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다≫에 관한 설교 교통 (4)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무리 확실히 믿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를 대체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렸든지 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네가 얼마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모든 것을 바치든지 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혹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숙독하고 심지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사람이 아무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만약 여태껏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정한 경력이 없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그저 텅 빈 상태나 끝없는 상상일 뿐이다. 설령 네가 하나님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 적이 있고 하나님과 대면한 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여전히 제로이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도 단지 한 마디 텅 빈 구호나 이상(理想)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쳐들고 읽고 심지어 하나님 말씀 중의 대표적인 부분을 다 마음에 새기고 귀중한 보물로 여기며 또한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으로 이끌어 들어가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구원받고 온전케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의 게시(揭示)에 따라 자신과 맞춰보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숭배와 신임을 사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개인의 경영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사취하고 훔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이용해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칭찬을 얻으려고 망상한다. 여러 해가 지나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는커녕,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준수해야 할 도를 찾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공급하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경외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점점 깊어졌고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점점 심해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점점 부풀려졌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이론적 공급과 인도 하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였고 마치 식은 죽 먹는 듯하였으며 마치 자신의 인생 목표를 찾은 듯하였고 마치 자신의 사명을 찾은 듯하였으며 마치 새 생명을 얻은 듯하였고 마치 구원을 받은 듯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 말씀을 낭랑하고 유창하게 암송하는 중에서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로를 찾은 듯하였으며, 마치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늘 하나님과 대면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또 늘 “감동”되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늘 하나님 말씀 속의 “하나님” 인도에 의해 마치 부단히 하나님의 고심을 깨달은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도 깨닫고 하나님의 경영도 깨닫고 하나님의 실질도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도 알게 된 듯하였다. 이런 기초상에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확신한 듯하였고 마치 하나님의 존귀를 더욱 인식한 듯하였으며 마치 하나님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더욱 느낀 듯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표면의 인식에 젖어 마치 그들의 믿음이 증가되고 고통받을 심지가 견고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듯하였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경력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식과 생각은 다 그들의 일방적인 소망에서 온 상상과 추측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한 검증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들의 소위 영적인 것과 분량은 하나님의 시련과 검증을 전혀 이겨 내지 못한다. 그들의 심지는 다만 모래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에 불과하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인식도 다만 그들이 머리로 상상해 낸 성과에 불과하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에 “꽤 공을 들인” 이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한 믿음인지, 무엇이 진실한 순복인지, 무엇이 진정한 헤아림인지, 무엇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인지를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이론, 상상, 지식, 은사, 전통과 미신 심지어 사람의 도덕관까지 다 가져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밑천과 무기로 삼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근거로 삼는다. 동시에 또 그들은 이런 밑천과 무기를 하나님을 알아가는 비법으로 삼고 하나님의 검증과 시련, 하나님의 형벌 심판을 맞이하고 대응하는 비법으로 삼는다. 최종에 그들이 얻는 것은 여전히 종교 냄새로 가득한, 봉건 미신으로 가득한, 전설적인 것과 기괴한 것과 묘연한 것으로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정론(定論)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정의(定義)는 하늘만 믿고 하느님만 믿는 사람과 똑같고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 등등 진실한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다 그들의 인식과 어긋나고 관계도 없고 몫도 없으며 심지어 상반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비록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자양” 아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참으로 들어설 수 없는데, 진정한 원인은 그들이 여태껏 하나님과 서로 알고 지낸 적이 없고 여태껏 하나님과 진정한 “접촉”과 교제가 없었던 데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서로 잘 알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믿음과 따름과 경배가 생길 수 없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이와 같은 관점과 태도로 그들은 결코 아무런 수확도 없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에 영원히 들어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의 추구 목표와 방향은 그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원수임을 뜻하고 그들이 영원토록 구원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무리 확실히 믿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경외를 대체할 수 없다.”, 이 말씀은 방금 읽은 첫마디 말씀인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한 가지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무슨 관념이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100% 믿어.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 믿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이 조금도 없기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야.’ 대부분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100% 믿고 또 많은 경력이 있어서 “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봤었고 하나님과 대면도 했었고 하나님과 어깨를 스쳐지난 적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떻게 저를 구원하셨었고 은혜를 얼마큼 주셔서 저는 이미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어요. 하나님은 너무나 전능하신 분이에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경력이 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암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 고쳐 주셨는데 제가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믿음이 크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믿음이 큰 것을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어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 번 말씀하시고 심령 깊은 곳에 음성을 들려주신 경력이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지 이론만 말하면 쓸모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하나님의 성품은 거스름을 허용치 않는 이 점에 대해 깊은 체험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이 확실히 공의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고 저주하며 한 사람도 구원하시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정의감이 있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심을 알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과오가 있고 더러운 패괴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숨기신 것을 보고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기에 더럽고 패괴된 저에게 숨기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정말 거룩하신 분이고 조금도 틀림없다고 하는데 이것을 인식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다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중 비미은장(역주: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의 뜻)한 성품이 제일 사랑스러워서 오만한 제가 정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한 가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실제입니다! 