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신 말씀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다≫에 관한 설교 교통 (3)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성품은 모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표해 낸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경력할 때 사람은 실천 중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한 목적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말씀하여 이루려는 효과를 알고 체험하게 된다. 사람에 대해 말하면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 뜻을 깨닫고,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함에 있어서 반드시 경력해야 하고 깨달아야 하고 얻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것을 경력하고 깨닫고 얻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점차 이해가 있게 되고 동시에 각기 다른 정도의 인식도 있게 된다. 이 이해와 인식은 상상해 내는 것이 아니고 지어내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체험하고 경력하고 느끼고 실증해 내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체험과 경력과 느낌과 실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내용이 있게 되는데, 그때의 인식이야말로 실제적인 것이고 진실한 것이고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득, 경력, 느낌과 실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과 인식에 도달하는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이다. 사람은 이런 교제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이해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되며,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점차적인 앎과 인식이 있게 되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실제적인 확신과 정확한 정의(定義)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실질적인 확정과 인식이 있게 된다. 사람은 이런 교제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더는 근거 없이 상상하지 않고 더는 자기 뜻대로 시기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정죄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논단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과의 논쟁이 점점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저촉이 점점 적어지며 사람의 패역이 점점 적어진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아림과 순복이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가 점점 실제적이 되고 또한 점점 깊어진다. 사람은 이런 교제 중에서 진리의 공급을 얻고 생명의 세례를 얻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얻게 된다. 이런 교제 중에서 사람은 성품의 변화를 얻고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와 경배도 얻게 된다. 이런 교제가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더는 한 장의 백지가 아니고 더는 한 마디 구두 서약이 아니고 더는 일종의 맹목적인 따름과 숭배도 아니다. 이런 교제가 있어야 사람의 생명이 하루하루 자랄 수 있고 사람의 성품이 점차 변화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막연한 신앙에서 점차 진실한 순복과 헤아림으로 나아가 진실한 경외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따름도 피동적인 데서 점차 주동적인 데로 나아가고 소극적인 데서 적극적인 데로 나아갈 것이다. 이런 교제가 있어야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를 수 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은 이론과 글귀 도리에만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원점에 머물러 있으며 전설적인 색채를 띠고 봉건 미신을 띠고 있는 전통적인 경배의 기초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원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거의 제로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에 대해 확신하는 것 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여전히 막연한 가운데 있다. 이러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진정한 경외는 또 몇 %나 되겠는가?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성품은 모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표해 낸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다 알고 있고 또 하나님 역사의 사실도 보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는 것을 통해야만 효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과만 마주하고 있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몇 년 경력했든지 다 이 사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경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실한 것이고 우리는 다 얼마간의 경력 간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 역사를 경력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고 또 은혜시대를 몇 년 경력했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종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고 누가 메시아인지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교계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데 모두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경력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말세 역사의 말씀이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이 효과는 어떻게 도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경력할 때 사람은 실천 중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한 목적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말씀하여 이루려는 효과를 알고 체험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이루려는 효과에 대해 알지 못할까요?” 이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실천 중에서”의 “실천”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사람이 성령 역사의 깨우침과 빛비춤을 경력하는 것입니다. 이 경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개인의 경력만이 아니라 주로는 또 경력 중에서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을 얻고 성령 역사를 얻는 경력입니다. 이런 실천이야말로 진실한 것입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어도 성령 역사를 얻지 못했는데 이런 사람에게 진실한 생명 경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령 역사가 없는 경력은 진정한 생명 경력이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의 “실천”은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경력이고 성령이 인도하는 경력입니다. 이 “실천”은 관건입니다! 성령 역사의 인도를 경력하지 못하고 성령 역사의 깨우침과 빛비춤을 경력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이 말씀을 한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원히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을 알”지 못하며 영원히 “하나님이 말씀하여 이루려는 효과를 알고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 몇 방면의 효과는 전부 성령 역사에 의해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실천”이 도대체 어떤 경력인지 이제 알겠죠. 생명 경력은 하나님을 믿은 햇수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을 몇 년 믿었고 어떤 일들에 부딪친 적이 있고 어떤 일들을 알아본 적이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주로 하나님을 믿은 시간 동안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을 얼마나 많이 얻었는지, 성령의 인도를 얼마나 많이 얻었는지, 성령 역사의 경력을 얼마나 많이 누렸는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실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경력하면서 주로 몇 방면의 효과에 도달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한 목적을 알게 된다.”가 한 방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서 아주 많은 말씀을 발표하셨는데 대부분은 심판 형벌의 말씀이고 사람의 패괴를 폭로하는 말씀이고 세상의 흑암과 사악을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온 인류가 어느 정도까지 패괴되었는지를 폭로했고 또 온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한 역사(歷史)와 온 종교계가 하나님을 대적한 역사도 폭로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발하신 진노를 나타냈고 또 이런 심판 형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하나님 성품의 실질을 다 나타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말씀은 하지 않고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말씀을 이렇게 많이 하셨지? 이건 무슨 문제지?” 여기서 당신이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목적을 모른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온 종교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 후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게 아닌 것 같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면 안 돼. 우리 인류는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심리상태가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말세 역사 중에서 이런 말씀을 발표하시는지, 이런 말씀들이 어떤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는 근원이 있고 배경이 있는데 이 근원과 배경을 모르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관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는 목적이 있고 근원이 있고 배경이 있는데 만약 목적, 근원, 배경을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어떤 의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몇 백만 자의 말씀을 하셨는데 근원은 무엇입니까?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 하나님께는 하나의 계획이 있었는데 한 방면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은 그분의 경영 계획의 목적과 취지에 근거하여 사탄의 패괴를 통해 한 단계 사역을 하여 인류를 온전케 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려는 진리를 사람 안에 만들어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배경은 바로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지 몇 천 년이 되어 지금까지 이미 깊이 패괴되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인류가 되었는데 사탄, 이 악마의 유산에 속하고 사탄의 후예에 속해 이미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께서 몇백만 자의 말씀을 하신 것은 너무나도 의의 있는데, 이런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고 온전케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을 분명히 안다면 이 말씀에 대해 아직도 관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관념도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셔야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우리의 생명에 유익한 점이 있고, 최종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데에 도달할 수 있으며 만약 다른 말씀을 하시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고 아무런 소용도 없고 아무런 의의도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관념이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몇 년 경력한 후이면 아무런 관념도 없게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함에 이롭다’라는 말이 정말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럼 아직도 축복의 말을 듣고 싶습니까? 아직도 비밀을 풀어 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그런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우리의 생명 진입, 성품 변화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그런 말씀은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오직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이 모든 말씀만이 우리의 제일 큰 필요이고 급선무입니다. 이제는 이 일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과 목적에 대해 다 분명히 알았는데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도달하려는 효과에 대해 분명합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도달하는 효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 대한 구원이고 온전케 하심입니다.”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효과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생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구원받는 표준이고 역시 온전케 되는 최소한의 표준입니다. 