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본분 이행과 봉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관련된 하나님 말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원래 있는 것, 즉 사람이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 된다. 섬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폐단은 단계적으로 체험하고 심판받는 과정에서 점점 줄어들므로 본분을 가로막거나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섬기는 과정에서 폐단이 생길까 봐 섬김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가장 나약한 자다. 사람이 섬기는 과정에서 표현해야 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며, 속이고 대충 하기까지 한다면,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기능을 잃은 것이다. 그런 자는 이른바 ‘둔재’이자 쓸모없는 폐물이다. 그런 자를 어찌 당당한 피조물이라 칭하겠느냐? 겉보기는 화려하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자가 아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봉사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겠느냐? 봉사하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으면 되고, 누군가 추궁하는 사람만 없으면 적당히 넘기면 그만이고, 성품 변화나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어떻게 순종할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 내놓을지 하는 일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이런 것을 바로 봉사한다고 하는 것이다. 봉사한다는 것은 시종일관 힘만 쓴다는 것이다. 노예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는 것이다. 그에게 “뭣 때문에 몇 년을 죽어라 일만 합니까?”라고 물으면 “복받으려고요.”라고 답한다. 또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성품은 변화됐는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는지,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를 진실로 깨닫고 체험했는지 등을 물으면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즉, 성품 변화와 관계된 각 부분의 목표는 전혀 향상되지도 않았고 발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 봉사만 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원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너무 깊이 패괴되어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말씀해도 순종할 수 없고, 자제해도, 자신을 저주해도, 맹세해도 소용없음을 알게 된다면 결국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확실히 패괴 성품이 있어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다. 일이 임할 때 늘 자신의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대해 늘 연구한다. 비록 기꺼이 힘을 쓰기도 하지만, 일단 성품이나 자신의 야심, 욕망, 속셈, 바람과 관련이 되면 이것들을 배반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다. 늘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려 하니, 나라는 사람은 정말 다루기 힘들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철이 좀 들었음을 의미한다. 봉사하는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성품의 변화를 중시하고, 자신도 원래 패괴 성품이 있고 교만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때, 바로 전환의 시작점이며, 성품 변화의 희망이 보이는 것이고, 구원을 받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일만 하면서 자기 손에 있는 일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힘만 쓴 것으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했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지,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전혀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생각들을 한 번도 해 보지 않는다면, 그저 이런 식으로 본분을 대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의 길에 오르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도 맺지 않은 채 하나님 집에서 힘만 쓰고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봉사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살피고 지켜 주기는 하지만 구원해 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거나 훈계하지도 않고, 심판하거나 형벌하지도 않으며, 시련과 연단을 주지도 않는다. 단지 현생의 축복을 좀 주는 선에서 끝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반성하기 시작하고 설교를 알아들으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그렇다면 구원받기 위해 추구해야겠어. 구원받기 위해 추구하지 않고 봉사하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하나님 믿는 일과 관계가 없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러고는 깊이 생각할 것이다. ‘나는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을까? 그 패괴 성품은 과연 무엇일까? 어쨌든 우선은 하나님께 순종해야겠어!’ 이러면 진리와 성품 변화로 연관되면서 희망이 생기게 된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의 원칙을 구해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그 본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절대 자신의 기호대로 행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즐겁고 편하고 체면이 서는 대로 행해서도 안 된다. 네 개인적인 기호를 하나님께 강요하며, 그것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고 진리 원칙으로 삼아 지킨다면, 그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다. 그러한 본분 이행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난 마음과 힘을 다했고 육을 버리며 고통받았으니 이행한 본분이 합격일 거야.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늘 만족하지 못하시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그의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의 잘못은 하나님의 요구를 찾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행동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바람과 기호, 사심을 진리로 여겼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 하나님의 기준이나 요구로 여겼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좋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진리로 삼았으니, 이것이 잘못이다. 사실 사람이 옳다고, 진리에 맞는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눈에 옳게 보일 때일수록 더 신중해야 하고,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봐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요구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한다면 그것이 옳다고 생각돼도 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그것이 꼭 진리에 부합하리라는 법은 없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할 수 없다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버려야 한다. 본분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겠느냐? 하나님의 요구와 기준, 진리의 원칙에 따라 행해야지, 사람의 주관적인 바람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이러면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의 원칙을 구해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중에서

