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 그리스도의 발표(선집)

목차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와 하나님의 역사가 도달하는 효과

우선 찬양 한 곡 부르자. <하나님 나라의 축가 (1) 국도(하나님 나라)가 인간 세상에 임하였다>

병창: 뭇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환호하고 찬미하며, 만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칭송하네. 국도가 인간 세상에 임하였네.

1. 뭇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환호하고 찬미하며, 만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칭송하며, 만인은 눈을 들어 하나님의 행사를 바라보네. 국도는 인간 세상에 임하였네. 하나님의 본체는 풍부하고, 하나님의 본체는 완전하도다. 어느 누가 이로 인해 기뻐하지 않으랴? 어느 누가 이로 인해 즐겁게 춤추지 않으랴? 시온아! (시온아!) 승리의 깃발을 들어 올려 하나님을 위해 경축하라! 개선가를 울려 하나님의 성호를 전파하라! 땅끝까지의 모든 만물아! 어서 깨끗이 씻고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바치라! 천우의 뭇별들아!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하나님의 궁창에서의 권능을 나타내어라! 하나님이 땅의 백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니, 노랫소리에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경배와 사랑이 흐르고 있네! 만물이 소생하는 날에 하나님이 친히 인간 세상에 임하셨네. 그때에 백화가 만발하고, 새들이 일제히 노래하며, 만물은 기쁨으로 끓어오르네! 사탄의 나라는 국도의 예포 소리에 무너지고 진동하는 국도 축가 소리에 부서져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리라!

2. 땅에 있는 사람 중에 누가 감히 일어나 대적할 수 있으랴? 하나님은 땅에 임하시면서 불사름을 가져오셨고, 진노와 모든 재난을 가져오셨네. 세상의 나라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도다! 하늘에는 (하늘에는) 흰 구름이 춤추며 뭉게뭉게 피어나네. 하늘 아래에는 (하늘 아래에는) 호수와 강물이 출렁이면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곡조를 연주하네. 잠자던 짐승들은 굴에서 나오고, 꿈속에 있던 만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깨어났으며, 만민이 기다리던 날은 드디어 도래하였네!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바치네!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바치네!

너희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주 격동되고 감동됩니다. 국도의 미경은 그토록 아름답고 사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느냐? 너희의 상상 속에, 사람은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님과 함께 이후의 아름다운 국도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성정 변화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정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어야 하느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느냐? (거룩해져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어떤 기준이냐?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와 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는 표현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답은 정답에 가깝다. 너희는 모두 마음을 터놓고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거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진리를 추구하는 기초에서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통제도 받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본분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곧 충성을 다해 본분을 해야 합니다. 그다음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마음이 하나님과 합해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일치해야 하고,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장 낮은 기준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사람이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관건이라고 생각됩니다.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기준은 하나님과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고,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알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말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가치

보아하니, 너희 마음속에는 자신이 준수해야 할 도에 대해 다 실질적인 내용이 조금 있고, 저마다 인식한 것이나 터득한 것이 조금 있구나. 그러나 너희가 말한 그런 것들이 너희에게 매우 공허한 것이 되는지 아니면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되는지는 너희가 평소에 실행할 때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달렸다. 이 몇 년 동안 너희는 각 방면의 진리에 있어서 도리적으로 놓고 보든, 진리의 내용상으로 놓고 보든 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 사람들이 모두 진리에서 노력하기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이런 각 방면, 조목조목의 진리는 틀림없이 일부 사람들 마음속에 이미 뿌리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너희 마음속에 이런 진리의 제목과 이런 이론은 뿌리를 내렸지만 실제 내용이 차지하고 있는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쳐 너희가 시련에 직면하고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런 진리의 실제가 너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크게 작용할 수 있느냐? 너희로 난관을 극복하게 하여 시련 속에서 나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하나님을 위해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게 하느냐? 너희는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느냐? 너희에게 이렇게 묻겠다. 너희의 마음속에서, 너희가 매일 생각하는 그런 일들 가운데서 너희는 어떤 것이 너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지 총결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냐?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날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당연히 매일 하는 본분을 잘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사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매사에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기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러냐? 이런 내용들만 있는 것이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일이 닥치니 결국엔 순복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만족케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순복할 생각만 하면서 시련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면서 불평하지 않고 그 어떤 요구도 없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도 순복이 되지 않아 거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전혀 선택하지 못했고, 늘 육체를 만족시키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무슨 원인이냐? 하나님이 검증하기 전에, 너희는 벌써 여러 번 자신에게 도전하고, 또 여러 번 자신을 테스트해 보고 검증해 보지 않았느냐? 자신이 정말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지, 정말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자기 선택이 없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고 하나님만 만족케 할 수 있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 사실, 너희 앞에 놓인 사실도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고,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곧, 각 사람의 결말과 귀숙이다. 아마 너희는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결말에 관한 것,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 하나님이 사람을 어떤 귀숙으로 이끌어 들어가는지에 관한 것과 같은 몇 가지 방면의 진리와 몇 가지 방면의 하나님 말씀을 이미 여러 번 읽어 보면서 연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리저리 찾으면서 사색을 해봐도 결국에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거나 혹은 모호한 결론은 얻을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여전히 자신에게 도대체 어떤 결말이 있을지는 확정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 교통을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을 받아들이고,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늘 실정과 내막을 알고 싶어 한다. 즉, ‘자신의 결말은 도대체 어떠할지? 자신이 도대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지?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도대체 어떤 태도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전에 어떤 짓들을 한 적이 있고, 어떤 말들을 한 적이 있어! 나는 이전에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좀 한 적이 있어! 나는 이전에 어떤 일들에서 하나님을 흡족케 해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켰고, 하나님께 미움을 사고 증오를 샀으니 내 결말은 미지수일 거야!’라고 하면서 근심까지 한다. 다시 말해,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결말에 대해 불안해한다. 어느 한 사람도 “난 내가 살아남을 사람이라고 100% 확신해! 난 100%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자신이 있어! 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를 준수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여기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은 구제 불능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에게 어떤 좋은 결말이 있기를 지나치게 바라지 못한다. 혹은 자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고 살아남을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결말이 없고, 자신은 좋은 귀숙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결론적으로,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자신의 결말을 많이 따져 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의 역사가 끝날 때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따져 보고 있고 계획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갑절로 대가를 치르고, 어떤 사람들은 가정과 직업을 버리며,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포기하기를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직하여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것을 택하며, 어떤 사람들은 집을 떠나 본분하는 것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가장 힘들고 고달픈 일을 감당하기를 택하며, 어떤 사람들은 헌금하거나 모든 것을 봉헌하기를 택하고, 더욱이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것을 택한다. 너희가 실행 방식을 어떻게 택하였든지, 그 방식이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하냐? (겉면의 행실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실행하는지,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그리스도들이 넘어지고 또 일부 거짓 인솔자들이 넘어진 일을 통해, 저희는 겉면의 행실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겉으로는 많이 포기하고 기꺼이 대가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해부했을 때, 저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곳곳에서 하나님과 맞서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는지,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어떠한지에 달렸다고 봅니다.) 너희는 다 잘 말했다. 보아하니 너희의 마음속에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기초적인 인식이 있고 기준도 있구나. 나는 너희가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매우 감동된다. 비록 너희가 한 어떤 말은 그렇게 적절하지는 않지만, 진리에 있어야 할 내용 해석에 이미 근접하였다. 이는 너희가 주변의 인ㆍ사ㆍ물과 하나님이 안배한 환경과 너희들이 눈으로 본 것에 대해 이미 자신만의 진정한 인식, 진리에 가까운 인식이 조금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설사 너희가 말한 것이 전면적이지 못하고 어떤 말은 그렇게 적절하지 않지만, 너희 마음에 있는 인식은 이미 진리의 실제에 아주 근접하였다. 너희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나는 기분이 매우 좋다.

사람의 생각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대가를 많이 치르고, 겉면의 행실이 아주 좋아 다른 사람에게 존중을 받고, 또 사람들을 아주 탄복하게 만든다. 그런 겉면의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다고 정할 수 있느냐? 왜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보면 흔히 그들은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고, 진리 실행하는 길을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다고 여기느냐? 왜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거기에는 한 가지 설명밖에 없다. 이 설명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 진리의 실제가 있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등등의 이런 문제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주 영적인 듯해 보이고 아주 고상한 듯해 보이고 형상이 매우 숭고하고 위대한 듯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늘 미혹되는 것이다. 이 일부 사람들은 겉면으로 글귀 도리를 잘 말하고, 겉면으로 말을 하고 일 처리하여 사람을 탄복케 하는 그 사람들의 일을 하는 실질이 무엇인지, 일 처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또한 그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전혀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람들의 인성 실질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처음 낯선 상태에서 익숙해지고, 그다음 조금씩 탄복하고 우러러보다가 마지막에는 그 사람들을 자신들의 우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숭상하는 우상과 자신들이 여기는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겉면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사람이고, 참으로 좋은 결말과 좋은 귀숙이 있을 사람이며,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은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이냐? 이 일의 실질은 무엇이냐? 이 일이 초래한 결과는 무엇이냐? 먼저 이 일의 실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런 사람의 관점과 실행법에 관해 사람이 스스로 채택한 실행 원칙, 그리고 각 사람이 평소에 중시하는 것은 실질상에서 모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시한 것이 깊은 것이든 얕은 것이든, 글귀 도리이든 실제이든, 결론적으로, 사람은 인간이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고,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 실행하는 부분에서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로 가면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행위와 행실을 총결해 내어 자신의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직접 초래되는 결과는 바로 사람이 인위적인 좋은 행위로 진리 실행을 대체하게 되고, 동시에 또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진리에 대항하는 자본,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맞서는 자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또 서슴없이 하나님은 한쪽에 버려두고, 자신 마음속의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놓는다. 사람에게 이런 미련한 행실과 우매한 견해, 혹은 편면적인 견해와 실행법이 생기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을 오늘 알려 주겠다. 그 원인은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따르면서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보고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데에 있다.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버리는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에게 요구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안다면, 사람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느냐? 또 함부로 사람을 숭상할 수 있겠느냐? 또 일반 사람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사람의 견해가 좀 이성적일 것이다. 그리고 패괴된 사람을 함부로 자신의 우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제멋대로 몇 가지 간단한 규례나 원칙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면 화제를 되돌려 계속해서 결말에 관한 화제를 교통해 보자.