이 일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럼 이 효과는 무엇을 통해 도달하는 것입니까? 모두 진리를 추구하여 성령 역사의 깨우침과 빛비춤과 인도를 얻는 것을 통해 도달하는 효과입니다. 만약 성령 역사가 없으면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어떤 효과에 도달하려고 하시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런 말씀의 근원과 배경은 도대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패괴된 인류를 심판 형벌하시는지,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계속 모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힘이 없고 이런 말씀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에는 몇 가지 방면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적과 근원과 배경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도달하려는 효과를 포함하고 있는데 당신이 만약 이 몇 방면에 대해 조금도 모른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식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은 우리 패괴된 인류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고 순복(역주: 순종)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럼 그가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 그리고 도달하려는 목적과 효과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인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제일 주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한 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점점 심화되고 전면적인 이해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런 말씀들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다른 말은 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어떻게 전 우주를 지휘하시는지, 어떻게 만유를 주재하시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급선무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과 이 단계 심판 형벌의 사역을 하시는 것은 의의가 너무 깊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근원과 배경을 알아야 합니까? 패괴된 인류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구원받는 데에 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런 말씀만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형벌에 순복하는 것을 경력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만약 패괴 문제가 해결받지 못한다면 무엇을 말해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암에 걸린 후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먼저 병을 고치는 것입니까? 그가 지금 죽게 되었는데 좋은 옷을 입든 어떤 좋은 것을 누리든 그에게는 다 소용없는 것이고 그 어떤 것도 다 공허한 것이며 오직 그의 병을 치료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패괴 문제와 죄성의 문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다 해결해야만이 비로소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른 것을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곧 멸망될 사람에게 “내가 이후에 천국의 복을 너에게 베풀어 주어 너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복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의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빈말입니다. 그럼 오늘날 심히 패괴된 인류는 현실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복을 얻을 수 있고 어떤 복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말이 현실적입니까, 비현실적입니까? 심히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기만 하고 죄의 악을 탐하기만 하는데 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패괴 문제와 죄를 짓는 본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자격이 없고 저주받을 자격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 말하면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 뜻을 깨닫고,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함에 있어서 반드시 경력해야 하고 깨달아야 하고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이상 방면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이 이상 방면의 진리는 모두 사람의 생명 진입의 토대입니다. 하나님 역사의 이상, 하나님 말씀의 근원과 배경,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목적과 말씀하여 도달하려는 효과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런 기초에서 진리를 더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여 성품이 변화된다면 현실적입니다. 이것은 조건만 마련되면 자연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기초가 없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늘 관념이 있기 때문에 생명 진입이 영원히 제로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큰 붉은 용과 종교계가 퍼뜨린 유언비어에 대해 연구합니다. ‘정말일까? 이 말에 진짜가 얼마나 되고, 가짜가 얼마나 될까?’ 그것을 연구해서 쓸모가 있습니까?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총명한 것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까? (어리석습니다.) 연구해 봐야 의의가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 말씀에 진입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멸망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 인솔자는 안 좋습니다. 진리도 없고 인성도 없습니다. 이런 인솔자라면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인솔자를 저에게 안배해 주셨을까요?”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일부 쓸데없는 일만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당신이 먹고 마시기에 충분하고 경력하기에 충분하며 성령 역사도 현실적이기에 진리를 추구하면 성령의 현실 역사가 있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 밖에 상면의 형제님이 이끌고 있고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교통해 주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다른 것을 연구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저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도대체 진짜야, 가짜야? 가장한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진리를 얻지 못하면 재수가 없는 것이고 진리를 얻으면 총명한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는지 가늠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역사는 다 현실적이기에 그분은 영원히 사람의 관념에 따라 일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일을 하시는 근원과 배경 그리고 도달하려는 효과에 대해 알았습니까? 당신이 만약 이 일을 꿰뚫어 본다면 어떤 것도 연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간단하게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실 때는 30세였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는 나이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20세가 안 되셨을 때였습니다.” “20세가 안 되셨다면 인성이 성숙하지 못한데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까?” 이 말에 도리가 있습니까? 이 말은 터무니없는 사람들이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그분의 인성이 성숙되었는지를 신경 써서 뭐할 겁니까? 말씀을 발표하시는 것은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말을 발표하느냐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분은 강단에 서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면 다른 사람이 기록하거나 혹은 그분 자신이 직접 쓰시는데 당신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감히 부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당신이 먹고 마시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먹고 마시고 순복하면 살 것입니다. 진리를 얻는다면 복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믿든 안 믿든 이 방식인데 믿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칙인데 현실은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왜 이런 사람을 선택해서 쓰실까? 그는 왜 나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지?” 성령께서 이런 사람을 선택하셨는데 당신에겐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믿지 못하겠으면 그분과 맞서보세요. 맞서면 죽는데, 그분이 당신을 도태시키실 것이고 제명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상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리석고 무지하며 당신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없고 당신이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다 가장 좋은 것이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이상적이며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당신이 지금은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구원을 받고 진리가 있게 되면 인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에게 심오한 지식이 있고 말하는 것이 부드럽고 이해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이러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좋지 않습니까? 당신의 상상과 관념에 부합되는 그런 사람이 사역하면 효과가 없고 일을 그르치고 방해합니다. 이런 사람을 제일 좋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표준을 보았습니까? 그가 만약 인성의 지식이 너무 많으면 그에게 성령 역사를 가로막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성령 역사의 효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가 만약 이해심이 매우 많고 사람의 관념에 완전히 부합된다면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까? 아는 사람 있습니까? 이 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면 당신은 진실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저의 이런 사역 방식을 지식인이 할 수 있습니까? 그는 문법과 어법을 중요시하고 그의 이미지를 중요시해 그가 사역을 다 하고 나면 이미지가 아주 좋아지고 사람들마다 그의 인성에 대해 매우 찬성할 것인데, 하나님 역사와 성령 역사의 효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가 성령 역사를 없애버리고 가려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까? 적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바리새인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관념과 상상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바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이 아닙니까? 그들은 사람의 관념에 제일 부합되는 인선(人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정죄하셨고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고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지에 대해 인식이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지혜롭기 때문에 어떤 육신을 입고 어떤 사람을 쓰시든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으며 완전히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완전히 효과에 도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세 역사의 이상적인 인선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말씀이 육신 되시고 사람을 선용하신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처럼 다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생김새와 말하는 방식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고 겉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미지가 좋아서 완전히 사람의 상상 속에서 일을 하는데 이런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고 다 적그리스도입니다! 은혜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무엇 때문에 성전에 가셔서 역사하지 않으셨습니까? 성전의 그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다 하나님의 원수였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전도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전에서 전도하지 않으셨는데 당신이 하나님께 대제사장,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선용하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으로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만약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 일을 꿰뚫어 보았죠?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 집에서 무엇 때문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를 그렇게 엄하게 처리합니까? 