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과 신분에 관하여(하)

그 당시 예수도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전에는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성전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찬미하고, 구약 성경을 보았다. 그가 세례를 받자 영이 본격적으로 ‘그의 위에 임하면서’ 사역을 시작하고 그의 신분과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전까지는 마리아 외에 누구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요한조차 몰랐다. 예수는 29세에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가 끝나자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가 세례를 받은 후부터 성령이 그렇게 그를 증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기 전인 29세 전까지는 정상인의 생활을 했다. 식사해야 할 때 식사하고, 잠을 자고, 옷을 입는 등은 변함없었으며, 다른 사람과 다른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때의 모습이다. 그에게도 때로는 연약함이 있었고,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자라며 총명과 지혜도 많아졌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은 단지 그가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성을 갖고 있었고, 일반인과 특별한 차이가 없었으며, 일반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고, 특이한 면이 전혀 없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있었다. 세례를 받은 후 그는 시험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다음에는 직분을 이행하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또한, 그에게는 능력과 지혜와 권병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를 받기 전에는 성령이 그에게 역사하지 않았다거나 그의 몸에 성령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도 성령은 그의 안에 거하고 있었다. 다만 본격적으로 사역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상인에게는 정상인의 성장 과정이 있는 것이다. 성령은 항상 그의 안에 거하고 있었으며, 그가 강생할 때는 다른 사람과 달리 새벽 별이 나타났다. 또한, 그가 강생하기 전에는 사자가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 마리아가 남자아이를 낳을 것이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고 말해 주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자 성령도 역사하기 시작했을 뿐이지, 성령이 그때 그에게 임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에게 임했다고 한 것은 그가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예전부터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았기에 사역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영은 함부로 역사하지 않고 세례의 방식으로 그를 증거했다. 예수가 물속에서 나오자 영은 본격적으로 그에게서 역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직분 이행과 구속 사역을 시작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즉, 은혜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든 다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원래의 육신 그대로였다. 다만 사역을 시작함으로써 그의 신분을 나타냈을 뿐이다. 또한, 그는 권병과 능력으로 가득해졌다. 이것이 바로 예전과 다른 점이었다.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즉, 지위에 확실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한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였다. 처음에는 몰랐던 사람들도 성령이 이렇게 증거하자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만약 성령이 증거하기 전에 예수가 엄청난 사역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 자신의 증거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가 한 사역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의 신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육안으로는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이 증거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성육신 하나님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성령이 증거한 후에도 그가 예전과 다름없이 사역했다면,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성령이 역사하는 부분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증거한 후에는 반드시 성령이 나타내어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이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으며, 하나님의 증거는 틀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이 또한 그 증거가 정확하다는 것을 실증한다. 성령이 증거하기 전에 한 사역과 이후에 한 사역이 같다면 성육신한 그의 직분은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부분도 두드러지게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알아보지 못한다. 눈에 띄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증거한 후에 성령의 증거를 지켜야 하므로 반드시 그에게서 이전과 다르게 지혜와 권병을 나타내야 했다. 물론, 이는 세례의 효과가 아니었다. 세례는 그저 의식에 불과하며, 세례의 방식으로 그가 직분을 이행할 시간을 보여 준 것뿐이다.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성령의 증거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성령은 성령의 증거를 끝까지 책임진다. 예수도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곳곳에서 설교를 듣고, 설교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별 큰 사역은 하지 않았다. 그가 직분을 이행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추어 육신에 거하고 있으면서 때가 되지 않으면 전혀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세례를 받기 전에 사역을 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성령이 본격적으로 ‘그의 위에 임해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에게 사역할 능력과 권병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앞으로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없었으며, 반드시 세례받는 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며, 그 누구도, 심지어 예수 자신조차도 어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스스로 방해할 리가 없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었음을 보여 주고, 하나님의 사역에 법칙이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의 영이 역사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도 그의 사역에 끼어들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그는 세례를 받기 전까지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초자연적이 아님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영의 안배에 어긋나지 않게, 순서와 절차에 따라 매우 정상적으로 사역한다. 그의 사역에 권병과 능력이 나타난 것은 단지 세례를 받은 후부터였다. 다시 말해, 성육신했다 해도 초자연적인 행동이나 일반인의 성장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진작부터 스스로의 신분을 알고, 세례받기 전부터 곳곳에서 큰 사역을 하면서 모든 일반인과 달리 비범함을 드러냈다면, 요한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못했을뿐더러 하나님의 다음 단계 사역도 전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착오가 생겼음을 말해 주고, 사람은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근원이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사역은 전부 세례를 받은 이후, 즉 3년 동안 행한 것이다. 성경에는 그가 세례를 받기 전에 어떤 사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세례를 받기 전까지 그러한 사역을 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일반인을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는 정상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고, 사람들은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예수는 29세가 되어서야 자신이 한 단계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 초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열두 살에 예배당에 예배하러 갔을 때 마리아가 그를 찾으니 그는 어린아이처럼 “어머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된 자인데 당연히 조금도 특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의 특이함이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다른 유치한 어린아이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했을 뿐이다. 그는 겉모습은 사람이었지만, 본질은 특이하고 남달랐다. 하지만 성령이 그에게 역사한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낀 시점은 세례를 받은 이후였다. 그는 33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성령이 그를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할 것임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32세 때는 실정을 조금 알고 있었다. 마태복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사역이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때가 되자 알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령이 그에게 행한 사역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과정이 있었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이자 그리스도이며, 성육신한 인자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역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그전에는 사역하지 않았겠느냐? 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가 이행할 직분을 말해 준 후에야 근심하며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겠느냐? 어째서 그는 요한이 그를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에게 세례를 준 후에야 비로소 전에 몰랐던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겠느냐? 이 모든 것은 바로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 하는 사역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그가 깨닫고 도달하기까지 전부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기에 영이 직접 역사하는 것과는 달랐다.