사람마다 관심을 갖는 것이 모두 자신의 결말이라고 했는데,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결말을 어떤 방식으로 정할까? 하나님은 한 사람의 결말을 또 어떤 기준으로 정할까?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이 아직 정해지기 전에 어떤 사역을 하여 사람의 결말을 드러낼까?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아까 말했다시피,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람의 결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의 결말은 모두 어떤 부류로 나뉘는지, 각기 사람마다 어떤 다른 결말이 있는지를 보고, 또 하나님 말씀에는 사람의 결말에 대해 모두 어떻게 정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를 보려고 이미 오랫동안 연구했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결과도 찾지 못했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조금만 언급했지 그렇게 많이 말하지는 않았다.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사람의 결말이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은 최후의 결과를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의 귀숙이 어떤 것인지 미리 알려 주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어떤 역사 원칙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고 사람의 결말을 드러내는지, 어떤 기준으로 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정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것 역시 너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 사람의 관념 속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 좀 전에 너희가 일부분을 말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충성으로 본분을 하고 화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복하여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이런 진리를 실행할 때, 또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실행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 너희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하나님 말씀 중의 일부분, 또는 설교 중의 일부분, 또는 자신이 숭상하고 있는 일부 영적인 사람들이 여기는 기준을 답습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강박할 뿐이다. 마지막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면 계속 그대로 지키고 있고 그대로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난 오랫동안 믿으면서 이대로만 실행해 왔어! 그동안 많은 진리를 깨닫고, 지난날 몰랐던 것도 많이 알았고, 특히, 사상 관점과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고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인식했으니까 하나님을 만족케 한 것도 많고 얻은 것도 적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그것이 성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에게서 이루려고 하는 최종 효과라고 여긴다. 이런 기준과 너희 각 사람이 실행한 것까지 포함해 종합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있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물론이죠!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형제님의 설교 교통에 따라 실행하며, 계속 본분을 하고 계속 하나님을 따르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했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깨달았든,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합하기를 추구하는 길에 서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행한 것이 정확하고 올바르다면, 결과도 틀림없이 올바른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이런 관점은 어떠냐? 정확한 것이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저는 그런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저 이렇게 본분을 하면서 계속 하나님 말씀의 요구대로 행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한테 알려 주신 적도 없고, 명확하게 지시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저는 그저 쉬지 않고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실 것이고, 더 이상 다른 요구가 없으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들은 올바른 것이냐? 내가 봤을 때, 너희의 그런 실행, 그런 생각과 관점은 상상이 섞여 있고 좀 맹목적이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일부 사람들은 “맹목적이라고요? 맹목적이라면 우리가 구원받을 희망, 살아남을 희망은 아주 작고 막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닙니까?”라면서 낙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희가 어떻게 여기든,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통해 너희에게서 이루려고 하는 효과는 너희에게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희에게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해 주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하나님은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증오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대상인지를 더욱 알게 하고, 너희 각 사람의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도대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화제를 나누는 것은 매우 필요하지 않으냐? 왜냐하면 나는 너희가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 말씀도 그렇게 많이 들었지만 이런 부분이 가장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든 진리를 다 노트에 적어 두고, 자신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부분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둔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해야 할 때 꺼내어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그것으로 그때그때에 따라 필요한 것을 채우거나 혹은 너희를 도와 눈앞에 있는 하나하나의 난관을 극복하게 하고, 또 혹은 그런 것들로 너희의 삶을 동반하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가 어떻게 하든 그저 하고만 있을 뿐이라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매우 중요한 것이겠느냐? 바로 너희가 행하고 있을 때, 너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인지, 너희가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도달하려고 하는 효과와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지를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라,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

너희가 반드시 적어 두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날마다 내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새겨 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어떤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떤 사람의 하나님을 믿어 온 경력(역주: 체험)이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그 말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맞는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맞는지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말은 도대체 무엇일까? 너희는 모두 큰 기대를 걸고 있겠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너희는 아마 매우 실망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이미 오랫동안 입에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 말을 입에 달고 있지 않았고 마음속에 두었다. 그 말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 아니냐? 이 말은 비록 간단하지만, 이 말에 대해 참으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 말은 아주 무게가 있고, 실행할 가치가 크며, 진리 실제가 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의 일생의 추구 목표이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일생 동안 따라야 할 길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이 너희에게는 진리가 아니냐? 이런 의의가 있지 않느냐? 아마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고 되새겨 보고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에 대해 ‘이 말이 매우 중요한 건가? 매우 중요한가? 이 말을 저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의심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그 한 마디로 정리하면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한 마디로 귀결시키면 하나님을 너무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많은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이 말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비록 이 말을 적어 두기는 했지만 마음속에 새겨 둘 뜻은 없다. 그저 노트에 적어 두고 한가할 때 펼쳐 보고 생각해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기억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기고, 더욱이 적용시킬 생각도 없다. 그러한데도 내가 왜 이 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든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매우 큰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 말을 해야 했다. 너희가 지금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하든, 나는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사람이 이 말을 잘 실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기준에 도달한다면, 틀림없이 살아남을 것이고, 틀림없이 좋은 결말이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말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너의 결말은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이 말을 너희에게 알려 주는 목적은 너희 마음속에 우선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너희를 가늠하는지에 대한 실제 내막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방금 이 말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과 매우 큰 관련이 있다고 했다. 어떤 부분에서 관련이 있을까? 너희도 매우 알고 싶어 하니 얘기해 보자.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련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지를 시험한다