거짓 인솔자와 적그리스도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전혀 증거하지 않고 자신만 높이고 간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글귀 도리만 말하면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허상을 주고 겉으로 하는 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되는 것인데 다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고 찬성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에 속하기에 하나님 집에서는 하나를 발견하면 하나를 도태시킵니다. 사람이 만약 이 일들을 참으로 꿰뚫어 본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깨닫고 인식할 수 있으며, 이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이해와 인식은 상상해 내는 것이 아니고 지어내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체험하고 경력하고 느끼고 실증해 내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체험과 경력과 느낌과 실증이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내용이 있게 되는데, 그때의 인식이야말로 실제적인 것이고 진실한 것이고 정확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후의 인식에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없고,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 실제적이고 너무나도 좋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역사 방식은 참으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으며 만약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역사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또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으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피조물보다 높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효과에 도달했을 때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관념이 없고 오직 순복과 충심만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을 연구하지 않고 다 순복하고 충성하면서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생명 성품은 철저히 변화되어 하나님에 대해 대적이 조금도 없는데 그가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대적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에 조금의 관념도 없으면 그가 하나님에 대해 참으로 인식이 생겼음을 증명하고 참으로 인식이 있으면 관념이 없고 관념이 없으면 더는 대적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오직 절대적인 순복만 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하며 죽더라도 원망의 말이 없고 죽기까지 순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 성품이 철저히 변화된 것이 아닙니까?

아주 많은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에게 앙심을 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 사람의 구속을 받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의 구속을 받는데 그는 “우리 교회 인솔자가 안 좋아서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우리 소구역의 인솔자는 좋지도 않고 거짓 인솔자여서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 집의 사역에 대해 관념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없고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구속이든 다 받는데 이 사람이 믿는 분이 하나님 맞습니까? 그의 믿음에는 뒤섞임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솔자를 믿고 한 사람을 믿는 것인데 그의 안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가 그를 잘 대해 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이 있고 잘 대해 주지 않으면 힘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순복이 있습니까? 그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에 순복할 줄 모르며 늘 사람의 구속을 받고 사람에게 좌지우지되는데 그가 사람을 숭배하고 사람이 그의 우상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늘 변덕스러운데 “사흘 동안 고기를 잡고 이틀 동안 그물을 말리는” 것과 같이 사흘은 열정적이고 닷새는 부진하고, 올해는 좋고 다음해는 나쁘며, 올해는 열정적이고 다음해는 부진하며, 올해는 추구가 있고 발전이 있고 다음해는 안이 흑암하고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는 무슨 문제입니까? 이런 사람은 이지가 비정상이어서 어떤 때에는 정신병이 재발하기도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흘은 힘이 있고 이틀은 힘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변덕이 심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전혀 없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람에 따라 돛을 다는 격이고 각종 요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언제 어떤 병이 재발할지 모르고 언제 정상이고 언제 비정상일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정신 이상에 속합니다. 정신이 비정상인 사람의 인성이 정상입니까? 이런 사람이 새신자라면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봐줄 수는 있지만 만약 8~10년 믿었는데도 여전히 이런 병적인 상태라면 그것은 정신병입니다. 이런 사람은 얼른 제쳐두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기껏해야 임시 효력자인데 충성스러운 효력자가 되기에도 불합격입니다. 그는 인성이 불안정해서 언제 어떤 병이 재발할지 모르기에 간질환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언제 발작할지, 언제 일어설 수 있을지, 언제 넘어질지, 언제 의식을 잃을지 다 미지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루기 힘들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나이가 들면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혼인의 구속을 받는데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혼인의 구속을 받으면 그가 사흘은 부진하고 이틀은 열정적이 되면서 자주 간질병이 발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있습니다.) 혼인의 구속을 받는 것이 그렇게 심각합니까? 당신이 배우자를 만나고는 “하나님 집에서 저에게 주는 생활비가 부족해서 생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럼 밖에 나가 일해서 돈 벌어 행복한 생활을 하세요. 누가 당신을 속박했습니까? 지금도 배우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으면 빨리 구하세요. 구한 다음 밖에 나가서 일하고 밖에다 집을 마련해 혼자 생활하세요. 하나님 집은 자유롭습니다. 하나님 집은 당신을 속박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복도 얻고 싶어 하고 배우자를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도 낳아 기르고도 싶어 하고, 또 하나님을 위해 화비(역주: 들이다, 바치다, 쓰다, 지불하다의 뜻)해서 본분을 하겠다는 심지도 세우지만 육체가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참지 못하고, 또 배우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당신에게 배우자를 구하라고 하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지체할까봐 두렵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마음은 창녀이면서 정절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태도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광명정대하지 못합니까? 배우자를 구하면 생명을 지체해 구원받지 못할까봐 근심하고, 진리를 추구하면 또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배우자를 못 구할까봐 근심하는데 평생 배우자를 구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고 헛산 것같이 느낍니다. 이런 사람은 무슨 병에 걸린 것입니까? 정신이 비정상적이고 경련이 온 것입니다. 만약 견디지 못하겠으면 배우자를 만나러 가세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집에서 당신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왜 하나님 집에 눌러앉아 있습니까? 양다리를 걸치고 주저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데 왜 목숨을 내걸지 못합니까? 목숨을 내걸면 어떤 문제든 다 해결하고 좋지 않습니까? 당신이 만약 “저는 진리를 추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각종 고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이런 심지가 있어야만 진리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받을 수 없는데 무슨 추구할 힘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그의 마음은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면서 또 배우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문제입니까? 이런 사람이 만약 배우자를 구하지 않으면 마음이 여전히 배우자 안에서 살고 있는데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진리를 얻지 못한다고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그에게 정상 사람의 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은혜시대의 선교사와 수녀들도 한평생 배우자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 사람이 견딜수 있는 고통입니다. 다른 사람이 견딜 수 있으니 우리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죠? 만약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빨리 찾으세요. 찾은 후 일을 하고 행복한 육체 생활을 보내면서 여가 시간에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안배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습니까? 계속 하나님 집을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길을 알려 주면 당신이 선택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 집에서 당신에게 소개해 주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결혼식을 올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직장을 찾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설마 교회에서 결혼상담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사역을 해서 의의가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미혼 청년을 위해 결혼상담소를 만드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안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원칙만 줄 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선택해도 되고 찾아도 됩니다.” 당신이 “이 돈이 너무 적어서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여가 시간에 집회하면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정죄하지 않고 제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어떤 복을 받을지는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적합합니까? (적합합니다.) 관념을 가지지 마세요. 지금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배우자의 속박을 받는 것을 발견했는데 오늘 제가 툭 터놓고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견디지 못해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 찾으세요.” 당신이 만약 찾지 않는다면 마음속에는 늘 이 일로 속박받고 방해받으며 본분을 하면서 늘 소극적이 되고 부진하게 되는데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늘 관념이 있고 생각이 있고 하나님 집에서 하는 것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여기면 당신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득, 경력, 느낌과 실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과 인식에 도달하는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이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에 근거해 도달하는 효과인데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이 과정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입니다. 이 진실한 교제를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도달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최종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입니까?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까?” 이것은 한 가지일 뿐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람의 경력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에 의해서 도달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들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도는 한 가지 방식인데 진실한 경력과 사람의 협력이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한평생 기도드린다 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도는 한 방면이기에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실행과 경력과 순복에 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많은 일에서 사람을 인도하시는데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 징계, 시련, 연단과 온전케 함을 포함합니다. 이런 과정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각종 시련 속에서 성령의 깨우침을 얻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대화가 아닙니까? 