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 그리스도의 발표(선집)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하나님의 거룩 (2)

다들 잘 지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 안녕하세요?) 형제자매들, 오늘 찬송 한 곡 부르자. 너희가 부르기 좋아하는 것, 평소에 늘 부르던 것을 찾아보아라. (하나님 말씀 찬양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부르겠습니다.)

1.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을 가리킨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간격도 거리도 없고, 의심과 추측이 없고 간교도 기만도 없으며,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으면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고, 배반도 거역도 하지 않을 것이며, 토색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을 얻고자 바라지 않을 것이며, 얼마를 얻고자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2. ‘사랑’이란 티 없이 순수한 티 없이 순수한 감정을 가리킨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간격도 거리도 없고, 의심과 추측이 없고 간교도 기만도 없으며,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너에게 사랑이 있으면 달갑게 봉헌하고 고난받을 것이고 하나님과 합할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고, 너의 가정과 앞날을 가정과 앞날을 포기할 것이며, 너의 청춘과 너의 결혼을 포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고 배반이다!

참 좋은 노래를 선택했구나. 너희는 이 노래를 좋아하느냐? (네.) 이 노래를 다 부르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자신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고 느껴지느냐?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 노래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어느 부분이냐? (바로 “‘사랑’에는 조건도, 간격도, 거리도 없다. ‘사랑’에는 의심도, 기만도 없고 간교도, 거리도 없고 어떠한 뒤섞임도 없다.”,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도 많은 뒤섞임이 있고 아직도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부분이 있으며 또한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저에게는 확실히 아직도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 없습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 없다면, 어떤 사랑이 있느냐? 그 사랑은 어느 정도에 머물러 있느냐? (단지 이런 사랑을 추구하고 소망하는 단계입니다.) 너의 분량으로, 자신이 경력(역주: 체험)한 것으로 말해 보아라. 그 사랑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느냐? 기만이 있느냐? 원망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럼 마음속에 받아 내려고 하는 것이 있느냐? 하나님에 대해 어떤 요구나 무슨 욕망이 있느냐? (그런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런 뒤섞임은 어떤 상황에서 보이느냐? (하나님이 안배하신 환경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이런 패괴된 성정이 유로(역주: 흘러나옴)됩니다.) 너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부르느냐? 너희는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 볼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겠느냐? (저도 이 노래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 ‘사랑’이 완전한 사랑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자신은 이런 기준과 아직 차이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은 다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조금 버릴 수 있고 조금 헌신할 수 있는 정도에 머물러 있을 뿐, 일단 자신의 앞날이나 운명에 관련되면 혼자 속에 또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데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매우 작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진실한 사랑과는 아직도 매우 큰 거리가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적극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 말씀에서 얻은 힘에 의지하고, 또한 이런 환경 가운데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존 관점에 연관되면 어떤 때에는 이겨 내기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그럼 너는 이겨 내기 힘들 때, 거기에 어떤 것이 가로막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느냐? 이런 것을 성찰해 보았느냐? (성찰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자신의 허영심과 체면 때문입니다. 또 앞날과 운명이 큰 가로막음이 됩니다.) 그럼 너는 앞길과 운명으로 인해 가로막음이 클 때, 왜 너에게 그렇게 큰 가로막음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 앞길과 운명이 왜 너의 가로막음이 될 수 있느냐? 너는 너의 앞날과 운명에 대해 어떤 요구를 가지고 있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 환경이 임하면 자신에게 앞날과 운명이 없는 것 같고, 심지어 어떤 때는 하나님이 저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귀숙이 없다고 느껴지는데, 이럴 때는 특별히 연약해집니다. 이 부분이 자신에게 매우 큰 가로막음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동안 경력한 후, 기도를 통해 이런 정형들이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자주 이 부분에서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럼 너희들이 말하는 ‘앞날과 운명’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느냐? (이 ‘앞날과 운명’은 바로 하나님이 배치하신 환경 속에서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혹시 운명과 귀숙이 없지 않은가’라는 느낌이 들어 아주 연약해집니다.) 그럼 너희가 말하는 ‘운명과 앞날’은 도대체 무엇이냐? 가리키는 바가 있느냐? 하나의 그림이냐? 아니면 상상이냐? 또 아니면 직접 앞날과 운명이란 것을 보았느냐? 그것은 하나의 실체이냐? (바로 귀숙입니다.) 귀숙이란 무엇이냐? 너의 앞날은 또 무엇이냐?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마음속으로 염려하는 앞날과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느냐?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입니다. 또한 본분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께 합당하게 쓰임받는 데에 도달하고 합격되는 본분을 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늘 하나님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과 차이가 매우 크다고 느껴집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말해 보아라. ‘티 없이 순수한 사랑’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 말해 보아라. (바로 자신의 뒤섞임이 없고 앞날과 운명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든지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하면서 끝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사랑이 있어야 그 사랑이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대조해 볼 때, 하나님을 믿은 이 여러 해 동안 겉으로는 얼마간 화비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은 결코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드러날 때는 자신이 이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소극적인 정형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은 본분을 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으며, 귀숙, 앞날, 운명을 한시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사람의 교통에,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고 ‘사랑’에는 반드시 실제적인 표현이 있어야지 입으로 속이는 것이 아니라고 교통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조해 보면 자신은 아직도 거리가 아주 멀다고 생각됩니다.)

너희는 이 노래를 자주 부르는 모양이구나. 너희가 이 노래에 대해 이해를 좀 하고 있고, 실제 경력과도 연결을 좀 시키고 있지만, 많은 사람은 ‘티 없이 순수한 사랑’, 여기에서 언급한 매 한 마디 말씀에 대해 이해하는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달갑게 따르려 하고, 어떤 사람은 앞날을 내려놓으려 하며, 어떤 사람은 가정을 내려놓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기만도, 원망도 하지 않고 혹은 거역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또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했겠느냐? 사람은 이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은 이런 사랑에 닿을 수 있느냐? 사람이 보기에도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 전혀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기에 이런 말씀이 사람에게는 모두 생소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런 세상에 태어나 패괴된 성정에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있거나 혹은 이런 사랑을 구비하여 바라는 것이 없고, 또한 무엇을 얻으려고 바라지도 않고, 달갑게 봉헌할 수 있으며, 달갑게 고난을 받고, 또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달갑게 버릴 수 있다면, 이런 사랑을 구비한 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의 완벽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런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겠느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그가 진공 속에 살면 모를까, 세상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경력 가운데서 이런 말과 자신을 대조하면서 자신을 다스리고 억제하였고, 심지어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하면서 고난을 받고 관념도, 패역도 내려놓고 욕망과 요구도 내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여전히 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에게 하나의 기준을 준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즉시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얼마 동안의 시간 내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했느냐? 그런 부분이 이 말씀에 있느냐? 이 말씀에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을 뿐이다. 사람이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하나님을 대할 수 있을지는 말씀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즉시 사랑해야 한다고, 당장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사랑을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늘 이런 말씀을 읽는다고 점차적으로 사랑이 생기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에 대해 근거 없이 의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없으려면? (역시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거래가 없으려면? 이것도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간교가 없으려면? ‘사랑’에 선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모두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는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언급하거나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고 이런 논법을 펴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구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너희는 그것을 어디에서 보았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보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간격이나 거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근거 없이 의심하느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있고,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음, 진실로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기만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완벽하게 말씀했는데, 그럼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랑이나 혹은 하나님의 실질이 바로 완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사람 중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는 어떤 상황하에서 내리느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 베풀고 봉헌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간단한 것으로, 실질적인 면은 없다.

하나님이 사랑에 대해 내린 정의와 그것에 대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한 방면의 실질에 연관된다. 어느 방면의 실질이냐? 지난번에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교통했다. 이 화제는 이전에 사람이 자주 말하고 제기했었던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이 단어가 자주 제기되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사람은 익숙하면서도 또 생소하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이 단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오긴 했지만, 인류가 그것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이 단어는 무엇이냐? (거룩입니다.) 맞다, 거룩, 이것은 우리가 지난번에 교통했던 화제의 주제이다. 지난번에는 일부분만 교통하고 다 교통하지 못했다. 지난번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생겼습니다.) 어떤 인식들이 새롭다고 생각되느냐? 너희들이 새롭게 얻게 된 어떤 인식과 말들이 너희가 이해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거룩과 내가 교통했던 하나님의 거룩이 구별되거나 다르다고 느끼게 하였느냐? 기억하고 있느냐? 인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면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는 뒤섞임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룩에 대한 한 방면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한 방면이다. 또 보충할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를 발하실 때에도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에서 하나님의 완벽, 신실, 지혜를 보았고 또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인식했습니다.)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것은 권병을 말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통하는 화제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하나님의 거룩에서 저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진노와 긍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에 특히 인상이 깊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유일무이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전에는 그렇게 인식하거나 정의를 내리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통을 듣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같지 않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긍정적인 것이고 원칙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본래의 실질로 인해 발하게 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보았기에 그런 진노를 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역시 피조물에게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인류도 긍휼과 비슷한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들이 있지만 안에는 모두 뒤섞임이나 목적이 있고, 또한 소위 사람의 긍휼은 모두 가상이고 공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인류에 대한 구원을 보았고, 또한 그런 긍휼은 사람을 직접 구원받는 길로 이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가 아름다운 귀숙과 염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실질에 구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하나님이 진노로 한 성을 훼멸하려고 하셨다가도 긍휼의 실질로 인해 하나님은 또 언제든지 긍휼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인식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 이 방면에 대해 인식이 있구나.

