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진입의 교통 설교

목차

129집 (a)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에 대한 설교 교통

【129-A-6】

진리를 찾고 구하면 도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효과와 유익을 가져다줄까요?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 중요하죠!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고 구하는 건 쉬워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진심으로 찾고 구한다면 정말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근데, 진리를 알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힘들어요. 찾고 구한 후에 실행하지 못하는데, 그럴 거면 진리를 찾고 구해서 뭘 할까요? 찾고 구할 필요가 있나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 원인이 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찾고 구한 뒤에도 저는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겠어요. 진리를 실행하기가 무서워요. 하나님을 믿는 건 괜찮아요.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도, 힘을 내는 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저에게 진리를 실행하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진리를 실행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진리를 실행하라는 말만 들으면 막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그저 일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것만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동원하여 효력하게 한다고 하신다 했더니, 별별 효력자가 다 왔습니다.

우리, 이 일을 가지고 말해 봅시다. 여러분은 예전에 열성적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화비하고 효력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조금이라도 진리에 흥미가 생겼나요? 그 방면에서 진보가 조금 있으신가요? 처음 믿었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죠? 그게 바로 진보입니다. 처음 믿었을 때는 일하기만 좋아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열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정말 진리도 알아야겠더라고요. 안 그러면 그릇된 길로 나아가 쉽게 악을 행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도 진리를 아는 게 좋아요. 하나님 집에서 교통하는 게 맞아요.” 이제 인식이 좀 생긴 거죠. 이건 뭘 설명할까요? 어린아이가 컸습니다. 철이 좀 든 겁니다. 그렇죠? 여러분의 실제 분량은 인생으로 따지면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15~16살 정도? 아니면 17~18살? 아니면 20대인가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마 네다섯살 정도일 거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뇨, 전 15살 정도일 거에요. 웬만한 일들은 다 알아요. 어쨌든 진리와 진리의 실행,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에 흥미가 좀 있긴 한데, 그렇게 크지는 않아요. 뭘 좀 하라고 하면 육체적으로 고난받는 건 괜찮아요. 할 수 있고 물러서지도 않죠.”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몇 살 정도 될 것 같습니까? 17~18살 아니면 20대일까요? 어느 연령대인 것 같습니까? (15~16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발전했죠? 고난을 받겠다는 심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진리를 추구하면서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까지 한다면 정말 커서 어른이 된 겁니다. 분량이 자라지 않을까 봐 걱정할 건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향상하다 보면 성장도 빠를 것입니다.