이런 인식이 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실제 중의 한두 가지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얻은 실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당신은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실질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됩니까?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고, 이런 실제가 있어야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만 있는 것보다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믿음만 있고 100% 믿고 조금도 의심없이 믿어도 사실 별 가치가 없지만, 이것밖에 안 되는 진실한 인식이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한 것이고,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믿은 실제이며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했음을 증명합니다. 이런 실제를 좀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품은 정말 사람의 거스름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인식했다면 이 하나의 인식이 당신의 생명에 어떤 방면의 실제를 더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허용치 않음을 인식했기에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 진리의 실제인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실제이고, 이것이 구원을 받는 기준입니다. 당신에게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은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리 실제가 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런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품은 거스름을 허용치 않는다는 걸 인식했어요. 격타도 받았고 징벌도 받아 깊은 체험이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공의로움,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에 대한 당신의 실제적인 인식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얻으시려는 성과인데, 당신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이런 성과가 없고 이런 수확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인지에 대해 좀 알게 되었지만 이론을 말해서는 쓸모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실제입니다.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효과에 도달했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좀 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하나님에 대해 경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몇 년 믿어서 경외하는 데에 도달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5년 믿어서 경외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10년 믿어서야 경외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20년 됐어도 경외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누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누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는지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무엇으로 드러났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경외가 있는지의 여부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욥을 칭찬하셨겠습니까?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렀고 게다가 큰 시험을 견뎌 냈으며 또 그의 순전함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어떤 순전함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는 간증을 선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욥의 간증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음에 성공하였다는 것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믿고 실패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도 “저는 하나님을 정말 믿어요. 100% 믿고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아요. 저는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 제가 암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구해 주셨고 몇 번이나 죽을 뻔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어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부류의 간증은 헛된 것이고 빈말입니다! 왜 빈말이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가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효과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봤다고 하고 100% 믿음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도 그를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꿈에 영계에 가본 적이 있고 하나님을 뵌 적이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믿음도 불합격이고 소용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렸든지 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이 한 마디 말씀을 방금 교통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대면한 경력이 있고 당신의 목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당신이 암에 걸렸어도 죽지 않고 여러 번 살려주셔서 많은 은혜를 누렸을지라도 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고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이렇게 참된 축복과 구원을 보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알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만 인식해도 쓸모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실질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아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당신이 그분의 존재만 인식한다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경력하든 소용없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인식했고 만유를 주재하시고 전 우주를 주재하심도 인식했는데,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없나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아주 크고 아주 진실하다는 것만 증명하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아는 것과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당신이 한 사람과 만난 적이 있어서 “이 사람은 제가 압니다. 어떻게 생겼고 키는 얼마이고 나이가 몇인지 다 잘 아는데 그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겉모습을 알고 이런 사람이 있는 줄을 알고 살아있는 사람임을 알고 그의 존재에 대해 100% 확신하지만 그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그의 실질에 대해 당신이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념 속에 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가정 상황을 알고 직장 상황을 알면 마치 이 사람을 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안다고 치시지 않고 당신이 이 사람에 대해 그저 겉의 일부 정황만 이해하고 아는 것이지 이 사람의 실질, 인품이 도대체 어떤지는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실질을 아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던 사람들, 특히 한평생 믿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적지 않게 경험했지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압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무엇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음을 증명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였으며 하나님이 오셨음에도 다 알아보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음성을 발하셨는데도 인식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고 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말씀을 더 보태시자 “이건 아니야. 바뀌었어.”라고 말하는데 보세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것을 사람이 고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고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진리가 있습니까? 보다시피,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줄 모릅니다. 그럼 여러분은 지금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설교하면서 터무니없이 과장합니까? 당신이 설교함에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는 말들이 실제적입니까? 너무나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장 중요한 말이나 하나님을 아는 말이나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는 말을 하려면 별로 없고 겉치레 말이나 쓸모없는 말은 너무 많아 줄줄이 늘어지는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줄 압니까? 여러분은 평소에 말을 함에 군더더기가 많습니까? (많습니다.) 말을 함에 군더더기가 없고 쓸모있는 말만 하게 되면 그때는 당신의 분량이 자라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네가 얼마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모든 것을 바치든지 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버리고 세상도 다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데 이것은 대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친척과 친구의 거절, 훼방, 논단을 받고 굴욕을 참으며 하나님을 위해 화비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큰 붉은 용에게 추적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버림과 대가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 봐야 하는 점입니다. 