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 그리스도의 발표(선집)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

여러 번의 교통을 통해, 각 사람은 매우 깊은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하나님을 오래 믿었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본 적이 없고, 지금처럼 이렇게 진실로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느껴 본 적도 없다. 인식하는 부분에서든 아니면 실행하는 부분에서든, 많은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새로운 수확과 더 높은 인식이 있게 되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추구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사람의 경력(역주: 체험)은 너무나 얕고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하나님의 성품 부분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의 그런 인식들은 일부 감성적인 면의 인식일 뿐이다. 이성(理性)적인 면의 인식으로 높아지려면, 아직도 경력 가운데서 점차 심화되고 점차 강화되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을 때, 주관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한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도대체 어떤지 등등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진정 아는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은 크게 약해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은 늘 순결함이나 완벽함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과 마주하고, 혹은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면한 것 같았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았다고 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는지, 하나님이 왜 노하고 왜 기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그 믿음은 막연한 것과 상상, 주관적인 염원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따르는 것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 성경 속의 그런 이야기와 그런 사례에 대한 풀이를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각 단계 사역을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게 하며, 하나님이 그 당시에 그 일을 한 본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실현하고, 자신의 계획을 어떻게 안배하고 전개하는지를 알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6천년 경영 사역을 하는 기간에 매번 가졌던 구체적인 뜻과 진실한 마음, 그리고 서로 다른 시기와 각기 다른 시대에 취했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알게 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마주할 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였는지, 하나님이 유로(역주: 흘러나옴)한 성품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사람마다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더욱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실제와 진실도 더욱 느끼게 된다.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목적은 사람에게 성경의 역사(歷史)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장절과 성경 속의 인물들을 잘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이 율법시대에서 역사한 일부 배경을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세부적인 부분들을 알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진실하고 더 정확하게 알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조금씩 열릴 수 있고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으며, 진일보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할 수 있으며, 진정한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소유소시에 대한 인식, 이런 것은 모두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더욱 믿음이 있게 하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게 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하여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보가 아니고, 남의 꽁무니를 따르며 맞장구를 치는 자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고 인식하여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저버리지 않는 한 무리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아직도 아주 모호하고 어정쩡하고 흐리멍덩하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도 싫어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봉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믿음에는 불순물이 가득하다. 또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맹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만, 진실하게 믿고 따를 수 있고, 아울러 하나님께 진실하게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다. 그래야 그 사람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 열어 놓을 수 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성품 부분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소유소시 부분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든, 혹은 하나님이 일을 하나 할 때마다의 뜻과 하나님의 모든 생각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든, 또한 어떤 부분에서 교통하든, 어떤 각도에서 교통하든, 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더욱 확인하게 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진실하게 알고 느끼게 해 주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과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더욱 진실하게 알고 느끼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오늘은 우선, 인류를 창조한 이래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일거일동을 총 정리해 보고, 창세부터 은혜시대가 정식으로 시작되기까지 하나님이 모두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훑어보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어떤 마음과 생각이 또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찾아내어 하나님 경영 계획의 순서를 정리해 보고, 하나님 경영 사역이 생기게 된 배경과 기원 및 발전 과정을 철저히 알아보고, 하나님이 경영 사역 가운데서 얻고자 하는 성과, 즉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핵심과 취지도 철저히 알아보도록 하자. 이런 내용을 알아보려면, 우리는 요원하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인류가 없었던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즉, 산 사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하나 창조하여 자신과 함께 생활하고, 자신의 동반자가 되어 자신의 곁을 함께하며, 그 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이 토로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으로 손수 흙 한 줌을 쥐어 자신의 마음속의 첫 번째 산 사람을 빚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처음으로 그런 생물에게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나님이 그런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얻게 된 후,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하나님은 처음으로 가족이 있게 된 즐거움과 동반자가 있게 된 즐거움을 느꼈고, 처음으로 부친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으며, 처음으로 마음에 두는 그리움을 느꼈다. 그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고, 하나님에게 처음으로 위안을 느끼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이나 말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손수 한 일이다. 그런 생물, 살아 있는 사람 하나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뼈도 있고 살도 있고 형상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전에 없던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책임을 느꼈고, 하나님의 마음은 그런 생물을 위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그 산 사람의 일거일동으로 감화되고 따뜻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생물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처음으로 그런 사람을 더 많이 얻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첫 번째 생각이 있기 시작해서부터 발생한 일련의 일들이다. 그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다 처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한 그 일련의 일들로 인해 즐거움을 느꼈든, 책임감을 느꼈든 아니면 사람에 대한 걱정이든, 그와 함께 나눌 사람은 없었다. 그 시각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전에 없던 외로움과 슬픔을 진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걱정, 그리고 사람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여전히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설사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일련의 일을 하였을지라도, 사람은 오히려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다. 기쁨 뒤에, 하나님은 곧 처음으로 사람이 가져다준 즐거움과 위로에 전혀 느낀 적 없었던 슬픔과 외로움을 아주 빨리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때의 심정과 그때의 마음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련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즐겁던 데서 슬퍼졌고, 슬프던 데서 고통스러워졌으며,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조급함도 섞여 있었다. 하나님은 발걸음을 다그쳐 보다 빨리 그런 사람, 그런 인류가 하루빨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다음,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하고 대답이 없는 사람이 아니기를, 더 이상 하나님이 일을 할 때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기를, 더욱이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그런 인류가 아니기를 바랐다. 하나님이 최초에 한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지금의 인류에 대해 모두 매우 의의 있고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만물과 인류를 만든 후, 하나님은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경영을 전개하였고 또한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했다.

이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를 만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수로 세상을 멸한 사실을 보게 된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기록에서 노아가 언급되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번째로 하나님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처음으로 한 사람을 불러 땅에서 자신의 분부대로 일을 하게 한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다 지은 후, 하나님은 처음으로 홍수로 세상을 멸하였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에는, 하나님이 인류를 만든 후 처음으로 인류를 그렇게 극도로 혐오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처음으로 그런 인류를 홍수로 멸해야겠다는 큰 결심을 내리게 된 것이다.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인류와 언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였다. 그 언약은 무지개로 증거를 삼은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류와 세운 첫 번째 언약이기 때문에, 그 무지개 역시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운 첫 번째 증거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곧 무지개이다. 바로 그 무지개의 존재로, 하나님은 늘 이전의 인류를 잃은 고통을 느꼈고, 그 무지개의 존재로, 하나님은 이전의 인류 가운데서 발생했던 일을 계속 생각하게(원문: 提示) 되었다…… 하나님은 발걸음 늦추기를 원치 않았으며,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다음 단계 경영을 계속하였다. 하나님은 그 후로 또 아브라함을 선정하여 자신이 이스라엘 온 땅에서 사역할 첫 번째 적임자로 삼았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첫 번째로 선정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시작하고, 그 사람의 후손 가운데서 자신의 사역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행한 것이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선정하여 이스라엘 선민 가운데서 율법시대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또 처음으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세부적으로 설명했으며, 처음으로 그렇게 구체적이고 규범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절기와 날 혹은 일처리하는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지를 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으로 그렇게 상세하게 규범적으로 인류에게 생활 속의 규례와 원칙을 정해 준 것이다.

‘처음’, ‘첫 번째’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전에 그런 사역을 한 적이 없고 그 사역은 전례 없다는 것이다. 설사 이전에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여러 가지 생물과 살아 있는 것들을 창조했을지라도, 그런 사역을 한 적은 없다. 그런 사역은 모두 사람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고, 사람과 관련되는 사역이며, 모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고, 인류를 경영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후에,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욥을 율법 아래에서 사탄의 시험을 겪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간증을 굳게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탄에게 사람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이고, 처음으로 사탄과 내기를 하여 최종에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서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하여 사탄을 철저히 수치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 얻은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인류를 만든 후에 얻게 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얻은 후,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의 경영을 계속하여 다음 단계에 할 사역을 하면서 다음 단계 사역의 적임자와 사역 장소를 예비하였다.

이런 것을 교통한 후,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떤 진정한 인식이 있게 되었느냐? 하나님은 이번에 인류를 경영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단지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니라, 계획 있게, 목적 있게, 기준 있게 자신의 마음과 뜻을 가지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번에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에게, 또한 사람에게 얼마나 중대한 의의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역이 얼마나 힘들든, 이 사역을 하는 데에 가로막음이 얼마나 크든, 인류가 얼마나 연약하고 인류의 패역이 얼마나 깊든, 이런 것이 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삐 보내고 있고,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지불하고 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경영하고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주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전에 없던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으로 이런 방식과 이처럼 많은 대가를 지불하는 큰 사업을 하여 인류를 경영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심혈과 대가, 자신의 소유소시, 자신의 지혜와 전능 그리고 자신의 여러 방면의 성품을 인류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조금씩 표현하고, 조금씩 보여 주고(원문: 釋放) 있다. 이런 방식의 표현과 보여 주는(원문: 釋放) 것 역시 전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이 경영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 외에,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적이 없었고,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가 있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경영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가 가장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인류를 무엇보다 더 중히 여기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인류를 위해 많은 대가를 지불했을지라도, 또한 끊임없이 그런 인류에게 상처를 받고 거역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이 사람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젠가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부름 속에서 깨어나 말씀에 감동되고, 하나님이 곧 조물주임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오늘 이런 말씀을 들은 후,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은 다 매우 정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역사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느낀 것 같겠지만, 사람의 느낌이나 일부 인식들은 하나님이 속으로 생각한 것과 영원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시에 왜 인류를 창조하였는지, 또 어떤 배경하에서 자신이 기대하는 인류를 얻으려고 했는지를 교통해 줄 필요가 있고, 그런 것을 모든 사람에게 다 알려 주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 하나님의 각 단계의 사역과 각 시기의 사역은 다 하나님의 전체 경영 사역과 관련되고, 또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각 단계 사역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의 경영 계획 사역의 유래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기초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따라서 깊어질 것이다.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창세 초기에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약간의 ‘정보’가 될 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는 무관한 것 같지만, 경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말해 줬던 이런 것들이 그저 한두 가지 정보에 그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심오한 비밀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너의 생명이 자라나고, 너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치가 조금 있게 될 때나 혹은 하나님의 뜻을 좀 투철하게 깊이 알게 될 때면, 내가 오늘 해 준 이런 말들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어느 정도까지 터득했든, 이런 일은 너희들이 인식할 필요가 있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하는 일과 사역이 생각으로 하는 것이든 아니면 친히 하는 것이든, 처음으로 하는 것이든 아니면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그런 마음과 그런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발표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런 성품과 소유소시는 모두 사람마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나면, 사람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점차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갈 믿음이 더욱 생기게 될 것이고, 진리를 추구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할 믿음이 더욱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 양자는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한다.

비록 사람이 듣게 되었거나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소유소시이지만, 사람이 얻게 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다. 일단, 그 생명이 네 안에 만들어지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더욱더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효과이다. 네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관해 인식하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일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중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가 지금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 믿는 것을 추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도 없으며, 더욱이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최종 결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모른다면, 사람의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열어 놓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게 된 후이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음미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음미하는 동시에, 그 마음은 점차적으로 조금씩 하나님을 향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요구나 사치한 욕망이 얼마나 몰염치하고 비열한 것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마음을 진정 하나님에게 열어 놓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비할 바 없이 큰 세계인지를 보게 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경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경지에는 기만과 궤사함이 없고, 흑암과 사악함이 없으며, 오직 진실한 것과 신실한 것만 있고, 오직 광명과 정직만 있으며, 오직 공의와 선한 것만 있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보살핌이 가득하고, 긍휼과 관용이 가득하여 너에게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이것이 네 마음을 하나님에게 열어 놓았을 때, 하나님이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비할 바 없이 큰 세계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전능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도 가득하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각 방면의 소유소시를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염려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으로 슬퍼하고 무엇으로 노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열어 놓아 하나님이 들어가도록 하는 사람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하나님에게 열어 놓아야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에 들어가야만 네가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볼 수 있고, 너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얼마나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대조적으로 네 주변의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 심지어 너의 가족, 너의 동반자, 네가 애착하는 물건이 너에게 있어서 얼마나 언급할 가치도 없고, 얼마나 보잘것없고 비천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 어떤 물질적인 것도 더 이상 너를 매료시킬 수 없고, 더 이상 그것을 위해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없다고 느껴질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자신을 낮춘 일에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함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을 보게 될 것이다. 너는 이전에 하나님이 했던 일 중에 매우 작은 것이라고 여겼던 일에서도 더더욱 하나님의 무궁한 지혜를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관용을 보게 될 것이며,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 포용, 양해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너에게는 하나님을 애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너는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 세상에서 생존하고 있는지 느끼게 될 것이고, 주변의 사람이든 아니면 주변에서 발생한 일이든, 심지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사랑과 소위 너를 향한 ‘보호’나 걱정이 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너의 최고의 사랑이자 가장 귀중한 보물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 가서, 나는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하신지, 하나님의 실질은 얼마나 거룩하신지, 하나님에게는 궤사함이나 사악함이 없고, 질투나 분쟁이 없으며, 오직 공의만 있고 진실만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소시는 다 사람이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마땅히 추구하고 동경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할 것이라 믿는다. 사람이 이런 것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어떤 기초 위에서 세워지는 것일까?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실질을 아는 기초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아는 것은 사람마다 평생 배워야 할 공과이자 성정 변화를 추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방금 하나님이 처음으로 했던 일련의 모든 사역에 대해 교통했다. 이런 일들 하나하나는 다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성품, 하나님의 실질과도 관련된다. 하나님의 더 많은 소유소시를 알려면, 우리는 구약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율법시대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율법시대를 끝마치고 은혜시대를 시작한 동시에 우리의 발걸음도 거기에 따라 은혜시대, 곧 은혜가 충만하고 구속이 충만한 시대로 오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또 처음으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나 했다. 그 새 시대의 사역은 하나님에게든 아니면 인류에게든 다 새로운 기점이다. 그 새로운 기점은 하나님의 또 다른 첫 번째 새 사역이다. 그 새로운 사역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도 만물도 다 예상치 못했던 천지개벽의 일을 한 것이다. 그 일은 지금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처음으로 인류 중의 일원이 되어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의 신분으로 자신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 새로운 사역은 하나님이 이미 율법시대의 사역을 끝마쳤다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이 더 이상 율법 아래에서 그 어떤 일이나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고, 율법의 형식과 율법의 원칙과 규례에 따라 말씀하거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율법을 위주로 하는 모든 사역은 다 영원히 정지되고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 사역과 새 일을 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또 새로운 기점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다음 시대로 인도해야 했다.