사람이 어떤 장점, 은사, 기술을 지니고 있든 상관없이, 본분을 이행할 때 일만 하고 힘만 쓴다면, 일을 할 때 상상에 따르든 관념에 의거하든 아니면 자신의 본능에 기대든, 힘만 쓸 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법이 없다면, “나는 진리를 실행할 거야. 난 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거야.”라는 개념도 없고 그런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유일한 생각의 출발점은 그 일을 잘하고,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전적으로 은사와 장점, 자신의 능력과 기술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많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힘만 쓰려고 하고, 자신의 노동력과 기술을 팔기 바쁘다. 특히 하나님 집에서 맡긴 사무적인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관점으로 임한다. 즉, 힘을 쓰는 데에 그치는 것이다. 입만 놀릴 때도 있고, 손을 사용하여 힘을 쓸 때가 있는가 하면 열심히 뛰어다닐 때도 있다. 이런 것으로 사는 것이 힘만 쓰는 것일 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집에서 맡긴 임무를 자신이 받아들인 후 재빨리 완수해서 리더에게 보고하여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수많은 계획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겉으로는 제법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완수하였음을 보여 주기에 급급할 뿐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 놓고 어떻게 해야 스스로가 만족스럽고 흐뭇할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함에 이를 수 있을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기준을 세우든 그것이 진리와 무관하다면, 즉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거나 확인한 다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행동하거나 흐지부지하게 행동한다면, 다 힘만 쓰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각, 은사, 재능, 기술에 의지해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어쩌면 일도 완성했고 문제를 발견한 사람도 없고 스스로도 흐뭇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마음도 뜻도 힘도 다하지 않았는데, 네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진리의 원칙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그 일에서 90%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고, 진리의 실제에 들어갈 것이며, 네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일을 했음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마음을 쓰지 않고 제멋대로 일을 한다면 임무는 완수했다 해도 잘한 것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기준을 잡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나 진리에 부합하게 일을 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적 상태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통틀어 ‘힘만 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만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이행하는 본분이 합격인 것이다.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할 때는 기준이 있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한 바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한 가지 요구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명을 주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마음은 다른 데 가 있거나,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마음을 들이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해냈다면,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기준에 이르러야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했다고 할 수 있고, 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했다고 할 수 있느냐?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참되고 강렬할수록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중에서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누군가 이끌어 주면 따르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무엇을 시키든 그대로 할 것이다.’라는 태도를 보인다. 책임을 지거나 고민하거나 마음을 졸이는 일은 없고, 그런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힘은 쓰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이런 행위는 진실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마음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사람이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언제나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어째서 진리를 얻지 못한다고 하겠느냐? 그는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마음을 들여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마음을 들여 진리를 묵상하고 구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해하고 헤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너희에게는 무슨 일이 임하든, 어떤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든 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며 마음을 들여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진리를 구하고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이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이럴 때가 많으냐? 마음을 들여 본분을 이행하고 책임을 질 수 있으려면 고통을 겪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말로만 떠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분을 이행하는 데 마음을 들이지 않고 항상 힘만 쓰고자 한다면 분명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형식만 갖추었을 뿐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마음을 들이면 점차 진리를 깨닫게 될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마음을 들이면, 점차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패괴와 부족함을 발견하며 자신의 다양한 내적 상태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성찰하는 데에 마음을 들이지 않고 겉으로 힘쓰는 데에만 신경 쓴다면, 자신의 다양한 내적 상태, 그리고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반응을 발견하지 못한다. 성찰하는 데에 마음을 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과 정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경배하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과 정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평온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어떤 것들을 아직 모르는지, 어떻게 해야 더 잘 해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늘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마음속에 늘 생각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아니라 머릿속의 것이나 외적인 것들이 가득 차 있다면, 마음과 정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고, 그것과 무관한 일들로 점철돼 있다면,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겠느냐?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중에서