각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할 때 사람에게 얼마의 말씀을 베풀어 주고 얼마의 진리를 알려 주는데, 그런 진리가 바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道)이고, 사람이 준행해야 할 도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도이고, 또한 사람이 삶 속에서, 인생의 역정에서 실행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을 발표해 주는 목적이다. 그런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발표되었으니,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사람은 그 말씀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실행하지 않고 삶 속에서 살아내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하면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의 결말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사람의 결말을 어떻게 정할까?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이 일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마 너희는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경력했기 때문에, 내가 그 과정을 말하면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각 사람에 대해, 즉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에 대해 모두 크고 작은 시련들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어떤 사람은 잡혀가거나 고문을 받는 시련을 겪었고, 어떤 사람은 선택에 직면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지위와 돈에 직면하는 시련을 겪었다.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시련이 다 각 사람에게 임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일을 할까? 왜 각 사람을 그렇게 대할까?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핵심이다. 즉, 하나님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 뜻인즉, 하나님이 너에게 시련을 줄 때, 너를 어떤 환경에 처하게 할 때,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제물을 보관하는 본분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본분으로 하나님의 제물을 접촉하게 되었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배정한 것이 아니냐?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너에게 닥치는 일은 다 하나님이 배정한 것이다. 너에게 그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은밀히 관찰하면서 네가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 네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볼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결과를 통해 네가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가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흔히 왜 그런 일이 닥쳤는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일이 닥칠 때 속으로만 ‘나한테 이런 일이 주어졌으니 조심해야지, 소홀히 해선 안 돼!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제물이니 내가 손을 대선 안 돼.’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간단한 생각을 하나 갖고 있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그 시련의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하였을까 아니면 만족하지 못했을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제물을 접촉하는 일이 왔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틀림없이 그 방면에서 신중할 것입니다.) 비슷하게 말했지만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것은 겉면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그 일이 임했을 때, 너는 먼저 그것을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책임이나 혹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이 임했을 때, 너는 그것을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으로 여겨야 한다. 그 일이 너에게 임했을 때, 너는 마음속에 기준이 하나 있어야 하며, 그 일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네가 어떻게 해야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겠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방금 우리는 제물 보관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제물에 관련되고 본분과 책임에도 관련되는데, 그 책임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너에게 임하면 시험이 있지 않겠느냐? 시험이 있다! 그 시험은 어디에서 오느냐? 그 시험은 사탄에게서 오고, 사람의 사악한 패괴 성정에서도 온다. 시험이 있는 만큼, 그것은 사람이 굳게 서야 할 간증에 관련되는데, 그 간증을 굳게 서는 것도 너의 책임과 본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일을 침소봉대할 필요가 있냐고 하겠지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면, 우리 곁에서,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작은 부차적인 일이라 해도 우리에게 임하기만 하면, 중요시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든 아니든 그것을 놓치지 말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검증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너에게 이런 태도가 있다면 하나의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즉, 너의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에게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싶은 소망이 있으면, 네가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 기준과 멀지 않은 것이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일, 평소에 아예 언급하지 않는 일을 작은 일로 여기고, 진리 실행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며, 그런 일이 닥치게 되면 가볍게 생각해 보고는 흘려보낸다. 사실, 그 일이 임했을 때가 바로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떻게 악에서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공부를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너는 그 일이 너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더욱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너의 곁에서 너의 일언일행을 관찰하고, 너의 행동과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데 저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요?”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가장 중요한 도로 삼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이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한 미묘한 사역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너는 덜렁쇠이다! 무엇이 큰일이고 무엇이 작은 일이겠느냐? 무릇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에 관련된 일이라면 크고 작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너희는 수용할 수 있느냐? (있습니다.) 매일 임하는 일에서, 사람이 보기에 어떤 일은 아주 크고 어떤 일은 아주 작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큰일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기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큰일에서 사람은 분량이 작은 것으로 인해 또한 소질이 부족한 것으로 인해 흔히 하나님의 뜻에 이르지 못하고, 아무런 계시도 얻지 못하며, 가치 있는 어떤 실제적인 인식도 얻지 못한다. 반대로 작은 일에서는 다 홀시하고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검증받을 기회, 시련받을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된다. 네가 계속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인ㆍ사ㆍ물,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환경을 그렇게 홀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네가 날마다, 심지어 시시각각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고 인도해 주는 것을 저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환경을 배치했을 때, 하나님은 은밀히 관찰하는데, 마음을 감찰하고 있고, 모든 생각을 감찰하고 있으며,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행하려고 하는지를 보고 있다. 네가 경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도(道),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정한 환경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유의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너에게 임한 그런 인ㆍ사ㆍ물이 진리와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게 수차례의 환경과 시련이 너에게 임한 후, 하나님이 너에게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에게 수차례의 시련이 임한 후, 너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또한 너는 하나님이 배정한 환경을 중요한 일로도,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나 검증으로도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기회를 한 차례 또 한 차례 밀어내고, 한번 또 한번 흘려보냈다면, 그것은 크나큰 패역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슬퍼하겠느냐? (슬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또 크게 놀라면서 ‘이전에 하나님께서 늘 슬퍼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슬퍼하지 않으신다고? 그럼, 언제 슬퍼하신다는 거지?’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일에서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면 위에서 이야기한 사람의 행동 표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일까? 사람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과 하나님의 검증을 밀어낼 때, 사람이 그런 것에서 도피할 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 태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그런 사람을 염기(厭棄)하는 것이다. 이 ‘염기’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아느냐? ‘염기’의 ‘염(厭)’은 매우 혐오하고 증오한다는 뜻이다. ‘기(棄)’는 어떤 뜻일까? 내게는 ‘포기한다’는 뜻이다. 너희는 ‘포기’가 어떤 뜻인지 다 알고 있겠지? 결론적으로, ‘염기’의 뜻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반응과 태도이고, 사람에게 크게 혐오감과 반감을 가져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결단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그 말을 한 중요성을 보았느냐?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 알겠느냐? (날마다 다른 환경을 배치하십니다.) ‘다른 환경을 배치한다’는 것은 사람 입장에서 느끼고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그 일을 하는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 출발점은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과 서로 다른 시간으로, 서로 다른 지점에서 각 사람을 시련하는 것이다. 무엇을 시련할까? 사람에게 임하는 매사에서 혹은 사람이 들은 것이나 본 것이나 직접 체험한 매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를 보려고 시련하는 것이다. 그런 시련은 각 사람에게 다 임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을 다 공평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도 하나님을 오래 믿었는데 저한테는 왜 임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임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배치해 준 환경을 전혀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 시련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도 시련이 여러 번 임했지만, 저는 정확한 실행의 길을 모르고, 설령 실행하였어도 그것이 시련 속에서 굳게 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정형이 있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내가 아까 했던 그 말이다. 즉, 네가 행한 것, 네가 생각한 것, 너의 행동 표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네가 도대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맞는지를 확정한다. 이게 간단한 일이냐? 이 일은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실행한다면 간단하겠느냐?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 간단하지 않으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시는지를 몰라 자신에게 임하는 일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사람은 서로 다른 시련 연단과 형벌 심판을 경력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비록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금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쉽게 해낼 것 같다고 느낄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너희가 지금 많은 말씀을 듣고, 진리 실제의 양육을 많이 받아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지를 이론상, 의식상에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실행하는 데에 아주 큰 도움이 되기에 너희는 아주 쉽게 도달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람들은 왜 도달하지 못할까? 그것은 사람의 본성 실질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원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다’는 이 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보자. (<욥기>입니다.) 욥을 언급하게 되었으니 욥에 대해 말해 보자. 욥의 그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고 정복하는 사역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다! 그렇지? 그럼, 그 당시의 욥을 놓고 말하면, 욥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었느냐?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어떠냐? 너희는 왜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느냐? 지금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으냐, 적으냐? (적습니다.) 이 문제는 매우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적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 말씀과 마주하고 있으니,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욥보다 훨씬 더 많다. 내가 왜 이 일을 언급하겠느냐?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여기서 나는 사실을 하나 설명하려고 한다. 그 사실을 설명하기 전에 너희에게 하나 묻겠다. 욥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주 적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깊이 패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깊이 패괴되었다’는 것은 문제의 표면적 현상이다. 내 입장에서는 영원히 그렇게 보지 않는다. 너희들은 평소에 흔히들 말하고 있는 그런 도리와 글귀, 곧 ‘깊이 패괴되었다’, ‘하나님을 거역한다’, ‘하나님께 충성심이 없다’, ‘순복하지 않는다’,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실속 없는 것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 그것으로 모든 문제의 실질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실행법이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를 같은 답으로 해석하는 것은 진리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모독하는 혐의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답을 듣기 싫어한다. 너희들은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일에 대해 너희는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나는 날마다 보게 되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행하고 있고, 나는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가 행하고 있을 때는 그 일의 실질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 일의 실질을 볼 수 있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실질은 무엇일까? 왜 지금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지 못할까? 너희의 답으로는 영원히 이 문제의 실질을 설명할 수 없고, 이 문제의 실질을 해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여기에 너희가 모르는 근본 원인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너희가 매우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려 주겠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해 와서 가족으로 여겼고, 그의 역사 대상으로 여겼으며, 정복하고 구원하고 온전케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에 가졌던 사람에 대한 태도이다. 그러나 당시에 사람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였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낯설다고 생각하면서 낯선 사람처럼 여겼다.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묘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어찌 됐든 자신의 생각대로 대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점이 있었을까?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관점도 없었다. 사람의 관점이란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는 것이면 받아들이고, 관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극력 저촉하고 반대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낯선 사람처럼 여겨 대했다. 이것이 처음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동안 사역을 한 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때에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여겼는가? 목숨을 건질 만한 지푸라기로 여겼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기 바랐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검증하고 시련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이용 대상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발표한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는 귀숙을 얻을 기회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진심이 있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겉면의 도리적인 인식이 조금 있게 된 것으로 인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점점 ‘숙지’하였고, 하나님이 한 말씀, 가르친 도, 발표한 진리, 그가 한 사역도 점점 ‘숙지’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낯설지 않다고 착각하고, 이미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길을 걷고 있다고 착각하였다. 사람은 비록 지금까지 진리의 도를 많이 들었고, 하나님의 역사도 많이 경력했지만, 많은 요소와 많은 상황의 방해와 저지하에 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점점 태만해지고, 믿음도 점점 사라지고, 자신의 결말도 점점 미지수라고 느껴져 사치한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향상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억지로 따르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지금의 이런 정형에 대해 하나님이 취하는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그저 이런 진리와 자신의 도를 사람에게 부어 준 후, 또 여러 가지 환경을 마련하여 각종 방식으로 사람을 시련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런 말씀과 그런 진리와 그 자신이 하는 사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이런 결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도리로, 글귀로, 규례로 지킬 뿐, 결코 일을 처리하거나 말을 하거나 시련이 왔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로 지키지 않았다. 특히, 어떤 크나큰 시련이 임했을 때,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런 방향으로 실행하는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극히 반감을 가지고 혐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수차례, 심지어 수백 차례 시련한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결심을 밝히는 그 어떤 명확한 태도도 없었다. 곧,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겠다!’라는 태도가 없었다. 사람에게 그런 결심이 없고 그런 행동 표현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더 이상 예전처럼 긍휼과 관용을 베풀거나 포용과 인내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에게 극도로 실망하는 것이다. 이 ‘실망’은 누가 초래한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요구를 하였고, 사람에게 많은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실행하였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무엇이었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목표에 따라 명확하게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한 마디 총결해 내어 그 말로 방금 우리가 말한, 사람이 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못하는지,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그 말은 무엇일까? 그 말은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 하나님이 사역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고 대립 상대로 여겼다는 것이다. 지금 이 일에 대해 분명히 보았느냐? 사람의 태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지는 아주 명확하다. 너희가 도를 얼마나 많이 들었든지 너희가 스스로 총결해 낸 것, 예를 들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길을 찾는 것,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이런 것들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어떤 경로일 뿐이다. 너희는 그런 목적을 위해 억지로 규례들을 지키는데, 바로 그런 규례들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런 길과 더욱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또 한 번 사람의 대립 상대로 서게 한 것이다.

