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

계속해서 다음의 경문을 읽어 보자.

12.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요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1:16~17)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경문에서 기술한 것은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일부 일과 일부 말씀이다. 우선 부활 후의 예수가 이전의 예수와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를 요해해보자. 그는 여전히 그 당시의 예수인가? 경문에 이런 한 마디 말로 부활 후의 예수를 묘사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주 뚜렷한바, 이때의 예수는 이미 더는 육신이 아니라 영체였다. 이는 그가 육신의 제한을 벗어나 문이 닫혀있는 상황에서 사람들 가운데 올 수 있고 또한 사람들에게 다 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 후의 예수와 전에 육신에서 살고 있던 예수와의 가장 큰 다른 점이다. 비록 이때의 영체와 이전의 예수의 형상은 차이가 없지만 이때의 예수는 오히려 사람들이 낯설게 여기는 예수로 되었다. 이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체는 이전의 육신보다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의혹을 느끼게 하였으며 동시에 또 사람에게 예수와 더 큰 거리가 생기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의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더욱 신비하고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의 이런 인식과 느낌은 한순간에 또 사람을 모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 시대로 끌어갔다. 그러므로 부활 후의 예수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바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를 보고 또한 그의 존재를 실증하고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이 사실도 실증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사람과 그와의 관계를 그가 육신 중에서 역사한 기간의 사람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한 방면으로는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일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인류를 구속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부활 후의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한 이 사실이 사람을 은혜시대에 단단히 고착시켰다. 이때부터 사람은 예수의 ‘사라짐’이나 ‘말없이 떠남’으로 인해 지나간 시대 즉, 율법시대로 되돌아갈 리가 없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가 한 사역을 준수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로부터 은혜시대의 사역은 정식으로 국면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는 인류도 이로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나와 하나의 새로운 기원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 후에 사람에게 나타난 여러 방면의 의의이다.

영체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이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는가? 이것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의의에 관련된다. 이 몇 단락 경문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일반적으로 영체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며, 또한 예수가 부활 후에 담당한 사역은 이미 끝났으니 이론상으로 말하면, 그는 다시 사람들 가운데 와서 원래의 형상을 지니고 사람과 만날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예수의 영체는 도마와 같은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 예수가 나타난 의의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사람의 마음에 더욱 깊이 심어지게 했다. 그가 도마에게 왔을 때, 그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의 손을 만져 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알려 주었다. 이런 말씀과 이런 일은 예수가 부활 후에야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예수는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이미 요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현재 여기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부활 후의 예수는 여전히 그 예수였고 그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 도마의 의심은 그때에야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기간에도 줄곧 있었고, 단지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고 또 영계에서 돌아온 예수일 뿐 그가 원래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고유한 성품을 띠고 있고 육신에 있을 때의 사람에 대한 요해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첫 번째로 도마를 찾아와 도마에게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하고 그에게 예수의 부활 후의 영체를 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영체의 존재도 더듬고 느낄 수 있게 하여 그의 의심을 철저히 내려놓게 하였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일에 대해 늘 의심하면서 믿지 못했는데,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단지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직접 제 손으로 만져 본 기초 위에 세워졌을 뿐이다. 예수는 이 부류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잘 요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 위의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보낸 분이나 말씀이 육신 된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에게 예수의 존재와 예수가 확실히 하나님의 도성육신(역주: 성육신)임을 시인하고 믿게 하기 위해 예수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에 도마의 의심에 변화가 있었는가? 