이 속에 마땅히 알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당신이 상고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몇 번 읽어도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화비하든 그것은 다만 사람의 믿음을 뜻할 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고 하나님 역사의 긴박함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는 마지막 한 단계의 사역임을 보았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화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믿음만 뜻할 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다음 말씀을 교통하겠습니다. “혹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숙독하고 심지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을 숙독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심지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 있다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인식이 있음은 당신이 말씀을 외울 수 있는지의 여부나 당신이 얼마나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계가 없고 하나님 말씀의 실질에 대해 당신이 경력이 있는지의 여부와 성령의 일깨움이 있는지의 여부, 하나님 말씀에 발표한 진리를 찾았는지의 여부에 관계되는데, 이것이 관건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의 뜻이 무엇인지 상고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이 한 마디 말씀을 어떻게 터득해야 가장 정확한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저는 이 몇 가지 문제를 투철히 상고하고 나서 답을 찾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셔서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 하시는지 자신이 찾아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발표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의 대뇌에는 상상이 있어서 어떤 일에서든 늘 자신의 관념과 생각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그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막힘없이 줄줄 외우고 설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일 거야.’라고 여기는데, 이것이 사람의 관념이 아닙니까? 만약 여기에 비추어 말한다면 종교계 목사들은 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성경을 말하고 한평생 성경을 말했기에 성경의 많은 말씀에 대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식이 없습니다. 왜 인식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실제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에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합니다. 어떻게 말하든,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실제가 없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참으로 인식이 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경외가 좀 있을 것입니다. 인식이 얼마 있으면 경외도 얼마 있고 인식이 조금도 없으면 경외도 조금도 없습니다. 당신이 경외가 30%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30% 있고 당신이 100% 경외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100%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슨 관계입니까? 정비례입니다. 인식이 얼마큼 깊으면 조금도 차이없이 경외심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는지의 여부를 가늠하면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정확합니다. 당신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종교계 목사는 한평생 성경에 대해 설교하고 성경의 많은 글귀에 대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 있기에 성경을 외우는 것을 놓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글귀만 외울 줄 알았지 기도해서 진리를 구하지 않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 사역을 하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숙독하고 심지어 막힘없이 줄줄 외울 수 있는 데에 이르렀는데, 그럼 마땅히 어떤 문제에 주의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외울 수 있는 데에 그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고 진리를 구하고 실제에 진입하기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 속의 진리 실제를 얻어야 하고 살아내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먹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생명이 되었고 당신의 실제가 된 것입니다. 막힘없이 줄줄 외워서 입에만 달고 있거나 하나님 말씀의 글귀를 외우면 쓸모없습니다. 실제 문제를 말해야 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것이 관건입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만약 여태껏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정한 경력이 없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그저 텅 빈 상태나 끝없는 상상일 뿐이다……” 이 말씀은 뜻이 아주 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만약 여태껏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정한 경력이 없었다면 끝입니다! 의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믿고 있고,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있다는 것은 또 어떤 것입니까?”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이 교제가 무엇인지 몰라서 “교제는 악수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어서 만나야 교제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교제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도리가 있습니까? 사람의 관념과 생각은 성립이 안 되고 그는 영이 통하지 않습니다. 교제를 하는 것은 서로 아는지의 여부나 겉으로 볼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눈으로 꼭 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일을 하시면 사람이 알게 되는데 어떻게 알게 된 것입니까? 예를 들면 어떤 때, 그가 무슨 일을 하려고 집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마음이 긴장되고 급해지고 불안해지면 그는 ‘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분명히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하고 나서 마음속에 이 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몰라 의문점이 남지만 나중에 징계가 임하면 알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일을 잘못했습니다. 제 뜻대로 했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시게 하여 후회되는데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교제입니다. 이런 류의 교제는 대부분 사람이 다 있었겠죠? 어떤 사람은 이렇게 교제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교제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깊게 교제하는데 어느 정도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기에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전에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너무 적게 바쳤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시간과 저의 전인 그리고 저의 심혈을 다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나서 그렇게 실행했다면 이것이 진실한 교제입니다. 다른 사람도 이런 기도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하게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 의식 과정에 그치고 바치기도 하지만 하고 나서는 후회하는데, 이것을 교제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 겉으로 보기에는 다 비슷한 것 같지만 어떤 것은 진실한 교제이고 어떤 것은 아닙니다. 그럼 여기에서 진짜 교제와 거짓 교제를 구별해 낸 것이 아닙니까? 이제 무엇이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있었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까? (알았습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 알았다면 하나님을 이렇게 여러 해 믿으면서 자신이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었는지를 다시 돌이켜보고 반성해 보세요.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아주 관건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진실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종교식의 기도를 한다면 진정한 교제의 기준에 닿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 거짓 교제는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생길 수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그에게 일러 말씀하신 경험이 한번 있는데, 그때 욥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부 하나님 선민들이 체포되어 혹형을 받았을 때 “저는 하나님께서 바로 제 곁에서 눈으로 지켜보시면서 저를 보살피시고 보호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어요.”라고 말했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대면하여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가 눈으로 본 것입니까?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바로 내 곁에서 나에게 힘을 주고 계시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무릇 이런 경력이 있는 사람은 다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었고 하나님과 대면한 적이 있으며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분명하게 보고 느낀 것이기에 누가 그에게 보지 못했다고 말해도 그는 시인하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봤습니다. 마음속으로 너무 분명히 느껴서 제 눈보다 더 믿을 만해요. 제 눈으로 본 것은 거짓이고 진실하지 않지만 마음속의 느낌은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이런 교제가 있었습니까? 몇 번 있었습니까? 