오늘 말한 이 화제는 좀 무겁지만, 어쨌든 나는 너희가 앞으로 경력하는 가운데서, 앞으로의 세월 속에서 방금 내가 말한 것을 해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즉,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불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네가 잠재의식 속에서 그렇게 인식할 때는 이미 하나님의 노를 건드린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항상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범위와 원칙 기준에 맞게 하였지 결코 자신의 뜻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실행한 방식은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일이 임했을 때, 어떻게 생각했느냐? 일이 임했을 때, 어떻게 실행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간구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일이 임하여 자신의 뜻이 나와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을 공기로 여기는데, 그럴 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자기 뜻대로 실행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도는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과 정형에 처해 있는 것은 벼랑 끝에 있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제가 벼랑 끝에 있든 말든, 어찌 됐든 오랫동안 이렇게 믿었으니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차마 버리지 못하실 거니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는 모태에서부터 지금까지 40~50년 동안 주님을 믿었어요! 시간으로 따지면, 저는 가장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가장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40~50년 동안, 저는 가정과 직업을 버렸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돈, 지위, 누림과 가족의 단란함도 버렸으며, 맛난 것도 먹은 적이 없고, 재미있는 것도 즐긴 적이 없으며, 많은 좋은 곳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반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난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그러면 오늘 너희에게 실정을 하나 알도록 해 주겠다. 곧, 무릇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다 돌을 들어 제 발등을 찍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상으로 제 눈을 가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상상과 규정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대체한 것이며, 그들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를 잃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와 그 기준

너에게 어떤 생각과 규정이 있기 전에, 너는 우선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본 다음, 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사람의 결말을 시간 단위로 정한 적이 없고 또 지금까지 한 사람이 받은 고난의 양에 따라 결말을 정한 적도 없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까? 시간 단위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너희가 늘 보았던, 전에 헌금을 많이 하고, 화비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지불하고, 고난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다 너희의 관념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드러내는 것과 살아내는 것들이 바로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기준인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여기든, 나는 이러한 예를 일일이 들지는 않겠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마음에서 생각하는 기준이 아니면 다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이고, 다 사람의 관념이다. 네가 계속 너의 관념과 상상을 고집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아주 분명하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여 포기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네가 늘 하나님 앞에서 관록을 내세우고, 하나님과 맞서고,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하면서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지도 않고,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그런 관점을 버리고 또 지난날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요구대로 따르며, 지금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실행하고, 어디서든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만의 상상, 관점, 생각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으며,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이해하고 알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한다면, 그야말로 너무 좋은 것이다! 그런 것은 네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에 들어서게 됨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그런 사상 관점을 기준으로 삼아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겠는가? 하나님은 시련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시련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데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시련하는 횟수이고, 둘째는 사람을 시련한 결과이다. 바로 이 두 가지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다. 이제 이 두 가지 기준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 보자.

우선,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시련이 왔을 때, 〔주: 네가 보기에 그 시련은 아주 작아서 아마 언급할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배치해 준 환경이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게 해 줄 것이다. 너의 분량이 작을 때, 하나님은 너에게 너의 분량에 맞고, 네가 깨달을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시련들을 배치하여 너를 검증한다. 너의 무엇을 검증하겠느냐? 하나님을 향한 너의 태도를 검증한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할까? 물론 중요하다! 게다가 특히 중요하다! 그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공을 들여 사람에게 그런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를 보려고 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를 보려고 하며,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그 당시에 깨달은 진리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주는 시련은 여전히 너에게 임할 것이고, 네가 진리를 깨달은 것이 많아짐에 따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에게 알맞는 시련을 배치해 줄 것이다. 너에게 또다시 시련이 임할 때, 하나님은 또 그 시기에 네가 가지고 있는 관점,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에 진보가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자꾸 사람의 태도를 보려고 하시죠? 사람이 그렇게 진리 실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태도까지 봐서 뭐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어리석은 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면,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의 곁을 지키면서 사람의 일언일행, 일거일동 심지어 마음과 생각까지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마다, 즉 사람의 선행, 사람의 잘못, 사람의 과오 더 나아가 사람의 거역과 배반에 대해 일일이 기록하여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증거로 삼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한 걸음씩 높아짐에 따라 네가 들은 진리가 점점 많아지고, 네가 받아들인 긍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정보와 진리의 실제도 점점 많아지면, 거기에 따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너에게 더 큰 시련을 배치할 것인데, 그 목적은 그 기간에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에 진보가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때, 하나님은 너의 관점과 네가 깨달은 진리의 실제가 서로 부합되기를 요구한다.

너의 분량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네가 약하고 어릴 때, 하나님은 너에게 매우 낮은 기준을 주지만, 너의 분량이 좀 커졌을 때는 조금 높은 기준을 준다. 그러나 네가 모든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너에게 더욱 큰 시련이 임하게 할 것이다. 더 큰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얻으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더 깊은 인식과 진실한 경외심이다. 그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너의 분량이 작을 때에 주었던 요구보다 더 높을 것이고, 더 ‘가혹’할 것이다. 〔주: 사람 편에서는 가혹하겠지만 사실 하나님 편에서는 아주 정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하는 그 기간에, 하나님은 어떤 사실을 이루려고 할까? 하나님은 계속 사람에게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드려요? 저는 본분도 하고 가정과 직업도 버렸고 화비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 표현은 다 마음을 이미 하나님께 드린 행동 표현이 아닌가요? 더 어떻게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까? 설마 이런 방식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는 도대체 뭔가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사실, 서로 다른 단계의 시련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미 각기 다른 정도로 마음을 하나님께 바쳤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바친 적이 없다. 하나님이 너를 시련할 때, 하나님은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육체를 향하고, 사탄을 향하고 있는지를 본다. 하나님이 너를 시련할 때,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는 편에 설지 아니면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는 입장에 설지는 네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약하고 어릴 때, 설령 너에게 시련이 왔을 때, 너의 믿음이 아주 작고 깨달은 진리도 한정적이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지라도, 네가 성심성의껏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게 하고,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이미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네가 들은 도가 점점 많아지고 깨달은 진리도 점점 많아질 때, 너의 분량도 점차 자라난다. 그때,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네가 약하고 어릴 때 요구한 기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이다. 사람이 마음을 점차 하나님께 바칠 때 마음이 점차 하나님에게 다가서고,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더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여러 번 시련을 준다. 그런 시련을 하는 기간에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에게서 어떤 태도도 보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행과 행동 표현을 보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려고 하는 태도와 결심도 보지 못한다면, 여러 번 시련한 후,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사라질 것이고, 더 이상 관용하지 않고 시련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사람의 결말은 결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그 사람은 어떤 악행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마 엇나가고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감추어져 있고, 또한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늘 명확한 태도와 관점이 없기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을 명확히 볼 수 없었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추구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더 이상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며, 더 이상 긍휼을 베풀어 주지도 않고,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생애가 이미 끝난 것이다. 그 원인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준 여러 번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서 지금까지 그들에게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것을 어떻게 간파했을까? 그 사람은 그동안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외적으로는 기쁘게 뛰어다녔고, 책도 많이 보았고, 일도 많이 했다. 그리고 10권이 넘는 필기 노트와 글귀 도리는 가득 가지고 있지만, 진보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관점이나 명확한 태도가 있는 모습도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은 늘 베일에 싸여 있고, 마음은 봉해져 있었다. 곧, 하나님을 향해 봉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진실한 마음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으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어떻게 준행했는지는 더욱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도 얻지 못했는데, 나중에라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하나님은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강요하겠느냐?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겠느냐? (혐오하여 포기하시고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혐오하여 포기한다. 너희는 그 말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기억했구나. 보아하니, 너희는 잘 알아들었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처음 따를 때, 어리고 무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어찌 된 것인지도 몰라 인위적인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랐다. 또한 시련이 임했을 때에도 아무런 의식이 없었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에 대해 아주 무감각했으며,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시련 속에서 굳게 서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기한을 주어, 그 기간에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 후, 자신의 관점을 밝힐 수 있도록 한다. 그 단계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관점이 좀 있고, 아직도 좌우로 흔들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고, 비록 기본적인 진리들도 실행했지만 크나큰 시련이 닥치면 도피하면서 포기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일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 대해 여전히 자그마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 표현에 달렸다. 사람이 적극적으로 향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포기한다. 그 원인은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기 전에 네가 이미 자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럼, 너는 하나님이 너를 포기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이러면 공평하지 않느냐? (공평합니다.)

