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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다≫에 관한 설교 교통 (7)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어떻게 악에서 떠날 것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고 회피가 아니고 멀리함도 아니고 숭배도 아니고 미신도 아니라 앙모, 숭경(崇敬), 신임, 이해, 헤아림, 순복, 헌신, 사랑이며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앙모도 없고 진정한 신임도 없으며 진정한 이해도 없고 진정한 헤아림과 순복도 없으며 단지 두려움과 불안만 있고 의심, 오해, 회피와 멀리함만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헌신과 보답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경배와 귀복도 없고 단지 맹목적인 숭배와 미신만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으며 악에서 떠날 수 없다. 반대로 사람이 종사하는 모든 활동과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훼방과 논단이 가득하며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어기는 사람의 악행도 가득하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임이 있으면 진실한 따름과 의지함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뢰가 있어야 진정한 앎과 이해가 있을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이해가 있으면 진실한 헤아림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헤아림이 있어야 진정한 순복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순복이 있어야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헌신이 있어야 조건 없고 불평 없이 보답할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신뢰와 진정한 이해와 헤아림이 있고 진정한 순복이 있고 진정한 헌신과 보답이 있어야 참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알 수 있고 조물주의 신분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이 진정 조물주를 알아야 진정한 경배와 귀복이 생길 수 있고, 사람이 조물주에 대해 진실한 경배와 귀복이 있어야 참으로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전반 과정이자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모든 내용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함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어떻게 악에서 떠날 것인가?”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있어 이것은 가장 중요한 단락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현재 하나님 선민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고 모두가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어떤 효과에 도달해야 합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것이 곧 진리를 추구하여 얻는 성과입니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하나님의 선민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얻은 성과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게 되어 도달하는 효과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모두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아마 일부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자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 베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맞습니까?” 굳이 이것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베드로보다는 조금 못한데 “조금 못하다”의 효과는 무엇을 가리켜 한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만약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되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욥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육신 되어 역사하셨다면 욥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하나님나라시대이고 성육신께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면 그도 틀림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렇게 이해하면 맞습니까? 조금도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어떻게 악에서 떠날 것인지에 대해 반드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어떻게 악에서 떠날 것인가?”라는 이 구절의 정의를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이 단락의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해. 이방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시인하지도 않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이 있어야 해! 경외란 주로 두려움을 말하니까.’라고 여깁니다. 이런 관점이 맞습니까? 그럼, 우리 이런 문제를 토론해 봅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해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두려워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없습니다. 그럼 두려움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은 멀리하게 하고 피하게 합니다. 멀리하고 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부인하고 배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숭배도 아니고 미신도 아닙니다.” 이 숭배와 미신은 긍정적인 사물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사물입니까? 부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상과 악령 그리고 명인들을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가 있습니까? 아무런 진리도 없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숭배할까요? 이런 우상, 악령, 명인의 한 측면이 그들의 육체의 상상과 관념에 부합되기 때문에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숭배는 인식이나 진실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방면이 그의 상상과 부합되면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숭배는 아주 맹목적이고 진리가 없으며 또한 아주 우매하고 거만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정치가나 명인 그리고 가수나 연기자들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데, 아주 황당한 일이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황당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느 방면의 능력과 특기가 있으면 몹시 숭배하는데, 이런 숭배에 진리의 근거가 있는지 말해 보세요. (없습니다.) 그가 그 사람의 실질에 근거해서 숭배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그런 특기와 은사가 있기에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본성이고 어떤 실질인지, 마귀인지, 악령인지 상관치 않고 사람이 그런 은사를 구비하기만 하면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주 맹목적이고 아주 황당하며 진리의 원칙에 부합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이 참으로 숭배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며 더군다나 원칙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숭배하는 사람이 마귀이고 사악하며 단지 어떤 종류의 은사가 있어 연기나 노래를 잘하는 것 뿐인데 그를 성인(聖人)으로 숭배합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무엇이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면서도 상관하지 않고 “그래도 그를 숭배할 거예요.”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을 숭배하는 이 사람이 아주 황당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주 황당하고 이성이 조금도 없으며 아주 맹목적입니다.

또 한 가지는 미신입니다. “미신(迷信)”은 글자 그대로 한 가지 일에 미혹되어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일이 다 옳고 좋은 것이며 다 긍정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사람들이 악령과 더러운 귀신 및 각종 동물들을 미신하고 있는데 그가 그 악령과 더러운 귀신 그리고 각종 동물들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 조금은 알겠지만 많이 알지는 못한데 그는 옳고 좋다고 여기며 미신하고 심지어 그것을 섬기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은 우상을 섬기고 악령을 섬기는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에게 진리의 실제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원칙이 있습니까?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미신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효과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기에 미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인 인식에 근거하는데,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형벌을 인식함으로써 나중에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한 실질 그리고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을 인식하게 되어 진실한 경외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경외는 미신이나 숭배가 아니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 도달하는 효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다년간 진리를 추구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당신은 왜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납니까? 그것이 우상이 되어 미신하고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모두 아닙니다. 여기에는 진리의 실제가 있습니다. 수년간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얼마간의 참된 인식이 있는 기초 위에 도달하게 된 하나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진리의 실제이고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간증한다면 사람들은 “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정말로 미신하는 게 아니고 개인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도 아니네요. 여기에 많은 진리가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여 도달하게 된 효과이지 사람이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달하고 싶다고 해서 도달하는 것도 아니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다수 사람들이 모두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1년만 추구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길 간절히 바라는데, 이것이 가능합니까? 1년으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됐지만 본분을 함에 있어 원칙이 없고 전부 제멋대로 자기 뜻에 따라 하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년간 인솔자 일꾼을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을 드러내며, 또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일이 닥치면 독선적이고 오만하며 자기 의견만을 고집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당신이 도달하고 싶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거나 얻고 싶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 해 경력(역주: 체험)한 결과이자 여러 해 추구한 효과입니다. 이방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여러 해 “수련”한 효과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몇 년을 수련해야 한 가지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몇 평생을 해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추구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데 몇 년이 필요하겠습니까? 8~10년이 없이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 진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사실을 보았습니다. 즉 매번 과오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니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고, 매번 연약하고 소극적이 될 때마다 “우린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지 못했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매번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할 때마다 “우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귀하고 몹시 바라는 것이며 사람들이 도달하기 위해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추구하다가 효과가 좀 있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좀 생겼어요. 당신이 저보고 제물을 훔쳐먹으라고 하고 음란을 범하라고 해도 저는 함부로 그러지 못하고 멀리할 것입니다. 당신이 저보고 본분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본분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저보고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저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붙잡힌 후 “저보고 유다가 되라구요? 안 됩니다.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죽을지언정 유다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좀 있지 않습니까? 이만한 성과는 몇 년을 경력해야 얻는 것입니까? 3~5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당신이 정말로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기를 추구하려면 8~10년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하면 그것을 “노력하는 자는 꿈을 이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고 회피가 아니고 멀리함도 아니고 숭배도 아니고 미신도 아니라 앙모, 숭경(崇敬), 신임, 이해, 헤아림, 순복, 헌신, 사랑이며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앙모도 없고 진정한 신임도 없으며 진정한 이해도 없고 진정한 헤아림과 순복도 없으며” 하나님 말씀에서 무엇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지를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모두 어떤 내용입니까? 첫 번째, “신임”, 두 번째, “이해”, 세 번째, “헤아림”, 네 번째, “순복”, 다섯 번째, “헌신”, 여섯 번째, “사랑”, 일곱 번째,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지에 대해 모른다면 지금 마땅히 이 7가지 방면의 구체적 내용을 더 상고해야 하고 더 많이 이해해야만 인식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 7가지 방면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즉 반드시 이 7가지 방면의 실제를 구비해야 합니다. 이 7가지 방면의 실제는 공허한 이론입니까, 도리입니까? 이론도 아니고 도리도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럼 이 “실제”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어떻게 도달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주 간단하고 해석하기가 쉽습니다.”라고 하지만 해석을 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실제는 도리를 깨닫는다고 해서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7가지 방면의 실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의해 도달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신임하고 있습니까? 과감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혼인을 하나님께 맡기고 한평생 결혼 상대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나중에 구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역주: 들이다, 바치다, 쓰다, 지불하다의 뜻)하다가 나중에는 역시 되찾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쳤지만 나중에 빈곤하여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니 되찾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겼지만 나중에 그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데려오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 세심히 돌보지 못하시니 그래도 자기가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스스로 버렸지만, 나중에 알아보고 나서 하나님께서 상관치 않으실까봐 걱정되어 그래도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믿음직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이런 행동들이 신임하는 것입니까? 