사람이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 마지막에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실행하고 간증을 굳게 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순복이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순복은 성령 역사에 대한 사람의 반응과 보답이 아닙니까? 사람이 성령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나타났음을 보게 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보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의 깨우침에 대해 진실한 순복과 실행이 생깁니다. 이 과정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이런 교제가 많아지면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진리를 얻기 위해 고통을 받고, 의식적으로 간증을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데 이것이 다 사람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는 과정입니다. 그럼 당신의 경력에 이런 의식적인 순복과 의식적인 보답과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린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런 경력이 많습니까? 만약 이런 경력이 많다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반드시 인식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동안 하나님과 교제한 경력이 몇 번밖에 없는데 그 몇 번도 대부분 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경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경력과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요구하신 경력과 그가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한 경력은 아주 적습니다. 단지 소극적인 방면에서 그를 징계하고 저지하고 징벌한 것뿐이어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징계하신 적도 있고 징벌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럼 이 일방적인 경력을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편면적인데 진실로 순복한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일에서 당신에게 깨우쳐 주고 빛비춰 주어 당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를 깨달아 그 순간에는 그렇게 했지만 이후에도 그렇게 했습니까? 계속 견지했습니까? 만약 없다면 그 한번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일에서 그에게 깨우쳐 주신 것을 한평생 지킬 수 있습니다. ‘이 일에서, 이런 일에서 나는 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족케 할 거야.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일에서 나를 징계하셨으니 난 한평생 이런 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거야.’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인데 한 가지 진리를 깨달으면 계속 굳건히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이번에 저를 깨우쳐 주셨으니 이번에 이렇게 실행하면 당신께 순복한 것입니다. 다음에 당신이 저를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당신께 순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한 번 깨우쳐 주면 네가 한 번만 실행하고 영원히 지키지 않기에 너는 진리를 얻을 자격이 없는데 내가 또 매일 너를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내가 너를 계속 깨우쳐 주면 네가 나무 인형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나무 인형이 필요 없다. 나는 죽은 사람을 원하지 않고 산 사람을 원한다. 나는 내가 한 번 깨우쳐 주면 영원히 지킬 수 있고 한 번 징계하면 그 일에서 영원히 거역하지 않는 사람을 원한다.”라고 말씀하시니 어떤 사람은 아주 피동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한 번 밀어주면 저는 한 번 움직이고, 두 번 밀어주면 두 번 움직이고, 세 번 밀어주면 세 번 움직이겠습니다. 만약 밀어주지 않으면 멈추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결혼하는 일로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저는 영원히 결혼하지 않고 청춘과 일생을 완전히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그때는 굳게 맹세했지만 그 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성이 아주 좋아보이고 그에게 아주 친절하면 그는 마음이 흔들려 원래의 마음을 바꾸고 맹세를 지키지 않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입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문제입니다. 당신은 신용이 없고 성실(역주: 거짓이나 꾸밈이 없다의 뜻)한 사람이 아니어서 손해를 봅니다. 당신이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맹세를 어겼기에 말에 신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는 실제 행동으로 해야 하고 한 말은 꼭 지켜야 합니다. 한두 번의 과오는 괜찮지만 영원히 하나님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태시키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파격적인 높여주심이 아닙니까? 일반인에게 이런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전 인류 중에 이런 기회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됩니다. 말세에서 이 20여 년 동안 우리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이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이 기회가 있고 다수의 사람들은 자격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자격이 없습니까? 왜냐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며 하나님께 거짓 맹세를 하며 하나님에 대해 대충대충 하며 속이면 그만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고 이런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돈 있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좋은 직장을 찾을 수 있고 뒷거래를 해서 혜택을 보기 위해서는 관리에게 아첨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 고생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이런 심리가 있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욥은 그 정도로 시련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온전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습니다. “저는 그 어느 때든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저의 생명의 최고 격언입니다. 하나님이 다 가져가셔서 저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지킬 것입니다. 이는 저의 신조이고 제 생명의 격언이고 좌우명이기에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죽더라도 지킬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보시더니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진실한 것이다. 이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고 참으로 지켜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고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은밀히 사람과 교제하면서 누가 하나님에 대해 진심인지, 누가 계속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도를 지킬 수 있는지, 누가 언제든 이 간증을 굳게 설 수 있는지를 보고 계시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예전에 늘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타난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 말씀의 숨은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만약 말세 역사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고 온전케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지막에 온전케 되는 사람들이 얻는 최대의 복입니다. 온 피조물의 최대의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는 것인데 이 복은 너무나도 큽니다. 이 복이 어느 정도로 큰지 사람의 언어로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데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사람들은 이 기회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평범한 일로 여기는데 언젠가는 평생 유감스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고통을 좀 받는 것이 뭐 별거입니까? 몇 년을 고통받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고통입니까? 기껏해야 10~20년이 아니겠습니까? 한평생 고통을 받는다 한들 뭐 어떻습니까? 한평생 고통을 받으면서 이 도를 지킨다면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한평생 고통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지키고 전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장가가지 않고 시집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혹형이나 재난의 고통이든 다 받고 간증을 굳게 서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하루를 살아도 진리를 추구하면서 어떤 고통이든 다 받는다면 어느 날엔가 어느 정도까지 변화될 수 있는지 보세요. 그때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조금의 고통도 받지 않으면 앞으로 큰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아도 한 가지 고통은 떨쳐버리지 못할 것인데 어떤 고통입니까? 후회로 인한 고통이고 유감으로 인한 고통인데 당신은 이 고통을 영원히 떨쳐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면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겠습니까? ‘내가 그때 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지 않았을까? 내가 왜 육체의 가족의 속박을 받고 하나님께 충심을 다하지 않았을까?’ 이 일을 생각하면 자신의 뺨을 때리고 피가 나도록 머리를 박을 것인데 평생을 후회하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것을 의식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 곳곳에서 육체를 생각하고 매일 감정 속에 살면서 매사에 육체의 이익만 고려하는데 이런 사람은 시야가 좁고 견식이 없고 마음속에 하나님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참으로 하나님이 있다면 이런 일을 고려한들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정말로 큰 지혜가 있습니까? 정말로 많이 총명합니까? 그것은 다 작은 지혜이고 잔꾀여서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따집니까? ‘내가 지금 돈을 이전보다 얼마나 더 적게 벌고 있지?’ 어떤 사람은 무엇을 따집니까?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이지?’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 시민이 되고 싶습니다.” 시민이 쓸모가 있습니까? 의의가 있습니까? 쓸모가 없고 의의도 없습니다. 당신이 구원을 받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원래 “나그네”이고 여태껏 이 세상의 시민이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시민이 되기를 쟁취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 사탄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보다 백배는 높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무엇을 추구합니까? 여전히 육체의 그런 것들을 추구합니까? 그 무슨 혼인, 가정, 시민, 신분이 의의가 있습니까? 그것은 수치를 당하는 기호입니다. 사람은 다 시야가 좁습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시민권을 얻어 보세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 재난이 임해서 세상의 나라가 없어졌을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어느 나라의 시민입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얼굴이 붉어지겠죠! 당신이 “저는 오래전부터 어느 나라의 시민도 아니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까?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아는 데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알려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면 무슨 문제든 다 해결되고 그 어떤 어려움이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믿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배우자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거든요!” 당신이 참으로 진리를 깨달았다면 배우자를 소개해 줘도 싫다고 할 것인데 사탄이 “내가 제일 좋은 사람을 찾아줄게, 어때?”라고 말하면 “당신이나 가져요. 저는 필요 없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신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시민이 필요합니까? 무슨 시민이 필요합니까? 마땅히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상의 나라가 차츰 다 무너지는데 그 시민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세상의 나라와 함께 멸망되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면 무슨 문제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이 말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지만 진리를 추구해서 죽음의 속박을 받지 않고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데,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진리를 추구하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합니까? 