너희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는 얼버무릴 수 있으면 그냥 얼버무려 버리고, 대충 할 수 있으면 대충 해 버리며, 시간을 길게 질질 끌고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너희가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잘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너희가 할 줄 모르는 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줄 것이니, 고민할 필요 없이 말을 잘 듣고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의 충성심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충성심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구나! 입으로만 떠들 뿐 마음을 쓰지 않으며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니,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으니, 네게 마음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의 그 알량한 양심으로는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할 수 없으니, 네 양심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아무런 역할도 못 하는 헛된 장식품일 뿐이다. 인간의 믿음은 참으로 가련하다! 뭐가 가련하냐?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고,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책임지지 않으며, 자신의 책임인지 알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으니 말이다. 네가 질 수 있는 책임도 지지 않는데, 네가 진 그까짓 책임이 무슨 가치가 있고 효과가 있겠느냐? 그저 힘을 좀 쓰고 말을 좀 했을 뿐,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합격한 본분 이행이 아니다. 여기에는 충성심도 없다. 그저 노동력만 팔면서 따르는 자인 척하니, 이렇게 하나님을 믿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 작디작은 믿음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언제나 얼마간 대가를 치러야 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얼마간 힘을 쓰고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고 부담을 느끼며,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의 중요성을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 이러한 부담과 책임을 갖고 모든 일에 임하되, 마음으로 행하여 하나님이 네게 준 그 사명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치른 그 모든 대가와 너에 대한 기대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형식을 따르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것은 사람을 우롱하는 행위다. 너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본분 이행에 진실한 대가와 충성심이 없다면, 그것은 전부 합격한 본분 이행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늘 형식만 따르려 하고, 무슨 일을 하든 건성으로 임하는 태도를 지니며, 사장에게 고용된 이방인처럼 힘만 쓰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고, 문제를 봐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기름병이 쓰러져도 세우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일이면 전부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이런 자가 무슨 하나님 집의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이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을 다하는지, 실제로 행하는지는 너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 또한 알고 있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실제 행동에 옮겼느냐? 참답게 대했느냐? 자신의 책임과 임무로 여겨 이행했느냐?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겨 행했느냐? 본분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제기했느냐?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말을 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이 신경 쓰는 것을 귀찮아 하면서 괜히 일을 벌이지 말자고 생각한다면, 이런 일 처리 원칙으로 대한다면, 이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파는 것이고 봉사하는 것이다. 봉사자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 자는 고용인으로, 일이 끝나면 돈을 받고 미련 없이 가 버릴 사람이다. 피차간에 아는 게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 집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 집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마음을 쓰고 책임을 진다. 또 눈에는 하나님 집의 일만 보이며, 마음속에는 하나님 집의 일이 가득 차 있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보든 늘 걱정하고, 부담과 책임감을 지닌다.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너희는 이런 상태에 이르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아직 먼 것이니, 추구해야 한다! 네가 자신을 하나님 집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먼저 스스로를 도태시킨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외부인으로 보지 않았는데, 너 스스로 너를 문밖에 두었으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너는 과연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 집 문밖의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규정하는지와 관계가 있겠느냐? 너 스스로 네 결말과 자리를 하나님 집 문밖에 두었으니 또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느냐?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최소한 양심이 있어야 한다> 중에서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도 않으며, 악인들이 하는 일을 하지도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도 않으며, 본분 이행에도 이렇다 할 잘못이 없고, 원칙적인 문제도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므로 문제를 간파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도 줄곧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국 드러날 것이다. 