방금 내가 너희에게 질문했을 때, 너희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이 없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이 방면의 화제를 말하겠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을 같이 연결시킨다.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내용에 대해 다 조금씩은 알고 있고 또 조금씩은 들어 보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을 같이 놓고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하다고 말한다. ‘거룩’이란 이 단어는 각 사람에게 있어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고, 또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룩의 함의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내는 것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유로한 것에서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거룩하다고 말한다면 듣기에 조금 모호하고 헷갈린다. 왜 그럴까? 네가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거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거룩하다고 말하는데, 그럼 너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 하나님의 거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다시 말해, 사람이 알고 있는 거룩에는 하나님의 어떤 유로나 소유소시들이 있느냐?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내가 본 것은 사람들이 늘 자주 쓰는 단어나 자주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습관이 되어 관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 보고 알아보면 거룩의 실제 의의가 무엇이고 거룩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이란 이 단어를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이 도대체 하나님의 어느 부분의 실질을 가리키는 것인지, ‘거룩’이란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적절하게 현현(원문: 兌現)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다 마음이 흐릿하여 그냥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거룩하냐? 아는 사람이 있느냐? 아마 모두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화제를 교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거룩’이란 이 단어를 구현시켜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의 실제 내용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이 이 단어를 늘 함부로 쓰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을 피하고, 또한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 채, 아무튼 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말하니 너도 나도 덩달아 입버릇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거룩’이란 이 단어를 더럽히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거룩’이란 이 단어는 보기에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냐? 최소한, 사람이 생각하는 ‘거룩’이란 이 단어는 깨끗하고, 정결하고, 신성하고, 순결하다는 뜻이다. 마치 방금 부른 노래 ‘티 없이 순수한 사랑’과 같이 ‘거룩’과 ‘사랑’을 서로 연결시킨 것은 틀리지 않다. 이것도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실질의 한 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 속에서 사람이 글자로만 이 단어를 봤을 때, 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순결한 것, 깨끗한 것 혹은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소위 더럽지 않은 것, 정결한 것을 연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연꽃이 정결하다고 하는데, 사람은 연꽃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렸느냐? (“진흙탕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는다”입니다.) 진흙탕 속에서 자라면서도 물들지 않는다고 정의를 내린 다음, 사람은 ‘거룩’이란 이 단어로 연꽃을 묘사한다. 또 어떤 사람이 지어낸 사랑 이야기나 내용을 거룩한 것으로 보거나 사람이 꾸며낸 어떤 위대한 인물들을 거룩하다고 본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나 영적 서적에 기록된 인물들, 성도나 사도 혹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어떤 영적인 경력을 거룩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다. 사람에게 왜 그런 관념이 있게 되느냐? 여기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는데,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사람이 패괴된 성정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고 사악하고 더러운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사람이 보고 접촉하고 체험하는 것은 전부 사탄의 사악함과 패괴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귀다툼과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령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했을지라도, 설령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나타냈을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거룩이 무엇인지를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심지어 사람이 늘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바로 이 까닭이다. 사람이 더러움과 패괴 속에서 살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광명을 보지 못하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모르고 더욱이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거룩이 무엇인지를 진정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이렇게 말했는데, 이 패괴된 인류 가운데 거룩한 것이나 거룩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실질만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실질이 거룩하다는 것에 관해 우리는 지난번에 어느 정도 교통하였다. 교통한 그 부분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을 인식함에 있어서 깨우침을 좀 주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그것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을 완전히 인식하기에도, 하나님의 거룩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도 충분하지 않고, 거룩의 진정한 함의가 하나님에게서 완전하게 체현된 그 부분을 인식하기에는 더욱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방면의 화제를 계속해서 교통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세 가지 문제를 교통하였다. 이제 네 번째 문제를 교통할 차례이다. 성경을 읽어 보도록 하자.

4. 사탄의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1~4)

이것은 마귀가 처음으로 주 예수를 시험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의 내용은 무엇이냐? 너희가 읽어 보아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입니다.) 마귀가 한 이 말은 간단하다. 하지만 이 말의 내용에 실질적인 문제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느냐?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그럼 마귀는 속으로 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느냐?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느냐? (압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왜 ‘만일’이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럼 마귀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한 것은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순복하였느냐? 경배하였느냐? (아닙니다.) 그럼 마귀는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그런 방식과 그런 말로 예수에게 화를 유발시킨 다음, 그를 유인해 걸려들고 속아 넘어가게 하여 주 예수가 그것의 뜻대로 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런 뜻이 아니냐? 마귀는 속으로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본성이 아니냐? 사탄의 본성은 무엇이냐? (교활하고 사악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경외가 없다. 사탄에게 있는 그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후, 그것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탄의 음험한 속셈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사탄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였느냐? 그것의 뜻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신분을 부인하려고 한 것이었다.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니 이 사역을 하지 말라.’고 말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뜻이 아니냐?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하였고 하나님의 사역을 허물어뜨리고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사탄의 악독함이고 그놈의 궤계이다. 사탄의 악독함은 그 본성의 자연적인 유로이다. 사탄은 설령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자신이 도성육신(역주: 성육신)한 줄 알고 있었을지라도 자신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런 일을 하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뒤를 따르면서 계속 하나님을 공격하고, 주저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일을 저지르며 하나님과 적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탄이 한 이 말을 더 해부해 보자.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느냐? 의미가 없다. 먹을 것이 있는데도 먹지 않고 왜 꼭 돌을 떡덩이로 되게 해야 하느냐? 이 일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주 예수가 당시에 비록 금식하고 있었지만 설마 먹을 것이 없었겠느냐? 먹을 것이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탄이 한 이 말의 황당함을 보게 된다. 사탄은 아주 음험하고 아주 악독한데, 우리는 또 여기에서 사탄의 황당함과 그릇되고 망령된 면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이 저지른 어떤 일에서 그것의 악독한 본성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는 짓을 보면 아주 가증스럽고 화도 나지만, 반대로 그것이 그 일을 저지르고 그 말을 한 성질을 보면 아주 유치하고 황당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 본성의 한 가지 유로이다. 그것에게 그런 본성이 있기에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 말은 사람이 보기에 아주 황당하고 아주 가소롭다. 하지만 사탄은 그 말을 내뱉을 수 있는데, 그것이 무지하고 그릇되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사탄의 사악함은 언제 어디에서나 늘 유로된다. 주 예수는 그것에게 어떻게 대답하였느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은 힘이 있지 않으냐? (힘이 있습니다.) 왜 이 말을 힘이 있다고 하느냐? (이 말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맞다! 이 말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냐? 예수님이 사십 주야를 금식하였어도 굶어 죽었느냐? (아닙니다.) 예수님은 굶어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탄은 다가와 예수께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이런 말을 하였다. ‘돌을 떡이 되게 하면 먹을 것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면 금식할 필요도 없고 굶주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다. 하지만 주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비록 육체에서 살고 있지만, 사람의 육체가 살아가고 숨을 쉴 수 있게 하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는 것이다. 한 방면으로는, 사람이 이 말을 진리로 삼으면 이 말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어 하나님은 사람이 의지할 분이고 진리임을 느끼게 한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이 말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주 예수가 사십 주야를 금식했어도 여전히 그곳에 서 있지 않았느냐? 여전히 살아 있지 않았느냐? 그것은 실제 사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그가 사십 주야나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았어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말의 유력한 증거이다. 그 말은 비록 간단하지만 주 예수에게 있어 그가 한 말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준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그 말 때문에 예수가 생각해 낸 것이냐? 너희는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럼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은 후천적으로 더해진 것이냐? 후천적으로 경력한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원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실질은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임하든 그가 유로해 내는 것은 진리이다. 이 진리, 이 말씀은 그 내용이 길든 짧든 상관없이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그 속에서 진리를 얻게 하고 인생의 길을 알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말을 하게 된 근원인데, 그 근원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 이 긍정적인 것은 거룩하지 않으냐? (거룩합니다.) 사탄이 한 그 말은 사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그것의 사악하고 악독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럼 그렇게 드러내는 것은 그것의 자연적인 유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누가 지시한 것이냐? 누가 사탄을 도와주었느냐? 누가 사탄을 협박했느냐? (아닙니다.) 모두 사탄이 스스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사탄은 그 뒤를 따르며 말을 하고 일을 저지르는데, 그 일들의 실질과 정체는 바로 사탄의 실질이다. 즉, 사악하고 악독한 실질이다. 그럼 사탄은 또 뭐라고 말했느냐? 우리 계속 읽어 보자.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5~6)

