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하나님의 권병 (2)

4.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하여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하다

한 사람의 탄생은 하나의 고독한 영혼이 인간 세상에 와서 인생을 체험하는 시작이고 또한 조물주가 하나의 영혼에게 조물주의 권병을 체험하도록 안배하는 시작이다. 물론 이것은 한 사람이나 한 영혼에게 있어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다 조물주가 그를 위해 안배해놓은 운명의 법칙 속에서 생존한다.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든 일생의 몇십 년 세월 속에서 조물주의 주재를 시인하는 데에 달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는 데에 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각 사람을 놓고 말하자면 몇십 년의 인생 경험에서 사람의 운명은 다 명정이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 달하고 사람의 삶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체득하거나 총결해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사람은 이런 인생 체험을 인정하는 동시에 점차적으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게 되고 사람의 심령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며 어떤 것이라야 사람을 진정한 인생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또 만약 한 사람이 조물주를 경배할 수 없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수 없다면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즉 한 영혼이 다시 조물주와 마주할 때 그의 심령이 꼭 끝없이 두렵고 불안할 것임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인간 세상에서 몇십 년 동안 생존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운명이 누구의 손에 장악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면 사람이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몇십 년 동안의 인생을 겪고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인식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올바른 터득이 있는 사람이고,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해 깊은 인식이 있는 사람이며, 또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진정한 체득과 경력이 있는 사람이고, 더욱이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물주가 사람을 만든 의의를 깨달았고, 사람이 마땅히 조물주를 경배해야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이 조물주에게서 왔으니 또 반드시 머지않은 어느 날 조물주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또 사람의 삶이 조물주의 안배이고 사람의 죽음이 조물주의 주재이며 살든 죽든 다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명정되어 있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런 것을 진정 깨달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자연히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할 것이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태연하게 내려놓고 머지않아 도래할 모든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순복하면서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안배해놓은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맞이할 것이며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고 무턱대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고 하나의 피조된 인류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얻기 어려운 한번의 기회로 삼는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정확한 인생관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축복과 인도 아래에서 살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빛 속에서 거닐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를 간증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한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병을 간증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할 필요없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조물주가 사랑하고 열납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고 인생의 마지막 한 고비를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아주 뚜렷한바, 욥은 죽음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를 구비하고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러한 조건도 구비했기에 순조롭게 그의 인생길을 다 걸었고 그의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고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갔다.

5. 욥의 일생 동안의 추구와 수확은 그로 하여금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하였다

