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니느웨 사람들은 마음속의 진실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자신의 결말을 바꿨다

하나님의 돌이킴과 그의 진노에는 모순이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때의 관용에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원인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 본문에서 말한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 악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 근원이 사악하다는 것이다. ‘악한 길에서 떠났다’는 것은 바로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며, 일을 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이 다 바뀌어 마음속에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을 누림과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중의 ‘떠날 것이라’는 것은 바로 내려놓고 버리고 과거와 철저히 결렬하여 더 이상 지나온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이 현상은 그들이 진실되게 회개했음을 실제로 증명하고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면도 보고 사람의 마음도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의 진실된 회개를 확실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또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을 보았을 때에야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즉, 사람의 행위와 표현, 사람의 각종 행실과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키고 뜻을 바꾸고 결정을 거두고 다시는 그들을 징벌하거나 멸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니느웨 사람의 결말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되찾은 동시에 재차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도 노기를 거두었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결코 얻기 어렵지 않고 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참된 회개이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기가 그때 얼마나 컸든지 간에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이 점차적으로 누그러져 뜻을 돌이키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성을 멸할 것이라고 선포하기 직전에,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직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노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일련의 회개를 한 후,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기는 점차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이 2가지 방면의 성품이 동시에 한 가지 일에서 유로되었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의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는가? 이 2가지 확연히 다른 실질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나고 유로되어 사람은 하나님의 실질이 참되고 사람이 범하는 것을 용납치 않음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태도로써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로 회개하기 어렵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진정으로 떠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참된 회개가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낌없이 계속해서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이다. 즉,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을 대한 이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게 유로되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결코 얻기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진실한 회개를 원하며, 사람이 악한 길과 강포에서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이다.

