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 그리스도의 발표(선집)

목차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하나님의 권병 (2)

우리 계속해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이 화제에 대해 교통하자. 이 화제에 대해 지난 두 번에 걸쳐 두 부분의 내용을 교통했는데, 첫 부분의 내용은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관한 것이다. 이 두 부분의 내용을 들은 후에, 너희는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지위,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얼마 생기지 않았느냐? 이런 이해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에 대한 더 실질적인 인식과 확신이 생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 오늘, 여기에서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병’, 이 방면의 내용에 관해 교통하겠다.

거시적인 각도와 미시적인 각도에서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권병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대표하는 특유한 표현이자 또한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대표하는 한 방면의 특정한 실질이다. 이 특유한 표현과 이 특정한 실질은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권병은 오직 조물주만이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조물주만이, 즉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이런 표현과 실질을 갖고 있다. 왜 하나님의 권병을 언급하겠느냐? 하나님 자신의 권병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권병과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특수성이 있느냐? 여기에서 언급하니, 또 어떤 특별한 의의가 있느냐? 이것은 너희 각 사람마다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절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권병’, 이 화제는 언제나 막연한 뜻을 띠고 있어, 사람이 인식하려고 해도 비교적 힘들게 느껴지고, 또 말하는 내용이 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사람이 닿을 수 있는 인식은 하나님 권병의 실질과 언제나 거리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마다 현실 생활에서 사람이 체득할 수 있는, 사람이 닿을 수 있는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이나 갖가지 현상에서 점차적으로 인식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권병’, 이 말은 비록 사람에게 심오하여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을 주지만, 하나님의 권병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류와 동행하며 일분일초를 보내고 있고, 인류를 인도하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실제 생활 속에서 분명히 하나님 권병의 가장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고, 체득할 수도 있다. 이 가장 실제적인 면은 하나님의 권병이 진실로 존재함을 충분히 실증할 수 있고, 또한 충분히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런 권병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깨닫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였다. 만유를 창조한 후, 하나님은 또 만유를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는 동시에 또 만유를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한다’, 이것은 어떤 개념이냐?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어떻게 현실과 맞추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한다’는 이 사실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겠느냐?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은 일부분의 행성이 아니고 일부분의 피조물이 아니며 더욱이 일부분의 인류도 아니라,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에서 볼 수 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주 천체의 각 행성에서 지구상의 각 종류의 생물에 이르기까지, 또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속에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한다’는 말의 ‘만유’에 대한 정확한 정의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권병을 시행하는 범위이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는 범위이다.

이 인류가 있기 전에 우주 천체가 존재하였다. 거시적 각도에서 보면, 이 우주 천체가 얼마나 오래 존재하고 있든지 하나님의 주관하에서 규칙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어느 행성이 언제 어느 위치까지 돌아가는지, 어느 행성이 언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어느 행성이 어느 궤도에서 운행하는지 또 언제 사라지거나 바뀌는지 다 추호도 차이가 없다. 이런 행성들이 있는 위치와 그것들 사이의 거리에는 모두 엄격한 법칙과 정확한 수치가 있고, 그것들의 운행 궤적, 운행 속도, 운행 법칙과 그것들이 언제 어느 위치까지 운행하는지에는 모두 정밀한 수치와 특정한 법칙이 있다. 천만년 이래, 그것들은 모두 이 법칙 속에서 운행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어떤 오차도 없었고, 그 어떤 힘도 그것들의 궤적과 규칙을 바꾸거나 파괴할 수 없었다. 이런 정밀한 수치와 특정한 운행 법칙은 모두 조물주 권병의 명정에서 왔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조물주의 주재와 주관하에서 규칙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인류는 거시적인 각도에서 어렵지 않게 일부 법칙과 수치를 발견하고, 또한 사람이 해석하지 못하는 일부 특이한 법칙이나 현상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고, 조물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이 조물주 권병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지만, 인류의 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들은 모두 갈수록 만물이 생존하고 운행하는 규율과 법칙이 비밀스럽고 방대한 암흑에너지의 주재와 주관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실의 존재로 인류는 만물의 운행 법칙 속에서 한 분의 ‘능력자’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의 능력은 비범하다. 비록 아무도 그의 참모습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그는 시각마다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고 있기에, 그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그의 주재를 초월할 수 없다. 이 사실 앞에서 인류는 만물의 생존 법칙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시에 인류는 또 이 법칙은 사람이 분명히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법칙은 자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주재자가 주관하고 있는 것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것은 다 인류가 거시적 방면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권병이다.

미시적 각도에서 보면, 지구상에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산천, 호수, 바다, 육지 그리고 사람이 겪고 있는 사계절과 각종 동식물, 미생물과 인류를 포함해, 땅에서 생존하고 있는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주관과 주재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주관과 주재로 만물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나타나거나 사라지게 되고 또한 만물의 생존에 법칙이 생기게 되어 이런 법칙 속에서 번식하게 되었는데, 이 법칙은 어떤 사람과 물질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초월할 수 없느냐? 유일한 답은 바로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권병으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동시에 또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된다. 이 모든 것의 움직임과 변화는 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인해 생기거나 없어지게 된다. 온역을 놓고 말하면, 그것은 갑자기 출현하므로, 아무도 그것의 출처와 그것이 나타나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며, 온역이 퍼지는 곳마다 정해진 사람은 다 그 액운을 피하기 어렵다. 인류 과학의 각도에서 보면, ‘온역’은 일종 악성 혹은 유해 미생물이 퍼져서 초래된 것인데, 그것이 전파되는 속도와 범위 그리고 전파되는 방식은 인류의 과학으로는 미리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인류가 설령 전력을 다해 각종 온역을 저지할지라도 온역이 한 번씩 닥칠 때마다 그것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이나 동물은 다 인류가 통제할 수 없다.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예방하고 저지하고 연구하는 것뿐이다. 매번 온역 자체가 생기고 사라지는 근원은 오히려 아무도 모르고 또한 통제할 수도 없다. 온역이 닥치고 범람하면 인류가 가장 먼저 취하는 조치는 바로 백신을 연구 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흔히 인류의 백신이 연구 개발되기도 전에 온역은 부지중에 사라진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사라진 것이냐? 어떤 사람은 세균이 통제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계절의 변화로 인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런 황당한 논조들이 성립되는지, 과학으로는 분명히 해석할 수 없고 정확한 답을 줄 수도 없다. 인류는 이런 황당한 논조에 직면하는 것 외에 온역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고 두려워할 뿐이다. 이런 온역이 도대체 어떻게 오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도대체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인류가 과학만 믿고 의지할 뿐, 조물주의 권병을 시인하지 않고 조물주의 주재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인류는 영원히 그 답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권병으로 인해 생기고 생존하고 없어지며, 또한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생기고 생존하고 없어진다. 어떤 것은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떠나는데, 인류는 그것의 근원을 볼 수 없고, 그것의 법칙을 장악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그것이 오고 가는 이유도 모른다. 만물 중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비록 사람들이 모두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귀로 듣고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비록 모두 인류와 관련이 있고, 비록 인류가 자신도 모르게 각종 현상의 특이함과 법칙 심지어 그 기이함까지도 체득할 수 있지만, 인류는 만물에서 발생하는 사물의 배후에 있는 조물주의 마음과 조물주의 생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그 배후에 모두 많은 이야기가 있고 많은 내막이 있는데, 인류가 조물주를 멀리하고, 조물주의 권병이 만물을 주재하고 있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인류는 영원히 조물주 권병의 주재 아래에서 발생되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주관과 하나님의 주재는 사람의 상상과 사람의 지식 범위를 뛰어넘으며, 또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고, 사람의 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섰는데, 모두 피조된 인류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하나님의 주재를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병으로 인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는데, 본다고 해서 꼭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본다고 해서 꼭 시인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믿음은 사물의 근원과 진상에 대한 사람의 인지와 체험의 정도와 심도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주관하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더욱이 볼 수도 없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영원히 하나님께 이런 권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의 권병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조물주를 진정 너의 주로, 너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모두 조물주의 주재와 갈라놓을 수 없다

