오늘 이 일에서 순복했을지라도 내일 다른 일에서는 또 배반할 수 있고 또 하나님께 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서 너무나 관건입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사랑함에 뒤섞임이 너무나 많고 또한 불합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보장하려면 관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마지막에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바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약 진리를 추구하여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현저한 효과에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승패의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여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진실로 토대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는다고 확증할 수 있겠습니까? 즉 진리를 추구하여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 진정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악에서 떠나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을 어느 정도 믿고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아직 성공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에 지금 추구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가 보기에 당신은 본분을 잘하고 있네요, 순복할 수도 있으니 몇 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성과가 좀 있네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혜이기에 자랑할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저는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늘 죄송하고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데에 도달해야 마음속에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진리를 추구할 이런 심지가 있다면 성공할 희망이 있고, 진리를 추구할 이런 심지가 없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다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추구해야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좀 흐리멍덩하게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땅히 생각이 맑아야 하고 마음속에 분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데에 도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진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진리를 추구함에 목표가 없고 목적 없이 일부 문제를 해결한다면 당신의 진리 추구함에 눈에 띄는 효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많은 문제를 상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진실한 정형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한 일부 교훈을 섭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패의 근원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추구해야 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아주 단순해 생명 진입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덜렁꾼이지 않습니까? 결정적이고 중요한 많은 문제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요한 일로 여기지도 않는데, 이러면 좀 덜렁대고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그럭저럭 믿고 있어요.”라고 말하겠죠?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럭저럭이란 흐리멍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너무 거칠다는 말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여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기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진리를 추구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한다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관계가 있습니까?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효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까? 율법시대에 욥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렀습니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어떤 기준이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고 요구하신 것과 완전히 같은 것입니까? (같지 않습니다.) 욥의 그것은 최저 기준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기준은 마땅히 욥보다 높아야 합니다. 욥의 그 최저 기준은 무엇입니까? 중대한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준은 무엇입니까? 욥보다 높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죽기까지 순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욥의 기준보다 높은 데에 도달하면 온전케 될 것이고 욥과 똑같은 기준에 도달한다면 구원만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최소한 복을 얻기 위해 믿지 말아야 하고, 사치한 욕망이 없이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세요, 좋은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끝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것은 가장 완미한 것입니다. 이 말도 기억하세요, 얼마나 큰 공로가 있든 사치한 욕망이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은 당신이 마땅히 하나님께 보답해 드려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은혜이니 당신은 자신이 공로가 있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여길 때 당신은 위험하고 이지가 없는 것이며 타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됨을 지킨다면 원칙이 있지 않겠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최대의 원칙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최대의 원칙이지 않습니까? 빛 속에서 사는 것도 최대의 원칙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 사람됨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은 이런 원칙이 있어야 사람됨에 성공하고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성공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