조물주의 공의로운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에 대해 마음을 돌이켰을 때, 그의 긍휼과 관용이 거짓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면 같은 일에서 하나님의 이 2가지 방면의 성품의 전환은 너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하였는가? 하나님의 성품은 완전한 것이지 분열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가 노하든 아니면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든 모두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표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발전에 근거해 그의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니느웨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의 바뀜은 그가 마음과 생각이 있고, 로봇이나 흙부처도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니느웨 사람에게 노할 수도 있고, 그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니느웨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말미암아 그의 결정을 바꿀 수도 있음을 인류에게 알려 준다. 사람은 규례에 맞추기를 좋아하고, 또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을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또 공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상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실질적인 생각이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물과 환경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도 부단히 전환된다. 전환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실질은 서로 다른 방면을 유로해 낼 것이다. 전환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생명의 확실한 존재이고,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생생한 나타남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진실한 유로로써 인류에게 그의 진노, 그의 긍휼과 자비, 그의 관용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임을 실증하고 있다. 그의 실질은 사물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수 있다. 그에게는 수사자와 같은 진노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은 그 어떤 사람이 의심하거나 범하는 것을 용납치 않고, 그 어떤 사람이 변화시키고 곡해하는 것도 용납치 않는다. 만사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수 있으며, 그는 만물의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발표하고 있고 매 시각마다 생생하게 시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에 따라 기계적으로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언제 어디서나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고 더 이상 진노를 발하지 않고 더 이상 니느웨 성을 멸하지도 않은 것을 네가 보았을 때, 하나님이 바로 긍휼과 자비라고 말할 수 있는가? 너는 하나님의 진노가 한 마디 빈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고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일 때, 너는 하나님께 인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흠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인해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인해 마음을 돌이킨다. 그의 감동, 마음을 돌이킴,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용과 긍휼은 모두 어떠한 흠도 없고 깨끗한 것이며, 순수하고 순결한 것이며,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하나님의 관용은 바로 관용이고, 긍휼은 바로 긍휼이다. 사람의 회개와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인해 그의 성품은 진노를 유로하고 긍휼과 관용도 발표한다. 그가 유로하고 발표한 것이 무엇이든지 다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그 어떤 피조물의 실질과도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발표한 일하는 원칙,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또는 하나님의 그 어떤 결정 및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어떠한 흠이나 오점은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결정하고 이렇게 한 이상 그대로 이루는데, 이런 결과는 모두 정확하여 틀림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원은 흠이 없고 오점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흠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도 역시 피조물이 구비하지 못한 것이며, 거룩하고 흠 없는 것이자 어떻게 고찰하고 알아보고(원문: 推敲) 체험하든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니느웨 성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너희는 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 다른 한 방면의 실질을 보지 않았는가? 또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한 방면을 보지 않았는가? 인류 중에 이런 성품을 구비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하나님의 이런 진노를 구비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하나님의 이런 긍휼과 관용을 구비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피조물 중에 누가 진노를 크게 발하여 인류를 훼멸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긍휼을 베풀면서 인류를 관용하고 사해 주어 인류를 멸하려는 결정을 바꿀 자격이 있겠는가? 조물주는 그만이 갖고 있는 방식과 원칙으로 그의 공의로운 성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그는 어떠한 인ㆍ사ㆍ물의 지배와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만이 갖고 있는 성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를 설득시키고 그의 어떤 결단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다 그의 공의로운 성품의 판결 아래에 있다. 진노를 발할 것인지 아니면 긍휼을 베풀 것인지 아무도 장악할 수 없고, 오직 조물주의 실질, 즉 조물주의 공의로운 성품만이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공의로운 성품의 유일무이함이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의 전후 변화를 해석함을 통해 너희는 ‘유일무이’, 이 단어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중의 긍휼을 묘사할 수 있는가?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 중의 한 방면 실질이라고 말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 이 2가지 방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정의하겠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하고 사람의 범함을 용납치 않는 것이며, 그 어떤 사람의 의심도 용납치 않는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특유의 것으로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고 사람의 범함을 용납치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다른 한 방면, 즉 하나님의 긍휼도 역시 거룩하고 사람의 범함을 용납치 않는 것이다.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도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하나님이 하려는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여 소돔을 멸하거나 니느웨를 구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의 진실한 발표이다.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된 마음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사는 늘 나타나 사람에게 보여지며 하나님은 인류와의 대화를 멈춘 적도 없고 인류를 향해 숨거나 피한 적도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의 언어와 행사는 인류에게 다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여러 가지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아는 데에 이를 수 있다. 인류가 무턱대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인류에게 숨고 사람이 이해하고 아는 것을 싫어한다고 여기는 까닭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더욱이 조물주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만약 사람이 한가한 시간에 짬을 내어 조물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대해 관심을 돌리거나 알아보고, 조물주의 생각과 그의 마음의 소리에 조금만 유의한다면, 조물주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씀과 행사가 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조물주가 항상 인류 가운데 있고 만물 그리고 인류와 늘 대화하며 매일 새로운 행사가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실질과 성품은 그가 인류와 대화하는 동시에 발표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남김없이 나타난다. 그는 늘 인류를 동반하고 살펴보고 있으며, 그의 소리 없는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천우(天宇) 위에 있고 만물 가운데 있으며 나는 지키고 기다리고 있으며 바로 너의 곁에 있다……”,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그의 소리는 감미로우며, 그의 그림자는 돌고 돌아 인류의 곁에서 감돌며,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며, 그는 떠난 적이 없고 사라진 적이 없으며, 줄곧 인류와 늘 함께하면서 사이좋게 지내온 것이다. 인류에 대한 그의 살뜰한 보살핌과 인류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정’ 그리고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실된 염려와 사랑이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타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과 요나의 몇 마디 대화는 친히 만든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연민의 정을 더욱 완전하게 유로해 냈다. 여기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술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한 원 말씀으로 요나와의 한 단락 대화이다. 비록 간결한 대화이지만 그중에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아쉬움과 염려의 정이 가득하다. 이 말에서 나타낸 것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마음속의 진실된 태도와 감정이고, 또한 하나님이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 낸, 인류가 듣기 쉽지 않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된 마음이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하나의 태도를 대표하는데 어떤 태도인가? 바로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전후를 대한 태도이다. 이 태도도 역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이 말씀에서 유로해 낸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 하나님이 ‘아끼다’는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된 태도를 설명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끼다’는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사람마다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 있고, 다음은 매우 사랑한다는 뜻이 있으며, 또한 아까워 차마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뜻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것이 표현하는 것은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내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뜻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인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이 자주 말하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이미 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