너희는 모두 이미 성년에 접어들었는데, 일부 사람은 이미 중년에 이르렀고, 일부 사람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지 않던 데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기까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부터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역주: 체험)하기까지, 너희는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얼마만한 인식이 있게 되었느냐? 사람의 운명에 대해 또 어떤 깨달음이 있게 되었느냐? 사람이 일생에서 하는 일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겠느냐? 너희가 이 몇십 년 살아오면서 소원대로 이루어진 일이 얼마나 되었더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 발생한 일이 얼마나 많았더냐?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일이 얼마나 많았더냐? 아직 결과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직 자신도 모르게 시기를 기다리고 천의(天意)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았더냐? 또한 사람을 막막하게 하고 속수무책이 되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더냐? 그 어떤 사람이든 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기대로 가득한데, 자신의 일생에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고, 먹고 입을 것이 근심 없고, 벼락출세하기를 바란다. 아무도 자신이 일생 동안 가난하고 비천하고 불우하고 재앙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사람이 예상하고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지난날에 겪은 모든 것에 대해 그저 흐리멍덩하여 지금까지 무엇이 천의인지 모르고 또한 그것에 관심도 없이 그저 동물처럼 무지몽매하게 사는 데까지 살아갈 뿐, 무엇이 운명인지에 관심이 없고, 왜 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도 사람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깨달음도 없고, 죽기 직전까지도 인생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른다. 이 부류의 사람은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고, 짐승에 속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사람이 만물 가운데 살면서 이 세계가 가져다준 사람에게 필요한 각종 물질을 누렸고, 이 물질세계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았지만, 사람이 경력한 것, 즉 마음과 영으로 경력하고 체험한 것은 모두 어떤 물질과도 상관이 없고,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심령 깊이 체득한 것이고,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체득은 사람이 운명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해하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런 체득으로 은연중에 한 분의 주재자가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있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음을 자주 느낀다. 사람은 이 모든 사물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운명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있고, 동시에 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앞길을 위한 조물주의 안배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사람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런 것은 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운명에 대한 사람의 깨달음과 태도가 무엇이든, 이 사실은 그 어떤 사람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이 매일 어디로 가게 될지, 매일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사람,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어떤 일이 발생될지, 이런 것은 사람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냐?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모든 일이 발생하는 것을 미리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일이 어떻게 발전되어도 통제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은 사람이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빈번히 일어난다. ‘생활상의 사소한 일’의 발생과 그 발전 방식이나 법칙은 끊임없이 인류에게 어떤 일이 나타나든 다 우연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발전하는 과정과 그것의 필연성도 다 사람의 소원대로 바뀌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 발생하는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통해 모두 인류에게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훈계를 전달하고 있고, 또한 인류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다는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동시에 또 인류가 운명을 자신의 손에 장악하려고 망상하는 이 야심과 욕망을 반격하고 있다. 이런 반격은 마치 인류에게 호된 뺨을 한번 또 한번 치는 것 같아 인류에게 어쩔 수 없이 인류의 운명을 도대체 누가 주재하고 주관하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인류도 야심과 욕망이 계속 파멸되고 파괴되는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운명의 안배에 순응하여 현실을 받아들이고 천의를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한번 또 한번 발생하는 ‘생활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인류의 평생 운명에 이르기까지,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또한 ‘조물주의 권병은 뛰어넘을 수 없다’는 이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조물주의 권병은 지고지상하다’는 이 영원불변한 진리를 전달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모두 조물주의 주재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고, 모두 조물주의 지배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와 만물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모두 조물주의 권병과 갈라놓을 수 없는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인류는 만물의 법칙 속에서 조물주의 지배와 주재를 깨닫게 되었고, 만물의 생존 법칙 속에서 조물주의 주관을 보게 되었으며, 만물의 숙명 속에서 조물주가 만물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방식을 귀납해 내게 되었다. 그리고 인류와 만물의 생사 윤회 속에서, 인류는 만물의 생령에 대한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대해 진정 체험하게 되었고, 또한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가 세상의 모든 법령, 규정, 제도를 초월하고 그 어떤 힘과 세력까지도 초월한다는 것을 진정 보게 되었다. 이로부터 인류는 조물주의 주재는 그 어떤 피조물도 파괴할 수 없는 것이고, 조물주의 명정 아래에 있는 만사만물은 그 어떤 세력도 침범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인류와 만물은 바로 이런 천상의 법칙과 계율 속에서 한 세대 또 한 세대 생존하고 번식해 온 것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조물주의 권병이 참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비록 인류가 객관적인 법칙 속에서 조물주의 주재를 보고, 만사만물에 대한 조물주의 명정을 보았지만, 또 조물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원칙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고, 또 자신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를 진정 인식하고 시인하고 받아들이고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어느 누가 조물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인해 조물주가 또 인류의 평생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는 것도 진정 믿고 시인할 수 있느냐? 또 어느 누가 사람의 운명이 조물주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 이 사실을 진정 꿰뚫어 볼 수 있느냐? 인류가 조물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이 사실에 직면할 때 어떤 태도로 조물주의 주재를 대해야 하는지는 지금 이 사실에 직면한 각 사람이 해야 할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이 일생 동안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섯 가지 관문

사람마다 일생 동안 몇 개의 중요한 관문을 거쳐야 한다. 그런 중요한 관문은 한 사람의 평생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기초적이자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절차이다. 다음으로 나는 사람이 일생 동안 반드시 거쳐야 할 이 몇 개의 관문을 간단하게 나열하겠다.

첫 번째 관문, 사람의 출생

한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성별인지, 어떤 생김새를 갖는지, 어느 시각에 태어나는지, 이런 것은 사람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의 몇 가지 내용이다.

이 관문의 몇 가지 사항(원문: 環節)은 모두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인데, 조물주가 일찍이 명정해 놓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어떤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인위적인 요소도 다 조물주가 명정해 놓은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조물주가 이미 그 사람의 평생 운명에 대한 안배의 첫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뜻한다. 이런 세부적인 것은 다 조물주가 일찍이 명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의 이후의 운명이 어떠하든지 그의 출생 배경은 명정해 놓은 대로이지, 추호도 그 사람의 평생 운명에 영향받지 않고, 또한 조물주가 그 사람의 평생 운명을 주재하는 것에도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1. 새 생명의 탄생은 조물주의 안배에서 온다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의 출생 지점과 가정, 사람의 성별, 사람의 생김새, 사람의 출생 시간, 어느 한 가지가 사람이 선택한 것이냐? 아주 뚜렷한바, 사람은 모두 ‘피동적’으로 태어나고,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어떤 곳에서, 어떤 시간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생김새를 가지게 되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어떤 가정의 일원이 되고 어떤 가족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은 선택권이 없이 조물주의 안배하에 고정된 배경에서 태어나고, 특정한 가정, 성별, 생김새를 갖게 되며, 사람의 일생과 밀접히 관련되는 태어난 날짜와 시간도 갖게 된다. 이 중요한 관문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자세히 따져보면, 사람의 출생에 관계되는 이 몇 가지 내용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조물주의 명정과 인도가 아니라면, 그는 어디로 갈지, 어디에 머물러 있을지 모르고, 그에게는 가족도 귀속도 진정한 집도 없게 된다. 그러나 조물주가 정성스레 안배하여 그에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주어 부모도 귀속도 가족도 있게 하는데, 그때로부터 이 생명의 인생 노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새 생명의 출현은 조물주의 안배에서 온다. 그리고 이 새 생명이 곧 소유하게 될 모든 것도 다 조물주가 부여한 것이다. 이 새 생명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유랑체에서 점차 피와 살이 있고 형상이 있는 피조된 인류가 된다. 그는 생각을 갖고 있고 호흡할 줄 알며, 추위와 따뜻함을 느낄 수 있고, 물질세계의 피조물이 종사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에 종사할 수 있으며, 머지않아 피조된 인류가 반드시 겪어야 할 모든 세상사도 겪게 된다. 한 사람의 출생에 대한 조물주의 명정은 조물주가 그 사람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을 곧 부여할 것임을 뜻하고, 한 사람의 탄생도 그가 조물주에게서 자신의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임을 뜻하며, 또한 그때로부터 그가 다른 형식으로 조물주의 공급 아래에서 살게 되고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서 살게 될 것임을 뜻한다.

2. 인류의 여러 가지 출생 배경이 생기는 근원

사람은 흔히 다음에 환생하게 되면 꼭 으리으리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난다면 백설공주처럼 생겨 보는 사람마다 귀여워하고, 남자로 태어난다면 백마 탄 왕자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싶어 하는 지나친 욕망을 갖는다. 흔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갖가지 환상을 품는 동시에 또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하는데, 자신의 가정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자신의 생김새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며, 자신의 성별에 대해 불만스러워하고, 심지어 자신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에 대해서까지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그런 생김새를 갖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고,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생김새를 갖게 되든지 사람이 조물주의 경영을 위해 여러 가지 배역을 맡고 여러 가지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이 취지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조물주가 보기에, 한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든, 그 사람이 남자이든 아니면 여자이든, 그 생김새가 어떠하든 이런 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고, 다 조물주가 전체 인류를 경영함에 있어 각 시기에 있게 되는 하나하나의 작은 부호와 표징에 불과하다. 그러나 각 사람의 진정한 귀숙과 결말은 결코 그 한 시기의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매번 부여받는 사명에 의해 결정되고, 조물주의 경영 계획이 완결될 때 그 사람에 대해 조물주가 내리는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이른바 결과가 있으면 꼭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게 되는 것처럼, 한 사람의 탄생은 그 사람의 전생과도 금생과도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 사람의 이번 윤회의 끝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의 탄생은 그 사람의 새 윤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전의 윤회가 한 사람의 전생이라면, 새로운 윤회는 자연히 한 사람의 금생인 것이다. 한 사람의 탄생이 그 사람의 전생과 금생에 모두 관련이 있는 이상, 그 사람의 출생과 연관되는 지점, 가정, 성별, 생김새 등 각각의 요소들도 그 사람의 전생과 금생에 모두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람의 출생과 연관되는 각각의 요소들이 그 사람 전생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금생의 운명으로 인해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갖가지 출생 배경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평범한 민족으로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대단한 국가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남방에서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북부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사막 지대에서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녹색 지대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의 출생은 즐거운 이야기와 웃음소리를 가져와 사람들의 축하를 받지만 어떤 사람의 출생은 오히려 애곡과 재난을 가져와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귀염둥이이지만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찬밥 신세이고, 어떤 사람은 용모가 뚜렷하지만 어떤 사람은 눈, 코, 입이 비뚤고, 어떤 사람은 생김새가 준수하지만 어떤 사람은 생김새가 추하고, 어떤 사람은 한밤중에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오히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 태어난다…… 사람의 갖가지 출생 배경은 각 부류 사람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안배로 결정되고, 또한 그 사람이 금생에 맞이할 갖가지 운명도 결정하고, 그 사람이 금생에 맡게 될 갖가지 배역과 사명도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은 다 조물주의 주재와 명정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런 명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출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하나도 없으며, 더욱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두 번째 관문, 사람의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면 그런 가정 환경과 가정 교육이 있게 되는데, 그런 것은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도 바로 한 사람이 일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두 번째의 중요한 관문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관문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것이고 명정된 것이다.