주로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이 좀 해결할 수도 있지만 죽느냐 사느냐는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적어지지 않고 질병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까? 해방받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을 믿을 만하겠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몇 마디 말을 믿지 못해서 관념이 생깁니다. “진리가 있으면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말하지 못하겠죠?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진리는 전능이 아닙니까? 진리가 있는 것이 돈 있는 것보다 더 좋은데 진리가 있으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얻든 말든 상관없는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없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없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진리가 없으면 살아도 고통스럽고 살아도 고생입니다! 진리를 얻는 것은 제일 큰 위안인데 얼마나 많은 돈을 들이든 이 위안을 살 수 없고 진리를 얻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위안을 사지 못하고 행복을 사지 못하며 심령의 누림을 사지 못하고 심령의 공허함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만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를 얻으면 사람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믿을 만한 것입니다. 그럼 혼인의 고통, 가정의 고통이 진정한 고통입니까? 만약 당신이 그것을 진정한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좋습니다!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떠나서 당신이 하나님을 잃었을 때 이 고통이 큰지 아니면 그 고통이 큰지 보세요. 비교해 보면 알 것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육체의 모든 복을 누려도 여전히 공허하고 흑암할 것인데 그때면 하나님을 얻은 대가가 얼마나 높고 하나님을 얻은 복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진리를 얻기 위해 모든 고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고통”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가족을 버리는 고통, 가정에서 벗어나는 고통, 배우자를 구하지 않는 고통 그리고 육체가 빈궁한 고통인데 이런 고통은 다 잠시적인 것이고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참으로 진리를 얻는다면 이만한 고통은 몇 년을 받든 다 괜찮습니다. 억지로 몇 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몇십 년을 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고통은 고통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고통이라고 할 것도 없겠습니까? 인간 세상에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그들은 별로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럼 수녀들에게 고통스러운지 물어보세요.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고 아주 행복합니다. 우리는 집과 직업이 있는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이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까? 그만한 고통을 받고는 매일 원망하고 큰 대가를 치른 듯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축복해 주셔야 하는 듯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를 빚진 듯한데 이런 사람은 너무나도 이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빚졌습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빚졌습니까? 하나님께서 강요하지도 않으셨는데 자신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벌써 죽었습니다. 살아 있어도 만족하지 않고 또 배우자를 만나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하는데 그 역겨운 정욕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해서 뭐가 잘못되겠습니까? 당신을 정신병에 걸리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높여주심이고 이것은 우리 패괴된 인류의 최대의 복입니다! 패괴된 인류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겠습니까? 자격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려야 합니다. 사람은 이런 이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지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이해가 없고 순복이 없고 죽음으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존엄이 없고 인격이 없고 훌륭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제일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여전히 이것, 저것의 구속을 받습니까? 배우자를 구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역사에 잘 순복하고 성령의 깨우침에 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 말씀을 경력할수록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더 많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종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통해, 수리ㆍ대처(역주: 교훈ㆍ질책)를 통해, 깨우침과 빛비춤을 통해, 시련과 연단을 통해 우리와 대화하시는데 매일 일로써 우리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말씀하시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교제하고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각종 인ㆍ사ㆍ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경고를 주시고, 각종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말씀하시고 각종 시련과 연단에 의해 사실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참으로 영이 있는 산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가 아닙니까?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으로, 영으로 완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하나님이 일을 하심에 대해 몇 방면의 느낌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진리를 실행할 때 우리 안은 평안하고 행복하고 특히 위안이 되는데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종의 느낌과 귀띔이 아닙니까? 당신에게 이런 느낌이 있을 때 무엇을 뜻합니까? “제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이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위로를 얻고 뿌듯하고 기쁘고 자유롭습니다! 아! 하나님의 뜻을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만족한다. 그래서 내가 너의 영 안에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실행하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응답하셨습니다. 당신은 느꼈습니까? 당신은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고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까? 이러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좀 생기지 않았습니까? 한번은 당신이 하나님을 거역했는데, 마음이 강퍅해서 기어코 육체를 만족시켰다면 마음이 흑암해지고 가라앉고 괴로워지고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생겨 평안이 조금도 없고 또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까? 이런 느낌은 당신에게 어떤 뜻을 나타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역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노를 발하시고 우리를 멀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느낌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띔해 주셔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셨는데 우리는 인식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서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을 아는 효과입니다. 당신은 이런 일을 많이 경력했습니까? 많이 경력했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마음속에 완전히 분명할 것입니다. 한두 번은 소홀히 할 수 있지만 여덟 번, 열 번을 해도 확신할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거역을 증오하십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때, 육체를 생각하고 자신을 만족시킬 때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고 멀리하십니다. 그때면 우리 영 안의 느낌은 바로 흑암하고 가라앉고 고통스럽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조금의 행복과 누림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무엇을 알려 줍니까? “네가 하나님을 거역하면 나는 너를 싫어할 것이고 너에게 얼굴을 가리고 너를 멀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이 뜻입니다.

만약 어느 날 당신이 하나님께 빚졌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너무나도 좋다고 느낄 때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맹세하게 되는데 그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해방이고 여태껏 있어 본 적 없는 행복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느낌을 주셔서 무엇을 알려 주십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깨우쳐 주십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좋아하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에게 이런 행복과 누림과 자유로움을 주시는 것은 바로 당신으로 하여금 이로 인해 믿음을 확고히 해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까? 이 일에서 우리는 또 하나님의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그토록 행복하고 그토록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이런 느낌을 주어 해방받고 자유롭고 신심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면 하나님께서 늘 아주 많은 응답을 주시는데 어느 한 가지 응답이든 한 번 혹은 몇 번이 아니고 열 번, 스무 번도 아니라 다 여러 번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완전히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후 도달하게 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증오하시고 혐오하시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데 우리가 충분한 고통을 받고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너무 상심해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더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제일 행복하고 제일 위로를 얻는지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얻으시는 시작이기에 하나님은 가장 만족스러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진실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일생 동안 하나님을 위해 화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 인도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우리를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여기시는데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크게 해방받고 자유로울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도 가장 위로를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으로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얻어져 우리의 마음이 더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을 때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되는데 그때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늘 행복하고 해방받고 자유롭고 가장 누림이 있고 매일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것 같을 것이며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느 정도까지 교제하면 최종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인을 얻으시는데 그때면 우리는 더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며 더는 하나님을 연구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조금의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찬미만 있고 순복만 있고 충심만 있고 매일 진실로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는데 이러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최종까지 교제하고 나면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타나심이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평생 동안 경력해서 최종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도를 최종까지 참으로 지킨다면, 즉 하나님을 아는 효과에 도달한다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볼 자격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최종의 결과는 이러한데,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볼 수 있겠습니까?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자격이 있는데 종교인들은 이런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직도 주님이 흰 구름을 타고 오셔서 데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가엾지 않습니까?