신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임하지 않다”를 사람의 말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실지, 또 그렇게 하실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 하나님께서 신용을 지키실지도 미지수이니까!’라고 여깁니다. 만약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의심과 추측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신임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얼마나 큰 신임이어야 신임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신임하는 데에 도달하기가 쉽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또 말합니다. “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데 저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정말 책임져 주십니까? 만일 언젠가 먹을 것이 없으면 누가 돌봐 줍니까? 만일 언젠가 자녀가 없어 의지하고 부양해 줄 사람도 없으면 어떡합니까? 역시 자기 스스로 돌봐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신임하고 있는 것입니까? 신임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가 만일 하나님께서 상관치 않으신다면 어리석은 짓을 한 게 아닙니까?” 그것은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맡겼는지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본래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만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상관치 않으십니다. 만약에 당신 자신을 정말 하나님께 맡긴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진심을 보시고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거짓된 마음이면 하나님은 당신을 상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기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았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진심입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께 맡긴 그 물건과 그 사람이 나중에 정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신에게 시련을 주어 믿음이 어떤지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시련이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무책임하신 것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럼 당신 스스로 정말 끝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까? 당신은 책임지지도 못하거니와 당신에게는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각종 환경과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신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매 한 가지 사물을 관리하신다고 여깁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심에 있어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관리하시든, 어떻게 인도하시든, 어떻게 역사하시든 당신은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가늠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가늠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가족을 하나님께 맡겼는데, 가족이 병에 걸리니 “하나님은 무책임하시네요!”라고 하나님께서 상관치 않으신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그를 병이 들게 하여 너에게 나의 큰 능력을 보여 주려는데, 어떤가? 나는 지병으로 너를 시련하여 너에게 도대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겠다.”라고 말씀하시면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당신은 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정이 불행해 부모가 먼 곳으로 떠나는 바람에 자녀가 고아로 되어 서로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기묘한 행사로 어느 날 그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안배는 이렇게 기묘합니다! 어떤 고아들은 사람이 보기에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살아남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묘하심이고 하나님의 전능입니다. 사람들은 돌봐줄 여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죽어야 할 사람은 죽고 살아야 할 사람은 살게 되고, 시련을 얼마나 겪고 고통을 얼마나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께는 그분의 안배가 있으시기에 사람이 걱정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관념 속에는 자녀를 꼭 지켜야 하며 자녀가 부모 곁을 떠나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뜻은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키려고 하면 아이는 기어코 나가려고 하고, 아이가 나가기만 하면 당신은 때리면서 단속하지만 나중에는 아무리 때려도 붙잡아두지 못하고 나가버리는데, 당신이 단속할 수 있습니까? 어떤 때에는 부모가 마음속으로 ‘이 아이는 글렀어, 좋은 놈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만 이 아이가 10~20년의 단련을 거쳐 좋은 사람이 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만유와 만물을 주재하심에 있어서 모두 그분의 방식이 있지만 사람은 이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경찰이 저를 잡아서 고문한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구해 주실지 그 여부를 모르기에 저는 이 시련을 담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만약에 정말 저를 잡아다가 때려 죽인다고 하면 저는 얼른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가 되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으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신임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그럼 왜 어떤 형제자매는 맞아죽었습니까?”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해하기 쉽지 않죠? 당신에게 참된 믿음이 있어서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죽을지언정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맞아죽는다 해도 이것은 믿음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임했기에 맞아죽을지언정 유다가 되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신임을 잃었습니까? 맞아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허락하셨는데, 당신은 왜 순복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당신의 죽음을 허락하셨으면 당신이 순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죽을지언정 순복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이런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도 당신을 신임하시게 됩니다! 그분께는 다 적합한 안배가 있으십니다. 당신에게 그런 간증과 순복 그리고 그런 희생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공평하게 대하실 겁니다. 이 점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역대 성도들은 별의별 죽임을 다 당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안배하셨는지 압니까? 다 적합한 안배가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당신은 추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을 신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그는 하나님을 신임합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저를 죽게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것이 신임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시험이라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신임이라고 하는지 아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고 당신에게 무엇이 임하든 하나님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 당신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안배는 잘못될 리가 없어. 조만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다 공의이고 공평이고 진리임을 알게 될거야.’ 당신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일부 사람들이 고문을 받아 죽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런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고, 어떤 사람들이 무슨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안배하시고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참되고 하나님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임합니다. 어떤 결과가 임하든지 그는 하나님을 신임하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없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께서 만유를 주재하시는 방식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관리하시고 이끄시는지에 대해 모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점이 있는데, 바로 사람이 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판단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자식에게 매일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그에게 따끈한 음식대신 찬 음식을 먹게 하고 먹을 밥이 없어 스스로 해결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당신은 “찬 음식을 먹으면 위가 상합니다.”라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살이 20년 하면서 위병이 사라졌는데,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람의 상상과 관념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커다란 가로막음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방면에 대해 모릅니까? 하나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주재하시는지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이끄시고 공급하시며 관리하시는지에 대해 인식이 없고,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관리하시는지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신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사람에게 또 하나의 치명상이 있는데, 바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의 행사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거역 그리고 불신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이 이 믿음을 잃는 것은 무엇과 관계됩니까?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지 못하기에 하나님에 대해 도무지 진실한 신임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사람의 방식으로 자신의 부모와 자녀를 사랑하므로 늘 육체적 관계의 속박을 받습니다. 당신이 육체적 관계와 당신의 상상과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는데 하나님께 어떻게 순복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신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 한 사람은 다 피조물이므로 모두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 그리고 관리를 받는데, 당신이 늘 사람들을 자신의 손에 통제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그 밖에 당신이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늘 육체적 관계에 따르고 늘 육체적 관계가 남아있어서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신임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신임하지 않고 자기를 신임하고 자신만 믿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을 참으로 신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며 헌신도 없고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신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임이 없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해”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사람에게 참된 이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해심은 하나님을 아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므로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고 사람에 대한 요구는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은 무엇이고 하나님은 왜 염려하시고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무슨 일을 걱정하시고 고심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추호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금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런 것들을 그가 모른다면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릴 줄 모르는데 어떻게 경외하겠습니까? 만약에 당신에게 경외심이 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약간의 두려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저는 두렵습니다!” 단지 약간 두려움이 있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까? 두려워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뜻이 좀 있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왜 많지 않습니까? 첫째로 경력이 깊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적으며 참된 인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조급해 하시고 근심하며 염려하시는지 그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데 이런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마저도 없으니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좀 있는데,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조금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너무 낮은데 아마도 한 사람 혹은 하나의 물건보다도 높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는 것은 곧 그의 마음속에 오직 하나님의 지위가 가장 높고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주요한 것이 아니고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우선이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부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조금만 있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설령 하나님을 조금 경외한다고 해도 0.1%밖에 안 되며 너무나 작습니다. 0.1%의 경외가 무슨 효과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르지 못합니다.) 0.1%의 경외심으로 세상과 세속에서 벗어나는 데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것에 이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0.1%의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진실되게 순복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0.1%의 경외심으로 간증을 설 수 있습니까? 0.1%의 경외심으로는 아마도 진리를 실행하는 것조차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경외심은 몇 %에 도달했습니까?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당신을 하나님께 순복하게 하고 모든 것을 버리게 하며 하나님에 대해 참된 봉헌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헤아리며 만족케 하도록 할 수 있습니까? 이 몇 가지 효과에 도달한다면 당신의 경외는 진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해”라는 이 하나의 실제에 보통 사람은 진입할 수 없고 구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구비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에 대해 순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며 마지막에 사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이 우리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애쓰시는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련과 재난이 닥치면 어떤 사람은 관념이 생기는데,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심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있으면 그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며 상상이 있으면 이해심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무엇이 임하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순복할 수 있고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헤아림”입니다. “이해” 다음으로는 바로 “헤아림”입니다. “이해”하는 그 마음이 조금 근접한 것인데 이해할 수 있으면 틀림없이 패역과 저촉이 없습니다. “헤아림”은 “이해”가 행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제가 이해했으니 하나님 편에 서고 원망하지 않으며 헤아리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헤아리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게 된 후에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조급해 하시는 것을 조급해 하고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절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하나님 마음에 상처를 드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헤아림”이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과 합하게 해 줍니다. 