1. 조물주는 각 사람을 위해 정해진 성장 배경을 안배하였다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어떤 인ㆍ사ㆍ물의 훈도와 영향을 받게 될지, 어떤 지식과 재능을 배우게 될지, 어떤 습관을 기르게 될지,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부모와 가족이 누구이고 주위의 인ㆍ사ㆍ물이 무엇일지는 사람이 선택할 수 없고, 그 사람과 주위의 인ㆍ사ㆍ물의 관계가 어떠하고 주위의 인ㆍ사ㆍ물이 그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마찬가지로 다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이 모든 것은 다 누가 결정하고 누가 안배하는 것일까?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인ㆍ사ㆍ물이 형성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조물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조물주는 각 사람을 위해 특정한 출생 배경을 안배하였는데, 물론 각 사람을 위해 특정한 성장 배경도 안배하였다. 한 사람의 출생이 주위의 인ㆍ사ㆍ물에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성장도 주위의 인ㆍ사ㆍ물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도 오히려 부유한 생활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사람의 출생은 부귀한 집에 몰락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궁핍한 생활 환경에서 자라는 것과 같다. 그 어떤 사람의 출생이든 다 특정한 규칙 아래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의 성장 배경에도 그 규칙이나 필연성은 없다. 이런 것은 다 사람이 상상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운명에서 생기고, 한 사람의 운명으로 결정된다. 물론, 결국 그것은 한 사람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명정에 의해 결정되고, 한 사람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에 의해 결정된다.

2. 사람의 각종 성장 배경은 갖가지 역할을 만들어 낸다

한 사람의 출생 배경은 그 사람에게 기본적인 성장 환경과 배경을 마련해 주고, 한 사람의 성장 배경도 그 사람의 출생 배경으로 인해 생긴다. 그 시기에 사람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사람의 생각과 머리는 여러 가지 새로운 사물을 접촉하며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람은 각종 새로운 사물을 접촉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성장한다. 사람이 귀로 듣는 것, 눈으로 보는 것,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 의해 사람의 사상 세계는 점차 채워지고 활기차게 된다. 사람이 접촉할 수 있는 각종 인ㆍ사ㆍ물, 배울 수 있는 각종 상식, 지식, 재능과 사람이 영향받고 주입받으며 훈도받은 갖가지 사상에 의해 그 사람의 평생 운명이 주도되고 영향받게 된다.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는 말과 구비하게 되는 사상은 모두 그 사람의 성장 환경을 떠날 수 없는데, 그 환경은 그 사람의 부모, 형제와 주위의 갖가지 인ㆍ사ㆍ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성장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 기간에 생활하게 되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그 시기에 그 사람이 접촉하게 되는 각종 인ㆍ사ㆍ물에도 달려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이 일찍이 명정해 놓은 것이라면, 그 사람이 성장하는 기간에 생활하게 되는 환경도 당연히 명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선택이나 사람의 취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의 계획에 달려 있고, 조물주의 정성스런 안배에 달려 있으며, 그 사람의 평생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성장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 접촉하는 사물은 모두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와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복잡한 연대 관계는 사람이 예견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이 장악할 수 없는 것이자 또한 아무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각 사람의 성장 배경은 모두 각기 다른 사람, 각기 다른 사물에 관련되고, 많은 사람과 많은 사물에 관련된다. 이런 커다란 관계망은 아무나 지배하거나 안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물주 외에 각종 인ㆍ사ㆍ물이 나타나고 지속되고 사라지는 것을 장악할 수 있는 일인일물(一人一物)은 없다. 바로 이런 하나하나의 커다란 인ㆍ사ㆍ물의 관계망 속에서 조물주의 명정 아래에 있는 각 사람이 성장하였고, 또한 각 사람의 성장 과정을 위한 각종 환경이 형성되었으며, 동시에 또 조물주의 경영 사역에 필요한 각종 역할이 만들어졌고, 각 사람에게 자신의 사명을 순조롭게 완수하기 위한 튼튼하고 힘 있는 기초가 다져졌다!

세 번째 관문, 사람의 독립

사람마다 성장 과정을 겪고 나면 필연적으로 점차 성숙해진다. 다음으로 그 사람이 해야 할 것은 철저히 자신의 성장 단계를 떠나고 부모를 떠나 성인의 역할을 맡아 독립적으로 앞길에 직면하고, 성인이 마땅히 직면해야 할 모든 인ㆍ사ㆍ물에 직면하고, 자신의 운명에 곧 나타나게 될 모든 것들(원문: 環節)에 직면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번째 관문이다.

1. 사람은 독립한 후 조물주의 주재를 초보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그 사람의 전체 인생길의 예비기이고 그 사람의 평생 운명의 초석이라면, 한 사람의 독립은 바로 그 사람 평생 운명의 서두이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그 사람의 평생 운명을 위해 모은 재산이라면, 한 사람의 독립은 바로 그 사람이 그런 재산을 소비하거나 점차 늘리는 시작이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독립할 때 어떤 사회 환경에 직면하게 될지, 어떤 직업과 사업에 직면하게 될지, 이런 것은 모두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고, 부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서 좋은 전공과목을 택하여 졸업한 후에 마음에 드는 직업을 얻게 되는데, 인생길에서 내디딘 첫걸음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기능을 배우고 익혔지만,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도무지 찾지 못하고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며, 더욱이 자신의 사업이 있다고는 말할 나위도 없는데, 인생길에서 내디딘 첫걸음이 곳곳마다 좌절을 겪고 우여곡절이 가득하고 앞날이 암담하고 인생이 막막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고생스럽게 공부해도 결국에는 일류 대학과 인연이 닿지 않아 마치 명예나 지위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운명이 정해진 듯한데, 인생길의 첫 번째 소원이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앞길이 순조로울지 아니면 험난할지 평생 처음으로 사람의 운명에 변수가 가득함을 느끼고, 그에 따라 인생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지만, 또한 기대도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비록 높지 않지만 책을 쓸 수 있어 제법 유명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일자무식이지만 상업에 종사해 이익을 얻고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사람이 어떤 직업을 택하든, 무엇을 생계로 삼든, 잘 택하고 잘못 택하는 것을 사람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사람의 소원과 결정에 근거하는 것이냐?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벌고, 가만히 있으면서 바람도 맞지 않고, 햇볕에 쬐이지도 않고, 그럴듯하게 입고, 어디를 가든 체면이 서고,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가문을 빛내고 싶어 한다. 사람의 소원이 이처럼 ‘완전’하지만, 사람은 인생길의 첫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점차 사람의 운명이 그처럼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처음으로 또 사람이 담대하게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고 아무 거리낌 없이 여러 꿈을 가질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능력과 권력이 없고 자신의 미래를 장악할 능력도 없음을 진정 의식하게 된다.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영원히 사람의 꿈과 거리가 있고, 영원히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뜻대로 되지 않으며, 사람은 이런 현실 속에서 흡족함을 얻을 수 없고 만족함을 얻을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거듭 시도해 보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고, 각종 경로를 찾아 자신의 밥줄과 전망을 위해 또 자기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과 희생을 한다. 하지만 마지막 결과는 사람이 설령 사람의 노력으로 자신의 꿈과 소원을 이룰지라도 영원히 자신의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사람이 어떻게 몸부림치든 자신의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 크든 작든, I.Q가 높든 낮든, 의지가 있든 없든, 운명 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고, 크고 작음이나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람이 평생 동안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지, 재부를 얼마큼 소유하는지는 그 사람의 부모에게 달려 있지 않고, 사람의 재능과 사람의 노력이나 야심에도 달려 있지 않고, 조물주의 명정에 달려 있다.

2. 사람은 부모를 떠나 정식으로 인생의 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성숙되었을 때는 부모를 떠나 독립적으로 ‘세상을 헤쳐 나갈’ 조건을 구비하게 된다. 이때는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역할을 맡기 시작할 때이고, 또한 바로 이때에 그 사람의 평생 사명은 흐릿하던 데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환해지기 시작한다. 비록 사람이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한평생 맡은 역할과 사명은 그 사람의 부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실질상 부모와의 그 친밀한 관계는 사람이 차츰 독립해 나감에 따라 조금씩 파열된다. 육체의 각도에서 보면,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서 여전히 불가피하게 부모를 의지하지만, 객관적 사실에서 사람이 일단 성장기를 지나게 되면 사람의 모든 것은 철저히 부모와 아무런 관계도 몫도 없게 되고, 사람이 맡은 역할은 모두 사람 자신이 혼자서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한 사람의 일생에서 맡은 책임은 출산하고 부양하는 것 외에 형식상에서 그 사람에게 성장 환경을 제공해 줄 뿐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의 운명이든 오직 조물주의 명정과 관련되고, 그 사람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지는 아무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명정해 놓은 것이고, 사람의 부모까지도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운명을 놓고 말하면, 사람마다 독립적이고 사람마다 각자의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의 부모든 그 사람의 평생 운명에 대해 조금도 가로막지 못하고, 그 사람이 한평생 맡은 역할에 대해서도 더 큰 영향을 주는 작용을 전혀 일으키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도록 명정되었든지, 그것은 다 그 사람의 평생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일 뿐, 전혀 그 사람의 평생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전혀 그 사람이 어떤 운명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모도 한 사람이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줄 수 없고, 가족 중 그 누구도 한 사람이 평생의 역할을 잘 맡도록 협조해 줄 수 없다. 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지, 어떤 생존 환경에서 자기의 역할을 맡게 되는지는 완전히 그 사람의 평생 운명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조물주의 명정 아래에 있는 어떤 사람의 사명도 다 그 어떤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람마다 자신의 특정한 성장 환경에서 성숙되면서 한 걸음씩 자신의 인생길에 들어서고, 조물주가 그 사람을 위해 안배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며, 자신도 모르게 자연히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인생의 자리에 들어서고, 조물주의 명정을 위해, 조물주의 주재를 위해 피조물의 직책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네 번째 관문, 사람의 결혼

한 사람이 나이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그 사람이 점점 성숙해짐에 따라 그 사람과 부모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자신의 출생, 성장 배경과 점점 멀어진다. 그 대신 그 사람은 부모와 다른 생활 방식으로 자기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 시기에 사람은 더 이상 부모가 필요하지 않고 동반자가 필요한데, 자신과 함께 일생을 보낼 동반자―그 자신의 평생 운명과 밀접히 관련되는 배우자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사람이 독립한 후에 직면하게 되는 인생의 첫 번째 큰일은 결혼인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네 번째 관문이다.

