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하나님의 권병 (2)

다섯 번째 고비, 사람의 후대

사람은 혼인이 있게 된 후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후대가 있고 어떤 후대가 있을지, 이것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다 사람의 운명에 근거하고 조물주의 명정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다섯 번째 고비이다.

만약 한 사람의 출생이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의 역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것은 곧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모가 되는 이 역할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 두 역할의 전환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각도로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를 겪게 하고, 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인생 경험도 주어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다른 인생 경험 속에서 조물주의 서로 같은 방식의 주재를 체험하게 하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도 조물주의 명정을 초월할 수 없고 아무도 조물주의 명정을 바꿀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체험하게 한다.

1. 사람의 후대는 결코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지 않다

사람의 출생, 사람의 성장과 사람의 혼인은 다 각기 다른 정도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여의찮음을 가져다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이나 생김새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좋아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장 환경에 대해서도 많은 불만과 트집을 부린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을 놓고 말하면 여러 가지 여의찮음에서 혼인이 가장 사람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출생, 성장과 사람의 혼인에 대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여의찮음이 있든지 겪어본 사람은 다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하고 부모가 누구이고 배우자가 누구인지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천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자신이 전반생에서 이루지 못한 모든 소망을 다 다음 세대의 몸에 두고 다음 세대가 자기 전반생의 모든 여의찮음을 메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후대에 대해 헛된 생각에 빠진다. ‘만약 딸이라면 외모가 꽃처럼 아름답고, 만약 아들이라면 영준하고 멋스럽고, 만약 딸이라면 각종 문예 특기가 다 뛰어나고, 만약 아들이라면 문무에 모두 뛰어나고 재능이 출중하고, 딸이라면 부드럽고 상냥하고 현숙하고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고, 아들이라면 총명하고 유능하고 이해심이 많고, 딸이든 아니면 아들이든 다 어른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자상하게 보살피고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이때 사람은 인생에 대해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사람의 마음속에 또 새로운 욕망의 불길이 타오른다. 사람은 스스로 이 한평생 이렇게 능력이 없고 장래성이 없고 더 이상 두각을 나타낼 기회도 없고 희망도 없어 운명으로 여기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모든 희망과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과 이상(理想)을 다 다음 세대의 몸에 두고 다음 세대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며 자식들이 조상과 가문을 빛내고 혹은 지위가 대단하고 혹은 큰돈을 벌 수 있고 혹은 유명 인사가 되기를 바란다. 어쨌든 벼락출세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계획과 상상은 아주 완벽하지만 사람이 자녀를 얼마 둘지, 자녀의 생김새와 능력 등등은 다 부모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게다가 자녀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더욱더 부모가 장악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다음 세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힘이 없으면서 오히려 자식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조종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주제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사람의 무지몽매함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신의 후대에게 온갖 심혈을 기울이지만 결국은 사람이 후대가 얼마나 되고 사람의 후대가 어떠할지는 다 사람의 계획과 소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 그지없지만 자식을 많이 두고 어떤 사람은 거액의 재산을 갖고 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딸 하나만 원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기 어렵고 어떤 사람은 아들 하나만 원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후대로 인해 복을 얻고 어떤 사람은 후대로 인해 화를 입으며, 어떤 부부는 총명하고 영리한데 자식은 오히려 멍청하고 우둔하며, 어떤 부모는 부지런하고 소박한데 자식은 오히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며, 어떤 부모는 정직하고 착한데 자식은 오히려 간사하고 악랄하며, 어떤 부모는 심신이 건강한데 오히려 장애 자녀를 낳고, 어떤 부모는 범속하고 진취적이지 못한데 자식은 오히려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어떤 부모는 지위가 천한데 자식은 오히려 두각을 나타낸다……