이 “헤아림”에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위로해 드리기 원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수수방관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 또 멀리하고 거역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 오히려 상관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상심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한 후에는 헤아림으로 바뀌는데 헤아림은 곧 행동을 하는 것이며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마음이 하나로 합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조급해 하시는 것을 조급해 하며 하나님 편에 서서 본분을 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단지 믿기만 하지 본분을 함에 있어 하나님에 대해 헤아림이 없으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거나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하며 하나로 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이익을 지키지 않고 늘 자신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조금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틀림없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하나님과 딴 마음이고, 하나님 편에 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지 않고, 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앞날과 운명만을 고려하며, 늘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기 쉽겠습니까? 우리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하나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어요.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 일하는 것을 보면 전부가 자신을 위하고 말하는 본심과 동기 그리고 근원이 모두 자신을 위한 거예요.” 이런 사람은 마음속에 틀림없이 하나님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그저 믿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믿겠습니까? 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생각해 드린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것은 100%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해 드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 사역의 진전이 더디니 조급해합니다! “하나님, 이 복음 사역이 왜 이렇게 더딥니까? 사람들은 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드리지 않을까요?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이 없지만, 저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헤아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일손이 부족한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부담이 없고 온종일 대충대충 하고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거나 위로해 드리는 데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그럼 제가 가서 그 본분을 하겠습니다. 제가 가서 그 사역을 잘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헤아림이라고 합니다. 헤아림은 실제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란 곧 깨닫고 인식하며 보고 나서 알았다는 것인데, 패역하지 않고 관념이 없고 논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헤아림은 행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으로 바뀌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헤아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것인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인데,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가 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마음이 선량하고 정의감이 있습니다! 조물주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보통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비록 아주 보잘것없지만 이런 마음이 있기에 너무나 위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위대하고 고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위인이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보잘것없는 인류가 조물주의 마음을 생각해 드릴 수 있다면 이 피조물은 이미 아주 위대하고 특별하지 않습니까? 겉모습의 출중함이 아니라 심령의 위대함입니다. 겉모습은 조금도 출중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조급해 하시고 하나님께 부담이 있으신데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일에 사람이 다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일어나 생각해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 집의 일을 위해 조급해 하고, 기도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서라도 일을 조금 하려고 하는데, 마음은 있지만 힘에 부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얼마를 할 수 있든지 너의 그 마음이 아주 귀하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런 마음이 있음을 보셨기에 마음의 위로를 많이 얻으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다 키웠더니 자녀가 비록 돈이 얼마 없고 아무런 힘도 없지만 그래도 부모에 대해 좀 효도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고 부모가 많은 위로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해.” 우리 피조물이 조물주를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소질이 높거나 낮든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이든 간에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힘을 다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매우 만족스럽고 이미 위로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이 헤아림이 귀하지 않습니까? 아주 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까지 도달하면 이 사람은 마음이 좋고 선량하며 심령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온전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고 언젠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다음 내용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순복”입니다. 순복이라고 하면 그 의의가 깊고 헤아림보다 더 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서만 협력하고 헤아리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순복이 포함하는 범위가 더 넓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순복이라 함은 간단하게 약간의 진리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으로 이 범위는 넓습니다.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한다고 말하면 앞날이나 운명과 같은 그 어떤 것에도 순복하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면 합격된 피조물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합격된 피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 그리고 주재에 순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배하셔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이 원래 어떤 영이고, 마지막에 어떤 거처가 있으며,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연구하지 않고 연구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면서 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 이후의 결말이 무엇이든 어디로 가든 당연히 순복하며, 어떻게 죽든 두말없고 절대 원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면서 절대로 자신을 위해 제멋대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순복이 있으면 합격된 피조물입니다. 순복을 구비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주 클 텐데,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심이 나왔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표징이고 특징입니다. 어떤 일에서든 이런 사람에게는 순복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무릇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면 그는 모든 일에서 늘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을 품고 받아들이고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거역하며 대적할까봐 매우 염려하는데, 이런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다음 주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헌신이다”입니다. 헌신을 말하면 다 아는 바와 같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다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진실한 것입니다. 단지 약간의 재산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며 결말도 하나님의 지배에 맡겨 어떻게 죽는다 해도 다 괜찮고 남은 반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 어떤 대가를 치르며 본분을 하라고 해도 아무런 조건과 원망도 없이 받아들이고 순복하는데, 마치 군인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이것이 절대적인 순복이 아니겠습니까? 절대적인 순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원망 없이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어느 정도까지 신임하게 되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나의 남은 생을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거야. 절대로 내 가정이나 자녀, 부모님, 남편(아내)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거야.” 이것이 진실한 헌신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구하면 많은 일이 지체되고 생명도 지체되고 정력도 허비되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지체된다면서 배우자를 구하지 않고 모든 정력과 시간을 다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받고 극대한 굴욕을 참으며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가족 그리고 가정에서 어떻게 핍박하고 박해해도 그는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고 오로지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고 보답하는 것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헌신만 있고 요구가 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100%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도 헌신했는데,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까?”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헌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에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저도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됩니까?” “2~3년 헌신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당신의 믿음이 어떤 때는 맹목적이지 진실한 헌신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봉헌했다가 다시 되찾아갑니까? 일부 사람들은 헌신한 후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일을 하며 또 자신의 선택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참된 믿음이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그의 헌신은 열심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그의 진실한 분량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분량이 모자랍니다. 일부 사람들은 2년 믿고 헌신했는데, 그럼 그 2년 동안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겠습니까? 경외가 몇 % 되겠습니까? 분량이 너무나 작습니다. 헌신하는 마음도 참되고 좋은 것이나 분량이 너무나 작습니다. 그러므로 헌신한 후,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임 그리고 헤아림과 순복이 부족한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헌신이 있는 사람이 만약 3~5년 진리를 더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신임하고 이해하고 헤아리며 순복하는 데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도 헌신했지만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진리를 잘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잘 추구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게 되면 당신은 하나님을 신임하고 이해하고 헤아리며 순복하게 되는데, 그때 당신의 헌신은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시겠죠? 무엇 때문에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당신의 지금의 헌신이 많은 경우에 여전히 거역과 대적, 선택과 도피가 있으며 게다가 자신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당신의 헌신에는 뒤섞임이 너무나 많은데 단지 헌신만 있고 순복과 실제적인 행동이 없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은총만 받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그리고 이끄심만 받을 뿐입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여 진실된 효과가 있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그때가 되면 당신의 헌신은 진실되고 하나님께 열납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신이 헌신을 했음에도 또 도피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본분을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요구도 엄격하고 더군다나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있어야 하며 진리도 깨달아야 하고 진실한 순복도 있어야 하며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도 받아들여야 하니. 이렇게 고생스러운 줄 알았더라면 헌신하지도 않았을 거고 본분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세상에서 일을 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요구가 엄격하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실로 헌신한 것일까요? 만약 그가 헌신했다고 한다면 그의 헌신은 약간 맹목적입니다. 그는 하나님 집에 와서 양코배기를 속이듯 본분을 해도 하나님 집에서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실 것이라 여깁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상상이 있으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얕보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러면 골칫거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다 그릇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하나님은 공의롭고 거룩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성품은 거스를 수 없음을 알았으니 진실한 헌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집에서는 본분을 함에 있어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구비해야 하며, 순복이 있어야 하고 매사에 진리를 구해야 하며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케 해야 한다고 사람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분을 함에 이렇게 많은 요구가 있음을 알았는데, 그래도 헌신하기를 원합니까? 그래도 헌신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헌신하는 마음은 진실함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있는 사람은 그의 헌신이 참된 것입니다.