1. 결혼은 사람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각 사람에게 있어 모두 일생의 대사이다. 그것은 한 사람이 진정으로 각종 책임을 짊어지기 시작하여 점차 각종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 데의 출발점이다. 사람이 아직 결혼을 접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모두 결혼에 대해 환상으로 가득할 것인데, 그 환상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여자는 자기의 짝이 백마 탄 왕자일 거라고 환상하고, 남자는 자기의 짝이 백설공주일 거라고 환상한다. 사람의 이런 환상은 결혼에 대한 각 사람의 요구에 모두 조건이 있고 모두 자기의 요구 기준이 있음을 뜻한다. 비록 현재 이 사악한 시대에 각종 정보들로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곡해가 끊임없이 주입되어 사람에게 결혼을 대하는 이 일에서 더 많은 부가 조건이 생기게 되었고, 또한 사람에게 결혼에 대해 여러 가지 부담과 여러 가지 이상한 태도가 생기게 되었지만, 이미 결혼을 경험해 본 사람은 다 사람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가 있든 결혼은 자신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사람은 일생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도대체 누가 자기의 배우자가 될지는 모른다. 비록 사람이 모두 결혼, 이 일에서 자기의 주장과 생각이 있을지라도, 최종에 정말 자기의 짝이 될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지 사람은 예견할 수 없고,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그가 너의 구애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그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지, 그가 너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지, 이것은 모두 너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꼭 너와 함께 한평생을 보낼 수 있는 그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 사람이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삶 속으로 들어와 네 삶의 동반자가 되고 네 운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네 운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너의 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결혼은 수없이 많지만 서로 다르다. 즉, 얼마나 많은 결혼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얼마나 많은 결혼이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는지, 얼마나 많은 결혼이 동서를 뛰어넘고 남북을 연결하는지, 얼마나 많은 결혼이 남녀가 서로 잘 어울리고 두 집안이 걸맞은지, 얼마나 많은 결혼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얼마나 많은 결혼이 고통스럽고 비통한지, 얼마나 많은 결혼이 사람을 부러워 질투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결혼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사람에게 무시당하는지, 얼마나 많은 결혼이 즐거움이 넘치고 얼마나 많은 결혼이 눈물로 가득 차 사람을 절망케 하는지…… 인류가 각양각색의 결혼에서 드러낸 것은 결혼에 대해 충성하고 죽어도 변치 않는 것이거나, 결혼에 대해 아끼고 아쉬워하고 헤어지지 않고 버리지 않는 것이거나, 또 결혼에 대해 속절없어 하고 몰이해하거나, 배반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것이다. 결혼 자체가 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든, 고통이든 조물주가 명정해 놓은 결혼에서 맡은 각 사람의 사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반드시 완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혼의 배후에 있는 각 사람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조물주가 일찍이 명정해 놓은 것이다.

2. 결혼은 쌍방의 운명에서 생긴다

결혼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관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평생 운명으로 인해 생기는데, 한 사람 평생 운명의 중요한 부분(원문: 環節)이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사람의 취향을 기초로 하지 않고, 그 어떤 외부 조건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전적으로 두 사람의 운명에 달려 있고, 그 결혼을 한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명정과 안배에 달려 있다. 겉으로 보면, 사람의 결혼은 인류의 후손 번성을 위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사람의 결혼은 단지 한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가는 의식에 불과하다. 사람이 결혼에서 맡게 된 역할은 결코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결혼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맡게 된 각종 역할과 그 사람이 완수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주위 인ㆍ사ㆍ물의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이상, 그 사람의 결혼도 반드시 주위의 인ㆍ사ㆍ물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더욱이 그 주위의 인ㆍ사ㆍ물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한 사람이 독립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인생길은 한 걸음씩 자신의 결혼과 관계되는 인ㆍ사ㆍ물로 향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머지않아 그 사람의 결혼에 나타날 다른 한 사람도 한 걸음씩 그런 인ㆍ사ㆍ물에 접근하게 된다. 조물주의 주재하에, 서로 상관이 없던 두 사람은 관련된 운명으로 인해 점차 한 결혼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기적같이 한 가족이 되고 기적같이 ‘한 줄에 묶인 두 메뚜기’가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될 때, 그의 인생길은 그의 짝에게 영향을 주고 그의 짝과 관련될 것이며, 그의 짝의 인생길도 그의 평생 운명에 영향을 주고 그의 평생 운명과 관련될 것이다. 즉, 사람과 사람 간의 운명은 서로 관련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평생 사명을 진정 독립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역할을 진정 독립적으로 맡을 수 있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출생은 커다란 관계망에 관련되고, 그 사람의 성장도 복잡한 관계망에 관련된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결혼도 불가피하게 방대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존재하고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그 관계망 속의 각 구성원과 관련되고, 또한 그 관계망 속의 각 사람의 운명에도 영향을 준다. 하나하나의 결혼은 결코 사람의 출생 가정과 성장 배경, 사람의 생김새와 나이, 사람의 소질과 재능 등등 여러 방면의 요소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한 쌍방이 공동으로 맡은 사명과 관련된 운명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가 지배하고 안배하는 사람의 운명에서 생기는 결혼에 대한 유래이다.

다섯 번째 관문, 사람의 자손

사람은 결혼을 한 후에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자손이 있고 어떤 자손이 있게 될지, 이것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다 사람의 운명에 근거하고 조물주의 명정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다섯 번째 관문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다른 사람의 자식 역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부모가 되는 이 역할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 두 역할의 전환은 한 사람에게 다른 각도로 인생의 다른 시기를 겪게 하고, 한 사람에게 다른 인생 경험도 주어 그 다른 인생 경험에서 조물주의 같은 방식의 주재를 체험하게 하고, 또한 아무도 조물주의 명정을 초월할 수 없고 아무도 조물주의 명정을 바꿀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체험하게 한다.

1. 사람의 자손은 결코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지 않다

사람의 출생, 사람의 성장과 결혼은 다 각기 다른 정도로 사람에게 뜻대로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일을 가져다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이나 생김새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모를 좋아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성장 환경에 대해서도 많이 불만족스러워하며 트집을 잡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을 놓고 말하면, 뜻대로 되지 않는 여러 일 중에서 결혼이 가장 사람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출생, 성장과 사람의 결혼에서 사람에게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았든, 그것을 겪어 본 사람은 다 사람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고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하고 부모가 누구이고 배우자가 누구인지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천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자신이 전반생에서 이루지 못한 모든 소망을 다 다음 세대에게 두어 다음 세대가 자기 전반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든 일을 대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자손에 대해 헛된 생각에 빠진다. ‘자식이 딸이라면 외모가 꽃처럼 아름답고, 아들이라면 준수하고 멋지고, 딸이라면 각종 문예 방면의 특기가 다 뛰어나고, 아들이라면 공부와 운동에 모두 뛰어나고 재능이 출중하고, 딸이라면 부드럽고 상냥하고 현숙하고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고, 아들이라면 총명하고 유능하고 이해심이 많고, 딸이든 아들이든 다 어른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자상하게 보살피고 사람들에게 두루 사랑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이때 사람은 인생에 대해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또 새로운 욕망의 불길이 타오른다. 사람은 스스로 이 한평생 이렇게 무능하고 장래성이 없고 더 이상 두각을 나타낼 기회도 희망도 없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모든 희망과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과 꿈을 다 다음 세대에 두고 다음 세대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며, 자식들이 조상과 가문을 빛내거나 지위가 대단하거나 큰돈을 벌거나 유명 인사가 되기를 바란다. 어쨌든 벼락출세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계획과 상상은 아주 완벽하지만, 사람이 자녀를 얼마나 두게 될지, 자녀의 생김새와 능력은 어떨지 등은 다 부모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게다가 자녀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더욱더 부모가 장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다음 세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기를 바라고,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힘이 없으면서 오히려 자식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조종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주제넘는 짓이 아니겠느냐? 어찌 사람의 무지몽매함이 아니겠느냐? 사람은 자신의 자손에게 온갖 심혈을 기울이지만, 결국은 자손이 얼마나 되고 자손이 어떠할지는 다 사람의 계획과 소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 그지없지만 자식을 많이 두고, 어떤 사람은 거액의 재산을 갖고 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으며, 어떤 사람은 딸 하나만 원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기 어렵고, 어떤 사람은 아들 하나만 원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자손으로 인해 화를 입으며, 어떤 부부는 총명하고 영리한데 자식은 오히려 멍청하고 우둔하며, 어떤 부모는 부지런하고 소박한데 자식은 오히려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며, 어떤 부모는 정직하고 착한데 자식은 오히려 간사하고 악랄하며, 어떤 부모는 심신이 건강한데 오히려 장애 자녀를 낳고, 어떤 부모는 평범하여 별로 하는 일이 없는데 자식은 오히려 능력을 잘 발휘하며, 어떤 부모는 지위가 천한데 자식은 오히려 두각을 나타낸다……