2. 다음 세대를 부양한 후 사람은 운명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혼인, 이 단계를 겪는 것은 대략 30세 정도인데, 이 시기의 사람은 아직 무엇이 천명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다음 세대를 부양하기 시작하여 다음 세대가 성장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은 신세대의 사람이 지난 세대의 사람의 모든 경력과 인생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보게 하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 세대가 걸어온 길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타산과 선택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게 한다. 이런 사실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각 사람의 운명은 다 명정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사람은 부지중에 점차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게 되고 마음속의 욕망의 불길도 조금씩 꺼진다…… 이 시기의 사람은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몇 개의 중요한 절차를 거의 겪고 인생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태도가 생기게 된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 전망과 미래에 대해 아직도 얼마나 큰 기대가 있겠는가? 50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백마 탄 왕자를 찾기를 꿈꾸는 여자가 있겠는가? 50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기의 백설공주를 찾기를 꿈꾸는 남자가 있겠는가? 50여 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되고 싶어하는 여성이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년 남성들이 사업에서 아직도 젊은 사람만큼 박진력이 있겠는가? 총괄적으로 말해서, 남자든 여자든 이 나이까지 살면 혼인에 대해, 가정에 대해, 자녀에 대해 모두 상대적으로 이성적이고 실제적인 태도가 생기고 자신의 선택이 거의 없고 운명에 도전하는 충동도 거의 없다. 사람의 경력을 놓고 말하면 사람은 일단 이 나이가 되면 자연히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 자손들은 제각기 타고난 복이 있고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하니까.”라는 이런 관점이 생기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정황에서 인간 세상의 온갖 풍파, 인생의 불우, 간난신고를 겪은 후 흔히 한마디 말로 인생에 대한 체득을 총결한다. “이게 바로 명이야!” 비록 이 말이 사람의 일생의 운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총결과 체득을 털어놓고 사람들의 속절없음도 털어놓아 통찰력이 있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는 오히려 차이가 아주 커서 조물주의 권병에 대한 사람의 인식을 추호도 대체할 수 없다.

