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의 교통 설교

목차

131집 (b)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131-B-4】

교계를 봅시다. 유대교의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맹목적으로 논단했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논단했을까요? 왜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많은 진리를 발표하셨고 그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예수님을 정죄하고 대적했을까요? 그들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하나님을 믿은 1세대 사람들인 거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2세대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고, 마지막 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믿습니다. 그들은 1세대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그들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예수님을 논단한 게 아닌가요? 가장 주요하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주님께서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발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참람한 말을 하는도다!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다니, 우린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서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치대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말씀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치대로 말하면 바리새인과 제사장, 서기관들은 다 무엇입니까? 다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빨리 예수님 앞에 엎드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 순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하고 독선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첫째면 자신은 둘째 가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의 권병에 순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순복되지 않은 거죠! 순복이 안 되면 광적으로 정죄하고 대적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그들은 어떤 것 때문에 죽게 됐습니까? 완고하게 광적으로 예수님 즉 도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 것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바로 저주받은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결말은 뭘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대적하면 죽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적하면 죽는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국도시대에 주신 이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저주받고 징벌받는 건 정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계 안에도 보면, 경건한 사람도 많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많고, 결혼하지 않고 주님 위해 화비하고 봉헌하는 처녀 총각들도 얼마나 많은데, 설마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다 죽겠냐고 합니다. 그게 맞는 말인가요? 그들이 죽으면 왜 안 되는 겁니까? 그런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겁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권병보다 더 큰가요?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까?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교의 대제사장도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해서 여지없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죽은 겁니다”. 대제사장의 지위가 높지 않습니까? 수도원의 수녀보다 훨씬 더 높죠? 교계의 목사, 전도사보다 훨씬 더 높죠? 온 유대교에 한 명밖에 없는 대제사장입니다. 높지 않나요?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대적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알아야 될까요? 소질이 좀 뛰어나고 총명한 사람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봐야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든 다 피조물에 속합니다. 어느 종교의 교주든, 목사나 전도사든, 제사장이나 선지자든, 천사까지 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께 저주받고, 결국 훼멸됩니다! 천사는 높지 않나요?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해도 하나님은 가차없이 하늘에서 땅으로 쳐버리십니다. 사탄의 악령무리가 바로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이게 사실이 아닌가요? 일개 피조물이 다 뭡니까?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죽지 않는답니까? 전에 하나님을 사랑했었고 경건했었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공을 세웠으면 하나님을 대적해도 죽지 않는다는 겁니까? 이런 이론이 성립되나요? 성립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셔요, 정말 경건한 사람들이에요! 평생 경건하게 살면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 어떻게 정하시죠? 알고 계신가요? 우리,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지금은 내가 각 사람의 결말을 확정할 때이지, 사람을 만드는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다. 나는 각 사람의 말과 행위 그리고 각 사람의 따르는 노정과 원래의 속성 또는 그 최종의 표현을 하나하나 나의 기록 책에 적어 놓는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든 모두 나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모두 나의 배정에 따라 각기 부류대로 될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받은 고난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사람의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모두 징벌받게 된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징벌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징벌받고, 그들 스스로 갖은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인해 보응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 무엇에 근거하십니까? 제가 이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에 근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귀숙을 정하시는 건, 즉 조물주께서 각 사람에게 귀숙을 정해 주시는 건 아주 엄숙하고 진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책임 있게 일하시는 분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장 공의롭게, 가장 거룩하게, 가장 책임 있게 일을 하신다고 할까요? 첫째, “나이가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자에게는 좋은 귀숙을 주고, 나이가 어린 자에게는 좋은 귀숙을 주지 않는다”, 이런 것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두 번째,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관록의 많고 적음’은 뭘 말합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오래 됐고, 일도 많이 했고, 지위도 있고 덕망도 높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지하는 사람이고, 인간관계도 좋다.”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근거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받은 고난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고생’이란 건, 그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서 박해를 많이 받은 걸 얘기합니다. 핍박과 환난을 비교적 많이 받았거나 옥살이를 한 시간이 비교적 오래 되었거나 또는 복음을 전하러 다닌 곳이 많거나 이방인들의 비난과 논단과 핍박을 많이 받았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 이런 것에 근거하지도 않으십니다. 네 번째,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가련한 정도’라고 하는 건 바로 진리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은 길고, 심혈도 많이 기울였고 심성도 괜찮습니다. 누가 봐도 불쌍한 생각이 들고,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 이런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한 마디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귀숙과 결말을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해 정하십니다.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으십니다. 아셨나요? 그럼 어떤 사람은 “왜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만 근거하고,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으시냐? 고난받은 거나, 관록이나 나이나 그런 것에는 왜 근거하지 않냐?”라고 물어 보겠죠!