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 그리스도의 발표(선집)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화제를 가지고 교통했다. 그 화제는 무엇이었느냐? 너희들은 기억했느냐? 내가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지난번에 교통한 화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이다. 이 화제는 너희에게 중요하지 않으냐? 어느 부분이 너희에게는 가장 중요했느냐?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이었느냐,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었느냐? 너희는 어느 부분의 화제에 대해 가장 흥미를 느끼느냐?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에서 너희가 가장 듣고 싶은 화제는 어느 방면이냐? 나는 너희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어디서나 다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며, 하나님의 성품은 사실,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이 셋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교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주 오래전에 발생한 일이다. 그런 일들은 다 사람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람에게서 발생한 동시에 하나님의 참여도 있고, 하나님의 발표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매우 가치가 있고 의의가 있다. 하나님은 인류를 갓 지은 후, 인류와 접촉하기 시작했고 인류에게 말씀하기 시작했으며, 인류를 향해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류와의 접촉이 있게 된 후로, 하나님은 인류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소시와 자신의 실질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들이 볼 수 있든 없든,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유로하고 자신의 실질을 발표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인류와의 접촉과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끊임없이 발표되고 유로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에게 무엇을 감춘 적이 없고, 무엇을 숨긴 적도 없으며, 자신의 성품을 조금도 남김없이 공개하고 나타내고(원문: 釋放)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알기를 바라지,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을 영원한 비밀처럼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을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기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인류만이 진정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빛 가운데서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발표하고 유로한 말씀과 성품은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실질도 대표한다. 하나님이 사람과 접촉할 때,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성품을 유로했든,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어떤 소유소시와 어떤 실질을 보게 되었든, 그것은 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한다. 인류가 느낀 것이 얼마나 되든, 이해한 것이 얼마나 되든, 깨달은 것이 얼마나 되든, 모두 하나님의 뜻, 즉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해야 하는지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의 실질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지, 하나님에게 어떤 소유소시가 있는지는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를 할 때 발표된 것인데, 거짓이 없고 가식이 없으며, 감춘 것이 없고 꾸민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왜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지 못하고 항상 분명하게 보지 못할까? 왜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할까? 하나님이 유로한 것, 발표한 것은 다 하나님 자신의 소유소시이고, 다 하나님 자신의 참된 성품의 세부적인 것과 각 방면인데, 왜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투철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하나 있다. 어떤 원인일까? 바로 창세 이래로 사람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즉 갓 지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였든, 사람은 그저 하나님을 동반자로 여기고 의지할 대상으로 여겼을 뿐, 결코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식이나 이해가 없었다. 바로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이러한 대상, 사람이 보기에 ‘동반자’인 그분이 발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질이라는 것을 사람은 몰랐고, 그분이 만물을 주재하는 분이라는 것도 사람은 몰랐던 것이다. 간단한 말로 하면, 그때의 사람은 하나님을 조금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으며, 하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랐고, 더욱이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도 알지 못했다. 물론 하나님도 그때에,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이 행한 것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인류가 창조된 초창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시대의 사역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에게 일을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사람에게 요구도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때에야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간단한 개념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곧 인류를 창조한 그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높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거나 얼마나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이 역사하는 절차에 따라, 역사하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요구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어느 방면의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아주 진실하지 않으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합리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가 지음받은 가장 이른 시대에서는, 사람에게 정복 사역을 하지 않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도 하지 않았다. 또한 사람에게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아주 낮았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사람에게 어떤 행위가 있든,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을 좀 했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다 용서할 만한 것이었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알고 있고, 사람에게 무엇이 갖추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어떤 요구 기준을 줘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때의 요구 기준은 아주 낮았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이 빈말이라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 자신을 알려면, 오직 하나의 경로밖에 없다. 그것은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하나님 역사의 발걸음을 따르고, 인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에게 본체를 나타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게 되었으면, 그것은 이미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본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은 무지개를 증거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는다고 언약을 세운 후, 하나님은 더욱더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과 동심합의하는 사람을 얻으려고 하였고, 또한 더욱더 절박하게 땅에서 자신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하였으며, 더욱이 사탄의 속박을 받지 않고 흑암 세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땅에서 얻으려고 하였다. 이런 무리를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오랫동안 바랐던 것이고, 창세 이래로 계속 기대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했든, 사람과 언약을 세웠든, 하나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정도 바뀌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바람도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것은 창세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바랐던 것이다. 즉, 인류 가운데서 자신이 얻고 싶은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은 진정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지심인(知心人)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 계속해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아, 하나님이 역사하는 그 발걸음을 따라,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및 하나님과 관련된 세부적인 것을 찾아내도록 하자. 그리고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실질을 알아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각 사람을 하나님에게 다가가도록 하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하자.

지난번에 우리는 하나님이 왜 사람과 언약을 세워야 했는지에 관한 일들을 가지고 어느 정도 나누었다. 이번에는 계속해서 다음 부분의 성경 구절들을 교통해 보자.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1) 아브라함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함

(창 17:15~17)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창 17:21~22)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

(창 22: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창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이 하려고 작정한 사역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너희는 다 들었겠지? 그는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택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려고 했느냐?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라고 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할 때, 당시의 아브라함의 배경은 어떠했느냐? 성경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들 노부부는 그 나이에 자녀를 출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느냐? 그는 엎드려 웃으며 속으로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 뜻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저 우스개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그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주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도, 사람이 이 나이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시다니! 아들을 하나 주겠다고 하시면서 낳아 기르라고 하시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땅에 엎드린 동시에 웃으면서 속으로 ‘불가능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건 농담하시는 거야, 이건 진짜일 수 없어!’라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담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냐? (의인입니다.) 어디에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했느냐? 너희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면 다 의인이고, 다 온전한 사람이고,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규례만 지키는구나! 이 일을 너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어느 사람에게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각 사람에 대해 가늠 기준이 하나 있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 일에서 나타낸 아브라함의 태도를 놓고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막연한 것이 좀 있지 않느냐?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냐? 크지 않다! 아브라함의 웃음과 속으로 생각한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은 순전히 상상이고, 멋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며, 무책임한 평가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웃음과 그의 작은 행동을 보지 못했을까? 알지 못했을까? 하나님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한 일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계획을 이미 다 해 놓고, 그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에게 어떤 태도가 있든, 하나님에게는 영향과 방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태도, 더구나 무지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함부로 바꿀 리도, 자신의 계획을 깨뜨릴 리도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7장 21~22절에 뭐라고 했느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왜 아랑곳하지 않은 것일까? 그때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높은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하나님이 한 일과 한 말씀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어떤 사람을 택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어떤 원칙으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사람에게 완전히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분량이 거기에 전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표현을 하든,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매우 정상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정죄하지 않았고, 질책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이삭을 낳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뿐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일은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봤을 때, 자신이 이루려고 계획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배정한 후에 곧 떠났다. 사람이 어떻게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이해하든, 어떻게 계획하든, 그런 것은 다 하나님과 상관없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시간과 절차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계속 앞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원칙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인식하든,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역사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사실대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본,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시간에 이삭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사람의 행위와 태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았느냐? 가로막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작은 믿음,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느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영향을 전혀 주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환경도 그의 경영 계획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려고 정한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제때에 완성되고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사역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다. 사람의 일부 우매함과 무지함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일부 저촉과 관념에 대해,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자신이 하려고 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또한 하나님의 무소불능이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사역은‘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하여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에서 멈추었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웅대하고 위대한 계획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 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의 서막을 열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시각, 또 누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그 일을 시작으로 조용히 상연될 줄을 알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함을 보지 않고 진심만을 원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보자. <창세기> 22장 2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였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즉 사랑하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알려 준 것이다. 지금에 가져와 봐도, 하나님이 한 그 일은 여전히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 하나님이 그때 한 것은 사람의 관념에 너무 맞지 않아 사람이 이해하기도 어렵다. 사람의 관념 속에서는 ‘사람이 불신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들을 주셨다가, 사람이 아들을 얻은 후, 또 바치라고 하신, 그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 걸까?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뭘까?’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지만, 또 무조건적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 일은 지나친 것일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또 좀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나치지 않다고 여겼다. 비록 아브라함도 여러 생각이 좀 들었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이 좀 있었지만, 그래도 이삭을 바치려고 준비했다. 여기에서 너는 어떤 일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기꺼이 바치려고 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느냐? 그 말을 어떻게 했었더냐? 본문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세기 22:3),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세기 22:9~10)라고 기록되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그 모든 행동을 하나님이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해서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정말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 그 전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아브라함이 전에는 우매했든, 무지했든, 하나님을 오해했었든, 어찌 됐든, 그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었고 정직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아들, 이삭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순복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한 많은 일은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상상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어느 사람을 움직이려고 할 때, 그 ‘움직임’은 많은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또 사람이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사람에 대한 검증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순복을 나타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복할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택한 아브라함에 대해 진정으로 안심하게 되었고 인정해 주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그 인물이 자신의 약속을 담당할 수 있고, 자신의 다음 경영 계획을 담당할 수 있는, 꼭 필요한 선도자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비록 그 일은 단지 시련과 검증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기쁨과 위로를 느꼈고, 하나님에게 바친 사람의 사랑을 느꼈으며, 사람에게서 오는 전에 없던 위안감을 느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위를 멈추게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삭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아브라함에게 행위를 멈추게 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순복은 이미 검증을 통과했으며, 그가 한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려고 하는 일에서 이미 결과를 본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하는 것이 아니냐?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하는 것이고 원했던 것이며, 하나님이 보려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진실하지 않느냐? 비록 하나님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 사람을 시험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자신이 바랐던 것을 보았다. 곧, 아브라함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고, 아브라함의 순복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무조건적’이 바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다.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람은 “저는 이미 이것을 바쳤고, 저것을 포기했는데, 왜 하나님은 아직도 저에 대해 만족하지 않으십니까? 왜 아직도 계속 저를 시련하십니까? 왜 아직도 계속 저를 검증하십니까?”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 네 마음을 보지 못했고, 네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너에게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직접 자기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것 같은 그런 진심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너의 무조건적인 순복을 보지 못하였고, 너에게서 위안을 얻지 못하였으니,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당연히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냐? 이 화제는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계속해서 다음 단락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읽어 보자.

3.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창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말씀은 비록 간결하지만 내용은 매우 풍부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유와 배경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할 때의 기쁨과 격동된 심정이 가득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를 기대하는’ 절박한 마음도 가득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고 자신의 분부에 순복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와 하나님의 선한 고심도 보았다. 그리고 이번 경영 계획 사역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홀로 감당한 슬픔과 아픔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구절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더더욱 보게 되었다. 그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씀이자, 또한 후세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의가 있고, 심원한 영향을 주는 말씀이다.

사람은 진심과 순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보여진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큰 것일까, 작은 것일까? 어느 정도 큰 것일까? 여기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는 가장 중요한 한 마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기의 독자, 즉 애지중지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돌려 드릴 때[주: 여기에서 ‘바치다’라고 해선 안 되고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 드리다’라고 해야 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복을 베풀어 주려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으로 축복을 주려고 했느냐?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많게 할까? 성경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은 어떤 배경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을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조금의 원망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구대로, 분부대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약속을 주었던 것이다. 그 약속에 가장 중요한 말이 하나 있다. 그 말은 그때 당시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관련된다. 그 가장 중요한 말을 너희는 발견했느냐? 너희는 아마 주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말씀을 했다. 그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할 때,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맹세할 때는 모두 어디를 가리키느냐? 모두 하늘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을 향해 서약하고 맹세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한 이 ‘현상’에 대해, 사람은 아마 그다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정확하게 해석해 줄 때면, 너희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번 외로움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나님은 ‘애끓는 마음에’,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나 취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주겠다고 자신에게 말씀한 것이다. 그로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듣게 되었다. 너는 하나님의 이런 행동으로부터 너 자신을 연상해 볼 수 있다. 네가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말할 때, 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지 않겠느냐? 그 태도는 아주 진실하지 않겠느냐? 너는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하지 않겠느냐?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할 때, 그 태도가 진지하고 진실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고 약속을 주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말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도 “아브라함은 내 말에 순종하였고, 또한 내가 택하고 선정한 자이니, 나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알린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이 말씀을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 선민이 생기게 한 다음, 그 선민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뜻을 정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이 발표한 것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하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계속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이것이 복된 일이 아니냐? 인류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가장 복된 일이다. 아브라함이 그 ‘복’을 얻게 된 것은 자손이 많아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경영, 자신의 부탁, 자신의 사역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이루려고 한 것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할 때,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때, 이미 뜻을 정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한 이 과정은 아주 진실되지 않느냐? 아주 실제적이지 않느냐? 하나님은 그때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심혈, 자신의 대가, 자신의 소유소시, 자신의 전부, 나아가 자신의 생명까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베풀어 주겠다는 뜻을 정했고, 또한 그 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시작하여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병(역주: 권세)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려는 뜻을 정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바뀐 적이 없다

비록 하나님은 자신에게 말씀한 동시에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였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모든 말씀에서 자신에게 주는 축복을 들은 것 외에, 그 당시의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때에도,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고 여전히 슬펐던 것이다. 하나님이 하려고 한 것과 계획한 것을 여전히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을 포함해,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더욱이 하나님과 협력하면서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얻었고, 자신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얻은 것 같지만, 사실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제로나 다름없었다. 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의 경영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이 보려고 기대하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아주 멀리 있기에,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하나님 자신 외에, 하나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매우 격동된 동시에 매우 무거운 심정을 느꼈지만,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다음 단계 사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너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주었다. 그 일은 겉으로 보면 비록 아주 정상적이고 또한 순리적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에게 순복하는 것을 아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이해와 진심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진실한 마음을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길까? 너희는 아마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지 모를 것이고, 아무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고, 그 아들이 자라난 후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조금도 빠짐없이 해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진심에 감동하였고, 또 귀하게 여겼다. 어느 정도로 귀하게 여겼을까? 귀하게 여긴 원인은 무엇일까? 아무도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에, 아브라함은 ‘천지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하여, 하나님에게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끼게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을 얻은 기쁨을 느끼게 했다. 그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이 친히 만든 피조물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창조된 이래 하나님께 바친, 하나님이 보기에 가장 소중한 첫 ‘제물’이기도 하다. 그 ‘제물’은 하나님이 매우 어렵게 기다려서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피조된 인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첫 선물로 여겼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심혈의 대가로 얻은 첫 성과를 보게 되었고, 또한 인류에게서 희망도 보게 되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마음으로 자신의 곁을 동반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헤아리는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이 있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마음 있는 사람이 자신을 동반하여 자신의 경영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했든, 단지 하나의 소망일 뿐이었고, 하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에게 순복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기준에는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복을 보았고, 하나님의 검증을 통과한 것도 보았다. 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복을 열납하였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의 지심인이 되기에는 부족했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 성품을 아는 사람이 되기에는 부족했으며,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는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외로웠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로울수록, 안타까울수록, 되도록 빨리 자신의 경영을 계속하고, 되도록 빨리 한 무리 사람들을 선정하고 얻는 것으로, 자신의 경영 계획을 이루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야 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인류를 창조해서부터 이미 한 무리 이기는 자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이해하고, 알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뜻은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다. 아직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든, 앞길이 얼마나 간고하든, 또한 하나님이 바라는 목표가 얼마나 아득하든, 하나님은 인류에게 둔 기대를 지금까지 바꾼 적이 없고, 또 포기한 적도 없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하나님 마음을 좀 느꼈느냐? 아마 깊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느껴 보아라!