3. 사람이 운명을 믿는다 해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없다

너희가 하나님을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따른 후 운명에 대한 너희의 인식은 세상 사람들과 어떤 실질적인 구별이 있는가? 조물주의 명정과 조물주의 주재를 참으로 인식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게 바로 명이야”라는 이 한마디 말에 대해 깊이 느끼는 바와 체험을 갖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추호도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안배와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기도 싫어한다. 마치 사람이 바다의 파도 속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다만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기다릴 뿐, 다만 운명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일 뿐 사람의 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더는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사는 데에 달할 수도 없다. 즉 사람이 운명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였다 해서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과는 다르고, 운명을 믿는다 해서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며, 사람이 운명을 믿는 것은 단지 이 사실과 이 겉면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일 뿐 조물주가 어떻게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지를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고 또한 사람이 조물주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는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다르며 더욱이 사람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는 것과도 다르다. 만약 한 사람이 운명만 믿고 심지어 운명에 대해 깊이 느끼는 바만 있을 뿐 그 속에서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인식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순복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의 한평생은 한차례 비극인데 여전히 일생을 헛되이 살면서 공허하고 여전히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수 없고 진정한 의미상의 피조된 인류로 될 수 없고 조물주의 인가를 받을 수 없다.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참으로 인식이 있고 경력이 있는 사람이면 그의 정형은 마땅히 적극적일 것이고 결코 소극적이나 속절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마음속에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서도 사람의 일생은 다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 있다는 하나의 정확한 정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고 자신이 보낸 인생의 매 하나의 단계를 돌아보면 매 걸음마다 걸은 것이 고생스럽든지 아니면 순조롭든지 다 하나님이 인솔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안배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정밀한 계획이자 역시 하나님의 세밀한 안배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중에 오늘까지 걸어와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 한 사람의 평생의 크나큰 복임을 보게 된다! 만약 한 사람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소극적이라면 그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안배한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있고 그에게 순복하는 태도가 없음을 실증한다. 만약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일을 대하는 태도가 적극적이라면 그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주재를 체득할 때 그는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것에 순복하려는 더 진실한 소망이 생기게 되고 더욱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운명을 지배하게 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도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운명이 어찌된 일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를 모를 때 스스로 자기의 성미대로 짙은 안개 속에서 힘들게 일하고 비틀거리고 그 노정을 걷는 것이 매우 고생스럽고 또 매우 슬프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총명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택하여 ‘자기의 두 손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드는’ 고통스러운 날들을 떠나고 계속해서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른바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없는 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진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날은 매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의의가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어디에 있든, 어떤 직책을 겸임하든 사람의 생존 방식과 추구 목표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다 끝없는 슬픔과 석연찮은 고통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다시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한다. 사람은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진정한 인생을 얻기를 추구해야만 점차적으로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4.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해야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를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를 모르기 때문에 운명을 대함에 있어서 사람은 늘 대항하는 정서가 있고 늘 거역하는 태도가 있으며 또한 늘 하나님의 권병에서 벗어나려 하고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려 하고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나려 하며 현재의 상황을 바꾸고 자기의 운명을 바꾸려고 망상한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곳곳마다 난관에 부닥친다. 이런 영혼 깊은 곳에서의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런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고 동시에 또 사람의 생명을 이렇게 헛되이 소모시키고 있다. 사람의 이 고통은 어떻게 초래된 것인가? 하나님의 주재가 가져다준 것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쁘기 때문인가? 아주 뚜렷한바, 이 양자는 다 아니다. 결국 모두 사람이 걸은 길 때문에 초래된 것이고 사람이 택한 생존 방식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아마 일부분 사람들은 아직 이런 것을 체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참으로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네가 하나님이 너를 위해 주재하고 안배한 모든 것이 너에게 있어서 너무나 유익한 점이 있고 너무나 큰 보호임을 참으로 인식하게 될 때 너는 이런 고통이 점차 경감되는 것을 느낄 것이고 너의 전인도 점차 홀가분하고 자유롭고 해방될 것이다. 현재 다수 사람들의 정형을 놓고 말하면, 비록 주관적으로는 이전의 그런 생활을 계속하고 싶지 않고 주관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사람이 조물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실제적 가치와 의의를 참으로 터득할 수 없고 또한 조물주의 주재를 참으로 인정하거나 순복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찾고 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약 조물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참으로 인식할 수 없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참으로 순복할 수 없다면 “사람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이 관점의 부추김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고 또한 사람이 운명과 조물주의 권병에 극력 대항하여 초래된 고통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사람은 또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기 매우 어렵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 매우 어렵다. 사람의 이런 정형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이전의 생존 방식에서 떠나고 이전의 인생 목표에서 떠나며 자신의 이전의 생존 방식, 이전의 인생관, 이전의 추구와 소망과 이상에 대해 총결하고 해부한 후 다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보면서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등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한가지라도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한가지라도 있는지, 사람에게 정확한 인생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한가지라도 있는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진리를 깨달으면서 살고 인성있게, 사람 모양이 있게 살게 하는 것이 한가지라도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네가 인류가 추구하는 갖가지 인생 목표와 형형색색의 생존 방식을 반복적으로 고찰하고 자세히 해부할 때 너는 이 가운데 인류를 창조한 조물주의 본의와 부합되는 것이 한가지도 없고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조물주의 주재와 보살핌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어가는 하나하나의 함정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런 것을 인식했을 때 이어서 네가 해야 할 것은 바로 낡은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가지 함정을 멀리하며 너의 인생을 하나님에게 너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하게 하고 너를 위해 안배하게 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인도에 순복하기만을 구하고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듣기에는 쉽지만 하자면 어렵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고생을 참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런 고생을 참을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은 협력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협력하기 싫어한다. 협력하기 싫어하는 이 사람들은 이 소원이 없고 이런 심지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재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벗어나려고 하고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일부분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시험해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 하고 또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위해 행복을 만들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권병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에서 초탈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의 비애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추구해서가 아니고 명리를 추구해서가 아니고 짙은 안개 속에서 운명과 맞서 싸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이미 조물주의 존재를 보고 조물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여전히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수렁에서 두 발을 빼내지 못하고 잘못을 고집하며 깨닫지 못하고 강퍅한 마음을 품고 있고 계속 수렁에서 발버둥치며 완고하게 조물주의 주재와 겨루고 끝까지 대항하면서 회개의 태도가 조금도 없다가 여지없이 참패를 당할 때에야 포기하기를 택하고 뉘우치기를 택해서이다. 이것이 사람의 진정한 비애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복하는 것을 택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벗어나는 것을 택하는 사람은 오히려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