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하나님의 권병 (2)

여섯 번째 고비, 사람의 죽음

분주하고 순탄치 않게 얼마나 많은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기복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잊지 못할 날들을 지냈는지, 얼마나 많은 춘하추동을 보냈는지, 부지중에 사람은 인생 중 몇 개의 중요한 고비를 지나 어느덧 노년에 이르렀고 세월의 흔적은 낙인처럼 온몸에 가득 남았다. 즉 사람의 몸매는 더는 늘씬하지 않고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되고 또렷하게 빛나던 두 눈은 이미 어두침침해지고 주름과 기미가 가득한 피부는 예전의 보들보들하고 매끌매끌한 피부를 대체하고 청력이 떨어지고 이가 흔들리다 빠지고 반응이 무디고 동작이 느리다…… 이때의 사람은 타오르는 청춘 시절과 철저히 작별을 고하고 한 사람의 일생 중의 황혼기 즉 한 사람의 노년에 접어들게 된다. 잇따라 사람이 곧 직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죽음인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하나의 고비이다.

1. 조물주만이 인류의 생사 대권을 장악한다

만약 한 사람의 출생이 그의 전생의 인연의 시작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전생의 인연의 끝이다. 만약 한 사람의 출생이 그 사람 평생의 사명의 시작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평생의 사명의 끝이다. 조물주가 각 사람을 위해 고정된 출생 배경을 설치해놓은 이상, 필연코 각 사람을 위해 고정된 죽음의 배경도 안배해놓았다. 다시 말해서, 각 사람의 출생은 다 우연한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죽음도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의 생사는 다 전생 금생과 필연적인 연계가 있다. 한 사람의 출생의 배경이 어떠한지, 죽음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다 조물주의 명정과 관련된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숙명 즉 한 사람의 운명이다. 한 사람의 출생에 여러 가지 논법이 있으니 한 사람의 죽음에도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특별한 배경이 있다. 이리하여 인류 중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수명이 생기게 되었고 여러 가지 죽음의 방식과 시간도 생기게 되었다. 즉 어떤 사람은 몸이 건장하고 힘이 넘치지만 젊어서 일찍 죽고 어떤 사람은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지만 오래 살고 천수를 다하고 집에서 죽으며, 어떤 사람은 비명에 세상을 뜨고 어떤 사람은 자연히 세상을 하직하며, 어떤 사람은 객사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 옆에서 두 눈을 감으며, 어떤 사람은 공중에서 죽고 어떤 사람은 지하에서 죽으며, 어떤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어떤 사람은 재난에서 죽으며, 어떤 사람은 아침에 죽고 어떤 사람은 밤에 죽는다…… 사람은 다 그럴듯하게 태어나 멋지게 살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을 바라지만 그 숙명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조물주의 주재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의 방식과 시간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설령 사람이 다 죽음의 도래를 애써 회피하고 거부할지라도 죽음은 오히려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조용히 사람에게 다가오는데, 아무도 자신이 어느 때에 죽는지를 모르고 아무도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도 모르며 더욱이 아무도 자신이 어디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주 뚜렷한바, 인류의 생사 대권을 장악하는 것은 결코 인류 자신이 아니고 자연계의 어떤 종류의 생령도 아니라 유일무이한 권병을 지닌 조물주이며, 인류의 생사는 결코 자연계의 어떤 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조물주 권병의 주재 하의 결과이다.

2.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필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 사람이 노년에 접어들 때 그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더는 가족을 먹여 살리거나 인생의 원대한 이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일생과 작별할 것인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의 종결을 맞이할 것인지, 어떻게 생명의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다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은 죽음에 대한 탐색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의 뒤에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하나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사람이 결코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죽음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감히 죽음에 올바로 직면하지 못하게 하고 죽음에 관한 화제를 논하는 것을 극력 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각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하였고 동시에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죽음의 이 사실에 신비한 베일을 한층 씌워놓았고 각 사람의 심령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도 가져다주었다.

사람이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짐을 느끼고 자신이 죽음과 점점 더 가까워짐을 의식할 때 사람은 마음속에 한가지 은은한 공포가 생기고 한가지 야릇한 두려움이 생긴다.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고독하고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때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로 가야 되는가?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빨리 끝난단 말인가?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단 말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의의가 도대체 뭘까? 살아가는 가치가 도대체 뭘까? 설마 명리를 위해서일까? 설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일까? ……’ 사람이 이런 구체적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든지 없든지,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의 정도가 얼마나 깊든지, 어쨌든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 늘 비밀을 탐구하려는 한가지 욕망이 있고 인생에 대한 한가지 몰이해가 있으며 동시에 인간 세상에 대한 사람의 아쉬움과 그리움도 뒤섞여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탐구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아쉬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마 참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사람은 너무나 많은 걱정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사람은 안심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이것을 걱정하고 저것을 걱정하며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의 가족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그런 걱정이 있으면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고통을 면할 수 있는 듯하고, 마치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과 어떤 친밀한 관계만 유지하면 죽음을 겪을 때의 고독과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한가지 두려움이 어렴풋이 있는데, 자기의 가족을 떠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더는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고 더는 이 물질세계를 보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가족이 있는 것에 습관된 고독한 영혼은 이렇게 외로이 죽어서 자신이 전혀 익숙치 않은 하나의 미지의 세계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