하나님의 각 단계 사역은 모두 하나의 흐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6천 년 경륜은 창세부터 지금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맞물려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길을 닦는 사람이 없었다면 뒤에 온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뒤에 올 사람이 있었으니 길을 닦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사역은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씩 전해 내려오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이어질 수 있었다. 길을 여는 자가 없다면 사역은 전개될 수 없고, 하나님은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단계든 어긋나지 않고 전부 순서대로 이어져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한 분의 영이 하는 일이다. 하지만 길을 연 자든, 길을 이은 자든, 결코 신분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요한은 길을 열었고 예수는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신분이 요한의 신분보다 낮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호와는 예수보다 먼저 역사했다. 그렇다고 여호와가 예수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느냐? 길을 닦거나 잇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의 본질과 대변하는 신분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려는 이상, 그는 반드시 길을 닦는 사람을 일으켜 사역하게 해야 했다. 요한은 처음에 전도할 때,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쳤다. 그는 처음부터 이 도를 전했다. 왜 그는 이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 말을 한 전후를 따지자면 요한이 먼저 천국의 복음을 말했고, 그다음에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관념대로라면 요한이 새로운 길을 열었으니, 그가 예수보다 당연히 커야 한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통해 길을 열고 주의 길을 예비했을 뿐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길을 닦았지만, 예수의 사역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사람의 사역 또한 전부 성령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여호와가 길을 이끈 시대였다. 여호와의 사역은 구약의 모든 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에서 행한 모든 사역을 대표한다. 모세는 그저 땅에서 그 사역을 지켰을 뿐이다. 그의 사역은 인성 협력에 속한다. 당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해 모세를 불렀고,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모세를 일으켰으며, 모세가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해 가나안에 들어가게 했다. 그것은 여호와가 친히 지시한 일이지, 모세가 스스로 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으로 불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율법도 정했다. 하지만 그 율법은 여호와가 친히 반포한 것으로, 단지 모세에게 전하게 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계명을 정했다. 게다가 구약의 율법을 폐하고 새 시대의 계명을 정했다. 어째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이는 같은 맥락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모세가 한 사역은 시대를 대변한 것이 아니며, 새로운 길을 연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가 앞에서 길을 이끌고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한 것이었다. 그는 그저 쓰임 받는 사람에 불과했다. 예수가 왔을 때, 요한은 이미 길을 닦는 단계의 사역을 마치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성령이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예수는 와서 바로 그 자신의 사역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모세의 사역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도 그렇게 많은 예언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겠느냐? 예수는 그렇게 많은 예언을 하지 않았는데도 왜 하나님 자신이겠느냐? 당시 예수가 했던 사역이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아무도 단언할 수 없었고, 또한 전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한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분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야의 사역과 예언들도 직접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부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고, 여호와의 묵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리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말씀도, 매우 많은 예언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이 보기에 그렇게 높은 도를 전하지도 않은 것 같지만, 그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요한이나 이사야, 다윗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을 신이라고 부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다윗 신이나 요한 신이라고 그렇게 부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예수만을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이는 하나님의 증거와 그가 담당한 사역, 그리고 그가 이행한 직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다윗, 여호수아, 다니엘, 이사야, 나아가 요한과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나오는 큰 인물들이 행한 사역을 통해 너는 누가 하나님 자신이고, 누가 선지자에 속하고, 누가 사도에 속하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이고, 누가 하나님 자신인지는 그들이 행한 사역의 본질과 유형에 따라 구분되고 확정된다. 네가 이러한 것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인 이유가 그렇게 많은 말씀과 사역을 하고 더욱이 수많은 이적을 나타냈기 때문이라면, 요한도 그렇게 많은 일과 많은 말을 했고, 모세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못하느냐? 아담은 하나님이 친히 만들었는데, 왜 하나님이라고 불리지 않고 그저 피조물이라고 불리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오늘날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역과 말씀을 하셨다고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모세도 그렇게 많은 말을 했으니 당연히 하나님 자신이겠죠?”