먼저 사탄이 한 이 말을 살펴보자.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하였고, 게다가 성경의 말을 인용하여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사탄이 한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아주 유치하지 않으냐? 유치하고 황당하고 역겹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사탄은 항상 어리석은 짓을 하고는 스스로 아주 총명하다고 여기고, 또 항상 성경의 말을 인용하는데, 심지어는 하나님이 했던 말씀까지 인용한다.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역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탄이 한 이런 말 속에서 너는 뭔가 보지 못했느냐? (음험한 속셈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탄은 일을 할 때 일관적으로 사람을 시험한다. 사탄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시험하고 유혹하고 유인하는 방식으로 빙빙 돌려서 말한다. 사탄은 일반 사람을 시험하듯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사탄은 하나님도 사람처럼 그렇게 우매하고 그렇게 어리석어 사물의 진상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사탄의 실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것의 궤사함과 음험한 속셈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것이 사탄의 미련한 면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게다가 사탄은 버젓이 성경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이 한 말에 도리도, 근거도 있으니 어떻게 흠을 잡아낼 수 있겠냐, 어떻게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겠냐고 여겼다. 이것은 사탄의 황당하고 유치한 면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증거할 때, 불신자들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지 않느냐? 너희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네가 이런 말을 들을 때, 역겹지 않겠느냐? (역겹습니다.) 네가 역겹다고 느낄 때, 마음속으로 혐오하지 않겠느냐? 증오하지 않겠느냐? (혐오하고 증오합니다.) 너에게 이런 느낌이 들 때, 너는 사탄과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생긴 성정이 바로 사악한 것임을 의식하였느냐? 너에게 이런 느낌이 있을 때, 너는 마음속에 ‘하나님은 전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아. 사탄의 말은 공격성과 유혹을 띠고 있고 황당하고 가소롭고 유치하고 역겨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시는 일에서 하나님은 전혀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시거나 역사하시지 않았고, 지금까지 이런 방식은 없었어.’라는 이런 의식이 있느냐? 물론 이때에 사람에게는 이 정도의 느낌만 있을 뿐,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함은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만 인정할 뿐, 진리 그 자체가 바로 거룩한 것임은 모른다. 지금 너희의 이 분량으로는 단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진리이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어서 다 받아들여야 돼.’라고 느낄 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리이고 하나님은 진리라고 말할 뿐, 진리 그 자체가 거룩하고 하나님이 곧 거룩하다는 것은 모른다. 그럼 예수는 사탄이 방금 한 그 말에 또 어떻게 답하며 상대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7)

예수가 한 이 말에 진리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진리가 있다. 보기에 이 한 마디는 사람에게 명령하는 말이고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사람이나 사탄은 이를 항상 범한다. 그래서 주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한 것이다. 사탄은 항상 그렇게 해 왔고, 또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하기에 정말 파렴치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탄의 본성 실질에서 보면 사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을지라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 한 마디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늘 하는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적용되지 않겠느냐? (적용됩니다.) 왜 그러냐? (우리도 항상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항상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왜 항상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사탄에게 패괴된 성정이 사람에게 가득하기 때문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사탄이 위에서 한 그런 말은 사람도 항상 하지 않느냐? (합니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하느냐?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그렇게 말하고 또 자연적으로 유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성정이 사탄의 패괴된 성정과 차이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 예수는 아주 간단한 한 마디 말씀을 하였는데, 그 말은 진리를 대표하고 또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주 예수는 사탄과 논쟁하는 말을 하였느냐? 사탄과 대치하는 말을 하였느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마음속으로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보았겠느냐? 역겨워하고 혐오스러워하지 않았겠느냐? (맞습니다.) 혐오하고 역겨워하였다. 하지만 주 예수는 사탄과 논쟁하지 않았고, 더욱이 그것과 그 어떤 이치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네.) 왜 그랬겠느냐? (주 예수께서 그것을 상대하기 싫어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상대하기 싫어했겠느냐? (사탄은 항상 그 모양이어서 변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느냐? 영원히 하나님이 진리임을 모르고 영원히 하나님이 진리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다. 또한 사탄의 본성에 사람을 역겹게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느냐? 시험해서 설령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한번 시도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설령 징벌받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했으며, 설령 시험해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려고 하였고, 기어코 그렇게 하여 하나님에게 끝까지 대항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본성이냐? 사악이 아니냐?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란 말만 꺼내면 눈에 핏발을 세우는데, 그가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이란 말만 꺼내면 화가 치민다. 그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느냐? 그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거니와 하나님도 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고, 그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는 왜 화를 내는가? 이 사람을 사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사악한 본성이 아니냐? 세상의 풍조나 먹고 노는 것, 스타나 미인, 이런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하나님’이란 이 단어만 나오면 화가 치민다. 이것은 사악한 본성이 아니냐? 사람의 사악한 본성임을 충분히 증명한다. 그럼 너희는 진리를 언급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과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에 대해 언급하면, 반감을 가지고 혐오하면서 듣기 싫어할 때가 있지 않으냐? 마음속으로 ‘이게 어디 진리야? 하나님은 다 진리라고 하지 않았나? 이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훈계하는 말씀이잖아!’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반감을 가진다. ‘날마다 이런 일들을 언급하고 날마다 시련을 언급하고 늘 심판을 언급하는데, 언제 끝날까? 언제면 좋은 귀숙이 있을까?’라며 알 수 없는 화가 나오는데,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어떤 본성이냐? (사악한 본성입니다.) 바로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해, 인류의 패괴된 성정에 대해 전혀 사람과 논쟁하거나 따지지 않고, 또 사람의 우매한 행실로 인해 문제를 크게 만들지도 않는다. 하나님에게서는 인류가 어떤 사물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그 어떤 관점도 볼 수 없고, 더욱이 인류의 관점, 또는 지식이나 과학, 또는 철학이나 상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이 한 것과 유로한 것은 모두 진리와 관련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는 말씀마다, 하나님이 하는 일마다 모두 진리와 관련된다. 이 진리는 근거 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이 진리와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실질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유로된 것이다. 이런 말씀의 실질과 이런 일들의 실질은 다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실질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신 한 가지 일이나 한 마디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와 광명을 가져다주었으며,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의 실제를 보게 하였고, 사람에게 광명의 길을 가리켜 주어 바른길을 걷게 하였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의 실질, 곧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이다. 너희는 보았겠지? 우리 계속 성경을 보도록 하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8~11)

마귀 사탄은 앞에 사용했던 두 방법으로 안 되니, 또 한 가지 수단을 들이댔다. 즉, 만국과 만국의 영화를 모두 주 예수께 보여 주면서 자신에게 경배하라고 하였다. 이 일에서 마귀의 어떤 정체를 보았느냐? 마귀 사탄은 아주 파렴치하지 않으냐? (파렴치합니다.) 어떻게 파렴치하냐?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인데, 사탄은 도리어 만물을 하나님께 보여 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객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냐? 파렴치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지만 이것을 누리려고 하였느냐? 하나님이 만물을 인류에게 베풀어 주자 사탄은 집어삼키려 하였고, 집어삼킨 다음 또 하나님께 “나에게 경배하라, 나에게 경배하면 내가 이런 것들을 다 당신에게 주리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추악한 몰골이다. 정말 수치를 모른다. 그렇지? 사탄은 ‘수치’라는 이 단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또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사탄은 무엇을 ‘수치’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었고 또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이 만물은 다 하나님의 소유이고 사람에게 속하지 않으며 더욱이 사탄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마귀 사탄은 낯가죽이 두꺼워 파렴치하게 이 만물을 하나님께 주겠다고 말하였다. 사탄은 또 한 번 황당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을 더 혐오하게 되었다. 그렇지? 하지만 사탄이 어떻게 했든, 주 예수가 그것의 속임수에 빠졌느냐? (아닙니다.) 주 예수는 어떻게 말씀했느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실제 의의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실제적인 의의가 있느냐? 사탄의 말에서 그것이 사악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인류가 사탄에게 경배한다면 어떤 결말을 얻겠느냐? 만국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도 사탄처럼 파렴치하고 가소롭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과 똑같이 된다. 그러므로 주 예수가 한 이 말씀은 각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다시 말하면, 주님 외에, 하나님 외에, 네가 다른 것을 섬기고 마귀 사탄을 섬긴다면, 너는 사탄과 한 패거리가 되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파렴치하고 사악하게 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공격하게 된다. 이러면 너의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고 격살되고 훼멸된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이 예수님을 여러 번 시험하여 성공하지 못했을 때, 또 시험했느냐? 더 이상 시험하지 않고 물러갔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악독, 그리고 그것의 그릇됨과 황당함은 하나님 앞에서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가 단 세 마디로 사탄을 이겨 사탄을 몸 둘 바 모르게 하였고 기가 죽어 물러가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탄은 더 이상 예수를 시험하지 못하였다. 주 예수는 이미 사탄의 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순조롭게 계속할 수 있었고, 자신이 담당하려는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주 예수가 한 그런 말과 일들은 지금에 와서도 각 사람에게 실제적인 의의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어떤 실제적인 의의가 있느냐? 사탄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냐? (아닙니다.) 왜 이렇게 말하느냐? 사람은 사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탄의 시험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있어야 합니다.) 네가 사탄의 시험을 겪을 때, 그것의 사악한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사탄을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사탄의 그릇됨과 황당함을 알게 되면, 또 그놈의 편에 서서 함께 하나님을 공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네가 사탄의 파렴치함과 악독함이 자신에게서 유로되는 것을 알고 분명히 의식하고 인식하게 되면, 또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 (사탄을 배반하고 그것과 단절할 것입니다.) 그건 해내기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을 성찰해야 하고,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형벌을 받아야만, 점차적으로 사탄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탄이 한 이런 말에서 사탄의 실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우리가 총결해 보도록 하자. 우선 사탄의 실질은 총체적으로 말하면 사악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서로 대비된다. 왜 사악하다고 하느냐? 그것은 사탄이 사람에게서 일하여 도달하는 결과에 근거해 보아야 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또 지배하고 있으며, 사람은 사탄의 패괴된 성정 가운데서 살면서 일을 저지르고, 사탄이 패괴시킨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있어서 부지중에 사탄에게 점유되고 동화되어 그것의 사악한 본성을 구비하게 되었다. 사탄의 모든 언행에서 사탄이 교만하고 궤사하고 악독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탄의 교만은 주로 어떻게 드러나느냐? 사탄은 늘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늘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지위를 없애고 자신이 그 지위를 차지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고 옹호하고 경배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교만방자한 본성이다. 하지만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킬 때에는 궤사하고 음험하였다. 사탄은 사람에게 일할 때 직접 어떻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대적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고, 하나님을 시험할 때에도 “내가 당신을 시험하고 공격하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탄은 어떤 방식을 썼느냐? (유인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유인하고, 시험하고, 공격하고, 덫을 놓고, 심지어 성경의 말까지 인용하였다. 그렇게 각종 방식으로 말하고 일을 저질러 그것의 음험하고 사악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사탄이 이렇게 하고 난 후, 사람에게서 어떤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느냐? 사람도 교만방자하지 않으냐? 사람은 사탄에게 수천 년 동안 패괴되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궤사하고 악독하며, 이치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 이것은 다 사탄의 본성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한 연고로, 그것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도 바로 이런 사악한 본성과 사악한 패괴 성정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사탄의 패괴된 성정에서 살게 되었고, 사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고 시험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으냐?