비록 니느웨 성의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찼지만, 그들의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고 더 이상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시를 대함에 있어서 소돔 성의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태도가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진실한 복종과 회개 및 각 방면의 진실하고 간절한 표현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아낌을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또 한 번 우러나오게 하여 그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상을 주는 것과 인류에 대한 아낌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은 그 누구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위인의 각도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인류 혹은 피조물에게 이런 서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네가 여기는 위인이나 초인 가운데 하나라도 있는가? 인류 가운데 어느 누가 인류의 생존 상황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한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한 성을 사해 줄 자격이 있겠는가? 누가 자신이 만든 만물을 아낀다는 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조물주밖에 없다! 조물주만이 이 인류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며 조물주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으며, 또한 조물주만이 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줄 수 있고, 조물주만이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일동에 끌렸다. 즉, 그는 인류의 사악과 패괴 때문에 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그는 인류의 회개와 신복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돌이키고 축하하며, 그의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은 모두 인류를 위해 있고 움직이며, 그의 소시소유는 인류를 위해 발표되며, 그의 희로애락은 모두 인류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그의 생명의 세부적인 것을 조용히 지불하며, 그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바친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지를 몰랐지만, 그가 친히 만든 인류를 줄곧 아끼고 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다 이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 없고, 값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은 단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리고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언젠가 인류가 그의 앞으로 귀복하여 그가 바로 인류를 자양해 생존하게 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고백

여호와 하나님의 요나와의 이 대화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고백이다. 한 방면으로는 사람에게 조물주가 자신이 주재하는 만물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알려 주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한 바와 같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즉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대해 대략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안에 살아 있는 것(사람과 가축 포함)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즉, 아이나 미성년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안다는 구체적인 실증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람에게 인류를 대하는 조물주의 태도, 즉 조물주 마음속에서의 인류의 가치를 알려 주는데,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한 바와 같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은 요나를 책망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전부 실제 정황이다.

요나가 비록 부탁을 받고 가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지 못했고, 성안의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근심과 기대도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이 질책은 인류는 하나님이 친히 만든 것이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이고 기대를 두고 있으며, 각 사람마다 하나님 생명의 공급을 누리고 있고, 각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혈과 대가로 바꿔 온 것임을 그에게 알려 주고, 하나님이 그가 친히 만든 인류를 요나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최후 시각이 이르기 전까지 절대로 가볍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그 성에 또 그토록 많은 아이와 무고한 육축들이 있다고 요나에게 알려 주는 데 의의를 두었다. 좌우도 분변치 못하고 어리석은 연령의 피조된 인류에 대해 하나님은 더욱더 그들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더 이상 앞사람의 길을 걷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니느웨의 과거를 간증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하나님의 긍휼 아래서 다시 살아가는 니느웨를 보기를 더더욱 바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니느웨 성에서 아직 좌우도 분변치 못하는 그 피조된 인류가 바로 니느웨의 미래이고, 그들이 니느웨의 언급하기 싫은 과거사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니느웨의 과거와 장래를 간증하는 중임도 맡게 된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 진실한 고백은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긍휼을 완전하게 나타냈다. 그것이 인류에게 나타낸 것은 ‘조물주의 긍휼’이 공허한 어휘나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그리고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는 매우 확실하고 참되며 거짓이나 가식이 없다. 그의 긍휼은 이렇게 끊임없이 각 시기에, 매 시대에 인류에게 베풀고 있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요나와의 대화는 조물주가 그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심을 베풀었는지를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한 단락의 서술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간결한 대화에서 표현한 것은 인류에 대한 그의 완전한 마음이고,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속 태도의 진실한 표현이자 또한 인류에게 긍휼을 널리 베푸는 구체적인 실증이다. 그의 긍휼은 인류의 선조들에게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인류의 후손들에게도 한 세대 또 한 세대 베풀어 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인류의 어느 구석진 곳과 어느 시대에 늘 임했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긍휼로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피조된 인류를 이끌고 인도하며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피조된 인류에게 공급하고 자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심은 영원불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는 줄곧 그가 친히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공의로운 성품 중의 긍휼이다. 이것도 역시 조물주의 틀림없는 유일무이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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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시소유(所是所有):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②귀복(歸服): 돌아와 복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