줄곧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는 일을 할 때 늘 잘못된 태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또 공을 들이는 법이 없고, 마음을 다하는 일은 더더욱 없으며 힘을 좀 쓸 때도 그저 과정만 밟을 뿐, 온 힘을 다하는 법이 없어 과오가 끊임없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거나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를 바꾸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즉, 그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는 태도를 본 적도,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는 늘 이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대한다. 이렇게 완고하고 강퍅한 성품을 시종일관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죄스럽다거나 이렇게 건성으로 임하는 것이 과오나 악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으며, 가책받거나 참소받지도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든, 그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그의 마음은 감동받지 못하고 태도의 변화나 전환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사람한테는 희망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내 집에서 봉사할 자격도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어째서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행할 때 그에게 아무리 큰 관용과 인내를 보여 줘도 효과가 없고, 그를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잘하게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구제 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제 불능이라고 정할 때, 그 사람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손을 놓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저를 놓아주십시오. 제가 고통받게 하지 마시고 징계하지 마시고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제가 대충 건성으로 임해도 봐 주십시오! 제가 방탕하게 굴어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하며 구속받기 싫어한다. 그럼 하나님은 “네가 바른길을 걷기를 원치 않으니 하나님은 손을 놓고 방임하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구제 불능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구제 불능인 사람이 양심과 지각이 있겠느냐? 죄책감이 있겠느냐? 참소를 받겠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질책과 징계, 채찍질, 심판을 느낄 수 있겠느냐?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전부 의식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희박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없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이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그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기 힘들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너희는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하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을지, 절대 이런 상태가 나타나지 않을지 알고 있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다음 가장 현실적인 것,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의 유대를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어떤 일을 맡기고 어떤 임무를 주었을 때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네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등이며, 가장 직관적인 것이 바로 이런 문제이다. 이 핵심을 잡고 하나님이 준 사명을 제대로 해내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임무를 주거나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라고 말했는데, 네가 무성의하고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과는 상반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정말 중요하며, 선택한 방식과 길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본분을 가볍게 여기고 대충 이행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느냐?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다. 본분을 이행한 결과가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은 본분을 대하는 너의 태도에 흡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네가 정상적으로 구하고 협력한다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전념한다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일정 기간 그 일을 위해 신경 쓰고, 마음을 들이고, 숙고하고, 시간을 들여 자료를 찾으며 본분을 이행하는 데 몸과 마음 모두를 바친다면, 네가 그렇게 협력한다면, 하나님은 네 앞에서 인도해 줄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힘을 쓸 필요도 없다. 네가 협력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미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놓았을 것이다. 네가 잔꾀를 부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도중 마음을 바꿔 잘못된 길로 빠지면 하나님은 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이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는 자격도 없고 쓸모도 없다. 저 옆으로 비켜서라. 너는 게으름 피우는 걸 좋아하지 않느냐? 잔꾀 부리기 좋아하지 않느냐?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그러니 그냥 쉬어라.”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번의 은혜와 기회를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손실이겠느냐, 아니면 이득이겠느냐? 엄청난 손실이다!