아브라함의 그 시기에, 하나님은 성을 하나 멸한 적이 있다. 그 성의 이름은 소돔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 그 성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성을 멸한 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다 생소할 것이다!

오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다음 몇 단락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그 당시의 마음을 알아보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하자. 계속해서 다음 성경을 읽어 보자.

(2) 하나님이 소돔을 훼멸하려고 함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몇 단락은 내가 성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본래 말은 아니다. 너희가 본래 말을 읽고 싶으면 성경에서 보면 된다.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부분적인 내용은 빼고 일부 중요한 단락과 구절만 골랐다. 몇 구절을 빼도 오늘의 교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교통할 이 모든 구절과 내용의 중점은, 그 당시에 발생한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과 사람에게서 나타난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은 제쳐 두고, 그 당시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하였는지만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고, 하나님이 한 매사에서 참된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면, 목적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을 행하는 사람만 기억하고 돌보아 준다

이 몇 단락 말씀에 중요한 단어가 몇 개 있다. 바로 그 몇 개의 숫자들이다. 우선, 여호와는 성읍 가운데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했다.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진짜로 의인 오십 명이 있었을까?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또 어떤 대화가 있었느냐? 아브라함이 만약 사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계속하여 아브라함이 만일 삼십 명이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은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럼 이십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열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읍에는 진짜로 의인이 열 명 되었을까? 열 명은 없어도 한 명은 있었다. 그 의인 한 명은 누구일까? 그 사람이 바로 롯이다. 그 당시에, 성읍에는 의인이 한 명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할 때, 이 숫자에 대해 아주 각박하거나 아주 엄격한 기준이 있었느냐?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 “삼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 거듭 캐물으면서 “열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까지 묻자, 하나님은 “열 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고, 열 명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을 남기고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그 열 명이라는 것은 이미 아주 보잘것없는 숫자였지만, 사실상 소돔 성에 놀랍게도 의인이 열 명도 안 되었다. 보다시피, 그 성읍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과 사악한 정도가 하나님이 보기에 이미 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의인이 오십 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한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런 숫자는 하나님에게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성읍에 의인이 단 한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성읍을 멸할 때에, 그 의인을 거기에 말려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그 성읍을 멸하든 멸하지 않든, 또한 그 성읍에 의인이 얼마나 있든, 그 죄악된 성읍은 하나님이 보기에 저주를 받아야 하고, 반드시 훼멸되어 하나님의 눈에서 소실되어야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인류가 어떤 시기에까지 발전했든, 하나님의 이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고, 자신의 눈에 있는 의인은 돌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명확한 태도는 하나님 실질의 진실한 유로이기도 하다. 그 성읍에는 의인이 오로지 한 명뿐이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최종의 결과는, 그 성읍이 반드시 훼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너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그 시대에, 하나님은 한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고, 의인 열 명이 있다는 이유로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일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로, 인류를 용서하고 관용하는 결정을 하거나 인도하는 어떤 사역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실을 아주 중요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을 아주 중요시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행이 있는 사람도 매우 중요시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진리를 교통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느냐?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가 본,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 말씀은 다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알려 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였고, 어떤 사람은 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다. 그저 이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의인은, 하나님의 눈에 있는 의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온전케 된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럼 그 의인이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보기에 그 ‘의인’을 하나님의 지심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절대 하나님의 지심인과 증인이라고 칭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칭하였을까? 우리가 본 이 구절까지 비롯해,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러 번이나 사람을 ‘나의 종’이라고 칭하였다. 다시 말해, 그때 그 의인들이 하나님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종들이었고,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호칭에 대해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까? 왜 그렇게 칭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호칭을 줄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기준이 있을까, 없을까? 틀림없이 있다. 사람을 ‘의인’, ‘순전한 사람’,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하든, 아니면 ‘종’이라고 칭하든, 하나님에게는 기준이 하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종’이라고 칭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낸 사자를 영접할 수 있고, 그 사자의 분부에 순종할 수 있고, 그 분부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할까?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분부하여 땅에서 하라고 한 것과 행하라고 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땅에서 하게 한 것과 행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도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때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단지 간단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간단한 분부들이었는데, 사람에게 한 종목씩 이 일을 하라고 하거나, 저 일을 하라고 한 것이 전부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사역을 한다. 그때는 많은 조건이 아직 구비되지 않았고, 시기가 채 무르익지 않았으며, 인류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보게 된, 하나님이 말씀한 ‘의인’이 30명이든, 20명이든,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종에게 임할 때, 그 종은 사자를 영접할 수 있고, 사자의 분부에 순종할 수 있고, 사자의 말대로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서 종으로 보이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었고, 도달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주 적절하게 사람을 칭한다. 그들을 ‘종’이라고 칭한 까닭은, 결코 지금의 너희처럼 하나님의 도를 어느 정도 듣고 나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깨닫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성이 성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분부가 임했을 때 자신이 하던 일을 중지하고, 하나님이 분부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종’의 다른 한 방면의 뜻은,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사자는 아니지만, 땅에 있는 하나님 말씀의 집행자와 시행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종이나 의인들의 가치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얼마나 큰지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전개하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종이 맡은 역할은 하나님의 사자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종들이 맡은, 하나님이 매번 분부한 ‘임무’는 하나님에게는 모두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잃을 수 없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그런 종들이 없으면, 인류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사역은 정지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경영 계획, 하나님의 기대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돌보는 사람에게는 널리 긍휼을 베풀고 혐오하여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심히 노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소돔 성에는 하나님의 종이 열 명 있었느냐? 없었다! 그 성읍은 하나님이 남겨 둘 가치가 있었느냐? 그 성읍에는 오직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했다. 그 뜻은 성읍에 하나님의 종이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을 구출하고, 소돔 성을 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대화가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깊이 있는 문제를 하나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매우 원칙 있게 일을 하기에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랫동안 감찰하고 고려하며, 시기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어떤 결정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한 그 결정에는 오차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읍에 의인이 사십 명도, 삼십 명도, 이십 명도 심지어 열 명도 없고, 성읍에 있는 유일한 의인은 롯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읍에서 발생된 일과 성읍의 상황은, 하나님이 눈으로 감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손금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결정은 틀릴 리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이 안받침되어, 사람은 그토록 마비되고, 그토록 무지몽매하며, 그토록 시야가 좁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표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또한 우리가 보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매우 간단하여 별다른 문제를 설명하지 않지만,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발표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 오십 명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이 방면의 성품을 보았느냐? 나아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의인 열 명을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관용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 의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걱정하였기에 그 성을 멸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보게 된 결과는 무엇이냐? 아브라함이 “만일 거기에 열 명이 있으면”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후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자신이 말하는 의인이 열 명도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왜 소돔 성을 멸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어떤 뜻을 굳혔느냐? 즉,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성읍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그 성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노기가 아니냐? 이 ‘노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지 않느냐? 이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의 유로가 아니냐?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실질의 유로가 아니냐? 하나님 편에서는 의인 열 명도 없다는 것이 확정되었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성을 멸하려고 했고, 그 성안의 사람들을 호되게 징벌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너무 더럽고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화들을 왜 이렇게 분석하겠느냐? 그것은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에서, 긍휼을 널리 베풀고 노를 심히 발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귀하게 여기는 동시에, 의인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마음에 두고 있는 동시에, 그 성안의 패괴된 모든 사람을 마음속으로 심히 증오하고 있었다. 이것은 널리 긍휼을 베풀고 심히 노를 발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느냐? 불로 태웠다. 하나님은 왜 불로 태우는 그런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을까? 네가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보거나 혹은 어떤 물건을 불에 태워 버리려고 할 때, 그 물건에 대해 어떤 심정이냐? 왜 그것을 태우려고 하느냐? 그 물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있지 않겠느냐? 포기한다는 뜻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불 태우는 방식을 쓴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뜻이 있고, 증오한다는 뜻이 있으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왜 불로 소돔을 멸했는지의 심정이다. 불로 태우는 방식은 곧 하나님이 노한 정도를 뜻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는 하나님이 노할 때에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보게 한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긍휼을 널리 베풀어 준다. 사람이 패괴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원수로 보며 극히 적대시할 때, 하나님은 심히 노를 발한다. 그러면 그 노를 어느 정도까지 발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노기가 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그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만약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미 하나님을 등졌다면 돌이킬 수 없다. 그 사람의 몸이나 혹은 생각이 겉으로 보기에도, 주관적인 생각에서도, 아무리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한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일단 하나님을 등졌다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노를 발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노를 심히 발할 때, 사람에게 기회를 충분하게 다 주었을 때에, 하나님의 노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영원토록 긍휼과 관용을 더 이상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성을 하나 멸하려고 했을 때, 그 일이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죄악으로 가득 찬 성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존재할 수 없고,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것을 멸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기 전과 후에 발생한 일에서 하나님 성품의 전부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악하고 죄에 속한 것과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심히 노를 발하는데, 심지어 그 노는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요하고 또한 가장 두드러진,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로한 두 가지 주된 부분이다. 곧, 긍휼을 널리 베풀고, 노를 심히 발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각 사람에게서 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 긍휼을 널리 베풀어 준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직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어느 사람이나 어느 일부분 사람들에게 노를 심히 발한 적이 아주 적으며, 심지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노기는 언젠가 사람마다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노기가 그치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노를 심히 발할 때면, 하나님은 이미 그 사람을 내버린 지 아주 오래되었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를 증오하고, 더 이상 그 존재를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노기가 일단 임하면, 그 사람은 소실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은 아직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았다. 일단 하나님이 노를 심히 발할 때면, 너희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보다시피, 하나님은 이 시대에 너희 모두에게 긍휼만 널리 베풀어 줄 뿐, 아직 노를 심히 발하지는 않았다. 혹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노기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여, 하나님의 노기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이 도대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체험해 봐도 된다. 너희는 그럴 용기가 있느냐?

말세의 사람은 하나님의 노기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보았을 뿐,진정으로 체험하지는 못했다

이 성경 구절들에서 보게 된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부분의 성품은 교통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듣고, 너희는 하나님을 더 새롭게 알게 되었느냐? 어떤 인식이 있게 되었느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마지막 이 한 무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누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가장 많이 누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비록 마지막 단계에서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고, 위엄과 진노를 띠고 자신의 사역을 하지만, 대부분 시간은 단지 말씀으로 자신의 사역을 이루는데,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으로 부어 주고 공급하고 양육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기는 계속 숨겨져 있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것 외에, 하나님의 진노를 직접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다시 말해, 심판과 형벌의 사역에서 하나님이 말씀 속에서 유로한 노기는, 비록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을 체험하게 했지만, 하나님의 노기는 여전히 하나님 말씀의 범위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을 책망하고, 사람을 드러내고,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을 형벌하고, 심지어 사람을 정죄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직 사람에게 노를 심히 발하지 않았고, 거의 말씀 이외에는 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람이 체험한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의 유로이지만,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하나님 말씀의 어조와 분위기에서 생긴 효과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효과를 하나님의 노기에 대한 진실한 체험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실한 인식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도 보았고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면도 보았다고 여기며,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체득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가 얼마나 형편없든, 혹은 사람의 성정이 얼마나 패괴되었든,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내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내하는 목적은, 그가 한 이런 말과 그가 지불한 심혈의 대가가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효과에 도달하는 그런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 결과를 기다리는 일에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에게 각기 다른 환경을 배정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마치 사람이 성인이 되려면 태어나자마자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18~19년이란 시간이 필요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20~30년의 시간이 걸려야 진정한 성인으로 성숙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런 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런 기한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또 그런 결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그 기간에, 하나님은 계속 긍휼을 널리 베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간에도 극소수의 사람들은 격살되었고, 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심하게 대적하여 징벌받았다. 이런 사례는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실증하고, 또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관용과 인내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도 충분히 실증한다. 물론, 이런 전형적인 사례에서 그 사람들에게 나타낸 하나님의 일부분 성품은, 결코 하나님의 전체 경영 계획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사실, 마지막 이 단계 역사에서,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는 기간에 계속 인내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내와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그런 결과와 맞바꾸고 있다. 너희는 이걸 보았겠지?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은 노를 발할 수도 있고 긍휼을 베풀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요한 두 부분 성품의 유로이다. 그것은 아주 뚜렷하지 않으냐? 즉, 하나님은 옳고 그름, 정의와 비정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다 사람에게 매우 뚜렷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증오하는지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모두 직접 체현되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에게 아주 뚜렷하게, 아주 분명하게 보게 한다. 그것은 결코 모호한 것이 아니고 두리뭉실한 것도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아주 진실하게, 아주 실제에 부합되게,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진정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에게 전혀 숨긴 적이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등졌다

내가 이런 것을 교통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도 성경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성경의 그런 이야기 속에, 비록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적고, 게다가 하나님은 직접 사람에게 자신의 성품을 소개하거나 자신의 뜻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이 그런 기록을 이야기로만 여겼기 때문에,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주 은밀한 존재인데, 하나님의 본체를 사람에게 숨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숨겼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교통을 들었는데, 너희는 여전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느냐? 여전히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에게 숨겨져 있다고 여겨지느냐?