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누리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특별히 안배하신 환경에서 그분과 교제하고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각종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과 각종 환경을 통해 우리와 대화하고 계시고 우리를 깨우쳐 주며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비록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밝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매일 우리를 보고 계시고 매일 우리를 인도하시며 매일 우리의 환경 속에서 각종 인ㆍ사ㆍ물을 통해 우리를 이끄시고, 온전케 하시고, 시련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온전케 되어 하나님을 마주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난 후에는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걸어야 할 길입니다. 아시겠죠? 그럼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경력하는 것이 복이 있지 않습니까? (있습니다!) 그럼 지금 당신은 자신이 버린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받은 고통에 대해 후회합니까? (후회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무엇을 유감스러워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받은 고통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우린 우매하고 믿음이 너무 적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이기적이고 비열함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느 날엔가 이것을 후회할 때면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그것은 유감으로 인한 고통이고 후회로 인한 고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효력자의 시련을 경력할 때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아주 많은 고통을 받았는데 마지막에 효력자가 되어 죽어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았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아. 그래도 효력자가 될 거야! 종교인들은 효력자조차 되지 못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성육신도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봤잖아!’ 여기까지 생각하면 만족을 좀 느끼게 되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효력자가 되고 국도에서도 몫이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버리지 않았을 텐데!” 소수 사람들은 후회했고 어떤 사람은 떠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떠났을 때, 일부 사람들이 의심할 때, 소수의 사람들이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제는 효력자가 아니다. 무릇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다 자민이다.” 자민으로 바뀌었을 때 효력자들은 자민에 대한 이 복을 보더니 후회하고 유감스러워했습니다! 무엇을 후회했겠습니까? ‘그때 내가 왜 충성하지 않았을까? 왜 원망의 말을 했을까? 왜 의심했을까? 왜 떠나려 했을까?’ 바로 이것을 후회하고 이것을 유감스러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떠난 후 자민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는 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무엇 때문에 돌아왔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자민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내가 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자민들은 무엇이라고 말했겠습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요!” 그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할 말이 없고 무릎을 꿇고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뿐이고 후회뿐이고 뉘우침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고통이 사람을 오랫동안 연단시키는데 자민의 이 복을 보면서도 손을 뻗지 못하고 받지 못하며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효력자의 시련이 끝난 후 사람은 무엇을 유감이라고 하고 무엇을 뉘우침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 고통이 정말로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실패입니다! 만약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효력자의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신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마주하겠습니까? 이 복을 받을 체면이 있겠습니까? 그때면 무엇을 후회하겠습니까? 이것은 제가 말할 필요가 없겠죠?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을 위해 치른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을 위한 충심이 너무 적고 하나님을 위해 버린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복이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양심이 없고 이지가 없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이런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고통을 좀 받을 수 있는 것이 복이 아닙니까? 당신은 은혜를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고통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당신이 받는 고통이 클수록 당신은 자신의 복이 크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 일을 터득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얼마나 큰 고통을 받든지 다 축복이고 복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매한 사람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당신이 지금 받는 모든 고통은 다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받을 수 있는 고통이 너무 적은데 고통을 좀 많이 받아야 좋습니다. 고통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건강하기 때문에 본분을 하는 것이 아주 힘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내가 온몸에 질병뿐이었는데도 힘을 많이 썼다면 간증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 고통은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부부는 가정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우리가 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간증이 없네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한 많은 일들에서 지금은 후회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여기겠지만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일에서 틀림없이 후회할 것임을 마땅히 꿰뚫어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득, 경력, 느낌과 실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앎과 인식에 도달하는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최종에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지 못했다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아 당신을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르지 못하게 했습니까? 이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야 하고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편의 말씀을 발표하신 그 중요한 때에 집에 가서 아이를 낳는다고 3년 동안 하나님을 알게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열두 편의 말씀을 발표하실 때 저는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면서 가정 생활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을 알게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편의 말씀을 발표하실 때 저는 지위와 명리만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알게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런 것이 평생의 유감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나중에 이 시기에 낳은 아이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이 아이 때문에 하나님을 알 기회를 놓쳤어!” 하지만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고 아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바로 그때 제가 세상으로 돌아가 생활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또 집도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 집을 보기만 하면 “이것은 저의 치욕의 기호이고 죄악의 기호입니다. 이 집을 산 것은 저의 거역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집을 보기만 하면 저는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이고 육체의 누림을 탐한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납니다.” 아주 많은 일들이 사람의 평생의 유감으로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몇 년이 진리를 추구하는 결정적인 시기었는데 제가 이런 배우자를 만나서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을 탓해서 뭐합니까? 당신은 심지가 없어 연애하고 싶어 했고 연애하는 느낌이 아주 좋다고 여기면서 매일 그 연애를 즐기다가 결국에는 진리를 얻지 못했는데 누구를 탓합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연애하고 싶습니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고 싶지 않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유혹하면 또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맹세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맹세를 다 한 후에 또 마음이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때면 다시 하나님께 “제가 그때 어리고 무지해서 말한 대로 하지 못하겠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이러면 됩니까? 이러면 곤란합니다. 이 죄악의 기록은 하나님을 한 번 기만한 것이기에 설령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당신은 평생 유감스러울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을 한 번 속인 적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말한 대로 하지 않은 기록이 있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저를 정죄하지 않으셨을지라도 저는 평생 유감스러울 것이고 생각만 해도 후회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일을 하고 싶습니까? 평생 유감스러울 일을 하지 마세요! 그럼 평생 유감스러워할 일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매우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참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일생 동안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일생 동안 배우자를 구하지 않고 일생 동안 직업을 구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보기에 이 일에서는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진리를 추구해서 생명 성품이 변화되는 데에 이르고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면서 비록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마지막에는 심령이 위로를 얻고 만족을 얻는데 이 일이 후회할 것이 있겠습니까? 진리를 얻는 일은 영원히 후회되지 않는 일이고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는 것은 영원히 후회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회가 있어 사람으로 환생했는데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감스러운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의 모양에 반드시 지위가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고 잘 먹어야 하고 잘 입어야 하는 이런 요소가 있습니까? 명예, 지위, 재산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한 사람의 모양은 사람의 빈부를 문제 삼지 않고 생김새의 추함과 수려함을 문제 삼지 않으며 또한 키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고 더욱이 나이의 많고 적음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진리의 형상을 살아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상, 하나님께 순복하는 형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형상을 살아내고 완전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모양입니다. 그럼 만약 욥과 베드로와 같은 이런 진정한 사람의 모양을 살아낸다면 후회할 것이 있겠습니까?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심지가 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무엇이 천재일우입니까? 창세부터 이 시대를 끝마칠 때까지 지금 이 한 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이전에도 있었던 적이 없고 이후에도 없으며 말세에서도 단지 이 20~30년의 시간뿐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데 요만큼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시간을 귀중하다고 여깁니까? 너무나도 귀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란 때, 하나님이 큰 붉은 용을 훼멸시킬 때면 사역이 끝난다.” 지금 형세를 보세요. 그때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큰 붉은 용의 나라가 곧 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징조에서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채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너무나도 빠릅니다! 그러므로 이 몇 년 동안 당신이 만약 대가를 치러 진리를 추구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유감스러울 것입니다!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를 따랐지만 제가 마지막 단계에서 3~5년, 5~6년 동안 추구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우매합니까! 스스로 죽도록 뺨을 때려도 한이 풀리지 않아요!” 유감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것이고 이 몇 년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끝난다. 끝난다.”라고 계속 말하는데 시간이 길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 몇 년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음이 극에 이른 것입니다. 이 몇 년 동안 당신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무슨 간증이 있겠습니까? 대가를 좀 치르지 않고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까! 이 몇 년간의 고통도 견디지 못하는데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육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든 다 받으면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고통도 받지 않는데 당신에게 인격이 있습니까? 존엄이 있습니까? 짐승과 무슨 다른 점이 있습니까!