지금 접대 본분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치른 대가가 작습니까, 큽니까? (큽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저의 집을 당신께서 쓰시도록 봉헌하오니 하나님 집에서 안배하는 대로 순복하겠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이 오든 원망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와도 인내하고 형제자매처럼 대하고 트집 잡지 않고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만약 원망이 있어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저를 벌하셔도 됩니다.” 이런 헌신이 진실하지 않습니까? (진실합니다.) 이런 헌신은 고통을 받을 수 있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며 개인의 선택이 없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있지 않습니까? 순복과 헌신이 다 있습니다. 진실한 헌신은 바로 이렇습니다. 지금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돈과 재물 그리고 좋은 물건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서두르지 말고 기도하세요! 분량이 아직 작으니 몇 년 추구하다가 진리를 깨달은 후 다시 봉헌해도 됩니다.”라고 말하자 “저는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봉헌하겠습니다. 봉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신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서 두말없이 헌신했는데, 이것은 맹목적인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몇 년 경력하면서 하나님과 몇 차례나 대면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고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임을 알고 나서 완전히 하나님께 봉헌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는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보답입니다.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이해심이 있지 않습니까? 헤아림이 있지 않습니까? 순복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가 왜 자신이 얻은 것을 하나님께 봉헌할까요? 이 일을 잘 해부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그가 하나님은 너무나 진실하심을 본 것입니다. “너무나 진실하십니다! 하나님 역사는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정말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신임합니다. 둘째, 그는 자신이 얻은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부터 온 것이지 자신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제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세상에 얻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저에게는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한 일이 보답이고 헌신이며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줄 압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런 사람에게 욥의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욥의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얻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지 저의 능력으로 얻은 게 아닙니다. 제가 농사를 짓는 것처럼 씨를 아무리 잘 뿌린다 한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태양 빛과 수분이 없으면 제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한다 해도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농사를 지어 얼마의 양식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햇빛이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시고 수분이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공급해 주시기에 나중에 밭에서 곡식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진실하시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임을 알았으므로 그는 사람으로서 양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에서 비롯된 이런 헌신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다지 완벽하지 않지만 그에게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리 완벽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헤아림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한동안 계속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경외가 악을 떠나는 데에 이르면 당신은 바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에게 경외심이 있는데,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간증을 굳게 선 사람들에게는 다 경외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악에서 떠날 수 있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잘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누리면서 세상 사람의 유행을 따르는 악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남녀간의 감정상에서 이겨 내지 못하는데, 이 정도의 분량이면 문제이고 이런 악은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반드시 이겨 내야 합니다. 언젠가 이런 악을 홀가분하게 물리친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기본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가장 큰 악은 무엇입니까? 지위와 돈 그리고 남녀 관계입니다. 만약에 이 세 가지 악을 물리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지위의 악을 멀리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겠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저에게 어떤 본분을 안배하면 저는 안배한 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지위를 다투지 않고 지위를 위해 머리를 짜거나 애쓰지 않겠습니다.” 만약 사람이 지위를 내려놔 다투지 않고 지위를 위해 말하거나 일을 하지 않으며 지위를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배척하거나 혹은 타격을 주지 않는다면 그의 순복은 참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하지 않고 지위를 빼앗아올 수 있어도 “저는 지위를 다투지 않고 하나님 집의 안배에 따르겠습니다. 저보고 무슨 본분을 하라고 하면 저는 그 본분을 하겠습니다. 저에게 작은 풀이 되라고 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하면 한 포기의 꽃이 되려고 다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순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함에 있어 늘 골라서 하려 하고 순복이 없습니다. “저는 이 본분을 하고 싶지 이 본분 외에 다른 본분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본분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참된 헌신이 있습니까? 그가 개인의 선택이 있어서 고른다면 큰 문제가 됩니다. 당신이 그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그는 소극적이 되고 본분을 하지 않으며 일을 팽개치려고 하거나 대충대충 해서 속이고 마음속으로 저촉하며 일을 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은 합격된 피조물이 아니고 순복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간사하게 말합니다. “순복하겠습니다. 저는 그래도 어떤 것을 하기에 적합합니다.” 당신이 기교부려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말을 들을 줄 아는 것이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조금 엄하게 말하면 반감이 생기면서 당신을 논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흠과 결점을 들추어내고 달걀 속에서 뼈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순복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매우 패역하고 오만하며 독선적입니다. 참된 순복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대처(역주: 질책)해도 저는 듣겠습니다. 사실에 반 정도만 부합되고 싫은 말을 해도 들을 것이며 저는 순복하고 두말없이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훈련시켜 순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순복하지 못합니다. 순복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어쩔 수 없어 조금 순복합니다. 그가 속으로 뭘 생각할까요? 사탄의 철학이 나왔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진실한 순복이 있겠습니까? 참된 순복이 없고 사탄의 철학이 있습니다. 헌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셨겠죠? 헌신과 순복은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헌신한 후에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기초 위에서 참된 헌신이 마침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의 경지는 더 높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려운 점이 있겠습니까? 참된 사랑을 언급한다면 어떤 어려운 점이나 패역이 없고 오직 헤아림과 이해 그리고 순복과 헌신만 있습니다. 가장 사랑스럽고 마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기 위해 어떤 고생을 해도 되고 죽어도 됩니다. 사랑 안에서의 헌신은 절대적이지 않습니까? 자녀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을 보세요, 어느 정도로 사랑합니까?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다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어떤 부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한평생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니 내 아들은 대학에 보내야죠! 집에 돈이 없으면 신장을 팔아서라도 아들 뒷바라지를 하고, 마지막에는 내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내 아들 공부는 시켜야 합니다!” 말해 보세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이 사랑이 크지 않습니까? 원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원망이 없습니까?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뼈가 다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이 정도로 사랑한다면 그 경지는 아주 높은 것입니다. 자녀가 정말로 그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어릴 때에는 손에 쥐면 부서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어느 날 자라서 어떻게 됐습니까? 살아있는 마귀임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헛 사랑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많지 않습니까? (많습니다.) 그다음 후회합니다. 후회하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저런 꼬락서니로 될 줄 알았더라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바보지!” 이때 사람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미워하고 사람을 간파하지 못한 자신을 미워합니다. 자기가 난 자식이 틀림없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김새만 비슷하지 영혼이 틀리고 전생의 원수가 자녀로 환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이런 영인 줄 알았더라면 뭐라 해도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사람은 “아이고! 사람은 우매하고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해, 사람이 직접 영계(靈界)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귀를 사랑할 줄은 생각 못했고 총명한 체 하다가 오히려 당했어!” 그러므로 무릇 육체의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지 않습니까? 어릴 때는 귀여웠을지 모르겠지만 급해 마세요, 그가 커서 본성이 드러나면 당신은 후회하고 보면서도 놀랄 것입니다. 그 본질을 사람은 간파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경력해 온 사실로써 설명한다면 육체의 가족이 사랑스럽습니까? 같은 부류의 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어떤 집은 두 자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다른 하나는 마귀이고 어떤 집은 엄마와 딸 중에 하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적그리스도이고 어떤 집은 아버지와 아들 중에 하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효력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가족 중에 하나는 좋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육체적으로는 모두가 가족이고 혈연관계지만 중요한 것은 영인데 같은 부류가 아닌 것입니다! 육체적 생김새로 보지 마세요 “야, 나도 닮고 당신도 닮았어.”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같은 부류의 영이 아니면 끝난 것입니다. 걷는 길이 같은 길이 아니면 마지막에는 공통의 언어가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아이가 사람다운 말을 좀 하는 것 같았어도 어른이 되어 본성이 드러날 때가 되면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랑스럽습니까?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는 것과 긍정적인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사물은 진리가 있고 실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긍정적인 사람이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므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부축할 수 있고 서로 공급하며 마지막에 서로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자매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던 차에, 같은 처지로 붙잡혀 온 형제자매를 만나자 서로 부둥켜 안으며 친 형제자매보다도 더 가까워집니다! 가족 중 누가 당신을 보러 옵니까? 누가 당신에게 마음속 얘기를 합니까? 육체적 가족이 가면 “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빨리 말해. 뭔 미련이 있다고!”라고 말합니다. 보세요, 그는 당신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당신을 보러 가면 “자매님! 간증을 굳게 서세요, 하나님이 곁에서 우리를 감찰하고 계세요!”라고 말해 줍니다. 이 한 마디 말이 당신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 줍니다. 형제자매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서 당신을 보살펴 줄 수 있고 정말로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가족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가장 가깝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랑스럽습니까?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자매라야 비로소 사랑스럽습니다! 가장 사랑스러운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된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이 일을 분명히 알았겠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 있다고 하지만 별로 크지 않고 기껏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좀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100%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누가 어리석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습니까?”라고 말한다면 바보같은 말이 아닙니까? 또 누가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말이 아닙니까? 이는 더욱 어리석고 영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의 경지가 가장 높은 사람이고 심령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며 마음이 매우 착하고 또한 성실하며 더욱 단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기에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이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높은 경지인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가 완벽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자신이 도대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정하지 못한다면 첫째로, 당신은 자신이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는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그냥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초월했습니까? 당신의 부모님, 아내(남편),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초월했습니까? (초월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사랑은 너무나 작거나 혹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헤아림이 있고 순복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복과 헤아림이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최소한 헤아림과 순복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를 가늠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진리도 추구하고 싶어 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가정과 친척을 버리는 고통을 받지 못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며칠만 집을 떠나도 남편(아내)을 생각하고 자녀를 생각합니다.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 가족들이 고생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화비해도 안심 못해!’ 이런 사람에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가 육체적 가족의 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악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육체 그리고 가족은 악입니다! 당신이 이런 악의 속박을 받아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거나 순복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당신이 악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 얽매여 있는데 이것이 악의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세상에 미련을 두는데 악에서 떠난 것입니까? 모두 악에서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친척, 친구들의 미움을 살까봐 그들을 잃을까봐 그들과 관계를 단절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이 악에서 떠났습니까? 그가 악에서 떠나지 못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준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악에서 떠나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세상, 세속, 육체, 가족 이 모든 것은 다 악에 속합니다. 당신이 이런 악에 얽매이고 속박을 당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악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마지막 하나의 실제이자 가장 큰 실제입니다.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이 뜻은 바로 하나님께 얻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어떤 실제를 구비하였습니까? 