만약 이런 경력이 많아진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되는데, 이런 인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보게 되는 것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혹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 그의 곁에 계심을 느꼈다면 그가 하나님의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존재만 알게 되었다면 “저의 믿음이 많이 자랐어요.”라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그가 “저는 하나님이 제 곁에서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시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느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엇을 알게 했겠습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고 그분은 사람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죠? “우리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런 느낌과 인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참되고 너무나 진실하고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 대해 끝까지 구원하시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혈육으로 보시고 자신의 혈육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이 실증을 얻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 곁에서 동반하십니다.” 이런 것은 다 진실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 방면의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심령 깊은 곳의 교제이고 심령 속의 교제인데, 보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본 것보다 더 진실하고 더 실제적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빈말입니까? (빈말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을 여러 해 믿은 사람이 하나님과 이런 교제가 전혀 없었다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는 불신파이고 하나님에 대해 진심이 아니고 막연한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만약 참으로 하나님과 여러 번 진실한 교제가 있었다면 소질이 너무 낮다면 모를까 그에게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참으로 소질이 있고 마음과 영이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을 것이고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갈수록 많아질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사랑도 점점 더 진실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과 몇 번 진실한 교제가 있었던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설교할 때는 술술 막힘없이 잘 말하고 그럴듯하게 말해 다른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볼 수 있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는 볼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 경외가 얼마나 있는지도 볼 수 없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고 그가 말한 도가 다 텅빈 이론임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은 의의가 없고 하나님께서 칭찬하시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함에 있어서 무엇을 중요시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는 데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 경력입니다. 그럼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하는 데에 어떻게 진입하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진심을 내놓으면 됩니다! 당신의 마음이 참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화비하고 있는데, 이것이 참되지 않단 말입니까?” 당신이 그때 자신을 헌신할 수 있고 정말 화비할 수 있었던 것도 진실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어떤 교제가 있었는지는 볼 수 없는데, 이것은 또 어떤 문제입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문제가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진심이 있었는데 왜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없었겠습니까? 즉 그의 진심 속에 때로는 의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험도 있었기에 성령 역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을 버릴 때에도 고민하고 오랜 시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정말 버릴까, 말까?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까 아니면 일이나 찾아서 할까?’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을 다잡고 ‘버리자!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자.’ 이렇게 이를 악물고 버렸어요. 버린 후에 한동안은 고통도 좀 받았고 어려운 점에 부딪쳐 의심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 버리는 게 맞을까? 내가 정말 버려야 되나? 나중에 어떤 결과일까?’” 이렇게 시험하고 의심하면 큰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허사가 됩니다. 이런 버림과 화비는 어디에서 실패한 것입니까? 그의 진심 속에 뒤섞임이 있어서 늘 하나님을 의심하고 늘 시험하고 늘 우유부단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진심이라면 그가 다 버린 후 후회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의심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특별한 요구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아무런 요구없이 ‘내가 아무리 버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난 후회하지 않고 계속 추구할 것이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거야.’라는 믿음이 있다면 됩니다. 그는 늘 조금 내놓고는 보답을 얻으려 하고 또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답도 얻지 못하자 돌려받으려 하고 의심하고 후회하면서 마지막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데서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그의 버림과 화비에는 거래의 성질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입니까? 문제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버리는 것과 다릅니다.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면서 여러 해 동안 좌절하고 실패해도 다른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모든 것을 버렸는데 후회되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하나님과 거래가 없기에 저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추구해도 아직 부족하기에 앞으로 더 잘 추구해야 해요. 저의 버림은 옳은 것이고 이것에 대해 의심하진 않아요. 나중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성실한 사람의 버림과 화비에는 거래가 없습니다. 그 외에 당신이 정말 모든 것을 화비하고 모든 것을 버린다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가기를 중요시해야지 당신이 걷는 길이 틀려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가는 길이 개인의 명리와 지위를 위해 분투하는 적그리스도의 길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했는데, 여기에서 실패한다면 정말 가련합니다. 문제의 근원을 찾았습니까? 진실한 버림이 있고 진실한 대가를 치른 후에 주로 무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까? 첫째 문제는 뒤섞임이 없어야 하고 개인의 속셈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버리고 대가를 조금 치르고는 “하나님께서 왜 날 축복해 주시지 않지? 난 왜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걸 못 봤지?”라고 따진다면 이것은 거래이기에 위험합니다. 둘째 문제는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전부를 화비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을 바르게 가야지 잘못 가서도 안 됩니다. 적지 않은 적그리스도, 거짓 인솔자들도 모든 것을 버렸지만 그들이 어디에서 실패했습니까? 길을 잘못 걸은 것입니다.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고 늘 하나님 선민을 농락하고 통제하여 하나님과 적이 되려고 하고 가는 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기에 그들은 어떤 고통을 받았든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든지 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만약 악을 많이 저질렀다면 하나님의 징벌까지 받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 자신을 반성해 봐야 합니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화비하는 것이 도대체 합격되는지, 안 되는지? 뒤섞임이 있는지, 없는지? 가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이런 일은 분명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저는 몇 년 동안이나 버렸는데 왜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까? 왜 성령 역사가 없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린 후에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걷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입니까?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당신이 길을 잘못 걸었다면 헛수고입니다! 아무리 많이 버린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는 것이 간단합니까? 버리기만 하고 화비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주요한 것은 그래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바로 뒤섞임이 없이 개인의 속셈이 없이 하나님과 거래가 없이 진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는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줄곧 그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시지 않으며 영원히 그와 함께하시고 그를 온전케 하실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사람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이제 분명히 알았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어도 왜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는지, 이것에 대해 문제가 과연 하나님께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시종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지금 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관건은 사람의 뒤섞임이 너무나 많아서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늘 자신의 길을 걷고 늘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기를 중요시하고 늘 하나님과 거래하기를 중요시하며 고생을 좀 하고 대가를 좀 치르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하고 은혜를 누리려고 하며 고생만 좀 하면 원망하면서 결국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의 나타남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알았죠! 