“사람은 이런 교제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이해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되며,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점차적인 앎과 인식이 있게 되며,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실제적인 확신과 정확한 정의(定義)가 있게 되고,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실질적인 확정과 인식이 있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이런 교제 중에서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효과입니다. 이 효과에는 몇 방면이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이해가 있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진정한 앎과 인식이 있게 된다.” 넷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점차적인 앎과 인식이 있게 된다.” 다섯째,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실제적인 확신과 정확한 정의가 있게 된다.” 여섯째,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실질적인 확정과 인식이 있게 된다.” 이 여섯 방면의 인식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여섯 방면의 표준이고 여섯 방면의 효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서 이 여섯 방면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이 여섯 방면의 인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중에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이 여섯 방면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알아야 하고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면서 늘 흐리멍덩하고 진리에 힘을 쓰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방면에 힘과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이 여섯 방면의 효과에 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는 주로 이 여섯 방면의 효과인데 이 여섯 방면의 효과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여섯 방면에 모두 인식이 있고 실질적인 확정과 인식이 있으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표준에 이른 것입니다. 최소한 사람의 몸에서 이런 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교제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더는 근거 없이 상상하지 않고 더는 자기 뜻대로 시기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정죄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논단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며……” 예전에 사람들이 자주 범하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런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된 것입니까? 바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생긴 것에 의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당신이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아는 효과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이런 문제들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마치 종교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오셔서 말세 역사를 하실 때 뛰어나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드러난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논쟁이 점점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저촉이 점점 적어지며 사람의 패역이 점점 적어진다.” 지금 스스로 가늠해 보면 하나님과의 논쟁이 점점 적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적어졌습니까? 아직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직도 있으면 안 됩니다. 다만 변화가 조금 있을 뿐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논쟁이 적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저촉이 적어지고 거역도 적어집니다. 이 3가지 효과에 도달하면 상대적으로 좀 안전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제일 큰 고통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해도 고통스러운 느낌이 없는데 그것은 그에게 인성이 없고 그가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온갖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 선민들에게 저버림당하고 교회에서 제명되니 고통스러워합니다. “이젠 끝났어. 구원받을 희망이 없어졌어.”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후 교회에서 제명되어서야 하나님을 믿는 것에 전환기가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면 좋을 것이 없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좋은 결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제서야 인식해서 쓸모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우리,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짐으로 인해 패역이 적어지고 하나님과의 논쟁이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저촉이 적어진다면 마음이 많이 편해지고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해방받고 자유로우며 ‘하나님을 믿고 드디어 성과가 생겼어. 난 이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을 수도 있어! 이젠 구원받는 것과 멀지 않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거야.’라고 느낍니다. 고통이 적어지고 기쁨이 생기고 위로되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의 체포와 혹형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간증을 굳게 서니 마음이 더욱더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는 경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시련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경외도 있어서 웬만하면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을 대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을 받는 것과 매우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구원받는 것은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고 너무나도 실제적입니다. 저는 이제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마음 깊은 곳의 제일 큰 위안이 아닙니까? 이 위안은 작지 않습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하면서 늘 대충대충 하고 하나님을 위해 좀 버리고 봉헌하고 화비하고 고통을 받으면 자격이 생겼다고 여기고 또한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고 육체가 금전, 물질, 이익을 많이 누리지 못하면 후회하고 유감스러워하는데 이런 사람이 정말로 안전합니까? 아직도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죠? 어떤 부분에서 위험합니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고 본분을 하면서 충심이 없으며 언제 줄행랑칠지 모르고 언제 내팽개치고 그만둘지 모르고 언제 하나님을 논단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배반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정신상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언제 비정상이고 언제 기뻐하고 언제 흥분하고 언제 넘어지고 언제 실패할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성품이 불안정한 사람은 다 인성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다 정신상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왕래할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을 인솔자 일꾼으로 발탁하고 양성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어야 하고 방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중용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봅시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아림과 순복이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가 점점 실제적이 되고 또한 점점 깊어진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효과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몇 년간 경력하면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순복이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점점 진실해지고 실제적이 되며 깊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헤아림과 순복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무슨 현상입니까? 이런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규례를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일은 저와 무관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이 일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규례를 지키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에 더 이상 규례를 지켜선 안 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규례의 속박을 받아야 합니까?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어떤 형제자매들은 교회에서 황당무계한 논리를 퍼뜨리는 사람을 보면 말합니다. “이 일은 저와 무관합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순복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규례를 지킵니까? 규례를 지키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고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한 어른이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아이가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나와는 무관해. 내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지나간다면 무슨 잘못을 범한 것입니까? 인성이 없고 도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도 이유는 있습니다. “그 일은 저와 무관합니다.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이 말은 경우에 어긋납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 일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지만 최소한 당신에게 도의와 인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피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인솔자는 사람을 배양하지도 않고 누가 진리를 추구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방해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을 철저히 해결하지도, 제한하지도 않는데 인솔자 일꾼을 하면서 도대체 무엇에 신경 쓰고 있습니까? “저는 그들과 집회하면서 제가 말하고 설교하는 것에만 신경 쓰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인솔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전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가 본분하는 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규례를 지키면서 저의 이 본분을 하겠습니다. 다른 건 저와 무관합니다. 손을 너무 길게 뻗으면 안 됩니다. 너무 길게 뻗으면 하나님께서 잘라버릴까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진실한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는 진심으로 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고 너무 비열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른다면 인솔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일꾼이 되기에도 적합하지 않으며 효력자가 되는 것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무엇을 효력자라고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바로 조금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고 일을 하면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사역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때에는 헤아리지 않고 그의 본분이 도달해야 하는 많은 효과들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효력자라고 합니다. 