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의 영체가 친히 그에게 나타나고 아울러 그에게 직접 손으로 예수 몸의 못 자국을 만지게 하는 것 외에 누구도 그의 의심을 해결해 줄 수 없었고 누구도 그의 의심을 내려놓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에게 자기의 옆구리를 만지게 하였고 또한 못 자국이 있음을 확실히 느끼게 하였는데, 도마의 의심은 그때부터 사라졌다. 그는 예수가 이미 부활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또한 예수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임을 시인하고 믿게 되었다. 비록 이때의 도마는 더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리스도와 만날 기회를 영원히 잃었고, 그리스도와 함께할 기회를 영원히 잃었으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알아갈 기회를 영원히 잃었고, 그리스도께 온전케 될 기회를 영원히 잃었다. 예수의 나타남과 예수의 말씀은 의심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렸고 선고도 내렸다. 그는 그의 실제적인 말씀과 행사로써 의심 많은 사람에게, 하늘 위의 하나님만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고 그들이 의심을 품고 따르는 것을 칭찬하지 않으며, 그들이 완전히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날은 하나님의 큰일이 철저히 이루어지는 그날일 수밖에 없고 물론 그날은 그들의 의심이 선고받는 그날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들의 완고한 의심이 그들의 믿음에 그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강퍅함이 그들의 소망을 허사가 되게 한다.”라고 알려 주었다. 하늘 위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림의 떡으로 굶주림을 달래는 격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태도이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예수 몸의 못 자국을 만졌을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헛된 일이다. 그들의 결국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헛수고”라는 이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도마에게 한 말씀은 각 사람에게도 부활한 예수가 바로 당시에 사람들 가운데서 33년 반 동안 역사한 예수이고 그가 비록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의 골짜기를 거치고 부활을 거쳤지만 그의 각 방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비록 그의 몸에 못 자국이 생겼을지라도, 비록 그가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을지라도 그의 성품과 사람에 대한 그의 요해 및 사람에 대한 그의 뜻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동시에 그는 또 사람에게 그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고, 죄를 이기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을 이겼으며, 그의 못 자국이 바로 그가 사탄을 이긴 증거이고 그가 속죄제로 되어 성공적으로 전 인류를 구속한 증거임을 알려 주었으며, 사람에게 그가 이미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그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였음을 알려 주었다. 그가 돌아와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의 나타남으로써 그들에게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내가 예전 그대로 존재하느니라. 오늘 참으로 너희 앞에 서 있어 너희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느니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알려 주었다. 예수는 또 도마의 일을 통해 이후의 사람들에게 ‘비록 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그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고,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를 볼 것이니라. 이런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고 타일러 주려고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난 이 단락의 말씀은 전체 은혜시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도움을 얻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에 대한 예수의 나타남과 도마에게 한 말씀의 영향은 심원한 것이고, 의의는 영구한 것이다. 도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하는 한 부류의 사람을 대표한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마음이 음험하고 잔인하고 간교하여,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불신하고, 하나님의 도성육신도 불신했지만,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통격을 가했고 또한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심이 많음을 발견하게 하고, 인식하게 하고 자신의 간교함도 시인하게 함으로써 진실로 예수의 존재와 부활을 믿게 했다. 도마의 일은 후세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警戒)를 주었고, 또한 후세 사람에게 하나의 제시를 주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마처럼 의심해서는 안 되고 만약 도마처럼 의심하면 흑암에 빠질 것이라고 자신을 경계하게 하였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늘 도마처럼 주님의 옆구리를 만져 보고 주님의 못 자국을 느낌으로써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고 검증하거나 추측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사람에게 도마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해 믿지 말고 단순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에 대해 의심 없이 믿고 따르기만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는데, 이런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예수의 자그마한 요구와 따르는 사람에 대한 그의 훈계였다.