비록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화제는 아주 익숙하지만, 자세히 말한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 추상적이고 내용이 좀 깊을 것이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까닭은 이전에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이 화제를 접한 것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할 것이다. 너희는 들어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구나. 그럼 먼저 이렇게 말해 보자.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이 하는 일과 그가 한 일의 결과만 봐도 그 사람의 실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선 이 각도에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교통해 보자. 사탄의 실질이 사악하고 악독한 이상, 사탄이 인류에게 하는 일은 바로 끝없이 패괴시키고 또 패괴시키는 것이다…… 사탄이 사악하기에 그것이 패괴시킨 사람도 분명히 사악하다. 그렇지 않으냐? “사탄이 사악해 사람을 패괴시켰어도 거룩한 사람이 한 명은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건 웃음거리가 아니냐? 가능하냐?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그럼 이 방면에서부터 얘기해 보자. 사탄은 사악하다. 이것은 사탄의 실질이고, 또한 실제이고 빈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탄을 추하게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과 실제를 교통하고 이 방면의 사실 진상을 교통할 뿐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이나 일부분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너희는 오늘 이런 말을 듣고 불편해할 수도 있겠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너희가 인식하게 될 때는 자신이 증오스럽고 오늘의 이 말이 너희에게 아주 유용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탄의 실질이 사악하기에 사탄이 하는 일의 결과도 틀림없이 사악하다. 최소한 사탄의 사악과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어떻게 패괴시킨 것이냐? 우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인류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사탄의 어떤 사악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너희는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아마 너희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몇 가지 중점을 잡아 너희에게 사탄이 사람을 어떻게 패괴시켰는지 보여 주겠다. 진화론이라고 하는 사상이론이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알고 있겠지? 이 진화론과 유물론은 사람이 배운 지식의 일부분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먼저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 후, 또 과학으로 사람에게 지식과 과학에 대해, 오묘한 비밀 혹은 사람이 탐구하는 어떤 일에 대해 흥미를 갖게 했다고 하는 것이다. 즉, 과학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고 잇따라 전통문화로, 거기에다 미신과 사회 조류로 사람을 패괴시킨 것인데, 이 몇 가지는 사람마다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다. 또한 각 사람이 주변에서 보고, 듣고, 접하고, 체험하는 것은 다 이런 일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마다 모두 이런 것의 포위망 속에 살고 있어서 도망치려고 해도 안 되고, 벗어나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다만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고 전염되고 통제와 속박을 받으며 벗어날 힘이 없다.

우선 지식에 대해 말해 보자. 지식은 각 사람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것이 아니냐? 적어도 ‘지식’이란 이 단어는 좋은 의미이지, 나쁜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여기에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킬 때 우선 지식으로 패괴시켰다고 말하느냐? 진화론은 지식의 일부가 아니냐? 뉴턴의 법칙은 지식의 일부가 아니냐? 지구의 인력도 지식의 일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지식을 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내용에 열거하느냐? 너희는 어떻게 보느냐? 지식에 어떤 한 가지 진리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지식의 실질은 무엇이냐? (진리와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는 그 모든 지식은 다 어떤 기초에서 배우는 것이냐? 다 진화론의 기초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탐구해 내고 총결해 낸 그런 지식은 다 무신론의 기초에서 총결해 낸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말하자면 그 모든 지식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사탄은 지식으로 사람을 어떻게 패괴시키느냐? 내가 방금 말했다. 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무관하고 진리와 무관하다. 어떤 사람은 ‘진리와 무관하지만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키지도 않았잖아!’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 지식이 너에게 행복은 사람의 두손으로 창조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너에게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가르쳤습니다.) 그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허튼소리입니다.) 아주 적절하게 말하였다. 다 허튼소리이다! 이 지식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복잡하다. 네가 지식은 그저 지식일 뿐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였음을 알지 못한 기초에서 지식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식을 배울 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단지 지식 안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과학의 답을 찾기만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연구만 하는 상황이라면, 사람은 영원히 진실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지식은 네가 밥벌이할 수 있도록 직장을 구하고, 돈을 벌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할 뿐이다. 하지만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을 알게 하지 못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께 순복하게 하지 못하며, 영원히 악에서 떠나게 하지 못한다. 네가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네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연구하고 시험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음은 더 커진다. 지금 우리는 지식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느냐? 다 사탄의 철학이다. 패괴된 인류에게 존재하는 사탄의 생존 철학, 생존 법칙은 진리와 연관이 있느냐? (없습니다.) 연관이 있기는커녕 도리어 진리와 어긋난다. 사람들이 늘 “생명은 운동에 달렸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말이냐? (허튼소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이 강철 같을 수 있는 것은 밥심 때문이다. 한 끼라도 굶으면 배고파서 견디지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어떠냐? (허튼소리이고, 사탄의 말입니다.) 더욱 황당무계한 논리여서 듣기에도 역겹다! 이 지식에 대해서는 이제 대체적으로 다 알았다. 사탄은 ‘지식’이라고 하는 것에 사탄의 많은 처세 철학과 사상을 주입시켰다.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그런 사상과 철학,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하고,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시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시는 것을 부인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식을 배울수록, 또 지식을 배우고 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모호해지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탄이 사람 안에 관점과 관념, 사상을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런 사상을 사람에게 주입시킴에 따라 사람이 패괴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지금, 사람들은 무엇에 근거해 사느냐? 정말 이런 지식으로 사는 것이냐? 아니다. 사람은 이런 지식에 감춰져 있는 사탄의 사상관점과 철학으로 살고 있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핵심이고,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목적과 방식이다.

1. 사탄은 어떻게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우리, 가장 쉬운 것부터 말해 보자. 너희가 학교에서 국어를 배웠는데, 그 말과 글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느냐? 없지 않느냐? 단어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느냐? (없습니다.) 단어는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말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더군다나 지금 하나님이 언어로, 말씀으로 사람과 소통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말해 보아라, 1 더하기 1은 2, 이것은 지식이 아니냐? 2 곱하기 2는 4, 이것은 지식이 아니냐? 그러면 이 지식이 너를 패괴시킬 수 있느냐? 이것은 상식이고 법칙으로, 사람을 패괴시킬 수 없다. 사람을 패괴시키는 지식이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사탄이 지식 속에 섞어 넣은 관점과 사상이다. 사탄은 이런 관점과 사상을 지식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에게 주입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편의 글이 있는데, 글자에 문제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무엇에 문제가 있느냐? 그 저자가 그 글을 쓸 때의 관점과 의도, 그리고 그 사람의 사상 내용이다. 이런 것들은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다. 네가 드라마를 한 편 본다면, 그 드라마에서 어떤 것들이 사람의 관점을 바꾸느냐? 배우들이 하는 말과 글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떤 것들이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바로 그 드라마가 나타내려는 중심 사상과 내용이다. 이런 것은 감독의 한 가지 관점을 대표하는데, 그 관점이 가져다주는 메시지가 사람의 사상과 마음을 좌우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말한, 사탄이 지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너희는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릇되게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네가 다시 소설이나 글을 볼 때, 그 글의 사상이 사람을 패괴시키는지 아니면 도움을 주는지 볼 줄 알겠느냐?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알든, 모르든 천천히 배우고 경력해야 하는데,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한 가지 지식을 연구하거나 한 가지 학문을 배우면 일부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와 같은 그 학문의 상식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는 한 가지 지식이 아니냐? 네가 만약 전기가 사람을 감전시킨다는 것을 모른다면 무지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네가 이 방면의 지식을 알고 나면, 너는 섣불리 전기를 만지지 않을 것이고, 그 외에 전기를 운용할 줄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지식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이제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았겠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분명하게 알았으면 더 말하지 않겠다. 사람은 세상에서 배우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너희들 스스로 천천히 분별해야 한다.