그 일이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될지 아니면 불길한 소식이 될지는 그 사람의 실질이 무엇이냐에 달렸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불길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할 때, 율법의 규칙과 규례만 지키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옛 사역으로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정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부분 사람들에게 그 일은 불길한 소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첫 번째 도성육신(역주: 성육신)은 단순하게 마음을 여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 진심을 가진 각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두 특대 희소식이 된다. 그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 하나님이 영의 방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생활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사람에게서 태어나 인자가 되는 방식으로, 인자의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역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도성육신은 사람의 관념을 깨뜨렸고, 또한 모든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으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익’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은 낡은 시대를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자신의 낡은 역사 방식과 역사 ‘풍격’도 끝냈으며, 더 이상 자신의 사자에게 뜻을 전달하게 하지 않았고, 더 이상 구름 속에 ‘감추어’ ‘천둥 치는’ 방식으로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사람에게 나타나거나 말씀하지도 않았으며, ‘정상적인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게’―사람이 상상도 못한 방식,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으로―말씀이 육신 되어, 즉 인자가 되어 자신의 그 시대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그 행동은 인류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또한 인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행한 것은 한 번도 했던 적이 없는 새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에 어떤 새로운 사역을 했는지, 또 그런 새로운 사역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과 소유소시를 알 수 있는지 보자.

다음은 성경 신약에 기록된 말이다.

1.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마 12:6~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먼저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라는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선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에 외출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거느리고 밀밭을 지나갔다. 그리고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사람이 함부로 외출해서는 안 되고 활동해서도 안 되며, 안식일에 여러 가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예수의 그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고, 심지어 비난까지 사게 되었다. 사람들이 예수의 모든 행사를 어떻게 몰이해하고, 어떻게 의논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논하지 말고, 먼저 예수가 왜 굳이 안식일을 골라 그 일을 했는지, 예수가 그 일을 통해 율법 아래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려고 했는지에 대해 말해 보자. 이것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과의 연관성이다.

예수는 와서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하나님은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으니, 그 새로운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안식일에서 나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새 사역을 미리 체험하는 것일 뿐, 진정 큰 사역은 계속 보여질 것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예수가 역사하기 시작했을 때, 예수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율법시대에서 정해진 규칙과 원칙을 깨뜨렸다. 그리하여 율법과 관련된 모든 것은 예수에게서 그 어떤 종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수는 전부 지키지 않고 내버렸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 사이로 지나간 것을 보게 된다. 곧, 주는 안식하지 않았고, 밖에서 역사하면서 쉬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의 그 행동은 사람의 관념을 반격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생활하지 않고 안식일을 벗어나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역사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의 그 행동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사역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즉, 그 새로운 사역은 율법을 벗어나고, 안식일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더 이상 율법시대의 규칙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의 영향을 받지도 않았고, 안식일에도 여전히 사역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도 배고프면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매우 정상이었다.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많은 사역과 많은 말씀은 다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다. 곧, 새 시작이 있을 때는 이전에 했던 자신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더 이상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하려고 할 때가 바로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이끌어 가려고 할 때이고,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진입할 때이다. 그런데 사람이 낡은 행실이나 규칙을 계속 행하거나 계속 고수한다면, 하나님은 기념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미 새로운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역사 단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새 사역을 가져올 때는, 새로운 형상, 새로운 각도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각기 다른 면의 성품과 소유소시를 보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걷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말씀하는 데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이런저런 금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전부 해방이고 자유이며, 그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속박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고, 진실하고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목석이 아니고 석상도 아니며, 사람이 공양하거나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분이며,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생명과 광명이고, 전부 자유와 해방이다. 하나님에게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하고 있다. 사람이 뭐라고 하든, 인류가 하나님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하나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려고 하는 사역을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의 관념도 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과 말씀에 대한 그 어떤 사람의 비난도, 심지어 자신의 새 사역에 대한 사람의 극렬한 반대와 대적도 꺼려 하지 않는다. 피조물 중에 아무도 사람의 도리와 상상 그리고 사람의 지식이나 혹은 사람의 도덕 관념으로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가늠하고,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규정하고, 하나님이 행한 사역을 비방하거나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망상은 가지지 말라. 하나님이 일을 하고 역사하는 데에는 그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인ㆍ사ㆍ물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놓고 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승리한 군왕이어서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나온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들을 다 하나님의 발등상 아래에 짓밟는다. 하나님이 어느 단계의 새 사역을 하든,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도 막힘없이 통행되고 큰 공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자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광명정대하게 안식일에 밖에서 역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없었고,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기 때문이고, 예수가 소유한 것은 곧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길이고, 예수가 한 사역은 다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고,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날마다 사탄의 결박 속에서 살면서 불합리한 각종 제도에 속박되어, 오늘은 이것을 금기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하는데, 삶에 조금의 자유도 없다. 그것은 마치 목에 칼을 차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와 같아 기쁨이라고는 말할 것도 못 된다. ‘금기’는 무엇을 뜻할까? 속박을 뜻하고, 결박을 뜻하며, 사악을 뜻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면 거짓 신을 섬기고 악령을 섬기는 것이 되며, 금기도 그에 따라 오는 것이다. 이걸 먹어서는 안 되고 저걸 먹어서도 안 되며, 오늘 외출해서는 안 되고, 내일 취사해서는 안 되고, 모레 이사해서는 안 되며, 또한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날짜를 택해야 하고, 심지어 출산하는 것까지도 날짜를 택해야 한다. 그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런 것이 금기이다. 곧, 사람을 결박하는 것이고, 사탄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심령과 육체를 속박하는 멍에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금기들이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말할 때면 마땅히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다. 즉,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금기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고 말씀을 하는 데는 원칙이 있지만, 금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곧 진리이고 길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의 ‘성전’은 무엇을 말하느냐?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성전’은 화려하고 높고 큰 건물을 가리킨다. 율법시대에서 ‘성전’은 제사장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으로 쓰였다. 예수가 말씀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매우 분명하다, ‘이’는 곧 말씀이 육신 된 주 예수를 말한다. 그것은 예수만이 성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성전에서 나왔고 거기에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그 말씀을 한 배경은 율법 아래의 사람들이 이미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성전이란 그 곳을 경배한 것이지, 하나님을 경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고지상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해야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였다. 보다시피, 예수의 눈에는 율법 아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과정만 거칠 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그 과정을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정했다. 우상을 섬기는 그 사람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더 높게 보았으며,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성전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없으면 머물 곳을 잃게 되는 것이고, 성전이 없으면 경배할 곳도 사라지고 제사드리는 일도 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머물 곳’이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성전 안에서 자신들의 일을 하도록 허가받은 곳이다. 그리고 소위 ‘제사를 드리는 것’이란, 그들이 성전 안에서 섬기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의 부정한 행동을 숨길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이 왜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겼는지에 대한 원인이다. 그들은 성전으로 덮어 감추고, 제사를 구실로 삼아 사람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일러 준 것이다. 그 말씀은 지금에 가져와도 마찬가지로 유효하고, 마찬가지로 겨냥하는 바가 있다. 비록 지금의 사람들과 율법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각기 다른 역사를 경력했지만, 그 본성 실질은 똑같다. 오늘날의 이런 역사 배경하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성전이 하나님보다 크다’는 것과 같은 성질의 일을 저지른다. 예를 들면, 본분을 직업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큰 붉은 용과 싸우는 것을 인권을 수호하고 자유와 민주를 쟁취하는 정치 운동으로 여기며, 기술 수준이 조금 있는 본분을 자신의 사업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종교적인 교리로 삼아 지키는 등등이다. 사람의 이런 행위들은 ‘성전이 하나님보다 크다’는 성질과 같은 것이 아니냐? 다만 2천년 전의 사람들은 형태가 있는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하였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형의 성전에서 개인의 경영을 할 따름이다. 규례를 중히 여기는 자들은 규례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고, 지위를 좋아하는 자들은 지위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며, 사업에 몰두하는 자들은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는 등등 사람의 각종 행위들을 보고 나는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다고 칭송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보다 크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따르는 도중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찾으면, 일단 자신의 경영과 자신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하나님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몰두하려는 사업에 온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일찍이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람들의 이런 정형은 2천년 전에 성전에서 개인의 갖가지 경영을 했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뭐가 있느냐?