만약 어떤 사람이 “제가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존재하는 문제가 적지 않네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정말 모르고 제 자신이 잘 믿는 줄로만 알았을 거예요! 이렇게 고생하면서 다 버린 데다가 가족과 세상도 저를 저버려 지금 되돌아갈 곳도 없기에 세상으로 돌아가면 죽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아직 하나님도 얻지 못했으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라고 말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습니까? 빨리 진리를 추구하세요!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속셈과 거래를 내려놓고 늘 복만 얻고 은혜만 얻기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쓸데없습니다. 고통이 많을수록 더 좋은 일이고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배울 것이 더 많습니다. “고통받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는 거야. 하나님이 날 좋아하지 않아서 내가 고통받는 거야.” 이렇게 여기지 마세요. 그러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입니다. 고통받는 것이 좋은 일이지 누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누림이 너무 많으면 나쁜 일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생명 진입에 유익한 점이 없고 고통을 많이 받아야 생명 진입에 좋은 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사람의 뒤섞임을 해결해야지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일을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외에 하나님과 절대로 거래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생을 좀 하고 대가를 좀 치르면 늘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얻으려고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확실한 답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날 칭찬하시는 거야, 안 하시는 거야? 내가 버린 게 얼만데? 하나님을 위해 받은 고통이 얼만데?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면 좋습니까? 늘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마음놓지 못하고 못 믿기에 늘 하나님을 시험하고 늘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얻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확실한 답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간증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인격이 있습니까? 존엄이 있습니까? 무슨 구두 언약이 필요합니까!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괜찮아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해 이렇게 화비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틀림없이 하나님의 공의이기에 여전히 저에게 문제가 있고 제가 아직 부족한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느낌이 없을수록 더 믿음에 의지해야 하고 느낌이 없을수록 더욱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특별한 상황이 없고 큰 어려움도 겪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왜 나타나시겠습니까! 당신은 늘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이 진리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더 믿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간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어도 그런 느낌이 없을 때가 많은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나 압력이 올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를 악물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큰 붉은 용이 주는 압력이 큽니까, 크지 않습니까? 한 번씩 미친 듯이 반격하기에 압력이 작지 않습니다! 넘어질 수 있겠습니까? 넘어지면 안 되고 이를 악물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버텨야 합니다. 해야 할 사역은 빨리 안배하고 빨리 처리하고 하나님 선민을 보호하고 엄호해야 한다면 다 적합한 배치를 하고 사역을 안배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멈출 수 있겠습니까? 손을 놓고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얼마나 큰 압력이 있든 다 견뎌 내야 하고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분발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국도의 실현을 위해 분발해야지 무슨 느낌에 의지한단 말입니까! 어려움이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셔서 당신과 몇 마디 말씀하셔야 당신이 힘이 생기고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고 말씀하시지 않으면 풀이 죽어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되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일어서야 할 때 앉아 있으면 안 되고 앞으로 가야 되면 기어서라도 가야지 멈춰서는 안 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가 부러져도 뱃속으로 삼킬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이런 정신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정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고 이렇게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며 하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나타난 적이 없는데도 그는 여태껏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데 나는 이런 사람을 칭찬한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늘 그들에게 나타나야 하고 늘 느낌을 줘야 앞으로 나아가지 그에게 느낌을 주지 않고 나타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고 넘어지고 물러서는데, 나는 이런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대하심에 있어 바로 이런 생각이고 이런 뜻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알겠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어떤 때는 느낌에 의지하지 말고 믿음에 의지해야 합니다. 진심을 내놓고 믿음을 내놓아야 합니다.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분발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몇 번의 교제가 있었으면 충분합니다. 남은 것은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실한 교제입니다. 이렇게 터득하면 맞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있으면 일어나서 머리를 들고 씩씩하게 나아가지만 느낌이 없을 때는 허리를 구부정해서 걷고 느낌이 조금도 없을 때는 쓰러져서 걷지 않습니다. 이러면 겁쟁이이지 영웅이 아닙니다. 느낌으로 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서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과 마땅히 이렇게 교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끌어줘야 되고 밀어줘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달래줘야 되는데 어떻게 달래야 하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버리면 복 받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럼 좋아요, 버릴 게요.” “어리석은 게 아닌가요? 복 받는 길인데 왜 안 가려고 하세요? 복 받으려고 하면서 고통은 조금도 받지 않으려고 하고 대가를 조금도 치르지 않을 건가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그럼 대가를 좀 치르고 고생을 좀 할 게요.” 또 한 발자국 걷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달래야 걷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걷습니까?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 앞으로 나아가고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인도하므로 그에게 나타나거나 느낌을 줄 필요가 없이 말씀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 하나님은 당신을 어떻게 인도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여전히 믿음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의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만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작아서 좌절할 때는 다른 사람이 달래고 끌고 밀고 채찍질하면서 이끌어야 하는데 이러면 당신은 아직 진리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하지 않으면 다 대충대충 하면서 속이고 본분을 하기 싫어하고 심지어 도망치기까지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진실한 믿음마저도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말 인식이 있는 사람은 무엇에 의해 앞으로 나아갑니까?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의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를 인도하시는데 그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 일깨움을 받고 빛비춤을 받아 길이 있고 힘이 있게 되어 앞으로 나아가면서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그를 인도하면 이런 사람은 온전케 되는 길로 갈 수 있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아래 단락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쳐들고 읽고 심지어 하나님 말씀 중의 대표적인 부분을 다 마음에 새기고 귀중한 보물로 여기며 또한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으로 이끌어 들어가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구원받고 온전케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 마음속에 이런 생각과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많은 인솔자 일꾼이 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어떻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맞습니까? (틀립니다.) 