성경에 욥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욥 42: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말하자면, 욥이 죽을 때 그 어떤 유감도 없었고 그 어떤 고통도 없었으며 자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욥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받았고 사람들에게도 기념되었다. 그의 일생은 인류 중에서 가장 가치있고 가장 의의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있고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받았으며, 그는 하나님의 시련도 받아들인 적이 있고 사탄에게 시험당하여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섰기에 하나님 입에서 ‘의인’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인 후의 몇십 년 기간에 그는 이전보다 더 가치있게, 더 의의있게, 더 착실하게, 더 태연하게 살아갔다. 왜냐하면 그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시련을 바꿔왔고 그의 의로운 행위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나타남과 직접적인 말씀을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을 받아들인 후의 몇십 년 기간에 욥은 인생의 가치에 대해 더 실제적으로 느끼고 체득하게 되었으며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서도 더 깊은 체득이 있게 되었고 조물주의 축복과 거두어감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확정된 인식이 있게 되었다. 욥에 관한 성경의 기록 중에 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그에 대한 이전의 축복을 뛰어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런 것은 다 욥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함에 있어서의 더욱 유리한 조건이자 역시 욥이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함에 있어서의 더욱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욥을 놓고 말하자면 그가 나이가 차서 곧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절대로 그의 재산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 어떤 걱정도 없었으며 그 어떤 유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일생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결국을 염려할 리도 없었다. 욥이 죽음에 직면할 때의 이 일련의 표현은 현재의 사람 중 몇이나 달할 수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간단한 하나의 겉면의 태도에도 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원인은 오직 하나이다. 즉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이런 주관적 추구 하에서 살아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전제 하에서 그의 인생의 몇 개의 중요한 고비를 겪고 그의 인생 중의 만년을 보내면서 그의 인생 중의 마지막 고비를 맞이한 것이다. 욥이 이 일생 동안 무엇을 경력했든지 간에 그의 추구와 그의 인생 목표는 그에게 있어서 행복한 것이었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복은 결코 조물주의 축복이나 칭찬으로 말미암은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추구와 그의 인생 목표로 말미암은 것이고 역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그의 점차적인 인식과 진실한 체득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더욱이 그가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는 동시에 직접 체험한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와 이 기간에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서로 알아가고 서로 이해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긴 매 한차례의 따뜻한 체험과 기억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조물주의 마음을 깨달아 얻게 된 위로와 즐거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람이 조물주의 위대함, 기묘함, 사랑스러움과 신실함을 보고 난 후의 경외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욥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죽음이 그가 곧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일생 동안의 추구와 수확이 그로 하여금 태연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할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태연하게 그의 생명에 대한 조물주의 거두어감에도 직면하게 할 수 있었고 더욱이 그로 하여금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성결하게 조물주를 대면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욥이 소유한 행복을 현재의 사람은 얻을 수 있는가? 너희는 소유할 조건이 있는가, 없는가? 조건이 다 구비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욥처럼 행복 속에서 살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현재의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어떤 사람은 죽음에 직면할 때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들부들 떨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혼절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소리내어 통곡할 것인데, 이런 표현은 절대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야 사람에게 있게 되는 돌발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이런 난감한 표현을 유로할 수 있는 까닭은 주로 죽음에 대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 때문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대해 분명한 인식과 체득이 없고 더욱이 진실한 순복도 없기 때문이며 사람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장악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고 자신의 생사를 장악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람이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6.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분명한 인식과 경력이 없다면 운명과 죽음에 대한 사람의 인식도 필연적으로 흐리멍덩하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없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관과 하나님의 주재임을 인식할 수 없으며 사람이 이러한 주재를 뿌리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죽음 앞에서 늘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는 유언이 있고 늘 걱정이 있으며 늘 유감이 남아있다. 사람의 마음에 너무나 많은 부담이 담겨있고 너무나 많은 내키지 않는 것들이 담겨있고 너무나 많은 풀리지 않는 것들이 담겨있기에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을 초래한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의 삶은 필수적인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필연적인 것인데, 아무도 이런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다. 사람이 그 어떤 고통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그 어떤 아쉬움과 걱정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 직면하려 한다면 유일한 경로는 바로 그 어떤 유감도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 세상을 떠날 때 그 어떤 유감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바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 순복하고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래야 사람이 인류의 분쟁을 멀리하고 죄악을 멀리하고 사탄의 매임에서 떠나 욥처럼 조물주의 인도 아래에서,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고 자유 해방을 받으면서 살고 가치있고 의의있게 살고 떳떳하게 살 수 있으며, 욥처럼 조물주의 시련과 박탈에 순복할 수 있고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으며, 욥처럼 일생 동안 조물주를 경배하여 조물주의 칭찬을 받게 되고 조물주의 친히 발한 음성을 듣게 되고 조물주의 나타남도 보게 되며, 욥처럼 즐겁게 살고 즐겁게 세상을 떠나고 그 어떤 고통도 없고 그 어떤 걱정도 없고 그 어떤 유감도 없게 되며, 욥처럼 빛 속에서 살고 빛 속에서 인생의 각 고비를 넘기고 빛 속에서 순조롭게 그의 평생의 길을 다 걷고 순조롭게 그의 사명을 완수하고━하나의 피조물로서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고 체험하고 인식하고 나서 빛 속에서 떠나 이로부터 조물주가 칭찬하는 피조된 인류로서 조물주의 곁을 지키게 된다.

조물주의 주재를 알아가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상의 이 여섯 고비는 조물주가 정상적인 각 사람에게 설정한, 일생에서 경력하게 될 몇 가지 중요한 절차이다. 그중의 매 하나의 고비는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현실적인 것이고 모두 사람이 초월할 수 없는 것인데, 다 조물주의 명정과 조물주의 주재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매 하나의 고비는 사람에게 있어서 모두 하나의 중요한 난관이다. 어떻게 해야 이 하나하나의 고비를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는지는 너희들이 현재에 직면한 아주 준엄한 문제이다.