창세 이래,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역사와 나란히 하면서 사람에게 감춘 적이 없고, 전부 공개하고 전부 나타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과 점점 멀어졌고, 사람의 패괴가 점점 깊어짐에 따라 하나님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사람은 점차 하나님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또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다 잃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모르게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숨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사람 마음속에는 결코 하나님이 없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하나님을 사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람이 늘 하나님을 피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아주 멀어졌다.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사람의 마음은 옮겨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보관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고, 보여 주지도 않았다. 설사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당신께서 제 마음을 감찰하시니, 제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십니다.”라고 기도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감찰을 받겠다고 하면서 만약 자신이 맹세를 어기면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게 해 달라고 서원까지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에게 마음을 감찰하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운명과 앞날과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 주관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무리 맹세를 하거나 입장을 밝혀도,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여전히 닫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 허락할 뿐, 자신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즉, 전혀 마음을 내놓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단지 듣기 좋은 말만 하여 하나님께 들려줄 뿐, 여러 가지 간사한 속셈은 다 감추고, 자신의 의도, 자신의 타산과 계획도 다 숨기고, 앞날과 운명을 하나님이 빼앗아 갈까 심히 두려워서 자기 손에 꽉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늘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진심을 볼 수가 없다. 비록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어서 사람이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고, 사람이 속에 어떤 것을 품고 있는지 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주관하게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에게는 살펴볼 권리만 있고, 주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 의식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맡겨 하나님의 지배대로 하기 싫어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봉인하고 있는 것 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또 갖은 방법을 다해 마음을 꽁꽁 싸매고, 듣기 좋은 말로 가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신임을 사취하고, 하나님이 보지 못하게 자신의 진면목을 감춘다.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게 자신의 실정을 보이기 싫어하고, 마음을 하나님에게 맡기기 싫어하고, 혼자 보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생각하든, 혼자 계획하고, 혼자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하나님의 ‘참여’가 필요 없고, 하나님의 개입도 필요 없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는 더더욱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분부에 대해서든,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든, 다 자신의 속셈과 이익에 근거하고, 자신의 그 당시의 정형에 근거하고, 또 자신의 그 당시의 처지에 근거하여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람은 늘 자신이 장악한 지식과 식견, 자신의 머리로 자기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판단하고 선택하며, 하나님이 간섭하거나 주관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 사람의 마음이다.

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류뿐이다. 즉, 모든 생물 가운데서,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인류밖에 없다. 사람에게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언어가 있고, 생각과 자유 의지가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소망을 모두 사람에게 걸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과 마음을 합할 수 있고, 자신과 동행할 수 있는 동반자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영을 시작한 이래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어 하나님이 만족해하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계속 이런 결과를 바라고 있었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성경의 기록에 이런 사람이 있었느냐? 즉, 성경에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던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 이 시대 이전에 그런 유례가 있었느냐? 오늘 성경의 기록에 따라 계속해서 읽어 보자. 그다음 인물, 즉 욥의 모든 행위가 오늘 우리가 말한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이 화제와 관련이 있는지 보고, 욥은 하나님이 만족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지 보도록 하자.

너희는 욥이라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성경의 본래 말을 인용하여,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욥에 대해 평가한 본래 말이다. 너희들 자신의 말로 말한다면, 너희는 욥이라는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이냐? 어떤 사람은 욥이 좋은 사람이고 이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욥이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욥은 인성이 있는 의인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모두 욥의 믿음을 보았다. 즉, 너희는 마음속으로 욥의 믿음을 아주 중시하고 아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럼 우리 오늘, 욥이 도대체 어떤 것을 갖추었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욥을 열납하게 되었는지 보자. 계속해서 성경 구절들을 읽어 보자.

(3) 욥

1.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 몇 마디에서, 너희가 본 중점은 무엇이냐? 이 간결한 세 구절은 욥이라는 사람과 관련된다. 내용은 비록 적지만 욥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분명히 말했다. 여기에서, 욥의 평소의 행위와 표현을 기술하여, 각 사람에게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치와 근거가 있는 것임을 알려 준다. 성경의 이 세 구절은 우리에게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든(욥 1:1), 아니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든(욥 1:8), 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의 욥의 모든 행위(욥 1:5)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임을 알려 준다.

먼저 첫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욥에 대한 첫 번째 평가이다. 그것은 <욥기> 저자가 욥을 평론한 것이다. 물론,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대표하기도 한다. 그 평가는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되어 있다. 계속해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으니라” (욥 1:8) 이 두 평가 중에 하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같은 내용의 두 평가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와 표현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욥이라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행실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행위와 속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내놓고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도 해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욥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

계속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을 보자. 위와 아래 그 두 구절 외에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그 표현은 욥이 평소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된다. 욥에게서 두드러지는 표현은 바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서도 항상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벌일 때에 ‘죄를 범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다. 그럼 욥은 그 일에서 어떻게 표현했느냐? 본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욥의 이런 표현에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 겉면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욥의 평소 생활에서도 항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욥이 자신만 악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성은 확실한 것이고,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욥은 우연히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항상 그렇게 했을까? 본문의 마지막 말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했다. 기술된 이 말의 뜻은, 욥이 우연히 혹은 일시적으로 기쁘면 가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도 아니라, 항상 자녀들에게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하였고,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의 ‘항상’은 일조일석이 아니고 잠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표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인식에만 머물러 있거나 입에만 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욥의 마음을 주도하였고, 또 욥의 행위를 지배하였으며, 욥의 마음에서 욥 자신이 생존하는 근본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욥에게는 항상 이런 행위가 있었다. 그것은 욥이 마음속으로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자기 자녀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했다는 것을 뜻하며, 욥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의 가치가 얼마나 컸는지도 뜻한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한 원인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곧, 자신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서 엇나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동시에, 자녀들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거스를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런 것은 바로 욥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정상적인 표현들이다. 이런 정상적인 표현들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했으며,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를 진정 살아냈다는 것을 실증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평소에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욥의 모든 행위를 알려 준다. 욥은 항상 그렇게 하였다. 그럼 욥의 행위와 마음은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이 아니냐?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욥의 마음과 행위를 열납한 것이 아니냐? 즉, 욥은 어떤 정형과 배경하에, 항상 그렇게 행할 수 있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욥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욥이 악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욥이 자신의 가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하나님을 거슬러서 그로 인해 가산을 잃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설들은 사실일까?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가장 귀하다고 하는 부분은, 단지 욥이 ‘항상 그렇게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큰 것은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목전에서의 태도와 사람 앞에서, 사탄 앞에서의 태도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런 증거에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진실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2. 사탄이 처음으로 욥을 시험하다 (짐승이 노략당하고 자녀가 화를 입다)

1) 하나님이 한 말씀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2) 사탄의 대답

(욥 1:9~11)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은 욥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욥기> 1장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본,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첫 대화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느냐?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을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그 대화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하여 욥을 시험하게 하려고 뜻을 굳혔다. 즉,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정확하여 틀림이 없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고, 욥의 간증으로 인해 사탄을 수치당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온전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직설적으로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사탄이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늘 하나님의 종, 욥을 엿보고 또 항상 욥을 시험하고 공격하고 있었고, 또 한 가지 방식을 써서 욥을 무너뜨려, 욥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굳게 서지 못하는 것임을 실증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또한 제멋대로 욥을 해쳐 하나님을 욕하게 만들어, 하나님 손에서 욥을 빼앗아 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마음을 감찰하기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은 묻는 방식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니, 영원히 하나님을 욕하거나 사탄을 따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사탄에게 알려 주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듣고, 사탄은 더욱 악에 받쳐 한시 급히 욥을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예 믿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또 사람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욥기> 1장 9~11절에 있는 것처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랄한 본성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한 사탄이 욥을 해할 방도를 모색하고 음모를 꾸민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재차 사탄에게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알려 주어, 사탄으로 고분고분 복종하게 하여―그것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여―욥을 공격하고 시험하게 하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일부러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 때문에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였다. 따라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여 사탄이 철저히 수치당하고 실패하게 함으로써, 그로부터 더 이상 욥의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의심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과 사탄에게서 오는 시험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견뎌 낼 수 있는 적임자는 오직 욥뿐이었다. 그런 대화가 있고 나서, 사탄은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하러 갔다. 그것이 사탄의 일차 공격이었다. 일차 공격 목표는 욥의 가산이었다.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이렇게 욥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한 목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요구가 하나 있었다. 즉, <욥기> 1장 12절,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고,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준 후, 제기한 조건이다. 즉, 하나님이 사탄에게 준 최저선인데, 욥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목전에 있는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은 그 검증을 견딜 수 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하나 주었다. 곧, 욥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 가도 되지만,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그때,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완전히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탄이 욥을 어떻게 시험하든, 어떤 방식을 쓰든 다 되지만, 욥을 해쳐서는 안 되고,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사람이 죽을지 살지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탄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 말씀을 하자마자, 사탄은 바로 쫓아가 갖은 수단으로 욥을 시험했다. 그렇게 되어 욥은 즉시 온 산의 우양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가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의 시련은 그렇게 욥에게 임한 것이다.

비록 우리는 성경에서 욥이 겪은 시험의 유래를 알게 되었지만, ‘당사자’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을까? 욥은 한낱 평범한 사람이니 자신의 배후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당연히 몰랐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으로, 욥은 하나님의 시련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욥은 영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또 그 시련의 배후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욥은 어떤 일이 닥치든,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대하는 욥의 태도와 반응을 분명히 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본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시련을 받기까지, 욥의 마음이 늘 하나님에게 열려 있었고,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도 않았고 등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기쁘고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이어서 우리 함께 욥이 어떤 시험을 겪었는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자.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 보자.

3)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한 후, 사탄은 물러갔다. 뒤이어, 욥에게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이 들이닥쳤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되었으며, 이어 양떼와 종들이 불에 타 죽었고, 그다음 낙타를 빼앗기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나중에 자녀들도 목숨을 빼앗겼다. 그 일련의 공격들은 욥이 처음으로 시험을 겪으면서 받은 고통이다. 그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단지 욥의 가산과 자녀만 겨냥하고, 욥은 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욥은 거액의 가산을 소유한 부자에서 한순간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그 타격은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올바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오히려 비범한 면을 나타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욥이 여러 가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을 들은 후의 첫 반응이다. 일단, 욥은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고, 당황스러움도 표하지 않았으며, 분노나 증오는 더욱 표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욥은 속으로 이미 그 모든 재앙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더욱이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자신에게 여호와의 시련이 임한 것이고, 여호와께서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어 가려고 한 것임을 확신했다. 그때의 욥은 마음이 아주 평온했고, 또한 아주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임한 재앙에 대해 이성적으로, 자연적으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적신(원문: 赤身肉體)이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욥이 신생아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는 것을 뜻하며,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욥이 알몸으로 세상에 왔으니,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신생아처럼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임한 그 모든 일을 대하는 욥의 그 같은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욥의 믿음은 신뢰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순복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에도 감사를 드릴 수 있었고, 더더욱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도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복은 인류 가운데서 본보기가 되고,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성의 최고봉에 이른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체험했다.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했고, 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도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그 시각 자신의 육체를 거두어 가도 기꺼이 원하고, 아무런 원망도 없다고 아뢸 수 있었다. 욥의 그 모든 표현은 다 욥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단순하고 성실하고 착했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고,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초에서 욥은 하나님이 인도한 것이나 자신이 만물 중에서 본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위, 표현과 일처리하는 원칙을 규범화했다. 오랜 시일이 지나, 욥은 자신의 경력(역주: 체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이 생겼고, 그와 동시에 악에서 떠나게 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욥이 지킨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성실하고 단순하고 착한 인성을 갖추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악에서 떠나는 실제 경력과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는 인식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그런 악랄한 공격에서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시련이 올 때에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 있었다. 비록 욥은 첫 번째 시험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욥의 그런 ‘간단’한 것을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고, 욥보다 더 높은 표현을 할 수 있을지는 더욱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욥의 그 ‘간단’한 표현을 마주하여, 그것을 다시, 오늘날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표명한 “절대적으로 순복하고 죽기까지 충성하자”라는 구호나 결심과 대조해 본다면, 너희는 부끄러워 진땀이 나지 않겠느냐?