하나의 현실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의 갖가지 궁상맞은 모습

또 다른 한 부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결말은 가장 비참하다. 그들은 내가 가장 언급하고 싶지 않은 부류이다. 그들이 비참하다고 하는 까닭은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은 것 때문이 아니다. 혹은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가혹해서 비참한 결말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업자득’이다. 이것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냐? 이 부류의 사람들은 바른길을 걷지 않았기에 자신의 결말을 일찌감치 드러낸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안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대상이다. 사람의 말로 말하면, 그런 사람이 가장 비참하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처음에는 매우 열성적이었고, 대가도 많이 치렀으며, 하나님 역사의 앞날에 대해 아주 좋게 보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상상으로 넘쳤으며, 하나님에 대해 특별히 믿음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에게 아름다운 귀숙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간에 어떤 원인으로 인해 도망갔다. 이 ‘도망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느냐?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고,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므로 믿은 시간이 얼마나 오래됐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떠났고, 어떤 사람은 살림살이를 하러 떠났으며, 어떤 사람은 큰돈을 벌러 갔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애를 낳는 삶을 위해 떠나갔다…… 이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일부분은 양심에 찔려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일부분은 지금 아주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그동안 세상에서 떠돌면서 많은 고생을 하고 나니 세상에 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 집으로 돌아와 위로를 받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려고 하며, 재난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구원받고 아름다운 귀숙도 얻기 위해 계속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큰 사랑은 한량없고, 하나님의 은혜는 무궁무진하여 사람이 이전에 어떠했든지 하나님은 용서해 주고 그의 과거를 포용해 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끝마다 돌아와 본분을 하겠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재물을 어느 정도 기부하면서 그런 방식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하나님은 그들의 결말을 어떻게 정할 것 같으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원래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교통을 듣고 나니, 아마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런 사람은 그 속에서 죽지 않는 결말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오려는 것이지, 진심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 곧 끝난다는 것을 알고, 돌아와 복을 받으려고 망상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네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네.) (제가 깨달은 바로는 그런 사람은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자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아주 잘 말했다! ‘기회주의자’, 그런 사람은 누구나 다 증오한다. 그런 사람은 눈치놀음을 하고, 이익이 안 보이면 움직이지도 않는 사람이니 당연히 증오해야 한다! 다른 관점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있느냐? (하나님은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나님의 역사가 곧 끝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난이 내리는 것을 보았거나 혹은 외부의 어떤 요소의 영향을 받아 돌아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참으로 진리를 추구할 마음이 있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도중에서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자세가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많은 기회를 주셨음에도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었기 때문에, 정말 통회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돌아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참 도를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그렇게 오랫동안 경력했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다시 사탄의 품속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극대한 배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실질은 긍휼과 사랑이지만, 그것도 어떤 부류의 사람에 대한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와서 위로를 찾고 기댈 곳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전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거기에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실질은 긍휼인데, 왜 그 부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조금도 베풀지 않겠느냐? 긍휼을 조금 베풀면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 이전에 사람들은 늘 “하나님은 만인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지 한 사람도 멸망(원문: 沈淪)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하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으십니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점을 봐서라도 하나님은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문제는 사실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매우 간단한 것이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이 있다면, 그리 많은 설명을 할 필요도, 그리 많은 추측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한 그런 말들은 다 근접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태도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방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확신에 찬 관점을 이야기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관점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 태도는 비교적 중립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태도는 애매모호하다. 확신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제는 이미 끝났으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관용해 줄 필요가 없기에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여긴다.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들은 상황을 봐서 그 사람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지난날의 연약함과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고, 그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하나님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며, 만일 그 사람이 다시 도망간다면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대체 그 사람을 받아들일지 아닐지에 대해 그렇게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관점과 좀 맞지 않을 것 같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끝없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람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다고 하면 또 사람의 무지함이 드러나지 않겠냐고 여긴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너희는 다 관점들을 가지고 있다. 너희의 관점은 너희가 의식상에서 인식한 것이고, 너희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깊고 얕은 정도의 체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이 일에 대해 너희에게 관점이 있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희의 관점이 맞는지는 아직 다 물음표이다. 너희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맞는 것일까? 난 잘 알지 못하겠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모르겠고, 더구나 하나님이 내게 알려 주지도 않으셨는데 뭐!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사랑이잖아! 하나님의 지난날의 태도에 따라 본다면 하나님이 받아들이시겠지만, 하나님의 지금 태도는 어떠신지 잘 모르니, 나야 뭐, 그저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뭐.’라면서 걱정이 조금씩 있지 않느냐? 그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 아니냐? 정말 너희를 난처하게 했구나. 이 일에 대해 너희에게 정확한 관점이 없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 너희 교회에 찾아올 경우에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잘 처리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거스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니냐?

방금 언급한 이 일에 대해 내가 왜 너희의 생각을 물었을까? 나는 너희의 관점을 테스트하려고 하고, 너희가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려고 한 것이다. 답은 무엇이냐? 그 답은 너희가 말한 관점이다. 일부 사람들은 아주 보수적이고, 일부 사람들이 말한 것은 다 추측하고 상상해 낸 것이다. 무엇을 ‘추측’이라고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종잡을 수 없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속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거나 혹은 저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 자신도 옳은지 틀린지를 모르면서 그런 애매한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 앞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너무 적고, 하나님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유의하는 경우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관련된 문제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련된 것을 물을 때면, 어리둥절해하고 긴장되어, 추측하거나 그냥 질러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그것은 사실을 하나 증명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너희가 일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모를까? 지금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 다 모른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태도를 분명히 꿰뚫어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찾고 구해 본 적이 있느냐? 교통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없다! 이것은 사실을 하나 실증한다. 즉, 네가 믿는 하나님과 진정한 하나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뜻만 생각하고, 인솔자의 뜻만 생각하며, 하나님 말씀 겉면의 도리의 뜻만 생각할 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전혀 진실로 알아가지 않고 찾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 일의 실질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믿어 왔느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기로 믿어 왔다. 그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했고, 더욱이 분명한 깨달음과 인식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잠재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믿어 왔다. 즉,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도 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석으로 믿어 왔다. 그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는 희로애락이 없다고 여기고, 하나님은 석상 같아서 어떤 일이 생겨도 태도나 관점, 생각이 없고 사람의 지배대로 한다고 여긴다. 또한 사람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하면 위대한 존재이고, 보잘것없다고 하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마땅히 긍휼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부 사람들은 생각과 머리로 하나님을 상상해 내어 그 하나님으로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게 하고, 자신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을 다 그런 상상으로 대하고 믿는 것이다. 또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려 노하게 한 후에도 하나님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고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로우니,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스려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잘못, 사람의 과오, 사람의 거역은 일시적인 성정의 유로(역주: 흘러나옴)이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관용하고 인내할 것이고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므로, 구원받을 희망은 매우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믿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만 하면,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기간에 하나님 말씀 책을 아마 보배처럼 여기면서 날마다 보고 읽었겠지만, 진정한 하나님은 오히려 한쪽에 방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공기로 삼고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예 목석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할까? 왜냐하면 나는 너희에게 일이 임하든 아니면 어떤 환경이 닥치든,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무관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만 알고, 그다음 자신의 그 생각과 관점을 억지로 하나님에게 씌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삼으며, 게다가 그 관점을 준칙으로 여겨 고수하는 것만 안다. 그렇게 오래 가다 보면 너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태도를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각종 오해를 버리라