계속해서 이 단락에 있는 구절 중 마지막 한 마디를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느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이 한 모든 말씀은 다 마음속에서 발표해 낸 것이다. 예수는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지금 너희들은 아마도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사람들은 금방 율법시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을 놓고 말하면 안식일에서 나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비록 너에게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지만, 물질적인 필요가 만족되었을 때, 그런 물질이 너에게 가져다준 만족감으로 진리 추구를 대체할 수 있을까?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이다! 우리가 교통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 이런 것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 가치는 절대로 그 어떤 고가의 물질로도, 돈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는 각 사람의 심령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각 사람에게 있어 이런 비물질적인 진리의 가치는 당연히 네가 좋다고 여기는 그 어떤 물건의 가치를 뛰어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체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중점은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전부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그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예를 하나 들겠다. 네가 배고플 때는 음식으로 보충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음식은 맛있는 것이나 혹은 맛이 별로라도 상관없다. 배불리 먹기만 하면 배고프던 그런 안 좋은 느낌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며, 자리에 앉아도 조용히 있을 수 있고 육체도 편히 쉴 수 있다. 사람의 배고픔은 먹거리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너의 심령의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먹거리로 해결할 수 있느냐? 또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할 때, 너의 그런 심령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네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력하는 과정에서, 성정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도 못한다면, 너는 아주 조급하지 않겠느냐? 너의 심령은 매우 갈급해지지 않겠느냐? 그런 느낌들은 네 심령이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느냐? 이런 심령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를 거닐고, 어떤 사람들은 몇몇 괜찮은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거나 본분을 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고 많은 힘을 쓴다. 그런 것이 너의 실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느냐? 너희는 이런 행실들에 대해 모두 깊이 느낀 바가 있다. 네가 힘에 부칠 때, 진리의 실제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하나님의 깨우침을 매우 사모하고 있을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너에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고, 몇 마디 위로의 말도 아니며, 육체의 잠시적인 안일과 만족을 얻는 것은 더욱 아니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직접 분명하게 알려 주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네가 그런 것을 깨달은 후에는, 설령 그것이 매우 작은 것일지라도 심령은 한 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하지 않느냐? 심령이 만족을 얻었을 때는 너의 심령,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은 것이 아니냐? 내가 이 일을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하면, 너희는 이제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이 말씀을 보라고 하는지 알게 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전부는 네가 전에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보다 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후의 경력 가운데서, 내가 오늘 왜 너희에게 이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을 놓고 말하면,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사람이 항상 떠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가장 큰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록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너에 대한 진리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네 심령에 안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깨닫는 일에서 자신의 정형에 결부시킬 줄 아느냐? 현실 생활 속에서 우선 자신이 경력한 인ㆍ사ㆍ물이 어떤 진리에 관련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런 진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결부시킬 수 있다. 네가 자신에게 닥친 일이 어느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도 모르면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맹목적이어서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우선 자신에게 닥친 일이 어떤 부류의 일인지, 어떤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를 보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너의 경력에 상응하는 진리를 찾은 다음, 그 진리에서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규례에 맞추거나 공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공식 같은 것이 아니고 법칙도 아니며,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고 살아 있는 것이며, 피조물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것과 사람이 생존하면서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법칙이다. 이것은 경력하는 가운데서 많이 체험해야 한다. 네가 경력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든,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 없고 진리를 떠날 수 없다. 네가 알게 된 하나님의 성품과 인식하게 된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표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진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 그 자체가 바로 진리이다. 다만,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에서 유로되는 진실한 체현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모두 구체화하고 명문화하여 더욱 직설적으로 너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것을 허락하고 어떤 것을 허락하지 않는지를 알려 주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증오하고 어떤 사람을 기뻐하는지를 알려 줄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발표한 그런 진리 뒤에 있는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하나님의 실질을 보게 되었다. 그런 것이 곧 하나님 성품의 유로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하고, 그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력하는 가운데서 도달해야 한다. 만약 현실 생활을 떠나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서 인식을 어느 정도 했을지라도 단지 도리와 글자 표면에만 국한되었을 뿐, 진정한 하나님 자신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교통하고 있는 범위는 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발생한 그런 일들을 해부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전에 발표한 성품과 소유소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많은 부분들을 더 넓게, 더 깊게, 다방면으로,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많은 부분을 알려면 이런 이야기를 통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국도시대(역주: 왕국시대)에서 발표한 말씀과 행한 사역은 더욱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할 수 있고, 또한 더 전면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사례들이나 이야기를 통해 좀 더 쉽게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일 뿐이다. 지금 하나님이 발표한 그런 심판 형벌의 말씀과 그런 진리로 한 글자 한 구절씩 차례대로 너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준다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다고 여길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공식 같은 성질을 띠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한다면 무미건조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례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말로 하나님이 그 당시에 마음속으로 생각한 그런 세부적인 것까지 다 알려 주고, 하나님의 그 당시의 심정, 즉 기분이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 그런 것을 알려 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공식이 아니고, 전설적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느끼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하나님이 했었던 사역을 더 광범위하게 알 수 있고, 하나님이 했었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발표한 그런 성품들을 통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함의 구체적인 표현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깊은 인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너희가 다 느꼈으리라고 믿는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그런 사역 범위에서, 너는 하나님의 다른 한 방면의 소유소시를 볼 수 있다. 그런 소유소시는 모두 육신을 통해 발표되었고, 인성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보게 하였고 느끼게 하였다. 사람들은 인자에게서 하나님이 육신 가운데서 인성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았고, 육신에서 발표되는 하나님의 신성도 보게 되었다. 이 두 방면의 발표가 사람에게 실제적인 하나님을 보게 하였고, 하나님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도 있게 하였다. 하지만 창세 이후에, 그리고 율법시대가 끝나는 그 기간에, 즉 은혜시대 이전에 사람이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느낀 것은 전부 하나님의 신성(神性) 방면이었고, 하나님이 비물질 세계에서 행한 것이고 말씀한 것이며,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본체가 발표한 것의 일부였다. 그런 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높고 커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더 많이 주게 된 인상은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그토록 신비하여 알 수 없고, 그토록 예측하기 어려워, 사람이 거기까지 미칠 수 없다고 여기게 하였다. 그리하여 상고하고 체험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아주 요원했다. 요원하여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하였고, 마치 하늘가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깨닫거나 하나님의 그 어떤 생각을 하나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할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너무 멀어 미치지도 못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일부 구체적인 사역을 하고 그와 동시에 일부 구체적인 말씀과 구체적인 성품도 발표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체험할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진실한 인식이 어느 정도 있게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비물질 세계에서 발표한 하나님의 소유소시이고, 사람이 이해한 것과 인식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성 방면의 소유소시이다. 그런 소유소시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개념을 줄 수 없고, 여전히 하나님은 ‘접근하기 어렵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영체’라는 인상을 주는 범위에만 머물러 있게 한다. 하나님은 물질세계에 있는 어떤 구체적인 것이나 혹은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사람의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는 늘 사람의 말로 하나님에게 어떤 기준을 하나 정해, 하나님을 물질화하고 인성화시키려고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얼마나 높다든가, 하나님은 얼마나 크다든가,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하다든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취미와 구체적인 성격은 어떠하다든가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속으로 사람에게 그런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자신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른 한 가지 방식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했던 것이다. 그런 방식은 인성 안에서도 거하고, 신성 안에서도 거하는 것이다. 예수가 사역을 하는 기간에 사람이 본 하나님은 인성의 표현이 아주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춤을 출 수도 있었고,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도 있었으며, 사람과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말을 하거나 혹은 어떤 일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예수는 신성 방면을 대표하는 많은 사역도 했다. 물론, 그런 사역은 다 하나님 성품의 발표와 유로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신성이 정상 육신에 실제화되어 사람에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였으며, 하나님은 더 이상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여 가까이할 수 없는 분이라고 느껴지지 않게 하였다. 반대로, 사람은 인자의 일거수일투족, 인자의 말씀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상고할 수 있거나 혹은 하나님의 신성을 알 수 있었다. 도성육신 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발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형상이 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도성육신 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소시 등등을 모두 구체화하고 인성화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하면, 인자의 겉모습은 어느 정도 국한성이 있지만 인자의 실질과 소유소시는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할 수 있는데, 단지 발표하는 형식상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다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역사하고, 육신의 각도에서 말씀하고, 인자의 신분과 지위에 서서 인류를 마주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실제적인 말씀과 역사를 접촉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있게 하였을 뿐이다.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성과 자신을 낮춘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과 실제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과 기초적인 정의도 있게 하였을 뿐이다. 비록 예수가 행한 사역이나 역사하는 방식, 말씀하는 각도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본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예수의 모든 것은 다 조금도 틀림없이 사람이 본 적이 없는 그 유일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각도에서 말씀하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을 대표하지도 않고, 그 어떤 패괴된 인류를 대표하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은혜시대에 예수가 말씀한 한 가지 비유를 보자.

3. 길 잃은 양의 비유

(마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비유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여기에서 비유로 한 표현 방식은 인류의 언어와 글에서는 일종의 수사적 방식이다. 그것은 인류의 지식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그런 말씀을 했다면, 사람은 그런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을 은혜시대에 인자가 발표하게 되면, 사람은 매우 편하고 매우 온화하고 또한 매우 마음에 와 닿는다고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도성육신하여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다. 그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이 그 시대에서 하고자 하는 사역을 대표하였고, 또한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 자신의 태도도 대표하였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그 태도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을 한 마리 양에 비유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하나님은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그 양을 찾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때 도성육신하여 사람에게 역사한 원칙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이런 비유로 그때 사역하고자 했던 결심과 태도를 묘사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도성육신의 ‘우세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과 인성의 언어를 이용해 사람에게 말씀하여 자신의 바람을 표현할 수 있었고,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신성의 언어를 인성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해 주거나 ‘통역’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해 주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데에 유리하다. 그 밖에, 하나님은 또 사람의 각도에서 사람의 언어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이 알기 쉬운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의 언어, 지식으로 말씀하고 역사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친절하고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게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하나님에게 말씀을 하고 일을 하는 데에 금기가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식과 언어 또는 사람이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과 사역을 하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이 그런 비유를 사용했는데, 그 비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함을 느끼게 하였고, 하나님의 진심도 느끼게 하였으며, 그 기간에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 비유는 율법 아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해 주었고, 동시에 은혜시대에서 살고 있는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도 격려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 비유를 읽으면서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의 가치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보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의 이 말씀은 그 자신이 말씀한 것일까 아니면 하늘의 아버지가 말씀한 것일까? 겉으로 보면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예수의 뜻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대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때의 사람들이 하늘의 아버지만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저 하늘의 아버지가 보내 주신 분일 뿐 결코 하늘의 아버지를 대표할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말씀을 한 마디 추가하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느끼게 해 주고, 그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도 느끼게 해 줘야 했었다. 그 말씀은 비록 간단한 한 마디이지만 매우 마음에 와 닿았고, 또한 예수의 비미은장이 유로되었다. 하나님은 도성육신하든 아니면 영계에서 역사하든, 사람의 마음속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한 마디 추가한 것이다. 그 말씀은 사람에게 숨겨진, 사람들이 모두 인자가 하는 말씀에 대해 반신반의한다는 문제를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말씀하는 동시에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이런 전제를 더해야만 말씀하는 효과에 도달할 수 있고, 사람에게 말씀의 정확성을 믿게 하여 말씀의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로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난처하고 인자의 처지도 얼마나 난감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때 사람들 가운데서의 예수의 지위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도 알 수 있다. 예수가 그 말씀을 한 것은 사실 사람들에게 “너희는 안심하거라, 내 이 뜻은 내 자신의 뜻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 말씀은 사람에게는 매우 풍자적이지 않느냐? 비록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여 역사하면 하나님의 본체에 구비되어 있지 않은 유리한 조건이 많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지만, 사람으로부터 오는 의심과 저버림을 참아야 했고, 사람의 마비와 둔함도 참아야 했다. 다시 말해, 인자가 사역하는 과정은 바로 사람의 저버림을 체험하는 과정이자,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체험하는 과정이고, 더욱이 하나님이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소유소시와 자신의 실질로써 끊임없이 사람에게 신임을 얻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정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여 사탄과 실제적으로 싸운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자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과 한 차례의 승부를 펼친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인자는 그 한 차례의 승부에서 자신의 낮춤, 자신의 소유소시, 자신의 사랑과 지혜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였고,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자신에게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보좌 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계속해서 다음의 두 구절을 보자.

4.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5.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에서 하나는 용서를 이야기하고 하나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이 두 방면의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할 사역의 내용을 아주 두드러지게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될 때는 거기에 따라 한 단계 사역을 가져오고, 그 시대에 발표할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을 가져온다. 그 시기에 인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에서 할 역사 범위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더 많이 하지도 않고 적게 하지도 않는다. 인자가 하는 말씀마다, 하는 사역마다 모두 그 시대와 관련된다. 인자가 사람의 방식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든 아니면 신성의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과 어떤 각도이든, 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인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 다른 각도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깨닫고 알고 이해하게 하며, 사람을 구원하는 자신의 사역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시피, 은혜시대에 예수는 사람에게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대부분 인성의 언어로 표현했고, 동시에 더 많은 경우에는 평범한 길잡이의 각도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 역사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고, 사람들을 더 많이 체휼해 주었기 때문에, 형식과 방식에서 더욱 실제적인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가 그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 중의 숫자로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 말씀에서 예수가 그때 그 비유를 하게 된 뜻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목적은 사람에게 한두 번이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남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는 어떤 개념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남을 용서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필수 과제로 삼고 또한 ‘도’로 삼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비유에 지나지 않지만 화룡점정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사람에게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고, 그 말씀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도 얻게 해 주었으며, 실행의 원칙과 기준도 얻게 해 주었다. 그 비유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정확한 개념도 가지게 해 주었다. 즉,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양해해 주고 관용해 줄 수 있는 그런 심리 상태를 가지고, 조건도 없이 횟수 제한도 없이 용서해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말씀을 하는 동시에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정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는 것만 생각했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횟수가 있느냐?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횟수’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끼며 그 횟수의 출처와 거기에 담긴 뜻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예수가 왜 그런 숫자를 말씀했는지 알고 싶어 하면서 그 숫자에 꼭 어떤 더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고 여긴다. 사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인성에서 말씀한 비유일 뿐이다. 그 어떤 메시지나 함의가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을 향한 예수의 요구에서 떠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이 했던 많은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들은 완전한 신성에서 오고, 그 말씀을 했던 각도와 배경은 사람이 볼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발표해 낸 것이고, 육체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이 꿰뚫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성육신한 후, 인성의 각도에 서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기에 영계의 범위를 벗어났고 초월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상상한 것이나 사람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일들이나 혹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말이나 인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으로 신성에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성품과 뜻 그리고 자신의 태도를 표현하여,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인성에 의하거나 인성을 통해(원문: 透過) 더욱 많이 도달하지만, 오히려 신성이 직접 역사하여 도달할 수 없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핵심적이며, 방식상에서도 융통성이 많아졌고, 형식상에서도 율법시대를 초월하게 되었다.