효력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진심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는데 그의 마음이 너무 교활하고 간사하고 이기적이어서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가 점점 실제적이 되고 또한 점점 깊어진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면 도달할 수 있는 효과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다년간 믿어도 줄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급해 하시는 것을 급해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셋째, 일부 사역이 효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부축하고 어떻게 배양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저와는 무관합니다.”라고 하면서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사람들이 도태되어야 하고 드러나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고 “저와는 무관합니다. 저는 집회하고 설교하고 교통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저와 무관합니다. 다른 일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 책임을 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마치 계모가 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밥을 해 줬으니 먹고 싶으면 먹어. 네가 병에 걸린 것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네가 넘어진 건 네가 잘못 보고 막 뛰어다녔기 때문이지 나와는 무관해. 난 너에게 넘어지라고 한 적 없어. 네가 찬밥을 먹어서 배탈이 난 거지, 나와는 무관해. 누가 너보고 밥이 따뜻할 때 먹지 말라고 그랬어? 난 신경 안 써.” 이런 계모가 자식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까? 진실한 보살핌이 있습니까? 그래서 계모는 효력하는 사람이고 효력이 도달하는 효과는 그런대로 아이를 먹여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를 굶겨 죽이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은 것이고 아이를 때려 죽이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력자의 뜻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효력자라고 하는지 알겠죠? 효력자는 진실로 본분을 합니까? 본분을 하면서 도달해야 할 효과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효력하는 것입니다. 효력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경외가 있겠습니까? 진실한 헤아림이 있겠습니까? 진실한 순복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효력자입니다. 효력자 다수는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고 한사코 규례만 지키고 이치를 따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지 않고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저와는 무관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효력자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습니까? 책임을 추궁할 방법이 없고 도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인솔자가 되지 못하고 일꾼이 되지 못하면 난 당신이 필요 없으니까 도태시킬 거예요.” 그와 도리를 따져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그렇게 많은 말을 해도 쓸모가 없습니다. 사실 그는 다 알고 있지만 마음이 너무 간사하고 교활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닿으려 하지 않고 교활한 일을 하고 잔꾀를 부린 탓에 결국 자신을 지체하고 망쳐버린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규례를 지키기만 하는데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집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집에 비가 줄줄 새는데도 그는 대야로 물을 받지 않고 그 구멍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는 저와 무관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저에게 이 사역을 맡기지 않았고 컴퓨터만 보라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역은 저와 무관해서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사람이 좋습니까? 이러면 문젯거리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한다면 영원히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심리상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는 사람은 이 일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는 “이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제가 사역만 하다보니 소홀히 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뺨을 때리며 뉘우칩니다. “이것은 제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비록 주인께서 이렇게 얘기해 주시지 않았지만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으며 반응이 정상입니다. 주인이 “이번에 실수했지만 괜찮습니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다음에 주의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일을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그는 “얘기해 줄 필요가 있습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척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소홀히 한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보세요, 그에게는 이런 인식이 있습니다. 이 한 마디가 그에게 마음이 있고 그가 규례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만약 당신 집에서 하인을 고용해서 하인에게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어린애 잘 돌보고 출근하는 사람 잘 돌보는 것만 책임지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녀가 “네, 그럼 저는 이 몇 가지만 신경 쓰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결국 어느 날엔가 도둑이 들어오니 그녀는 ‘도둑이 왔어! 그런데 주인이 도둑을 신경 쓰라고 하지 않았어. 청소하고 아이와 어른만 돌보라고 했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도둑이 “간섭하려고 그러지? 간섭하면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니 그녀는 “저는 하인일 뿐입니다. 주인이 저에게 도둑을 신경 쓰라고 하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훔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둑은 물건을 다 훔쳐 갔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물건들 다 어디 갔어요? 왜 도둑이 든 것 같죠?”라고 말하니 하인은 “도둑이 와서 다 훔쳐 갔습니다. 제가 그에게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훔치라고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이 하인이 어떻습니까? 주인은 이 하인을 고용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하인은 또 말합니다. “저에게 도둑을 신경 쓰라고 하지 않았는데 제가 왜 신경 쓰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도둑을 신경 쓸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하인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까? 겉으로 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함에 있어서 그 하인처럼 규례를 지키면서 일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일지 아십니까? 그 하인과 같습니다. 주인이 그녀에게 말합니다. “그래요, 당신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달 월급을 줄 테니 가세요. 내가 당신을 영원히 쓰겠다고 하지 않았으니 나에겐 당신을 내쫓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하인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심리상태가 틀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하고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렸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무엇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역함에 있어서 규례만 지키고 일이 좀 많으면 하기 싫어합니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높습니까?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유한한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양심적으로 자신의 본분을 잘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한사코 규례만 지킵니까? 한사코 규례를 지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합니까?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너무나 양심이 없고 일을 처리할 줄 모르고 하나님과 교제할 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깨닫는 진리가 점점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따라서 패괴가 점점 적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점점 많아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사람은 이런 교제 중에서 진리의 공급을 얻고 생명의 세례를 얻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얻게 된다. 이런 교제 중에서 사람은 성품의 변화를 얻고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외와 경배도 얻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해서 최종에 도달하게 되는 효과이고 또한 사람에 대한 성령 역사의 가장 큰 온전케 함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면 최종에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경외와 경배가 생길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경외와 경배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고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말해 보세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가장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봤을 때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비교적 긴 지, 지금 얼마나 큰 변화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가늠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몇 년 동안 인솔자 본분을 맡아 하면서 아무런 효과도 없고 여전히 글귀 도리만 말하고 실제가 얼마 없고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역을 얼마 하지 못하는데 한 사람 몫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떤 인솔자 일꾼은 3명이 해도 한 사람이 사역하는 것만큼도 못하고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데 쓸모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한 해 한 해 믿어도 큰 발전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뚜렷한 발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인성에는 늘 간사함, 교활함, 이기주의, 비열함이 있고 그에게는 늘 사탄의 철학이 있고 늘 옹졸함이 있고 잔꾀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혐오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까? 이런 사람을 배양해야 합니까? 그를 인솔자로 선거해야 합니까? 절대 선거해서는 안 됩니다! 선거하면 당신이 교회와 하나님 선민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데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품이 나쁘고 진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제로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몇 년을 믿고 어떻게 본분을 하고 어떻게 버리든지 그가 한 것은 영원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데에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아니고 단지 효력하는 사람일 뿐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효력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거래해서 복을 얻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속셈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최종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막연함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는 무조건 1점도 안 되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이런 사람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인에 속하고 결국에는 훼멸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성스러운 효력자의 조건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충성스러운 효력자는 하나님을 위해 효력하면서 충심이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인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인성이 없고 성품이 나쁘면 최종에 충성스러운 효력자로 생존할 수 없고 무조건 훼멸될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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