이상은 모두 의심 많은 사람에 대한 예수의 태도였다. 그럼 예수를 성실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에 대해 그는 또 어떤 말씀을 하였고 어떤 일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계속해서 우리가 보려는 예수와 베드로에 관한 한 단락의 대화이다.

이 단락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거듭 물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부활 후에 베드로와 같은 이 부류의 사람, 즉 진정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의 더 높은 요구 표준이다. 그의 물음은 캐묻는 것이자 질문이며 더욱이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이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묻는 것은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라고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비록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물었지만, 사실상 그의 마음속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묻는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려고 하였다. 단지 베드로가 복이 있어 이 부류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예수가 직접 한 질문을 받았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한 이 말씀에 비하면,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세 번의 질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말씀은 더욱 사람에게 예수의 태도의 엄격함과 질문할 때의 절박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본성이 궤사하고 의심 많은 도마에 대해 예수는 그로 하여금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못 자국을 만지게 함으로써 예수가 부활한 인자임을 믿게 하였고 예수가 그리스도의 신분이라는 이 사실을 시인하게 하였다. 비록 예수가 도마에 대해 엄하게 질책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 명확한 언어의 정론도 없었지만, 예수는 실제 행동으로 그에 대한 예수의 요해를 그에게 알려 주었고, 동시에 이 부류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와 정한 뜻도 밝혔다. 예수가 한 이 단락의 말씀에서는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를 볼 수 없다.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진실한 믿음을 전혀 조금도 구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예수의 요구도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해 예수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유로(역주: 흘러나옴)하였다. 그는 베드로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못 자국을 만져 보라고 요구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도 하지 않고 베드로에게 거듭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의 질문은 사람을 깊이 깨닫게 하고, 의미심장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 자책을 느끼게 하고 황공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예수의 그 애타는 마음과 슬픈 심정도 느끼게 하였다. 고통과 괴로움 뒤에 사람이 더 많이 체험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걱정과 보살핌이고, 터득한 것은 단순하고 성실한 사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과 엄격한 요구였다. 예수의 질문은 사람에게 간단한 언어에서 유로되는, 사람에 대한 주의 기대가 단지 믿고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데에 달하고 너의 주를 사랑하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달해야 하는 것임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의 사랑은 바로 생각해 주는 것이고 순복하는 것이며 능히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화비하고 지불하는 것이며, 여기의 사랑은 또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에게 간증을 누리고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보답이고 사람의 책임과 의무와 본분이자 역시 사람이 일생 동안 준행해야 할 도(道)이다. 이 세 마디 질문은 곧 베드로와 온전케 될 모든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와 부탁이다. 바로 예수의 세 번의 질문이 베드로를 인도하고 격려해 주어 그의 인생길을 다 걸을 수 있게 하였고, 바로 예수가 떠날 때의 질문이 베드로로 하여금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하였고 베드로로 하여금 주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마음을 생각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께 순복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를 위로해 드리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일생과 자신의 전인(全人)을 바치게 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두 부류의 사람에 비추어 역사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바로 그를 믿고 따르면서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은혜시대의 도(道)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바로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 후, 우선 가장 의의있는 이런 2가지 일을 하였는데, 한 가지는 도마의 몸에 하였고 한 가지는 베드로의 몸에 하였다. 이 2가지 일은 무엇을 대표하는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대표하지 않는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대표하지 않는가? 도마의 몸에 한 사역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사람이 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훈계하기 위한 것이며, 베드로의 몸에 한 사역은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동시에 이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명확한 요구를 제기하고 그들의 추구 목표를 명확히 가리켜 주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부활 후 그가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는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말씀하였으며, 또한 그들에게 요구를 제기하고 사람에 대한 그의 뜻과 기대를 남겨 주었다. 말하자면, 도성육신 하나님으로서는 육신에서 살고 있는 동안이든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후의 영체이든지 인류에 대한 그의 걱정과 요구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을 때, 이 제자들을 걱정하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각 사람의 정형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각 사람의 부족함을 요해하고 있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 영체로 되어 각 사람에 대해 요해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가 육신에 있을 때와 똑같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 결코 완전하게 확정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육신에 있는 기간에 사람에게 결코 가혹하게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부활 후 사람에게 나타나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온 분이고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임을 100% 확정하게 하는 데에 달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는 그의 나타남과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이런 일을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하는 데의 최대의 이상(異象)과 동력으로 하였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이 일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견고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은혜시대의 사역을 철저히 인류 가운데 구체화시켰으며, 따라서 은혜시대의 예수의 구원의 은혜, 이 복음도 점차적으로 인류 중의 구석구석에 확장되었다. 네가 말해 봐라, 예수가 부활한 후의 나타남은 의의가 있는가, 없는가? 만약 네가 그 당시의 도마 또는 그 당시의 베드로라면 너의 일생 중에서 이런 의의 있는 일을 한번 만난다면 그것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는가? 너는 이 일을 하나님을 믿는 생애에서 가장 좋고 가장 큰 이상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너는 이 일을 한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하나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너는 필생의 정력을 바쳐 이 최대의 이상을 널리 전할 수 있겠는가? 너는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을 네가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인 부탁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비록 너희가 이런 일을 경력(역주: 체험)하지 못했지만 도마와 베드로의 이 2가지 사례는 이미 충분히 현대인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뚜렷한 요해가 있을 수 있게 한다. 가히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후, 친히 인간 세상의 생활을 겪고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겪으면서 인류의 타락을 보고 인류가 생활하는 현황을 본 후, 육신 중의 하나님은 더욱더 인류의 무력함과 인류의 비참함과 가련함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육신 중에 살고 있는 하나님은 그의 인성으로 인해, 육신의 본능으로 인해 인류의 처지를 더욱 알아주고 따라서 그를 따르는 사람을 더욱 걱정한다. 이런 것을 너희는 아마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견장괘두’란 이 단어로 그를 따르는 각 사람에 대한 육신 중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염려와 관심을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이 단어는 인류에게서 온 언어이지만, 비록 그것이 아주 인성화된 단어이지만 그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견장괘두’는 너희가 경력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끼고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기초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해야 하는 동시에 그래야만 비로소 달할 수 있다. 예수의 나타남은 바로 그를 따르는 사람에 대한 그의 인성에서의 ‘견장괘두’를 그의 영체, 가히 말해서 그의 신성 안에 실제화하고 넘겨준 것이다. 그의 나타남은 사람에게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과 보살핌을 체험하고 느끼게 하였으며 동시에 또 하나님이 시대를 개척하는 분이고 시대를 전개하는 분이자 역시 시대를 끝마치는 그 한 분임을 매우 강하고 힘있게 실증했다. 그는 그의 나타남으로 모든 사람의 믿음을 견고케 하였고 그의 나타남으로 세인들에게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실증하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구한 입증을 얻게 하였으며 그는 그의 나타남으로 새 시대 사역의 국면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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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요해(了解): 알다.

②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③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④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⑤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⑥견장괘두(牽腸掛肚): 늘 마음에 두고 걱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