― 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 관념, 상상이나 바람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바쁘고, 패괴된 성품에 지배받아 한다. 그래서 주어진 본분을 이행하고도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무엇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진리를 따르거나 하나님께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알고 있던 약간의 진리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은사, 능력, 습득한 지식, 재능과 자신의 의지나 선의를 바탕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다. 이는 제대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겠느냐? 합격한 본분 이행이겠느냐? 천연적인 것과 상상, 관념, 지식, 학문을 바탕으로 본분을 이행해도 원칙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때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은 것 같지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내내 진리 대신 자신의 관념 상상이나 의견을 고수하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봉사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하나님은 왜 힘쓰고 봉사하는 이 자들을 가리켜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사람들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 그 동기와 근원, 속셈, 생각은 전부 사욕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뜻과 개인의 이익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체면과 지위, 허영, 앞날에 대한 생각, 타산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음속에 진리가 없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지금 너희가 핵심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느냐? 일을 할 때 네가 품은 마음과 생각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사욕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만약 진리에 부합한다면 자신의 생각대로 행해도 된다. 그러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얼른 뉘우치고 그 길을 버려야 한다. 그 길은 잘못된 길이므로 그렇게 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계속 걸어간다면 악행이 될 것이다.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해야 하는가> 중에서

베드로는 책망과 연단을 겪어 온전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겠나이다. 제가 행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기만을 원하나이다. 설사 형벌과 심판을 받을지라도 기꺼이 원하나이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사역과 말, 모든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체험할수록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졌다. 반면 바울은 표면적으로만 사역했다. 비록 그도 공을 들이긴 했지만 그것은 사역을 잘해서 상을 받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이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사역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마음속 진실한 사랑과 현실적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울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사역하는 것에 치중하고 외적인 사역과 기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상인의 체험에 없는 도리적인 것을 중시했다. 그는 깊은 곳의 변화와 진실한 사랑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베드로의 체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과 참된 인식을 갖기 위함이었으며,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실제적으로 살아 내기 위함이었다. 바울의 사역은 예수에게 받은 사명을 위한 것이자 자신이 얻고자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자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는 무관했다. 그의 사역은 전적으로 형벌과 심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순결한 사랑을 추구했고,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추구했다.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알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순결했다. 여러 해 연단을 겪으며 예수와 생명에 대한 그의 인식도 높아졌다. 그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자발적인 사랑이었다. 그는 보수를 바라지 않았고 그 어떤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 반면 바울은 오랫동안 사역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었다. 그가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마지막에 월계관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최고의 면류관이지 가장 순결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추구했으며,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 역사에 붙들려 어쩔 수 없이 추구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추구는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임을 증명할 수 없다. 베드로야말로 본분을 이행한,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기여하면 상을 받아야 하고 또 크게 기여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의 관점을 보면 그 본질은 거래의 성질을 띤 것이지,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또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 즉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면 사람에게 사람의 원래 본분을 회복하고 원래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선을 넘어 하나님께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의 종착지는 그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판정되었다. 또 그들이 얼마나 많이 사역했는지,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지가 아니라 그들이 원래 추구한 것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길이 가장 옳은 길이며, 옛 성품을 변화시켜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 성공의 길인 것이다. 성공의 길이란 피조물이 원래의 본분과 모습을 되찾는 길, 즉 회복의 길이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한 모든 사역의 근본 취지이다. 사람의 추구에 여전히 자신의 사치스러운 요구와 불합리한 소망이 섞여 있고 성품 변화의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회복의 사역과 서로 어긋나며 틀림없이 성령이 행한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추구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추구가 또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설사 고통받고 화를 입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추구다. 바울이 추구한 것에는 자신의 육체, 자신의 관념, 자신의 타산과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는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 전혀 아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따르고자 했다. 비록 베드로가 한 사역이 크지는 않지만, 그가 추구한 마음가짐과 걸어온 길은 옳은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진리의 도를 추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가 합당한 자격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령 네가 지금은 사역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지배하는 대로 모두 따를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다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어떤 환난과 연단도 모두 겪을 수 있어야 하고, 연약하지만 마음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명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추구하는 관점이 올바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네가 많은 사역을 하고 다른 사람도 너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정작 너 자신은 변화가 없고 조금의 간증도, 참된 체험도 없으며, 죽기 전까지도 네가 하는 일에 간증이 전혀 없다면, 이런 사람이 변화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겠느냐? 성령이 당시에는 너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때 사용하는 것은 네가 사역할 수 있는 부분이며, 사용할 수 없는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다. 네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쓰임 받는 과정에서 점차 온전케 될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네가 얻어지는 것까지 성령이 모두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 자신의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추구하는 관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 자신의 문제로, 이는 너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체험이 가장 중요하고 개인의 진입이 가장 관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까?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했으니 최소한 제가 천국에 들어가 생명의 열매를 먹게는 해 주셔야죠.”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에는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오랫동안 많은 사역을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더럽기 짝이 없다면, 네가 내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하늘의 이치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그 어떤 이에게도 특혜를 준 적이 없다. 이것은 아무도 깰 수 없는 하늘의 규칙이다! 너는 생명을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내가 온전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베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자신의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원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의 생명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상만 받으려고 한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이전: 2)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란?

다음: 4)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죄의 매임에서 벗어나 정결케 될 수 있을까요? 그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콘텐츠

2)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아 가는 데 관한 말씀

하나님은 사탄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사역은 사탄의 사역을 훨씬 초월한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나의 사역은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졌으며, 결국에는 나의 전능이 나타나고 사탄의 무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만 교계는 하나님께 대적하기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왜 종교계 사람들을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이고 마귀와 같은 부류라고 하는가? 그들이 악을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한 일을 지금까지 그들에게 나타낸 적이 없다.

설정

  • 텍스트 설정
  • 테마

색상

테마

폰트

폰트 사이즈 조정

줄 간격 조정

줄 간격

페이지 너비

목차

검색

  • 페이지 내 검색
  • 도서 내 검색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