너희가 지금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지,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는 악인의 악행을 보면 증오할까, 안 할까? (증오하십니다.) 우매한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슬퍼하십니다.) 그는 사람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증오하십니다.) 이것은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흐리멍덩하고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일까? 이것은 너희들이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 ‘흐리멍덩한’ 그 태도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거스르지도 않았으니,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닐 것이라고 여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상대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냉정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 방식은 한쪽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즉, 깨우침과 빛 비춤, 채찍질과 징계 등등을 포함해 그 어떤 사역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열외로 취급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려 노하게 하고, 하나님의 행정을 범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극도로 혐오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려 노하게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극도로 분노한다! ‘분노’는 단지 일종의 정서이고 심정일 뿐, 명확한 태도를 뜻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정서와 심정은 그 사람에게 결말을 하나 가져다줄 것인데, 하나님을 극도로 혐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한쪽에 버려 두어 먼저 상대하지 않다가 ‘추수 후’에 일괄 처리하는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런 사람에게 결말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그 부류 사람들에게 결말을 줄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아주 정상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느냐?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자신의 행위로 초래된 악한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그 부류 사람들에게 그 어떤 환상도 가지지 말고, 더 이상 그 어떤 요행의 심리도 품지 말라고 명확히 알려 준다. 하나님은 사람을 끝없이 관용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과오와 패역을 인내해 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도 그 부류의 사람들을 몇몇 만나 봤습니다. 근데 그 사람들은 기도하면 특히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고, 평소에도 매우 즐거워하는데, 마치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 같았어요.”라고 할 것이다.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눈물 흘리며 통곡한다고 해서 꼭 하나님의 감동이나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하겠느냐?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고 포기하려고 작정했을 때, 그 사람의 결말은 이미 없어진 것이다. 그 사람이 기도하면서 저만의 느낌이 얼마나 좋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얼마나 크든, 그런 것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런 믿음이 필요치 않고, 이미 그 사람을 혐오하여 포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리는 그 순간, 그 사람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남겨 두었다가 징벌을 받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비록 하나님의 실질에는 사랑의 요소가 있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실질에 존엄이 있다는 점을 홀시하고 잊어버렸다. 하나님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제멋대로 하나님을 거스려도 하나님에게 아무런 감각도 없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에게 긍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참으로 존재하는 분이지 사람이 상상해 낸 목석이거나 어떤 물체가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마땅히 시시각각 하나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의 태도를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느낌을 알아야지,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속에서 바라는 것을 하나님에게 강요하여 사람의 방식과 상상으로 대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기를 시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일의 심각성을 안 후,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각 사람에게 일처리를 조심스럽게 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하며, 하나님을 대하는 일에서는 부디 신중하고 또 신중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일도 함부로 하지 말며, 함부로 막 씌우지도 말고, 함부로 결론 짓는 일은 더욱 하지 말며, 기다리며 찾고 구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표현이다. 네가 우선 이렇게 할 수 있고, 먼저 이런 태도를 갖출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고 사리를 모른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하는 그런 태도로 말미암아 너를 기억하고 인도해 주고 깨우쳐 주거나 혹은 어리고 무지한 너를 관용해 줄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만불손한 태도로 인해, 곧 함부로 하나님을 논단하고,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 인해 너를 정죄하고 징계하고 심지어 징벌하거나 너에게 결론을 지어 줄 것이다. 그 결론은 아마 너의 결말에 관련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너희 각 사람에게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아주 신중하게 대해야지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되고, 일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네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령 단순한 일일지라도 마음속으로 많이 되새겨 보고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네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범사에서 이런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특히 네가 모르는 일에서도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하나님은 시시로 너를 인도하여 실행의 길이 있게 해 줄 것이다. 사람에게 어떤 표현이 나타나든, 하나님은 매우 분명하고 명백하게 볼 것이며, 너의 그런 표현에 따라 정확하고 합당한 평가를 해 줄 것이다. 네가 마지막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다 총결하여 너의 결말을 정할 것인데, 그 결과는 사람마다 심복구복하게 한다.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너희가 행한 모든 것과 너희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너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결말을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또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너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 태도는 너희가 최종에 멸망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예비해 준 아름다운 귀숙에 들어설 것인지를 결정한다. 국도시대(역주: 왕국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20년 넘게 역사하였다. 이 20년이 넘는 기간에 너희의 행동 표현이 너희에게는 아마 모두 좀 흐리멍덩하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각 사람을 위해 다 확실하고 진실한 기록을 해 놓았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이 교통하는 말씀을 듣기 시작해서부터 더욱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본분을 하기까지, 하나님은 그 사이에 나타났던 사람의 각종 표현에 대해 다 기록해 두었다. 또 본분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환경이나 시련이 왔을 때 사람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 사람의 각종 표현이 어떠하였는지,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하나님은 기록 책에 다 기록해 두었다. 이런 일들이 너희에게는 아마 매우 희미하겠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전혀 흐릿한 것이 없이 매우 분명하다. 이런 일은 각 사람의 결말과 관련되고 각 사람의 운명과 앞날에 관련되기 때문에, 더구나 하나님이 심혈과 대가를 다 여기에 쏟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고, 소홀함을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이런 기록부를 작성하고 있는데,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따른 노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는지가 바로 너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것은 매우 진실하지 않으냐? 지금까지 너희는 하나님이 매우 공의롭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지 않으냐?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또 다른 상상을 가지고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희의 결말을 도대체 하나님이 정하는지 아니면 사람 스스로 정하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누가 정한다고? (하나님이요.) 또 모르겠지? 홍콩 교회 형제자매들이 먼저 말해 보아라, 누가 정하느냐? (사람이 스스로 정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다고? 그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냐? 한국 교회에서 누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말을 정하시는 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에 근거하고, 사람이 걷는 길에 근거합니다.) 그 말은 아주 객관적이다. 여기에 사실이 하나 있는데, 너희에게 알려 주어야겠다.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에 사람에게 기준을 하나 정해 주었는데,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사람의 결말을 가늠한다. 네가 하나님의 그 기준에 따라 행하였다면 좋은 결말을 얻을 것이고, 그 기준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그 결말을 도대체 누가 정하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혼자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정하는 것이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동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고, 사람에게 아름다운 귀숙을 예비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대상이어서 그 결말과 귀숙은 하나님이 예비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대상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 사역을 할 필요가 없고 또 하나님이 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사람은 구원받을 대상이다. 구원받을 대상은 비록 피동적인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 대상의 태도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이룰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기준을 모르고 목표도 없다. 기준과 목표가 있어도 협력하지 않고 실행으로 옮기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결말은 하나님을 떠나서도, 사람을 떠나서도 안 된다고 한다. 너희는 이제 그 결말을 도대체 누가 정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사람은 경험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기 좋아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관한 화제를 교통할 때, 너희는 어떤 사실을 하나 발견하지 못했느냐? 하나님의 지금의 태도가 바뀐 것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냐? 하나님이 계속 그렇게 인내하고, 계속 모든 사랑과 긍휼을 기한 없이 베풀어 주겠느냐? 이 일은 또 하나님의 실질에 관련된다. 이른바 탕자가 돌아오는 좀 전의 그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문제를 물어보았을 때, 너희의 대답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단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의 상징으로 정한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기 때문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든, 어떻게 거역하든 다 상관없어! 하나님은 사랑이 있기에 사람을 포용해 주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거야! 사람의 어리고 무지한 것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의 패역도 긍휼히 여기실 거야!’ 정말 그러할까? 어떤 사람은 일단 하나님의 인내를 한 번 혹은 몇 번 체험해 보고 나면,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자신의 자본으로 삼고 하나님이 한 번으로 영원히 자신을 인내해 주고, 긍휼히 여겨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평생 하나님의 그 인내를 하나님이 자신을 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관용을 한 번 얻으면 그 한 번으로 하나님은 영원히 관용만 한다고 정하고, 게다가 그 관용은 기한도 조건도 없고, 심지어 아무런 원칙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인식법이 맞느냐? 매번 하나님의 실질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는 어리벙벙해지는데, 나는 너희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매우 안타깝다. 너희는 하나님의 실질, 이 방면에 관한 진리를 적지 않게 들었고,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화제도 적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너희 머릿속에는 그런 일과 그런 방면의 진리에 대해 그저 이론과 문자상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도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몸소 느끼거나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 흐리멍덩하게 믿고 맹목적으로 믿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오만불손하고 무시하는 태도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그런 태도로 무엇이 초래되었느냐? 너희가 늘 하나님을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일단 조금만 알아도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의 전부를 얻었다고 여긴다. 그다음 하나님을 거기에 정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일단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면,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에 이르러 하나님이 “나는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더 이상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관용과 인내도 베풀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 극도로 혐오감을 가지고 반감을 가진다.”라고 하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이런 표현에 저촉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당신은 더 이상 저의 하나님이 아니고, 더 이상 제가 따르려고 했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저의 하나님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을 계속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저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기한 없이 저를 관용해 주시고 인내해 주시면서 당신이 사랑과 인내, 관용이 있는 분이심을 보게 해 주셔야만 당신을 따를 것이고, 또한 끝까지 따라갈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내와 긍휼이 있어야만 저의 거역과 과오가 기한 없이 용서받고 사함받을 수 있으니까요! 또한 제가 언제 어디서나 죄를 짓고, 또 언제 어디서나 죄를 자백하면 사함을 받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노기를 건드려도 당신은 저에 대해 그 어떤 견해나 규정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한다. 비록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이런 문제를 이렇게 주관적으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죄가 사함받을 수 있는 도구와 아름다운 귀숙을 얻을 수 있는 이용 대상으로 여길 때는 이미 무의식중에 살아 있는 하나님을 대립 상대에 놓고 원수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내 눈에 비친 것이다. 비록 네가 말끝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진리를 추구합니다”, “저는 성정이 변화되고 싶습니다”, “저는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본분을 잘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할지라도, 이론이 얼마나 많든, 얼마나 그럴듯하고 얼마나 번지르르하든, 사실상 지금까지 오면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장악한 규례, 도리, 학설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자연스레 하나님을 자신과 대립되는 편에 놓게 되었다. 비록 글귀를 장악하고 도리도 장악하였지만 진정으로 진리의 실제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나는 동영상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자매 여럿이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라는 그 책을 손으로 아주 높이 받쳐 들고 있었다. 그것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사진이기는 했지만 내게는 사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내게 사람마다 마음속에 높이 받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그 책이라는 사실을 연상케 하였다. 그것은 매우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런 행실은 전혀 하나님을 높이 받드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뚜렷한 문제, 아주 작은 문제까지도 너희는 마음속에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물을 때, 진지하게 파고들 때, 너희가 대답한 것은 상상이고 추측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의심스러운 말투로 반문까지 했는데, 그것으로 나는 속으로 너희가 믿는 분이 진실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너희는 그동안 하나님 말씀을 읽은 후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가지고, 더 많은 도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규정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도대체 어떠한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이 왜 슬퍼하는지, 왜 노하는지, 왜 사람을 혐오하여 포기하는지 등등 이런 문제를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각종 행동 표현에 대해 보고만 있을 뿐 태도도, 생각도 없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더욱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묵인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별다른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태도를 이미 책에서 다 말씀으로 밝혔고, 이미 사람에게 다 나타냈으니, 반복적으로 시시때때로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을 지키지만 여전히 태도가 있고, 관점이 있으며, 사람에 대한 요구 기준이 있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태도는 매우 뚜렷하다. 한때 하나님을 매우 열심히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오늘날 다시 돌아오려고 하는 그런 일에 대해, 놀랍게도 너희는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니냐? 사실, 그 일은 정말 알기 쉬운 일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마땅히 알아야 하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모르고 있으니, 내가 알려 주겠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도망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어디든 이런 사람들이 있다. 즉, 하나님의 도에 대해 이미 확신을 한 후, 각기 다른 원인으로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그들은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고, 제멋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떠나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어떤 원인으로 인해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거론하지 말고, 먼저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자. 그 태도는 아주 분명한 것이다! 그 사람이 떠난 그 시각부터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의 생애는 이미 끝난 것이다. 그 사람 스스로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마침표를 찍어 준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이미 하나님을 저버려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이미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받아주겠느냐? 또한 그 사람에게 그런 태도와 생각이 있어 하나님을 떠나려고 작정했을 때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려 노하게 한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이 노발대발하면서 하나님을 손가락질하며 욕하지 않았을지라도, 설령 그 사람에게 과하거나 악랄한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설령 그 사람이 속으로는 ‘어느 날, 내가 밖에서 실컷 즐겼거나 혹은 하나님이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다시 돌아올 거야’,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면 다시 돌아올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또 혹은 “내가 밖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나 바깥 세상이 너무 어둡고 사악한 것을 보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고 싶지 않을 때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설령 그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속으로 계산해 놓았을지라도, 설령 그들이 자신을 위해 퇴로를 남겨 두었을지라도,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했든 어떻게 계획했든 그것이 단지 일방적인 소망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장 크게 실수한 것은 자신들이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였는지를 잘 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작정한 그 시각부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철저히 포기하였고, 하나님은 속으로 이미 그 사람의 결말을 정해 놓았다. 어떤 결말일까? 그 사람을 곳간에서 사는 쥐들과 같이 분류해 두었다가 그 쥐들과 함께 멸망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저버렸는데도 징벌을 받지 않는 그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원칙 있게 일을 한다. 어떤 일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어떤 일은 하나님이 속으로만 정하기에 사람이 사물의 결과를 보지 못한다. 사람의 눈에 보였다고 해서 그것을 진실한 면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지 못한 그 면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진실한 생각과 규정이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도망간 사람은 참 도를 배신한 사람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징벌을 내릴까?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크게 노할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는 위엄과 진노가 있으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음대로 죽임을 당하는 양이 아니고, 더욱이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목석도 아니며,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공기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실질은 건드려 노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건드려 노하게’ 만드는 것은 한 마디 말 때문일 수도 있고, 생각 때문일 수도 있으며, 악랄한 행위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아주 온화한 행위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이 보기에, 사람의 도덕이나 윤리상에서 넘어갈 수 있는 행위나 혹은 학설, 이론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일단 하나님을 건드려 노하게 한다면, 너는 기회가 없어지고 그에 따라 너의 마지막 날도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다! 네가 하나님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늘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모른다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을 어디서부터 진입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즉,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일단 네가 속에 하나님은 거스를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준행하는 길에 진입하는 것은 네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야 하거나 시련을 어느 정도 겪어야 하거나 혹은 징계를 어느 정도 겪어야만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너의 마음이 어떤 실질인지, 네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렸다. 사람의 실질과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 이것이 아주 중요하고 아주 관건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일부 사람들을 놓고 말하면,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와 진리를 혐오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영원토록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하나님이 이미 왔다는 소식도 들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이 한 새 사역도 경력했기 때문에, 그들이 떠난 것은 미혹된 상황에서 한 것이 아니고, 어슴푸레한 상태에서 한 것도 아니며, 더욱이 강요당한 상황에서 한 것도 아니라 의식과 정신이 맑은 상황에서 주동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들이 떠난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리게 된 상황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은 양 떼에서 잃어버린 어린 양이 아니고, 더욱이 방향을 잃은 탕자도 아니다.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떠나는 그들의 그런 상태와 그런 정형이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렸는데, 그렇게 ‘건드린’ 것이 그들에게 수습할 수 없는 결말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결말은 매우 무섭지 않으냐?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태도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직도 자신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고, 또한 자신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그 어린 양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직도 자신이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징벌받을 날은 멀지 않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려 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행정을 거스렸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사람이 참 도를 확신한 후에도 의식이 또렷하고 정신이 맑은 상황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난다고 할 때, 그런 배경에서 하나님 편에서는 그 사람의 구원받는 길을 막은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 대문은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닫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다. 그 사람이 다시 문을 두드릴 때는 하나님이 더 이상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사람은 영원히 문밖에 버려질 것이다. 너희 중 어떤 사람들은 아마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세운 후, 250명의 그 족장들이 모세의 여러 행동과 각종 원인으로 인해 불복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구에게 불복한 것이냐? 그들은 모세에게 불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배에 불복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신 그 일에 불복한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이라는 이런 말을 했다. 이 한 마디는 사람이 보기에 매우 심각한 것이냐? 심각하지 않다! 최소한 글자 표면에서 표현된 뜻은 심각하지 않고, 법적으로 봐도 그것은 별일이 아니다. 그것은 표면상으로 봤을 땐, 저촉되는 말이나 단어가 아무것도 없고, 더욱이 모독하는 뜻도 없으며, 단지 일반적인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하나님의 그렇게 큰 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한 말이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그 몇 마디 말에 나타난 성정과 태도가 마침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범한 것이다. 그들의 최후의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을 놓고 말하면, 그 사람의 관점은 어떤 것이고 태도는 어떤 것인지, 왜 그 사람의 관점과 태도가 하나님의 그런 처벌을 초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원인은 바로 하나님인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배반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것이다. 성경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으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제 너희는 이 일을 잘 알았겠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표현들이 나타나는데,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에 따라 하나님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목석이 아니고 공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치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야 한다.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해하게 될 때면 하나님을 쉽게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게 될 때는 하나님을 쉽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고, 부지중에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이로써 너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있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이 장악한 글귀 도리나 이론을 하나님께 씌우지 않고, 항상 범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보지도 더듬지도 못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것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늘 속으로 ‘내가 여기서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실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실까? 아마 아실 수도 있고 모르실 수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을 안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한편, 또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노기를 건드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이미 벼랑 끝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진리 실제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은 더욱 모르며, 생명 분량에는 아무런 진보도 없고, 지키고 있는 것은 얕다 못해 더 이상 얕을 수 없는 그런 도리뿐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직시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보면 누림이 있겠느냐? 마음에 위로가 되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사람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뒷전에 두어 공기로 삼지 말고,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살아 있고 확실히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만 있으면서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시로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각 사람의 행동과 일언일행을 감찰하며, 행동 표현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감찰하고 있다. 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든 원치 않든, 너의 모든 행위와 너의 마음과 생각은 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고 있다. 너의 행위로 인해, 너의 행동으로 인해, 또 너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에 대한 견해를 바꾸고 있고, 끊임없이 너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마치 하나님이 너를 매우 총애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고정불변인 것처럼 늘 자신을 하나님 손에 있는 귀염둥이로 여기지 말 것을 권한다. 꿈꾸지 말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 공의롭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주 신중하고 엄숙하게 정복 사역과 구원의 사역을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이다. 각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엄격하고 진지한 것이지, 사람을 애완동물로 삼아 달래며 놀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총애도 아니고 지나친 사랑도 아니며,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은 방종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끼고 가엾게 여기는 것이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며,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에는 하나님의 기대가 깃들어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자본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고,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는 원칙이 있고 바뀔 수 있는 것이지 절대 규례가 아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각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점차 바뀌고 점차 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질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뚜렷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아마 너는 어떤 일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너의 관념으로 하나님은 마땅히 이렇게 할 것이라고 상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일은 정반대이다. 네가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을 가늠할 때는 이미 하나님의 노를 건드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네가 상상한 것처럼 하지 않을 것이고, 그 일을 절대로 네가 말한 것처럼 대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너에게 네 주변의 매사를 신중하게 대하고, 범사에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법을 배우라고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관한 일을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확실해야 하고, 반드시 분별이 있는 사람들과 교통하며 참답게 찾고 구해야지,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장난감으로 삼아 함부로 논단하거나 함부로 결론을 내리거나 오만불손한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고 너의 결말을 정하는 과정에서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든,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든, 결론적으로 너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와 인식에 달린 것이다. 너는 하나님에 대해 어느 한 방면의 인식이나 이해가 있다고 해서, 그 한 번으로 하나님을 영원히 규정해서는 안 된다. 죽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기억했겠지? 내가 한 말 중에서 비록 어떤 말은 실정이고 어떤 말은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너희의 지금의 정형과 지금의 분량으로 인해 나는 더 높은 요구를 꺼내 너희의 적극성에 타격을 주고 싶지 않고, 속으로 매우 많은 쓸쓸함을 느끼게 하거나 하나님에 대해 매우 많은 실망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반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로 앞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믿는 일을 흐리멍덩하게 대하지 말며, 이 일을 가장 큰 일로 대하고, 입에만 달고 있지 말며 마음속에 두어 실제와 연결시키고 현실 생활과 연결시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 일은 치명적인 일이고, 너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우스개로 여기지 말고, 아이들 장난처럼 여기지 말라! 오늘 너희에게 이런 말을 했는데, 너희가 뭐라도 깨닫고 얻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는 내가 한 이런 말에 대해 또 의문점이 있느냐?