조건 없고 불평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의 경배는 무조건적이고 더군다나 불평도 없습니다. 그는 어떤 배경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예전과 다름없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로 인식하면 신임, 이해, 헤아림, 순복, 헌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는 무조건적이고 불평없이 경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혹은 좋은 가정 환경이든 아니면 열악한 감옥이든 예전처럼 하나님을 경배하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살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면 피조물의 참된 형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순복마저 없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진실한 경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순복이 없는 경배는 말 뿐이지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마치 종교인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때, 기도하면서 심지어 “엉엉” 하고 마구 울지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배와 찬미가 끝난 후 하나님을 여전히 대적하고 진리를 증오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배가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맹목적으로 하늘을 숭배하는 것이지 정말 의식하고 경배할 대상이 있어서 하는 그런 실질적인 경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려면 얼마만큼의 실제를 구비해야 합니까? 진리를 얼마나 깨달아야 도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인식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권병, 그리고 하나님의 신분이 조물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때 사람은 조건 없고 불평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조물주를 경배한다고 하면 사람에게 조건이 또 있을 수 있습니까? 피조물로서 조물주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에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의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마땅히 효도해야 하는데 감히 이 말에 반대할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든지 간에 즉, 젊든 나이 들었든 아니면 80~90세 되는 늙은이든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하면 누구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조물주를 경배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당연지사입니다. 당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조물주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조물주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즉, 어느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고 조물주인지 모르므로 그에게 참된 경배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까? 어느 하나님께 속했습니까? 하나님의 신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조물주이고 조물주가 곧 참 하나님이십니다.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도리상으로는 그렇지만, 만약 저의 몇 가지 질문에 당신이 대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단지 도리로만 인정한다면 이런 경배가 참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좀 맹목적이고 인식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정말로 인식한 후에 경배해서 생겨나는 효과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지만 20살이 되던 해에 어느 날엔가 아버지가 돌아와서 “내가 네 아비다.”라고 말하고 어머니도 “너의 아버지란다.”라고 말하면 아이는 어머니도 아버지라고 인정하니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야지.”라고 하면서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사람이 내 아버지가 맞을까? 잘 모르겠어!’ 도리로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진실한 인식이 없으면 아무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친근하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바로 조물주이십니다.”라고 말해도 당신은 “하나님이 왜 조물주이십니까? 하나님이 여러 분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느 하나님이 조물주이십니까? 조물주는 모두 몇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몇 분이십니까? 저는 이런 일이 아직 분명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분명치도 않으면서 “털썩” 하고 그 자리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다가 속으로 ‘그럴까? 왜? 정말일까?’라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당신이 이런 의문이 있는데, 당신의 경배가 진실하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하려면 무엇을 구비해야 합니까? 조물주의 신분을 명확히 해야 하고 그분의 전능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그분을 조물주라고 하는지, 당신은 어떻게 확정했는지, 당신이 무엇에 근거해 그분을 참 하나님이라고 하고 조물주라고 하는지 당신이 이런 것을 명확히 한 다음 다시 무릎 꿇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마음속에 의문이 없고 평안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을 믿어 마지막에 이르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 얻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 조물주를 경배함에 있어서 조건 없고 불평 없이 경배하고 보답하고 귀복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엔가 인류가 마지막 거처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그때면 조물주를 경배하게 되는데, 조물주를 경배할수록 얻게 되는 일깨움과 깨달음이 많고 아는 것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면 진정한 마지막 거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이고 조물주를 경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할 필요 없고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다 제 위치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조물주이십니다. 조물주가 피조물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고 피조물은 어떤 책임을 이행해야 하며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모두가 분명히 알고 매일 이렇게 실행하면서 조물주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류의 생활이자 피조물의 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 정도까지 믿으면 마지막 거처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피조물에게 즉 조물주를 경배할 수 있는 피조물에게 하나의 진정한 마지막 거처를 주십니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천지가 생겨날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생활이 시작될 것이며 더는 사탄의 패괴가 없고 누구도 인류를 미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이만큼밖에 깨닫지 못했기에 사탄이 우리를 미혹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며 각종 수단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탄은 더는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고 받침물 즉, 효력자의 신분도 없어져 무저갱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으면서 걸어가는 것이 광명의 바른 인생길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길은 걸을수록 밝아집니다!

그럼 지금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경배는 어떻습니까? 기도로 구하기만 하지 진실한 경배가 없는데, 이러면 안 됩니다. 진리가 너무나 적습니다. 진실한 경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어느 날, 수리 대처가 임했을 때 당신이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사랑이기에 수리 대처를 받아 마땅합니다. 저는 순복하겠습니다.”라는 이 한 마디 외에 다른 말은 더 하지 않고 “하나님, 당신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경배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몇 마디 말인데 계속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찬양할 만하시고 칭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경배하겠습니다.” 이 몇 마디 말밖에 없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임했을 때 “하나님, 저는 당신의 사랑이 임했음을 보았기에 원망이 없습니다. 당신은 조물주이시니 저는 당신을 경배하고 숨이 붙어 있는 한 당신을 경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여기에 불평이 있습니까? 어느 날, 부모가 죽으면 울겠습니까?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당신이 저의 부모님을 거두어 가셨지만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당신을 경배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자식이 죽고 없어도 “하나님, 저는 울지 않겠습니다. 자식은 당신이 주신 것이니 지금 당신이 거두어 가셨어도 저는 당신을 경배하겠습니다. 당신은 조물주이시기에 저는 원망 없이 순복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역사를 이 정도까지 경력하면 어떤 일이 임해도 조건 없고 불평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말없이 다 순복하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까? 이러면 하나님을 믿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다가 실신하고 조금 있다가 가슴을 치며 통곡까지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역시 죽은 자와 사탄을 위해 우는 것으로, 사탄과 아주 가까운 것입니다. 죽었는데 죽지말라고 하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죽었으면 자연의 이치대로 처리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맡기며 무조건적으로 불평없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기도는 대부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일부분 말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인데, 그 말을 분별할 줄 압니까? “당신이 저의 가장 소중한 자녀를 거두어 가셨어도 저의 조물주이시고 역시 참 하나님이시기에 저는 당신을 경배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순복이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맞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형제자매들에게 감탄하고 인정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기도밖에 없기에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깨우침을 주시면 그대로 지키고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지.’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순복이 있습니다! 성령의 일깨움과 빛비춤에 순복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지막에 고난과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난 후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데,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을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기도를 아주 많이 하지만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시련 속에서 간증을 굳게 서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시련 가운데서 드러나기에 말만 해서는 소용없습니다. 시련이 닥치면 바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간증을 굳게 설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찬미가 우러나올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기도할 때의 찬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없고 말 뿐이며 실제가 없기에 사탄이 인정하지 않고 불복합니다. 욥은 시련이 임했을 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련 속에서 이런 찬미가 있을 수 있었는데 이것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큰 붉은 용에게 잡혀 옥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간증을 굳게 서서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며 이는 참된 간증입니다. 평소에 편안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경배가 아니라 입버릇입니다. 보세요, 일부 인솔자 일꾼은 환경이 임하고 큰 붉은 용의 군병이 계속 추적하자 겁에 질려 사직했습니다. “저는 이 본분 하지 않을래요. 목숨을 잃고 죽을까봐 두려우니 인솔자 일꾼을 그만두고 숨어서 믿을래요.” 그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초월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불평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는 무조건적이나 불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는데, 위험한 환경 가운데서 스스로 인책사직한 것입니다. 사람이 도대체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떤 배경 하에서 드러납니까? 시련이 가장 크고 사람의 목숨과 관련되며 그리고 생사의 여부를 알 수 없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저는 적지 않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 집을 위해 책을 인쇄하고 책을 나누어 주는 등등 가장 위험한 사역을 하다가 나중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죽을 정도로 맞으면서도 간증을 굳게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긴 자의 간증이기에 그 누구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숨을 내놓았는데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말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위험한 사역을 담대히 담당하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입니까? 그가 위험한 줄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당신이 잘못 말한 것입니다.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도 위험한 줄 압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도 안 가면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 말씀 책을 받을 수 있겠어요? 이때 제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목숨을 내걸고 “가자, 죽든 살든 하나님께 맡기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때려 죽인다 해도 과감히 가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를 문밖으로 끌어내면 그는 바지에 오줌을 쌀 정도로 겁에 떱니다. 그에게는 그런 담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믿음이 있고 굳세며 담력이 있는 일부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본분마저 하지 못하고 효력하는 것도 원치 않는데 이런 사람은 죽기를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그럭저럭 살다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럭저럭 죽기를 기다리다”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상관치 않으시고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도록 내버려 두시다가 언젠가 재난이 닥치면 당신을 먼저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정(情)을 내려놓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네가 정을 내려놓지 못하지 않는가? 너에게 일정한 시간을 주고 기회를 줄 테니 진리를 잘 추구하라. 만약 너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데도 버려야 할 것을 네가 버리지 못한다면, 좋다, 네가 사탄 마귀를 그토록 사랑하니 너를 죽은 사람과 함께 죽게 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공평하게 대하시면서 온전케 하시고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만족케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는 불신파이고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인데, 죽은 사람에게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잘해 준다면 그의 이런 성품 자체가 곧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가 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부류의 사람을 보시면 메스꺼워하십니다. 그는 마귀에 속하는 사람이기에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어찌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만약에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고 본분을 잘하지 않으며 늘 하나님 집의 중요한 사역을 방해한다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벌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 집의 중요한 사역을 늘 방해한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것은 바로 악령 역사이고 더러운 귀신의 역사이기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의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당신이 동정해서 뭘 합니까? 어떤 사람은 애석해 하고 동정하며 사탄 편에 서서 하나님을 원망하려 하는데 당신도 좋은 물건이 못됩니다. 당신 역시 더러운 귀신 악령과 한 패거리입니다. 더러운 귀신, 악령을 제명하니 그는 싫어하고 동정을 표시합니다! 당신이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동정하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대적이며 하나님도 당신을 메스꺼워하십니다! 당신이 계속 꿰뚫어 보지 못하면 눈이 먼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에 대해 꿰뚫어 보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사탄을 동정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에 마귀를 함부로 동정해 주는 것입니다. 마귀를 이해해 주고 동정하면서도 당신은 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추구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사탄 마귀를 동정하면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고 대적인데, 이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느 날엔가 당신의 가족, 마귀, 악령에 속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당신은 울겠습니까? 당신이 울면 하나님은 당신을 메스꺼워하시고 당신이 눈물을 닦고 울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기도하고 나서 속으로 또 울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메스꺼워하시며 당신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오랜 마귀 사탄 하나가 죽었는데, 당신이 울고 눈물을 흘린다면 가치가 있습니까? 그 눈물은 가치가 없습니다! 보기에도 당신은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사악한 소인입니다.