라고 묻는다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은 왜 당시에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이라고 증거하셨으면서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까? 요한이 한 사역이 큽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큽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요한이 한 사역이 크고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작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요한을 증거하지 않으셨을까요?”라고 반문하여라.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 자신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고 직접 이끌었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이다. 모세에게는 그런 영과 어떠함이 없었고, 그는 그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일과 예수가 한 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행하는 사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인지, 선지자인지, 사도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지는 사역의 성질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너는 의문이 없어질 것이다. 성경의 기록에는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역대로 수많은 큰 인물들이 성경을 해석했다고 해서 너는 그들을 전부 어린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의 해석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저 성경 해석가일 뿐,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신분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곱 인을 뗄 수 있겠느냐? ‘어린양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일곱 인을 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 사역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는 김에 곁들여 하는 사역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사역을 똑똑히 알고 있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굳이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6천 년 사역에 굳이 ‘어린양이 성경을 해석하는 시대’를 더해야겠느냐? 그는 새 사역을 하기 위해 왔다. 다만 과거의 사역에 대해 조금 풀어 주어 사람이 6천 년 사역의 실정을 알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구태여 많은 성경 구절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는 사역이다. 너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곱 인을 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역을 하기 위해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너는 예수가 말세에 강림한다는 것만 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강림하겠느냐? 너희처럼 이제 막 속량되어 변화의 과정과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지금의 너같이 고루한 사람을 예수가 구원해 온 것은 사실이다. 네가 죄에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게 죄와 더러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성결해질 수 있겠느냐? 네 안에는 여전히 더러움이 가득하며, 또한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강림에 함께하기를 원하니, 그런 꿈 같은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한 단계의 과정이 빠졌다. 너는 그저 속량되었을 뿐, 변화의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하나님이 친히 사역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너는 속량만 될 뿐, 성결해질 수는 없다. 그리되면 너는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너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에서 한 단계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되고 온전케 되는 중요한 한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속량된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유업을 곧바로 이어받을 수 없다.

이 단계의 새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그 대단한 전도자, 설교자, 성경 해석가, 그리고 소위 영적인 위인들이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이 단계의 새 사역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너희가 말하는 것은 전부 낡아 빠진 것들이 아니겠느냐? 보좌에 오르거나 왕의 분량을 예비하는 것, 자신을 버리거나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 인내하거나 모든 일에서 공과를 배우는 것, 겸손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전부 케케묵은 말들의 반복이 아니더냐? 이는 겉만 바꾸는 것일 뿐 속은 그대로이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떡을 떼거나 안수 기도를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 외에 무슨 새로운 사역이 있겠느냐? 무슨 발전성이 있겠느냐? 이대로 이끌다 보면 너는 죽어라 규례를 지키거나, 여태까지 해 온 대로만 계속 행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사역이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찌하여 그것이 전부 고대의 ‘노인’이 물려준 유전이자 유훈임을 모른단 말이냐? 너희의 말과 행동은 전부 노인들의 유언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더냐? 노인들이 임종 때 남긴 당부가 아니더냐? 너는 너희가 하는 일이 역대의 사도, 선지자, 심지어 만유를 뛰어넘는 일이라 생각하느냐? 이 단계 사역은 시작되자마자, 위트니스 리를 숭상하며 ‘보좌에 앉아 왕 노릇 하기를 추구하던’ 너희의 작업을 제지시키고, 너희의 기를 죽여 놓았으며, 사람이 이 단계의 사역에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이 단계의 사역이 없다면 너희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구제 불능이 될 것이다. 너희 가운데는 낡아 빠진 것들이 너무나 많다! 다행히 현재의 사역이 너희를 끌어왔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너희가 어디로 갔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너는 새로운 것을 찾지 않는단 말이냐? 어째서 항상 낡아 빠진 것들을 지키고 있는 것이냐? 그러므로 성령의 현재 역사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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