인생의 이 몇십 년이 길다고 하면 그리 긴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하면 또 짧은 것도 아니고 눈 깜짝할 사이이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비록 연령상에서는 성년이라고 하지만 이 연령대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운명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제로와 같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이 부단히 늘어남에 따라 사람도 점차 중년에 접어들게 된다. 비록 3~40세의 사람이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 초보적인 체험이 있지만 이 연령대 사람들의 인생과 운명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아주 모호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4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만든 인류와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만물에 대해 요해하기 시작하고, 인생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된 일인지를 요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따른 지 오래되고 이미 중년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정의가 있을 수 없고 더욱이 진실한 순복도 있을 수 없다. 또 일부분 사람은 복을 받기를 추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갖지 않고, 비록 많은 나이를 먹었지만 조물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추호의 요해와 인식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이런 실제 공과에 대해 추호의 진입도 없는데, 어리석기가 그지없고 한평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생에 대한 사람의 체험과 운명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근거해 사람의 각 시기를 나눈다면 대략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사람의 유년기인데, 즉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또는 태어나서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이다. 두 번째 시기는 사람의 성장기인데, 즉 사람이 중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또는 30세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이다. 세 번째 시기는 사람의 성숙기인데, 즉 사람이 노년에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또는 60세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운명과 인생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그저 남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는 언사에만 머물러있을 뿐 그 어떤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이 단계에서 세워진 사람의 인생관과 사람의 여러 가지 처세 방식은 모두 아주 천박하고 아주 유치한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유년기이다. 사람은 인생의 여러 가지 풍상고초를 체험한 후에야 운명에 대해 진실한 체득이 있게 되며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서 사람의 운명이 역전할 수 없음을 점차 알게 되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임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성장기이다. 사람이 더는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더는 각종 분쟁에 말려들기 싫어하고 타고난 운명을 알고 하늘의 뜻에 따르며 자기 일생의 공로와 죄과를 귀납하고 총괄하면서 자기의 일생에 대해 조물주가 판정해주기를 기다릴 때,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성숙기이다. 사람의 이 3개 단계의 서로 다른 체험과 사람의 서로 다른 수확에서 보면, 정상적인 상황하에서 각 사람이 일생에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수 있는 이런 기회는 결코 많은 것은 아니다.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60세라면 그는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는 시간이 30년쯤밖에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 더 오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려고 한다면 그의 수명이 충분히 길어야 하고 그가 백세까지 장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법칙에 따라 보면 한 사람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다”라는 이런 화제를 접하기 시작해서부터 조물주가 주재한다는 이런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까지 또 사람이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할 수 있기까지, 이것은 비록 기나긴 과정을 겪어야 하지만 손꼽아 세어보면 사람은 단지 3~40년 세월밖에 안 되는 기회만으로 이런 성과를 얻을 뿐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복을 받으려는 욕망과 야심에 머리가 혼미해져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는 중요성도 꿰뚫어보지 못한다. 이리하여 인간 세상에 와서 인생을 체험하고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는 이 소중한 기회를 아낄 수 없고 하나의 피조물이 조물주의 직접적인 인솔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진귀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즉시 하나님의 본체의 나타남을 볼 수 있고 한시바삐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역이 최대한 빨리 끝나고 하나님이 최대한 빨리 사람의 결국을 안배하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은 대역무도한 사람들이고 극도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유한한 시간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잘 잡아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이고 대단히 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서로 다른 소망이 2가지 판이한 관점과 추구를 폭로해냈다. ‘복을 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하여 여태껏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 적이 없고 여태껏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기를 추구한 적이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살려고 하고 스스로 타락하는 사람이며 멸망의 종류이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권병에 순복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데, 이런 사람은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니 꼭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어떠하든지 사람의 선택이 필요없고 하나님 사역의 길고 짧음도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지 않으면 네가 또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께 손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지 않고 자기 주장대로 하려 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최종에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뿐이다. 오직 사람이 되도록 빨리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사람은 희망이 있게 되고 사람의 이 일생을 헛되이 살지 않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