네가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그 모든 불행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겠느냐? 많은 생각들이 연이어 떠오르지 않겠느냐? 아주 놀랍지 않겠느냐? 욥에게 닥친 시련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욥에게 시련이 왔을 때, 그 모습은 문자를 통해서도 이미 비참하여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묘사되었는데, 하물며 실제 모습이야 더 말할 나위 있을까? 보다시피, 욥에게 임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욥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조종한 것일까? 당연히 사탄이 한 것이고, 사탄이 직접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어떤 방식으로 시험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사탄에게 조건만 하나 주었다. 그리하여 그 시험이 곧 욥에게 임한 것이다. 그 시험이 욥에게 임했을 때, 사람들에게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 사탄의 악랄함과 사람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심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그때 시험의 잔인한 정도는 글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다. 다시 말해,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악랄한 본성과 추한 몰골은 그때에 여지없이 폭로된 것이다! 사탄은 그런 기회를 빌어, 하나님이 허락한 기회를 빌어, 욥에 대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광폭하게 해쳤는데, 그 수단과 잔인한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자 전혀 견뎌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고 시험 속에서 간증을 굳게 섰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사탄과 자신의 순전함, 정직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대결을 펼쳤다고 하는 편이 더 낫다. 그 대결에서, 욥은 온 산의 우양과 모든 가산을 잃었고 자녀들도 잃었지만,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즉, 욥은 사탄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가산과 자녀들을 잃을지언정,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욥이 가산을 잃은 전 과정이 간단하게 기록되었고, 또한 욥의 표현과 태도도 기록되었다. 간명하게 핵심을 찌른 문자적 기록은 사람들에게 마치 욥이 그 시험을 아주 ‘가볍게’ 대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정말 사실의 진실한 장면을 원상 복귀하고, 또 사탄의 악랄한 본성에 결부시키면, 그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며, 진실한 장면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해치고 증오하는 정도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해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틀림없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또한 하나님 눈에 있는 의인,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사탄을 배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그 기회를 빌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다 욥에게 쏟은 것이다. 보다시피, 욥이 몸과 마음에서부터 육체까지, 외부에서 마음속까지 받은 고통은 그토록 너무나 심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기에, 성경의 기록에서 욥이 고통받을 때의 그 심정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밖에 없다.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와 무안을 당하고 허둥지둥 도망가 버렸다

욥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었고, 보고 있었으며, 또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마음이 몹시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다고 하여, 자신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그 답은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지킨 욥의 의(義)를 실증할 기회를 주었고,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열함을 드러낼 기회도 주었으며,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탄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향해, 욥의 의를 간증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일을 간증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하고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느냐? 사실, 욥은 이미 사탄을 이기지 않았느냐? 여기에 욥의 가장 대표적인 말이 있다. 즉,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이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고 말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의 그런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기에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으며, 하나님의 칭찬은 그른 데가 없고,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은 의인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위해 한 증거이다. 이런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사탄을 매우 두려워하게 했고,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했고, 허둥지둥 도망가게 했으며, 더더욱 속수무책이 되게 했다. 또한 욥의 그 말 한마디에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 행사의 기묘와 위력을 느끼게 되었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도가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을 보게 되었으며, 더욱이 작디작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나타난 강대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대결에서 사탄은 그렇게 패하고 말았다. 비록 사탄은 ‘식견을 넓혔지만’ 욥에 대해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고, 그 악랄한 본성도 결코 그 일로 인해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탄은 계속 욥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다시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욥이 두 번째 시험을 받을 때의 구절들을 보자.

3. 사탄이 욥을 다시 시험하다 (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이 한 말씀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2) 사탄이 한 말

(욥 2:4~5)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3) 욥은 어떻게 시련을 대하였는가

(욥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3: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도를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똑같은 것을 반복하여 물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욥이 첫 번째 시련에서 나타낸 것과 살아낸 것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평가는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기 전에 받은 평가와 똑같은 것이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집을 지켜 주고, 그에게 복도 베풀어 준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다. 욥의 실제 표현으로, 하나님은 욥에게 갈채를 보내며 만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욥의 눈에는 모든 가산과 자녀 중에 아무것도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는 이유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욥의 마음속에서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하나님의 지위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욥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귀중히 여겼다는 것을 보았다. 그 한 차례 시련에서, 욥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상을 얻고 또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가산과 자녀를 빼앗긴 경력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욥에게는 그것이 심령을 씻어 내는 한 차례 진실한 체험이자, 자신의 인생을 충실케 하는 한 차례 생명의 세례였고,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순복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 풍성한 잔치였다. 그 시험으로, 욥의 신분은 부자에서 단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 대한 사탄의 참해도 겪게 되었다. 욥은 자신이 단 한 푼도 없게 되었다고 사탄을 증오하지는 않았지만, 사탄의 그런 악랄한 행위에서 사탄의 추하고 비열한 모습을 보았고, 사탄이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배반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영원히 지키려고 하는 마음을 더욱더 불러일으킨 것이다. 욥은 ‘절대로 가산이나 자녀와 가족과 같은 그 어떤 외부의 요소 때문에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등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절대로 사탄의 노예, 가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라고 맹세했다. 이것은 욥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험의 다른 한 면에서도, 욥은 마찬가지로 수확이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시련에서, 욥이 얻은 것 또한 상당히 풍성했다는 것이다.

지나간 몇십 년의 삶 속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도 받았다. 그런 축복에 욥은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더욱더 빚진 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큰 축복을 받고, 그토록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하면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와 동시에 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도 있기를 바랐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순복과 믿음을 인정할 때까지, 자신의 순복을 검증하고 더욱이 자신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그 시련이 닥친 것인데, 욥은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인정하고, 그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욥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욥의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가 온 것은 욥의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검증을 받을 수 있고, 동시에 정결함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더욱이 욥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뜻한다. 욥은 그런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그 시련에서 더욱 순전하게 되었고, 또한 그 시련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욥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더욱더 감사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더 찬송했으며, 또한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앙망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간절히 사모했다. 비록 욥이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욥의 경력과 체험을 놓고 말하면, 욥의 믿음과 인식은 이미 아주 큰 진보가 있었고, 전의 것을 초월해 있었다. 즉, 욥의 믿음은 증가되었고, 순복에는 목표가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는 더 깊은 진보가 있게 되었다. 비록 그 시련으로, 욥의 심령과 생명은 새롭게 되었지만, 욥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그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을 헤아려 보았고, 자신의 부족함과 결점도 성찰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욥은 또 묵묵히 기도하면서 다음으로 올 시련을 기다렸다. 그 이유는 욥이 자신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이,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시련에서 승화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언일행 그리고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고 있으므로, 욥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도 여호와의 귀에 상달되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또 한 차례의 시련이 예정대로 임하게 된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돌봐 주시는 마음을 진실로 체험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어본 후,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또 한 번, 하나님이 보기에 순전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회인가! 사탄은 그 기회를 빌어 철저히 욥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는데, 이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사탄에게 틈탈 기회가 생겨 언제 어디서나 욥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우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비록 자기의 사악한 의도를 빈틈없이 감추었지만, 자기의 악랄한 본성을 억제하기는 어려웠다. 그 진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답하는 사탄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4~5) 사탄의 그 말에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사탄의 악랄함에 대해 실질적인 인식과 느낌이 있게 된다. 사탄의 그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은 후,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은 다 사탄의 비열함과 무치함을 더욱 증오할 것이고, 또한 사탄이 퍼뜨린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에 대해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욥을 위해 깊은 기도와 축원을 해 줄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순전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어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축원할 것이며, 또한 욥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을 영원토록 채찍질하고 격려해 줄 수 있기를 축원할 것이다. 비록 사탄의 그 말 속에서 사람들도 다 사탄의 악랄한 속셈을 알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의 ‘청구’에 시원하게 승낙해 주었다. 하지만 사탄에게 다시 한번 조건을 하나 주었을 뿐이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욥 2:6) 이번에는 사탄이 손을 펴서 욥의 뼈와 살을 치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고 말씀했다. 그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에게 넘기지만, 생명은 보존하고 빼앗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사탄이 욥을 그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급히 욥에게 가서 가죽에 상처를 입혀 온몸에 악창이 나도록 손을 뻗치자, 욥은 피부의 아픔을 느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송하자, 사탄은 그것을 보고 더욱 기고만장하였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맛보았기에, 욥의 살을 뜯어 악창이 헐도록 손을 뻗쳤다. 곧바로, 욥은 피와 살의 더없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주물렀는데, 그렇게 하면 육체의 아픔으로 심령에 가져다주는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을 듯싶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스스로 굳세지도록 노력하면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살펴보시나이다. 어찌하여 사람의 연약함까지도 염려하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욥의 모습을 보았지만, 욥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탄은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하면서 급히 손을 뻗쳐 욥의 뼈를 상하게 했다. 순식간에, 욥은 마치 살이 뼈에서 찢겨 떨어지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은, 전에 없던 고통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아픔은, 욥에게 죽기보다 못한 느낌을 주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욥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고, 살을 찢어 아픔을 감소시키고 싶었지만, 외치고 싶은 것을 참았고 살을 찢지도 않았다. 그 까닭은 욥이 사탄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때,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자신의 앞에도 계셨고 뒤에도 계셨고 자신의 좌우에도 계셨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의의가 결코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욥이 아파할 때, 그 아파하는 모습을 전혀 구경한 적이 없으며, 반대로 얼굴을 가리고 감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이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무력하며 나약하고 무지한데, 당신은 왜 그렇게도 염려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면서도 스스로 아파하시는데, 사람이 어찌 당신이 염려하시고 마음에 두실 만한 가치가 있겠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고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사탄은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결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갔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낸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이야기는 결코 사탄이 물러간 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각 인물들의 출현으로 더 다채로운 장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다른 한 면에서 나타난 표현은 범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참해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지 않을 때, 그의 아내가 처음으로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맡아 욥을 공격했다. 본문은 이렇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대역을 맡아 한 말이다. 그 말에는 공격과 참소가 섞여 있고 유혹과 시험 그리고 비방도 섞여 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없자, 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여, 욥이 자신의 순전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더 이상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사탄은 또, “만약 여호와의 이름을 욕하면 이 모든 고통을 참을 필요가 없고, 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로 욥을 유인하려고 했다. 아내의 권고에 욥은 이렇게 질책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인식이다. 단, 욥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진실성이 그때에 실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는데, 그 뜻은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데, 왜 아직도 욕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 살아서 뭐해요? 당신의 하나님이 그렇게 불공평한데도 계속 여호와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당신이 그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화를 당하게 하는 거예요? 얼른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더 이상 따르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한테 닥친 재앙이 사라질 거예요.”라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욥의 간증이 또 생겼다. 그 간증은 일반인에게는 없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성경에 있는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욥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 간증을 보았다. 하나님은 단지 그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옳은 분임을 실증해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다. 아내의 권고에 욥은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했다. 그 말은 참 무게가 있지 않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만이 그 말이 매우 무게가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다. 그 말이 무게가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듣고자 했던 말이며, 하나님이 보기를 바랐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의 간증에서 정수(精髓)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욥의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실이 실증을 얻었다. 욥을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시험을 받고 더 나아가 온몸에 악창까지 났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아내와 친지들이 모두 권고한 그때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욥은 어떤 시험이 오든, 얼마나 큰 환난과 고통이 닥치든, 설령 죽음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은 저버릴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욥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위치가 가장 중요했고,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는 욥에 대한 평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를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욥은 마음과 하는 말이 일치하였는데, 입으로만 찬송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 욥의 진정한 모습이고,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긴 원인이기도 하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받은 그런 고난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임하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욥이 받은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욥은 그때, 자신이 평소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던 것과 평소에 일을 행하던 원칙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발표해 냈다. 이것은 진실한 것이다. 만약 욥에게 시험이 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욥을 시련하지 않았을 때,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란 사람은 아주 위선적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재산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욥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건 당연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욥이 시련을 겪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하였더라면, 너는 “욥이란 사람은 허풍 치기 아주 좋아합니다. 욥이 하나님에게서 늘 축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지 않은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재앙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할 겁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욥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닥치는 것도 싫어하며, 닥칠까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도 차마 보지 못했던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여전히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면서 자신의 순전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때에, 욥의 표현에 대해 공리공론을 늘어놓기 좋아하고, 글귀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욥이 지킨 순전함 때문에 정죄당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욥의 간증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인 표현과 했던 말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사람은 질투심을 느꼈고, 어떤 사람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경시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면서 욥의 간증을 보고 코웃음까지 쳤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은 고통을 보았고, 욥이 한 말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시련이 왔을 때, 욥이 나타낸 인성의 ‘연약함’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연약함’이 그들이 여기는 소위 말하는 욥의 순전함 중의 불순전한 부분이며, 동시에 그 ‘연약함’이 또 ‘하나님이 보기에 순전한 사람’의 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생각에는 순전한 사람이라면 다 완벽한 사람이고 흠이나 오점이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에게는 연약함도 아픔의 느낌도 없고 슬픔과 괴로움의 정서도 없으며 증오도 없고 그 어떤 겉면의 과격한 행위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 순전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많은 행위가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욥이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는 결코 사람의 상상처럼 그것으로 인해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욥의 ‘실성’으로, 사람들은 욥이 매우 몰인정하다고 여겼다. 그것은 욥에게는 눈물도 없었고 혈육의 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초에, 사람에게 남겼던 욥의 ‘나쁜 인상’이었다. 뒤이어 욥의 일련의 행위는 사람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겉옷을 찢은’ 것은 하나님에게 무례하게 대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머리털을 민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과 반박하는 뜻이 있다고 잘못 여겨졌다. 욥이 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 말 외에 사람은 욥에게서 하나님이 칭찬하는 의(義)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욥에 대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평가는 단지 몰이해, 오해, 의심, 정죄와 도리상의 인정, 이런 범위에 머물러 있을 뿐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이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그 말씀을 진정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욥에 대해 위와 같은 인상이 있게 된 기초상에서 욥의 의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은 의심이 생겼다. 왜냐하면 욥이 행한 것과 성경에 기록된 욥의 행동 표현들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하늘땅도 놀라고 귀신도 흐느끼게 하는 것과 같은, 사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에게는 그 어떤 ‘장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그 모습은 또한 세상 사람들을 놀라 어리둥절하게 하였고, 세상 사람들에게 욥의 의를 의심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부정하는 태도까지 생기게 하였다. 왜냐하면 욥은 몸을 긁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맹세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통곡하며 눈물 흘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이 본 것은 욥의 연약한 모습뿐이었고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한 말을 들었을지라도,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혹은 어떤 말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었고 여전히 욥의 말에서 욥의 의를 볼 수 없었다. 욥이 시련의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 사람에게 준 인상은 기본적으로 다 대범한 모습이었다. 사람은 욥의 행위의 배후에서 일어난 욥의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보지 못했고, 또한 하나님을 향한 욥의 마음속의 경외심과 욥이 지킨 ‘악에서 떠나는’ 도의 원칙도 볼 수 없었다. 욥의 대범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단지 빈말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한낱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욥의 ‘연약함’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깊은 인상을 남기게 했고, 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정의를 내린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에 대해 ‘괄목상대’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이해’도 있게 했다.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을 때, 내가 말한 ‘괄목상대’와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실증된 것이다.