2. 사람은 다음 세대를 부양하고 난 후에 운명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결혼이라는 이 단계를 겪는 때는 대략 30세 정도인데, 이 시기의 사람은 아직 무엇이 천명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다음 세대를 부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음 세대가 성장해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은 신세대의 사람이 지난 세대 사람의 모든 경력과 인생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것에서 사람은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또한 다음 세대가 가는 길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계획과 선택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실들로 사람은 각 사람의 운명이 다 명정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게 되고 마음속의 욕망의 불길도 조금씩 꺼지게 된다…… 이 시기의 사람은 인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몇 개의 중요한 절차를 거의 겪어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태도가 생기게 된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 앞날과 미래에 대해 아직도 얼마나 큰 기대가 있겠느냐? 50세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여자가 있겠느냐? 50세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기의 백설공주를 꿈꾸는 남자가 있겠느냐? 50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되고 싶어 하는 여성이 있겠느냐? 대다수의 노년 남성들이 사업에서 아직도 젊은 사람만큼 추진력이 있겠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남자든 여자든 이 나이까지 살게 되면 결혼에 대해, 가정에 대해, 자녀에 대해 모두 상대적으로 이성적이고 실제적인 태도가 생기고, 자신의 선택이 거의 없게 되고, 운명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충동도 거의 없게 된다. 사람의 경력을 놓고 말하면, 사람은 일단 이 나이가 되면 자연히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 자녀들은 제각기 타고난 복이 있고 사람의 명은 하늘이 정하니까.’라는 이런 관점이 생기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 세상의 온갖 풍파, 인생의 불우, 간난신고를 겪고 난 후에, 흔히 “이건 운명이야!”라는 말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총결한다. 비록 이 말은 사람의 평생 운명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총결하고 깨달은 것들을 털어놓고 사람의 부득이함을 털어놓은 것이어서 통찰력이 있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인식과는 오히려 차이가 아주 커서 조물주의 권병에 대한 인식을 전혀 대체할 수 없다.

3. 사람이 운명을 믿는다고 해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인식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따른 후에, 너희가 운명에 대해 인식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 어떤 실질적인 구별이 있게 되었느냐? 조물주의 명정과 조물주의 주재를 참으로 인식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게 바로 명이야”라는 이 말에 대해 깊은 감명과 체험을 갖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안배와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기도 싫어한다. 마치 사람이 바다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기다릴 뿐, 운명에 맡길 뿐 사람의 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여 더 이상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사는 데에 도달할 수도 없다. 즉, 사람이 운명에 맡긴다고 해도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과는 다르고, 운명을 믿는다고 해도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며, 사람이 운명을 믿는 것은 그 사실과 그 겉면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일 뿐, 조물주가 어떻게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지를 인식하는 것과는 다르고, 또한 사람이 조물주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는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과도 다르며, 더욱이 사람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것과도 다르다. 한 사람이 운명만 믿고 심지어 운명에 대해 깊은 감명만 있을 뿐, 그 속에서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순복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한평생은 비극이 될 것인데, 여전히 일생을 헛되이 살면서 공허하고, 여전히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하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상의 피조된 인류가 되지 못하고, 조물주에게 인정받지도 못한다.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참으로 인식이 있고 경력이 있는 사람의 정형은 당연히 적극적일 것이고 결코 소극적이거나 부득이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마음속에는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서도 사람의 일생은 다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정확한 정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고 자신이 보낸 인생의 각 단계를 돌아보면, 걸음마다 고생스럽든 순조롭든 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안배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정밀한 계획이자 세밀한 안배가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오늘까지 걸어와 조물주의 주재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의 평생에 있어 크나큰 복임을 보게 된다! 만약 한 사람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소극적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안배한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있고, 그에게 순복하는 태도가 없음을 실증한다.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일을 대하는 태도가 적극적이라면,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진실로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안배한 모든 것에 순복하려는 더 진실한 소망이 생기게 되고, 더욱더 하나님으로 그의 운명을 지배하게 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도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운명에 대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를 모를 때 스스로 자기의 성미대로 짙은 안개 속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며 그 노정을 걷는 것이 매우 고생스럽고 또 매우 슬프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사람이 인식하게 될 때, 총명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택하여 ‘자기의 두손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드는’ 고통스러운 날들에서 떠나고, 계속해서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른바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없는 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참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날은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의의가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어디에 있든, 어떤 직책을 겸임하든 사람의 생존 방식과 추구 목표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다 끝없는 슬픔과 가시지 않는 고통이어서 사람으로 차마 다시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한다. 사람은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진정한 인생 얻기를 추구해야만, 점차적으로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4. 사람은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를 모르고 하나님의 주재를 모르기 때문에, 운명을 대함에 있어 사람에게는 늘 대항하는 정서가 있고, 늘 거역하는 태도가 있다. 사람은 또한 늘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현재의 상황을 바꾸고 자기의 운명을 바꾸려고 망상한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곳곳마다 난관에 부딪친다. 이런 영혼 깊은 곳의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런 고통은 사람으로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는 동시에 또 사람의 생명을 이렇게 헛되이 소모시키고 있다. 사람의 이 고통은 어떻게 초래된 것일까? 하나님의 주재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냐,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쁘기 때문이냐? 아주 뚜렷한바, 이 양자는 다 아니다. 결국 모두 사람이 걸은 길 때문에 초래된 것이고, 사람이 택한 생존 방식 때문에 초래된 것이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아직 이런 것을 체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참으로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 네가 하나님이 너를 위해 주재하고 안배한 모든 것이 너에게 너무나 유익하고 너무나 큰 보호가 됨을 참으로 인식하게 될 때, 너는 이런 고통이 차츰 경감되는 것을 느낄 것이고, 너의 온 몸과 마음도 점차 홀가분해지고 자유로와지고 해방될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정형을 놓고 말하면, 비록 주관적으로는 이전의 그런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고, 주관적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사람이 조물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실제적인 가치와 의의를 참으로 깨닫지 못하고, 또한 조물주의 주재를 참으로 인정하거나 순복하지도 못하며, 더욱이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찾고 구하며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약 조물주가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참으로 순복하지 못한다면, ‘사람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는 이 관점의 부추김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고, 또한 사람이 운명과 조물주의 권병에 극력 대항하여 초래된 고통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사람은 또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기 매우 어렵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 매우 어렵다. 사람의 이런 정형을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이전의 생존 방식에서 떠나고, 이전의 인생 목표에서 떠나며, 자신의 이전 생존 방식, 이전의 인생관, 이전의 추구와 소망과 꿈에 대해 총결하고 해부한 다음 다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보면서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등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사람에게 정확한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사람으로 더욱더 진리를 깨달으면서 살고 인성 있게, 사람 모양이 있게 살게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네가 인류가 추구하는 각종 인생 목표와 형형색색의 생존 방식을 반복적으로 고찰하고 자세히 해부해 볼 때, 너는 그 가운데 인류를 창조한 조물주의 본의와 부합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사람으로 조물주의 주재와 보살핌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는 함정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런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음으로 네가 해야 할 것은 바로 낡은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가지 함정을 멀리하며, 너의 인생을 하나님이 너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하게 하고 너를 위해 안배하게 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인도에 순복하기만을 구하고,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듣기에는 쉽지만 하자면 어렵다. 어떤 사람은 그런 고생을 참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런 고생을 참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협력하기 원하고 어떤 사람은 협력하기 싫어한다. 협력하기 싫어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이 소원이 없고 이런 심지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벗어나려고 하고,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를 달가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시험해 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두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권병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의 비애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고, 명리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며, 짙은 안개 속에서 운명과 맞서 싸우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조물주의 존재를 보고 조물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잘못된 길에서 돌아설 줄 모르고, 수렁에서 두 발을 빼내지 못하고, 잘못을 고집하며 깨닫지 못하고, 강퍅한 마음을 품고 있고, 계속 수렁에서 발버둥치며, 완고하게 조물주의 주재와 겨루고 끝까지 대항하면서 회개의 태도가 조금도 없다가 여지없이 참패를 당할 때에야 포기하기를 택하고 뉘우치기를 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의 진정한 비애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복하기를 택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벗어나기를 택하는 사람은 오히려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관문, 사람의 죽음

분주하고 순탄치 않게 얼마나 많은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기복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잊지 못할 날들을 지냈는지, 얼마나 많은 춘하추동을 보냈는지 모르는데,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에서 중요한 몇 개의 관문을 넘어 어느덧 노년에 이르렀고, 세월의 흔적은 낙인처럼 온몸에 가득 남았다. 즉, 사람의 몸매는 더 이상 늘씬하지 않고,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되고, 또렷하게 빛나던 두 눈은 이미 어두침침해지고, 주름과 기미가 가득한 피부는 예전의 보들보들하고 매끌매끌한 피부를 대체하고, 청력이 떨어지고, 이가 흔들리다 빠지고, 반응이 무디고 동작이 느려졌다…… 이때의 사람은 타오르는 청춘 시절과 철저히 작별을 고하고, 한 사람 일생의 황혼기, 즉 한 사람의 노년에 접어들게 된다. 이어서 사람이 곧 직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죽음인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다.