2. 사탄은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과학은 무엇이냐? 사람마다 모두 마음속으로 과학은 아주 대단하고 아주 심오하다고 느끼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과학을 말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이건 서민들이 닿지 못하는 것이고, 과학 연구원이나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만 접촉하는 화제이니, 우리 서민들과는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켰느냐? 우리가 다른 것은 놔두고 사람들이 눈앞에서 자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DNA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네.) DNA는 다 알고 있다. 그렇지? DNA는 과학이 발견한 것이 아니냐? 그럼 ‘DNA’는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느냐? 사람의 육체가 아주 신비롭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이 화제를 접촉할 때, 특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호기심이 많은 그 사람들은 기력을 다 여기에 쏟는다. 틈만 나면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찾아보고 이 방면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려고 한다. 과학은 무엇이냐? 과학은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바로 사람에게 있어서 신기한 일, 사람이 모르는 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 사람이 탐구하는 오묘한 비밀에 대한 상상이나 학설이다. 네가 보기에 과학의 그 범위는 어디까지이냐? 만유를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무엇이냐? 모두 연구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의 세부적인 것과 법칙을 연구한 다음, 그럴듯한 결론을 내려 사람마다 ‘과학자들은 정말 대단해, 이렇게 많이 아는 걸 보니까. 지식을 얼마나 갖춰야 이런 일들을 알 수 있을까?’라고 느끼게 하면서 그들을 특별히 우러러보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 그들은 만물을 연구하고, 흥미를 갖고 있는 범위의 오묘한 비밀들을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냐? 그럼 그 최종 결과는 무엇이냐? 일부는 사람이 추측한 것이고, 일부는 사람의 경험으로 총결해 낸 것이며, 또 일부는 사람이 역사(歷史)와 배경을 고찰하여 총결해 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과학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물질세계의 것만 보게 하고 사람의 호기심만 만족시킨 것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속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을 보게 할 수는 없다. 사람은 과학에서 답을 찾은 것 같지만, 사실 그 답은 사람을 미혹하였고, 사람에게 일시적인 만족을 얻게 하였다. 또한 이 만족은 사람의 마음을 물질세계에 뿌리박게 하였다. 사람은 과학에서 이미 답을 얻었다고 여기면서 어떤 일이든 다 과학의 관점으로 검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확신한다. 사람의 마음이 과학에 점유되고 유혹되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배할 마음이 없게 되었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마땅히 하나님에게서 답을 얻어야 한다는 것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과학을 믿는 사람일수록 더 그릇되어, 어떤 일이든 다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다 연구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따랐어도 틈만 나면 세균을 연구하거나 일부 자료들을 검색하면서 답을 찾는다. 그는 진리의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지 않고 많은 일들에서 과학의 관점이나 지식, 그리고 과학의 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찾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종교 전문가들은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의 그 방주가 있는 곳에 가서 알아본다. 사람들은 방주를 보긴 했으나 방주가 보여 주는 표면 현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지 못했고, 단지 그 이야기와 그 역사(歷史)만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과학을 연구하고 물질세계를 연구한 결과이다. 네가 물질을 연구한다면 그것이 미생물이든, 천문 지리든 너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이런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과학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지 않느냐? 하나님을 연구하게 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더욱 의심하게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탄이 과학의 방식으로 사람의 어떤 것을 패괴시키려고 하느냐? 과학으로 검증해 낸 이런 결과로 사람을 미혹하고 마비시키려는 것이 아니냐? 이런 두리뭉실한 답으로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여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 않게 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게 한다.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을 의심하고 부인하고 멀리하게 한다. 그래서 과학을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사탄은 어떻게 전통문화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전통문화에 포함되는 것들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이 전통문화란 무슨 뜻이냐? (조상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조상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은 한 측면이다. 한 가문, 한 민족에서 인류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온 생활 방식, 규칙, 논법, 규례, 이런 것들이 사람의 사상 속에 주입되었다. 사람은 그것을 무엇으로 여겼느냐? 생활 속의 필수적인 것과 규례로 여기고 사람의 생명으로 삼아 지키면서 영원히 바꾸거나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옛 조상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일부 전통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공자와 맹자의 사상, 중국의 도교와 유교가 사람에게 가르친 것들인데, 각 사람의 뼛속에 다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전통문화에는 모두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느냐? 사람이 지키는 명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느냐? 예를 들어 순서대로 살펴보면, 설날, 정월 대보름, 청명절, 단오절, 그리고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추석, 개천절, 심지어 어떤 사람들의 가문에는 또 어른의 생신, 아기 한 달 잔치와 백일잔치가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전통 명절인 것이다. 전통 명절의 배후에는 전통문화가 있지 않느냐? 전통문화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내용이 있느냐? 사람에게 진리를 실행하게 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제물을 바치게 하거나 하나님 제단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는 명절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모든 명절은 다 뭘 하기 위한 것이냐? (사탄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것을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것으로 여긴다. 그럼 이런 전통문화에 숨겨진 기원은 무엇이냐? 이런 전통문화는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 (사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사탄은 이런 전통 명절을 통해 사람에게 어떤 것들을 주입시키는데, 그런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에게 조상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중의 하나가 아니냐? 예를 들어, 청명절 때 성묘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려 조상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를 들면, 단오절은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한다. 8월 15일에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는 무엇이냐? 왜 한자리에 모이느냐? (가족이 제일이고 정 때문입니다.) 서로 만나 정을 나누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물론 섣달그믐이나 보름을 쇠는 것에도 적지 않은 명목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다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시킨 일종의 사탄 철학과 사탄 사상이다. 사탄은 그런 것을 사람에게 주입시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게 만들면 좋아한다. 또 조상이나 사탄에게 제사 지내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육체에서 먹고 마시며 놀고 즐기게 한다. 각 명절을 쇨 때마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탄의 사상관점들이 심어지게 된다. 사람이 40~50세가 되거나 더 늙었을 때, 그런 것들과 그런 사상관점은 이미 사람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그런 관점이 옳든 그르든, 사람은 또 있는 힘을 다해 전부 다음 세대에게 전수한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문화와 명절은 사람을 어떻게 패괴시키느냐? (이런 규례가 사람을 속박하고 결박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시간과 기력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한 측면이다. 설 쇠는 것을 예로 들어 말해 보자. 남들은 다 설을 쇠는데, 네가 쇠지 못하면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아, 설을 쇠지 못했네. 설 첫날부터 별로 좋지 않아 제대로 쇠지 못했으니, 올 한 해도 순조롭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마음이 좀 불안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좀 두렵지 않겠느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 돈을 달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죽은 사람이 쓸 돈이 부족한 모양이야. 불쌍해! 종이돈을 좀 태워 주어야지. 태워 주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어떤 재앙이 닥칠지도 몰라. 언젠가는 순조롭지 않게 될 거야!’ 마음속에 늘 이런 두려움과 근심이 있다. 그러면 이런 근심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냐? (사탄입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 아니냐? 사탄은 각종 방식과 여러 가지 구실로 너를 통제하고, 협박하고, 결박하고, 너를 흐리멍덩하게 하여 그것에게 굴복하게 하고 시키는 대로 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다. 사람은 연약할 때에,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귀신에 홀린 듯 어리석은 일들을 한다. 즉, 귀신에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노략당해 어쩔 수 없이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도 전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이다. 심지어 지금 많은 사람들은 깊이 뿌리박힌 일부 전통문화에 대해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다. 특히 사람이 연약할 때, 소극적일 때, 사람은 또 이런 명절을 쇠고 싶어 하고, 사탄과 다시 만나 사탄을 한 번 더 만족시키고 자신도 좀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전통문화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느냐? 사탄의 검은손이 조종하고 있지 않느냐?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 조화를 부리고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 사탄이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전통문화 속에 살면서 이런 전통 명절을 쇠고 있는데, 이런 환경 속에서 사탄에게 우롱당하고 패괴되는 것이 아니냐? 또한 사탄에게 패괴되기를 기꺼이 원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이런 일에 대해 모두 인식이 생겼다.