비록 욥이 받은 고통의 정도를 아무도 상상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지만,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감소시켰을 뿐이다. 욥은 이런 말을 했다. 본문에는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이라고 적혀 있다. 아무도 이 말을 아주 중요한 말로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유의했을 수도 있다. 너희가 보기에 그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느냐? 그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느냐? 나는 너희 중 많은 사람들이 욥이 한 그 말에 대해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이상, 그 어떤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표현도 없어야 하고, 반대로 사탄에게서 오는 그 어떤 공격도 당연히 ‘적극적’으로 직면해야 하며, 심지어 웃는 얼굴로 사탄의 시험을 맞이해야 하고 사탄이 욥의 육체에 가져다준 그 어떤 고통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야 하고 자기 마음속의 그 어떤 느낌도 표현하지 말아야 옳다고 여기고, 심지어 하나님께 그런 시련이 좀 더 강력하게 오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며,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진정 의지가 굳센 사람이 표현해야 할 바이고 구비해야 할 바이라고 여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런 일을 말로 하기는 쉽지만 막상 하자면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욥의 이런 시험을 겪어 본 사람이 하나도 없고, 욥의 이런 불행을 겪어 본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욥에게 임한 그런 시험을 겪을 수 있는 사람은 왜 하나도 없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이런 책임과 이런 부탁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욥이 해낸 것을 해낼 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으며, 더욱이 욥처럼 그런 고통이 닥칠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외에,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지 않고,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지금 욥의 그런 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의인 중의 한 사람,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 사탄을 허둥지둥 도망하게 하여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좀 칭찬한다고 안 될 것이 있을까?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이 하나님의 것보다 더 높단 말이냐? 설마 시련이 왔을 때, 너희가 욥보다 더 잘한단 말이냐? 하나님도 다 칭찬했는데, 너희에게 무슨 이의가 또 있단 말이냐?

욥은 자신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였다

나는 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사람은 겉면을 본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아 사람의 실질을 알고 있지만, 사람은 보여지는 겉면으로 사람의 실질을 정의한다.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때, 욥의 그 행동은 욥의 세 친구를 포함한 모든 영적 인물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생일을 포함한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생명과 육체에 당연히 감사해야지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런 깨달음은 신성불가침한 것이고 언제든지 바뀔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욥은 ‘상규에 어긋나게’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다. 욥의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금지 구역에 난입한 것이니 사람들의 이해와 동정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욥의 ‘의’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들은 욥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방종’이 생겨 감히 그렇게 겁 없이 함부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여생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태어난 그날이 멸망하였더라면이라고 저주했으니,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겉면의 현상은 사람들에게 욥의 행동을 정죄할 증거를 주었지만, 누가 그때의 욥의 진정한 생각과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까? 또 누가 욥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거기의 내막과 원인은 하나님만 알고, 또한 욥 본인만 알고 있었다.

사탄이 손을 뻗쳐 욥의 뼈를 상하게 했을 때, 욥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었다. 욥은 벗어날 수가 없었고 반항할 힘도 없었으며, 몸과 영혼은 초강도의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 ‘극심한 고통’은 욥에게 육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미소한 존재라는 것과 무기력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 그 심정도 깊이 깨닫고 이해했다. 욥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을 때, 속된 인간이 그토록 무기력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치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감춘 것을 느끼는 듯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겼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욥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욥을 위해 더욱 마음 아파하였으며, 욥의 아픔으로 인해 아파하고 욥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였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도 느꼈다…… 욥은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눈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며, 더욱이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각 욥은 그 속된 육체에서 애써 벗어나고만 싶었고, 더 이상 그 육체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아픔을 참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욥은 육체의 아픔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께 심려를 끼쳐 드릴까’ 염려하는 고통도 참아야 했다. 그 이중적인 아픔은 하나는 육체에서 온 것이고, 하나는 심령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으로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을 감당하였고, 또한 속된 인간의 극한이 그토록 사람을 어찌할 수 없게 하고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고, 따라서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 시각 욥은 자신이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지언정,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욥은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싫어하고 심지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까지 싫어하기 시작했다. 욥은 더 이상 자신의 생일과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욥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 3:3~4) 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에 대한 자책감과 빚졌다는 생각도 섞여 있었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구절은 그때의 욥의 심정을 최고로 표현했으며 또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완벽하게 각 사람에게 나타냈다. 동시에 욥이 소원한 것처럼, 욥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그 시각 진정 승화되었다. 물론 그 ‘승화’는 하나님이 이루려고 예상했던 효과이다.

욥은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 눈의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 시련을 받을 때,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빼앗겼다. 욥은 그것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노를 사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욥은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즉, 욥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일에서 순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이것은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 속에서 나타낸 표현이자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한 간증이다. 두 번째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쳐 욥, 본인을 괴롭혔다. 욥은 비록 전에 없던 아픔을 체험했지만, 그 간증은 오히려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욥은 자신의 강직함과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고, 욥의 표현과 간증은 다시 한번 하나님에게 인정되고 열납되었다. 그때의 시험에서 욥은 실제 행동 표현으로 사탄에게 선고했다. 즉, 육체의 아픔은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복을 바꾸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앗아 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욥은 죽음이 닥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욥의 의연함은 사탄을 작아지게 하였고, 욥의 믿음은 사탄을 두려워하게 하고 간담이 서늘케 하였으며, 사탄과 결사전을 펼치는 욥의 기세는 사탄을 침통하게 하였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으로 사탄은 더 이상 욥의 몸에 손댈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그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죽음도 이겼음을 뜻하고, 완전히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욥은 그 두 차례의 시련에서 간증을 굳게 섰고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적으로 살아내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신의 생존 법칙의 범위도 넓히게 되었다. 그 두 차례의 시련을 겪고, 욥의 인생에는 더 풍부한 경력이 있게 되었다. 욥은 그 ‘경력’으로 더욱 성숙되고 노련해졌으며, 더욱 굳세지고 더욱 믿음이 생겼으며,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그 가치를 더욱 굳게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련으로 욥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염려(원문: 顧念)의 정을 깊이 체험하고 느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 많아졌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련은 욥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욥의 마음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했다. 욥이 감당한 육체의 아픔이 극에 다다랐을 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는 보살핌을 느끼게 된 욥은 저도 모르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 표현은 욥이 이미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을 향한 헤아림과 깊은 사랑이 자연적으로 유로된 것이다. 욥의 그 ‘자연적인 유로’는 하나님을 향한 헤아림과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욥이 자신을 증오함으로 인해, 차마 하나님을 고통받게 할 수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욥의 헤아림과 깊은 사랑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때의 욥은 자신이 다년간 하나님을 앙모하고, 갈망하고, 그리워했던 것을 다 헤아림과 깊은 사랑의 경지로 승화시켰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복과 경외심도 헤아림과 깊은 사랑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욥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에게 상처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태도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께 그 어떤 괴로움과 슬픔, 심지어 불쾌함을 드리게 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은 비록 여전히 지난날의 그 욥이었지만, 욥의 믿음과 순복,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에게 완전한 만족과 누림을 얻게 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이루려고 예정한 순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의 명실상부한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의 의로운 행실은 사탄을 이기게 했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서게 했으며, 순전함을 얻게 하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키고 초탈시켰으며,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당하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게 했다. 욥은 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참소당했고, 또 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시험당했으며, 의로 말미암아 사탄의 손아귀에 넘겨졌고 의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치고 간증을 굳게 섰다. 그때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질 수 없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욥은 진정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고 빛 가운데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이 엿보거나 해치는 일이 없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욥은 하나님이 보기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으며 자유로워졌다……

욥에 관하여

욥이 시련을 겪은 전 과정을 알게 된 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과 관련된 메시지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이고, 특히 욥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된 ‘비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여기에서 욥에 관해 얘기해 보자!

욥의 일상생활 속에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보다

욥을 이야기하려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순전함과 정직함’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욥은 아주 완벽하고, 아주 강직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물론 이것은 글자 표면상의 해석과 이해이다. 욥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현실 생활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단지 글자 표면에서, 책에서, 도리상에서는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할 것이다. 먼저 욥의 일상생활이 어떠했는지, 즉 욥의 생활 속의 정상적인 표현들이 어떠했는지를 보고, 그런 것을 통해 욥의 생존 원칙과 인생 목표를 알아보고, 욥의 인성 품격과 욥이 추구했던 것도 알아보도록 하자. 그럼 지금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말은 욥의 지위와 신분이 그 당시에 매우 높았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욥이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것은, 욥의 가산이 많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 때문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지는 않았다. 어쨌든 욥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욥에 대한 첫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며, 거대한 가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존귀한 지위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활 환경과 여건을 가지고 있는 정상인을 놓고 볼 때, 그 사람의 먹고 마시는 것과 삶의 질과 각 방면의 사적인 생활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 보아야 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4~5)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일이 기록되었다. 첫 번째 일은 욥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고,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자녀들을 염려하고,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기 때문에 항상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각기 다른 생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는 욥의 자녀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부유한 생활로 인해, 늘 잔치를 즐기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배불리 먹고 마시는 삶에 빠져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준 우월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나날을 보냈으므로 늘 죄를 범하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지 않고, 그 일들로 인한 번제도 드리지 않았다. 보다시피,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버릴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상세한 상황은 결코 우리가 관심을 가질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중점 부분은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욥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구절에 기록된 다른 한 가지 일이다. 그 일은 욥의 인성 실질과 일상생활에 관련된다. 성경에는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은 거기에 있지 않았고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록되었다. 다시 말하면, 욥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욥은 비록 부유하여 갖가지 가산을 소유하고, 또 많은 노비도 소유하고 있었지만, 삶은 결코 사치하지 않았다. 욥은 부유하다고 하여 우월한 삶의 환경 속에 빠져 있지 않았고, 육체적인 누림를 탐하지 않았으며, 부유하다고 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점차 멀리하지도 않았다. 보다시피, 욥은 바른 삶을 살았다. 욥은 결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탐욕이 더해지거나 누림을 좋아하거나 생활의 질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겸손한 자세로 일을 하고 겸허한 됨됨이를 갖추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되돌아보았고, 또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욥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일찍 일어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은 하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즉, 욥의 마음에서 풍부한 물질은 결코 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치도 대체하지 못했다. 욥이 평소에 행하는 것은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든, 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서, 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겼고, 일상생활의 작은 것에서도 다 묻어났다. 우리는 욥의 그런 실제 표현에서 그의 성실함을 볼 수 있고, 정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욥의 실질을 볼 수 있다. 욥이 늘 ‘그의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뜻은, 욥이 자녀들의 행위를 동의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고, 마음속으로 싫어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죄를 정했다는 것이다. 욥은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욥은 늘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자백하라고 했던 것이다. 욥의 그 행위는 또 우리에게 욥의 인성의 다른 한 면을 보게 한다. 그것은 욥이 늘 죄를 짓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욥의 자녀일지라도 결코 그들과의 혈연관계로 인해 자신의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감정으로 인해 그들의 죄행을 놔두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관용을 얻으라고 권유했으며, 또한 그들에게 누림을 탐하는 일로 하나님을 저버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을 좋아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증오했으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악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행하는 사람을 증오했다. 욥의 애증은 욥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났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욥의 정직함이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알아보려고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욥의 진실한 인성의 유로와 살아냄에 관한 것이다.

시련 속에서 나타난 욥의 인성 표현 (시련 속에서의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알아본다)

위에서 우리가 말한 것은 다 욥이 시험을 겪기 전에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인성의 여러 방면이다. 욥의 여러 부분의 표현들이 사람에게 욥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과 이해가 있게 하고, 물론 기초적인 확신도 있게 하리라 믿는다. 내가 ‘기초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 품격과 욥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추구한 정도에 대해 아직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알게 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욥이 말한 그 두 구절을 통해 욥에 대한 좋은 인상이 조금 있는 것 외에는 더 깊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의 시련을 받을 때, 인성의 살아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래야 욥의 참된 인성을 각 사람에게 완전하게 보여 줄 수 있다.