그 아래에서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씀은 신성에서 직접 발표한 것일까? 아주 분명한바, 그렇지 않다! 그런 말씀은 다 인자의 인성에서 말한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자기 생명같이 보살피라”는 것과 같은 말을 하고 또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었는데, 최소한 하나님의 신성 안에는 그런 말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런 신조로 인류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소유소시의 자연적인 유로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한다.”라고 이렇게 표현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실질 안에 있고 하나님의 소유소시 안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하나님 성품의 자연적인 표현과 유로이기 때문에 일부러 어떻게 하거나 혹은 일부러 어떤 방식, 어떤 도덕규범을 준수하여 사람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하나님은 본래부터 이런 실질을 구비하고 있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할 때, 많은 방식, 많은 말씀, 많은 진리는 다 인성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뜻은 그와 동시에 표현되어 사람에게 이해하게 하고 인식하게 해 주었다. 사람이 이해한 것과 인식한 것은 조금도 틀림없이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에 구비된 실질과 소유소시를 대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다 발표한다는 것이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과 하늘의 하나님이 교제하고 소통하는 데의 가로막음과 장애물이기는커녕, 오히려 인류와 조물주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고 다리이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사역의 성질과 방식의 일부가 지금 이 단계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이 단계 역사에서도 인성의 말을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였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하는 말이나 인류의 지식 방면의 말과 방식을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일단 말씀이 육신 되면, 인성의 각도에 서서 말씀하든 아니면 신성의 각도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씀이나 표현 방식은 다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여러 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을 때, 성장하는 과정에 그는 인성에서 사람에게서 온 지식, 상식, 언어나 표현 방식을 어느 정도 알아보고 배우고 장악하는 것이다. 피조된 인류에게서 온 그런 것들이 도성육신 하나님에게 갖추어졌는데,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거나 신성을 발표하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각도와 사람의 언어로 사역할 때 더욱 적절하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하고 또 사람들이 더욱 쉽게 접근하고,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역사 효과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에서 이렇게 역사하는 것은 더욱 실제적이지 않느냐?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을 때,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그 육신이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때, 즉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이 실제로 발표될 때, 그때가 바로 인자가 자신의 직분을 정식으로 시작하는 때이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간에 더 이상 ‘세대 차’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은 사자가 자신을 위해 소식을 전달하던 사역을 정지하고, 하나님 자신이 육신 가운데서 발표할 모든 말씀과 사역을 친히 발표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구원하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하며, 새로운 시대가 곧 전 인류에게 향할 것임을 뜻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예수가 강생할 때 많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일은 바로 마왕이 찾아 죽이려고 한 것인데, 심지어 온 성읍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까지 모두 살해했던 것이다. 그 일에서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 와서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했는지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도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역사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사람은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 최소한 하나님의 마음은 기뻤다. 그것은 자신의 새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사역하고 직분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기다리고 오랫동안 예비한 후, 하나님은 드디어 정상 사람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고,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자신의 새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과 대면하여 말씀하고, 사람과 대면하여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 사람의 언어로, 사람의 방식으로 사람과 대면하면서 사람의 언어로 공급해 주거나 일깨워 주고, 도와주고, 사람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하며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도 있었고, 또한 사람의 방식으로, 심지어 사람의 안목으로 인류를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육신의 사역이 이미 초전 승리를 거둔 것이고 또한 큰 공을 이룬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그때로부터 하나님은 처음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일에서 위안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도 실제적이고,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하나님이 느끼게 된 위안 또한 그토록 진실하였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새로운 한 단계 사역이 성취될 때마다, 하나님이 기쁨과 위로를 느낄 때마다,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할 수 있을 때이자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더 가까워질 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때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또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데에 근접할 수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인류에게는 행운이고, 지극히 좋은 일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특대 희소식이다. 하나님이 한 단계 새 사역을 하였을 때는 하나님에게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된 것이다. 이 단계 새로운 사역과 새로운 시작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고 시행될 때는, 이 단계 사역이 이미 결정되고 성취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이미 최종 효과와 성과를 보았을 때이다. 또한 그때는, 그 효과가 하나님을 만족케 했을 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기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자신이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자신이 찾으려고 하는 사람을 이미 확정하고 얻기도 하였으며, 하나님의 사역이 성취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음에 위안을 받았고, 슬픔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즐거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로운 사역을 전개할 수 있기 위해 아무런 가로막힘도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했을 때, 또 이 모든 것이 다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결말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 결말로 말미암아 만족했고, 마음은 즐거웠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겠느냐? 너희는 상상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눈물을 흘릴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춤을 출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노래를 불러도 되지 않겠느냐? 그 노래는 마땅히 어떤 노래여야 하겠느냐? 하나님은 당연히 아름다운 노래, 구성진 노래, 그 자신의 마음속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자신에게 들려주며, 만물에게도 들려줄 수 있다. 하나님의 즐거움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은 다 정상이다. 하나님에게는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심정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별다른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금고아 주문으로 하나님을 대하면서 하나님에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제한하거나 하나님의 그 어떤 심정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기뻐해도 안 되고, 눈물을 흘려도 안 되며, 울어도 안 되고, 그 어떤 정서를 표현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몇 차례 교통을 통해, 너희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자유와 해방을 좀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이후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할 때도 정말 하나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최소한 하나님이 왜 기뻐하고 왜 슬퍼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그 어떤 간격도 없게 될 것이며, 너는 상상과 관념이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하나님은 너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분이 되고, 생생하게 나타나는 분이 되며, 너의 생명이 되는 하나님이 되고,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님이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이런 소망이 있느냐? 그렇게 될 자신이 있느냐?

계속해서 다음의 구절들을 읽어 보자.

6. 산상 수훈

1) 복을 말하다 (마 5:3~12)

2) 빛과 소금 (마 5:13~16)

3) 율법을 말하다 (마 5:17~20)

4) 노하는 것을 말하다 (마 5:21~26)

5) 간음을 말하다 (마 5:27~30)

6) 이혼을 말하다 (마 5:31~32)

7) 맹세를 말하다 (마 5:33~37)

8) 보복을 말하다 (마 5:38~42)

9)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다 (마 5:43~48)

10) 구제를 말하다 (마 6:1~4)

11) 기도를 말하다 (마 6:5~8)

7. 예수의 비유

1) 씨 뿌리는 비유 (마 13:1~9)

2) 가라지 비유 (마 13:24~30)

3) 겨자씨 비유 (마 13:31~32)

4) 누룩 비유 (마 13:33)

5) 가라지 비유를 설명 (마 13:36~43)

6) 보화를 감추는 비유 (마 13:44)

7) 진주를 발견하는 비유 (마 13:45~46)

8) 그물을 치는 비유 (마 13:47~50)

8. 계명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선 ‘산상 수훈’에 포함된 조목부터 보자. 이런 내용은 다 어떤 것에 관련되느냐? 확실히 말해서, 이런 내용은 율법시대의 규례 속에 있는 그런 내용들보다 더욱 높고 더욱 구체적이며, 사람의 생활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사람의 실제적인 실행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다음의 구체적 내용을 읽어 보자. ‘복을 말하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율법을 말하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노하는 것을 말하다’에 대해 어떤 정의를 가지고 있는지, 간음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혼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말들과 규정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이혼할 수 없는지, 맹세를 말하고, 보복을 말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구제하는 것 등등 이런 내용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여러 방면의 실행에 관련된다. 이런 실행들을 지금에 가져와도 어떤 것은 계속 적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람을 향한 지금의 요구보다는 좀 얕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접촉하게 되는 기초적인 것에 가까운 진리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의 생명 성정 방면에 관련된 사역에 착수했지만, 그런 사역은 율법의 기초상에서 하게 된 일부분 사역이다. 그런 방면의 규정과 논법은 진리와 관련이 있을까? 당연히 관련이 있다! 이전의 규례든 원칙이든 아니면 은혜시대의 그런 수훈이든, 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관련이 있는데, 다 진리와 관련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발표하든, 어떤 방식으로 발표하든, 어떤 언어를 통해 발표하든, 그 기초, 근원, 출발점은 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원칙으로 하여 발표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런 말씀들이 지금에 와 보면 좀 얕기는 하지만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은혜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생명 성정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없어서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수훈 중에서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고 할 수 있느냐? 없다! 어느 한 가지든 다 진리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가지든 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고,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람 됨의 원칙과 범위이며, 다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때 사람의 생명 정도(程度)는 겨우 그런 것만 받아들이고, 겨우 그런 것만 깨달을 수 있었을 뿐이다. 사람의 죄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말씀들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범위에서 그렇게 얕은 교훈으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원칙과 범위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은 모두 그때 사람들의 분량에 근거해 결정한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쳐 준 범위도 그런 범위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예수의 비유’ 중에 있는 조목들의 내용을 보자.