“조건 없고 불평 없는 경배와 보답과 귀복(歸服)이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면 이렇게 경배하고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며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께 얻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위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이런 한 무리의 사람을 얻었다. 인간 세상에서의 이번 여행은 헛되지 않았는데, 몇 알의 열매를 맺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이 몇 알의 열매가 인원이 많지 않다고 생각마세요. 하나님 편에서는 보배이고 6천년 경영 계획의 결정체입니다! 이 몇 알의 열매만 있으면 이 세상이 끝날 것이고 시대가 바뀔 것이며 하나님은 시대를 끝마치는 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고 이 몇 알의 열매만 있으면 하나님의 다음 단계 사역을 할 수 있으며 순조롭게 전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바라시는 것이 없으시고 이 패괴된 인류의 몸에서 바라시는 것은 바로 몇 알 안 되는 이 열매입니다. 그 외에 살아남지 말아야 할 것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멸하십니다.

방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몇 가지 진실한 내용에 대해 교통했습니다. 여기에는 신임, 이해, 헤아림, 순복, 헌신, 사랑이 포함되고 또한 무조건적이고 원망 없는 경배가 있으며 보답과 귀복이 있는데, 이것들은 진리의 실제에 속합니다. 만약에 도리만 깨닫는다면 사람은 해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진리가 없는 새신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는 “버렸다가 복을 받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보십시요, 그는 하나님에 대해 신임하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런 실제는 도리나 이론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이르게 되는 효과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몇 방면의 실제를 행하지 못했고 구비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이 점을 분명히 보셨겠죠? 그러면 당신의 생명 경력은 어느 정도에 도달했습니까? 지금 이 7가지 실제를 구비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몇 년 믿었는데, 이 7가지 실제에서 몇 가지를 해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를 해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두 가지를 해낼 수 있습니까? 이전에 사람들 대부분이 진리를 추구하기 원한다고 말했고 더군다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고생을 해도 원망 없이 기꺼이 하겠다고 표했는데, 이 효과에 얼마큼 도달했습니까? 이것은 이 7가지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가늠하겠습니까? 이 7가지로 가늠하면 알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이것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마땅히 도달해야 할 효과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앙모도 없고 진정한 신임도 없으며 진정한 이해도 없고 진정한 헤아림과 순복도 없으며 단지 두려움과 불안만 있고 의심, 오해, 회피와 멀리함만 있다.” 이 몇 가지 실제는 역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벗어나면 모두가 빈말이고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진리를 추구함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도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인식은 어느 정도까지 도달했습니까? 하나님을 앎에 있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어느 방면의 실질과 성품을 인식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지 이런 일은 모두가 상고해야 할 화제(話題)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믿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다 사람에 대한 구원이고 사랑임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정말로 거스를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왜 악인을 혐오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지 알게 됐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저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왜 성령 역사가 없는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치 않음을 인식했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앎이 좀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더 깊이 경력한다면 어느 정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함부로 범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순복이 있고 본분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며, 참된 헌신이 있고 전인(全人)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데 이런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가정과 직장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참된 헌신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는 참된 헌신이라 할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참된 헌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을 참된 헌신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참된 헌신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임과 헤아림 그리고 이해와 순복이 있습니다. 본분하는 중에 이 몇 가지 실제를 볼 수 있어야 참된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이 본분을 함에 있어 하나님에 대해 헤아림과 순복 그리고 이해와 신임이 조금도 없고, 무엇을 하든 대충대충 하고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힘든 일은 피해 쉬운 일만 하고, 게다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지위가 조금 있으면 오만하고 사람을 통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함에 있어 실제적인 사역을 전혀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그날그날 되는대로 살며 실제적인 일을 조금도 않고 진실한 공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가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랐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버렸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린 기회를 틈타 복을 얻기 위해 마지못해 버린 것이지 결코 기꺼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본분을 함에 있어 순복이 조금도 없고 진리를 추호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조금의 충성심도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런 버림은 불합격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에서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도태시킬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당신과 같은 이런 버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버림에는 기만하는 성분과 대충하는 것이 너무 많고 기회를 엿보며 요령을 피우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반대로 하나님을 기만하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진정한 앙모도 없고 진정한 신임도 없으며 진정한 이해도 없고 진정한 헤아림과 순복도 없으며”, 이것은 공인된 사실입니다. 그 밖에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단지 두려움과 불안만 있고 의심, 오해, 회피와 멀리함”만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이 사실을 모두가 분명히 보았겠죠? 지금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면서 가정을 버렸지만 나중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복은 없고 두려움과 불안만 있습니다. ‘휴, 집이 어떻게 됐을까? 가족들은 잘 있을까? 그들이 고생하지 않을까?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돼! 나는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거나 본분을 할 기분이 아니고 내 마음은 가정에 가 있고 몸은 가족에게 있어.’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버린 것 같지만 그것은 거짓이고 기만이지 진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오해하며 회피하고 멀리하기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람이 겉으로는 버렸지만 마음이 하나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을 피하며 하나님을 담대히 마주하지 못합니다. 어째서 담대히 하나님을 마주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할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알며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고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에 대해 오로지 회피와 멀리함만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렇게 버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적합합니까, 적합하지 않습니까? (적합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지 않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외식하거나 위장하지 말고 기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집에서는 당신과 같은 이런 거짓 버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으며 악에서 떠날 수 없다.” 이것은 확고하여 의심할 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별로 인식이 없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패괴가 흘러나올 때, 수리 대처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가 행한 일이 적합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지적하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참된 순복이 있으며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안배를 해도 불평없이 다 받아들이고 순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버림과 그의 헌신을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 없다고만 보지 마세요, 그의 마음은 참된 것입니다. 그가 많은 것을 버렸어도 원망이 없고 하나님을 의심치 않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내 자신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니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 하나님은 가장 좋은 분이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화비하다가 만약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내 자신의 패역 때문이고 내가 순복하지 않은 탓이고 내 자신이 그릇된 길로 갔고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 걸 원망해야 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생각과 관점에는 양심과 이지(理智)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막무가내로 억지만 부리고 온갖 궤변만 늘어놓는데 그러면 곤란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악인에 속하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온종일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자신의 궤변만 늘어놓으며 하나님과 하나님 집이 늘 자신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한 것은 다 옳고 곧 진리라고 여깁니다. 당신이 한 것이 맞고 당신이 진리라면 하나님을 믿어서 뭘 합니까? 하나님 믿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하나님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진정 하나님을 믿어야 할 사람은 패괴된 인류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에게는 패괴가 없습니까? 그럼 당신에게 진리의 실제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에게 정상적인 인성이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좋은 사람이란 말입니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어서 뭘 합니까? 좋은 사람은 하나님 믿지 말고 자신을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말로 납득시킬 수 없고 늘 자신의 그릇된 논리만을 말하는데 당신이 그릇된 논리를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세요. 아마도 몇 년 말하지 못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죽고 그릇된 논리를 말할수록 더 빨리 죽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 총명한 사람이라면 빨리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마귀 사탄임을 인정하십시오. 아마도 사정이 좋아져 며칠 더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종사하는 모든 활동과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훼방과 논단이 가득하며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 말씀의 참뜻을 어기는 사람의 악행도 가득하다.” 이런 사람은 어떻습니까? 틀림없이 도태되고 훼멸될 대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행이 가득하고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고 대적이며 더군다나 훼방이고 논단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말하는 그릇된 도리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악에서 떠나지 않아 악행이 너무나 많고 그의 마음과 생각에 악으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임이 있으면 진실한 따름과 의지함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뢰가 있어야 진정한 앎과 이해가 있을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이해가 있으면 진실한 헤아림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헤아림이 있어야 진정한 순복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순복이 있어야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헌신이 있어야 조건 없고 불평 없이 보답할 수 있으며,” 이 몇 가지의 실제는 갈수록 깊고 단계마다 갈수록 심오해집니다. 사람은 최소한 하나님을 신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믿음은 신임을 포함합니까, 포함하지 않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믿음이 곧 하나님에 대한 신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생겨나는 따름과 의지 그리고 신뢰와 이해 및 헤아림에서 순복과 헌신까지 모두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까? 진실한 믿음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바로 신임입니다. 당신이 신임하지 않으면 담대하게 버릴 수 있습니까? 당신이 신임하지 않으면 담대히 헌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신임하지 않으면 담대히 따를 수 있습니까? 중국, 큰 붉은 용이 통치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참된 믿음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대가가 없고 위험하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믿어도 아무일도 없다면 그런 믿음은 믿을 만하겠습니까? 진실인지 아니면 허위인지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큰 붉은 용 국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려면 담대히 따르고 버리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대가를 치를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을 구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믿는 그런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과감히 그러지 못합니다. 지금 이방인이 당신에게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어느 하나님을 믿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아이고, 그건 안 돼요. 어떤 하나님이든 다 믿을 수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만은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목이 날아갈 위험이 있어요. 