가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살해당한 소식을 들은 후, 욥의 반응은 이러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 1:20) 이 말에는 이런 사실이 하나 들어 있다. 즉, 욥은 그 소식을 들은 후, 당황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린 종을 질책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일이 일어난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현장에 가서 검사하거나 사실의 경과를 조사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욥은 가산을 잃게 되었다고 하여 그 어떤 아쉬움이나 몹시 상심한 표현이 없었고, 또한 자녀와 친지들을 잃게 되었다고 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지도 않았다. 욥은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그 행동은 일반인의 행동과 달랐고, 그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게 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욥을 ‘몰인정’하다고 질책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의 가산이 순식간에 없어졌을 때, 정상인이라면 몹시 상심하거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가산은 사람의 일생 동안의 심혈을 뜻하고 생존의 의탁이고 살아 나갈 희망이며, 사람에게 가산이 없어지면 심혈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뜻하고 희망도 없어지고, 심지어 미래까지 잃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산을 대하는 정상인의 태도이고, 가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자 또한 사람에게 보이는 가산의 중요성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산을 대하는 욥의 그런 냉담한 처리 태도를 모두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오늘 욥의 속마음을 읽어 보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는 점을 풀어 보자!

상식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가산을 베풀어 주었으니, 욥은 당연히 가산을 잃게 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하나님이 준 가산을 잘 보호하지도 보살피지도 못했고 지켜내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산을 빼앗겼다는 것을 들은 후, 욥의 첫 반응은 마땅히 현장에 가서 갖가지 물건을 철저히 점검한 다음, 하나님의 상을 다시 얻도록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욥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당연히 자기 생각이 있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온 것이지, 자신이 고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욥은 받은 축복을 자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지켜야 할 도를 최선을 다해 지키는 일을 생존의 원칙으로 하였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겼지, 결코 더 많은 축복을 탐내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산을 대하는 욥의 태도였다. 욥은 축복을 받기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축복이 없거나 축복을 잃음으로 인해 번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기뻐서 날뛰거나 너무 흥분하여 모든 것을 잊은 것도 아니고, 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욥이 가산을 대한 태도에서 욥의 참된 인성의 유로를 보게 된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며 물질생활에 대한 욥의 요구 기준은 매우 낮은 것이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까 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욥이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께 순복하는 태도이다. 즉, 욥은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려고 하든 말든, 요구가 없었고 원망도 없었으며,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자신의 가산은 자신이 고생해서 얻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신뢰이다. 즉, 욥의 믿음을 가리킨다. 욥에 대해 개술한 세 가지를 통해, 욥의 인성과 평소의 참된 추구를 매우 분명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가산을 잃었을 때, 그렇게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욥에게 그런 인성이 있고, 그런 추구가 있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욥은 평소에 추구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량과 믿음이 있게 된 것이다. 욥의 그 말 한마디는 일조일석에 있게 된 것이 아니고,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나서 꾸며 낸 것도 아니라, 욥이 다년간의 인생을 경험하는 가운데서 본 것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에게 축복만 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거두어 갈까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의 순복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느냐? 하나님의 존재만 믿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은 전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욥의 이성(理性)

욥은 실제 경력과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으로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욥의 그런 이성적인 선택은 평소에 추구한 것과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욥은 성실하여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인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고 순복할 수 있었으며, 그 순복으로 더욱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그 경외로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순전하게 되었고, 그 순전함으로 지혜가 있게 되었고, 또한 가장 이성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로 이지가 있고, 생각이 논리에 부합되고 황당무계하지 않으며, 적절한 언행과 판단이 있고, 적절하고 규범화된 도덕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에게 ‘이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욥을 가장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은 욥의 인성과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욥의 행동 표현과 관계된다. 욥은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순복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이 욥에게 남이 얻지 못한 인식을 얻게 만들었다. 욥은 그런 인식으로 자신에게 닥친 일을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더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욥의 말과 행위, 일처리 원칙, 일처리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규범적이고 매우 명확하고 아주 구체적이었다. 욥은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되게 하고 처리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으며,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일과 거두어 가는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욥의 ‘이성’이다. 욥은 이런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욥은 몸의 극심한 고통, 친구들의 만류, 죽음을 마주하여 실제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한 면을 보여 주었다.

욥의 본모습: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다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다음, 어떤 행동 표현들이 있었는지에 관해 묘사한 것이다. 그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뎌 내고 있었는데, 아무도 치료해 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도와 몸의 아픔을 경감시켜 주지 않았으며, 욥이 스스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의 상처 표면을 긁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욥이 고통받는 기간의 한 장면에 불과하여 욥의 인성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욥은 그 기간에, 결코 그 어떤 말로도 그때의 심정과 자신의 관점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의 행동과 표현은 여전히 그 자신의 인성의 진실된 유로이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2장의 장면에서 우리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가 놀랍게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앞뒤의 두 묘사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이런 대비는 우리에게 욥의 본모습을 보게 한다. 즉, ‘욥은 비록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욥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신분으로 대해 주는지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 자신의 신분에 어떤 부작용을 초래할 것인지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욥은 지위의 복을 탐내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가져다준 후광을 누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서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의가 어떤 것인지만 마음에 두었다.’ 욥의 본모습은 욥의 실질이다. 즉, 욥은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으며,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았다.

욥은 애증이 분명했다

욥과 그 아내와의 대화에서 욥은 다른 한 방면의 인성을 또 모두에게 보여 준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권고하여 욥을 도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호의’는 결코 욥의 찬사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욥을 노하게 했다. 그것은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과 순복을 부인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전혀 용납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었겠느냐? 욥이 어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보고, 전혀 무관심할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했다. 욥이 아내를 대한 태도에는 노기와 증오가 있었고, 질책과 훈계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이 자연적으로 유로된 것이자, 또한 욥의 정직한 인성의 진실된 표현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다. 욥은 그런 정의감이 있어 사악한 기풍과 조류를 증오하였고,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 괴상한 논조나 터무니없는 이론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버리게 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꿋꿋이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욥의 착함과 진실함

욥의 여러 가지 행동 표현에서 다 욥의 인성 유로를 볼 수 있다면,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교통하려고 하는 다음 화제이다.

나는 앞에서 욥은 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근본 원인을 말했다. 너희는 그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이 없고, 냉혹하고 무정하고 인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욥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자기의 생일을 증오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인성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슬퍼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아파하는 것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을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어 더욱 고통스러워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모든 표현들은 다 사람이 따라 배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그 일만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물음표를 찍거나 각기 다른 평가를 하게 하였다. 사실, 욥의 그 행동이야말로 욥의 가장 근본적인 인성 실질이 유로된 것이다. 욥의 인성 실질에는 숨긴 것이 없고, 꾸민 것이 없으며, 사람의 가공도 거치지 않았다. 욥의 그 행동이 사람들에게 욥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착한 것과 진실된 것을 보게 했는데, 욥은 맑은 샘물처럼 바닥까지 보이고 순수하고 투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의 여러 방면을 알게 된 후, 욥의 인성 실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게 된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한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고 실제적인 이해와 깨달음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이해하고 깨달은 것들이 사람을 도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게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것과 하나님의 역사 취지와의 관계

비록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욥에 대한 인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알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인성과 추구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욥은 그렇게 순전하고 정직하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랑받았는데, 하나님은 왜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까?”라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이와 비슷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 품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그런 의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문제이다. 그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이상, 우리는 그 문제를 내놓고 명확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다 매우 큰 필요가 있고, 또한 다 위대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경영에 관련되고, 인류가 구원받는 일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한 사역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어떤 방식으로 하든, 어떤 것을 대가로 하든, 어떤 것을 목표로 하든, 하나님이 하는 일의 취지는 불변하다는 것이다. 그 취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 안에서 이루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것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안에서 이루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실질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일의 한 방면의 취지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탄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안받침물이 되고 효력품이 되기 때문에, 사람은 늘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사탄의 시험과 공격에서 사탄의 사악하고, 추하고, 비열한 몰골을 보게 한다. 그리하여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것에 대해 인식이 있고, 분별이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을 점차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와 방해와 공격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복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으로 인해 사탄의 공격을 완전히 이겨 내고 사탄의 참소를 완전히 이겨 내게 되면, 사람은 철저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람이 구출되는 것은 사탄이 실패를 선고했음을 뜻하고 그 사람이 더 이상 사탄의 먹잇감이 아니고, 더 이상 사탄이 삼키려고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탄이 포기한 대상이라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고 순복과 경외심이 있으며, 사탄과 철저히 결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탄을 수치당하게 하고, 간담을 서늘케 하며, 또한 사탄을 철저히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가 사탄을 물리쳐 철저히 손을 떼게 만든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얻게 된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지려면 반드시 사탄에게서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거기에서 걸어 나와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시련을 여러 번 겪고,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알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고, 사탄의 시험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실하고 착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이성이 있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사탄이 결박하고, 엿보고, 참소하고, 해칠 수 없는,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이고, 완전히 해방되고 해탈된 사람이다. 욥이 바로 그런 자유인이었다, 하나님은 왜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려고 했는지에 대한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욥은 비록 직접 사탄의 참해를 겪었지만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며, 영원히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사탄의 참해와 참소를 받지 않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우려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 빛 속에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얻었다. 그 권리는 아무도 박탈할 수 없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점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권리는 욥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의지력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로 바꾼 것이다. 욥은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진정한 피조물로서 천경지의로 조물주를 경배하면서 아무런 방해도 없는 자격과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도 욥이 시험을 겪은 후의 최대의 성과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사람의 삶은 늘 사탄에게 방해받고, 심지어 사탄에게 통제까지 받는다. 다시 말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사탄에게 구금되어 있는 사람이고, 자유가 없는 사람이며, 사탄의 손에서 풀려 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사람이고, 사탄에게 끊임없이 뒤쫓기고 가차 없이 공격당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행복을 논할 여지가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을 논할 여지가 없으며, 인간의 존엄을 논할 여지는 더욱 없다.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사탄과 싸우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를 무기로 삼아 사탄과 결사전을 벌이고 사탄을 철저히 물리쳐 사람을 보기만 하면 피하게 하고 간담이 서늘하게끔 만들면, 사탄은 사람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철저히 포기할 것이다. 그때면 사람은 구출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너에게 사탄과 철저히 결렬할 결심만 있고 사탄을 물리치기에 유리한 무기는 갖추지 못했다면, 너는 여전히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오래되어 네가 사탄에게 시달려 기진맥진하기만 하고 간증은 여전히 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아주 미미하다. 최종에,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음을 선포할 때에도, 너는 사탄에게 단단히 붙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에게는 영원히 기회와 희망이 없다. 즉, 그런 사람은 사탄에게 완전히 노략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아들이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온 몸과 마음을 얻게 하다

하나님이 장기적으로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부축하는 사역 기간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요구를 일일이 사람에게 알려 주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도 나타내 보여 주는데, 목적은 사람에게 분량을 갖추게 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에게서 각 방면의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이다. 사람에게 그런 장비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하나하나의 경로와 방식은 다 하나님의 원수, 즉 사탄을 ‘협력’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후,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이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사탄이 배치한 진영에서 빠져나오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서 빠져나온다면, 그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방면을 검증하든, 그 검증 기준은 사람이 사탄의 공격하에서 간증을 굳게 섰는지의 여부와 사탄의 올무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기를 던지고 투항하여 사탄에게 귀순했는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지에 달렸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는 하나님이 준 무기를 가지고 혼자 사탄의 결박을 이겨 사탄에게 사람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고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사탄이 한 사람을 단념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 사람을 쟁탈하지 않고, 더 이상 그 사람을 참소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 사람을 제멋대로 학대하거나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 하나님께 얻어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이다.

욥의 간증이 후세들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반적인 과정을 알게 된 동시에, 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목적과 의의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더 이상 욥이 받은 고난에 대해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었고, 욥이 고난받은 의의에 대해서도 아주 새로운 깨달음이 있게 되었다. 사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욥과 같은 시험이 닥칠까 봐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련이 와도 더 이상 저촉하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욥의 믿음과 순복, 사탄을 이긴 간증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사람은 욥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을 보게 되었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를 가지고 사탄을 완전히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결심과 믿음만 있으면 사탄을 수치당하게 하고 실패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사람에게 목숨을 버릴지언정 간증을 굳게 설 결심과 의지력만 있으면 사탄이 듣고 두려워하여 황급히 물러선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욥의 간증은 후세들에게 경고를 하나 주었다. 그 경고는 사람들에게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참해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훈계하고 있다. 욥의 간증은 또 후세들에게 깨우침을 하나 주었다. 그 깨우침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구원받은 것임을 알게 했다. 욥의 인성 품격과 인생의 추구는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각 사람이 본받아야 하는 것이고, 욥이 평생 동안 살아낸 것과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에게 귀중한 자산이 된다.

욥의 간증은 하나님에게 위안이 되었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 그 안에 있는 함의를 깨닫지 못할 것이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심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엔가, 너희가 욥과 같은 시련이나 그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될 때, 너희가 환난을 겪고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배치한 시련을 겪게 될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때, 치욕과 고통을 참을 때면, 내가 이런 말을 한 그 의의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욥에 비해 아직도 훨씬 멀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며, 욥이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 가서 너는 욥이 했던 그 몇 마디 대표적인 말들이 패괴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욥이 행한 것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 하기 어렵겠다고 느낄 때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값진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행한 것과 하나님이 지불한 것은 얼마나 고귀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교통했는데, 너희는 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정확한 평가도 있게 되지 않았느냐? 너희는 마음속으로 욥이 참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욥이 행하고 보여 준 그런 사실은 사탄을 포함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증거는 욥에게서 생긴 것이며, 하나님이 얻은 첫 번째 예가 되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욥에게서 위안을 얻게 되었다. 창세부터 욥의 때에 이르러, 하나님은 처음으로 무엇을 위안이라고 하는지, 무엇을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은 것이라 하는지를 진정 느끼게 되었으며, 무엇을 진정 자신을 위해 증거했다고 하는지를 보기도 하였고 얻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욥의 간증과 욥의 각 방면에 대한 서술을 들은 후, 자신의 앞길에 대해 계획이 있으리라 믿으며, 또한 우려와 공포로 가득한 대부분 사람들도 몸과 마음을 천천히 풀기 시작하고 조금씩 마음에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으리라고 본다……

다음의 몇 구절도 욥과 관련된 기록이다. 계속 보자.