첫 번째,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 비유는 매우 뜻깊다. 씨 뿌리는 것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흔히 보게 되는 일이다. 두 번째, 가라지의 비유이다. 무엇이 가라지인지는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나 어른이라면 다 알 것이다. 세 번째, 겨자씨의 비유이다. 너희는 겨자가 뭔지 다 알겠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성경을 찾아보면 된다. 네 번째,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들은 누룩이 발효 식품에 쓰이고, 사람의 일상생활에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음의 여섯 번째, 보화를 감추는 비유, 일곱 번째,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 그물을 치는 비유, 그 모든 비유의 소재들은 다 사람의 생활에서 찾은 것이고, 다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 비유들은 사람에게 어떤 그림을 떠올리게 하느냐? 그 그림은 하나님이 정상 사람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활상의 용어, 인성의 용어로 사람과 소통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사람의 각종 생활 방식을 체험하고 목격한 후, 그런 생활 체험은 다 신성의 언어를 인성의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敎材)가 되었다. 또한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예수가 사람에게 진리를 좀 깨닫게 해 주려고 할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좀 깨닫게 해 주려고 할 때, 위의 여러 가지 비유와 같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줄 수 있었다. 그런 비유는 모두 사람의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사람의 생활과 어긋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할 때, 농부들이 씨 뿌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무엇이 가라지인지도 알고 무엇이 누룩인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예수는 인류가 보화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므로 보화를 감추는 비유도 하고, 보화를 찾는 비유도 해 주었다. 예수는 생활 속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어부들이 그물을 치는 등등 인류의 생활과 관련되는 그런 행위들을 친히 보았고, 동시에 그런 생활을 체험하기도 했었다. 예수는 모든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하루 세 끼와 일상에서 일하고 쉬는 것을 체험하고 평범한 사람의 생활을 친히 겪으면서 다른 사람의 생활도 목격하였다. 예수가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친히 겪을 때, 어떻게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인지, 어떻게 자신이 더 자유롭고 더 편하게 살 것인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그런 진실한 생활을 체험하는 동시에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쓰라림을 보았고, 사탄의 패괴 아래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쓰라림과 가련함과 비참함도 보았다. 예수는 인류의 생활을 체험하는 동시에, 패괴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너무나도 의지할 데 없다는 것도 몸소 느끼게 되었고 또한 죄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사탄에게 시달리고 죄악에 시달려 목표와 방향이 없는 참상도 느끼게 되었다. 예수가 그런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신성에서 본 것일까 아니면 인성에서 본 것일까? 예수의 인성은 존재하고 살아 있는 것이어서 그 모든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고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실질, 곧 예수의 신성도 그것을 당연히 보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 자체―예수, 그 사람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가 본 그 모든 것은 자신에게 그 당시에 도성육신이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예수는 그때에 도성육신이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 임하는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고 있었지만,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무기력함을 보게 되었을 때, 인류가 율법 아래에서 가련하게 살면서 힘없이 몸부림치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예수의 마음은 더욱더 아팠다. 그리하여 예수는 더욱더 절박하게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려고 하였다. 예수는 마음속으로 어떤 곤경에 직면하게 되든, 앞으로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든, 죄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을 구속해야겠다고 더욱 굳게 생각하였다. 그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이 어떤 것인지, 담당해야 할 부탁이 어떤 것인지 더욱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는 자신이 담당할 사역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완성하려고 했다. 곧,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도록, 그와 동시에 하나님도 속죄제로 말미암아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그에 따라 인류를 구원하는 진일보의 사역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사람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제가 되는 일을 완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마음속으로 기꺼이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고, 속죄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뿐만 아니라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그 사역을 완성하려고 했었다. 심지어 예수는 인류 생활의 참상을 보았을 때, 되도록 빨리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려고 했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그런 절박한 마음이 있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을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이 얼마나 큰 굴욕을 참아야 하는지도 고려하지 않았다. 예수의 마음속 신념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즉, 자신을 바치기만 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제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고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전개할 수 있으며,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생활과 생존 상태가 이제 곧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념과 예수가 하고자 마음을 굳힌 일은 모두 인류를 구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여 다음 단계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육신에서 살고 있는 도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그에게는 정상 인성이 있었다. 또한 그는 정상인이 구비한 감성과 이성(理性)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고통인지를 알고 있었다. 예수는 인류의 그런 생활을 보았을 때, 단지 사람에게 어느 정도 교훈만 해 주고, 어느 정도 공급이나 가르침만 해 주면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계명만 지키게 하면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이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사해 줄 수 있다고 깊이 느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고 목격한 후, 마음속에 인류를 죄 속에서 헤매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강렬한 소망이 생겼다. 예수는 그 소망에, 더더욱 자신이 되도록 일찍, 되도록 빨리 십자가에 올라 인류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것이 바로 그때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죄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낀 후에 갖게 된 마음과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인류를 향해 이런 뜻을 가지고 이런 성품을 발표하고 유로하였는데, 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구비한 것이냐? 보통 사람이 그런 환경 속에서 살면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만일 보통 사람이 그 모든 것에 직면한다면, 높은 각도에 서서 문제를 볼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그럴 수 없다! 비록 하나님 도성육신의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고 또한 사람의 지식도 배우고, 사람의 언어로 말하며, 심지어 어떤 때는 사람의 방식을 쓰거나 사람의 논법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지만, 인류를 대하고 일을 대하는 그의 실질은 패괴된 인류와 절대로 같지 않고, 또한 그가 서는 각도와 높이는 그 어떤 패괴된 인류도 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입은 육신도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구비하고 있고, 그의 마음과 인성에서 발표해 낸 것도 다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로 놓고 말하면, 육신이 발표한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다. 그런 공급은 단지 어느 한 사람만 상대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상대한 것이다. 패괴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속에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그 몇 명뿐이고, 자신이 관심을 갖고 걱정하는 사람도 단지 그 몇 명뿐이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기 집의 아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신의 부모이다. 상대적으로 ‘널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기껏해야 어떤 친척이나 괜찮은 친구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을까? 영원히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단지 사람의 각도와 사람의 높이에 서서 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성육신 하나님은 패괴된 인류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그 도성육신이 얼마나 평범하든, 얼마나 정상적이든, 얼마나 낮든, 심지어 사람들이 얼마나 업신여기든 그의 생각과 인류를 향한 태도는 아무도 구비할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신성의 각도에 서서, 조물주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질로, 하나님의 마음 상태로 인류를 대하고 있다. 그는 절대로 보통 사람의 높이에서, 패괴된 사람의 각도에서 인류를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은 인간의 안목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규례, 사람의 학설 등등을 가늠 기준으로 삼아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이고, 패괴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범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가늠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육신과 패괴된 인류가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다. 그 다른 점은 각자의 실질로 인해 결정된 것인데, 바로 그 다른 실질로 각자의 신분과 지위가 결정된 것이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각도와 높이도 결정된 것이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발표와 유로를 보았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가 행한 것과 말한 것은 모두 자신의 직분과 관계되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계되며, 모두 하나님 실질의 발표와 유로이다. 설령 예수에게 인성의 표현이 어느 정도 있을지라도 예수의 신성 실질과 유로를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런 인성의 표현들은 정말 인성의 표현일까? 예수와 패괴된 인류의 인성 표현은 실질상에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의 도성육신이다. 예수가 정말 패괴된 인류 중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그가 신성의 각도에서 인류의 죄악된 생활을 대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패괴된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든지 죄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다 같은 것이다. 마치 돼지가 진창에서 살면서 아무런 불편한 느낌도 없고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맛나게 먹고 달게 자는 것과 같다. 사람이 돼지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돼지는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고 깨끗함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얼마 가지 못하고 돼지는 또 진창에서 이리저리 뒹구는데, 매우 자유롭다. 왜냐하면 돼지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기에, 돼지는 정말 더럽다. 네가 돼지에게 청소를 깨끗하게 해 줘도 좋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돼지를 집 안에서 키우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돼지를 대하는 것과 돼지 자체가 가지는 느낌이 영원히 다른 것은 사람과 돼지가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말씀이 육신 된 인자는 패괴된 사람과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성육신만이 하나님의 각도에 서서, 하나님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대하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육신이 받는 고통은 무엇이냐?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너무나 큽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지만, 사람은 다 그분의 실질을 모르고 늘 그분을 사람으로 대하여 섭섭하게 하고 억울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정말 너무나 큽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무고하신 분이고 죄가 없으신 분인데 오히려 사람과 똑같은 고통을 받으시고 사람과 함께 박해, 훼방, 모욕을 당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오해를 참아 주시고 거역하는 것도 참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고통은 정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보아하니,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실, 너희가 말한 그런 고통은 하나님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원인은, 그런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고통일까? 말씀으로 된 육신에게 있어서 진정한 고통은 또 무엇일까?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있어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조금 오해가 있어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고통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늘 하나님이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 같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도성육신 된 기간에 인류에게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높고 큼을 보게 할 수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늘 그렇게 낮추면서 작디작은 육신에 자신을 감추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틀림없이 매우 고통을 받는다고 여긴다. 사람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에게 온갖 동정을 주며, 심지어 늘 이런 것에 대해 자그마한 찬미까지 드린다. 사실, 사람이 터득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차이가 있고 거리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솔직하게 말하겠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도성육신이든 그런 고통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 도성육신 하나님의 각도에서만 하나님이 받은 고통에 대해 교통해 보자.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어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인류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생존 방식, 생존의 법칙이 하나님에게 주는 느낌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마음에 혐오감을 느끼게 하지 않겠느냐? 왜 혐오할까? 인류의 생존 방식과 법칙은 무엇이냐? 어떤 원칙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냐?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등 그 모든 것은 다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을 토대로 하여 생긴 것이다. 그런 생존 법칙 아래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인성이 없고 진리가 없으며, 전부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만 가지고 있다. 우리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질을 보자. 하나님의 실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전혀 반대된다. 하나님의 실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 등등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제가 가득하다. 그런 실질을 구비한 하나님이 이런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데, 하나님 마음속의 느낌은 어떠할까?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자 아무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면한 것, 접촉한 것, 들은 것, 본 것, 체험한 것은 전부 다 인류의 패괴와 사악이고,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 고통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패괴된 인류는 실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패괴는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근본 원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을 때, 자신과 공통 언어가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을까? 인류 가운데서는 찾을 수 없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느냐? 사람이 논의하는 것, 사람이 좋아하는 것, 사람이 추구하고 동경하는 것은 모두 죄와 관련되고, 모두 사악한 조류와 관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하지 않겠느냐? 그런 일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기쁠 수 있겠느냐? 위안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그런 고통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이라도 가진 적이 있느냐? 누가 거들떠본 적이라도 있느냐? 누가 또 몸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더 느끼지 못한다. 사람의 냉담과 사람의 마비는 하나님이 받는 고통에 설상가상이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두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는 가장 큰 고통일 것이라고 여긴다. 지금, 사실에서 보면 그러하냐?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태껏 육신이 받는 그런 고통으로 인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적이 없고, 지금까지 사람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거나 무엇으로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사람의 패괴된 생활과 패괴된 인류의 사악함을 목격하고, 사람이 사탄에게 통제되고 사탄에게 농락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 사람의 그 모든 죄악에 하나님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인류에 대한 혐오는 날로 늘어나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는 크나큰 고통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마음의 소리, 자신의 희로애락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 완전하게 발표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진정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노력해 보는 사람도 없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한번 또 한번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대가에 대해 그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실질로 인해 하나님은 인류의 사악, 패괴와 죄악을 조금도 용인할 수 없고,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극도로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육신은 그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너희는 이런 것을 보았느냐? 너희 중 아무도 보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천천히 체득해 보아라!

계속해서 다음 구절들을 보자.

9. 예수가 표적과 기사를 행하다

1)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요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2) 나사로가 부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요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가 행했던 표적과 기사 중에서 두 가지만 골랐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내가 여기에서 교통하려고 하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을 매우 놀라게 하는 두 가지 표적과 기사이다. 즉,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했던 매우 대표성을 갖고 있는 두 가지 표적과 기사이다.

우리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개념이냐? 통상적으로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면 몇 명이 먹을 수 있느냐? 일반인의 식사량으로 가늠한다면 겨우 두 명만 먹을 수 있다. 이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에게 주는 최소한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 기록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몇 명에게 나누어 주었느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하면 오천 명이란 그 수는 많지 않으냐? 그 수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사람이 보기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 간에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한입씩 조금만 먹는다고 해도,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이 먹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다. 그는 오천 명을 모두 배불리 먹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은 것도 있었다.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표적은 사람에게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게 했고 또한 하나님에게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은 전능하다는 사실도 보게 해 주었다. 여기에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는데, 음식물이 없었다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을까? 당연히 먹일 수 있다! 그것은 표적과 기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불가사의하다고 여기고, 기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고 여기는 부분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하나님에게는 보통 일인데 왜 여기에서 설명하려고 할까? 왜냐하면 그 표적의 뒤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 먼저, 그 오천 명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느냐?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느냐? 전혀 몰랐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지도 몰랐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만 알고 있었거나 혹은 예수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거나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소문으로 전해진 예수에 대해서 호기심만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예수를 따랐다고는 전혀 말할 나위가 없고, 예수 자체에 대해 알고 있다고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가 그 오천 명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 그저 배불리 먹을 생각뿐이었다. 예수는 그런 배경에서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는 동시에 마음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냥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그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어떠하였을까? 여기에서, 예수의 생각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관련된다. 배가 고파서 그저 한 끼 배불리 먹으려고만 하는 그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에 대해 호기심으로 가득 차고 또 기대로 가득 찬 그 오천 명을 마주하여, 예수는 단지 그 표적과 기사를 통해 그 오천 명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하였을 뿐, 결코 그 오천 명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사람들이 그저 구경거리에 끼어들기 위한 것이고, 그저 떡으로 배불리 먹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자리에서 오병이어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여 주어, 구경하기 좋아하고 표적을 보기 좋아하는 그 오천 명에게 눈을 뜨게 해 주고, 도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해 준 것이다. 예수가 사실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는 했지만, 그 오천 명은 단지 떡으로 배불리려고만 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가르침도 해 주지 않았으며, 단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만 보게 해 주었다. 예수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무릇 피조물이라면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므로 무릇 하나님의 눈 아래에 있는 피조물에게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은 모두 그들에게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를 누리게 해 줄 것이다. 설령 그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은 후에도 예수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아무런 감사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따지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데는 원칙이 있기에 불신자들은 보살펴 주시지도 않고 보호해 주시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더더욱 누리지 못하게 하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이 보기에 무릇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릇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라면, 다 관리해 주고 보살펴 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안배하고 주재할 것이다. 이것이 만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이다.