어떤 점이 틀렸습니까? 이것은 상고해 봐야 할 점인데, 이 점을 분명히 상고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사역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 낭송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책을 발급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은 글귀 도리를 말하는 것보다 조금 진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더 높은 요구가 있으십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관건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고 온전케 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진리 실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진리 실제가 없어도 전할 수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틀림없습니다. 지금 이 차이를 잘 알았겠죠?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진리 실제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할 수 없고 정확한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렇지만 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만족케 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관건은 이것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당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살아낼 수 있음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했다고 할지라도 당신 자신이 성품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하나님 말씀의 실제를 살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가 아닙니까? 그럼 이 차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됩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구하기를 배워야 하며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기를 배워야 하고 또 당신의 실제 경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겉으로만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데에 만족하시지 않고 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력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다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입으로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살아낸 것과 실행해 낸 것이 다 하나님의 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달하라고 요구하시는 기준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럼 너는 지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인가?”라고 물으실 때 당신이 “아직 아닙니다. 지금 경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빨리 잘 경력하세요. 어느 날엔가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도 준행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만족해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의 경력 중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으로 가져가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이런 사람만이 바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정도까지 만드셔야 하나님의 마음이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의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만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할 수만 있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들이 실제에 진입했든 안 했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만 하면 만족한다.” 이런 요구 기준은 너무 낮습니다. 지금 많은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데 구원을 받았겠죠?”라고 말하는데, 이 질문이 어떻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겠습니까? 본분만 했지 사람이 아직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 계속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전한다면 틀림없이 국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다.) 어디가 틀렸습니까?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없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이르지 못했고 사역만 좀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역을 조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변화가 없으면 안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안 됩니다. 당신이 효력을 다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온전케 하려 하십니다. 어떤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야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선민인 우리가 본분을 하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본분을 하는 데에만 만족한다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본분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할 때 있는 힘껏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를 많이 경력하여 마지막에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구원을 받고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단계의 하나님의 사역을 경력하면서 여태껏 본분을 하고 있었기에 제가 진리를 추구하든 하지 않든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마지막까지 화비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사람입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논법이 성립되겠습니까? 이런 논법은 꿈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됐든 제가 이렇게 화비하면서 가정도 버리고 큰 붉은 용도 배반했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계속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버릴 거라고 믿지 않아요.’라고 여기는데,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의 이런 논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못난 자식아, 어리석은 말만 하는구나,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아는가? 너는 네가 나를 위해 효력을 다하기만 하면 내가 만족한다고 여기는가? 너는 네가 사역을 좀 할 수 있다고 내가 만족한다고 여기는가? 나는 너를 온전케 하려고 하는데 너는 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가? 너는 왜 분발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이렇게 본분하는 데에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겠습니까?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일이나 좀 한다면 효력자가 아닙니까? 당신은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가 믿고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믿기에 그를 지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가 본분을 하면서 진리를 잘 추구하거라.” 당신이 집을 떠나 몇 년 됐는데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다가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들이 “밖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했는지 좀 교통해 줘.”라고 하면서 당신이 하는 말을 들어볼 텐데, 조금도 실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들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사람들이 “몇 년 동안 나가서 뭘 했길래 진리를 못 얻었어요? 우린 당신이 더욱 진보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랬고 돌아오면 우릴 도와주고 우리에게 간증해 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으니 금의환향한 게 아니네요!”라고 말할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게 힘을 들여 일이나 좀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몇 년 힘을 들여 일했고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하면 안 됩니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간증을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일부분 사람들이 마지막에 어디에서 실패했는지 보도록 합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시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러면 완전히 끝장입니다! 아무리 힘을 낸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저는 남은 반평생을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해도 전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로 효력자이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저 이렇게 힘만 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진리를 실행하는 데 의지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다음 한 마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게시(揭示)에 따라 자신과 맞춰보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숭배와 신임을 사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개인의 경영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하나님의 영광을 사취하고 훔친다.” 이러면 더 큰일입니다! 이것은 어떤 부류 사람들의 행위입니까?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의 행위이지 않습니까?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실패했습니까? 바로 이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보았겠죠? 