4.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다

(욥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42:2~6)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이 비록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너희는 이런 말을 통해, 여기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느냐?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느냐? 우선,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보자. 여기에 위의 두 문제를 설명할 만한 말이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6) 이 구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설 속에서 알게 된 것이지,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그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그런 후 삶 속에서,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하였다. 여기에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어떤 사실일까? 욥은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었지만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은 지금의 사람들과 같지 않으냐?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그 뜻은 욥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요소이다. 객관적으로는, 비록 욥이 하나님을 따랐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고 말씀한 적도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비록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한 적도 없고 어떤 분부를 한 적도 없었지만 욥은 만물 가운데서, ‘귀로 듣기만 했던’ 전설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 그런 후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따르게 된 유래와 과정이다. 하지만 욥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든, 어떻게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든,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 구절을 보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 9:11)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전혀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앞에서 지나가거나 일을 하거나 사람을 인도하는 때를 상상하면서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하지 않을 때, 사람에게 임하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하는지, 어떤 곳에 임하는지를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감춘 것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감춘 것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다음 구절에서 욥은 또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9) 이 구절에서, 우리는 욥의 경력에서 하나님이 시종 욥을 향해 감추었고, 공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으며, 공개적으로 욥에게 어떤 말씀을 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 앞으로 지나가거나 자기 오른편에서 일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자신 곁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신다고 여겨 왔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할 수 없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참된 믿음이 없었다면 계속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욥이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느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는 하나님이 과장해 말씀한 것이 아니라 진실된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욥에게도 나타나지 않았고 말씀하지 않았을지라도, 욥은 여전히 순전함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항상 번제를 드렸고,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했다.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던 그 일에서, 욥이 긍정적인 사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믿음은 얼마나 굳세고 또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볼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이 감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고 해서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욕하지도 않았다. 욥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욥은 하나님이 감추었다고 해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향해 공개적으로 나타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한 적이 없다. 그것은 욥이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재를 이미 보았고, 또한 자신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축복과 은총을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은 시종여일하게 욥을 향해 감추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욥은 아무도 얻지 못한 성과, 즉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화복을 따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중점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듣지도 못했지만, 욥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치가 있었다. 욥은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했을까?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것과 같다. 이 ‘찬송’은 조건이 없고 배경이 없고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주관하게 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욥의 마음에서 생각한 것과 작정한 것과 계획한 것은 다 하나님에게 봉해져 있지 않고 열려 있었으며,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무엇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렇게 경배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지나친 욕망도 품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토색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바뀔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으며,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의 창현(彰顯)이며, 어느 각도에서 보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욥이 한평생 체험하고 인식한 것이다. 욥의 그런 모든 마음과 행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여겼다. 하나님은 욥의 그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욥에게 있게 된 그런 마음도 소중히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임하게 될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하나님에게 요구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여 행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순복하는 것이었다. 욥은 이것을 자신의 직책으로 여겼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거나, 무엇을 분부하거나, 무엇을 가르치거나, 무엇을 타이르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지금의 말로 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 어떤 진리 방면에 관해 깨우쳐 주고 인도하고 공급해 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욥에게 그런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런 태도가 있게 된 것은 매우 대견스러운 일이다. 욥의 그런 표현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족한 것이며, 욥의 간증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마음과 그 본인은,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도리만 말하고 큰소리만 치고 제물을 바치는 말만 할 뿐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참된 인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경외가 없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소중하다. 그것은 욥의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에게 숨기는 것이 없으며, 욥의 인성이 성실하고 착하며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성을 갖추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병과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화복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에 사람의 걱정은 무지몽매한, 이지 없는 표현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태도를 갖고 있는 표현이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이런 인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지금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은 너희가 알고 있는 만큼 많았느냐? 하나님이 그때 했던 사역과 말씀은 아주 적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욥에게 그런 성과가 있게 된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욥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하나님에 대해 그런 태도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욥의 인성과 그 자신의 추구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인성과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시대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서 벌써 욥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결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것이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추고 있지만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사는 충분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력하지도 못했지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 시련 속에서 한 간증은 누구나 다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기쁨과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았고, 더욱이 사람들로부터 찬탄도 받았다. 욥의 일생은 평범하였고 위대하지 않았다. 여느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그 평범한 몇십 년의 세월에서, 욥은 일반 사람들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인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주재도 체험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욥은 그 어떤 일반인보다 총명하지 않았고, 초강력 생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이 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욥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갖추지 못한,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갖추었으며,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굳세고 의연하고 생각이 세밀하였다. 그러므로 욥은 평범한 나날에서 하나님이 행한 모든 비범한 일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공의로움도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과 보호를 보았으며, 지고지상한 하나님의 존귀와 권병도 보았다. 욥이 일반인이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원인은, 순결한 마음이 있고,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고, 마음이 조물주에게 끌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욥이 추구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완벽한 사람이 되고, 순전한 사람이 되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욥이 갖춘 것과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지 못한 배경에서 한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지혜도 느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지 못했지만,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사람에게서 거두어 가는 일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욥이 보낸 세월은 보통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욥이,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을 알아가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욥의 눈에는 하나님의 행사가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고, 하나님의 주재도 사람의 생활 속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다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욥은 자신의 평범한 나날 속에,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비범하고 기묘한 행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안배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감추고’ ‘침묵’하는 것은 결코 욥이 하나님의 행사를 체험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욥의 일생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만물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한 것이다. 욥은 평범한 나날을 보내면서, 만물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지만 또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하면서 발표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깨달음을 얻었다. 보다시피, 사람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고 욥처럼 추구한다면, 욥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그런 인식을 얻을 수 있으며,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에 대한 깨달음과 인식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지 않고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고 말씀하지 않은 전제하에서,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은, 충분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권병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이 욥 같은 그런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따르는 일반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논리적으로 추리한 것일지라도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상이 마음 같지는 않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욥, 한 사람만의 특허인 듯,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욥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있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아주 분명하다. 욥만이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너희도 틀림없이 깨달았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시련에서도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사탄에게 얽매이고, 사탄의 올무에 걸려 있다. 그들은 다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해치고 삼킬 대상들이고, 다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며, 다 사탄에게 감금된 죄수들이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데 어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으랴

지금의 사람들이 모두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이상, 사람의 본성 실질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할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까? 악에서 떠나는 사람일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로 요약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이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 함의는 전혀 모른다. ‘하나님의 원수’, 이 말 속에는 그 실질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원수로 여긴 것이다. 우선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처음의 소망을 놓고 봤을 때, 목적과 속셈과 야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설사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의 존재를 보았을지라도 여전히 속셈을 가지고 믿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최종 목적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이다. 생명 경력 가운데서, 사람은 늘 ‘난 하나님을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렸는데, 하나님은 내게 뭘 주셨지? 내가 이 기간에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세어 보고 점검해 보아야지. 내가 그동안 화비도 많이 했고, 많이 수고했고, 고난도 많이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런 행동 표현에 따라 별다른 약속이 없을까? 하나님은 내 선행을 기념하실까? 내 결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한다.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수시로, 항상 이렇게 따져 보며 속셈과 야심을 품고 거래를 하면서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즉, 사람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과 따지고, 또한 끊임없이 자신의 결말을 놓고 하나님과 ‘도리를 따져 가면서’ 하나님에게서 진술을 받아 내려고 하고, 하나님이 도대체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시종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며, 심지어 점점 압박하면서 욕심은 밑도 끝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동시에 또 하나님과 따지고 든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련이 오거나 환경이 임하면, 늘 연약해지고 소극적이 되고 나태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하나님을 보물단지, 만능 상자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최대 채권자로 여기며, 하나님의 손에 있는 축복과 약속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권리와 직책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보호하고 보살피고 사람에게 공급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에 대해 가장 기본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자, 또한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개념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 실질에서부터 사람의 주관적 추구까지 놓고 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경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정형을 놓고 말하면, 사람의 실질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 실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은 악랄하고 음험하고 간사하며,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게다가 비열하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꽁꽁 봉해져 있고, 하나님에게 전혀 맡겨지지 않아,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람의 진심을 보지 못했고, 사람에게서 경배를 받지도 못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든,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공급해 주든, 사람은 못 본 체하고 전혀 무관심하며, 마음을 시종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장악하고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사람들의 정형이다. 계속해서 욥을 보자. 우선 욥에게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이 있었는지 보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일에 다른 의도가 있었느냐? 하나님은 그 당시에 어느 누구에게 이후의 결말에 관한 일을 말씀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 당시에 아무에게도 결말에 관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욥은 그런 배경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욥과 비교할 가치가 있느냐? 양자는 차이가 매우 크고, 같은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고, 욥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과 전혀 거래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사치한 욕망과 요구도 없었으며, 오히려 ‘주신 이도 여호와,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라고 여겼다. 그것은 욥이 오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켜 오면서 보고 얻게 된 성과이다. 마찬가지로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는 그런 성과도 얻었다. 그 두 마디는 욥이 생활 경력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순복하는 태도가 있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이고 알게 된 것이다. 그 두 마디는 사탄의 시험을 이긴 욥의 가장 유력한 무기였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선 초석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너희는 마음속으로 욥을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느냐? 너희는 사탄에게서 오는 시험을 받을까 두려우냐? 너희는 하나님에게 욥을 시련한 것같이 너희도 시련해 달라고 기도할 심지(心志)가 있느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감히 그렇게 기도하지 못할 것이다. 보다시피, 너희의 믿음은 보잘것없이 작다. 욥의 믿음에 비하면 그야말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서지 못하고, 사탄의 공격과 참소와 시험을 이기지도 못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을 수 있겠느냐? 욥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이 구원받는 의의를 깨닫고 알게 된 후, 지금 너희는 욥과 같은 시련을 받아들일 믿음이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려고 하는 심지를 좀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시련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갖지 말라

욥을 시련하여 욥에게서 간증을 얻은 후, 하나님은 욥과 같은 그런 사람을 한 무리 혹은 더 많이 얻으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사탄이 하나님과 내기를 하여 욥을 시험하고 공격하고 잔인하게 해쳤던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잔인하게 해치지 못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은 사탄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우매한 사람에게 다시 똑같은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욥에게 있었던 한 차례의 시험으로 이미 충분했다! 하나님은 사탄이 함부로 사람을 잔인하게 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욥이 사탄의 시험과 참해를 겪은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이미 충분했다. 하나님은 사탄이 다시 그런 짓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목숨과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며, 사탄에게는 제멋대로 하나님의 선민을 지배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너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돌아보고, 사람이 무지몽매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철저히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사탄에게 넘겨야 하지만, 사람이 늘 사탄에게 우롱당하거나 해를 입고, 늘 고통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고 만유를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사람을 함부로 해하고 학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사탄이 각종 방식으로 사람을 유인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며, 더욱이 사탄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에 개입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는 법칙을 사탄이 짓밟고 파괴하는 것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한데,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이렇게 큰 사역은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 사역의 핵심과 결정체이자, 또한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역사한 심혈의 대가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찌 그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사탄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

사람은 늘 하나님의 시련이 올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지만, 늘 사탄의 올무에서, 사탄이 공격하고 잔인하게 해치는 위험한 경지에서 살고 있으면서 두려운 줄도 모르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믿음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물에만 국한되어 있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하나님이 인류를 아껴 주고 체휼해 주는 것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련,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에 대해 약간의 무서움과 두려움이 있는 것 외에, 사람은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하는 면이 조금도 없다. 시련을 언급하기만 하면, 사람은 마치 하나님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여기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속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워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리라’는 구호를 외치는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는 극력 저촉하며 반대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조금만 조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잘못 인도될’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탄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사탄이 사람을 잔인하게 해칠 것이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사탄에게 해를 입으면서도 사탄에게 노략당할까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진심으로 사람을 사탄의 마수에서 구원한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사람이 욥처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면, 욥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결말을 얻지 않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복한다면, 사람에게 손해가 될 것이 뭐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너희 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중하게 대하며, 무례한 짓을 하지 말고 흥분하지 말며, 혈기, 천성, 상상과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안배한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대하지 말며, 하나님을 건드려 노하지 않도록 꼭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찾으라고 권한다. 기억했겠지?

우리 계속해서 시련을 받은 후의 욥이 어떠한지를 보자.