비록 떡과 고기를 먹은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 사람들과 따지지 않았다. 너희는 그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그 어떤 말씀이라도 가르쳤느냐?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는 어디로 갔느냐? 성경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행한 후, 그곳을 조용히 떠났다. 그럼 예수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라도 했었느냐? 증오가 있었느냐? 그런 것은 다 없었다. 예수는 그저 자신을 전혀 따르지 않을 그 사람들을 더 많이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예수의 마음은 아팠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류의 타락을 보았고, 인류가 자신을 저버리는 것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그 사람들을 보고 있거나 혹은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인류의 아둔과 무지에 예수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고 또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되도록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주님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들에게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그 사람들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 사람들에게 심혈을 쏟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분명했는데, 예수는 단지 그들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만 했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에게 선대해 주고 공급해 주고, 그들을 적셔 주고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도성육신 된 것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유로하였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즉, 인자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하였고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든, 어떤 결과가 있든, 예수는 오직 조물주의 신분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대해 주었다. 예수에게서 유로된 것 중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조용히 일을 한 후, 또 조용히 떠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면의 성품일까? 하나님의 자비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무사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하지 못한다! 실질상으로 놓고 말하면,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그 오천 명은 어떤 사람들이냐? 주님과 마음이 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확실히 말해서, 그들은 절대로 주님과 마음이 합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한 그들의 실질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예수는 한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적대를 풀어 주었다. 그 방식이 바로 ‘선대’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여겼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피조물이었으므로, 예수는 여전히 그 죄인들을 선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이다. 그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를 참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과 염려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조물주가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된 인류에게 기울인 심혈과 쏟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단어로 묘사할 것이다. 어떤 두 단어일까? 어떤 사람은 무사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박애(博愛)라고 말한다. 그 두 단어 중에서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단어이다. 그 단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넓은 흉금과 마음을 묘사하는 데에 쓴다. 나는 그 단어를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칙도 대상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베푼다는 뜻이 있고, 우매한 사람, 흐리멍덩한 사람의 감정이 흘러넘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있다. 내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더 적절한 단어가 두 개 있는데, 어떤 단어일까? 첫 번째 단어는 ‘석대무비’이다. 이 단어는 예술적인 경지가 있지 않느냐? 두 번째 단어는 ‘광대’(원문: 浩瀚)이다. 내가 이 두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은 그 속에 실제적인 의의가 있다. ‘석대무비’란 이 단어는 글자 그대로 보면 어떤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그 실물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사람에게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주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각도에서 보든 아니면 입체적인 각도에서 보든, 그것은 모두 그 존재를 가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 비록 사람에게 그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했다고 느끼게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정량화하기 힘들다는 것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허한 것이 아니고, 전설 속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만물이 함께 누리는 것이고, 또한 모든 피조물이 각기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각도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하지만 오히려 만물이 자양을 얻고 성장하도록 하는데, 만물의 성장이 하나님 사랑의 세부적인 것을 창현(彰顯)하고 있으며, 또한 시시각각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있고 증거하고 있다.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고 만물을 자양하는 비밀은 인류가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고 특히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마음은 사람이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물주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자신이 친히 만든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그 정은 얼마나 큰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드넓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실제 존재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사람이 ‘조물주’란 이 몇 글자의 실제 함의를 더 깊이 깨닫고, ‘피조물’이란 이 호칭의 진정한 의의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광대하다’란 단어로는 보통 무엇을 묘사하느냐? 그것은 보통 바다나 우주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예를 들면, 광대한 우주, 광대한 바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드넓고 심오하고 고요한 우주는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에 대해 상상과 경앙(敬仰)으로 가득하고, 그것의 비밀과 심오함에 대해 바라볼 수는 있으나 닿기는 어렵다. 바다를 생각하면 바다가 광활한 것부터 떠오를 것이다. 바다는 그 끝을 볼 수 없게 하고 또한 그 신비함과 너그러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광대하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의 귀중함과 하나님 사랑의 심오함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 사랑의 에너지는 무한하고 광활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또한 하나님 사랑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로되는 하나님의 존엄과 범접할 수 없음도 느끼게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너희는 내가 ‘광대하다’란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껴지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석대무비’와 ‘광대하다’라는 이 두 단어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하기에 충족하다! 인류의 언어에서 이 두 단어만이 비교적 적절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비교적 가깝다. 너희는 적절하다고 느껴지느냐?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이 두 단어를 쓸 수 있느냐? 너희는 틀림없이 쓸 줄 모를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이해와 체험이 단지 평면적인 범위에만 국한되어 있고, 아직 입체 공간의 높이에는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말문이 막히고 심지어 할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한 이 두 단어는 아마 너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단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체험하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고, 범위가 너무 작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은 무사한 분이라고 하니, 너희는 무사하다는 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무사’로밖에 묘사할 수 없단 말이냐? 그 범위는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냐? 이 일에서 너희는 많이 상고해야만 어느 정도 수확이 있을 것이다.

위의 첫 번째 표적과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비록 사람이 수천 년 동안 읽어 온 이야기이고, 이야기 속에서 일부 간단한 줄거리를 제시하여 간단한 현상들을 보게 했지만, 우리는 그런 간단한 줄거리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이다. 이런 소유소시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발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발표할 때, 자신의 마음의 소리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한 그런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소리 없는 표현인 것이다.

계속해서 “나사로가 부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이 구절의 말씀을 보자.

너희는 이 말씀을 본 다음 어떤 소감이 드느냐? 예수가 행했던 이 표적과 기사는 첫 번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표적과 기사도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보다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런 일을 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에서는 매우 의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기 때문에, 사람은 단지 그의 겉모습만 보게 되었고, 그의 실제적인 면과 미소한 면만 보게 되었다. 설령 누군가 예수의 일부 성격이나 외적인 특기를 보았고 알고 있었을지라도, 어느 누가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예수의 실질이 도대체 누구인지,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겠느냐? 이런 것은 사람에게는 다 미지수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증명하려고 하고, 사실의 진상을 알려고 한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여 자신의 신분을 실증할 수 있지 않느냐? 그 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식은 죽 먹기이고 누워서 떡 먹기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하여 자신의 신분과 실질을 실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일을 하는 데에는 계획이 있고 절차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하지 않았고, 오직 적절한 시기, 적당한 기회를 찾아 가장 의의 있는 일을 하여 사람들에게 보게 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권병을 실증하고 자신의 신분을 실증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부활한’ 그 일에서 예수의 신분이 실증될 수 있지 않느냐? 성경 구절을 보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예수가 이 일을 했을 때는 그저 “나사로야 나오라”는 딱 한 마디만 했더니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일은 그렇게 주의 말씀 한 마디로 이루어졌다. 그 기간에 예수는 제단도 쌓지 않고, 그 어떤 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만 한 마디 했다. 그럼 그것을 표적과 기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명령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떤 술법이라고 해야 할까? 겉으로 보면, 표적과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금에 와서 말해도 표적과 기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절대로 혼을 불러오는 술법이라고 할 수 없고 사술은 더더욱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표적과 기사는 조물주 권병의 가장 정상적이고 작은 창현일 따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병이자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죽게 하여 그 영을 육체에서 떠나 저승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하는 권병이 있다. 사람이 언제 죽고 또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지,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으며, 인ㆍ사ㆍ물, 공간, 지리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기만 하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물 생령은 모두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고, 만물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생존하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 역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조물주만이 갖고 있는 권병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런 일을 한 목적은 사람에게도 사탄에게도 실증으로 보여 주어 사람의 모든 것과 사람의 생사까지도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비록 하나님이 도성육신 되었지만 예전과 다름없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며, 사람의 모든 것은 사탄이 주관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 권병의 유로와 창현이고, 하나님이 만물에게 인류의 생사는 하나님이 장악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일종의 방식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런 방식은 조물주가 인류에게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방식 중의 하나이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권병으로 인류를 가르치고 인류에게 공급해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며, 조물주가 비언어로 인류에게 자신이 만물을 주관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보게 해 주는 일종의 방식이고, 조물주가 자신의 실제 행사로 인류에게 그분 외에 다른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종의 방식이다. 그런 소리 없는 방식으로 인류에게 가져다준 가르침이 지속되는 시간은 영구한 것이고 영원불멸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심령에 영원히 쇠락하지 않는 파장과 깨우침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나사로가 부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그 일의 영향력은 심원한 것이다. 예수는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각 사람들을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사를 주관한다’라는 이런 깨달음 속에, 이런 이상(異象) 속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해 놓았다. 하나님은 비록 이런 권병이 있지만, 비록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인류의 생사를 주재하고 있다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지만, 그것은 결코 예수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의의 없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행하는 매사마다 대단한 가치가 있고, 모두 보물 중의 보물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또는 유일한 사역 목표나 항목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의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권병을 충분히 창현할 수 있었고, 예수의 신분을 충분히 실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런 표적과 기사를 결코 중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일을 한다.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본무(本務)’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일을 하는 데에는 자신의 역사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번 단계에는 어떤 사역을 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를 알고 있고, 엄격하게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을 한다는 것이다. 패괴된 사람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사람은 갖은 방법을 다해 자기 능력을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자신에게 머리 숙이고 굴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삼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사탄에게서 온 사악한 것이다. 그것을 또한 패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성품이 없고, 그런 실질도 없다. 하나님이 일을 하는 목적은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더 많은 계시와 인도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사례가 매우 적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적다고 해서 예수의 능력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예수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전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 일은 아주 실제적인 의의가 있고, 또한 도성육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도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는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에게 공급해 주고 도움이 되는 사역을 더 많이 한 것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것과 같은 일은 그저 예수가 직분을 하는 가운데서 한,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실질에 ‘자랑’이라는 이런 요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표적과 기사를 많이 나타내지 않은 것은 일부러 자제한 것이 아니고, 환경의 제한을 받은 것도 아니며, 능력이 안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는 나사로를 부활시킬 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한 그 말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 한 마디는 무엇을 뜻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 때, 세상을 창조할 때에도 말씀으로, 명령식의 말씀, 권병을 띤 말씀으로 했었다. 그리하여 만물은 그렇게 생겨났고, 일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예수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 말은 하나님이 당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입에서 나온 말씀과 같이 하나님 자신의 권병을 지니고 있었고, 조물주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물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도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권병이다. 그 권병은 도성육신한 하나님의 육신 가운데서 창현되고 실제화되었다. 그런 권병과 능력은 조물주에게 속하고, 조물주가 실제화된 인자에게도 속한다. 그것 또한 하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 사실로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인식이다. 이 화제는 여기까지 말하겠다.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10.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논단하다

(막 3:21~22)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11.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다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23:1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과부의 재산을 가로채고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므로 더욱 무서운 심판을 받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상은 각기 다른 두 부분의 내용이다.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논단한 첫 부분의 내용을 보자.

성경 본문 중, 예수와 예수가 한 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평가는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막 3:21~22)라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논단한 것은 남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터무니없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예수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들은 후 예수에 대해 내린 정론이다. 비록 그들의 정론은 정의를 신장한다는 허울을 쓰고 사람들에게 이치와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지만, 예수를 논단하는 그들의 기고만장한 기세는 그들 스스로도 억제하기 힘들었다. 예수를 증오하는 그들의 광적인 기세는 그들의 야심을 드러냈고, 그들의 사악한 사탄 몰골도 드러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악랄한 본성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논단한 그런 말들은 그들의 야심과 질투, 진리를 적대시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추하고 악랄한 본성의 지배를 받아 말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행한 일의 근원을 알아보지 않고, 예수가 한 말씀과 행한 일의 실질도 알아보지 않고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을 무작정,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듯이, 미친 듯이, 의식적으로, 악의적으로 공격하고 비방했으며, 심지어 예수의 그 영, 즉 성령, 하나님의 영을 함부로 비방했다. 그것이 그들의 입에서 나온 “그가 미쳤다, 바알세불과 귀신의 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알세불과 귀신의 왕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의 영을 입은 육신이 하는 역사를 보고 미쳤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알세불과 귀신의 왕이라고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정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모독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실질은 사탄, 악마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실질과 완전히 똑같다. 그들이 대표한 것은 패괴된 인류만이 아니라 또 사탄의 화신이며, 인류 가운데 있는 사탄의 대변자(원문: 出口)이자 사탄의 공범자이고 사탄의 심부름꾼이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훼방하는 실질은, 그들이 하나님과 지위를 쟁탈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질과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태도, 그들이 입으로 뱉은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을 직접 모독하고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정론을 내놓았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성령 모독죄로 정하였는데, 그 죄는 금세와 내세에서도 다 사함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 구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오늘 우리 함께 하나님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한 그 말씀의 실제 함의에 대해 말해 보자. 즉, 하나님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그 말씀을 어떻게 이루는지에 대한 비밀을 밝혀 보자.