자신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에게 비춰 보기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숭배와 신임을 얻으려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교통하는 것을 이용하여 개인의 경영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교통하고 전하는 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사취하고 훔쳐서 개인의 명리와 지위를 얻고 지위의 복을 누립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는 이런 부류의 전형적인 대표이고 종교의 목사도 전형적인 대표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이용하여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기에 마지막에 드러나 도태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고 하나님의 실질이 거룩하여 사람이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좋아하실 거라 착각하지 마세요, 틀렸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뒤섞임이 있고 개인의 속셈과 목적이 있으며 개인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개인의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며 사람의 숭배와 신임을 사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취하고 훔치기 위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정죄하실 것이고 당신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의 범함을 용납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적그리스도를 증오하시겠습니까? 즉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종교계의 목사, 장로, 지도자들을 증오하시겠습니까?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범함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인식해야 하고 이래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를 이용해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칭찬을 얻으려고 망상한다.” 어떤 사람은 상고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효력하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날 칭찬하시지 않을 거라고는 믿지 않아.’ 이런 사람은 개인의 속셈과 의도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뚜렷해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을 사취하려고 하는데 꿈 깨세요! 하나님의 눈은 모든 것을 감찰하고 있고 하나님은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고 계십니다!

다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는커녕,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준수해야 할 도를 찾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공급하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경외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점점 깊어졌고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점점 심해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점점 부풀려졌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전하고도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없고 진리를 깨닫는 데에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패괴 성품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점점 더 깊어지고 질투가 점점 더 심해지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거래하고 상상을 갖고 사역하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더 심해지고 질투가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점점 더 부풀려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만약 하나님과 이런 거래가 없고 이런 속셈이 없고 이런 상상을 품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오해가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심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상상이 부풀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무엇이 가져다준 것입니까? 그의 개인적인 야심이 가져다준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이 가져다준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거래가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가 만약 이런 상상이 없고 이런 거래가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오해가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심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어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이런 방식을 통해 성령 역사를 얻으려 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얻으려 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꼬임수에 넘어가실 리 없고 그를 거들떠보지 않으시고 그에게 역사하지 않으셨기에 그의 오해가 더 깊어지고 질투도 더 심해지고 상상도 더 부풀려지고 야심도 더 커져만 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더 깊어지면서 그의 사탄 본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자신을 시험한 것이고 자신의 사탄 본성이 드러난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게 됐는데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다고 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시켰습니까? 누가 당신에게 하나님을 알지 말고 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라고 했습니까? 이번에 콧방아를 찧었죠? 누굴 탓하겠습니까?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종교인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 제가 기다리고 있으니 꼭 저에게 먼저 나타나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영접하지 않더라도 저부터 영접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날마다 기다리고 있고 날마나 기도하고 금식하고 있으니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무조건 저에게 먼저 나타나셔야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이라고 하면서 “아멘”을 몇 년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시험하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런 기도를 들으시지 않고 당신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했더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들에게 나타나시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이런 도를 우린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반대할 것이며 끝까지 대적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 본성이 흘러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어떤 결과입니까?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멸망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인정사정 두시지 않습니다. 대적하는 자는 죽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면서 모든 것을 버렸기에 때가 되면 하나님이 꼭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하고 국도에 들어가게 해 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순복이 있습니까? 경외가 있습니까? 진실한 인식이 있습니까? 전부 관념과 상상이고 전부 시험과 거래이고 전부 야심과 환상이며 꿈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걷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경외가 생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점점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질투가 점점 더 심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상상도 점점 더 부풀려지는 것입니다. 이 지경까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적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과 대적하면서 하나님과의 모순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지막까지 믿어도 이 지경에 이르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게 되고 하나님과 점점 적대되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점점 더 많아지고 마지막에 화가 치밀어 사탄 본성이 눈덩이가 되는데, 이런 사람은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이론적 공급과 인도 하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였고 마치 식은 죽 먹는 듯하였으며 마치 자신의 인생 목표를 찾은 듯하였고 마치 자신의 사명을 찾은 듯하였으며 마치 새 생명을 얻은 듯하였고 마치 구원을 받은 듯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 말씀을 낭랑하고 유창하게 암송하는 중에서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로를 찾은 듯하였으며, 마치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늘 하나님과 대면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또 늘 ‘감동’되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늘 하나님 말씀 속의 ‘하나님’ 인도에 의해 마치 부단히 하나님의 고심을 깨달은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도 깨닫고 하나님의 경영도 깨닫고 하나님의 실질도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도 알게 된 듯하였다.” 이렇게 많은 “마치”는 무슨 뜻입니까? 그런 일이 아니고 가상이며 겉보기에 그런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경력과 인식 속에도 “마치”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난 그런 거 같아.’ ‘나도 그런 거 같아.’ ‘난 딱 그래.’ ‘난 정말 그래.’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입니다. 알았겠죠. 당신이 ‘그런 것 같다’고 느끼거나 ‘마치’ ‘80%’ ‘아마’라고 느끼면 안 됩니다. 그것들은 다 “마치”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마치”가 아닙니까? 당신 자신이 마음속으로 알고 나서 “저는 깨달았어요.” “저는 분명히 봤어요.” “저는 인식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가 아니라 다 진실한 것이고 실제입니다. 