5. 시련을 받은 후의 욥

(욥 42:7~9)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우매하고 거만한 사람은 비천하게 본다

<욥기> 42장 7~9절에, 하나님은 욥을 자신의 종이라고 언급하였다. ‘종’이라는 명칭으로 욥을 칭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욥의 가치를 뜻한다. 비록 하나님이 욥에 대해 더 높은 명칭으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 명칭이 결코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욥의 가치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여기의 ‘종’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번 ‘내 종 욥’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기쁜 심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종’이란 단어의 함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종’이라고 말한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욥을 시련한 후에, 하나님이 처음 공개적으로 사람에게 욥이 행한 것과 말한 것을 열납한다고 알려 준 것이며, 처음 공개적으로 욥이 전에 행한 것과 말한 것의 확실성과 정확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의 사람들의 부정확하고 황당한 말들로 인해 그들에게 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배경에서 살았으면서도, 욥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정확한 인식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멋대로 추측하고 여기저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겨 하나님 마음에 화가 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욥이 행한 것과 말한 것을 열납한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노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의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일을 하여 자신들의 죄를 씻으라고 알려 주었다. 그들의 우매함과 거만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샀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번제를 드려 자신들의 과오를 만회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번제는 모두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었지만, 그 번제는 욥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번제의 특이한 점이다. 욥은 시련에서 하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에게 열납되었고, 그와 동시에 욥의 친구 몇몇은 욥이 시련을 받는 기간에 오히려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우매하고 거만한 탓에 하나님에게 정죄받고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었다. 그 ‘징벌’이 바로 욥의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그 후에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기를 푸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조치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뜻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또한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그들의 모든 행위를 열납하지 않고 욥을 크게 열납하고 기뻐한다고 알려 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고, 우매하고 거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미움받으며, 우매하고 거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노기를 사고 하나님의 눈에 비천하게 보인다고 알려 주었다. 이 두 방면은 하나님이 두 부류 사람에게 내린 정의이고, 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기도 하며,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이다. 하나님이 비록 욥을 종으로 불렀을지라도, 그 ‘종’은 하나님 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권병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게 한 사람이며,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직접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다른 사람보다 존귀한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종’에 대한 진정한 함의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으로 말미암아 그 ‘특별한 영광’을 얻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종’으로 칭함받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확연히 다른 그 두 가지 태도가 바로 두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하나님 눈에 귀하게 보이며, 우매하고 거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날 수 없기에,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늘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고 정죄받으며, 하나님 눈에 비천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권병을 주었다

욥은 자기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한 후, 하나님은 욥의 기도로 인해 그들의 우매함과 거만함에 따라 그들을 처리하지 않았다. 즉, 그들을 징벌하지 않았고, 그 어떤 보응도 내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종,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열납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였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할 때에는 그 사람에게 많은 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 상은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권병도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어줌으로, 그 몇 사람의 과오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병이다. ‘욥의 기도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않는’ 이런 방식으로, 그 우매하고 거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물론 그것도 엘리바스 등의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 말씀 중에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는 말이 있다. 욥은 어떤 말들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욥기>에 기록된, 욥이 한 그 많은 편폭의 말들이다. 그 많은 편폭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원망이나 추측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욥은 결과만 기다렸을 뿐이다. 욥의 기다림은 바로 순복하는 태도였다. 욥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께 한 욥의 말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열납하였다. 욥이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었다고 해서 욥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것을 보았고, 듣고자 했던 것을 들었다. 욥이 했던 모든 행동들을 하나님은 일일이 다 보고 있었고, 욥이 말한 구절구절마다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어 하나님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때에, 그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인식과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의 사람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배경에 근거해, 하나님은 여전히 욥이 한 말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욥의 행동 때문이었고, 욥이 표현한 것과 유로한 것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기간에, 속으로 생각한 것과 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에서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이 만족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고, 그 뒤로 욥은 역경 속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욥의 시련은 사라지고 더는 없었다. 욥은 이미 시련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시련에서 굳게 서고 사탄을 철저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베풀어 주는 것은 명정사순한 것이었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이전보다 더 많이 받았다. 그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욥은 다시는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고,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도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축복은 우양이나 낙타, 가산 등등에만 국한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베풀어 주려고 하는 것은 전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겠다고 기록된 것이 있느냐?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는 결말이 언급되지 않았고, 그것은 결말에 관련되지도 않았다. 하나님 마음속에서, 욥의 가치가 어느 정도이든, 지위가 어느 정도이든,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축복은 아주 적절하였다. 하나님이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할까?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사람의 결말을 선포하는 데까지 진행되지 않은 때에는 사역이 끝나는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결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저 일부 물질적인 축복만 주었다. 즉,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낸 것이다. 그것은 욥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점이다. 같은 점은 욥도 늙어 가고, 정상인처럼 언젠가는 인간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욥 42:17) 여기의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시대에, 욥에게도 나이를 정해 주고 수한이 찬 후 그렇게 자연히 세상을 떠나게 하였다. 욥이 두 번째로 축복을 받은 때부터 죽기까지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욥에게 그 어떤 고통도 더하지 않았다. 욥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자 필연적인 것이고 아주 정상적인 일이지, 판결을 선고한 것이 아니고 정죄한 것도 아니다. 욥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 욥이 죽은 후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관해, 하나님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고, 그 어떤 평론도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하는 것은 아주 합당하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일하는 내용과 원칙은 자신의 역사 단계에 근거하고 자신의 역사 시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욥과 같은 그런 사람은 어떤 결말이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속에 정론이 하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원치 않고, 사람에게 알려 줄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 욥은 그렇게 나이가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욥이 일생 동안 살아낸 가치

욥이 일생 동안 살아온 것이 가치가 있지 않느냐? 욥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왜 욥이 가치 있게 살았다고 할까? 사람 편에서 볼 때 욥의 가치는 무엇일까? 사람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욥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하여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 드높은 간증을 하였고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하였으며,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고 모델이 되어 인류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게 하였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욥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삶의 가치는,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송하여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위안을 얻게 하고 누릴 것이 있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삶의 가치는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을 위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드높은 간증을 하고,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영광을 얻도록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위안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에 결과가 보이게 하고 희망도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욥의 간증은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굳게 설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사탄을 수치당하게 할 수 있는 선례를 하나 열어 놓았다. 이런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욥은 하나님의 마음에 위안을 얻게 하였고, 영광 얻는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거기에서부터 완벽한 시작이 있게 하였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그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고,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가 되었다. 욥이 일생 동안 살아낸 것과 사탄을 이긴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하나님께 귀하게 보이며,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게 되었고 본이 되었다. 욥은 마치 흠 없고 눈부신 빛나는 보석 같아 영원히 하나님께 소중히 여겨지고, 또한 사람이 소중히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율법시대에서 행한 역사를 보자.

(4) 율법시대의 규례

1 십계명

2 제단을 쌓는 원칙

3 종을 대하는 원칙

4 도둑질과 배상에 관한 규례

5 안식년과 3개 절기를 지키는 것

6 안식일 규례

7 제사드리는 규례

1) 번제 드림

2) 소제 드림

3) 화목제 드림

4) 속죄제 드림

5) 속건제 드림

6) 제사장이 제사드리는 규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지키라고 분부함)

① 제사장이 번제를 드림

② 제사장이 소제를 드림

③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림

④ 제사장이 속건제를 드림

⑤ 제사장이 화목제를 드림

8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규례

9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10 부녀의 산후 정결케 하는 규례

11 문둥병을 검사하는 기준

12 문둥병환자 치유받는 규례

13 병균에 감염된 방을 정결케 해야 하는 규례

14 유출병 등 질병에 관한 규례

15 매년 한 번 속죄일을 지켜야 함

16 소와 양을 잡는 규례

17 이방인의 악습을 좇지 말라 (근친 결혼 등)

18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자는 쳐 죽임

20 간음죄 처벌 규례

21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 (사람이 지켜야 할 일상 행동 규례, 성물을 먹는 규례, 생축으로 제사드리는 규례 등)

22 지켜야 할 절기 (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속죄일 등)

23 기타 규례 (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

율법시대의 규례는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인도한 실제적인 증거이다

너희는 율법시대의 이런 규례나 원칙을 모두 보았겠지? 이런 규례는 범위가 넓을까? 먼저 십계명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다음은 어떻게 제단을 쌓느냐 하는 등등의 규례이다. 이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3개 절기를 지키는 법들이고, 그다음은 제사를 드리는 규례이다. 너희들이 보아라, 제사를 드리는 데에 모두 몇 가지가 있느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등등이 있고 그다음은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는 규례인데, 제사장이 번제를 드리고, 제사장이 소제를 드리는 등등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여덟 번째는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규례이고, 그다음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규례이다. 여기에, 사람의 생활과 관련되는 여러 방면에 모두 규정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관한 규례, 부녀의 산후 정결케 하는 규례, 문둥병 환자가 치유받는 규례이다. 이런 규례 중 질병에 관한 일까지도 하나님은 다 알려 주었다. 심지어 또 소나 양을 잡는 규례 등등도 있다. 소나 양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하나님이 어떻게 잡으라고 하면 그대로 잡아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일리가 있기에,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행하면 틀림없이 옳은 것이고,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일부 지켜야 할 절기와 규례도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과 유월절 등등도 하나님은 다 알려 주었다. 우리 마지막 한 가지 기타 규례를 보자. 등불 관리, 희년, 토지 무르기, 서원, 십일조 등등 이런 규례의 각 방면은 관련된 범위가 넓지 않은가? 우선은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관련되고, 그다음은 또 도둑질, 배상, 안식일 지키는 것……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경영 계획을 시작하여 정식으로 사역을 하였을 때, 사람에게 많은 규례를 제정해 주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규례들은 사람이 땅에서 정상적인 인류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정상적인 인류의 생활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은 우선 사람에게 하나님의 제단을 어떻게 만드는지, 하나님의 제단을 어떻게 쌓는지를 알려 주었고, 그다음 사람에게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으며, 또 사람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생활 속에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정해 주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각 방면을 빈틈없이 규정하였는데, 그런 규례, 그런 규칙, 그런 원칙으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사람의 생활을 인도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 속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오도록 인도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만든 만물 가운데서 질서 있게, 법칙 있게, 절제 있게 생활하도록 인도하였다. 하나님은 우선 그런 간단한 규례와 원칙으로 사람에게 일정한 범위를 제정해 주어, 땅에서 정상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삶을 살게 하고 정상적인 인류의 생활이 있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6천년 경영 계획을 시작한 일부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런 규례와 규정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은 아주 광범위하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율법시대에서 인류를 인도한 구체적인 항목이다. 그것은 이전의 율법시대 사람들이 반드시 받아들이고 준수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했던 사역의 기록이자, 하나님이 전 인류를 이끌고 전 인류를 인도한 실제 증거이다.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가르침과 공급을 떠날 수 없다

이런 규례들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과 경영을 대하고 인류를 대하는 태도는 엄숙하고 진지하고 신중하며 책임지는 것임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차에 따라 빈틈없이 인류 가운데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하고, 하고자 하는 말씀을 빈틈없이, 조금도 빠짐없이 사람에게 알려 주어,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하고, 하나님이 행한 것과 말씀한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하였다. 사람이 다음 시대에는 어떠하든,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이 최초의 율법시대에는 이런 간단한 사역을 하였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 시대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인류에 대해 개념이 아주 모호하고 아주 흐릿했다. 설령 의식 속에 생각들이 좀 있거나 타산이 좀 있다 하더라도, 다 분명한 것이 아니고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류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공급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최초의 인류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하나님은 가장 간단명료하고 가장 기본적인 인류 생존의 원칙과 생활에 있어야 할 그런 규례에서부터 사람을 가르치고, 그런 것을 조금씩 사람 마음속에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의 규정들을 통해, 그런 규례들을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점차 알게 하였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점차적인 깨달음이나 이해가 있게 하였으며,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이 있게 하였다. 그런 효과에 도달한 후에야, 하나님은 조금씩 그 후에 해야 할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그런 규례와 하나님이 했던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의 기초 중의 기초이고, 하나님 경영 계획의 시작 사역이었다. 하나님은 비록 율법시대의 사역 전에, 아담과 하와 또는 그들의 후손에게도 말씀을 한 적이 있지만, 그런 분부와 가르침은 다 그렇게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한 조목씩 사람에게 반포한 것이 아니고, 또한 문서화되지도 않았고 규칙화되지도 않았다. 그때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여 그 정도에까지 이르게 해야만 율법시대의 그런 규례를 말씀할 수 있었고, 사람에게 율법시대의 그런 규례를 집행하게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고, 그 결과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런 간단한 규례와 규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경영 사역의 절차를 보게 하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 중에서 유로된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한다. 하나님은 어떤 내용과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고, 어떤 방식으로 계속하고,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해야 하나님을 증거하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무엇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알고 있고, 사람 안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고 있으며, 사람에게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사람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사람은 마치 목석 같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지라도, 사람은 여전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 절차에 따라 한 걸음씩 오늘까지 이끌려 오게 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든, 그런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다 모호한 것이 아니고 다 분명하고 뚜렷한 계획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차에 따라, 자신의 계획에 따라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한다. 설사 그 이후의 사역을 미리 사람에게 예시해 주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다음 사역은 여전히 엄격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계속 진행되고 전개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소시의 창현이자, 또한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경영 계획에 따라 어느 단계의 사역을 하든, 하나님의 성품과 실질은 다 하나님 자신을 대표한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다. 어떤 시대에서든, 어느 절차의 역사 가운데서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증오하는지는 영원히 바뀌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이 율법시대 역사에서 규정한 그런 규례와 원칙을 지금에 가져오면, 사람들이 그것을 아주 얕고 아주 간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지라도, 그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소시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보기에 간단한 그런 규례 속에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책임과 염려가 발표되어 있고, 하나님 마음의 아주 세밀한 실질도 발표되어 있어 사람에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있고, 또한 만유는 전부 하나님의 손에서 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식을 얼마나 많이 장악하고 있든, 도리와 비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든,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것들은 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를 대체할 수 없다. 또한 인류는 영원히 하나님의 인도를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이 친히 하는 역사도 떠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류와의 갈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이 주는 것이 계명이든, 규례이든, 혹은 하나님이 진리를 공급해 주어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해 주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 목적은 다 사람을 인도하여 아름다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발표한 모든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이런 사역은 다 하나님의 실질 방면의 유로이고,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 방면의 유로이며,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절차이다. 이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 가운데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마구 논할지라도,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념이나 생각이 생길지라도 상관치 않는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ㆍ사ㆍ물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경영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사역을 하고 자신의 경영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짜이찌엔(再見)!

2014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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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②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③정직: 여기서는 정의롭고 솔직하다의 뜻.

④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⑤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⑥안받침: 한 사물을 통해 다른 한 사물을 두드러지게 하다.

⑦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⑧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⑨장거(壯擧): 장하고 큰 계획이나 거사.

⑩안받침물: 한 사물을 통해 다른 한 사물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

⑪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⑫천경지의(天經地義):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나 법칙을 뜻한다. 천경지위라고도 한다.

⑬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⑭명정사순: 명분이 정당하고 이치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