우리가 교통한 모든 내용은 다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고, 다 인ㆍ사ㆍ물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관련된다. 물론, 위의 두 단락 성경 구절도 예외는 아니다. 너희는 이 두 구절에서 무엇을 보지 못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노를 보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범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그 방면의 성품을 보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에게 사함받지 못한다는 것도 보았다고 말한다. 설령 사람이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노기와 사람의 범접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느꼈을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아직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두 구절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건드려 노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태도와 처리 방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 태도와 처리 방식이 바로 성경에 있는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이 말씀의 진실한 함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할 때, 즉 하나님을 건드려 노하게 할 때, 하나님은 정론을 내리는데, 그 정론이 바로 하나님이 꺼내 놓은 결과이다. 성경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 12:31),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라고 이렇게 적혀 있다. 그러나 예수가 그런 말씀을 한 후, 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를 미쳤다고 말한 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결말이 어떻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느냐? 그들이 어떤 징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느냐?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한 ‘없다’라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른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결말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의 ‘없다’는 문제를 하나 설명한다. 그것은 어떤 일들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원칙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모독한 사람, 자신을 대적한 사람, 심지어 자신을 훼방한 사람들에게, 고의로 공격하고 훼방하고 욕한 사람들에 대해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태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증오하고, 마음속으로도 그 사람들을 정죄하였으며, 심지어 그 사람들의 결말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에게는 명확한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결말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도 알게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후에,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결말과 정론을 내리는 원칙도 알기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처리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방식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을 하는 원칙에 관련된다. 일부 사람들의 악행에 있어 하나님은 사실이 임하게 하는데, 즉 죄행을 선포하지도 않고, 결말을 정하지도 않고, 사실이 바로 임하게 하여 징벌을 받게 하거나 상응한 보응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임할 때 징벌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인데, 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악행은 하나님이 그저 말씀으로 저주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노도 그들에게 임하는데, 그들이 받는 징벌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결말은 심지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징벌받고 격살당하는 결말보다 성질이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고 관용하지 않고,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한 상황에서, 그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내버려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버려 두다’는 무슨 뜻일까? 이 단어 자체의 뜻은 먼저 한쪽에 놔두고 상대하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버려 두다’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첫 번째 해석은, 사탄이 처리하도록 그 사람의 목숨과 모든 것을 다 사탄에게 넘겨주고, 하나님은 더 이상 책임지지 않고, 더 이상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미치든, 발광하든, 멍청해지든, 살든, 죽든,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든, 모두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피조물이 조물주와 완전히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 해석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친히 어떤 일들을 하기로 뜻을 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빌어 효력을 하게 할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빌어 안받침물이 되게 할 수도 있으며, 그런 사람에 대해 일종의 특별한 처리 방식과 특별한 취급 방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울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그 부류의 사람들을 처리하기로 뜻을 정한 원칙과 하나님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려 노하게 하고 하나님의 최저 기준을 거스른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결과는, 하나님이 사람의 목숨을 모든 것과 같이 다 한꺼번에 사탄에게 영원히 넘겨주어 영원토록 사함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사탄의 먹이가 되고 장난감이 되어 그때부터 하나님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욥이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 그 당시의 비참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욥은 여전히 매우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진 사람, 사탄에게 완전히 통제된 사람, 하나님의 보살핌과 긍휼을 완전히 잃고, 조물주의 주재를 잃고, 조물주를 경배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서 피조물이 될 권리를 박탈당하고, 조물주와 완전히 관계가 단절된 사람이 받게 될 사탄의 학대는 더욱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아니겠느냐? 욥에 대한 사탄의 참해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면, 그 결과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소로 환생하고, 어떤 사람은 나귀로 환생하고, 어떤 사람은 더러운 귀신과 악령에 점유되고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들리는 등등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사탄에게 넘겨진 일부 사람들에게 있게 되는 결말과 끝장이다. 겉보기에는 그때 당시 예수를 헐뜯고 훼방하고 정죄하고 모독한 그 사람들이 어떤 결과도 감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님에게는 어떤 일에 대해서든 다 처리하는 태도가 있다. 각 부류 사람의 결말에 대해 하나님이 다 명확하게 말씀하여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지 않고 직접 일하는데, 말씀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과가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결과는 더욱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이 일부 사람에 대해 말씀으로 자신의 태도를 밝히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이미 그 사람을 상대하기 싫어하고 더 이상 보기 싫어한 것이다. 그 사람의 모든 행위로 인해, 그 사람의 본성 실질로 인해, 하나님은 그저 그런 자를 하나님의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직접 사탄에게 넘겨주는데, 그 사람의 영, 혼, 체까지 다 사탄에게 넘겨주어 제멋대로 처리하게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증오하고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려,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철저히 포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도 친히 그 사람을 처리하기 싫을 정도에 이르고, 사탄에게 넘겨주어 마음대로 하게 하고, 사탄이 통제하고 삼켜 버리고 임의로 대하게 하는 정도에 이르면, 그 사람은 철저히 끝난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사람이 될 자격이 영원히 취소된 것이고, 피조물이 되는 자격도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심한 징벌이 아니겠느냐?

이상의 이런 내용이 바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이 말씀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자 이 성경 구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다. 이제 알았겠지!

계속해서 다음 구절들을 읽어 보자.

12.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요 20:26~2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1:16~17)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구절에 기록된 것은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했던 일들과 말씀들이다. 우선 부활 후의 예수가 이전의 예수와 어떤 다른 점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예수는 여전히 그전의 예수였을까? 성경에는 이런 말로 부활 후의 예수를 묘사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주 뚜렷한바, 이때의 예수는 이미 더 이상 육신이 아니라 영체였다. 이는 예수가 육신의 제한을 뛰어넘어 문이 닫혀 있는 상황에서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 후의 예수와 전에 육신에서 살고 있었던 예수와의 가장 큰 다른 점이다. 비록 그때의 영체와 그전의 예수의 형상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때의 예수는 오히려 사람들이 낯설게 여기는 예수가 되었다. 이는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체는 그전의 육신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지게 하였으며, 동시에 또 사람들에게 예수와 더 큰 거리가 생기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의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더욱 신비하여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의 그런 인식과 느낌은 한순간에 사람을 또 모두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 시대로 데려갔다. 그러므로 부활 후의 예수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 자신을 보게 하고 또한 자신의 존재를 실증하고,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그 사실도 실증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자신이 육신 가운데서 역사했던 기간의 사람들과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었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일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인류를 구속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후의 예수가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사람들에게 나타난 그 사실로 인해, 사람은 은혜시대에 단단히 고착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의 ‘사라짐’이나 ‘말없이 떠나간’ 것으로 인해 지나간 시대, 즉 율법시대로 되돌아가지 않게 되었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가 행한 사역을 준수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은혜시대의 사역은 정식으로 국면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던 인류도 그때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나와 새로운 기원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가 부활 후에 사람에게 나타난 여러 방면의 의의이다.

영체인데도 왜 사람이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었을까? 그것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의의에 관련된다. 너희는 이 몇 구절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일반적으로, 영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예수가 부활 후에 담당한 사역은 이미 끝났으니, 이론상으로 말하면, 예수는 다시 사람들 가운데 와서 원래의 형상을 지니고 사람과 만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영체는 도마와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나 예수가 나타난 의의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사람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심어지게 했다. 예수는 도마에게 왔을 때, 의심 많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을 만져 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 말씀과 그런 일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보게 되느냐? 부활 후의 예수는 여전히 그 예수였고, 그의 실질은 바뀌지 않았다. 도마의 의심은 그때에야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기간에도 계속 있었다. 그때의 예수는 단지 죽음에서 부활하고 다시 영계에서 돌아온 예수였을 뿐이었다. 예수는 원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고유한 성품을 띠고 있었으며, 육신에 있을 때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로 도마를 찾아와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하고, 예수의 부활 후의 영체를 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영체의 존재도 더듬고 느낄 수 있게 하여 도마의 의심을 철저히 내려놓게 하였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일에 대해 늘 의심하면서 믿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도마의 믿음은 단지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손으로 만져 본 기초 위에 세워졌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 부류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만 믿으면서 하나님이 보낸 분이나 도성육신 된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예수는 도마에게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확실히 하나님의 도성육신임을 시인하고 믿게 하기 위해 손을 내밀어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에 도마의 의심에는 변화가 생겼을까? 도마는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의 영체가 친히 나타나고 아울러 도마에게 직접 손으로 예수 몸의 못 자국을 만지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도 도마의 의심을 해결해 줄 수 없었고, 아무도 도마의 의심을 내려놓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지게 하였고, 또한 못 자국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도마의 의심은 그때부터 사라졌다. 도마는 예수가 이미 부활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또한 예수가 진정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도성육신임을 시인하고 믿게 되었다. 비록 그때의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와 만날 기회를 영원히 잃었고, 그리스도와 함께할 기회를 영원히 잃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알아갈 기회를 영원히 잃었으며, 그리스도께 온전케 될 기회를 영원히 잃었다. 또한 예수가 나타나 말씀한 것은 의심 많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렸고 선고도 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실제적인 말씀과 행사로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하나님만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곧,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고, 그들이 의심을 품고 따르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 그날은 하나님의 큰 공이 철저히 이루어지는 그날일 수밖에 없는데, 물론 그날은 그들의 의심이 선고받는 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들의 완고한 의심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게 되며, 그들의 강퍅함으로 인해 그들의 소망은 허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림의 떡으로 굶주림을 달래는 격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의심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진정한 태도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령 예수의 못 자국을 만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헛된 일이다. 그들의 결말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헛수고’라는 이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도마에게 한 말씀은 각 사람에게도 부활한 예수가 곧 그 당시에 사람들 가운데서 33년 반 동안 역사했던 예수임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고, 또한 예수는 비록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 부활했지만 예수의 각 방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예수의 몸에는 비록 못 자국이 생겼을지라도, 예수는 비록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을지라도 예수의 성품과 사람에 대한 이해 및 사람에 대한 뜻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 주었다. 그와 동시에, 예수는 또 사람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죄를 이기고 고난을 이기고 죽음을 이겼으며, 자신의 못 자국이 곧 사탄을 이긴 증거이고 속죄제가 되어 전 인류를 성공적으로 구속한 증거임을 알려 주었으며, 자신이 이미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가 돌아와 제자들을 만났을 때, 예수는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예전의 그대로 존재하느니라. 오늘 진정으로 너희 앞에 서서 너희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느니라.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할 것이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는 또 도마의 일을 통해 이후의 사람들에게 ‘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비록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고,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를 볼 것이니라. 그런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고 타일러 주려고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난 이 구절의 말씀은 전체 은혜시대의 사람들에게 매우 큰 도움을 얻게 해 주었다. 예수의 나타남과 도마에게 한 말씀이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심원한 것이고, 그 의의는 영구한 것이다. 도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심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고 마음이 험악하고 간교하여,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를 불신하고, 하나님의 도성육신도 불신했지만, 예수의 부활에 그들은 통격을 당했고 또한 자신들에게 의심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식하고, 자신의 간교함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예수의 존재와 부활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 도마의 일은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警戒)를 주었고, 또한 후세 사람에게 제시를 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마처럼 의심하면 흑암에 빠질 것이니 도마처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를 준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따르면서 늘 도마처럼 주님의 옆구리를 만지고, 주님의 못 자국을 확인하여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고 검증하거나 추측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게 도마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지해 믿지 말고, 단순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에 대해 의심 없이 믿고 따르기만 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는데, 그런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예수의 자그마한 요구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훈계였다.

지금까지는 모두 의심 많은 사람에 대한 예수의 태도였다. 그럼 예수를 성실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에 대해, 예수는 또 어떤 말씀을 하였고, 어떤 일을 하였을까?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보려고 하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이다.

이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거듭 물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 즉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더 높은 요구 기준이다. 예수의 물음은 캐묻는 것이자 다그쳐 묻는 것이고, 더욱이 베드로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이다. 예수가 그런 방식으로 묻는 것은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일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까?’라고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는 비록 베드로 한 사람에게 물었지만, 사실상 예수의 마음속에서는 베드로에게 묻는 기회를 통해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단지 베드로가 복이 있어 그 부류 사람들의 대표가 되어 예수의 질문을 직접 받았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한 이 말씀에 비하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질문했던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태도가 엄격하고 또한 질문할 때의 마음이 절박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한다. 본성이 궤사하고 의심 많은 도마에 대해, 예수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못 자국을 만지게 하여 자신이 부활한 인자라는 것을 믿게 하였고, 자신의 신분은 그리스도라는 그 사실을 시인하게 하였다. 예수는 비록 도마를 엄하게 질책하지 않았고, 도마에게 명확한 말로 정론을 내리지도 않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자신이 도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도마에게 알려 주었고, 그와 동시에 그것은 그 부류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정한 뜻이라는 것도 밝힌 것이다. 예수가 했던 그 말씀에서 그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는 볼 수 없다. 도마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예수의 요구도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 같은 부류의 사람에 대해 확연히 다른 태도를 유로하였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자신의 못 자국을 만져 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베드로에게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였다. 예수의 질문은 사람을 깊이 반성하게 하고, 의미심장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 자책을 느끼게 하고 황공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예수의 그 애타는 마음과 슬픈 심정,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고,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고, 단순하고 성실한 사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성 어린 가르침과 엄격한 요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수의 질문은 사람에게 간단한 말씀에서 유로되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기대가 단지 믿고 따르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임을 느끼게 하였다. 곧, 너의 주를 사랑하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임을 느끼게 하였다. 그 속의 사랑은 헤아리는 것이고 순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화비하고 지불하는 것이다. 또한 그 속의 사랑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하나님에게 증거와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보답이고 사람의 책임과 의무와 본분이자 사람이 일생 동안 준행해야 하는 길이다. 그 세 번의 질문은 곧 베드로와 온전케 될 모든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와 부탁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한 세 번의 질문에 인도받고 격려받아 자신의 인생길을 다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예수가 떠날 때에 했던 질문에 베드로는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복하게 되었으며,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일생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로 역사하였다.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은혜시대의 도(道)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두 번째 부류는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한 후, 먼저 가장 의의 있는 그런 두 가지 일을 했던 것이다. 한 가지는 도마에게 하였고, 한 가지는 베드로에게 하였다. 그 두 가지 일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대표하지 않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대표하지 않느냐? 도마에게 했던 사역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사람이 되지 말고 어쨌든 믿기만 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에게 했던 사역은 베드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확한 요구를 제시하여 그들의 추구 목표를 명확히 가리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부활한 후,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는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났고, 말씀하였으며, 또한 그들에게 요구를 제시하고, 사람을 향한 자신의 뜻과 기대를 남겨 주었다. 말하자면, 도성육신 하나님으로서, 육신에서 살고 있는 동안이든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부활한 영체이든, 인류를 향한 그의 걱정과 요구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을 때, 그 제자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마음속으로 각 사람의 정형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각 사람의 부족점도 알고 있었다.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가 되었어도 각 사람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육신에 있을 때와 똑같은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 결코 완전하게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육신에 있는 기간에는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다가, 부활 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분이고, 도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100% 확정하게 해 주었다. 예수는 자신의 나타남과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한 그런 일을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하는 데의 최대의 이상(異象)과 동력이 되게 해 주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그 일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견고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은혜시대의 사역을 철저히 인류 가운데 구체화시켰다. 따라서, 은혜시대 예수 구원의 이 복음도 점차 인류 가운데 구석구석까지 다 확장되었다. 말해 보아라, 예수가 부활한 후에 나타난 것은 의의가 있지 않느냐? 네가 그 당시의 도마나 혹은 그 당시의 베드로였다면, 너의 일생 가운데서 이런 의의 있는 일을 한 번 만나게 되었다면, 이런 일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너는 이 일을 하나님을 믿는 생애에서 가장 좋고, 가장 큰 이상으로 여길 수 있겠느냐? 너는 그 일을 한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너는 필생의 에너지를 바쳐 이 가장 큰 이상(異象)을 널리 전할 수 있겠느냐? 너는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는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너희는 비록 그런 일을 경력하지 못했지만, 도마와 베드로의 그 두 가지 사례는 이미 현대인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뚜렷한 이해가 있을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도성육신한 후, 친히 인간 세상의 생활을 겪고,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겪으면서 인류의 타락을 보고, 인류가 생활하는 지금의 상황을 본 후, 육신에서의 하나님은 인류가 무기력하고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것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육신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의 인성으로 인해, 육신의 본능으로 인해 인류의 처지를 더욱 알아주고, 따라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더욱 마음에 두고 있다. 너희는 그런 것을 아마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견장괘두’란 이 단어로 육신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염려와 생각, 관심을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이 단어는 인류에게서 온 말이고, 아주 인성화된 단어이지만,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견장괘두’는 너희가 경력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끼고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기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동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나타난 것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 대해 자신의 인성에서 가지고 있었던 ‘견장괘두’를 실제화하여 자신의 영체에,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신성 안에 넘겨준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나타난 것으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사람을 마음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느끼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시대를 개척하는 분이고 시대를 전개하는 분이자 시대를 끝마치는 그분임을 매우 강하고 힘 있게 실증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나타남으로 모든 사람의 믿음을 견고케 하였고, 자신의 나타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실증하였으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구한 입증을 얻게 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나타남으로 새 시대 사역의 국면도 열어 놓았다.