4.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미신’이란 이 단어는 낯설지 않겠지? 미신에 관련하여 사람이 늘 접촉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 (거짓 신입니다.) 이것은 전통문화와 상통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오늘 상통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사람이 자주 접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즉, 점치러 가고, 점괘를 보고, 향을 피우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점치러 가고, 어떤 사람은 부처를 공양하며 향을 피우고, 또 어떤 사람은 운수를 보고 관상을 본다. 너희 중에 운수나 관상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아주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 (느낍니다.) 왜 그러냐? 점괘를 보고 점을 치면 사람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사람의 어떤 심리를 만족시킬 수 있느냐? (호기심입니다.) 단지 호기심뿐이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점을 보는 목적은 무엇이냐? 왜 점치러 가느냐? 미래를 예측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들이 관상을 보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고 싶거나, 화복을 알고 싶거나, 결혼에 대해 알아보고 싶거나, 다음 해의 운세를 보고 싶거나, 자녀의 앞날을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또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 관상쟁이에게 방향을 가리켜 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앞날의 운세가 어떨지, 앞날이 어떨지 알고 싶어 한다. 이렇게 다방면이 있다. 단지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뿐이냐? (아닙니다.) 사람이 관상을 보거나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다 자신의 앞날의 직접적인 이익을 위한 것인데, 이런 것들이 자신의 운명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과연 소용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왜 소용없느냐? 영문을 모르고 화를 당하느니 앞날이 어떨지를 좀 아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 미리 알게 되면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점괘가 잘 나와서 그들이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면 혹시 다음 해에는 운 좋게 장사로 떼돈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소용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늘 우리가 교통하려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고 이 방면의 내용이나 화제가 아니다. 사탄은 어떻게 미신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느냐? 점치러 가는 것이나, 관상을 보는 것이나, 운수를 보는 것이나 사람이 알고 있는 이런 것들은 다 앞날의 운세가 어떨지를 알기 위한 것이고, 앞으로 걷는 길이 어떨지를 알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이런 것들은 도대체 누구의 손에 장악되어 있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손에 장악되어 있다. 그러나 사탄은 어떠냐? 사탄은 그런 방식을 통해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고 하느냐? 사탄은 관상을 보고 점치는 방식을 통해 사람에게 그것이 사람의 앞날의 운세를 알고 있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또 그런 기회를 빌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제어하여 쉽게 그것을 미신하게 하고 그것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관상을 보러 갔는데, 그 관상쟁이가 눈을 감고 수십 년 전에 너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너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속으로 문득 ‘정말 대단하네, 딱 맞아! 내 과거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탄이 너의 지난 일을 아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가! 하나님은 너를 오늘날까지 이끌었고, 사탄 역시 사람을 오늘날까지 패괴시키면서 줄곧 너를 따라왔다. 그것이 악령이므로, 너의 수십 년쯤을 아는 것은 그것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알고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다. 너는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너의 마음을 그것에게 맡기지 않겠느냐? 네 이후의 앞날이며 운세며 다 그것에게 맡겨 장악하게 하지 않겠느냐? 갑자기 네 속에서 그것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혼까지도 그것에게 홀려 간다. 너는 바로 또 물을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년에는 어떤 일들을 피해야 합니까? 어떤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어서 관상쟁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떤 곳에는 가지 말고, 어떤 일은 하지 말고, 어떤 색깔의 옷은 입지 말고, 어떤 곳은 적게 가고, 어떤 일은 많이 하세요……” 너는 이런 말들을 바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빠를 것이다. 왜 빨리 기억하겠느냐? (자기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것에 의지해 행운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의 마음은 그것에게 빼앗기지 않겠느냐? 그것이 너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던 말들이 일일이 이루어질 때, 너는 또다시 그것을 찾아가 다음 해의 운세를 보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럴 겁니다.) 너는 그것이 시키는 대로 너에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서 고분고분 따르지 않겠느냐? 너는 얼마 못 가서 그것의 품에 안기고 바로 미혹되어 그것에게 통제된다. 왜냐하면 너는 그것이 한 말이 다 진짜이고 또 그것이 너의 전생도, 금생도, 미래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제어한다. 그러나 사실상, 진정 사람을 주관하는 이는 누구냐? 하나님 자신이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그때 단지 교활한 수단을 써서 무지한 사람에게, 물질세계만 볼 수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믿고 신뢰하게 하고, 나중에는 그것에게 노략당하고 그것의 말을 듣고 고분고분 따르게 할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싶어 할 때, 사탄이 놓아주느냐?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정말로 사탄에게 노략당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그런 행위는 파렴치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느냐? (사탄은 속임수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사기 치는 수단이고 기만하는 수단이다. 사탄은 후안무치하게 사람에게 자신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고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고, 무지한 사람으로 자기의 말을 순순히 듣고 따르게 한다. 사탄이 단 두세 마디 말로 사람을 속여 어리둥절하게 만들면, 사람은 그것에게 머리를 숙이고 굴복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말로 너에게 그것을 믿게 하느냐? 예를 들면, 네가 아직 그것에게 너의 식구가 몇 명인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너의 집식구가 3명이고, 7살짜리 딸아이가 있고, 부모의 나이가 얼마인지도 말해 너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처음에 네가 의심하고 믿지 않던 상황에서 이 말을 들으면 믿음이 조금 생기지 않겠느냐? (생깁니다.) 잇따라 그것은 또 말한다. “당신은 요즘 하는 일이 순탄치 않네요. 상사가 늘 알아주지 않고 못살게 구네요.” 네가 듣고는 “맞아요! 요즘 정말 그래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또 믿게 되지 않겠느냐? 그것은 또 다른 말로 너를 미혹해 더욱 그것을 믿게 하는데, 너는 이렇게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더는 그것을 반항하거나 의심할 여력이 없게 된다. 사탄은 단지 얕은 수, 심지어는 유치한 수작으로 너를 미혹한다. 너를 미혹함과 동시에 방향을 찾지 못하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며, 너로 그의 말을 순순히 듣고 고분고분 따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일종의 ‘뛰어난’ 방식인데, 너는 자신도 모르게 꾀임에 빠지고 유혹당하게 된다. 그것이 먼저 사람이 좋다고 상상하는 것들을 너에게 조금 알려 준 다음, 또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피해야 한다고 알려 주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덫에 걸려들게 된다. 그 덫에 걸려들면 문제가 된다. 너는 늘 그것의 말이 생각나고, 그것이 너에게 하라고 시킨 말이 생각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에게 점유당한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람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사탄의 꾀임이나 유혹에 반항할 힘이 없다. 사탄의 사악함, 궤사함과 음험함 그리고 악랄함에 비하면 사람은 얼마나 무지하고 여리고 연약한가! 그렇지 않으냐? 이것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일종 방식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여러 가지 술수에 조금씩 유인되고 조금씩 기만당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바로 사람에게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할 능력과 그 분량이 없고 사탄을 이길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어떻게 사회 조류로 사람을 패괴시키는가