알았겠죠? 당신 속에 아직도 “마치”가 있습니까? 당신 속에 “마치”가 있다면 큰일입니다. 그럼 “마치”는 무엇을 뜻합니까? 인식이 아니고 꿈을 꾸는 것이고 가설이며 아마이고 80%이며 불가능인데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은 이제 진리 실제가 좀 있네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럴 거예요.” “뭐, 그냥” “아마도요” 이러면 됩니까? 만약 당신이 정말로 ‘난 이제 진리 실제가 좀 있는 것 같아.’라고 느낀다면 다음 한 마디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이 느낌이 ‘마치’가 아니었으면, 지금 제일 겁나는 게 ‘마치’야.” 당신은 “마치”를 겁냅니까? 좀 겁내게 되었겠죠. 이 “마치”는 사람을 해치고 사람의 앞길을 망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리 실제가 거의 장비된 것 같고 80% 정도 된다고 여기면서 “나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나도 경력이 있어.”라고 자신이 괜찮다고 느끼는데, 이것은 다 “마치”이고 “마치”의 결과는 바로 위험입니다! 자신이 진리 실제가 있는지의 여부를 절대 “마치”로 가늠하지 말고 느낌으로 하지 마세요. 그 느낌이 바로 “마치” 속에 들어 있어서 쉽게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다음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표면의 인식에 젖어 마치 그들의 믿음이 증가되고 고통받을 심지가 견고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듯하였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경력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식과 생각은 다 그들의 일방적인 소망에서 온 상상과 추측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일방적인” 것도 사람을 망칩니다. 하나님과 절대로 일방적인 교제를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찾아야지 자신의 상상에 근거하지 마세요, 믿을 바가 못 됩니다. 그 외에 느낌으로 하지 마세요. “마치”라는 느낌도 믿을 바가 못 됩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한 검증도 이겨 내지 못하고 그들의 소위 영적인 것과 분량은 하나님의 시련과 검증을 전혀 이겨 내지 못한다. 그들의 심지는 다만 모래 위에 세워진 공중누각에 불과하고” 이것이 바로 “마치”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자신의 상상과 마치와 느낌은 다 믿을 바가 못되고 결과는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소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다만 그들의 두뇌로 상상해 낸 성과일 뿐입니다. 상상해 낸 성과와 이론에서 총결해 낸 것, 사유에서 총결해 낸 것, 귀납해 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아닙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두뇌가 있고 사유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많은 진실한 인식을 총결해 냈는데 이론상에서 말하면 다 맞지만 실제적으로 경력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없으며 전부 두뇌로 상상해 낸 것이어서 여러분이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지만 마지막에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의 어떤 시련과 검증도 견디지 못합니다. 시련이 닥치면 넘어지고 여지없이 실패합니다! 한 번 체포되니 유다가 되고 한 번 시련을 받으니 원망하면서 넘어지고 고통스러운 시련 하나에 일어나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과 시련에 집에 돌아가서 믿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지 않고 도망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옥살이를 몇 년 하고 나더니 조용히 있겠다며 집에 간 뒤로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것이죠? 이전에 막힘없이 줄줄 말하더니 지금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목숨만 간당간당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형제자매들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서 묻습니다. “저 자매님이 왜 저래요?” “뭘 물어봐요, 실족한 거잖아요!” “왜 실족했어요? 이전에 그렇게 말도 잘하고 설교도 막힘없었잖아요! 왜 실족해서 하나님을 안 따르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믿음도 없고 마음에 원망밖에 없고 오해와 추측밖에 없으니 드러나 도태된 거죠, 뭐.” 보다시피 경력한 것이 아니고 두뇌로 상상한 것이면 믿을 바가 못됩니다. 그것은 다 “마치”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많은 “마치”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실제가 좀 있는 것 같고 마치 자신이 믿음이 있는 것 같고 마치 자신이 분량이 있는 것 같고 마치 자신이 틀림없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온전케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마지막에 “덜컥” 한 가지 시련이 닥치니 누구보다 더 볼품없이 넘어졌고 누구보다 더 호되게 곤두박질했습니다. 이 “마치”는 믿을 만합니까?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믿을 게 됩니까? 시험을 거치지 않고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큰소리치지 마세요. 무슨 간증도 없으면서 빈말만 하는 사람은 무지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다른 사람은 혹형을 경력하여 간증을 섰습니다. 그것은 간증이고 실제가 있기에 불복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어떤 혹형도 받지 않았으면서 뭘 불어댑니까? 다른 사람은 큰 붉은 용이 그렇게 미친 듯이 체포하고 핍박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약해진 적이 없고 가족을 버린 이후로 여태껏 집에 가보지 않아도 가족이 그리워서 울거나 걱정돼서 우울해 하거나 이 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본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것을 실제가 있다고 합니다.

다음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최종에 그들이 얻는 것은 여전히 종교 냄새로 가득한, 봉건 미신으로 가득한, 전설적인 것과 기괴한 것과 묘연한 것으로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정론(定論)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정의(定義)는 하늘만 믿고 하느님만 믿는 사람과 똑같고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 등등 진실한 하나님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은 다 그들의 인식과 어긋나고 관계도 없고 몫도 없으며 심지어 상반된다.” 이러면 큰일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진실한 교제도 없고 어떠한 실제도 살아내지 못했으며 도리만 말하고 한바탕 공담만 하는데, 마지막에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지금 종교계의 목사와 지도자는 어떻습니까? 수치를 당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역사와 참 하나님의 나타남에 직면하여 한동안 대적하다가 마지막에 와서 보니 “아, 정말 하나님의 역사였구나!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간증이 점점 더 많아지고 점점 더 실제적이네. 이렇게 좋은 영화는 정말 성령 역사에서 나온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보면 볼수록 눈이 뒤집히고 보면 볼수록 주저앉게 되고 마지막에 서있지도 못하고 땅에 앉아 통곡하게 됩니다! 통곡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누굴 탓하겠습니까? 누가 당신보고 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까?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간증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보니 눈물을 짜게 됐지요? “정말 뜻밖이야!”라고 하면서 최종에는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시인하게 됩니다. 그럼 당신은 뭘 했습니까? 왜 일찍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 일부 적그리스도는 제명되고 나서야 눈물을 짜면서 후회하고 자신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길을 잘못 걸었음을 알게 됐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일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러 해 믿고 비록 본분을 할 수 있지만 힘에 부치는 것 같고 실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함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후회합니다. ‘난 몇 년 동안 어떻게 믿은 거야? 왜 뭘 해도 잘 못하지? 여태껏 오늘처럼 이렇게 내 자신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 데도 쓸모없다고 느껴 본 적이 없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말 그대로 폐물이어서 무용지물이 됐구나.’ 수치를 당하기 시작했죠? 만약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본분을 잘하지 못합니까? 만약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글을 잘 쓰지 못합니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영화를 잘 만들지 못합니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무엇을 해도 잘하지 못합니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인솔자 일꾼을 잘하지 못합니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아무런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합니까? 정말 진리 실제가 있다면 왜 무슨 일을 해도 원칙이 없습니까?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진리 실제가 없으면 안 되고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고 폐물입니다! 이런 사람이 만약 아직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괜찮다고 여긴다면 낯가죽이 두꺼운 것입니다. 진리 실제가 없으면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리 실제가 없다면 폐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말씀을 먹고 마셔도 다 부족하고 뭘 해도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큰소리치겠습니까? 그래도 잘난 체하겠습니까? 그래도 자신을 뽐내겠습니까? 그래도 육체적 누림을 탐내겠습니까?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나타내겠습니까?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사람이 진리 실제가 없으면 빨리 착실하게 진리를 추구하세요. 착실하게 처신하고 착실하게 진리가 있는 사람에게 순복하고 성령의 역사에 순복하고 빨리 하나님 말씀의 권병(역주: 권세) 아래에 순복하고 절대로 건방을 떨지 말고 오만하지 말고 독선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순복을 배우는 것이 가장 이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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