1. 조물주만이 인류의 생사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

한 사람의 출생이 그 사람의 전생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전생 인연이 끝난 것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그 사람의 평생 사명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평생 사명이 끝나는 것이다. 조물주가 각 사람을 위해 정해진 출생 배경을 설치해 놓은 이상, 필연코 각 사람을 위해 정해진 죽음의 배경도 안배해 놓았다. 다시 말해, 각 사람의 출생은 다 우연한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의 죽음도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의 생사는 다 전생, 금생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 한 사람의 출생 배경이 어떠한지, 죽음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다 조물주의 명정과 관련된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숙명, 즉 한 사람의 운명이다. 한 사람의 출생에 여러 가지 설이 있으니, 한 사람의 죽음에도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특별한 배경이 있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수명이 생기게 되었고, 여러 가지 죽음의 방식과 시간도 생기게 되었다. 즉, 어떤 사람은 몸이 건장하고 힘이 넘치지만 젊어서 일찍 죽고, 어떤 사람은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지만 오래 살고 천수를 다하고 죽으며, 어떤 사람은 비명에 횡사하고 어떤 사람은 자연사하며, 어떤 사람은 객사하고 어떤 사람은 가족 옆에서 두 눈을 감으며, 어떤 사람은 공중에서 죽고 어떤 사람은 지하에서 죽으며, 어떤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어떤 사람은 재난에서 죽으며, 어떤 사람은 아침에 죽고 어떤 사람은 밤에 죽는다…… 사람은 다 그럴듯하게 태어나 멋지게 살다가 장렬하게 죽기를 바라지만, 그 숙명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조물주의 주재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지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 그 방식과 시간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설령 사람이 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애써 회피하고 거부할지라도, 죽음은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조용히 사람에게 다가오는데, 아무도 자신이 언제 죽는지를 모르고, 아무도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도 모르며, 더욱이 아무도 자신이 어디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주 뚜렷한바, 인류의 생사 전권은 결코 인류 자신이 장악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계의 어떤 생령이 장악하는 것도 아니라, 유일무이한 권병을 지닌 조물주가 장악하는 것이다. 인류의 생사는 결코 자연계의 어떤 법칙에서 생겨난 산물이 아니라, 조물주 권병의 주재로 인한 결과이다.

2.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 사람이 노년에 접어들 때 직면하게 되는 것은 더 이상 가족을 먹여 살리거나 인생의 원대한 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일생과 작별할 것인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마무리 지을지, 어떻게 생명의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사람이 다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은 죽음에 대해 탐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죽음의 뒤에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다른 미지의 세계가 존재하는지를 사람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감히 죽음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죽음에 정확히 직면하지 못하게 하며, 죽음에 관한 화제를 극력 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각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되었고, 동시에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죽음이란 이 사실에 신비한 베일이 씌워졌으며, 각 사람의 심령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도 드리워졌다.

사람이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짐을 느끼고 자신이 죽음과 점점 더 가까워짐을 의식하게 될 때, 사람은 마음속에 은은한 공포가 생기고 영문을 모르는 두려움이 생긴다.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은 사람으로 더욱더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때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빨리 끝난단 말인가?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단 말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의의는 도대체 뭘까? 살아가는 가치는 도대체 뭘까? 설마 명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설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 사람이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든 없든,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의 정도가 얼마나 깊든, 어쨌든 사람의 심령 깊은 곳에는 늘 비밀을 탐구하려는 욕망이 있고, 인생에 대한 몰이해가 있으며, 아울러 인간 세상에 대한 사람의 아쉬움과 그리움도 뒤섞여 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탐구하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아쉬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아마 참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너무나 많은 걱정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안심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에도 이것을 걱정하고 저것을 걱정하며,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의 가족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의 재산을 내려놓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그런 걱정이 있으면 죽음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고통을 면할 수 있는 듯하고, 마치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과 어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죽음을 겪을 때의 고독과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어렴풋이 있는데, 자기의 가족을 떠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더 이상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고 더 이상 이 물질세계를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가족과 함께 하는 것에 습관이 된 고독한 영혼은 이렇게 외로이 죽어서 자신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

3. 일생 동안 명리를 추구하다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고독한 영혼에게 조물주의 주재와 명정으로 부모와 가정이 있게 되었고, 인류의 일원이 되는 이런 기회가 있게 되었으며, 인생을 체험할 기회가 있게 되었고,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경험할 기회가 있게 되었으며, 조물주의 주재를 깨닫고 조물주의 만물 창조의 기묘함을 인식할 기회도 있게 되었고, 더욱이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귀복할 기회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칫하면 사라지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참으로 붙잡지 않았다. 사람은 필생의 정력을 들여 모두 운명과 맞서 싸우고, 일생 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에 바삐 보내고, 명예와 직위 사이를 오가고 있다.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혈육 간의 정, 돈과 명리인데, 사람은 그것을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사람들은 다 운명이 기구하다고 원망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고 탐구해야 할 이런 문제, 즉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는 무엇인지’는 뒷전에 두고 일생이 얼마나 되든 사람의 청춘이 다하기까지, 귀밑머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얼굴이 노화되기까지, 명리가 사람이 노쇠해지는 걸음을 막지 못하고 돈이 사람 심령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기까지, 누구나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누구나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로지 명리만을 위해 바삐 뛰어다닌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마지막 관문에 직면하게 될 때에야 설사 사람에게 거액의 재산이 있고 고귀한 신분과 대단한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원래 자리―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영혼으로 돌아갈 것임을 진정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부모가 있게 될 때, 사람은 부모가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고, 사람에게 재산이 있게 될 때, 사람은 돈이 사람의 지지대이고 삶의 자본이라고 여기며, 사람이 지위를 소유하게 될 때, 사람은 지위를 단단히 붙잡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고 한다. 사람은 곧 죽게 될 때에야 평생을 쏟아부어 추구했던 것들이 본래 다 금방 사라져 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고, 어느 하나도 가져갈 수 없고, 어느 하나도 사람에게 죽음을 면케 해 줄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하나도 고독한 영혼의 귀로에 위로나 동반자가 될 수 없고, 더욱이 어느 하나도 사람을 구원하여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물질세계에서 얻은 명예나 이익은 사람에게 잠시적인 만족감을 주고, 사람에게 일시적인 기쁨과 위로를 주고, 사람에게 심령이 편안하다는 가상을 주어 사람으로 방향을 잃게 하였다. 그러므로 망망한 인해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안식을 얻고 위로를 얻고 심령의 평온 얻기를 간절히 바라던 사람은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게 되었다. 사람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등등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할 이런 문제도 아직 모르고 있을 때, 사람은 명리에 유혹되고 미혹되고 통제되어 한번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화살 같이 지나고 세월이 베틀의 북과 같이 빨리 흘러 어느덧 사람은 그렇게 일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사람이 곧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람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것과 사람에게는 더 이상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그 어떤 것도 잡을 힘이 없다는 것을 차츰 의식하게 된다. 그때에야 사람은 본래 자신이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난 아이였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임을 진정 느끼게 된다. 그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삶의 의의가 무엇인지, 사람이 왜 이 세상에 와야 하는지를 사색하기 시작한다. 또한 바로 그때 사람은 정말로 내세가 있는지, 정말로 하느님이 있는지, 정말로 보응이 있는지를 더욱더 알고 싶어 한다…… 사람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인생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더욱 알고 싶어 하고, 죽음이 다가올수록 심령의 공허감을 더욱 느끼며,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은 날로 커져 간다. 죽음이 임박할 때 사람이 이런 것을 나타내게 되는 원인을 따져보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 가지는 사람이 머지않아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의지해 왔던 명예나 이익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이 머지않아 홀로 다른 낯선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인데, 마주하는 것은 사람을 뒷걸음치게 하는 신묘막측한 미지의 세계이며, 그 낯선 세계에서는 사람에게 그 어떤 가족이나 의탁할 곳도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인이 죽음을 마주한 모든 사람으로 마음이 편치 않게 하고, 죽음에 임한 각 사람으로 전에 없던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한 사람이 진정 이 단계까지 걸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누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지, 또 누가 인류를 생존하게 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의 자본이자 또한 한 사람이 생존함에 있어 반드시 구비해야 할 토대이지,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리고 어떻게 명리를 추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나, 어떻게 같은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출중해지고 어떻게 더 부유하게 살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이나, 더욱이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어떻게 다양한 경쟁에서 여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배우는 것을 구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이 평생을 들여 장악한 각종 생존 기능은 비록 사람으로 풍족한 물질적 누림을 가질 수 있게 하지만, 전혀 사람의 심령에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으로 계속 방향을 잃게 하고, 자신을 다스리기 어렵게 하여 인생의 의의를 깨달을 기회를 한번 또 한번 놓치게 하고, 또한 사람에게 어떻게 정확히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근심을 가져다주는데, 사람의 일생은 이렇게 망쳐진다. 조물주가 각 사람을 대하는 것은 다 공평한 것이다. 그는 각 사람에게 일생의 기회를 주어 그의 주재를 체험하게 하고 그의 주재를 인식하게 하지만, 사람은 단지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에라야, 죽음이 코앞에 닥칠 때에라야 문득 깨닫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너무 늦은 것이다!

사람은 다 한평생 돈과 명리를 추구하며 이 둘을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지지대로 삼는데, 마치 돈과 명리를 가지게 되면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올 때에야 사람은 돈과 명리가 사람에게 그렇게 요원하고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그처럼 연약하고 힘없고 그처럼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며, 죽음 앞에서는 그처럼 고독하고 의지할 데가 없고 그처럼 무기력하며, 원래 사람의 생명은 돈과 명리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든지 사람에게 얼마나 높은 지위가 있든지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이 빈궁하고 미소하며,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없고 명리가 사람의 죽음을 면케 할 수 없으며, 돈이든 명리든 다 사람의 수명을 일분일초도 연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계속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더욱 무서워한다. 그때에야 사람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되고, 또한 한 사람이 살든 죽든 그것은 다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된다.