3. 일생 동안 명리를 추구하다가 죽음에 직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하나의 고독한 영혼이 조물주의 주재와 명정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가정이 있게 되었고, 인류 중의 일원이 되는 이런 기회가 있게 되었으며, 인생을 체험할 기회가 있게 되었고,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할 기회가 있게 되었으며, 조물주의 주재를 체득하고 조물주의 만물 창조의 기묘함을 인식할 기회도 있게 되었고, 더욱이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귀복할 기회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칫하면 사라질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진실로 붙잡지 않았다. 사람은 필생의 정력을 들여 모두 운명과 맞서 싸우고 일생 동안 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에 바삐 보내고 명예와 직위 사이를 오가고 있다. 사람이 보애(寶愛)하는 것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이며 사람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를 일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사람들이 다 운명이 기구하다고 원망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고 탐구해야 할 이런 문제 즉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를 뒷전에 두고 일생이 몇 년이든 사람의 청춘이 다하기까지, 귀밑머리 백발이 되기까지, 얼굴이 노화되기까지, 명리가 사람이 노쇠해지는 걸음을 막지 못하고 돈이 사람의 심령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기까지, 누구나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누구나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오로지 명리를 추구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닌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생 중의 마지막 고비에 직면할 때에야 사람이 설사 거액의 재산이 있고 고귀한 신분과 대단한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다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다 필연적으로 그의 원래 위치로━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영혼으로 돌아갈 것임을 진정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부모가 있게 될 때 사람은 부모가 곧 그의 전부라고 여기며, 사람에게 재산이 있게 될 때 사람은 돈이 곧 사람의 받침대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의 본전이라고 여기며, 사람이 지위를 소유하게 될 때 사람은 지위를 단단히 붙잡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고 한다. 사람이 곧 죽게 될 때에야 사람은 평생을 쏟아부어 추구했던 것들이 본래 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고 어느 하나도 가져갈 수 없고 어느 하나도 사람에게 죽음을 면케 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하나도 하나의 고독한 영혼의 귀로 중의 위로나 동반자가 될 수 없고 더욱이 어느 하나도 사람을 죽음에서 초탈하도록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물질세계에서 얻은 명예나 이익은 사람에게 잠시적인 만족감을 주고 사람에게 일시적인 기쁨과 위로를 주고 사람에게 심령이 편안하다는 가상을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방향을 잃게 하였다. 그러므로 망망한 인해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안식을 얻고 위로를 얻고 심령의 평온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게 되었다. 사람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살아가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등등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이런 문제도 아직 모르고 있을 때 사람은 명리에 유혹되고 미혹되고 통제되어 한번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화살 같고 세월이 베틀의 북과 같아 어느덧 사람은 이렇게 일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사람이 곧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람과 갈수록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점차 의식하게 되고 사람은 더는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그 어떤 한가지도 잡을 힘이 없다. 이때에야 사람은 본래 자신이 마치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난 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을 진정 느끼게 된다. 이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삶의 의의가 무엇인지, 사람이 왜 이 세상에 와야 하는지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또한 바로 이때 사람은 정말로 내세가 있는지, 정말로 하느님이 있는지, 정말로 보응이 있는지를 더욱더 알고 싶어한다…… 사람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인생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더욱 알고 싶어하고, 사람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심령의 공허함을 더욱 느끼며,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의지가지없음을 느낀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은 날로 커져간다. 죽음이 임할 때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생길 수 있는 그 원인을 따져보면 2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 사람은 머지않아 사람이 인간 세상에서 의지하며 생존해왔던 명예나 이익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게 될 것이다. 둘째, 사람은 머지않아 홀로 다른 하나의 낯선 세계를 마주할 것인데, 마주하는 것은 사람을 뒷걸음치게 하는 신비막측(神秘莫測)한 하나의 미지의 세계이며, 이 낯선 세계에서 사람은 그 어떤 가족과 의탁도 없다. 이 두 방면의 원인이 죽음을 마주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편치 않게 하고 죽음에 임한 각 사람으로 하여금 전에 없던 당황함을 느끼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한 사람이 진정 이 단계까지 걸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누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지, 또 누가 인류를 생존하도록 공급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재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의 본전이자 역시 한 사람이 생존함에 있어서 반드시 구비해야 할 토대이지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리고 어떻게 명리를 추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같은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출중해지고 어떻게 더 부유하게 사는지를 배우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어떻게 다양한 각축(角逐)에서 여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이 평생을 소비해 장악한 갖가지 생존 기능은 비록 사람으로 하여금 풍족한 물질적 누림을 가질 수 있게 하지만 사람의 심령에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방향을 잃게 하고 자신을 다스리기 어렵게 하여 인생의 의의를 깨달을 기회를 한번 또 한번 놓치게 하고 또한 사람에게 어떻게 정확히 죽음에 직면하는지에 대해 남모르는 근심을 가져다주는데, 사람의 일생은 이렇게 망쳐진다. 조물주가 각 사람을 대하는 것은 다 공평한 것이다. 그는 각 사람에게 일생 동안의 기회를 주어 그의 주재를 체험하게 하고 그의 주재를 인식하게 하지만 사람은 단지 죽음에 직면할 때에라야, 죽음이 코앞에 닥칠 때에라야 문득 깨닫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너무 늦다!

사람은 한평생 다 돈과 명리를 추구하며 이 양자를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받침대로 삼는데, 마치 돈과 명리를 가지면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올 때에야 사람은 돈과 명리가 사람에게 그렇게 요원하고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연약하고 힘없고 이처럼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며,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고독하고 의지가지없고 이처럼 무력하며, 원래 사람의 생명은 돈과 명리로 바꿔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든지 얼마나 높은 지위가 있든지 죽음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로 빈궁하고 미소하며,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없고 명리가 사람의 죽음을 면케 할 수 없으며, 돈이든 아니면 명리든 다 사람의 수명을 일분일초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갈망하고,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무서워한다. 이때에야 사람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되고 또한 한 사람이 살든 죽든 다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