정부에서 믿지 못하게 해서 잡히면 죽거나 옥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하나님을 믿어도 다 되고 위험하지도 않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참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임이 있으면 진실한 따름과 의지함이 있을 것이고” 보세요, 하나님에 대해 진실로 신임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된 따름과 의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지금까지 믿고 나서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서 제가 더 이상 버리지 않으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므로 도태될 수 있습니다. ‘당신 시중 안 들고 갑니다.’라고 이혼 서류 한 장을 남편에게 주고 저는 지금부터 정식으로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신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혼 서류를 쓰기가 쉽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따라야 하니까 당신과 함께 살지 못하게 돼서 미안하다. 마귀 사탄아!” 이것이 바로 진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음을 보고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 행동을 보시기에 입으로 100번을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노아시대에 노아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실제적인 행동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의 그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방주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100년을 하루같이 방주를 짓게 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온전케 하셨으며 그의 믿음을 증거하셨습니다. 100년 동안 농사를 지어 자신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 것 외에 나머지 일은 전부가 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진실한 믿음에 대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모든 심혈의 대가로 당신의 믿음을 간증하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진실로 신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신을 반성해 보세요, 당신의 믿음 속에 얼마나 많은 대가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방금 가정을 버렸어요! 몇 년 동안 모진 마음을 먹고서야 마침내 이런 결심을 하게 됐는데, 하나님께 여러 번 기도하고 나서야 비로소 발걸음을 떼고 집 문을 나설 수 있었어요. 집 문을 나설 때도 눈에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집문을 나서기가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신임하지 않으면 발길을 뗄 수 없고 눈물이 줄줄 흘러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저녁이면 집 생각이 나서 이불 속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면서 기도하다가 잠이 들고 이렇게 하루가 지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의 믿음이 가련하지 않습니까? 노아의 믿음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노아의 믿음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기 쉬웠습니까? 당신이 말해 보세요, 그렇게 큰 방주를 지으려면 많은 나무를 잘라야 하는데 나무를 베는 것만 해도 몇 년을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큰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아마도 나무 몇 그루 자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자르지 않을 것입니다. 노아는 100여 미터가 되는 방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믿음으로는 얼마나 큰 방주를 지을 수 있습니까? 50kg 체중을 실을 수 있는 방주를 만들어 자신이 배에 앉아 가라앉지만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노아가 지은 그 방주가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각종 동물과 먹을 양식을 다 실어야 했습니다. 코끼리 한 마리만 해도 2~3톤 되고 코뿔소 한 마리만 해도 2~3톤 되는데 그 방주를 짓기 쉬웠겠습니까? (쉽지 않았습니다.) 100년 동안 노아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100년을 따랐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다면 당신의 믿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년을 견지할 수 있겠습니까? 10년을 견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10년간 옥살이한다면 믿음을 견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년간 옥살이한다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옥살이할 때 당신의 가족이 다 죽었다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암에 걸렸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신임이라고 합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실증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했는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거지가 되어 밥까지 구걸해야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자매님은 감옥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죄수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치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럼 진실한 신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잠깐 고통받는다면 하나님을 신임하면서 의심하지 않겠지만 1년 고통받는다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10년 고통받는다면? 각종 치욕을 당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하지 않으신다면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을 신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엄청난 수모를 참을 수 있습니까? 이런 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을 가장 잘 검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시련을 겪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큰 시련을 통과한 것입니까? 지금 만약 당신의 가족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어느 날 당신에게 재난이 닥치고 온역에 걸린다면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어느 날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평생 대가를 치르다가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은 사람을 너무나 잘 드러냅니다.

말세 사역은 바로 사실과 각종 시련 즉 온갖 시련으로써 사람을 연단하고 드러냅니다. 만약 사람이 간증을 굳게 서고 욥의 믿음이 있고 베드로의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각종 시련이 드러내는 것을 이겨 내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보았겠죠? 말세의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을 드러내는 사역이 아닙니까? 바로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이며 더욱이 사람을 드러내는 사역입니다. 드러냄을 말하자면 당신이 여태껏 쌓아왔던 것이 만약 시험에 들어 무너진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신은 바로 도태되는 것이고, 목숨을 내놓고 죽어도 변치 않는 충심이 있다면 그것은 비로소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지금의 분량으로 충분합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잡힐까봐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는 병에 걸릴까봐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저는 죽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저는 혼인에서 실패할까 가장 두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으면 당신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치명적인 점입니다. 당신이 만약 진리를 잘 장비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어느 날엔가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에서 넘어질 것인데,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허풍을 쳐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간증을 굳게 선 사람들을 가장 탄복합니다. 그런 사람은 간증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간증을 굳게 선 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멋대로 말하거나 농담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다지 고통을 받은 적이 없고 어떤 혹독한 고문도 받아보지 못했다면 제발 허풍을 떨지 마세요. 허풍을 떨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모든 것이 빈말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영적 도리를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를 추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정말로 떠난다면 우리의 진리 추구는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서 이루시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에도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도태될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데 저는 이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져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몇 년 믿었는데 진리가 조금도 없어요? 몇 년간 헛 믿었군요. 아직도 마음대로 떠들어대고 있으니! 당신의 그런 말에는 실제가 조금도 없고 초라하며 아무것도 없는데 아직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네요!” 여러분은 진리의 실제와 순복이 조금도 없고 본분을 함에 있어 충심조차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에서 너무 멀지 않습니까? 너무 멀리 차이가 나면 희망이 있겠습니까? 희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최소한 충심이 있어야 합니다. 본분을 함에 있어 대가를 치를 수 있고 고생하고 순복할 수 있으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다면 제가 보기에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일부 형제자매들에게 “좀 쉬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안 쉬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왜 안 쉬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힘들었는데, 2달 동안 이렇게 바쁘게 지내면서 피곤했을 텐데 왜 쉬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니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좀 있어서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다 처리하지 못해도 쉴 때 됐어요. 이게 벌써 며칠째입니까?”라고 말하자 그는 웃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빨리 쉬세요. 앞으로 한동안 바쁘게 보내고 나면 다 하루씩 쉬면서 긴장을 풀어줘야 합니다. 늘 이렇게 바쁘게 일한다고 능률이 오르겠습니까?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으면 안 됩니다. 긴장을 풀 때에는 풀어야 하고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안 쉬면 사역 효과가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 한 편을 찍거나 대본 하나를 쓰고 나면 얼른 하루를 쉬어야 합니다. 하루 쉰다고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지만 하루 쉬면서 긴장을 풀고 난 후에 사역을 하면 효과도 좋습니다. 바삐 보내기만 하고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한다고 해서 효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가를 치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안 됩니다. 그는 말이 별로 없지만 대충대충 하며 속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조금도 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은 큰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정말 바쁜데 저나 형제자매들 역시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본분을 함에 있어 누가 착실하고 실제 사역을 많이 했는지 누가 며칠을 바쁘게 보냈지만 일은 별로 하지 않았는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형제자매들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술이 있지만 실제적인 일을 얼마 하지 않아서 제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세요. 집에 돌아가 온종일 쉬면 더 좋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자리만 차지하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누굴 속이려는 것입니까? 양무리에서 풀을 먹지 않는 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양가죽을 쓴 이리입니다. 하나님 선민 중에서 늘 대충대충 하면서 속이는 사람은 불신파입니다. 본분을 아무리 오래 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대충대충 해서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늘 건성으로 할 거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 집에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서 빈둥거려서 무슨 소용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정말로 바쁘게 보냅니다. 날마다 본분을 하느라 바쁘고 날마다 실제 사역을 하고 본분을 함에 성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하게 본분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일을 질질 끌면서 계속 그렇게 해나가는데 하나님 집의 형제자매들이 모르고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까요?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이 당신 몸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떨까요? 당신이 1년, 2년, 3년 본분을 해도 시종일관 성령 역사가 없다면 당신이 하나님 집에서 3년 동안 누구를 해친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해친 것입니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세상을 추구하면서 돈 벌어 육체 생활을 누리고 죽는 것보다 가치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집에서 3년 있었다 해도 성령이 역사하시지도 않는데, 3년 있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없는 데다가 세상도 못 잡았으니 이런 사람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본분을 할 바에는 잘하고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어야 하며 실제적인 본분과 실제적인 일을 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제가 집에 돌아가면 환경이 좋지 못해 단속이 심해서 잡힙니다!” 연말이면 괜찮아서 잡지 않을 것입니다. 큰 붉은 용이 이것저것 신경을 다 쓰지 못해 잡지 않을 것이니 혼란스러울 때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본분을 잘 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은 항상 억울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도 못했어요! 형제자매들도 저를 얕보구요.” 그럼 당신에게 장기 휴가를 줄 테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요. 하나님에 대해 진실되게 신임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빈말임을 지금 똑똑히 보았겠죠.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이고 기회주의자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잘 해야 합니다. 