4.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하여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다

한 사람의 탄생은 고독한 영혼이 인간 세상에 와서 인생을 체험하게 되는 시작이고, 또한 조물주가 한 영혼에게 조물주의 권병을 체험하도록 안배하는 시작이다. 물론, 이것은 한 사람이나 한 영혼에게 있어 조물주의 주재와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람은 다 일생 동안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안배해 놓은 운명의 법칙 속에서 생존한다. 양심이 있고 이지가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있어 일생의 수십 년 세월 속에서 조물주의 주재를 시인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는 데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따라 각 사람을 놓고 말하자면, 수십 년의 인생 경험에서 사람의 운명에는 다 명정이 있음을 인식하고, 사람 삶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거나 총결해 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사람은 이런 인생 체험을 인정하는 동시에 점차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게 되고, 사람 심령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며, 어떤 것이라야 사람을 진정한 인생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또 한 사람이 조물주를 경배하지 못하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하지 못한다면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 즉 한 영혼이 다시 조물주와 마주하게 될 때, 그의 심령은 분명 끝없이 두렵고 불안할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인간 세상에서 수십 년 동안 생존하면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운명이 누구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면, 사람이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수십 년의 인생을 겪고,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인식이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올바른 터득이 있는 사람이고,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에 대해 깊은 인식이 있는 사람이며, 또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 진정한 깨달음과 경력이 있는 사람이고, 더욱이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물주가 사람을 만든 의의를 깨달았고, 사람이 마땅히 조물주를 경배해야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이 조물주에게서 왔으니 또 반드시 머지않은 어느 날 조물주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또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조물주의 안배이고, 사람이 죽는 것이 조물주의 주재이며, 살든 죽든 다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명정되어 있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런 것을 진정 깨달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연히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할 것이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내려놓고 머지않아 임할 모든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순복하면서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안배해 놓은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할 것이며,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고 무턱대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고, 피조된 인류의 본분을 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얻기 어려운 한번의 기회로 삼는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정확한 인생관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축복과 인도 아래에서 살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빛 속에서 다닐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한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병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할 필요 없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조물주가 사랑하고 열납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고, 흔쾌히 인생의 마지막 한 관문을 맞이할 수 있다. 아주 뚜렷한바, 욥은 죽음을 대하는 이런 태도를 구비했고,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이런 조건도 구비했기에, 순조롭게 자신의 인생길을 다 걸었고, 평생의 사명을 완수하고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갔다.

5. 욥은 일생 동안 추구하고 수확한 것으로 인해 담담히 죽음에 직면할 수 있었다

성경에 욥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욥 42:17) 말하자면, 욥은 죽을 때 아무 유감도, 아무 고통도 없이 자연사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욥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께 칭찬받았고 사람들에게도 기념되었다. 그의 일생은 인류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있고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칭함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있고 사탄에게 시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굳게 증거했기에, 하나님 입으로부터 ‘의인’이란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인 수십 년의 기간에 그는 이전보다 더 가치 있게, 더 의의 있게, 더 착실하게, 더 담담하게 살아갔다. 왜냐하면 그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의 시련을 가져왔고, 그의 의로운 행위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나타남과 직접적인 말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을 받아들인 수십 년의 기간에 욥은 인생의 가치에 대해 더 실제적으로 느끼고 깨닫게 되었으며, 조물주의 주재에 대해서도 더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되었고, 조물주의 축복과 거두어 감에 대해 더욱 정확하고 확정된 인식이 있게 되었다. 욥에 관해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욥을 축복해 준 것이 이전에 축복해 준 것을 뛰어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것은 다 욥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함에 있어 더욱 유리한 조건이 되었고, 또한 욥이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함에 있어 더욱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욥을 놓고 말하자면, 그가 나이가 차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절대로 자신의 재산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 어떤 걱정도 없었으며, 그 어떤 유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신의 결말에 대해 염려하지도 않았다. 욥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나타낸 그 일련의 표현은 현재의 사람 중 몇이나 도달할 수 있느냐? 왜 이렇게 간단한 겉면의 태도에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 원인은 단 하나이다. 즉,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이런 주관적인 추구하에서 살아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시인하고 순복하는 전제하에서 그의 인생의 중요한 몇 관문을 거치고 그의 인생의 말년을 보내면서 그의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했던 것이다. 욥이 일생 동안 무엇을 경력했든,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는 그에게 행복한 것이었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복은 결코 조물주의 축복이나 칭찬으로 말미암은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로 말미암은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물주의 주재에 대한 그의 점차적인 인식과 진실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더욱이 그가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는 동시에 직접 체험한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와 그 기간에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서로 알아가고 서로 이해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긴 한 차례 한 차례의 따뜻한 체험과 기억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사람이 조물주의 뜻을 깨달아 얻게 된 위로와 즐거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람이 조물주의 위대함, 기묘함, 사랑스러움과 신실함을 보고 난 후에 갖게 된 경외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욥이 아무 고통도 없이 죽음에 직면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죽으면 곧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일생의 추구와 수확이 그로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게 하였고, 그로 담담하게 그의 생명에 대한 조물주의 거두어 감에도 직면하게 하였으며, 더욱이 그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성결하게 조물주를 대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욥이 소유한 행복을 현재의 사람은 얻을 수 있느냐? 너희에게는 그 행복을 소유할 조건이 있느냐? 조건이 다 구비되어 있다면, 왜 현재의 사람은 욥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느냐? 왜 현재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 죽음에 직면할 때 어떤 사람은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들부들 떨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혼절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소리 내어 통곡할 것인데, 이런 것은 절대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야 사람이 돌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이런 난감한 표현을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까닭은 주로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깨달음이 없고 더욱이 진실한 순복도 없기 때문이며, 사람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장악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생사를 장악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6.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분명한 인식과 경력이 없다면, 운명과 죽음에 대한 그 사람의 인식도 필연적으로 흐리멍덩하다. 사람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분명히 보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관과 하나님의 주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며, 사람이 그런 주재를 뿌리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죽음 앞에서 늘 끝없이 유언하고 늘 걱정하며 늘 유감을 남긴다. 사람은 마음에 부담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고, 내키지 않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아리송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초래된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사람이 살아가게 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고 죽게 되는 것도 필연적인 것인데, 아무도 이런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다. 사람이 아무 고통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고, 아무 아쉬움과 걱정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관문에 직면하고 싶어 한다면, 그 유일한 경로는 바로 아무 유감도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인간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유감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바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 순복하고,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인류의 분쟁을 멀리하고 죄악을 멀리하고 사탄의 매임에서 떠나 욥처럼 조물주의 인도 아래에서,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고, 자유와 해방을 받으면서 살고, 가치 있고 의의 있게 살고, 떳떳하게 살 수 있으며, 욥처럼 조물주가 시련하고 거두어 가는 것에 순복할 수 있고, 조물주가 지배하고 안배하는 것에 순복할 수 있으며, 욥처럼 일생 동안 조물주를 경배하여 조물주의 칭찬을 받게 되고, 조물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듣게 되고, 조물주의 나타남도 보게 되며, 욥처럼 즐겁게 살다가 즐겁게 세상을 떠나고, 아무 고통도, 아무 걱정도, 아무 유감도 없게 되며, 욥처럼 빛 속에서 살고, 빛 속에서 인생의 각 관문을 넘기며, 빛 속에서 순조롭게 자신의 평생 길을 다 걸어가고 순조롭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즉, 피조물로서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고 체험하고 인식하고 난 후에 빛 속에서 떠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조물주가 칭찬하는 피조된 인류로서 조물주의 곁을 지키게 된다.

조물주의 주재를 알아가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상의 이 여섯 개의 관문은 조물주가 정상적인 각 사람에게 설정해 놓은, 일생에서 경력하게 될 몇 가지 중요한 절차이다. 각 관문은 사람에게 있어 모두 현실적인 것이고, 모두 사람이 초월할 수 없는 것인데, 다 조물주의 명정과 조물주의 주재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각 관문은 사람에게 있어 모두 중요한 난관이다. 어떻게 해야 이 각 관문을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을지는 현재 너희들이 직면하고 있는 아주 준엄한 문제이다.