이런 화제는 비록 좀 새롭기도 하고, 너희의 관점이나 너희가 평소에 추구하고 중시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나는 너희가 한동안 교통하고 나면 내가 한 이런 말들을 하나같이 인지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화제는 매우 새롭고 너희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너희에게 그 어떤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오늘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를 겁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방식으로 너희를 훈계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라 너희에게 사실의 진상을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어디까지나 거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태도도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지도 않고, 무턱대고 그런대로 믿고 그런대로 걸어오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이 일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하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어떤 일들을 분명히 말하여 너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그분은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어떤 것인지, 너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과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너희로 알게 할 필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너희들 각자의 마음에 다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하나 있게 하여 자신이 이 길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아직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지 못했는지, 어떤 영역에 전혀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평소에는 너희가 함께 교통하면서 그저 사람들이 늘 해오던 화제만 말하다 보니 범위가 매우 좁고 내용도 아주 얕아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범위 기준과 거리가 있고 차이가 있었는데, 계속 그대로 나간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길과 동떨어져 걸을수록 더 멀어질 것이다. 너희는 그저 하나님의 기존의 그런 말씀을 숭상할 대상으로 삼고, 의식과 규례로 삼고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사실, 너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전혀 없고, 또 하나님은 지금까지 너희 마음을 얻은 적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여기는데, 그것도 솔직한 말이다. 확실히 좀 어렵다! 사람에게 본분할 때 외적으로만 일을 하라고 하고, 힘을 쓰라고 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아주 쉽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 것은 다 인류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이 영역에 관련되기만 하면 각 사람에게는 확실히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일에 관련되기 때문에 일정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네가 첫걸음을 떼고 진입하기 시작하면 어려움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작이다