잘 기도하다가 어느 날에 성령의 역사와 깨우침이 있고 진리를 깨달아 당신에게 참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진실되게 신임하여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셔도 저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든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다시 나와서 본분을 한다면 아마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도의 응답을 분명히 받지 않고 집을 나온다면 조금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임이 있어야” 마지막에 참된 순복이 있게 되며 “진정한 헌신과 보답이 있어야 참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알 수 있고 조물주의 신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아주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신분이 조물주임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앎이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 편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단지 한 방면으로만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그리고 지고(至高)를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조물주이고 만유와 모든 것을 주재하실 수 있는 분 즉 하나님이 바로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그분이라는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신분이 조물주임을 인식하지 못하면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습니까?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전능하실까? 정말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실까? 큰 붉은 용이 그렇게 미치도록 날뛰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왜 멸하시지 않을까? 세상이 그렇게 흑암하고 사악한데 하나님은 왜 상관하시지 않을까?’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이런 오해와 관념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많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참된 신분에 대해 즉 조물주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없고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부족한 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물주를 경배할 수 없고 그의 경배는 거짓인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제가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다가 거의 죽게 된다면 당신께서 저를 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만약 제가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가서 그들이 저를 때려 죽이려고 한다면 당신이 저의 목숨을 지켜 주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제가 꿰뚫어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겠으니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이 어떻습니까? 하나님 신분을 압니까?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전능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 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의 관념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 분이고, 하나님 능력의 크고 작음과 하나님의 기능 또한 같지 않은데, 어떤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수 있고 어떤 하나님은 어느 방면에 장점이 있지만 누가 조물주인지는 모르겠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하나님의 참된 신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각종 악령과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으면서 무슨 “만신 중의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신분을 알 수 있습니까?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조차도 모르기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과제가 너무 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알고, 또 하나님의 진실한 신분 즉 조물주에 대해 진실로 알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고 있는 이 하나님이 바로 조물주이시고 그분이 모든 것을 주재하심을 인식한다면 그분에 대한 진실한 경배가 생기게 됩니다. 진실한 경배란 무엇을 가리켜 말할까요? 바로 하나님이 조물주이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며 전능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간계 위에 세워졌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이미 성취되어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믿음이 있고 조물주의 전능에 대해 이런 인식이 있다면 당신이 조물주를 경배한다는 말은 다 진실된 것이며 어떻게 말을 해도 다 참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느 날 당신이 하나님을 믿다가 하나님을 위해 순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순복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기도할까요? ‘하나님, 어느 날 제가 당신을 위해 순교하고 당신을 위해 희생한다고 해도 당신은 조물주이시기에 저는 당신을 경배할 것입니다.’ 이 말이 어떻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만약 제가 죽지 않는다면 당신을 경배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경배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고 의심하고 있으며 옴니암니 따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무엇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기도할 줄 알고 찬양할 줄도 압니다. 이것이 경배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기도와 찬미는 경배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당신의 말에는 거래가 있고 순복이 없으며 당신은 조물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말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배울 과제가 있는데 진리가 없으면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조물주에 대해 진실한 경배와 귀복이 있어야 참으로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식하여 하나님이 곧 조물주이심을 알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배가 생기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경배가 생겨날 때 오로지 순복과 사랑, 헌신만 있고 거래나 바라는 것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기도와 찬미는 비로소 진실된 경배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배가 있을 때, 자연히 모든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몇 년 경력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3~5년이면 되겠습니까? 7~8년이면 되겠습니까? 지금부터 시작해도 적어도 7~8년 걸려야 합니다. 누가 묻습니다. “하나님 역사를 아직도 7~8년 더 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모릅니다. 어쨌든, 당신 느낌에 1~2년 안에 끝날 것 같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필사적으로 추구한다면 아마도 될 겁니다. 당신은 주저하지 말고 필사적으로 추구하기만 하십시오, 목숨이 있는 한 분투하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해도 쓸모없습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떤 고통을 받든 순복할 줄만 알고 당신의 마음이 시시각각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그리고 진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진리를 추구하고 순복할 줄 알아야 하며 본분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추구하고 실행하면 1~2년, 3~5년이 지나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축복을 얻게 되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해결된 것입니다. 어느 날 누가 당신을 대처 수리해도 원망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이게 됩니다. 누가 당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지 다른 사람과 시비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본분을 하든지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해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나 가정을 위해 고려하지 말고 자신의 생명의 진보와 성품 변화를 위해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면 설사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다 해도 만약 우리가 진리의 실제에 조금 진입했다면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높은 요구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의 최저 요구에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버림받기까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시겠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합니다.) 그럼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계속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전반 과정이자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모든 내용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도달함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되게 신임하면 참된 이해와 헤아림, 그리고 순복, 헌신, 사랑이 있게 되고 마지막에 원망의 말이 없고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보답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 경력은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임이 있으면” 무엇이 있게 됩니까? “진실한 따름과 의지함”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이 각종 환난과 시련이 임하면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실되게 따르며 의지하고 있습니까? 온갖 시련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겨 냈는데, 이것으로 진실되게 따르고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까? 진실한 신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신뢰가 있어야 마침내 참된 앎이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진실되게 이해하면 참된 헤아림이 있게 됩니다. 지금 소수의 사람들에게 참된 헤아림이 생겼지만 다수 사람들은 아직 없습니다. “헤아림”을 말하자면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본분과 하나님의 집 사역 그리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대해 부담이 생기기 시작하고 부담이 생기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17~18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 바쁘게 보내고 매우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고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해야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이는 커서 철이 든 다음 집이 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의 몸이 안 좋은 것을 보고 “휴, 내가 빨리 졸업하고 직장을 구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려야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생명이 어느 정도 자라나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담당하고 부담을 질 줄 알게 됩니다. 지금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까요? 바로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실 대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찾기 쉽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몇 백명 중에서 한 사람 정도 찾을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몇 천명 중에서 한 사람 정도 찾을 수 있는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지금 저는 진리를 추구하고 정말로 부담이 있는 사람을 찾아 양성하려고 하지만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질이 좋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권력과 지위가 있으면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계획하며 자신의 모종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의 집 일을 잘하는 것과 하나님 선민을 잘 이끄는 것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찾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어쩌면 하나님 선민은 ‘우리는 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하루 빨리 우리를 양성해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왜 보지 못하십니까?’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나는 누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인지 어째서 안 보일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안 좋아서일까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분이 보지 못하시는 걸까요 아니면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항상 괜찮다고 여기는 걸까요? 이것은 어느 쪽의 문제일까요?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는 다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데, 당신은 왜 보지 못하십니까?”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만 순복할 줄 모릅니다! 당신은 분별력도 없고 단지 일방적인 소망만 있으며 아무 일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분별하라고 하면 분별할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글을 쓰고 경력 간증을 쓰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하나님 집의 일을 처리하라고 하면 당신은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 한 가지 사역을 하라고 하면 잘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추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높이 듭니다.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까?” “네.” “그럼 일을 하고 본분을 함에 있어서 실속있게 하십시오!”라고 말하면 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하고 먹을 줄만 알았지 일을 하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사역을 하라고 하면 며칠은 괜찮고 사흘은 좀 하는 것 같은데 한 달, 두 달, 석 달이 되면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사역을 한쪽에 내팽개칩니다. 사람은 신용이 없고 3분간의 열정으로만 아주 잘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있습니까? 당신의 참된 헤아림이 고작 3분입니까? 며칠 뿐이란 말입니까? 1년 견지할 수 있습니까? 6개월 견지할 수 있습니까? 노아는 100년을 견지했는데 당신은 몇 년을 견지할 수 있습니까? 노아는 방주를 다 짓고 나서 모든 동물과 먹을 것 그리고 사용할 것을 모두 방주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이 정도에 이를 수 있습니까? 당신이 본분 하나도 한결같이 잘 하지 못한다면 신용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냄비 열정”입니다. 그 열정이 식으면 풀이 죽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달아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되게 순복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 속합니까? 성품이 안정적이고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이런 인성 품질을 구비하지 않고 “저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허풍칠 일입니까? 당신은 본분을 잘해야 하고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며칠도 버티지 못해 무너지고 본분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허풍을 떨어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그 분량에는 어떤 본분을 해도 다 합격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수리 대처를 거쳐야 하고 또 상면에서 진리를 거듭 교통하고 지도해 주고 형제자매들도 당신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수리 대처가 없고 형제자매들의 도움과 지적이 없으면 안 되며 상면에서 진리를 교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과 발표가 없어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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