인생의 이 수십 년은 길다면 긴 것이 아니고, 짧다면 또 짧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비록 연령상으로는 성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연령대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운명에 대한 인식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이 계속 늘어남에 따라 사람은 또 차츰 중년에 접어들게 된다. 비록 30~40세의 사람에게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 초보적인 체험이 있지만, 이 연령대 사람들의 인생과 운명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아주 모호하다. 어떤 사람은 4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이 만든 인류와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 만물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고, 인생이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따른 지 오래되고 이미 중년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정의가 없고 더욱이 참된 순복도 없다. 또 일부 사람들은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비록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조물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는’ 이런 실제 공과에 대한 진입도 전혀 없는데, 어리석기 그지없고 한평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 대한 사람의 체험과 운명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근거해 사람의 각 시기를 나눈다면, 대략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사람의 유년기, 즉 출생부터 중년까지 또는 출생부터 30세까지이다. 두 번째 시기는 사람의 성장기, 즉 중년부터 노년까지 또는 30세부터 60세까지이다. 세 번째 시기는 사람의 성숙기, 즉 노년부터 사망까지 또는 60세부터 사망까지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운명과 인생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그저 남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는 언사에만 머물러 있을 뿐, 그 어떤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이 단계에서 세워진 사람의 인생관과 여러 가지 처세 방식은 모두 아주 천박하고 아주 유치한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유년기이다. 사람은 인생의 여러 가지 풍상고초를 체험한 후에야 운명에 대해 진실한 깨달음이 있게 되며,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서 사람의 운명은 역전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조물주의 주재는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 의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성장기이다. 사람이 더 이상 운명과 맞서 싸우지 않고, 더 이상 각종 분쟁에 말려들기 싫어하고, 타고난 운명을 알고 하늘의 뜻에 따르며, 자기 일생의 공로와 죄과를 귀납하고 총괄하면서 자기의 일생에 대해 조물주가 판정해 주기를 기다리게 될 때,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성숙기이다. 사람의 이 3개 단계의 서로 다른 체험과 사람의 서로 다른 수확에서 보면, 정상적인 상황에서 각 사람이 일생에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수 있는 이런 기회는 결코 많은 것은 아니다. 만약 한 사람의 수명이 60세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은 30년쯤밖에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 더 오랜 시간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수명이 충분히 길어야 하고, 그 사람이 백세까지 장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법칙에 따라 보면, 한 사람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다’라는 이런 화제를 접하기 시작해서부터 조물주가 주재한다는 이런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까지, 또 사람이 조물주의 주재에 순복할 수 있기까지 비록 기나긴 과정을 겪어야 하지만, 손꼽아 보면 사람은 단지 30~40년밖에 안 되는 기회로 이런 성과를 얻을 뿐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복을 받으려는 욕망과 야심에 머리가 혼미해져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는 중요성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인간 세상에 와서 인생을 체험하고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는 이 소중한 기회를 아끼지 못하고, 피조물이 조물주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주 진귀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본체가 나타나는 것을 속히 보고 한시바삐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역이 최대한 빨리 끝나고 하나님이 최대한 빨리 사람의 결말을 안배해 주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은 대역무도한 사람들이고 극도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유한한 시간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잘 잡아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 사람들이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이고 대단히 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서로 다른 소망에서 두 가지 판이한 관점과 추구가 폭로되었다. ‘복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없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재 인식하기를 추구한 적이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살려고 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타락하는 자들이고 멸망할 자들이다.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내려놓을 줄 알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 원하며, 하나님의 권병에 순복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데, 이런 사람은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사는 사람이니, 반드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어떠하든 사람의 선택이 소용없고 하나님 사역의 길고 짧음도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지 않겠다면, 네가 또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에게 손해가 있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지 않고 자기 주장대로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맨 마지막에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뿐이다. 오직 사람이 하루빨리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을 인식해야만, 사람은 희망이 있게 되고 사람의 이 일생을 헛살지 않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

아무도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이상의 이런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운명에 대한 너희의 관점이 바뀌었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에 대해 어떤 인식이 있느냐?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권병 아래에서 각 사람은 능동적으로 또는 피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있고, 일생에서 어떻게 몸부림쳤든, 얼마나 많은 굽은 길을 걸어 왔든, 최종에는 모두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안배해 놓은 운명의 궤적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 권병의 뛰어넘을 수 없는 면이자 또한 조물주의 권병이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다. 조물주 권병의 뛰어넘을 수 없는 면, 또한 이런 방식으로 인해 만물은 법칙 있게 생존할 수 있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윤회하며, 또 이 세계는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날마다 해마다 앞으로 변해 나간다. 이런 사실은 지금 너희가 다 보았을 것이고, 깊든 얕든 다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깊고 얕음은 진리에 대한 사람의 경력과 인식에 근거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도 근거한다. 네가 진리 실제에 대해 인식이 얼마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경력이 얼마 있고, 하나님의 실질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인식이 얼마 있으면, 너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그만큼 깊은 인식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는 사람이 순복할 수 있는지에 근거해 존재하는 것이냐? 하나님에게 이런 권병이 있는 것은 사람이 순복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권병은 어떤 상황에서든 다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 자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고, 만물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다. 이 일은 사람이 변한다고 해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누구의 의지에 의해 변경되는 것도 아니며, 그 어떤 시간, 공간, 지리의 변동에 의해 변동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병은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할 수 있는지에 따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이 바뀌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어떤 태도이든,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은 전혀 바뀌어지지 않는다. 설령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고, 설령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병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변경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취향과 사람의 선택에 의해 바뀌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병은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나 없는 순간도 없으며, 천지는 없어져도 그의 권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자신이고, 그는 유일무이한 권병을 갖고 있으며, 그의 권병은 그 어떤 인ㆍ사ㆍ물, 공간, 지리의 속박과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자신의 권병을 시행하고 있고, 자신의 큰 능력을 창현하고 있으며, 자신의 경영 사역을 계속하고 있고, 만물을 주재하고 있으며,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고, 만물을 지배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자 또한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권병에 순복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태도와 실행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사람은 지금 마땅히 어떤 태도로 인식하고 대해야 하느냐? 이것은 각 사람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이다. 현실 생활에서 네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너는 마땅히 어떻게 하나님의 권병과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깨달아야 하느냐? 네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경력해야 하는지를 모를 때,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 너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는 속마음과 소원과 실제가 있다는 것을 표명할 수 있겠느냐? 우선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그다음 찾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림’이란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안배한 인ㆍ사ㆍ물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점 너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찾고 구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배치한 인ㆍ사ㆍ물에서 하나님의 고심을 살펴보고 깨닫는 것이고, 그 속의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해야 할 것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를 깨닫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효과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얻으려는 성과를 깨닫는 것이다. ‘순복’이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인ㆍ사ㆍ물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 조물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지를 체험하고, 조물주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공급해 주는지, 어떻게 사람 안에 진리를 심어 주는지를 체험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 아래에서 그 어떤 일에도 다 자연법칙이 있다. 너에게 하나님으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하고 주재하게 할 결심이 있다면, 너는 마땅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찾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병에 순복하기를 원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태도이자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각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는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추는 데에 공력을 많이 들여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하나님을 너의 유일무이한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받는 시작이다

‘하나님의 권병’에 관한 이 방면의 진리는 각 사람이 진지하게 대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진리는 각 사람의 인생에 관련되고, 각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련되며, 각 사람이 일생에서 지내 온 중요한 그 몇 관문과 관련되고,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권병을 마주해야 하는지에 관련되며, 각 사람의 마지막 귀숙에도 당연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필생의 정력을 들여 이런 것을 인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권병을 직시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너는 차츰 하나님 권병의 진실한 존재를 인식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권병을 시인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인 적도 없다면, 네가 얼마나 오래 살든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서는 인식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설령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몇십 년 되었을지라도 너에게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진실한 인식과 깨달음이 없다면, 네가 길 끝까지 갔을 때 너는 인생에 대해 아무런 수확도 없고,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데에 대한 너의 인식에는 필연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 아니냐? 그러므로 네가 인생길을 얼마나 걸었든, 너의 지금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 너의 앞길이 얼마나 멀든, 우선 너는 하나님의 권병을 시인하고 직시해야 하고, 하나님이 너의 유일무이한 주재자인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데에 관한 이런 진리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과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각 사람의 필수 과목이고, 각 사람이 인생을 알고 진리를 얻는 데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자, 사람이 날마다 직면해야 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본적인 공과와 생활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름길을 택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내가 알려 주겠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에서 도피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유일한 주이고, 하나님은 사람 운명의 유일한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고, 사람의 운명을 초월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크든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없고, 더욱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안배하고 좌지우지하거나 바꿀 수 없으며, 오직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유일무이한 권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조물주만이 인류의 유일무이한 주재자이다. 하나님의 권병은 피조된 인류를 주재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비피조물과 우주의 별하늘도 주재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바꿀 수 있는 일인일물(一人一物)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전히 현 상태에 불만족스러워하면서 자신에게 어느 방면에 특기가 있고 어느 방면에 능력이 있다고 여기고, 여전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서 현재의 처지를 바꾸려고 하거나 벗어나려고 하거나 혹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고,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나는 네가 고생을 사서 하고 스스로 창피를 당하고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만간 어느 날, 너는 너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고 너의 노력이 헛수고임을 알게 될 것이고, 운명과 맞서 싸우는 너의 야심과 욕망, 그리고 너 자신의 탈선 행위에 끌려 돌아오지 못할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고 또한 반드시 그로 인해 침통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네가 그 결과의 심각성을 볼 수 없지만, 네가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 진리에 대해 더욱더 깊이 경력하고 체험하게 될 때면, 너는 점차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이 말들이 가리키는 것과 그 속의 진실한 함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네가 도대체 마음이 있고 영이 있는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는지에 달렸다. 물론, 이것은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권병을 깨닫고 인식할 수 있는지도 결정한다. 만약 네가 너의 일생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느낀 적이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권병을 시인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너 같은 사람은 철저히 폐기되는데, 반드시 하나님이 혐오하여 포기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너 자신이 가는 길과 너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권병에 순복할 수 있어 점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실한 경력이 있게 되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병에 대한 진실한 인식과 하나님의 주재에 대한 진실한 체험을 얻게 되고, 참으로 조물주의 앞에 귀복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구원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한 체험과 순복이 있게 된다. 그들은 죽음에 직면할 때가 되면 욥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상태가 있게 될 것이고, 욥처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없고 자신의 소원도 없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피조된 인류의 참된 신분으로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2015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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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명정(命定): 명하여 정함.

②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처소, 본향을 뜻함.

③귀복(歸服): 돌아와 복종함.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