사회 조류는 지금에 와서야 있게 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있게 된 것이냐?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기 시작할 때부터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회 조류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느냐? (옷차림과 치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늘 접하는 것이다. 옷차림과 치장, 최신 유행, 패션 트렌드, 이것은 작은 방면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사람이 흔히 말하는 사회의 일부 유행어는 포함되지 않느냐? 사람이 지향하는 생활 방식은 포함되지 않느냐? 사람이 좋아하는 유명 가수, 유명 배우, 사람이 읽기 좋아하는 잡지나 소설은 포함되지 않느냐? (포함됩니다.) 너희가 보기엔 어느 방면의 조류가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느냐? 어느 방면의 조류가 너희에게 있어 가장 큰 유혹이 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40~50세, 50~60세, 70~80세가 되었는데, 이 나이에 무슨 조류를 따르겠습니까, 조류는 우리에게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스타를 쫓아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런 건 다 18~19세, 20여 세 아이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유행하는 옷도 입지 않아요, 다 멋쟁이들이나 하는 일이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너희를 패괴시킬 수 있느냐? (유행하는 말들입니다.) 그런 말들이 사람을 패괴시킬 수 있느냐? 그럼 내가 한 가지를 말해 볼 테니, 맞는지 들어 보아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이것은 조류가 아니냐? 이것은 너희가 말한 패션이나 맛있는 먹거리, 그런 조류보다 강하지 않으냐? (강합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이것은 사탄의 철학이다. 인류 사회의 어디에서나 그 한 마디는 아주 성행하기에 조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말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주입되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받아들이지 않던 데로부터 받아들인 후에는 습관이 되어 예삿일이 되는데, 더 나아가 자신이 현실 생활을 접할 때, 점차적으로 그 말을 묵인하게 되고 그 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며, 마지막에는 그 말의 존재에 찬성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과정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과정이 아니냐? 아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너희는 그 말에 대해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인데, 사람마다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한 일, 그리고 자신이 직접 겪은 모든 일에 근거하면, 그 말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하는 정도가 각기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그 말을 얼마나 경력했든지 상관없이 그 말이 사람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효과는 무엇이냐? (돈이 만능이라고 하면서 돈을 숭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인류, 즉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너희를 포함해, 사람마다 성정에서 유로되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느냐? 돈을 숭상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이것을 없애 버리기 쉬우냐? 쉽지 않겠지? 사탄이 사람을 아주 깊이 패괴시킨 것 같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이런 조류로 사람을 패괴시킨 것은 사람에게서 모두 어떻게 표현되느냐? 너희는 이 세상에서 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고 하루도 생활할 수 없다고 여기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돈이 있는 만큼 지위도 있고 존귀하다고 보는데, 돈이 없는 사람은 기를 펴지 못하고, 돈이 있는 사람은 지위가 높고, 기도 펴고, 큰소리도 칠 수 있고, 판을 치며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말과 이런 조류는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어떤 대가든 다 치르게 되지 않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존엄과 인격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더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본분할 기회를 잃고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잃게 되지 않겠느냐? 이런 것은 사람에게 손실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탄은 그런 방식으로, 그 한 마디로 이 정도까지 패괴시켰는데, 그 속셈이 음험하고 잔인하지 않으냐? 이 수단은 아주 악독하지 않으냐? 그런 말이 유행하면 네가 처음에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데서 진리라고 여기는 데에 이르기까지 너는 그것에게 철저히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너도 어쩔 수 없이 그 한 마디를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그 말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았느냐? 참 도이고 진리인 줄 알면서도 추구할 힘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대가를 치르기 싫어하고, 고난받으면서 이를 위해 바치기를 원치 않으며,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희생할지언정 끝까지 하나님께 대항한다.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든, 어떻게 하시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크다고 깨닫든 여전히 자기 고집대로 그 말을 위해 대가를 치른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은 이미 너의 행위와 생각을 좌우하는데, 너는 그 말에 너의 운명이 좌우되기를 바랄지언정 그 모든 것을 내려놓기 원치 않는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 말에 좌우되고 지배되는 것은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효과에 도달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사탄의 철학과 사탄의 패괴된 성정이 네 마음속에 뿌리내린 것이 아니냐? 네가 이렇게 하면 사탄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너는 사탄이 이렇게 사람을 패괴시키는 것을 보았느냐? (못 봤습니다.) 보지 못했다. 느끼기는 했느냐? (못 느꼈습니다.) 느끼지 못했다. 여기에서 너는 사탄의 사악함을 보았느냐? (봤습니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패괴시키는데, 사람이 막을래야 막을 수 없고, 또한 자신도 어찌 할 수 없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너는 사탄의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고, 사탄에게서 오는 사악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받아들이고 나서도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전히 그것을 끌어안고 보배처럼 귀중히 여기면서 그것의 지배에 맡기고 그것이 제멋대로 우롱하게 내버려 둔다. 사람은 이렇게 사탄에게 점점 더 깊게 패괴되어 간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위의 몇 가지 방식은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고, 사람마다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은 이 몇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은 지식이 있고, 과학적 이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각 사람은 다 전통문화의 계승자로서, 사탄이 가져다준 전통문화를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가고 있으며, 또한 사탄이 가져다준 사회 조류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사람은 사탄과 항상 관계가 밀접하여 시시각각 사탄이 가져다준 사탄이 하는 모든 것에 보조를 맞추고 있고, 궤사, 교만, 악독, 사악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은 사탄의 이런 성정이 있게 된 후, 이 인류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행복하겠느냐 아니면 비통하겠느냐? (비통합니다.) 왜 그렇게 말하느냐? (모두 이런 것에 결박되어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어떤 사람은 안경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아주 지식 있어 보이고, 말할 때도 조곤조곤하게 하고, 게다가 언변이 뛰어나고 말에는 이치도, 근거도 있다. 또 나이가 지긋해 여러 일에 경험이 많고, 경력도 꽤 많아 크고 작은 일에서 전후 관계를 말할 수 있고, 근거도 댈 수 있으며, 또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이런 일의 진위와 이치도 평가할 줄 안다. 또한 사람이 보기에 그의 행위와 겉모습, 그리고 그의 됨됨이, 인격, 인성 등 각 방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 이런 사람은 현재의 사회 조류에 특히 잘 영합하므로,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앞서며, 최신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 비록 나이는 많아도 여태껏 조류에 뒤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다. 이런 사람의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지만, 마음속 실질은 오히려 사탄에게 완전히, 철저히 패괴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겉모습은 온유하고 우아하며, 지식도 있고 도덕과 규범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고 인격도 있으며, 게다가 젊은이들 못지않게 아는 것도 많아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의 본성 실질은 오히려 사탄과 추호의 차이도 없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완전한 사탄의 표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성과’이다. 나의 이 말이 너희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배운 지식, 장악한 과학, 이 사회 조류에 적응하기 위해 걷는 길은 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도구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런 완전한 사탄의 패괴된 성정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실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이런 것들은 겉으로 보기엔 어떤 흠도 잡을 데가 없는데, 그 원인은 사람의 행위가 비정상이 아니고, 사람마다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며,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신문을 보고, 정상적으로 배우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들은 겉면의 도덕규범을 좀 배워 문안할 줄 알고 예의를 중시하며, 인사치레할 줄 알고 사람을 잘 헤아릴 줄 알며, 타인에게 우호적이고 도와주며 베풀고, 혹은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남의 덕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탄의 패괴 성정이 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 그 실질은 사람이 겉면의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실질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을 사람에게 공개한다 해도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는 사탄이 각종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과 생각, 사람의 관념과 사상을 아주 철저히 점유한 까닭이다. 이런 점유와 패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가끔 있는 것도 아니라, 언제 어디에나 다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3~4년, 5~6년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탄이 주입한 이런 사상과 관점을 계속 지키면서 보배로 여겨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 사탄에게서 온 사악하고, 교만하고, 악독한 본성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항상 서로 다투고, 따지며,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사탄의 교만방자한 본성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만일 사탄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유교와 도교의 전통문화 같은 것이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서로 화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데 왜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받아들이고도 함께 있으면 더욱 분열되느냐?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런 것들은 사탄에게서 온 것으로, 사탄이 사람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사탄의 것들은 외적으로 얼마나 근사하고 위대하든,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과 사람에게 살아내게 하는 것은 다 교만방자한 것이고, 다 궤사하고 사악한 본성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아무리 잘 위장할지라도, 지식이 아무리 풍부할지라도, 아무리 가정 교육을 잘 받았을지라도 사탄에게 패괴된 자신의 성정을 덮어 감추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네가 그를 성인(聖人), 완벽한 사람, 천사로 여기든, 또 그를 얼마나 순결하다고 여기든, 그가 겉으로 얼마나 잘 포장하든, 그가 뒤에서 하는 생활과 그가 유로하는 성정의 실질은 다 무엇이겠느냐? 틀림없이 전부 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 주변에 있는,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좋은 사람, 혹은 이전에 생각했던 좋은 사람, 또는 네가 숭배했던 우상에 대해 너는 지금의 분량으로 어떻게 보느냐? 우선 이런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 그가 성실한 사람인지, 사람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있는지 볼 것인데, 그가 하는 말과 일이 사람에게 덕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유로하는 소위 선이나 사랑, 좋은 것은 다 무엇이냐? 모두 거짓된 것이고 가식이다. 그 거짓의 배후에는 남에게 말하지 못할 사악한 목적이 있는데,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우상으로 여겨 숭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분명히 보았느냐? (분명히 보았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패괴시키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거기에 긍정적인 것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우선 사람이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느냐? (모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위인이나 어떤 간행물이나 방송을 막론하고 그들이 말하는 그런 선과 악은 정확한 것이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한 가지 사건이나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냐? (공정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이 세상과 이 인류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진리의 기준에 따라 가늠하느냐? (아닙니다.) 왜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없느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지식을 배우고 그렇게 많은 과학을 알았다면, 사람의 능력은 커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마저도 분별하지 못하느냐? 이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람은 진리가 구비되지 않았고, 과학과 지식은 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사람을 사악하게 하고 패괴시켜 사람에게 진리도, 생명도, 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사탄이 사람을 이렇게 사악하게 만들고 패괴시켰는데, 너는 사탄에게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 인류에게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아마 “당신이 말씀하신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나 집 없는 사람을 구제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자선단체에서 선을 행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는 것도 다 선행이 아닙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을 뭐라고 해야 하느냐? 사탄은 각종 방식과 각종 학설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그것이 사람을 패괴시킨다는 것은 모호한 개념이냐? 모호하지 않다. 