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다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실질, 사람의 본성 실질, 인성이 있고 없고의 실질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판단할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잘 생기고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면 인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 말이 맞나요? 또 누군가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나이도 많고 고난도 많이 받아서 인성이 좋아요.”, 이 말이 맞나요? 또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인간 관계도 잘 맺고, 명성도 좋아서 인성이 좋아요.”, 맞나요?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는 어떻게 확정해야 합니까? 바로 진리를 사랑하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고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좋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드러내는 시금석이고 분수령입니다. 진리에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역에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됩니다. 본분에서도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아셨죠?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무엇으로 판단합니까? 우리는 대다수의 좋은 사람들이 너무도 온순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음도 참 착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 주고, 거지나 소외 계층을 불쌍하게 생각해 줍니다. 심지어 애완동물까지 불쌍하게 생각해서 유기견이나 길고양이까지 다 입양합니다. 누가 닭이나 오리를 잡는다면 돈을 주고 사서 살려 주고, 물고기를 잡는 것을 봐도 산 것은 사다가 다시 방생해 줍니다. 이만하면 정말 착한 거죠? 근데, 진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정말로 착한 게 아닙니다. 정말로 착한 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건 바로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생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착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보면 평소에 수다 떨 때는 늘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온화하고 친절하다가도 일단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진리를 교제하면, 곧바로 눈이 커지면서 광적으로 정죄하고 대항합니다. 진리만 언급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듭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입니까? 마귀가 아닙니까? 전형적인 마귀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분별할 줄 모릅니다. 계속 겉모습으로만 판단을 합니다. 그러면 쉽게 속겠죠? 사탄 마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 제일 착해 보이는 말, 배려해 주는 말들을 다 할 줄 압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뭘 할 때 되면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의 겉모습이나 겉으로 말하는 것으로는 사람의 실질을 꿰뚫어 볼 수 없고,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계에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 성경의 진리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봅시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평생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화비했습니다. 근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시니까 눈에 쌍심지를 켜고 거부하고 정죄하고 대적합니다. 어떤 사람들이죠? 바로 마귀가 원형을 드러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닌데요! 그분들은 예전에 주님을 위해 많은 걸 포기했어요, 그러면서도 보수도 바라지 않았다고요. 그게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닌가요?”, 이 말이 맞나요? 틀렸습니다. 왜 틀렸죠? 그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화비한 것은 목적이 있고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득이 없으면 일찍 일어나는 법이 없죠! 그들도 바울처럼 천국에 가고, 상을 받고 면류관을 받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인가요?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면 자신만의 속셈과 목적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죠? 그 속셈과 목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받고 상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후로는 날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됐을 거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딤후 4:7~8) 바울은 사역의 끝자락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바울이 고난받고 화비했던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하는 동안 예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증거한 적이 없고,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한 적이 없고, 예수님의 소유소시와 성품을 증거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본다면 바울은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했었나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늘 증거했겠죠. 바울은 자신을 증거하기 좋아했고,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사랑했었다면 이렇게 말을 했을 겁니다. “제가 그동안 누굴 위해 고난받았는지 아시나요? 예수님을 위해 받은 겁니다. 전 예수께서 절 너무 사랑하신다는 걸 봤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주저하고 예수님의 부탁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을 볼 낯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칭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저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뵐 면목이 없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영접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했어야죠! 근데, 바울이 쓴 많은 편지에 이런 말이 한 마디라도 있나요? 바울이 수많은 편지를 썼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말은 한 마디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사역하고 화비한 사실과 우리가 본 결과에 따라 교계에서 주님을 위해 화비하고 사역하는 사람들, 바울을 숭상하는 모든 사람들, 바울처럼 추구하면서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늠해 봅시다. 그 사람들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주님을 위해 수고하며 사역한 것과 그들이 말하는 경건함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화비한다 한들, 수고하며 사역을 한다 한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실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숙을 결정할 때 뭘 근거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뭘 근거로 그들의 결말을 정하실까요? 여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귀숙을 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관록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받은 고난의 많고 적음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 사람의 가련한 정도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 궁극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대로 실행하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통행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를 위해 화비하고 고난받는 사람, 하나님을 흡족케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하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든 하나님과 거래하지 않는 사람, 행하는 모든 것은 뭘 얻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케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사람, 그러면서 “우리는 예전에 다 패괴된 인류에 속하고 많은 죄를 지으며 하나님께 득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는 진리를 깨닫게 됐으니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살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고난받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진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사람이 진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하거나 이기적이고 비열한 목적을 위하거나 더욱이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진정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난받고 화비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화비하고, 이렇게 고난 받고, 이렇게 사역하고, 이렇게 지불하는 대가는 진리가 있는 간증이고, 진리가 있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