13.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눅 24:30~32)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4. 제자들이 예수께 구운 생선을 드리다

(눅 24: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우리 계속해서 위의 이 몇 구절들을 보자. 첫 구절은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은 것과 성경을 풀어 준 것에 관해 기록한 것이고, 두 번째 구절은 예수가 구운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너희는 예수가 떡을 먹고 구운 생선도 먹었다는 이런 묘사들이 너희에게 어떤 장면을 보여 주는지 상상해 보아라. 만약 예수가 너희 앞에 서서 떡을 먹는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혹은, 예수가 너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면서 생선도 먹고 떡도 먹는다면, 그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한번 상상해 보아라! 만약 네가 주님과 아주 가깝다고 느껴지고, 주님은 사람을 아주 친절하게 대해 준다고 느껴진다면, 그런 느낌은 정확하다. 그것이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들 앞에서 떡을 먹고 생선을 먹는 일로 도달하려는 효과이다. 만약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과 대화만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뼈와 살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 혼이라고 느껴지게 한다면,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실망하지 않겠느냐? 실망하게 될 때는 버림받은 느낌이 들지 않겠느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 거리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역효과를 가져오겠느냐? 사람들은 틀림없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경원시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끊고 은혜시대 이전의 사람과 하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되돌아갈 것이다. 사람이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체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잃게 하고, 동시에 또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에 있을 때 사람과 거리감 없도록 맺어 놓은 친밀한 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든다. 영체에 대한 사람의 느낌은 단지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말없이 응시하는 것일 뿐,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교류하거나 대화하지 못하며, 따르고 의뢰하고 앙망하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못 된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을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기 원치 않으며, 오로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다가가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고 싶을 뿐이다. 예를 들면, 너의 가족, 너의 자녀가 너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가까이하지 못하며, 늘 너를 피할 때, 네가 그들을 위해 했던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게 될 때, 너의 심정은 어떠하겠느냐? 너는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느냐? 이런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때, 하나님에게 생기는 심정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부활한 후, 예전 그대로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고,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지친(至親)으로 여기게 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하나님은 사람을 진정으로 얻을 수 있고, 사람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다.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 준 것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생선을 드린 것에 관한 이 두 성경 구절을 발췌했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느냐?

예수가 부활한 후에 일련의 일들과 말씀을 한 것은 마음을 많이 썼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정이 가득 담겨 있고, 또한 육신에 있는 기간에 사람과 맺었던 아주 친밀한 관계를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고 정성을 다해 지키고 있다는 것도 가득 담겨 있으며, 더욱이 육신에 있는 기간에, 따랐던 사람과 함께 먹고 함께 거했던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그리움과 그의 기대까지 가득 담겨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간에 거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간격을 벌어지게 하는 것도 원치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에게 예수가 부활한 후 더 이상 사람과 가까이하던 그 주님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느껴지게 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영계로 돌아가고, 사람이 영원히 볼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으로 인해, 사람에게 예수와 사람 간에 지위상의 차이가 생겼다고 느껴지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경원시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팠던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아주 멀어졌다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얻기 아주 힘들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영체로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또다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벌어지게 할 것이고 동시에 또 사람에게 부활한 후의 그리스도는 위대하여 사람과 동류가 아니어서 더 이상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할 수 없으며, 사람은 죄가 있고 더러워 영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잘못 여기게 했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 육신에서 항상 해 오던 일련의 일들을 하였고, 성경에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고 기록된 것처럼 해 주었으며, 또한 그전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었다. 예수가 행한 그 모든 것은 예수를 본 각 사람에게 주님은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원래의 예수님이며,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겪었지만 부활하였고, 사람을 떠나지 않았고, 또 사람들 가운데 돌아왔으며, 예수의 모든 것은 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람 앞에 서 있는 인자는 여전히 원래의 예수였고, 그의 움직임과 언행은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익숙한 느낌을 가지게 해 주었다. 예수는 예전처럼 자비와 은혜가 넘치고 포용이 넘쳤으며,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예수였고, 여전히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였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같이 성경을 나누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피와 살이 있어 사람들에게 만질 수도 볼 수도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런 인자는 사람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고,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주며 또한 사람에게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듯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그 인자를 마음 놓고 대담하게, 믿음 가득히 의지하고 앙망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에게서 은혜와 축복 그리고 평안과 희락을 받고, 그에게서 보살핌과 보호를 얻고자 기도하기 시작했다.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기 시작했다.

예수가 육신에서 역사하는 기간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신분과 예수가 한 말씀에 대해 완전하게 확신하지는 못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오를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관망하는 것이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부터 무덤에 들려 들어갈 때까지 그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실망이었다. 그 기간에, 사람은 이미 마음속으로 예수가 육신에 있는 기간에 했던 말씀을 의심하던 데에서 부인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차례로 나타났을 때, 직접 눈으로 그를 보았거나 그가 부활한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부정하던 데에서 반신반의하는 데로 점차 바뀌었는데, 예수가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게 하고, 예수가 부활한 후에 사람들 앞에서 떡을 먹고 또 구운 생선을 먹으니, 사람들은 예수가 도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제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때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뼈와 살이 있는 그 영체로 인해, 각 사람은 꿈속에서 방금 깨어난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눈앞에 서 계시는 이 인자는 바로 태고부터 계신 그분이셨구나. 그분은 형상도 있고 뼈와 살도 있으며, 사람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함께 생활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구나……’ 그때, 예수의 존재는 사람에게 그렇게도 진실하고, 그토록 아름답고 또한 그토록 기쁘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게 하였고, 동시에 또 감격이 넘치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다시 한번 나타남으로 사람들에게 진실로 자신의 낮춤을 보게 하였고, 자신의 친근함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염려와 그리움을 느끼게 하였다. 짧은 상봉으로 예수를 본 사람들은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졌고, 그 낙담하고 막막하고 황공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리움이 가득하고 마비되었던 사람은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되었으며,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희망이 있음을 느꼈고, 기댈 곳이 있음을 느꼈으며, 눈앞에 서 있는 인자가 사람의 영구한 방패이고 영원한 견고한 망대와 피난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는 비록 부활하였지만,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역사는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의 나타남으로 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언제 어디서나 사람과 동반하고 동행하고 함께하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공급해 주고 목양할 것이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게 하고,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예수는 또 사람에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고 동행해 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영원히 사람이 기댈 곳이며,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각 사람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람의 기댈 곳이 되면 사람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게 되지 않으며, 그를 받아들여 속죄제로 삼는 사람은 더 이상 죄에 결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했던 그런 사역들이 사람이 보기엔 아주 작은 일들인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하나하나 다 그토록 의의 있고 가치 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중요하고 무게가 있는 것이다.

비록 예수가 육신에서 사역하는 기간에 간고와 고난이 가득했지만, 그는 뼈와 살이 있는 영체로 나타나 그때 도성육신 되어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전하게, 완벽하게 이루었다. 예수는 도성육신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직분을 시작하였고, 또 도성육신의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직분을 끝마쳤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를 가져왔고 은혜시대를 시작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전개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견실하게 하였고 인도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절차가 있고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기묘한 행사로 충만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관통된 주요 실마리는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이고, 관통된 것은 사람을 내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그 걱정하는 마음이다. 이런 성경 구절에 있는, 예수가 부활한 후에 했던 하나하나의 일들에서 유로된 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기대와 걱정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살뜰한 관심과 보살핌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너희는 보았느냐? 너희는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않겠느냐? 너희가 그 시대에 태어났고 예수가 부활한 후 너희에게 나타나 형상이 있음을 보여 주고, 예수가 너희 앞에 앉아서 떡과 생선을 먹으면서 너희에게 성경을 풀어 주고 너희와 얘기를 나눈다면, 그 시각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매우 기쁘지 않겠느냐? 죄책감이 들지 않겠느냐? 이전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회피하고, 저촉하고, 의심하던 것들이 다 사라지지 않겠느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정상이 되지 않겠느냐?

성경의 그런 한정된 구절들을 해석하는 중에, 너희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흠을 조금이라도 발견한 적이 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티끌만한 뒤섞임이라도 발견했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에서 그 어떤 궤사함이나 사악함이라도 보았느냐? 확실하게 말해서 보지 못했다! 그럼, 너희는 지금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희로애락은 다 하나님의 실질과 하나님 성품의 유로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나는 너희가 이런 말씀을 보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이 앞으로 너희가 성정 변화를 추구하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추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유익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나는 또 이런 말씀이 너희에게서 도달하는 효과가 날로 커져, 너희들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 더욱 가까워지고, 더 이상 진리 추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라고,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기를 바란다. 반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의 발표와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광명을 동경하고, 정의를 동경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려고 하는 심지가 있게 하여 하나님에게 얻어지는 사람이 되고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첫 번째로 도성육신하여 했었던 일들에 관해 교통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에 있는 기간에 발표하고 유로한 성품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각 방면의 소유소시를 보게 되었다. 그 각 방면의 소유소시가 보기엔 아주 인성화된 것 같지만, 사실상 모든 유로와 모든 표현의 실질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전혀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도성육신하여 인성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모든 방식과 모든 방면은 다 하나님 자신의 실질과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도성육신 된 방식으로 인류에게 임한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한 육신 가운데서 하는 사역도 매우 중요하다. 그가 유로하는 성품과 발표하는 마음과 뜻은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각 사람, 패괴 속에서 살고 있는 각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너희는 이것을 느낄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게 된 후, 하나님을 마땅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너희는 총결해 낸 것이 있느냐?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세 가지 충고를 주겠다.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둘째, 하나님과 지위를 쟁탈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떤 지위를 주었든, 어떤 사역을 담당하게 했든, 하나님이 높여 주어 어떤 본분을 하라고 했든, 이전에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이 화비하고 봉헌했든, 절대로 하나님과 지위를 쟁탈하지 말라. 셋째, 하나님과 겨루지 말라. 하나님이 너에게 행한 일과 안배한 일 그리고 너에게 임하게 한 일을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순복할 수 있든 없든, 절대로 하나님과 겨루지 말라. 네가 이 세 가지를 다 지킬 수 있다면, 너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쉽게 하나님을 건드려 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교통하자!

2014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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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②정직: 여기서는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⑤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⑥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⑦금고아 주문: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금테를 조이는 주문.

⑧무사(無私): 이기적이지 않고, 사심이 없는 마음을 가리킴.

⑨석대무비(碩大無比): 비할 바 없이 크다.

⑩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⑪안받침물: 한 사물을 통해 다른 한 사물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

⑫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⑬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⑭견장괘두(牽腸掛肚): 늘 마음에 두고 걱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