그것도 실제적인 일을 얼마간 하지만 다 자신만의 속셈과 목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갖가지 외식하는 일과 혹세무민하는 일도 포함된다. 패괴된 인류도 사탄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어떤 관점과 학설을 제창하고, 또 왕조마다, 시기마다 어떤 학설을 제창하여 사람에게 사상을 주입시킨다. 그런 사상과 학설이 사람 마음속에 점차 뿌리내리게 되면, 사람은 나중에 그런 것에 따라 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이 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사탄과 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냐? 사탄과 하나가 되면 최종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탄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게 되지 않겠느냐? 이 일을 과감하게 인정하지 못하는구나. 그렇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사람이 곧 사탄이 되고, 사람의 본성도 사탄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왜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다고 하느냐? 이것은 그것이 일을 저지르고 유로한 것에서 해부하여 본성을 정한 것이지, 근거 없이 사탄이 사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사탄이 사악하다는 말만 한다면, 너희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희는 속으로 ‘그건 말씀하실 필요도 없어요, 사탄은 원래 사악하니까요.’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사탄의 어떤 면이 사악하냐?”,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니까 사악한 것이죠.” 너희는 이렇게 대답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자세히 말해 주니, 너희는 사탄의 사악한 실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해 이렇게 알게 되었는데, 그럼 너희는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었느냐? 이것은 연관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연관은 너희에게 상처가 되었느냐? (아닙니다.) 너희에게 도움이 되었느냐? (네.)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 (매우 큽니다.) 나는 이런 두리뭉실한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 구체적으로 말해 보아라. 이 ‘매우 크다’는 도대체 얼마만큼 큰 것이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개념이 마음속에서 이미 어느 정도 명확해졌습니다.) 음, 또 누가 보충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이 방면의 실질을 교통함에 있어 사탄의 사악한 실질을 교통할 필요가 있느냐? (있습니다.) 왜 필요하냐? (사탄의 사악이 하나님의 거룩을 안받침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 그 말은 절반만 맞다. 다시 말해, 사탄의 사악함이 없다면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맞다. 그러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거룩은 사탄의 사악이 안받침해 낸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옳으냐? 네가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말한다면, 이 말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고유한 실질이다. 설령 하나님이 일을 하시면서 유로하신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에게 있는 이런 실질은 원래 있는 것이고, 자연적인 유로이며, 하나님 자신이 고유한 것이고, 그대로 있었는데, 단지 사람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은 사탄의 패괴된 성정 안에서 살고 사탄의 패괴 실질 안에서 살면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 거룩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말해 보아라, 먼저 사탄의 사악한 실질에 대해 교통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몇 가지 방면을 교통했지만, 사탄의 실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 어떤 사람은 아마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당신이 교통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내용인데, 어째서 계속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켰는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시고, 사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까?” 이제 이런 의문이 해결되었느냐? (해결되었습니다.) 어떻게 해결되었느냐? (하나님의 교통을 듣고 사악에 대해 분별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사악에 대한 분별과 정확한 정의가 있게 된 뒤에 사악의 구체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표현, 근원, 실질도 다 분명하게 보고 나서 다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말해야 비로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고 그것이 바로 거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거나 인식할 수 있다. 내가 사탄의 사악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혹은 이 인류 가운데서 사람이 했던 어떤 일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일들은 거룩과 연관시킬 수 있다고 착각할 것이다. 이런 관점은 그릇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내가 사탄의 실질에 관하여 지금 이렇게 교통했는데, 그럼 너희는 최근 몇 년 동안의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역사에 대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하여 어떤 인식이 있게 되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듣기 좋은 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 너 자신이 경력한 하나님의 거룩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뿐이냐? 하나님의 사랑만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이것은 너무나 단편적이지 않느냐? 단편적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랑 외에 하나님께 또 다른 방면의 실질이 있는데, 너희는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명절, 풍속, 미신을 혐오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혐오한다고만 말했는데,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혐오한다는 뜻이냐? (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의 거룩에는 실제 내용은 없고 단지 혐오만 있는 것이냐? 너희는 속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사악한 것들을 혐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추리가 아니냐? 그것은 일종의 추정과 판단이 아니냐? 너희가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함에 있어 가장 기피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실제를 떠나는 것입니다.) 실제를 떠난 도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가장 기피해야 할 것이다. 또 있느냐? (추리, 상상입니다.) 추리와 상상, 이것도 가장 기피해야 하는 한 가지이다. 왜 추리하거나 상상하지 말아야 하느냐? 추리해 내고 상상해 낸 것은 정말 본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실질이냐? (아닙니다.) 또 무엇을 기피해야 하느냐? 듣기 좋은 단어를 나열해 하나님의 실질을 묘사하는 것을 기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기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부풀려 과장하는 것이 아니냐? 허튼소리 하는 것이 아니냐? 추리하고 판단하는 것은 허튼소리 하는 것이고, 듣기 좋은 단어만 골라 말하는 것 역시 허튼소리 하는 것이다. 또 있느냐? 근거 없이 찬미하는 것 역시 허튼소리 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의 이런 허튼소리를 들으면 누림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누림이 없다는 말의 동의어는 무엇이냐? (‘괴롭다’입니다.) 듣고 있으면 괴롭다! 하나님이 한 무리 사람들을 인도하고 한 무리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는데, 이 무리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늘 알아듣지 못한다. “하나님은 좋은가?”라고 물으면 “좋아요!”라고 대답하고, “얼마나 좋은가?”라고 물으면 “아주아주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아주아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묘사해 봐라.”고 하면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아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허튼소리 하는 것이 아니냐? 이 허튼소리는 방금 너희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패괴된 성정을 증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지 않으냐? (유사합니다.) 그럼 너희는 방금 허튼소리 한 것이 아니냐? 허튼소리 하는 것은 대부분 어디에서 오느냐? (사탄에게서 옵니다.) 사탄에게서 온다. 허튼소리 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의 무책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네.) 네가 인식하지도 못하고 허튼소리를 하면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네가 지식을 배워 좀 추리할 줄 알고 논리를 안다고 다 써먹고, 또 여기에도 사용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까지 사용하는데, 하나님이 들으면 괴롭지 않겠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알아가려고 한단 말이냐? 듣기에 거북하지 않으냐?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인식한 만큼 말하고 솔직한 말을 하고 실제적인 것을 말해야지, 겉치레로 말하거나 아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다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사탄은 성정이 교만방자하여 비행기 태워 주면 좋아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면 좋아한다. 인류가 배운 듣기 좋은 말을 한데 나열하여 안겨 줘야 흐뭇해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추어올리고 아첨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찬미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 찬미와 아첨은 증오하고 아예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이 함부로 하나님께 찬미하고 서원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아예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네가 인식하지 못했으면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인식했다면 실제적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에 어떤 실제 내용이 있는지, 너희는 구체적인 인식이 있느냐? 지금은 함부로 허튼소리 못하겠지? 허튼소리 하지 않겠다고 입을 봉하고 있어도 안 된다. 그래도 인식은 조금 있지 않느냐? 너희는 생각하고 있느냐? 지금은 착실하게 대하는구나, 그렇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제가 패역을 유로할 때나 과오가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 형벌이 임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임하거나 자신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환경이 임했을 때, 이 방면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셨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 이것은 경력 가운데서 본 것이다, 그렇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사람을 인솔하고 사람을 주재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사람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 괴롭힘 속에서 살고 있다고 교통해 주신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사역은 모두 거룩하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교통하신 내용에서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고 괴롭힘을 당해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아주 실제적이다. 그것은 참된 인식이다. 또 다른 인식이 있느냐? (제가 이해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전에 사탄이 했던 말과 사탄이 했던 일에 대해 교통해 주셨는데, 거기에서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무엇은 먹을 수 있고 무엇은 먹을 수 없다고 알려 주신 말씀에서 유로된 것은 다 매우 깨끗하고 매우 직설적인 것이라고 교통해 주셨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만 보충하겠습니다.) 위의 몇 사람이 말한 것을 듣고 나서 너희는 누구의 말에 그나마 ‘아멘’이라 하겠느냐? 누가 말하고 교통한 것이 오늘 우리가 교통한 화제와 가깝고 더욱 실제적이냐? 마지막 자매가 교통한 것은 어떠냐? (좋습니다.) 네가 그의 말에 아멘 한다면 그가 한 어떤 말이 핵심을 찔렀느냐? 직접적으로 말해 보아라, 아는 만큼 교통해 보아라, 틀려도 괜찮다. (금방 자매가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사탄처럼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보았습니다.) 맞다, 그것은 한 방면이다. 이 말을 너희들은 다 들었겠지? (네.) 그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이 자매를 위해 박수를 쳐 주자. 아주 좋다! 이 두 차례의 교통에서 너희는 그래도 어느 정도 수확이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아직 계속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실질을 알아가는 이 과제는 매우 깊어서 하루아침에 되거나 한두 마디 말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는 사탄의 패괴된 성정의 여러 방면, 지식이나 철학이나 사람의 사상관점, 그리고 사람 자신의 여러 방면의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실질을 알아감에 있어 너무나 큰 장애물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런 화제를 들었을 때, 아마 어떤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어떤 것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떤 것은 아예 실제와 연관시키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너희의 인식을 좀 듣고 나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내가 교통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말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거룩의 실질을 인식하려는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말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인식한 것을 형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은 아주 간단하고 또 내가 말한 적도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며, 어떤 인상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이 말을 기억했는데, 이건 아주 좋다. 정말 괜찮다. 출발이 아주 좋다. 나는 너희가 깊다고 여기거나 이르지 못한다고 여기는 이런 화제에 대해 너희들이 서로 많이 교통하기 바란다. 많이 교통해도 이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누군가 너희에게 많이 지도해 줄 것이다. 너희가 지금 이를 수 있는 이 부분만이라도 많이 교통하면, 교통할 때 성령이 역사하여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을 알아가고 인식하는 것은 각 사람의 생명 진입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 너희가 소홀히 하지 말고 또한 그것을 장난으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함에 있어 기초 중의 기초이고 토대 중의 토대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글귀나 도리에서 살고 있다면, 설령 사람이 소위 진리의 표면적인 말에 따라 행하면서 산다고 해도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공백이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통하도록 하자.

2014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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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⑤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⑥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⑦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⑧안받침: 한 사물을 통해 다른 한 사물을 두드러지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