방금 누군가 “왜 저희는 욥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까?”라는 문제를 꺼냈다. 전에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지? 사실, 우리는 이 문제의 실질에 대해서도 얘기했었다. 그때, 욥은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고, 하나님을 천지 만물의 주재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고 조물주로 여겨 경배했다. 그런데 지금의 사람은 왜 하나님을 이렇게도 대적할까? 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까? 그 첫 번째 원인은, 지금의 사람은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고, 사탄의 본성이 깊이 뿌리박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을 전혀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의 대립 상대로 여기고 사람의 원수로 여기면서 하나님과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렇게 간단하다. 이것도 좀 전에 교통하는 가운데서 약간 언급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원인이 아니냐? 네가 비록 하나님에 대해 조금 알고 있을지라도 네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알려 준 것이 아니냐? 너는 그 방면에 관련된 이론과 도리만 알 뿐이지, 하나님의 진실한 면에 대해 터득한 것이 있느냐? 주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느냐? 실제적인 인식과 체험이 있느냐? 하나님이 알려 주지 않는다면 알 수 있겠느냐? 이론을 알았다고 해서 진실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떻게 알게 되었든, 얼마나 알고 있든, 하나님을 진실되게 알기 전까지 하나님은 너의 원수일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대립되는 면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바로 사탄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 너는 아마 하루 세끼 시중들며 차를 대접하고 물을 떠다 드리며 그의 삶을 돌보면서 마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처럼 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하나 발생할 때, 사람의 관점은 늘 하나님과 어긋나고, 사람은 늘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이 비록 겉으로는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 마음이 합해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단 일이 생길 때면 사람의 패역 본질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적대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적대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적대시하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과 대립되는 면에 놓고 대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의 주관적인 의지 속에,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하나님과 대립되는 그런 실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대하거나 하나님과 관련되는 것을 대할 때, 사람의 첫 반응은 먼저 추측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다음 사람은 아주 빨리 저촉하는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과 대립할 것이다. 잇따라 소극적인 감정을 품고 하나님과 ‘논박’하거나 겨룰 것이다. 심지어 이런 하나님을 따를 가치가 있냐고 의심하기까지 할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의 이성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관한 어떤 유언비어나 훼방을 들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느냐? 첫 번째 반응은 ‘그 유언비어가 정말인지 거짓인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니 조용히 지켜봐야지.’라는 것이다. 그다음 ‘이 일은 확인할 수도 없어, 도대체 이런 일이 있을까? 그 유언비어가 도대체 진실한 걸까?’라고 생각해 본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미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태도와 그런 관점은 어떤 실질이냐? 배반이 아니냐? 그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는 그 사람의 관점을 보지 못하여 마치 그 사람은 하나님께 저촉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도 않는 것 같지만, 일이 닥치면 그 사람은 즉시 사탄의 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된다. 이 사실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사람은 하나님과 대립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실질 자체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사람이 지불한 대가가 얼마나 되었든,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하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억제하든, 심지어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할지라도, 어떻게 한다 해도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의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냐? 네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대하고 정말 하나님으로 여긴다면, 그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겠느냐? 마음속에 그에 대한 그 어떤 물음표가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겠지? 이 세상의 풍조가 이렇게 사악하고, 이 인류가 이렇게 사악한데, 그들에 대해서는 왜 관념이 없는 것이냐? 자신도 그렇게 나쁘면서 왜 관념이 없는 것이냐? 몇 마디 유언비어나 훼방으로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큰 관념과 그렇게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 분량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모기나 역겨운 파리 몇 마리가 ‘앵앵’거렸을 뿐인데, 미혹되었단 말이냐?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사실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는 태도로 냉정하게 처리할 뿐, 그 무지한 자들에게 진지하게 따지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을지언정 하나님과 끝까지 적대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합하는 도를 전혀 찾으려고 하지 않는 그 부분의 사람들을 얻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여 아마 또 일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 주기를 원하느냐? 원해도 좋고 원하지 않아도 좋다. 하여간 내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계속 이렇게 너희에게 상처를 주고, 늘 너희의 아픔을 들춰내면 너희 마음속에 있는 높고 큰 하나님의 형상에 영향을 주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너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극력 수호하고 보호하는 높고 큰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해 낸 것이어서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진상이 환히 드러나지’ 않겠느냐? 참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해 낼 수 없으니, 너희가 다 현실에 직면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너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유익하다.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하나님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부분 사람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른 시간이 얼마나 되었든, 그들의 의식과 관점은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의 처세 원칙과 방식을 지키고 있고, 이방인과 같은 생존 법칙과 신념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은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려고 한 적도 없고,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시인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믿는 것을 여가 취미로 여길 뿐이고, 하나님을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은 알아갈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참된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들은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거들떠보는 것도 귀찮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강렬한 음성이 하나 있어 늘 그들에게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입으로만 시인하면서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고 그 어떤 실제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총명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인데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나요? 본분을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지 사람의 실질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표현을 보지 않고 사람의 속마음에 있는 실질만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고 이런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저렇게 하시지? 난 이 일을 납득할 수 없고 저 일도 납득할 수 없어! 이 일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아요. 그 일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는 그런 말에 대해 나는 이같이 답할 것이다. “너한테 해석해 줄 필요가 있느냐? 그 일이 너와 상관이 있느냐? 네가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해 흠잡을 자격이나 있느냐? 네가 그를 믿기는 하느냐? 그가 너의 믿음을 인정은 하느냐? 너의 믿음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가 하는 것이 너와 또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하나님 마음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나 있느냐?”

교훈과 권면의 말씀

너희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괴롭지 않으냐? 너희가 비록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하거나 혹은 받아들이기 싫어할지라도, 이것은 다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 사역은 하나님이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태도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실질과 성품을 알아가지 않는다면, 최종에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너희는 내 말이 듣기 거북하다고 탓하지 말고, 내 말이 너희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탓하지도 말라. 내가 말한 것은 다 사실이지 너희에게 타격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든, 어떻게 하라고 하든 나는 너희가 올바른 길을 걷기 바라고, 너희가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지 말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기 바란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올바른 길에서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일들을 너희에게 분명히 말해 주어 흐리멍덩하지 않고 아주 분명하고 또렷하게 믿게 하고, 하나님의 태도와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게 하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할 필요가 크다고 생각한다. 설령 어느 날에 이르러 네가 따라가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내게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많은 말들을 분명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자신의 결말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한 그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태도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결말을 대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자신만의 가늠 방식이 있고, 자신만의 요구 기준이 있다. 그 가늠 기준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나 다 공평하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안심이 되었겠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짜이찌엔(再見)!

201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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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③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처소, 본향을 뜻함.

④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⑤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⑥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⑦자업자득: 원문은 발에 생긴 물집은 자신이 걸어서 생겼다는 뜻.