지금 보시면 하나님 집의 설교 교통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진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합니다. 흥미가 없다면 듣기 싫어할 겁니다. 듣다가, 졸다가, 자다가, 또 듣다가 잡담이나 하게 됩니다. 몇 번 듣고 나선 안 듣겠다고 합니다. 누군가 다시 설교 교통을 듣자고 부르면 “아, 일이 있어요. 당신들끼리 가세요.” 합니다.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금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 저건 실제적이야, 저건 나도 좀 경력해 봤어, 저건 나도 좀 체험해 봤어.” 그런 사람은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는 말도 실제적이 되었고, 들으려고 합니다. 이건 뭐라고 할까요? 그런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몇 년 정도 믿어야 설교 교통을 듣기 좋아하게 될까요? 제가 하는 설교 교통은 유머스럽지도 않고 문학적인 색깔도 없습니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근데 왜 다들 듣기 좋아하는 걸까요? 바로 진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실제적이고 진실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교통을 귀담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 교통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또한 완전히 깨달을 수 있고, 알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어려움이 많을까요? 그렇게 많진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의 말씀에 대해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보기만 하면 “알겠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어.”라고 말한다면 알게 됐다는 겁니다. 그런 게 진보한 게 아닙니까? 설교 교통을 듣기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까지, 그 과정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경로가 아닌가요? 언젠가 교회 생활이 없을 때에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생명 경력에서 어느 단계에 속하는 걸까요? 바로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더 이상 젖먹이 아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성장한 것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까? 상면의 설교 교통 듣는 걸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그냥 귀담아 듣고, 예배를 즐기고, 듣기 원하는 거잖아요? 그걸로 뭘 설명할 수 있겠어요?”라고 하겠지만 틀렸습니다. 그것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 상면의 설교 교통을 듣지 않아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어요.” 합니다. 적그리스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정말 깨달았을까요? 정말 도달했을까요?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의 실제가 전혀 없습니다. 정말 진리의 실제가 있었다면 하나님 집에서 그 사람을 출교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상면에서 출교시키기로 결정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선민들이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은 “그 사람에게는 정말 진리의 실제가 있어요. 진심으로 회개했어요. 우린 출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손들지 않겠습니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진리가 주권을 잡고, 하나님 말씀이 주권을 잡고, 그리스도가 주권을 잡습니다. 더욱이 성령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실천 경력 속에서 어떤 공과를 배우셨나요?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첫 걸음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확실히 많은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했습니다. 또한 진리는 모든 일에서 정말 찾게 되고 구하게 됩니다. 매번 선택과 관련된 순간에 진리를 찾을 수 있고 구할 수 있습니다. 매번 곤혹스럽거나 어둠 속에 살고 있을 때,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무소부재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은 성립되는 것이고,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하는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진리가 확실히 존재하는 만큼, 우리는 진리를 찾은 다음, 또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리를 실행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의 이론과 진리의 말씀이 존재한다는 것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않고 실행의 길을 찾지 않는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까요?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진리가 있다는 것만 인정하고 “우린 진리에 어긋나서는 절대 안 돼요.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그럴까요? 정말 그렇게 간단할까요? 어떤 일은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일은 자신의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붉은 용의 권세하에서 그들에게 붙잡혔다고 합시다. 거기서 ‘내가 배반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돼.’라고 한다면 성립될까요? 큰 붉은 용이 이가 부러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때린다면,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진리를 실행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대가를 치르는 원인도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리와 돈을 위해, 어떤 사람은 허영심과 체면을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자녀를 위해, 그리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위해, 어떤 사람은 우상이나 보배를 위해 대가를 치릅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단지 진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이나 어떤 상을 받기 위한 게 아니라,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적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일을 하나 돌이켜 봅시다. 율법시대에 아브라함은 그러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항상 남에게서 득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다른 사람들도 와서 자리를 잡고 그곳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고 “여기를 빼았겠다? 좋습니다! 양보할게요! 우리가 가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과 똑같이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우리 주인님은 정말 나약해서 맨날 당하기만 하시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많은 재산을 강도에게 약탈당해 아브라함을 찾아 갔습니다. “되찾을 수 있도록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네, 제가 돕겠습니다.” 가서 되찾아 왔습니다. 그 사람은 “찾을 수 있게 도와주셨으니, 당신에게 보상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싫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풍족하게 해줬어’라고 말할까 봐, 당신의 물건은 신발 끈 하나, 땡전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두 가지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인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아들이고, 제가 평생을 살면서 이제 겨우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시면 바쳐야지. 아들을 안 바치면 어떻게 되고, 바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이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어. 아무튼 하나님께서 내게 바치라고 하셨으니 그럼 바쳐야지! 이득을 바라지 말자!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다시 달라고 하시는 것도 당연한 거야! 바쳐야지!” 하나님은 그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쳤습니다. 결국, 바쳤지만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나이다. 그걸 바라고 바친 것도 아니나이다. 근데 하나님께서 절 축복해 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을 바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그런 일들을 했을까요? 뭘 위해서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인성과 양심, 그리고 이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저 기준이자 원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브라함의 기반을 빼앗으려고 할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것이라고 말하는데, 너무 억지스럽지만 난 당신과 싸우지 않겠네! 양보할게. 내가 다른 곳으로 갈게.”,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내가 돕겠소. 하지만 상은 주지 마시오. ‘아브라함을 풍족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소. 나도 기개가 있소. 내가 먹고 쓸 것은 내 손으로 벌 거니까! 당신의 베풂 같은 건 필요 없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상은 바라지 않소.”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까닭은 뭘까요? 속셈이나 뒤섞임이 있었나요? 그건 아브라함이 일을 행하는 데의 최저 기준이었고, 사람으로서의 원칙이었습니다. 일을 행하는 데에 최저 기준이 있었다는 건 아브라함에게는 원칙이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원칙을 뭐라고 여겼을까요? 바로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그렇게 처신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 겁니다. 그렇게 처신하는 게 참된 길이고, 바로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생을 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